문학과 시인의 철학적 사유
正濟 : 박옥태래진
(소설가·철학자·시인)
시를 쓴다는 것은 지성인의 감성이 느끼는 이지애(理智愛)적 정신에 있다.
지성인의 정신이란, 자신의 깨침으로 이룬 느낌이나 지혜를 남에게 내보이면서 나누어주는 정신이다.
그것은 곧 자기 내면의 감성세계를 객관화시켜 남에게 지식의 언어로 표현하여 주는 지성적 이지애(理智愛)의 행위이다.
지식이란 우리에게 교육적 효과에 의해 인식화 된 관념적 인식들이기 때문에,
지식은 우리에게 지혜를 싹트게 하는 하나의 밭은 될지언정 지혜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지식이란 어디에나 널리 있는 것들이요,
지혜란 오직 자기 자신의 내면속에서만이 탄생되는 깨우침이다.
그래서 창조적 시의 정신에서는 지식적이어서는 안 되고
고도의 감성을 이성과 지성적이며 사랑으로 표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철학적으로 사유되는 시의 정신이란, 자신을 깨우치고 남을 깨치어서 인간을 깨치고 자연과 우주를 크게 깨우치고자 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순수하면서 가장 진실적이고 가장 도덕적이면서도 창조적이어야 함이다.
그것이 시의 생명력이다.
따라서, 자신(개체)을 읽고, 남(객체)을 읽으며 모두를 읽어 내는 가운데,
근원성과 인과성의 현상들을 잘 표현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는 정신언어의 종합 표현예술이어야 한다.
그러해야 독자들이 감동할 수 있는 시가 태어나고, 교훈도 담겨지는 시가 되어 진다.
그것이 지성적 시 정신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읽어내고 표현하고 적용해야 할 통찰적 시적 표현 관점이 될 기준점을 또 찾아 내야 한다.
그러하므로, 그 가치적 통찰의 관점을 찾아 내는 데에는
몇 가지의 중요한 기준 요소점이 따른다.
그것의 첫째는 어떠한 것의 존재성이요, 둘째는 그것의 본질성이요, 세째는 객체적 인과성이요, 넷째는 모든 것들의 목적성인 것이다.
그것이 지성적 시의 가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직시하고 그 가치들을 통찰하는 작가적 소양이 있어야, 자신만의 일기나 글이 아닌 객관적 입장의 독자를 위한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다.
또한, 詩想을 일으킨다는 것에는 감성적 성찰이 있어야 한다.
감성적 성찰이란, 인간의 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예민한 정보 통신망의 유선적 신경과 무선적인 교감과 영기의 찾아내고 받아들여, 그 근원들을 살펴 像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감성 속에는 감응과 감정 그리고 감동 및 감지(오성적 오감)가 있는데, 그러한 것들로부터 오는 정보가 하나로 통합 통찰되었을 때, 그곳에서 이루어진 감성을 영상으로 재현해 내는 상이 시상인 것이다.
그 시상에서부터 詩作은 시작 된다.
그것이 감성적 성찰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시상(詩像)이다.
그리고, 詩에는 애성(愛性)적 도덕정신을 담아야 한다.
애성적 도덕정신이란, 진리적 사랑의 정신이요,
만물의 근원을 깨치어 사랑하고 베푸는 도덕정신이다.
애성적 정신에는 크게 세 가지의 도덕이 있다.
첫째는, 인간적 애성도덕, 둘째는 자연적 애성도덕, 세째는 신성적 애성도덕이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과 신성이 함께 공생 공존하면서
이 세상을 이루고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성적 통찰정신과 감성적 성찰정신과 애성적 도덕 정신을 합하여, 시의 창조적 생명력을 집어넣고 운율적인 시를 지었다면, 그때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감동적이며 가장 훌륭한 불후의 명작이 탄생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질과 깨침을 가진 시인이야말로 곧 시성詩聖의 반열에 서게 될 것이다.
작금의 흔한 시들처럼 그렇지 못한 시들이라면, 그 시들은 오직 자신만의 외침일 뿐이요, 일기요, 낙서요, 넋두리밖에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류의 시들은 독자를 얻지 못 한 채 혼자만의 길을 걷다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한편, 시가 짧은 것이 좋으니 아니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쓸모없는 논쟁에 불과하다.
앞에서 전제한바와 같이 그러한 모든 요소가 기승전결(起承轉結)로 이루어 졌다면 시의 길고 짧음에 대한 의미는 모두 없어진다.
짧은 시만 좋다하여, 어떤 현상만을 표현하고 마무리적인 結을 짓지 않고서, 이것이 순수 문학입네 하고서 독자들 앞에 내 놓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가당착적 자신의 짧은 실력의 노출일 뿐이다.
짧은 한 문장에도 기승전결이 꼭 들어 있어야 시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산문적이거나 수필 식으로 늘어놓은 시 또한 더욱 시라 할 수 없다.
좋은 시란, 짧은 한편의 시를 읽고서도 소설 한 권을 보고 난 느낌을 받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시들에는 세 가지의 큰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첫째는, 앞서 말한 모든 기본 요소를 갖추면서
시제에 임한 現像을 그대로 적절히 묘사한 시이다.
둘째는, 시제의 현상이 갖고 있는 등장 피사체들의 내면세계를 주관적으로 객관적 타당성을 표현해 낸 시이다.
셋째는, 주어진 시제의 외적 묘사와 내적 표현이 시제를 벗어난 타의 사건들에게도 비유가 되고 교훈을 주는 시이다.
일반적으로 격이 낮은 시는 첫 번째의 요소만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래도 좋은 시는 두 번째까지 함께 갖춘 시이다
그러나, 세 개의 요소를 모두 갖춘 시는 참으로 대단한 시가 될 것이 분명하다.
또 하나, 시제의 범주를 다양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것에는, 자아적인 내면계의 범주와 자신과 타인과의 범주,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계의 범주와 더 넓은 자연계의 범주에까지 다양하다.
시인마다 자신의 색깔이 있다는 것은, 자신이 어느 범주에 속한 글을 주로 쓰고 있는 가이며, 그 범주에서도 어떤 소재를 어떤 문장형태의 기법을 채택하여 쓰고 있는가에 있다.
그것은 자신이 어느 범주에 속한 가와 어느 만큼의 한계성에 머물러 있는가를 판가름 해 준다.
그것이 곧, 그 시인의 역량이요, 자질이다.
그러므로, 지성적이고 철학적인 문학인으로서,
보다 더 넓고 높으며 깊은 시를 쓰려 한다면,
모든 범주를 다루고 소화해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많은 것을 깨치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문학인은 철학적 사유를 끊임없이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만의 글을 쓰다 죽으면 된다는 식이라면, 그는 문학인으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쓸데없는 공해물만 생산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위대한 문학인, 시성적인 시인이 되기를 모두가 지향해야 함에 있어서 먼저 우리는 지혜와 지성을 갖춘 깨친 문학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곧, 전지적 문학인이요, 전지적 시인의 자질이다.
따라서 詩 정신과 시인의 정신에서 바라 볼 때에,
문학계는 물론 기존작가와 신인들까지도, 그러한 세상사 지혜의 깨침을 위해서는 철학적 사유를 반드시 지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문학에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은 시인 이전에 모든 만물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할 줄 아는, 기본 자질을 갖춘 지성적 시인이어야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요, 위대한 시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순수문학이니, 목적문학이니, 계몽문학이니, 현대문학이니 하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문학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신들만의 장르 보호적 이기의 발상이다.
그것이야말로 편협 된 자신들의 미숙한 실력 노출이며 비겁한 행위 그것이다.
그 동안 한국의 문학이 절름발이가 되어, 세계의 문학에 얼굴을 못 내미는 원죄 또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어서 빨리 모든 장르의 가치를 소화하며 인정하고 더욱 키워야할 것이며, 새로운 장르 또한 더욱 창조하고 개척하여야 할 것이다.
[한겨레문학].[남양주문학]지에 발표된 글 중에서
http://blog.naver.com/ritch5/50135230003
(출처 : http://m.blog.daum.net/lespaul6/228602?categoryId=47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