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어당(林語堂)의 차ㆍ담배ㆍ술 예찬 - 임어당,『생활의 발견』(1938) 中
임어당(林語堂)의 차ㆍ담배ㆍ술 예찬 - 임어당,『생활의 발견』(1938) 中
4. 차와 교우에 대하여
인간의 문화와 행복이라는 면에서 볼 때 나는 담배와 술과 차의 발명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정과 사교와 한담을 즐기는 데 이만큼 직접적인 효력을 지닌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모두가 만남에 소용이 된다는 점이다.
둘째, 음식처럼 배가 부르지 않으므로 식사 중에도 즐길 수 있다.
셋째, 후각을 자극시켜 코를 통해서도 즐길 수 있다.
이런 담배와 술, 차를 즐기는 풍습은 한가롭게 우정이나 사교를 나누는 분위기가 아니라면 결코 발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정을 알고, 심성이 세심하면서 천성이 한가로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들을 즐기기 위해서는 적당한 상대가 있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꽃은 어떤 인물과 어울리는 정감이 있다. 빗방울 소리는 한 여름 산사에서 듣는 것이 제격이다. 또 어떤 경치는 그에 알맞은 여성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즉 사물의 기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물에는 저마다 정감이 있어서 적당한 상태와 함께 하지 않으면 제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성격이 잘 맞는 친구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온 정성을 기울여야만 한다. 마치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유지하고자 애쓰고, 바둑의 고수가 천리가 멀다 않고 적수를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분위기란 이처럼 중요하다. 함께 즐기고자 하는 친한 친구가 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와 즐기고자 하는 종류가 다르면 그에 알맞은 친구를 선택해야 한다. 학문과 사색을 즐기는 사람과 운동을 같이 하려 하거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을 음악회에 초청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이다.
차와 함께 나누는 마음
차를 즐기는 핵심은 그 색채와 향기와 풍미를 감상하는 것이며, 그 만드는 원칙은 청순, 건조, 청결에 있다. 따라서 차를 마시는 데는 조용한 분위기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차에 대한 평론서인 "다소"에서는 차를 마실 때 어울리는 분위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도 손도 한가로울 때
시를 잃고 난 후 피로할 때
마음이 산란해졌을 때
음악을 감상하고 있을 때
노래가 끝났을 때
휴일에 집에 있을 때
그림을 감상할 때
깊은 밤 대화를 나눌 때
아름다운 벗이나 고운 애인과 함께 할 때
소나기가 내릴 때
잔치가 끝나고 손님이 돌아간 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한적한 별장에 있을 때
차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냉철한 머리로 세계를 관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위가 소란스럽거나 신통찮은 사람이 시중을 들거나 하면 맛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무심코 마셔 버리게 되고 만다. 그래서야 어찌 차의 참맛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함께 마시는 상대도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란스러워지고, 차의 고상한 매력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혼자서 차를 마시면 속세를 떠났다고 하며, 둘이서 마시면 한적하다고 하고, 서너 명이 마시면 유쾌하다 하며, 대여섯이 마시면 저속하다고 하고, 예닐곱이
마시면 비꼬는 말로 박애라고 한다.
또 차를 마실 때 커다란 주전자에서 거듭 따르거나, 단숨에 꿀꺽 들이마시거나, 식은 차를 데워 마시거나, 진한 차를 원하는 것은 심한 노동 끝에 배를 채우고자 하는 농민이나 노동자의 기갈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차의 풍미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리하여 예로부터 다도에 정통한 사람은 깨끗한 심신을 갖춘 다음 손수 차를 끓여내는 즐거움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다도처럼 까다로운 의례로 발달하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평온하고 고상한 취미로 승화될 수 있다. 그것은 수박 씨를 깨무는 것처럼 차를 끓이는 행위조차 차를 마시는 즐거움만큼의 만족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옛날 채양이란 사람은 늙어서 차를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손수 차를 끓이고 그 내음을 맡은 즐거움을 가졌다. 또 주문보라는 학자는 매일 여섯 차례씩 정해진 시간에 차를 끓여 마시고, 죽을 때 자신의 관에 찻주전자를 넣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이렇듯 스스로의 정결한 마음과 취미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차이지만 다음과 같은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도를 갖춘다면 그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차는 순하여 냄새가 옮기 쉽다. 그러므로 술이나 진한 향이 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둘째, 차는 시원하고 습기가 없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
셋째, 차의 맛은 물에 있다. 산의 샘물이 가장 좋고, 냇물, 우물물이 순이다. 혹 논물이라도 방죽의 물이라면 본래 산간의 물이므로 괜찮다.
넷째, 진귀한 찻잔을 감상할 때는 조용한 친구와 함께 한다.
다섯째, 일반 차의 순수한 빛깔은 엷은 황금색이다. 검붉은 색깔의 차는 우유나 레몬 등 향이 강하여 차의 맛을 지울 수 있을 만한 것을 넣어서 마셔야 한다.
여섯째, 좋은 차에는 뒷맛이 있다. 그것을 마시고 나서 30초쯤 지났을 때, 차의 성분이 침샘에서 작용하는 신간이 지난 뒤에 느껴지는 맛이다.
일곱째, 차는 신선한 것을 끓여 곧 마셔야 한다. 그리고 한번 따를 뒤에 나머지도 너무 오랫동안 두어서는 안 된다.
여덟째, 차는 갓 길어온 물로 끓여야 한다.
아홉째, 순수한 차에 다른 것을 넣는 것은 좋지 않다. 단지 사람에 따라서 약간의 향료를 넣는 것은 괜찮다.
열째, 최상의 차에서는 마치 갓난아이의 살갗처럼 미묘한 향이 있다.
5. 담배와 향에 관하여 - 임어당(林語堂)
번역출처: http://infol.isfreeweb.com/?mid=friend&listStyle=webzine&document_srl=4954
오늘의 세계는 끽연가와 금연가의 둘로 구분된다. 끽연가가 금연가에게 다소의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방해가 육체적인 것인 반면, 금연가가 끽연가에게 끼치는 방해는 정신적인 것이다. 물론 끽연가에게 간섭하지 않으려는 금연가도 많이 있으며, 부인들은 남편들이 침대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참아낼 수 있도록 훈련할 수도 있다. 이것은 결혼이 행복스럽게 잘 되어가고 있다는 가장 정확한 증거다.
그러나 금연가가 인류 최대의 쾌락의 하나를 잃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도덕적으로 우수하다든가, 무엇인가 자랑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든가 하는 억측이 왕왕 이루어지고 있다. 끽연이 도덕적약점이라는 것은 나도 서슴치 않고 인정하지만, 그 반면에 약점이 없는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경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약점이 없는 인간은 신용이 안 간다. 그러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늘 근직 그대로이며, 실수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끽연가보다 그 습관은 대체로 규칙적이고 생활이 기계적이며, 언제나 이성이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
나는 이성적인 인간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완전한 이성인이라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러므로 재떨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집에 들어가면 언제나 마음이 조마조마하며 불안해 죽을 지경이다. 방은 대체로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고, 쿠션은 일정한 장소에 놓여 있고, 집안사람들은 새색시 모양으로 단정하고, 인정미라곤 찾을 길도 없다. 그러면 나도 대번에 손님티를 낸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불유쾌한 행동이다.
린위탕(林語堂(림어당),
1895.10.10~1976.3.26)
중국의 소설가 겸 문명비평가. 음운학(音韻學)을 연구하고 루쉰[魯迅] 등의 어사사(語絲社)에 가담하여 평론을 썼다. 자유주의자로 불리며 세계정부를 제창하였다. 소품문지(小品文誌) 《인간세(人間世)》 등을 창간, 소품 문을 유행시켰으며, 평론집을 발표해 영국에 중국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본명 위탕[玉堂]
국적 중국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푸젠성[福建省] 룽치[龍溪]
주요저서 《나의 국토 나의 국민》(1935) 《폭풍 속의 나뭇잎》(1941)
원이름은 위탕[玉堂]. 푸젠성[福建省] 룽치[龍溪]의 가난한 목사 집안 출신. 상하이[上海]의 성 요한대학[聖約翰大學] 졸업 후 베이징 칭화학교[北京淸華學校] 영어교사가 되었다. 1919년 하버드대학에 유학, 언어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1921) 예나, 라이프치히 두 대학에서 수학했다.
1923년 귀국하여 국립 베이징대학 영문학 교수가 되었는데, 음운학(音韻學)을 연구하는 한편 루쉰[魯迅] 등의 어사사(語絲社)에 가담하여 평론을 썼다. 1926년 군벌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아모이[厦門]대학 문과 주임, 이듬해 우한정부[武漢政府]에 가담하여 그 외교부 비서가 되었다.
1932년 유머와 풍자를 주장하는 《논어》, 1934년 소품문지(小品文誌) 《인간세(人間世)》 등을 창간, 소품문을 유행시켰으며, 1935년 평론집 《나의 국토 나의 국민 My Country and My People(我國土我國民)》을 쓰고, 이듬해 영국으로 가서 《생활의 발견 The Importance of Living》(1938) 등으로 중국문화를 소개하였다. 소설 《Moment in Peking(北京好日)》(1937) 《폭풍 속의 나뭇잎 A Leaf in the Storm》(1941) 등에서는 근대중국의 고민을 표현하였다.
영문 저작으로는 모국문화의 옹호, 중국문으로는 모국의 속물성(俗物性)을 풍자하였으며, 뛰어난 세계문화 창조에는 상식 ·이성(理性) ·생활감정 등을 교묘하게 조화하는 중국정신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미래소설 《The Unexpected Island》(195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자유주의자로 불리며 세계정부를 제창하였다.
이런 근엄한 도덕가들, 즉 정서라곤 전혀 없고 시적 정서라곤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끽연의 도덕적. 정신적 이익을 상완(賞煙)할 수가 도저히 없다.
그러나 우리들 애연당(愛煙黨)이 공격을 받는 것은 예술적 방면으로부터가 아니라 반드시 도덕적 방면으로 부터이기 때문에 우선 금연가보다 높은 표준에 서있는 끽연가의 도덕을 위하여 한 마디 변명의 말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는 사람은 내 성미에 맞는 사람이다. 파이프를 입에 물었을 때의 끽연가는 보통 때보다 명랑하고 사교적 이고 비교적 격의 없는 무례한 태도를 발휘하며, 때로는 그 담화에도 매우 명랑한 재치가 넘쳐흐르는 수가 있다. 어쨌든 이편과 마찬가지로 저편도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새커리①에게 전폭적으로 찬의를 표한다.
「파이프는 철학자의 입술로부터 예지를 끌어내며, 우매한 자의 입을 닫치게 한다. 파이프는 명상적이며 생각이 깊고 인자하며 허식 없는 청담(淸談)을 조성한다. 」
끽연가의 손톱은 비교적 더럽지만 마음만 따뜻하면 그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어쨌든 명상적이며 생각이 깊고 인자하며 허식이 없는 청담이라는 것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다 어떠한 희생이라도 기꺼이 바칠 것을 사양치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파이프를 입에 문 사람은 늘 행복하다는 것이며, 행복은 결국 도덕적 가치 중에서 가장 취어난 것이다.
W. 매긴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치고 아직 자살한 사람이 없다.」 파이프의 애용가는 절대로 마누라와 싸우지 않는다는 말은 더욱더 진실에 가까운 명언이다.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하지 않은가 !
파이프를 이빨 사이에다 물고 어떻게 제 마음대로 큰 소리로 마누라에게 호통을 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아무데도 없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을 때에는 자연히 작은 목소리로 말하게 된다.
끽연가인 남편이 화를 낼 때에 일어나는 현상은 화를 내는 즉시로 권련이나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불쾌한 낯을 짓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감정은 벌써 돌파구를 발견하고 있는지라, 자기의 분개나 모욕감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언제까지 골난 얼굴을 하고 있으려고 별러도 그것을 계속하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파이프에서 타오르는 고요한 연기와 냄새는 자못 기분이 좋고 은근히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연기를 내뱉고 있는 동안에 울적한 성난 감정도 숨을 쉴 때마다 내뱉어 버리게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기 때문에 영리한 아내는 이제라도 당장 울화를 터뜨리려고 하고 있는 남편의 태도를 알아챘을 때에는 공손히 남편에게 파이프를 물려주며 「자, 그런 것은 어서 잊어버리세요, 네 ! 」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이 공식은 언제나 효과 백 퍼센트다. 아내는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파이프가 실패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끽연의 예술적 문학적 가치는 우리들 애연당들이 잠시 금연하였을 때 무엇을 잃어버리는가를 상상해 보면 가장 잘 알 수 없다. 어떠한 끽연가라도 단연코 니코틴 부인에 대한 충성을 끊어 버리려고 벼르는 어리석은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 후 잠시 공상적인 양심과 싸우고는 결국 제정신으로 되돌아간다. 나도 그러한 어리적은 짓을 하여 약 3주간이나 금연을 시도해본 일이 있었으나, 3주간이 끝날 무렵에는 내 양심은 다시 정도(正道)로 되돌아가라고 완강히 꾸짖는 것이었다.
▲ 파블로 카잘스(Pablo Carlos Salvador Casals y Defillo)
나 는 다시는 아예 사도(邪道)에 빠지지 않으리라고 맹세하고 노년에 이를 때까지 길이 니코틴 신전(神殿)의 경건한 신자가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노년이 되고 보면 교풍회(矯風會) 부인들의 포획물이 될 것이 예상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그러한 불행한 노경에 들 때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의지력과 도덕감이 나에게 남아 있는 한 나는 다시는 그러한 것을 되풀이 할 생각이 전연 없다. 담배라는 유익한 발명의 덕택으로 인간에게 제공된 정신력과 도덕적 행복감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큰 부도덕이 어디 있으랴? 마치 나는 금연이라는 어리석은 짓은 구경도 못했다는 듯이 아예 다시는 그런 짓은 되풀이 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의 위대한 생물화학자 할데인에 의하면, 끽연은 연류문화에 심심(深甚)한 생물학적 영향을 끼친 인류사상 4대 발명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연을 결의한 3주간, 내가 내 마음속의 보다 양식적연 자아에 대하여 비겁한 짓을 하고 또 정신을 앙양하는 위대한 무엇인가를 고의적으로 완강히 거절한 이야기야 말로 참으로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다. 이제는 그래도 당연한 이치를 붙여서 회고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도덕적 무책임감의 발작이 무슨 까닭으로 그처럼 오래 지속되었는지 나 자신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 3주간을 주야로 내 오디세이적 심리를 조이스류로 상기해 보자면 3천 행(行)의 훌륭한 호머식 시나 혹은 빽빽이 연쇄해서 1백50면이나 되는 산문이 될 것이 분명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목적부터가 싱겁기 짝이 없었다. 인간은 왜 인류와 우주의 이름에서 금연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일까? 나는 이런 상태로는 대답을 못하겠다.
하지만 생각컨대 오로지 인간이 자기에게 저항한다는 힘을 정복한다는 즐거움을 위해서만 자기 성벽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고, 또 그렇게 해서 일시적인 도덕적 정력(精力)의 과잉을 소진해 버리려고 할 때에는 왕왕 이러한 불합리한 기분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 내가 갑자기 금연을 하리라 하고 성스럽지 못한 결심을 하게 된 이유를 그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바꿔 말하면, 나는 세상 사람이 스웨덴식 체조에 탐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에게 도덕적 시련을 부과하였던 것이다. - 즉 이러한 시련은 사회를 위해서 실제로 하등의 유익한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위한 운동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성질의 것이다. 내가 자신에게 부과한 것은 확실히 이러한 종류의 사치이며 다만 그뿐이다.
물론 최초의 3일간은 소화기관의 어디인가가, 특히 상부가 이상하리만큼 힘이 빠진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이상한 감각을 없애려고 더블민트의 추잉검이나 품질이 좋은 복건차(福建茶)나 몬테세라트 산의 라임과(果)의 향정(香錠) 따위를 사용해 보았다. 이 이상한 감각은 꼭 사흘 만에 완전히 정복하여 없앨 수가 있었다.
이것은 육체에 속하는 문제로, 따라서 조금도 힘들 것이 없는 일이어서 내게는 가장 경멸할 만한 부분에 속하는 문제였다. 끽연과의 성스럽지 못한 싸움의 전부가 이 육체적인 문제에만 있는 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금연의 의미를 전연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끽연이 정신적 문제에 속해 있다는 걸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끽연의 정신적 중요성을 분별치 못하는 사람은 이 문제에 절대로 관여 할 자격이 없다.
사흘이 지한 후에 나는 제 2차적인 단계에 부닥쳤다. 정말로 정신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나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즉 끽연가 중에는 두 가지 인종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끽연가라는 명칭을 붙일 만한 가치가 전연 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 제 2단계란 있을 수 없다.
수많은 끽연가들이 전연 아무런 괴로움도 없이 담배를 끊었다는 그 「용이한 전환」이라는 말을 흔히 듣지만 그 이유를 나는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다 못쓰게 된 칫솔을 버리는 것처럼 그들이 용이하게 이 습관을 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담배맛을 전연 몰랐다는 증거다. 세상 사람들은 「의지력이 강하다」고 칭찬하지만 실은 진짜 애연가가 아니었다는 것과 일평생 한 번도 진짜 애연가인 적이 없었다는 것뿐이다. 그들에게 끽연은 아침마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체적 행위다. 이러한 행위는 심혼(心魂)을 만족시키는 성질이라곤 전혀 없는 단순한 육체적. 동물적 습관에 불과하다.
이러한 무미건조한 인종이 셀리②의 <종달새>나 쇼팽의 소야곡에 심금이 울리어 무아황홀의 경지에 과연 들어갈 수 있을까?
이러한 사람들은 끽연을 버리고도 능히 편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교풍회의 부인회원들과 함께 <이솝 이야기)라도 읽는 편이 훨씬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들 진짜 애연당에게는 교풍회의 부인회원들이나 <이솝 이야기> 남성 애독자에게는 전연 알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우리들의 경우라면 각자에 대한 불공평한 점이라든가 또는 금연의 무의미한 점이 대번에 모두 분명해진다.
우리들의 양식과 이성은 즉시로 금연에 반발을 일으키고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즉 그 훌륭한 정신적 행복, 그 예민한 공상적 지각, 그 발랄하고 풍부한 창조적 정력을 우리들 작가가 얻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하여 왜 의식적으로 의지의 힘을 행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일까?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육체적 내지 경제적으로 보아 어떠한 이유가 거기 있다는 것일까? 이러한 상태야 말로 참으로 벽난로 곁에서 벗과 청담을 마음껏 즐기거나 고서를 읽고 그 속에 있는 따뜻한 맛을 감득하거나, 문인으로 이름 있는 사람들의 말과 사상을 완전히 재현하거나 하는 일에 대하여 절대로 필요한 조건이 아니겠는가?
이러할 때 담배에 손을 내미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유일한 행위가 아닐까? 담배 대신에 추잉검을 씹는다는 것은 범죄적인 죄악이다. 이만한 정도의 일이라면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범한 몇 가지 예를 여기 소개해 보겠다.
내 친구 B가 북평(北平)에서 상해(上海)에 도착하여 나를 찾아왔다. 헤어진 지 3년만의 일이다. 북평(당시에는 北京이라 하였음)에서 우리는 흔히 담배를 피우며 밤늦게까지 정치․ 철학․ 현대 미술 등에 관하여 서로 논하는 때가 많았다. 그 친구가 이제 왔기에 우리들은 회고담에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북평에서 안 여러 교수․ 시인․ 변덕쟁이가 화제에 오르내렸다.
기발한 비평이 튀어나올 때마다 내 기분은 자꾸만 저절로 여송연 쪽으로 갔으나 꾹 참고는 그저 일어났다 앉았다 하기만 하였다. 이에 반하여 내 친구는 여송연 속에 파묻힌 채 자못 기분 좋게 도도히 논담(論談)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담배를 끊었다는 것과. 그의 방에서도 파금(破禁) 못하는 프라이드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좋은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이서 무릎을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흉금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는데 실제론 냉담히 딴 생각이 있는 것만 같은 얼굴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라는 것이 절반밖에 없기 때문에 이야기는 어쩐지 일방적으로 진전되어 얼마 안 있다가 그만 친구는 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럭저럭 완강히 버티어 최후까지 견디어 나갔다. 예의 그「의지력」으로 해서 된 이야기로 나는 이기기는 했지만 가슴에 남은 것은 다만 불행과 불쾌라는 기분뿐이었다. 며칠 지난 후 그 친구는 선중(船中)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네는 그전처럼 친밀감도 없고 발랄하지도 못하고 쾌활하지도 못하니 그게 어찌된 일이냐고 하고는, 그것은 아마 상해 생활의 탓이 아니냐고 하였다. 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날 밤 담배를 피우지 않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어느날 밤, 어떤 인텔리들의 클럽 집회가 있었는데, 이 회는 언제나 몽롱한 담배 연기에 싸이는 것이 예사였다. 성대한 식사가 끝난 후에는 대게 회원 중의 한 사람이 논문을 낭독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날 방은 C의 차례로서 논제는 「종교와 혁명」이라는 꽤 기발한 비평을 포함한 특색 있는 것이었다. 그 논평에 풍옥상(馮玉祥)은 북방파 메더디스트 교회에 입신(入神)하였는 데 반하여 장개석(蔣介石)은 남방파 메더디스트 교회에 입신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을 지적한 곳도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오패부(吳佩孚)는 머지않아 서방파 메더디스트 교회이 입신할 게 아니겠느냐고 비꼬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기발한 비평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담배연기는 자꾸만 자욱해질 뿐, 방안의 분위기 그것에 쓸데없는 망념이 싸여있는 것만 같이 나에게는 생각되었다.
회장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던 시인 H는 물고기가 거품을 뿜는 것처럼 그 육중한 공기 속으로 연달아 담배 연기 동그라미를 내뿜으면서 사색에 잠겨 자못 유쾌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으로, 나는 마치 신의 버림을 받은 죄인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금연의 무의미함이 나에게 자꾸만 분명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분명하게 의식된 순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제 정신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금연하게 된 이유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하였으나, 수긍할 만한 이유라곤 무엇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집회가 있은 후, 내 양심은 신령을 좀먹기 시작하였다. 나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상상력을 동반치 않은 사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는 상상력이 무미건조한 금연이라는 파익(破翼)을 타고서 무슨 수로 허공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겠는가?
▲ 영화배우 김지미 씨
그 후 어느 날 오후, 나는 어느 부인을 방문하였다. 마음속으로는 그때 벌써 재 개종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 외에 그 누구도 방안에 없었다. 나는 그녀와 진정한 밀담을 할 작정이었다. 그 젊은 부인은 책상다리한 무릎에다 한쪽 팔을 괴고 조금 앞으로 몸을 수그리고는 그 무엇을 생각하는 듯한 태도와 가장 우아하고 고운 맵시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이제야 정말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 부인이 담배통을 내밀어 주기에 나는 그 한 개를 힘껏 쥐고는 가만히 빼내었다. 그 행위로 말미암아 벌써 도덕적 타락의 일시적인 발작에서 회복하였다는 것을 의식 하면서 .
돌아오는 즉시로 나는 곧 보이를 시켜 가늘게 만 「캡스란」 한 통을 사오게 하였다. 내 책상 오른편에는 한 곳만 정해 놓고 탄 자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불붙은 권련을 늘 습관적으로 그 자리에 놓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내 계산에 의하면 두께 2인치의 책상 뚜껑을 태워 뚫는 데에는 거의 7, 8년 동안이 걸리게 되는 셈이었으나 예의 그 불명예스러운 결심을 실행한 뒤 그 널판이 아직 반 센터미터쯤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볼 때마는 유감천만이었다. 그러므로 타다 남은 자리에다 또 다시 불이 붙은 담배를 놓게 된 것은 매우 기뿐 일이었다.
이제부터 또 오랫동안 걸려 2인치의 구멍을 뚫는 그 작업을 계속할 셈으로, 내 궐련은 솔솔 연기를 내면서 즐거운 듯 타들어 가며 뚫는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문학에는 술에 비하며 담배의 예찬이 비교적 적다. 풍습으로서의 끽연은 겨우 16세기에 이르러 포르투갈의 선원에 의해 수입된 것이 기 때문이다.
나는 16세기 이후의 중국 문학 전반에 걸쳐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영묘한 향초를 예찬한 어귀라곤 불과 여기저기서 산견(散見)할 수 있는 너무나도 무의미한 몇 행에 지나지 않았다. 담배를 예찬하는 서정시는 확실히 옥스퍼드 대학생에게서나 수입해 들여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은 차나 술이나 음식을 상완(賞玩)하는 그 태도에서 보더라도 명백한 것처럼, 항상 냄새에 대하여 너무나도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담배가 없었던 시대에 그들은 벌써 향을 피운다는 술법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중국 문학에서 향은 언제나 차나 술과 동일한 범주로 분류되었고 같은 기분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다. 중국 제국이 인도차이나까지 판도를 넓힌 그 먼 한대(漢代)적 옛날부터 공물로 헌납되었던 남부 여러 영토의 향은 궁정이나 부호의 가정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생활술(生活術)을 논하는 책은 반드시 몇 항에 걸쳐서 향의 종류. 성질. 피우는 법 등을 논한 것이다. 도적수(屠赤水)가 저술한 <고반여사(考槃餘事)>의 향에 관한 장(章)에 향의 즐거움을 논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_훈향(燻香)의 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유거(幽居)하는 고결한 학자들이 진리와 종교를 논할 때 향 한 줄기를 피우면 신혼(神魂)이 맑아지고 마음이 상쾌해질 것이다.
심야사경 (深夜四更)에 이르러 외로운 달이 중천에 걸리고, 냉기가 살에 스며들며 속계를 멀리하였다고 느낄 때 향은 사람의 마음을 해방시켜 주며 , 저도 모르게 한가한 휘파람이 입에서 새어 나온다.
밝은 창 옆에서 고서의 필적을 살피거나, 혹은 파리채를 손에다 들고서 한가로이 시를 읊거나, 혹은 밤에 등불 밑에서 독서삼매에 잠길 때 향은 사람의 수마(睡魔)를 몰아내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향을 「고반월(古拌月)」이라 부르는 것이다.
빨간 잠옷을 입은 여자가 남편 옆에 서있고, 또 남자가 향로에 손을 걸친 여자의 손을 잡고는 서로 비밀의 속삭임을 주고받을 때 향은 남자의 마음을 뜨겁게 하며 한층 더 애정을 북돋아 준다. 그러기에 향을「고조정(古助情))이라 부르는 것이다.
또 비오는 날 오후 낮잠을 자다 깨어 꼭 닫힌 창가에 앉아서 글씨 연습을 하면서 차의 부드러운 풍미를 맛보고 있을 때 향로는 이제 겨우 따뜻해지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윽한 방향이 사방에 떠돌며 몸을 싸고돈다. 주연을 끝내고 한참 자다 깨면 중천에 걸린 만월이 밤하늘에 교교히 빛나고 있다.
손가락을 올리어 현을 타고 청산(靑山)의 모습을 저 멀리 중공(中空)에 바라보며 사람 없는 누각 위에서 홀로 긴 휘파람을 분다. 타다 남은 향에서 피어오르는 보일까 말까 한 연기는 문에 친 발 가에 떠돌고 있다.
이러한 정경들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정경이다. 향은 또 악취를 막고 습지의 악기(惡氣)를 막는 데도 필요하여 적어도 사람이 가는 데는 어디서나 긴요한 물건이다. 가장 질이 좋은 향은 가남향(伽南香)연데 이것은 좀처럼 구하기 어렵다. 산중에 사는 사람에게는 전혀 구할 가망이 없다.
가남향 다음 가는 것은 침향목(沈香木), 일명 가라목(伽羅木)이라고도 일컫는 것으로 세 등급이 있다. 일등품은 너무 냄새가 강하고 날카로워서 자극이 심한 결점이 있고, 삼등품은 지나치게 건조하고 연기도 지나칠 정도로 많다. 양당(兩當) 6,7푼으로 살 수 있는 이등품의 냄새가 가장 온당하며 최우수품이라 할 수 있겠다.
차를 달인 후의 숯불을 향로에 넣고서 서서히 향을 피울 수도 있다. 마음이 흐뭇해진 그러한 한때는 마치 인계(人界)를 떠나 우화등선(羽化登仙), 선경에 노는 기분이 든다. 아, 이 얼마나 큰 기쁨이랴!
요새 사람들에게는 참된 방향(芳香)을 상완하는 감상력이 결핍되고 이상한 이국적인 향명(香名)만을 찾아서 몇 종류의 향을 혼합해가지고는 헛되이 고래의 향과 다투려고만 하고 있다.
침향목의 향기야말로 참으로 자연의 향기이며, 그 최상의 향기에는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가훈청향(佳蒸淸香)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부자 시인 모벽강(胃辟彊)은 재원인 그 애첩과의 생활을 그린 <영매암억어 (彰梅底憶語)>에다 그들의 향에 대한 즐거움에 관한 여러 가지 수록(朧錄)을 실었는데 다음의 글은 그 몇 구절이다.
내 애첩은 그윽한 항기가 풍겨 오는 규방에서 나와 함께 고요히 앉아 명향(名香)을 시훈(試蒸)하거나 혹은 그 품평 (品評)을 하는 때가 많았다. 소위 「궁향(宮香)」이라는 것은 그 질이 선정적이라 할 것이요. 침향목(沈香木)은 속법(俗法)이다.
흔히 사람들은 침향(沈香)을 바로 불에다 직접 놓는 수가 많은데 그러면 수지(樹脂)가 타서 방향(芳香)이 곧 사라져 버린다. 그러한 방법은 방향을 죽여 버릴 뿐만 아니라, 연기가 나서 질식할 것만 같은 취기(臭氣)를 신변에다 남긴다.
횡격침(橫隔沈)이라 일컫는 목문(木紋)이 가로 뻗은 질이 굳은 향은 가장 우수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침향(沈香)에 속하는 네 종류 중의 하나인데, 섬유가 가로 뻗은 것이 그 특징이다. 또한 철향의 별종(別種)에 봉래향(蓬萊香)이라 일컫는 향이 있는데 그것은 채 덜 핀 버섯처럼 원추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집에는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향이 늘 떨어지는 일이 없이 비치되어 있었다. 내 애첩은 연기가 보이지 않도록 약한 불 위에 고운 모래를 깔고서 그 위에다 향을 놓고 태웠다. 그 유현미묘(幽玄微妙)한 방향을 고요히 맡고 있노라면 미풍이 실어다 주는 가남(伽南)의 향기처럼, 이슬이 반짝이는 장미꽃 냄새처럼, 몹시 문지른 한 조각 호박(琥珀) 냄새처럼, 뿔로 만든 잔에 따른 물 냄새처럼 그 향기는 방안 이 구석 저 구석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이리한 방법으로 침상을 향기로 뒤덮어 놓으면 그 그윽한 향기는 여자의 살 냄새와 섞이어, 꿈속에서 까지 달콤하게 취하는 기분을 자아내 준다.
註 1) 새커리: 영국의 소설가(1811~63)2)
2) 쉘리: 영국의 시인 (1792-1822)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William Makepeace Thackery, 1811-1863)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는 상류계층의 위선을 풍자적으로 비웃는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인도 주재 영국 대표부의 한 문관의 아들로 칼카타에서 태어났다. 캠브리지 대학 졸업시까지 영국내의 여러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디킨슨과는 달리 그의 교우 관계는 상류계층의 청년들과 이루어졌다. 독일과 파리 등지에서 미술학도로서 구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여유있는 한가로운 자들이 생활에 익숙한 점도 디킨슨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 후 새커리는 신문사 설립으로 얼마 안 되는 재산의 손실을 보았으나 생활비 조달을 위해 신문사 일을 계속하였다. Pickwick Papers의 작가가 사망하였을 때 새커리가 후임 삽화담당자로 물망에 올랐으나 디킨슨이 거절하였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화이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서서히 상승시킨 잡지에 발표한 연속적 수필에 그는 익살맞은 삽화를 곁들였고 중요한 소설에서도 삽화를 넣어 생동감을 보여주었다. 결혼 수년 후 아내가 발광하자 런던 사회 계에서 관심사를 찾으려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인간성은 호평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의 생애의 온 전망은 디킨슨 전망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쉘리,『종달새에게』
오라 그대 활기찬 영혼이여!
그대는 새가 아니어라
하늘 혹은 그 가까이에서 그대 온 심장을 퍼부어
즉흥적인 기교로 풍요한 가락을 이루어내나니
더욱 높이 더 높이
땅에서 그대는 솟아올려 마치 불꽃튀는 구름 같어라
푸른 하늘을 그대는 날으며 노래하고 계속 올라가고 또 올라가며
끝없이 노래하도다
지는 해의 황금 광채 속 구름이 번쩍이는 그대는 떠서 달리니
육체를 벗어나 막 달리기 시작한 즐거움 같아라
연보라 저녁 노을이 그대가 나는 둘레에서 녹으니
마치 넓은 한낮의 하늘의 별 같아라
그대 보이지 않지만 내 듣느니 그대 예리한 기쁨이여
은빛 누리의 화살처럼 날카로워라
그 강열한 불빛은 밝아오는 흰 여명으로 흐려지고
드디어 거의 볼 수는 없지만―여전히 있음을 느끼노라
온 대지와 온 대기가
그대 소리로 요란하여라
마치 밤이 지새며 한 외로운 구름에서
달이 광채를 쏟아부어 하늘을 뒤덮는 듯
그대가 무엇인지 알지 몰라라
그대 무엇에 가장 가까우뇨?
무지개 구름에서도 이렇게
보기에 찬란한 빗방울을 쏟지는 않았도다
그대 존재에서 선율의 빗줄기를 쏟듯이
사상의 광채 속에 숨어있는 시인 같아라
자기도 모르게 찬가를 노래하자
드디어 세계가 움직여
일찍이 들은바 없는 희망과 두려움으로
공감하는 듯하여라
호화궁궐 탑속의 고귀한 처녀 같아라
은밀한 틈을 타 사랑에 불타는 넋을 달래며
사랑처럼 달콤한 가락에 자기방이 넘치여라
이슬 덮인 골짜기의 황금빛 반딧불처럼
보이지도 않게 신비한 빛을 꽃과 풀 사이에
뿌리되 시야를 가리고 마누나
스스로의 초록 잎속에 숨겨진 장미와도 같이
따뜻한 보람에 시달려 드디어 뿜어내는
그 향기가 너무나도 달게 날개달린 도적들의 얼을 빼는구나
반짝이는 풀위 비에 눈을 뜨는 꽃위에
쏟히는 봄 소나기 소리며
일찍이 존재한 즐겁고 맑고 신선한 모든 것들을 그대
가락은 능가하도다
우리에게 가르쳐다오 요정이냐 아니면 새냐
그대 아름다운 생각은 어떠한 것인가
나는 일찍이 이렇게 신성한 황홀의 향수를 쏟아내는
사랑이나 술의 찬미를 들어본 일이 없도다
혼인축가의 합창도 승리에 찬가도
그대에게 견주면 모두 공허한 자랑에 지나지 않는 것―
어딘가 결함이 숨겨진 것임을 우리는 느낀다
그대 즐거운 가락의 샘은 어떤 대상인가?
어떤 뜰 아니면 물결 산인가?
어떤 모습의 하늘 평얀가?
어떤 사랑의 그대 동포앤가?
어떤 고통의 초월인가?
그대 맑고 날타로운 즐거움엔 권태가 있을 수 없는 것
범민의 그림자가 결코 가까이할 수 없는 것
그대는 사랑하되 사랑의 서글픈 물림은 절대로 모르는 것
눈을 뜨고 있거나 자거나 그대는 죽음에 대해 우리 인간이 꿈꾸는 것보다
더 깊고 참된 것을 생각함이 틀림없다
아니면 어떻게 이토록 수정 같은 흐름으로 그댄 선율이 솟구칠 수 있는가?
우리는 앞을 보고 또 뒤를 보며 없는 것을 그리워한다
가장 진지한 우리의 웃음엔 어떤 괴로움이 지워지고
우리의 극치의 아름다운 노래는 슬픔의 절정을 말하는 것
비록 우리가 미움과 오만과 두려움을 비웃을 수 있을지라도
눈물을 무시하도록 태어난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대 즐거움에 감히 가까이할
수 있을지를 모른다
기쁨에 넘치는 온 가락의 소리보다도
책에서 찾아지는 모든 보배보다도 더
그대 재주는 시인보다 뛰어났도다 그대 대지를 비웃는 자여!
가르쳐다오 내게 그대 머리에 지닌 분명한 기쁨의 반이라도
그러면 내 입에서 흘러나올 이처럼 조화로운 영광에
세계가 귀를 기울이리 지금 내가 네게 귀를 기울이듯이
6. 어떻게 취할 것인가 - 술과 술좌석 놀이에 대하여
술이란 다른 어느 것보다 문학적으로 위대한 공헌을 했다. 또 술은 담배와 함께 절묘한 파트너로서 인간의 창조적인 정신을 일깨워준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음주의 쾌감, 이른바 거나함이란 것은 신비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 여성이 술취한 기분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저는 얼근한 기분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제일 좋고 행복하답니다.'
사실 그런 기분일 때는 의기양양하여 어떤 장애라도 극복할 자신이 생긴다. 감수성도 예민해지고 현실과 공상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는 듯한 예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런 기분은 곧 해방감이다. 정신의 해방감, 육체의 해방감. 그리하여 그것은 예술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술을 욕심내는 마음은 당연하다. 사람이 어떤 감흥을 갖기 위해서 술과 차를 마시는데, 이 두 가지는 가장 극적인 대비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가장 좋은 표현이 있다.
'차는 세상을 버린 사람과 같고 술은 기마무사와도 같다. 술은 아름다운 우정을 위해 있고, 차는 덕 있는 조용한 사람을 위해 있다.'
중국의 한 작가는 음주에 알맞는 심경과 장소를 이렇게 분류해 놓았다.
'엄격한 자리에서의 술은 유장하게 마시고,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은 로맨틱하게 마셔라. 병자의 술은 소량이어야 하며, 슬픔의 술은 취할 정도로 마셔라. 봄 술은 정원에서, 여름 술은 들판에서, 가을 술은 쪽배 위에서, 겨울 술은 집에 틀어박혀서, 밤 술은 달빛 아래서 마시는 것이다 좋다.'
또 다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취하는 데는 때와 장소가 있다. 꽃의 색향과 조화되려면 햇볕 아래서 꽃을 대하고 취해야 하며, 상념을 씻으려면 눈을 향해 취해야 한다. 성공을 기뻐하여 취하는 사람은 그 기분에 화합하여 노래를 한 곡 불러야 하고, 송별연에 임하여 취하는 사람은 이별의 저에 곁들여 한 곡의 음악을 연주하라. 선비가 취하면 수치를 면하기 위해 행동을 삼가야 하며, 군인이 취하면 위용을 높이기 위해 크게 술을 분부하여 위엄을 더해야 한다. 누각 위에서의 잔치는 서늘한 기운을 이용하기 위해 여름이 좋으며, 강물 위에서의 잔치는 의기양양한 자유 감회를 갖기 위해 가을이 좋다.'
술에 대한 여러 가지 예의 범절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비난할 점도 있다. 반면에 칭찬할 점도 있다. 비난할 점이라면 술을 억지로 권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쾌하고 허물없는 기분에서 나오는 것으로 술자리의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흥취가 술맛을 나게 한다. 한데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칫 술 많이 마시기 경쟁으로 치닫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최고의 술자리는 유쾌하고 신나게 마시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얼근하게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도도한 즐거움을 갖지 말란 법은 없다. 일자 무식이라도 시흥을 알고 기도를 하지 못해도 신앙이 있으며 술 한 방울 못해도 함께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함께 임하는 사람들의 어울리고자 하는 마음일 뿐이다.
*출처 : [이글루스] 임어당(林語堂)의 차ㆍ담배ㆍ술 예찬 - 임어당,『생활의 발견』(1938) 中 http://m.egloos.zum.com/imjohnny/v/2074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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