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왈도 에머슨 - 자연Nature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문학과 지성사, 1998
“바람과 파도는 항상 유능한 항해사의 편이다”
(Edward Gibbon(1737~1794). ‘로마제국 쇠망사’2, Ch.68에서 인용)
목차
자연 13~95
미국의 학자 95~133
초령
인간은 그 자신의 개별적 삶의 내부나 배후에 보편적 영혼이 존재함을 의식한다. 우리의 개인적 삶 속에는, 마치 창공 속에서첢, ‘정의’ ‘진리’ ‘사랑’ ‘자유’의 본성이 나타나 빛난다. 이 보편적 영혼을 인간은 ‘이성reason’이라고 부른다. 이성은 나의 것도, 너의 것도, 그의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 이성의 것이다. (...) 이 외따로 떨어진 지구를 그 안에 보듬고 있는 파란 하늘, 영원한 적요에 감싸여 있고 영원 불멸의 천체로 가득한 이 하늘, 그것이야말로 이성의 전형이다. 지성적으로 고찰하여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연과 관련하여 고찰하면서 우리는 영혼spirit이라고 부른다. 영혼은 창조자이다. 영혼은 그 자체속에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사람은 그것을 그의 언어에 체현하여 ‘아버지’라고 부른다.
-p39~40
상식을 함양하기 위해서 얼마나 지리한 훈련이 매일, 매년, 아니 끝없이 지속되는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성가신 일과 불편함과 딜레마가 되풀이하여 생기는가. 소인배들은 이러한 우리를 보고 얼마나 좋아하는가. 물건값을 놓고 얼마나 언쟁하고 이해 타산을 위한 저울질은 어떠한가. - 이 모두가 마음의 ‘손’을 만드는 데 봉사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르친다. “좋은 사상이라도 실천되지 않으면 좋은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p50~51
여기에서 특히, 우리ㅣ가 도처에서 마주치는 자연의 통일성-그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 뚜렷이 이해된다. 사물의 무한한 다양성은 모두 동일한 인상을 자아낸다. 크세노파네스는 노년에 이르러 어디를 돌아보더라도 만물은 서둘러 통일로 귀일된다고 토로하였다. 그는 형상의 지루한 변화 속에서 동일한 실체를 보는 데 싫증이 났던 것이다. 프로테우스Proteus의 우화야말로 결정적인 진리가 들어 있다. 하나의 나뭇잎, 하나의 물방울, 하나의 결정체, 한 순간,, 어느 것이든 전체와 관련되어 있고, 전체의 완성에 관여한다. 하나의 입자는 하나의 소우주로서 이 세계의 모습을 충실히 모사한다.
-p57
미켈란젤로는 건축가에게 해부학의 지식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를 들으면 가령 뱀, 사슴, 코끼리의 움직임이 연상될 뿐만 아니라, 푸른 초원의 색깔도 상상된다. 하모니를 이루는 음향의 규칙은 조화로운 배색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화강암이 그것을 마모시키는 강물과 차이가 나는 것은 다만 열을 받았느냐 아니냐일 뿐이다. 강은 흘러갈 때 그 위를 흐르는 공기와 같고, 공기는 한층 미묘한 흐름으로 자신을 가로지르는 빛과 유사하고, 빛은 우주 공간을 함께 여행하는 열과 닮았다. 각 창조물은 다른 창조물의 변형이다. 창조물간의 유사성이 차이점보다 훨씬 더 많고, 만물의 법칙은 그 근본에서는 한가지인 것이다. 한 예술의 규칙 혹은 한 조직의 원리는 자연 속에서 두루 통용된다. 이 일치는 지극히 친밀한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쉽사리 목격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연의 가장 깊은 내면에도 깃들여 있고, 보편적 영혼 속에 그 원천이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것은 또한 사고 속에도 스며 있다. 말로 표현하는 모든 보편적 진리는 다른 모든 진리를 함축하거나 상정한다. 모든 진리는 다른 진리와 조화를 이룬다 Omne verum vero consonat. 그것은 마치 모든 가능한 원들을 포함하는 한 원구상의 커다란 원 같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 가능의 원들도 마찬가지로 그려지면 그 커다란 원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모두 한 면으로 보면 절대적 실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수한 면을 가지고 있다.
-p58~59
8.전망
세계의 법칙과 사물의 윤곽에 관한 탐구에서 최고의 이성이 항상 가장 참된 것이다. 너무나 정련되어 있어서 그 가능성이 희미하게만 나타나는 것은 실상 여러 영원한 진리 중에서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종종 아련하고 몽롱하다. 경험적 과학은 사람의 시력을 흐리게 하기 쉽다. 그리하여 모든 기능과 과정에 대한 지식 그 자체로 인하여, 자연의 탐구자는 전체에 대한 인간적인 주시를 잃게 되는 수가 있다. 아는 자는 그래서 비시적이다. 그러나 모든 주의를 경건하게 모아 진리의 발견에 헌신하는 가장 박식한 박물학자일지라도, 그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배울 바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은 또한 이미 알려진 지식을 가감하거나 비교해서 배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누구에게서도 배울 수 없는 영혼의 돌진에 의해서, 그리고 부단한 자기 발견과 전적으로 겸허한 마음가짐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또한 탐구자에게 정확성이나 무오류성보다 훨씬 더 우수한 자질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는 때로는 논쟁의 여지없는 단정보다 추측이 보다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한 몽상이 백여 명이 합심하여 하는 실험보다도 더 깊이 자연의 비밀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p82~83
인간이 세계의 주인인 것은, 그가 그 안의 가장 오묘한 거주자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세계의 두뇌요 심장으로서, 모든 크고 작은 사물에서, 산간의 모든 지층에서, 그리고 관찰이나 분석의 결과로 드러나는 모든 새로운 색채의 법칙이나 천문학의 사실 혹은 대기의 영향 속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일면을 발견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신비의 자각으로 17세기의 아름다운 찬미가 작가였던 조지 허버트는 시적 영감에 고양되었다. 다음의 시는 인간에 대한 그의 단시의 일부이다.
인간은, 사지가 하나에서 열까지,
온 세계가 그 밖의 다른 세계와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균제미의 극치이다.
각 부분은 가장 멀리 떨어진 것도 형제라고 부른다.
머리는 발과 은밀한 친교를 맺고 있고,
그 둘은 또한 달과 조수와 친교를 맺기 때문이다.
인간이 포착하여 그의 인식의 대상으로 삼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눈은 가장 높이 떠 있는 별도 끌어내린다.
그 작은 몸 속에 온 세계가 깃들어 있다.
풀이 우리 육체를 혼연히 치료하는 것은
거기에서 자기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하여 바람은 불고,
대지는 휴식을 취하고, 하늘은 움직이고, 샘은 흐른다.
눈에 띄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은 없다.
모두가 우리의 기쁨이요, 우리의 재화이다.
세계 전체가 우리의 찬장이거나
우리의 오락실이다.
별은 우리를 침대로 인도한다.
밤은 커튼을 밀쳐 닫고, 해는 그것을 열어제친다.
음악과 빛이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만물이 아래로 내려와 존재할 때,
그것은 우리의 육신에 친근하고,
올라가 원인이 될 때에는 우리의 정신에 친근하다.
너무나 많은 하인이 인간을 시중들기에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의 모든 도정에서,
병으로 창백하고 여위었을 때, 자신을 친절하게 대한
모든 것들을 밟고서 지나간다.
오, 강렬한 사랑이여! 인간이 한 세계이고,
또 한 세계가 있어서 그를 시중들고 있구나.
-p84~86
그 기원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뜻밖의 지혜를 전해주는 우화 한 편이 있다. 이 우화에 ᄄᆞ르면, 신은 태초에 그 자신에게 보다 유용하도록 인간 Man을 사람들 Men로 나누었다. 그것은 마치 손이 한층 더 그 목적에 알맞도록 그것을 다섯 손가락으로 나눈 것과 같은 이치에서였다.
이 옛 우화는 언제나 새롭고 숭고한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 곧, 세계에는 유일자 One Man가 있는데, 그가 부분적으로 혹은 어떤 한 가지 능력을 통해 모든 개개인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전인(全人)을 찾으려면, 사회 전체가 합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은 농부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다. 이들 전부인 것이다. 인간은 목사이고, 학자이고, 정치가이고, 생산자이고, 또 병사이기도 하다. 이 분업화된 상태, 다시 말하면 이 사회적 상태에서, 이러한 직능들은 개개인에게 분배되어 있다. 개개인은 자신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공동 작업에서 자신이 맡은 몫을 다하고자 노력한다.
-> 정도전, ‘정보위’
이 우화는 또한 개개인이 자신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서는 종종 자신이 맡은 일로부터 벗어나 다른 모든 사람들을 품어 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근원적 인간, 이 힘의 원천은 너무 많은 사람에게 분배되었고 너무 세분된 나머지 물방울이 되어 흩어져 다시 합쳐 모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지가 몸체로부터 절단되어 무수한 괴물의 형상으로 뽐내고 다니는 것과 같다. 멋진 손가락, 목, 위, 팔꿈치는 있지만, 온전한 사람은 없다.
-> 이상(李箱)의 부채꼴 인간.
-p97~98
사색하는 인간이 아닌 사상가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또 책을 써낸다. 이처럼 단순히 재능만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하여 출발이 잘못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통찰한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통용되는 도그마로부터 출발하여 책을 써내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에 파묻혀 자란 온순한 젊은이들은 키케로나 로크 혹은 베이컨이 제공한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는다. 그들은 키케로, 로크, 베이컨이 이 책을을 썼을 때, 그들 역시 도서관에 파묻힌 젊은 청년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리하여 사색하는 인간 대신 책벌레가 생겨난다. 다시 말하여, 책을 순전히 책이라는 이유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책에 박식한 부류가 생겨난다. 그들은 책을 자연과 인간성에 관련된 사색으로서가 아니라, 세계, 영혼과 함께 그것으로 3부 회의를 구성한다. 이리하여 원문 확정자, 교정가, 그리고 각종 서적 수집광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책은 잘 사용하면 최상의 것이나, 오용하면 그것처럼 나쁜 것도 없다. 책의 바른 사용이란 무엇인가? 모든 수단이 효과를 얻고자 하는 그 유일한 목적은 무엇인가? 책은 오로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써만 쓸모가 있는 것이다. 책에 이끌려 자기 자신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의 체계를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위성이 되어버린다면 차라리 책을 읽지 않느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은 살아 움직이는 심령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심령을 가질 수 있다. 대두분의 사람들에게는 이에 이르는 길이 막혀 있어서 아직 현동화되어 있지 않지만, 사람은 누구나 이 살아 있는 심령이 그의 내부에 잠재해 있다. 이 생기 있는 심령이 절대적 진리를 보고 진리를 말하고 혹은 창조한다. 이러할 때에 그 심령은 천재성을 발휘한다. 천재는 결코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의 특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견실한 자산이다. 그 본질에 있어서 살아 있는 심령은 진보적이다. 책, 학교, 예술 유파, 그리고 제도는 어떤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과거의 천재가 토로한 생각에서 멈추어 있다. 이들은 말하자면, 이것이 좋다, 그러니 이것을 신봉하자고 말한다. 그들은 나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앞을 보지 않고 뒤를 보기만 한다. 그러나 천재는 앞을 바라본다. 인간의 눈은 머리의 뒤쪽이 아니라 이마에 달려 있다. 인간은 미래를 전망하고, 천재는 창조한다. 어떤 재능을 소유하고 있건간에, 인간이 창조하지 않는다면, 신성의 순수한 유출은 그의 것이 아니다-타다 남은 불기운이나 연기는 있을지 모르지만, 불꽃은 없다. 창조적인 태도, 창조적인 행동, 창조적인 말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태도, 행동, 말은 관습이나 권위의 흔적이 배어 있지 않고, 선과 아름다움에 대한 정신 그 자체의 감각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온 것이다.
-p104~105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광맥을 다 퍼내어 쓰고, 상찬할 만한 신중함으로 그리스나 팔레스타인으로 항해를 떠나거나, 수렵꾼을 따라 대초원으로 여행을 가기도 하고, 알제리의 변방을 소요하면서 재충전을 위하여 애쓰고 있다.
필요한 어휘 때문에서라도 학자는 행동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 한다. 생활이 곧 우리의 사전이다. 시골에서의 노동에, 도시에서, 무역과 제조업의 통찰에, 많은 남녀의 솔직한 교제를 나누면서, 과학에, 예술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모두 유용하다. 그것은 특히 우리가 지각한 바를 표현할 언어를 이 모든 사례를 통해 습득하는 그 한 가지 목적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나는 어떤 연사이든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궁핍이나 유창함으로 그가 어떻게 생활해왔는지 즉시 알아차린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석재 공사를 위하여 타일이나 기단석을 캐내는 채석장처럼 우리의 배후에 놓여 있다. 이것이 문법을 배우는 방법이기도 하다. 학교나 책은 들판과 일터가 만들어낸 언어를 복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P112~113
학자의 의무는 ‘사색하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모두 자기 신뢰 속에 포괄될 수 있다. 학자의 책무는 사람들에게 현상 가운데에서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고양시키고, 분발시키고, 지도하는 데 있다. 그는 더디고, 명예도 되지 않고, 보수도 없는 관찰하는 일에 정진한다. 플램스티드와 허셸처럼 유리로 만든 천문대에 들어가 별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많은 사람의 찬양을 받을 수도 있고, 그 결과가 훌륭하고 유익하기 때문에, 명예가 확실히 보장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사적인 관측소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별이ㅣ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인간 정신이라는 희미하고 몽롱한 별의 목록을 관측하는 학자-몇 가지 사실의 확인을 위하여 또는 과거의 자신의 기록을 수정하기 위하여, 때로는 며칠이나 몇 달씩을 관찰에 바쳐야만 되는-는 과시나 즉각적인 명예는 단념해야 할 것이다. 오랜 준비기간을 거치면서 그는 때때로 이미 대중화된 기술에 대한 무지나 무능을 드러내어, 그를 밀쳐내는 재주 있는 자들의 경멸의 표적이 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말을 더듬는 일도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은 자를 위하여 산 사람을 저버리는 일도 있을 것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가난과 고독을 받아들여야-얼마나 자주인가!-한다는 것이다. 익숙한 길을 밟고, 유행과 교육과 사회의 기성 종교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편함과 즐거움 대신, 학자는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고난을 택한다. 물론 자기 신뢰와 스스로 방향을 정하는 길에 따르는 형극과 엉키는 덩굴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질책, 의기 상실, 불확실성, 시간의 허비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더욱이 사회에 대하여, 특히 교육받은 사회 집단에 대하여 맞서 견뎌야 할 적대감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손실과 조소를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그는 인간성에 내포된 최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위안을 삼아야 한다. 학자는 사적인 고려를 초월하여 공적인 빛나는 사상을 호흡하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세계의 눈이요, 세계의 심장이다. 그는 영웅적인 감정, 고귀한 삶의 행적, 감미로운 시, 혹은 역사의 결론을 보존하고 전달함으로ㅆ, 늘 야만주의로 퇴보하는 세속적 번영에 저항할 것이다. 비상시에 혹은 모든 엄숙한 시간에 인간의 마음이 이 행동의 세계에 대한 논평으로써 어떤 신탁의 말을 토로하였든간에, 학자는 그것을 받아 전달하여야 한다. 또 이성이 그 침범할 수 없는 옥좌로부터 오늘을 지나는 사람들과 사건에 대해 천명하는 새로운 평결은 무엇이든지, 이를 귀기울여 듣고 전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이 학자의 지기분일진대, 자신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대중의 아우성에 결코 굴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그에게 합당한 자세이다. 학자만이, 다만 그만이, 세계를 알고 있다. 세계는 어느 순간이든 가상에 불과하다. 어떤 예법, 정부의 어떤 물신적 숭배물, 덧없는 상업, 전쟁, 혹은 인간에 대하여 세계의 반이 환호하면 나머지 반은 그것을 욕한다. 마치 만사가 이 상찬과 비난에 달려 있는 것처럼 야단이다. 필시 그 문제 전체는 학자로서 이 논쟁에 귀를 기울이다 상실할 수 도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상만큼의 가치도 없을지 모른다. 비록 이 지상의 오래 산 사람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최후의 심판의 대파국을 알리는 징조라고 주장하더라도 종이총은 종이총일 뿐이라는 그의 주장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묵묵히, 확고하게, 마음을 극단적으로 맑게 하여, 자기를 주장하여야 한다. 관찰에 관찰을 더하고, 냉소와 비난을 견디고, 자신의 시간이 오길 기다려야 한다-오늘 참으로 소중한 그 무엇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만족시켰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성공은 하나 하나의 바른 행보로 이루어진다. 그를 재촉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동료들에게 말하게 하는 그의 본능은 확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자기 정신의 내밀한 곳에 내려가는 것이 곧 모든 인간 정신의 내밀한 곳으로 내려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을 지배하는 어떤 법칙을 파악하면, 그것으로써 그와 동일한 언어를 말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의 언어가 번역될 수 이ᅟᅵᆻ는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파악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시인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자신의 자발적인 사상을 기억하고 그것을 기록하는데, 그는 그럼으로써 혼잡한 도회지의 사람들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p115~118. ‘미국의 학자’ 챕터 전문을 학문하는 틈틈이 읽어볼 것.
자신의 선한 생활에 참여하는 영혼들을
신은 자신처럼 사랑한다. 그들을 자신의 눈처럼
귀하게 여긴다. 신은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리라.
그들이 죽을 때, 신 자신도 죽으리라.
그들은 산다, 축복받은 영원 속에서 산다. - 헨리 모더 Henry More
초령(超靈)
공간은 동서로 넓지만
둘이 나란히 나갈 수는 없다
둘이 그 안에서 함께 갈 수는 없다
저 건너 주인인 양 뻐기는 뻐꾸기는
제 알이 아닌 것은 모조리,
산 것이나 죽은 것이나, 둥지에서 밀어낸다.
흙과 돌에 마술이 걸렸고,
밤과 낮 역시 그 힘에 지배된다
모든 자질과 정수도,
시간과 시대에 그 의지를 펼치는
권능으로 넘쳐서 격정에 떨고 있다.
-P134~135
영원을 한 순간에 응축시킬 수 있고
한 순간을 영원으로 늘릴 수 있도다.
우리의 실제의 생년과 다른 청춘과 노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느낀다. 어떤 생각들은 늘 우리를 젊게 만들고, 또 그것을 지속시킨다. 그러한 생각 중의 하나가 보편적이고 영원한 미에 대한 사랑이다. 이 미의 관조에서 깨어나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유한한 삶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만대에 속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우리는 가장 저급한 지성의 활동으로도 어느 정도는 시간의 한계에서 벗어난다. 아플 때나 나른할 때 듣는 한 소절의 시나 하나의 심오한 문장은 우리를 쇄신시킨다.
-p141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가장 저급한 사람에게 공통적인 인간의 예지가 있는데, 우리의 통상적인 교육 제도는 그것을 침묵시키고 발현되지 못하도록 온갖 애를 다 쓴다. 마음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최상의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소유권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거기에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붙이거나 도장을 찍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는 이미 오래 전에, 영원한 옛날부터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식자나 사상을 열심히 탐구하는 자는 결코 지혜의 독점을 주장하지 않는다. 한 방향으로 과도하게 빠져들게 되면, 그로 인해 진실하게 사고할 수 없다. 귀중한 사상들은 많은 경우 지나치게 예리하거나 지나치게 심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얻어진 것인데, 그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원하여 찾았으나 허사였던 것을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대화중에 말해진 부분보다 느끼면서 말로 표현되지 않은 부분에서 심령의 활동은 더 빈번히 감지된다. 심령은 어느 모임이든 그것을 감싸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서로 서로에게서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찾으려 한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이상으로 안다. 우리는 자신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스스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웃과의 사소한 대화에서도 같은 진리를 얼마나 자주 느끼는지 모른다. 즉, 우리들 각자의 내면 속에 깃들여 있는 어떤 높은 존재가 이 소극을 내려다보고 있고, 조브 신Jove이 우리들 각자의 등뒤에서 조브 신에게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p146~147
나는 슬픔이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나를 단 한 발자국도 더 참된 자연 속으로 데려다주지 않는 것이 슬프다. (...)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죽음뿐이다. 우리는 죽음을 음을한 만족감으로 쳐다보며, 거기에는 적어도 우리를 피해가지 않을 현실이 있다고 중얼거린다.
나는 우리가 가장 세게 움켜쥐더라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버리는 사물의 이 덧없는 사라짐 evanesence과 미끄러짐 lubricity이 우리 삶의 조건 중 가장 아름답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은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가 그를 위한 어릿광대요 놀이 친구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크라켓 경기를 위한 놀이터는 가질 수 있지만, 우리의 철학을 위해서는 단 한 알의 딸기도 비축할 수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곧바로 내리칠 수 있는 힘을 주지 않았다. 우리의 내리침은 모두 비껴나고, 우리의 타격은 우연에 불과하다. 우리들의 상호 관계는 에돌고 스쳐지나는 것일 뿐이다.
꿈은 우리를 또 다른 꿈으로 인도하니, 이 환상은 끝이 없다. 인생은 염주처럼 기분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그 기분들을 하나씩 겪어나갈 때, 그들은 그 자신의 색깔로 세상을 칠하는 다채색 렌즈라는 것을 드러낸다. 기분은 각기 초점에 잡힌 것만을 현시하기 때문이다.
-p174~175
의사들은 자신들이 물질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물질주의자이다-영혼은 극단적으로 박편화된 물질이다. 오, 그것은 얼마나 얇은가! 그러나 영적인 것은 그 존재가 자신의 증거인 것으로 정의된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어떤 생각을 덧붙일 것인가! 종교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덧붙일 것인가! (...) 나는 우리 삶의 가치는 그 불가해한 가능성-예컨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면서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날 것인지 결코 알 수 없는-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 그런데도 나 역시 높은 의자에 앉아 나의 대화를 대화 상대의 머리 형태에 맞춤으로써, 나의 미래의 가능성을 가로막아야 한단 말인가? 거기에 이르면, 의사들은 헐값으로 나를 사서 입막음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선생, 의학사가 입증하고 있소. 연구소에 제출도니 보고 자료도 있고요. 입증된 사실이란 말이오!” 그러나 나는 사실과 추론을 믿지 않는다. 기질은 본성에 내재하는 거부권이요 제한력이다. 따라서 그것이 본성 속에 깃들여 있는 본성에 반하는 과잉의 억제에 활용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본래적인 평형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겨진다면 터무니없는 것이다. 인간의 덕성이 작용할 때, 모든 종속적인 능력은 활동을 중지한다. 그 자신의 단계에서 혹은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 기질은 최종적인 것이다. 소위 과학이라는 미명의 덫에 걸리면 누구도 물리적 필연성이라는 사슬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와 같은 씨앗을 뿌렸다면, 그와 같은 역사가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사람을 감각주의의 우리 속에 갇혀 살게 만들고, 조만간 스스로를 죽이는 결과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창조력이 스스로를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성으로 들어가는 문, 창조주가 통과해 지나가는 문은 결코 닫혀 있지 않다. 절대적 진리의 추구자인 지성이나 절대적 선의 애호자인 심령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개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고의 권능의 한 번의 속삭임으로 우리는 이 악몽과의 부질없는 투쟁으로부터 깨어난다. 우리는 그것을 그것의 본래의 자리인 지옥으로 내던져버리고, 다시는 우리를 위축시켜 그와 같은 미천한 상태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P179~180
(...)즉, 그대가 어떤 그림이 좋아서 실컷 감상하였다 하더라도, 그 그림과 작별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후 그것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는 감정 없이 혹은 찬탄의 말이 없이 본 그림으로부터 좋은 교훈을 얻었다. 새로운 책이나 어떤 사건에 대해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 밝힌 견해라 하더라도 삭감하여 들어야 한다. 그들의 견해는 당시 그들의 기분과 그 새로운 사안에 대한 그들의 막연한 추정을 전해준다. 그러나 그것을 그 사안에 대한 그 사람의 영구불변한 견해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어린이는 이렇게 묻는다. “엄마, 왜 이 이야기가 엄마가 어제 나에게 해주었을 때만큼 좋지 않을까?” “오! 아가여, 가장 연로한 지식의 천사라도 그것은 그렇단다. 만일 너는 전체를 향하여 태어났지만, 이것은 하나의 특수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란다라고 대답한다면 그의 의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이 사실의 발견으로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까닭은 사람들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그리고 사랑에 관하여 그것이 속삭이는 비극의 슬픔 때문일 것이다.
예술의 세계에서 발견하는 그 부동성과 유연성의 결여를 우리는 예술가들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보다 큰 아픔을 맛본다. 많은 사람들이 팽창의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일찍이 어떤 사상의 대변자로 우리 앞에 나타났던 우리의 친구들이 그 이미지를 벗거나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사상의 힘과 대해를 앞에 놓고 서 있지만, 결코 거기로 나아가는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한다. 사람은 손에서 이리저리 굴려보아도 아무런 광택을 내지 않지만 특정한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면 비로소 심오하고 아름다운 색깔로 빛나는 래브라도 형석과 어느 정도 흡사하다. 사람에게는 적응의 능력이나 보편적 순응 능력이 부족하다. 각자는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는 그들의 재주가 가장 빈번하게 발휘될 수 있는 장소와 때를 기술적으로 계속해서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을 행하고 최상의 명칭으로 그것을 명명하고, 뒤따르는 결과에 주어질 상찬을 받고 싶어한다. 나는 인간 세계의 형식으로서 때로 과잉이 아니 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가련한 일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삶은 빼앗거나 속임수를 쓸만 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P182~183
(...)반대가 이처럼 난무하다 보니 실제적인 지혜는 그것에 무신경해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태의 전반적 양상이 무관심을 가르친다. 생각으로 골머리 앓지 말고 어떤 형편에서든 일에 착수하라. 인생은 지적인 것도 비판적인 것도 아니고 완강한 것이다. 인생의 큰 복리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아무런 의문 없이 즐길 수 있는 잘 적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자연은 관망하기를 싫어한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얘들아, 아무 소리 말고 음식을 먹어라”라고 곧잘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연의 입장인 것이다. 시간을 충만케 하는 것-그것이 행복이다. 다시 말하여, 시간을 가득 채워, 회한이나 동의를 구할 틈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표면 가운데에서 산다. 삶의 참된 기술은 그 표면 위에서 스케이트를 잘 타는 데 있다. 좋은 힘을 타고난 사람이 최신식 사회에서는 물론 가장 낡고 진부한 관습이 지배하는 곳에서도 성공한다. 그들은 손으로 다루고 처리하는 뛰어난 솜씨로 성공한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서나 대세를 장악한다. 인생은 바로 힘과 형식의 혼성체이다. 그러기에 어느 쪽이든 조금이라도 지나친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순간을 완성하는 것, 행로의 매단계에서 여행을 마무리짓는 것, 좋은 시간을 극대화하여 사는 것, 이것이 지혜이다. 인생의 짧음을 생각하면, 궁핍으로 엎드려 있어야 하는 것인지, 고개를 들고 꼿꼿이 앉아 있어야 할 것인지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 기간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무가치한 것이다. 이런 단언은 보통 사람의 몫이라기 보다는 광신자 아니면 차라리 수학자의 몫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의 책무는 순간을 단위로 한 것이니, 순간을 관리하기로 하자. 나에게는 오늘의 5분이 이 다음 천세의 5분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 균형을 잡고, 현명해지고, 우리 자신의 삶을 살기로 하자. 다른 사람들을 잘 대하기로 하자. 그들이 진실한 것으로 대하자. 그들은 필시 진실할 것이다. 사람들은 손이 흐물거리고 떨려서 지속적인 노동을 하지 못하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환상 속에서 산다. 인생은 환상의 폭풍이다. 이 폭풍 속에서 안정을 찾는 유일한 길은 현재의 순간을 존중하는 것이다. 겉모양과 정치적 술수가 난무하는 이 와중에서 나는 일말의 회의도 품지 않고 더욱 굳건히 이런 신념을 고수한다. 즉, 우리는 미루고, 참고할 것을 찾고, 소망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현재 처한 그곳에서 우리가 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그들에게 관대한 정의를 베풀고, 우리의 삶의 동반자와 현실의 정황을, 그것이 아무리 미천하고 역겹다 하더라도, 세계가 그 모든 즐거움을 우리를 위하여 위탁한 신비스러운 대리자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 동반자와 현실의 정황이 야비하고 사악한 것인데도 사람들이 만족을 얻는다면, 그것은 정의의 최후의 승리인 것이고, 따라서 시인의 목소리나 존경받는 사람들의 무심한 동정의 말보다도 우리의 가슴을 더욱 만족스러운 감동으로 고동치게 할 것이다. (...)
나는 작은 은총에 감사해한다. (...) 나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웬만한 행복이면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된다. (...)
위대한 재능은 분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은 어느 것이나 노상에 있다. 우리 존재의 중간 지대는 온대 지역이다. 우리는 공기가 희박한 한 대 지역인 순수 기하와 생명 없는 과학의 세계로 비상할 수도 있고, 감각의 세계로 내려갈 수도 있다. 이 두 극단 사이에 생명의 적도, 혹은 사상과 정신과 시의 적도 지대-그 좁은 띠가 자리잡고 있다.
-P186~189
인생은 놀람의 연속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생은 태어나서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신은 매일같이 우리를 고립시켜,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보지 못하도록 숨겨놓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주위를 살펴보려 하지만, 신은 장엄한 정중함으로 투시할 수 없는 가장 순수한 하늘의 장막을 우리 앞에 쳐주시고 우리의 뒤도 같은 종류의 장막으로 가려주신다. 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기억하지 못하리라. 그대는 예견할 수 없으리라”라고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 같다. 모든 훌륭한 대화, 훌륭한 태도, 그리고 훌륭한 행동은 관습을 망각하고 현재를 가장 위대한 것으로 만드는 자발성의 소산이다. 자연은 계산하는 자를 혐오한다. 자연의 방법은 비약적이고 충동적이다. 사람은 맥박의 고동으로 산다. 신체 기관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이다.
-P195
이상(ideal)은 우리와 더불어 여행을 하고, 천상에는 갈라진 간극도 틈도 없다. 우리가 계몽되는 양식을 주목하기만 하라. 심오한 사상의 소유자와 대화를 나누거나. 혼자 있을지라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에, 나는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고, 몸이 추울 때 불을 쬐는 것처럼, 곧바로 만족감을 느끼지 않는다. 아니다. 나는 먼저 어떤 새롭고 고귀한 삶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을 감지한다. 계속하여 책을 읽거나 사색해나가면, 이 새로운 영역은 마치 섬광 속에서처럼, 그 심오한 아름다움과 평정을 홀연 드러내며, 자신의 표정을 더욱 내비친다. 그것은 마치 뒤덮고 있던 구름이 사이를 두고 갈라지면서 다가오는 여행객에게 내륙으로 뻗은 산과 그 산기슭 밑으로 영원한 고요 속에 펼쳐져 있는 초원, 그리고 그 위에서 양떼가 풀을 뜯고 목동들이 피리를 불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흡사하다. 이 사상의 영역에서 발원한 통찰력은 그 최초의 시작과 함께 더욱 이어져나갈 것을 약속한다. 내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거기에 다다라서 거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p199
p214~215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로는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홀로 성공한 예-성공을 스스로 검증하는 경우-는 없다.
나는 이 말을 논쟁하는 기분으로, 혹은 왜 그대의 세계를 실현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으로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한 나머지 하찮은 경험주의로 법칙을 미리 판단하는 것은 나와 거리가 멀다-올바른 노력을 기울였는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내하라, 인내하라, 우리는 결코 쟁취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의 기만을 경계해야 한다. 먹고, 마시고, 백 달러를 버는 데는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그러나, 희망을 품고 우리 삶의 빛이 되는 어떤 통찰을 얻는 데는 정말 짧은 시간밖에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정원을 손질하고, 저녘 식사를 하고, 아내와 집안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일들은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않는 것이어서, 그 다음주면 모두 잊어버린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 사람이 언제나 되돌아가는 그 고독 속에서, 그는 제정신을 찾고,
새 세계로 나아갈 때 함께 간직하고 갈 계시를 체험한다. 조소에 개의치 말라. 패배에 개의치 말라. 오랜 심령이여, 다시 일어서라! 이런 말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모든 정의를 위한 승리가 아직 남아 있다.
이 세계가 존재하며 실현시키고자 하는 진정한 로맨스는 우리의 천재를 실제적인 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역자해설, <초월주의자의 길>
p218
에머슨의 사상, 특히 종종 순진한 이상주의 철학으로 조소되곤 하는 그의 초월주의 사상이 이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삶의 소산이라는 점은 특별히 주목될 필요가 있다.
p219
에머슨은 자연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예찬하면서도 또한 그 광폭함에 시선을 멈추고, 자기 확신에 찬 언어로 삶의 가능성과 희망에 대해 역설하면서도 운명의 완악함을 말하고,
삶의 실재에 도달하기를 열망하면서도 그 환상의 끈질김에 대해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가자료
에머슨 - '자기 신뢰(Self-Reliance)', '하버드 신학대학원 연설문(Divinity School Address)', '시인(The Poet)', '원환(Circles)'
p229~231
에머슨의 동시대적 호소력도 상당 부분 여기에 연유한다. 산업화와 자본주의화로 인하여 삶의 조건이 불평등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에머슨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사람일지라도 인간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인가"라는 회의주의적 질문으로 시작되는 '경험'은(...)
자연의 중심에 서서 신과의 합일을 구하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무한 가능성을 설파해온 이제까지의 태도와 사뭇 다른 이 회의적 태도는 그 스스로 설명하고 있듯이 1842년 다섯 살 난 첫아들 왈도의 죽음이
몰고 온 충격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충격은 아들을 잃은 슬픔이나 상실감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얕은 피상성-슬픔이 아무런 심오한 삶의 지혜나 각성을 가져다주지 않고 곧 일상의 흐름 앞에서
그 예봉이 무디어지고 종내는 무심하게 잊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나는 슬픔이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나를 단 한 발자국도 더 참된 자연 속으로 데려다주지 않는 것이 슬프다."
그리하여 에머슨은 우리의 삶은 결국 사물의 표피만을 배회할 뿐 그 실재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진다. 진리를 갈구하는 심령 앞에 선 자연의 침묵-이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대한 성찰이
뛰어난 에세이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어서 에머슨은 보다 행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 역시 사물의 주어진 부분, 곧 표면에만 메달릴 수 있음에 대해 경고하면서, 우리의 삶은 인간의 얄팍한 지성으로는 촌탁할 수 없는 놀람의 연속일 수
있음을 말하고, 삶의 실재는 결국 동시성과 다양성을 기초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을 비껴나갈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에머슨은 삶의 현실이란 결국 의식 주관이 그리는
관념의 세계라는 것이고, 이 유한한 주관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세계를 보다 넓히고 확충하는 삶을 살 것을 권고한다. 심령의 자기 충족성을 강조하는 자기 신뢰의 철학이 유한하고 덧없는
인간 조건의 초극을 근본 동기로 삼았던 것처럼, 인간 인식의 유한성에 대한 새삼스러운 인식은 이제 그것의 초월을 위한 원동력으로 전화되고 있다. 이처럼 에머슨의 초월주의 철학에서 긍정은 부정의
초극을 위한 긍정이요, 그 낙관주의는 삶의 비극성을 딛고 일어서기 위한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머슨은 '운명(Fate)'이라는 에세이에서 "지성은 운명을 무화시킨다. 인간은 사고할 수 있는 한 자유롭다"고 썼다.
p232
소로우(Henry D. Thoreau)는 '월든'에서 "책은 그것이 처음 씌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읽혀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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