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유인 한대수

Posted by 히키신
2016. 12. 22. 07:24 영혼의 위로_Music

출처
: http://m.blog.naver.com/tnt62sik/120010178878
*오래전 작성된 글이라 사진은 전부 짤렸다.

마지막 작품 - 따끈따끈하이 좋지요

테헤란로에 인접한 주택가로 갔다. 거기에 한대수 씨가 지난 9월부터 묵고 있는 원룸 주택이 있다. 방 한 쪽에 부엌, 그리고 다른 한 켠에 화장실, 그리고 침대 하나가 놓여 있는, 예상보다 너무 단촐한 방이다.
그러나 방의 주인은 우리가 잘 아는 단발머리에, 반짝이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테이블도 의자도 따로 없었다. 침대에 기댄 한대수 씨를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방바닥에 빙 둘러 앉았다.

- 방바닥에 앉아서 인터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엉덩이가 아주 뜨끈뜨끈 합니다.
> 아, 따끈따끈하이 좋지요?

우리가 꺼내 놓은 녹음용 디지탈 미니디스크에 관심을 보이던 방 주인은 대뜸 "근데 저 고향이 저 경상도 지방이다...?" 며 묻는다. 나의 몇 마디 말을 듣고 그 억양을 읽은 것이다. 그렇다고, 뿐만 아니라, 부산이며 인터뷰 자리에 함께 온 친구도 고향이 부산이라고 답했다.

> 오ㅡ 부산! 오케이, 부산 넘버원!

다 알다시피(한대수 씨의 연보, 클릭) 한대수 씨는 부산에서 나서 경남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근황을 묻는 것으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 앨범이 이제 나왔으니까, 그에 따른 활동을 할 거고. 크리스마스 때는 마누라 만나러 갈 거고. EPI 레코드하고 팬 멤버들이 개인 칸서트 추진하자, 이런 운동이 지금 크게 벌어지고 있는데, 제가 요새 오른 팔이 아파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곧 좋아지겠지요.

> 미국에 언제 다시 들어갈 건지 질문을 많이들 하는데, 우리는 '외국'에 대한 의식이 너무나도 많아요. 외국 음악가의 경우에는 어디 사는가가 중요하진 않거든요. 류이치 사카모토( 류이치 사카모토(坂本龍一) ; 일본의 영화음악가. 1952년 일본 나가노태생. 공식 홈페이지주소는 http://www.sitesakamoto.com/) 키타아로, 믹 재거 이런 사람들은 뭐 어디 사는지 안 중요하죠. 또 돌아다녀야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얻고. 과거 20년동안 저는 한국에 일이 없었고, 불러 주는 사람도 없었죠. 그래서 올 이유도 없었지요. 근데 일이 있으면 한국에 있는 거죠. 일을 따라 다녀야지요.


- 아마 뵙기가 쉽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하겠죠.
> 음, 그렇죠. 우리나라의 경우도 백남준이나, 정경화 씨나... 외국에서 모든 것을 흡수하고, 살고 또 들어오고 안 했으면 그런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못 됐겠죠. 국내의 아티스트들이 국외로 나가는 게 좋아요. 일을 하는 한에서 서울에 있을 거예요.

한대수 씨는 요즘 오른쪽 팔이 불편해서 병원엘 다니고 있다. 그리고 내년 봄에 가나 아트센터에서 열리기로 계획된 사진전 구상과, 악보집 발간 준비도 한다. 저녁에는 8집 앨범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일을 안 하고 있으니까, 자꾸 술만 먹게 되고... 또, 제2의 주병진이 될까 겁나요.
그래서 이 집에는 미인 출입금지예요. 그런데, 안 되겠네! 하하하. 오늘만 빼 놓고. 하하하하!

동행한 <퍼슨웹>의 객원기자를 가리키며 크게 웃었다. 한대수 씨는 인터뷰어를 매우 편하게 만드는 인터뷰이이다. 이 방에 들어온 후 우리가 벌써 몇 번이나 폭소를 터뜨렸는지. 그 자신이 그야말로 호탕하게 '우하하하' 잘 웃기도 하지만, 그의 직설적이면서도 담백한 말투와 특유의 유머 감각은 그가 50을 넘긴 '영감'(한대수 씨 자신의 표현)이며, 살아 있는 가요사의 신화라는 사실을 때로 잊게 만들었다.

마지막 앨범

그러나 이번 앨범 재킷에서 이 유쾌·호방한 인물은 한껏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주 보기 싫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찡그리고 있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했다. 앨범 재킷에 설명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인터뷰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 왜 이 음반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까?

> 에... 저는 처음부터 음악을 하면서 '가수'라는 개념으로 활동을 시작한 거는 아니었거든요. 뒤에도 항상 그랬고. 그냥 제가 보고 느끼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너무나도 아픔이 많고 - 그것을 표현하고 발표하니까 음악이 되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글을 쓰듯이 그렇게 느낌이나 영감을 표현한 건데.
그 느낌이라는 것이, 나이가 들고 이제 8집을 내니까 역시 영감이 둔해져요. 영감이 둔해져도 그냥 할 수는 있어요. <행복의 나라로>나 <물 좀 주소> 같은 거 비슷비슷하게 만들면 앞으로 앨범 5장도 더 만들 수 있겠죠.

그렇지만 비슷한 연배의 밥 딜런, 폴 사이먼, 폴 매카트니 등이 하는 작업을 보면 영 재미도 없고 새로운 것도 없다고 한다.
> 제 자신도 리미테이션 느껴요. 이 정도 왔구나 하는. 그래서 음악 활동을 하자면 프로듀서나 젊은 밴드한테 아이디어를 주는 일을 할 수도 있겠죠. 또 구태여 가수를 해라하면 남의 노래를 부를 수도 있는데. 그런데 작곡이 젤 힘들어요.
> 작곡이 어려운데 우리나라 음반계에서 작곡가를 키우지 못했어요. 가수만 키웠죠. 아마 요즘 히트 하는 곡도 작곡가 한 5사람이 다 쓸 거예요. 저 때만 하더라도 옛날에 큰 레코드사들 - 신세계, 지구, 오아시스 이런 데서 가망성 있는 작곡가들을 보면 키우거나 같이 나누지는 않고 자기들만 다 먹어버리고. 그러니까 작곡가들이 음악 때려치우고 곰탕집 내는거요. 가락국수집 내고 명동칼국수집 내니까, 작곡가가 없지요. 이런 역사 때문에 지금도 작곡가가 모자란 거죠. 슬픈 상황이죠.
- 아직도 활동할 수 있는 힘이 넘치는 걸로 보이십니다만.
> 와, 그래요? 근데 락큰롤 문제도 있어요. 50 넘어서 활동하는 밴드가 롤링스톤즈 하나가 있는데 그거는 워낙 조직이 잘 돼 있고 화폐가 너무나 많고 하니까. 크ㅡ 화폐가 그냥 파워가 되는 거예요. 무대장치 하나에 2밀리언! 무대만, 와ㅡ. 50 넘어서 락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옛날에는 제가 혼자서 통키타 하나 들고 2시간 반도 했는데, 저번에 해보니까 밴드가 다 된 상태에서 10분만 하니까 땀이 줄줄 나고, 에너지가 죽 빠지더라꼬요.
> 또 중요한 것이 아무래도 또 락 자체가 저항 음악이니까. 저항적 정신과 분노가 있어야 되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분노가 모지래지. 하하하. 화난 것도, "아이고 그래 화났다. 누가 돈 가져갔다, 그러면 아이고 또 누가 또 가져갔는갑다", 그러죠. 젊었을 때는 (삿대질을 하며) 야, 니가 내 돈 가지갔어?
문제는 락이기도 한 것이다. 한대수 씨는 만약 처음부터 '가수'라는 개념으로 음악을 시작했다면,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행복의 나라로
* 이 페이지에서의 음악 링크는 한대수 씨공식 홈페이지(http://www.hahndaesoo.co.kr)와
윈드버드 70년대 우리 가요 감상실에서 링크한 것입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곡의 길이와 음질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으면 안 하는 게 좋다
> 할 말이 없으면 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번 앨범에서 특히 할 말을 많이 했꼬요.
- '마지막'이라는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앨범에 대한 반응은 어떤지요?
> 아, 이번 음반에 반응이 상당히 좋아요. 제 웹사이트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국내 최고다, 아니다 세계 최고다라 하고. 심지어 우주 최고라는 사람도 있고. 하하. 평론가 박준흠 씨는 저한테 밥을 사주겠대요. "와? 당신한테 내가 밥을 사주야지", 그랬더니, 이번 음반이 하도 좋아서 저한테 감사하다는 거예요.
음반사를 겨우 잡아 8집을 어렵게 내놓은 한대수 씨는 언론의 평가와 반응에 대해 민감했다. 예컨대 <문화강국>에서 했던 동영상 인터뷰가 마음에 든다는, 반면 <조선일보>의 기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 글이 너무 닝닝하더라고.
뿐만 아니라,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들도 "음반을 들어봤는지? 듣고 느낌이 어땠는지? 어떤 곡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대수 씨로부터 따갑게 질문을 들어야 했다. 동행한 <퍼슨웹>의 "미인"은 아직 음반을 들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 (크게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와, 여성들 반응을 들어봐야 되는데-.
그러나 그 "미인"은 금년 7월달에 나온 한대수 씨의 자서전을 읽었다는 걸로 '용서'를 받았다.

> 책은 어땠어요? 느낌은? 눈물나는 부분도 좀 있죠?
> 진짜 11년만에 우리나라 음악인들과 기술진들과 같이 사운드를 만들었다는 것이 가장 만족스럽죠. 음반 나오고 난 뒤에 미국에 잠시 가서 파티를 했는데, 미국 친구들도 오고 옥싸나 회사 사람들도 왔는데 반응이 너무나 좋았어요.
음악 생활을 총결산한다는 이 8집 음반은 실제로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한대수 씨 자신도 대단히 만족스럽다고 했다. 손무현 씨의 편곡과 프로듀싱이나 엔지니어 기술도 최고 수준이라 결코 뉴욕에서 작업한 것에 손색이 없는 완벽한 사운드라는 것이다. 앨범 자체는 상당히 다양한 색깔을 가진 노래들로 이루어져있다.
> 제가 여러 가지 색깔이 있었잖아요. <기억상실>은 재즈였고 <천사의 담화>는 쟌 케이쥐 같은 미니말리즘이었고, <이성의 시대>는 완전히 하드락이었고 또 누구 말대로 <멀고 먼 길>은 밥 딜런이나 포크 계열이었고. 그런데 마지막 작품이고 하니까 특별한 컨셉을 정하지 말고 그냥 곡이 있는 대로 가자는 거였죠. 그래서 <멍든맘....> 같은 곡은 댄스 포크로 가고, <그대>는 포크 분위기로 가고...
- 노래 가사들의 특징이 항상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치성이 있다는 거고, 하나는 유희적인 유머러스함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음반에서는 <멸망의 밤>이 전자에 <남자/여자>가 후자가 해당된다고 보입니다만...
> 노래 첫 대목의 여자 목소리는 내 목소립니다. 가성을 쓴 거지요. 직접 여자 목소리를 쓰려고 하니까 재미가 없더라꼬요.
그런데 상당히 심각한 문제지요, 남자 여자 문제가. 미국 같은 데는 이혼율이 54%잖아요. 사회나 인생에서 남자, 여자 관계가 기본인데 그게 잘 안 되는 사회는 결국 망하는 사회거든요. 그게 제일 중요하고 기본인데, 미국에서 보면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사건 같은 거 막 나잖아요. 그런데 결국 그 시작이 이혼문제 아니겠나. 부모가 없고, 혼자 버려져 있으니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울 수도 없꼬. 애들이 가진 게 분노밖에 없는 거잖아요.
심각한 문제를 유머러스하게 다루는 거를 워낙 저가 좋아하니까. 저가 그렇게 해 봤어요. 음악적으로는 블루즈는 블루즌데 그런 형태를 못 들어봤으니까 한번 해 본 거죠.
> 아, 그런데 그 곡이 제일 재밌습니까?
- 예, 재미로 말하면 <멍든 마음 손에 들고>도 만만치 않던데요.
> 아, 하하. 그거 희한하다. 조선일보 기자도 <남자/여자>가 제일 재밌다 했는데...

- 물론 귀에 익기는 <그대>가 그랬고요. <To Oxana>는 멜로디가 예쁜 것 같던데요.
> 어떤 의미에서는 이번 음반에는 선과 악, 강한 것과 약한 것, 분노와 아름다움, 요런 기 상당히 표현되었어요. 그기 또 저 성격이고... 완벽한 이중성 같은 거ㅡ.

- <Intro>나 <파라노이아>에서 "무섭다"고 하셨는데.
> 저는 사람들 만나면 술도 좋아하고, 농도 좋아하는데 사실, 깊숙이 저는 무서워요. 요즘 세상이.
왜냐하면 모든 것이 너무 급변하니까. 1+1=2라는 것은 과정이 있는데, 과정은 모르고 2만 안다고. 모든 인터넷을 통해서 답만 받으니까.
몇 %의 사람은 빨리 회전하는 세상에, 저, 뭡니까, 파도를 타고 배를 띄울 수 있는데, 그 나머지 대부분이 파도 밑에 휩쓸린다고. 특히 우리 세대는. 40이상 넘으면 컴퓨터 근처도 못 가요, 무서워 가지고.
> 그런데, 자꾸 듣는 것이 빌 게이츠 성공 스토리라든지, 또 테헤란로 여기서 누가 3달만에 500억 벌었다, 이런 거지. 그 사람 한 두 명이지, 나머지는 사실 소외되고 직장이 많이 바뀌고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서게 된다고요. 우리나라는 그래도 다행히 길거리 나서는 사람 몇 명 안되지만, 미국 같은 데는 심각하죠. 뉴욕 같은 데는 한 30만명이 홈레스니까. 정책도 없고.
> 제가 반말하는 것이, 아니 반문하는 것이 어떻게 미국이 세계 최고 부자나라냐? 자기 국민도... 말이지, 응. 그야말로 길거리에서 썩어가고 있어요. 계속 굶으니까 정신이상이 되고, 전국에서는 몇 백만이 되는데 그냥 두는 거예요. 앨 고어나 조지 부시가 뭐 어떻다 하는 거지, 그 사람들 신경 안 쓰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것도 그렇고 저 자신이 이제 노후의 문 앞에 들어갔잖아요. 팔도 아프기 시작하고.(웃음) 아, 농담 아니에요. 노후의 문 입구에 들어갔어요. 어쩔 수 없어요. 거기 대한 두려움도 있고. 여러 가지 급변하는 사회와 저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그런데 "이 좆같은 세상, 다 썩어가네"로 시작되는 <멸망의 밤>은 모든 방송국으로부터 방송불가판정을 받았고, <남자, 여자>도 모방송국에서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 도합 4곡이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 앨범의 한대수 씨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어야 할 이유는 많은 것 같다. 나이든 이 락커, 고국으로부터 그 업적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멀고 먼 길 - 가면 가고, 오면 오고

한대수 씨를 신화로 만든 것은 1집 <멀고 먼 길>이었다. 1집을 통해서 한대수 씨는 한국 가요사의 이정표이자 전위가 되었다. 대부분 그가 불과 20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만들었다는 1집의 곡들은 모두가 주옥편이다.
<물 좀 주소>를 내가 처음 들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85년이었다. 친구 집에 가서, 그의 형이 가지고 있던 "금지곡 모음"이라는 제목의 해적 테이프 안에 <물 좀 주소>가 들어 있었다. 김민기의 <친구>, 송창식의 <고래사냥>, 윤시내가 불렀다는 <나는 열 아홉 살이에요>와 함께. 이름도 모르던 가수의 <물 좀 주소>의 충격을 잊기 어려웠고 자연스럽게 <멀고 먼 길>의 팬이 되었다.
<멀고 먼 길>의 팬으로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다. 우선 이번 음반에서 리메이크된 <옥이의 슬픔>의 정확한 제목이 <옥의 슬픔>이냐는 것이었다. 이 간단한 물음에 대한 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 미스프린트를 많이 했어요. 제가 추방되고 없는 사이에 레코드 회사가 자기들끼리 막 만들어냈기 때문에 가사도 많이 틀렸고 제목 자체도 틀렸고. 저하고 의논하지도 못했으니까. 또ㅡ 자기들만 팔고 주머니에 넣고 그랬으니까. 30년 동안...... 그래서 신세계가 건물이 많습니다. 하하하하!! "슬픈 옥이야-♬"고 제목은 <옥의 슬픔>이 맞지요.





- <옥의 슬픔>에 있는 큰 답답함이나 분노 같은 거는 뭐였습니까?
> 우리는 못 사는 나라였는데, 저는 그 때 연세대 사택에 살았거든요. 담이 높고 수위가 지키는.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동네 친구가 없었어요. 아예 나가 논다는 개념이 없었어요. 식모나 목수, 수위 아저씨 같은 사람들하고 친하고 그랬는데, 상당히 외로웠어요. 그 고독을 <옥의 슬픔>에 담았어요.
"하얀 벽을 보는 빛 잃은 눈동자-♬" 근데 그것이 반응이 있었던 것은 그러한 상태에 있는 부유층 아이들이 많더라고요. 부유층 아이들은 그 층 나름대로 문제가 많잖아요. 바깥 세상을 어릴 때부터 접촉해야 되는데, 너무 프로텍트하고 그러니까. 그 틴에이저들이 크면 또 사회생활을 하지도 못하고.

그리고 <하루 아침>의 가사에 대해서도 물었다. 룸펜 청년의 하루를, 낙관적인듯 달관한듯, 재미있게 형상화한 이 노래는 <무한대> 앨범에서 리메이크 되었을 때는 오리지날 버전과 가사가 달라져 있다.

> 그렇죠. 백수의 일기죠. 원래는 심의가 안 나왔어요. 가사가 놈팽이 이야긴데, 유신 체제에서 우리나라에 놈팽이가 어디 있느냐는 거지요. 가사에서 "반겨주는 빈대 셋♬" 그랬는데 실제로 방에 빈대가 많았어요. 이도 많았고. 제가 셋방에 살 땐데.
그런데 빈대가 없다는 거야!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는 나란데 무슨 빈대냐는 거였죠. 또 왜 할 일 없이 "언덕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고, "나무가 사라지"느냐? 왜 할 일 없이 "치마 구경"이나 하느냐? 말이지. 빨리 나라를 재건해야 되는데.
그래서 겁이 나서 레코드회사 사장님이 그 노랠 빼버렸어요. 그런데 노래가 남아 있기는 해서 나중에 다시 넣었지요. 89년에 만들 때는 빈대가 개미로 변했지요. 89년에는 빈대가 없으니까.



<하루 아침>

- 저는 그 빈대들이 한대수 씨 당시 친구분들을 말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친구 자취방에서 뒹구는 친구들 말이죠.
> 아, 그래요. 그렇게 상상할 수도 있겠네. 하하하.
또 가사에서 백수 청년이 가는 데가 처음에는 명동이었다가 나중에 광복동으로 바뀌었는데.
> 예. 명동에 제가 살았지요. 그런데 "명-동에 들어가♬" 그런데 사실은 그게 세 음절이 들어가야 되거든요. 다다다, 명동이 안 맞지요. 그래서 명륜동으로 할라다가 명륜동은 유명하지도 않고. 두 번째 할 때는 부산도 구박 많이 받는 나라니까. 광복동으로 했지요.

- 강산에 씨가 그 곡을 리메이크 했던데 어떠셨어요?
> 아주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하하하.(일동 폭소) 그런데 그거는 강산에 씨 탓이 아니고, 편곡을 좀 잘못 했어요. 강산에 씨는 그래도 의식 있는 음악가인데.


나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마스터 테이프가 소각 당한 2집 <고무신>은 <후쿠오카 라이브>(1997)로 완전히 복각이 되었을 때야 들었다. 1989년에 복각되었다는 음반은 청계천이나 국제시장에서나 찾기 어려웠다. 의외였던 것은 1집의 분노나 슬픔에 비해 <고무신>의 음악은 훨씬 부드럽고 낙관적인 거 같았다는 점이었다.


- 제 느낌이 맞습니까.
> 맞아요. 2집을 만들었을 때는, 물론 작곡은 그 전에 해 놓은 거도 있지만. 결혼했겠다, 군대 끝났겠다. 직장 있겠다. 상도 탔겠다. 낙관적인 게 분명 있긴 있지요.
그런데 비교적 제 음반의 대부분은 고통의 흐름이 많아요. 이유 중의 하나는,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작곡가가 기쁘고 기분 좋은 때는 곡이 안 나오거든요. 밥 잘 먹고 즐겁게 있는데 무슨 작곡이 나옵니까. 고통스러워야 음악이 되고, 작가들도 마찬가지겠죠. 고통에서 모든 것이 나와요. 창작은. 슬픈 강이 항상 흐릅니다. 이번 것도 그렇고.




- 이번 음반 타이틀은 <영원한 슬픔 Eternal Sorrow>이지요?
> 아, 영원한 고독! 우리가 가는 길이 <영원한 고독>인 거 같아요. 인생의 나머지는 모르지요. 잠시 살다 가는 건데 시작과 끝은 모르니까. 답은 없고. 어느 종교도 그 답을 줄 수도 없고. 그건 틀림없어요. 저는 신학자의 손자니까,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제목 붙이고 싶더라고요.



미국행은 혹 도피가 아니었나?

- 음반 2개를 내고 미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한대수'라는 가수를 신비화하고 전설처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가요사 같은 데도 그렇게 써 있기도 한데, 꼭 6, 70년대적인 정치적 저항이나 히피즘과 연결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는데, 본인은 어떤지요..
> 물론,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워하고 그러겠죠. 저는 어릴 때부터 처음부터 음악적인 배경에서 자랐고, 음악의 표현이라는 게 제일 만족스러웠죠. 근데 떠남으로써 저보고 '신화'라 그러는데. 옛날에 페이퍼에서 "신화가 돌아왔다" 그랬는데 너무 그러지 말라 그랬지, 제발... 그런 걸 제가 고의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대수 씨는 미국으로 떠나던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그 때는 직장도 좋았어요. 어린 나이에 코리아 헤럴드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기자는 굉장히 파워가 있었어요. 못 가는 데도 없고 화폐도 봉급말고도 많이 들어오고. 옆으로도 들어오고 밑으로도 들어오고. 처음 받고 나서 깜짝 놀랬어요. 한국화약 사장하고 인터뷰를 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끝나고 나서 주는데 돈 봉투가 이렇더라고요. 그래서 '아이고 이거 안 됩니다' 그랬더니 그 사장이 '네 이눔 안 받아 갈 거야'하면서 고함을 지르더라고요. 그래서 돌아와서 편집국장한테 말하니까 '아, 모른 척하고 넣어둬' 그러더라고요.
직장 생활도 괜찮았죠, 또 4, 5년 연애한 이쁜 여자와 결혼했죠. 모든 것이 상당히 화평한 상태였어요. 음악도 앨범이 2개 나왔고 가요제에서 작곡상도 받고 국전에서 상도 받았고. 말하자면 저는 젊은 청년으로서 희망이 있는 상태였어요.
- 그런데 왜 떠나기로 결심했던 겁니까?
> 그런데 음악할 수 없다는 것이 굉장히 디프레스하게 만들더라고. 그것이 가장 만족감을 주는 건데. 그거 없이 단순히 출퇴근하고 돈 받고, 집에 오면 마누라 안아 주고, 호떡 같이 먹고. 그게 반복되는 인생이 진짜 의미가 없더라고. 그래서 가기로 했죠.

- 어떤 사람들은 그 힘들던 70년대의 상황에서, 음악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을 회피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만?
> 제가 도망간 거요? 아,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아요. 근데 저는 대한민국 청년으로서 할 임무는 다 했어요. 공무원까지 했고, 군대까지 다 했고. 제가 디자인포장센터 초창기 멤버예요.
오히려 제가 애국애족한 거죠. 하하하. 나라가 너무 좁으니까 좀 비껴 준 거죠. 어떠한 의미에서 그것도 사실이에요. 만약 이민 간 인구들이 다 들어오면 살 데가 없다고요.
저는 그런 말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안 써요. 말 가지고 말을 만드는 거니까. 그리고 오히려 더 사람들이 나가야죠. 더 일찍 나가서 모든 것을 흡수하고 돌아와야죠. 만약에 제가 그렇게 뉴욕 생활을 안 했다면 이런 음악을 지을 수가 없어요. 불가능합니다. 뉴욕은 전 세계인들이 와서 영감을 얻는 데 아닙니까.
우리가 나라가 워낙 작으니까 그런데 국경에 대한 관념을 좀 없애야되요. 일본 같이 고등학교 때부터 로마에 보내야 되요. 화폐 파워가 안 되니까 할 수 없지만도. 그런 사람들이 들어오면 또 좋은 거를 흡수하고 좋은 거로 고치고 그래야죠.

- 신중현이나 김민기와 비교를 많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 전혀 음악적으로는 관계가 없죠. 우리 셋 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나훈아 씨나 남진 씨 같은 음악이 아니라, 좀더 젊은이들이 뭔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음악을 했다는 면에서는. 그러나 스타일에서는 다 달라요. 신중현 씨는 신중현 씨대로 굉장한 아름다움이 있고, 김민기 씨도 그렇고. 음악적으로는 전혀 이야기가 안 되지만, 다 좋아해요. 근데 그 분들을 두 분 다 좋아해요

"음악만큼 완벽하고 강한 건 없어요"
- 경상도 사투리와 미국식 발음이 절묘하게 어울려서 특이한 창법을 만들어낸다는 평가가 많은데, 이런 문제를 스스로 의식을 많이 하시는지요? 예를 들어, <고무신>의 "대수야! 와 밥 무라-"는 가사 같은 거는 제가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재미있게 들리는데.
> 아, 그거는ㅡ. 김종서 씨 알지요? 그 사람이 <무한대>에 참여했었는데. 자기가 그걸 집어 넣겠데, "대수야, 와 밥 무라"를. 그래서 '야 너 꼭 해야 되나', 그랬는데 하고 나니까 재미있데요.
그게 어떻게 보면 첫 랩중의 하나이기도 하죠. 그라고 사투리를 노래에서 그대로 쓴 예는 없거든. 옛날에는 나훈아 씨나 남진 씨도 얼마나 서울말을 연습하느라 노력을 했었는데. 발음이 서울 발음이 안 되면 방송에 못 나갔습니다.
> 저가 제일 의식하는 것은, 소리의 조환데, 발음과 음이 어떤 소리로 던져졌을 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자극이나 깨우침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건데. 사투리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렇게 발음함으로써 그 음이 이야기가 되더라고. 음악 자체가.
서울말로 "바람아 불어라" "명태잡이 찾아온다♬" 이렇게 하면 노래가 안 되지. 사투리가 막 나오니까 음이 되더라고요. 좀 거칠면서 흙 냄새도 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고. 지금은 뭐 경상도 사투리도 좋고 전라도 사투리도 좋죠. 우리가 지금도 속 좁지만, 그 때는 너무 했어요.
- 근데 <고무신>에서 그게 왜 명태잡이냐고, 명태는 남해에서는 잘 안 잡히고, 동해 쪽으로 올라가야 잡히는데. 그래서 혹 고향이 사실 울산 쪽이 아니냐는 질문을 한 사람이 있던데요. 부산 쪽이면, 멸치 잡이여야 되는데.
> 으하하하하. 상당히 공부를 하셨네요. 아, 예, 예. 그런 지리적인 거는 생각 안 하고 발음이 좋아서 한 겁니다. 멸치는 발음이 안 되지. 하하하하.
- 억양 문제와 관련해서, 여쭈는 건데, 가족이나 태어난 곳 또는 한국이라든지에 대한 뿌리 의식이 음악 활동이나 다른 활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까?
> 뿌리가 상당히 중요하죠. 러시아 사람들이 그런 게 많다는데. 마더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같은 작곡가도 그랬지요. 저도 우리나라에 대해서- 그 아픔이라든지 문제점이 저한테 큰 주제가 되는 거죠. 그라고 또 경상도니까 부산이 상당한 뿌리가 되는 거죠. 경남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이나.

- 김영삼이 경남고를 나왔지요?
> 하하, 또 김영삼 씨라 하니까 부끄럽네. 하하하. 하도 문제를 많이 일으켜 가지고.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하여간 인물은 인물이죠.
- 경상도 남자들이 가부장적 의식이나 남녀 차별의식이 강하고, 공동체에 대한 가치부여하는 경향이 큰데ㅡ.
> 아, 저도 그런 경향이 좀 있는 같기는 해요. 남자 구찌, 여자 구찌 다르다고 생각하고. 차별하는 거는 아니지만, 남녀의 역할은 다르지요. 역할에 혼란이 와서 더 문제지요. 60년대 이후부터 페미니스트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여자들이 더 고독해지고 힘들어진 거 아닌가? 뉴욕의 케이스를 보면 이혼녀들은 나이 4, 50되면 고양이 개하고밖에 살 수 없어요. 남자는 40대 되어도 걸프렌드가 있을 수 있지요. 같이 일하고 와 가지고 남자가 밥 맛이 왜 이래? 하면 말이 안 되죠. 야, 나도 힘들어-. 그렇게 되니까 싸움이 나고.
- 자서전이나 홈페이지에 나온 부인 옥산나와의 관계를 보면, 옥산나는 직장에 나가고 한대수 씨는 설겆이도 하고 요리도 하는데.
> 그래서 남자 여자가 분명히 있다는 거죠. 제가 여자가 된 거죠. 하하하하. 옥싸나는 남자가 되고. 그렇게 하면 되요, 또. 둘 다 같이 밖에 나가고 그라믄 문제가 된다는 거지. 저같이 여자일을 하는 남자가 많아요. 요새는 똑똑한 여자가 많으니까. 미국에서도 그런 게 많아요. 남자가 진공청소기하고 애 보고...
우리 옥싸나가 좀 남자 같은 면이 있어요. 바깥 일도 잘 하고 털파리 ( 털파리 : '덤벙대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부산 사투리 ) 고. 그릇도 다 깨뿌고. 요리해라 하면, 다섯 시간 되도 사라다 몇 개밖에 안 나오고. 역할을 교차시키는 건 좋은 거 같아요.
이야기가 번져 가며 한대수 씨는 미국의 가족 관계와 제도를 비판했다. 이야기가 자연스레 정치적인 데로 흘렀다.

미국을 따라가지 말자
> 저로서는 미국의 시스템이 전혀 옳다고 생각 안 해요. 전혀. 저가 미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데. 만약 통일국가를 이뤄서 나가자면 모델 케이스는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 요런 데를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너무 미국 밑에 있어 놓니까. 아- 여태까지 미국을 따라왔는데 미국의 시스템을 안 따라 갔으면 좋겠어요. 불란서나 독일 시스템도 좀 공부하고.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뉴욕타임스에 난 건데, 당신은 통일을 이뤘을 때 어떤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냐 하니까 김정일 위원장이 난 스웨덴이 좋다, 이랬다고. 그 사람도 유럽 문화에 대해서 좀 아는 거죠. 유럽이 좀 인간적이고.
미국은 완전히 부산말로 돌놈이야. 그 시스템이. 이번 선거에서도 보면 알지만, 돌놈적인 게 있어요. 남자 여자 관계도 진짜 말도 안되고.

- 요새 한국 사회는 어떴습니까?
> 우리는 이제 제일 큰 숙제가 빨리 통일을 해야지. 인구 분산도 해야 되고.
강남이 꼬마방이 월 130만원이라는 게 말이 안되거든. 이게 말이 됩니까? 만하탄에서 1300불이면 최고급 동네인데. 뉴욕에서 15th 애브뉴 53가 같으면 1300쯤 할 건데. 강남이 만하탄입니까. 모든 게 비정상적인 면이 있죠. 통일이 되면 북쪽으로 생산품이 가고, 또 철로로 러시아 중국 몽고로 수출품이 가면 경제도 좋아질 거고. 그게 가장 큰 숙제일 거 같네요.
근데 통일이 정치적으로는 안 되겠죠. 한 세대는 지나야 될 건데. 문화 경제만 되면 그것도 통일이 된 거죠. 미국처럼 합중국하면 되죠.
> 제가 가서 노래 한마디 부르고, 그 쪽 사람도 와서 노래 부르고. 북쪽 냉면집 체인이 남한에 생기고, 남한 공장이 북한에 생기고.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하고. 그라믄 통일 아닙니까?
그의 달변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 정치적인 홈런 필요 없다고, 히트만 하면 되죠. 왜냐하면 김정일 위원장이 그 자리 절대 안 놔 줄거고, 우리는 5년만에 한번 뽑는 프리 시스템이고. 정치적으로는 아마 양보를 안 할 거죠. 그런 걸 바래서도 안 되는 거죠. 제일 중요한 거는 남북한 사이에 결혼이 이뤄지면, 그게 통일 아닙니까? 그 다음 세대는 통일된 세대가 되는 거죠.


음악만큼 완벽하고 강한 건 없다.


한대수 씨는 알려진 대로 오랜 경력을 가진 사진가이기도 하다. 다른 앨범 때처럼 8집의 앨범 자킷의 속지들도 직접 찍은 사진들로 채웠다. 그리고 내년에 30년만에 처음으로 사진전이 준비되고 있다.
- 사진가나 시인으로서 자신을 평가하면 어떻습니까?
> 뭐 괜찮은 거 같애요. 저는 항상 색다른 거나 새로운 구멍이 없는지 찾으니까, 시나 사진을 하는 건데. 그러나 저는 결국 음악가입니다. 사진이나 시는 혼자서 영감 하나로 끝나니까. 스튜디오 상업 사진은 별로 재미가 없고. 스튜디오 작업이라 하면 사진은 회화를 못 따라 가지요. 밴 고호 이상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진이 회화와 다른 것을 줄 수 있는 거는 사회 현황의 그 순간을 그대로 나타내는 거죠. 누가 쓰러졌는데 그 쓰러지는 장면을 그대로 찍는 거지. 저는 포토저널리즘 - 그것에 제일 만족해요. 옛날에 여자도 빨가벗겨 찍어보고 맥주병도 찍어봤지만 별 의미가 없더라고요.
한국이 지금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면 그 사회 현황이 어떤가? 그 사람들 표정이 어떤가? 이런 거는 사진만이 줄 수 있는 특권이더라고요. 그 부분은 상당히 재미있게 생각합니다.
- 그런 감각은 사진 기자 생활의 영향도 있는 거 같습니다...
> 예... 사진은 순간 그대로예요. 사진이 상당히 발전해왔고 여러 갈래로 번져갔지만, 다시 오리지널로 돌아가야 되는 게 브레쏭 ( Henri Cartier-Bresson. 1908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출생한 사진작가. 인위적인 연출이나 계획없는 사진연출로 유명하다고 함 ) 이나 유진 스미스 ( Eugene Smith 1918-1978. Life誌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금세기의 포토저널리스트 ), 덩컨 ( David Douglas Duncan, 1916년 미국태생. Life誌 기자. 한국전에도 기자로 종군) - 그 사람들은 샷 하나로만 갔거든.
- 저희가 보기에는 정말 음악 하실 에너지가 넘치시는 거 같은데요?
> 와하하하하, 그렇습니까. 음악은 정말 말도 못하게 힘들어요! 그래서 병이 난 건지도 모르겠는데, 음악은 완전히 빨가벗는 거고 또 제일 중요한 것이 완전히 말도 못하는 화폐거든요. 그래서 리스판스빌리티, 책임이 굉장히 많아요. 또 음악은 10, 20명이나 되는 엔지니어나 다른 음악가들, 음반사 사람들과도 관계해야 하죠.
사진은 어떤 건가 하면 - 자기 혼자 찍고, 자기 페이스대로 암실에서 작업하고. 갤러리하고 계약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하고. 그래서 프레셔가 훨씬 덜하지요.
음악은 또 무대에 서는 거니까 아무래도 옷도 입어야 되고 포즈도 취해야 되고. 그런데 사진작가는 세수를 안 해도 되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어도 되고. 그런 게 참 편한데.
> 그렇지만, 자극도를 생각하자면- 작품을 발표했을 때 관객들에게 주는 느낌이나 영감이나 생각하면 음악이 최고지요. 영원하지요. 아직도 베토벤이나 비틀즈 같은 경우는 빅히트 아닙니까.
하여간 음악 같이 강한 거 없는 거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건데. 그림이나 조각보다도.
SHARP과 김현정
- 젊은 세대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한대수 씨를 잘 모르는데 10대나 20대들이 듣는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10대나 20대들이 하는 댄스곡들이 상당히 필요하지요. 어느 세대나 팝이 있다고. 우리 때도 팝이 있었어요. 플래터스( The Platters : 1950년대 중반의 대표적인 보컬그룹. 1955년 발표됐던 그들의 히트곡 "The Great Pretender"는 퀸에 의해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 나 뭐 그런 거. 비틀스도 나왔지만 계속 공존했지요. 팝이 항상 있어야 되고 그것이 하나의 패션인데. 물론 오래 못 가지요. 그 당시에 기분이니까.
대부분의 저 세대 음악가들이 댄스곡이 우짜고 저짜고 그라는데 나는 비난하는 거 하나도 없어요. 그라고 저도 자주 봐요, 즐겁게. 너무 이쁘니까-. 그 중에 좋은 곡들이 많더라고. 특히 샾 같은 애들은 곡도 좋고 둘 다 이쁘더라고. 누구하고 데이트를 해야 될지를 모르겠더라고. 김현정은 마 너무 늘씬하고.
한대수 씨가 기거하는 방 화장실 문에 나이트 가운을 입은 김현정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었다.
>저도 좋아해요, 댄스곡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댄스곡도 있고 예를 들어서 김도균 씨나, 손무현, 한상원 씨가 할 수 있는 무대도 있고 그기 없다는 게 서글픈 거죠. 그래도 그건 할 수 없어요. 꼭 있어야 돼요, 항상 있는 거고. 미국도 마찬가지죠. 마돈나, 크리스티나 아귈레라인가 누군가 뭐 그런 사람도 있고. 미국은 약간 나은 것이 그래하면서 그 옆에서 비비킹 ( B.B King ; 1925년 미국 미시시피 태생. 금세기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중 하나. 1999년에는 생애 9번째로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공식 홈페이지- http://www.worldblues.com/bbking ) 이나 에릭 클랩튼이 기타 치고 있고 같이 빌보드 차트를 나눌 수도 있고. 그것이 우리가 아쉬운 거죠.
티비 나올 때마다 봐요. 열다섯, 열 일곱 되는 애들이 이야기하고 또 패션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굉장히 크리에이티브 하다고. 옷이나 댄스 무브도. 잘하는 팀은 참 재밌게 예술적으로 참 잘하더라고. 저 팬이에요.
- 그 중에서도 특히 샤프?
> 샤프하고 김현정. 김현정이 남버원이고.

- 얼마 전에 김현정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던데요?^^
> 아, 그랬구나. 야- 세상에. 병문안 갔어야 되는데.

- 의미 있는 음악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어려운 조건에서 하고 있고, 어찌 보면 신념은 있지만 생활이 어려워서 많이 앓기도 하는데, 그런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 예- 음악을 하는 목적이 뭔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죠. 무엇 때문에 음악을 하느냐? 첫째, 자신이 음악적 재능이 있는지 물어보고 없는 사람은 안 해야지. 음악이라는 건 정말 알 수 없는 거니까. 음악적인 재능이 있고 보여줄 게 있다, 판단했으면 그 다음에 또 목적이 뭐냐? 대부분 유명해지고 싶다, 돈 벌고 싶다, 그런 건데.
그라믄 유명해지고 돈 벌고 난 뒤에는 뭐 하고 싶냐? 그거까지 물어봐야 된다고! 유명해지고 돈 버는 거까지는 쉬운데 제일 마지막에 있어야 될 리스펙트, 존경 - 다들 못 가지거든요. 마이클 잭슨도 두 가지는 있지만 마지막 한 가지는 없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진지하게 음악을 해야 되요. 자기 생활이 음악이어야 되고.
구태여 인기를 얻기 위해서 조작하고 꾸며대는 것은 1, 2년을 못가고 다 끝나거든요. 짐 모리슨이나, 지미 헨드릭스, 존 레논도 자기 생활이 음악이었기 때문에 신화가 되었고, 윤이상 씨 - 우리가 위대한 음악가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분도, 진지한 음악가였고 그런 분은 역사에 남고 존경도 받죠. 마이클 잭슨은 돈은 즐기고 있지만 절대 존경은 못 받거든요. 그래서 자기 목적이 뭐냐를 먼저 물어봐야 될 거 같애요.

- 본인은 젊은 시절에 어땠습니까?
> 아, 저 같은 경우는 음악을 시작한 거는 연애를 많이 하기 위해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고 반해가지고. 하하하하. 그러다가 음악이 이렇게 흘러온 거죠.
생활이 어려운 젊은 음악가들이 공사판에서 일하고 식당에서 일하고 츄럭도 몬다는데, 으레 그렇게 해야죠. 저도 뉴욕에서 낮에는 사진 공장 다니고 밤에 연습하고 코피 터지고 그라면서 무대에 섰어요. 브루스 스피링스틴은 노동자였고 엘비스 프레슬리도 츄럭 몰았지요.
머라이어 캐리는 웨이츄리스 일하다가 소니 회장하고 마 찐빵이 된 거지. 소니 회장이 식당에 온 거를 보고 가가지고는 그 무릎에 앉아버린 거야. 그 늘씬한 여자가 무릎에 앉으니까 소니 회장이 그냥 간 거지. '이렇게 싱싱한 여자가 무릎에 앉으니까 내 몸의 이상한 부분이 이상해진다', '머라이어야! 니 너무 좋다, 우리 집에 그냥 오라' 그래 시작되 가지고 소니 회장이 500만불로 그냥 밀은 거 아니예요. 한 3년 동안 500만불로 밀면 되죠. 물론 목소리는 있고 몸매 좋고.
운전하고 그릇 닦고 그래 해야 되요. 그렇게 해도 하겠다는 사람은 될 것이고. 그래하다가 너무 지치는 사람은 목적이 없어지는 거죠. 다들 그랬어요, 고생 고생 끝에.



100번 틀어주면 된다...
열변을 토한 한대수 씨는 덧붙여 우리 뮤지션들이 가진 가장 큰 악조건은 우리나라가 "화폐"가 별로 없고 또 그래서 제대로 된 (배급)망이 없다는 거라 했다. 특히 그에게 '망'은 대단한 관심사이면서 '한 맺힌(?)' 부분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잘못된, 또는 낙후한 '망' 체계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70년대에 나온 음반으로는 십수년간 거의 인세를 받아보질 못했다고 했으니까.
> 화폐가 없으께는 뭐냐 계속 서태지, 베이비 복스 가야지 뭐. 다른 음악 하는 사람들한테는 돈이 안 돌아가니까. 저도 이번에 EPI 뮤직 아니었으면 음반이 안 나왔어요.
그런데 워너브로더스 같이 세계망이 있다면 그것이 유리한 점이에요. 마돈나처럼 오늘 음반이 나왔으면 모레는 시드니 가 있고, 다음 주에는 도꾜, 서울에 가 있어야지요. 그런데 할려면은 우리가 그 쪽에 들어가서 한다는 거는 힘들고 우리가 여기서 만들어야 되요. 삼성전자가 어느 정도 했듯이, 화폐의 능력과 기발난 아이디어를 가진 음반사가 나와야 되요. 그럴러면 중국과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동양에서라도. 그게 상당히 중요해요.
> 왜냐하면 음악이라는 것이 이상해서, 물론 나쁜 음악은 아무리 해도 안 되지만 어느 정도 괜찮은 곡들은 자꾸 틀어주면은, 100번 들려주면 좋아하게 되요.
조성모, 그 형편없는 발라드 아닙니까. 너무나도 형편 없지. 그렇지만 작곡이 아주 졸자는 아니거든, 중간은 되거든. 그런데 그걸 라디오나 길거리에서 얼마나 틀어댑니까? 그래서 100번 들으니까 좋아지는 거야. 마찬가지로 마돈나나 브루스 스프링스틴 음악이 훌륭해서보다도, 그렇게 나쁜 곡도 아니고 훌륭한 것도 아닌데, 100번 들으니까 좋아지더라고. 예스터데이 같은 명작은 아니지만, 세계망을 가지고 미국애들이 자꾸 틀어주잖아요.
> <멸망의 밤>이라든지, <그대>라든지도 한 100번 틀어주면 된다고. 꼭 미국애들이 음악을 잘 하는 것이 아니고, 프리젠테이션이 좋고 망이 있으니까.
아직까지 역사적으로 동양에서 세계적인 클라식 아티스트는 나왔는데, 50년 락큰롤 역사에서 한 명도 없어. 우리가 인구가 얼마나 되고, 재능이 얼마나 좋은데 한 명도 없다는 거는 그건 말이 안 되거든.


멸망의 밤
그대

한대수 씨는 클래식은 완벽한 아티스트라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했다. 클래식 음악가들이 작곡보다는 연주 기량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건데, 말러 이후에 위대한 작곡가는 없다고 했다. 특유의 화법으로 번스타인을 비웃기도 한 그는 상대적으로 클래식은 죽은 음악이라 단언했다.
> 그렇지만 락캔롤은 완벽한 아티스트가 되어야 해요. 데이빗 보위를 보세요. 옷, 걷는 스타일, 작곡, 가사, 프리젠테이션- 완벽한 아트예요. 지가 다 만들어내거든. 그래서 락이 굉장히 힘들어요.
락 애티튜드가 동양 애티튜드하고 다르거든.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는데. 콜롬부스를 이사벨 여왕이 보낸 것처럼 서양 애티튜드는 죽을 수도 있지만 "해라, 해보라"는 건데, 우리는 "죽으니까 안 된다". 하하. 그러니까 우리는 락하고 반대되는 태도지. 우리는 부모님들때부터 '안된다'는 교육만 받았으니까.

> 무대에 나와서 막 발광하고 그래야 되는데. 이기 팝*이라고 알죠? 그 사람 초기에 대단했는데. 빤스를 다 벗고 그라는데, 한번 공연 가서 봤는데 민망해서 못 보겠더라고. 바이올린 활을 사타구니에 끼우고 아, 웃기더라고. 유리를 깨 가지고 그기다가 몸을 비비고 피를 묻히고. 그기 락이라고. 그래서 사실 락적인 애티튜드하고 우리 거하고는 정신이 사실 다르지. 일본도 마찬가지고. 약간만 스쳐도 '아, 스미마셍' 그러잖아. 죽을 죄를 지었대.

* Iggy Pop: 1947년 4월 미시건 태생.
전위적인 음악과 기행으로 이름이 높다.1999년 9월 발매된 그의 최신앨범의 제목 "Avenue B"는 이기 팝이 오랫동안 거주했었던 뉴욕의 한 지역이라고 한다. 어쩌면 한대수씨와 마주쳤을지도 모르고...
공식사이트 : http://www.virginrecords.com/iggy_pop


그런데 락은 "야, 내 잘 났어, 너 뭐야."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게 안되는 이유 중에 하나요. 이제 동양에서도 상당히 괴짜들이 많이 나오죠. 특히 파격적인 게 노랑머리 물들이는 거. 나는 뉴욕에서 동양여자가 노랑물 들인 거 보고 깜짝 놀랬어. 일본에서 5년전부터 나왔다는데. 특히 파격적인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나오죠. 요코 오노 같은 여자.
삼겹살, 맥주 - "화폐가 사람 지기지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대수 씨의 방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집 근처의 식당에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박사 숯불갈비>였고, 삼겹살과 맥주를 시켰다. 한대수 씨의 오른쪽 팔은 꽤 많이 불편해서, 그는 왼손에 포크를 잡고 삼겹살을 찍어 먹었다.
팔 나으면 쇠주를 마셔야지. 그래도 많이 좋아진 거 같애요.
- 술은?
술은 거진 매일 먹는데, 요즘 몸이 그러니까 잘 안 먹죠.
- 술, 담배를 끊을 생각은...
전혀ㅡ! 그렇게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굽고, 따르고, 먹느라고 이야기는 잇고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 혹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야죠. 조성모나 지오디한테 가서 빌려야죠. 돈이 없으니까. 조성모가 한 1억정도는 빌려주겠죠. 하하하. 그라믄 만들어야죠. 오성욱 감독이 관심이 있다고 그러더라고. 뮤직비디오를 하면 색다른 것이, 10대만 나오다가, 할배가 나와서 기타를 치면서 한다, 거기서부터 보낼 거 아냐? 근데 할배가 하는데 재미있게 한다... 그라면 진짜 문 잠가야겠다. 또 10대들이 찾아올 거 아냐, 그러면 골치 아프죠...... 제가 원래 영상 쪽에 관심이 많으니까.
- 친구는...?
비교적 친한 친구가 많진 않아요. 우리 마누라하고 제일 친하고. 저가 친구나 우정관계가 문제가 많아요. 아는 사람은 많지만 아주 가까운 사람은 몇 명 안돼요.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세대 중에서 친한 가수들의 이름을 세대별로 죽 댔다. 양희은, 서유석, 김추자, 윤형주....... 황신혜 밴드, 어어부, 크래쉬, 강산에 등등.)
- 컴퓨터? 인터넷?
복잡한 거는 못하고, 문 열고 내 팬레터 정도는 처리한다.
- 정태춘 씨 인터뷰 기사가 퍼슨웹에 실렸었는데...
아, 그래요. 나, 정태춘 씨 덕을 많이 봤어. 왜냐하면 그 분 아니면 이번에 <멸망의 밤>이 안 나올 뻔했잖아. 심의 관계를 그 사람이 노력한 거 아냐. 무슨 말인 줄 알겠죠? 그런 노력 아니면 이런 음반이 시장에도 못 나온다고. 저번에 포크 페스티발에서 만나서 재밌는 대화 나눴고...... 사람 참 좋더라꼬.
- 한국에서 생활하기는?
상당히 편해요. 꼭 같아요, 뉴욕하고. 물질적으로 모자란 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오히려 여기가 좀더 고급이에요. 10년 전에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물질적으로 차이가 있더라고, 음식이라든지. 전혀 뉴욕이나 똑같다. 여자들이나 남자들 옷 입는 패션이 똑같고. 여기 사람이나 저기 사람이나 똑같더라고.
장기체류해서 오히려 재미가 있어요. 여기 사는 데-. 한국의 좋은 점은 정이에요. 우리가 정이 많은 나라고. 그라고 이렇게 사람들이 뭉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뉴욕보다는 좀더 자기 시간을 우정을 위해서 쓰는 게 많지. 절대 필요할 때만 모이고, 생활이 냉정하거든. 필요 안 하면 이거거든. 정이 많은 게 나쁜 점이 있다면 간섭을 할라 하는 게 있거든.
뉴욕의 나쁜 점은, 너무 자기 중심이라서 모든 것이 me me me야! 영 재미가 없지. 좋은 점이 있다면 간섭 안 하니까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이 없는 거야.
- 부인이 보고 싶진 않으...?
허허. 보고 싶지. 그런데 일은 희생 없이 되는 게 없어. 항상 우리가 현실하고 타협하고 살아야 잖아요. 또 제 팬 베이스가 여기고, 또 현실적으로 우리 둘이가 같이 움직일 수 있는 거도 아니고. 그래서 저라도 혼자 움직이는 거고.
- <하룻밤>?
"하룻밤 지나서∼♬" 그거를 대기 좋아하더라고 사람들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그 노래가 나오는데, 나는 이해가 안 가데? 와 그 노래를 좋아하는고?
요즘 들으면은 촌스럽지 않아요? 그 노래는 특히 전혀 모자란 상태에서 녹음했는데, 기타리스트도 없이 저 혼자 기타 치고 노래하고 다 했어요......
- 살면서 혹 무책임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아니, 한 번도 없어.

- 책임감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는지?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건 제일 중요한 거라 생각해요.
-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인간에 대한 애정은 깊거나 혐오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계 맺음을 즐기지 않는 것...?
즐기는데, 저가 마음을 틀어놓을 사람이 몇 명 안돼요. 그거하고 무책임하고는 아무 관계없는 거지.
- 한국사회의 인간관계가 관심과 정은 많지만 간섭하는 경향이 있다함은...
한국 사회가 아니라 인간 사회... 자체가 친구가 있어 봤자 둘 셋 아닌가? 그건 한국 사회하고 아무 관계없는 거지. 저 개인적으로 친구가 없다는 거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둘 셋밖에 없고, 둘 중에 하나는 마누라고. 하하하.
- 간섭받기 싫은 만큼 간섭하기도 싫어하는 거...
아니, 그게 아니야ㅡ 그것도 아니고, 전혀.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부분이 없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깊숙이 들어가면 내가 지루해지는 거야.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면,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대개 사랑이건, 우정이건, 대인관계를 힘들어하지 않은가?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책임질 일도 때로 회피하기도... 쉽게 잘 안되니까.
우정 관계는 책임과는 관계 없이,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돼. 일은 책임을 져야 돼. 우정 관계는 진실한 친구다, 그러면, 반시간을 만났다 그라믄 서로 반시간이 안 아깝고 그래야 되는, 서로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내한테는 별로 없다 그 말이야.
-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많이 못 만났다... 그런 부분에서 당신은 독특한 거 ?
거진 없지. 그런데 억지로 만들 수는 없고.
- 그런 면에서 부인은 잘 통하신다...?
그것이 나는 정말 복이기도 하지만ㅡ. 상당히 노력을 한 거기도 하지.
근데 자기도 진심으로 생각해 봐. 친구, 친구 하지만 그야말로 방어태세를 갖출 필요 없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열 명, 스물 명이 아니라고.
모든 사람의 답변이 '둘, 셋'일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정말 진실한 친구 몇 명 되느냐? 말이지, 물어봐, 둘 셋이면 상당한 거지. (식당 아줌마를 향해) 어언니, 우리 국은 안 주나?

음반사들로부터 음반 내는 걸 거절 당했을 때?
기분이, 야 완전히 야, 현실이 이렇구나 하고 느꼈지. 완전 기분이 희한한 거지.
완전히 그냥 '멸망의 밤'이 나오는 거지, 하. 그냥. "이 무엇 같은 세상!" 음반에 대해서는 지금 논할 것이 아니고, 저 자신도 감상을 느끼고 있는 상탠데.
시간이 지나면 <멀고 먼 길>보다 더 좋아질 거예요. 시간을 좀 주세요. 또 오늘은 좋아했는데, 내년에는 다른 노래가 좋아질 수도 있죠. 어렵게 나온 앨범이니까 마이 협조 좀 해주이소. 사람들이 노력도 많이 하고 희생도 많이 했다고.
- "화폐"라는 어휘 사용이 제일 특이한데...
그 놈의 화폐가 사람 지깁니다. 죽이고, 속이고.

- 싫어하는 사람이 스탈린, 김일성, 문선명이라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파워 앤 칸트롤인데, 스탈린은 너무 그거를 해 버렸다고.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고. 김일성은 공산주의 중에서도 더 지독한 공산주의를 만들었거든, 그거는 김일성주의일 뿐이지. 언제 칼 맑스가 그런 말을 했나? 칼 맑스나 헤겔하고 아무 관계 없어요. 듣기 좋으라고 공산주의라 한 거지. 문선명이 싫어하는 이유는 그 사람은 그냥 화폐 많은 사람이지, 좀 미친 놈이지. 자기가 메사이어라니까. 종교가 아니지, 뭐.
그 사람들은 정말 강한 리더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남의 인생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인류의 진보를 막는다고 생각해요.

- 당신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나 혹은 무정부주의자나......?
정치적으로? 애나키스트는 아니고, 그건 말도 안되고. 자유주의란 말도 너무 좀 그렇고?
뭔가 하면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만든 어떤 제도든, 시스템이거든. 지금은 자본주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있었고...... 어떠한 시스템이든 대다수가 그 제도에 의해서 혜택을 얻어야 된다고.
근데 지금은 미들 클라스, 중견층이 없잖아. 극소수의 부자와 대다수의 가난뱅이들 뿐이잖아. 우리나라가 그렇잖아. 미국도 마찬가지고.
우리 다 가난뱅이야. 항상 돈 걱정하잖아. 밥을 묵어면 밥 값 걱정하고. 우린 전부 다 가난한 사람들이야. 돈에 전혀 신경 안 쓰는 극소수 사람들이 있어요. 아무리 써도 돈을 다 못쓰는 사람들 있어. 해외로 좋은 것만 보고, 먹으러 다니는 사람들. 한국에도 그런 사람 많애요.
모든 제도는 대다수가 혜택을 받아야 돼. 대다수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제도는 제도가 아이지.
단순히 자유주의나 무슨 주의나 그런 건 너무 단순한 말이야. 웃기지 마라 그래. 그게 내 주의라고.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지금 문제가 있다는 거는 틀림없는 사실이야. 전 세계적으로!

정리 : 천정환(heutekom@personweb.com)
연보 와 앨범 연보
한대수 씨의 공식 홈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을 옮긴 것이다.
이 홈페이지에 가면 사진과 함께 보다 상세한 연보를 볼 수 있다.
www.hahndaesoo.co.kr
1948 3월 12일 부산 출생
1955 부산 남일 국민학교 입학
1958 뉴욕 초등학교 입학
1962 부산 경남 중학교 입학
1964 부산 경남 고등학교 입학
1965 미국 롱 아일랜드 A.G. Berner 고등학교로 전학
1966 New Hampshire 대학에서 수의학 전공
1967 New York Institute of Photography 전공
1968 한국에서 포크 싱어 송라이터로 데뷔
1969 이화여자 대학교,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부산대학교, 드라마 센터 공연
1970 한국 디자인 포장센터에서 디자이너(3급 공무원)로 근무
1971-74 군복무(해군 149기)
1974 코리아 헤럴드 신문 기자 겸 사진작가
1977 뉴욕시 Color Wheel, Chroma Copy의 사진작가 활동
락 밴드 "Genghis Khan"의 리더로서 클럽 Trude Heller, CBGB's 등에서 공연1988 L.A.로 이주. Color House, Burbank 사진관 매니저 활동
1991 뉴욕으로 이주. Nathaniel Lieberman studio, architectural 활동
1993 Speed Graphics사 매니저 활동
1997 Crossbeat Asia의 후원 하에 일본의 락스타 Carmen Maki와 함께 일본 공연 및 서울 올림픽 경기장에서 유니텔 락 콘서트 "Koreanism" 공연
1999 양희은의 "아주 특별한 만남" 공연(5.5-9, 영산 아트홀)에서 고정 게스트로 함께 공연
2000 SBS 포크 페스티발(5.27-28, 올림픽 공원 잔디마당)에 양일간 참가
앨범 연보
1st : 멀고 먼- 길 Long Long Road
신세계, 1974, SIS-81115, LP & Tape
1977년 이후 수차례 LP 및 MC 재발매
재발매되면서 재킷이 계속 바뀜
1989년 재발매판(초판과 동일한 재킷)에는 <하루 아침>의 미발표 오리지날 버전이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수록곡 순서도 다른 재발매판들과 다름
2nd : 고무신 Rubber Shoes
포 시즌(4 Season) 레코드, 1975, LP & Tape
1975년 2월 9일 녹음
1989년 7월 1일 재발매(서울음반, 기획: 김홍식), SPDR-172(LP) / SPDC-172(카세트)* LP에서 복각 - 마스터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소각됨
1999년, "97년 후쿠오카 라이브"와 묶어 2CD로 재발매(도레미), DRMCD 1548
3rd : 무한대 Infinity
신세계, 1989, SIS-890294, LP & Tape

4th : 기억상실 Loss of Memory with 잭 리 밴드 Jack Lee Band
뮤직 디자인, 1990, LP, Tape & CD
5th : 천사들의 담화 Angels' Talkin' with 이우창 Lee Woo-Chang
삼화, 1991, LP & Tape
1975 고무신∼1997 후쿠오카 (6th)
2CD, 도레미, 1999, DRMCD 1548, CD & Tape
CD 1: 2집 [고무신](1975)의 재발매
CD 2: 일본 후쿠오카 라이브(1997) 녹음
7th :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 Age of Reason, Age of Treason
Gam Mee Records (NYC), 1999.9, CD Only
나의 마지막 작품" ...8th eternal sorrow

http://personweb.com/sub3/performance/han_ds/hds_chro4.html#top 퍼슨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