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카로사,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Das Jahr der schönen Täuschungen>

Posted by 히키신
2017. 3. 7. 21:08 글쓰기와 관련하여

한스 카로사,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Das Jahr der schönen Täuschungen>, 2004, 범우사


p11 (글의 시작)

온 세상에 있는 사과나무가 한 그루 남김없이 말라죽고 별로 볼품도 없는 단 한 알의 네트종 씨앗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그 한 알의 씨앗을 분해하고 현미경 검사를 해서 그 정밀한 기록을 후세에 전할 것인가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운을 맡기고 새로운 나무로 자랄 가망은 희박하나마 그것을 땅에 심고 어떻게든 그 결과를 보기로 할 것인가우리들은 때때로 어떤 젊은이의 생활을 묘사하면서 그와 유사한 의문을 제기해 본다언제인가는 존재했으나 다시는 나타나지는 않을 그 생활을그런 유형의 인간은 지금은 거의 멸종되려고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다행히도 예술가들은 정신계에서는 앞서의 두 가지 방법이 서로 결합될 수 있음을 우리들에게 증명해 보여줬다때문에 여기서도 그 방법을 따르고 싶으며또한 인간의 성장을 돕는 여러 가지 소재를 규명하고 싶다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를 친구들의 가슴 속에다 심어 그것이 싹트고 성장하는 것을 기다려 보는 게 더욱 좋을 듯싶다.


P18

옛 사람들을 당신의 가슴에서 떼어 버리지 않기를.” 오토 폰 라이크스네르는 그 편지의 마지막에다 그렇게 썼다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시대를 보았던 내적인 눈으로 당신의 시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당신의 내부를 깊이 파고들어서 당신의 존재의 핵심을 탐구하십시오그러나 절대로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되며 새롭다고 해서 그것을 해결로 보지 않도록 하십시오동경에 넘친 당신의 청춘을 마음껏 즐기되 관능적인 생활에 대한 욕구를 제어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당신이 당신 자신의 내부에서 계획하는 하나하나의 불꽃의 힘이 당신의 찬성의 근원을 기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금욕을 설교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러나 당신은 가능한 한 마음의 순결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P19

요컨대 그는 그 먼곳에서 온 현인(賢人)의 편지에서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을 되풀이해서 읽었으며그 편지를 부적처럼 언제나 지니고 다녔다.


P26~27

오래 전부터 내 기분은 정신이나 미래에서 놀며 항상 거기에서 생명을 탐지해 내었으므로 파우스트나 안티고네편이 나의 조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내게는 까운 존재였다때문에 지금 누가 이 앨범이라는 창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농부의 얼굴이나 관리의 얼굴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 이렇게 생을 즐길 수도 없었으리라고 내게 설득한다 해도 나는 단연 그것을 터무니없는 농담으로 보아 넘겼을 것이다.


P33~34

기존의 사물을 넘어라! 이것이 그 잡지(게젤샤프트)의 모든 시모든 논문을 대변하는 것이었다거기에는 전대미문의 말들의 향연이 있다그것은 새로운 감각새로운 감정일체를 짓밟는 분방한 사랑나신찬앙(裸身鑽仰)의 설교이며 인류를 허탈 상태에 떨어뜨린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항이었다아무리 마른 해면일지라도 그것들의 새로운 관념이 나의 내부로 힘차게 스며 들어온 만큼 물을 빨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P35

사십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그 때의 흥분을 다시 불러일으키려고 하면 그것이 그 후의 내게 얼마나 불길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던가를 확실하게 깨달아진다활자로 인쇄된 것은 무엇이나 확실한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십팔 세 소년에게는 이 새로운 복음의 선포는 유혹의 소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소년은 거기에서 지금까지 염원했던 모든 것을 끌어낼 수가 있었으며 단념이나 분별그리고 특별한 업적도 요구되지 않았으며 무제한한 자유의 향수그것이 지상명령이었다. 가령 그것에 대한 다소의 의심이 내심 중에 일어났을지라도 그것은 삶의 향수로 불러주는 다른 소리에 의하여 완화되었다그것은 가난한 자와 결핍에 괴로워하는 자들을 위한 공분과 동정의 소리였다. 사회가 갖는 암흑의 처참한 밑바닥이 규명되었고만인의 해방과 복지가 위압적인 투로써 요구되었으며그것이 궁극적인 이상으로서 널리 알려졌다경험도 사려도 없는 몸으로서 그것을 읽었을 뿐으로 이미 반은 자신을 피압박 계급의 해방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P38

발터는 잡지를 검은 커버 속에다 다시 넣었으나 별로 기분이 좋은 안색이 아니었다그는 약간 냉랭하게 말했다대도회에서는 모든 것이 전부 쓰여지거나 인쇄되거나 하지는 않는다도착한 첫 날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목을 디밀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그것은 새로운 제복만 입고 있다면 하사관을 만나서도 원수(元首)로 생각하는 신병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고.


P40

()그 강의에 의하여 우리들이 파인애플을 과학적으로 고찰하게 되면 그것이 기다리고 있다그 강의에 의하여 우리들이 파인애플을 과학적으로 고찰하게 되면 그것은 한 개의 응대과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래도 그런 인식은 우리들의 갈망을 가라앉혀 주지는 못한다잠시 후 일꾼이 나타나서 보기 좋은 과실에 칼을 대어 그 조각들을 접시에 나누어 담기 시작하고 그 접시는 사방으로 돌려진다그 동안 교실에는 맛좋은 냄새가 진동한다실제 열매는 다만 상징적인 의식이라고 할 수 있어 각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극히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분배를 받지 못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개개의 학생들은 자기가 그 존경하는 선생에게서 개인적인 만찬에 초대받은 것 같은 느낌이 되어 경건하게 자기에게 분배된 한 조각을 맛보는 것이었다


P43

괴테가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총명하고 분별 있는 장형이 철없는 매제들에게 들려주는 것 같은 그런 취지였다즉 그 매제들이 자라나는 성장의 흔적을 그는 애정으로서 더듬고 그것을 외워 써 두었던 것이다그렇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은 보다 정확하고 냉정하고 예리하게 되어 왔다인식은 눈뜨면서 꿈꾸는 듯한 심정에서보다는 보다 오성의 탐색에서 이루어졌다과학은 생물의 내부조직의 진상을 알기 위해서 그것을 산 채로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는 그런 폭력적인 탐구법도 피하지 않게 된 덧이다스승들은 모두가 공직의 몸이 되어 국가로부터의 위탁자로서 밤낮으로 그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P44~45

그러나 어찌해서 유기체는 존재하게 되었는가-이런 수수께끼를 혼자서 더듬고 있노라면 문득 유년 시대로 돌아가서 생명은 시작이 없는 영원한 것이라는 느낌이 솟아오르는 순간이 있다생명은 열도 한기도 범할 수 없는 나라를 고향으로 삼고 있음에 틀림없다. 가령 가장 맹렬한 회오리바람도 저 정답고 부드러운 광선을 파괴할 수 있기는커녕 휘게 할 수도 없듯이 열과 한기도 생명의 그 영토에 대해서는 어떻게도 할 수는 없다생명이 지구상의 존재로 된 이후로는 그것은 끓어오르는 고열을 피하여 한쪽 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거기에는 일종의 가장자리생명이 존속할 수 있는 부동적인 지대가 있다그 사실은 생명은 항상 위험에 쫓기고 있다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경험과 일치한다오늘날에도 생명은 다만 이 지구의 얇은 외피 위에 번성하고 있을 뿐으로 항상 그것을 잡아 다니려는 저 무섭고 어두운 작열의 지저에 있어서도또 언제나 동경하는 에테르의 한냉 속에서도 그것을 존속할 수는 없다결국 생명에는 하늘의 여러 힘이 참여하고 있어 그것은 단순히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 세계에서 생겼다고 만은 말할 수는 없다먼저 저 불가지의 세계로 이르는 통로가 생명 자체 속에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 때의 우리들로서는 전연 생각할 수도 없었던 사상이었다우리들은 칸트에 대해서도 또 수베텐 보르크나 그 계통의 사람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랐다만약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생명의 발상에 관한 온갖 수다한 학설은 언제까지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천사 같은 순수한 정신의 소유자만이 이 가지(可知)의 세계가 불가지의 세계로부터 생기는 과정을 알 수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해도 우리들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P47~48

이 순간에 또다시 유년 시대에 가졌던 그 기분이 되살아났다밝은 등에 둘러싸여서 관에 누워 있는 시체를 보았을 때의 긴장되고 엄숙한 느낌모든 죽은 자에 대해 그들의 미래의 생명과 평화에 대해 마음을 쓰던 그 당시의 생각이그러나 지금 우리들 앞에 누워 있는 이 죽은 자들은 꽃으로 장식된 저 명예로운 장례에 참여할 기회가 부여되지 않아장식도 축복도 없이 끝없는 죽은 자들의 행진이 해부학 강의실의 문을 지나 계속되는 것이다죽음조차도 다수라는 것으로 해서 무가치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 이것을 보고는 누가 감히 부활을 믿을 것인가. ()내가 완전한 여인의 나체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그런데 그것은 괴멸하고 있는 자의 육체가 아닌가며칠 전까지도 그녀에게 사랑을 바친 남자는 적지 않았으리라이제는 그녀를 위하여 최소한의 매장비용까지도 부담하려는 자가 없다눈을 감겨 주는 자도


P48~49

조직이란 즉 같은 종류의 세포의 결합으로 그 결합에서 각 기관이 만들어진다혈액까지도 우리들은 액체에 의하여 상호간에 결합도 되고 떨어지기도 하는 무수한 세포라 만드는 조직이라고 볼 수가 있다그런데 무엇이 그 무수한 짜임 손(세포)에게 그런 위탁을 하였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일체를 포괄하는 일종의 신령이 모든 경우를 통하여 부성적인 생산력을 갖고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실제의 운영에서는 우리들은 더없는 모성적인 것을 느끼는 것이다감추어진 의도에 따라서 몇 만의 세포가 끊임없이 새로운 형성물을 만들기 위하여 운반되고 동원되어간다그런 경우 일은 신과 같은 인내로서 진행되어 저장고는 언제나 가득 찬다그리고 짜임 손은 아무리 일에 실패를 거듭하여도 끊임없이 새로운 활동을 개시하는 것이다. 

 강의시간은 이해의 기쁨 속에서 벌써 지나가 버렸다. (가령 혐오할 인상이라도 그것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받으며 충실히 학문에 종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남자로서 어울리는 일인가를 나는 확실히 느꼈다만약에 의료직을 맡으려는 자가 타인의 죽음이나 무서운 괴멸을 목격하고 마음의 평형을 잃는다면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의 힘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가령 문외한으로부터 비정의 인간이라고 여겨진다고 해도 그는 다만 자신의 임무를 다하면 되는 것이다물론 미숙한 연배에 있어서는 그런 기분이 태도로서 밖으로 나타날 때는 극히 무례한 형태를 취할 때가 있겠지만 그것은 다만 혼돈의 위력과 유혹에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한 정당방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


P50

그 순간의 일이 내게는 또 다른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겨 주었다그 시체실에 누워 있는 어떤 죽은 자도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는 감정이 나의 내부에서 눈떴던 것이다그 엄숙한 여성은 마치 방황하는 영혼의 안내자처럼 창 가까이에 서 있고 그 창 밖에는 정오의 햇살을 받고 익은 인동 덩굴의 열매가 탐스런 금빛으로 비치고 있었다죽은 자들의 운명에 부드럽고 새로운 빛이 비쳐왔다그들은 각자 독특한 의무와 권리를 갖는 계층에 들어간 것이다그렇다그들은 그들의 해체를 다른 사람과 달리 자연스럽게 맡긴다의식와 미의 사도의 손에 맡김으로서 보다 높은 왕국의 시민이 된 것이다타는 촛불이나 눈물에 젖은 의식 같은 것이 필요없는 나라로


P55

그러나 이 숙독의 폭풍이 그치자 뒤에는 우울만이 남겨졌으며또 무엇인가 다른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어 그것에 따르게 되었다그리하여 우리들은 시대의 흔들림 그대로 책에서 책으로 옮아갔다고대의 위대한 시작이 차츰 우리들의 시계에서 사라져 괴테의 모습까지도 한 때는 멀어졌을 정도였으므로 우리들은 기준을 잃어갔다그러나 뜻하지 않게도 갑자기 데멜의 힘찬 부름이 우리들의 귓전을 울렸다휴고가 어느 주간잡지에서 <들에 어둠이 내릴 때...> 로 시작되는 데멜의 짧은 시를 발견한 것이다우리들은 그것을 베끼고 매일처럼 읊조렸다물론 거기에는 후기의 괴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내용도 있었으나 전체는 설명하기 어렵고 새로웠다이 열두 행의 시에 대해서 무엇인가 설명을 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그것은 다만 항상 아름다우며 삶의 의의를 스치고 심정을 꿰뚫었다.


p59

누구나 자기에게서나 남에게서 이상한 것을 기대했으며 관습적인 것은 그 가치가 의심되었다사람은 종교를 버리고 마술로 뛰어들었고 영원히 감추어져 있는 것에 대한 호기심 그것은 당시 어떤 장소 어떤 방면에서나 퍼져 있었다거기에 모인 사람들 마음속에도 역시 눈떠 있어서 자칫하면 기묘하게 겉으로 나타났다우리들을 휘감고 있는 오관의 음울한 속임을 돌파하고 싶다는 것이 모두의 염원이었다그러나 정상적인 과정으로는 그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일동은 질병을 예찬하며 그것을 천재와 위대함에 도달하는 통로처럼 생각했다그런 뒤틀린 생각에도 일종의 진리의 싹은 감추어져 있었다


p61

 다음 사람은 겨우 급제였고그 중에서 내가 최열등 성적이었다핀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내게는 불가능하였다주위가 나의 안계에서 사라지자마자 그 날의 커다란 체험으로서 프로메티우스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나는 여기저기를 마구 더듬어댔다마침내 정이 떨어진 듯 누군가가 눈가리개를 풀어주면서 반은 농담으로 반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자네는 참으로 둔감하군이끌리는 대로 따르면 되는 거야. 그게 안 된단 말이군.

 이번에는 어느 젊은 조각가의 차례가 되었다.(...)그는 제법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곤 했으나 조각가로서의 재능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풍채의 아름다움특히 그 풍부하고 빛나는 금발 때문이었다한편으로는 거의 승려적이라고 할 만큼 금욕적인 일상생활그리고 이렇게 서로 모순된 두 개의 현상이 상호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점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한 원인이 되었다그는 몇몇 아름다운 여성의 마음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나 그는 사랑의 밤을 지낸 다음 날에는 그의 멋진 두발이 언제나 조금은 그 젊은 황금의 광채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믿었다아마도 그것은 그의 지나친 생각이거나 혹은 다소는 근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어떻든 그는 를 열락의 희생으로 바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때문에 이제는 허영에서 덕성으로 인도되어 그는 여성을 피하며 지내갔다


p83

그녀는 갑자기 내게 약혼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내가 없다고 대답하자 그 대답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여자라는 것을 조심해야 된다고 내게 충고하는 것이었다악마가 악마를 경계하라고 말해주는 저 암흑의 세계우리들은 모두 한 번은 그 세계에 떨어지게 되어 있지만 그 때의 나의 눈에는 아직 그러한 세계는 비치지도 않았다.   


p89

마리아는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뜻이 무엇인가는 나는 알 수가 있었다나는 보겐라이터가인 외가를 본받는 게 현명하다절대로 뱃속을 알 수 없는 어두운 세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본받지 말고이 가계(家系)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관직에 있었던 사람은 없지 않은가이런 사람들은 부인을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결론을 내리듯 말했는데그 선고는 나의 가슴을 뒤흔들었으며 훗날에도 그 말은 마치 저주처럼 내 귀에 되살아나는 것이었다내게 대한 경고로써 친절한 마음씨에서 말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면서도 나의 부계의 성격에 있어서 내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즉 이상한 일에 대한 그들의 야심적인 애호일상성을 뛰어넘어 더욱 자유스럽고 활동적인 세계를 열려고 하는 그들의 노력이런 것들을 그녀는 틀림없이 좋지 않게 보는 것이다나에게는 그렇게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p100~101

-프랑스의 그늘 아래서-


어느 독일의 교육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프랑스에서는 그 문학의 여명기에 언어적 기념비가 하나도 없었다고프랑스는 에다(북유럽의 신화 전설집산문과 운문의 두 종류가 있음)도 칼데발라도 니베룽겐의 노래도 신곡(神曲)도 가진 바가 없다그는 그것을 그 나라의 커다란 결점으로 본 것이다그러나 가령 그런 점이 유감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런 빈곤에서 부에 이르기 위한 부를 퍼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들의 꿈이나 예술활동의 온갖 영역에서 거목과 같은 선인(先人)의 그림자가 없었다는 것이 참으로 그들에게는 단순히 손해였던가그들은 그 보상으로써 이교도와 같이 삶에 대하여 밝고 개방된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현실의 여러 현상에 대해 지대한 흥미를 기울였고 어떤 심연을 앞에 두고도 눈을 감지 않았다동시에 그들은 참다운 인식을 얻기 위해 불꽃 튀기는 노력으로 도취의 능력최고의 것에도 최저의 것에도 일체 고려함이 없이 귀의하는 능력을 갖추었으며 표현의 예리함을 지니고 있다우리들 독일인은 종종 그 예리함에 아연해질 따름이다.(...)

 참다운 독일 시인이면 시인일수록 그가 프랑스의 정수에 완전히 매혹된다고 해도 그것이 조금도 그의 본질을 해치지는 않는다그는 자신의 고유의 것을 그것으로 해서 잃지는 않는다아니이 프랑스산()과의 접촉만이 그의 내부에 깃든 참다운 독일적 요소의 발현을 재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프랑스인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시와 진실>(괴테의 자서전적 소설)을 쓰지는 못했다그러나 그런 작품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루소의 영향이 무엇보다 필요했었다확실히 나는 아르디느가 없었더라도 이 서쪽의 이웃들이 쓴 책에 친밀해졌겠지만 그럴 경우에는 아마도 그 시기가 훨씬 늦었을 거며 생의 열성적인 입김이 스며들지는 않았겠지그러므로 이중의 이국적 매력이 내게 작용했다고 말할 수가 있다.


p104~105

인간도 노경에 이르면 예전에 이러이러한 사람을 만났었다는 사실이 자기에게 좋은 일이었는지 아닌지를 벼로 음미하려고 하지 않는다기껏해서 자기 자신이 미숙해서 사상이 굳지 않았을 때 그것과 교섭을 가지게 된 불행을 슬퍼할 뿐이다. 진실의 영혼이 배경으로 물러서면 악마들이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아르디노도 두 사람의 관계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나 이상으로 고민하였으리라내게는 현실의 부족함을 보충할 공상과 독서라는 것이 있지 않았는가. 나는 그녀의 내부에 있는 그 무엇도 성장시킬 수는 없었으며 그녀도 내 속에 있는 가장 깊은 것을 일부러 깨울 수는 없었다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모두가 그 일을 알지 못했으며 다만 우리들이 왜 좀더 행복하지 않은가를 의심스럽게 생각하였을 뿐이었다.

 세상에는 남자의 순진함과 명랑함에 강력하게 끌리면서도 그에게서 그 특징을 잃게 하려 하고 그런 참다운 면목에서부터 침울한 존재로 만드려는 무의식적인 결심을 하는 여성이 있다얼마 후 그녀는 슬픔에 사로잡힌 남자를 보지 않고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게 된다아르디느는 정말로 그런 여성의 한 사람이었다.


p109~110

도망칠 재간도 없이 어떤 다른 존재에 매어 있다는 것은 실은 자기 암시자기가 자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기묘한 자기 암시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나 멋진 발견이었던가.


p111

아마도 그날 밤 나에게 그처럼 변한 감정을 일으켜 준 것은 실제로 저 만월에 가까운 달이었으리라그것은 거부의 감정이었다죽음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인간이 시체로 변하는 것에 대한 항의인 것이다. 왜 생명소실의 순간에 어느 종류의 결정(結晶)이 물에 녹듯 또는 초가 자신의 빛 속에서 소실해 가듯 참다운 용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들이 겁을 내고 장식을 하며 그리고 땅 속에 숨기는 저 창백한 껍질은 어쩔 도리가 없단 말인가그 방정식에는 무엇인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류가 때때로 느낀다그리고 화장(火葬)을 선택해서 그 해답을 얻으려고 한다


p126~127

(...)그러기 위해 나는 별로 바람직하지는 못하나마 어떤 암울한 책들에서 그 원조를 구하였다그것들은 여성이란 것을 깔보는 시대의 책이어서 무사려했던 청년은 여성이란 언제나 죄악 속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쉽사리 상상을 할 수가 있었다. 아르디느가 대부호 마리한자의 구혼을 물리치고 가난한 독일의 시인을 좇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시라는 것을 우습게 생각했다만약 그녀가 데멜의 낭독회에 참석했더라면 그녀도 반드시 웃음을 터뜨렸던 사람 중의 하나였으리라이것으로 그녀에 대한 판단은 내려졌다우리 인간들이란 어떤 사람을 싫어할 겨우 거기에 따른 그럴듯한 변명을 언제나 할 수가 있지 않은가그러면서도 동정과 연민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녀의 출생에 대한 의심을 입에 내어 피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말하자면 그녀의 지위는 프랑스 여성으로서의 그 지위와 품위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던 것이다.


p132

다소 역설 같지만세인이 말하듯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인의 몽상이 자아내주는 우울하고도 엄숙한 조율에 대해서도 공감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p136

(...)앞으로 정도가 나아지면 응당 받게 될 인상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으나 인생이란 하나하나의 사건에 대해 미리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묻지 않는 법이다


p140

나는 잊는다는 것이 무엇임을 실감할 것 같았다우리들은 매일 음식물에 다소의 물을 섞어야 하는데 그 사람은 한꺼번에 다량의 물을 마셔버린 셈이다


**p144~145

잘 봐 두게나저분은 노년의 괴테를 만났던 노인일세. -나폴레옹의 위엄과 그 몰락만년의 베토벤실러크라이스트헵벨그릴파르차의 희곡휠덜린과 노발리스아이헨도르프와 미리케그 밖의 천재 서정시인들의 작품 <늦여름>(아돌프 슈티푸터의 소설젊은이의 발전상을 담은 작품임)과 <푸른 하인리히>(고트프리트 켈러의 소설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와 비견할 작품>, 헤겔과 쇼펜하우어의 세계고찰베르디온 바그너의 악극프랑스의 위대한 작가와 예술가들러시아와 북구(北歐)의 문호들영화의 발명자연과학의 확충지표를 뒤덮을 철조망전력(電力)의 응용독일제국의 건국적십자조약의 체결의술과 화학의 홍융일체를 삼투하는 방사선의 발견이런 모든 것과 그것에 필적할 그 외의 많은 현상들이 모두가 이 한 세기의 소산인 것이다자랑과 환희의 감정이 현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주고 있다그들은 시대 속의 시대에 살고 있는 자신들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로 여기며 온갖 위해(危害)는 지상에서 말끔히 제거되었다고 믿고 있으나 지령(地靈)은 두 가지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미 이 빛나는 세기에 대해 탄핵자들과 폭로자들이 일어선 것이었다그들은 결코 약자나 비겁자가 아니라 가장 용감한 독수리 같은 인물들로서 그들은 카잔도라(트로야왕 프리아 모스의 딸로서 그리스편의 목마를 서에 넣지 말라고 말렸음)처럼 입을 열어 말을 시작한 것이었다기술의 근면이 낳은 어마어마한 성과데몬 같은 거대한 에너지의 전개 아래서 인류 고유의 그 깊은 소질이 얼마나 쇠퇴되는가를 알았다그리고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을 자유로운 영혼고귀한 중용뛰어난 자에 대한 외경심창조적인 슬픔청춘의 힘을 소생케 하는 아름다움 같은 보배가 상실되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끊임이 없는 속도의 증대에도 일조의 기묘한 평등화가 따랐으며 각계각층이 그걸 느껴 시대가 제공하는 과도함에 불신의 눈을 번득이는 사람들이 때때로 나타났으나 그런 거부의 형식은 비참할 정도로 단순했다. 점포에다 전화기를 설치 않으려는 이름 높은 노 상인초근목피를 복용함으로써 새 시대의 왁진제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타이프라이터가 아니라 붓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뮌헨에서 인스브룩까지의 여행에 급행열차를 타지 않고 일부러 마차를 준비시킨 사람들의 일화가 세인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일단 진행을 시작한 지금 그걸 아직은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완고한 사람들을 사람들은 사랑했다모든 것이 다 상실돼 버린 사람들을 처절한 마음으로 사랑하듯.

 아무리 그래도 이미 되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인간들의 거주지는 나날이 그 거리가 좁혀지지만 사람들의 영혼은 결코 서로 가까워지지는 않았다모든 것을 덮어주는 푸른 하늘이 여러 국민의 안계(眼界)에서 사라지면서 어떤 암울한 영혼이 황금의 미래를 투영하며 불화의 씨를 뿌려 주었다기묘한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에 숨어들어 그들은 서로를 희화(戱畵)로서 보기 시작했으며 두려움에서는 미움이미움에서는 파괴의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이십 세 전후의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그런 변화와 그 결과를 꿰뚫어 볼 수는 없어 경고하는 예언의 외침을 들었으나 그것을 시적 공사의 산물로 해석하고는 흥겨워했다.  


p146

시간이란 과대평가를 조정해 주기 마련이다.


P150~151

리하르트 데멜이 쓴 울분의 시를 끄집어냈던 것이다그 시는 <노동자>라는 제목의 시로서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이었으며 시대적인 근본감정을 담담하고 힘판 필치로 표현한 것이었다부족한 것이 있다면 다만 시간뿐시간뿐! 이라는 말로 그 시의 각 구절은 끝나고 있다그리고 그 전체는 모든 인류의 감정에 조소와 비통에 가득 찬 음조로 그 외침을 들려준다. 노동자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자유롭고 아름다우며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시간 여가뿐이다. 그 시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시를 사랑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미워했다그러면서 그 시가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는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예감을 하지 못했었다실업(失業)이 증대되고 노동자에게 시간이 남아 돌아가게 된 시대가 온 것은 그렇게 먼 훗날은 아니었으므로. ()

 대개 자신의 체험이나 사색에 의해 얻어진 사상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신중하면서도 온화한 태도로 말하지만 기성의 사상으로서 어디에선가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는 항상 성급하게 주장하게 마련이다. (나는 아직도 다정한 혁명가가 실은 가장 끈기 있는 투사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P171

 젊은 사람이 체험담을 기술한다면 그것이 생생하면서도 직접적인 인상으로 넘쳐 있어 대개는 근시적인 성격을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 상례다나이를 먹은 뒤에야 우리들은 존재의 차원을 넓히게 되어 이런 일은 꼭 해야겠고 어떤 일은 그만 두었어야 했을 거라는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사물을 보다 깊이 통찰하기 위해서는 나이를 먹어야 한다.


P180

 이윽고 하인에게 내려진 지시는 간단한 것이었다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죄는 없다그러나 그대의 죄는 너무나 큰 것임으로 내심을 나타내 보일 틀림없는 증거를 내보여야 한다후회의 고통을 피살자 자신이 일깨워 주었으니 그대는 그것을 좋은 표정으로 보아야 한다. 속죄는 아무리 괴로운 일이라도 수행해야 된다그대가 걸어갈 길에 대해서는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어떤 기분으로 거기에 닿는가가 중요하다무거운 마음으로 공포 속에 갇혀 그 길을 가서도 안 되며 유혹자에게 모든 죄를 떠맡기면 마음이 가벼워지겠지 하는 음모를 가져서도 안 된다그대는 영혼을 눈떠 무슨 희생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로 산을 내려가 재판소로 출두해야 된다


P195

나는 리하르트 헤르트뷔히 교수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대개는 그의 탁월한 강의 덕택이었다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수강생의 가슴에다 요점을 새겨주어 그것을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하는 요령을 알고 있었다시험장에서 그가 질문하는 방식도 성실한 연장자가 연하의 동배의 능력을 시험하려는 것보다는 일종의 강의의 연속이었다


P205

아버지가 새 시대의 시인들의 가치를 부정할 때마다 그것이 나의 마음을 그렇게 언짢게 할 까닭도 없었다그리고 만약 아버지가 스트린트베르크나 니체나 데멜이나 몽베르트를 칭찬했다면 그 편이 오히려 내게는 이상했으리라나이가 많은 사람이 평시와 다르지 않은 태도로 젊은이에게 공경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지 못하고 갑자기 젊은이에게 굴복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늙었다는 느낌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P207~209

복종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너의 늙은 아버지가 말하거든 그 말을 듣지 말라그에게 복종하지 말라.” 소년들은  그 시구를 무섭도록 잘 알아들었다잠시 후 그들의 떠드는 모습은 이상스러워져 가기 시작했다그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나무 사이로 끊임없이 뛰어다녔다동생은 계속 웃고 떠드는가 하면 형은 형대로 아버지의 말을 듣지 말라복종하지 말라 하면서 외쳐대는 것이었다이미 시인 양성은 문제가 아니었다나는 어른들이 그날 파사우로 집을 보러 간 것을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아버지가 이 꼴을 본다면 뭐라고 평을 할 것인가.

 그런 혁명적인 시를 낭송한 다음부터는 엄격한 감독자의 역할을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나는 점점 아파지는 마음으로 제자들의 소동을 지켜볼 뿐이었다나중에는 동생 쪽이 아직 제대로 익지도 않은 파란 자두를 보고는 따도 좋으냐고 물었고 나로서는 거절할 틈도 없게 되고 말았다그러나 좀처럼 나무에 기어오를 수는 없었다먹고 싶다는 일념에서 제일 멋진 놈이 달린 굵은 가지를 붙들고 늘어지면 그건 벌써 저만큼 멀어져 있는 것이었다내가 그 모양을 흥겹게 보고 있는 동안 제자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도를 넘었고나는 전신이 마비된 듯 제지할 능력을 잃고 하는 대로 맡길 수밖에 없었다그 때 동생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취한 형 쪽이 헛간에서 톱을 하나 찾아내어 그것을 동생에게 내밀어 주었다악동 두 놈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톱은 나무를 파고들었다그제야 나는 야단을 쳤으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으며 무거운 가지는 이미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악동들은 아우성을 치며 그 귀중한 과일에 덤벼들었다어머니께서 생일에 쓰려고 고이고이 가꾸고 계시는 그 과일에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으나 마음 속으로는 화가 나서 사과주와 설익은 자두는 위 속에서 별로 잘 어울리지 않으리라고 여기고 열심히 그 악동들을 부추겨 그 과즙을 마시게 했다효과는 당장 나타났다잠시 후 동생에 이어 형 쪽이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더니 얼굴색이 노래지기 시작했다형제는 별안간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들이 어떤 상태로 집에 돌아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시인 교수는 그것이 처음이면서도 마지막이 되어 버렸기에그 후 두 소년의 어머니를 몇 번 만났으나 그녀의 양산이나 우산이 언제나 그 장밋빛 얼굴을 가려 내가 아무리 공손하게 인사를 하려 했어도 나의 그런 의도는 실현 불가능이었다.


P215~216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은 자신의 요구에 의해선가 그렇지 않으면 타인에 의해서 인가 라고그는 즉시 내 말을 알아들었다그런 사상은 이런 사람에게 낯익은 것이었으니까그는 비웃음기를 띠우며 머리를 흔들었다물론 좋아서 이런 도박을 시작한 것은 아닐세.

 저도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우리 모두가 아무런 요구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어떤 사람은 좋은 소질을 갖고 어떤 사람은 나쁜 소질을 갖고 말입니다훌륭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도 있어 그 사람들은 좋은 범절을 배우며 해충에도 다치지 않고 잘 자랍니다그 사람의 눈에는 걱정거리는 하나도 없으며 자기의 별을 놓치는 일이 없어 별의 지시에 따라 나아갑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짓밟힌 양친 밑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었습니다아버지가 그 사람의 피 속에다 분노를 낳았다면 그것은 그 사람과 함께 성숙해서 그의 손을 조종합니다때문에 그 손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그러니 어떻게 그 젊은이가 어리석은 머리에 끝없이 떠오르는 나쁜 사념을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그는 얼마나 자신에게서 탈출하고 싶을까요대개 우리 인간들은 언제인가는 그의 병적 충동을 고칠 방법을 발견하겠지만 어떻든 우리들은 그런 사람에게서 몸을 지킵니다그러나 일체를 생각하는 신은 어떻습니까


P219~221

신을 사랑하는 자는 신으로부터 사랑을 되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스피노자의 교훈을 뼈 속까지 느끼는 사람은 극히 소수로 한정되어 있다. 거의 모든 신앙가는 신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개개인을 사랑할 수가 있다고 믿는다그리고 사랑하는 이상은 신이 그 개개인을 미워할 수가 있다는 귀결에 다다른다그들 신앙가들의 생각은 궁극의 진리일 수는 없다그게 그렇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 거신가인도(印度)의 현자라면 인간의 생사는 신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들의 육신을 만들고 있는 억겁의 세포 가운데서 낡은 세포 하나가 죽고 그 대신에 새로운 세포 하나가 생겨난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고 만족할 수가 있겠지만 활동적인 인간에게는 그런 빈틈없는 노인 같은 가르침이 무슨 보탬이 될까. (활동하고 싸우는 인간은 자기의 부름이 영원한 자를 움직여 그걸 자신의 친구로 삼을 수가 있다고 믿어야 안심할 수가 있다그 절대자가 성좌 위에 살든 자신의 가슴 속에 살든. 그러나 그런 자문자답은 다만 희미한 예감으로서 나의 뇌리를 오고 갔을 뿐이었고 그것을 골똘히 생각해서 표현하기에는 나의 힘은 아직도 미숙했다나는 그럴수록 빨리 고뇌에 찬 사람의 곁을 떠나고만 싶었다. ()

대체 주님은 권능한가주님이 사탄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는가그 점에 대해 간단한 교시를 받을 수가 있다면 감사하겠다고 젊은 신학생은 절망적인 몸짓으로 웃었다. (

 신은 악마에게 인정한 범위 내에서만 활동을 허락해 주었다이 세상이 침체하지 않도록 하는 자극제로서 쓰려는 것이다그런 사고는 <파우스트>를 읽은 독자라면 누구든지 납득하지만 자기 아버지에게는 소용없다는 것이 그 동창생의 의견이었다우리들은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결국 납득할만한 논법을 찾아냈다. (지옥의 마왕은 신을 향해 길을 가려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배력도 가지지 못한다만약에 그렇게 강력하다면 하늘에는 이미 오래 전에 태양도 별도 그림자도 없게 되었을 것이다다만 신의 힘과 사랑에 의해서만이 우주는 유지되고 영원히 새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악마는 무슨 일도 건설할 수도 성취시킬 수도 없다그는 다만 파괴하려는 음모만을 심중에 갖고 있는데 그것은 다만 인간 영혼의 파괴만은 아니다이 아름다운 세계 전체도 악마는 파괴하려고 하면서도 파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p226~227

셰익스피어가 재현했던 가혹한 시대의 왕자들은 항상 권력과 위험과의 긴장상태 속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측근자들은 지고의 은총이 아니면 파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왕의 머리에 얹힌 공허한 왕관 속에는 언제나 죽음이라는 환관들이 주권을 쥐고 있다 라고 왕관을 벗으면서 리차드 2세가 했던 말이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로 루트비히 왕이 조그마한 왕국의 왕좌에 오른 때는 이미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다왕의 고결한 의지로 본다면 그는 역시 영웅시대의 왕자였으나 그분이 실제로 만난 것은 단조로운 공리성(功利性)이 지배한 범속한 세계였던 것이다그 세계는 그를 초조하게 했으며 혐오의 정을 갖게 했으나 그의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았다또 왕 쪽에서도 그 세계를 위협할 수도 없었다그는 잔자분한 임무를 경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위험을 내포한 위대한 임무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사 주어졌더라도 대처할 수도 없었겠지만 형편없는 현대와 왕자의 장려한 꿈과의 갈등은 어떻게도 손을 쓸 수가 없어 자랑스런 마음에 남겨진 유일한 길은 고독으로의 몰입이었다그것이 차츰 왕을 현실세계로부터 영원한 자유로 불러냈었다. 그런 왕자들은 물론 정치가로서는 부적합하지만 국민들은 번민하는 그 모습에 포로가 되어 그 모습을 자신의 공상세계에다 맞아들였었다.


p228~229

사회가 해독을 끼치는 자를 배제하는 것도 납득할 수가 있으나 거장 중의 거장인 신이 하잘 것 없는 재료를 갖고도 무엇인가 만들어 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믿어도 좋다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베어져 장작이 되지만 거기에 불붙는 불은 순수한 원소를 유지시킨다그 나무가 지상에 쓰러져서 썩어도 그것은 새로운 성장을 위한 하나의 자양분이 된다자연은 원소를 하나하나 보존하고 이용하며 위대한 예술가는 살인자의 얼굴을 갖고도 마음을 흔들어 주는 상()을 형성한다그러니 신이 쓸데없는 낭비를 한다는 게 있을 수 있겠는가!


p238

그렇다이미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 첫 여인에게로 가는 길을 막는 것또한 모든 가난한 자들의 곤궁보다는 나 자신의 갈등이 내게는 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p240

본원적인 인간이 동경하는 것은 항상 위대한 창시자의 시대이다. 그리고 어느 종교가 확실히 순수한 영향을 주는 것은 그것에 귀의를 고백하는 것이 위험을 의미하는 시대에 한정된다(...) 나는 뜻밖에도 온 생명력이 유년시대의 샘에서 흘러나옴을 느꼈다


p249

오늘날은 저작의 수나 양보다는 시인으로서의 순수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p250

나는 지난 겨울부터 미로를 방황하며 최선의 것을 낭비하고 자기 자신을 추구하려고 하면서도 점점 거기서 멀어져 간다는 생각으로 괴로움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 

하나의 전환기에 산처럼 버텨 서서 혹은 감시하고 혹은 고무시켜 주는 준열하고도 냉담한 정신적 존재는 순수한 예술적 풍성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가끔 그 양면이 한 인간의 내부에서 만나면 한 시대에 대해 잊을 수 없는 성격을 부여하는 여러 가지 힘을 낳는다그것은 애써 세상의 애호를 얻었던 화가의 색을 퇴색시키며 하나의 효소로써 새로운 것의 생성을 촉진시키는 일체의 발아(發芽)를 정지시킨다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심연에 닿을 듯한 아슬아슬한 걸음으로 걸으며 높은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지지 못하는 일들을 멸시한다동시대인들은 그들의 외고집에 대해 무한한 증오나 사랑으로 보답한다


p252~253

시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그의 기성작품들은 점점 애호가를 더 얻게 되지만 새로 태어나려는 작품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친구도 없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아주 멀리에 있는 힘까지도 종종 그런 새싹을 저지하려는 음모에 가담하려는 것처럼 생각된다진귀한 새가 그 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던 곳에서 시대를 향해 노래를 부르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가운데는 반드시 그 노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그들은 그 새의 노래를 듣기보다는 새와 잡담을 하려하며 다른 새들에 대한 비평을 그 새를 기준으로 해서 왈가왈부하려고 든다어느 편이든 그들은 될 수만 있다면 그 새에게서 날개죽지 하나라도 뽑으려 한다만약에 그 새가 그런 식으로 깃털을 뽑히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모르되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간단히 날아가 버릴 무례함을 감행할 용기가 없다면 새는 언젠가는 온몸이 발가숭이가 되어 너무나 잡담을 했던 것 때문에 멜로디를 잊어버리는 수도 있다. (...)

 그녀의 심적 상태를 헤아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혁명적인 것에 대한 공감사회개조에 의한 정의의 나라를 수립하겠다는 선언문에서 얻어낸 듯싶은 어린애 같은 신념도취에 대한 욕구폭풍을 잉태한 강렬한 성격에 대해 느끼는 기쁨그 모든 것은 심층에 있어 뿌리 밑의 허약함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에 의해서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며 부숴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약점이었다. (...) 그녀에게는 그녀의 본질이 무엇임을 끊임없이 지적해서 가르쳐 주는 침착한 연상의 친구가 필요할 것이다.


p267

다시 지난 밤의 은밀한 이야기가 나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다시 손에 책을 집어 들었다그것은 확실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여러 가지 명제에서 몇 개의 커다란 변이(變異)에 대한 예감이 떠올랐으며 이미 알고 있던 것이 한층 잘 이해되었다어느 원소도 미지의 특성이 예감되었으며 괴테의 저술로서 인간계와의 일치가 생각되었다단지 극소수의 물질과만 화합을 긍정치 않는 자랑스럽고 순수한 물질이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활동적인 물질도 있어서 다른 것은 모두가 그것들에 의해 용해되거나 분해되어 버린다게다가 그 물질 자신은 자기를 유지하고 있다또한 다른 물질의 의지를 좌절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물질들도 많으며 타자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그 능력을 발휘케 해주는 물질의 존재도 알려져 있다. 순간마다 세계는 무너지며 또다시 새로운 결합을 한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통괄하는 모든 규칙이 내가 읽고 있는 페이지 위에 써 있는 것이다그것이야말로 정말로 마법의 책이다더욱이 그 때까지 내가 매일 꺼림칙하게 등에 업고 지냈던 것이 아닌가.


p269

자연이 잠시나마 자신을 아무렇게나 취급한다면 우리들의 꽃피어나는 푸른 지표(地表)는 눈도 댈 수 없는 폐허로 화해 버리리라

(...) 외적인 위험성이 적을 때는 사람들은 즐겨 위험한 상태를 공상 속에서 그려보지만 차츰 도회와 친구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된다


p270

아무리 가난하여 친구가 없는 사람이라도 상렬한 영혼과 겸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시에서는 이 지상의 최고 존재나 사물과 깊은 교류를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 언제인가 어떤 천재가 대리석 속에다 불어넣은 사상에 내객이 접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오직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뿐이다. 깊은 뜻을 내포한 그림이 그를 포용하여 그를 일변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나 성좌로부터 축복을 받은 별이 그 빛나는 광선으로 그의 혼에까지 도착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그와 마찬가지다우리들의 감정을 끝없이 움직여 주는 시인의 아름다우면서도 어두컴컴한 시어도 도시에서 태어난 몽상가들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심지어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에 담긴 지식조차 대학의 실험실이 아니고서는 어디에서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p272

여행자가 이삼 일 동안에 얻은 체험 내용은 그것을 정리하고 소화하는데 몇 주일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그가 빨리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여행이 재미가 없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는 자기의 기분을 알아주지 못한다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p279~281

예기치 않았던 달빛이 나의 침상 위에서 조금씩 이동됨에 따라서 나는 우리들이 이 세기의 아들이라는 것과 우리들이 자연계의 인식을 위해 몸을 바친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깨달아졌다은빛 같은 달빛과의 해후에서 느껴지는 은밀한 행복에 그냥 몸을 맡길 것이 아니라 나는 항상 우리들을 돌며 끊임없는 그 천체에 대해 지금까지 읽거나 들었던 몇 가지 일들을 생각해 보려고 했다그러자 내게는 지금껏 그 어느 누구도 이 천체에 대해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학자는 달의 운동을 계산하며 그 높이를 측량하고 시인에게는 달이란 그의 시구를 빛내주는 다정하고 신비한 빛이며 또한 친밀스러운 농담의 기연이기도 하다경건한 사람에게는 달은 아마도 영원한 하늘나라로 가는 도상에 있는 조그만 성당이어서 스스로 갈구하는 영혼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지니리라

 달이 그렇게도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다일생동안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달과의 거리에 상당하는 노정을 답파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도 달세계를 밟은 사람은 아직 없다거기에는 공기도 물도 없으며 따라서 생명도 부패도 없다행위에는 방해됨이 없고 고뇌에도 물들지 않는 침묵의 성역그 달이 우리들을 돌고 있는 것이다지구도 달이 없다면 오늘과 같은 지구는 아니었으리라. 학자들은 달이 지구가 아직 가스 상태나 유동 상태에 있을 때 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들은 기꺼이 그 학설을 믿는다달은 우리들의 일부이나 우리들이 다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기 때문이다달의 내측 궤도에서는 지구의 노래가 통용되나 그 반대쪽에서는 다른 법칙이 통용된다지구의 단단한 핵이 그렇게 가까이에 있는 아름다운 천공의 조용한 소리를 깨달을 때 그리고 이 별이 우리들의 바다에다 조석간만을 만들어 줄 때그 달은 모든 피조물의 다정다감한 마음을 사로잡아 거기다 각인을 찍지 않는가!

 그날 밤 나의 흉중에 오고 간 사념들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는 없다그것은 천문학자들이 달세계를 설명할 때 달에는 중력의 작용이 적다는 말과 관계가 있었다이 구체(球體)는 지구보다 훨씬 적으며 보다 가볍고 섬세한 물질로 이루어졌다거기서는 지상에서보다는 폭넓은 강물도 뛰어넘을 수가 있으며 무슨 물체이든 더 높이 던져 올릴 수가 있을 것이다거기서는 모든 것이 보다 경쾌하며 더 먼 거리를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사색이나 행위까지도 그렇겠지. 지구와 다른 가벼움에 대한 예감 그것이 때때로 스스로의 무거움으로 괴로워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동경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이 아닐까.

(...)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혹은 삼라만상에혹은 자신의 내부에 눈을 돌리고 한밤중의 참다운 영()의 시간이 주는 입김을 느끼는 것이다. 지구가 갖는 영향권의 이정석(里程石), 우리들의 근친인 달그것을 젊은이는 마음속에서 다시 발견하며 그것을 보다 높은 영혼들의 집합점으로 여기고 거기다 인사를 보낸다. 특히 노 괴테와 같은 시인들의 시나 소설에 담긴 지구상의 일들이 너무나 우리들의 마음을 냉엄하게 사로잡아 우리들은 우리의 지식이 이 지구 위에서 획득된 것이라곤 믿을 수가 없다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계시의 발상지로서 무엇에도 허둥대지 않고 달이 갖는 그 정적을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때때로 그런 내면의 정적 속에서 살아간다. 완전히 이 세상과 절연해 본 사람만이 보다 높은 협동정신에 이르도록 성숙한다일체가 보다 가볍고 보다 청순한 그 세계에 살아감으로 해서 우리들은 괴롭고 곤란한 인생사에서 마음속의 소원을 실현할 수가 없었던 고독한 사람들을 좀더 잘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은 계속 그들에게로 가까워질 수가 있다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들 자신의 천성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보상이 아닐는지우리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적으며 우리들의 정신적인 눈은 우리 자신을 직접 인지할 수는 없다때문에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깃드는 가능성을 우리 자신 속에서 개척해 나가야만 한다거기에서 비로소 풍성한 수확이 가능할 것이며 그때 우리들이 지불하는 노고에 의해 우리들의 본질이 무엇임을 가장 빨리 알아낼 수가 있다.


p283

아버지는 조용히 경청하고 있다가 누구나 전투적인 기분몸을 어디엔가 바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는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이데거의 기투성

(...) 우리들은 언제나 위급한 경우를 잊어서는 안 된다남자는 나라가 위급할 때면 하루 아침에 병사로 바뀔 수가 있으나 너는 의사로서 비록 평화스러운 시대에도 해매다 적에 대해 대항해야 될 것이다거기에 너무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니라.” 그런 아버지의 훈계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나는 똑같은 말이 나와 아버지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기가 시작되었음을 느꼈다아버지의 의지는 확고하며 명백하지만 나의 것은 동요하며 위태스럽다아버지는 자신의 처방에 대해 어떤 의구심도 갖지 않으며 나도 기꺼이 아버지의 그런 신념에 따르고 싶다그러나 나의 은밀한 신뢰와 애정은 그런 처방이 필요 없는 창조적인 천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주무시러 나의 방을 떠나는 모습은 아주 괴로워 보였다그리고 아버지는 어떤 큰 기쁨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나만큼은 그렇게 잘 모르고 계셨다.


*작품해설 전통의 수호자카로사 홍경호(전 한양대 교수문학박사)

p286~287

그러나 시대적인 변화와 거기에서 오는 요란한 소리그리고 표현주의의 격정(激情)같은 것들은 그에게는 직접 부딪치지 않고 스쳐서 지나갔을 뿐이다그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초연한 입장에서 독자의 길을 걸어갔다또한 신 즉믈주의 문학에 동참했던 대부분의 작가들이 국외로 망명한 데 반해서 그는 국내에 잔류했었다이런 이유 때문에 괴테의 아류(亞流)라느니 나치에 협력했다는 등의 비난을 받게 되지만 이러한 비난은 그로서는 억울했다가 이토록 세속의 어지러움에서 초연하게 일상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의사로서의 직업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너무나 고귀한 그의 천성 탓이기도 했다.

 그는 의사라는 직분에 지나칠 정도로 책임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작가로서는 괴테의 고전주의에 경도되어 시대와는 관계없이 고전적 필치로 자신의 체험만을 작품화했다이런 연유로 카로사의 작품은 괴테의 그것과 병렬로 비교하고 고찰할 수밖에 없다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카로사는 괴테의 그림자이고긍정적으로 말한다면 카로사는 독일문학의 전통에 가장 충실했던 전통의 수호자라 할 수 있다. (...)

 의사로서 작품을 쓴 작가들은 많다슈니츨러나 고트프리트 벤이나 체호프의 문학에는 의사라는 직업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지만 카로사의 경우에는 그것을 도외시하고는 그의 문학을 생각할 수가 없다그는 의사였기에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보다 깊이 알았으며 그의 심성이 언제나 내적인 평온과 따뜻한 인간애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일찍부터 광포(狂暴)함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했고인생의 비밀을 탐구하는데 일생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