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

Posted by 히키신
2017. 3. 7. 21:14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김영사, 2014


1확신과 성찰

p44

한국 사회에 있어서아마 그 상실이 가져오는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예의의 상실에서 오는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의 증가일 것이다. (...) 의례가 사람의 삶의 순진한 풍부함을 보증하여 준다는 것이다사람은 마음으로 존재하기 전에 몸으로 바르게 존재하여야 한다


2이성의 방법과 서사

p69~71

확신의 근거

(...)되풀이하여사고의 명증성과 확실성은 진리의 보장으로서 보편성을 갖는 것인가세상에서 사람들이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사유와는 관계없는 경우도 많다. (...) 어떤 때 조금 더 논박하기 어려운 확실성의 증거는 어설픈 논리보다는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스토아 철학자 제논은 모든 확실한 지식은 특별한 지각적 인상ㅡ그 체험의 질과 성격에 있어서 저절로 참이라고 느껴지는 데에서 오는 확신에 기초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확신이라고 한 것은 카탈렙시스(Katalepsis)의 번역인데이것은 그 이외에도그 말을 현대에까지 확대하여 생각하면심신이 굳어서 움직임이 어려워지는 강경증(catalepsy)을 의미할 수 있다확실한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유연성을 잃고 그리하여 논리적 또는 이성적 설득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직 상태를 말할 수도 있다물론 이 경직 상태가 반드시 진리로부터 이탈을 증표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의 제논의 카탈렙시스는 미국의 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이 설명한 것을 빌려온 것인데그는 이와 관련하여고통의 경험을 통하여 사랑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된 것과 같은 경우를 들고 있다. 사실 사랑의 경험에서도 그러하지만다른 개인적 체험에 있어서도그것이 참으로 그렇다는 느낌은 그것 자체가 진리의 보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경우들이 있다그러나 많은 경우 그러한 느낌은 우연하고 일시적인 현상이라기보다도 오래된 체험의 한 절정으로서 일어나는 것이다그것은 개인의 깊은 체험과 체험이 매개하는 인간 현실 또 거기에 개입되는 외부적 세계에 대한 복합적 의미를 밝혀주는 듯한 순간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 이것은 사실 깨달음을 수반하는ㅡ즉 직관적인 형태일망정성찰의 계기를 지닌 직접 체험이다.

 데카르트의 경우에도 이 명증성의 기준은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그가 기준으로 내세운이성의 빛에서만 나오는맑고 주의 깊은 마음의 확실한 생각은 이성적 기준인 듯하면서도 강한 감각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을 놓치기 어렵다여기에는 일종의 카탈렙시스적 체험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물론 그러한 경우에도 그것은 다른 경우보다도 과학의 세계에서의 객관적 업적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라는 이유로 하여 그 점을 분명히 드러내주지 않는다그러나 데카르트가 중요한 철학자가 되게 하는 것은 과학이나 철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적 진실에 충실하고 그의 사고가 그의 삶 전체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p90

이성 체험의 카탈렙시스(katalepsis; 확신)


p91~92

결국 이성적인 것도 감각적 흐름의 삶 속에서 발견되고 또 감각적으로 체험되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또 그럼으로써만그것은 삶에 대하여 살아 있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이성의 개념은 현상으로서의 세계나 감각적 체험에 대응하는 것이어서 마땅하다세계의 실체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이성의 활동이라고 하더라도우리가 아는 세계는 이 이성의 활동과 어떤 질료와의 맞부딪침에서 생겨난다이 부딪침에서 세계를 초월하는 지적인 세계에 대한 긍정이 일어난다.


에피파니(epiphany; 顯現[현현])의 역사

p94

문학의 서술은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을 기술하면서도 대개의 경우 그것을 보다 높은 어떤 본질적인 것의 계시인 것처럼 제시하려고 한다문학적 서술특히 시적 서술이 형이상학적 전율(frisson metaphysique)을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러한 관련에서이다이 전율이 일어나는 사건을 제임스 조이스는 에피파니라고 부른다에피파니는ㅡ사물의 본질의 계시가장 하잘것없는 사물의 혼이 환히 밝아지는 순간을 말한다. 여기의 요점은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이 직접적으로 다른 지적인(intelligible) 한 세계에 마주치는 듯한 경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체험이성도덕적 이성

p97~99

데카르트 이후 유럽의 주된 조류가 된 카르테시아니슴(cartesianism)에 대한 비판을 체계화한 최초의 이론가의 한 사람은 비코이다그에게는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의지에 방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이성의 추상적인 보편성이 아니고 어떤 집단인민민족 또는 인류 전체가 이루는 공동체가 드러내 보여주는 구체적 보편성이다. 데카르트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되는 과학적 이성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지금도 계속된다방금 인용한 것은 20세기에 와서 윤리와 문화의 원리로서의 과학적 이성이 부족함을 비판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원리를 정리하고자 한 한스 게오르크 가디머가 요약한 비코의 입장이다비코가 과학적 이성에 대체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의 양식(공통감각, sensus communis)인데이것은 가디머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인문주의의 전통에서 삶의 지혜프로네시스나 프루덴티아에 통하고또 이러한 지혜가 언어에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는 점에서능변(eloquentia)에 통하는 것이다그러한 주장들은 물론 적절한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데카트르적 이성이 인간의 사회적 삶에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그것은 다시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된다.

 (...) 데카르트의 관심이 과학적 이성과 그 가능성을 향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그것은 그에게 보다 큰 이성의 일부를 이루는 것일 것이다. (...) 어느 쪽이나그것은 위에서 인용한 데카르트의 말대로반복된 명상 또는 사고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그리고 덧붙이면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업적에 대한 새로운 검토를 요구한다이것은 다시 말하여 계속적인 정신의 훈련ㅡ그리고 이것도 덧붙인다면현실 행동의 훈련ㅡ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것은 아마 일생의 정신의 역정에 관계된 것일 것이다데카르트의 방법의 추구가 자전적 형식으로 쓰여 있는 것은 그의 방법이 간단한 학습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지속적인 삶의 훈련으로 얻어지는 것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그러나 그것이 삶의 훈련이기를 그치고 방법이 되어버린 것이 그 후의 역사에 있어서의 데카르트적인 전개라고 할 수 있다그리하여 그것이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3삶의 지혜

p113~4

 한 특정한 집단의 상식이 되어 있는 문화를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중국이나 서양이 범해 온문화제국주의의 원인이다여기에 대하여 단순한 문화다원주의는 문화의 다원성이나 쉬운 보편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그것은 또 대중문화에 있어서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심각한 의미에 있어서의 문화는 주체적 능력으로 존재한다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경우 자신의 문화의 주체적 능력으로써 그것을 대상화하거나 파편화하여 자신의 안에 흡수하는 것을 말한다진정으로 공동체적 상식의 보편화를 겨냥하는 것은 두 공동체가 주체가 되고 다시 갈등과 종합의 변증법적 과정의 고민을 통하여 하나의 보편적 주체로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p128~130

(...) 위의 것들은 학문 연구자 자신의 가치와는 관계없이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치 또는 가치 체계에 대한 분석의 방법을 말한 것이다여기에서 가치는 순수하게 가치가 정하는 정향에 부수하는 현실 관계 속에서만 분석되고 그 자체에 대한 판단과 선택은 조심스럽게 유보된다ㅡ적어도 베버의 주장은 그렇다그러나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이러한 엄정한 태도 자체가 가치 선택의 결과이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베버는 학문인의 바른 기능은 어떤 특정한 가치의 입장을 옹호하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엄정한 사실적 분석과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그것이 학문과 교육의 윤리이다교육자가 학생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윤리의 태도이다그러면서 그런 일에 성공할 경우 그리하여 학생들은 자신의 입장에 배치되는 좋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그리고 그 자신 이러한 엄정성ㅡ사실의 존중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도덕적 성취라고 부른다그리고 학생들로 하여금 가치와 사실을 있는 대로 엄정하게 이해하게 하여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하는 일은 교사가 도덕적 힘에 바르게 봉사한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이러한 발언에서 드러나듯이 베버의 가치중립의 태도는 이미 도덕적윤리적 선택을 나타내고 있다뿐만 아니라이 태도에는 다른 많은 가치가 함축되어 있다학문의 반성적 고찰이 이미 그러한 고찰을학문을 위하여사회를 위하여또 개인의 실천적 선택에서핵심적 가치로 선택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 거기에 여러 입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민주적 태도를 전제한다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입장과 관계없이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관용의 덕을 나타낸다.

 (...)

 베버의 방법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나 주어진 과제로서의 가치 현상을 다룰 때에사실을 존중하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이다이것은 방법이면서 삶 전체의 교양적 수련에서 생겨날 수 있는 전인격의 소산이다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입장에서는 습득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헤겔이 고전 언어나 학문의 습득 또는 장인들의 작업에서 요구되는 객체적인 것에 대한 헌신ㅡ자기소외라고 부를 수도 있는 헌신이 정신을 보편적인 것으로 높이는 역할을 한다고 한 데에 이미 그러한 과정에 대한 관찰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사실에 대한 과학적 태도는 도덕 교육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p132

물론 가치와 사실 사이에는 그리고개인적 자율과 집단적 의무 사이에는아무리 근접하는 경우라도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다그러나 이 심연을 받아들이면서실천적 선택에 있어서암묵적으로ㅡ그것은 이 모순으로 인하여 암묵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에ㅡ최대의 이성적 숙고를 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 숙고 자체가 깊은 도덕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숙고의 결과는필연의 요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남아 있어야 하지만불가피하게 그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이것은 이성이 그 자체로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또는 이성은 도덕 안에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원리가 된다이것은 개인의 자율성이 모든 도덕의 기초라는 칸트적인 명제를 확인하는 것이다즉 이성은 도덕적 가치로부터 초연할 때 그것은 가장 도덕적인 것이 될 수 있다물론 그것은 숨은 이해관계에 대하여서도 초연하여야 한다그때 그것은 도덕 안에서 숨은 이성이 된다


4성찰시각실존

p142~3

존 롤스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은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에서 중요한 흐름을 이룬 사회계약론을 계승하는 것이면서이 계약에서 이성적 요소를 적극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는자유롭고 동등하며 이성적인 개인들이 모여 선입견 없이ㅡ그렇다는 것은 자신이나 타인의 사회적 위치신분계급능력지능체력또는 선악관 등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즉 그가 무지의 베일이라고 부르는 공평한 정보의 상태에서 자신의 특권이나 불리함을 알지 못한다고 상정하고ㅡ공평한 사회 정의의 이념에 동의하기로 한다면두 가지 원칙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한다하나는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를 평등하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가령부와 권위의 불평등은 그것으로 모든 사람에게특히 가장 불리한 위치의 사회 구성원에 보상이나 이익이 돌아올 때만 정당화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부자가 부를 많이 누리게 된다면그와 동시에 그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에게도 이익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시된 두 개의 원칙은ㅡ또는 다른 원칙이라고 하더라도 그럴 것이다ㅡ간단히 제시되어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개인적집단적 성찰의 절차를 거쳐서 비로소 정당성의 원칙으로 정착될 수 있다가령 종교에 의한 차별 또는 인종 차별또는 부와 권력의 배분에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판단들이 여기에 어떻게 맞아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처음 상정된 상황과 나의 판단을 조정해 나가면서그 원칙을 시험하는 것이다이것이 나올 수 있는 성찰의 상태를 그는 성찰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이라고 부른다이것은 모든정의롭고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의 방법론의 역할을 한다이것은 일반화될 수 있다이러한 또는 어떤 윤리적인 원칙 또는 원리가 주어지면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신중하게 고려된 신념에 맞아 들어가는가 또는 그것의 연장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거기에 맞지 않는 경우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고칠 수도 있고최초에 설정한 상황이 옳은 것인가 또 거기에 추가해야 할 것이 있는가를 새로 검토할 수도 있다그리하여 상황의 설정과 판단과 원리 사이를 왕래하면서 원리와 우리의 판단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 이르게 될 수가 있다


p149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그는(너스바움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하다그리고 거기에는 서로 다른 원리가 작용한다하나는 성찰적 영역즉 비록 구체적인 사건에 의하여 자주 시정되어야 하는 것이기는 하나일반적 행동 원리와 숙고가 작용하는 영역이다그 다음에는 감정 이입과 상상력에 의한 공감을 요구하는 보다 구체적인 영역이 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해될 수 없는 개인의 실존적 영역이 있다


p154~6

지각적 균형의 예시를 설명함에서 너스바움이 예로 들고 있는 문학작품은 헨리 제임스의 <대사들(The Ambassadors)>이다. (...) 너스바움은 그(스트레더대사들에 등장하는 인물)의 열의에는 초연함이 있고무관심이 있고관측자의 무사공평함이 있다이것은 지각의 명료성을 위하여또는 지각의 균형을 위하여 불가피한 조건이다그것은 삶에 대한 독자나 작가의 자세는 감정의 깊이를 희생하여 시각적 명료성을 얻는어둡고난잡한 성적 정열에 빠져드는 것을 포기하는또는 경멸하는, ...... 그것을 단순화하고 독자의 관점에서 일반적 이야기로 줄여버리는......자세이다. 너스바움의 생각에는 스트레더가 유지하고 있는 초연한 자세지각의 도덕(the morality of perception)에 의지하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일이다스트레더의 태도로는 채드와 마담 드 비오네 사이에 존재하는 성적 사랑의 깊은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마련이다사랑이라는 것도너스바움의 해석으로는자신들의 관계의 내밀성으로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둘러 보는 것이라면그것은 참다운 사랑일 수 없다사랑의 이해는 지각의 또는 이성적 균형 속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맹목과 열림배타성과 일반적 관심인상의 독해와 사랑의 몰입 사이의 불안정한 진동으로써만 가능하다그런데 이러한 어려움은 윤리적 문제 일반에도 해당되는 것이다윤리적 질문은 우리를 윤리의 임계선으로 이끌어간다고 그는 말한다사람의 윤리적 삶에 있는 깊은 요소들은 그 폭력성이나 열도에 있어서 우리를 윤리적 태도의 너머로균형잡힌 비전의 추구 그리고 완전한 적합성의 밖으로 이끌어간다.


5해체와 이성

p175

사실 두 개의 이미지가 겹친다고 할 때그 겹침은 동심원처럼 확대되는 것이다삶의 두 순간삶의 두 계기에서의 삶의 스타일어떤 삶의 궤적과 자연의 모습이나 과정의 일관된 유사성ㅡ이러한 것이 겹치는 것이다아마 동아시아의 천지인(天地人)을 하나로 잇는 태극설(太極說)들에 들어 있는 통찰은 인간의 삶의 전체 사이에 있는 어떤 아날로지를 말한 것일 것이다다만 이 아날로지가 지나치게 도식화되어 그 설득력은 약화된다이 수많은 삶과 세계의 중첩에 어떤 로고스가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ㅡ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ㅡ그것을 정식화하기는 지난한 것일 수밖에 없다거기에 큰 패턴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그것은 많은 경우 우연적인 사건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190~2

[프랑스의 철학자시몬 베이유(Simone Weil)가 다른 곳에서 말한 것에 비추어 보면이러한 자기 소멸을 통한 신과의 일치는 다른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꿰뚫어 비추는 빛처럼 작용하는 데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했다어떤 사람의 마음에 신이 임하고 있는가 아니한가는 그가 지상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나타난다.” 또 마음에 심은 신은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빛이다신을 증언하는 것은 말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영혼이 창조자를 경험한 다음에 그 피조물이 새로 드러내 보이는 바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이다. 

(...)

 지각 체험 자체도 이러한 과정에 대한 가장 기초적이면서 또 원형적인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감각적 체험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는 예술 그리고 시가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이러한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과정(창조된 것의 해체와 새로운 창조 둘 사이의 회로)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지각에서 사물은 그 모습을 나타낸다예술은 그것을 보다 분명한 형상으로 포착하고자 한다이 형상에는 쉽게 논리로 환원할 수 없는ㅡ그러면서 그것에 이어져 있던ㅡ이념이 들어 있다그렇다고 이 형상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그것은 형상의 끊임없는 변용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또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예술가의 마음의 역정의 일부이기도 하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심리적인 현상인 것은 아니다그것은 형이상학적 계시의 성격을 갖는다

(...)

 우리가 생각을 하는 경우에주의가 집중되는 것은 생각의 대상이다그러나 참으로 근본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대상과 아울러 대상을 생각하는 주체를 생각한다는 것을 뜻한다그것은 움직임으로서의 마음과 움직임의 정지로서의 사유의 관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그리고 생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실재 또는 어떤 분명한 명제이지만그것은 움직이는 마음의 해체와 형성의 과정에 결과물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후설의 현상학에서 사유와 사유된 것(cogito-cogitatum)의 관계는 핵심적 주제이다여기의 구분은 지각이나 인식의 현상이 마음의 움직임의 소산이라는 것을 시사한다물론 후설의 현상학적 연구는 사유 또는 지향성으로서의 사유가 구성해 내는 것들즉 노에마타(noemata)의 구조에 집중되었다

p197~8

 퇴계의 <자성록(自省錄)>은 성리학의 저서이면서주자의 저서를 비롯하여 유교의 많은 경전들이 그러하듯이일상적 관찰과 고전의 주석을 유연하게 담고 있는 저서이다제목의 자성(自省)이란 말이 논어의 삼성(三省)의 요청에 이어진 자신에 대한 되돌아봄을 뜻한다는 것은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동서고금에서 많은 것의 근원은 되돌아봄의 공간 속에서 또 그것을 다듬는 데에서 되찾아진다물론 유교에서 맨처음 되찾아져야 하는 것은 마음이다. <자성록>에서부한(富翰김돈서(金惇敍)에게 주는 편지는 주로 마음의 수련에 대한 여러 권고로 이루어져 있다마음에 관한 퇴계의 담화는 대체로 주자의 말 주일무적수초만변(主一無適酬酢萬變)이라는 구절에 대한 끊임없는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마음은 하나에 집중하고 자기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그러면서 그것은 하나에 머물지 않고 많은 것에 대응하여 움직인다.


p199


 일이란 좋은 일나쁜 일큰 일작은 일을 막론하고 그것을 마음속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이 둔다는 자는 한 군데 붙어 있고 얽매여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正心助長計功謀利의 각종 폐단이 주로 여기에서 생기기 때문에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두고 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불교나 노장에 있어서의 枯橋寂滅을 가장 높은 경지로 생각하는 것이다일일三省한다든지중을 잡으라든지(윤궐집중允厥執中 <書經>), 스승의 말을 존중하고 실천하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필요한 일이다마음에 두는 것도 아니요아니 두는 것도 아닌 것(非著意非不著意)이것이 그 요체이다.


p205

퇴계와 같은 철학자가 2천 수 이상의 시를 남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면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모든 것은 정확한 시적 관찰에서 시작한다.


 이슬 맺힌 풀은 부드러이 물가르 두르고

 연못 맑고 산뜻하여 그 맑음 모래 한 톨 없어라.

 구름 날고 새 지나감은 본디 서로 비춤이라.

 다만 두려운 것은 때로 제비 물결 찰까 함이라.

 

6직선의 사고와 공간의 사고


p209~211

종교의 돈오의 체험은 어떤 강렬한 순간에 일어난다그러나 그 순간은 모든 시간에 열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이것을 공간으로 옮겨보면이 체험은 하나의 점과 그것으로부터 방사하는 일정 크기의 또는 무한한 크기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말할 수 있다다만 그 점은 하나의 점이면서 공간 전체에 일체가 된 것으로 느껴진다호직(胡直)의 체험에서 불이 내 몸을 꿰뚫고 환하게 비추었다......사람과 하늘 안과 밖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었다.....나는 전 우주가 나의 마음이며그 영역이 나의 몸이고그 고장이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할 때 이것은 모든 것이 일체가 된 것을 말한다그 내적인 구조에는 자아가 있고 우주가 있다결국 체험의 게슈탈트는 하나와 전체이 두 가지 극의 분리와 혼융으로 이루어진다

(...)

호직(胡直)의 깨우침또 그리고 다른 동아시아의 구도자들의 깨우침의 순간이 깊은 산에서 경험한 것이라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산은 거대한 자연의 모습ㅡ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테두리의 모습을 시각적 체험으로 제시해 준다그것은 숭고의 체험이다그렇다는 것은 그것의 총체적인 지각이나 인식이 사람의 능력을 넘어간다는 말이다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주변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땅의 모습을 볼 수 있다그것이 지구 위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어떤 예외적인 영역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그것이 우리에게 비일상적 체험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의 체험이 너무나 그 근원적인 형태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특히 과학 기술의 사고가 지배하는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 그러하다어ᄄᅠᆫ 경우나 산의 체험은일상적 삶에도 있으면서 압축된 종교적 체험에 근접 하는 것이기도 한세계의 지평에 대한 의식을 결정화(結晶化)하는 자연 현사에 대한 체험이다이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수 있다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어떻게 거기로부터 멀리 있는가를 알게 한다.


p215~7

 삶의 과정이 그 과정을 사는 사람에게 열의를 전달하는 경우는어디에서나 그 삶은 의미 있는 것이 된다이 열의는 어떤 때에는 신체의 동작에어떤 때는 지각에어떤 때에는 상상 활동에어떤 때에는 반성적 사유에 엮여 들어가 있다그것이 어디에 엮여져 있든지거기에는 재미가 있고열기가 있고현실의 흥분이 있다그리고 중요함이라는 말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게 실감 있는 그리고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중요함이 있다.


로이스가 그의 글에서 말하는 것은 이웃과 그의 고통과 기쁨 그리고 모든 생물체와의 사심 없는 공감에서 오는 해방감이다그것은 지금까지 죽은 듯한 외적인 접근으로 알던 것을 그 내적인 의미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게 될 때 느껴진다


이러한 내적인 의미에 대한 신비스러운 느낌은 사람이 아닌 자연물에 의하여 자극된다드 세낭쿠르(De Senancour)나 워즈워스 또는 셸리와 같은 시인들이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비슷하게 영국의 박물지 저자리처드 제퍼리스(Richard Jefferies)는 대지와 태양과 먼 바다ㅡ이런 자연 현상이 주는 일체감을 말한다제임스는 제퍼리스를 인용한 다음그런 자연과의 공감의 시간이 상업적 가치의 관점에서는 값없이 보낸 시간일 거서이라고 한탄하여 말한다그러나 무가치를 무릅쓰고 그러한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용적인 이해관계가 그렇게 막무가내가 되어 죽음의 아우성으로 몰려오기에개인을 넘어가는 가치 그것의 세계에 대하여 어떤 넓이의 통찰을 가지려면삶의 ㅋ느 규모의 의미에 대한 통찰을 갖고자 한다면우리는 실제적인 세계에 대하여서는 전혀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p221

...여기에 비치고 있는 농업의 양의성은 실용적인 일과 심미적인 관조의 대조에 일치한다뿐만 아니라 그것은 세계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두 태도에 깊이 이어져 있다이 대조 또는 모순은 이보다 깊은 대조로 인한 것이다세상을 이념화하는 근본적인 방법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그러니까 그것은 단순히 실용과 심미ㅡ얼핏 생각하면 현실과 관조의 세계가 서로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두 이념이 대조되고그것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제임스는 정황의 이념성을 이야기할 때 농부들의 이념성을 자신의 이념서에 대조하여 서로서로 다른 사람의 일의 이념성을 보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나의 케임브리지에서의 실내 생활 스타일을 보았더라면그들이 나의 정황의 이념성에 대하여 맹목일 것처럼나는 그들의 정황의 특이한 이념성에 대하여 맹목이었던 것이다.


 제임스는 여기에서 이 두 개의 이념성을 단순히 타자의 이념성의 독해의 어려움으로 생각한다그러나 사실은 이 이념성은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그것들은 한 세계 속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한 세계를 달리 구성하는 관점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p226~227

생물은 조작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해되어 마땅하다.

현상학도 주어진 지각 현상을 주어진 대로 이해하고 기술 하는 것을 그 최대 목적으로 생각한다어떤 경우에나 사물의 윤곽을 그리는 것은 대부분의 겨우 일정한 관점을 포함하는 불완전한 스케치(Abschattung)가 될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것을 최대한으로 선입견 없이 주어진 대로의 형상에 접근하려는 거서이 형상학적 환원의 목적이다이러한 주어진 것을 사람의 의도적 개입이 없이 그 자체로서 보면서도 그 안에서 어떤 질서를 발견하고자 하는 태도는 심미적 태도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참으로 엄정한 세계 이해에 이르고자 하는 철학적 성찰의 밑에 들어 있는 것도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세계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실천적 함의를 갖는다.  

 

p229

사람의 생존은 필수적으로 자연에 대한 실천적 개입ㅡ부분적 이점의 동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실천적 개입을 요구한다

(...)

전통적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이 일에 열중한다고 하여 주변의 자연의 풍경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는 일일 것이다그 결과가 결국 지주나 시장에 보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여 심어 놓은 곡식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일의 즐거움이 없을 수는 없다곡식의 성장 자체가 사람을 보다 큰 자연 환경에 연결시켜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또 작물에 대한 관심은 저절로 하늘과 땅의 조건과 그 변화에 대하여 의식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대체적으로 전통적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의식과 삶의 정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자연을 떠나서 사는 것은 아니고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에서 보건대능동적 집중의 실제적 태도와 수동적 관조의 심미적 태도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아마 그것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는 관계 속에 있을 것이다이것은 우리의 삶의 일상적 연속 속에서 그러하고 일의 삶에서 그러할 것이다일상적 순간에 일어나는 의식의 방향은 너무나 교체 작용이 빠른 까닭에 우리가 별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 한 관점에서 산을 본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그리고 조용하게 서서 한 자리에서만 자연을 느끼고 거기에서 기쁨을 얻는 것은 아니다땅도 발로 걸어서 우리읭 삶의 일부가 되는 부분이 있다.

 실용과 심미의 구분은 자연을 떠난 삶에서 일어난다이탈리아의 사회학자가 토리노의 노동자들과 한 농촌의 농민을 비교 조사한 바에 의하면농민들은 공장 노동자들에 비하여 오락을 덜 필요로 하고 그런 만큼 삶 자체가 즐거움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 있다오늘날 실제적인 일로 인하여 지평적 의식의 협소화를 경험하는 것은 도시의 근로자들일 것이다이것은 공장에서 일을 하나 회사에서 일을 하나 마찬가지일 것이다더구나 오늘날 도시에서 주거의 형태까지도 사람을 보다 큰 지평으로 열어놓기보다는 삶의 세계에 그것을 한정하며 특히 사람의 욕망 충족의 필요가 규정하는 대상들에 한정하게끔 설계되어 있어서 이러한 지평의 협소화는 더욱 조장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삶의 만족의 문제를 떠나서 삶의 일면적 실요화는 그 관점에서도 문제를 가질 수 있다오늘날 실요적 태도의 문제점은 환경의 문제 드에서 드러난다이것은 사실 지구 전체를 우리의 부분적인 이해관계에서 나오는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것에 관계되어 있다그것은 다시위에서 시사된 바와 같이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사실적 이해가 잘못된 데에로 이어진다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자연의 전체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높여주고 이것을 포함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폭넓은 의식의 화폭을 열어주는 성찰적 태도는 한가한 도락의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세계의 균형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할 수 있다이것은과학적으로선형 사고의 모델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에 대조되는 새로운 큰 체계의 이론으로 뒷받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그러니까 관조와 성찰은 단순히 주관적인 선택이 아니라 보다 충실한 과학적 이해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프리고진은 고정적인 역학과 열역학의 궁극적인 통합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관조와 성찰은 실용적 태도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자연경제에 입각한 삶에서 그것은 늘 하나로 조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이 조화의 가능성은 현대인도 잊지 못한다이것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느끼는 것이다.


7산에 대한 명상

p244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대상의 규모의 크기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규모는 보다 조심스러운 인식을 위한 정서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p251

지각심리학은 우리의 모든 지각 행위가 형상(figure)과 그 배경(background)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ㅗ 말한다현상학의 큰 발견의 하나는이미 비쳤듯이 우리의 모든 행위ㅡ의지적개연적 또는 실제적 행위가 일정한 지평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언어나 체험 또는 행위의 깊고 참된 의미는 단순히 표면에 나타난 것만 가지고는 알 수 없다이것은 실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우리가 하는 일 또는 하고자 하는 일도 배경이나 바탕에 관계없이 기획될 때그것은 결국 삶의 보다 큰 테두리에 의하여 부정되고 말 것이다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이 결국은 큰 테두리를 파괴하고 교란하여 의도한 것ㅡ우리의 의도가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것이라고 가정한다면ㅡ우리가 의도한 것과는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259

거리의 관조_형이상학적인 것이 이념성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그 체험이 정서나 감각의 직접성을 가진 듯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적으로 주어지지는 아니하기 때문이다. ...후설은 입체적 사물에 대한 지극은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부분우리의 눈이나 촉각에 와 닿을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이념적 구성을 포함한다고 생각하였다그러면서도 우리는 앞에 있는 책상과 같은 물체를 전체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느낀다이와 같이 거리나 깊이는 이념적으로 구성되고거기에 실존적 느낌이 따르면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바로는 이념보다 정서이다이 정서가 먼 것을 현존하게 한다.


p261

사람 사는 데에삶의 테두리의 전체에 대한 의식이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관조적 태도는 실용성을 떠나면서도 유용한 삶의 일부분을 이룬다고 보아야 한다.


P264

...그렇다고 한다면우리는 개성적인 것이 보편성에 가까이 갈 수 있고보편성이 개성적인 것에 가까이 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 심신을 도야한다는 것은 보편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그렇다고 도야된 인격이 아무 특징이 없는 평균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자신의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ㅡ또는 더 넓게 심신을 닦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자신의 것으로 닦으면서 동시에 보편성을 구현한다는 것을 말한다거꾸로 우리가 보편성을 알게 되는 것은그것이 인간의 삶과 관련되는 한에 있어서는뛰어난 개인에 구현됨으로써이다


p269

예술에 있어세계의 드러남은 어디까지나 예술가의 내면적 수련과 기량적 연마에 대응하여 나타난다.


p271

사회적 소통을 겨냥하는 것이 아닌 것까지도언어는 사회적 성격을 갖는다언어적 표현은 그 자체로 잠재적으로 투쟁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8진리의 길:부정과 긍정

p285

테일러가 근본적 반성ㅡ아우구스티누스적이든 데카르트적이든ㅡ근본적 반성을 서양의 전통만이 지닌 문화적 특성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이것은많은 전통에서 발견될 수 있는 정신적 체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다만 서양에서 그 가능성의 두 가닥으로의 분리는 인간성의 단편화를 가져오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방법적 역점으로 하여 역사적 일관성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지 않나 한다그 결과 내면적 탐구로 나아가는 내면화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통하여 진리의 확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 현실에 밀접 하게 연결되어 있는 발견의 가설과그것을 초월하여 있는 형이상학적 계기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었다또 이러한 애매성의 고뇌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적 이성의 방법적 집요함의 모범으로 뒷받침되었다물론 과학적 진리의 도구적 성격과 그 확신이 가져온 인간 세계의 단편화 또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p287

테일러는 서양의 근본적 반성을 설명하면서내면으로의 전환에 부정의 순간이 있고 긍정의 순간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몽테뉴는위에서 잠ᄁᆞᆫ 언급한 바와 같이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간다아우구스티누스도 영혼의 어두운 밤을 거쳐서 신앙으로 나아간다데카르트는 철학적지리적 방랑을 거쳐서 독일 울름의 더운 방에서 악마의 속임수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방법적 확실성을 예감한다이 부정과 긍정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그것은 정신의 역정의 불가피한 변증법이다. ...논어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여러 저자의 자전의 제목이 곤학기(困學記)가 되어 있는 것도 그러한 과정의 불가피함을 표현한 것이다. 16세기의 호직(胡直)의 <곤학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학문의 길에는 병과불안과 잠 못 이루는 밤과 괴이한 환각의 괴로움이 있다그러나 마지막에 호직은 인간계와 비인간계를 꿰뚫는 전 우주와도 일치하는 자아의 한없는 연속성을 발견한다. 16세기 후반 17세기 초의 고반룡(高攀龍)의 긍정적 진리의 체험은 더 극적이다이 진리의 순간은 대체로 자연과의 교감이 일어나는 때이다긴 여로의 끝에 깊은 산속에서 잠을 깬 그는 물소리가 차고그 맑음이 뼈에 사무침을 느낀다그 다음에 곧 그는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한다.


 내 마음에 남아 있던 불안은 말끔히 사라졌다내 어깨를 누르던 만근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나는 마치 번갯불에 얻어맞은 듯불이 내 몸을 꿰뚫고 환하게 비추었다나는 이 변화와 완전히 일체가 되었다사람과 하늘 안과 밖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었다나는 전 우주가 나의 마음이며그 영역이 나의 몸이고그 고장이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모든 것이 밝고 허령하였다.


p289

학문은 이러한 계시의 순간보다는 반성과 성찰의 일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그 원리는 합리성이나 이성적 질서이다그러나 우리의 반성과 성찰은 합리적 일상화를 통하여 외면적기계적인 수단으로 전락한다그것이 외적인 방법과 형식을 넘어서 계속적으로 열림과 숙고의 공간으로 유지되는 것은 그것이 그 합리성을 너머어가는 깨우침의 체험에 이어짐으로써이다


p290

진리는 오류로부터의 유기적인 성장의 결과이다그리하여 오류는 진리의 한 부분이 된다과정은 최종의 결과 속에 완전히 흡수되지 아니한다중요한 것은 진리를 찾는 정신이 지속되는 것이다우리의 지각 체험의 형성에진리의 깨달음에 그리고 윤리적 실천에서그것의 인간적 의미를 살리는 것은이 진리를 찾고 있는 정신의 지속이다.


2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1장 진화와 인간혼돈의 가장자리


p301~3

심정적 반감의 문제를 떠나서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과학이 시사하는 인간관의 상당 부분이 반드시 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다시 사회생물학 문제로 돌아가보면 그것에 대한 비판은 그 법칙들이 엄밀한 과학적 사고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유추에 의존하고 있다는 데 기초해 있다이것은 지금의 단계에서 사회생물학이 충분히 과학적이 아니라는 말이 되고다른 어떤 것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물어보아야 할 것은 과학이 어떻게 인간 이해에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보다도오히려 거꾸로 분명하게 검토되지 않은 관념들이 어떻게 과학에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이다.

 ...

과학이 시사하는 인간관은 그 방법적 구속으로 인해 벌써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인간 이해로부터 비껴나간다는 느낌을 준다인간 이해에서 그 자신의 직관으로 접근되는 자료를 버리는 것은 증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버리는 것이다사람의 지능에 관한 논쟁에서 철학자 설(Searle)은 두뇌에서 진행되는 운산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재생한다고 하더라도그때 컴퓨터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바와 같은 의식 또는 더 나아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제기하고 의식의 부재가 컴퓨터와 인간을 갈라놓는 것이라고 주장한 일이 있다내면의 모든 성찰이 반드시 신뢰할 만한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내면에 대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외면적 증거가 체험의 직관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또는 적어도 그에 대한 적절한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면 그러한 인간 이해의 기획은 성공한 것이 될 수 없다.


*p304~5

일정한 형태로 조직된 분자와 세포들은 새로운 성질요즘 더러 쓰는 용어로 말하건대창발적인 성질(emergent property)을 드러낸다인간을 과학적으로 살펴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이 새로운 존재론적 차원을 어떻게 그 관찰에 포함시키느냐 하는 것이다오늘날 이 차원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없는 것 같다그러나 과학에서도 복잡한 조직의 어떤 국면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성질과 작용이 과학적 연구의 새로운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전통적 인간 이해는 이러한 차원에 삽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할 때 궁극적으로 철학적 인간학이나 자연과학의 인간 이미지는 서로 수렴될 가능성도 있다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자각적 이해는 서로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날지도 모른다이러한 수렴은 사람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학문에 인간에 대한 어떤 전제가 들어 있고모든 사람의 일에 인간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들어 있다면우리의 인간 이해가 객관적 사실과 인간의 내면적 요구에 적절하게 맞아들어간다는 것은 인간경영의 토대가 믿을 만한 것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

 생물학이 인간론의 일부를 이루어야 할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반대로 생물학은 철학적 인간론의 물음에 답해야 할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그러한 문제점들을 생각하는 것은 생물진화론의 관점을 넓히고 세련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p305~6

다윈은 과학을 말한 것일 뿐인데다윈주의자들은 그의 생각을 유추적으로즉 정당한 이유 없이 도덕과 형이상학의 영역에까지 확대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윈 자신은마르크스가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던 것과 같이넓은 의미의 다윈주의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p315

투쟁적 생존에 대한 생각은 다윈이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영감을 얻은 것으로투쟁은 먹이의 결핍상황이나 그 압박이 커진 상황에서 일어난다다윈은 생존경쟁을 말하면서개체와 개체의 투쟁보다는 결핍으로 특징되는 환경과의 투쟁을 더 많이 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궁핍의 상황에서 늑대 두 마리가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경우는 차라리 드문 경우이고오히려 더 많은 것은 사막 변두리에서 식물이 가뭄과 싸우면서 살아남는 경우였다결핍상황에서는 피나는 싸움은 다른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먹이의 양을 줄임으로써 살아남는 경우나경쟁자에게는 쓸모없는 먹이를 활용하는 경우도 살아남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다또 종과 종 사이에 경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서로 다른 종은 대체로 환경 내에서 다른 종류의 지위(ecological niche)를 차지하기 때문에 늘 직접적 대결이 그 생존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p316~8

일본의 생물학자 기무라의 중립진화(neutral evolution) 이론이다이 중립진화론은 세포 내의 핵산이나 아미노산의 진화가(의미있는 변화라는 관점에서중립적인 변이의 고정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개체 차원에서 적자생존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진화를 의심스럽게 한 것이다.  ....

 다윈주의에 도전하거나 수정을 요구한 발견과 이론 가운데마이어가 언급하는 것으로 굴드(Stephen Gould)의 단절적 평형(punctuated equilibrium) 이론이 있다고생물학자 굴드의 관찰에 의하면 화석으로 증거되는 생물의 진화는다윈과 그 후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을 통한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진행되어온 것이 아니라급격하게 변화와 정지ㅡ수백만 년 간격의 변화와 정지의 되풀이로서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진화의 과정에 대한 이러한 관찰은 독일의 생물학적 쉰데볼프(Schindewolf)가 말하는 도약적 진화 이론과 비슷한 것이다. ... 그러나 단절적 평형이론의 함의는 진화의 리듬과 시간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굴드의 주장은 설사 그것이 궁극적으로 다윈주의 속에 수용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다윈적 진화론의 많은 개념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갖는 것이 틀림없다그리고 그것이 그의 의도였다그의 생각으로는 생명의 진화 또는 변화를 지배한 것은 어떠한 필연적 법칙이 아니라 우연성(contingency)이다따라서 진화에는 발전의 일정한 방향도 종착점도 없다진화에 필연성 또는 법칙성을 부여하는 것은 자연도태와 환경적응이다.  다윈주의는 생존경쟁에서 작은 이점들이 누적되는 것을 통해 환경에 보다 더 잘 적응하는 형태로 바뀌어가는 것이 생물진화의 기제라고 말한다그러나 굴드의 관점에서 적자생존을 보장하는 자연도태는 한정된 국지적 현상을 말한 뿐이고생명의 폭발과 느린 변화 또는 정지라는 것으로 특징되는 큰 범위와 긴 시간의 생명현상에는 적용되지 아니한다생명형태의 급격한 폭발은 적응과 도태의 균형을 깨어버리고,  그 엄격한 균형이 가능하게 하는 법칙성을 깨어버린다. ... 이 형태적 실험은 점진적으로 다시 소수의 형태로 표준화된다고 말하면서이 과정에 작용하는 것은 제비뽑기의 우연이라고 주장한다현대적 생명의 체계는 기본적 법칙ㅡ자연도태든해부학적 설계의 우수성이든기본법칙에 의해 보장되었던 것이 아니다그것은 대개 우연성의 산물이다. 


p323

하나의 신종이 이미 다른 종이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는 생태계의 지위(ecological niche)를 침입해 들어갈 때그것은 생존투쟁에 이겨야 한다ㅡ이것이 자연도채라는 개념에서 나오는 상식이다그러나 케이스(Ted Case)의 컴퓨터 모델연구에 의하면이러한 경우에 침입자가 상대로 싸워야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개체나 종이 아니라 일정한 지역의 생태공동체 전체이다이 공동체가 서로 강한 상호작용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ㅡ다양한 종이 영양배분이나 먹이망의 구성에 깊은 상호의존 관계 속에 짜여져 들어가 있는 경우그것은 약한 상호작용의 공동체보다도 강력하게 우수한 침입자를 막아낸다그 겨로가 약한 경쟁자도 다양한 종의 공동체에서는 더 높은 생존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이 공동체는 어디에서나 대개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이러한 공동체조직에 일정한 규칙이 있음을 시사한다.


p326~9

 생태학적 사고에 적용될 수 있는 카오스는 일반적으로 진화의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카우프만(Stuart A. Kauffman)은 복잡계의 수학으로 생명현상ㅡ분자 차원에서 생명의 발생과 진화 그리고 거시적 시간에서 생명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에게 진화의 주요한 계기의 하나가 자연도태인 것은 틀림없다그러나 그것은 보다 복잡계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 달리 말하면 유기체가 분자의 차원에서든 보다 큰 사회의 차원에서든자연 도태는 전체적 상황을 지배하는 메타다이내믹스를 타고 작용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전체를 포함하는 복잡계의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이다그가 말하는 복잡한(complex)체계는 일사불란한 규칙이 지배하는 질서정연한(ordered)체계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그것은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질서와 혼돈 사이를 파동하며 그 사이에 성립하는 체계이다생명은 분자의 차원개체 발생의 차원이나 생태적 또는 진화적 차원에서 이 체계의 특징을 나타낸다개체와 종의 생존과 적응은 다른 개체와 종들과 투쟁적 관계에서 이루어지지만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다른 개체와 종의 생존의 총체에 영향을 준다그 때문에 한 종의 진화는 다른 종과 환경과의 공진화(coevolution)가 된다하나의 종의 진화는 그 종의 총체적 적응성(inclusive fitness)을 증가시키고 또 공진화자에게도 도움을 주는 쪽으로 진행된다각각의 행동자들이 미세한 이익을 추구하면서 상호조정이 이루어지는 이러한 공진화의 체계는 혼돈의 가장자리에 균형을 잡는 데까지 공진화한다.

...

생물의 진화에서 메타다이내믹스의 존재는ㅡ특히 법칙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을 포함하는 메타다이내믹스의 존재는 생명의 문제가 선형적이고 기계론적인 합리적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 전통적으로 인문과학의 인간에 대한 사고는위에서 비친 바와 같이과학적 연구에 완전히 폐쇄적이지는 않으면서도 기계론적인 인간이해에 늘 유보를 표명해 왔다체험적 직관에서 오는 인간현실의 자유와 필연의 계기는 과학의 입장에서도 다시 존중되어야 하는 사실로 인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

 사실 핵심적인 것은 과학에 대하여 과학성을 옹호하는 것보다도 과학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이 비판의 가치는 반드시 사실에 대립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말해 과학 이데올로기의 비판은 과학의 건강 그 자체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p331

한 영역에서의 생각은 다른 영역에서그렇지 않았더라면 간과했을 어떤 특징을 발견하고 고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그리하여 한 시대의 과학과 문화는ㅡ물론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이론의 잠정적 성격에 대한 겸허한 인정이 있어야겠지만ㅡ상부상조하며 공진화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그러나 이 공조관계는 쌍방통행이어야만 마땅할 것이다.

 

p336~7

과학적 표상은 자연의 본질을 포괄할 수 없다그렇다는 것은 자연의 대상성은 처음부터 자연이 스스로를 보여주는 한 가지 모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물음을 통해 과학의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 것을 되찾는 일이다그것은 성찰(Besinnung)을 통해 물음에 값하는 것에 몸을 맡김으로써 가능하다. ...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결국 세계와 진리 또는 존재에 대한 인간의 열림 없이는 어떠한 진리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생명학적 진리도 이 열림의 시원 또는 더 전통적인 관점으로 말하면인식론적 토대와의 관련 위에서 생각해야 마땅하다진화가 사실이라고 한다면그것도 이 인간의 시원적 열림에 관계하여 이행되어야 한다이 열림으로부터의 과학이 나오고 수학의 논리의 세계가 나오며윤리와 도덕 그리고 아름다움의 세계가 나온다.


p339

그러나 진화론에서 말하듯이 자연도태와 적응이 진화의 기준이라고 한다면사람이 다른 생물에 비해 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그러한 생각은 인간중심주의 사상에 관계되어 있다공룡시대에 이어 오늘의 시대를 포유류시대라고 하지만이것은 사람의 관점에서 나온 생각이다어떤 생물학자는 실제로는 절지동물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그 학문적 관심을 개미에 주로 쏟은 윌슨과 같은 사람의 눈에는세상의 주인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나 포유류보다도 곤충이다오늘날의 생물의 생체량(biomass)으로만 따져도곤충은 오늘날 세계 생체량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그것은 북극권에서 티에라 델 푸에고와 테즈메이니아까지 세계의 방방곡곡에 서식한다. 그 수나 공간적 점유의 범위를 떠나 그 활동의 복합성정교성 등으로 보더라도곤충의 세계는 미묘하기 짝이 없다윌슨은마음의 크기에 사로잡혀 있기에망정이지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코뿔소보다 개미가 더 경이로운 존재라고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적응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나무는 그 화학적 환경에 극히 섬세하게 조율되어 있고나방은 바람을 타고오는 페로몬 분자의 실마리에 의지하여 몇 마일 떨어진 거리에 있는 다른 나방을 자기짝으로 알아낼 수 있다이러한 능력도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리키는 인간이 진화의 마지막 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p340~1


 그러나 인간중심의 생각은 문화적 사회적 이유보다는 더 깊은 곳ㅡ과학의 인식론적그러니까 자기비판에 철저하지 못한 과학의 인식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하이데거의 말대로과학적 사고는 자연을 대상화하고 합리성의 규칙 하에 정리하는 사고이다이러한 정리 밑에는 조종의 의도가 숨어 있다하이데거는 기술에 들어 있는 일반적인 태도를 설명하면서 그것은 사물로 하여금 제 자리에 서 있으라고 시키는 것또 다른 시킴을 위하여 시킴을 받을 수 있게 대령하고 서 있으라고 하는 것이다. ... 사람이 자연을 연구관찰의 대상으로그 자신의 표상영역으로 포착하려고 할 때그는 자연에 연구대상으로 다가가 대상이 용도품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러한 추구를 계속하라는 요청에 답하고 있는 것이다.


p342

 과학의 일방적인 입장을 극복하는 것은 반드시 반()과학주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과 관련될 때 가능하다과학이 가장 위대한 진리의 한 방식이라는 것은 분명하다다만 인간본질에 이어져 있는 보다 근원적인 드러남으로서의 진리에 과학이 복귀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경로를 경유해야 할 것이다.


p344~5

...이것은 소위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의 입장에서 어떤 학자들이 주장해온 바이다. 이들의 주장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으며시인이나 철학자들의 직관을 포용한다그것은 결국 인간의 관리능력이나 이해능력을 넘어가는 부분이 자연에 존재함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 

 생태계의 파괴에서 오는 충격은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만지구 생태계의 현황은 단순히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없어져가는 종의 수로서 극적으로 표시될 수 있다오늘날 생명의 종은 일 년에 3만 종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물론 어떤 경우에나 종이 영생하는 것은 아니다종은 300~400만 년의 주기로 소멸된다.(여기에는 인간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

 ...리키는 지금 지구의 생명은 공룡 절멸 때 있었던 것과 비슷한 또는 그것을 넘어서는 절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이것은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위기가 여섯 번째의 절멸 위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종의 다양성이다.]


p346

윌슨은 사람은 오랫동안 다른 생물체와의 공진화를 통해 다른 생명체에 대한 감정적인 유대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이것을 그는 생명친화감(biophilia)이라고 부른다여기에 이어져 있는 ㄹ것이 인간이 자연에 대해 갖는 심미적 만족감이다인간이 스스로를 정신적이라고 느낀다면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생명친화감 더 나아가 자연친화감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이것은 많은 문화에서 종교와 철학과 시가 말해온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지구 전체의 위기로 등장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에서 그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나 그렇지 않은 접근 역시 모두 어느 한쪽을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여러 면ㅡ또는 인간이 세계와 우주라는 공간에 열려 있는 존재로서 가지고 있는 여러 선택들을 나타낸다그것들은 서로 상보적이기도 하고 상충하는 것이기도 하다그러나 동시에 여러 선택들이 오늘에와서 단순히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며더 나아가 일치점에 이르고 있다는 느낌은 강해져가는 것으로 보인다.


p347

콘라드 로렌츠의 표현으로 제방을 쌓은 것은 강을 관에 넣은 것과 같다. 리키는 케냐의 자연보호사업 책임자로 오랫동안 일했지만이 보존정책의 수행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과 복잡성의 과정을 이해하고 수긍하고통제 가능하다는 무지에 근거한 생각을 버리고인간의 통제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p349~351

 근본적으로 공리적인 동기 또는 시킴과 부림의 틀도 신비에 맞닿아 있다그 속에 움직이는 사고의 끝에도 신비가 나타난다그리고 그 신비는 공리를 초월한다그러면서 그것은 어떤 질서를 수렴한다이것은 심미적-정신적 태도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열림 속에 포함된다하이데거에게 철학적 사고의 근본은 존재에 대한 경이감(Erstaunen)이다또 자연이 드러난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비를 느끼게 한다신비는 세상만물이 드러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감추는 까닭에 생겨난다드러남은 감춤 가운데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드러남은 감춤과 더불어 존재의 무한한 신비를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여기에 대응하여 움직이는 것이 사람이다. ... 오늘의 정보 생산과 여론 형성을 목표로 하는 언술과 그 언술이 지향하는 목표들은 모두 사무로가 사람을 대령시키고자 하는 언어이다여기에 대하여 하이데거 식의 생각은 스스로를 있음대로의 사물에 맡기는 사고이다그것은 차라리 존재에 대한 경건한 열림의 느낌이다여기에는 심미적 또는 정신적 정서를 동반한다그러나 그것이 비논리에 스스로를 맡기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의 언어가 철학 속에 남아 있는 데 주목해야 한다그의 언어는모든 참다운 철학언어가 그러했듯이논리 속에 있으면서 논리를 초월한다그것은 더러 지적되듯이 신학에 비유될 수 있다신학은 논리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면서가장 논리적인 사변의 언어를 쓴다자크 데리다는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논한 일이 있다. 그가 지적하는 것처럼이것은 신학의 수법이다그러나 그것이 하필 신학에 한정되고 또 수법에 불과한 것인가인간의 언어는질서가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파동하고 출현하고 소멸하듯이생성소멸한다그리고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보이는 모든 형식화된 언어와 이념도 질서와 혼동 사이에서 출현하고 소멸한다인간의 도덕과 윤리도 그러한데명멸하는 하나의 질서의 암시일는지도 모른다과학의 진리 또는 가장 믿을 만한 질서의 암시 중 하나이다우리가 분명하게 규명할 수는 없지만시와 철학과 과학의 언어는 보다 근원적인 혼돈과 질서의 파동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p351

 ..... 始原의 아름다움은 암석의 결과 알갱이 속에 살아 있다.

 우리의 벼랑을 타고 오르는 끝없는 태양처럼그러나 사람은?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조금은 비인간화하여야 한다그리고 우리가 거기서 온 

 바위와 대양처럼 자신을 가져야 한다.

 <카멜 곶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