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증

Posted by 히키신
2017. 2. 15. 16:43 etc

8. 신경증 (전반부)

정신병과 대조적으로 신경증은 부권적 기능의 자리매김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신경증자는 이미 언어의 기본 구조를 습득한 자이며 확실성보다는 의심에 지배 받는다. 정신병의 폐제와는 반대로 억압의 구조를 갖기 때문에 억압된 것이 내부로부터 말실수, 실수 행위, 증상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도착증과 비교하자면 성기대(性器帶)가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로서, 주이상스를 가져다 주는 것에 대해 일정 정도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도 추구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낀다. 또한 신경증은 도착증과 달리 타자의 주이상스의 원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억압

신경증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은 억압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억압은 한때 마음속에 스쳤던 지각이나 사고의 기록을 분리해 내서 (정신병과 달리 일단 긍정한 상태에서) 의식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이다.
억압된 것은 감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그 감각이나 감정에 부착된 관념이며 무의식은 그 관념들로 구성된다. 억압이 일어나면 생각과 감정은 분리가 되며 생각은 의식에서 밀려난다. 이것이 원인도 모른 채 (신경증 환자가) 불안이나 우울, 죄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이유이다. 어떤 생각을 억압하더라도 거기에 상응하는 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다 (히스테리 환자에게서 공통적인 현상) 반대로 의식이 생각을 허용하지만 그에 따른 아무런 감정도 불러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강박증 환자에게 공통적인 현상)
분석은 환자가 관념과 고리가 끊긴 예전의 감정을 지금 이곳의 분석 관계 속으로 전이시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는 가능한 한 분석가가 텅 빈 스크린의 역할 (부정태를 통한 투사- 프로이트의 “무기질 인간 Man without Quality”)을 취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억압된 것의 회귀

억압과 억압된 것의 회귀는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 (엄마가 쓰다듬어주는 것을 메스꺼워한다면 이는 곧 엄마에 대한 욕망이 억압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신경증의 증상은 언어의 역할을 하며, 억압은 바로 그 언어를 통해서(정확히는 언어에 의해 쓰여진 신체-기표로 덧쓰여진 신체) 표출된다. 일반적으로 히스테리는 억압된 것이 신체로 되돌아오는 반면 강박증은 억압된 것이 정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해지곤 하는데 이것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구분의 잣대는 어떤 장소로 되돌아오느냐가 아니다) - 실제로 신체적인 장애를 겪는 강박증자가 증가하는 추세다.

라캉적 주체의 위치/태도

따라서 신경증에 속한 진단 범주는 증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어떤 위치/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최근의 과학적인 의학이나 통속심리학에서 공식화된 범주들은 증상의 국소적인 패턴이나 증후군을 나열하는 식에 머물러 있고 그러한 패턴들 이면에 숨겨진 심층적인 구조에 접근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거식증에 걸린 한 여성은 결국 식사 장애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데 이는 사실 거식증이라는 말을 동어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캉은 심층적인 구조로 신경증의 하위 범주를 제시하므로 어떤 특정한 증상이 여러 범주에서 동시에 발견될 수도 있다.

히스테리와 강박증

프로이트는 초기의 성경험에 대해 주체가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서 히스테리와 강박증을 정의하려고 했다. 강박증이 죄의식으로 반응하는 반면 히스테리는 혐오감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임상작업에서는 경험적인 지표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강박증에서 이른바 히스테리의 특징을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상보다 정말로 환자의 심리 구조를 통제한 다고 할 수 있는 어떤 매커니즘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로이트는 (1890년대 후반) 히스테리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도록 분명하게 정의하려고 했으나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저작을 형식화하고 확장하면서 그가 제시하지 못했던 강박증과 히스테리의 구조적인 이해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1. 구조적인 정의들

히스테리와 강박증에 관한 라캉의 가장 기본적인 구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환상 개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대상은 항상 주체가 타자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에 상실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강박증자는 이 순간 대상과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어떠한 연관 관계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예를 들면 엄마의 젖가슴은 아이가 만족을 얻는 최초의 근원이다. 처음에 유아는 젖가슴을 자기 자신과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유기가 진행되는 동안 아이는 젖가슴을 상실되는 것으로 체험한다. 이 상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보상 받으려 하는데 강박증자는 욕망의 원인인 젖가슴을 자신의 것으로 구성하는 환상을 통해 분리를 극복하고 보상받으려 한다.
강박증자는 대상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며 타자의 욕망과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타자를 무화시키고 중화시키려는 강박증자의 본환상을 본환상의 일반적인 공식 (S ◇ a)으로 대신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히스테리 환자의 환상은 타자가 상실한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다. 히스테리 환자는 자신이 없이는 엄마가 완전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이 엄마를 완전한 하나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강박증자는 분리가 주체에게 끼친 효과들을 뒤집으려 하는 반면, 히스테리 환자는 분리가 타자에게 끼친 효과를 뒤집으려 한다. 히스테리의 대상은 결여를 안고 분열되어 있는 타자로서 빗금 친 A 이다 (히스테리 환자의 본환상은 a ◇ A로 표기될 수 있다)

2. 사유 안에 있기(강박증)/원인으로 있기(히스테리)

강박증자와 히스테리 환자는 존재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히스테리의 주된 질문이 <내가 남자냐 여자냐>라면 강박증의 주된 질문은 <내가 죽었느냐 살았느냐>이다. 강박증자는 자신이 의식적인 생각에 빠져 있을 때만 살아있다고 확신한다. 존재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사고하는 의식적 주체, 즉 에고와 연관된다. 의식적인 사색가와 같이 강박증자는 고의적으로 무의식을 무시하며 자신은 완전한 주체이며 결여에 종속된 주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박증자는 성관계에 연루되더라도 상대를 대상 a의 우연적인 <용기>나 <매체>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상대를 무화 시킨다) 이에 반해 히스테리 환자는 성적 상대인 타자를 강조한다. 그녀는 타자의 욕망을 지배하기 위해 스스로 그 욕망의 대상이 된다. 또한 타자를 불만족한 상태로 유도하여 자신이 대상의 역할을 영원히 수행하도록 노력한다 (불만족한 욕망에 대한 욕망)

3. 불만족한 욕망(히스테리)/불가능한 욕망(강박증)

히스테리와 대조적으로 강박증자의 욕망은 불가능한 욕망이다 만약 강박증자가 욕망의 실현에 다다르게 되면 타자는 그를 분열된 주체의 자리 속에 가두어 사라지게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타자의 존재 앞에서 강박증자는 자신이 <아파니시스 aphanisis-주체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타자의 존재를 회피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든지, 현실적 조건으로 불가능한 상상 속의 연인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전형적인 전략이다)
이에 반해 히스테리의 환상 속에서 욕망하는 자는 바로 타자 (A), 일반적으로 이성애 커플인 경우엔 남편이나 남자 친구이다. 언뜻 보기에 히스테리 환자 자신은 욕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서 여성을 대상화한다고 공격 받는다). 하지만 라캉는 사태를 기술한 것이지 당위성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강조되어야 할 점은 대상으로서의 히스테리 환자의 위치가 단지 일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히스테리 환자는 또한 자신을 남성 파트너와 동일시하며, 마치 자신이 그인 것처럼 욕망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정육점 여인’ 사례- 남편과 동일시를 통해서 자신이 직접 자신의 여자 친구-타자가 욕망하는 또 다른 여자-를 욕망한다)
라캉은 히스테리의 특징을 L’hysterique fait l’homme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 말은 히스테리 환자는 남자를 만드는 동시에 남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남자로부터 결여/욕망을 끌어냄으로써 그를 존재하도록 만들고 이와 동시에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의 역할을 대신한다. 우리는 여기서 <내가 여자인가 남자인가?>라는 히스테리 환자의 질문의 타당성을 찾게 된다. 물론 이것이 강박증자는 자신의 성에 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모든 신경증자는 동성애 성향이 있다고 말한 바 있으며 아이는 어떤 점에서 항상 엄마와 아버지 모두와 동일시한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내가 살았느냐 죽었느냐?>라는 질문이 강박증자를 더 깊이 사로잡고 있다)

4. 타자의 주이상스에 대한 신경증자의 태도

히스테리 환자는 타자의 주이상스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의 욕망을 불만족한 상태로 유지시킨다. 그녀는 그의 욕망의 원인이 되길 원하지만 그의 주이상스의 원인이 되는 것은 거부한다.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의 좋은 본보기로 강박증자와 히스테리 환자의 만남을 상상해 보자 – 강박증자는 자기 앞의 상대를 거부하고 자신의 대상 a와 관계한다. 히스테리 환자는 성관계 도중 자신이 다른 곳에 있다고 상상함으로써 타자의 욕망을 유지시키려 한다) 이 때 욕망과 주이상스의 구분이 매우 중요한데 히스테리 환자에게 성적만족과 욕망의 불일치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사랑, 욕망, 주이상스는 각기 구조적으로 다른 수준에 위치하며 문제는 환자가 그것들을 하나의 동일한 대상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과 같은 이상을 위해 욕망과 성적 만족의 추구를 포기한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분석가는 환자를 사랑, 욕망, 주이상스가 일치할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끄는 것을 분석의 목적으로 삼으면 안 되고(정상/비정상 이라는 설정된 개념을 심어주어서도 안 된다) 분석주체의 욕망이 변증법적인 운동을 따르도록 이끌어 그가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분리되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강박증자 또한 히스테리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타자에게 어떠한 주이상스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전략을 펼친다. (그렇다면 신경증은 타자의 주이상스에 대한 하나의 일관된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신경증자의 본환상은 타자의 주이상스를 보장하는 초월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 그의 본환상은 타자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타난 것인데, 이 때 그 타자란 곧 상징적 아버지나 초자아를 말한다 양심의 내면화된 목소리인 초자아의 가혹성은 사실상 주이상스를 위한 매체가 된다. 즉 강박증자의 초자아는 그로 하여금 생각만으로도 흥분되는 어떤 짓을 하도록 명령한다 - 주이상스를 즐기길 지시하는 명령- 그 것은 또한 초자아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명령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명령에 복종하는 한, 우리의 만족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 타자를 위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그가 만약 작가라면 그는 자신의 글을 평가할 미래의 모든 독자를 위해 자신의 주이상스를 희생한다)

5. 분석중의 히스테리와 강박증

강박증자는 자신의 무의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강한 부정을 보인다 그는 오직 자기분석을 통해서만 (자신의 꿈을 기술하거나 일기를 씀으로써) 자신의 무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강박증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절한다 전형적인 강박증자는 부모의 소망에 반대해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사실 그의 삶 전체가 타자의 이상에 대항해 반항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은 자기만의 자생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자신이 타자로부터 독립된 존재라고 굳게 믿는 강박증자가 분석을 거부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자발적으로 분석에 참여하는 강박증자가 있다면 아주 우연한 기회에 타자의 욕망과 마주쳐 버린 사람들이다. 타자 속의 결여와 대면한 그들은 자신의 세계에 대한 위협감을 느끼며 불안에 빠진다. 그는 더 이상 타자를 무화시키거나 중화시킬 수 없으며 자신이 타자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고 결굴 타자에 대해 마음을 연다 (히스테리화) 문제는 이렇게 이루어진 히스테리화는 무척이나 허약하고 그 생명이 짧다는 점이다. 따라서 분석가는 강박증자가 다시 폐쇄적이 되지 못하도록 분석가로서의 자신의 욕망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어야 한다. 지속적인 타자와의 대면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타자의 욕망을 일깨워 주어 강박증자가 그의 환상을 반복하지 못하도록 분석가는 막아야 한다.
히스테리 환자의 경우는 타자가 자신의 결여된 지식을 충족시켜 주길 기대하므로 쉽게 분석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다. 그러나 분석가가 히스테리 환자에게 그녀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더라도 그녀는 잠정적으로만 만족하며 지식을 얻자마자 곧바로 꼼꼼히 따져보고 평가하고 이의를 제기한다 이렇게 그녀는 분석가의 지식 속에서 결여와 공백을 추구한다. 이런 식으로 앎의 놀이 속에 말려든 분석가는 조만간 환자에게 공급할 새로운 지식이 바닥나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 승리는 환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요컨대 그녀는 분석가에게 일종의 살아 있는 수수께끼가 되고자 한다. 이 때 분석가에게 필요한 전략은 협상 테이블을 뒤집는 방법 (히스테리 환자의 담화에서 분석가 담화로의 이행) 이다.
강박증의 분석이 주체를 히스테리화하는 것으로 시작하면, 히스테리의 분석은 반대로 주체의 담화 형태를 바꾸어 타자로부터 지식을 받거나 기대하길 멈추게끔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만 모든 히스테리 환자가 자신의 분석가를 대놓고 시험하려 들고 모든 강박증자가 노골적으로 분석가를 무시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환자들의 심리 구조의 차이에 근거한 일반적인 성향들일 뿐이다. 이 두 가지 범주를 성별과 대응해서 설명한 것도 일반적인 경향성을 설명한 것뿐이다 (상당수의 남성들이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히스테리 환자로 진단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라캉은 남성 구조와 여성 구조의 구분이 (물론 이는 생물학적인 성의 구분이 아니다) 강박증과 히스테리의 구분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양자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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