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문 - <죽음 앞의 삶, 삶 속의 인간>
박이문, <죽음 앞의 삶, 삶 속의 인간>, 미다스북스, 2016
4부 실존적 선택과 사회적 규범
01. 실존적 선택 –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p601~2
...인간이라는 존재는 비록 박테리아의 유전자로부터 진화되었더라도, 그 원인이나 이유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지만, 생물학적, 물리학적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윤리적 존재라는 사실과 우주의 궁극적 가치가 적어도 인간의 경우 생물학적 생존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윤리적이란 자신의 생물학적 욕구를 희생하면서 남을 생각하는 마음씨이다. 수치심은 윤리적 결함, 즉 내가 생물학적 나의 욕망을 초월해서 남의 아픔과 기쁨을 생각하지 않는, 즉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물체로서만 존재하는 자기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다. 나의 생존에 대해서 자부심은커녕 수치심을 느끼는 까닭은 나의 생존을 위해 남과의 생물학적, 유전자적 경쟁에서 나만을 위해 수많은 다른 유전자들을 희생시켜야만 했던 사실, 즉 ‘유전자로서의 나’는 비윤리적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 때문이다.
엄격히 따져볼 때 이러한 사실을 단 한 번도 윤리적으로 탓할 점이 전혀 없는 장관, 학자, 사업가, 사회운동, 윤리 운동가들은 물론 공자, 간디, 마르크스, 테레사와 같은 영원한 윤리적 범전으로 살아온 이들에게도 다 같이 해당된다. 비록 그들이 일생동안 윤리적으로 탓할 바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조상 중에 적어도 누군가가 도적질이나 사기나 비겁하거나 잔인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윤리적으로 위대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유전자로서의 그들은 비윤리적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존경쟁이 한없이 거칠고 험악하다. 삶이 삭막하고 살아 있음이 부끄럽다. 세상을 떠나고 싶다.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부터라도 수치스럽지 않은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마치 바퀴벌레처럼 번식하고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실존하는 데 있다. 그것은 나의 유전자가 멸종하는 일이 있더라도 윤리적 주체로서의 나를 끝까지 확인하면서 긍지를 갖고 살아야 함을 뜻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이 차선의 선택인지 모른다.
p613~4
파스칼의 말대로 혼자됨이 없이는 참다운 정신적 만족, 즉 행복은커녕 의미 있는 일을 성취할 수 없다.
p622~3
절대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적 세계관의 틀 밖에서도, 철학적 힌두교, 불교, 도교, 그리고 유교 등을 비롯해서 수많은 비서양적 세계관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생명, 더 나아서는 생명 일반의 존엄성이라는 이념에서 흔히 자살은 부정, 죄악시, 금기 그리고 사회적으로 규탄되어왔다. 그리고 자살 부정의 이유를 인격적 절대신의 존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혹은 자연적 원리로서 찾으려고 했다. 인간의 생명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모든 생명의 존엄성은 형이상학적 혹은 자연적 우주의 객관적 질서의 일부로서 하나의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생명의 존엄성이 객관적 사실이라는 말에는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을 개연성이 있음을 함의한다. 그렇다면 생명존중과 생명존중 행위에 전제되어 있는 생명의 존엄성은 영원불변한 우주의 객관적 질서 원칙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생명존엄성에 위베되는 자살행위를 우주의 질서에 근거해서 규탄하는 논리는 타당성을 잃는다. 둘째,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객관적인 형이상학적 사실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째서 그러한 사실에 부합하게 살아야 하는가의 당위성의 물음이 생긴다. 하지만 사실적 명제로부터 당위적 명제의 유추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살행위를 도덕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죄악시하고 반대하는 어떤 근거도 만족스럽지 않다. 자살행위의 비도덕성 및 죄악성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자살행위에 대한 인간의 부정적 심리적, 정서적, 즉 비이성적 반응의 표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반응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자연스럽고 정직한 반응이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사정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극히 몇몇 사람들을 예외로 하고는 어느 사회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거의 절대적 다수가 자살행위의 도덕적 악과 종교적 죄과를 마치 객관적 사실인 듯이 생각함으로써 자살을 금기시해왔다면 이러한 현상은 어떤 설명을 요구한다.
이 현상에 대한 생물심리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모든 동물의 생물학적인 궁극적 가치 및 목적은 생명의 연장이다. 동물로서의 인간도 ‘인간’이기 이전에 생물학적 동물이며, 한 종류의 동물로서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그의 궁극적 가치와 목적은 자신의 생물학적 생명의 연장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종교적 근거가 없는 한 그의 생명에 대한 본능은 불안하다. 그는 자신의 생존을 정당화하고 의미를 부여할 필요를 의식한다. 그런데 자살에 비친 죽음의 가치 선택은 그의 생물학적 본능에 배치되고, 생물학적 위협의 상징으로 다가오며, 비록 그것이 남의 경우일지라도 자살 긍정은 죽음의 긍정, 자기의 죽음의 가능성과 타당성이라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생존에 대한 본능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한 그는 자신의 자살은 물론 남의 자살도 인정할 수 없다. 자살찬미적 세계관이 어떤 사회나 시대에서도 지배할 수 없었던 것은 극히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빼놓고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생존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생물학적 본능대로 가능하면 오랫동안 생존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자살의 거부는 어떤 객관적 사실의 부정이 아니라 생존을 선택한 자신을 격려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에게 던지는 집단적 구호이다.
P627~8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의 자살이 가치가 있고 정당화되는 것은 그것이 죽음의 찬미가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더 큰 생명을 직접적으로 긍정하는 사회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사회적 복지를 위한 고려와는 상관없이, 직접적으로는 오로지 ‘지조와 의리’ 혹은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정직성’이라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신조에 따라 이루어진 사무라이나 카르멘의 자살이 숙연한 감동을 주는 것은 그러한 도덕성이 간접적으로 사회집단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갖고 있는 중요성에 근거한다. 자살을 무조건 죄로, 죽음을 무조건 악으로만 볼 수는 없다. 어떤 종류의 자살은 죽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삶의 긍정, 인간의 초월성의 증거이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고 생존함으로써 죽는다.
P637~8
‘윤리’라는 낱말은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 영어 ‘ethic’, 불어 ‘ethique’, 독일어 ‘Sittlichkeit’라는 낱말, ‘도덕’이라는 낱말은 라틴어를 어원으로 하는 영어 ‘morality’, 불어 ‘moralit’, 독일어 ‘moralit’라고 쓰는 낱말의 동의어로서 한자로 표시한 것이다.
위의 두 개념들과 가장 유사한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개념으로서 인륜 및 ‘도道’라는 한자들을 골라낼 수 있지만, 이 두 개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개념들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개념들이며, 따라서 신조어였으며 오늘날에는 동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개념으로서 인륜이라든가 도라는 낱말보다도 더 보편적으로 ‘우리들’의 말로 유통되고 있다.
도대체 윤리와 도덕은 동의어인가, 아니면 그것은 각기 무엇을 뜻하는가? 윤리라는 낱말의 어원인 그리스어 에토스ethos라는 말과 도덕이라는 낱말의 어원인 라틴어 모랄리타스moralitas라는 낱말이 원래 다같이 ‘풍습’ 혹은 ‘관습’을 뜻했었다는 것으로서 알 수 있듯이 윤리와 도덕이라는 낱말은 원래는 동일한 뜻을 갖고 있었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윤리,도덕적으로 산다는 것, 즉 정말 인륜에 맞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윤리,도덕적 판단의 잣대는 무엇인가?
p639~640
하지만 한 독립된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기존의 전통에 맞게, 사회적 관습이나 풍습을 따라가는 행동과 삶이 윤리-도덕적이기는커녕 그와 정반대로 오히려 비윤리-비도덕적으로 의식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생긴다. 실제로 인간사회의 도덕적 발전은 한 개인 아니면 소수의 개인들이 기존의 사회적 행동의 관습과 전통적 규범을 전복하고 개인이 새롭게 만든 원칙 그리고 새롭게 꾸민 관례를 세움으로써 가능했다.
윤리와 도덕이 구별되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두 가지 종류, 즉 사회적 및 개인적 행동의 관습과 원칙의 구별에 비추어 설명될 수 있다. 윤리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존의 행동 관습과 범례를 지칭하고, 그러한 것에 맞는 행동을 ‘윤리적’이라 할 수 있다면, 도덕은 개인이 실존적 주체자로서 자신이 선택한 행동의 원칙과 자신이 만들어낸 관례를 지칭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행동의 원칙과 관례, 즉 ‘윤리’에 대립하게 되더라도 자신이 실존적으로 선택한 원칙과 관례에 맞는 행동의 성격을 지칭한다. 윤리가 한 추상적 인간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규정한 무기명적 행동의 원칙과 규범이라면, 도덕은 한 구체적 개인이 실존적으로 선택한 아주 개인적인 행동의 원칙과 규범이다. 이런 점에서 ‘윤리적’인간은 기존사회의 질서에 적응적이고 따라서 보수적인, 즉 집단의 일부로서의 사람이라면, ‘도덕적’인간은 기존 사회에 비적응적이고, 기존 질서에 개혁적인, 즉 집단에 감성적으로 맞서는 대립적 개인이다.
p642~3
<논어> ‘자로’(13.18)에 윤리와 도덕의 관계의 차이에 대한 공자의 깊은 견해는 염소를 훔친 아버지를 고발한 아들의 도덕-윤리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염소를 도둑질한 아버지를 고발한 아들을 정직한 사람의 예로 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아들의 행동을 정말 옳은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제자 공엽의 질문에 대해 스승 공자는 “우리 고장에서는 아비는 아들을 위하여 숨기고, 아들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는 것을 곧은 것으로 믿는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공자의 위와 같은 말은 뜻밖의 것이다. 곧음, 즉 정직함은 정신적 가치이며, 모든 가치판단은 반드시 어떤 규범을 전제하고, 모든 규범에는 보편적 적용이 요청되므로 사회적 및 객관적 성격을 갖추어야 하는데, 공자가 제시하는 행동의 원칙은 사적 원칙으로서 원천적으로 보편적 적용이 불가능하다. 모든 이들이 사적 관점에서 공평성을 위반하여 경우에 따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범을 위반한다면, 그 규범은 규범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공자의 뜻밖의 대답에는 법, 윤리, 도덕의 각각의 본질과 그것들 간의 관계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명제가 담겨 있다.
첫째, 도덕의 본질이 사회적으로 입법화된 규범으로서의 실정법 혹은 비입법화된 규범으로서의 윤리와 개인이 자신의 실존적 결단에 따라 선택한 규범으로서의 도덕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명제와, 둘째, 두 가지 규범이 갈등할 경우가 있다는 명제와, 끝으로, 셋째,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법과 윤리는 도덕적 규범, 즉 개인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행동 규범에 비추어서만 정당화된다는 명제이다. 첫째 번 명제는 맞는다.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법 혹은 윤리적 규범이 그 사회의 한 구성원인 개인적 관점에서 볼 때 행동규범으로서의 도덕적 신념과 다른 것은 문명권을 달리하는 사람들 간의 윤리-도덕적 신념의 상대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사회의 구성원들 간에도 윤리-도덕적 가치판단의 차이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둘째 번 명제도 맞는다. 윤리-도덕적 신념과 판단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문명권들 사이에서나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 사이에는 언제나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경우 서로 상충해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셋째 번, 즉 도덕적 판단, 즉 개인이 선택한 행동의 규범과 그것에 전제된 인간으로의 가치관이 사회적 관습으로서의 윤리와 그러한 윤리의 공식화를 뜻하는 공적 법에 시간적으로 선행하고 논리적으로 전제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도 맞는다. 한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행동규범으로서의 법은 그것이 제정되기 이전에 이미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행동의 관습이나 관례를 공식적으로 반영한 것에 불과하며, 그러한 풍습이나 관례, 즉 윤리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각기 은밀한 사적 심성 및 주관적 가치관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법 및 윤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 한편으로는 사회적 규범과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 규범 간의 위와 같은 긴장된 관계에 비추어서만 한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법의 끊임없는 개정 및 사회적 풍습과 관례의 부단한 변화를 설명하고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철학적 탐구작업을 해봐도 좋을 것 같다.
p653
개인적으로 나는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기를 바라는가?
5부 인간과 인생에 관한 성찰
01.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p756
...그렇다면 인간다운 삶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지식? 권력? 부귀? 사회적 명성? 인류에대한 공헌? 쾌락?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죽은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 무명으로 살다 사라진 일자무식의 농부, 가난한 노동자, 돈벌이에 바쁜 동대문시장의 상인들, 평범한 직장인 등에서도 인간다운 인간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무식, 나약, 가난, 무명, 무능, 고통도 ‘인간다움’과 배치되지 않는다. 인간다움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려는 심성, ‘개’같이 되기를 거부하는 의지이며, ‘인간다운 삶’이란 ‘동물’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확인해줄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삶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인간으로서보다는 개처럼 살고자 하는 본능의 유혹에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혹을 극복하고 인간답게 살 때 우리의 죽음은 꽃으로 피어나고, 그 꽃의 향기로 허무한 인생은 충만한 존재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 <라 쁠륨>, 1999, 가을호
02. 인생 텍스트론-인생이란 무엇인가
p766~7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을 언어로, 인생을 텍스트로 볼 수 있는가? 보석 상인한테는 약간의 상품 가치밖에 없는 금반지가 그것을 주고받은 부부한테는 둘도 없는 귀중한 의미를 갖고,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한테는 한낱 돌조각에 지나지 않는 불상이 불교신자에게는 무한히 중요한 정신적 실체로 보일 수 있듯이, 물리적으로 동일한 것도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로 나타날 수 있다. 1)山是山, 水是水, 2)山不是山, 水不是水, 3)山是水, 水是山 4)山是山, 水是水라는 하나의 유명한 선시禪詩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1)의 명제와 4)의 명제는 문자적으로 동일하지만, 후자는 전자에서 나타난 실체와는 전혀 다른 실체를 나타내고 있다. 똑같은 ‘산’과 ‘수’를 함께 보면서도 후자와 전자는 서로 전혀 달리 보고 있다는 것이다. 똑같은 인식대상이 전자의 경우 지각적 존재로 파악된 데 반해서, 후자의 경우 형이상학적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 인간/인생이 지각적/과학적 인식 대상, 그리고 과학적 설명대상이 되지만 그것은 언어/텍스트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논리적 개연성이 아니라 당위성이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관찰하고 체험할 수 있는 인간/인생은 설명되지 않는다.
p770~2
인생이란 곧 소설임을 말하며, 각 인간의 삶이란 각자 다른 소설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내 자신에게 던질 때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변하고, 이 물음은 정확히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로 되며, 이에 대한 물음은 결국 ‘나의 삶이 어떤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바뀐다. ...
부처, 예수, 공자나 네로, 진시황이나 히틀러가 살았던 인생을 각기 그들이 창작한 소설/이야기로 본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가? 그것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태도, 생각, 행동,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모든 사실과 사건들을 뜻한다. 그러나 모든 것들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서, 즉 ‘나’혹은 ‘예수’혹은 ‘공자’의 시각에서 볼 때 각기 그들의 태도, 생각, 행동,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모든 사실과 사건들이 논리적으로 더 연관성을 갖추어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더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인생은 한 백치가 들려준 이야기이다’라는 말은 바로 인생에 대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해준다. 한 인간의 본질이 그의 주체성을 의미하고 한 인간의 주체성이 그 삶의 어떤 통일성을 지칭한다면 ‘백치가 한 이야기’같은 인생에서 ‘주체성’이란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직 인생 전체를 통해서 어떤 통일된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는 인생일 경우에만 그의 삶은 비로소 정체성, ‘자아’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 인간의 삶이 텍스트인 이상 어떤 텍스트이건 모두 최소한의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논리적 일관성을 띤다. 또한 어떤 텍스트일지라도 그것의 구성 요소들의 논리적 관계가 완전히 맞추어지기에는 인생이란 텍스트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너무나 많고 복잡하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생의 텍스트가 내포하는 이야기는 셰익스피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완전 백치의 이야기도 아니며, 그와 동시에 전지전능한 신의 이야기도 아니다. 따라서 언제나 정도의 차이를 막론하고 다소 애매모호하고 그만큼 난해하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정체성, 즉 한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해 누구나 결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주장은 지나친 독선/독단이다.
p773~5
인생이 텍스트 쓰기이며, 인생의 의미가 텍스트적으로만 해석되고, 인생의 가치가 텍스트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면 각자 인생의 의미는 그가 죽는 날에야 끝을 맺게 될 소설/텍스트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어떤 텍스트를 써서 어떻게 끝을 맺을까의 문제는 각자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따라 어떤 주제를 어떻게 선택하여 실천에 옮기느냐에 달려 있다.
이 점에서 인간적 삶의 의미를 소설/텍스트로서 발견할 수 있고 이런 텍스트의 의미를 아름다운 꽃에 비교할 수 있어도, 텍스트 쓰기로서 인생은 꽃피는 과정과는 다르다. 한 꽃나무가 어떤 꽃을 피울 수 있는가가 자연의 원리에 의해 이미 결정된 데 반해, 자신이 어떤 인생 텍스트를 쓰는가는 오로지 나의 자유로운 실존적 결단에 의존한다. 오직 나만이 내가 죽는 날 끝을 내야 하는 소설/텍스트의 책임자이며, 내 인생의 의미 내용, 즉 가치의 책임자이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텍스트 쓰기는 죽을 때까지 창작자로서 각자 ‘나’를 부단히 긴장하게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긴장에서만 나는 창작자로서 자부심을 아울러 체험한다.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곧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며, 이는 곧 ‘더 가치 있는 소설/텍스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풀이될 수 있다면, 어떤 소설을 어떻게 써서 어떻게 끝을 내야 하는가의 문제는 오로지 각자 자신의 텍스트 쓰기가 자신의 자유로운 가치선택, 즉 어휘와 구성에 대한 자신의 선택 및 그것을 이행하려는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 ...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특수한 형이상학적 존재양식에 근거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똑같이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자연에 내재immanence, 즉 자연 속에 폐쇄되어 갇혀 있지만 자신이 쓰는 텍스트와 그것의 의미는 결국 각자 자신이 책임을 지고 창조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또한 자연을 초월transcendence하여 다른 사람, 다른 존재에 무한히 개방적으로 열려 있다. 즉 인간의 본질은 자율성에 있다는 말이다.
인간 존재양식에 대한 이런 사실은 존재 일반에 대한 형이상학적 결론을 도출한다. 적어도 인간만은 물질적 존재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러한 존재를 내포한 우주에 대한 총괄적 설명은 유물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구가 우주의 물리적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인정하면서도 ‘역시 지구는 우주의 형이상학적 중심이다’라는 언뜻 보아 모순된 헤겔의 명제는 옳다. 인간은 그냥 존재하지 않고 의미로서 존재하며, 그러한 인간에 의해 우주 전체도 그냥 존재하지 않고 무엇인가의 의미로서 존재한다. 이 점에서 ‘물리적으로 인간은 우주 속에 포함되지만 자신의 머릿속에 우주를 넣고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은 우주보다도 더 크다’는 파스칼의 역설적 주장은 말이되고 또한 옳다.
<철학과 현실>, 1995, 봄호
03. 아직 쓰이지 않은 텍스트
p779~782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위와 같은 사실을 새삼 시적 언어로 압축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의식, 즉 인지되지 않은 존재는 의미가 있을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 언어 이전의 다양한 의식, 즉 지각-경험-세계-존재, 그리고 의지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기unintelligible’ 때문이다. 언어는 세계와 독립해 존재하며 세계를 표상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 자체가 이미 언어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에 의해 구성되기 전의 존재, 세계 그리고 경험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이른바 언어 이전의 ‘객관적’존재들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말할 수 없는 혼돈상태로 ‘무의미한’채로 어둠 속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어둠은 언어의 빛으로 밝아지고 비로소 ‘의미의 질서’를 갖고 인간 앞에 ‘나타나게aletheia’된다. 언어의 근원적 가치는 도구적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 내재적으로 귀중한 가치인 광명이기도 하다. 인간이 그냥 물질이나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후자가 혼돈의 어둠 속에 그대로 갇혀 있는 데 반해서, 전자는 질서의 빛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빛, 즉 투명성은 의미의 꽃과 향기를 창조해낸다. 인간의 본질은 의미를 찾는 데 있다. 따라서 모든 것에 대한 투명성은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이상이다. 이러한 이상의 실현은 인간이 언어를 발명함으로써 그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은 끝이 아니다. 언어의 발명은 한밤중에 켜진 작은 촛불에 비유된다. 세계, 아니 존재 일반은 거의 전부 아직도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다. 그만큼 세계와 인간의 삶은 혼돈에 빠져 있다는 말이며, 이런 것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인간은 질서를 찾으려 하게 된다. 혼돈이 불안을 조성하고 불안이 자유를 약탈한다면, 질서는 안정을 가져오고 안정은 자유의 뿌리가 된다. 그러므로 언어에 의한 세계 질서의 건설은 곧 안정과 자유의 획득을 의미한다. 내가 어려서부터 말에 매료되고 언어-글-시-문학-책이 나를 매혹시키고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내가 안정을 얻어 불안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획득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
경험/사고는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언어에 선행하며 그것들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독립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험/사고와 언어는 완전히 독립할 수 없고 경험/사고는 그것이 곧 언어적 활동이며, 글을 쓰는 이유는 기존의 경험/사고의 표현이나 전달에만 있지 않다. 글로 써지기 전까지는 경험/사고가 의식활동이니만큼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유동적이며 불확실하며 막연한 채 남아 있으며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러한 경험/사고의 내용이 더 복잡해지고 세밀해지면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경험/사고라는 주관적 의식 활동이 문자로 종이에 기록되어 객관화됨으로써 경험/사고의 내용이 그만큼 확실해지고 섬세하며 복잡한 차원으로 발전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경험/사고를 언어로 기록하는 이유는 고도의 경험과 사고를 하자는 데 있다.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근본적 이유는 좀더 잘 생각하고 세계와 인생을 좀더 잘 인식해보자는 데 있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더 정확히 생각하고 세계를 더 잘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글쓰기에 대한 욕망의 근원에는 진리에 대한 깊은 숨은 욕망이 깔려 있다. ... 나는 왜 시를 쓰려 했고 문학을 하려고 했으며 철학을 하고 있는가?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 자신과 세계를 더욱 투명하게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다.
p785
인간은 좀더 바람직한 생활 여건의 조성이라는 실용적 요청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순수한 정신적 요청에 의해서 세계와 자신을 투명하게 파악하려는 지적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은 곧 인식적 요청을 뜻하며 인식은 의식의 ‘객관적 사물현상’의 ‘주관적 관념화’로 서술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과정이 언어적 기록에 의해서 ‘의미’의 질서를 갖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글쓰기는 객관적 대상/세계나 주관적 의식/경험을 언어-기호로 서술, 즉 표상 혹은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의미를 기록하는 작업이다. 객관적 대상/세계나 주관적 의식/경험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그 속성을 본질적으로 달리하고 있을지 모르나 다 같이 ‘실재’하는 무엇을 지칭한다는 데는 아무 차이가 없다. 그것들은 다 같이 ‘존재론적 질서ontological order’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각/의식을 거쳐 언어로 서술 기록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것들은 존재론적 전환을 이루어 ‘의미론적 질서semantical order’로 고정된다. 그러므로 글쓰기란 결국 ‘존재’의 ‘의미화’에 지나지 않으며 인식/앎은 오직 의미적 세계에만 속한다.
여기서 인식의 풀리지 않은 역설이 드러난다. 그것은 인식대상과 인식된 것, 존재 질서와 의미 질서, 즉 글로 쓰여지기 이전의 존재론적 질서와 글로 쓰여진 의미론적 질서 사이의 자기모순적 관계이다. 인식은 필연적으로 인식의 주체로서의 의식과 그와 별개의 대상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인식대상은 글쓰기 속에서 ‘의미’로만 나타난다. 인식의 결과 ‘의미’만이 남게 되고 그것은 결국 대상의 증발을 뜻한다. 인식대상으로서 객관적 세계, 객관적 존재는 어느덧 내가 ‘무엇 무엇으로서’글로 써서 의미로 파악한 것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입장 혹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세계는 내가 또는 인간이 관념적으로 파악한 세계인 ‘의미’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인식에 대한 전통적 인식 모델은 인식을 일종의 객관적 대상의 의식 복사複寫 혹은 반영反映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에 있어서 위와 같은 점들이 사실이라면 인식에 대한 고전적 모델은 틀렸다. 인식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객관적 대상의 마음 속 복사나 반영이 아니라, 그러한 대상의 글쓰기로 이룩하는 주관적/관념적 조직이며 구성이다. 이런 점에서 인식은 발견이 아니라 제작이다.
p794~5
앞서 거듭 강조했듯이 어떤 객관적 존재도 그것이 언어로 기술되기 이전에는 인식될 수 없다. 언어, 더 정확히 말해서 텍스트로 전환됐을 때 비로소 객관적 세계는 인식된다. 그러나 인식의 구체적 내용은 비관념적 존재의 관념화, 존재적 질서의 의미적 질서화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인식의 구조는 인식된 세계와 인식 이전의 세계가 결코 동일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인식의 궁극적 목적은 인식 이전에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자는 데 있다. ‘진리’라는 말의 궁극적 의미는 다름 아니라 바로 이러한 존재 파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인식은 만족될 수 없는 인식이며 모든 진리는 필연적으로 진리가 아니다. 시적 글쓰기는 바로 이러한 인식의 역설적 구조의 자의식에서 비롯된다. 시적 텍스트는 철학적 텍스트로 표상/인식될 수 없었던 객관적 존재/세계를 좀더 만족스럽게 표상/인식하기 위해서 고안된 새로운 언어/세계의 구성의 시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세계/존재를 파악하기 위한 글쓰기가 ‘철학적’에서 ‘시적’으로 바뀌어가면 갈수록 그렇게 쓰여진 텍스트의 의미는 그만큼 애매모호, 즉 ‘시적’이 되며 인식이 추구하는 투명성과 체계성에서 멀어진다. 따라서 글쓰기는 시적, 즉 애매모호한 비개념성을 탈피, 그곳에서 멀어져 철학적, 즉 좀더 개념적으로 될 필요성을 느낀다. 이렇게 볼 때 이상적 글쓰기의 작업은 철학적인 것도 아니며 시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두 가지 글쓰기를 무한히 번갈아 반복하는 작업이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궁극적인 글쓰기는 페넬로페의 끝없이 되풀이되는 옷 짜기와 같다. 페넬로페는 남편 오디세우스가 없는 동안 자신을 아내로 삼으려는 청혼자들로부터 시간을 벌며 남편이 살아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 한낮에 실로 짠 옷을 밤이면 다시 푸는 작업을 한없이 반복했다. 철학적 글쓰기를 페넬로페의 옷 짜기에 비유할 수 있다면 시적 글쓰기는 자신이 짠 옷의 실을 풀고 있는 페넬로페의 작업과 같다.
04. 삶에 대한 태도
p801~4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긍정적인 자세는 삶 자체의 존엄성을 전제로 한다. 가을이 되면 시들어 땅에 떨어지는 한 포기의 꽃이 귀하다 한다면, 4,50년이라는 세월을 고생만 하다 죽어간다 해도 인간의 삶 자체는 모든 이유를 초월하여 귀중하다. 어떻게 해서, 무엇 때문에 한 포기의 꽃나무, 한 인간의 삶이 태어났느냐는 문제는 영원히 신비에 가려져 있다. 그러기에 그 꽃나무, 그 인간의 삶은 그만큼 귀하고 숭고한 의미를 갖는다. 삶 일반, 특히 인간의 삶을 떠나서 무엇이 의미가 있으며, 무엇이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삶 일반, 특히 인간의 삶을 떠나서 모든 존재는 그 뜻을 잃는다. 삶이라는 관점에서만 모든 사물들은 비로소 그 질서, 그것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삶이야말로 가치 중의 가치, 즉 절대적 가치가 된다. 이와 같은 삶의 성격, 이와 같은 삶과 그밖의 사물현상들과의 관계를 의식할 때 우리는 새삼 삶의 존엄성, 궁극적 존엄성을 의식한다. 삶은 우리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을 지니고 있다. 삶의 신성한 존엄성을 의식할 때 삶을 아끼고, 가다듬고, 충만한 것으로 만들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논리적 필연성을 갖고 있다. 한주일밖에 피어 있지 못하더라도 한 포기의 꽃의 아름다움이 의식될 때 그 꽃을 보다 잘 간직하고 감상하고자 하게 됨이 당연한 이치인 것과 같다.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 더 귀한 것은 없고, 살아간다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삶은 모든 가치의 근원,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언뜻 보아서 우리들 모두가 동시에 갖고 있는 또 다른 모순된 태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인생을 고해로 보는 입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 뿌리가 깊다. 그것은 기독교, 힌두교, 불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생각이며 고대 그리스의 이른바 금욕주의자들의 확신이기도 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삶은 절대적 가치는커녕, 아무 가치도 없는 것, 우리가 극복해야할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볼 때 그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 빨리 자살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역시 고해라고 보는 삶에 끝까지 애착을 갖고 하루라도 더 살려고 애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들 역시 죽음보다는 삶이 귀중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반증해준다. ... 이른바 삶의 고통은 힘이 들고 몸에서 땀이 나지 않고는 테니스를 치는 즐거움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에 비유될 수 있다. ...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객지에서 이민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소외감이라는 심리적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부딪친다. 공을 열심히 쳐서 백발백중 목표지점에 명중시킨다 할지라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치는지가 의심스럽게 여겨지기도 하고, 열심히 삶이라는 배를 저어 끝없는 바다에 침몰하지 않고 떠가다가도 어디로 향하여 가는지를 의심하게 되는 괴로움을 면하기 어렵다. ... 사회의 한복판에 참여하여 발언하고 사는 게 아니라 그 주변 그늘에서 안일한 그날그날을 보내왔다는 느낌을 완전히 청산할 수 없다. ...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이든 간에 우리는 이곳에서 살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귀중함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싫든 좋든 우리의 삶과 사회의 객관적 현실을 냉정히 인정하고, 그런 바탕에서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하고 삶의 보람을 창조해야 한다. 우리의 상황이 남들보다 불리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도록 애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산다고 해도 문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 애써야 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데 있다. 아름다운 꽃은 적절한 조건에서는 저절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마련이지만, 불행히도 인간은 꽃과는 다르다. 나의 인성이 아름다운 한 포기의 꽃처럼 되기를 원한다 해서 나는 저절로 그런 꽃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나의 삶이 한 포기의 꽃으로 피기 위해서는 나의 부단한 노력과 지혜를 필요로 한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인생의 꽃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거꾸로 ‘사람은 정신으로만 살 수 없다’는 말도 위의 말에 못지않은 진리이다.
p805~6
그러나 좀더 삶을 생각하는 사람은 일단 이러한 물질적 만족이 어느 정도 채워졌을 때 그러한 삶에 만족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진다. 만약 그러한 삶에 만족한다고 끝까지 우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정말 만족해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이상, 그와는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을 찾지 못한 채로 일종의 단념에서 생기는 자위적 태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든다. 이러한 나의 추측이 옳다면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옛말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 물질적 충족 외에, 아니 물질적 충족 이상으로 정신적으로 충족됐을 때 비로소 인간은 행복, 자기만족, 삶의 보람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질적 충족을 채우며 사는 이외에도 정신적 충족을 위해서 살아야 하며,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외에도 정신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정신적 가치는 지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지적 가치는 앎의 가치다. ... 앎 자체가 인간에게는 가치라는 말이다. 앎 자체가 빛이요, 기쁨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근본적인 면의 하나는 인간이 앎을 추구하고 앎 자체에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인간적 행복, 인간의 인간적 보람은 앎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바꿔 말해서 인간이 인간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한 한 그의 앎의 영역을 넓히고 깊게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 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앎을 깊게 하려고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공자나 아인슈타인 같은 지적 업적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고, 그만큼 유명하게 되는 것도 삶의 보람이 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업적을 남기고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유명하게 되는 것보다, 그런 목적 이전에 오로지 앎 자체, 진리 자체에 정열을 갖고 자신의 지적 세계를 가능한 한 넓혀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처럼 각자 자신의 능력, 분수, 처지에 따라 자신의 지적 세계를 넓혀간다면 그만큼 그의 세계는 확대되고 그만큼 그의 삶은 깊어지고, 그만큼 그의 삶은 풍부하게 된다. 설사 내일 눈을 감고 의식을 잃은 송장이 되더라도 그 순간까지 하나라도 더 보고, 느끼고, 알게 되는 기쁨, 그 보람을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p808~9
모든 사람이 생물학적, 지적, 도덕적 가치를 추구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각자 갖고 있는 가능성은 선천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물질적인 성공을 크게 이룰 수 있는 반면 정신적인 성취는 크게 이룰 수 없으며, 반대로 어떤 사람은 정신적으로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지만 물질적 성공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물질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하냐 아니면 정신적인 성취가 더 중요하느냐에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든 간에 그것을 가능한 한 충분히 이루는 데 있으며, 얼마만큼 열심히 이루느냐에 있다. 바꾸어 말해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가는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삶의 밀도 혹은 삶의 긴장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삶의 참다운 성공, 삶의 참다운 보람은 구체적으로 성취한 결과가 남들이 볼 수 있는 외형적인 것에 있지 않고,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 오로지 각기 자신이 내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삶의 과정의 밀도, 긴장, 인텐시티intensity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장미꽃이 할미꽃보다 더 아름답다든가, 호랑이의 삶이 고슴도치의 것보다 더 늠름하고 보람있는 삶이라는 판단은 나올 수 없다.
꽃이 진다고 해서 그 꽃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조만간 죽어 흙이 되고 벌레의 밥이 되게 마련이라고 해도 삶 일반, 특히 인간의 삶은 아름답고 귀하다. 아니 우리가 머지않아 사라지기 때문에 그만큼 더 우리들의 삶은 보람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삶의 존엄성, 절대적 가치를 의식하고 삶에 대한 경외, 삶의 성스러움을 새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시들시들한 꽃보다 생생한 꽃이 더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적극적 삶, 인텐스한 삶은 그만큼 더 귀중하다. 삶의 귀중함, 삶의 존엄성을 의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삶을 아끼고, 보다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욕과 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며, 스스로의 삶에 극치를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긍지를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보다 더 보람 있는 삶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죽는 날까지 우리는 작은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항상 생각하고 노력하여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한 포기의 꽃이 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러한 목적, 이러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끊임없는 긴장의 과정 자체 속에 삶의 희열이 있을 것이며,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 ‘투쟁속에서 만물은 생하고 또 죽는다’,
- <삶에의 태도>(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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