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 밥벌이의 지겨움
-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 모든 '먹는다'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것이다. ...
예수님이 인간의 밥벌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거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먹이시느니라"라고 하셨다지만, 나는 이 말을 믿지 못한다. 하느님이 새는 맨입에 먹여주실지 몰라도 인간을 맨입에 먹여주시지는 않는다. ...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다. 그러니 이 글에는 결론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나는 이른바 3D 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방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 신년 아침에, 신호의 떨림과 신호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삶의 하찮음까지도 경건하게 느껴졌다.
신호는 남으로부터 나에게로 오는 것이고, 나로부터 남에게로 가는 것이다. 신호는 깜빡이거나 혹은 떨림으로서 해독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내가 보내는 신호들도 떨리거나 깜빡거리고, 나에게 와 닿는 신호들도 떨리거나 깜빡거린다. 그래서 인간은 나의 떨림으로 너의 떨림을 해독할 수 있다. 핸드폰을 진동수신으로 바꾸어 놓으면 신호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내 몸을 울린다. 신호는 떨리는 진저리인 것이다.
- 멀거나 큰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먼 것들은 그 풍경을 바라보는 자를 눈멀게 한다. 기어이 바라보려는 자의 시선은 아득한 저편 연안에 닿지 못하고 시선은 방향을 잃는다. 시선의 모든 방향이 열려진 공간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기어이 보려 하는 자의 갈등은 몸속에 가득 차 오른다. 본다는 것은 아마도 걸리적거림이었던 모양이다.
한 편의 문학평론과 하나의 인터뷰
남재일 : <자전거 여행> 서문인가에 "사람들아 이 남루한 수사학을 욕하지 말아다오"란 문장이 있다. 여기서 '남루한 수사학'이란 표현은 작가 안의 무인이 펜을 든 자아를 지켜보는 지형에서 나온 것 같다. 칼 대신 펜으로 긁어놓은 것은 무인의 시선에는 남루한 것이며 수사학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서 이 문장에는 문과 무가 불화하는데, 불화의 양상이 무가 문을 지배하고 문이 무에 도전하는 위계적 구조다. 나는 문장의 전압이 이 수직적 낙차에서 발전되는 게 아닌가 싶다. 쉽게 말해 문과 무의 불화는 무가 문보다, 혹은 칼이 펜보다 더 순도 높은 미학적 형식으로 자리매김되는 순간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런데 <칼의 노래>에서 칼은 미학적 형식으로서의 무의 환유적 대상물이자 동시에 잡다한 무인의 손아귀에 있는 역사적 실재이기도 하다. 김훈의 미학이 어떤 사회적 담론의 지형에 투입되면 칼은 역사적 실재로서 변신하게 된다. 이념을 둘러싼 전쟁과 군부독재를 통해 칼을 체험한 한국에서 칼의 의미가 곧바로 역사적 상처와 연결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이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훈 : 칼에 대해 조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과민함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지금의 문제는 칼이 아니다. 비틀린 펜의 폭력, 주인 없는 비열한 가면의 폭력이 더 큰 문제다. 내가 칼로서 잘라내고 싶은 게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말은 사실 절대 칼이 될 수 없다. 말이 칼이 되기 위해서는 말을 버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다시 말을 해야 한다. 이 문제는 노자도 해결 못했다. 말은 하찮은 것, 한줌밖에 안 되는 것이지만 말을 통하지 않고는 칼이 될 수 없는 것, 그게 불우함이다. 내가 예술가를 보는 것도 이 맥락이다. 더러운데 하는 것, 하면서 견디는 것, 그게 좋은 거다.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은 흥정과 타협의 산물이 아니면 안 된다.
-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생각의 나무,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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