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철학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분석 철학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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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분석)철학
- 버트런드 러셀
제3대 러셀 백작 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 OM, FRS, 1872년 5월 18일 ~ 1970년 2월 2일)은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사회 비평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이자 지성인으로 여겨진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일생의 여러 부분에서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순으로 자신의 이상을 생각해왔으나, 자신이 이 중 어느 쪽도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일생의 대부분을 잉글랜드에서 보냈으나, 그는 웨일스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러셀은 1900년대 초반 "관념론 반대운동(revolt against idealism)" 을 일으켰으며, 그의 선배 프레게, 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꼽히며, 20세기의 선두 논리학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를 저술했으며, 이는 수학을 이용해 논리학의 기틀을 닦고자 한 시도이다. 그의 철학 에세이 〈On Denoting〉은 "철학의 패러다임" 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저술은 논리학, 수학, 집합론, 언어학, 철학중에서도 언어철학, 인식론, 형이상학에 영향을 주었다.
러셀은 당시 반전 운동가로서 크게 활약했다; 그는 자유 무역을 지지했으며, 반제국주의 운동가로도 활약했다. 러셀은 1차 세계대전 때 반전 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후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주의자, 전체주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과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는 핵무장 반대운동에도 열렬히 참가했다.
1950년, 러셀은 "인본주의와 양심의 자유를 대표하는 다양하고 중요한 저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러셀의 부모는 당시 정치사상이 극단적인 쪽이었다. 러셀의 아버지 존 러셀은 무신론자였으며,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생물학자 더글러스 스펄딩과 자신의 아내간의 정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부모 양쪽 모두 당시 사회 분위기에 앞서가는 "산아제한"의 지지자였다. 아버지 존 러셀의 무신론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에게 러셀의 대부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 데서 명확히 드러난다. 밀은 러셀이 태어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지만, 그의 저술은 러셀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러셀 백작부인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으나, 종교 이외의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여 다윈 사상을 지지했으며, 버트런드 러셀에게 사회정의에 대한 시각을 키워주었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성서 이야기인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출애굽기 23:2/새번역성서)는 러셀의 좌우명이 되었다. 당시 러셀이 살던 펨브로크 롯지도 종교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분위기였는데, 러셀의 형 프랭크는 저항적이었으며, 러셀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생활했다. 할머니는 공교육에 반대해 손자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교사를 초빙해 가르쳤으며 이 때문에 친구를 사귀지 못한 러셀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공포를 느꼈다.
러셀의 사춘기 는 굉장히 고독했으며, 그는 몇 차례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러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자신의 주된 관심사는 종교와 수학이었으며, 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자살을 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그는 집에서 몇 명의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 그의 형 프랭크는 러셀에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쳐, 러셀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또한, 이 기간 중에 러셀은 퍼시 비시 셸리의 저술을 찾게 되었다. 자서전에 그는 "나는 내 생각이나 기분을 말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서, 모든 여가 시간을 그의 저술을 읽으며, 마음 깊이 새기는 데 보냈다. 나는 셸리의 저술을 알게 된 것이 정말 환상적이라고 느꼈으며, 내가 인간으로서 그를 만났다면 큰 동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기록했다.[17] 15세가 되며 러셀은 기독교의 교리가 합당한가에 대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으며, 18세에 그는 완전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러셀은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선구자적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20세기 초에는 헤겔에 영향받은 이상주의에 반대했고, 30년 뒤에 이는 비엔나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의해 형이상학 반대를 반복했다.
논리와 수리 철학
러셀은 근대 수리 논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은 러셀이 자신의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러셀의 첫 수학에 관한 책은 《기하학기초론에 관한 에세이(An Essay on the Foundations of Geometry)》이다. 이 작품은 칸트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러셀은 자신의 책이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스키마를 받아들일 여유 공간이 없다는것을 깨닫고, 칸트의 수학과 기하학을 완전히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최초의 작업에 대해 거의 중요성 없다는 평가를 했다.
그는 또한 1+1=2를 증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
*대표저작 :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 《러셀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Why I Am Not a Christian. London: Watts》
2.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독일어: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 – 1951년 4월 29일)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이며, 논리학, 수학 철학, 심리 철학, 언어 철학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와 일상 언어 철학에 영향을 끼쳤고 분석 철학을 대표하는 인재로도 알려져 있다. 20세기 말 한 철학 포럼이 정리한 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와 《철학 탐구》는 상위 5위권에 모두 선정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후일 인문학과 사회 과학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고 분석 철학자로서는 예외로 예술가들에게 전파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종종 천재를 가리키는 낱말로 쓰인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논리 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와 《철학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로 나뉜다. 《논리 철학 논고》에 나타난 전기 사상은 명제에 사용된 낱말의 은유다운 관계를 분석하여 기존 철학에서 잘못된 개념 탓에 빚어진 논리에 상충하는 점을 지목하는 것인 일변, 후기 사상에서 언어-놀이에서 상호 변환되는 자연 언어가 논리에 부합한 구조로 정형화한 언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우울증에 따른 자살 경향을 보였다. 장남인 한스는 네 살 때 작곡할 정도로 신동이었으나 1902년 쿠바의 아바나에서 자살했다. 뒤를 이어 삼남 루돌프가 1904년 베를린에서 자살하였고 차남 쿠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군의 총 퇴각이 결정되자 자신이 지휘하던 진중에서 총을 이용해 자살하였다.[19] 루트비히도 청년 시절 줄곧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러셀로부터 천재로 인정받은 후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학교 생활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높은 톤의 어투에 약간 말더듬이가 있었고 우아한 옷을 입은 민감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심중으로만 생각하는 학생이었다. 동급생 거의 대부분이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점을 특징으로 꼽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선생", "헤어 루트비히"(독일어: Herr Ludwig→루트비히씨)와 같은 별명으로 불렸다.
비트겐슈타인은 1905년 하늘을 나는 문제를 해결한 영웅과 천재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루트비히 볼츠만의 선집을 읽고 볼츠만에게서 물리학을 배우려고 했으나 볼츠만은 1906년 생을 자살로 마감하였다.
1906년 베를린에서 기계공학을 배우기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우스토 베란치오 같은 사람들이 남긴 르네상스 시기 작업에 흥미를 느꼈다. 1908년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항공과 관련한 논문으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공학 연구소의 연구생으로 등록되어 대기권 상층에 연을 띄우는 연구하였고 작은 제트 엔진에 사용될 프로펠러를 제작하였다. 맨체스터에서 연구 생활하는 동안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공저한 《수학 원리》, 고틀로프 프레게의 《산수의 근본 법칙》를 읽고 수학기초론에 흥미를 느꼈다. 1911년 여름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를 방문한 후부터 연락을 자주 교환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버트런드 러셀에게서 배우기로 하였다.
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의 송네 피요르드의 끝에 있는 스크욜덴 인근의 오지에서 독거에 들어갔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곳의 한 집 이층을 빌려 겨우내 지내면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가장 정열 있고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흔히 "논고"라고 불리는 《논리 철학 논고》로 정리되었다.
전쟁 기간 비트겐슈타인은 군인의 눈으로 목격한 천박을 대상으로 한 경멸을 노트에 기록하였다. 종전 뒤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노트에 철학과 종교를 대상으로 한 단상을 적어나갔다. 노트에 적힌 단상을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종교를 향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 비트겐슈타인은 종교를 대상으로 해 불가지론다운 태도를 견지했는데 전쟁 중에 비트겐슈타인은 레프 톨스토이의 《믿음 안의 찬송》을 갈리시아 루마니아 왕국에 있던 한 서점에서 구입한 후 어디나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으므로 후일 비트겐슈타인의 지휘에 있던 부대원들은 “찬송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란 별명을 얻었으며,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러 저작에서 종교상 영향받았다.
윤리, 종교에 딸린 기호를 가지고 "논리"에 부합한 연구를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 관심했던 논리 분석을 윤리 개념에 접합하면서 전쟁 기간에 발전하게 한 소위 "그림 이론"을 적용하였다. 여기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과 노르웨이에서 은둔 생활한 시기에 한 작업이 "논고"의 바탕이 되었다.
세계의 모든 현대다운 시각의 바탕이 되는 착각인 소위 자연법칙은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한 설명이라서 사람들은 자연법칙이 고대의 신이나 운명처럼 거스를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즉시 멈춰야 한다. — 비트겐슈타인, 논고, 6.371–6.372
논고를 번역한 프랭크 램지가 1923년 가을 비트겐슈타인의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갔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좁다란 텅 빈 방에 침대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작은 테이블과 난로가 고작이었다. 프랭크 램지는 저녁 식사로 질긴 빵 하나와 버터와 코코아 한 잔을 건네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침 여덟 시에서 정오나 오후 한 시까지 수업하였고 오후 시간은 자유롭게 보냈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직 생활하면서 아이들을 이롭게 하려고 42쪽으로 된 철자와 발음이 표기된 사전을 만들었다. 《어린이를 위한 사전》(독일어: Wörterbuch für Volksschulen)은 《논고》를 제외하면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유일한 책이다. 이 사전은 1926년 빈에서 출판되었고 횔데르 피흘러 템프스키의 간단한 서문이 들어 있다. 이 사전의 초판은 2005년 2월 경매에서 75,000 £에 판매되었다. 교직 생활하면서 체벌 문제에 휩싸인 비트겐슈타인은 1926년 4월 11살 소년을 심하게 때렸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였고 결국 교직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교직을 그만 둔 후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잠시 머문 후 휘텔도르프 자비의 형제 수도회에서 정원사로서 일하였다.
1926년 비트겐슈타인은 누나인 그레틀을 위해 새 집을 구상하였다. 건축은 전쟁 중에 친구가 된 파울 엥겔만이 진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과 파울 엥겔만은 참호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다. 파울 엥겔만은 새 집이 아돌프 루스 이후 현대 건축을 나타내는 공간으로 자리잡기를 바랐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집을 짓는 일에 온통 매달렸고 창틀, 문, 난방기 같은 것까지 일일이 살펴보았다. 문 손잡이와 난방기는 직접 설계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요구로 모든 창문에 150Kg에 이르는 금속 차양막을 달았다. 《비트겐슈타인의 건축》을 쓴 버나드 라이트너는 이 건축물이 건축사에서 다른 예를 찾기 힘든 독특한 것이라 평가하면서 "이 집은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로 매우 정교하게 지어졌다. 모든 철제는 바닥에 숨겨져 있도록 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집이 거의 완공되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천정의 높이를 30mm 더 높이라고 하였고, 그가 원한대로 천정을 높이고서야 마침내 완공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누나 헤르미네는 이 집을 두고 "나는 언제나 내가 그 집 안에서 살아도 되는 걸까 자문하곤 하였다. 그 집은 신의 거처처럼 만들어져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집을 좋게 말하면 너무 소박하게 지었다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은 이 집이 건축의 기본이 되는 생활이나 건강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고 여겼다.[49]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 집은 러시아 군인들의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1950년대 그레틀의 아들이 개발업자에게 집을 팔아 없어질 위기에 놓였으나 빈 랜드마크 협회가 1971년 이 집을 구매해 보존한다. 이 집은 현재 불가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건축 작업을 마치고 모리츠 슐리크와 만났다. 슐리크는 빈 학파를 이끌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슐리크 자신은 빈 학파의 논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한 적이 없으나 프리드리히 바이스만과 같은 빈 학파의 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에 기초한 주제를 화제로 하여 자주 대화했다. 슐리크와 빈 학파의 회원들이 자신의 《논고》를 오해한다고 생각하여 자주 좌절한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에 딸린 생활과 신비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논리실증주의는 이러한 것을 쓸모 없는 것으로 비하한다고 간주했다. 한 모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를 돌아가면서 낭송하는 사이 자신의 책 언급을 거부하여 좌중을 짜증나게 하였다. 이런 일이 있었어도 비트겐슈타인은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철학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모임이 이어지는 동안 프랭크 램지가 《논고》와 관련해 토론하려고 빈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토론을 통해 프랭크 램지가 자신의 《논고》를 오해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동성애 성향이 있었고 빈의 프라테르 공원에서 젊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윌리엄 워렌 바틀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를 쓰면서 1973년 발견된 비트겐슈타인의 노트에는 프라테르에서의 만남을 "친구의 격려"와 같이 표기하였다고 밝혔다. 뒷날 바틀리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의심받았으나 비트겐슈타인이 데이비드 핀센트, 프랜시스 스키너, 벤 리처드와 같은 사람들과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풍문은 거의 정설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정치적으로 좌파적 입장을 지녔다고 평가한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자신이 "심장에서부터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있고 많은 방면에서 노동자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56] 비트겐슈타인은 도덕적 성찰이 없다는 이유로 과학적 방법을 혐오하였으며, 음악취향은 보수적이었고, 핵무기의 사용에 반대하였다.[57] 오스트리아 철학자 오토 바이닝거를 존경한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의 이론을 복사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배포하기도 하였다.[58] 오토 바이닝거처럼 비트겐슈타인도 민족성과 성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었다.[59] 1930년대 초반 기록된 MS 154와 같은 노트에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자책하는 여러 문구가 적혀 있다.
성자는 단지 유대인 천재일 뿐이다. 가장 뛰어난 유대인 사상가라 할지라도 더는 재능이 없다. (내 자신을 대상으로 해)
음악을 거론하지 않고는 나를 표현할 수 없다. 어쨌거나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 비트겐슈타인, 1949
후일 비트겐슈타인은 "내 생각은 100% 헤브라이즘답다"라고 스스로 비판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기부정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았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그는 자신의 참신함과 천재성을 확신하였다. — 한스 슬루거
1934년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인 케인스가 쓴 《러시아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서 서술된 소비에트 생활에 매료되어 스키너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련방으로 이민을 고려하였다. 그들은 러시아어를 배웠고 1935년에는 비트겐슈타인이 안전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닌그라드와 모스코바를 여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시아 당국에 교사 자리가 있는지 문의하였으나 이에 대답은 3주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1936년부터 37년 사이에 비트겐슈타인은 스키너와 함께 노르웨이에 다시 머물렀다.[63]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에서 연구를 계속하였고 이것을 철학적 “조사”라고 불렀다.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 비트겐슈타인은 영화관 제일 앞자리에서 영화를 보는가하면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편안히 서방세계를 관망하였다.[68] 노먼 말콤은 비트겐슈타인이 강의를 마치자마자 영화관으로 달려가곤 했다고 회고하였다.
강의를 마친 학생들이 교실을 나가려고 의자에서 몸을 빼는 순간 비트겐슈타인은 친구를 향해 "갈 수 있겠어?"하고 낮은 목소리로 묻곤 하였다. 영화관에 갈 때면 비트겐슈타인은 빵이나 파이 따위를 사들고서는 영화를 보면서 먹었다.— 노먼 말콤
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수학기초론에 대한 자신의 기존 견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에서 논리는 단단한 기호였으며, 그는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개론》에 대해서도 이러한 사고를 기초로 비평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에 이르러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글과 강의를 통해서 과거 자신의 사상을 부정하였다.
몽크의 회고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시작되었는데도 철학 강의나 하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를 견디기 힘들어하였다고 한다. 1941년 9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형제였던 존 라일 교수에게 요청하여 런던에 있는 가이스 병원에서 봉사하겠노라고 요청하였다. 존 라일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의학 교수였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은 가이스 병원에서 약품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71]
병원의 직원들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자신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간혹 비트겐슈타인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하고 부탁하였고, 자신을 비트겐슈타인 교수님이라 부르지 말고 여느 의사들과 같이 박사님이라 불러주기를 바랐다.
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몹시 외로웠다.
내 생활의 미래를 대상으로 해 나는 더는 어떤 희망도 없다. 살아있는 사망이 길게 늘어진 것과 같은 이런 것은 예전에는 없었다. 최악 상황 말고는 내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친구도 없고 기쁨도 없고. — 비트겐슈타인, 1942년 4월 1일
죽음은 삶에서 일어나는 그저 그런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영원히 계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들어선다면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속한 것이다. 제한없이 펼쳐진 이 길에서 우리의 삶에 끝은 없다.
— 비트겐슈타인, 논고, 6.4311
1951년 초 비트겐슈타인은 유언장을 다시 작성하였다. 그는 노먼 말콤에게 "내 마음은 이미 죽었어. 더이상은 고통일 뿐이지. 내 알기로 삶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고 그 다음엔 정신적인 삶만이 남게 되는거야"라고 말하였다.
62번째 생일이던 1951년 4월 26일 의사가 생이 이제 몇일 남지 않았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좋군요,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4월 29일 사망하였고 로마 가톨릭 식 장례의식을 거쳐 묻혔다.
《논리-철학 논고》(라틴어: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이다. 초판의 서문은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버트런드 러셀이 썼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본문을 썼으며 일정량이 모이면 러셀과 무어에게 보냈고 1918년 완성하였다. 초판의 출간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22년에 이루어졌다. 흔히 《논고》로 줄여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기존의 철학에서 적용하는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논리를 잘못 적용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내가 믿기에는, 이러한 문제들의 문제 제기가 우리의 언어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뜻은 대략 다음의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 나에겐 여기서 전달된 사고들의 진리성은 불가침적이며 결정적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나는 본질적인 점에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주요 저작
《논리-철학 논고》
《논고》를 집필하던 시점의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기존의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 슈타인은 이러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 이론(picture theory)을 제시한다. 그림 이론을 구상하게된 까닭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재판에서 모형들이 사용된 것을 본 것 때문이었다. 그림 이론이란 언어는 세계를, 명제는 사실을, 이름은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이 실제 대응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일기장에 “한 문장에는 하나의 세계가 연습삼아 조립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그림 이론은 기존의 철학, 특히 형이상학이나 도덕학에서 신이나 자아, 도덕과 같은 것들은 실제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없어서 뜻(Sinn)이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과학과 같은 것은 실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를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라고 끝맺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 명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증명할 수 없어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구태여 증명하려 하여 무가치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함께 재직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 자신의 그림 이론에 대해 토론을 하던 가운데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론에 스라파가 반론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목부분을 밀어 올렸다. 스라파의 행동은 이탈리아에서 의문이나 조소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제스처였다. 순간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주장했던 언어의 논리학과는 달리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언어의 의미는 결코 한 가지로 고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84]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바탕으로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였으나 출판하지는 않았다. 《철학적 탐구》는 비트겐슈타인의 사후에 남겨진 초고를 합하여 출판되었다.[85]
《철학적 탐구》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을 상당부분 수정하게 된다. 초기의 그림 이론과는 달리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그림 이론을 포함한 기존에 있었던 사물과 언어가 일치한다는 주장을 반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있기 전에 생활 양식이 있다. 또한, 언어는 그 '뜻'[주해 3] 이 아니라 '사용'[주해 4] 에 본질이 있으며,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는 하나의 공통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쓰임에서 나타나는 여러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것을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s)[주해 5] 이라고 불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놀이에 비유했는데, 줄넘기 놀이, 술래잡기, 가위바위보 등의 '놀이'에서도 어떤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처럼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 대니얼 솔로브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접근을 현대형 프라이버시 개념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86]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명료하고 논리적인 이상적인 상태의 언어를 추구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러한 철학은 옥스퍼드학파라고도 불리는 일상언어학파가 잇게 된다.
3.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OM, FRS, 1861년 2월 15일 ~ 1947년 12월 30일)는 영국의 철학자·수학자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호논리학(수학적 논리학)의 대성자 중 한 사람이다.
사적(史蹟)이 많은 영국 남부의 켄트 주 램스게이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영국 성공회의 신부로 사립학교 교장이었다. 이러한 환경은 역사·종교·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을 함양시켜 주었다. 188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여 수학을 전공하였으며, 이어 장학금 연구원(펠로)으로 선발되고 강사가 되었다.
1910년에 런던 대학교의 응용수학 교수가 되기까지 버트런드 러셀과 10년간에 걸쳐 협력하여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논한 고전 《수학 원리》 3권을 완성하였는데, 이미 1898년의 《보편대수학론》(이 논문으로 왕립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등에 이러한 논리-수학적 관심이 나타나 있었다. 또한 런던 대학교 시절에 상대성이론에 강한 관심을 보였고, 그의 철학자로서의 업적은 《자연이라는 개념》 등 과학철학에 관한 여러 저작에 의해 확립되었다.
1924년 63세로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초빙되어 미국으로 건너갔고, 매사추세츠 주의 케임브리지에 살며 《과학과 근대 세계》, 《상징작용》, 《과정과 실재》, 《관념의 모험》, 《사상의 제 양태》가 계속 간행되어 우주론 내지 형이상학 체계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과학의 기초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수학자 화이트헤드는 실재론적 기초 위에서 넓은 시야의 문명론을 전개하면서 '유기체 철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철학 사상을 구축했다.
그는 부인과 함께 담화의 명수였으며, 그의 집은 계속 찾아드는 학생이나 동료를 위해 개방되어 있었다. 또 전 생애에 걸쳐 사회와 정치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가졌다. 1945년에 문화훈장인 '오더 오브 메릿'(Order of Merit)을 수여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수학 원리》(버트런드 러셀과 공저, 3권 1910-1913), 《과정과 실재》(1929),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 1933)이 있다.
4. 모리츠 슐리크
모리츠 슐리크(Moritz Schlick, 1882년~1936년)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베를린에서 태어나 빈 대학 교수를 지냈다. 노이라트·카르나프 등과 마흐 협회·빈 학단을 창설하였다. 논리실증주의 운동의 지도자. 사실과 엄격히 대응하는 명제를 진리로 보는 경험적 인식론, 논리학 및 수학의 선험성(先驗性) 등을 연구했으며, 정신착란에 걸린 학생에게 살해되었다.
*고대 희랍 철학
1. 고르기아스(그리스어: Γοργίας, 기원전 485년 경 ~ 기원전 385년 경)는 시칠리아 레온티노이 출신의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이자 철학자, 웅변가이다. 프로타고라스와 함께 1세대 소피스트를 형성하였다. 몇몇 고전학자는 그가 단지 몇 살만 어렸을 뿐인데도 엠페도클레스의 제자였다고 보고한다. 고르기아스의 강연에서 특이한 면은 청중으로부터 여러 질문을 받고 즉석에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만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인식 할 수 없다. 만약 인식한다 하여도 타인에게 말할 수 없다"는 일종의 허무주의적 경향이 그의 근본 사상으로, 이것은 당시 잦은 전쟁으로 참혹해진 희랍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데에 플라톤의 철학의 동기가 있다. 저서 중에 〈팔라메데스론〉, 〈헬레네론〉, 〈비존재론〉, 〈화평론〉 등이 유명하다. 고르기아스의 철학에서 모든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저작 《비존재에 관하여》에서 3개의 주장을 제시한다.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존재하더라도 인식되지 않는다. 셋째, 인식되더라도 언어로 전달되거나 해석되지 않는다. 이 주장은 한 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르가아스가 최초로 작성했다는 증거는 없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언급과 《멜리소스, 크세노파네스, 고르기아스에 대하여》을 통하여 이것이 고르기아스의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독일어: Vorsokratiker, 영어: Presocratics)란 문자 그대로 소크라테스 이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를 한데 묶어서 쓰는 낱말이다. 이 낱말은 처음 독일의 고전 문헌학자 헤르만 딜스가 이들 철학자의 단편들을 한데 모아 엮은 책의 제목에서 비롯된다. 그 뒤,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독일어를 직역하여 그대로 쓰고 있으며, 오늘날 서양 철학사에서 굳어진 낱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흔히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하며, 또는 그들이 태어난 지방의 이름을 따서 이오니아, 엘레아 철학자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에 대한 중요한 분석들은 그레고리 블라스토스, 조너선 번스, 고든 클라크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에 의해 다루어졌다.
그들 대부분은 중요한 문헌들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그 문헌들이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후대의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 의해 인용되었던 것들과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문헌들뿐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그들 주위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신화적 해석들을 거부했으며, 대신 좀 더 이성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만물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만물은 무엇으로부터 창조되었는가?
자연에서 발견되는 사물들의 다수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자연은 수학적으로 어떻게 기술해야 하는가?
일부는 나중에 수학적, 과학적 그리고 철학적 연구의 기초가 되는 문제들과 역설들을 정의하는 데 집중했다. 물론, 초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우주론은 근대 과학에서 기초된 관점에 의해 수정되었다. 그 이후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그들이 내놓은 대답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물었던 질문들은 이후 철학자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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