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칠일 밤(Siete Noches)>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칠일 밤(Siete Noches)>, 송병선 옮김, 현대문학, 2004
- 보르헤스가 말하는 문학 원형의 일곱 가지 주제
일일 밤. 신곡
p17
나는 단테를 밀턴Milton과 비교해보았습니다. 밀턴은 하나의 음조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어로 “서블라임 스타일(고상한 형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음악은 주인공들의 감정과 전혀 상관없이 항상 똑같습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처럼 단테도 음악의 경우, 감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억양과 강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의 구절을 큰 소리로 읽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나는 큰 소리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훌륭한 시를 읽을 때면, 큰 소리로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시는 작은 소리나 속으로 읽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조용히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시가 아닙니다. 시는 항상 큰 소리로 읊을 것을 요구합니다. 운문은 항상 그것이 문자 예술이기 이전에 구어 예술이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것은 또한 노래였다는 사실도 떠올리게 합니다.
p19
단테는 어느 기하학 책에서 정육면체가 가장 단단한 용적이라는 것을 읽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시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상적인 발언이지만, 단테는 그것을 불행을 이겨내야 하는 인간의 은유로 사용하면서 “사람은 착한 사각형, 정육면체”라고 노래합니다. 그것은 정말 보기드믄 은유입니다.
또한 화살에 대한 흥미로운 은유도 떠올리고 싶습니다. 단테는 활시위를 떠나 과녁에 꽂히는 화살의 속도를 우리가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화살이 과녁에 꽂혀 있고, 활을 떠나며, 활시위를 당긴다고 말합니다. 그는 얼마나 빨리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처음과 끝을 뒤집어 놓습니다.
p21
...그러나 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이야기성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 이야기성은 냉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지 일화로 치부했던 것입니다. 시는 이야기가 되면서 시작되었고, 시의 근원에는 서사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서사시가 최초의 시적 장르라는 것을 우리는 잊었던 것입니다. 서사시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고, 이 모든 것은 시에도 있습니다.
p24
단테의 경우,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우리는 그가 다른 천문학이 아닌 천동설을 믿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또 다른 세상을 믿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파울 그루삭이 지적한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단테의 말을 아주 깊이 믿습니다. 그것은 ‘신곡’이 1인칭으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문법적 작위가 아니며, “(그들이) 보았다”나 “(그것은) 그랬다”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보았다”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법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즉 단테는 ‘신곡’의 등장인물 중 하나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루삭에 의하면, 그것은 새로운 특징이었습니다. 단테 이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록은 너무 장황한 수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단테의 경향과는 먼 거리에 있습니다. 북부 아프리카 출신의 성인이 사용한 화려한 수사는 말하고자 하는 바와 우리가 듣는 것 사이에 종종 끼어듭니다.
p29~30
현대소설은 우리에게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서 오백이나 육백 페이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단테에게는 한순간으로 족합니다. 바로 그 순간 작중 인물은 영원히 규정지어지기 때문입니다. 단테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중심 순간을 찾습니다. 나는 여러 단편소설에서 그와 똑같은 것을 하고자 했고, 중세때 단테가 발견한 방법 때문에 만인의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암호로서 한순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단테의 작품에는 그런 인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단지 짧은 3행연구로 구성되어 있지만, 영원합니다. 그들은 한 단어나 하나의 행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노래의 일부지만, 그 일부는 영원합니다. 그들은 계속 살아가고 있고, 기억과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다시 새로워집니다.
카알라일은 단테의 작품이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더 많은 특징들이 있지만, 두 가지가 가장 핵심적입니다. 그것은 다정함과 엄격함입니다. 이 두가지는 모순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편 셰익스피어가 “인간의 친절함의 우유”라고 불렀던 인간의 다정함이 이 작품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우리가 질서 있는 엄격한 세상의 주민이라는 것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 질서는 타자, 즉 제3의 화자에게 해당됩니다.
2일 밤. 악몽
p59~62
“어젯밤에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었어요. 몹시 무서웠어요. 하지만 개간지에 도착했고, 거기에 하얀 나무집이 있었어요. 달팽이처럼 꾸불꾸불한 계단이 있었고, 층계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고, 거기에는 문이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 문에서 아저씨가 나왔어요.” 그러고는 갑자기 말을 멈춘 다음,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아저씨는 뭘 하고 있었어요?”
모든 것, 즉 꿈이나 꿈에서 깬 다음의 일도 조카에게는 동일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다른 가정을 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그것은 신비주의자들의 가정과 형이상학자들의 가정입니다. 이 두 개는 서로 비슷하지만 정반대입니다.
미개인이나 아이에게 꿈은 잠을 깬 이후의 일화입니다. 반면에 시인과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잠에서 깨어난 이후의 모든 삶이 꿈일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의 극작가인 칼데론 데 라 바르카는 무미건조한 짧은 말로 “인생은 꿈이다”라고 말했으며, 셰익스피어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꿈과 같은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시인인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는 “내가 내 인생을 꿈꾼 것인가? 아니면 꿈이었나?”라는 멋진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나도 뭐라고 정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은 우리를 유아론으로 이끌면서, 꿈꾸는 사람은 단 한 명이며, 그 사람은 우리 각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만듭니다. 여기서 꿈꾸는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그 꿈꾸는 사람은 이 순간 여러분들을 꿈꾸고 있으며, 이 방과 이 강연을 꿈꾸고 있습니다. 꿈꾸는 사람은 단 한 명만이 있고, 그는 우주의 모든 과정을 꿈꾸고, 세계의 역사를 꿈꾸고 있으며, 여러분들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포함한 모든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과거에 일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순간 존재하기 시작하고, 꿈을 꾸기 시작하며, 우리 각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각자입니다. 이 순간 나는 내가 차르카스 거리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꾸고 있고, 내가 말할 주제를 찾고 있으며, -아마도 그 주제를 찾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 각자가 나를 꿈꾸고 있고,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꿈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꿈이란 꿈을 깬 이후의 부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멋진 생각입니다. 그것은 바로 잠을 깬 이후의 모든 것은 꿈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 활동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그루삭의 글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잠에서 깬 상태로 있을 수도 있고, 꿈을 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 활동은 동일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셰익스피어의 말 “우리는 꿈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p70~71
이제 나는 일부러 시인들을 인용합니다. 그들이 혜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트로니우스는 영혼이 육체의 짐에서 해방되면 놀이를 한다고 말하면서, “육체 없는 영혼은 놀이를 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한편 공고라(Gongora)는 어느 소네트에서 꿈과 악몽은 허구이며 문학의 창작품이라는 생각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꿈은 연출 작가
극장 위로는 갑옷 입은 바람
어둠은 아름다운 몸으로 옷을 입는다
꿈은 연출입니다. 애디슨은 18세기의 원칙에 의거해 잡지 <관객>에 발표했던 훌륭한 글에서 이런 생각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애디슨은 실제로 육체의 족쇄에서 해방되면 영혼이 상상을 하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가질 수 없는 자유를 가지고, 상상의 능력을 지닌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영혼의 모든 작용 중에서(지금 쓰는 말로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지금은 영혼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니까요)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인가를 고안해내는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빨리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과 우리의 생각을 혼동합니다. 우리는 책을 읽고 있는 꿈을 꾸지만, 사실은 우리가 책에 쓰인 각 단어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것을 타인의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나는 수많은 꿈속에서 이 예측적인 과정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다가올 것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과정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p73
꿈은 가장 오래된 미학 행위입니다.
우리는 동물들이 꿈을 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틴 시구에는 사냥개가 꿈속에서 토끼를 뒤쫓으며 짖는 것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꿈은 극적인 순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애디슨은 꿈속에서 우리가 원형 경기장이며, 관객이고, 배우이며, 줄거리이고, 우리 자신이 듣는 대화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하며, 그런 것은 현실 속에서 가질 수 없는 생동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희미한 꿈이나 힘이 없는 꿈을 꾸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 꿈은 아주 생생합니다.
p77
7이란 숫자는 3학(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4과(산수, 기하, 천문, 음악)로 이루어진 일곱 개의 학예일 수도 있고, 일곱 개의 미덕일 수도 있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단테는 그 숫자가 마술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숫자는 이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명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삼일 밤. 천 하룻밤의 이야기
p89
서양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는 동양의 발견입니다. 아니 영속적인 동양의 의식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 역사에서 페르시아의 존재와 비교할 수 있을 만한 것입니다. 이런 광범위하고 정적이며 장엄하고 이해할 수 없는 동양에 대한 의식 이외에도, 여러 중대한 순간들이 있고, 나는 이제 그 중의 몇몇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p96
일반적으로 그 이야기들은 이상한 역사를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인도에서 이야기되었고,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 그 다음에는 소아시아, 그리고 마침내 아랍어로 씌어져 카이로에서 편찬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 하룻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잠시 제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제목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목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천’이란 말이 우리에게 무한의 동의어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 밤이라고 하는 것은 무한한 밤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셀 수 없이 많은 밤들이지요. 그러니까 ‘천 하룻밤’이라는 것은 무한한 밤에 하나를 덧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영국식 표현을 떠올려 봅시다. 종종 ‘영원히’라는 말 대신 그들은 ‘영원하고도 하루forever and a day’라고 말합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에 하루를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여자에게 쓴 하이네의 시구 “나는 당신을 영원히, 심지어는 그 후에도 사랑하리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무한의 시상은 ‘천 하룻밤의 이야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핵심적인 생각입니다.
p98~100
우리는 ‘서양’이란 말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양 문화는 서양의 노력 덕택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서양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두 개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로마는 헬레니즘 전통의 연장선에 있습니다)와 동양 국가인 이스라엘입니다. 두 나라는 우리가 서양문화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합쳐져 있습니다. 동양이 드러났다고 말할 때, 우리는 계속된 드러남, 즉 성경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상호성을 띠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양은 동양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
동양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입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독일어 하나를 떠올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양을 ‘아침의 땅’이라고 부르는 ‘모르겐란트morgenland’라는 단어입니다. 서양은 ‘아벤트란트abendland’, 즉 ‘저녁의 땅’입니다. 여러분들은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서구의 몰락’이라는 책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것은 바로 저녁의 땅이 아래로 향하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보다 무미건조하게 말하자면, ‘서구의 몰락’이 됩니다. 나는 우리가 동양이라는 아름다운 말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안에 금이라는 행복한 우연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야이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는 금이란 단어를 느낍니다. 태양이 떠오를 때면 금빛 하늘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유명한 단테의 시구 “동방의 벽옥 같은 아름다운 빛이”라는 말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 동양이란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양의 벽옥은 동쪽에서 온 벽옥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아침의 황금이기도 합니다. 연옥의 첫 번째 아침의 황금이지요.
동양이란 무엇일까요? 지리적 의미로 정의를 내린다면, 아마도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동양의 일부, 즉 북부 아프리카는 서양에 속해 있다는 것, 혹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서양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집트는 동양이며, 이스라엘, 소아시아, 박트리아, 페르시아, 인도를 비롯하여 그 너머 동쪽의 모든 나라들은 서로 공통점이 없지만 모두 동양으로 여겨집니다. 가령 타타르지방, 중국, 일본과 같은 곳이 우리에게는 모두 동양입니다. ‘동양’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우리 모두가 가장 먼저 이슬람의 동양을 떠올리고, 그 다음에 북부 인도의 동양을 생각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천 하룻밤의 이야기’라는 작품입니다.
p104
그런데 왜 처음에는 천 개의 이야기였던 것이 나중에 천 한 개가 된 것일까요? 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미신적인 것인데(하지만 이 경우, 미신은 아주 중요한 요인입니다), 짝수는 불길한 징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홀수를 찾았고, 다행히도 하나를 덧붙였던 것입니다. 만일 구백구십구일 밤으로 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하룻밤이 빠졌다고 느낄 것입니다. 반면에 천 하룻밤은 우리에게 무한성을 느끼게 해주고, 게다가 덤으로 하나를 더 밭은 느낌을 줍니다.
p117
‘천 하룻밤의 이야기’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거대한 책이라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기억의 일부이며, 또한 오늘 밤의 일부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일 밤. 불교
p122~3
나는 이 세상에 가장 널리 퍼진 이 종교의 정수만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불교의 원리는 기원전 오백 년 전부터 잘 보존되어 왔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제논 시대부터 스즈키 다이세쓰 박사가 일본에 선불교를 보급하는 지금의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원리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이제 이 종교는 신화와 천문학, 그리고 이상한 믿음과 마법과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몹시 복잡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상이한 종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에 한정시켜 말하려고 합니다. 이런 종파들은 대부분 히나야나Hina-yana, 즉 소승불교에 속합니다.
먼저 왜 불교가 그토록 장수했는지 살펴봅시다. 이 장수의 문제는 아마도 역사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들은 우연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논쟁의 여지가 있고 실수를 범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나는 거기에 두 가지의 근본적인 까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바로 불교의 관용 정신입니다. 다른 종교의 경우와는 달리 불교의 특별한 관용 정신은 특정한 시기에만 해당했던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항상 관용적이었습니다.
불교는 절대로 쇠나 불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한 번도 쇠나 불이 설득의 동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불교신자가 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새 종교를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불교신자는 루터교인이나 장로교인 혹은 감리교인 또는 칼뱅교도도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나 가톨릭신자도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이슬람교나 유대교로 개종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 혹은 이슬람교도는 불교신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불교의 관용은 약점이 아니라 불교 자체의 특징에 속하는 것입니다.
p124
나는 이천오백 년 전 네팔에 싯다르타 혹은 고타마라는 왕자가 있었고, 잠을 자고 있거나 인생이라는 기나긴 꿈을 꾸고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그가 붓다, 즉 覺者 혹은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믿었으며,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이스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깨어나길 원하는 악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싯다르타는 서른 살의 나이에 잠에서 깨어나, 그러니까 득도를 하여 붓다가 되었습니다.
나는 불교신자인 그 친구와 함께ㅡ내가 기독교인인지 확신이 없지만, 불교신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신합니다ㅡ토론을 하면서 “기원전 오백 년에 카필라밧투Kapilavastu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왜 믿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가르침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재치에 가까운 말을 덧붙였습니다. “붓다의 역사적 존재를 믿거나 그런 사실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수학의 법칙을 피타고라스나 뉴턴의 생애와 혼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사원에서 스님들의 명상의 주제 중 하나는 붓다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심을 가져야만 진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p135~6
붓다는 쿠시나가라의 대장장이 집에서 숨을 거둡니다. 제자들이 그를 에워쌉니다. 제자들은 그 없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자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역시 제자들처럼 비현실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의 법을 남깁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두 사람이 모인 곳에서 그가 세 번째 사람이 되겠다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반면에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기의 법을 남긴다고 말합니다. 즉 첫 번째 설법에서 그는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던 것입니다. 이후에 불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라마교, 탄트라, 대승불교, 소승불교, 일본의 선불교 등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거의 유사한 두 개의 불교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붓다가 가르친 불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중국과 일본에서 가르치고 있는 선불교입니다. 나머지는 신화로 치장되고 꾸며진 이야기입니다.
p145~6
우주의 역사는 여러 순환의 주기로 나뉘어져 있고, 이런 순환 속에는 위대한 소멸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거나, 베다Veda의 말만 남아 있게 됩니다. 이 베다의 말은 사물을 창조하는 원형입니다. 브라마신 역시 죽어서 다시 태어납니다. 여기에 아주 감동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브라마는 자기의 궁궐에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겁 후에, 그리고 소멸 후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는 텅 빈 침실들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신들을 생각했습니다. 다른 신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브라마가 자신들을 창조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역사를 이렇게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잠시 생각해봅시다. 불교에는 유일신이 없습니다. 아니 유일신이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운명이 업에 의해 미리 예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1899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야만 했고, 눈이 멀어야만 했으며, 오늘밤 여러분들 앞에서 이 강연을 해야만 했다면, 이 모든 것은 나의 전생의 결과입니다. 나의 전생에 의해 예정되지 않은 내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업(카르마)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업은 정신 구조, 아주 미묘하고 정밀한 정신 구조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우리의 삶을 짜고 있으며, 다른 것과 함께 섞어 짜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행동, 우리의 선잠, 우리의 잠, 우리의 비몽사몽뿐만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의 업을 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업을 이어받은 또 다른 사람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p148~151
...다시 말하면, Z라는 글자는 Y에 의해 결정되어 있고, Y는 X에 의해, X는 V에 의해, V는 U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있지만 현재를 시작하게 만든 것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신자들과 힌두교인들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무한성을 믿습니다. 그들은 이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미 무한의 시간을 지나왔다는 것을 믿습니다. 여기서 내가 무한이라고 하는 것은 무기한이나 무수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무한한 것, 즉 끝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에게 허락된 여섯 개의 운명 중에서(누구는 악마가 될 수도 있고, 누구는 식물이 될 수도 있으며, 누구는 동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우리를 구원해야 합니다.
붓다는 바다 밑에 사는 거북이와 둥둥 떠다니는 팔찌를 상상했습니다. 육백 년 마다 거북이는 바닷물 위로 고개를 내밉니다. 그 머리가 팔찌 안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아주 희박합니다. 붓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북이의 머리가 팔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듯이 우리가 사람이 되는 것도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이 된 시간을 이용하여 열반에 도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유일신인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우주를 창조하는 개인적인 신도 없다고 믿는다면, 고통의 원인, 즉 삶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 개념은 바로 붓다가 ‘禪’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
가령 쇼펜하우어의 ‘의지’란 말을 생각해봅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상상합니다. 거기에는 우리 각자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의지가 있으며, 그 의지는 세계라는 표상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이런 개념을 다른 철학자들 속에서 다른 이름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송Bergson은 ‘생의 비약elan vital’이라고 말했고, 버나드 쇼Bernard Show는 ‘생명력life force’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들은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베르그송과 버나드 쇼에게 ‘생의 비약’은 우리가 강요해야만 하는 힘이며,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며 세상을 꿈꿔야 합니다. 쇼펜하우어에게, 그러니까 염세주의자인 우울한 쇼펜하우어와 붓다에게 세상은 꿈입니다. 우리는 꿈꾸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그것은 오랜 노력과 연습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단계가 고통이며, 그것은 선이 됩니다. 선은 삶을 만들어내고, 삶은 어쩔 수 없이 가엾습니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무엇보다도 산다는 것은 바로 생로병사, 즉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붓다가 가장 슬퍼한 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정을 버려야 합니다. 자살은 그 자체가 열정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항상 꿈속의 세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란 환영이며 꿈이고, 인생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실을 깊이 느껴야만 하고, 명상을 통해 그것에 이르러야 합니다. 불교 사원에서 이런 명상 연습 중의 하나는 신참내기 수도승이 자기 인생의 매 순간을 완전히 경험하며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지금은 정오다. 지금 나는 마당을 지나고 있다. 지금 난 주지스님과 만났다.” 그리고 동시에 정오와 마당과 주지스님이 자기의 존재나 생각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불교는 바로 ‘자아’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중요한 명상이 바로 ‘자아’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흄Hume과 쇼펜하우어, 그리고 우리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인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거기에는 주체가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단지 일련의 정신적 상태일 뿐입니다. 만일 내가 “난 생각한다”라고 말하면, 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정 주체와 그 주체의 작품인 생각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흄이 지적하듯이 “난 생각한다”가 아니라 “비가 온다”처럼 무인칭 주어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가 온다고 말할 때, 비가 행위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덥다”, “춥다”, “비가 온다”처럼 무인칭 주어로 “생각한다”, “고통받는다”라고 말하면서 주어의 사용을 피해야 합니다.
(각 언어별 차이 ex) 영어 – 웬만해서는 주어 생략 x / 한국어 – 주어 생략 빈번. 동사만으로도 말 됨)
p155~8
선불교의 명상 주제 중의 하나는 우리의 지나간 삶은 환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스님이라면, 나는 이 순간 막 삶을 시작했으며, 보르헤스가 살았던 예전의 삶은 모두 꿈이고, 모든 세계의 역사가 꿈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정신 수양을 통해 우리는 마음대로 선을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자아가 행복할 것이라거나 우리의 임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평온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열반에 이르면, 더 이상 생각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증거는 아마도 붓다의 전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붓다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이르렀지만, 그는 계속해서 살았고, 오랫동안 자기의 법을 가르쳤습니다.
열반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더 이상 우리의 그림자를 투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업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모두 업이라고 불리는 정신 구조 속에 촘촘히 얽혀 있습니다. 우리가 열반에 도달하면, 우리의 행위는 이미 그림자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선이나 악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을 생각하지 않고 선을 행하면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반은 무엇일까요? 서양에서 불교에 대해 관심을 보인 것은 대부분 이 아름다운 말 때문입니다. 열반이라는 단어가 아주 소중하고 귀한 것을 담고 있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열반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소멸, 消火를 뜻합니다. 우리가 열반에 이르면, 우리 자신의 불이 꺼진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으면 거기에 거대한 열반과 소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오스트리아의 동양학자는 붓다가 당대의 물리학을 이용했으며, 당시에 소멸이라는 생각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왜냐하면 불꽃이란 꺼져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cf. 헤라클레이토스 ‘불꽃’) 불꽃은 계속해서 살아 있으며, 다른 상태로 지속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따라서 열반이란 반드시 지금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열반 후에도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존재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신비주의자들의 메타포는 혼례의 은유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은유는 다릅니다. 우리가 열반을 말할 때, 우리는 열반의 포도주나 열반의 장미, 혹은 열반의 포옹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섬과 비교합니다. 폭풍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있는 섬 말입니다. 물론 정원이나 탑과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
나에게 불교는 박물관의 유품이 아니라 구원의 길입니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습니다. 불교는 이 세상에 가장 널리 전파된 종교이며, 오늘밤 이 주제를 내가 경건한 마음으로 다루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오일 밤. 시
p169~170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틴어로 “발견하다descubrir”는 “만들다inventar”와 동의어입니다. 이것은 새로이 만들거나 발견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학설과 일치합니다. 베이컨은 배우는 것이 기억하는 것이라면, 알지 못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입니다. 단지 우리가 보지만 못할 뿐입니다.
난 무엇인가를 쓸 때면, 그 무엇이 예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 나는 대략 처음과 끝을 알고 있고, 그런 다음 중간 부분들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 부분들을 새로이 만들어낸다는 느낌도 없고, 그것들이 내 자유의지에 종속된다는 느낌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숨겨져 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내 임무는 바로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브래들리Bradley는 시의 효과 중의 하나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것을 기억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p176
케베도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무덤은 플랑드르의 전쟁터이고
그의 비명은 피 흘리는 달이다.
바로 여기에 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 행들은 모호성 때문에 풍부합니다.
p187~9
...우리는 이 시구들이 단지 스페인어로만 말해질 수 있다고 느낍니다. 프랑스어의 소리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라틴어 계열의 언어에 있는 유음화현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랑스어가 형편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다음의 빅토르 위고의 시처럼 훌륭한 시들이 씌어진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L’hydre-Universe tordant son corps e’caille d’astres.
(세계라는 히드라, 별들이 박힌 몸을 뒤틀면서)
어떻게, 다른 언어였으면 도저히 이런 시를 쓰지 못했을 언어를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영어에 대해서 말하자면, 영어는 고대 영어의 열린 모음들을 상실했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단점은 셰익스피어가 다음과 같은 시를 쓰게 만들어주었습니다.
And shake the yoke of inauspicious stars
From this world-weary flesh
이 말은 “세상에 지친 이 육신에서 기구한 운명의 별들의 멍에를 떨어버리겠소”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이 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만일 내가 하나의 언어를 선택해야만 한다면(그러나 언어들을 모두 선택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독일어를 고를 것입니다. 독일어는 영어처럼, 아니 영어보다 훨씬 많은 합성어를 만들 수 있고, 열린 모음과 놀라울 정도의 음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신곡>으로도 충분합니다.
다양한 언어에 수많은 아름다움이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처럼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 아름다움은 도처에서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감성이 예민하다면 우리는 모든 언어로 씌어진 시 속에서 그런 감성을 느낄 것입니다.
p195
이제 어느 시인의 위대한 시구로 끝을 내려고 합니다. 그는 17세기에 앙겔루스 실레지우스(Angelus Silesius, 1624~1677. 독일의 신비주의적 종교시인. <천사의 순례>가 대표작이다.)라는, 이상하게도 시적이고 현실적인 이름을 택한 사람입니다. 이 시구는 오늘 밤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요약해줍니다. 단지 차이라면 나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혹은 논리의 위장을 통해 말했을 뿐입니다. 우선 스페인어로 말하고 나서 독일어로 읊겠습니다.
La rosa sin porqué florece porque florece.
Die Rose ist ohne warum ; sie blühet weil sie blühet.
장미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것은 꽃이 피기 때문에 꽃을 피우는 것이다.
육일 밤 – 카빌라
p203
피타고라스는 자기의 글을 한 줄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자신이 쓴 글에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죽은 후에도 제자들의 정신 속에 자신의 생각이 계속해서 살아 있고, 가지처럼 뻗어나가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거기서, 항상 잘못 사용되고 있는 “Magister dixit”란 말이 탄생합니다. 이 말은 흔히 알고 있는 “스승님이 말씀하셨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논쟁이 마감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피타고라스의 제자가 피타고라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공격을 받았다면, 그는 “스승님이 말씀하셨다”라고 대답했을 것이고, 그 ‘말씀’은 바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책들이 우리를 속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의 말로 하자면, 글자는 우리를 죽이지만, 영혼은 삶에 활력을 준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p216
악을 변호하려는 노력들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먼저 신학자들의 고전적인 옹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악이란 항상 부정문이라고 말하면서 ‘악’은 단지 선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거짓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육체적 고통은 강하며, 그 어떤 쾌감보다도 더욱 강렬합니다. 불행은 행복이 결여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불행에 빠지면, 우리는 비참하게 느껴진다는 것처럼 긍정문으로도 표현됩니다.
아주 우아하지만 동시에 거짓인 또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그것은 악의 존재를 옹호하기 위한 라이프니츠Leibniz의 주장입니다. 가령 두 개의 도서관을 생각해봅시다. 첫째 도서관은 완벽한 책이라고 여겨지고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는 천 권의 <아이네이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다른 도서관은 상이한 가치가 있는 천 권의 책을 장서로 가지고 있고, <아이네이스>는 그 중의 한 권입니다. 어떤 도서관이 더 나은 것일까요? 말할 필요도 없이 두 번째 것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악이란 세상의 다양한 가치를 위한 필요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p218~9
웰즈Wells의 <꺼지지 않는 불>의 줄거리는 ‘욥기’를 따르고 있으며, 그 주인공 역시 흡사합니다. 마취된 상태에서 작중인물은 자기가 실험실로 들어가는 꿈을 꿉니다. 형편없는 실험실에서는 나이 먹은 어느 노인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 노인은 하느님이며, 상당히 화가 나 있습니다. 그는 작중인물에게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힘든 재료와의 투쟁일세”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에게도 악은 다루기 힘든 재료이며, 선은 유순한 재료입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선은 승리하게 되어 있고 승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보라는 것을 믿고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적어도 괴테의 나선형식 진보를 믿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서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우리는 개선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잔인함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제 죄수를 생각해봅시다. 죄수들은 감옥이나 혹은 집단수용소로 이송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들을 생각해봅시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 시절에는 승리한 군대는 패자들을 죽이고, 전쟁에 진 도시는 불태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지적으로도 향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증거는 이 작은 사건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카빌라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에 흥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열린 지성을 지니고 있고, 타인의 지성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우둔함과 막연한 믿음을 연구할 자세도 갖추고 있습니다. 카빌라는 박물관의 유품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사상의 은유이기도 합니다.
p220~223
이제 나는 카발라의 신화이자 가장 흥미로운 전설 하나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골렘Golem입니다. 골렘은 메이링크Meyrink의 유명한 소설에 영감을 제공했으며, 메이링크의 작품은 내가 쓴 어느 시에 대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은 흙 한 줌을 집어서(아담은 ‘붉은 흙’을 뜻합니다) 그것에게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그렇게 아담을 창조합니다. 카발라주의자들에게 그 아담은 최초의 골렘에 해당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 즉 생명을 불어 넣는 말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 만일 누군가가 하느님(디오스Dios)의 이름을 소유한다면,. 혹은 누군가가 하느님의 네 글자 이름에 이르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이름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골렘, 즉 사람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내가 읽은 <카빌라의 상징주의>에서 이 책의 저자인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은 골렘의 전설을 아주 아름답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책이 이 주제를 가장 분명하게 다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골렘은 다음과 같이 탄생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랍비가 하느님 이름의 비밀을 배웠습니다. 아니,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토로 만든 인간의 형상 위로 그 이름을 말했습니다. 이 전설에 대한 어느 판본에는 ‘진실’이라는 뜻을 가진 ‘에메트EMET’라는 단어를 이마에 썼다고 합니다. 그 후 골렘은 주인의 손이 골렘의 머리에 닿지 않을 정도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신발근을 묶어달라고 말합니다. 골렘은 몸을 숙이고, 랍비는 그 틈을 이용해 입김을 불고는 ‘에메트’의 첫 글자 혹은 알레프aleph(히브리어의 첫 번째 알파벳)를 지우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자 ‘메트’, 즉 ‘죽음’이라는 글자가 남게 됩니다. 골렘은 다시 흙으로 변합니다. ...
나는 몇 가지 전설을 언급했지만, 처음의 전설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가장 귀기울여들을 만한 가르침이 그것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극히 작은 신의 입자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능하고 정의로운 하느님의 작품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카발라가 우리에게 남겨주는 가르침은 바로 그것입니다. ... 위고의 시집 <명상록>에 수록된 위대한 시구 “어둠의 입이 외친 것”(신이 우주를 창조했고, 우주가 악을 만들었다는 내용.)처럼 카발라는 그리스인들이 ‘아포카타스타시스Apokatastasis’(원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한다.)라고 부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 심지어 카인과 악마도 기나긴 윤회가 끝나면 되돌아와서 언젠가 그들을 출현하게 만들었던 신과 뒤섞이게 될 것입니다.
칠일 밤 – 실명
p228~9
이제 사람들이 흔히 잊어버리고 지나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나 역시 그런 현상이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장님이 깜깜한 세계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님들이 보는 어둠을 바라보면서”라는 셰익스피어의 한 시구는 바로 이런 생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여기서 어둠을 ‘깜깜한 색’으로 이해한다면, 셰익스피어의 이 시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님들, 특히 여기서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이 장님이 볼 수 없는 색이 바로 검은색입니다. 그리고 볼 수 없는 또 다른 색이 빨간색입니다. ‘적과 흑’, 이것들이야말로 우리들이 볼 수 없는 색입니다. 나는 아주 깜깜해야만 잠을 자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안개와 같은 세상, 그러니까 초록색이나 파란색의 안개가 끼여 있는 세상에서 잠을 자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장님들의 세계는 바로 희미한 빛이 비추는 세계입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빨간색은 희미한 밤색으로 보입니다. 실명의 세계는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밤의 세계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내 이름을 걸고, 역시 눈이 먼 채 세상을 떠나셨던 우리 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름을 걸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들처럼 눈이 먼 채 웃으면서 용감하게 죽고 싶습니다. 수많은 것들, 가령 눈이 멀어지는 것과 같은 것은 유전됩니다. 하지만 용기는 유전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이 용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장님은 매우 불편한 세계 속에서 삽니다. 그것은 확실하지 않은 세상이며, 특정한 색이 나타나는 세계입니다. 나는 아직도 노란색과 파란색, 그리고 초록색을 볼 수 있습니다. 흰색은 사라졌거나, 아니면 회색과 혼동되기 일쑤입니다. 빨간색은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계속 치료를 받고 있고, 그래서 언젠가 시력이 나아져 그 위대한 색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시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그 색, 수많은 언어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고 있는 그 색을 말입니다.
p233~4
조금씩 나는 도서관장과 실명이라는 이상한 아이러니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천국이란 단어를 들으면 정원을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대궐을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바로 내가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여러 언어로 되어 있는 구십만 권의 중심이었습니다. 나는 간신히 책표지와 책등만을 판독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런 후, <축복의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그 누구도 눈물을 흘리거나 비난으로 깎아내리지 말길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하느님의 훌륭한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심경을...
이 두 가지 선물, 즉 수많은 책과 밤, 그리고 그것을 읽을 수 없는 무능함은 서로 모순됩니다.
... 그러나 나는 분명히 우리(그루삭과 보르헤스)의 삶이 일치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두 사람은 시력을 잃었고, 동시에 책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까 우리의 어두운 눈에는 흰 종이와 마찬가지의 책이었고, 글자가 없는 책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으이 아이러니에 대한 시를 썼고, 그 시의 말미에 화자가 복수의 ‘나’이면서도, 단 하나의 그림자로 이루어진 그 시를 쓴 사람이 과연 우리 두 사람 중에서 누구인지를 내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p254~7
나는 실명이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불행하지만은 않습니다. 여기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의 시인인 루이스 데 레온(Luis de Leun, 1527~1591. 스페인 중세 문학에 큰 기여르 한 신비주의자 신부이며 시인) 사제의 시구를 떠올려보겠습니다.
나는 내 자신과 살고 싶습니다.
하늘의 은혜를 입은 미덕을 즐기고 싶습니다.
아무런 증인도 없이 홀로,
사랑과 질투,
증오와 희망과 두려움에서 해방된 채.
에드가 앨런 포는 이 시구를 외우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증오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증오른 느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게도 우리 모두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첫 대목인 “나는 내 자신과 살고 싶습니다./하늘의 은혜를 입은 미덕을 즐기고 싶습니다”를 음미해봅시다. 하늘의 미덕 속에 어둠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시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과 가장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가장 자신을 잘 탐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눈이 먼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작가는 살아갑니다. 시인의 임무는 고정된 시간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여덟시에서 열두 시까지, 그리고 두 시에서 여섯 시까지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항상 시인이며, 계속해서 시의 공격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화가도 색과 모양의 공격을 받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음악가 역시 예술에서는 이상한 소리의 세계가 항상 그를 찾고 있으며, 그를 찾는 멜로디와 불협화음이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술가가 작업하는 데 있어, 실명은 전적으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루이스 데 레온 사제는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를 장님 음악가인 프란시스코 살리나스Francisco Salinas에게 받쳤던 것입니다.
한 작가, 아니 모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든지, 그것이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술가의 경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심지어는 수치와 장애와 불행을 포함한 모든 것은 점토로서, 즉 예술의 재료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 그런 것들은 우리가 변형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처한 비참한 상황으로부터 영원하거나 영원하려고 소망하는 것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만일 눈먼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구원 받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실명은 하늘의 선물입니다. 나는 이미 여러분들을 내가 받은 선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나는 앵글로색슨 말을 선물로 받았고, 스칸디나비아 말도 부분적으로 선물받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과거에 무시했을지도 모르는 중세 문학의 지식을 선물로 받았고, 그런 선물로 여러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책들이 좋은니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씌어진 순간을 정당화시켜 주었습니다. 그것들 이외에도, 눈이 먼 사람은 모든 사람의 애정을 한 몸에 받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장님에게 호의를 베풀어주려고 하니까요.
나는 이 강연을 괴테의 시구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내 독일어 실력은 형편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멀어진다”라는 말 정도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지 않고 인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 해가 지면 가장 가까이 있던 것들이 우리 눈에서 멀어집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내 눈에서 결정적으로 멀어진 것과 같습니다.
괴테는 황혼만이 아니라 인생을 언급하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우리를 떠나갑니다. 죽음이 최상의 고독이 아니라면, 아마도 늙음이 최상의 고독일 것입니다. 또한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멀어진다”는 실명이 천천히 진행되는 과정을 언급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주제가 바로 오늘밤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려고 했고, 그것이 전적으로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운명 혹은 우연이 제공하는 수많은 이상한 수단 중에서 한 가지 수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에필로그
p267~8
보르헤스의 어머니인 레오노르 아세베도Leonor Acevedo는 9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 침대 머리맡에 항상 보르헤스 <전집> 한 권을 보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누구도 그 책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 책을 제외하고는 보르헤스의 집에 그의 책은 한 권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책과 ‘중요하지 않은’ 자기 책들을 뒤섞어 놓는다는 것은 악취미이며, 참을 수 없는 허영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엄격한 태도는 자신의 친구들의 책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몽테뉴가 그랬던 것처럼 보르헤스의 서재는 보르헤스 자신의 거울입니다. ...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거나 아니면 스페인어로 새로 출판된 그의 책들이 도착하면, 그는 즉시 그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합니다. 그의 이런 괘씸한 겸손함 덕택에 나는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영어, 히브리어,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슬로바키아어, 폴란드어, 독일어, 아랍어 드으로 번역된 그의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된 자기의 책도 이런 지경인데, 어떻게 그가 집에 신문 스크랩을 해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강연의 내요을 점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우선 신문 부록을 구해서 복사를 하고, 복사된 내용을 잘라서 흰 종이에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작업은 오자를 교정하고, 옮겨 적는 작업에서 발생했던 실수를 고치고, 강연을 하는 도중에 끼워 넣은 쓸데없는 말들을 가차없이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그 결과물을 보르헤스에게 읽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수년 전부터 나는 보르헤스가 불굴의 책임감을 가지고 자기가 쓴 글들을 검토하고 수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 경우에는 한 구절도 그냥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한 번, 두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이 넘게 나는 각 강연의 문단이나 문장, 아니면 두 개나 세 개의 문장을 읽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는 많은 부분을 삭제했지만, 거의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최초의 생각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
그는 정확한 표현을 추구하고, 감탄스러울 정도의 인내로 정확한 단어를 찾아 사용하고, 거의 대부분 그의 얼굴은 흐뭇해하는 미소를 짓습니다. 그는 강도 높게 작업에 집중합니다. 사용하지도 않을 단어의 어원을 찾으면서 반 시간 이상 보내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는 그 작업을 일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세기에 걸쳐 천천히 축적된 지식을 존중하고, 창조적 모험을 즐기고, 꺼지지 않는 호기심을 느끼는 그의 태도가 바로 그에게 항상 젊은 시절의 열정을 갖게 만든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 그는 어렸을 때부터 눈이 멀게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의 조상 중의 몇몇이 눈이 먼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날카롭고 예의 바른 심리학 교수이며, 보르헤스에게 단순한 “보기”를 들 듯이 신화와 형이상학의 문제들을 이야기하면서 가르쳐주었던 이상한 문화의 불가지론자이고, 보르헤스가 열다섯 살이었을 때 제네바로 데려가 세계의 시민이 되게 만들었던 그의 아버지도 “눈이 먼 채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작업이 끝나고 책 제목을 붙이자, 보르헤스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쁘지는 않군. 내가 보기에 나를 그토록 사로잡았던 주제에 대해서만 본다면, 이 책은 나의 유언장이군.....”
1980년 2월 12일, 아드로게에서
로이 바르톨로메우Roy Bartholom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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