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강상중 - 고민하는 힘(2009), (주)사계절출판사

Posted by 히키신
2020. 1. 7. 23:04 글쓰기와 관련하여

'당신은 진지합니까?'

...

'나는 과거의 인과 때문에 사람을 잘 믿지 않습니다. 사실 당신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지요. 그렇지만 당신만은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의심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한 사람이거든요. 나는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누군가를 믿으며 죽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 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뱃속까지 진지합니까?'"

1장, 나는 누구인가

p42~43

- 어중간한 태도가 아닌, 뼛속 깊이까지 진지하게 파고들어 진짜 담백한 내 모습을 찾는 것. 그것이 선행되어야 진짜 '나'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 어디서든 당당하며, 아우라를 풍기기 마련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보면 세상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려는 야심가나 시대에 대한 꿈과 의욕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대부분은 부자 아버지에게 기생하는 젊은이, 은둔 생활을 하는 지적 교양인, 먹고 살 만큼의 자산이 있어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 있는 백수', 또는 먹고 살 만큼만 일하는 사람 등이 주인공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시대에 대해 나름대로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불만을 타파하기보다는 포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세상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 의문의 눈초리를 들이대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 달관한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즉 '돈만 있으면 되는 세상은 더럽고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말은 그렇게 해도 시대의 추세가 그러니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2장,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p53

- 지난 20대의 나를 돌이켜보면, 시대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으나 끝까지 다가가지 못한 채 결국 현실로 되돌아온 듯하다. 내 속의 분노를 표출하거나 혹은 승화시키기 보다 그때그때 적당히 삭혀가며 넘어간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내 나름의 방식대로 나의 삶을 걸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걸어온 길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불공정한 경쟁과 가혹한 부의 편중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경제 발전이 벽에 부딪힌 나라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이것이 20세기 세계전쟁의 원흉이 된 '제국주의'입니다. ... 막스베버는 이 점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런 문화 발전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마지막 사람들(letzte Menschen)'에게 다음과 같은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 이들은 인간성이 과거에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이미 올랐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할 것이다.'"

2장,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p55

- 주위를 둘러보면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 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미디어에 등장해 자신을 뽐내는 자칭 OO 전문가들과, 그들이 방송에서 내뱉은 한마디는 마음이 없는 향락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나는 영혼이 순수한 이들을 사랑한다. 그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진정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의미를 묻는다

'해답이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한다'. 그것은 결국 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달관한 어른이라면 그런 일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사회에 이익이 되든 그렇지 않든 '알고 싶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같은 것을 솔직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좌절과 비극의 씨앗이 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숙하기 때문에 의문을 능숙하기 처리하지 못하고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위험한 곳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

4장, 청춘은 아름다운가?

p85

- 대학 3학년 때부터 해답이 없는 물음에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나는 그 물음을 더 깊이 붙드느라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제학을 전공한 동창과 술자리 중 서로의 대화가 시작되지 않는 지점이 있었다.

'간단하게 설명해줄게. 세상은 A라고 가정하자. 이건 누구나 동의하니 서로 간 약속이 된 거지. 그런데...'

'잠깐, 그걸 왜 모두가 동의한다고 생각해? 나는 그 최초의 전제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데.'

'그러면 우린 더 이상 얘기를 할 수 없어. 해답을 내릴 수 없는 물음을 자꾸 붙잡고 왜 그러냐고 얘기하면 세상에 누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

'음... 하지만 난 이해가 안 되는데. 그리고 그 최초의 지점에서 '왜'를 묻는 게 철학이라 어쩔 수 없네.'

'참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구만. 쯧쯧...'

모든 규칙과 전제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최초의 전제는 왜 해답이 없다고 하면서도 모두가 맞다고 동의하고 그냥 넘어가는지 당시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물론 그때처럼 학문적으로 매달려있진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그렇다 치고' 넘어가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나는 여전히 청춘인지도 모른다.

무수한 좌절과 비극의 연속이었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이 나에게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는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장 눈에 띄는 수확은 아닐지 모르나, 나는 이것이 매우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청춘 시절부터 '나'에 대한 물음을 계속하며 '결국 해답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그보다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라는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음 위를 지치듯 모든 일의 표면만 지친다면 결국 풍성한 것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춘은 좌절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실패가 있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도 청춘의 향기를 잊고 싶지 않습니다.

4장, 청춘은 아름다운가?

p91~92

그러나 늦게 온 우리 뮤즈의 이 발명품도

우리 병든 인종이 젊음에 바치는

깊은 흠모를 막지 못하리,

ㅡ 성스러운 젊음, 순박한 모습, 다정한 이마

흐르는 물처럼 맑고 깨끗한 눈동자,

그 향기, 그 노래, 그 부드러운 열기를

하늘의 푸름처럼, 새처럼, 꽃처럼 무심코

모든 것 위에 널리 퍼트려 주는 젊음에!

ㅡ 보들레르의 <저 벌거숭이 시대의 추억을 나는 좋아한다> 중에서

-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할 뿐, 더 이상 꼭 들어맞는 해답을 찾고자 하지 않는다. 그렇게나 당연한 걸 이제서야 깨달았냐고 묻는다면, 그저 미소로 답할 뿐이다. 표면만 거친 사람과 깊숙이 파고든 후 밖으로 나온 사람은 바라보는 풍경이 다르다.

요컨대 '그것이 그 사람에게 믿음을 주기에 충분한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는지 믿을 수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믿는다'가 아니라 '자기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인 종교', '자기가 교주'인 것입니다.

5장,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p102~103

- 니체는 '창조자는 자신의 믿음을 믿는다'라고 하였다. 믿음의 근거가 모두 무너져 내려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이는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결과는 결국 그것이 옳든 그르든 갈 때까지 가본 후에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가 뭐라든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믿고 갈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도락과 직업>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개화가 진행될수록, 또한 직업의 성질이 분화될수록 우리는 단편적인 인간이 되고 마는 묘한 현상이 일어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이라고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6장,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p114~115

- 이상의 '부채꼴 인간'과 같은 단편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점은 분명 아쉽다. 옛날 지역의 고명한 의원이 아픈 이의 진맥을 짚어 본 후, 증상을 찾아 치료하는 일과 현대의 많은 분과로 나누어진 전문의를 비교해보면, 이따금 아쉬워지곤 한다. 그러나 요즘은 옛날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분야별로 전문지식이 깊어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기존엔 전혀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가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미래엔 비록 단편적인 인간일지라도, 서로의 지식이 융합되어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자유스럽기 때문에 잘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유로워지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 이런 것을 자유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7장,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p131

- 경제적인 어려움, 불우한 가정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겐 현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지 잘 안다. 경제적인 자유, 화목한 가정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온 이들에겐 지난한 삶을 살아온 이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화목한 가정 속에서 살아온 이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부자유로 운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부자유롭기 때문에 더 잘 볼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

정신의학자이며 사상가인 빅터 E. 프랭클은 사람들이 고뇌에 견디는 힘을 많이 지니고 있지만 의미 상실에는 견디지 못한다는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하나하나의 의미를 일일이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니고 의미를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가 무의식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그것이 사람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따라서 의미를 확신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8장, 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p143

-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제각각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예기치 못한 부조리한 사고 등으로 의미의 상실에 빠지면 으레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당초 그 의미 또한 자신이 부여한 것이 아닌가! 진정한 의미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상실된 의미가 자신의 삶의 유일한 의미라는 것 역시 자신의 생각일 따름이라면, 절망에 빠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성적인 사고와 실제 현실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우리는 모두가 도통한 선승처럼 해탈한 것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 뿐이므로.

그러므로 뜻하지 않은 의미 상실을 겪게 되었을 땐, 재빨리 또 다른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그 어떤 것도 자신에게 의미가 없다고 여겨질 때에도, 그 무엇에라도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확신하게 되면 마음이 열립니다. 프랭클이 말한 것과 비슷하지만 자기의 의미를 확신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고민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확신할 때까지 계속 고민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중간하게 하지 않고 진지하게 끝까지 고민하는 것. 나는 거기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8장, 왜 죽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p153

-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너무나도 스트레스라 생각하여, 어중간한 상태에서 고민하길 그치곤 했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의 답을 찾지 못한 채 중도에 그만두었기 때문일까, 나는 다시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지난 10년과 같은 반복을 하지 않으리라! 끝까지 스스로 묻고 또 되물었다. 그 끝에서, 현재 나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았고 새로운 삶을 앞둔 상태다.

하지만 분명 앞으로도 또 시련과 고난은 여지없이 나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 내 역량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은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헤쳐나갈 뿐이다.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인 공포는 바로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의 힘'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아이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죽음에 대해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이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둘 다 '두렵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아이처럼 '모르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것이 아니라 적어도 죽음에 대해 다양하게 고민하고 마음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두렵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 인생에 대해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민을 피한다면 끝없이 두려움에 떨어야겠지요.

나는 그 경험 덕분에 과거보다 대담해졌고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활이든 대포든 얼마든지 덤벼라'라는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9장, 늙어서 최강이 되라

p162~163

- 죽음 앞에서도 대담해지려면 인생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것과 더불어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조금만 아파져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기 마련이다. 죽진 않지만,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만 받게 되면 사람은 '그저 하루라도 빨리 죽었으면, 그래서 이 고통이 멎었으면'과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따라서 될 수 있는 한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된다.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가혹한 경쟁 시스템. 점점 얇아지고 약해지는 사회 안전망, '승자'와 '패자'사이의 격심한 차이. 젊은이들이 견뎌야 할 현실은 너무나도 혹독합니다. 따라서 잔혹하고 박정한 취급을 받는 그들, 그녀들에게 세련된 정신론을 제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할 바에야 살아 남기 위한 노하우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나 실업자의 경우처럼 살아남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루바삐 자기방어책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고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적인'고민을 '인간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지요.

글을 마치고

p172~173

- '인간적인'고민을 '인간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제대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함석헌은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며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끝까지 탐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고민하는 힘을 가진 이들은 제대로 살아갈 힘이 있다.

- 2020. 01.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