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4년 금강산, 청년 율곡과 어느 노승의 대화
1554년 금강산, 청년 율곡과 어느 노승의 대화
: 불교와 주자학의 철학적 격론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서울대철학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받음. 《주회에서 정약용으로》 《중고생을 위한 고사성어 강의》 등의 저서와 ‘理氣 패러다임의 철학적 전망’ 등 논문 다수.
1. 방황
율곡은 나이 열여섯에 어머니의 죽음을 맞았다. 조운(漕運)의 일을 맡은 아버지를 따라 남도를 돌아오던 길에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는 부랴부랴 마포에 배를 대고 집으로 향했다. 조선 제일의 여인으로 칭송받는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을 임종도 못하고 떠나보낸 안타까움과 그리움은 율곡의 정신적 풍경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로부터 삶에 대한 회의와 우울이 깊어갔고, 급기야는 유학자들에게는 금기나 다름없는 입산을 결행하게 된다.
율곡은 그의 술회에 의하면, 학문도 과거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맞았고 그 이후 몇 해 동안 “옛 사람들의 글로 해학에 가까운 것을 취해서 수시로 열람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오랫동안 자신 속에서 갈등해 온 도학(道學)과 과거(科擧), 즉 성(聖)과 속(俗)의 두 갈래 길에서 ‘성자의 학문’을 우선으로 하겠다는 것, 다시 말하면 사회적 성취보다 스스로의 삶을 완성하겠다는 힘든 길을 가겠다고 ‘뜻을 세운’ 것이다.
그는 학문의 방법을 말할 때, 언제나 ‘입지(立志)’를 첫머리에 강조했다. 19세, 금강산에서 내려와 스스로를 경계한 《자경문(自警文)》의 첫머리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크게 세워 성인으로써 표준을 삼을 것이니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못 마친 것이 된다.”고 적었다. 아이들을 깨우치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첫머리도 ‘입지’로 시작하고 임금에게 방대한 성리학의 학문체계를 요약 제시한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첫머리도 수신(修身)의 첫 발걸음이 입지임을 힘주어 강조했다.
이 무렵, 즉 열여섯에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던 2~3년, 그리고 새로운 각오로 학문에의 길을 내딛던 이 시기가 그의 인간과 사상을 읽는 관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이력,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전환점’이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그는 두 번의 전환을 겪는다. 하나는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증폭된 정신적 갈등을 어쩌지 못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이고, 또 하나는 ‘삶’을 이해하는 유교적 진리에 대한 실존적 자각과 더불어 하산하는 것이다. 이 두 전환은 일년 남짓의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는 다시 하산(下山)했다. 불교에 대한 그의 심취와 탐구가 그의 내적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다시 사회 속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1년여의 방황을 마치고 다시 유학으로 회귀하면서 지은 시에는, 그를 괴롭히던 정신적 충격과 방황이 상당히 탈각되면서 상당한 정신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산인(山人) 보응(普應)과 함께 하산하여 풍암(豊巖) 이광문(李廣文)의 집 초당에서 묵으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도를 배움에는 ‘매인 바’가 없어야 하니 學道卽無著
인연따라 이르는 곳에 노닐 뿐이네 隨緣到處遊
잠시 청학동 하직하고 暫辭靑鶴洞
백구주에 와 구경하노라 來玩白鷗州
내 몸은 천리 구름 속에 있고 身世雲千里
우주는 바다 끝에 닿아 있네 乾坤海一頭
초당에 묵어가는 무심한 하루밤 草堂聊寄宿
매화를 비추는 달 이것이 풍류로다 梅月是風流
그는 편견과 고착을 떠나 진리를 구했고, 그런 정신으로 불교와 노장(老莊)의 청학동을 노닐다가, 이제 다시금 유학의 백구주(白鷗州)로 돌아왔다. 그는 삶의 실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키는 대로 방황하고 여러 철학을 순례했지만, 나중 이 입산의 경력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혐의와 비판에 시달리게 했다. 그러나 이때 그는 다만 길을 가고자 했을 뿐,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2. 노승과 나눈 짧은 대화
그렇다면 그는 어떤 계기를 통해 유교로 다시 ‘회귀’했을까. 여기가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유감스럽게도 율곡은 그 점을 직접 자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았다. 당대의 유가독존적 분위기가 불교에 대한 논의 자체를 원천봉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천만 다행하게도 그 언저리를 짐작하게 해 주는 상징적 일화 하나가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금강산을 유력하던 시절 어느 암자에서 노승과 나눈 문답이 그것인데, 이 일화는 그의 불교를 향한 입산과 유교를 위한 하산이라는 실존적 ‘전향’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니, 거시적으로 볼 때 불교와 유교의 만남이라는 동아시아 문명사에서의 거대한 합류의 한 실례를 보여주는 귀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노승과의 에피소드는 짧지만 풍부한 함의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자세히 분석해 보려한다. 언젠가 꼭 한번 다루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제목은 「금강산에서 조그만 암자의 노승에게 주다」이다.
(*시를 주게 된 경위는 이렇다.)
내가 풍악산을 유람하던 어느 날, 혼자서 깊은 골짜기를 몇 리쯤 가다보니 조그만 암자 하나가 나타났다. 노승 하나가 가사를 걸친 채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나를 보고서도 일어나지도 않고 입도 떼지 않았다. 암자를 한바퀴 둘러보니 아무 것도 없고 아궁이에는 불을 땐 지 며칠 된 듯하였다. 내가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시오?” 노승은 웃음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무엇으로 허기를 끄시오?” 노승은 소나무를 가리키며 “이게 내 양식이오.” 나는 그의 식견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공자와 석가, 둘 중 누가 성인이오?” “선비는 나를 놀리지 마시오.” “불교는 이적(夷狄:오랑캐)의 가르침이어서 중국(中國)에선 시행될 수 없소이다.” “순(舜)은 동이(東夷) 출신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출신이니 이들 역시 이적이란 말이오.” 나는 말했다. “불교의 핵심적 교의(妙處)가 우리 유가를 벗어나지 않거늘 굳이 유학을 버리고 불교를 찾고 있소?” 노승이 말했다. “유가에도 ‘마음 그것이 곧 부처다(卽心卽佛)’라는 말이 있소?” 나는 말했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말하면서 입만 열면 요순을 들먹였는데 (이것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 그렇더라도 우리 유학의 견해가 (훨씬) 적극적(實)이오” 노승은 (내 말을) 수긍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묻기를,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다’가 무슨 소리요” 내가 말했다. “이 또한 상대적 의식의 특정한 양태(前境)일 뿐이오.” 노승이 씨익 쪼개는 것을 보고 내가 물었다. “‘소리개가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 이것은 색(色)이오 공(空)이오.” 노승이 말했다.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님은 진여(眞如)의 체(體)요, 이런 시로 어떻게 빗댈 수 있단 말이오.”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언어적 표현(言說)을 거쳤다면 바로 상대적 인식의 지평(境界)이니 어떻게 체(體)라 할 수 있겠오. 허면 유가의 핵심(妙處)은 언어를 통해 전할 수 없는데 불교의 진리는 문자 언저리에 있는 셈이오.” 노승은 화들짝 놀라며 내 손을 잡고 “그대는 시속의 범용한 선비(俗儒)가 아닌가 보오. 나를 위해 시를 지어,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글귀의 뜻을 풀어주시오.” 그래서 절구 한 수를 써 주었더니 (이윽히) 보고나서 소매속에 넣고는 벽을 향해 돌아앉아 버렸다. 나도 그 골짜기를 나오고 말았는데 경황간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사흘이 지난 뒤 다시 가 보았더니 암자는 그대로인데 노승은 떠나버리고 없었다.
물고기 뛰고 소리개 날아 아래 위가 한가지 魚躍鳶飛上下同
이는 색(色)도 아니오, 공(空)도 또한 아닌 것 這般非色亦非空
무심히 한번 웃고 내 몸을 둘러보니 等閒一笑看身世
노을지는 숲, 나무들 사이에 홀로 서 있구나 獨立斜陽萬木中
이 게임을 보고 있노라면 선가(禪家)에서 일어나는 사제간의 법력 겨루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지금 율곡과 노승은 각각 유교와 불교의 가치를 어깨에 매고 한판 정당화의 칼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 전투의 서막과 종극을 이해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실제로 칼을 부딪는 장면인데, 이 대목은 상세한 철학적 분석과 해설이 필요하다. 편의를 위해 핵심부에 다음과 같이 번호를 매겨두기로 한다.
(1) 율곡: “공자와 석가, 둘 중 누가 성인이오?” 孔子釋迦, 孰爲聖人.
(2) 노승: “선비는 나를 놀리지 마시오.” 措大,莫瞞老僧.
(3) 율곡: “불교는 이적(夷狄:오랑캐)의 가르침이어서 중국(中國: 여기서는 동아시아 문화권을 지칭한다)에선 시행될 수 없소이다.” 浮屠是夷狄之敎, 不可施於中國.
(4) 노승: “순(舜)은 동이(東夷) 출신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출신이니 이들 역시 이적(夷狄)이란 말이오.” 舜東夷之人也. 文王西夷之人也. 此亦夷狄耶.
(5) 율곡: “불교의 핵심적 교의(妙處)가 우리 유가를 벗어나지 않거늘 굳이 유학을 버리고 불교를 찾고 있소?” 佛家妙處, 不出吾儒. 何必棄儒求釋乎.
(6) 노승: “유가에도 ‘마음 그것이 곧 부처다(卽心卽佛)’라는 말이 있소?” 儒家亦有卽心卽佛之語乎.
(7) 율곡: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말하면서 입만 열면 요순을 들먹였는데 (이것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 그렇더라도 우리 유학의 견해가 (훨씬) 적극적(實)이오” 孟子道性善言必稱堯舜, 何異於卽心卽佛. 但吾儒見得實.
(8) 노승: 수긍하지 않고, 한참 있다가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다’가 무슨 소리요” 不肯,良久,乃曰, 非色非空, 何等語也.
(9) 율곡: “이 또한 상대적 의식의 특정한 양태(前境)일 뿐이오.” 此亦前境也.
(10) 노승: 씨익 쪼개다. ?之.
(11) 율곡: “‘소리개가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 이것은 색(色)이오 공(空)이오.” 鳶飛戾天魚躍于淵, 此則色耶空耶.
(12) 노승: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님은 진여(眞如)의 체(體)요, 이런 시로 어떻게 빗댈 수 있단 말이오.” 非色非空是眞如體也. 豈此詩之足比.
(13) 율곡: 웃으면서, “언어적 표현(言說)을 거쳤다면 바로 상대적 인식의 지평(境界)이니 어떻게 체(體)라 할 수 있겠오. 허면 유가의 핵심(妙處)은 언어를 통해 전할 수 없는데 불교의 진리는 문자 언저리에 있는 셈이오.” 笑曰, 旣有言說便是境界, 何謂體也. 若然則儒家妙處不可言傳, 而佛氏之道不在文字外也.
(14) 노승: 놀라서 손을 잡고 시 한 수를 청하다. 愕然,執我手曰...爲我賦詩...
3. 진검승부의 분석과 해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율곡이었다(1). 노승은 귀찮다는 듯이 슬쩍 몸을 비켜버렸다(2). 이것보란 듯이 율곡이 이번엔 힘을 실어 외곽의 허술한 부분을 찔러보았다(3).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노승은 칼을 뻗느라 흐트러진 율곡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왔다(4). 노승의 솜씨가 일전을 겨룰 만하다고 판단한 율곡은 정식으로 도전장을 던졌다(5). 여기까지는 탐색전에 해당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한판 싸움이 시작된다. 그 주고받음을 단계별로 분석해 보기로 하자.
(5) 율곡: “佛家妙處, 不出吾儒 何必棄儒求釋乎”
율곡은 “불교의 핵심 교의가 유교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단언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그는 이때쯤 그 동안의 정신적 방황과 불교에의 침잠을 통해, 불교가 노리는 목표와 그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인적 없는 금강산 깊은 곳에서 며칠씩 침식을 잊으며 깊은 사색과 명상에 잠겨 있던 어느 날, 그는 불교가 왜 증감상(增減想)을 짓지 말라고 그토록 강조하는지에 대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그 교의는 별 특별한 것이 없다. 다만 이 마음의 일탈을 차단하고 심신의 에너지를 집중, 그 고요의 극치에서 정신의 <허명(虛明)>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짐짓 화두(話頭)라는 것을 설정하여 수행자들로 하여금 이에 의거해 노력하게끔 했다.”
그렇지만 율곡은, 인식의 장애를 제거하여 얻은 정신의 투명성(虛明)은 그 자체 아무런 <실질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방법적 부정은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무엇을 구현하기 위한 준비로서만 의의를 가질 수 있는데, 불교는 그 부정을 통해 구현하려는 목표, 즉 창조적 생명활동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한 적극적(positive) 지평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율곡은 불교의 반쪽을 긍정했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은 불교가 유교에 못 미친다고 판단했다. 이 생각이 이 격돌의 전편을 끌고 가는 주조음(主調音)이다. 더구나 불교는 인종과 민족, 문화적 철학적 기반이 다른 저쪽 서역(西域)의 산물이 아니던가.
(6) 노승: “儒家亦有卽心卽佛之語乎”
노승은 이 ‘물음’을 비껴갈 수도 있었지만, 수십 년의 나이의 격차와 삶의 이력의 무게를 접어두고 이 물음에 시종 진지하게 대처했다. 흡사 60객 퇴계(退溪)와 갓 서른의 고봉(高峰) 사이에 오간 학문적 토론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정경이다. 노승은 이렇게 반문했다. “유가에도 ‘마음 그것이 곧 부처다(卽心卽佛)’라는 말이 있소?” 이 물음에는 수많은 의미와 맥락이 깔려 있다. 왜 노승은 하필이면 팔만대장경의 장광설(長廣舌) 가운데 이 말을 들어 반격했을까. 그는 불교의 궁극이 유가의 이념 속에 포섭된다는 율곡의 발언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노승이 든 ‘즉심즉불’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을 넘어서 발전한 중국선(中國禪)의 표어 가운데 하나이다. 그 가운데서도 점교(漸敎)를 표방하는 북종(北宗)에 대해 돈교(頓敎)를 대표하는 남종(南宗)의 가르침이며 남종 가운데서도 ‘일상성’ 속에서 활발한 정신의 자유를 첨예하게 고취하는 마조(馬祖) 선의 핵심적 표어이다.
즉심즉불에 대해 좀 부연 설명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마조선은 계율을 지키고 경전을 읽는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목표에 이르는 길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고,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들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젊은 마조(馬祖)가 스승 남악(南嶽)을 만날 때의 일이다. 스승인 남악은 일찍이 정신의 절대적 자유란 상대적 인식의 극단적 세척으로부터 성취된다는 것을 증거함으로써(甚物伊來. 設使一物卽不中.) 육조(六祖) 혜능(慧能)으로부터 인증을 받은 사람이다. 어느 날 남악의 눈에 선방에서 열심히 좌선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첫눈에 큰 그릇임을 알고서 넌지시 떠보았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보시다시피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좌선은 해서 무엇 하려는가.” 마조는 별일이라는 듯 “부처가 되려구요”하고 대답했다. 다음날 남악은 마조의 선방 앞에서 숫돌에다 기와를 갈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마조 왈, “아니 스님 지금 무얼 하고 있습니까.” “기와를 갈고 있지 않나.” “뭐하시게요.” “거울을 만들려네.” “원, 세상에, 기와를 갈아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남악이 기다렸다는 듯 쏘아부쳤다. “기와를 갈아 거울이 안 된다면 퍼질러 않아 어찌 부처를 기약하는가.” 정신이 아득해진 마조가 엎드려 가르침을 청하자 남악은 이렇게 대답했다. “수레가 안간다면 바퀴를 쳐야겠는가, 소를 때려야겠는가. 참된 원리는 앉거나 누움에 걸리지 않고(禪非坐臥) 이르러야 할 자리는 일정한 틀이 없다.(佛非定相) 너의 따지고 가리는 마음, 취하고 버리는 태도로 하여 ‘부처’가 질식하고 있음을 왜 모른단 말이냐.”
《전등록(傳燈錄)》을 포함해 공안의 앤솔로지인 《선문염송(禪門拈頌)》 《마조어록(馬祖語錄)》등에 전해오는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남악은 전통적 방법에 따라 좌선에 열중하고 있는 마조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정신의 본바탕은 아무런 규격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그 같은 절대무제약(絶對無制約)의 공간에서라야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 해방될 것이라고 깨우쳤다. 결국 방법은 없다는 것, 이 방법 없는 무가나(無可奈) 속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급기야 임제(臨濟)의 봉불살불(逢佛殺佛), 조주(趙州)의 무(無)로 이어졌다.
마조가 학인들을 일깨우기 위해 즐겨 쓴 말이 바로 이 즉심즉불이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도 하고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고도 하는 이 말은, 모든 외적 규범과 방법을 차단하고 곧바로 자신의 본질을 파지하라는 지극히 단순직절한 가르침이다. 그는 남악에게서 배운 대로, “참된 원리는 앉거나 누움에 걸리지 않고(禪非坐臥) 이르러야 할 자리는 일정한 틀이 없다.(佛非定相)”는데 철저했다. 그러므로 “모든 인위적 <선택>과 의도적 노력을 방하(放下)하고 판단중지(epoche)의 온전한 혼돈 속에 머물라, 그것이 도에 이르는 길이다.”
노승이 어린 선비 율곡에게 “즉심즉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유가가 설정한 이념의 규범성과 방법의 번쇄성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유가의 가르침이란 결국 예(禮)로 설정된 이상적 행위양식에 대한 존중과 복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도 유교란 다양한 인간관계의 무대에서 한 인간이 수행해야할 엄격한 격식의 체계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래디칼한 불교인 선의 자리에서 그같은 유교적 권위와 인습은 진정한 인간성의 실현에 대한 가장 큰 방해와 위협이었던 것이다. 노승은 진정한 해방의 의미에 대한 각성 없이 세간의 자잘한 규범과 소성(小成)에 매여 있는 유교가 오히려 불교의 초세간적 가르침을 포괄하고 있다는 애숭이 선비의 물정모르는 당돌함에 기가 차서, 이렇게 반문했다. “어린애야, 너는 도대체 ‘즉심즉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기나 하니?”
(7) 율곡: “孟子道性善言必稱堯舜, 何異於卽心卽佛. 但吾儒見得實.”
율곡은 이 반론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율곡이 인간의 심리학적 지평에 대해 불교와 유교 양면에서 나름의 이해를 축적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같은 순발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맹자인가. 맹자가 성선을 말하고, 요순을 들먹인 것이 지금의 논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이 <연관>의 고리를 읽지 못하면 주자학적 지평 아래서의 율곡의 심리학과 도덕학을 그 충분한 의미와 깊이에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곡절은 이렇다.
앞에서 율곡이 불교의 가르침이 그다지 독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불교는 “다만 이 마음의 일탈을 차단하고 심신의 에너지를 집중, 그 고요의 극치에서 정신의 허명(虛明)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는 노승이 던진 즉심즉불 역시 이 차원에서 생각한다. 그가 이해하기에,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표명하고 있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불교와 선은 그 본연의 정신신체적 에너지는 무명(無明)과 탐진치(貪嗔痴)에 의해 전락(轉落)되고 소외(疏外)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본원적 에너지가 절대의 힘과 공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마조의 즉심즉불은 그것을 충격적으로 일깨우자는 말이겠는데, 율곡은 이 같은 인식이 일찌감치 유학의 전통에 이미, 그리고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맹자는 아득한 춘추전국의 혼란기에 인간의 추악한 모습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던 시대에 공자가 창도한 유학의 진실을, 즉 인간성의 본래적 선함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어깨에 걸고 전파하던 동키호테였다. 그는 굳건한 확신과 확고한 용기, 그리고 효율적 변설을 무기로 우세하던 비관론의 도도한 흐름에 맞서 인간의 본래적 에너지가 사회적 공적 지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변호해 나갔다.
《맹자》 전편을 통관하고 있는 그의 인간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a) 인간의 에너지는 본원적으로 선(善)을--이때 선이란 사회적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지향하고 있다. (b) 인간의 에너지가 왜곡 변질되는 계기는 외적 대상과의 교섭을 통해 강화되는 에고의 비본질적 욕망이다. (c) 그렇지만 이렇게 생긴 정신신체적 ‘일탈’도 본래의 선한 에너지를 근본적으로는 차단하지 못한다. (d) 그 에너지를 자각하고 확충해 나감으로써 내적 에너지의 순수성에 대한 확신이 깊어지고 그 깊어진 확신은 내적 에너지의 순수한 발현을 증강시키는 쪽으로 에스컬레이트되며 그 극에서 순수한 에너지의 전면적 해방이 성취된다. (e) 근본적으로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는 이 순수한 에너지는 상호감화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 ‘확충’의 극치에서 사회적 질서와 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
이 다섯 단계에서 관건은 ‘인간 내부의 선한 에너지’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이다. 맹자는 다음과 같은 단적인 예를 들었다. 성선론을 들먹일 때마다 회자되는 예화이다. 어린애가 우물 쪽으로 기어간다. 아이는 아직 자신의 행동이 몰고 올 결과에 대한 지각이 부족하다. 경험을 통해 사태를 추론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그래서 세계에 대해 아무런 공포가 없다. 그런데 아이가 무심히 우물 쪽으로 기어가는 광경을 누군가가 보았다 하자.
가슴이 철렁한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아이를 건지려고 달려갈 것이다. 여기에는 아이를 건져 동네사람에게 칭찬을 받겠다는 명예욕도, 아이를 건져 보상을 받겠다는 이해득실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아이의 위험에 대한 자각과 건져야겠다는 충동, 그리고 실제 건지는 행위 사이에 아무런 간격이 없다. 이 ‘간격 없음’은 유학이 인간 에너지의 순수성을 확인하는 결정적 표지이다. 만일 그 ‘지각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면 이미 내부적 에너지의 순수성은 오염되고 만다. 사(私)가 끼일 때 즉 현실적 고려나 욕망이 개입할 때 인간의 내적 순수성은 파괴된다.
대개 인간의 정서나 의지, 그리고 인식과 행동은 안타깝게도 오염되고 왜곡되어 있다. 유학은 이 오염을 정화하여 정신의 본래적 순수를 확보하라고 가르친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지로 가능하겠는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자신에 대한 관심을 접고 공동체의 이익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겠는가. 맹자는 그럴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억압이 아니라 개인의 진정한 실현이라는 ‘믿지 못할’ 주장까지 했다. 맹자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했는데, 그들이 다름 아닌 요순(堯舜)이라 불리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인격이다. 맹자는 인격의 본래적 가능성과 그 확장으로서 선의 구현이라는 자신의 교설을 회의하는 사람들을 위해 언제나 이들을 실증적 전거로 삼았다.
율곡은 맹자의 교설에 담긴 핵심적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즉심즉불을 말하는 노승에게 맹자의 성선(性善)으로 응수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종합하건대 율곡의 응수에는 다음과 같은 판단이 깔려 있다. “맹자의 성선은 인간의 에너지가 외적 내적 방해를 받지 않을 때 투명하고 순수하게 표출된다는 교설이고 그것은 지금 노승께서 말씀하시는 즉심즉불의 가르침의 핵심을 포섭하고 있다”고.
율곡은 불가의 즉심즉불이 맹자의 성선론의 지평에 포괄된다고 단언한 뒤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렇더라도 우리 유학의 견해가 더욱 적극적(實)이오!” 돌이켜 보면, 불교는 왜곡된 세계를 바로잡기 위한 공(空)의 ‘부정’의 방법을 기조로 할 것이냐, 혹은 본원적 세계를 적극적으로 지시하는 불공(不空)의 ‘긍정’의 효과를 기조로 할 것이냐의 시계추 속에서 흔들려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온전한 가르침은 이 둘을 모두 포괄하는 역동적인 것, 다시 말하면 입파여탈(立破與奪)이 자재(自在)한 것이어야 한다. 일찍이 원효가 공과 불공을 동시에 말하는 《대승기신론》을 발견하고 환호했던 소이(所以)가 바로 여기 있다. 대승 최후의 발전인 선(禪)은 그 같은 입파여탈의 역동성, 즉 본원적 세계의 현실적 구현을 ‘실천적’으로 증거하는 전통을 세웠다. ‘즉심즉불’은 그러므로 불교 내부의 실(實)을 대표하는 표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율곡은 유가가 훨씬 실(實)하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대승기신론》을 포함한 여래장 사상이 우주적 공능과 연관된 인간의 본원적 에너지를 ‘긍정’은 했으되, 그 에너지가 우주 안에서 창조성을 구현하고 있는 방식과 세목에 대해 적극적으로 입언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 점에서는 대승 최후의 발전이라는 선(禪)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일상적 에너지를 절대화하여 ‘나무 지고 물긷는 것(神通幷妙用, 運水及搬柴)’을 암시하거나, ‘차나 한잔 들고 가라(喫茶去)’고만 하지 도무지 인간행위의 순수를 정위해주는 적극적 ‘규정’이 없는 것이다.
주자를 따라 율곡 또한 행위의 규범에 일정한 표준을 마련하지 않고, 순전히 개인의 즉각적 자발성만 강조할 때, 사회적 통합과 질서는 물론, 개인의 온전한 실현을 기대할 수 없다고 믿었다. 유교적 어법을 빌면 불교는 세계로부터의 고착을 벗어던지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했을지는 모르나 ‘준칙(準則)’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세계를 향한 창조적 참여, 나아가 그 참여를 통한 사회적 질서와 화해의 구현이라는 지평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율곡은 판단한 것이다.
(8) 노승: “不肯. 良久, 乃曰, 非色非空, 何等語也”
노승은 이렇게 진리를 준칙을 통해 규정적으로 접근하는데 동의할 수 없었다. 노장의 표현을 빌리면 ‘혼돈(渾沌)’의 에너지를 모종의 규범적 형식 아래 통합하려는 어떤 시도도 불교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특히 소승의 맹목적 좌선과 스콜라적 교학을 비판하며 태동한 대승불교, 특히 중국 선의 전제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노승은 유학이 소승적 테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음에 틀림없다.
규정적 접근과 비규정적 방임(Gelassenheit, 逍遙)의 두 입장 차이는 유학 내부에서도 첨예하게 논의된 바라는 점을 일러두어야겠다. 준칙의 성현 혹은 붓다의 ‘준칙’을 둘러싼 갈등은 송명의 신유학 안에서 맥락을 달리하여 재연되었다. 이른바 도문학(道問學)과 존덕성(尊德性)으로 대표되는 주자와 육상산(陸象山)의 방법론 논쟁이 그것이다. 인간의 본원적 에너지를 어떻게 발양할 것이냐에 대해 주자는 점진적인 격물(格物)과 거경(居敬)을 통한 ‘준칙’의 확인과 체화를 강조했고 육상산은 인간정신 내부에 준칙 형성의 이성이 자연적 자발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외부적 준칙이 필요하지 않다고 역설했다. “육경(六經)은 내 마음의 주석(六經皆我註脚)”이라고 그는 외쳤던 것이다. 이들 두 테제 사이에 쉽사리 우열이나 진위를 가릴 수는 없다. 아무러나 상산이나 그 뒤를 이은 양명학이 늘 선(禪)의 혐의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준칙’을 둘러싼 노선 갈등이 유교 혹은 불교만의 것이 아님을 일러주고 있다.
노승이 절대적인 것의 ‘자유’를 강조했다면, 율곡은 그 반대편에서 절대적인 것의 ‘규범’을 강조했다. 그래서 율곡은 주자를 따라 불교를 허(虛)로, 유교를 실(實)로 평가하지만, 그러나 노승이 이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노승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묻는다.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다’가 무슨 소리요?” 이 질문으로 하여 우리는 앞에서의 진단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한다. 노승은 자신의 입장, 즉 절대적인 것의 무규정성과 무규범성을 경전의 언어를 빌어 재차 주장하여 율곡을 설득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색(色)과 공(空)의 병치적 연관은 대승 반야경전의 핵심을 최대한 요약한 《반야심경》에 구체적으로 결정(結晶)되어 있다. 《반야심경》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로,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 요소들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설파한다. 중관(中觀)은 자칫 학인(學人)들이 이 언표의 표면에 붙잡혀 세계에 대한 또 다른 ‘규정’에 몰두할까 싶어, 다시금 비색비공(非色非空)의 반야검(般若劍)을 휘두른다. 《중론(中論)》과 삼론(三論)에서 보이는 극단적 부정의 논리를 보라. 그것은 세계를,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그리고 그 인식의 표명인 인간의 언어를 치열하고 집요하게 깨부수는 노력을 섬뜩하고도 집요하게 보여준다. 그 비(非)의 논리는 인간의 분별(分別)이 기대고 있는 마지막 발판을 빼앗기 위한 처절한 사투이다.
그를 통해 무엇이 전개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수행을 통해 펼쳐지는 그 같은 비인식의 세계가 끝없는 축복, 즉 니르바나로 묘사되는 절대적 해방의 공간이고, 그 공간에서 자유로운 삶의 에너지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공능(用)을 발휘해나간다는 정도만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축복은 축복을 향유하는 자신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축복은 축복을 누릴 주체인 자아의 탈각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의 것’으로 확인(identify)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뭏든 노승이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非色非空)”로 촉구하려는 바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진리란 무규정적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상대적 인식의 왜곡과 배제의 협소한 영역에서는 도저히 확보할 수 없는, 융이 말하는 모종의 ‘전체(Ganzheit)의 경험’이라는 종교적 진실이다.
이에 비해 유교는 요순이라는 모델을 설정하여 절대를 특정하게 표지화하고, 또 그에 이르기 위해 선과 악의 이분을 설정한 다음, 택선거악(擇善去惡)의 인위적 훈련을 통해 분리된 중심을 강화해나가는 ‘고착된’ 가르침이었다. ‘선택’과 ‘고집’의 이 방법(擇善而固執之: 《중용(中庸)》)은 그러나 필연적으로 분리를 낳고 분리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하며 갈등은 진리의 전체성을 해친다. 요컨대 노승은 이렇게 판단했다. “어린 선비가 말하는 유가의 길은 상대적 인식의 특정한 영역을 분리 강화시켜나가는 것이라면 우리 불가의 길은 상대적 인식을 근원적으로 불식시켜 비분리적 인식의 초월적 지평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서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 1) 노승이 무위(無爲)를 말하는데 비해, 율곡은 유위(有爲)를 강조한다. 2) 노승이 소요(逍遙)를 말하고 있다면, 율곡은 중용(中庸)을 최고의 경지로 삼고 있다. 요컨대 2) 노승이 자유를 말하는데 비해 율곡은 책임을 말하고 있다.
(9) 율곡: “非色非空...此亦前境也”.
율곡은 노승이 무엇을 얘기하려 하는지를 알았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하다. 율곡의 반문은 일상적 대화의 방식이나 이로(理路)에 익숙해진 사람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난데없이 불쑥 튀는(abrupt)’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전경(前境)일 뿐이오”라는 대답은 비색비공이 무슨 소리냐는 노승의 질문에 대한 합당한(corresponding) 대답이 아니다.
율곡은 노승이 던진 공을 따라 가지 않고 던진 손을 물어버린 격이다. 부연하자면, 노승이 물은 것은 세계가 편협한 상대적 인식--필연적으로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의 지평을 벗어날 때 무슨 일이 전개되는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절대적 공간에 대해 생각이나 해 본적이 있느냐는 추궁이었다. 율곡은 이 질문에 대해 유가가 보유하고 있는 카드를 곧바로 내보이지 않고 우선 노승이 가진 카드를 요구했다. 율곡은 말한다. “당신네들이 절대적 인식의 지평을 알리기 위해 제시한 비색비공이란 것 또한 상대적 인식의 지평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외다!”
여기서 전경(前境)이란 불교유식(佛敎唯識)의 전문용어로 ‘앞에 펼쳐진 풍경’, 즉 의식의 구체적 구성물을 뜻한다. 불교에 의하면 인식은 감각기관과 감각자료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데(6識), 이들은 보다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에고 의식(7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위 8식, 9식으로 갈수록 의식은 보다 근원적이고 전체적인 정신신체적 에너지의 흐름을 가리킨다.
그런데 불교는 우리가 당연시 하는 이들 6-8識 단계의 의식을 자기로부터, 본원으로부터의 분열 혹은 소외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신체적 에너지는 일상적 의식의 단계에서는 오염되어 있는데, 이 왜곡은 에너지의 가장 심층부에 자리잡고 있는 자아에 대한 염려와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식(唯識)과 《대승기신론》이 이 문제를 본격 다루고 있는데, ‘추한 형태의’ 오염은 일상적으로도 관찰이 가능하지만, 보다 간접적인 ‘미세한 형태의’ 오염은 명상과 수행이 깊어가면서 비로소 확인된다고 말한다. 이 같은 분석을 통해 불교가 알리고자 하는 바는, 세계는 아무런 규정도 없는 통일적 전체라는 것, 그리고 이 전체성을 원초적 염려 위에 서 있는 자아가 파편화시키면서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문제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노승은 불교의 최상승의 진리가 의식이 단편화에 의한 자기질곡을 벗을 때 일어날 니르바나의 축복에 있다고 자랑(?)하기 위해,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非色非空)”를 내세웠다. 그런데 율곡은 니르바나의 축복을 말하는 바로 이 말 자체가 절대적 의식의 지평과 상대적 의식의 지평을 ‘이원적으로 인식한’, 그리하여 불교가 그렇게도 타기하는 ‘소외된 인식’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따져드는 것이다.
자, 우리는 아주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동일한 언어가 실질적으로 상대적 지평에 ‘제약되어’ 있을 수도 있고, 또 혹은 상대적 지평 너머의 소식을 ‘암시하는’ 해방된 언어일 수 있다? 이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그렇다면 묻노니, 상대적 인식의 지평과 절대적 인식의 지평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으며 그것의 표지는 과연 어떤 것이냐.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한 시원한 대답은 없다. 그 둘은 외면적 관찰에 의해 구분될 수 없고 특징적 표지도 확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언어적 차원’에서는 이 둘을 ‘절대로’ 구분할 수 없다!
율곡은 이 두 지평을 동시에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율곡은 과연, 노승이 ‘비색비공’이라는 언표로 상대적 지평 너머의 소식을 암시하는 해방된 언어로 썼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짐짓 이렇게 시비를 건 것일까. 논자는 율곡이 알고도 시비를 걸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율곡의 비판에 대한 노승의 웃음, 그리고 그 웃음을 낚아채는 율곡의 기민한 응수를 함께 보아야 한다.
(10) 노승: “之.”
율곡은 초월을 가리키는 언어라도 ‘그것이 언어인 한’, 상대적 지평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노승은 빙긋이 웃었다. 그거라면 노승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불교는 이미 자체 전통에서 이 문제를 누구보다도 심각하고 치밀하게 다루지 않았던가. 노승은 어린 율곡이 초월에 이르는 불교의 방법적 논의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시비를 걸고 있다는 생각에 슬몃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비색비공이라는 말로 초월적 지평을 가리키고 있는데, 귀여운 애숭아, 너는 나의 표현이 상대적 언어의 탈을 쓰고 있다고 내 발목을 잡는거냐?”라는 뜻이 노승의 웃음 속에는 깃들어 있다.
불교의 전통은 ‘진리를 언표하는 언어의 역설’을 첨예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장자의 뗏목과 통발이 끊임없이 인용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운위되며, ‘방편(方便)’이 불교의 독특한 방법론적 발상으로 자리잡은 것도 이 점을 깊이 자각한 결과이다. 절대적 진리는 침묵에 있다는 것, 어떤 언어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 언어는 상대적 지평의 이원론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런데 눈먼 중생들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 그리하여 절대적 진리가 침묵에 있다는 것을 ‘방법적으로 깨우치기 위해서는’ 손을 더럽히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원효(617-686)의 말처럼 결국 “언어를 통해 언어를 잠재울(依言離言)”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방편’으로서의 언어이다. 그래서 부처는 48년 설법의 장광설(長廣舌)을 뱉고도 “나는 일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어거지(?)를 쓰고 있고--물론 이것은 후기불교의 주장이다--, 그 어거지가 전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불교적 전통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비유하자면, 쓰는 것과 동시에 지워버린다.
이 점은 즉심즉불을 강조한 마조 자신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학인이 어째서 즉심즉불을 외치고 다니느냐고 묻자 마조는 “우는 아이 달래려고”라고 대답했다. 아이가 울지 않으면 어떡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하지 뭐(非心非佛)!” 라고 대답했다. 실제 노승이 물은 비색비공(非色非空)은 비심비불과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도 비색비공을 내세운 것은 애송이 선비에게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임이 틀림없다. 즉심즉불과 비심비불은 그것이 노리고 있는 궁극적 효과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모두 일변에 집착하는 상대적 인식의 폐단을 극복하고 전체적 인식의 지평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적 설정에 불과한 것이다.
(11) 율곡: “鳶飛戾天魚躍于淵, 此則色耶空耶.”
율곡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는 노승의 웃음 뒤에 깔린 문맥을 즉각적으로 읽고 이렇게 되물었다. “‘소리개가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 이것은 색(色)이오 공(空)이오.” 시린 하늘 저편으로 소리개가 날아가고, 싱싱한 물고기가 고요한 연못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율곡에 있어 생명의 움직임은 창조적 생명력의 생생한 자발성을 구현하고 있다. 이 테제는 송대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율곡에게 있어서도 영원의 철학을 받치는 주춧돌이었다. 율곡은 우선 절대의 지평이 일차적으로 자아의 고착을 풀어냄으로써 펼쳐진 실상의 자유로운 공간임을 확인한다. 그때 세계는 존재(色)나 비존재(空)라는 인식의 구성물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자아에서 해방된 ‘우주적’ 에너지는 그 자체 절대의 지평을 확보한다. 그가 인용한 이 《시경(詩經)》의 한마디가 바로 그 지평을 선명한 상징으로 언표하고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자아의 개입이나, 인식의 왜곡이 개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우주적 창조력, 그 순수의 발양뿐! 이것은 인간의 에너지가 단편화나 고착이 없을 때 본원적 우주적 공능과 구분될 수 없다는 불교의 전제와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리고자 하는 근본 소식에 있어 불교와 유교의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불교적 진실이 유가적 지평에 포괄된다는 율곡의 단언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여 이젠 알겠다. 율곡이 앞의 (9)에서 불교의 방편론을 절대가 아닌 상대적 지평으로 끌어내린 까닭이 ‘악의’나 ‘왜곡’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율곡은 불교가 지향하고 있는 절대적 지평의 가치를 인정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를 말하는 언어가 또한 ‘억압’이 아니라 ‘암시’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짐짓’ 딴지를 건 것은 절대적 지평과 언어와의 관계가 불교적 전통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혹은 그보다 탁월한 형식으로’ 유교 내부에서도 천양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유교가 말하는 이상적 인격, 그를 통해 증현되는 세계 또한 ‘언어’를 빌리고 있지만, 실상은 언어의 제약을 벗어난 절대적 화해의 지평임을 확신하고 자부했다.
앞에서 그가 불교의 이상과 목표는 유교 안에 포섭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인간성의 절대적 가치가 맹자의 성선론에 집약되어 있고, 요순이라는 모델에 구체화되어 있다고도 주장한 바 있다. 그만하면 알아들었을 텐데도(?) 노승이 알아듣지 못하고 ‘비심비불’로서 불교의 절대적 지평을 내세우자 율곡이 불퉁스럽게 시비를 건 것이다. 지금 든 ‘연비어약’은 그 시비의 본론이다. 즉 유교가 ‘일상성’의 언어를 말하고 있지만 그 언어를 통해 노리고 있는 것은 ‘상대적’ 지평이 아니라 해방된 ‘절대적’ 공간이라는 것! 그것을 좀 깨우쳐 주십사하는 것이다.
요컨대 율곡이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은 이렇다. “절대적 지평은 언어에 의해 오염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에서든 유교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노승께서는 자꾸만 불교적 인식에서만 절대적 지평이 확보될 수 있다고 우기시는데 그것은 유교를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교는 언제나 일상적 ‘언어’로 말하지만 그를 통해 노리는 것은 ‘상대’가 아닌 ‘절대’입니다. 그 절대는 ‘일상성’을 떠나지 않기에 오히려 불교보다 훨씬 차원이 높습니다. 제가 불교를 떠나 유교로 향하는 근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고, 아울러 노승을 설득시키려는 근본적 동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승께서는 유가 언어의 ‘일상성’을 표면적 상대적 ‘이분’의 차원에서만 바라보시는데 언어는, 앞에서 말했듯이, 그 자체로는 분열(vicalpa)의 언어인지 해방(moksa)의 언어인지를 ‘즉자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해방’과 ‘절대’를 말하는 언어조차도 그렇습니다. 초월적 지평을 말하는 ‘비색비공’도 상대와 구속의 언어로 기능할 수 있고, 일상적 언표인 ‘연비어약’도 절대와 해방의 공간에 대한 찬가일 수 있습니다.”
(12) 노승: “非色非空是眞如體也. 豈此詩之足比.”
그런데 노승은 ‘연비어약’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선 율곡의 전략적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율곡의 예증을 흔히 일상적 시야에 들어올 수 있는 단순한 사건의 기술로만 보았던 것이다. 단순하지 않더라도 일상적 표현은 서정적이든 서사적이든 특정한 감정의 고양이나 집중된 의식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고 그것은 예외없이 상대적 인식의 지평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것은 세계의 왜곡, 즉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상상적 구성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승은 말한다.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님은 진여(眞如)의 체(體)요, 이런 시로 어떻게 빗댈 수 있단 말이오.” 다시 말하면 모든 상대적 지평이 탈각한 절대의 세계를 어찌 이런 시시한 시로 비유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진여(眞如)의 체(體)란 《대승기신론》의 어법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불교에 관해 논한 바를 궁극적으로 긍정의 자리에서 논한 불교대승의 가장 발전된 단계에 속하는 경전이다. 진여란 ‘본래 그러하다’는 뜻이고 체란 모종의 에너지의 중심이 있음을 알리는 말이다. ‘본래 그러하다(眞如)’란 말은 ‘다만 이렇게’라는 여여(如如)와 동의어로서 세계가 자아에 의해 개입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는 모습을 알리자는 말이다.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 그 진여의 체는 이제 자아에 의해 구성된 것도 아니고, 자아에 의해 편향된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고유한 활동으로 드러난다. 그 모습은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자아에 의해 인식작용에 의해 구성된 객관이 아닌 절대객관의 세계, 즉 법계(法界)이다.
이 세계가 펼쳐나가는 모습이 얼마나 장엄한가를 읽으려는 사람은 화엄의 바다에 한번 들어가 보라. 그것은 선가의 표현을 빌면, ‘내가 우물을 보는 세계가 아니라 우물이 나를 보는’ 세계이고, ‘진흙으로 만든 소가 장강을 건너고’, ‘줄 없는 거문고가 산조를 타는’, 상대적 이성이 발붙이지 못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인간이성의 편협함, 상대적 인식의 불완전성에 대한 깊은 자각과 그를 벗어나려는 고된 수련의 결과 증득되는 세계이다. 노승은 의아하게 되묻는다. 도대체 이 같은 절대해방의 ‘법계 法界’를 어떻게 솔개나 물고기를 읊은 천박한(?) 시에 끌어댈 수 있느냐는 것이다.
(13) 율곡: “笑曰, 旣有言說便是境界, 何謂體也. 若然則儒家妙處不可言傳, 而佛氏之道不在文字外也”
앞에서 진리를 말하는 언어의 이중적 특성을 살펴보았다. 이 특성으로 하여 노승은 율곡의 덫에 걸렸다. 율곡은 말한다. “언어를 거쳤다면 이미 상대적 인식의 지평으로 떨어진 것이다. 색(色)이니 공(空)이니 진여체(眞如體)니는 물론, 팔만대장경의 장광설이 모두 방편적 입설이고, 그것은 진여체를 곧바로 지시해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그것이 지시하고자 하는 바와의 거리를 숙명으로 안고 있다. 개념은 이미지에 의존하고 이미지는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율곡은 이 같은 전제에서 결국 이미지를 통해 실재에 다가설 수 없는 것은 불교나 유교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유교 역시 성현의 내면적 진실은 언어로 전달할 수 없다. 안회(顔回)가 공자를 평해, “우러르면 더욱 높고 앞인가 하면 뒤이며, 절벽같이 우뚝 서서 절망감을 안겨준다”는 그 진실은 불교가 진여(眞如)의 체(體)와 용(用)을 구성적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양상이다. 지금 인용한 소리개의 비상과 물고기의 약동 역시 그렇다. 그 시는 소리개와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의 내적 정신의 풍경에 일차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바, 소리개와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는 자신 속에 아무런 갈등을 존치하지 않음으로써 외적 대상과의 일체감을 누리고 있고 그것은 우주적 의미를 띠고 있다. 거기서 주관 혹은 에고는 사라진다.
이 자리는 유가의 이상인 천인합일(天人合一), 장자(莊子)의 표현을 빌면, 천지여아병생(天地與我竝生) 만물위아일체(萬物爲我一體)의 경지, 장재(張載)가 기(氣)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곳, 그리고 주자가 이(理)와 성(性)과 인(仁)을 통합시키고 그것을 우주의 본원력인 원형이정(元亨利貞)과 등치시켜 알리고자 했던 곳이다. 율곡은 여기서 불교의 진리뿐만 아니라 유교의 궁극적 이념까지 선명히 통관했다.
그의 나이 겨우 열아홉이었지만 왕필(王弼)이 불후의 명작, 역전(易傳)과 노자주(老子注)를 쓴 때가 지금 율곡보다 한 살 어렸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율곡은 유교의 대강(大綱)을 읽었다. 그 이념을 보다 정련하게 체계화하고 구체적 현실에서 실현해나가는 것은 앞으로의 세월을 기다린다 해도 근본적 방향과 지취에 대해 자신을 정위하는 각성은 연령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는 이 몇 해 동안 남다른 사상적 방황과 정신적 편력을 겪고 있었고 노승과의 문답은 그 순례의 한 매듭을 증거하고 있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14) 노승: “愕然, 執我手曰...爲我賦詩.”
노승은 앞에 선 애숭이 선비의 식견이 범용하지 않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불교는 그렇다 하고 유교의 진리가 불교적 이상과 합치하며 오히려 그보다 고차원의 것이다? 노승은 대체 네가 자부하고 있는 유교의 진리, 그 구체적 표현인 연비어약이 무슨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지 시로 한번 읊어 보라는 주문을 던진다. 노승은 율곡이 단숨에 써 준 시를 일별하고는 소매 속에 넣고 돌아누워 버린다. 이를 보건대 노승은 선비의 자만(?)을 전폭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은 듯하다.
율곡이 며칠 뒤 암자를 다시 찾았을 때 노승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없었다. 이는 노승이 유가의 진실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수도승의 일상적 패턴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율곡이 써 준 시는 노승에게서보다 그 자신에게 보다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율곡이 이른 모종의 통찰, 그리고 이제 나아갈 정신적 지표를 상징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물고기 뛰고 소리개 날아 아래 위가 한가지 魚躍鳶飛上下同
이는 색(色)도 아니오 공(空)도 또한 아닌 것 這般非色亦非空
무심히 한번 웃고 내 몸을 둘러보니 等閒一笑看身世
노을지는 숲, 나무들 사이에 홀로 선 나 獨立斜陽萬木中\
4. 허명에서 중용으로
노승과의 문답은 앞으로 전개될 율곡 철학의 향방을 예고하는 상징, 혹은 전주곡이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는 그가 생각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창조적 에너지의 인간적 발현을 둘러싼 제약과 해방의 전 구도를 짐작하게 해 준다. 나는 위의 에피소드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나아가 그와 불교와의 대면을 빼버리고서는 그의 독특한 이기(理氣) 철학을 적절히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율곡이 금강산을 유력하던 시절, 함께 지내던 지정(智正)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산을 내려온 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는데 그가 어느날 불쑥 산사에서 책을 읽고 있던 율곡을 방문했다. 밤새 회포를 나눈 다음날, 떠나는 그에게 율곡은 지난 시절의 감회와 더불어, “불교에서 유교에로 전회”를 권유하는 은근한 뜻을 시에 담아 보냈다. 산을 내려온 뒤 5년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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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옥 총채 휘두르며 시비(異同)을 가렸지만 時揮玉辨異同,
논쟁의 끝은 언제나 뒤엉킨 실타래였네 談邊矛盾紛縱橫.
안타깝게도 대사의 미혹은 그대로여서 憐師惑志未曾變,
큰 길 버려두고 샛길을 찾는구려 不遵大路求捷徑.
법륜(法輪)도 심인(心印)도 본래 징표가 없거니 法輪心印本無徵,
삼계(三界)와 육도(六道)를 누가 증거하리오 三界六道誰汝證?
우리 유가에 진정한 즐거움의 경지 있어 吾家自有眞樂地,
외물(外物)을 끊지 않고 능히 성(性)을 기른다네 不絶外物能養性.
고원을 찾고 특이를 세우는 것은 모두 중(中)이 아니라 求高立異摠非中
스스로를 돌이켜 성(誠)이라면 거룩함(聖)에 이를 수 있다오 反身而誠可醒(成)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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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인 지정에게 주다(贈山人智正)」, 《전서》 1-p.71.)
율곡은 진리란 인간사의 일상성, 즉 외물(外物)이 구성하는 상황성과 그 상황이 제기하는 요청에 대처하는(respond) 인간의 에너지(性)의 종합적 필드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고 말한다. “외물(外物)을 끊지 않고 성(性)을 기른다(不絶外物能養性)!” 이것이 율곡 철학의 지반이다. 유교의 중심인 중용은 각자가 선 자리에서, 그의 인간 관계의 지반 위에서 주어진 상황적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라고 가르친다. “소기위이행(素其位而行)!” 이것이 인간의 길인데, 율곡은 불교가 이 원리(理)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는 인간의 일을 다음 두 가지로 요약했다. 1) 소극적으로는 자기 속의 원리(性卽理)를 가리고 있는 기질(氣質)의 왜곡을 교정하고 방해물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2) 자기 내부의 원리를 일상의 다양한 관계와 맡은 직무에서 적극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 둘 가운데 하나가 빠져도 인간의 일은 완성되지 않는다. 율곡은 불교가 첫 번째 일에는 유효했으되, 두 번째 원리는 아무래도 소홀히 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가 금강산을 들어섰다가 다시 하산하여 유학으로 돌아온 소이(所以)이다.
그 하산의 의미는 요약하자면, 무위(無爲)에서 유위(有爲)로, 혹은 소요(逍遙)에서 중용(中庸)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길이 ‘자유’가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 혹은 “자유는 오직 책임 속에서만 구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자각이 그를 절망적 상황에도 언제나 정치적 공간, 사회적 역할에로 나아가고자 한 동력이었고, 아울러 그의 독특한 이기(理氣) 해석도 이 같은 자기 정위의 기반 위에 세워진 철학적 건축물이다.
출처 http://budrevie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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