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덕 - 복귀(復歸)1975

Posted by 히키신
2016. 11. 23. 15:17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제 4. 言語와 實相
17. 因果도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그 속(현실)에서 끄집어 낼지라도, 그것이 고갈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것들의 전부가 우리의 능력 앞에서 동시에 한꺼번에 주어지는 일은 없었다. 우리의 능력의 수준만큼, 그리고 우리의 노력의 정도만큼, 그 가능성은 우리의 앞에서 실현될 뿐이었다. 이 현실, 이 세계는 우리의 앞에서 언제까지나 開放的이다.
반면에, 인간의 思惟는 무한한 事象을 앞에 놓고서, 그것을 有限의 차원에로 끌어 내리려고 한다. 무한인 것처럼 보이는 우주에다가 한계를 지어 보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사유는 유동적인 현실을 그대로 대하지는 못하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이든 고정시켜 놓고는, 그러한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는 전제 밑에서 작용한다.
우연히 한번 그러한 일이 있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며, 앞으로도 그러한 상황의 밑에서는 그러한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유는 예외(例外)를 가장 싫어한다. 모든 것을 원칙대로만 파악하려고 하고, 언제나 ‘맞아 떨어지는’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다시 말하면, 완결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이며,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사유는 어디까지나 閉鎖的이다.
인간의 사유는 우리의 현실을 그것으로서 총체적으로 대하는 일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이 현실의 어떤 ‘국면’만을 상대하려고 하며, 그리고 이 때에는 일정한 ‘比較의 觀點’을 먼저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서만 이 국면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의 관점이 즉 ‘개념(槪念)‘이다.
가령 이 몸을 예로 든다면, 인간의 사유는 그 몸을 총체적으로 대상으로 삼지는 못하고, 가령 그것의 ‘길이’와 같은 어떤 국면만을 알아보려고 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있어서는 m나 cm같은 ‘비교의 관점’을 미리 정해 놓는다. 이리하여 가령 172cm라는 답이 나오면, 우리의 사유는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때에는 그 몸의 ‘무게’나 ‘건강상태’같은 것은 관심 밖의 것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져 있던 비교의 관점이 불편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다른 기준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리하여 가령 별의 거리를 측정하려고 할 때에는, m로는 불편하므로, 光年이라는 새 기준으로 바꾸기도 한다.
인간의 사유는 이와 같이 ‘비교의 관점’ 이라는 색안경을 끼고서만 현실을 槪念的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촉수(觸手)에 걸려 들지 않는 것은 관심 밖의 것으로서 무시된다.
이와 같이 개념을 통해서만 작용하는 인간의 사유는, 그것이 대하는 이 세계가 그렇게까지 그 내용이 풍부한 것은 아니라고 自慰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인간의 사유가 아무리 쫓아갈지라도, 우리의 현실 또는 세계는 언제나 그보다 앞질러 있으며, 인간의 사유가 그것을 완전히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유가 내세우는 관점의 촉수에 걸려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이 현실 또는 세계의 그대로의 전부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의 현실 또는 세계는 사실은 客體化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총체적으로 대상으로 삼을 만한 주관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의 현실에 관하여, 우리가 아무리 심각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아무 것도 끄집어 내지를 못한다. 우리의 현실 또는 세계와 우리와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우리의 사유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실천일 뿐이다.
사유에 의함으로써는 우리는 아무 것도 끄집어 낼 수 없지만, 실천에 의하는 경우에는 이 현실속에서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성취시킬 수 있다. 비록 그 성과는 그것만으로는 미미한 것일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는 없었던 것이요,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창조가 된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맞는 도전(挑戰)의 양상에 따라, 거기에 알맞는 방식으로,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창조의 과정에는 한계가 없다. 지난날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우리가 해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한한 창조활동이 모두 우리의 ‘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래 우리의 현실속에서는 무한한 가능성이 발굴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으며, 우리가 원하는 바에 따라 무엇이든지 우리의 앞에서 전개시킬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는 소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 또는 세계는 곧 그대로 우리의 나타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를 떠나서 이 현실, 이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며, 나의 현실 또는 나의 세계는 곧 그대로 ‘나’다.
-p85~87

제6. 영원하고도 새로운 문제
-26. 인간의 소외(疎外)

(…)이리하여 가령 교수가 학생을 대할 때에도, 그저 형식적으로 ‘교수’로서만 처신하려고 할 뿐, 그 이상 깊이 ‘인간 대 인간’의 직접적 관계에는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가까운 가족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대인관계의 직접성, 구체성을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의 생활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이러한 직접성, 구체성은 자취를 감추고, 우리는 그저 교수-공무원-유권자-시민-고객 등등 ‘생명 없는 추상’의 탈을 쓴 존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 간다.
경제활동이 인간의 주요 관심사가 된 사회에서는, 위에서 말한 양화(量化)와 추상화(抽象化)의 과정은, 경제적 생산의 영역을 넘어서, ‘물건’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까지 확대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 인간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아무런 생명도 없는 ‘추상’의 탈을 쓴 허수아비로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인간이 소위 ‘자아상실’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확립된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산업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인간의 ‘소외’현상이 특히 눈에 띄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간이 육체적 존재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자아상실은 충분히 문제될 수 있으며, 실제에 있어서 이것은 모든 종교인과 사상가에 의하여 인간존재의 가장 시원적(始原的)인 문제로서 다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런데 구약(舊約)에서는 이 소외현상을 ‘우상숭배’라는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우상을 숭배할 때에는, 인간이 만든 우상이 물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자신도 물건이 된다. 물질에는 자기라는 것이 없다. 그리고 물질이 되어버린 인간도 자기를 가지는 일이 없다. 따라서 우상을 숭배할 때에 인간은 자기를 상실하게 되며, 그러기 때문에 우상숭배는 배척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상숭배에 대한 구약의 주장의 골자가 된다. 구약의 몇 귀절을 들어보자.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호세아’ 14:3)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여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가식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시편’ 135:15~18)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자신의 풍부함을 남(他)에게 투사(投射)하고, 그리고 그 풍부함이 자기와는 동떨어져 있는 그 ‘타’에게 본래부터 위탁되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이 ‘타’에게 복종하고 그것을 사모함으로써만 그 풍부함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우상숭배다. 그리고 이 때의 그 ‘타’는 반드시 물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는, 인간이 만든 ‘수공물’을 숭배할 때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관념’을 숭배할 때에도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외재적(外在的)인 관념신(觀念神)을 숭배하는 것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우상숭배가 된다. 이 때에 인간은 그 자주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아를 상실하고 자기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인간의 탈을 쓴 물건이요, 인간이라는 이름의 ‘생명 없는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상을 만든 자나 우상을 의지하는 자가 다 우상과 같아진다는 것은 이것을 말해 주고 있다. 특히 기계문명이 발달된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람들은 추상화된 자격을 가지고 서로 남을 상대하고 있으며, 여기에 양화현상까지 겹치게 되면, 결국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상품이다(homo homini merx).’라고까지 극단적으로 표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은 그 본연의 자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인류의 위대한 導師들이 한결같이 ‘영원한 문제’로서 제시해온 것은, 바로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아상실과 이에 대한 인간의 자기발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잃어버린 ‘자아’를 다시 찾는 것이 아니다. 찾아야 할 ‘자기’, 다시 말하면, ‘참된 자기’는 사실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아를 다시 찾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꾸며진 것을 ‘자기’라고 착각하고서 그것을 숭배하고 따라가지 않는 것,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라고 인정하고서, 그것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다름 아닌 우상숭배요, 이 때에 사람들은 자신을 소외된 자로서 느끼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으로 꾸며진 것을 ‘자기’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며,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영원하고도 새로운 문제’는 바로 여기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p128~130


우리가 그 무엇인가를 행할 때에는, 반드시 그 이전의 상태가 어떠하였는가를 문제삼아야 하는 것이며, 이래야만 우리는 우리가 행하려고 하는 것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고, 따라서 그 방향도 올바르게 잡을 수 있다.
-P158~159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한 바와 같이 ‘坤’괘는 6개의 효가 모두 음(--)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완전 정지와 자기 충만을 상징하고 있다. 제 1단계의 사업을 원만히 끝내고, 이제 제 2단계의 비약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 대해서 주역은 “무한한 재능을 안으로 간직하고서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라(含章可貞).”(坤六三 爻辭)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純陰의 상태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여기에 양(ㅡ)이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완성된 상태는 스스로 새로운 움직임을 전개할 수는 없고, 움직일 수 있는 계기가 밖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역은 이것을 음효가 양효로 변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리하여 ‘곤’괘의 初六이 양효로 변하는데, 주역은 이것을 ‘復’괘로 부르고 있다. 새로운 움직임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動因이 날아와서 완전 정지의 상태에 종지부를 찍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중국의 철인들은 이것을 ‘복’ 즉 復歸라는 관념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오직 때가 이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天地生物之心’(程朱學派의 用語)이 다시 자신의 일을 해낼 수 있는 상태에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귀’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반드시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한다.
첫째로, ‘복귀’의 전단계로서는 일시적인 ‘후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항상 전면에 나와 있기만 한다면, 복귀라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동시에 여기의 후퇴가 앞날의 복귀를 전제로 하지 않고, 영영 물러서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단순한 ‘도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이 후퇴는, 개인이나 사회를 불문하고, 하나의 ‘자기 완성’의 기간이 될 것이다. 후퇴가 반드시 복귀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면, 여기의 후퇴는 복귀 후에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모든 종류의 활동을 위한 준비기간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준비가 완료되어 자기 완성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바로 이렇나 때를 지목하여 주역은 ‘含章可貞’이라는 교훈을 내리고 있다. 또한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治父는 그의 시귀에서 “산당정야좌무언 적적요요본자연(山堂靜夜坐無言 寂寂寥寥本自然)“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또한 구약의 ‘욥기’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이미 모든 창조활동을 끝냈으나 아직 ‘사탄’ 또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전을 받기 이전의, 자기충만에 가득찬 하나님의 상태를 여기에 해당시키고 있다.
셋째로, 자기 완성이 이룩되고 나면, 다음에는 일정한 계기가 주어지는대로 ‘사명감’을 가지고서 현실속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복귀의 참뜻이 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계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출애굽기’ 19:3)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출애굽기’ 19:3)

여호와가 모세를 ‘시나이’산으로 부른 것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 때에는 신비로운 사명감에 가슴이 부풀어 있는 超人과 그의 지도를 받아야 할 일반 대중의 구별이 생겨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보살’과 ‘중생’의 관계로서 파악하고 있으며, 중생속에 뛰어들어 그들을 제도함으로써, 보살은 보살로서의 구실을 다 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만일 중생이 없으면 일체의 보살은 마침내 무상정각을 이룰 수 없나니라(若無衆生 一切菩薩 終不能成 無上正覺).”(‘華嚴經’ 普賢行願品)
(…)
넷째로, 복귀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명감을 의식한 초인-구세주-보살의 ‘大發願’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의 발원은 절대자 앞에서, 그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 무엇인가를 바라는 따위의 욕망을 가지고는 올바른 복귀를 할 수가 없다. 욕망을 가지고 절대자를 대하는 경우에는 달라는 만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중생속에 뛰어들 때에는, 욕망을 가지고 그들을 대할 것이 아니라, 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여 그 속에서 바람직스러운 가치를 실현시켜 보겠다는 커다란 발원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발원은 아무나, 그리고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크나큰 발원을 한 보살이 중생들속에 뛰어든다는 것은 결코 이것을 범상한 일로서만 보아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보살과 중생이 만난다는 것은 ‘희귀한(rare)’일이며, 그러기 때문에 ‘法華經’도 부처님은 “오직 一大事因緣으로써만 세상에 출현하신다( 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 世).” 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야 하고, 동시에 그것들이 모두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범상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때가 영웅을 만드는 것이다.
다섯째로, 새로운 계기가 주어지어 복귀를 한 자는 그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하나의 도전을 이겨 내고 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새로운 사태는 또다른 도전을 가해 올 가능성이 있는 것인데, 이러한 새로운 도전마저 극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餘力이 이쪽에 보유되어 있어야 한다.
a의 도전을 받았을 때에 단순한 –a로 이에 대응한다면, 그것은 마치 모기에 물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그 자리를 탁탁 치는 것과 같이, ‘원시적-직접적인 반격’은 될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되지 못한다. 위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a와 –a가 마주치면 그저 0이 될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남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나의 왼뺨을 때릴 때에 나도 그의 왼 뺨을 때리는 것이 바로 이러한 ‘원시적-직접적인 攻防戰’이 되는 것이며, 이것으로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보살은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하여 복귀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밖으로부터의 도전을 표면에서 그대로 받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속에 깊숙이 끌어들여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이와 같이 해서 이해된 그 의미에 맞추어 자기 결정을 하고 난 다음에,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도전에 맞서 나가야 한다. 무슨 문제가 있을 적마다 그것을 그것만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일단 후퇴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참된 자기의 입장에서 그 문제의 의미를 새로이 인식하고는, 그러한 의미에 맞추어 자기의 설 땅을 결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자신을 개조하기까지 하고는, 그처럼 새롭게 된 자기를 가지고 당면한 문제 처리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귀가 된다.
-p159~163

(…)다음에 둘째는, 기복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된다. ‘우의 상’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또는 발원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그것이 위대한 도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 달라는 기원이 되는 경우에만 한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 ‘가치있는 행위’를 할 것을 다짐하고, 이에 대해 ‘마음속의 지도자’에게 가호를 구하는 경우에만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올바른 길로 인도해 달라고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세속적인 福德을 베풀어 줄 것을 바라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에는, 다시 말하면, ‘가치있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는 않고, 다만 ‘가치있는 결과’를 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에는, 그러한 요구가 비록 십자가상이나 불상 앞에서 행하여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한 ;기복’에 그치는 것이요,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상 앞에 나서기만 하면 우상숭배가 되지 않는다고 기독교인들은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모든 창조는,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오직 마음만이 능히 해낼 수 있고, 그리고 이러한 절대자를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지성뿐이다. 지성이 아니라, 욕망을 가지고 절대자 앞에 나서는 경우에는, ‘다이얼’을 돌리지도 않고서 방송을 들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감응도 얻어 낼 수가 없다. 일에 당면하여 자기로서 해야할 일은 생각치도 않고, 그저 하나님이나 부르고 부처님에게 의지하려고 하기만 하는 것은, 가장 타락한 종교인의 태도가 된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길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을 가지고 절대자 앞에 나서는 경우에는 ‘求不得苦’에 빠진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p211~212

37. 準偶像崇拜
(1) 假像的自己 하나의 도전에 대해 알맞게 응전함으로써 이것을 무난히 극복해 낸 자가 계속해서 닥쳐 오는 또 다른 도전마저 그처럼 이겨낸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참으로 희귀한 일에 속한다. 하나의 도전을 이겨내고 나면 그의 마음은 ‘포만’ (koros)의 상태에 빠지게 되고, 이 때부터 그는 주의의 사람들에 대하여 ‘거만’(hybirs)한 자세를 취하게 되며, 이리하여 그는 점차로 ‘파멸’(ate)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상태에서 그의 앞에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게 되면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 하게 되는 것이다.
(…)
기원전 5세기에 제작된 ‘아테나이’의 수많은 비극은, 승리감에 도취한 자가 어떻게 ‘코로스’의 상태에 빠졌다가, 주위의 사람들을 난폭하게 다루는 ‘휘브리스’의 자세를 취하게 되며, 나중에 온갖 재난이 돌발하여 결국 ‘아테’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는가를 주제로 삼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포만-거만-파멸이라는 3막극이 성립될 수가 있는 것은, 하나의 도전을 이겨낸 자가 ‘가상적인 자기’를 만들어 내어, 그러한 ‘자기’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힘든 문제들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는 ‘비범한 자질’이 있어서,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일을 잘 처리해 낼 수 있으리라고 방심하는데에서 불행은 시작되는 것이었다. 참된 자기라는 것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에 이룩한 업적을 ‘자기’의 것으로 돌리고, 그리고는 이처럼 조작된 자기가 천재적으로 모든 문제들을 언제 어디서나 척척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이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가 있다.
-p214~215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며, 그래야만 술과 부대가 모두 온전할 수 있다.(‘마태복음’ 9:17)
-p215

**(3) 가치판단(價値判斷) ‘나’를 우상화하여 하나의 實體로 보는 것은 ‘아의 상’(我相)에 사로잡히는 시초가 된다. 여기에서는 ‘나’와 ‘나 아닌 것’을 갈라서 보는 ‘사려분별’의 마음이 생겨나고, 그것은 더 나아가서 ‘나 아닌 것’을 배척하고 나를 수호하려는 ‘가치판단’의 태도에로 발전해 나간다. ‘나’는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에 수호해야 하고, ‘나 아닌 것’은 가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배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의 태도는, 자신의 입장이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小我에서 大我에로 그 기준을 확대한다. 나 개인에게만 좋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정당’한 것이며, 따라서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순한 ‘자아’(ego)가 ‘초자아’(super-ego)로 확대될 때에, ‘정당성’의 계기가 여기에 뛰어들게 되고, 동시에 그 주장은 當爲(ought to)의 요청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된다. 모두에게 좋으니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지는 구실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이데올로기’(ideologie)라고 부른다. 있는 그대로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있어야 할 것에 관한 이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있어야 할 것에 관한 이론’은 실제에 있어서는 ‘있는 그대로에 관한 이론’의 탈을 쓰고서 주장된다. 우리 모두가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본래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익이 된다 안 된다라는 단순한 주관적 판단으로써는 일반에게 호소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진리의 기반 위에 그 주장을 올려 놓으려고 하는 것이며, 이리하여 생겨난 것이 正義의 관념이었다.
실제에 있어서는 개별적 이익에 적합한 것이면서도, 겉으로는 普遍妥當性을 가장하고 나선다는 점에서, 정의의 二面性은 인정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까지 사람들의 머리를 깊은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가령 로마의 법학자 Ulpianus는 ‘각자에 그의 것을’(suum cuique)주는 것이 정의의 내용이 된다고 하였다. 사실 각자에 그의 것을 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보편타당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외견상의 보편타당성에도 불구하고, ‘개별적 이해관계’의 대변자로서의 다음과 같은 그 정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첫째로, 각자에 그의 것을 준다고 하지만, 그러면 무엇이 각자가 가져야 할 ‘그의 것’인가. 이에 관하여 그들은 물론 여러 가지로 그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끝까지 추궁해서 물어 나가면, 이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결국에 가서는 “그의 것은 그의 것이다.” 또는 좀더 솔직하게 “나의 것은 나의 것이다.”라는 同語反覆(tautology)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하나의 논리적 전개가 이와 같이 ‘동어반복’에 빠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그 주장의 내용이 아주 공허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요, 아무런 실질적 설명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 둘째로, 비록 동어반복에 빠지는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에 관한 이론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각종 형태로 반복해서 주장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이 현실사회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상당한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에 있어서는 개별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표면상으로는 보편타당성을 가장해서 주장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대의명분이 될 수가 있으며, 따라서 일반에 대한 설득력도 또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정치의 실천가들은 바로 정의의 이러한 측면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자기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싸움에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들은 이것을 솔직하게 그대로 털어놓으려고는 하지 않고, 자유 평등 평화 국가 민족등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자기의 주장이 ‘정의’의 원리에 맞기 때문에 자기는 승리하게 된 것이라고 내 세운다. 이리하여 정의는 强者의 專有物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모든 그럴싸 한 ‘주의’나 ‘주장’들은 모두 공허한(즉, 동어반복에 빠지는) 것이며, 我執에서 생겨난 욕구에 대하여 보편타당성을 가장하기 위해 이름만을 그렇게 붙였을 뿐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리하여 ‘金剛經’은 가령 국가를 위하여 보람 있는 일은 하겠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것조차도 我相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참된 구도자로서 취할 바 태도가 아니라고 이르고 있다.
“’수보리’야, 만일 구도자가 ‘나는 佛土를 장엄하게 하겠다’라고 말하였다면 그는 구도자라고 불릴 수 없나니라. 어째서 그런고 하면, 여래께서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은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구도자가 我와 法이 없음을 통달한다면, 여래께서는 그를 참된 구도자라고 부르실 것이니라.”

(4)哲學의 發生 대게 ‘정의’에 관한 이론은 하나의 문명이 쇠퇴기에 접어든 이후부터 생겨나는 것이 보통이다. 동시에 개별적 이해관계에 보편타당성의 탈을 씌우기 위해서는 이론적 조작술이 발달되어 있어야 하므로, 어마어마한 체계를 갖춘 ‘철학’이 생겨나는 것도 대체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周文化가 그 절정기를 지나 春秋戰國의 혼란기에 접어들자 儒-墨-道-名-法 등 각종 학파가 일어나 중국 철학의 꽃을 피웠고, 그리고 Toynbee가 말하는 ‘헬레닉’ 사회가 그 쇠퇴기에 들어서자 Platon, Aristoteles등의 이른 바 ‘영원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 생겨났었다.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여 ‘아의 상’에 사로잡힌 群像들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처참한 살육이 공공연하게 감행되는 ‘악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숭고하고 심원한 철학체계가 생겨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p227~230

(1)後退와 逃避
현실 문제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에, 그 허물이 자기에게 있다고 보고, 그리고는 올바른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자기반성 내지 자기완성에로 그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 ‘복귀’를 전제로 한, ‘후퇴’의 본질이 된다. 이에 대해 ‘도피’는 모든 허물을 남에게로 돌리고, 무가치한 물건을 버리듯이, 자기의 현실을 버리려고 한다. 자기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데, 자기의 주위와 현실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처럼 가치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 떠난다는 것이다.
후퇴에 있어서의 마음의 방향은 ‘안으로’ 자기를 겨누고 있고, 도피하는 자의 마음은 남을 원망하면서 온통 ‘밖으로’나와 있다. 후퇴에 있어서는 ‘나 때문이다’ 이고, 도피에 있어서는 ‘너 때문이다’ 이다.
-p243~244

(2)逃避의 風潮 이러한 도피의 풍조는 무엇보다도 ‘불만족스러운 자기의 현실’을 설명하는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 나라가 이처럼 볼 품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면, 도피의 심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대게 그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외부적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충분한 발전을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가 支那대륙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반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또는 자연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심지어는 倭를 비롯한 이웃 민족의 지속적인 침략을 받아 왔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힘차게 발전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 조건이 아무리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만일 그러한 부담을 이겨낼 만한 힘이 갖추어져 있다면, 그것은 도리어 우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자극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외부적 조건이 아무리 劣惡할지라도, 그것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자세 여하에 따라, 그것은 좋은 자극제 구실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이 그처럼 볼 품이 없는 것은, 그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안에’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밖으로 돌리고,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넋두리를 하는 데서부터 도피의 풍조는 싹트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연적-물리적인 자극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그 사회가 정신적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도전을 맞아 알맞게 대응해 내갈 수 있는 자기결정의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에 국한된다. 이리하여 나라의 일을 맡아 보는 자가 시행착오만을 거듭하면서 갈팡질팡하자, 뜻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버리고서 어디론가 떠나 버리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도피의 풍조는 크게 퍼져 나간다. 이렇게 되면 그 사회는 하나의 문제를 앞에 놓고서 자신의 전부의 능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킬 수가 없게 되며,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그 사회는 더욱더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p245~246

(7) 인텔리겐차
이처럼 ‘입만 살아 있는 자들’도 위정자를 위해 그 이용가치를 인정받는 때가 없지는 않다. 특히 높은 수준의 異質文明과 접촉하기 시작한 사회가 外來物에 대한 적응을 원만히 끝내지 못하고 있을 동안에는 그러하다. 그 높은 수준의 외래 문명을 되도록 빨리 흡수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자들을 양성하기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 그 밖의 나라의 높은 수준의 문명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러한 人材를 양성하는 일이 하나의 커다란 국가 사업으로 되어 왔었다.
신라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많은 유학생을 중국-일본-미국-독일 등으로 파견하였지만, 그들은 이를 테면 두 문명 사이의 다리를 놓는 중개역할을 담당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러시아의 용어를 따라, ‘인텔리겐차(intelligentsia)’라고 부른다.
제 17세기의 러시아 황제 ‘표토르’(Pyotr, Peter)는 낙후된 자기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구문명을 조속히 도입하기로 결심하였고, 이리하여 많은 유학생을 프랑스 등에로 파견하였으며, 공부하고 돌아온 그들을 나라에서 크게 등용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공직은 바닥이 났고, 이리하여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지식인의 수효는 늘어만 갔다. 드디어 제 19세기에 이르자 그들은 불평객의 집단으로 변질하였고, 이리하여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들은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는 일에 협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지식인의 이러한 변천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텔리겐차’의 기질을 가장 표준적으로 엿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텔리겐차’는 그들의 독서력으로 말미암아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이용가치가 있다고 하겠으나,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도피자인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그들은 자신이 소속해 있는 사회에 대하여 반기를 들 수 있는 잠재적인 소질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들의 몸은 비록 자기 나라 ‘안에’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밖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신적 고향은 자기가 다녀 온 그 외국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는 “프랑스에서는 이러이러한데 러시아에서는 왜 이 몰골인가.”라는 自嘲的인 불평만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인텔리겐차’는 이를 테면 전형적인 ‘內的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반면에 있어서, 그들이 소화한 외국 문물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도 기실은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아무리 프랑스를 찬양한다고 할지라도 프랑스에서는 그들을 프랑스인으로 대해 주지를 않았다. 이리하여 그들을 러시아인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닌, 허공에 뜬, 기형적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과 거의 비슷한 현상을 우리나라에서는 ‘事大主義’라는 이름으로 찾아볼 수 있다. 불교의 근원지인 인도가 지리적으로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불교인들 중에서 비굴한 事大家는 별로 생겨나지 않았지만, 유교의 중국과 근대문명의 일본 그리고 기독교의 미국은 우리와 접근해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항상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이들 국가를 통해 지식을 배워 온 그때그때의 ‘인텔리겐차’들은 때로는 파렴치하다고 할 정도의 짙은 독무(毒霧)를 뿌려 왔던 것이다. 이리하여 몇 년 동안 그 외국에 가서 공부하면서 견딜 수 없는 인종차별을 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귀국할 때에는 벌써 한국말을 다 잊어버렸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고 있다. 당시의 러시아의 상류사회에서도, 러시아 말 대신에 프랑스말을 유창하게 구사해야만, 사람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자기의 현실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도피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독주하는 자나 도피하는 자는 모두 그가 앉아야 할 자리에 앉아 있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건전한 상태에 있지 못하며, 심리학자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열등의식’(inferiority complex)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그리고 열등 의식에 사로잡힌 자는, 일면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마조히즘’(masochism)의 면을 보이는 반면에, 타면에 있어서는 남을 무참하게 학대하는 ‘새디즘’(sadism)의 면도 보여준다고 한다.
독주하는 자가 그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파렴치하다고 할 정도로 비굴해지는 것은 ‘마조히즘’의 현상이고,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국민을 상대로 싸우기까지 하는 것은 ‘새디즘’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텔리겐차’는, 선진국의 중산계급이 그 위대한 근대사회 건설에 성공한 先例를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의 볼품 없고 무력함에 대한 항상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그들이 엄연한 자기 나라의 현실을 부정하고, 기존도덕을 파괴하며, 조상으로부터의 모든 문화적 유산을 아낌없이 말살하려고 하는 것은 ‘새디즘’의 작용이고, 그러면서도 외국의 것이라면 무조건 존경하고 따르려고 하는 것은 ‘마조히즘’의 소치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가 앉을 자리를 떠나 있기 때문이고, 참된 자기로부터 소외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모든 도덕률을 봉건적이라는 한마디로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유형 무형의 모든 문화재를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말살해버리며, 그러면서도 별스럽지도 않은 외국의 문물을 금이야 옥이야 소중히 여기는 오늘의 우리 나라 일부 젊은이들의 심리 속에서도 이러한 ‘새드-매조히즘(sad-masochism)’의 병적 현상을 엿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통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모든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이고(그들은 기성세대가 말하는 6.25의 참상도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자기네들의 존재를 상대방에게 알리기(identify하기)위해 가능한 한 기발한 방법으로 소위 ‘이유 없는 반항’을 해보겠다는 점이다. 그들은 외국에는 가보지 않았으나, 이미 ‘인텔리겐차’의 나쁜 면은 모두 닮아 가고 있는 것이다.
-p258~261
(8)逃避者의 가는 길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자기 자신을 남에게 알리기 위해 발버둥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그들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현실감각은 이미 둔해져 있고, 오직 가공의 세계에서만 그들의 울부짖음은 메아리 칠 뿐이므로, 이런 상태로 얼마만큼을 지나고 보면, 그들도 다음의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살기 위해’ 부득이 현실에 굴복하여 독주자의 지시대로 따라가든가, 또는 아주 어디론가 숨어버리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일본의 대학생들은, 학생시대에는 곧잘 ‘인텔리겐차’의 본색을 드러내다가도, 졸업만 하고 나면 그들의 소위 ‘늙은 이’가 경영하는 기업체에 취직하여, 평생을 온순한 월급장이로 낙착되고 마는데, 이것든 그들이 전자의 길을 택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도 대개는 이 길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이 교통수단이 발달되어 있는 시대에는 아주 죽어버리지 않는 한, 항구적인 도피생활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동시에 이런 자들은, 자신의 능력부족 때문에, 제대로 현실에 적응해 나갈 수도 없다(모든 잘못을 기성세대의 책임으로 돌리고 도무지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실력이 없다). 이리하여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패배자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이러한 고통을 정면으로 뚫고 나가 해결할 힘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은 呪術신앙에 빠져, 어떤 신비스러운 힘의 도움을 받아 자기의 뜻을 실현시켜 보려고 공상하게 된다.
뇌물을 바치고서 관직을 얻겠다든가, 권력의 그늘 밑에서 치부해 보겠다든가, 청탁을 하여 자식을 일류학교에 입학시키겠다든가 하는 것들은, 돈이나 권력에 붙어 있는 ‘魔力’에 의지하여 힘 안들이고 목적을 달성해보겠다는 것이다. 또한 ‘경’을 손에 들고 울부짖으면서 사악한 무리들을 이 땅에서 몰아 내 달라고 신에게 매달리는 행동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것들은 넓은 의미의 ‘주술신앙’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만족스러운 결과만을 얻어 보겠다는 것은 邪道이며, 그리고 사도에 빠진 사람이 올바른 창조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술신앙이 쇠퇴기에 접어든 사회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현상이라 함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p262~263

제 14. 因果必然
(1)사람은 본래부터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생각하기 전에 먼저 행동하고, 그리고 감정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보다 앞서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이 점은 특히 원시인의 의식상태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원시인은 모든 사물을 감정적으로만 대하려고 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앞에 있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대하려고는 하지 않고, 오직 그것이 그들에게 이로운가 또는 해로운가만을 가려내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있는 그대로를 파헤쳐 보려는 호기심 같은 것은 도무지 없다. 평상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비정상적인 사건이 눈앞에 벌어졌을 경우에만 한해서 경이와 공포의 심정으로 그것을 대할 뿐이다. 그리고는 그것이 그들에게 이로운가 또는 해로운가만을 가려냄으로써 그것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끝난다. 그 이상 더 나아가 그것의 정체 같은 것을 파악해 보려는 호기심은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반면에, 원시인은 모든 것을 집단적으로만 생각한다. 개인의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아니라, ‘우리가’라고만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과는 별도로 ‘내가 이것을 했다’ 라는 생각이 별로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집단적으로만 대하고 또한 평가하기 때문에, 가령 환자가 생겨나면 가족 전체가 그 병에 대한 치료를 받았다(Kafir Indian). 아내의 병 때문에 백인의 병원을 찾은 남편은 약을 주자마자 그 자리에서 그것을 자기가 먹었다는 보고가 있다. 자기가 그 약을 먹어도 집에 있는 아내의 병을 낫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원시인은 이와 같이 자기네들의 이해관계에 직접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비정상적인 사건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는 이러한 사실이 그들의 집단에 대하여 이로운 것인가 또는 해로운 것인가만을 문제삼는다. 그리고는 이로운 것을 그들의 집단에 대한 ‘포상’(reward)이라고 보고, 반대로 해로운 것을 그들에게 내려지는 ‘처벌’(punishment)이라고 생각한다.
본래 원시인은 죽은 조상의 영혼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조상의 영혼은 그의 후손인 그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무생물까지도, 차별없이 강력하게 지배한다고 원시인은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은 조상의 영혼은 그들이 전부이고 또한 만능인 것이며, 이러한 영혼 앞에서는 그들과 동물-식물-무생물과의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인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문명인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만만한 자아의식은 원시인들에게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과 그들이 ‘동등’하다고 보든가, 또는 그것들보다 ‘열등’하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죽은 조상의 영혼 앞에서는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조상의 영혼이 그들의 한 일에 대하여 포상하기도 하고 또는 처벌하기도 한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2) 원시인은 죽은 조상의 영혼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보는 동시에, 그러한 조상의 영혼 앞에서는 사람과 그 밖의 존재와의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이리하여 그들은 모든 사물에게 요정(demon)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요정이 깃들어 있어서 그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고, 또한 일정한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본다. 이와 같이 원시인의 눈에 비친 삼라만상은,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나 식물 또는 무생물이든, 모두 생명이 있고 인격이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원시인의 이러한 해석을, Tylor를 따라, ‘애니미즘’(animism) 萬有精神論이라고 부른다. 원시인은 그들이 대하는 모든 사물을 ‘인격’이 있는 존재로 대한다는 뜻이다(personalistic thinking 人格的思考).
이리하여 물소(水牛)에 짐을 실리고 말을 타고 온 백인을 보고서, 오스트렐리아의 원주민 마오리족(the Maoris)은 물소를 백인의 아내로 그리고 말을 백인의 어머니로 보았다고 한다. 아내는 짐을 싣고 다니며 일하고, 자식을 업어 주는 것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산이나 숲 같은 것도 그들의 친족으로 보았다. 이리하여 두 부족 사이에 평화가 성립되었을 경우에 이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한 부족의 추장의 딸과 다른 부족의 추장의 아들을 결혼시키는 동시에, 그들 부족을 각각 대표하는 산들까지도 서로 결혼을 시켰다. 이와 같이 원시인은 사람과 그 밖의 모든 존재를 동질적(homogeneous)인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원시인은 모든 것을 동질적으로 보고, 또한 모든 존재에는 인격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사회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자연현상까지도 대하였다. 이리하여 가령 비정상적인 자연현상이 일어났을 경우에도, 그들은 문명인과 같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묻지 않고, 반대로 ‘누가 이렇게 하였는가’ 또는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라고만 묻는다. 가령 홍수가 진 경우에 이것을 靈泉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조상의 영혼이 내리는 처벌이라고 보고, 그리고는 누가 그처럼 불경스러운 짓을 하였는가를 알아 내려고 한다.
이리하여 그것에 대한 책임자를 찾아 나서는 그에 대하여 일정한 보복을 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자는 사람인 경우가 보통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리하여 옛날 ‘아테네’에는 각각 사람, 동물, 식물 또는 무생물을 재판하기 위한 4개의 재판소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중세의 서양에서는 사람을 죽인 개나 소, 또는 곡물을 먹어서 손해를 끼친 메뚜기와 같은 동물에 대해서도 재판의 절차를 밟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일정한 절차를 밟아 사형이 선고되면, 피고동물은 사람과 같은 방법으로 그 형이 집행되었다.
이와 같이 원시인은 모든 것을 동질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의 질서’는 그들의 ‘사회의 질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리하여 가령 메뚜기가 습격해 왔을 때에 그들은 그 중의 하나를 잡아서 이 지방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애원하였고(Liberia의 the Kpelles), 값비싼 樟腦나무를 찍으려 산에 오를 때에는 그 나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저 산에 놀러간다고 소리지르고서 떠났으며(the Sakais), 종려유(棕櫚油)를 얻기 위해 나무에 올라갈 때에는 마치 告訴人과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Serebes의 the Toradjas). 원시인은 이와 같이 그들의 사회생활의 원리에 맞추어 자연을 보고 또한 대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유물론자와 같이 사회를 자연의 일부로 보든가, 또는 Kant를 따라 사회와 자연을 갈라서 二元的으로 보고 있지만, 원시인은 반대로 자연을 사회의 일부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모든 존재를 동질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 원시인은 자연과 사회를 본질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그들의 사회적 원리에 맞추어 자연까지도 그대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원리라는 것은 즉 應報(retribution)의 원리를 말한다. 즉, 선행에 대해서는 포상이 따르고 악행에 대해서는 처벌이 따른다는 것인데, 그들은 사회뿐만이 아니라 자연까지도 이러한 원리에 맞추어 해석한다. 이리하여 풍년이 들고 또는 홍수가 지는 것까지도 그들의 선행 또는 악행에 대해 내려지는 조상의 영혼으로부터의 포상 또는 처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이와 같이만 보기 때문에, 가령 사냥에서 크게 성공하였을 경우에도, 이것을 무기가 좋았기 때문에 또는 자기의 사냥솜씨가 훌륭하였기 때문이라고는 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조상의 힘의 도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너무도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느낌이 강한 나머지, 두려움 때문에 병에 걸리는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응보’의 원리로부터는, 자기가 입은 해악에 대해서는 질적-양적으로 동등한 보복이 그 가해자에게 반드시 가해져야 한다는, 복수(blood revenge)의 원리가 또한 생겨난다. 그리고 여기의 복수는 자기보존의 본능에 따라 행하여지는 단순히 소극적인 반작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격을 받았을 때에 공격자를 물어 뜯고 달아나는 개나 고양이의 반격은 여기에서 말하는 복수와는 같은 것이 아니다. 복수는 응보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것이며, 거기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라는 當爲(ought to)의 의미가 들어 있다.
이리하여 복수를 하기 위해 출동한 원시인은 그들이 받은 피해만큼의 피해를 상대방이 입기까지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복수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요 사회적인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원시인에게 있어서 法的인 동시에 또한 道德的인 것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like for like). 원시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正義의 이념이 되는 것은 이러한 복수인 것이므로, 나중에 기독교에서 강조되는 바와 같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비겁하고 추악한 반도덕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복수를 함에 있어서 원시인은 그들이 받은 해악과 상대방에게 가한 해악을 實體化(substantialize)한다. 그러한 해악이 ‘그러한 것’으로서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러한 두 해악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동등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복수는 동질-동량의 해악의 교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로카이바족(the Orokaivas)이 복수를 diroga-mine(diroga=死魂, mine=교환) 즉 ‘죽은 사람의 혼의 교환’ 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사물을 나타난 그대로 대하지 않고 그것을 실체화하여, 그 속에 그 무슨 본질이 있다든가 또는 그것에 어떤 힘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것은, 원시인의 사고 방식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가 된다. 이리하여 그들은 가령 환자의 병을 실체화하여 일정한 의식을 거치기만 하면 그것을 환자로부터 빼어내 나뭇가지 등에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곰의 가죽을 어린애의 피부에 꺼매 주면 그 어린애는 힘이 강해진다고 생각한다(Eskimo). 그리고 이러한 ‘실체화경향’(substantializing tendency)은 나중에 더욱더 확대되어, 단순한 병이나 건강뿐 아니라, 책임이나 시간과 같은 관념, 그리고 혈족이나 종족과 같은 집단엑까지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죄인이 그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속죄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또한 오늘날 문명인이 말하는 법인-국가-민족 등에 관한 생각도 그러한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원시인은 모든 것을 실체화하고, 그리고는 응보의 원리에 맞추어 그것들을 대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언제나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 (do ut des)라는 원칙에 맞추어 행동한다. 그리고 이 때에 있어서 그들은 그들의 상대방이 누구인가, 즉 동족인가 他族인가, 사람인가 동물인가, 식물 또는 무생물인가, 심지어는 神인가에 따라,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상대방에게 그 무엇인가를 준 다음에는 반드시 그만큼 받아 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령 신에게 제물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효험이 없을 때에는 신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반항으로 돌변하는 것이었다.

(4)원시인은 죽은 조상의 영혼이 선-악에 대하여 상-벌을 내린다고 본다. 즉, 죽은 자의 영혼은 응보의 主體가 된다. 동시에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이리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들은 해석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모두 응보로서의ㅡ즉, 선악에 대한 상벌로서의ㅡ의미를 가지는 것이 된다.
그 후 종교는 발달하였고, 나중에는 수많은 고등종교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행위 때문에 죽은 다음에 포상을 받아 천국으로 가든가 또는 처벌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보는 점에 있어서는, 응보의 관념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다만 응보의 원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살아 있는 동안의 현세에서가 아니라, 죽은 다음에 맞는 내세의 일로 미루어졌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처럼 현세에서 내세에로 미루어지게 되었는가. 이러한 변천의 과정을ㅡ문헌이 많이 남아 있는ㅡ고대 그리스의 종교와 철학을 통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의 종교를 가장 자세하게 그린 문헌은 Homeros의 두개의 敍事詩(Ilias와 Odysseia)이다. 그것들에 의하면, 왕의 권한은 우주를 주관하는 최고의 신 Zeus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이리하여 왕은 항상 제우스의 총애를 받으며, 왕의 권한과 왕이 발하는 법은 제우스로부터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왕은 항상 자신의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왕이 만일 올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면, 그는 제우스의 축복을 받아 모든 것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왕이 만일 제우스에 반항하여 악을 집행하는 경우에는, 그는 제우스로부터 예를 들면 폭풍우 같은 것으로 처벌을 받는다. 그러면 제우스는 어떤 경우에 이러한 상 또는 벌을 내리는 것인가. 이 점을 밝히려는 것이 ‘호메로스’의 두 개의 서사시의 주요 동기가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빈틈 없이 주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며, 그리고 그 신이 善神인 이상 지극히 낙관주의적인 인생관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그리고 결과는 언제나 정당한 것으로 낙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경험이 풍부해지자, 악한 사람이 반드시 처벌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자일수록 도리어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현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고대 그리스의 護神學)(theodicy)은 이에 관하여, 신의 응보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실은 하나 그러나 서서히 행하여지는 것이라고 해명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사람들의 의심을 푸는 데에 충분하지는 못하였다. 악행에 대한 처벌을 받음이 없이 무사히 일생을 마치는 권력자나 부자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호메로스’ 이후부터는 이러한 응보는, 현세에서가 아니라, 내세에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이리하여 고등종교는 생겨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내세에 있어서의 천국과 지옥을 생각하는 한, 응보적 사고방식의 본래의 핵심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것이다.

(5)응보적 사고방식은 비단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의 분야에서도 인정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초기의 철학에 있어서는 자연은 여전히 사회의 원리에 맞추어 설명되었다. 물론 外界에 대한 관찰이 풍부해짐에 따라 자연(physis)을 사회(nomos)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원시인에게 특유한 응보적 사고를 그들은 끝내 버리지 못하였다.
Thales에서 시작되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우주의 근원이 되는 ‘아르케’(Arkhe)에 관한 논의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모든 사물의 밑바닥에는 아르케가 있어서, 이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아르케는 처음에는 반드시 하나(mon)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monarkhia(monarchy의 語源)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양적인 專制君主國家의 정치질서를 머리에 그리면서 우주의 기본인 아르케를 생각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이 一君萬民의 정치질서를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唯一神이라든가 조물주라는 관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올림프스의 신들(Olympic gods)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세계가 있었으며, 따라서 이 세계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혼돈’(Chaos)의 상태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비록 질서와 형상이 없었을망정, 거기에 그 어떤 세계가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혼돈 속에는 질서를 잡아 나가는 힘이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이러한 힘에 의해 Chaos는 Cosmos에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다. 여기의 ‘코스모스’는 ‘질서가 잡힌 아름다운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자가 바로 ‘올림프스의 신들’이다.
이 때의 신들은 마치 조각가와 같은 일을 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재료를 이용하여 일정한 형상에 맞추어 그것들을 다듬어 나간다. 이리하여 모든 것들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가 유지되고, 질서가 잡혀간다. 이렇게 함으로써 ‘카오스’는 ‘코스모스’가 된다. 그러므로 코스모스의 상태를 성취시키고 또한 그것을 지켜 나가는 것은 신들에게 부과된 至上의 과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코스모스에 대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이러한 관념은 사실은 그들의 ‘폴리스’(polis 도시국가)의 생활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당시의 그들의 생활은 폴리스의 시민으로서의 생활이 그 전부였었다. 당시의 그리스에는 6백 개 가량의 폴리스가 있었고, 그 영토는 도시의 성곽에서 충분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정도였으며, 인구는 수천을 넘지 않았다. 시민은 서로 안면이 있었고, 서로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Aristoteles는 인간을 ‘폴리스의 동물’이라고 말한 바 있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폴리스의 일’(즉, politics)은 그들 자신의 일이었으며, 이러한 일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는 인간으로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폴리스에는 각각 독립된 법이 있었다. 그리고 이렇나 법에 의해 각기 自治의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의 법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것’(nomos)으로서, 그것에 의해 폴리스의 질서 즉 코스모스는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법이 생명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神意의 표현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의 ‘신의 뜻’은 인간이 지나치게 많은 (즉, 균형을 깨뜨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일 절도(節度 sofrosyne) 있는 생활을 하여 자신의 분수를 잘 지키면 그것은 법을 지키는 것이 되지만, 반대로 만일 지나치게 많은 것을 차지하여 거만(倨慢 hybris)해지면, 그것은 신의 뜻에 반역하고, 법을 어기는 것이 되어 신의 반격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때에는 범법자 자신뿐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폴리스까지도 처벌을 받는다.
고대 그리스의 사람들은 폴리스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하여 코스모스에 대한 그들의 관념을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이 때에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균형과 조화였었고, 또한 질서의 유지였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한 것은 조화가 파괴되어 불균형의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신이 여기에 관여하여, 반드시 올바른 상태에로 회복시키고야 만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가령 Herakleitos는 반대자 사이의 긴장 내지 불균형이 자연 속에 있다고 보았고, 이것을 그는 전생(polemos)의 상태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이러한 반대자 사이의 전쟁 속에서 균형을 잡아 나가는 보편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여기의 로고스는 신의 뜻이며, 그것에 따라 만물은 존재하고 또한 발전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만물의 ‘운명’이요 또한 ‘필연성’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여기의 운명 또는 필연성을 eimarmene라고 그는 표현하였다. 그런에 이 말의 동사인 meriomai는 ‘몫을 차지한다’는 뜻이고, 語源學的으로 그것은 smeriomai에서 생겨났으며, 이것의 어간(語幹)인 smer는 ‘배정한다’는 뜻이고, 그것에 해당하는 라틴어 mereo는 ‘공로가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생각한 운명 또는 필연성은 ‘공로에 따라 배정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선-악에 따라 상-벌을 귀속시키는 응보의 원리 그대로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 있어서 사회적 해석으로부터 해방된 자연법칙이 원리상 확립된 것은 Leukipus와 Demokritos와 같은 原子論子 이후부터의 일이 된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들은 우주를 어떤 인격적 존재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는 보지 않고, 철저하게 기계론적인 사고(mechanism)의 밑에서, 모든 生起의 필연성만을 찾으려고 하였기 때무이다. 그런데 이 필연성(Ananke, anagke)에 관하여 ‘데모크리토스’는 이것을 원자 사이의 타격과 반격의 관계라고 이해하였다. 즉, 모든 현상의 변화는 원자 사이의 충돌과 분리, 타격과 반격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 속에서 필연성 즉 因果法則은 나타난다고 그는 보았다. 그런데 ‘레우키푸스’는 여기의 필연성을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생각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어서, 여기의 원인을 ‘데모크리토스’는 aitia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본래 ‘책임이 있다’는 뜻이었다. 즉, 원인은 결과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원자론자들은 인과법칙을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로서 보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은 선-악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상-벌을 대응시키는 응보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와의 사이의 내부적 관계를 ‘유책(有責)’으로 보는 태도는 오늘의 자연과학에까지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
(6)여러 가지 원인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원자론자들 이후부터 자연의 법칙은 독자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자연(physis)은 사회(nomos)로부터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양사회에서 기독교가 승리를 거두게 되자, 이 둘은 또 다시 조물주에로 歸一되었으며, 이러한 상태는 중세의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제 16세기에 이르러 신의 원리를 떠나 또 다시 독자적으로 자연의 법칙이 탐구되기 시작하였고, 그 성과는 제 17세기의 Newton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제 20세기에 이르러 相對性原理와 量子力學이 나타나기까지, 자연법칙에 관한 뉴턴의 관념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전해 내려왔다. 그리고 자연법칙에 관하여 뉴턴이 확립해 놓은 소위 ‘古典的 관념’ 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지금은 모두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1)客觀性의 문제
첫째는, 자연법칙에 있어서의 객관성이 문제된다. 원인에 뒤이어 반드시 결과가 뒤따르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객관적’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시 말하면, 원인과 결과와의 사이에는 단순한 post hoc(그것에 뒤이어)가 아니라 porpter hoc(그것 때문에)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에 뒤이어 반드시 그러한 겨로가가 뒤따르는 것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객관의 세계에 본래부터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관례적으로(by custom)그렇게 보기 때문이라고 Hume은 말하였고, 그리고 Kant는 인과법칙이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이 인과율(因果律 Kausalitat)에 맞추어 대상을 그렇게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인과법칙을 객관의 세계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주관의 세계의 문제로서 바꿔 놓은 것이 된다.
사실 인과법칙을 객관적이라고-즉, 객관의 세계에 본래부터 그러한 법칙이 있다고-보는 것은 원시인의 응보적 사고 방식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시인에 있어서 응보의 원리는 죽은 조상의 영혼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러한 영혼이 하는 일은 그들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러한 일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객관적으로 그 무엇인가가 이루어진다는 관념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초월적인 권위(權威)가 있어서 그것이 선악에 대해 반드시 상벌을 귀속시킨다고 생각하는 것과, 원인에 뒤이어 결과가 뒤따르는 것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객관적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그 사고방식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된다. 우리의 주관과는 독립해서 그 무엇인가가 그것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실체화경향’이 그 모두에게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성의 사고방식이 ‘흄’과 ‘칸트’ 이후부터는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2) 等價 의 문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원인과 결과는 같다’(causa aequat effectum)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Robert Mayer에 의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발견된 이후부터는 물리학상의 확고한 진리로서 인정되어 오고 있다. 본래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 있어서는 同類 사이에서만 작용과 반작용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러 ‘원인과 결과는 같다(동류)’로 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에너지가 없어지고 그 대신 다른 종류의 에너지가 생겨난다는 것은 결코 그러한 두 종류의 에너지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Carnot의 熱力學에 의하면, 열을 다른 에너지로 바꿈에 있어서는 상당한 분량의 열이 의도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그대로 없어진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원인과 결과가 같다’라는 뜻으로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類에는 類가 따라야 한다는 응보적 사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원시인은 선악과 상벌을 모두 실체화하여 그것들 사이의 等價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3) 對的性格의 문제
다음에는 인과법칙에 있어서의 대적 성격(bipartite character)이 문제된다. 원인과 결과는 서로 1대1로 상대하고 있어서, 하나의 원인은 그것과 대응하는 하나의 결과만을 가지고, 그리고 하나의 결과는 그것과 대응하는 하나의 원인에로만 소급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결과에는 무수한 원인과 관련되어 있고, 그리고 하나의 원인으로부터는 무수한 결과가 생겨난다. 이리하여 여기에 복잡하게 얽혀 있고 또한 끝없이 계속되는 ‘因果의 連鎻’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어느 것이나 원인 아닌 것이 없고, 또한 그 어느 것이나 결과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연속체(連續體 continuum)의 흐름 속에서 어느 하나를 지목하여 원인이라 하고 다른 또하나를 골라서 결과라 하고는, 그것들만을 서로 대응시켜 거기에서 인과관계를 인정하려고 하는 것은 확실히 人爲的造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행위의 흐름 속에서 어느 하나를 골라 악행이라고 규정짓고, 그것에 대해서만 처벌을 대응시키려는 응보적 사고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4) 先後關係의 문제
인과관계에 관한 일반의 생각에 의하면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그 뒤를 따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죄가 시간적으로 먼저 있고 벌이 그 뒤를 따른다고 하는 응보의 원리 그대로의 재판(再版) 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후관계의 생각은 오늘날의 자연과학에 있어서 점차로 ‘함수 상의 의존관계’(functional dependency)의 관념으로 바꿔지기에 이르렀다. 가령 태양의 주위를 公戰하는 行星을 예로 들기로 한다면, 이에 관해 Kepler가 작성한 방정식에 있어서는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와 행성의 ‘속도’등이 하나의 함수관계를 이루고서 한몫에 규정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先行한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억지로라도 선후관계를 따지기로 한다면, 태양으로부터의 거리가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서 지구는 그러한 속도로 공전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는 반대로 지구가 그러한 속도로 공전하기 때문에 태양으로부터 그러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결국 이것은 자연법칙에 관하여 선후관계를 문제 삼는 것이 무의미함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자연과학이 시간적 선후관계의 생각을 버리고, 자연법칙을 점차로 함수 상의 의존관계로 표시하기 시작한 것은, 원시인의 사고방식에 뿌리박은 응보관념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 위대한 일보 전진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5) 絶對的必然性의 문제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연법칙을 절대적 필연성의 법칙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일정한 원인에 대해서는 일정한 결과가 ‘반드시’ 뒤따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며, ‘因果必然’이라는 말이 관용구(慣用句)처럼 사용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자연법칙이 진리라고 인정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절대적 필연성 때문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 법칙을 우리는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법칙에 관한 이러한 신념도 오늘날 量子力學이 성립되기에 이르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절대적 필연성의 요청에 맞추어 하나의 운동의 장래의 상태를 예언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의 운동상태를 기술하는 2개의 변수-예를들면, 위치와 속도, 또는 시간과 에너지-를 동시에 모두 확정 지을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의 물체가 지금 어디에 위치하고 있고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확정지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한 시간 후, 또는 1년 후에 그 물체가 어디 있을 것인가를 예언할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Lamarck는 지구에 관한 하나의 방정식만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는 먼 미래에 있어서의 지구의 상태를 예언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巨視的 현상에 있어서는 이러한 일이 원리상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微視的 현상에 있어서는, Heisenberg의 ‘불확정성원리’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러한 2개의 변수 중의 하나를 확정지으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불확정해지며, 따라서 그 운동의 장래의 상태를 확정적으로 예언할 수는 없고, 다만 수많은 실험을 통하여 그것의 장래의 상태를 통계적-확률적으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지극히 작은 원자 안에서 電子와 같은 물체가 빛의 속도(1초에 30만km)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의 운동상태를 절대적 필연성의 요청에 맞추어 추적(追跡)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거시적 현상에 있어서도 절대적 필연성은 ‘近似的’으로만 인정될 뿐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오늘날 자연법칙의 의미는 절대적 필연성에서 ‘통계적 확률성’에로 수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원시인의 응보관념으로부터 우리가 참으로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여기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7) 본래 원시인은 자기네들의 이해관계에 직접 관련이 있는 비정상적인 사건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는 그것이 그들의 집단에 대하여 이로운가 또는 해로운가만을 알려고 한다. 그리고 이로운 것을 포상이라고 보고 해로운 것을 처벌이라고 보며, 이러한 상-벌을 그들의 어떤 행위에 대하여 내려지는 초월적 권위의 반작용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러한 반작용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누구도 그것에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리하여 선-악이 있으면 반드시 상-벌이 뒤따르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것을 무가내하(無可奈何)로 지배하는 절대성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볼 때에,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법칙이 그것 자체로서 어딘가에 있다고 보는 사고방식은 역사 이전부터 인류가 가지고 있던 숙명적인 습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후 인간이 점점 합리적으로 되어 가자, 자기네들에게 직접 고통이나 쾌락을 주는 것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호기심’이 많아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비로소 실천으로부터 독립된 과학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상-벌이라고만 해석되었던 것이, 인간의 非行이나 공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단순한 ‘사건’이 되었다.
본래는 ‘책임이 없으면 처벌이 없다’라고 되어 있던 것이 이때부터는 ‘책임이 없으면 사건이 없다’로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말로 aitia는 책임을 의미하기도 하고 원인을 의미하기도 하였으므로, 이것은 그대로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다’로 되었다. 이리하여 이 때부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因果法則 비슷한 것이 탐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과법칙을 사람들이 찾아 나서기는 하였으나, 그러면서도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권위의 意志라는 생각을 그들은 끝내 버리지 않았다. 초월적인 권위가 있어서 모든 사물을 그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그러한 움직임의 법칙이 즉 인과법칙이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이 생각하는 인과법칙의 배후에는 항상 그 법칙대로 움직이도록 명령하고 조종하는 명령자 내지 ‘作者’가 있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다(인격적 사고 personalistic thinking). 따라서 그러한 인과법칙은 원시인이 응보의 원리에 대하여 인정한 ‘절대적 필연성’(ananke)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초월적 권위는 자기가 뜻하는대로 ‘반드시’ 이루어 놓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룩된 과학의 발달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자연법칙에 대해 인정하는 절대적 필연성의 특성을 그것이 끝까지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권위가 있다고 보는 ‘인격적 사고’를 어떤 형태로이든 그것이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법칙의 이러한 특성은 최근의 ‘양자역학’에 이르러 수정되기에 이르렀으나, 그러나 그것에 따르는 일반 철학의 재조정(再調整)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처음에 응보의 원리와는 별도로 인과법칙이 탐구되기 시작하자 여기에 ‘사회로부터의 자연의 분리’라는 생각이 수반하게 되었다. 원시인에 있어서는 자연은 사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러한 자연을 따로 떼어 그것에 특유한 법칙을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권위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초월적 권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의 명령에는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보는 자연은 이러한 초월적 권위가 하라는대로 잘 순응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고 인정되었다. 사람인 경우에는 명령에 불복종하는 非行이 있을 수 있지만, 자연에 있어서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기독교 신학에 이르러 더욱 확고해지기에 이르렀다.
신은 전능하기 때문에 자연은 신의 명령(즉, 장녀법칙)에 절대복종한다. 따라서 자연에 대해서는 불복종의 경우에 과해질 ‘제재’(sanction)를 규정할 필요가 도무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신의 뜻에 거역하여 죄를 짓는 일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사회법칙은 처벌과 포상을 규정하는 규범(規範)으로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즉 기독교 신학이 내세우는 이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우주관의 밑에서 자연과 사회를 갈라서 보는 二元論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이원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배후에 있는 ‘인격적 사고’가 청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그리고 자연법칙을 조물주의 명령으로 보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신을 중심으로 한 一元論에 귀일되는 것이며, 원시인의 응보관념이 그러하듯이, 여기의 자연법칙도 규범으로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절대적 필연성의 법칙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가 된다. 다만 자연은 이러한 규범을 잘 지키는 ‘모범생’인데 반하여,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제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간의 변천과정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들을 표현함에 있어서 사람은 처음에 ‘언어’를 사용하였다. 동시에 ‘애니미즘’의 사고방식에 잠겨 있던 원시인들은, 그들에게 특유한 영혼 신앙과 응보의 원리로 말미암아, 이러한 사건들을 ‘神話’의 형식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인간의 경험이 풍부해 지고, 그리고 경험된 것을 체계적으로 파악해 보려는 의욕이 강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경험된 것을 언어로써 남김 없이 표현하는 데에 부족함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이 참으로 알고자 한 것은, 사실과 사실 사이의 ‘類似性’ 뿐만이 아니라, 자연 속에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질서’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완전히 표현하는 데에는 언어는 역시 불완전하였던 것이다.
가령 우리가 ‘A는 M이다’ 라고 말하였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여기의 A와 M의 두 낱말은 각각 여러 개의 이미지(image)를 가지고 있다. 가령 A에는 a,b,c등의 그리고 M에는 m,n,p등의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낱말에는 다음 낱말과 연결되기에 적합한 이미지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리하여 위의 문장을 가령 ‘a는 m이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잘 통하지만 가령 ‘c는 p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든가 또는 반대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가령 ‘大學(유교의 경전) 은 四書(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하나이다’라는 문장을 ‘대학(college)은 4개의 책 중의 하나이다’라는 뜻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에, 일정한 질서를 체계적으로 표현하려고 함에 있어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언제나 편리하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자연의 질서를 완전히 표현함에 있어서는 어떠한 수단이 강구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관하여 ‘數’라는 새로운 상징수단을 사용함으로써 과학적인 관념을 만들어 내는 데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Pythagoras였다. 그는 사물의 존재와 그 성질이나 관계를 모두 수로써 표현하려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행복’을 7, ‘법’이나 ‘정의’를 4라고 상징하지만, 이것들이 모두 그에게서 유래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든 영역에 걸쳐 수라는 상징수단을 철저하게 사용하게 되자, 인간의 상징능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본래 ‘수’에 관해서는 단일의 수 또는 고립된 수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수는 언제나 상대적이며,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수는 체계적인 질서 속에서의 하나의 위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수는 그것 자체로서의 존재를 가지지 않으며, 그것의 의미는 수의 체계 전체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로써만 결정될 뿐이다. 동시에 自然數의 계열은 끝없이 계속되며, 그것이 가지는 기본적인 관계는 하나의 수(n)를 곧 그 뒤에 오는 수(n+1)와 연결시키는 관계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하며, 그 어느 한 모퉁이에라고 不調和의 陰()이 그늘지는 일이 없는, 참으로 질서정연한 관계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를 인간이 상징수단으로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진정으로 感性의 세계에서 理性의 세계에로 건전하게 진일보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피타고라스’에 있어서의 수는 아직은 整數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수의 체계의 특징은 그것의 완전한 명석성(aletheia)에 있다. 고대 그리스 초기의 자연철학자들은 모든 존재와 모든 인식에 있어서의 완전한 조화와 명석성만을 찾으려고 하였던 것인데, ‘피타고라스’도 이러한 조화와 명석성에 맞는 수로서 오직 정수만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학파가 直角三角形에 있어서 사변(斜邊)과 다른 두 변과의 사이에 공약수(公約數)가 없음을 발견하자 그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약분(約分)할 수 없는 길이를 발견하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arreton 즉, 無理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와 같이 ‘조화’와 ‘정수’만을 생각하였던 것은, 그들이 아직도 類에는 類만을 대응시키는 응보의 관념에 그대로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이와 같이 산술(算術)과 기하(幾何), 다시 말하면, 정수(整數)(즉, 離立數)와 연속량(連續量) 사이에는 아무런 조화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수’를 단순한 상징수단으로 보지 않고 實體的存在로 보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은 ‘무리수’와 같은 새로운 상징수단의 창조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는 그것과 1대1로 대응(isomorphieren 동형대응)하는 어떤 사물의 이미지적인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물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상징(symbol)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는 간단한 하나의 관계의 상징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관계의 관계의 상징, 또는 관계의 관계의 관계의 상징 등등이 될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수와 같은 1차적 관계의 상징 뿐 아니라, 무리수와 같은 2차적 또는 3차적 관계를 상징하는 수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점에서, 기하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연장(延長)과 수와의 관계를 성취시킴으로써, 철학과 과학의 발달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은 解析幾何學의 창시자인 제17세기의 Descartes였다.
해석기하학에 이르럴 종래에는 그 연결이 불가능하였던 기하학적 연장과 이립수, 다시 말하면, 무리수와 정수의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확립된 것은 ‘연속’이라는 개념이었다. 가령 1과 2라는 두 정수의 중간에서 생각될 수 있는 무수한 分數와 무리수를 이러한 두 정수에 좌표계(座標系)의 곡선을 통하여 연결시킴으로써, 우리는-인접해 있는 두 수의 차(差)를 여하히 작은 수보다도 더 작게 할 수 있다는-연속의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수가 가지는 상징적 기능을 십분 활용함으로써, 물체의 운동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것은 Leibniz와 Newton에 의해 각별로 만들어진 微分學 과 積分學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통틀어 解析數學이라 한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해석수학은 그 후에, 自乘함으로써 ()數가 된다는-일상생활의 경험으로써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虛數’까지도 포함한, 복소수함수(複素數函數)(즉, 타원함수楕圓函數)의 이론에까지 발전해 나갔다. 이리하여 수라는 상징수단으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자연현상의 전부의 영역에 미친다고 생각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이러한 수의 체계는 참으로 합리적이요 논리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상징수단에 대응하는 자연현상도 그만큼 합리적이요 논리적인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엄격한 ‘결정론’(determinism)에 따르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모든 것이 일정한 數式에 따라 움직이도록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에 대한 고전적 관념 속에 ‘객관성’과 ‘절대적 필연성’이 그 내용으로 들어 있었던 것은 이러한 단계의 수학적 상징에 그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대하는 현실은 본래는 우리의 思惟로써 그 전부를 다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수학적 상징을 가지고 대할지라도 그것으로써는 다 포섭할 수 없는 잔여물(殘餘物)이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나는 법이다. 이리하여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승승장구하던 해석수학은, 지금까지는 물질과 운동을 설명함에 있어서 참으로 유용하였으나, ‘線스펙트럼’(line spectrum)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이르러 드디어 좌초(坐礁 )하고 말았다.
종래의 고전적 電子論에 의하면, 原子核의 주위를 일정한 週期로 돌아가는 電子의 운동에 있어서, 그 전자의 에너지는 점차로 감소되고, 따라서 그 궤도도 그만큼 원자핵에 가깝게 수축되며, 동시에 그 원자에서 방출되는 光의 스펙트럼선은 매우 넓은 폭을 가지게 되리라고 예상되었었다. 그러나 실제로 원자로부터 방출되는 빛을 프리즘을 통과시켜 알아보니, 그것은 元素를 따라 각각 다른 선스펙트럼을 이루고 있었고, 이에 따라 각종 원소는 지극히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관해 Poincare는, 종래의 수학적 상징에 의하는 한, 누구도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의 수학적 상징으로써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발견되었고, 특히 생물학적 현상에서는 그러한 殘餘가 더욱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과학자들이-‘연속성’과 ‘필연성’에 바탕을 둔-因果的決定論에 완고하게 집착해 있었던 것은, 비록 원시적인 응보관념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인격적 사고’를 그들이 끝내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 바탕을 둔 神意的決定論이 그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는 理神論을 주장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자연해석이 ‘인격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라이프니츠의 단자론(單子論) (Monadologie)에 나타난 ‘예정조화론(豫定調和論)’은 인격적 사고에 의하지 않고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케플러는 ‘수학적 방법으로 진행하는’ 神은 모든 行星에게 ‘기하학적 아름다우무’을 따르도록 명령하였다고 말하였고, 갈릴레오는 자연을 ‘신의 질서의 집행자’라고 보았으며, 뉴턴은 신의 뜻에 의해 자연법칙은 설정되었다고 말하였다. 근대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이들 지성인은 조물주에 의해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기독교 신앙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물리학의 이론 전개에 직접적인 前提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인격적 사고의 흔적을 그들은 감출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들이 발견한 자연법칙에는, 원시인의 응보원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절대적 필연성’이 그 필수적 요소로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연속’의 개념에 바탕을 둔 해석수학은 새로운 물리학에 의해 배척을 받고 있다. 이리하여 아인슈타인은 그의 ‘일반적 상대성원리’를 발전시킴에 있어서 ‘리이만 기하학’이라는 새로운 상징수단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원자의 내부에서는 연속개념을 적용할 수가 없으므로, 미시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이젠베르크는 새로운 代數的 상징을 만들어냈다. 이리하여 그는 양자역학의 최초의 형태인 行列力學(matrix mechanics)을 확립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계속된 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하여 미시적 세계의 非連續性과 非因果性은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巨視的 세계에 있어서는 여전히 고전적 물리학의 체계가 지배하고 있으며, 그러한 두 체계를 통일하는 종합적인 새로운 자연관은 아직 생겨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원시인의 응보적 사고로부터는 부분적으로만 벗어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실정이다.

(9) 현실을 설명함에 있어서 원시인은 언제나 모든 사물을 선-악에 따르는 상-벌의 뜻으로만 보았다. 따라서 이 때에 그들은 이러한 상벌을 내리는 초월적 권위를 항상 머리에 그렸고(인격적 사고), 동시에 그들이 대하는 모든 사물 속에는 그러한 선악 또는 상벌의 뜻을 지니는 일정한 ‘성질’ 내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실체화경향). 모든것을 實體化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그것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의 본질 내지 실체가 있다고 보는 사고방식과, 눈에 보이지 않는 인격에 의하여 우리의 앞에서 전개되는 모든 현상이 계획되고 성취되었다고 보는 사고방식은, 본래는 이와 같이 원시시대로부터 우리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 있어서는 우주의 법칙인 ‘로고스’(logos)가 문제되었다. 이것은 만물의 존재법칙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에는 만물을 그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主宰者 내지 神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었다. 만물로 하여금 그렇게 존재하도록 하는 원인 내지 본질이 있다고 보는 ‘실체적 사고’와, 만물로 하여금 그렇게 존재하도록 만들어 주는 주재자 내지 신이 있다고 보는 ‘인격적 사고’가, 로고스라는 이 말 속에 함께 엉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개의 사고방식이 원시인의 응보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함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이 로고스는 그 후 Platon에 이르러 이데아(idea)가 되었고, 다음에 Aristoteles에 이르러서는 에이도스(eidos 形相)가 되었다. 이와 같이 명칭이 달라짐에 따라 인격적 요소는 제 2선으로 물러났지만, 그것의 실체화 경향은 도리어 크게 두드러지게 되었다. 모든 존재가 ‘그것’때문에 그렇게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그 존재의 본질 내지 실체가 무엇인가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본체 내지 제1원인을 끝까지 찾아들어가면 결국은 주재자 내지 신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통상적인 이론 전개에 있어서는 그러한 인격을 직접 내세우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기독교 시대에 들어서자 인격적 사고는 다시 제1선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 모든 것을 신의 攝理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기본 입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양의 ‘형이상학’(Metaphysik) 내지 ‘존재론’(Ontologie)은 이러한 전통의 바탕 위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항상 찾으려고 한 것은 모든 존재의 본질-본체-실체-제1 원인이었으며,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것이 ‘객관의 세계’에, 다시 말하면,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에는 관계 없이 그것 자체로서 영원히 변함없이 實在한다고 믿었다. 이것은 가장 완전한 형태의 실체화경향인 것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경향의 배후에 어떤 형태로이든 인격적 사고가 숨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자연법칙의 필수적 요소로서 그것의 ‘객관성’과 ‘절대적 필연성’이 인정된 것은 이러한 두 사고방식(즉, 인격적사고와 실체화경향)에 입각함으로써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물론 자연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실체화경햐을 배제해 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흄은 인과법칙에 관하여, 원인에 뒤이어 결과가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 주는 힘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관례적(慣例的)으로 그렇게 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인과관계를 객관의 세계에서 주관의 세계의 문제로 바꿔 놓았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의 ‘비판주의’의 입장에서 새로운 자연해석을 가능하게 한 사람은 칸트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사람에 의해 참으로 제거된 것은 자연법칙에 있어서의 ‘객관성’일 뿐, 그것의 ‘절대적 필연성’은 아니었다.
칸트에 의하면,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계기(繼起)의 관계는 대상을 단순히 관찰하기만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주관이 여기에 개입하여 그렇게 구성함으로써만 비로소 인정되는 것이다. 현실 속에 본래 인과법칙이 있어서 그것을 그대로 모사(模寫)(abbilden)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함에 있어서 우리의 주관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즉, 先驗的인 a priori) 인식형식에 맞추어 그것을 인과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因果律(Kausalitat)은 경험에 의해 주어진 것을 그렇게 결합시키는 ‘A priori’한 인식형식으로 보아야 한다. 인과법칙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주어진 것을 ‘인과율’에 맞추어 결합함으로써 인과법칙은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과법칙은 종래에 생각되듯이 존재론상의 법칙인 것이 아니라, 다만 인식론상의 요청(要請)(Postulat)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과법칙에 관한 논의를 존재론의 문제로부터 인식론의 문제로 돌려 놓은 것은 그것으로서 확실히 하나의 進一步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자연법칙에 그처럼 오랫동안 붙어 다니던 ‘객관성’은 비로소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이 그것을 알든 모르든, 자연법칙이 본래부터 그러한 모습으로 자연 속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소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법칙에 있어서의 ‘절대적 필연성’만은 칸트에 있어서 아직 제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선험적 인식형식의 하나로 ‘인과율’을 들고 있는 것은 이 점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인과율인가. 우리의 주관은 어째서 인과적 결정론에 맞추어서만 사물을 인식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것은 아마 그가 알고 있던 수학은 데카르트 이래의 해석수학뿐이었고,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자연관은 뉴턴의 물리학에서 유래한 고전적 우주관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인과율을, 다시 말하면, 절대적 필연성을 인간이 선험적(a priori)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형식이라고 보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자연법칙의 절대적 필연성은 오늘날 미시적 현상에 관해서는 용납될 수 없음이 알려지었다. 다시 말하면, 원자 내부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은 이미 그 발붙일 곳을 잃고 말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거시적 세계에서 아직도 인과율이 논하여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은 그것이 해석수학과 고전적 물리학의 배경 위에서만 가능하였던 것이므로, 그것은 참으로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경험적(a posteriori)이었던 것이다. 해석수학과 고전적 물리학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물의 움직임을 절대적 필연성에 맞추어 인식하도록 ‘요청’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해석수학과 고전적 물리학의 배후에는 아직도 ‘인격적 사고’가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칸트와 같이 ‘근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지성인들’까지도 원시인의 응보적 사고로부터 본질적으로는 벗어 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응보적 사고방식이 그들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모든 의식활동을 숨어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적 필연성을 구비해야만 ‘진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시인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참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연법칙에 있어서의 ‘객관성’뿐이 아니라, 그것의 ‘절대적 필연성’까지도 거부하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절대적 필연성에 대한 거부는 오늘날 미시적 현상에 관해서는 가능하게 되었다. 원자 내부의 세계에서는 절대적 필연성이 진리가 될 수 없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는 아직 자연현상 전반에 걸쳐서는 성취되지 못하고 있다. 원시적 사고에 뿌리박고 있던 ‘因果-必然’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에 우리는 지금 부분적으로만 성공하였을 뿐이다.
(10) 돌이켜 생각해 보면, 현실을 설명한다는 것과 이것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결부시킨다는 것이 반드시 일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인과율’은 인식론상의 ‘요청’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인식주관이 그렇게 대하려고 한다는 것일 뿐이다. 사실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렇게 움직이는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과의 관계’는 사실 속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 속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보아야만 하는가.
하기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변화’라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된다. 가령 유능한 정치가가 나타나 적절한 경제정책으로 가난에 쪼들리던 나라를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켰다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그 정치가의 ‘활동’과 국가의 ‘발전’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결부시킴으로써, 그러한 변화를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러한 활동 때문에(because) 그러한 발전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하나는, 이러한 변화를 일으킨 ‘作者’가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 정치가의 활동이 있었고 그리고 국가의 발전이 있은 것은 사실이고, 따라서 “이런 일이 있었고 그리고 이런 일이 있었다(是事有()是事有).”라고 말하는 정도라면 무방하겠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 누군가를 끄집어 내어, 그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 정치가의 활동은 물론 중요하였지만, 그러나 수많은 기업가나 일반 국민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그러한 성과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작자’를 개입시켜 사물을 고찰하는 것은 본래는 원시인의 ‘인격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또하나는, 그 무엇인가가 그것으로서 ‘常住’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 정치가의 훌륭한 경제정책이 있었고 또한 국가의 경제발전이 있은 것은 사실이고, 따라서 “이런 일이 생겨났고 그리고 이런 일이 생겨났다(是事生有是事生).”라고 말하는 정도라면 무방하겠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경제 정책’이나 ‘경제 발전’이라는 것이 그런 것으로서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나라의 제반 조건을 떠나서 하나의 경제정책이 그것으로서 독자적으로 성립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리고 정치나 문화의 분야에서의 생활향상을 떠나서 경제만이 발전이 생겨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그런 것으로서 있다’ 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그런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현실을 대하는 것은 본래는 원시인의 ‘실체화경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작자’와 ‘상주’는 원시인의 의식상태에 그 근원을 두는 것이었으며, 원시인은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절대적 필연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선악과 상벌이 그런 것으로서 있으며(상주), 선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상벌이 따르도록 꾸며진다는 것이다(작자). 이리하여 ‘인과필연’이라는 관념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올바르게 보고 또한 대처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원시인에게서 비롯된 ‘인과필연’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누군가가 있어서 이 현실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보는 ‘인격적 사고’와,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이런 상태에서 언제까지나 그런 모습으로 있다고 보는 ‘실체화 경향’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의 표현을 따르면 人相과 法相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포함하여 현실을 그렇게 만든 작자가 있다고 보는 것이 ‘인상’이고, 그리고 그 무엇인가가 그런 것으로서 상주해 있다고 보는 것이 ‘법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상’은 모두 我相 즉 ‘자아의식’에서 유래한다고 불교에서는 말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아의식(즉, 제7식)이 생겨나면 우리는 ‘인격적 사고’와 ‘실체화 경향’을 따르게 되며, 이 때부터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망상과 고통이 생겨난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불교에서는 ‘아상’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은 인상과 법상, 다시 말하면, 인격적 사고와 실체화 경향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동시에 이것은 ‘인과필연’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라는 뜻도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원시인에 특유한 응보적 사고를 멀리하라는 뜻이다. 이렇게 벗어나고 해방되어야만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주어진 문제를 잘 풀어 나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때에 비로소 우리는, ‘때문에’ 에 걸리지 않고, ‘어떻게’ 에만 우리의 정신력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362~396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