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전집 2. 산문(작성중)

Posted by 히키신
2017. 5. 7. 17:51 글쓰기와 관련하여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03(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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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에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김수영의 다양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짧은 단편 곳곳에는 시인 다운 위트와 해학도 담겨 있고, 진솔하고 솔직하게 써내려간 단편들도 많다. 위대한 작가는 대표되는 작품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써내려간 산문집 역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훌륭한 작품의 탄생은 그런 여러 산문들과 메모 속에서 나왔으리라. 


면봉

p22

환자는 우리나라의 민중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의사는 우리나라의 문화정책이다. 


낙타 과음

p23

인제는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데가 내 고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서 어떻게 앉아 있어도 쓸쓸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몹시 쓸쓸하다.

p24

창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무기체와 같이 그냥 앉아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내 자신이 우습다. 한없이 우습기만 하다. -원주)

p25

내가 이 아이들을 볼 때는 무심하고 범연하게 보고 있지만 이 아이들이 생각에 잠겨 있는 지금의 나를 볼 때는 여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걸세.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공연히 엄숙한 마음이 드네. 그리고 그들이 스치고 가는 치맛바람에서 나는 온 인간의 비애를 느끼고 가슴이 뜨거워지네.

 술이 깰 때 기진맥진한 이 경지가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좋으이. 이것은 내가 <안다는> 것보다도 <느끼는> 것에 굶주린 탓이라고 믿네. 즉 생활에 굶주린 탓이고 애정에 기갈을 느끼고 있는 탓이야. 그러나 나는 이 고독의 귀결을 자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려네. 거기에는 너무 참혹한 귀결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아! 내 자신에게 고백하기도 무서워. 이를테면 죽음이 아니면 못된 약의 중독 따위일 것이니까....

 운명이란 우스운 것이야. 나도 모르게 내가 빠지는 것이고, 또 내가 빠져 있는 것이고 한 것이 운명이야. 실로 운명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야. 그것은 말할 수 없이 가벼운 것이고 연약한 것이야....

 Y여, 나의 가슴에도 언제 눈이 오나?

 새해에는 나의 가슴에도 눈이 올까?

 서러운 눈이 올까?

 머릿속은 방망이로 얻어맞는 것같이 지끈지끈 아프고 늑골 옆에서는 철철거리며 개울물 내려가는 소리가 나네. 이렇게 고통스러운 순간이 다닥칠 때 나라는 동물은 비로소 생명을 느낄 수 있고, 설움의 물결이 이 동물의 가슴을 휘감아 돌 때 암흑에 가까운 낙타산의 원경이 황금빛을 띠고 번쩍거리네.

 나는 확실히 미치지 않은 미친 사람일세그려.

 아름다움으로 병든 미친 사람일세.


안수길(安壽吉)

p28

<백로야 까마귀 싸오는 곳에 가지 마라 창파에 조이 씻은 몸 더러워질까 하노라>의 백로처럼, 그는 가장 위태스러운 연락선을 타고 속세에 건너왔다 선경(仙境)으로 돌아간다. 


무제

p29

자식을 길러보지 않고서야 어린아이 귀한 줄 모른다는 것을 요즈음에 와서 나는 절실히 느끼게 되는데, 동시에 자기의 자식을 알려면 자기 자식만 보고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자기의 골육이나 자기 자식이 사랑스럽고 귀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동물적인 본능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나에게는 자기의 골육붙이나 가정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기 싫은 것은 없다. 

p30~31

<사람이 돈을 따라서는 아니 된다>는 말을 앞서 인용하였는데 소위 처세상에 있어서, 즉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는 이 원리를 이용하여 보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하게 되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보아 악마의 조소가 수시로 떠어르는 데는 세상에 대하여서나 나 자신에 대해서나 미안한 일이다. 하여간 악마의 작업을 통해서라도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나의 위치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역대의 모든 시인들이 한번씩은 해온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고독이나 절망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고독이나 절망이 용납되지 않는 생활이라도 그것이 오늘의 내가 처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남자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위도(緯度)에서 나는 나의 생활을 향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치유될 기세도 없이

p38

없는 사람이 잘살아 보겠다고 하는 운동을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정부의 처사가 상식화되어 가고 있는 사태처럼 요즈음 우리들을 다시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국민들이 무엇보다도 염려하는, 앞으로 다가올 경제 위기를 가장 자신 있게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씩씩한 정치가들이 국회 안에는 산더미같이 와글거리고 있는데 바깥의 현실은, 비근한 예가 경북 교조(敎祖)나 경방(京紡) 파업문제 같은 것만 하더라도 당국의 태도는 여전히 <빨갱이>에 대하는 태도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과정(過政)>의 태도라고 볼 수 없고, 마치 새로 설 신정부(新政府)의 서곡이나 부지공사처럼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은 웬일일까. 국무총리를 신파(新派)가 잡든 구파(舊派)가 잡든 우리들의 관심은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총신경은 진정한 민주운동을 누가 어떠한 구실로 어느 정도까지 다시 탄압하기 시작하느냐의 여부에 쏠려 있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억압 밑에서 살아남은 민중이라 억압의 기미에 대해서는 지극히 민감한 것도 사실이지만 반면에 지극히 비굴한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이 자칫하면 과거의 타성에서 수그러지기 쉬운 국민의 혁명적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운동의 원수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 글이 쓰여진 1960년이나 2017년의 대한민국이 이러한 대목에서 크게 달라진 면이 없었음은 수많은 사례들에서 잘 알 수 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사마천의 <사기> 에서 말하는 '훌륭한 왕과 무능한 왕의 4가지 경우' 중 가장 최하의 정치, 즉 '국민과 싸우는 정부' 에서 요즘은 그나마 한발짝 물러선 것 같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소록도 사죄기
P46
실제 자기가 아파보지 않고는 남의 아픈 것은 모른다. 이 너무나도 평범한 진리를 나는 요즈음 치질을 앓으면서 다시 한번 생생히 체득했다. 요 정도의 시원치 못한 소록도 사죄기를 쓰게 된 것도 치질로 드디어 드러눕게 된 덕분이다. T.S. 앨리엇의 말마따나 우리는 누구나 다 환자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소록도에 봉사를 가 볼 작정이다. 사회적기업연구원에 인턴으로 근무하던 때 같이 인턴으로 근무했던 아무개가 어느 방학 무렵 소록도에 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의미 깊은 시간이었다고 얘기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나에게는 더 큰 울림을 줄 지도 모르겠다.]


요즈음 느끼는 일

p49

자유를 모르는 것은 속물입니다. 일본의 시인 니시와키 준사부로[西原三郞]는 <시(詩)를 논하는 것은 신(神)을 논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라는 의미의 말을 했지만, 저는 <자유를 논하는 것은 신을 논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결국 똑같은 말이지요.

[언젠가 형이 '자유, 사랑' 과 같은 말은 함부로 쓸 말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당시 그 말이 꽤나 인상깊었고, 그전까지 '자유'가 진정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마구 사용해왔던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p50

...우리들의 사회에는 이러한 웃지 못할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의 악질적인 방종입니다. 나는 여기서 구태여 벤야민이 말한 노동자를 위한 자유의 필연성을 새삼스럽게 논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자유의 방종은 그 척도의 기준이 사랑에 있다는 것만을 말해 두고 싶습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호흡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도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환경에서는 여간 조심해서 보지 않으면 분간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이 순결하면 순결할수록 더 그렇습니다. 기도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사랑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의 방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 그러나 아까 말한 일본의 요시야 여사도 말했듯이 요즈음의 세상은 문학하는 젊은 청년들까지도 점점 약게만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 밀턴은 서사시를 쓰려면 술 대신에 물을 마시라고 했지만, 서사시를 못 쓰는 나로서는,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랑을 마신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또 혁명의 시대일수록 나는 문학하는 젊은이들이 술을 더 마시기를 권장합니다.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로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물부리

p53

나는 요즈음 계산은 일체 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원고료 계산은 물론 정신적인 계산까지도 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번역자의 고독
P57

 나의 재산은 정성뿐이었다. 남보다 일이 더디고 남보다 아는 것은 없지만 나에게는 정성만은 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그 자부마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일전에 D신문의 <시단평>을 통해서 나는 <한국의 현대시에 대한 나의 답변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르겠다'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 글을 보고 모 소설가가 <모르겠다고 해서야 쓰겠나, 잘 키워가도록 해야지>라는 말을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이 소설가는 이 글을 보면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자포자기가 돼서야 쓰나, 아무리 보수가 적은 번역일이라도 끝까지 정성을 잃지 말아야지>라고. 나는 그를 평소부터 소설가라기보다는 학교교사로 보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후부터는 더욱 그 감이 심해졌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고급 <속물>이 참 많다.


양계(養鷄) 변명

p63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나는 도둑의 이 말이 무슨 상징적인 의미같이 생각되어서 아직까지도 귀에 선하고, 기가 막히고도 우스운 생각이 듭니다. 도둑은 철조망을 넘어왔던 것입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이 말은 사람이 보지 않을 제는 거리낌없이 넘어왔지만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다시 넘어 나가기는 겸연쩍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구태여 갖다 붙이자면 내가 양계를 집어치우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장면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도둑은 나고 나는 만용이입니다. 철조망을 넘어온 나는 만용이에게 <백번 죽여주십쇼, 백번 죽여주십쇼> 하고 노상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하고 떼를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카프카의 단편전집 중에서, 어느 성문을 지나려는데 문지기가 막고 서서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디로 가려 하는가?' 라고 묻자, 문지기에게 '내 전재산을 그대에게 모두 줄 테니, 매일 나에게 그 질문을 반복해서 해줄 수 있겠소?' 라고 답했다는 글이 생각난다. 물론 김수영의 위 글은 카프카의 글과는 그 의미적 측면에서 다르다. 차라리 이상(李箱)의 유명한 시에서 <안열리는문을열려고안열리는문을열려고> 라고 했던 것과 유사한 점이 더 많을 것이다.]


장마 풍경

p65

장마가 지면 강물 내려가는 모양이 장관이다. 황갈색으로 변색한 강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 내려가는 것을 보면 사자 떼들이 고개를 저으면서 달려 내려가는 것 같다. 높아진 수위는 사자의 등떼기처럼 늠실거린다. 군데군데 하얀 거품이 이는 것은 숨 가쁜 사자의 입거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것은 수천 마리의 사자의 떼가 아니라 한 마리의 사자같이 보이기도 한다. 한 마리의 사자. 그러면 저 거센 물결들은 사자의 휘날리는 머리털이라고도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그 사자는 머리 쪽과 궁둥이 쪽이 서로 늘어나서 동서로 잡아당긴 엿가락처럼 자꾸자꾸 늘어나기만 하고, 그 신장되는 등 위를 물결이 흘러 내려가는 것 같다. 혹은 뛰어가는 사자는, 꿈속에서 달려가는 것처럼 열심히 달려가기는 하지만 밤낮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계속되는 연상을 주는 강물은 삼라만상의 요술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지만, 나는 어느덧 연상에도 금욕주의자가 되었는지 너무 복잡한 연상은 삼가기로 하고 있고, 그저 장마철에 신이 나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사자가 달려가는 것 같다는 정도의 상식적 연상으로 자제하고 있다.

 [시인이 목도한 장마철의 강물은 이러하다!]

p66

풍경을 보는 것도 좋지만 풍경을 사는 것은 더 좋다.

[나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관찰자' 의 위치에 있는 것이 좋지 않나 하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셰익스피어가 말했듯, 마치 무대 위에서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처럼ㅡ배역이 크고 작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ㅡ사는 것도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간 자신의 인생은 관찰만 할 수 없고, 살아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생활', 혹은 '밥벌이'가 주는 구속과 모순, 부조리 따위는 도리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구속 받고, 행복한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지 정도로 간단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위에서 김수영이 말한 것처럼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에 굶주린 탓인지지'도 모른다.]

p67

아무 일도 안 하느니보다는 도둑질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만, 하여간 바쁘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우선 풍경을 뜻있게 보기 위해서만이라도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나만 바쁜 것이 아니라 모두 다 바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나만 바쁘다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는 미안한 일이 되고, 어떤 때에는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모두 다 바쁘다는 것은 사랑을 낳는다.

 장마철의 한강물을 보고 성난 사자 같은 연상을 하는 것도 너무나 살벌하고 고갈한 환경이 시키는 반사작용이라고 생각하면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떻게 또 생각하면 세상사람들은 모두 다 너무 바쁘고 나만이 너무 한가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든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가주의자(閑暇注意者)이지만, 위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끄덕여진다. 모두가 한가로운 세상, 혹은 모두가 바쁜 세상은 결국 모두 평등한 세상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김이석(金利錫)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p71

나는 첫눈에, 저치도 나만큼 가난하고 나만큼 고독하고 나만큼 울분이 많고 나만큼 똉깡이 심한 치겠구나 하고 느꼈다. 

p72

내가 보기에는 이석은 너무 소심했다. 그리고 그는 선천적으로 소시민적인 작가였다. 그가 동경하는 것은 예술이지 사상이 아니었다. ... 이런 작가는 이종(移種)을 하기가 힘이 든다. 그의 배양토는 <피양>이었는데 이 뿌리의 흙을 모조리 다 털고 나와 보니 다시 새 흙에 뿌리를 박기까지가 퍽 힘이 들었다. 그리고 겨우 새 흙에서 물이 오를 만하게 되자 그는 죽어버렸다.

p73

우리나라의 글쓰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그는 <신문소설>이 없으면 없는 대로 불안했고 있으면 또 있는 대로 자기 글을 못 쓰니까 불안했다. 월남 후 14년을 그는 내내 고생만 하다가 죽은 셈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작가를 기를 만한 자격이 없다. 이중섭, 차근호, 김이석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나 보아라. 나는 김이석의 죽음을 목도하고 친구로서보다도, 이남태생의 한 주민으로서 부끄러움과 슬픔이 더 크다.

[1964년에 쓰여진 글이다. 2017년 오늘날의 우리나라는 글쓰는 사람들의 형편이 얼마나 좋아졌는가?]


교회 미관에 대하여

p75

오늘날 우리들의 잠재의식은 대제도(大制度)에는 거저가 없다는 공포에 젖어 있다. 저 큰 집을 어떻게 거저 들어갈 수 있을까? 입장료가 없을까? 이렇게 구질구질한 옷을 입고 들어가도 타박을 맞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이다.

[이러한 잠재의식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토끼

p78

나는 무슨 일이든 얼마가 남느냐보다도 얼마나 힘이 드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아내는 아직도 나의 이 <역경주의(力耕主義)>에는 그리 신뢰를 두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무슨 일이든 얼마가 남느냐보다 얼마나 힘이 드느냐를 먼저 생각한다...곱씹어 보게 되는 말이다.]


이 일 저 일

**p80

...이런 지독한 경험을 했는데도 구공탄 냄세는 용이하게 맡아지지 않고 골치가 아픈지 안 아픈지도 모르겠다. 구공탄 냄세가 완연히 코에 맡아질 때에는 이미 때는 늦었고, 골치가 아프기 시작하면 벌써 상당한 분량의 가스를 마신 게 된다. 

 그런데 오늘의 경우도 그렇지만, 구공탄 냄세를 맡았다는 것보다도, 번연히 알고 맡았다는 것, 주의를 하면서 맡았다는 것, 혹은 극도로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경계를 해가면서 맡았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고 더 분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글이 쓰기 싫은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글을 막 쓰는지 모르겠다. 쓰고 싶은 글을 써보지도 못한 주제에, 또 제법 글다운 글을 써보지도 못한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소리지만, 오늘도 나는 타고르의 훌륭한 글을 읽으면서 겁이 버쩍버쩍 난다. 매문을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하면서 매문을 한다. 그것은 구공탄 냄세를 안 맡으려고 경계를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맡게 되는 것과 똑같다.

 이 글은, 쓰기 시작할 때는, 사실은 구공탄 냄세를 빌어서 우리나라가 아직도 부정과 부패의 뿌리를 뽑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야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요즘의 나의 심정은 우선 내 자신의 문제가 더 급하다. 내 영혼의 문제가 더 급하다.

 타고르의 <장난감>이라는 시가 있다. 좀 길지만 번역해 보자.


 아이야, 너는 땅바닥에 앉아서 정말 행복스럽구나, 아침나절을 줄곧 나무때기를 가지고 놀면서!

 나는 네가 그런 조그만 나무때기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나는 나의 계산에 바쁘다, 시간으로 계산을 메꾸어버리기 때문에.

 아마도 너는 나를 보고 생각할 것이다, '너의 아침을 저렇게 보잘것없는 일에 보내다니 참말로 바보 같은 장난이로군!' 하고.

 아이야, 나는 나무때기와 진흙에 열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단다.

 나는 값비싼 장난감을 찾고 있다, 그리고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를 모으고 있다.

 너는 눈에 띄는 어떤 물건으로도 즐거운 장난을 만들어낸다. 나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에 나의 시간과 힘을 다 써버린다.

 나는 나의 가냘픈 쪽배로 욕망의 대해(大海)를 건너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자기도 역시 유희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타고르의 이런 시를 읽으면 한참 동안 눈이 시리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쉬운 말로 이런 고운 시를 쓸 수 있으니. 이런 쉬운 말로 이런 심오한 경고를 할 수 있으니. 사회비평이나 문명비평도 좀더 이렇게 따뜻하게 하고 싶다. 그것이 더 가슴에 온다. 세상이 날이 갈수록 소란하고 살벌해만지는 것을 보면, 이제는 소리를 지르는 데는 지쳤다. 기발한 것도 싫고 너무 독창성에만 위주하는 것도 싫고 그저 진실하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진실을 추구하다 타고르의 시보다 더 따분한 시를 쓰게 되어도 좋을 것 같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나도 모르는 나의 정신의 구공탄 중독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무서운 것은 구공탄 중독보다도 나의 정신 속에 얼마만큼 구공탄 가스가 스며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무섭다. 그것은 웬만큼 정신을 차리고 경계를 해도 더욱 알 수 없을 것 같으니 더욱 무섭다. 


재주

p84

가장 가까운 문제이며 가장 많이 생각하는 문제이면서 가장 멀고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재주다. 동서고금의 제 성현과 문호와 시인의 작품을 아침저녁으로 떡먹듯이 잠자듯이 읽고 있으면서 사실은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만해도 벌써 거만해진 탓인지도 모른다. 우리 주위에 너무 재주 없는 사람들만 득시글거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임은 아무래도 나의 눈과 머리와 마음에 더 많은 것 같다. 허위에 흐려져 있는 눈, 타성에 젖어 있는 머리, 어줍지않게 오만해진 마음. 

[허위에 흐려져 있는 눈, 타성에 젖어 있는 머리, 어줍지않게 오만해진 마음. 남의 티끌을 찾기 보다 항상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미소를 머금고, 입은 다문 채로, 귀를 열고서.]

p85

좌우간 재주라는 것은 자기 자신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남이 보아야 알고 특히 무엇이고 비교해 볼 때 잘 나타난다. 


모기와 개미

p88

우선 지식인의 규정부터 해야 한다. 지식인이라는 것은 인류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사람이다. ... 우리나라에 지식인이 없지는 않은데 그 존재가 지극히 미약하다. 지식인의 존재가 미약하다는 것은 그들의 발언이 민중의 귀에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닿는다 해도 기껏 모기소리정도로 들릴까 말까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인의 소리가 모기소리만큼밖에 안 들리는 사회란 여론의 지도자가 없는 사회이며, 따라서 진정한 여론이 성립될 수 없는 사회다. 즉 여론이 없는 사회다. 혹은 왜곡된 여론만이 있는 사회다. 우리나라의 소위 4대 신문의 사설이란 것이 이런 왜곡된 가짜 여론을 매일 조석으로 제조해 내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씌어지고 있다. 이것을 진정한 여론이라고, 민주주의 사회의 여론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더도말고 우리나라의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서만도 허다하게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지식인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우리나라는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 지식인이 가물에 콩 나기만큼 있기 때문에 문학가가 아직도 사회적인 멸시를 받고, 그나마 여론을 조성하는 자리에서는 대학교수보다도 볼품이 없고, 우리의 시와 소설은 아직껏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잡지사가 그전보다 좀 깨었다고 하는 것이, 외국 말을 아는, 외국에 다녀온 문인들을 골라서 글을 씌우고 싶어하는 경향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것도 구역질이 나는 경향이다. 역시 탈을 바꾸어 쓴 후진성이다.

p91

...에라 모르겠다, 최모의 번역을 군데군데 어벌쩡 고쳐가며 베끼는 수밖에 없다, 이런 불쌍한 생각까지를 예사로 하게 된다. 이러니 나는 내가 욕하는 최모 씨나 정모 씨보다 더 나쁘면 나빴지 조금도 나을 게 없다. 아직은 모른다. 과연 정모 씨의 번역을 베끼게 될지 어떨지 일을 시작해 봐야 안다. 그러나 벌써 그런 생각을 먹었다는 것만으로 내가 실제 그의 번역을 베끼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반은 죄를 지은 셈이다. 필경 나도 누구를 지식인이 아니라고 욕할 만한 권한이 점점 희박해져 가는 처지에 있고, 그런 절망적인 처지에 이길 가망이 도저히 없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소련의 현대시인 솔제니친의 시에 나오는 개미와 같은 낡은 생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감명적인 시라고 생각되어서 최근에 <사상계(思想界)>에 번역되어 나온 것을 그대로 옮겨서 소개한다.

 

 개미와 불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작은 나무쪽을 불 속에 던져 넣었는데, 그것은 개미들이 오밀조밀 집을 짓고 있던 통나무쪽이었다.

 통나무 껍질이 딱딱 소리를 내면서 타기 시작할 때 개미들은 절망 속을 기어 허위적거렸다. 껍질을 기어나와 날름대는 불꽃 속에서 타죽어가고 있었다. 얼른 통나무의 한쪽을 들어올려 비벼대었다. 많은 개미들이 도망쳐 모래밭을 횡단, 낮은 솔잎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 기운을 피해 아주 달아나 버리지 않았다. 일단 절박한 위험을 극복하자마자 개미들은 다시 타고 있는 통나무 주위로 기어 들었다. 마치 어떤 힘이, 개미들을 그들이 포기해 버린 고향으로 다시 되돌려 보낸 듯이 많은 개미 떼가 불타는 통나무로 다시 기어오르기까지 했다. 기어코 타 죽을 때까지 개미들은 그 불붙는 집을 방황하는 것이었다.  


생활의 극복 ㅡ 담뱃갑의 메모
P93
나는 수첩을 갖고 다니기가 싫어서 담뱃갑 뚜껑에 메모를 해두는 버릇을 지키고 있은 지가 벌써 오래된다. ...
그런데 이와 비슷한 담뱃갑의 보이지 않는 메모가 내 마릿속에도 거의 언제나 들어 있다. 요즘의 그 위에 쓰여 있는 메모는 미국시인 시어도어 레트커 시의 짤막한 인용구다. <너무 많은 실재성(實在性)은 현기증이, 체증이 될 수 있다ㅡ너무 밀접한 직접성은 극도의 피로가 될 수 있다.>
...
대체로 시의 경험이 낮은 시기에는, 우리들은 시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수가 많으나, 시의 어느 정도의 훈련과 지혜를 갖게 되면, 시를 <기다리는> 자세로 성숙해 간다는 나의 체험이 건방진 것이 되지 않기를 조심하면서, 나는 이런 일종의 수동적 태세를 의식적으로 시험해 보고 있다. 여기에서 <너무 많은 실재성>과 <너무 밀접한 직접성>은, 그러니까 시를 찾아다니는 결과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내 자신에게 경고를 주는 의미에서 이런 메모를 해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작싱의 교훈은 곧 인생 전반의 교훈으로도 통하는 것이다. 너무 욕심을 많이 부리면 도리어 역효과가 나는 수가 많으니 제반사에 너무 밀착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런 초월철학은 대단한 진리도 아니지만 니대로의 이행(履行)의 전후관계에서 보면 한없이 신선하고 발랄하고 힘의 원천이 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이 평범한 진리보다도 이것을 적어두고 있는, 파지가 다 된 담뱃갑일 것이다.
...
자식은 자기의 몸보다도 더 사랑스러운 것이 부모의 상정이다. 자식의 미련을 청산하기란 자기의 미련을 청산하기보다도 몇 배나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이 미련도 꺾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이를 깨물고 자식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자. ... 이런 회심(回心)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나는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무서운 장해물부터 우선 없애야 한다. 그 장해물은 무엇인가.

지금 나를 태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욕심, 욕심, 욕심. ㅡ 레트커의 시에서.


욕심이다. 이 욕심을 없앨 때 내 시에도 진경(進境)이 있을 것이다. 딴 사람이 될 것이다. 딴사람ㅡ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벌써 오랜 옛날에, 나의 머릿속의 담배에 오랫동안 적어놓은 일이 있던 공자인가 맹자인가의 글의 한 구절이 또 생각이 난다. 이런 뜻의 유명한 처세훈이다. <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말라.> 마음의 여유는 육신의 여유다. 욕심을 제거하려는 연습은 긍정의 연습이다.
...
그러나 이 모순의 고민을 시간에 대한 해석으로 해결해 보는 것도 순간적이나마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여유가 고민으로 생각되는 것은 우리들이 이것을 <고정된> 사실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을 흘러가는 순간에서 포착할 때 이것은 고민이 아니다. 모든 사물을 외부에서 보지 말고 내부로부터 볼 때, 모든 사태는 행동이 되고, 내가 되고, 기쁨이 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씨(동기)로부터 본다ㅡ이것이 나의 새봄의 담뱃갑에 적은 새 메모다. 나의 <마음대로>의 새 오역이다.
<백양(白羊)>에서 가장 오래 신세를 지다가 뒤늦게 <아리랑>으로 옮겨와서 최근에 <파고다>로 또 옮겨온 메모의 배경의 정다운 역사. 그리고 펜에서 만년필로 변했다가, 만년필에서 볼펜으로 변한 메모 도구의 정다운 역사. 그것은 과거는 되찾아지기 전에 우선 부정되어야 한다는, 이 역시 너무나 평범한 발전의 원칙에 따른 돌음길. 부정은 끝났다ㅡ나의 메모와 메모의 배경과 도구를 돌이켜볼 때, 나의 내부의 저번에서 모기소리처럼, 그러나 뚜렷하게 들려오는 서리. 이 소리의 음미.
그러나 우리들의 앞에는 모든 냉전의 해소라는 커다란 숙제가, 우리들의 생애를 초월한 숙제가 가로놓여 있다. 냉전ㅡ우리들의 미래상을 내다볼 수 있는 눈을 주지 않는, 우리들의 주위의 모든 사물을 얼어붙게 하는 모든 형태의 냉전ㅡ이것이 우리들의 문화를 불모케 하는 냉전ㅡ너와 나 사이의 냉전ㅡ나와 나 사이의 모든 형태의 냉전ㅡ이것이 다름아닌 비평적 지성을 사생아로 만드는 냉전. <파고다>여, 전진하라.

박인환(朴寅煥)
P99
종로에서 마리서사를 하고 있을 때 너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초현실주의 시를 한번 쓰던 사람이 거기에서 개종해 나오게 되면 그전에 그가 쓴 초현실주의 시는 모두 무효가 된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프로이트를 읽어보지도 않고 모더니스트들을 추종하기에 바빴던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을 너의 그 말을 해석하려고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마리서사
P107
나에게는 아직고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좀처럼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죽음과 가난과 매명(賣名)이다. 죽음의 구원. 아직도 나는 시를 통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40여 년을 문자 그대로 헛 산 셈이다. 가난의 구원. 길가에서 매일같이 만나는 신문 파는 불쌍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자책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역사를 긴 눈으로 보라고 하지만,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마다 왜 저애들은 내 자식만큼도 행복하지 못한가 하는 막다른 수치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나는 40여 년 동안을 문자 그대로 피해 살기만 한 셈이다. 매명의 구원. 지난 1년 동안에만 하더라도 나의 신문행위는 모두가 원고료를 벌기 위한 매문, 매명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진정한 <나>의 생활로부터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나의 머리는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받을 원고료의 금액에서 헤어날 사이가 없다. 마리서사 시대에, 복쌍은 나한테도 이런 비유의 말을 했다.ㅡ'이 속(속세)에서는 얄팍한 가면이라도 쓰고 다녀야 해. 그러니까 수영이두 옷 좀 깨끗하게(인환이처럼 데뷔를 하려면 맵시 있는 옷차림을 하라는 뜻) 입구 다니라구' 그러나 복쌍은 인환이를 속이듯이 나까지도 속인 것이 분명하다. 그는 나한테는 가면을 쓰라고 하면서 내가 보기에는 그 가면을 자기는 오늘날까지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전 심사위원의 명단 속에 박일영이라는 이름이 날 리가 만무하고, 어느 산업미술전에도 그의 이름은 나타나 있지 않고, 그 흔한 간판점 하나 그의 이름으로 날 성싶지 않은 그런 성인에 가까운 생활을 그가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혹시나 노상에서 누가 만나도 그가 보기 전에는 구태여 이쪽에서 인사하고 싶은 사람이 없을 정도의 망각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인환의 만년처럼 비뚤은 길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고, 지(知)와 행(行)이 일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고, 17년 전과 비해서 아웃사이더의 생활이 얼마나 하기 힘들어졌는가가 새삼스럽게 통절히 느껴지고, 이상한 가슴의 동계(動悸)를 느끼게 된다. 아주 새로운 것은 아주 낡은 것과 통하는 것일까. 적어도 복쌍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는 내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의 해답을 낼 수 있을 만큼 낡아진 것 같다.

**이 거룩한 속물들
P117
세상은 참 우숩다. 그렇게 이를 갈고 속물들을 싫어할 때는 아무 소리도 없다가 이렇게 내 자신이 완전무결한 속물이 된 뒤에야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고 한다. 세상은 이다지도 야박하다.


P119~120
우선 나는 지금 매문(賣文)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도 고급 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입으로야 물론 안 그렇다고 하지. 그까짓 것, 그저 담뱃값이나 벌려고 하는 거지. 혹은 하도 나와달라고 귀찮게 굴어서 마지못해 나간 거지, 입에 풀칠을해야 하고 자식새끼들의 학비도 내야 할테니까 죽지 못해 하는 거지, 정도로 말은 하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만도 아닐걸......그런 것만도 아닐걸......

 그러다가 보면 차차 돈도 생기고, 살림도 제법 안정되어 가고, 전화도 놓고 텔레비도 놔야 되고, 잡지사나 신문사에서 오는 젊은 기자들에 대한 체면이나, 다음 청탁에 대한 고려를 해서도, 다락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헌잡지 나부랭이나 기증받은 책까지도, 하다못해 동화책까지도, 말끔히 먼지를 털어서 비어 있는 책꽂이의 공간을 메워놓아야 한다. 그리고 베스트셀러의 에세이스트로 유명한 A,B,C의 뒤를 따라 자가용차를 살 꿈을 꾸고, 펜클럽 대회가 파리와 미국에서 언제 열리는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악덕은 누차 말해 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잂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戰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으로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을 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즉, 나다.

 이 내가 되는 일, 진짜 속물이 되는 일, 말로 하기는 쉽지만 이 수업도 사실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속물이 안 되려고 발버둥질을 치는 생활만큼 어렵다. 그리고 그만큼 고독하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고독은 나일론 재킷이다. 고독은 바늘끝만치라도 내색을 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고 탈락한다. 원래가 속물이 된 중요한 여건의 하나가, 이 사회가 고독을 향유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물이 된 후에 어떻게 또 고독을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속물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있다.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는 고독의 재킷을 입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이 글 제목대로 <거룩한 속물> 즉 고급 속물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이 나일론 재킷을 입은 속물이다. 고독의 재킷을 입지 않은 것은 저급 속물이지 고급 속물은 아니다. 고급 속물은 반드시 고독의 자기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규정을 하면 내가 말하는 고급 속물이란 자폭(自爆)을 할 줄 아는 속물,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무래도 나는 고급 속물을 미화하고 적당화시킴으로써 자기 변명을 하려는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초(超)고급 속물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심연(深淵)은 무한하다. 속물을 규정하는 척도도 무한하다.

 속물은 어디에 있는가. <거룩한 속물>은 어디에 있는가. 양서점(洋書店)에 있는가. 양서방(洋書房)의 주인은 일본 고본옥(古本屋)의 주인에 비하면 어디인지 모르게 거만하다. 양서방의 카운터에 타이프라이터를 놓고 앉아 있는 좁다란 바지통의 사나이의 그 야무진 눈동자, 우리들은 이 배미사상(拜美思想)의 눈동자를 오늘의 지성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가. 그의 눈동자에는 나일론 재킷이 씌어져 있나. ...

 속물의 특성은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십이층인가의 고층 건물을 지은 사람을 상대로 그 건물의 뒤에 사는 사람이 햇빛을 막아서 그늘이 진다는 피해로 오랫동안 소송을 걸었다가 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인이라면 옆의 집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집까지는 헐 용기가 없더라도 미안한 생각쯤은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들을 보면 그늘이 진 옆의 집에 미안한 생각을 품기는커녕, 왜 나만큼 큰 집을 못 짓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쓰레기와 오물까지도 아침저녁으로 내리쏟는다. 유독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뿐이 아니다. 이런 그레셤의 법칙은 문화단체와 예술단체의 이름으로, 교수의 이름으로, 학장의 이름으로, 아나운서의 이름으로, 신문기자의 이름으로 날이 갈수록 더 성해가기만 한다. 유능한 아나운서와 유능한 사회자는 대담자나 회담자나 청중을 리드해 간다는 미명으로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아무것도 안 붙인 가슴보다는 지옥의 훈장이라도 붙이고 있는 편이 덜 쓸쓸하다. 아무 목걸이도 없느니보다는 개의 목걸이라도 걸고 있는 편이 덜 허전하다. 하나님이시여, 이 <테리어>종들에게 구원을!

 구원은 무대를 바꾸어놓아야 한다. 사회자가 나쁜 게 아니라 사회자가 서 있는 자리가 나쁘다. ...그러나 역시 속물들은 여전하다. 하지만 일루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 다 속물을 만들어라. 모두 다 유명하게 만들어라. 간판이 너무 많은 종로나 충무로 거리에서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더 간판을 늘려라. 하나님은 오늘날의 속물의 근절책으로 이 방법을 시험하고 있고, 어느정도 효과도 거두고 있는 것 같다.

민락기(民樂記)

p125
 대체로 돈 있는 사람들이나 권력 있는 사람들은 남의 말을 공손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이 열 마디를 하면 한두어 마디 대꾸할까 말까 할 정도로 무뚝뚝하고 과묵하고 불친절하다. 우리들은 그것을 불쾌하기 여기면서도 또 마음 한구석으로는 매력을 느낀다. 이런 사람들의 형은 대체로 비슷하다. 우리들은 친구나 친척 가운데 이런 사람들을 으리 한두어 사람쯤 갖고 있다. ...
돈이나 권력 있는 사람들이 24시간 침묵만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도 돈 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수다를 떠는 때가 많다. ... 나의 친구 중에 그런 사람이 하나 있는데, 나는 그의 반 시간이나 한 시간 동안의 장광설을 듣고 나서 <당신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이로정연하게 떠들어대도 결국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오> 하고 비꼬아준 일도 있었다.

P127
...양명문(楊明文)씨의 <민락기>라는 시를 읽고 내 나름의해석을 붙여가면서 몇 번씩 반복해 느껴보았다. 내 나름의 해석이란 이 시가 행동의 경이와 포만감과 불안감을 읊은 작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내 생각이 틀렸는지 어떤지 관심 있는 식자들의 심사를 청하는 의미에서 그 전문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가 아닌 내가
푸른 파도 위를 걸어간다.
<괜찮을까.....>

터무니없는 이 기적
함부로 저질러놓는
이 무시무시한 기적들.

점심에 광어회를 먹었더니
더 잘 뜨는가, 바다 한가운데를 파도를 차던지며 걸어나간다.
ㅡ파도에서 파생되는 시간의 미끼들은
ㅡ갈매기의 순수한 양식이라는데
ㅡ이 치들은 사념의 알을 낳는다는데.

바닷가 푸른 언덕 소나무 그늘쯤서
새김질하던 누우런 소들도
근심스레 나를 바라본다.

그래도 나는 신이 난다.
모두 내 세상 같아 우쭐해진다.
<괜찮을까.....>

부질없는 이 기적
번개질 치는 현란한 <이마주> 속에
무수히 날아드는 색채언어군(色彩言語群).

물결이 취했는가 멀미가 난다.
그만 풀썩 주저앉는다.
그래도 둥둥 떠 있는 나.

중천엔 해가 너털웃음을 치는 하오.
내 발밑에 밟히우는 실재의 모래.
모래의 허망한 감촉.

지친 나는 맥이 빠져버린다.
갑자기 남의 세상 같아 서글퍼진다.
<괜찮을까.....>

*민락(民樂)은 해운대 근처에 있는 작은 어촌 이름이다.

괜찮을까.....괜찮을까.....괜찮을까.....? 괜찮다......괜찮다......
괜찮다......괜찮아!

[위의 표현은 김수영의 여러 시에서도 볼 수 있다. 너무나도 고통스럽지만, 스스로 채찍질을 하면서, 다짐하는 듯하다. 동시에 한없이 연약하고 나약하기만 한 인간 본연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p111
...사람을 알려면 별로 많은 사람을 사귈 필요가 없다. 나의 경우에는 여편네 하나로 족한 것 같은 생각조차도 든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벽>을 보면 된다. <벽>이란 한계점이다.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숙명이다. 이 <벽>에 한두 번이나 열 번 스무 번이 아니라 수없이 부닥치는 동안에 내딴에는 인간 전체에 대한 체념이랄까ㅡ그런 것이 생긴다. 그래서 나도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본의 아닌 철학자가 된 셈이다.

[마치 형이 꼭 쓴 글인 것만 같다.]

P112
...이런 부부의 철학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죽은 박인환이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그놈이 누구한테 들었는지 나한테 이런 말을 제법 정색을 하고 한 일이 있었다. "부부란 자식 때문에 사는 거야. 여기 성냥갑이 두 개 있지. 이 성냥갑 사이에 성냥개비를 하나 놓자. 이 성냥개비는 두쪽의 성냥갑에 실을 동여매고 있어. 그래서 한쪽의 성냥갑이 멀어질 때면 이 성냥개비가 실을 잡아당기는 거야. 너무 멀리 가면 안 된다구" 그때는 또 시시한 말을 하는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들어두지 않은 말이, 이상하게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또한 이상하다. 인환이가 이 말을 실천하지 않고 죽은 것을 보면 그놈도 진정으로 믿고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놈은 멀리 떨어져 나간 성냥갑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나가다가 자폭을 해버린 성냥갑이 되었다. 봉래하고 진섭이하고 소주를 마시고 난 이튿날 아침에 죽었으니까, 소줏불에 점화된 성냥갑이 되었다. 그가 생전에 뇌까리던 조니워커를 마시고 자폭을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을 거라.

글씨의 나열이오
p115-6
이 글을 쓰려고 까만 볼펜을 드니 둘째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이 변색을 한 것이 눈에 뜨이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오. 변색이란 것이 과장이 아니오. 하얗게 바래 있소. 아니 하얗게 떠 있소. 두 손가락의 피부가 표백을 한 거요. 술잔을 쥔 부분의 피부가 표백을 한 것이오. 어저께 당신이 준 오천 원 중에서 이천오백 원어치를 마신 거요. 내가 쓴 돈이 그것이지 마신 분량은 내가 지불한 돈의 배가 더 될 거요. 내가 낸 돈은 일차의 대폿값하고 이차의 맥줏값뿐이지, 삼차에 들어앉은 집에서 마신 것은 다른 친구가 냈으니까. 술 많이 마셨다는 자랑이 아니오. 괴롭단 말이오. 아침에 깨어보니 또 요에 오줌을 쌌구려. 지금 이 글을 그 축축한 요 위에 팔을 비벼대면서 쓰는 거요. 정말 괴롭소. 비명이 아니오. 세상에서는 자학이 나쁘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자학의 미덕에 대신하는 종교를 찾지 못하고 있소. 속되어 가는 나 자신에 대한 이나마의 변명이라도 없이는 어디 살겠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문학(문학이라고 해둡시다)을 신용하지 않소. 이것이 현대의 명령이오. 카뮈가 이런 말을 했지. 그 이전에 랭보가 무어라고 했소. 시는 절대적으로 새로워야 한다고 했을 거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우리들의 시를 절대적으로 경멸해야 하오. 이런 우리의 산상수범(山上垂範) 때문에 우리의 시를 시가 아니라 산문이라고 욕하는 유다들의 비방에 우리들의 시가 책형을 당해도 우리는 그 오해를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하오.
[참고. 산상수훈(山上垂訓)은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 위에서 그리스도 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에 관(關)하여 행(行)한 설교(說敎)를 의미하는 성어다.]
며칠 전에 '깨꽃' 이라는 몇 해 전의 작품을 어디다 주려고 청서를 하면서, 그러나 그들의 오해가 내 오해로 변했소. 무슨 말이냐고? 이 '깨꽃'이라는 글 중의 어디에서 시를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소. <의미>로서의 시가 없소. <의미>로서의 시가 안 되오. 그것은 그냥 글씨의 나열이오. 미안하오. 그 글씨의 나열에 대해서 오천 원이나 받아서 미안하오.

 

삼동(三冬) 유감

P130

마음은 <대통령 각하>나 <25시>가 격려하는 사회 정의의 구현을 위해 불같이 타오르면서, 이상하게도 몸은 낙천과 기독의 가르침의 대극을 향해 줄달음질치는 것이 이상하다.

[나 또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래왔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탓에, 바깥의 문제에 더 주목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진정한 나는, 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갈망이 가득하지 않았는가...]


P131

유심적인 면에서는 요즘의 나는 헨델을 따라가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모든 문제는 우리집의 울타리 안에서 싸워져야 하고, 급기야는 내 안에서 싸워져야 한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나>에게로 귀결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대단한 문제를 풀어낸다 한들, 그것은 실은 스스로에게 진실하지 못한 것이고, 따라서 어떤 점에서든지 결점을 가지게 마련이다.]

...

그날 밤은 완전히 내 자신이 타락했다는 것을 자인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지만,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 마루의 난로 위의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역시 원수는 내 안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또 든다. 우리 집 안에 있고 내 안에 있다. 우리 집 안에 있고 내 안에 있는 적만 해도 너무나 힘에 겨웁다. 너무나도 나는 자디잔 일들에 시달려왔다. 자디잔 일들이 쌓아올린 무덤 속에 내 자신이 파묻혀 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옛날의 어떤 성인의 일까지도 생각이 나고는 한다. 자기 집 문앞에서 집안 사람들도 모르게 한평생을 거지질을 하다가 죽은 그 성인은 아마 집안의 자디잔 일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원수는 내 안에 있다'. 인도의 성자 중 한 사람인 비베카난다는 '상대방에게서 보이는 결점들은 결국 내 속에 있는 결점들이 그사람에게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고 하였다. 공자와 소크라테스도 역시 '스스로를 보라'고 하였다.]


나의 언애시

P134

...그러고 보면 나는 이미 종교의 세계에 한쪽 발을 들여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자를 그냥 여자로서 대할 수가 없다.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고 죽음이라는 전제를 놓지 않고서는 온전한 형상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눈으로 볼 때는 여자에 대한 사랑이나 남자에 대한 사랑이나 다를 게 없다. 너무 성인 같은 말을 써서 미안하지만 사실 나는 요즘 이러한 운산(運算)에 바쁘다. 이런 운산을 하고 있을 때가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나의 여자는 죽음 반 사랑 반이다. 나의 남자도 죽음 반 사랑 반이다.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 시에 다소나마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이러한 연애관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키츠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실제의 체험에서 배운 것이니까 어디까지나 나의 것이다. 새로운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의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인지는 몰라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빈도가 잦아진다. 모든 것과 모든 일이 죽음의 척도에서 재어지게 된다. 자식을 볼 때에도 친구를 볼 때에도 아내를 볼 때에도 그들의 생명을, 그들의 생명만을 사랑하고 싶다. 화가로 치면 이제 나는 겨우 나체화를 그릴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잘하면 이제부터 정말 연애시다운 연애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쓰게 되면 여편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연애시를, 여편네가 이혼을 하자고 대들 만한 연애시를, 그래도 뉘우치지 않을 연애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을 전제에 놓고서 대상을 바라본다. '모든 것과 모든 일이 죽음의 척도에서 재어지게 된다'.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 라는 표현은 마치 헤라클레이토스의 한 단편과 같은 느낌을 준다.]

p138~140

나는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가. 멋에 대해 쓰고 있는 건가? 그러나 멋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죽는 것 다음에 싫은 것이 멋이다. ...

 문학 하는 사람들의 촌티. 사진을 찍기를 좋아하는 소설가나 시인이 너무 많다. 새로 나온 시인들의 처녀시집에 저자의 사진이 들어 있는 것처럼 천하게 보이는 것은 없다. 멋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도 이런것을 보게 되면 구역질이 난다. 넥타이를 깍듯이 매고, 혹은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를 들고 있는 사진. 월간잡지에 나오는 형형색색의 멋을 피운 포즈. 혹은 멋을 피우지 않은 체하려는 포즈. 문학전집 신문광고에 나오는 <예술적>으로 찍은, 소도구까지 동원하고 있는 포즈. 그중에서 가장 세련된 포즈를 취할 줄 아는 K나 H 같은 작가의 사진도 일본의 <쇼세츠 신쵸[小說新潮]>나 <분게이슌주[文藝春秋]>의 어디에서 본 것 같은 포즈. 돌아간 염상섭(廉想涉) 씨 같은 분은 사진을 찍는 데도 일본 작가의 흉내가 아닌 자기의 개성이 있었다. 혹은 개성이 있는 것같이 보였다. 소설이 돼 있으니까 사진도 그렇게 보였는지 모른다. 좌우간 그의 이마의 혹은 일본 작가를 본딴 것은 아니다. ...

 그러나 내가 정말 멋있을 때는 이런 소음의 모델의 장면도 생각이 나지 않고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일 것이다. 정신이 집중될 때가 가장 멋있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죽는 때가 가장 멋있는 때가 될 것이고, 그러고 보면 사람은 적어도 일생의 한번은 멋있는 때를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멋쟁이라는 멋의 평등의 귀결이 나오게 된다.

 이처럼 멋에도 절대적인 멋과 상대적인 멋의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절대적인 멋의 인식을 체득한 사람에게는 세속적인 멋은 멋을 부리지 않는 것이 멋이 된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들은 괴짜라고 부른다. 한 사회에 문화가 있으려면 이런 괴짜들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현대의 획일주의는 이런 괴짜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부르주아의 획일주의에 의식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비트의 화장법이다. 의식적ㅡ이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비트의 아류들은, 화장의 결과만을 중요시하고 화장의 태도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현대시에도 통하는 말이다. 현대성과 의식과 겸손이 동의어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시인들이 현대시를 쓴다고 으스대고 있다.

 

해동

p143~144

목욕통에 얼어붙었던 물이 윗덮개가 조용히 풀리기 시작한다. 위의 3분가량에 흥건히 물이 괴어 있고, 얼음의 근심은 소리없이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아직도 마당 위에 얼어붙은 먼지에 쌓인 얼음들은 요지부동이지만, 직경 2미터도 안 되는 목욕솥의 해빙이 알려주는 봄의 전조는 새싹을 보는 것보다도 더 반갑다. 새싹이 틀 때 봄을 느끼는 것은 이미 늦은 감이 들고, 가을의 낙엽을 보고 셸리처럼 지나치게 일찍이 봄을 예고하는 것은 너무 시적이어서 싫고, 그저 남보다 조금 먼저 범인(凡人)처럼 봄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워 좋다.

 새싹이 솟고 꽃봉오리가 트는 것도 소리가 없지만, 그보다 더한 침묵의 극치가 해빙의 동작 속에 담겨 있다. 몸이 저리도록 반가운 침묵. 그것은 지긋지긋하게 조용한 동작 속에 사랑을 영위하는, 동작과 침묵이 일치되는 최고의 동작이다.

 가라앉은 얼음을 겨우내 굳어온 근심이라고 생각할 때, 이 불행의 잠수 행위는 희열에 찬 풍자까지도 풍겨주고, 어지러운 현실의 걱정이야 어찌되었든 우선 까닭 모를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수돗가에 씻어놓은 저녁쌀이 튀어나올 듯이 하얗게 보이고, 마루에 올라와 난롯가에서 손을 비벼보면 손의 두께까지도 제법 두툼하게 느껴진다.

 피가 녹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얼음이 녹는 것이 아니라 피가 녹는 것이다. 그리고 목욕솥 속의 얼음만이 아닌 한강의 얼음과 바다의 피가 녹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거대한 사랑의 행위의 유일한 방법이 침묵이라고 단정한다.

 우리의 38선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빙산의 하나다. 이 강파른 철덩어리를 녹이려면 얼마만한 깊은 사랑의 불의 조용한 침잠이 필요한가. 그것은 내가 느낀 목욕솥의 용해보다도 더 조용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조용함을 상상할 수 없겠는가. 이것이 다가오는 봄의 나의 촉수요 탐침(探針)이다. 이 봄의 과제 앞에서 나는 나를 잊어버린다. 제일 먼저 녹는 얼음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철이고 싶다. 제일 먼저 녹는 철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얼음이고 싶다. [전문]

 

미인

p145

삼십대까지는 여자와 돈의 유혹에 대한 조심을 처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던 것이 요즘에 와서는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방심이 약이 되고 있다. 되도록 미인을 경원하지 않으려고 하고 될 수만 있으면 돈도 벌어보려고 애를 쓴다. 없는 사람의 처지는 있는 사람은 모른다고 하면서 있는 사람을 나무라는 없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대한 공감도 소중하지만, 사실은 있는 사람의 처지를 알아주는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대한 없는 사람으로서의 공감이 따지고 보면 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도 그렇지만 오늘날도 역시 가난하게 살기는 쉽지만 돈을 벌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태와, 또한 나이와, 게다가 여태까지 쌓아온 선비로서의 지나친 수양의 탓 때문인지, 좌우간 요즘의 나로서는 미인과 돈에 대한 방심이 그것들에 대한 지난날의 조심보다도 몇 곱절 더 어렵다. ...

 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이는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으니, 현대미학의 제1조건인 동적(動的) 미를 갖추려면 미인은 반드시 돈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 돈 있는 미인을 미인으로 생각하려면, 있는 사람의 처지에 공감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돈이 있어야 한다.

 

와선

p151

선(禪)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누워서 하는 선, 즉 와선(臥禪)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선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면서도 이 누워서 하는 선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나는 내 딴으로 해석하면서 혼자 좋아하고 있다. 내 딴으로 생각한 와선이란, 부처를 천지팔방을 돌아다니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골방에 누워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처나 자기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부처를 기다리는 가장 태만한 버르장머리 없는 선의 태도다.

['부처를 찾기 위해 스스로 갖은 고초를 겪어 가며 노력하지 않고서, 쉽게 얻으려 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 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닐까.]

 

2부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

p155

지성인은 원래 우리말로 바꿔 말한다면 <선비>라 할진대, 정의를 갈구하는 이유에서 자기 몸을 항시 항거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데 있을 것이다.

[정의를 위하여 자기 몸을 항시 항거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 '지성인' 이라 김수영은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진정한 지성인은 참으로 드물다.]

p156

하지만 미국의 시인 휘트먼이 말하듯이 자유란 것은 두번째나 세번째나 혹은 다섯번째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맨 마지막으로 생명과 더불어 없어지는 것이니, 우리는 그처럼 끝까지 싸울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

 생각해 보라. 우리는 얼마나 뒤떨어졌는가. 학문이고 문학이고 간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벅찬 물질 만능주의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신의 구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지성인은 눈에 뜨이지 않게 또 눈에 뜨이지 않는 성과를 위해서, 그러나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정신을 위해서 싸워야겠고, 그러한 무장이 항시 되어 있어야겠다. ... 어제까지 우리들이 싸워왔듯이 오늘도 우리는 싸워야 하고, 오직 내일의 승리는 우리의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만물은 투쟁속에서 生하고 또 死는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 문득 떠오른다. 내일의 승리가 누구의 것이 될지 나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독자의 불신임

p159

다시 말하자면 영혼의 개발은 호흡이나 마찬가지다. 호흡이 계속되는 한 영혼의 개발은 계속되어야 하고, 호흡이 빨라지거나 거세지거나 하게 되면 영혼의 개발도 그만큼 더 빨라지고 거세져야만 할 일이지 중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중단될 수도 없는 일이다. 

 

창작 자유의 조건

p177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中間辭)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설가, 평론가, 시인이 내가 접한 한도 내에서만도 우리나라에 적지않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학의 후진성 운운의 문제를 넘어서 더 큰 근본문제이다.

 시고 소설이고 평론이고 모든 창작활동은 감정과 꿈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과 꿈은 현실상의 척도나 규범을 넘어선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상으로는 38선이 있지만 감정이나 꿈에 있어서는 38선이란 터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너무나 초보적인 창작활동의 원칙을 올바르게 이행해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문학을 해본 일이 없고, 우리나라에는 과거 십수 년 동안 문학작품이 없었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문학작품이 없는 곳에 문학자가 어디 있었겠으며 문학자가 없는 곳에 무슨 문학단체가 있었겠는가. 아마 있었다면 문학단체의 이름을 도용한 반공단체는 있었을 것이지만, 이 반공단체라는 것조차 사실에 있어서는 반공을 판 돈벌이 단체이거나, 문학과 반공을 <이중으로> 팔아먹은 돈벌이 단체에 불과하였다.

 

자유의 회복

p181

요즈음 일본에서 오는 <한양(漢陽)>지에 장일우(張一宇)라는 평론가가, 한국의 시나 소설에 대해서 쓰는 것을 읽어보지만 나는 그이만한 성의도 없다. 그는 그래도 그가 돼먹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시인의 시행을 정성껏 옮겨놓고 있지만 나에게는 도저히 그만한 여유가 없다.

 그런데 동지(同誌)의 4월호에 나온 '현대시와 시인'을 읽어보아도 그렇지만 그는 너무 한국의 <시인>에게만 채찍질을 가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추측으로는, 그가 한국의 시작품만 보았지 한국의 소위 시인들이 처해 있는 분위기를 실제 호흡하지 못하고 있는 데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성의나 시의 견식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이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가 1960년 4월의 가치를 언더라인 하고 높이 평가할 줄 아는 상식 있는 평론가인 줄 알기 때문에 나의 유감은 그만큼 더하다. 우리나라의 시단은 자고로 완전한 자유를 누려본 일이 없다. 자유가 없는 곳에 무슨 시가 있는가! 이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진리이지만 이 사실을 도외시하고 우리나라의 시단을 평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오늘날 이 사실은 개별적인 시인의 무력과 무재주와 심지어는 무성의까지도 탓하기 전에 먼저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p185

우리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러나 건강한 개인도 그렇고 건강한 사회도 그렇고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은 쳐야 한다. 몸부림은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이 지식인이다. 진지하게라는 말은 가볍게 쓸 수 없는 말이다. 나의 연상에서는 진지란 침묵으로 통한다. 가장 진지한 시는 가장 큰 침묵으로 승화되는 시다.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보더라도 지금의 가장 진지한 시의 행위는 형무소에 갇혀 있는 수인의 행동이 극치가 될 것이다. 아니면 폐인이나 광인. 아니면 바보. 그러나 이 글의 주문의 취지는 영웅대망론(英雄待望論)이 아닐 것이다. ...

 나의 직관적인 추측으로는, 표면상의 지식인들의 피곤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들의 내면에는 개인의 책임에 대한 각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이행이 은연중에 강행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나>의 문제로 귀착된다.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는, 따라서 나는 내 정신을 갖고 살고 있는가로 귀착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나를 무한히 신나게 한다.

p187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란 끊임없는 창조의 향상을 하면서 순간 속에 진리와 미(美)의 전신(全身)의 이행을 위탁하는 사람이다. ... 우리는 일순간도 마음을 못 놓는다. 흔히 인용되는 예를 들자면 우리는 '시지프의 신화'에 나오는 육중한 바윗돌을 밀며 낭떠러지를 기어올라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인(自覺人)의 세계의 대열 속에 미약한 한국의 발랄한 젊은 세대가 한 사람이라도 더 끼게 된다는 것은 우리들의 오늘날의 그지없는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