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환,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

Posted by 히키신
2017. 3. 7. 21:10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박동환, <서양의 논리동양의 마음>, 1987, 까치


*아님과 존재의 밖

*타자와 잉여

*얽힘

*제거와 부정의 길

**다름의 인정

여러 의문들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볼 것


p9 – 징검다리에 서서 머뭇거리다

 이 세상은 전부가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 토막극들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이것을 저것으로 저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려고 한다그의 추론과 상상이 이것으로 저것을저것으로 이것을 넘을 수 있는가.


p16 

0034 : 믿음의 체계를 만들지도 부수지도 않고버리지도 갖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다스리는 길을 찾는다.


p20

경쟁도 평등도 각자가 지닌 고유한 능력과 인격을 무너뜨리는 행위이다경쟁에서 이기는 자는 없다참으로 경쟁에서 이기는 길은 그것을 벗어나는 데에 있다. 서양과 동양의 오랜 흐름이 지닌 생각의 역사에서 현대의 무자비한 경쟁과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데 방법될만한 것을 찾기는 어렵다

 

 하나와 같음이라는 허구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존재의 논리를 찾을 수 있는가.


0073 : 자루 속에 세상을 넣을 수 있는가사람들은 자루를 버리지 못한다자루에는 압력이 쌓이고 그러므로 파국에 이른다파국은 언제나 보다 큰 힘타자로부터의 보복이다.


p23

왜 우리들은 서로 싸우도록 지어졌습니까?

지어진 자가 지은 자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의문이해할 수 없는 지은이의 도덕성.


0092 : 사람이 찾는 것은 무엇인가.

 믿을 만한 대상그의 삶에 희망과 활기를 주는 것.

 그런데 그 대상에는 정함이 없다아무것이라도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참으로 주착이 없다사람은 아무것으로 채워도 상관이 없는 빈 껍질이다무엇이든지 그의 삶에 희망과 활기를 준다면 그것은 그의 믿음의 대상이 된다.


p29

0104 : 어떤 것도 거부되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진리로 남아 있지 않은 다만 거부하는 행위로서 이어지는 철학의 역사.


 (...) 이만 하면 참으로 진리될 만한 것은 모든 철학자들이 세우는 주장 이다에 대하여 언제나 아니다라고 하는 뿌리깊은 거부행위 뒤에 숨어 있는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p30

0105 : 문학자그는 해답을 위하여 어떤 체계를 만들지 않는다체계가 없어도 혼란에 빠지지 않는 강심장의 그는 탈논리(脫論理)의 직관으로 세상을 헤쳐놓는다신학자그는 문제에 대한 하나의 완전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처음의 결단에 따라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도록 운명지어져 있다그러나 모든 문제에 해답이 있는가이것이 철학자가 놓이는 의문의 사태이다.

 철학자는 처음의 결단을 믿지 않는다현실은 하나의 완전한 해답을 허락하는 것도끝없는 혼란의 소용돌이도 아니다철학은 현실주의자의 사색이다.


p31

0107 : 아무도 모든 것을 볼 수도느낄 수도 없다누구든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모든 것과의 얽힘을 떠날 수 없다어떻게 얽히는가거기에 논리와 존재의 샘이 있다.


p32~33

0152 :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어느 편에 드는 것이 철학자의 길인가. (...) 

존재의 사태나 무()로부터 물러설 수 있는가. 달라짐이나 같음의 사태로부터 물러서는 길이 있는가가지를 치는 갈림길의 뿌리를 어떤 대상이나 실재로 못 박을 수 있는가갈림길에서 뒷걸음 쳐 어디론가 알 수 없는 데로 끝없이 물러서면 무엇을 만나는가.


p45 – 자아는 나의 것인가

0201 : 참 자기의 모습을 찾기 위하여 자기가 가진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 하는가청년기에 참 자기를 찾을 수 있는가그의 생각과 행동의 많은 것은 자기자신의 표현이 아니라 사정에 밀려 잡히는 대로 얻은 것이거나 부러움으로 모방해서 지닌 것에 불과하다이른바 불혹(不惑)의 나이에는 순수한 자기로 돌아갈 수 있는가.


 어느 나이에 인간은 자기 아닌 것으로부터 취한 것을 모두 버리는가.


p51

0252 : 의식의 노력은 극대화할 것인가극소화할 것인가의식이 지닌 아니다’ 혹은 다름의 행위능력으로 세계가타자가 지닌 아니다의 힘에 대결할 수 있는가.


p52

0253 : (...) 타자에게 넘겨줌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자. 타자와의 얽힘에서 자아의 영토를 극소화하는 자극소의 생각으로 깨닫는 철학자. 극소의 힘으로 일하는 물리학자자아의 동일성을 버리는 자.

p55

0290 : (...) 영혼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없다그것은 세상으로부터 숨겨진 뒷길현실을 바라보고 가늠하는 먼 거리에 서 있다그것은 세상의 현실과 같이하지 않는다그것은 자기 아닌 자로부터 자기를 거두어 거리를 지키는 고독자이다


 그러면서도 영혼은 세상을 외면하지 못하는 갈등의 주인공이다영혼이 가지고 있는 것은 없으니까우주가 파도치는 대로 춤을 춘다그것은 언제나 자기 아닌 것을 따라서 행세하는 외로운 거리의 여행자.


p62

0302 : 사람이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생각에 사물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한 점이다. (...) 

 

 생각을 끊음으로사람의 믿음을 거두어들임으로 오히려 파노라마 뒤로 물러나 있는 자의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p63

0303 : (...) 생각이 다름에 머물 수 있는가생각은 같음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아닌가.


p67

0353 : 어떻게 사물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가그 자체가 지닌 자체’ 것으로써 밝힐 수 있는가그 자체 아닌’ 것으로써 밝힐 수 있는가

그 자체에 자신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가.

그 자체가 그러함의 참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그 자체에 그런 것이 없다면 어디서 그러함의 이유와 뿌리를 찾을 수 있는가그 자체 아닌 그 밖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그 밖의 타자가 그 자체를 한정하는 이유와 뿌리가 되지 않겠는가

 꿈이 실제인지 아닌지가 꿈 속에서 드러나는가꿈이 아닌 현실에서꿈 밖에서 정체가 드러난다현실에 주어진 사물의 정체는 그 사물의 현실이 아닌현실 밖의 타자로서 드러나지 않겠는가.  


p69

0354 : (...) 무엇이 사물을 사물 되게 하는가무엇이 사물을 사물로 한정하는가사물을 정의하는 본질이나 형상은 사물을 사물 되게 하는 바탕인가사물을 사물로 한정하는 정체인가사물의 본질이나 형상은 사물의 정체나 바탕과 같은 것인가같음의 지평 위에 사물의 정체와 바탕이 드러나는가같음으로 이어지는 지평에서 사물을 사물 되게 하는 뿌리를 만나는가아니면다름으로 얽히어 사물의 뿌리에 이어지는가.

(...) 있음을 있음 되게 하는 있음의 뿌리는 있음과의 다름으로 얽힌다.


p82

0403 : 이해한다는 것은 뒤로 물러선다는 것이다.

 인상에 주어진 직접의 사태로부터 물러서는 것이다그래야 그러한 사태를 받쳐줄 가설에 이를 수 있다물러섬으로써 얻은 가설의 타당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그것은 발견되는 것이지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p85

0407 : 그 밖에 없는가?

 이 물음이 시원(始原)의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그것이 자기를 한정하는 자기 아닌 자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이다스스로 있는 무한자초월의 일자절대자(), ()는 자기 아닌 것을 향한 물음으로 만나는 개념이다이것들은 끝없이 밀려오는 타자에 부딪쳐서 떠오르는 상상의 대상이다.


p92

0473 : 왜 시원(始原)분석인가시원(始原)분석이 아닌가시원(始原)분석은 일어난 사태의 시작을 드러냄이다헤겔의 순수 있음은 하나의 시원(始原)일 수 있다왜 원시(原始)분석이 아닌가원시도 역사의 한 시점에 놓여 있는 사태이다그것은 이미 끝난 지난날의 사태이다시원(始原)분석은 시작에 놓여 있는 어떤 사태를 찾음이 아니다그것은 지난날에서처럼 지금도 되풀이되는 보편의 바탕을 찾는다.


p94

0476 : 시원(始原)분석은 버림으로써 마지막에 이르는 것이다. 버리지 않고 이를 수 있는 마지막은 끊임없이 맴도는 쳇바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다름으로 얽히는 길을 따라 다름이 끊기는 저편에 이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같음과 다름이 언제나 맴보든 쳇바퀴 속 시시각각의 잡다로부터 휴식하는 절대자를 만날 수 있는가.


p97

0493 : (...) 있음에서 있음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추론은 있을 수 없는가있음으로부터 있음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추론이 없다면 그것은 있음의 참 시원에 대한 망각이 아닌가.


p98

0494 : 현실의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으로다시 형상의 형상으로 올라가는 플라톤의 시원분석은 어떤 존재론을 일으키는가올라가 찾은 정상에 인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그 정상에 놓일 수 있는 어떤 것이 없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서의 규정을 끊임없이 피하여 사라질 뿐이다그것은 모든 존재로 하여금 그런 존재 되게 하는 것이다그러나 그것이 무엇인가아니다무엇이 아니다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사라져가는 것이다

 현실의 감각에다 순간에 지나지 않는 존재의 빛을 던지고 사라져가는 형상들형상들로부터 다시 사라져가는 형상의 형상사라져가는 것이야말로 세계에 펼쳐지는 모든 자의 뿌리될 만한 것이다존재하는 자는 모두 자기를 저버림으로써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존재하는 자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의 길은 자기 긍정자기와의 같음이 아니라 자기 배반자기와의 다름이다.


p103

0500 : 서양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동 아시아 사람의 반응체질동 아시아 사람의 대답은 그렇소인지 아니오인지 알 수 없는 때가 많다고 한다그의 대답은 흔히 그렇소그러나 아니오’ 혹은 그렇소그리고 아니오로 들린다고 한다두 문명에서 서로 다른 논리가 통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서양 사람들은 그들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철학적 이견(異見)에도 불구하고 다같이 이다나 아니다의 분명한 선택을 강요하는 무모순의 형식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무모순의 형식논리가 현실 생각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인 경험주의자실용주의자실존주의자 그리고 변증론가조차도 여전히 이다아니다’ 사이의 딱 부러지는 갈림을 피할 수 없게 하는 논리의 바탕을 버리지 않는다


 이다아니다의 또렷한 갈림은 논리적으로 어떤 짜임에 달려 있는가그러나신의 절대자유의 능력을 믿는 그리스도교 철학자나 해탈로 나아가는 도가(道家)나 선가(禪家)가 이다아니다의 분명한 선택에 메달릴 이유가 있는가이다아니다의 분명한 선택을 거부하는 자는 논리적으로 어떤 짜임에 달려 있는 것인가.


p107

0541 : 어떤 타자에게도 달려 있지 않은 자그리하여 어떤 타자의 한정도 받지 않고 오히려 한정하는 절대의 타자그런 것은 추리의 귀결이 될 수 없는가귀결은 반드시 전제로 한정받거나 매개되는 것인가. 귀결은 언제나 전제에 달려 있는 것인가전제에 달려 있지 않은 귀결은 얻을 수 없는가오히려 전제를 한정하는 자를 귀결로 이끄는 길이 있는가.


p109

0542 : (...) 순수 존재는 규정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도 있지 않음이나 규정될 수 없는 것으로 있음조차 될 수 없는 것을 향한 자기 한정이나 부정은 왜 일어나지 않는가순수 존재가 자기 한정이나 자기 부정을 함으로써 규정될 수 없는 것으로 있음조차도 아닌 어떤 다름으로 옮겨가지 않는가.


 그것은 아니다로써 가장 높은 (초월의자기 한정 혹은 자기 부정에 이르게 되는 행위이다. (...) 그것은 시원(始原)의 사태인 순수 존재 밖에 놓인 잉여의 타자로 옮겨 순수 존재 자체를 한정하는 것이다


이는 순수 존재라는 시원(始原)의 사태에 안으로 얽힘과 밖으로 얽힘이 짜는 두 갈래의 길이 함께 깃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p110

0543 : 반성과 부정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반성하는 자의 이성에 내재하는 것인가아니면반성하는 자의 이성 밖에 있는 것인가반성과 부정의 뿌리인 타자는 어디서 일어나는 것인가반성하는 자의 이성 자신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헤겔과 그를 따르는 변증론가들은 생각한다.

 

 반성과 부정의 매개자인 타자가 이성 초월적임을 말하는 철학자들의 역사는 아직도 미완성에 있다십사세기의 유명론자도 이십세기의 실증주의자나 실존주의자도 타자의 이성 초월을 논리화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성과 부정의 샘은 이성 내제와 이성 초월의 두 갈래로 펼쳐지는 타자의 길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p111

0544 : x 아닌 것은 x에 내적인가외적인가. x 아닌 것이 x에 내재함으로 얽히는가 혹은 x에서 초월함으로 얽히는가.

 x와 x아닌 것 사이의 얽힘 자체는 내적인 것도 외적인 것도 아니다그 얽힘이 내적인지 외적인지를 좌우하는 것은 순수 논리의 사태가 아니라 말과 관념의 습관이 만드는 개념의 질서이다.

 아니다로 얽히는 순수 논리의 사태로 말과 관념이 짓는 질서인가.


0545 : 아니다로 얽히는 시원(始原)의 사태에 모든 논리적인 추리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p112

0547 : 논리적인 추리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것은 이미 주어진 것에 따르는 어떤 것을 찾거나 풀어내는 일에 매달린다그 따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전건에 후건이 따라 이어짐에는 두가지의 길이 있다.


 그 길은 동의와 반대 혹은 이다와 아니다라는 두 가지 반응행위로서 나아간다. 하나는 이미 주어진 것에서 이탈하지 않는 이다로 이어지는 계열을 풀어내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이미 주어진 것에서 이탈하는 아니다로서 이어지는 계열을 찾아내는 길이다한쪽에는 내재와 동일성으로 수렴되는 계열로 흘러서 추리가 일고 다른 한쪽에는 끝없이 일어나는 잉여의 타자로 확산되는 계열로 나아가는 추리가 인다


p113

0548 : 다름은 사람에게 견딜 수 없는 불안을 가져온다. 다름은 알 수 없는 데로 가로 놓인 거리이다그 거리를 잇는 다리는 두 가지의 질문공법으로 가설되는 것이다저 편에 놓인 것은 이 편에 놓인 것과 같은 것인가다른 것인가.


0560 : 추리의 흐름은 무엇에 따르는가다만 공허한 개념의 그믈과 그 얽힘에 따르는가아니면존재의 흐름을 따라 추리가 일어나는가오히려추리를 따라 존재의 흐름이 드러나는가어떤 가능한 존재의 흐름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서 추리와 상상의 그물이 주어져 있지 않은가추리와 상상의 그물이 존재의 흐름을 만들지는 않더라도 존재인지 존재 아닌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어떤 것으로 하여금 가능한 존재의 흐름들로 가지쳐서 나가도록 길들이지 않는가.


p116 

0564 : 다른 명령은 같은 전제로 하여금 다른 귀결을 낳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명령받는 자가 백지의 사태가 아니라면 그것은 다만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백지의 사태가 아닌 전제라는 것에 대한 명령은 전체에 대한 물음이다따라서 같은 물음에 대하여 다른 전제는 다른 귀결로 응답하는 것이다.


0565 : 허위나 모순을 지닌 명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무엇을 끌어안는가그것은 어떤 의미도규정도 거부한다그것은 어떤 규정도 지니지 않는다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어떤 제한도 없다따라서 그것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어떤 것도 밀어내지 않는다그것은 어ᄄᅠᆫ 잉여도 놓아두지 않는다그의 끌어안는 둘레 가운데에 모든 명제그 자신의 부정이나 모순을 뜻하는 것까지도 들어 있다.


p118

0565 : 흄은 이어지지 않은 조각들로 주어진 인상들에서 인과의 얽힘이나 물체의 있음을 지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인과의 얽힘이나 물체의 있음이 조각들로 주어지는 인상들 밖의 잉여세계 x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p119

0566 : 어느 경우에나 pq라는 논리적인 얽힘은 후건이 전건의 안으로 얽히는 짜임으로ㅆ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에서 헤겔의 변증논리를 거쳐 오늘의 기호논리에 이르기까지 전건의 안으로 얽힘으로 후건이 매달리는 짜임을 추리의 방법으로 삼아 왔다.

->인도유러피안어군 주부-술부 종속관계. vs 한국 주부 생략 가능술부로써만 문장구성.


p125

0596 :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상상의 노력은 어디서 시작하는가상상이 일어날 때 그것은 어디를 향하는가.


그것은 확실한 사태를 떠나 확실치 않은 타자의 사태로 나아가는 행위이미 확정된 지평선 너머로 퍼져나가는 잉여추적의 행위잉여추적의 행위로써 확률귀납이나 음양대대(陰陽對待)의 논리적인 얽힘이 이루어진다.


p127

0598 : 전제에 어긋나거나 모순되는 결론을 만날 수 있는가?

베이컨은 실험이나 관찰에서 추론의 전제에 반대를 일으키는 사태를 찾는다전제로 하여금 자신의 안으로 얽히는 짜임 밖에서 자신의 반대를 만나도록 이끄는 것이다.

 헤겔은 전제의 안으로 얽히는 짜임 안에서 전제 자신의 모순을 만나도록 풀이를 한다전제를 시작으로 하여 그 전제 안으로 얽힘을 풀어가는 가운데서 모순이 드러나므로 그것을 결론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p128

0599 : 얽어짬의 논리를 초월성으로 푸는 자는 없는가. (...) 플라톤은 그 갈림길에 서 있던 철학자이다


p132

0630 : 왜 경험에 대한 추론이 연역의 규칙에 따를 수 없는가경험의 흐름은 어떤 연역적인 귀결에 대해서도 언제나 아니다라고 반대할 수 있으니까그러한 반대의 가능성에 대한 배려가 귀납논리에 들어 있는가.

 아니면귀납논리는 다만 경험 일반화의 규칙으로 여겨질 뿐인가. 이러한 귀납논리는 경험주의의 발상을 참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경험주의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모든 연역적인 귀결이나 일반화에 부딪칠 반역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p137

0636 : 경험에 필연이 있는가경험은 그의 확률로서 0이나 1을 빼놓은 사태이다경험은 확률 0과 사이에서 일어난다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어떤 확률이나 어떤 논리에 좌우되는가1/100의 확률을 가지는 사태와 99/100의 확률을 가지는 사태는 필연도 모순도 아닌 우연이라는 논리적으로 같은 지대에 놓여있다.


p139

0671 : 변증론가가 주장하듯이 부정성의 결여를 실증주의에 돌릴 수 있는가. (...) 실증주의에는 현실체제에 대한 부정의 자세가 없는가실증주의나 경험주의의 부정성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

 이성은 참 부정의 바탕이 되는가

 참 부정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객관에의 매개자인 참 부정의 능력은 어디에 있는가이성에 내재하는 것인가아니면이성의 테두리 밖의 말할 수 없는 어떤 자에 달려 있는가.


p140

0673 : 참으로 자기 밖의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자기를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어떻게 자기를 떠날 수 있는가어떻게 참으로 자기 아닌 타자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가공허한 관념과 개념 밖의 경험으로써인가자아반성의 이성으로써인가아니면아니다로써 시원(始原)의 사태를 거슬러올라가는 순수 논리의 얽힘으로써인가.


p142

0675 : 비트켄슈타인은 왜 아니다에 아니다를 더함으로 반드시 이다(긍정)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는가. 그는 왜 아니다라고 하는 낱말에게 논리학자나 상식인이 매기는 뜻을 거부하였는가그는 왜 하나의 말이 하나의 정해진 뜻이나 사태를 나타내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사람의 말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그는 왜 모순이라는 것을 어떤 말의 그물이 임시로 쫓아낼 수는 있어도 영원히는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보았는가그렇다면 말의 짜임은 참으로 있는 어떤 사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일 뿐이다


p144

0675 : 말의 짜임에 대하여 처음으로 해체를 선고한 철학자는 하이데거비트켄슈타인데리다인가개념의 논리적인 풀이로 만들어지는 관념론에 대하여 실험과 반증을 제창한 프래그머티스트 퍼스인가논리실증주의자 카르납인가혹은 포퍼인가개념의 사변과 본질을 배격한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인가헤겔의 관념변증법에 자연과 실천의 변증법으로 맞선 마르크스인가.


 그들은 모두 말의 믿음으로 이어져온 서양철학의 흐름에 해체를 선고한다그러나 말의 믿음에 해체를 처음 던져 역사의 길을 돌린 철학자는 누구인가해체를 말하는 데리다조차 하이데거나 니체나 헤겔로 시론하면서도 유명론자 오캄이나 경험주의자 흄을 말의 믿음에 해체를 일으킨 선구자로 잡지 않는 것은 서양철학의 흐름에서 모처럼 자각된 그의 해체의 바탕이 아직 보편에 이르지 않았음을 알린다.


p151

0700 : 철학자들은 모두 물러나 바라보려고 한다물러나 바라보며 왈가왈부를 한다뒤로 물러나 그 앞에 놓인 세계를 내려다보는 한 계단 높은 디딤돌이 언제나 있다.


 그러나참으로 있는가물러남으로 얻은 조망의 디딤돌을 철학자들은 참으로 있음이라 혹은 가장 높은 참이라 한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물러남으로 얻은 그것에 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실체니 형상이니 정신이니 물질이니 개체니 보편자니 무()니 허()니 혹은 그밖에 말할 수 없는 무엇이니 하는 참들이란 


 뒷걸음쳐 물러나며 밟는

 끝없는 연장선 위의

 점,

 점들이 아닌가.


p156

0733 : 사람들은 관찰대상을 믿는다그러나 경험주의자들조차도 관찰되는 것을 가지고 세계를 파악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관찰되는 것은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그것은 언제나 다른 것으로 바뀌어지는 숙명을 지닌다.


p160

0771 : Nothing is x

 라고 말할 때 Nothing은 다만 해당 주어가 없음을 말함인가이 명제는 술어 is x를 매길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가어째서 술어 is x를 매길 수 있는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겠는가.

 Nothing is unicorn.

 Nothing is self-creative.

 is unicornis self-creative라는 술어를 지니는 대상은 있을 수 없는가이것은 다만 논리적인 요구이며 실험적인 물음일 뿐이다이 물음은 허구에 대한 말놀이인가사람이 대상을 찾는 길이 아닌가.


p162

0772 : 지각에 주어진 사태의 뿌리는 그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든지 사물 자체라는 것이든지 스스로 있음이라는 것이든지 없음이라는 것이든지간에 모두 전제로서의 지각이 지닌 규정의 내제함축의 바깥에 놓인 것잉여로 얽히는 것을 귀결로 하는 것이다플라톤과 칸트와 하이데거와 老子가 말하는 서로 다른 존재론적 실재들은 잉여함축의 귀결로서 주어진 다만 순수 논리적인 사태에 상상으로 이름 붙인 대상에 지니지 않는 것이다.


0773 : 도대체 찾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놓여 있는 데서 어느 길로 들어서야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나아갈 길을 자유자재로 돌이킬 수 있는가자유자재로운 길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찾음의 길을 좌우하는가찾음을 향한 추리와 상상의 길은 어떻게 열리는가찾음의 대상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추리와 상상의 길에서 떠오르지 않겠는가.


p165

0775 : 의문의 사태는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일어나는 것도사람 자신의 추리나 상상 밖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그 사태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타자로부터 덮쳐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언제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의문의 사태로부터 추리와 상상이 흘러 논리가 짜이고 그 흐름이 가로 막히는 데서 대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일어난다.


p166

0777 : 가장 높은 형상도이념도 여전히 그의 밖으로 얽히는 잉여의 타자에 대하여 우연을 면치 못하는 가능의 사태일 뿐이다.


0779 : 참으로 있는 대상은 어떤 것이라거나 어디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사람은 어떤 것으로부터 밀려오는 여러 가지 암호를 만날 뿐이다의식이니 물체니 핵이니 존재니 니 하는 것은 실제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암호현상에 붙힌 여러 가지 이름이다.


p167

0790 : 한결같지 않음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보편의 대상에 귀의할 것인가보편의 횡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을 것인가. 자아실현의 목적과 대상이 있는가아니면자아와 대상은 풀어버려야 할 매듭인가. 빠져나갈 수 없는 선택의 굴레 속에서 얽혀 이어지는 존재의 매듭을 번갈아가면서 방황하는 사람들철학자정치가신앙가.


p171

0801 : 언제나 뜻밖의 재난이 닥칠 수도 있다고 하는 상상은 합리적인 생각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공포망상증 환자에 대한 한 정신과 의사의 견해다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망상증에 지나지 않는가뜻밖의 사태를 언제나 상상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인가. (...) 재난과 같은 타자로부터의 피할 수 없는 충격과 부정이것을 예상하는 것이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최대의 합리성이 아닌가.


p172

0802 : 생각이란 파도처럼 일며 깨지는 것.

 파도가 이는 방향으로 생각의 그물이 퍼져가고 파도가 일 때마다 깨져 다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방향도 알 수 없는 거친 풍랑을 만나면 산산이 찢겨진 그물에 얽힌 채로 바람과 바다가 지닌 무한한 자유와 힘을 상상해야 한다.


0820 : 파국은 왜 언제나 있는 것인가동일성이란 어떤 존재에게도 허락된 바탕이 아니기 때문이다.

p176

0826 : 어떤 철학자가 자기 아닌 것을 찾아헤매었던가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으로 시작된 자기 아닌 것을 찾아헤맨 서양 철학자들의 노력은 성공하였는가변증법과 경험주의의 역사는 자기 아닌 것과의 만남을 위한 어떤 전략인가.


 독재자의 최후의 몰락과정을 보라.

 그것은 그가 거부했던 자기 아닌 것과 이루는 파국적인 만남이 아닌가.


p176~177

0850 :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것들은 가능한 세계를 완전하게 갖추도록 만드는 마디들이다그 가능한 세계에서 어떤 반대나 모순의 마디를 쫓아낼 이유가 없다서로 반대 모순되는 것들은 시간 가운데서나 추리의 펼침에서 서로 얽히어 따르지 않겠는가

 겨울의 추위가 극에 이르면 머지않아 따뜻한 봄날이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겠는가. <주역(周易)>의 작자는 음과 양으로서헤겔은 과 으로서 끝없이 이어지는 우주적인 반복(反覆)의 완전한 얽힘을 그리지 않는가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며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웃게 될 것임이라말하지 않는가.


 지금 주어진 사태에 반대 모순되는 것을 귀결로 삼은 것은 어떠한 추리의 얽힘에 따름인가주어진 사태에서 건너뛰지 않고 한결같이 펼쳐지는 연장선 너머에 얽혀 있는 잉여의 사태에 대한 상상으로 귀결이 나오지 않겠는가이러한 귀결은 내재함축을 따르는 추리의 영역밖으로 나아가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참 파국의 사태에 대한 추리는 이미 주어진 마디 밖(잉여)으로 얽히는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다.


P181

0870 : 같음의 지평에서 깨달음이 이루어지는가깨달음이란 다름의 사다리를 딛으며 거슬러올라감이 아닌가.



P182

0872 : 끝없는 싸움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싸움에 참여하는 자가 각기 다른 바탕을 지니기 때문이다그 다른 바탕의 안으로 얽힘을 풀어가는 과정이 싸움이다바탕의 밖으로 얽힘을 풀어나가는 일은 싸움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P183 

0874 : 어떤 믿음이나 생각에 대해서도 그것을 거짓이라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그것은 각기 누구에겐가 닫혀 있는 문을 열어주는 열쇠와 같기 때문이다다만 그들이 이 세상에서 서로 거부하는 사이로 얽히는 데에 문제가 있다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 어떤 문으로도 자유로이 드나드는 믿음과 생각의 맛쇠라 할 만한 것이 없을까.


P183~184

0875 : 망치송곳까뀌집게나사틀이대패이 연장들이 지닌 하나의 쓰임을 물을 수 있을까모든 연장들의 쓰임을 한 가지로 묶을 수 있을까아니면모든 연장들을 대신하는 만능의 연장이 있을 수 없는가모든 자물쇠들을 열 수 있는 맛쇠처럼 어느 모로나 쓰임이 되는 만능의 연장은 어떤 모양일까.

 그것은 각각의 고유한 모양을 절제해버리고 각기의 모양을 파형시킨 그 어떤 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겠는가.


 카타스트로피 머신(catastrophe machine)을 만들 수 있을까어떤 파국의 충격도 흡수하므로 거듭 되는 해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서 그 구실을 다하는 반응체는 어떤 원리 위에 세워지는가그 카타스트로피 머신은 어떤 정체어떤 같음의 원리를 지닐 수 있는가.


P186

0879 : 사람이 경험하는 불합리불가해불확실불안재난은 타자로부터 불어와 부딪치는 바람소리사람을 향한 타자의 거부반응.

 

 


P189

0900 : 우주에 가득한 파도치는 소리는 끝내 사라지고야 말 사람의 야망과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경고.


0902 : 타자를 정복하거나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거나 그것은 일시적인 자유의 환상이다타자가 허용하지 않는 자유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P190 

0903 : 비관주의자도 낙관주의자도 아닌 자그가 일 수 있는 것은 현실주의자그러나 그는 현실에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안다현실이 없는 세계그것이 최상의 세계. 


P193

0935 : 눈을 감으면 죄어짜오는 듯한 세상이 물러가버린다그것이 거부의 가장 원시적인 실험이다


P199

0976 :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막상 신의 존재를 거부하기를 꺼린다왜 믿지도 않으면서 거부하지 못하나신은 왜 아직도 그들을 떠나지 않고 있나.


 사람에게 어떤 증거도 증명도 주어지지 않는데 여전히 원인으로 얽힘이니 스스로 있음이니 절대자니 말하거나 믿거나 하는 것은 사람의 쪽에서 끊을 수 없는 그러나 알 수 없는 어디에 얽히어 달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0977 : 갈림길에 서서 엉거주춤 머물러 있는 자의 모습이 있다진리는 초월과 내재의 갈림길에서관념과 실재의 갈림길에서구원과 해탈의 갈림길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진리의 신()은 싸우는 생각들 가운데서 어느 편에 들 것인가


P203

0990 : 한 가지 대상을 놓고 많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처럼 한 깨달음으로 이런저런 말을 하는 철학자는 언제나 다하지 못한 말 때문에 미완성에 머물러 있다다할 수 없는 말이 남기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p205

0992 :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은 이미 자기를 떠나는 것이다모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닌 다름으로서 세상에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이다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이 다름 아닌 자기이며 자기밖에 어떤 것도 아닌 자기로 있는 것이다.

 자기를 드러내지도 알리지도 않는 자는 누구인가다름으로 얽히어 드러나는 파노라마 뒤 암흑 속에 참으로 자기자신으로의 같음을 지킴이것이 절대의 모습이다모습을 지니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P213~214

1006 : 긴장과 결단으로 해서 다다르는 완전성을 바라볼 것인가아니면자유자재로운 해탈의 경지에 들 것인가.

 두 갈래의 정신이 찾아가는 정점(頂點)이 다른 이유는 그들이 각기 다른 논리적인 이상을 지니기 때문이다한쪽에서는 이다와 아니다의 갈림이 명백하기 때문에 긴장과 결단의 극치점을 피할 수 없고 다른 쪽에서는 이다와 아니다의 갈림이 애매하기 때문에 반논리(反論理)와 해탈(그러나 그것이 또하나의 논리가 아니겠는가?)의 영역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


 갈림을 명백하게 해서 펼쳐지는 엄밀한 폐쇄논리는 논쟁과 분규가 허용되는 결국의 개방사회를 낳고 갈림을 애매하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달관(達觀)의 개방논리는 용해와 화합을 달래는 결국의 폐쇄사회를 가져온다.


P215

1008 : (동양 사람들은 타자로써 끊김의 충격따로이 밀려난 세상에 익숙하다현대의 문명에 넋을 잃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영 뿌리 뽑히지 않는 원시의 습관이 웅크리고 있다연속성과 내재함축이라는 서양 사람들의 논리에 밀리면서 불연속과 개방의 논리로 넘어가야 하는 시대가 동양 사람들 앞에 놓여 있다.


P216~218

1040 : (열린 생각열린 논리로써 열린 체계열린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가.

()열린 생각열린 논리는 열린 체계열린 사회를 가져오는가동일성을 넘어 타자와의 모순으로 얽히어 열린 생각열린 논리에서는 참으로 초월하는 실재와 현실참 불연속의 사태에는 열려 있지 않다열린 생각열린 논리는 타자와의 파국적인 만남이나 자기 밖의 현실과의 만남을 밀어내는 닫힌 체계닫힌 사회를 거느린다.


 왜 인류구원을 향한 박애와 보편의 정신을 외치는 종교는 오히려 더 닫히거나 배타적일 수 있는가왜 동양 사람은 옛날부터 공()과 무(혹은 중용의 대도(大道)를 지니고 자유자재의 열린 생각과 논리를 펼치면서 전제정치와 획일주의의 더 오랜 흐름을 가지고 있는가.


P220

1060 : 인류공동체의 바탕은 흔들리고 있는가. 하나의 선택과 행위에 대하여 합의에 이를 수 있는 바탕이 흐려져가고 있는가하나의 장을 이루어사는 사람들을 잇는 같음의 끈이 없어져가는가언제나 다름으로서 세상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인 사람과 그의 영혼을 어떤 같음으로 바탕지어 편안히 자리잡게 할 수 있는가


P221

1061 : (참 보편과 객관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는가


 사람이아니 자아가 물러섬으로 다다르는 진리인 보편과 객관을 서양 사람에게서는 찾을 수가 없다아니이십세기의 모든 사람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


1062 : 계급과 소외를 없애서 약육강식의 갈등과 경쟁이 없는 사회 그리하여 각자가 지닌 희망과 능력을 자유로이 펼치는 세상이 될 것인가. 갈등과 경쟁이 사라지게 하려는 사회도경쟁의 자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도 하나의 같은 원리를 그 바탕에 지니지 않는가계급과 소외를 없애서 하나와 같음으로 다스리는 것이며 경쟁을 보편화함으로써 역시 하나와 같음을 향해 애쓰지 않을 수 없게 한다하나와 같음을 머리에 두지 않고는 경쟁의 체제가 지탱될 수도 없으며 경쟁이 사라진 평등의 사회를 바라볼 수도 없다.


 경쟁을 없애든지 경쟁을 붙이든지 사회는 아직 하나와 같음이라는 존재 논리적으로 무리한 바탕을 떠니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을 하나와 같음이라는 테두리에 두들겨넣을 수 있는가. 류는 하나의 생존권에 매어 있는 운명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기의 다름이 하나로 모여 흐르는 존재의 강과 바다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찾아 아직도 세계의 철학자와 정치가와 종교가는 해매지 않는가.


P222

1063 : 분쟁이 없는 시대가 되려면 사람마다 자기 동일성이라는 바탕을 내세울 만한 허구의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이 사라져야 한다그렇다면 비동일성의 바탕 위에 사람의 자아와 사회가 일어설 수 있는가

 그것이 후세기의 문명과 철학의 생각거리가 아닐까.


P228~229

1097 : 글이 있기 전의 원시문명을 거슬러올라가는 인류학자와 세련된 글의 해석을 바탕으로 현대과학을 쪼개보는 철학자는 어떤 생각을 같이하는가글이 있기 전과 그 다음의 인류는 어떤 짜임에 같이 있는가. 선사시대나 현대의 사람이 함께 피할 수 없는 굴레는 무엇인가.


 원시의 신앙인 샤머니즘과 현대과학을 같은 자리에아니 같은 마음 안에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수천년의 바뀐 흐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그것들은 사람이 변함 없이 찾을 수밖에 없는 무엇을 함께 지니는가.

  

1098 : 동양 사람이 서양의 과학을 처음 만났을 때 무엇을 깨달았는가그것은 좋은 것과 함께 나쁜 것도자연과 함께 초()자연의 기적도 모두 원인과 결과이유와 귀결로 짜인 질서의 부분이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동양의 마음으로 돌아왔을 때 무엇을 찾았는가. 이유 있는 것과 함께 이유 없는 것도인과로 엮어진 이승과 함께 인과를 풀어버리는 저승도 모두 알 수 없는 우주의 조화(造化)라는 깨달음.


08. 파국의 논리

 

p145~6

 

0822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은 두 개의 다른 창을 번갈아 던진다. ‘이다’(긍정)아니다’(부정)라고 하는 두 개의 창.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낸 경험의 논리인 귀납법을 보라. 그것은 이다의 사례를 모아서 일반 법칙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가. ‘아니다의 사례는 그러한 일반화에 걸리적거리는 것을 떼어버리는 일을 한다. 과연, 경험의 신이 부정의 사례로부터 면제된 긍정의 일반 법칙을 찾는 사람에게 마지막 승리를 주기 위하여 귀납법의 절차를 따라 한결같이 창을 던질 것인가.

 

그가 다음 순간에 던지는 창은 이다일까 아니다일까. 경험의 신에게 사람이 명령할 수 있는가. ‘이다의 창을 던지라고.

 

0823

 

현실은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는가. 현실은 어떤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것인가.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원하였기 때문에 부모를 떠나게 되었던가. 능터로 소풍을 간 학교 아동이 사격장에서 날아온 유탄에 맞아 숨지는 것은 누구의 계획에 따른 것인가. 불시에 일어난 전쟁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입대한 청년이 설계할 수 있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각자가 바라보고 뜻하는 것 밖으로부터 밀려오는 운명의 부름은 어떤 질서나 계획에 따르는 것인가.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파국과 미결의 사태, 부조리와 무의미를 밀어내버릴 수 있는가.

 

p154

0890

 

산에 올라가 풀과 나무들의 무성한 자람을 보거나 바다에 나가 우레 같은 파도의 부서지는 소리를 듣거나.

줄기찬 생명의 일어남이며 바쁜 생명의 사라짐이다. 생명은 거부하는 힘으로 태어나 거부에 둘러싸여 잠든다. 존재 아닌 자의 힘으로 나타나고 존재 아닌 자의 힘이 거두어간다.

 

09. 해탈의 논리

p157

0900

 

우주에 가득한 파도치는 소리는 끝내 사라지고야 말 사람의 야망과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경고.

 

0901

 

달려 있음흔들림으로 얽히는 존재의 자리를 뜰 수 없는 자에게 허락된 믿음은 어떤 것인가.

 

0902

 

타자를 정복하거나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거나 그것은 일시적인 자유의 환상이다. 타자가 허용하지 않는 자유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p160

0935

 

눈을 감으면 죄어짜오는 듯한 세상이 물러가버린다. 그것이 거부의 가장 원시적인 실험이다.

 

0936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다시 찾고 싶어 추억으로 간직하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은 짐승의 부자유를 지고 태어나 완전 자유를 얻으려고 일생을 바친다.

완전 거부를 조건으로 완전 자유를 얻는 것이 사람이다. 신은 사람에게 자유를 가르치려고 가장 고통스러운 거부의 연습을 어릴 때에 시킨다.

 

p169

0992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은 이미 자기를 떠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닌 다름으로서 세상에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이 다름 아닌 자기이며 자기밖에 어떤 것도 아닌 자기로 있는 것이다.

자기를 드러내지도 알리지도 않는 자는 누구인가. 다름으로 얽히어 드러나는 파노라마 뒤 암흑 속에 참으로 자기 자신으로의 같음을 지킴, 이것이 절대의 모습이다. 모습을 지니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10. 철학적 문명론

p175~6

1003

 

서양 사람의 생각은 사태의 실상을 그 변화의 극단에서 파악한다. 그는 극단의 실험과 모험에서 파국과 모순에 부딪친다. 그는 극단에서 일어나는 파국과 모순에 도전한다. 그것을 밀어내기 위하여, 그는 연역논리와 변증법으로, 확률과 귀납논리로 파국과 모순 제거의 절차를 찾는다. 그가 추구하는 합리성은 파국과 모순의 제거행위에 있다.

동양 사람의 생각은 극단의 모험을 즐기지 않는다. 사태는 언제나 극단에서 극단으로 반환운동을 하는 것. 어느 극단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에 자리함이 가장 합리적인 것이다. 파국과 모순은 거부할 수 없는 사태의 숙명. 음양의 대대(對待)나 도()의 반복(反覆)에서 파국과 모순은 일상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관리자가 될 수 있을 뿐. 그가 추구하는 최대의 합리성은 파국과 모순의 원만한 수락행위에 있다.

 

1004

 

서양 사람의 논리는 애매함을 밀어내는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논리는 이론의 정신을 나타낸다. 이론은 말의 그물 안에서 펼쳐진다. 그의 논리는 말의 그물을 따라 이어지는 내재함축으로 얽히는 것이다.

동양 사람의 논리는 애매함을 받아들이는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논리는 실제의 정신을 나타낸다. 실제의 사태는 말의 그물 밖에 걸쳐 있다. 그의 논리는 잉여포섭으로 얽혀짜인다.

 

1006

 

긴장과 결단으로 해서 다다르는 완전성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자유자재로운 해탈의 경지에 들 것인가.

두 갈래의 정신이 찾아가는 정점(頂點)이 다른 이유는 그들이 각기 다른 논리적인 이상을 지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이다아니다의 갈림이 명백하기 때문에 긴장과 결단의 극치점을 피할 수 없고 다른 쪽에서는 이다아니다의 갈림이 애매하기 때문에 반논리(反論理)와 해탈(그러나 그것이 또 하나의 논리가 아니겠는가?)의 영역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

 

갈림을 명백하게 해서 펼쳐지는 엄밀한 폐쇄논리는 논쟁과 분규가 허용되는 결국의 개방사회를 낳고 갈림을 애매하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달관(達觀)의 개방논리는 용해와 화합을 달래는 결국의 폐쇄사회를 가져온다.

 

p177

1007

 

현악기를 연주하는 서양의 음악가를 볼 때마다, 옛날 도승(道僧)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 가운데서 맞서는 두 갈래의 정신. 긴장의 갈림과 자유자재. 실현과 해방.

 

p183

1063

 

분쟁이 없는 시대가 되려면 사람마다 자기 동일성이라는 바탕을 내세울 만한 허구의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이 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비동일성의 바탕 위에 사람의 자아와 사회가 일어설 수 있는가.

그것이 후세기의 문명과 철학의 생각거리가 아닐까.

 

p184

1090

 

갈등과 모순으로 얽힌 당면의 현실에 대한 관심이 순수 논리의 연구로 바꿔질 수 있는가.

현실의 문제는 논리의 문제인가.

현실의 복잡한 과제들이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사변적인 철학자들의 논리문제, 그 가운데서도 같음과 다름 혹은 이다’, ‘아니다의 논리문제로 돌아가버리는가. 동서사상의 갈등과 비교문명(比較文明)의 난관이 어떻게 이다’, ‘아니다의 문제로 낙착되는가.

그러한 순수 논리의 문제는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좌우하는 운명의 법칙에 대한 원시적인 의문과 두려움 때문에 오래전에 일어났던 필연과 자유에 대한 터무니없는 상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가. 누구든지 수없이 거듭해서 자신을 뒤집었던 모색의 우여곡절을 넘으면서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흔들린 불확실한 밤길을 돌이켜볼 수 있다.

 

p188

1098

 

동양사람이 서양의 과학을 처음 만났을 때 무엇을 깨달았는가. 그것은 좋은 것과 함께 나쁜 것도, 자연과 함께 초()자연의 기적도 모두 원인과 결과, 이유와 귀결로 짜인 질서의 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동양의 마음으로 돌아왔을 때 무엇을 찾았는가. 이유 있는 것과 함께 이유 없는 것도, 인과로 엮여진 이승과 함께 인과를 풀어버리는 저승도 모두 알 수 없는 우주의 조화(造化)라는 깨달음.

 

풀이말

 

서양의 바람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p191~2

 

논리와 현실은 서로 마주보는 극단이다. 논리의 극에 서서 보는 사람에게 논리에 앞서는 현실이 있는가. 논리에 달리지 않고 다가오는 현실이 없다. 그렇다면 논리 자체는 무엇에 달려 있는가. 논리의 흐름을 좌우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 흐름을 펼치는 자가 있지 않겟는가. 그것이 자아든가, 스스로 움직이는 자든가, 스스로 있는 자든가.

 

현실의 극에 서서 보는 사람에게 현실에 앞서는 논리가 있는가. 현실에 달리지 않고 펼쳐지는 논리가 없다. 그렇다면 현실 자체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다만 다가올 뿐이다. 어디로 다가오는가. 어디로도 아니다. 그 어디든지 비어 있는 자리일 뿐이다. 다만 자리일 뿐인 마음이든가 허()이든가 공()이든가.

 

사회현실이나 인생의 현실이나 헤어날 수 없는 혼란에 빠질 때면 그 바탕에는 결국 논리적으로 부딪친 혼란이 있다. 그것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여지가 있다면 논리란 무엇이냐?’라고 다시 물어 논리학의 마당 자체를 바꾸거나 넓혀야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현실의 흐름이 크게 바뀔 때마다 그 바탕에 걸린 논리의 반성이 일어왔다. 근래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데카르트, 헤겔이나 포퍼가 그러한 반성을 꾀했던 사람들이다. 동양 사람은 지금 서양으로부터 밀려오는 대세(大勢)에 부딪쳐 일어나는 소용돌이를 휘어잡아 나아갈 길을 찾는다. 그것은 왜 논리의 문제인가. 그것은 왜 서양 사람이 부딪쳤던 어느 시대의 혼란보다 복합적이며 그의 어떤 해결보다 단순할 수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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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환 교수가 그의 인생 말미에, 박사 학위를 마친 후 자신의 철학의 개론과 같이 써내려간 글을 다시금 퇴고해 냈다. 글은 위와 같이 끝난다. 그러나 맨 마지막 문장, ‘그 어떤 해결보다 단순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말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직접 여쭤보고 싶지만, 그럴 기회도 없거니와 설령 그런 기회가 있다 손 치더라도, 아마 미소지으며 침묵하시지 않을까. 박동환 선생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그 자신만의 철학의 신호탄을 쏘아올렸으니, 이제 그 해답은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