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노빈 - <신생철학(新生哲學)>

Posted by 히키신
2016. 8. 1. 11:09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철학자는 민중보다 앞서서 먼저 고통을 자각하며, 민중보다 나중에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다.

철학의 과제는 큰 고통에 관한 인식이며, 큰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철학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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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기억하고 또 기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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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노빈– 신생철학 정리
(학민사, 1978)
사람의 눈은 비록 그물과 같은 감옥에 갇혀 부자유의 노예가 되는 것일지라도 물고기의 눈과는 다른 살아 있는 눈이다. 사람의 눈은 눈알로써만 보지 않는다. 눈알 뒤에는 눈알을‘자유로이’ 굴리는 정신적 힘줄이 있다. 물고기는 그물에 갇히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의 밥상 위에 얹히게 되지만, 사람은 그물을 째고 나올 수 있는 힘 즉 자유의 불빛을 지니고 있다. 사람에 대한 그물은 사람이며, 사람은 이 그물을 만든 장본인이며,동시에 이 그물을 태워버리는 주인공이다.시각에 대한 우리들의 경고는 시각의 ‘제한성’ 에 대한 경고이지 시각 그 자체를 제거하려는 철거명령은 아니다.
시각의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시야의 제한성과 시선의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시각들이 협동해야 한다. ‘시각의 협동’은 “혼자서 보지 말고 함께 보아라!”는 명령을 준수해야 한다…
사람의 눈은 한 개가 아니다.왼쪽 눈과 바른쪽 눈이 협동하듯 사람들의 눈은 협동한다.그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두 눈은 나란하다.왼쪽 눈이 바른쪽 눈 위에 있지 않다.그것처럼 사람들의 사회적 시야들이 상하에 있어서 수직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평등한 위치에 되돌아옴으로써 입각견지가 통일될 수 있다.
시각의 협동은 바로 ‘시각의 통일’이다.시각이 통일됨으로써 수평적 시야와 수평적 시선이 전개될 수 있다.평등한 시야와 평등한 시선이 성립하는 조건은 자유로운 협동과 통일이며,자유와 통일이 성립하는 조건도 시각의 평등이다.시각의 협동은 자유로운 환경에서만 가능하며,시각이 협동함으로써 자유가 확보될 수 있다.
-p48~49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와의 논쟁은 문제의 초점을 잃었던 것도 같다.남을 사랑함은 결국 ‘더 큰 나’를 사랑함이 아니더냐. “사람은 본래 자기를 사랑하도록 마련이다”라고 주장했을 때,이기주의자들은 “그러나 그 ‘나’는 무한히 큰 범위를 가질 수도 있다”고 덧붙여야 했을 것이다. (김태길, ‘빛이 그리운 생각들’, 1965, 삼중당, P215)


요소론적, 명사적 세계관은 광물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면서 식물적 세계관에 의하여 강화되었다.명사 지배,시각 지배의 시대라고도 부를 수 있는 서양 2천 여년의 문화는 식물적 정신에 의하여 비육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광물적 세계관은 정신활동을 구속함으로써 인간성을 기계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미 희랍 자연철학의 시초부터 ‘인간기계론’의 이론적 토대는 마련되어 있었다.이것은 피타고라스의 형상이론과 수 개념이 정신적인 것이면서도 물질적인 것에 토대한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뚜렷하다.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은 이미 라메트리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간공학이론’을 원칙적으로 거의 완성시켜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공학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인간성에 관한 이론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이버네틱스’는 말하자면 광물로서의 인간이라는 요소론적 인간관의 현대적 표연이라고 하겠다.
광물적 세계관은 식물적 세계관에 의하여 보강된다.마치 식물의 생명이 낭비적이며 과도한 증식을 통하여 성장하듯,요소론적 세계관은 과도한 증식의 철학, ‘고리대금의 철학’을 낳았다.생명유지에 필요한 것만큼 이상의 낭비와 과잉생산,과잉공급을 갈망하는 욕심이 마음을 지배하면서 과도한 금욕이 강요되는 광물적,식물적 세계관은 야수적 세계관에로 발전한다.생산자에게만 과도한 금욕이 강요되는 고대적,봉건적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절제가 미덕으로 평가받지만,근세 이후로는 공공연히 ‘욕망의 체계’(System der Begierde)로서 사회를 표현하게 되었다.요소론적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바라는 ‘다다익선의 낙관론’을 지향하여 왔다.
윤리적인 공리주의는 물질적인 공리주의를 결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더 많은 재산을!더 많은 지식을!더 높은 건물을!더 빠른 비행기를!말하자면 올림픽 경기가 요소론적 세계관의 발상지에서 비롯되었듯이 현대의 올림픽 경기는 전세계 인류를 ‘많이!철학’의 제물로 바치려 한다.오늘날은 성화를 어느 신에게 바치는가?바로 요소론적,연금술적 원흉인 광물 ‘금’이다.현대의 제우스는 올림프스산에 있지 않고 ‘금고’ 속에 있다.맘몬을 위하여 욕망의 석유 성화가 훨훨 타는 요소론적 제전에 인류의 정신은 팔과 다리를 부지런히 놀리며 ‘더 많이!더 높이!더 멀리!’를 가치로 하여 달려간다. …
-p68~69

실제중심적 철학은 공리주의에 기초한 것인 동시에 빈익빈 부익부라는 분열을 조장하여 왔으며,인간성의 균형,문화적 균형,정치-사회적 균형,민족들 사이의 균형을 파괴하여 왔다.어느 한쪽이 다량의 행복을 획득하면 그 반면에 다른 쪽은 불행의 양이 증대된다.벤담의 조국에서 획득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곧 그의 조국이 짓누르고 있는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 민족들의 최대행복은 아니었다.오히려 이 지역들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배고픔으로써 영국 본토는 밝고 행복하며 배부를 수 있었다.게르만 민족이 진보하기 위하여 동양민족은 정체하여 있어야 한다.희랍의 진보는 페르샤의 죽음이며,유럽의 진보는 아프리카의 죽음이다.얼마나 이기적 진화이며 이기적 발전이냐.진화와 진보는 퇴화와 퇴보,즉 ‘살인’을 반비례 변수로 한다.
-p71~72
사람은 실체로서가 아니라 행위자로서 파악되어야 한다.사람은 행위다.행위는 요소적 실체를 타넘어 간다.행위는 실체와 요소를 건너뛴다.요소는 개울에 설치된 돌다리와 같다.행위는 이 돌다리를 디디고 간다.요소론적 세계관은 고정된 돌덩어리들만을 시각적으로 고집하려고 한다.그것은 그 다리를 건너가는 행위를 관찰할 수 없다.행위는 요소를 초월한다.
-p75


현실적 모순은 승리가 보장된 언어와 패배가 결정된 언어와의 투쟁이라고 하겠다.
-P87

사람의 정신은 실체로서가 아니라 행위로서 파악되어야 한다.행위로서의 정신은 뛰어넘는 행위,뚫고 나오는 행위다.정신이라는 행위는 진리라는 행위와 구조에 있어서 일치한다.언어의 벽,가상적 벽을 뚫고 나오듯 정신은 종이와 언어와 속임수의 장막을 뚫는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적 행위는 ‘파괴적’ 행위이며 흔히 이것을 비판적 행위라고 부른다. 여기서 ‘파괴적’ 이란 물론 인위적 구속성에 대한 파괴적 해방행위에 적용된 말이다.행위하지 않는 정신,비판하지 않는 정신은 죽은 정신 즉 정신이 아니다…..
지성(Intellectus)은 사이(ineter, 間)를 읽음(legere, 讀), 즉 행간독서다.눈에 보이는 활자ㅡ사실 이것은 사자이지만ㅡ또는 시각을 사로잡는 물체,즉 우상(idolum, eidolon)을 타넘어 ‘여백’ 에로 뛰어들어가며,종이를 뚫고 배후의 사실을 읽을 수 있는 ‘투시력’ 이 지성적 행위의 능력이다. ‘타넘어 가서 읽어 봄’이며 ‘뚫고 들어가 봄’이므로 지성적 행위에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대문짝만큼 커다란 활자,또는 좁쌀만큼 작은 활자로부터 시선을 떼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성적 행위 또는 정신적 행위는 용기로부터의 행위다.정신적 파괴력,논리적 용감성없이 진리행위는 불가능하다.뜀바위(서울 백운대에 있는 큰 바위로서 그 사이에 매우 깊은 틈이 벌어져 있다)하나 건너뛰지 못하는 정신이나 지성은 이미 정신도 지성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용기’란 비겁에 대립된 용기뿐만 아니라 ‘게으름’과 ‘정체성’에 대립된 용기를 뜻한다.기만행위나 거짓말뿐만 아니라 정신적 녹이 진리의 적이다.이 녹은 언어적 장벽 또는 정신의 장막에 끼어 있는 것으로서 정신이 원활하게 행위하는 것을 방해한다.정신적 녹이 잔뜩 끼어 있으면 정신은 게을러지며 비겁하여지므로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서도 매에 쫓기다 풀숲에 머리만 처박는 꿩처럼 논리적 둔감의 숲,또는 보수주의적 수렁에 머리를 처박고 만다.
-p100~101

인식된 실재의 부분의 총화를 흔히 철학자들은 현상이라고 불러왔다.인식되지 않은 존재를 흔히 철학자들은 물자체라고 불러왔다.그러나 현상이란 기지의 존재이며 물자체는 미지의 영역이다. “물자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 실재의 영역을 물자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현상은 방정식에 있어서 기지수와 비슷하며 물자체는 미지수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미지로부터 기지로,또는 기지로부터 미지로 나아감이 진리행위의 과정이다.
-p103

사람은 살아 있기 위하여 생각한다.…철학의 관심사는 생각 자체가 아니라 고난에 부딪치고 있는 사람의 생존이다.철학의 출발은 눈을 감고 하는 명상이 아니라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고통이다.
-p103

철학은 서재 또는 강의실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눈물과 피와 땀과 한숨이 뒤범벅된 사람들의 생존현장에서 탄생한다.철학은 인쇄된 책들과 마주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있는 책’인 바 민중이라는 책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는 고통과 고난과 괴로움,시달림과 같은 살아있는 글자와 마주쳐서 생긴다.철학은 공책이나 사유에 봉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고통에 봉착하고 있다.
철학은 철학적 안락의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햇빛이 내려쪼이는 공사장에서,불꽃이 튀는 용광로 곁에서,거센 풍랑이 휩쓰는 바다 위에서,거머리가 꿈틀거리는 논바닥에서,검은 먼지가 가득찬 갱 속에서,또는 어둡고 그늘진 뒷골목에서 씌어지고 있는 것,이것이 살아있는 철학이다.철학의 활자들이 기록되는 장소는 창백한 종이(tabula rasa)가 아니다.한숨과 고통이 철학의 종이이며 눈물과 피가 철학의 잉크다.
P105-106

철학이라면 보통 머리가 허연 늙은 학자를 연상하고,지혜라면 곧 곳간에 들어 쌓인 책을 생각하지만,아니다.철학은 구더기같다는 민중 속에 있고,지혜는 누구나 다하면서도 신통히 알지도 않는 삶 곧 그것 속에 있다.이 말없는,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을 들여다 본 사람이 철학자다.
(함석헌, ‘인간혁명’, 1961, p56)

02. 분단, 감금자로서의 악마
악마는 틈에서 나서 틈으로 지나다닐 뿐만 아니라 틈을 만들며 사이를 넓히는 자다. …
악마는 바로 ‘쪼개는 자’, ‘분단시키는 자’다. 서양말의 어원에서 이점은 잘 드러나 있다. 악마(dia-bolos)란 ‘둘로 쪼개며’, ‘이간질하며’, ‘속이며 모략 중상한다’는 말(dia-ballein)에서 생긴 것이다. 악마의 하는 짓은 잘게 쪼개며 절단하는 일로써 대종을 이룬다. 그러므로 세계지도 위에 절단의 핏자국을 남기는데 솜씨를 자랑하였던 영국인들에 있어서 악마(devil)는 바로 절단기계(devil)를 뜻하지 않는가! 악마는 종이를 절단하거나 나무를 절단하는 자가 아니다. 악마는 인간을 절단하는 자다. ‘인간절단기’가 바로 악마다. …
악마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절단하며 악마의 통로를 몰래 숨어 다니면서 인간적 협친성을 파괴하는 쐐기를 박는 자다. 악마는 사람들끼리 쥐고 있는 협동의 손길에다 찬물을 끼얹어 끊어버리며, 인간 사이에 이어진 신뢰의 뺨에다 주걱따귀를 들이대는 자들이다. 친구들을 등지게 만들며, 산맥 서쪽에 사는 사람과 산맥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서로 원수로 만들어 버리며, 민족과 민족을 이간질시키는 자를 악마라 부르지 않고 달리 무엇이라 부를 수 있는가?
협동적 인간활동을 파괴하는 인간절단기 악마는 이간자다. 악마가 인류 역사의 기록을 더럽힌 각 시대의 사연은 ‘이간’이라는 대문자로 시작되어 있다. 인류 역사의 틈바구니에 끼어든 악마들의 독트린은 이렇게 되어 있다.
“사람들을 이간시켜라! 사람들끼리 서로 떨어져 서로 원수가 되게 하라!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게하라! 형제간에 쌈을 붙이자!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자!”
-p156,157

그러나 악마들이 처음 쏜 불신의 불화살과 배반의 독화살은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과정에서 점점 악마에게 되돌려 날아간다는 것이 불신과 배반의 운명이다. 불신과 배반의 독은 악마의 이빨과 혀끝에서 나온 것이지만 여러 사람을 해치고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출처인 악마 자신에게 되돌아 가고 마는 것이다. … 악마의 종말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종말이 있기까지 지불되어야 하는 고통과 혼란의 총화는 엄청난 것이다. 이것은 손실이다. … 악마가 쏜 화살이 악마를 향하도록 사람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하라! 서로 쏘지 말고. 그러면 악마는 자기가 쏜 화살에 맞아 거꾸러질 것이다.
-P158~159

악마는 정신과 마음을 쪼개 놓으며 사람들을 분열시키며 민족 내부 분단을 조장하며 민족들 사이를 갈라놓는 절단기(devil)일 뿐만 아니라, 갈라진 사람을 ‘가두어 두는’ 감금자다. 악마는 일단 분열된 정신을 언어의 감옥에 감금시켜서 보수적 장벽을 뚫고 나오지 못하도록 하며, 분열시킨 사람들을 개인적 단자의 철창에다 감금하여 놓으며, 분열된 민족들을 민주적 공리주의, 민족적 이기주의의 장막에다 가두어 두려고 획책한다. 모든 분단은 감금이다. 감금은 분단이다. 분단시켜 놓기 위해서는 가두어 두어야 한다. 가두어 두려면 분단시켜야 한다. 분단된 것은 부자유이며 부자유는 분단된 것이다.
-p159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십자가를’ (마태 10:38)짊어져야 한다는 말씀은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개의’ 십자가들을 도맡아서 포개 지라는 말씀은 아니다. 더구나 ‘남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몰래 또는 강제로 지우라는 말씀은 아니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남의 등어리에다 씌워버리는 가해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해자는 자신이 져야 할 고통의 십자가를 피해자의 등에다 넘겨주고 쾌락의 ‘황금십자가’, 실로 수놓은 ‘황금십자가’ 또는 ‘종이십자가’를 하얀 목에 걸고 다니거나 붙이고 다니거나 하얀 손에 들고 다닌다. 얼마나 악독스럽고 표독스러운 예술이 악마들의 혀 끝과 손 끝에서 제작되는가!
-p125~126

가장 훌륭한 것의 타락은 가장 나쁜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천사가 타락할 때 그것은 악마로 둔갑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진보되었다는 것, 예컨대 이성이 타락하면 가장 퇴보된 악마의 발톱이 된다. 타락된 이성, 악마의 손톱과 발톱은 사람을 떼어놓고 사람을 가두어두는 데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뜯어먹는 포크와 나이프로서도 사용된다.
-p160~161

악마로부터 손을 떼고
사람들끼리 손을 잡아라!
사람을 위하여 손을 써라!
-P167
*윤노빈 ‘신생철학’ 제 5장_언어의 인위성_P169~184
서양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철학에 대하여 무얼 좀 알아보려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들은 마치 으슥한 신전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또는 노인의 목쉰 부르짖음과도 같은 소리로 “너 자신을 알아라!”는 외침을 듣고 움찔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옛날 어떤 신전의 돌기둥에 새겨진 의미깊은 금언으로서 뿐만 아니라, 실은 서양철학이라는 대가문을 이끌어 온 정신적 교훈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양철학자들이 그처럼 오랜 동안 영혼의 문제, 정신의 문제, 자아의 문제, 자기의식의 문제, 실존의 문제 등에 골몰하여 왔음은 그들의 조상 소크라테스가 남긴 가훈에 충실하였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너 자신을 알아라!” 네가 감히 무얼 안다고. 너 아닌 다른 문제들, 너를 둘러싼 문제들, 예컨대 우주니 세계니 인생이니 하는 것들, 또는 정치-사회-법률 등, 또는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들에 관해서 알아보려고 하기 전에 먼저 너 자신에 관해서 알아보라는 이 말, 또는 매사에 너 자신을 정신차려 가다듬으며 사려깊은 통찰을 앞세울 것이며, 네 분수를 지키라는 이 말에 대하여 이제와서 왈가왈부한다거나, 그 말을 탓할 바가 어디에 있겠으며, 흠잡을 데가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너’란 바로 ‘나’다. ‘나’란 단순히 개인적 사생활에 몰두하는 ‘나’라기보다 사람 자신, 보편적 사람됨 등을 뜻할 것이므로 세계와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에 관한 앎을 앞세우라는 저 금언은 조금도 못마땅할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철학자들은 보편적 사람됨과 그 기능에 관한 탐구를 자기 자신의 세계 속에서 진행하여 왔으며 ‘나’ 속에서 또는 ‘나’ 에게로 파고들고자 했다. 바꾸어 말해서 나에 비추어서 보편적 사람됨을 해명하는 방식을 택하여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중대한 잘못이 숨어 있다. 나 혼자만의 세계, 나의 내면세계에서 보편적 문제를 해결함은 근본적으로 틀린 해결방식이다. 원칙적으로 나 혼자만의 내면세계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개인으로서 고립되어서가 아니라 남과의 만남에서 살아가며 생각한다. 나 혼자서 많이 노력하여 많은 지식을 획득하고 많은 성과를 이루어 놓았다고 뽐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실은 남이 가르쳐 주어서 남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만을 안다는 것은 그 말 자체부터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 즉 ‘남’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그로부터 어떤 은혜나 덕을 입어서 그의 혜택을 기억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남이 나에게 지식을 전달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내용과 의도와 결과가 호의로써 충만된 것은 아니다. 그가 나에게 전달하는 지식이 참일 수도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일 수도 있으며, 무의식중에 또는 과실로서가 아니라 고의로써 진실 아닌 거짓을 전달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가 보여준 것처럼 마귀가 사람을 속일지도 모른다는 공상적 가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속이는 엄연한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매 이제 ‘거짓말’ 이 새로운 인식이론으로서의 ‘사회적 인식론’ 에서 마땅히 취급되어야 한다. 여태까지는 남을 알기에 앞서 먼저 나를 알아야 했다면, 나와 남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수립되는 동일성에 입각해서 나를 알기 위하여, 내가 살기 위하여 남을 알아야 한다는 요청이 제기된다. …
그러나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격률에 대하여 음미해 보아야할 것이다. 즉 “너의 무지는 너 자신의 탓도 있겠으나 상당히는 남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달아라!” “너를 무지이게끔 만든 사람, 너를 무지이게끔, 무지의 상태에 머물게끔 애쓰는 사람도 있음을 알아두는 것이 유익하다.” 요컨대 “무의식적이든 또는 고의적이든 남이 나를 속이고 있음을 깨달아라!”는 격률이 “너의 무지를 깨달아라!” 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p188~190
서양철학의 모순 및 한계점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리고 그에 빗댄 동양철학과 더불어 동학사상,
즉 한국철학을 정제되지 않은 거친 어조로 설파한 이 시대의 새로운 철학적 세계관(신’생’철학)을
담고 있다.

**P191~213, ‘참말과 거짓말’

사상싸움의 패배는 모든 싸움의 패배를 가져오며, 또 사상의 지배는 모든 것에 대한 지배를 의미한다. 무력에 정복될 때에는 적에 대한 적개심과 반항심이 솟아나지만 사상에 정복될 때에는 적을 도리어 벗으로 알고 환영함이 보통이다. 뿐만 아니라 조국과 제 겨레를 잊어버리고, 적과 또 적국을 따라간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그러하려니와 특히 우리나라에서 더 잘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안호상, ‘민주적 민족론’, 단기 4294년, 어문각, p4)

작은 인식은 자기 신발 한짝 훔쳐간 사람에 대해서는 적개심의 이를 갈면서도 자기 부모와 자기 조상과 자기 민족의 발에다 노예의 사슬을 얽어매 팔아먹는 자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하지 못하며, 심지어 그 큰 도적을 주인으로 모시기까지 한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인식은 무관심적, 신경질적, 도착적일 뿐만 아니라, 무간심적, 신경질적, 도착적이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바꾸어 말하자면 고통이 인식을 협소하게 만들며, 인식이 협소화됨으로써 고통이 증대된다. 따라서 고통을 해소하면 인식은 건전해지며, 인식이 건전해지면 고통은 해소된다. 악마가 퇴치되면 인식은 확장되며, 인식이 확장되면 악마가 퇴치된다. 여기서 순환논증의 마술에 걸릴 필요는 없다.
-p248

사람이 실재에 너무 가까이 가면 사람은 관념에서 멀어지며, 관념에 너무 가까이 가면 실재에서 멀어진다. 하나의 산을 너무 가까이서 보면 흙과 낙엽과 돌과 같은 것들이 보일 뿐이다. 반대로 너무 멀리서 산을 바라보면 구름에 가린 그림과 같은 형체만 보일 뿐이다. 실재에 너무 가까이 간 인식도 위험하며, 관념에 너무 가까이 간 인식도 위험하다. 너무 실재 가까이 가는 것도 ‘실재’에 속는 결과를 초래하며, 너무 관념 가까이 가는 것도 ‘관념’에 속는 결과를 초래한다.
실재에 너무 접근한 인식은 ‘감각적’ 확실성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반드시 감각이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감각은 좋은 증인인 동시에 나쁜 유혹자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념은 좋은 안내자인 동시에 나쁜 오도자다. 감각과 관념은 모두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지니고 있으므로 두 가지가 좋은 방향으로 합치면 매우 좋은 인식을 성립시킬 것이다. …
감각적 확실성이 제구실을 다하려면 인식은 ‘감각 바깥에로’ 나와야 한다. 관념적 윤곽이 제구실을 다하려면 인식은 ‘관념 바깥에로’ 나와야 한다. 인식의 확장은 ‘속에서 밖으로!’ 의 탈출이며 해방이다. 인류의 거처 동굴은 인간의 심리 속에다 동굴을 파놓았으며, 인간은 이 굴 속에 들어앉아 쉬려고 한다. 그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은 ‘속에서’ 다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동굴 밖에 얼마나 많은 풀과 돌과 짐승이 있는가? ‘밖에’ 나가지 않고서는 살 수도 없으며, 또 사실대로 알 수도 없다. 살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하며, 알기 위해서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 살기 위해서 관념 속에서만 틀어박혀 있어서는 안된다. 관념 ‘밖으로’나와서 실천하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감각 속에만 틀어박혀 있어도 안된다. 감각 ‘밖으로’ 나와서 알아보아라. 관념론자는 관념론 ‘밖으로!’ 나와야 한다. 실제론자는 실제론 ‘밖으로!’ 나와야 한다.
-p250~251

여백은 ‘무’가 아니다. … 여백은 존재다. 여백은 인간에 대해서만 성립하는 ‘일시적’ 공백이지 실재 그 자체에 대하여 성립하는 영원한 공간은 아니다. 개별적 인식은 개별적 여백의 담을 타넘어 광범한 인식에로 확장되어 간다. 인식 스스로 커간다. 인식의 인위성이 인식의 확장과 성장을 위협하더라도.
… 인식에 대한 가장 큰 여백은 ‘실재’다. 언어가 없다고 해서 실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실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없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지 않은가. 인식과 언어의 인위성은 인식과 언어의 인간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 신문이 나오지 않는 휴일이락 해서 사건도 휴식한다는 얘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신문사가 문을 닫았다고 해서, 방송이 중단되었다고 해서 사건이 문을 닫았거나 사건이 중단된 것은 아니다. 역사가들이 없거나 역사가들이 마음대로 기록할 수 없다고 역사적 사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을 불태운다고 해서 사실이 잿더미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p252
실재 밖에 실재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실재 밖에 언어와 인식이 살아 있다.
…이리하여 인식의 확장, ‘인식의 해방’ 이 지켜야 할 최대의 준칙은 다음과 같이 정립된다.
있는 것을 없다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된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된다.
있는 것을 있다고, 없는 것을 없다고 생각하며 말하라.
-p254
…달팽이껍질 속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겉껍질을 아무리 만져보아도 소용이 없다. 내용은 껍질 속에 있다. 그 내용을 밖에로 끄집어낸다는 것은 그 내용과 구별되는 모든 것들과 그 내용을 대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철학이나 사상을 ‘여백’ 에로 끌어내지 않고서는 그 철학, 그 사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비판할 수도 없다.

지혜(智慧)란 ‘어둠을 뚫고 밝은 데로 나옴’이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의 시력이 뚫을 수 없는 언어적 장벽, 인식론적 암흑의 장막을 뚫는 투시력을 갖고 있다. … 지혜란 해방이며 탈출이며 구원이다.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밝음의 배움’(哲學)은 ‘암흑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광명에의 용기’ 또는 ‘인식의 해방’ 이다.
-p256
생각이 독백이 아니라는 것, 도대체 독백이란 없다는 것. 왜냐하면 독백은 실제에 있어서 내적 대화이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며, 사이와 틈을 건너간다는 것이다. 나의 세계 바깥에서 나의 형제들과 만나는 것, 이것이 생각하는 행위다. 나와 형제들 사이, 나와 친구들 사이의 틈을 건너서 서로 정신적 팔을 마주잡는 것이 생각하는 행위다.
어찌 생각을 나 혼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나 개인의 고독을 장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있겠는가. 생각은 독창이 아니다. 생각은 보이지 않는 합창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정신적 합창을 뜻한다. 생각한다는 것 그 자체가 서로 손잡음을 뜻한다. 사람은 생각의 공동체이며 인식의 공동체다. 사람들은 ‘함께’ 생각하며 ‘함께’ 인식한다. 사람들이 함께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다. … 사유(思惟)는 사유(私有)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상은 사유재산이 아니다. 지식은 공동소유물이다. 혼자만 몰래 사용하는 지식의 창고, 또는 사상의 도서관은 벌써 지식의 창고도 아니며 사상의 도서관도 아니다. 원칙적으로 지식의 창고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사상의 도서관 문엔 자물쇠가 없어야 한다. 지식이나 사상의 사유성을 고집하는 사람은 대화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가장 병든 사상은 자신의 고유성을 고집하는 사상이다. 나의 사상과 너의 사상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담을 쌓는 것은 벌써 사상의 자격을 상실하였다는 증거다.
-p262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dis-covering)이 진리다.
-p266
‘역사’(Geschichte)는 사건(Geschehen)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인위적(人爲的) 사건이며 인위적(人僞的) 사건에 관한 인위적 기록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역사적 사건은 악마의 인위적 마희로부터 항상 도전받고 있다. 역사에 관한 정확한 이해는 역사의 인위적 성격에 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역사는 명사로서보다는 동사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동사로서의 역사적 사건(geschehen)은 자동사적인 것으로서보다는 사역동사적인 것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즉 저절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사람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발생하게끔(geschehen lassen) 되어서 제작된 사건이 역사의 참뜻이다. “인위적 존재는 저절로 있는 것(sein)이 아니라 사람에 의하여 있게끔 만든 것(sein lassen)이다” 라는 인위적 존재의 곤본적 성격을 역사가 대표한다.
-p271

사람의 생명은 공유다. 생존은 공존이다. 생존의 인위적 성격은 생존의 공유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살기 때문에 생존은 인위적(人爲的)이며 또 인위적(人僞的)이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악마화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생존이 보호도 되며 위협도 받는다. 본래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다. 그것도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 손잡고 사는 모인 사람들(社會)이다. 생존은 함께 산다는 뜻에서 생존일 뿐만 아니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공유다.
본래 사람의 생존은 사유(私有)될 수 없다. 이 말은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한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나의 생명을 남이 소유할 수 없으며, 남이 소유해서도 안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나의 생존은 나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속한 것이므로 나의 생존은 남에게 점유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생존은 오로지 나의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나의 생존은 나의 부모, 나의 자식들, 나의 형제들, 나의 이웃들, 나의 벗들, 나의 민족, 나의 인류 전체에까지 확대되어 있다.
-p274

생존의 반대는 구속이다.
생존은 부자유와 대결하는 것이지 죽음과대결하는 것은 아니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류의 역사는 살인의 역사였다. 직접적으로 대량 살인을 범하며, 살인기술을 발전시키며, 살인기술자를 양성하며, 살인전문가 집단을 구성하며, 살인제도를 구성하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더구나 ‘간접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기술과 학문과 제도를 발전시키는 짐승은 인간밖에 없다. 사람의 죽음은 자연적인 것으로서보다는 인위적인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람의 생존이 자연적인 것으로서보다는 인위적인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죽음은 저절로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된다. 사람의 죽음은 자신이 잘못하여서 죽거나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서 죽임을 당하거나 둘중의 하나다. 그러나 엄밀히 추구해가면 인위적 죽음의 원인으로서 인위적 죽임의 요인들이 있음을 캐낼 수 있을 것이므로 결국 생존의 죽음은 타살이거나 타살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살은 대개 타살의 최종결과다. 남들이 쏜 죽임의 화살들을 수없이 맞은 사람이 맨 나중에 가서 자신의 목에다 밧줄을 매는 수고를 보탤 뿐이다.
사람들은 ‘죽음’ 에 관하여 많은 얘기를 해왔다. 죽음에 관한 명상, 죽음에 관한 수필, 죽음에 관한 명언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어느 한가지도 죽음의 참뜻을 깨우쳐 주지 못하였다. 사람의 죽음은 사실에 있어서는 죽임(killing)이라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면 죽임이라는 뜻에서 본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하여서 모른다”고 하기보다 “모르는 것이 죽음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
죽임은 “모르게 함”이다. 죽음은 모르는 상태다. 죽임 또는 ‘살인’은 전체적 살인 또는 급살과 부분적 살인 또는 서살로 대별된다. 한꺼번에 단번에 모르게 함이 급살이며, 천천히 모르게 함이 서살이다. 모르게 함은 단순한 무지 조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식론적 의미에서의 무지를 인위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도 죽임의 여러 경우들 가운데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죽음은 모르는 상태다.
이 사람을 보라!
밖으로 나올 줄 모르는 사람,
틈과 사이를 건너뛸 줄 모르는 사람,
악마를 가려볼 줄 모르는 사람,
친구를 알아볼 줄 모르는 사람,
형제를 알아볼 줄 모르는 사람,
은인을 알아볼 줄 모르는 사람,
자기를 죽이려는데 대하여 저항할 줄 모르는 사람,
감히 말할 줄 모르는 사람,
제대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
서로 손잡을 줄 모르는 사람,
자기 것을 지킬 줄 모르는 사람,
스스로 통일할 줄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살해된 사람이다.

묘지에 가서 어제 매장한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큰 소리로 물어보라.

그대는 관 밖으로 나올 줄 아는가?
그대는 관 속과 바깥 사이를 건너뛸 줄 아는가?
그대는 자기를 꺼내 톱으로 썰고 맷돌로 갈아버리려는 악마를 가려낼 줄 아는가?
그대는 평생 가까웠던 친구를 알아볼 줄 아는가?
그대는 한 핏줄로 태어난 형제를 알아볼 줄 아는가?
그대는 은인을 알아볼 줄 아는가?
그대는 자기를 찢어버리려는 자에 대해 저항할 줄 아는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할 줄 아는가?
그대는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아는가?
그대는 여러 사람들과 손잡을 줄 아는가?
그대는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킬 줄 아는가?
그대는 통일할 줄 아는가?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므로 질문을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며,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조차도 모르는, 철저히 모르는 것 즉 사람이 아닌 ‘시체’다. 시체의 모르는 상태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초래된 것이다.
-p279~281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제일 꺼려한 좁은 문은 넓게 사는 길로 통하여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즐겨한 넓은 문은 가느다란 죽음의 길로 통하여 있었다.
‘오래’ 살려고 하지 말고 ‘넓게’ 살려고 노력하라!
넓게 사는 길이 오래 사는 길이다.
-p289

생명을 잡아 늘구지 말고 ‘옆사람’에게 생명을 펴라!

생명의 길은 앞으로 이어져감으로써가 아니라 옆으로 퍼져감으로써 지속,확장된다. 생존에 관한 한 그것은 ‘진보’ 가 아니라 뻗어남을 통하여 자라난다. 진보함으로써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함으로써 진보한다. 결코 이 순서는 바뀔 수 없다. 생존의 공유적 역사는 진보에 대한 자각과 진보를 구현하는데 있어서의 발전이 아니라, 확장에 대한 자각과 확장을 실천하는데 있어서의 성장이다.
-p290

생명을 길게 늘어뜨리려 하다가는 끊어진다.
생명을 넓게 뻗어나게 하라!
존재를 넓히려 하지 말고
생존을 넓히려 하라!

…생존에 대한 평가는 그 길이로써가 아니라 넓이로써 기준을 삼아야 할 것이다. 생존의 심오성이라는 것도 사실에 있어서는 생존의 광활성을 뜻한다. 한 사람이 심오하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과 헤어져 깊은 산골짜기에 홀로 외롭고 심각하게 산다는 것과는 다르다. 심오하게 사는 사람은 바로 ‘사람과 함께’ 또는 ‘넓게’ 사는 사람이다. 생존의 ‘넓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이 광활한 넓이야말로 ‘인ㅡ간’의 깊이이며 ‘인ㅡ간’의 길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인ㅡ간의 수명은 짧으나 그것은 막힘없이 넓다.
인생은 넓음으로써 예술보다도 훨씬 길다.
-p291

“이제 몇날이 지나지 않아서 또 먼제로 가야할 텐데 먹지도 못할 것을 그건 심거서 무엇하십니까?” 제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건 모르는 말씀, 비록 우리가 먹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먹어도 좋지 않겠소?”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백세명, ‘하나로 가는 길’, 일신사, 1968, pp.43~44)
생존은 실체로서가 아니라 ‘주는 행위’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태양이 온누리에 따뜻함과 밝음을 주는 것처럼 생존은 줌(giving)의 가지를 한울 속에 뻗어나간다. 생존은 줌으로써 확장된다. ‘줌’ 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된다. 줌은 빼앗김 또는 빼앗음이라는 인위성의 위기에 봉착하여 왔다. 줌으로서의 생존은 원조를 가장한 약탈과 구별된다. 악마는 주는 척 하면서 빼앗는다. 악마는 미끼를 원조하면서 생명을 빼앗는다. 그런데 전체적 총계에서 본다면 약탈한 것은 악마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감소된 것이다. 훔친 장물이 훨씬 감소되는 것처럼, 약탈은 전체적 축소, 즉 죽음을 초래한다. 악마는 빼앗음으로써 마의 창고를 채울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악마의 창고는 결국 텅 비게 된다. 사람의 손에서 빼앗긴 것은 악마의 창고에 들어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창고에 들어가 썩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빼앗음’은 ‘없앰’이다.
생존은 확장이며 줌이며 초월이며 ‘사랑’이다. 확장으로서의 생존은 축소와는 딴판인 사랑이다. 줌으로서의 생존은 약탈, 탈취와는 딴판인 사랑이다. 초월로서의 생존은 감금, 구속과는 딴판인 사랑이다. 생존은 행위며, 행위로서의 생존은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은 음양 속에 들어있는 액체 덩어리도 아니며, 사랑은 입술 사이로 날름거리는 혓바닥도 아니다. 사랑은 물체가 아니라 행위다. 사랑은 명사로서가 아니라 동사로서, 그것도 자동사로서아니라 인위적 타동사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된다. 사랑의 인위성은 빼앗음과 살인의 독소인 ‘미움’의 인위성에 항상 직면하여 있다. 서로 미워하며 서로 빼앗고 서로 할퀴고 서로 때리며 서로 욕하며 서로 죽이게끔 이간시키는 악마의 행위가 항상 사랑의 행위를 위태롭게 하려고 도사리고 있다.
사랑은 사람의 ‘하나됨’ 또는 ‘하나님스러움’ 또는 ‘우리됨’을 짜주는 한울의 끈이다. 사랑은 사람 사이의 틈을 가득 채움으로써 생존을 확장시키며 인간의 생명을 확장시켜 준다. 사랑의 밧줄은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 준다. 사랑의 밧줄은 사람들의 탯줄이다. 여러 가닥으로 꼬여진 사랑의 밧줄은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옆으로 이어져 있다. 공중에 매달린 밧줄은 흔히 악마의 올가미 또는 악무한적 세계도피의 거미줄과도 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한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협동적 행위다. 사랑이란 바로 서로 잡아 당겨주는 행위이며 서로 생각해 주는 행위다. ‘사랑’이란 본래 ‘생각’이 아니었던가!

서로 일으켜 주며
서로 붙잡아 주며
서로 구원해 주며
서로 도와 주며
서로 가르쳐 주며
서로 생각해 주며
사람들은 함께 살아있다.
-p294~296

인간의 초월은 날개로써가 아니라 두 발로써 달성되며, 고층사다리로써가 아니라 두 팔로써 달성된다.
-p299

땅이 성스러운 것은 그것에 한울이 발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 위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땅은 성스러운 것이다. 그 위에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에 땅은 ‘성지’인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성지다. 그런데도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가 태어난 성지를 버리고 가난한 거지처럼 부자들이 사는 타향에서 눈치의 거리를 방황하면서 문화적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객사할 뿐만 아니라, 인질의 땅에서 태어난 자녀들 손에다 국제적 고등거지의 깡통을 영원히 쥐어주려는 ‘신라방’ 주민들이 있음은 매우 가련한 일이다. 이들은 고향을 더러운 곳, 지저분한 곳, 시끄러운 곳이라 하여 침을 뱉고, 깨끗한 곳, 아름다운 곳, 조용한 곳에로 짐을 싸서 도망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어느 땅치고 깨끗하지 않으며 아름답지 않으며 조용하지 않은 땅이 있는가? 모든 땅은 깨끗하며 아름답고 조용하다. 깨끗한 중국인들이 아무리 ‘더럽다’ 고 하는 동쪽 구이의 땅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군자가 가서 산다면 누추한 곳이 아니라고 공자라는 군자 한 분이 가르친 적이 있다. (‘논어’ 자공편 참조. 구이는 조선민족, 만주민족, 일본민족 등을 고래 중국인들이 얕잡아 부르던 이름.)
그러나 이 사람의 군자다운 생각과는 달리 땅 위에 군자가 이민 와서 살아야 그 땅이 더럽다는 누명을 벗게 되는 것은 아니다. 땅 위에 한울이 있고 땅 위에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모든 땅은 깨끗하며 아름답고 조용한 것이다.
-p324.325

인내천 혁명이 세계사상적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사상 탄생 배경의 세계성뿐만 아니라 그 사상 내용의 혁명성에 기인한다. 人乃天은 人乃賤에 대한 혁명이다. 인내천 사상이 혁명적인 것은 인간이 인간을 천대하던 과거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의미의 인간 존엄성을 고취하는 인내천 사상은 지난날의 온갖 위선적 인본주의, 종군적 박애주의, 박애적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타 넘었다. “사람이 바로 한울이다” 라는 한마디의 웅변이 가짜 인본주의의 온갖 교언들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한반도의 모든 골짜기와 모든 강과 모든 산과 하늘에 사무친 아세아적 인간 천대의 신음 소리를 수운은 들었다. 서양 군함에 실려온 로고스적 과학기술의 유물주의적 인간 천대의 대포 소리를 수운은 들었다. 신과 인간의 절대적 불평등에 바탕한 위선적 서양 종교업자들이 지껄이는 인간 천대의 간사한 목소리를 수운은 들었다.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지배하여 온 인간 천대의 모든 소리를 듣고 수운은 人乃天으로써 人乃賤의 역사를 종식시키고자 한 것이다.
인내천 사상은 전통적 동양사상의 최첨단에서 탄생한 것인 동시에, 로고스적 살인기를 능가한 활인기로서 등자한 것이며, 예수의 가면을 쓰고 들어온 위석적 사랑을 능가하는 보편적 공경의 도리로서 등장하였다. 인내천 혁명의 내용은 소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人乃賤의 철저한 거부이지만, 적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사회적 성화다. 인내천 사상은 인간의 행위를 신적 행위에로 고양시켜 놓고자 한다. 한울님을 모시는 인간의 신적 행위, 한울님을 산채로 기르는 인간의 신적 행위, 한울님을 구체적으로 본받아 혁명적으로 실천하는 인간의 신적 행위가 지니고 있는 뜻이야말로 인내천의 적극적 혁명성을 제시하고 있다.

-p335,336

한울님을 키우려면 가두어 두지도 말아야 하며 때리지도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함부로 ‘옮기지 말아야’ 한다. 옮김은 유기적, 공화적 생명을 ‘빼앗음’ 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 속에서 키워질 때나 땅 위에서 키워질 때나 한울 속에 살아 있다. 어머니 태 속에 살아 있음은 어머니와 함께 살아 있으며, 세상에 나와 큰 울 속에 살아 있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 있음이다. 태 속에선 땅 위에건 간에 사람은 우주와 함께 살아있다.
‘함께’는 인간적 생존 방식이다. 사람에게서 이 ‘함께’를 뺏아 버리면 벌써 사람은 키워질 수 없다. ‘함께’를 떠나서 살아 움직일 수 없으며 ‘함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함께’ 생각한다. ‘함께’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가면 객이 되며 倜가 된다. ‘함께’ 로부터 떠나버리게 되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며, 바르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함께’ 로부터 옮겨 버리게 되면 한울님은 키워질 수도 없으며 바르게 생각할 수도 없다. 도대체 ‘함께’로부터 옮길 수도 없으며 떠나버릴 수도 없으며 떼어 낼 수도 없는 것이 사람의 생존이다.
태 속에서 나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서 사람은 점점 나(자아)를 확인해 간다. ‘나’ 의 첫 번째 자각이란 ‘남’(타자)에 대한 인식에 바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나’라는 자각을 갖게 되는 것은 ‘남’이 나에 대하여 저항이 되며 방해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라고 하겠다.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남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자각은 이 같은 초보적 단계로부터 남에 대한 대립감 또는 적대감 위에서 점점 뚜렷해진다. 남으로부터의 나의 마음과 나의 신체를 가두어 두는 여러 가지 선입관과 거짓말이 침입하게 되면 나와 남 사이에는 ‘함께’라는 투명한 막 대신에 ‘차별’이라는 두꺼운 장벽이 쌓이게 된다. ‘나’의 진정한 자각은 이 차별적 장벽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시작된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자각이다. 나의 첫 번째 자각은 나와 남의 구별에서 성립하는 편벽된 자각이지만, 두 번째 자각은 흔히 해탈 또는 覺이라고 불리우며 “천지와 더불어 그 큰 덕에 합한다”고도 표현된다.
-p342,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