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블로흐

Posted by 히키신
2017. 4. 7. 20:30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희망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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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희망/유토피아를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18C 독일 관념론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철학의 주요 화두가 되어왔다. 예술의 부정적 기능을 비판하는 입장과 달리, 예술의 긍정적 기능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예술이 인류에게 희망을 보여줌으로써, 시대의 총체적 파국에 맞설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예술의 제시하는 유토피아를 통해 인류는 무너지지 않고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 선 대표적 인물이유토피아의 철학자, 희망의 철학자로 불리는 에른스트 블로흐이다. 신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는 유대계 독일 철학자로서, 나치의 박해를 받던 암울한 상황에서도 인간이 유토피아를 희망할 수 있음을 확신에 찬 어조로 얘기하였다.

 

블로흐의 예술철학은 마르크스주의와 신학적 계기로 가득 차 있다. 둘은 일견 상반되는 듯 보이지만, ‘최후의 날, 심판을 통해 새 시대가 도래한다고 생각한 점, 그리고 두 영역 모두 궁극적 목표를 유토피아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 뿌리가 같다. 블로흐는 고난과 고통으로 넘쳐나는 현실에서 유토피아가 가능한 근거를 현실의 불완전함에서 찾았다.이는 ‘지금 이 자리에서 희망을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 이 시간과 이 공간에 희망은 이미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유토피아, 희망의 극점이 바로예술에서 구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는감각적 가상을 통해 가능하다. 블로흐의 독자적 표현에 따르면, 예술의 유토피아적가상예측된 상이다. 현재의 모습이 아니기에미래적인 시간성을 담지한 것이자. 지금 당장 실현되어 있진 않지만,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 아닌, 그렇게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잠재테이것이 예측된 상이다. 미적 가상 개념은 헤겔에 의해 진리를 현시할 수 있는 단계로 격상되었지만, 동시에 예술이 감각물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철학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단계로 격하되었던 것에 반해, 블로흐에 이르러 존재론적 최고의 심급으로 복원된 것이다.

 

한편, 예측된 상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 음악에서 증폭된다. 음악은 시, 소설, 회화 등과 달리, 시간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것은 묵시록적 시간 속에서 희망의 순간을 보여줄 수 있다. 게다가 음악은 슬픔, 기쁨 등 인간의 감정을 가장 생생히 표현할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유토피아의 환희와 그것을 둘러싼 미묘함은, 말이나 글보다 음악의 선율을 통해 보다 잘 구현됨이 당연하다. 특히 블로흐는 예측된 상이 담고 있는 미래의 모습이 낮꿈에서 예견된 것이라 주장했다. 낮꿈이란, 예술의 예비적 단계로서, 상상력이 유희하며 희망을 예견하는 꿈이다. 프로이트가 분석한 꿈이 밤꿈이자, 억눌려있던 무의식적 욕망이 되살아나 자아가 잠식된 상태라면, 블로흐의 낮꿈은 자아가 그대로 살아있으면서 상상력과 놀이하며 미래를 구현하는 꿈이다. 밤꿈이 과거지향적이라면, 낮꿈은 미래지향적이다. 때문에 낮꿈에 의해 예술과 예술의 예측된 상은 가능하다.

 

희망의 철학자, 블로흐는 친구였던 벤야민과 많은 부분 닮아있다. 들다 유대계 독일철학자로서 마르크스주의와 신학적 계기를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 한 쪽에서도 결코 환영 받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둘 다 경제결정론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문화, 예술 등 상부구조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재정립하려고 했던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좌파라기엔 너무 우파적, 인간적이었고, 우파라기엔 너무 좌파적 경향이 컸다. 특히, 블로흐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전후 동독으로, 다시 당국과의 마찰 때문에 서독으로 옮겨갔던 전력에서 학계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구체화 된 유토피아, 그것을 보여주는 예술의 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예술의 가능성으로 인해 인류가 구원되고 안락을 취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