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Posted by 히키신
2016. 12. 15. 16:59 Poetry#1

김수영 전집 – 1. 시 , 민음사, 1981

<웃음>

웃음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서러운 것일까
푸른 목
귀여운 눈동자
진정 나는 기계주의적 판단을 잊고 시들어갑니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좋지 않아요
웃고 있어요
그것은 그림
토막방 안에서 나는 우주를 잡을 듯이 날뛰고 있지요
고운 신(神)이 이 자리에 있다면
나에게 무엇이라고 하겠나요
아마 잘 있으라고 손을 휘두르고 가지요
문턱에서.
이보다 더 추운 날처럼 나는 여기서 겨울을 맞이하다가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도
이 웃음만은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
시간에 달린 기이다란 시간을 보시오
내가 어디라고 한탄하지 마시오
나는 내 가슴에
또 하나의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1948>



<풍뎅이>

너의 앞에서는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았다
백년이나 천년이 결코 긴 세월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사랑의 테두리 속에 끼여 있기 때문이 아니리라
추한 나의 발빝에서 풍뎅이처럼 너는 하늘을 보고 운다
그 넓은 등판으로 땅을 쓸어가면서
늬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추악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도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 안다
너의 이름과 너와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질 때까지
소금 같은 이 세계가 존속할 것이며
의심할 것인데
등 등판 광택 거대한 여울
미끄러져가는 나의 의지
나의 의지보다 더 빠른 너의 노래
너의 노래보다 더한층 신축성이 있는
너의 사랑

<시골 선물>

종로 네거리도 행길에 가까운 일부러 떠들썩한 찻집을 택하여 나는 앉아 있다
이것이 도회 안에 사는 나로서는 어디보다도 조용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의 반역성을 조소하는 듯이 스무 살도 넘을까 말까 한 노는 계집애와 머리가 고슴도치
처럼 부스스하게 일어난 쓰미에리의 학생복을 입은 청년이 들어왁서 커피니 오트밀이니 사과니
어수선하게 벌여놓고 계통 없이 처먹고 있다
신이라든지 하느님이라든지가 어디 있느냐고 나를 고루하다고 비웃은 어제저녁의 술친구의 천박
한 머리를 생각한다
그것은 갈색 낙타 모자
그리고 유행에서도 훨씬 뒤떨어진 서울의 화려한 거리에서는 도저히 쓰고 다니기 부끄러운 모자
이다
거기다가 나의 부처님을 모신 법당 뒷산에 묻혀 있는 검은 바위 같이 큰 머리에는 둘레가 작아서
맞지 않아 그 모자를 쓴 기분이란 쳇바퀴를 쓴 것처럼 딱딱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시골이라고 무관하게 생각하고 쓰고 간 것인데 결국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서울에 돌아온 지 일주일도 못 되는 나에게는 도회의 소음과 광증(狂症)과 속도와 허위가 새삼스
러웁게 미웁고 서글프게 느껴지고
그러할 때마다 잃어버려서 아까웁지 않은 잃어버리고 온 모자 생각이 불현듯이 난다
저기 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먹고 떠들고 웃고 있는 여자와 젊은 학생을 내가 시골을 여행하기
전에 보았더라면 대하였으리 감정과는 다른 각도와 높이에서 보게 되는 나는 내 자신의 감정이
보다 더 거만하여지고 순화되어진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구태여 생각하여 본다
그리고 비교하여 본다
나는 모자와 함께 나의 마음의 한 모퉁이를 모자 속에 놓고 온 것이라고
설운 마음의 한 모퉁이를. <1954>

<꽃2>

꽃은 과거와 또 과거를 향하여
피어나는 것
나는 결코 그의 종자(種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설움의 귀결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설움이 없기 때문에 꽃은 피어나고

꽃이 피어나는 순간
푸르고 연하고 길기만 한 가지와 줄기의 내면은
완전한 공허를 끝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중단과 계속과 해학이 일치하듯이
어지러운 가지에 꽃이 피어오른다
과거와 미래에 통하는 꽃
견고한 꽃이
공허의 말단에서 마음껏 찬란하게 피어오른다 <1956>

<파밭 가에서>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1959>

<싸리꽃 핀 벌판>

피로는 도회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
푸른 연못을 넘쳐흐르는 장마통의
싸리꽃 핀 벌판에서
나는 왜 이다지도 피로에 집착하고 있는가
기적소리는 문명의 밑바닥을 가고
형이상학은 돈지갑처럼
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1959. 9. 1>

<미스터 리에게>

그는 재판관처럼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구제의 길이 없는 사물의 주위에 떨어지는
태양처럼 판단을 내린다 ㅡ 월트 휘트먼

나는 어느 날 뒷골목의 발코니 위에 나타난
생활에 얼이 빠진 여인의 모습을 다방의 창 너머로 별견(瞥見)하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쪽지를 미스터 리한테 적어놓고
시골로 떠났다

『태양이 하나이듯이
생활은 어디에 가보나 하나이다
미스터 리!

절벽에 올가가 돌을 차듯이
생활을 아는 자는
태양 아래에서
생활을 차 던진다
미스터 리!

문명에 대항하는 비결은
당신 자신이 문명이 되는 것이다
미스터 리!』 <1959>

<하……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라스나 리처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릿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혈투』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세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그림자가 없다

하……그렇다……
하……그렇지……
아암 그렇구말구……그렇지 그래……
응응……응……뭐?
아 그래……그래 그래. <1960. 4. 3>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라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세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1960. 6. 15>

<<4. 19> 시>

나는 하필이면
왜 이 시(詩)를
잠이 와
잠이 와
잠이 와 죽겠는데

지금 쓰려나
이 순간에 쓰려나
죄수들의 말이
배고픈 것보다도
잠 못 자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해서
그래 그러나
배고픈 사람이
하도 많아 그러나
시 같은 것
시 같은 것
안쓰려고 그러나
더구나
<4. 19> 시 같은 것
안 쓰려고 그러나

껌벅껌벅
두 눈을
감아가면서
아주
금방 곯아떨어질 것
같은데
밥보다도
더 소중한
잠이 안 오네
달콤한
달콤한
잠이 안 오네
보스토크가
돌아와 그러나
세계정부 이상(理想)이
따분해 그러나
이 나라
백성들이
너무 지쳐 그러나
별안간
빚 갚을 것
생각나 그러나
여편네가
짜증 낼까
무서워 그러나
동생들과
어머니가
걱정이 돼 그러나
참았던 오줌 마려
그래 그러나

시 같은 것
시 같은 것
써보려고 그러나
<4. 19> 시 같은 것
써보려고 그러나 <1961. 4. 14>

<격문(檄文) – 신귀거래 2>

마지막의 몸부림도
마지막의 양복도
마지막의 신경질도
마지막의 다방도
기나긴 골목길의 순례도
<어깨>도
허세도
방대한
방대한
방대한
모조품과
막대한
막대한
막대한
막대한
모방도
아아 그리고 저 도봉산보다도
더 큰 증오도
굴욕도
계집애 종아리에만
눈이 가던 치기(稚氣)도
그밖의 무수한 잡동사니 잡념까지도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농부의 몸차림으로 갈아입고
석경을 보니
땅이 편편하고
집이 편편하고
하늘이 편편하고
물이 편편하고
앉아도 편편하고
서도 편편하고
누워도 편편하고
도회와 시골이 편편하고
시골과 도회가 편편하고
신문이 편편하고
시원하고
버스가 편편하고
시원하고
하수도가 편편하고
시원하고
펌프의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온다고
어머니가 감탄하니 과연 시원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
인제 정말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
시원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
이건 진짜 시원하고
이 시원함은 진짜이고
자유다 <1961. 6. 12>

<모르지? – 신귀거래 5>

이태백이가 술을 마시고야 시작(詩作)을 한 이유,
모르지?
구차한 문밖 선비가 벽장문 옆에다
카잘스, 그람, 슈바이처, 앱스타인의 사진을 붙이고 있는 이유,
모르지?
노년에 든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연애시를 쓰는 이유,
모르지?
우리집 식모가 여편네가 외출만 하면
나한테 자꾸 웃고만 있는 이유,
모르지?
그럴 때면 바람에 떨어진 빨래를 보고
내가 말없이 집어 걸기만 하는 이유,
모르지?
함경도 친구와 경상도 친구가 외국인처럼 생각돼서
술집에서는 반드시 표준어만 쓰는 이유,
모르지?
5월 혁명 이전에는 백양을 피우다
그 후부터는
아리랑을 피우고
와이셔츠 윗호주머니에는 한사코 색수건을 꽂아 뵈는 이유,
모르지?
아무리 더워도 베와이셔츠의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넣지 않는 이유,
모르지?
아무리 혼자 있어도 베와이셔츠의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넣지 않는 이유,
모르지?
술이 거나해서 아무리 졸려도
의젓한 포즈는
의젓한 포즈는 취하고 있는 이유,
모르지?
모르지? <1961. 7. 13>

<예지>

바늘구멍만한 예지(叡智)를 바라면서 사는 자의 설움이여
너는 차라리 부정한 자가 되라
오늘
이 헐벗은 거리에 가슴을 대고
뒤집어진 부정이 정의가 되지 않더라도

그러면 너의 벗들과
너의 이웃사람들의 얼굴이
바늘구멍 저쪽에 떠오르리라
축소와 확대의 중간에 선 그들의 얼굴
강력과 기도가 일체가 되는 거리에서
너는 비로소 겸허를 배운다

바늘구멍만한 예지의 저쪽에 사는 사람들이여
나의 현실의 메트르여
어제와 함께 내일에 사는 사람들이여
강력한 사람들이여…… <1957>

<서시>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成長)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
정리(整理)는
전란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그리고 교훈은 명령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지지한 노래를
더러운 노래를 생기 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1957>

<비>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榮譽)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 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鷄舍) 위에 울리는 곡괭이 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ㅡ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음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1958>

<생활>

시장거리의 먼지 나는 길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처럼
솟아오른 놈

(유년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 웃는다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1959. 4. 30>

<달밤>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밤거리를 방황할 필요가 없고
착잡한 머리에 책을 집어들 필요가 없고
마지막으로 몽상을 거듭하기도 피곤해진 밤에는
시골에 사는 나는ㅡ
달 밝은 밤을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 보다
나는 커단 서른아홉 살의 중턱에 서서
서슴지 않고 꿈을 버린다

피로를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슬픈 일이다
밤이여 밤이여 피로한 밤이여 <1959. 5. 22>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세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1960. 6. 15>
<이놈이 무엇이지? ㅡ신귀거래 9>

여행을
안 한다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도 없다
밀모(密謀)는
전혀 없다
담배마저 안 피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성급해지면 아무 데나 재를 떠는
이 우주의 폭력마저
없어질지도 모른다
정적(靜寂)이
필요 없다
그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다
낚시질도
안 간다
가장(假裝) 파티에
가본 일도 없다
하물며
중립사상연구소에는
그림자도 비친 일이 없다
뇌물은
물론 안 받았다
가지고 있는
시계도 없다
집에도
몸에도
그러니까
The reason why
You don’t get
A clock
Or
A watch마저
말할 필요가 없다
집에도
몸에도
이놈이 무엇이지? <1961. 8. 25>

<아픈 몸이>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골목을 돌아서
베레모는 썼지만
또 골목을 돌아서
신이 찢어지고
온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는데
또 골목을 돌아서
추위에 온몸이
돌같이 감각을 잃어도
또 골목을 돌아서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는
그 무수한 골목이 없어질 때

(이제부터는
즐거운 골목
그 골목이
나를 돌리라
ㅡ아니 돌다 말리라)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나의 발은 절망의 소리
저 말(馬)도 절망의 소리
병원 냄세에 휴식을 얻는
소년의 흰 볼처럼
교회여
이제는 나의 이 늙지도 젊지도 않은 몸에
해묵은
1,961개의
곰팡내를 풍겨 넣어라
오 썩어가는 탑
나의 연령
혹은
4,294알의
구슬이라도 된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1961>

<백지에서부터>

하얀 종이가 옥색으로 노란 하드롱지가
이 세상에는 없는 빛으로 변할 만큼 밝다
시간이 나비모양으로 이 줄에서 저 줄로
춤을 추고
그 사이로
4월의 햇빛이 떨어졌다
이런 때면 매년 이맘때쯤 듣는
병아리 우는 소리와
그의 원수인 쥐 소리를 혼동한다

어깨를 아프게 하는 것은
노후(老朽)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개울과 개울 사이에
하얀 모래를 골라 비둘기가 내려앉듯
시간이 내려앉는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두통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바다와 바다 사이에
지금의 3월의 구름이 내려앉듯
진실이 내려앉는다

하얀 종이가 분홍으로 분홍 하늘이
녹색으로 또 다른 색으로 변할 만큼 밝다
ㅡ그러나 혼색(混色)은 흑색이라는 걸 경고해 준 것은
소학교 때 선생님…… <1962. 3. 18>

<장시 2>

시금치밭에 거름을 뿌려서 파리가 들끓고
이틀째 흐린 가을날은 무더웁기만 해
가까운 데에서 나는 인성(人聲)도 옛날이야기처럼
멀리만 들리고
눈은 왜 이리 소경처럼 어두워만 지나
먼 데로 던지는 기적소리는
하늘끝을 때리고 돌아오는 고무공
그리운 것은 내 귓전에 붙어 있는 보이지 않는 젤라틴지(紙)
ㅡ나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재산처럼
외계의 소리를 여과하고 채색해서
숙제처럼 나르 괴롭히고 보호한다

머리가 누렇게 까진 땅주인은 어디로 갔나
여름저녁을 어울리지 않는 지팡이를 들고
이방인처럼 산책하던 땅주인은
ㅡ나도 필경 그처럼 보이지 않는 누구인가를
항시 괴롭히고 있는 보이지 않는 고문인(拷問人)
시대의 숙명이여
숙명의 초현실이여
나의 생활의 정수(定數)는 어디에 있나

혼미하는 아내며
날이 갈수록 간격이 생기는 골육들이며
새가 아직 모여들 시간이 못 된 늙은 포플러나무며
소리 없이 나를 괴롭히는
그들은 신의 고문인건가
ㅡ어른이 못 되는 나를 탓하는
구슬픈 어른들
나에게 방황할 시간을 다오
불만족의 물상(物象)을 다오
두부를 엉기게 하는 따뜻한 불도
졸고 있는 잡초도
이 무감각의 비애가 없이는 죽은 것

술 취한 듯한 동네아이들의 함성
미쳐돌아가는 역사의 반복
나무뿌리를 울리는 신의 발자국소리
가난한 침묵
자꾸 어두워가는 백주의 활극
밤보다도 더 어두운 낮의 마음
시간을 잊은 마음의 승리
환상이 환상을 이기는 시간
ㅡ대시간(大時間)은 결국 쉬는 시간 <1962. 10. 3>

<전향기(轉向記)>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소련한테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얼마전까지는
흰 원고지 뒤에 낙서를 하면서
그것이 그럴듯하게 생각돼서
소련을 내심으로도 입밖으로도 두둔했었다
ㅡ당연한 일이다

소련을 생각하면서 나는 치질을 앓고 피를 쏟았다
일주일 동안 단식까지 했다
단식을 하고 나서 죽을 먹고
그 다음에 밥을 떡국을 먹었는데
새삼스럽게 소화불량증이 생겼다
ㅡ당연한 일이다

나는 지금 일본 시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너무 자연스러운 전향을 한 데 놀라면서
이 이유를 생각하려 하지만
그 이유는 시가 안 된다
아니 또 시가 된다
ㅡ당연한 일이다

<히시야마 슈조>의 낙엽이 생활인 것처럼
5.16 이후의 나의 생활도 생활이다
복종의 미덕!
사상까지도 복종하라!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이 말을 들으면 필시 웃을 것이다
ㅡ당연한 일이다

지루한 전형의 고백
되도록 지루할수록 좋다
지금 나는 자고 깨고 하면서 더 지루한
중공(中共)의 욕을 쓰고 있는데
치질도 낫기 전에 또 술을 마셨다
ㅡ당연한 일이다 <1962>

<후란넬 저고리>

낮잠을 자고 나서 들어보면
후란넬 저고리도 훨씬 무거워졌다
거지의 누더기가 될락 말락 한
저놈은 어제 비를 맞았다
저놈은 나의 노동의 상징
호주머니 속의 소눈깔만한 호주머니에 들은
물뿌리와 담배 부스러기의 오랜 친근
윗호주머니나 혹은 속호주머니에 들은
치부책 노릇을 하는 종이쪽
그러나 돈은 없다
ㅡ 돈이 없다는 것도 오랜 친근이다
ㅡ 그리고 그 무게는 돈이 없는 무게이기도 하다
또 무엇이 있나 나의 호주머니에는?
연필쪽!
옛날 추억이 들은 그러나 일년 내내 한번도 펴본 일이 없는
죽은 기억의 휴지
아무것도 집어넣어본 일이 없는 왼쪽 안호주머니
ㅡ 여기에는 혹시 휴식의 갈망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ㅡ 휴식의 갈망도 나의 오랜 친근한 친구이다…… <1963. 4. 29>

<돈>

나에게 30원이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대견하다
나도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무수한 돈을 만졌지만 결국은 헛 만진 것
쓸 필요도 없이 한 3,4일을 나하고 침식을 같이한 돈
ㅡ 어린 놈을 아귀라고 하지
그 아귀란 놈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집어갈 돈
풀방구리를 드나드는 쥐의 돈
그러나 내 돈이 아닌 돈
하여간 바쁨과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나하고 같이한 돈
바쁜 돈ㅡ
아무도 정시(正視)하지 못한 돈ㅡ돈의 비밀이 여기 있다 <1963. 7. 1>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ㅡ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 10>

<시>

신앙이 동(動)하지 않는 건지 동하지 않는 게
신앙인지 모르겠다

나비야 우리 방으로 가자
어제의 시를 다시 쓰러 가자 <1964>

<강가에서>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소인이 돼간다
속돼간다 속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1964. 6. 7>

<말>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寒氣)도 내 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 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 버렸다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1964. 11. 16>

<65년의 새해>

그때 너는 한 살이었다
그때 너는 한 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그때 너는 여섯 살이었다
그때 너는 여섯 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그때 너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때 너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너의 의지는 싹트기 시작했다
너의 의지는
학교 안에서 배운 모든 것이
학교 밖에서 본 모든 것이
반드시 정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의 어린 의사를 발표할 줄 알았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너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때 너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너의 근육은 굳어지기 시작했다
너의 근육은
학교 밖에서 얻어맞은 모든 것이
골목길에서 얻어맞은 모든 것이
반드시 정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의 어린 행동은
어린 상징을 면하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우리 키만큼 되었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는 이제 열아홉 살이었다
너는 이제 열아홉 살이었다
너는 여전히 기적이었다
너의 회의는 굳어가기 시작했다
너의 회의는
나라 안에서 당한 모든 것이
나라 밖에서 당한 모든 것이
반드시 정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의 어린 포부는
불가능의 한계를 두드려보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우리 키보다도 더 커졌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는 이제 스무 살이다
너는 이제 스무 살이다
너는 여전히 기적일 것이다
너의 사랑은 익어가기 시작한다
너의 사랑은
38선 안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
38선 밖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
전혀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는 너의 힘을 다해서 답쌔버릴 것이다
너의 가난을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가난을
이 엄청난 어려움을 고통을
이 몸을 찢는 부자유를 부자유를 나날을……
너는 이제 우리의 고통보다도 더 커졌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니 네가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란다
네가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란다
65년의 새 얼굴을 보고
65년의 새해를 보고 <1965 연두시(年頭詩)>
<적 1>

우리는 무슨 적이든 적을 갖고 있다
적에는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
지금의 적이 제일 무거운 것 같고 무서울 것 같지만
이 적이 없으면 또 다른 적ㅡ내일
내일의 적은 오늘의 적보다 약할지 몰라도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으로 내일의 적을 쫓으면 되고
내일의 적으로 오늘의 적을 쫓을 수도 있다
이래서 우리들은 태평으로 지낸다 <1965. 8. 5>

<적 2>

제일 피곤할 때 적에 대한다
바위의 아량이다
날이 흐릴 때 정신의 집중이 생긴다
신의 아량이다

그는 사지의 관절에 힘이 빠져서
특히 무릎하고 대퇴골에 힘이 빠져서
사람들과
특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련을 해체시킨다

시(時)는 쨍쨍한 날씨에 청량한 들에
환락의 개울가에 바늘 돋친 숲에
버려진 우산
망각의 상기(想起)다

성인(聖人)은 처를 적으로 삼았다
이 한국에서도 눈이 뒤집힌 사람들
틈에 끼여 사는 처와 처들을 본다
오 결별의 신호여

이조시대의 장안에 깔린 기왓장 수만큼
나는 많은 것을 버렸다
그리고 가장 피로할 때 가장 귀한
것을 버린다

흐린 날에는 연극은 없다
모든 게 쉰다
쉬지 않는 것은 처와 처들뿐이다
혹은 버림받은 애인뿐이다
버림받으려는 애인뿐이다
넝마뿐이다

제일 피곤할 때 적에 대한다
날이 흐릴 때면 너와 대한다
가장 가까운 적에 대한다
가장 사랑하는 적에 대한다
우연한 싸움에 이겨보려고 <1965. 8. 6>

<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965. 8. 28>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란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1965. 11. 4>

<이 한국문학사>

지극히 시시한 발견이 나를 즐겁게 하는 야밤이 있다
오늘밤 우리의 현대문학사의 변명을 얻었다
이것은 위대한 힌트가 아니니만큼 좋다
또 내가 <시시한> 발견의 편집광이라는 것도 안다
중요한 것은 야밤이다

우리는 여지껏 희생하지 않는 오늘의 문학자들에 관해서
너무나 많이 고민해 왔다
김동인, 박승희 같은 이들처럼 사재(私財)를 털어놓고
문화에 헌신하지 않았다
김유정처럼 그밖의 위대한 선배들처럼 거지짓을 하면서
소설에 골몰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덤핑 출판사의 20원짜리나 20원 이하의 고료를 받고 일하는
14원이나 13원이나 12원짜리 번역일을 하는
불쌍한 나나 내 부근의 친구들을 생각할 때
이 죽은 순교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우리의 주위에 너무나 많은 순교자들의 이 발견을
지금 나는 하고 있다

나는 광휘에 찬 신현대문학사의 시를 깨알 같은 글씨로 쓰고 있다
될 수만 있으면 독자들에게 이 깨알만한 글씨보다 더
작게 써야 할 이 고초의 시기의
보다 더 작은 나의 즐거움을 피력하고 싶다

덤핑 출판사의 일을 하는 이 무의식 대중을 웃지 마라
지극히 시시한 이 발견을 웃지 마라
비로소 충만한 이 한국문학사를 웃지 마라
저들의 고요한 숨길을 웃지 마라
저들의 무서운 방탕을 웃지 마라
이 무서운 낭비의 아들들을 웃지 마라 <1965. 12. 6>

<이혼 취소>

당신이 내린 결단이 이렇게 좋군
나하고 별거르 하기로 작정한 이틀째 되는 날
당신은 나와의 이혼을 결정하고
내 친구의 미망인의 빚보를 선 것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집문서를 넣고 6부 이자로 10만 원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10만원 중에서 5만 원만 줄까 3만 원만 줄까
하고 망설였지 당신보다도 내가 더 망설였지
5만 원을 무이자로 돌려보려고
피를 안 흘리려고 생전 처음으로 돈 가진 친구한테
정식으로 돈을 꾸러 가서 안 됐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이것을
하고 피를 안 흘리려고
피를 흘리되 조금 쉽게 흘리려고
저것을 하고 이짓을 하고 저짓을 하고
이것을 하고

그러다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에 다니는
나이 어린 친구한테서 편지를 받았지
그 편지 안에 적힌 블레이크의 시를 감동을 하고
읽었지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 그러나 완성하진 못했지

이것을 지금 완성했다 아내여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
어제 국회의장 공관의 칵테일 파티에 참석한
천사 같은 여류작가의 냉철한 지성적인
눈동자는 거짓말이다
그 눈동자는 피를 흘리고 있지 않다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지대(地帶)에는
중립이 없다
아내여 화해하자 그대가 흘리는 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그러기 위해서만
이혼을 취소하자 <1966. 1. 29>

*주 : 영문으로 쓴 블레이크의 시를 나는 이렇게 서투르게 의역했다. <상대방이 원수같이 보일 때 비로소 자신이 선(善)의 입구에 와 있는 줄 알아라.> (원주)
**주의 주 : 상대방은 곧 미망인이다. (원주)

<판문점의 감상>
31일까지 준다고 한 3만 원

29일까지는 된다고 하고 그러나 넉넉잡고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한 3만 원
이것을 받아야 할 사람은 1.4 후퇴 때 나온
친구의 부인
이것을 떼먹은 년은 우리 여편네가 든
계(契)의 오야가 주재하는
우리 여편네는 들지 않은 백만 원짜리
계의 멤버로 인형을 만들어 파는 년이라나
이 3만 원을 달러 이자라도 내서 갚아 달라고 대드는 바람에
집문서를 갖고 가서 무이자로 15개월만
돌려 달라고 우리가 강청한 사람은 이 돈을 받을 사람과 한 고향인 함경도 친구

이 돈이 31일까지 나올 가망성이 없다
전화를 걸어 보니 아직도 해결이 안 됐느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폼이 벌써 이상스럽다
이것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 생각을
그 마지막 대책을 나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고 있다
31일까지!

31일 오오 나의 판문점이여
벌판이여 암흑의 바보의
장막이여 이 돈은 원은 10월 말일이
기한이고
내 날짜로는 그것이 기한이고
38선의 날짜로는 8월 15일이 기한인데
3만 원을 돌려 달라고 우리가 부탁한 친구가
돈을 받을 1.4후퇴의 친구 부인하고
한 고향이라는 것을
31일까지 돌려 주겠다고 아니 29일까지
돌려 주겠다고 집문서를 가지고 간 친구에게
말한 것이 잘못이었나 보다
이것이 이남 사람인 우리 부부의 오산(誤算)이었나 보다
38선에 대한
또 한 해의 터무니없는 감상(感傷)이었다 보다
그렇지? <1966. 12. 30>

<사랑의 변주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쫓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넝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ㅡ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1967. 2. 15>

<꽃잎 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 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 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1967. 5. 7>

<여름 밤>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소음도 번쩍인다
여름은 이래서 좋고 여름밤은
이래서 더욱 좋다

소음에 시달린 마당 한구석에
철 늦게 핀 여름 장미의 흰구름
소나기가 지나고 바람이 불 듯
하더니 또 안 불고
소음은 더욱 번성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다 남은 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던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기 전 날
우리는 언제나 소음의 2층

땅의 2층이 하늘인 것처럼
이렇게 인정(人情)의 하늘이 가까워진
일이 없다 남을 불쌍히 생각함은
나를 불쌍히 생각함이라
나와 또 나의 아들까지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다 남은 날
땅에만 소음이 있는 줄만 알았더니
하늘에도 천둥이, 우리의 귀가
들을 수 없는 더 큰 천둥이 있는 줄
알았다 그것이 먼저 있는 줄 알았다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이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1967. 7. 27>

<먼지>

네 머리는 네 팔은 네 현재는
먼지에 싸여 있다 구름에 싸여 있고
그늘에 싸여 있고 산에 싸여 있고
구멍에 싸여 있고

돌에 쇠에 구리에 넝마에 삭아
삭은 그늘에 또 삭아 부스러져
거미줄이 쳐지고 망각이 들어앉고
들어앉다 튀어나오고

불이 튕기고 별이 튕기고 영원의
행동이 튕기고 자고 깨고
죽고 하지만 모두가 갱(坑) 안에서
참호 안에서 일어나는 일

사람의 얼굴도 무섭지 않고
그의 목소리도 방해가 안 되고
어제의 행동과 내일의 복수가 상쇄되고
참호의 입구의 ㄱ자가 문제되고

내일의 행동이 먼지를 쓰고 있다
위태로운 일이라고 낙반(落盤)의 신호를
올릴 수도 없고 찻잔에 부딪치는
차숟가락만한 쇳소리도 안 들리고

타면(惰眠)의 축적으로 우리 몸은 자라고
그래도 행동이 마지막 의미를 갖고
네가 씹는 음식에 내가 증오하지 않음이
내가 겨우 살아 있는 표시라

하나의 행동이 열의 행동을 부르고
미리 막을 줄 알고 미리 막아져 있고
미리 칠 줄 알고 미리 쳐들어가 있고
조우(遭遇)의 마지막 윤리를 넘어서

어제와 오늘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지고 침묵과 발악이 오늘과
내일처럼 달라지고 달라지지 않는
이 갱 안의 잉크 수건의 칼자국

증오가 가고 이슬이 번쩍이고
음악이 오고 변화의 시작이 오고
변화의 끝이 가고 땅 위를 걷고 있는
발자국소리가 가슴을 펴고 웃고

희화(戱畵)의 계시가 돈이 되고
돈이 되고 사랑이 되고 갱의 단층의 길이가
얇아지고 돈이 돈이 되고 돈이
길어지고 짧아지고

돈의 꿈이 길어지고 짧아지고 타락의
길이도 표준이 없어지고 먼지가 다시 생기고
갱이 생기고 그늘이 생기가 돌이 쇠가
구리가 먼지가 생기고

죽은 행동이 계속된다 너와 내가 계속되고
전화가 울리고 놀라고 놀래고
끝이 없어지고 끝이 생기고 겨우
망각을 실현한 나를 발견한다 <1967. 12. 15>

<성(性)>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1968. 1. 19>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테이블도 많으면
걸린다 테이블 밑에 가로질러놓은
엮음대가 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은
미제 자기(磁器) 스탠드가 울린다

마루에 가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옆에 놓은
찬장이 울린다 유리문이 울리고 그 속에
넣어둔 노리다케 반상 세트와 글라스가
울린다 이따금씩 강 건너의 대포소리가

날 때도 울리지만 싱겁게 걸어갈 때
울리고 돌아서 걸어갈 때 우리고
의자와 의자 사이로 비집고 갈 때
울리고 코 풀 수건을 찾으러 갈 때

38선을 돌아오듯 테이블을 돌아갈 때
걸리고 울리고 일어나도 걸리고
앉아도 걸리고 항상 일어서야 하고 항상
앉아야 한다 피로하지 않으면

울린다 시를 쓰다 말고 코를 풀다 말고
테이블 밑에 신경이 가고 탱크가 지나가는
연도(沿道)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 피로하지
않으면 울린다 가만히 있어도 울린다

미제 도자기 스탠드가 울린다
방정맞게 울리고 돌아오라 울리고
돌아가라 울리고 닿는다고 울리고
안 닿는다고 울리고

먼지를 꺼내는데도 책을 꺼내는 게 아니라
먼지를 꺼내는데도 유리문을 열고
육중한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울리고
울려지고 돌고 돌려지고

닿고 닿아지고 걸리고 걸려지고
모서리뿐인 형식뿐인 격식뿐인
관청을 우리집은 닮아가고 있다
철조망을 우리집은 닮아가고 있다

바닥이 없는 집이 되고 있다 소리만
남은 집이 되고 있다 모서리만 남은
돌움길만 남은 난삽한 집으로
기꺼이 기꺼이 변해 가고 있다 <1968. 4. 23>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