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시(短詩) Epigram

Posted by 히키신
2017. 4. 8. 00:42 글쓰기와 관련하여

단시
Epigram

단시(短詩)는 경구(警句)·비시(碑詩)라고도 하며 그리스어의 에피그라마(epigramma, 表書)에서 유래하였다. 로마의 시인 마르티알리스를 근원으로 하여 영시(英詩)에서는 16세기의 시인 J.헤이우드에서 B.존슨을 거쳐 18세기의 명인(名人) 포프에 이른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단시 시인으로는 볼테르, 독일에서는 로가우를 들 수 있다. 현재는 산문에서 발췌한 1행으로 된 것도 단시라고 부르며 격언이나 속담보다 개성적이며 예리한 기지와 풍자가 내포되어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다양하고 풍성한 이미지에 탐닉하기보다는 자본주의와의 싸움에 투신할 때 진정으로 가치 있고 위대하고 힘찬 시가 씌어지리라고 주장한 브레히트(Brecht, Bertolt, 1898.2.10~1956.8.14)는 이러한 단시의 기법을 전략적으로 사용한 경우이다. 『스벤보로 시편』의 1부에 수록된 「독일전쟁 안내(Deutsche Kriegsfibel)」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편들은 독일 전쟁의 본질을 하층 민중들에게 폭로하기 위해 간결한 형식과 명확한 논리, 소박한 언어를 사용한 단시들이다. 유럽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격언식 단시를 브레히트는 여기서 반파시즘 투쟁의 무기로 삼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단시 형식은 또한 비합법 투쟁을 위해 재빨리 읽거나 듣고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는 기동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브레히트는 망명지에서 이 시들을 선전·선동용 전단이나 반나치 방송을 위해 썼고 만약 이 시들이 독자의 손에 들어가거나 귀에 들릴 때 금방 그것을 이해하고 깊은 인상과 깨우침을 줄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국시사에서는 70년대 민족문학운동의 전진과 함께 시의 서사적 경향이 강화되었는데, 혁명적 낙관주의나 타령조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단형 서정시, 즉 단시가 이시영과 같은 시인에게서 발견된다. 처녀시집 『만월』에 수록된 「서시」 「백로」나 「들국」 「가을에」 등에 이르기까지 단시는 이야기시에 대비되어 짧고 정제된 형식 속에 시적 긴장을 증폭시키는 기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시영의 단시는 그가 1969년 시조로 등단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 민족의 전통적 서정시 형식인 시조와의 관련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저항적 시인에게 있어서 단시가 차용되는 비근한 예를 우리는 김남주의 옥중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저 창살에 햇살이2」, 「옥좌」 같은 단시는 쉽고 일상적인 말을 쓰지만 일순간에 일상적 사고를 역전시키고 뒤집어버리는 수법이나 날카로운 대조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김남주 옥중시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에는 특히 풍자와 단상을 제6부로 모아놓고 있는데 여기 수록된 「맨주먹 맨손으로」, 「다시 와서 이제 그들은」, 「개털들」,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어느 백성의 이야기」, 「남과 북」, 「세상 참」 등의 단시들은 김남주의 시적 성취를 대표하면서 80년대 한국시의 한 중요한 성취를 이룬다. 복잡한 비유나 시각적 이미지보다는 청각적 효과에 주로 의존하는 김남주의 단시는 노래로 부르기에 적합하고 대중집회에서 낭송될 때 엄청난 감동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는 관계로 시를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에 부응하는 결과를 낳았다.(권도경)

출처
문학비평용어사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2006. 1. 30., 국학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