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환,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박동환,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고려원, 1993
제1부 마음의 논리학은 있는가?
1.사사(私私)로운 출발
p17
3.3 유년시절에는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 같았는데, 소년시절에는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하려고 마음먹은 모든 일이 여기저기에서 부딪치고 꺾였다. 그래서 나는 나의 현재의 모습은 내가 지금까지 시도했던 모든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라고 말한다.
p19
4.1 미국의 어느 상원의원이 한 연회장 구석에서 수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비서가 다가와서 물었다.
“다음 가실 곳을 잊으셨나요?”
“아니,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그들은 시간에 쫓기며 일한다. 그들은 휴가시간에 더욱 바쁘다. 언제나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해야 할 아무 일도 없는 시간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해서 업적을 이루어야 그들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다. (...)
싸우는 자는 서로 닮는다. 닮은 것이 없는 자는 경쟁에서 제외된다. 경쟁은 닮은 자들끼리 서로 닮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제거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경쟁에서 거세될 가능성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 자는 없다. 이렇게 자기 존재를 실현하고 증명하기 위한 업적성취는 경쟁으로, 경쟁은 자기 상실의 불안으로 이어지는 모순과 역설에 빠진다. 그들의 세계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노동과 성취의 욕구가 어째서 그러한 역설에 빠지는가? 그들의 존재실현 또는 증명의 논리에, 노동과 업적성취에 어떤 철학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p20
도대체 목적성취라는 현실행위에서 합리적인 모순해소를 가장(假裝)하는 것은 온 세계의 사람들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놀이의 판도로 압축시키려는 서양적 지성의 유희로 볼 수밖에 없다. 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이, 그것이 노동이든 자기 성취든 간에 무자비한 경쟁과 자기 상실의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야수시대의 흔적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서양사람의 동물적 지성에 대한 경고가 있어야 한다.
p21~22
4.3 유학에서 돌아온지 10년 후에 이루어진 제2의 서양 견문과 체험의 기회는 자기 망각과 상실의 과정이었던 보다 젊은 시절의 유학체험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동양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자기의 정체를 다시 찾도록 강요당한 기회였다.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유학시절처럼 이방인으로서의 자기 처지를 잊어버리고 현지의 사상과 문화에 몰입해 안주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개방사회라는 것이 연역논리같은 엄밀한 추리에 바탕을 두는 것이고, 그와 대조되는 이른바 폐쇄사회는 음양논리와 같은 관용과 개방적 사유에 바탕이 있다는 것을 세우기 시작했다.
엄밀한 연역논리를 지지한다면 추론이 그 자신의 전제의 함축범위 밖으로 펼쳐지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전제에 반대나 모순되는 것을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엄밀논리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각자가 가진 전제의 함축범위 밖의 다른 사람의 전제나 그로부터의 귀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다원화와 대결관계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엄밀논리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전제를 달리할 때 서로 폐쇄된 자기 밖의 타자와의 대결, 대화, 교류를 피할 수 없는 개방사회의 관계로 강요받는 것이다.
서양의 과학자나 철학자가 논쟁에서 각자의 이론적 전제를 펼쳐나가는 집요한 연역적 일관성은 감탄할 만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끝없는 모순긴장과 모순해소의 역학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러한 집요한 일관성을 일찍이 포기하는 개방논리의 소유자들 사이에서는 다른 전제들 사이의 대대(對待)와 조화의 질서가 쉽게 이루어져 결국 폐쇄사회로 정착 또는 정체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심히 일하는 것, 말하자면 노동과 자기 실현이라는 하나의 척도가 경쟁을 일으키고 경쟁은 자기 상실의 모순을 낳는 경우처럼, 어디서나 일어나는 발전의 패러독스다.
p31
6.1 철학은 고대의 언어와 문헌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 철학은 기록과 기억의 무덤에 은폐된 삶과 존재의 깊은 뿌리에 대한 회고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시대의 가능한 가장 원시적 물음과 반성에 대한 증언이며 아무도 보장하지 않은 미래를 향하여 몸을 던지는 탐험이다.
p32
6.5 아직도 철학적 물음이 비철학적 물음과 함께 섞여 있다. 철학적 물음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다른 모든 물음들이 떨어져 나간 다음에 남는 가장 순수한 것이다. 더 이상의 이런 저런 정보가 흔들릴 수 없는 영원의 사태에 관한 것이다.
철학은 어느 경우에나 피할 수 없는 숙명,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에 관한 것이다. 철학은 어쨌든 겪게 될 그런 사태의 우주적 구도, 그것을 찾는다.
p33~34
2.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1. 자연사에 일어난 생존전략인 논리
1.1 자연을 무대로 인류의 발달사를 이끌어 온 상징적 사건과 계기들을 돌이켜 엮어 본다.
(1) 인류는 자연회전의 한 고리가 되어 살다. 어떤 개별자의 목적도 의식작용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자연의 부분으로서.
(2) 동굴이나 숲을 찾아서 가능한 한 자연의 적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하여 자기를 방어적(defensive)으로 은폐하다.
(3) 손이 자유롭게 해방되고 손의 연장(延長)으로서의 도구를, 나무창, 돌도끼 그리고 불을 만들어 쓰다. 손과 도구를 구사하여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려는 공격적(offensive) 행위가 자연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가해자다.
(4) 그릇될 만한 것을 찾아서 또는 질그릇 따위를 만들어서 자기에게 필요한 자연의 산물을 긁어 모으고 나누어 담다. 자연에 대하여 자기 본위의 질서매기기,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공격적인 분류와 동일화의 원칙을 적용하기 시작하다.
(5) 이 분류와 동일화의 원칙을 바탕으로 모든 범주체계(category system)와 제도가 자리잡히다. 그 제도와 범주체계에서 이른바 합리성과 논리의 체계가 싹트다. 옛날 그리스 철인들의 논리학과 존재이해가 여기에 바탕을 두다.
(6) 다시금 자신의 분류와 동일화의 원칙을 더욱 적극적으로 자연에 강제하는 방법을 시도하다. 실험조작으로써 허구와 분류와 동일화의 체계를 깨고 보다 현실적인 분류와 동일화의 체계를 만들어 자연을 조작하려는, 세계의 지배가가 되려는 이른바 과학혁명을 하다.
(7) 20세기에도 여전히 공격적이며 방어적인 그리고 물리적이거나 개념적인 도구조작기술의 혁명이 계속되다. 그러나 자기 본위의 분류와 동일화 체계에 의한 세계지배주의가 부딪칠 모순과 반전 가능성을 반성하는 새로운 철학적 양심의 등장이 기다려지다.
p35
1.2 (...)
인류의 세계이해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동서(東西)의 고대 철학사를 인류의 원시적 삶이 시작된 석기시대 이전으로부터 다시 조명하는 데서 가능하게 될 것이다. 원시인류의 탄생으로부터 지난 2500년에 걸친 철학사상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다만 생명의 자기 지탱과 확장을 위한 전략, 곧 세계의 다름을 같음으로 돌리는 행위가 지배해 왔다. 개척적, 공격적 행위와 상향추론은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한 탐험과 확인의 길로서, 보존적, 방어적 행위와 하향추론은 탐험과 확인의 소산을 연장하고 관리하는 길로서 개발되어 온 것이다.
p36
1.4 발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다름으로의 논리적 맥락에서 나타난다. 다름으로의 논리적 맥락이 발전의 유력한 작용이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단순화 작용에 있다. 한 영토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자기 같음으로의 확장운동은 그 모든 것들의 논리적 모순관계를 이끌거나 그 모든 것들의 공존 가능성을 포화상태로 몰아감으로써 그 복잡성으로의 경향을 다름으로의 운동으로써 단순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임계점에 부딪친다.
(...) 이러한 다름으로의 발전형식은 물질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정신과 사회의 영역에서도 혁명의 불가피한 상황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p37
1.6 논리란 무엇인가? 논리적 추론이란 다만 물음의 행위일 뿐이다. 이 물음의 형식을 찾는 데에 논리학의 뜻이 있다. (...)
무엇을, 아니 어떻게 물음인가? (...)
어떻게 물음인가? 물음이 지향하는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의 ‘같음’을 물음이다. 그 ‘같음’을 추적하는 물음으로서 이런 저런 상향추론과 하향추론의 형식이 이루어진다. 자연 또는 세계와 관계함에 있어서, 그러나 대상의 성격에 관계없이 던져지는 인간의 물음이 그렇게 형식화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개척 공격적 물음으로서 상향추론의 여러 형식이, 보존 방어적 물음으로서 하향추론의 여러 형식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왜 그 같음에 대하여 다름을 묻지 않는가? 자연에서도 그 밖의 세계에서도 부딪치는 사물에 대하여 그 다름을 물을 수 있다. 그것도 부딪치는 세계의 특성에 상관없이 일어나는, 그러나 지금까지 논리에서 간과된 물음의 길이다.
p39~40
2.2 사물들을 같음의 지평으로 눕히려는 의식은 말한다.
이것은 나무다.
이것은 돌이다.
이것은 바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거부하는 몸짓을 한다.
나는 나무가 아니다.
나는 돌이 아니다.
나는 바람이 아니다.
그러니 나무이면서 나무가 아니다. 돌이면서 돌이 아니다. 바람이면서 바람이 아니다.
나는 본다.
그러나 보지 않는다.
나는 듣는다.
그러나 듣지 않는다.
나는 잡는다.
그러나 잡지 않는다.
p40
2.3 진리를 찾아 광야를 헤매는 자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아무것도 잡지 않는다.
2.4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떤 틀에 묶어 놓을 수 없는 것. 마음은 언제나 잉여에 산다. 자신을 어떤 같음으로 묶는 울타리를 떠난다.
마음은 어디에 잡아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아니다.
2.5 세계의 다름을 견딜 수 없는 의식, 그래서 세계를 어떤 같음으로 돌려 놓으려는 의식, 그것이 세계에 대한 폭군으로서 아니면 철부지 망나니로서 행세하는 것이다.
2.6 의식이 그의 원칙으로서 고집하는 동일률, ∀x(x=x), 그것은 세계를 향한 폭력의 도구다.
p44
2.14 세상에 자신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 수 있는 영원한 어떤 것도 없다면, 가장 보편적인 지속자(持續者)는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닌 논리적인 것에 있다. 모두 수많은 이음을 따라 같음으로의 길로 돌아가고 수많은 매듭으로 끊어지는 다름으로의 길로 흩어져 간다. 이것이 세상에 자리잡고 자기를 드러내는 모든 것이 예외 없이 거치는 ‘이면서 아닌’ 길이다. 그러나 세상이 ‘이면서 아닌’ 길을 따라 펼쳐지며 돌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아직도 관찰하는 자, 보는 자에게 나타나는 길이며 세상이다. 보지를 말아라. 길을 버려라. 길을 버리고 보라. 세상은 혼돈과 무질서의 바다일 뿐이다. 세상은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이다. 세상은 ‘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짓고 그 마지막 책임을 지는 자가 있다면 그의 마음과 논리를 무엇으로 잡을 수 있겠는가? 그는 언제나 다름으로서 사라져 갈 뿐이다.
3. 호모 에렉투스의 돌도끼에 얽힌 철학사
2. 생산력과 생산관계, 그보다 보편적인 하부구조
p48
2.1 최근의 인류 역사가 사랑보다는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류의 생활양식이 수렵, 채집에서 농경생활로 변천한데 기인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 수렵, 채집인은 자연 질서의 일부를 이루지만 농경인은 필연적으로 그 질서를 왜곡시킨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점은 정착 농경사회에서는 재산축적이 가능해져 그것을 지킬 필요성이 대두했다는 사실이다. (리처드 리키, 로저 레윈 , <오리진> , 김광억 옮김(서울,1983), 16~17쪽)
p51
2.4 (...) 돌도끼, 노예, 과학과 같은 대리자 혹은 도구를 매개로 하는 인류의 목적실현행위는 그 왜곡에 따르는 추상성 때문에 자연의 총체적 질서와의 위태로운 긴장관계에 놓인다. 이렇게 인류가 자연을 그의 생존목적에 매개하기 위하여 도끼를 들었을 때부터 과학혁명에서 과학기술에 의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삶에 얽힌 노동, 그런 목적에 얽힌 집요한 사유와 조작의 절차가 변함없이 개발되어 왔다.
p53
생산력 형성의 원시적 단계로부터 일정한 생산관계와 사회체제의 발전단계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의식이 존재의 규정성에 성실하게 따랐는가?
3. 의식과 존재의 관계, 그럼에도 암호상자에 갇힌 존재의 비밀
3.1 처음에 의식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파도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이는 의식은 다만 흔들리며 흐르는 것이었다. 공중에 떠도는 바람에 주인이 없듯이 처음에 이는 의식에도 주체가 없다.
그에게는 우리집도 우리마당도 없었고, 더구나 나의 집, 나의 것은 있을 수 없었다. ㅊ처음부터 아예 우리니 나니 하는 주체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오고 가는 말에도 오랫동안 주어가 없었다. ‘벼락치다’라는 놀라움에서 그 힘의 주인으로 ‘하늘님이’ 떠오르고 ‘배고프다’ 라는 느낌에서 먹을 것을 찾는 ‘내가’ 나서게 되었다.
p55
3.7 세계를 절대적으로 결정하고 지배하는 자, 사람들은 그를 신(神)이라고 혹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일컫고 그에게 이런 저런 성질을 매기려고 하지만, 나는 그 알 수 없는 자를 향하여 물음을 던질 수 있을 뿐이다. 그 알 수 없는 자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 다만 그 알 수 없는 자로부터의 반향이 인간의 경험에, 인간의 논리적 사유에, 인간의 의지에 어떻게 부딪쳐 오는지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그 알 수 없는 자가 인간의 세계를 결정하고 지배하는 논리적 형식인지도 모른다. 세계를 태초부터 결정하고 지배하는 자는 기다리며 찾아야 할 어떤 것이지 인식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살아 있는 것이 공유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해할 수 있고 따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 사이에서 불일치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공유할 수 있는 진리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그런 파국의 마지막 사태에 숨겨져 있다.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 자에 대하여,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재난과 이변 앞에서 우리의 말문은 막힐 수밖에 없다. 거기에 모든 살아 있는 것들, 모든 있는 것들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자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철학적 사유의 수천 년 역사 가운데서 이어져 온 착각은 세상에 나타난 사물들의 본질에서, 증거의 객관성과 논리적 합리성에서, 최고의 선(善)에서, 이런 저런 신의 속성들에서 모든 살기 위하여 경쟁하는 것들이, 아니 모든 있는 것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를 찾은 데에 있다.
4.자기 분열자로서의 의식 그리고 존재의 보편원리로서의 비동일성
p59
4.5 (...) 철학자들은 모든 일어나는 사건들이 이행해 가고 의존하는 타자의 영토를 대상화한다. 모든 사건들이 결국에 귀속할 만한 대상을 만들어서 그 대상을 확인하고 자기화하려고 한다. 결국 자기 의식의 영토로 다시 끌어들여지지 않는 대상은 없다. 대상화 행위에는 이미 자기화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의존과 귀속의 대상인 동시에 그것으로 자기를 확인하고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세계에 자기 몸을 드러내는 모든 것들의 숙명인 타자에의 이행을, 그 숙명의 비동일성을 자기 동일자 또는 절대자에 호소해서 구제하려는 세계인식의 노력은 결국 다시금 좌초해서 타자화될 수밖에 없다.
5. 철학의 양심, 철학적 문명론
p61
5.1 (...) 삶을 위한 문제해결만이 철학적 사색이 추구하는 최선의 목표는 아니다. 당장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제에의 해답이 아닌 진리를, 아니면 해답을 외면한 의문을 던지는 행위의 높은 뜻을 버릴 수 없는 것이 철학자다. 자신의 삶에 승리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지복(至福)의 영생이 약속된다고 할지라도 철학자의 의문과 그의 인간적 방황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는 그러므로 석가와 예수의 구원을 믿는 사람, 공자와 맑스의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는 사람이다. 애초부터 해답의 능력과 권리가 허용되지 않을 것이 뻔한 영토에서 여전히 잠재울 수 없는 의문 때문에 고뇌하는 자만이 철학자가 된다.
5.2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철학, 현실에 실천을 낳지 않는 철학을 그들은 규탄한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철학과 행동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의 애매성과 다의성에 무감각하다. 현실은 특별히 어떤 철학도 어떤 행동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을 감는다. 그러나 실은 현실의 철학과 행위는 언제나 선택의 임의성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선의 선택의 현실적 뿌리를 찾아가면 언제나 애매성에 부딪친다는 충격적 사실을 발견한다.
4. 세계 철학사와 주변화의 논리
p66
1,4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결국의 어떤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시간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모든 사태의 운명이 양보하고 있다. 결국 다가오는 미래의 사태에 양보할 수밖에 없는 모든 주체의 논리적 숙명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철학자들조차 모든 사물이 이루어져 가는 성취의 논리적 꼴에 대하여 급급할 뿐이다. 그들조차 주관적이며 관념적이다. 그러나 모든 이루어져 가는 사태는 반드시 사라져 가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태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법칙이라면 그 숙명의 논리적 꼴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왜 고립과 소외를 두려워하는가? 그 자신의 존재를 군거와 집단에 남겨주어 거기에 파묻어 버리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그 자신의 존재를 좀더 지탱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그는 결코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결국 사정없이 다가서는 운명의 법칙, 그 자신의 지속에는 개의치 않는 참 보편의 어길 수 없는 명령에 비로소 복종한다. 그는 언제나 차선(次善)의 선택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주변자다. 개체들이 펼치는 자기 지탱의 노력과 그럼에도 사정없이 내려치는 운명의 명령, 여기에 세계를 주름잡는 최고의 논리적 꼴이 숨겨져 있다.
p72
3.3 무문자(無文字)시대의 논리는 기존의 철학사를 넘어 고고학의 시대로 진입해서 모든 인류가 공유할 만한 철학사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이미 인류의 이른바 자연에 대한 상상과 실험, 그리고 철학적 사색이라는 것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수십, 수백만 년을 또는 그 이상을 거슬러서 그 사이에 펼쳐진 자연사를 다시 구성하려는 현대과학이 취하는 하나의 탐구방향에 따르는 것이다. 그런 탐구방향은 유물사관에도 관념사관에도 모순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회 문화적 생존 이전에 자연의 원시적 적응원리로서의 관념과 사상의 출현과 그 동기를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 나타나는 사회 문화적 변혁과정을 본다.
자기 동일성을 지탱하려는 생명체의 환경에 대한 매개행위로서, 특히 인간의 경우 어떤 생물에게서보다도 더 개발된 매개형식이 자기 동일성을 지지, 확장하는 기발한 발상으로서 과학과 철학이 나타난 것이다. 이 보편적인 자연사의 원리는 유물변증법적 인식론에 따르는 것이다. 다만 자연에 대한 원시적 보편주의 또는 평등원리를, 말하자면 인간의 고유한 특권에 대한 과감한 양보를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보편적 도덕원리로서 투쟁과 승리를 포기해야 하는데서 그들은 아주 곤란한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p74
3.7 일반 철학사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세상에 있는가? 그것은 중국 철학사도 인도 철학사도 아니다. 옛날 그리스나 유럽의 철학사도 서양 철학사도 물론 아니다. 그런 지역 철학사를 합쳐 놓은 세계 철학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동양사람이든 서양사람이든 간에 기독교도든 불교도든 간에 이런 저런 우연한 경위를 거쳐 주조된 언어의 체계 또는 이런 저런 문화에 소속하기 전에 모두 매한가지로, 아니 어쩔 수 없이 자연의 삶이라는 원시적 사태에서 출발하는 사유의 모습을 그리지 못한 것이 오늘까지 철학사의 관행이다. 동서의 철학사가 2500년 전으로부터 돌연히 발생한다는 것은 이상하고도 부당한 일이다. 이제 철학사는 그런 언어의 체계와 문화라는 조작된 장벽을 넘어 모두 같은 보편적 조건을 지닌 자연의 사람으로 돌아가야 하는, 말하자면 원시적 바탕을 이탈해 본 적이 없는 자의 지속적인 생존활동의 사변적인 부분으로서 다시 짜야 한다. 그러니 해체의 논리는 철학사 가운데서, 언어의 견고한 구조와 거기에 세워져 있는 장벽으로서 온갖 사회학, 물리학 존재론의 전통과 체계를 꿰뚫고 세계의 가장 원시적인 그러나 가장 필연적인 삶의 질서에 도달하는 것이다.
3.8 철학사는 어떻게 다시 방향을 잡을 것인가? (...) 일반 철학사는 서양이 주도하는 세계 철학사의 판도에서 소외된 동양 철학사의 자리를 회복시키며 문명인과 석기시대의 원시인에게도 동등한 논리적 능력을 부여하는 길을 찾는다.
p75
3.9 (...)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순환이 하나의 법칙 안에 묶여 있음을 어떻게 보여 줄 수 있는가?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으로부터 그가 나타날 때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정보들이 그 생명의 시작을 향하여 모이는, 그렇게 모태에서 하나의 개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그리고 그 잉태된 한 점의 세포가 주변의 물질과 정보를 긁어 모으며 증식되어 가는 과정을, 그러나 증식을 거듭하다가 어느 때가 되면 긁어 모으기는커녕 지탱하기도 어려워서 지니고 있는 물질과 정보를 주변으로 돌려보내야만 하는, 그래서 드디어 게걸스럽게 정보를 긁어 모으던 한 개체의 중심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는 모두에게 평등한 과정을, 그렇게 주변자로서 각기 최선의 모험을 연출하는 모두의 모습을 컴퓨터 위에 그래프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임시의 중심이었던 그 개체는 그러나 그 자신을 형성하는 정보의 수집과 관리에서조차 기실 주체는 아니었다. 그렇게 고장성쇠(枯長盛衰)하는 세계의 과정을 이해하는 논리학은 모든 것의 가장 원시적인 질서를 지배하는 모순과 반전의 규칙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세계로 던져진 주변자가 자기화할 수 없는, 생존하는 한 자기화할 수 없는, 거기에다 해체시대의 모험과 비극으로 가득 찬 삶의 모습을 외면한, 이른바 체제의 철학자에겐 보이지도 않는 참 보편의 논리가 있다. 이 보편의 논리를 따라야 비로소 주변자로서 평등한 모든 사람들의 참다운 세계 철학사를 쓸 수 있다. 철학자는 세상사람들에게 허구의 전문(專門)을 가르치기 전에 그들이 숨긴 원시의 삶과 논리를 대변해야 한다.
p77
4.1 (...)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직 그들의 관찰의 논리적으로 일반화하는 데 주저한다. 그들은 이렇게 일반화할 수 있다. [P · ~P] 라는 것은 현실의 사태가 이미 선험적으로 미래를 향하여 갈림길에 선 존재양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현재의 시점에 있어 모든 가능한 사태는 P이면서 ~P이다. 세상에 오직 P로서 또는 오직 ~P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명제 P든지 ~P든지 그 자체로서 독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콜링우드에 따르면, P는 이미 전제된 어떤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타나며 그때에만 비로소 그 명제의 진리값이 결정된다. P든지 ~P든지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진리값)를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P는 그것에 얽힌 그 밖의 어떤 것에 의존해 있다. 이처럼 하나의 명제 P가 서술하는 사태가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문제다. 어떤 사태 P가 그 밖의 어떤 사태 ~P에 관계하지 않고서는 P가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말 P인가? P는 아마 ~P의 부분으로서 그리고 명백하게 [P · ~P]의 부분으로서밖에는 있을 수 없다.
이상(李霜)이 그 자신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그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그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자기를 잃어 가는 과정(<李霜의 철학적 이해>에 대한 이경숙의 노트)은 모든 존재하는 사태가 이미 논리적으로 마련되어 있는 우주적 프로그램 [P · ~P]에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다. 우주의 탄생 또는 존재의 출현이라는 사태 자체가 이미 그 이전의 사태에 대하여 반전과 모순의 관계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소산(所産)들이 그들이 인간이거나 자연의 사물이거나 간에 각각 모순과 반전의 관계로 등장하면서 임시의 동일성을 현실에서 찾아 서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p79
4.2 이 논리는 반드시 끼여들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을 버린다. 그래서 철학자는 최소한의 것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찾는다. 미처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를. 그럼에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박혀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것들에 집착해 있다. 유교든지 불교든지 기독교든지 문화혁명(文化革命)이든지 이런 저런 교리와 예언에 자기 생명에 매달리듯이 집요하다.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것에다 꼭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붙이는 고집스러움이 사람들에게 있다.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것들, 우연한 것들을 벗겨 버린다면 플라톤이나 후설의 본질직관? 그들이 말하는 본질을 찾을 수 있는가? 나는 쉬지 않고 바꾸어 새로운 것을 본다. 여기서 못 본 것을 저기서 찾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본 것을 저기서 확인하려는 것인가? (...) 이런 것과 저런 것들을 거쳐 가는 사이에 남을 만한, 확보할 만한 보편자가 있을 수 있는가? 없다.
버려야 할 것을 쉼 없는 새로움에서 발견한다. 아니, 새로움에 부딪치는 데서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을 쉼 없이 버린다. 그렇게 쉼 없는 새로움에 부딪침에서 무엇이 견뎌 남겠는가? (...) 기대하며 쌓고 쌓은 것이 그 이전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경험의 거치는 꼴을 수없이 볼 뿐이다.
이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위안과 희망을 준다. 이것이 그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도 속임수 많은 현실의 미로(迷路)에 잡혀 헤매는 자다. 현실을 버티고 있던 모든 것이 쓰러져 가는 과정에서 잡히는 틀과 같은 것, 그 틀을 넘어서 모든 것이 쓰러져 가는 과정에서 잡히는 틀과 같은 것, 그 틀을 넘어서 모든 것이 사라져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 피안(彼岸)에 대한 위대한 철학자의, 믿는 자의 장담이 허구에 가득 찬 것임을 충분히 시달린 20세기 사람들은 알고 있다.
p81
5.대화의 논리로 본 역사
1. 대화의 논리
1.1 대화 가운데서 묻는 자와 응답하는 자는 각기 그 자신의 고유한 개념정의와 공리(公理)들을 중심에 놓고 있다.
1.2 각자의 개념과 공리들은 일정한 범위의 함축성을 지닌다.
1.3 묻는 자는 응답하는 자의 개념과 공리들로부터 유도되는 논리적 귀결들이 미결정성과 모순이 노출되면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개념과 공리들을 고치거나 확장하는 일을 한다.
1.4 그러나 미결정과 모순은 한 대화의 영역 또는 중심에서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밀어내거나 감추어질 수 있을 뿐이다. 대화의 영역 또는 중심이 옮겨지면 이에 대응해서 미결정과 모순의 구석자리도 옮겨진다. 한 대화의 영역이 만들어내는 잉여지대인 미결정과 모순의 이행성(移行性)은 (힐베르트와 러셀, 화이트헤드가 추구하던 완전하고 일관된 공리체계의 불가능을 증명한) 괴델의 불완전성이론과 후기 비트켄슈타인의 모순의 주변성을 일반화할 때 얻을 수 있다.
1.5 미결정과 모순의 이행성을 드러내는 논리적 구조는 괴델과 비트켄슈타인 이전에 헤겔 그리고 오래 전에 엘레아의 제논과 소크라테스 그리고 비슷한 시대의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
그러나 그들은 소크라테스적 대화의 영역 가운데서 비로소 언제나 미완결로 끝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다시 미결정과 모순의 초점이 잡히지 않는 잉여지대로 옮겨 가는 논리전개의 역동적 구조가 드러난다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모순과 미결정의 잉여지대는 대화의 영역 안으로 함축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끝없이 이탈해가는 것이다.
2. 잉여에의 끝없는 대화인 역사
2.1 사회와 문화의 체계는 그 중심을 차지하는 기본적 개념과 공리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구석에 방치, 소외되어 있는 모순과 미결정의 잉여로 이루어진다.
4. 주변자에 관한 추가 노트
‘[한] 체제가 새로운 체제에 의해 교체되는 과정은 체제의 중심에서가 아니라 주변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이집트 태생의 경제이론가 사미르 아민이 그의 <불평등발전론>(Le Développement inégal, Paris:1973)에서 제출한 명제다. (...)
다윈과 맑스, 프로이트, 비트켄슈타인과 ‘포스트모던’ 데리다는 각기 자기가 소속한 서구문명의 전통을 지탱해 온 뿌리깊은 기본원리와 신념을 거부한 혁명의 사상가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대안(代案)의 개척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아직도 근본적인 물음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딛고 선 존재와 논리의 확고함에 의문을 품었으면서도 그 동요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에 대하여 돌이켜볼 어떤 아르키메데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지점도, 그들이 살았던 세계의 중심인 유럽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는 자기의 터전으로부터 쫓겨난 일이 없는, 그래서 자기 언어와 사상을 지닐 수 있었던 지배권의 사상가에게 거는 지나친 기대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근본적인 물음은 자신이 수천 년 누려 온 안전한 터전으로부터 쫓겨나 20세기의 주변지대를 떠도는 비(非)서구계의 국외자(局外者)에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 세계의 중심을 잡고 거기에다 자기의 꿈 같은 구도를 실현하려는 지배자의 귀와 철학자의 눈은 이미 그 자신의 끝없는 존재를 향한 욕망으로 어둡게 가려져 있다.
p89~90
6. 동양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1. 논리적 숙명으로서 다름
1.2 새옹지마(塞翁之馬)
(...) 한 사건경험의 우연성, 말하자면 다름으로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그러니 일어나는 사건의 논리적 무규정성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으로 열려 있음으로 해서 무엇으로인지 알 수 없는 같음으로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그것은 이미 논리적으로 그렇게 규정, 조건지워진 세계에 들어 있는 것이다.
1.3 사람과 나무가 각기 그의 운명을 개척하고 자유를 실현하는데 쓰는 방법과 부딪치는 한계에서 무엇이 다른가? 현상으로서는 다른 듯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 없다.
제각기 흩어져 가는 가을의 나뭇잎보다 사람의 떠나가는 길이 나을 게 뭐랴. 그들의 붙박이 삶이나 그러다가도 결국 계절이 되면 덧없이 사라져 가는 그들의 운명에 비해서 사람의 삶과 운명이 다른 게 뭐냐?
1.4 다만 우연한 것들이, 본디 아무것도 아니었던 있지도 않았던 ‘나’라고 하는 이 한 점에 밀려 왔다가 그리고 물러가면 그 하나의 점과 자리조차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우연한 것들로 채워졌다가 빠져 나가는 그 빈 껍질,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덧없는 그 자리는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니다. 잡히지 않는 그런 것들의 오고 감이 혹은 무엇 같음으로 드러나고 다시 다름으로 사라져 가는 길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적 허무주의가 아니라 물리적 현실사태다.
p98
3. 실(實)과 허(虛) : 다름의 논리전략
3.1 동양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언행이 일치하지 않음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명(名)과 실(實)을, 혹은 이론과 실제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에도 일치될 수 없는 숙명의 논리적 관계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현실을, 표면(表面)(과 명분과 이면(裏面)의 배려 사이에 끝없이 일어나는 논리적 괴리를 진지하게 익힘에 있다.
3.2 옛날로부터 중국인들은 왜 실(實)과 허(虛)를 잡고 오늘의 이른바 논리라는 것을 버렸는가? 그들에게 논리는 다만 이름(名) 또는 개념의 분석과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 개념의 분석과 조작은 같음의 논리를 만들어 낼 뿐이다. 그 같음의 논리는 그들이 이미 같음으로서 잡고 있는 것밖에 아무것도 가져다 줄 수 없다.
그들은 개념의 유희와 사변에 지나지 않는 같음으로의 길을 벗어나 다름으로의 길을 잡으려고 실과 실의 바탕으로서 허를 본다.
3.3 서양인의 마음이 실에 없는 것은 아니다. 서양인의 마음이 실에 있는 것은 그것이 실제의 경험과 실험으로서 귀납법이나 그 밖의 상향추론에서처럼 같음의 환원논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p101
3.9 입 안으로 들어간 생선구이는 즐거움인가 고통인가? 즐거움으로의 먹음인 같음으로의 길과 고통으로의 먹힘인 다름으로의 길이 하나로 얽힌 이 모순과 혼돈의 총체적 사태는 옛날 그리스 로마사회의 전통에서 말하는 정의(正義)나 동아시아 문화권에 정착되어 온 도덕(道德)이나 기독교의 교리로서 전도하는 사랑이라는 척도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다.
세계의 총체적 사태가 언제나 모순과 혼돈으로 빠져 버린다는 사실은 어떤 같음의 논리도-그것이 존재이해의 논리든지 도덕판단의 논리든지-허구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3.10 온갖 사물의 무상(無常)함이란 무엇인가? 있는가 하면 없는 것이다. 개체로서 있으면서 개체로서 있지 않은 것이다. 이 무상함을 세계의 질서로 받아들이는 데에 자유의 첫걸음이 있다. 그러니 자유는 X로 있으면서 X로 있지 않음을 저항 없이 수행하는 데에 있다.
p102
4. 허사(虛辭) 결정론 : 주변자의 논리
4.1 (...)
주변을 잡고 중심을 흔듦으로써 문제해결을 꾀한다. 주변자의 동의에 의해서 비로소 중심자의 보편성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주변을 잡는 자에게 참 보편에의 길이 있다.
p105
5.2 개인주의는 개인에게 자유를 가져 오는가? 개인주의를 원리로 하는 이른바 개방사회에서 개인은 그 자신에 대한 마지막 책임자다. 누가 그를 대신하여 선택하고 결정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
끊임없이 위협하는 타자와 대결하고 경쟁하는 그의 마음과 영혼 그리고 자아는 외롭고 고집스러우며 타자를 향하여 닫혀 있다. 그의 마음과 영혼은 타자와의 외로운 대결에서 그 자신을 흔들리지 않게 버텨 줄 절대타자에게 열려 있을 수 있다. (...) 그러나 그의 절대의 타자는 그의 마음과 영혼에게 참 자유와 평화를 주는가?
개인주의가 허용되지 않는 통제사회에서 개인에게 자유가 없는가? 이른바 폐쇄사회에서 개인은 전체의 조화라는 질서 가운데로 해체되어 버린다. 전체를 지배하는 질서를 떠나서 그 자신의 고유한 정체, 그의 같음은 찾을 수 없다.
그의 운명과 정체를 결정하는 배려와 선택이 타자에게 양도된다. 그가 개인적으로 고유하게 확보할 수 있는 자기의 같음, 그의 정체는 애매하다. 그가 고집할 수 있는 그에게 고유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의 마음도 영혼도 자아도 근본적으로 그의 것이 아닐 수 있다. 마음과 영혼과 자아는 세계의 타자성, 그 다름을 향하여 열려져 있다. 그에게는 전통적 유교와 불교사회에서처럼 또는 공산주의 사회에서처럼 그의 마음과 영혼과 자아의 개별적 같음을 지키기 위하여 집요하게 매달려야 할 아무런 이유도 터전도 없다.
5.3 서양의 과학과 철학사의 전통이 발젼시켜 온 모순으로서 보편주의와 개인주의의 관계가 있다. 그들의 과학체계에서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은 보편의 질서 가운데로 해체된다. (...) 개체들이 지닌 자기 동일성이란 결국 타자성으로 그래서 보편성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 제행무상(諸行無常)에 다를 바 없는 과학의 논리는 서기 전 천 년 중앙아시아를 떠돌던 아리안이 남긴 한 우파니샤드로부터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을 거쳐 서양인들에게 들어온 것이 아닐까?
7. 한국 사상사의 과제-맑스주의
p110
- (...) 둘째로 문명의 끝없는 듯 보이는 발전에도 불구하고 더욱 명백해지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결국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한계에 대한 깊고 정직한 인식이 우리 세계관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삶으로부터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운명의 개척과 발전 가능성에 착안할수록 그 실험을 가로막는 근본적 타자성(他者性)을 무시하는 의식에 젖고 그것이 오늘의 세대로 하여금 소박한 낙관과 시대착오적 확신에 안주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확신과 낙관은 대화하는 마음에 착각과 단절을 가져 오고 자기 부정과 지양(止揚)이라는 변증법적 운동을 정지시키고 만다. 이것이 우리 사상계에 흘러 들어오는 모든 조류들이 각기 떨어져 우왕좌왕하거나 만남이 없이 다만 평행하는 이유다.
- p112 (...) 한국의 산업사회로의 진입은 다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파악과 해결에 있어서도 이미 앞서서 산업사회와 그 문제를 생각한 구미(歐美)학계의 현대산업사회 비판론에 호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70년대에 걸쳐서 우리나라 사상계에서 각광받은 철학사조는 실존주의도 실용주의도 실증주의도 아닌, 이런 모든 철학의 사회의식 결여를 공격하는 호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의 이른바 비판이론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교조적 맑스주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그것이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켜 기계화하고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에서와 같은 결과를 가져 왔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공산주의에서도 자본주의에서도 인간이 전체주의 체제에 매몰되어 가는 세계적 현상을 놓고 인간성의 해방과 비판적 이상의 회복을 외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이론은 그동안 경제개발 제일주의를 추진해 온 ’70년대 한국의 몰인권적 정치현실과 몰인간적인 문화 도덕적 상황에 대하여 심각하고도 충격적인 경고로 다가올 수 있었다.
p114. (...) 그러나 새로운 현실창조를 위하여 철학은 현실에, 이론은 실천에 언제나 밀착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현실과 그 현실이 강요하는 실천은 오히려 이론적으로 다시 반성되고 다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현실창조를 위하여 향유해야 하는 자유, 실천의 자유는 현실에 근시적으로 밀착하는 데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와 결돤과 행동을 요구하는 현실에 대하여 상상적 실험의 자유를 허용하는 거리를 유지함으로써만 현실이 지닌 제약조건을 극복, 지양하는 창조적 실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학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는 특수성 태제와 현대과학의 이론연구를 모델로 하는 실증주의, 그리고 변증법적 부정의 논리를 정신으로 하는 비판이론은 서로 대립하고 배척하는 삼각관계를 이루었을 뿐 토론과 상호지양에 의한 보드 큰 한국사상의 잉태과정이 되지를 못하였다.
4. (...) p117
실천은 목적실현의 행위다. 그러나 그 목적하는 바가 아무리 최선의 것일지라도 목적을 실현하려는 실천행위만이 우리의식과 관념활동의 전부를 규정하고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실에서의 실천행위를 그 행위 밖의 무한정한 가설적 시각으로부터 바라보는 의식활동의 자유를 가진다. 그리하여 의식활동은 실천행위의 현실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초월(극복)하는 자유를 행사한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실천에 옮길 수도 없는, 그러나 언젠가는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를 의식과 관념에 종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실천행위가 이루어지는 현실과 현재에 사는 것이 아니다. 하루종일 실험실에 갇혀서 일하는 과학자를 보라. 그의 의식활동은 그가 현재 조작하는 온도계나 압력계 혹은 플라스크 속의 반응장치로부터 멀리 떠나 그가 증명하게 될지도 모를 이런저런 가설의 세계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철학자에게, 사업가에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따라서 우리의 실천행위는 현실과 현재로부터 해방된 의식과 관념의 자유로운, 말하자면 존재의 현실 또는 현재에 구속되지 않는 가설행위에 의존한다. 만약 현실의 사태와 실천행위가 관념비판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면 모든 과학자와 철학자는 그의 연구활동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의 삶을 정지해야 한다.
p120~1211. 5. (...)
그런데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적 관계는 이미 서양의 중세시대에 형성된 기독교적 자연관에서 싹트고 있다. 오래된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자연을 하느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용하도록 만들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을 이용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특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오래되고 더 보편적인 세계관, 말하자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지배적인 관계가 이미 2500년 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파르메니데스와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같은 소피스트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논리적, 이성적 능력에 의한 존재질서의 완전파악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 이전의 호메로스 같은 시인들의 이야기에서는 이런 저런 신(神)들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이 그리스의 철학자들이야말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지배적 관계를 확립한 선구자들이다.
그러므로 맑스는 헤겔과 칸트, 플라톤과 파르메니데스 같은 자기 이전의 철학자들을 관념론자로 몰아쳐 버리기 전에 자기 자신이 아직도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적, 착취적 관계로서의 생산력의 발전관을 버리지 못한 자기 이전의 전통에 머물러 있는 관념론자이며, 일관성을 잃은 인류 본위의 주관적인 형평론자임을 스스로 반성했어야 한다. 따라서 맑스주의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유물론적 관념비판에 토대한 실천이론은 여전히 주관적인 관념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정한 탈(脫)관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p123
6. (...)
주인과 노예에 대한 헤겔의 변증법과 계급모순에 대한 맑스의 형평론은 그러한 행위에 있어서 주객(主客)의 반향관계를 고려한 정의로운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적 관계가 일으키는 자연 또는 (암호상자[black box]에 숨겨진) 존재의 근원으로부터의 반향을 감안하는 데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과 창조의 주체적 행동이 더 이상 최고 목표이거나 최고 선(善)일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이든지 타인이든지 간에 타자로부터의 반향을 보편적으로 감안한, 그리하여 우주적으로 정의로운 형평을 유지한 생산과 창조만이 우리의 목표이며 선일 수 있다. 우리의 목표와 선은 맑스주의자가 외치는 해방과 자유를 어느 특정자에게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실현하는 데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와 선은 맑스주의자가 외치는 해방과 자유를 어느 특정자에게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실현하는 데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근원적 타자로부터의 반동과 반향을 경청하는 보편적 형평질서 위에 서는 평화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인간과 인간의 타협에 의한 평과가 아니라 우주적 정의 위에 서는 평화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과제는 주체적 실천에 의한 혁명이 아니라 보편적 형평질서 위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로의 혁명이다.
제2부 동아시아 문화론
- 사례의 합리성과 반(反)추상화의 논리
1.2 (...)p131
인간이 부딪치는 현실체험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 합리적 판단은 논증적 추리나 기술적으로 처리되는 계산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논리와 기술의 한계 때문에 합리성과 합리적 판단에 대한 논리적 정의를 다시 구성해야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모든 연결된 요인들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유기적 판단이 동원돼야 하는 인체 질병의 진단에 있어 각 분야별 전문가의 기계적 검사에 의존하는 현대의학은 옛날처럼 노련한 명의(名醫)의 종합적 통찰과 직관이 아쉬운 상황을 불러일으킨다. 각 분야별로 특수화된 전문의들의 기술적 검사들을 모두 동원해도 이른바 명의의 오래 숙련된 직관과 판단을 따르지 못하는 사례에서 기술의 발달과 전문화의 허구를 본다.
(...)
예로부터 동아시아문화에서 고유한 삶의 지혜는 일면적이며 추상적인 것을 경계한다. 아버지의 뜻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은 효(孝)이나 매가 지나쳐서 까무러칠 때까지 맞는 것은 효가 아니라고 가르치는 공자는 추상적인 원칙을 경계하며 실제사례에 따르는 판단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효는 아버지로 하여금 살인의 죄에 이르도록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 (조우현, <컴퓨터와 명의와 효에 얽인 사례에 대하여>, <<理性과 感性사이에서>>(서울,1980)참고).
p133
3., (...)
사례에 의존하는 모범 또는 범례의 추리에서처럼 중국인의 실제주의의 합리성의 개념과 논리가 명백하게 나타나는 데는 없다. 그들의 실제적인 세계이해가 사례에 의존하는 추론방법으로 밑받침되어 있고, 이 사례에 의존하는 추론방법은 그들의 일상적인 담화와 대화의 형식으로 틀지워진다. 과도한 추상화 또는 절대화를 경계하여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상황 가운데서 찾아져야 할 중용의 판단 원리를 강조한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그뿐 아니라 옛날 그리스인들이 예술의 영역에서 추구했던 조화, 균형, 비례의 질서는 극단의 추상화를 삼가며, 전체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조화와 균형과 비례에 대한 배려는 결국 산술적으로 추상호되는 형식적 질서를 지향하며 그 형식의 질서를 절대화, 형상화하고 있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서구의 지성을 지배하는 것이다.
p134
이와는 반대로 중국적 합리성의 표현으로서 사례에 의존하는 모범 또는 범례추리는 추상적 일반화 또는 보편본질의 실체화를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추론의 실험과정의 극한점에서 만날 수 있는 모순과 잉여의 사태를 이른바 중도(中道) 또는 시중(時中)이라는 안전한 중심지대 가운데에 은닉하려는 것이다. 모순과 잉여의 사태를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중국과 그리스의 문화가 각각 발전시킨 논리적 추론과 합리화의 형식 차이에서 두 개의 다른 지혜의 개념이 서구와 동아시아 문화권에 정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동아시아 과제로서의 서구의 정신
p140 (...)
그러나 포퍼는 자신이 제외하는 과학의 논리가 이미 옛날 그리스인들의 논리적 방법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논리적 방법이 실험과 관찰의 계기를 근세시대에 얻음으로써 과학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말하자면 포퍼가 사회이념과 과학방법의 정신으로서 제시한 추측과 반박의 논리는 이미 옛날 그리스의 수학적 방법으로부터 시작돼 근대과학혁명을 거쳐 온 서구문명의 정신과 논리에 대한 한 현대적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3. 문화의 전통으로서의 실증주의
p144
2. (...)
현대 사회학의 주요이론의 학파가 형성된 기원을 우리는 맑스(1818~67), 뒤르켐(1858~1917), 베버(1864~1920)의 사상으로서 밝힐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사상 원류는 홉스, 로크, 루소, 칸트, 헤겔, 존 스튜어트 밀, 오귀스트 콩트 그리고 역사주의 학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사상가들의 공헌 없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지만, 적어도 우리들이 논하려는 사회이론 또는 사회과학에서의 인본주의, 실증주의 논쟁의 계보를 밝히기 위한 충분한 배경이 된다.
뒤르켐은 사회적 현상을 개개인들의 심리적 작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말하자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개인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실재 자체가 지닌 어떤 법칙이다. 자살행위와 같은 아주 사적인 결단도 그 개인이 처한 사회적 관계 또는 구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
뒤르켐의 자살론 또는 맑스의 경제 결정론에서 전제된 방법론적 견해와 대결하는 견해를 베버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베버는 사회구조 또는 더 구체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어떻게 개신교 윤리의 정신에 의해서 형성되었는가를 밝힌다. 말하자면 사회구조 또는 체계가 인간 행위와 관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와 관념이 구조 또는 체계를 형성한다고 하는 생각이다. 이는 인간 활동(노동) 또는 창조적 행위가 역사를 만들어 간다고 갈파한 젊은 맑스의 인본주의 사상과 함께 오늘 정통파 사회과학 방법론을 비판하는 현상학적 지식사회학의 개척자 알프렛 슈츠(A. Schutz)와 피터 버거(P. Berger) 그리고 인본적 맑스주의자 마르쿠제와 호크하이머의 새로운 방법적 이념의 선구적 자리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
p146
그러므로 서양사람들의 사회과학 방법론에 관한 논쟁을 보다 깊은 철학사적 조명에 의하지 않고 그 논쟁에서 드러난 피상적 측면들만을 우리나라에서 되풀이하는 것은 아주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남(서양사람)의 쉼 없는 지적 활동의 결과(이론체계)들을 배우고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태도는 해방 이후 오늘까지 계속되어 왔다. 근래 우리나라 사회학계의 논쟁에서도 마르쿠제, 하버마스, 알벵 굴드너(A. Gouldner), 피터 버거, 어빙 고프먼, 파슨스, 스키너, 레스리 화이트(L. Whyte) 같은 사람들이 써 놓은 수많은 말들을 그대로 반복한 것밖에 거기에 어떤 새로운 자기 사상을 첨가한 일이 있었던가 반성해 볼 때 그러한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학자로서 이런 저런 선구자들의 단순한 반복자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4. 문화의 논리-동아시아와 서구의 사례
p157
서구적 합리성의 구현으로서의 과학혁명
(...) 그렇지만 알렉산더 코이레는 갈릴레이에 대한 책 속에서 그리스인들의 공헌에 대한 지나치게 좁은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사변은 최소한 관찰만큼 중요하다.
(...)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하며 자연에 물음을 던지고 그 응답을 해석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연역이며 또한 <상상적인> 개념들이다.’ (Koyré, 37쪽)
p160
(...)
노자에게 있어 도가 되돌아온다는 것은 그 뿌리인 이름지을 수 없는 없음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유가의 고전으로서 역경(易經)이나 중용에서 도는 한 극(極)에서 다른 극으로 끊임없이 반전하는 과정을 함축한다(Fung, 1962, 99~111쪽). 도가나 유가 어느쪽도 양극 사이의 반전이라는 순환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합리적인 행동은 엄밀하게 극단으로 나아가지 않고 중간점에 처하는 것, 곧 ‘시중(時中)’에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최고의 지혜 또는 가장 합리적인 행위는 ‘극단을 피하라’는 격률 속에 표현되어 있다.
(...) 말(馬)을 잃은 촌부에 대한 이야기를 왓츠(A. Watts)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것은 아주 운이 좋지 못한 사건이었으므로 이웃 사람들은 모여서 그를 위로하였다. 그러자느 그는 ‘글쎄요’라고 말했다. 다음날 도망갔던 말은 여섯 마리의 야생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웃사람들은 다시 와서 그의 행운에 대해 떠들었다. 그러자 그는 ‘글쎄요’라고 말했다. 다음날 그의 아들이 야생마들 가운데 한 마리에 안장을 얹고 타려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분질러졌다. 이웃사람들이 다시 와서 그의 불운을 동정하는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글쎄요’라고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징병관이 마을에 와서 젊은이들을 병정으로 뽑아 갔다. 그러나 농부의 아들은 부러진 다리 덕에 이를 면했다. 이웃 사람들이 와서 모든 것이 다 행운으로 결말지어졌다고 말하니 그는 ‘글쎄요’라고 대답했다. (Watts,<Tao>, Penguin Books,1979, 31쪽)
p161
맺음말
현대 논리학 발전에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논리실증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많은 20세기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기본적인 논리의 법칙이 추상적이고 공허하며 논리외적 조건, 말하자면 문화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경험주의 관점을 대변한다. ‘논리의 법칙은 합리적인 신념의 체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또 이것을 다음과 같이 보다 엄밀하게 진술한다. ‘논리의 법칙도 마찬가지로 이상화된(ideolized) 합리적인 신념체계의 이상화된 부분들에만 직접적으로 적용된다.’(Ellis, 100쪽). 그러므로 각 문화권 안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기본적인 논리의 규칙들은, 그것이 형식화된 것이든 아니든, 그 문화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논리의 규칙들은 각 문화권 안에서 고유하게 추구되는 합리성의 가장 이상화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5. 문화의 다름을 비교할 수 있는가?
p164 인본주의 경향의 사회이해가 구미학계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사회이해에 있어서 탈식민주의와 인본주의는 20세기 역사에 도전해 온 인간 사상의 이대주류(二大主流)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온 탈식민적 역사이해나 서구의 사회이해의 논리가 아직 현대철학의 비판과 세례를 충분히 받지 못한 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
- <한국적>시야가 지니는 문제점
p165~167
그러나 우리는 왜 특별히 과거를 통해서 자기 존재의 고유성을 확인하고 보존하려고 하는가? 그러한 경향은 약소민족의 불안정한 현재상황, 그러한 현실을 직면할 수 없는 뿌리깊은 도피의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 반성의 질문을 던져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자기 존재의 입지를 현재에서 찾을 수 없는 노인은 과거의 영광을 회상해야 하는 것이다.
(...)
첫째로, 한국인의 문화와 사상 또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 시야에서 볼 때 비교될 수 없는 특수성과 고유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폐쇄적 태도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특수성과 고유성의 주장은 우리민족이 동양사 내지 세계사의 흐름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할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 한국적인 것, 한국적 시야의 특수성은 세계사적 관점으로 연결, 통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레브스트로스에서 비롯한 근래의 구조주의 인식론은 보편성을 강조하며 역사주의적 이해를 비판하기 때문에 때때로 서구문명으로부터 소외된 원시단계의 민족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특수성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주의의 사회이해도 경험론적 분석에 의해서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
오늘 우리의 주변적 존재상황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를 가장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의식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역사의 주류에서 소외된 자는 자신의 처지와 예리하게 대조되는 사물의 다른 측면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충분히 세련된 주변자는 반드시 비실재(非實在)의 실재화(가능성)를 그리고 실재의 비실재화(가능성)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소외된 존재로서 세계를 볼 때뿐만 아니라 자신의 습관적 생활과 사고의 궤도가 깨어지는 문화적 충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소외된 자로서 똔믄 이방인(異邦人)으로서 부딪치는 충격의 체험은 제한된 영역 안에서의 특수한 세계이해를 넘어서게 하는 계기가 된다.
2. <서양적>사회과학의 문제점
p169~171
서양에서 이루어진 보편주의 사회과학의 체계는 비교적 우월한 위치에서 안정, 통합되어 있었던 서양 문화권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회인식의 체계가 열세(劣勢)에 몰려 있는 문화권 가운데서 온갖 이질적 세력들 사이의 갈등을 체험하는 민족들의 다양한 주관적 세계들을 표현해 줄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이질적 문명권에 의한 지배라고 하는 갈등적 상황체험을 지니고 있는 비서구세계에서는 그 복합적인 혼돈상을 어떤 하나의 통일된 사회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 철저한 경험, 현상적 이해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다율다중적(多律多重的)인, 더 나아가서는 모순적인 세계를 보도록 인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얻어지는 세계관이 토마스 쿤, 툴먼(S. Toulmin)과 같은 과학사가의 설명으로부터도 유도되는 것을 발견한다. 툴먼에 의하면,
서로 다른 이상과 모형들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들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어떤 공통의 이론적 용어도 없다. 그들이 공유하는 어떤 동일한 문제조차도 있을 수 없다. 한 사람의 눈에는 ‘설명을 요하는 문제적 현상’으로 보이는 사건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과될 것이다.
따라서 가치판단의 기준(이상) 또는 인식체계(모형)를 서로 달리 하는 개인 또는 집단들이 공존하는 사회문화의 다원화된 세계에서 갈등과 모순은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
(...) 오늘의 시점(時點)에서 볼 때 우리세계의 특징은 통일인가 분열인가?
결국 서양적 사회인식의 편협성은 혼돈과 갈등, 그리고 무모순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불합리한 것에 대한 그들의 비(非)포용성에서 싹트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질서를 형성하는 것, 논리적인 것, 합리적인 것, 이것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에 있어서도 서양인들 사고의 중요한 지도원리 또는 이념이 되어 왔다. 현실세계가 드러내는 혼돈과 갈등은 논리적으로 제거되어야 하며, 그것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홉스, 루소로부터 맑스와 듀이에 이르기까지 서양 전통의 철학자, 정치사상가들이 흔히 갈등의 제거를 선결조건으로 하는 사회체제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ᄄᆞ라서 사회체제 질서의 기초가 되는 어떤 합리적인 행동선택의 기준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떠날 수 없었던 사상사적 전통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
논리적인 것, 합리적인 것에 호소하는 습관-이것은 합리주의, 경험주의 어느 철학 전통에 속하든지 상관없이 서양인들 마음 가운데 깊이 자리잡고 있는 신앙과도 같다. 물론 실천과 행동의 세계에서 제거될 수 없는 비(非)논리, 불합리성에 주의시킴으로써 논리와 이성에의 과도한 신뢰를 위험시한 흄, 에드먼드 버크, 앙리 베르그송, 버트런드 드 쥬브넬(Bertrand de Jouvenel)과 같은 예외의 철학, 정치사상가들이 서양에 있기도 했다. 어떤 논리나 이성에 의해서 제거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불합리와 모순에 대해서 침묵, 미결정, 신비주의, 카리스마, 공감의 수단으로 접근하는 동,서양의 인물들이 많았으나 결코 이러한 희귀한 행동과 실천이 서양인들의 환원적, 합리적 보편주의 세계관과 사회, 역사인식의 체계를 반성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3. 보편-특수 논쟁 : 반성과 지양
p180~182
e......A B C D
d......A B C E
c......A B D E
b......A C D E
a......B C D E
가령 우리가 e, d, c, a에 대하여 어떤 하나의 이름을 특별하게 부여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e, d, c, a라는 사물들 사이의 공통적 요소인 B 때문에 그 집합의 사물들에 한 일반적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타당성이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일반적 이름이 다양한 개별적 사물들의 집합에 대하여 적용되는 것은 결코 그 집합을 지배하는 어떤 공통성, 보편성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태곳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의 인류에 대하여 그리고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는 미래에 태어날 존재들에 대해서도 ‘인간’이라고 하는 한 일반적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한두 가지의 변치 않는 공통점,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비트켄슈타인의 유사성 이론에 의하면 한 일반적 이름의 근거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다. 어떤 변치 않는 공통적 요소를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모든 인간들을 인간답게 보이도록 하는 본질적 특성은 아닐지도 모른다. 기계적으로 발견된 단순한 (최대공약수로서의) 공통성이란 다양한 특수개체들로 이루어지는 집합의 다채롭고 풍부한 특성을 진실대로 파악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철학사가(哲學史家)가 한 계통의 사상가들로 구성되는 학파의 특징을 밝히려고 할 때도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상학자들의 공통적 핵심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현상학’이라는 일반적 이름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슈피벨버그는 그러한 공통적 핵심을 지정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음을 밝혀 준다.
이와 같은 핵심을 발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이한 현상학들에서 불변적(不變的)인 것(공통적인 것)을 찾고 가변적인 것을 무시해 버리는 데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의 주요한 약점은 이렇게 구체적 현상들의 다양성으로부터 추출해 낸 것이 빈약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상학의 특징을 흔히 서술적인 철학으로 규정하는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러한 규정은 현상학을 몇몇의 결정적으로 비(非)현상학적인 철학들로부터 구별해 주는 역할조차 못할 것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보다 의미 있는 설명은 적어도 현상학으로 하여금 두드러진 외양(外樣)과 영감적 힘을 얻도록 해 주는 가변적인 것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물(또는 요소)들의 한 집합이 이루어 내는 특징 또는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단순한 공약수나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 비공약수적(非公約數的)인 가변성일 수 있다고 암시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 비공약수적 가변성이란 무엇인가? 비트켄슈타인이 말하는 ‘부분적이고 막연한 유사성’, 곧 가족적 유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공통적, 공약수적 요소를 가지고 한 집합의 사물 또는 개체들을 정의할 수 있는가? 한 집합의 개체 또는 사물들이 단 하나의 공약수적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집합을 대표하는 한 ‘일반적’ 이름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앞의 도표가 나타낸다. 그리고 비록 e, d, c, a라는 개체들이 B라는 공약수적 요소를 지닐지라도 그러한 공통성 때문에 그 개체들의 집합이 한 일반적 이름, 어떤 전체적 특성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이미 언급되었다.
여러 요소들의 한 집합으로서의 개체 또는 사람들은 각기의 고유한 배열(configuration) 또는 모형(paradigm)을 가지고 있다. 가령 e, d, c, a라는 개체들에 있어서 B(공통적 요소)가 차지하는 의미, 역할, 중요성, 곧 각 개체들에 있어서 B가 다른 요소들과 가지는 관계는 다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e에 있어서 B가 A, C, D와 가지는 관계, d에 있어서 B가 A, C, E와 가지는 관계, c에 있어서 B가 A, D, E와 가지는 관계, a에 있어서 B가 C, D, E와 가지는 관계는 일정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공통적 요소인 B는 모든 개체들에 있어서 같은 의미, 같은 역할,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요소 B는 다른 배열방식 또는 모형을 가진 각 개체들(e, d, c, a)-이 개체들은 하나하나의 사물이나 인물이라고 해도 좋고 서로 다른 형태의 사회 또는 문화라고 해도 좋다-가운데서 완전히 다른 의미와 중요성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철학자들, 툴먼과 쿤 그리고 인류학자 루드 베네딕트(Ruth Benedict)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강조된 바 있다. 툴먼에 의하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모형을 지니고 있는 개체들이라고 할 때 한 사람의 모형 안에서는 해소되어야 할 문제의 현상으로 보이는 요소가 다른 사람의 모형을 통해서 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베네딕트도 우리문화의 배열방식에 의하면 비정상적인 행위가 어떤 문화의 배열방식에 의하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관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서로 다른 배열방식과 모형을 지닌 개체들에 있어서 공통적 요소는 서로 다른 의미, 역할, 중요성을 가진다고 할 때, 그러한 공통성 또는 공약수들을 근거로 성립하는 보편개념과 일반이론이 어떤 타당성을 가지는 것인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각기 고유하고 특수한 배열방식 또는 모형을 지닌 특수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적 요소는 다만 기계적으로 추출된 공약수거나 또는 각 특수자들 사이의 근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있을 수 있는 우연한 일치성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개체로서의 다양한 인격들 또는 시,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여러 사회, 문화체계들의 서로 일치할 수 없는 근본적 특수성을 보더라도 부분적이고 막연한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우연한 유사성을 넘어서는, 그리하여 그 이상으로 의미 있는 일치성, 보편성, 일반성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6. 왜 중국에는 과학혁명이 없었는가?
1.과학발전의 원인을 찾을 수 있는가?
p187~188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이집트, 중국, 인도 등 어떤 문명권에서도 탄생시키지 못한 이른바 근대과학문명이 유럽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특히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중국은 서구세계보다 앞선 과학기술을 가졌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앞선 과학기술-예를 들면 자석에 관한 지식, 천체관측법, 측지학, 제철기술, 화약, 시계와 같은 것들-을 서구세계에 수출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이와 뉴턴류의 과학이 중국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과학사가 조세프 니덤의 질문이다. 그는 이른바 근대과학이 중국에 발생할 수 없었던 것은 중국인의 지적(知的) 결함에 있는 것도 아니요, 중국의 사상적 전통에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는 중국의 사상적 전통으로 말하자면 막스 베버가 가리키는 기독교 문화권보다도 근대산업사회와 근대과학기술을 낳을 수 있는 훨씬 유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가 이와 같은 지적 조건들, 그리고 일식의 예측과 달력의 계산법을 알아낼 만큼 정교한 경험적 귀납과 실험방법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근대과학을 탄생시킬 수 없었던 결정적 원인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 원인은 중국이 서구세계에서와 같은 상업주의를 싹트게 할 수 없는 농업 관료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기술과 순수과학 또는 경험적 관찰실험과 논리적, 수학적 추리가 결합해서 이루어지는 근대과학 발생의 어떤 사회 경제적 동기도 마련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니덤이 시도하는 대로 기술과 학문, 실험과 논리를 결합한 근대과학이 중국에 탄생하지 못한 원인을 이렇게 사회 경제적 조건들로써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볼 만한 것이다. 근대과학의 발생을 사회 경제적 요인으로 돌리기를 거부하는 이론가는 베버 이외에도 있다. 알렉산더 코이레(A. Koyré)나 에른스트 카시러(E. Cassirer)에 따르면,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이 플라톤을 거쳐 르네상스 이후에 다시 발견됨으로써 옛날 그리스 전통의 수학에 자극된 순수이론적 탐구를 바탕으로 근대과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
철학자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앞에 열거한 모든 현상(우리가 일상적으로 결과와 원인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상 서로 어떤 인과관계도 없이 다만 우연히 공존하는 것이다. 무수한 개체들은 각각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실현 가능성의 범위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체들이 실행하는 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무한히 많은 가능한 관계에서 어떤 것이 어떤 것의 원인이거나 결과라고 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무수한 사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무수히 많은 관계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지정하려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책임을 어떤 임의적 사건에게 뒤집어씌우는 심리적인 환원주의이다.
이렇게 보면, 우주는 일정한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서가 아니라 무한한 공존 또는 동반관계들의 그물(web)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어떤 것의 원인 또는 결과라고 한정해서 묶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어떤 것의 원인 또는 결과라고 밝히는 것이 이렇게 임의적인 것이라면 고정된 원인도 고정된 결과도 없는 것이며, 우리는 사회와 자연의 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하여 임의적으로 설명의 근거를 선택할 뿐이다. 무한한 공존 또는 동반관계들의 그물로써 이루어지는 우주의 체계를 우리는 언제나 임의적으로 (또는 심리적, 사회적으로) 결정된 관심을 중심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해하고 구성하는 인과(因果)의 그물은 임의적 근거와 임의적 귀결에 관계들로써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2.합리성에 대한 논리적 접근
p192
(...)
수학적 개념체계가 구체적 현상관찰이 일일이 미치지 못하는 물리과학의 대사에 대하여 선구적 개척의 역할을 해 온 것을 회고할 때 오늘의 역사, 사회과학이 그 일회적, 구체적 현상관찰에서 이상형을 구성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반성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과거의 사변 철학의 시대에는 구체적 현상관찰에 의한 검증을 무시했기 때문에 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으나 오늘의 역사, 사회과학은 구체적 현상관찰에 집착하기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역사와 문화와 사회가 임의적이고 다양한 모양으로 이루어지고 변하는 만큼 다양하고 자유로운 철학적, 논리적 개념체계를 요청한다.
역사와 사회과학에 수학적 연역체계를 적용할 때 지나친 형식주의를 초래하게 되고 그렇다고 어떤 논리적, 추상적 범주체계도 배격하는 것은 지나친 현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수학의 연역체계를 자연관찰에 적용하여 검증하고 객관화할 수 있듯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리와 철학의 개념체계를 역사와 사회관찰에 적용하여 검증함으로써 객관화할 수 있는 것이다.
3.과학혁명의 논리적 방법은 무엇인가?
p195
(...)
사실 비교문명의 이론가들이 근대과학의 고유한 논리적 방법에 착안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구 문명권 밖에서도 근대과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자주 있었던 것처럼 착각했던 것이다. 근대적 과학혁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이집트, 인도, 중국 또는 이슬람 문명권에서도 훌륭한 과학이 있었으며 그러한 선구자들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많은 과학사가들이 지적한다. 특히 8세기로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의 동서문명을 흡수해서 서구에 넘겨줌으로써 근대적 과학혁명이 가능하게 한 것은 이슬람 문명권의 기여한 바라고 한다. 예를 들면, 11세기 초에 활약했던 알하겐(11세기 아랍의 과학자 이름) 같은 과학자는 과학연구에서 실험과 수리적 엄밀성을 결합한 근대과학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학과 의학, 그 밖의 기술방면에 대한 인도와 중국의 공헌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
p197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비율이 정수들로서 표현될 수 없는 사례들, 말하자면 어떤 공약수도 갖지 않는 비율이 존재함을 발견했을 때 그들의 합리주의에 대한 신념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직각을 이루는 삼각형의 두 변이 각각 1일 때 그 빗변은 √2일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1이라는 정수를 가장 작은 공약수라고 보았기 때문에 1:1:√2라는 비율에 대하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1:√2라는 비율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2라는 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수의 원자 또는 가장 작은 공약수는 정수 1이라고 하는 수의 개념정의를 고집하는 논리적 일관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논리적 일관성은 분수(分數)조차도 반드시 정수들 사이의 비율로서 정의할 정도였으므로 √2같은 무리수(無理數)의 발견은 그들의 수(數) 원자론(number atomism)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되는 것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빗변이 가지는 무리수를 알고 있었으나 그 근사치(近似値)에 만족하는 실제적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
P198
실제적 효용에는 지장이 없는 근사치에 양보하지 않는 순수 논리적 일관성의 추구가 어떤 극한점에 도달할 때 그 일관성으로 넘을 수 없는 잉여현상에 부딪치게 되고 여기서 이미 주어진 가정 또는 전제에 대한 재구성의 계기가 이루어진다. 엘레아 학파의 제논도 그리고 소크라테스도 이러한 논리적 방법의 대가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겸손하게 상대방이 내놓은 전제 또는 주장에 충실히 따라간다. 그리고 상대방의 전제가 내포하는 것들을 연역해 내는 과정이 어떤 극한점에 도달하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문제점 곧 모순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P199
(...)
근대적 과학혁명에 기여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논리적 방법의 강점(强占)은 실제적 효용치에 타협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연역적 일관성의 추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철저한 연역적 일관성에 의존하면 이미 가지고 있는 전제나 공리(axiom) 또는 공약수적(commensurable) 개념과 기준을 가지고서는 넘어설 수 없는 어떤 극한점에 도달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렇게 철저한 연역적 일관성에 의해서만 이미 가지고 있는 공약수적 개념으로서의 공리 또는 전제가 적용될 수 없는 예외, 특수자, 또는 잉여와 같은 주변적 사태들을 관찰하게 되고 이러한 예외, 특수자, 잉여의 사태와의 끊임없는 부딪침에서 기존의 공약수적 개념 또는 공리체계가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근세의 과학혁명에 있어 관찰과 실험은 이미 가지고 있는 공약수적 개념 또는 공리의 연역적 극한 또는 한계를 검증하는 계기로서 주어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근대적 과학혁명을 가능하게 한 이러한 논리적 방법을 나는 주변유도(periphery-leading)의 논리라고 부르며, 이것이 서구적 합리성의 고유한 특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만약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이러한 주변유도의 논리적 방법의 전통이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 이후 어떤 관찰과 실험 그리고 어떤 사회 경제적 조건이 주어졌어도 근대의 과학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4.중국의 합리성의 논리적 특징은 무엇인가?
p201~204
(...)
도가사상을 대변하는 노자와 유가사상을 대변하는 공자는 적어도 천하의 질서를 조직적이고 강제적인 힘에 의해서 찾을 수 없다는 점에 공감한다. ‘백성을 제도로써 다스리고 형벌로써 질서를 세우면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빠져 나갈 궁리를 하게 된다. 백성을 덕으로써 다스리고 예로써 질서를 지키면 그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 따르게 된다’ (논어, 2:3),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도덕경, 25). 그들은 아무 ‘억지’도 부리지 않는 물처럼 자유자재로운 자연의 변이과정을 본받아 사물의 질서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체험하고 관찰한 자연의 원리에서 그들의 도(道)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의 지혜와 행위는 언제나 궁극적으로 자연의 법을 본받도록 운명지워져 있으며, 그러한 숙명을 이탈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자연의 궤도 밖에서 대안(alternative)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았던 데서 그 후 2500년 동안의 중국문명 및 사상사를 이루어 온 고유한 논리와 방법이 결정된 것이다.
도의 개념이 음덕(陰德)과 겸양과 중용이라고 하는 덕목들을 포함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의 질서와 운동의 논리적 형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가사상의 원천을 이루고 있는 노자의 <도덕경>이나 유가의 형이상학을 담고 있는 <중용> 그리고 유가 및 도가의 자연사상의 근거를 제공한 <주역>에 나타난 도의 개념, 특히 그 논리적 형식은 다음과 같이 동일하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1) 하나의 완성된 담론의 영역(the universe of discourse)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alternative) 담론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2) 따라서 주어진 담론의 영역 안에서 가능한 논리적 형식은 반(反) 또는 복(復)의 과정이다.
우리는 위에서 중국의 정신세계와 사회질서, 말하자면 중국적 담론영역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예와 도의 개념이 그들의 자연의 개념에서 본받은 것이라고 논하였다. 농경생활에서 얻은 수천 년의 체험 가운데서 그들은 자연의 자율성과 충족성을 굳게 믿게 되었던 것이다. 농사라는 것은 자연을 인공적으로 조작하거나 서둘러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자라나도록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자연의 변화는 다른 힘을 빌리지 않는 충분하고 자족한 운동이며 그것을 거부하거나 이탈해서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연관은 인간의 생활 또는 사상의 영역으로 하여금 벗어날 수 없는 한계에 스스로 갇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과 사유의 영역이 이렇게 어떤 한계 안에 제약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담론의 영토까지도 그렇게 제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문명과 사상이 넘어설 수 없는 제약조건으로서의 자연의 질서와 운동과정은 어떤 논리적 형식을 드러내는가? 유가나 도가의 도의 개념의 모형이 되었던 자연은 자족하고 완벽하므로 자연 아닌 어떤 가상세계에 대한 사변적, 논리적 추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의 논리적 형식은 자연의 운동 자체가 지닌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 ‘크다는 것은 두루 간다(遠)는 것이고, 멀다는 것은 되돌아온다(反)는 것이다.’ (도덕경, 25). 두루가다(逝)->멀다(遠)->되돌아오다(反)의 과정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다시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도덕경, 40)이라고 노자는 말한다. 노자에 있어서의 뿌리로 되돌아감이란 무(無)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데 반하여, 유가의 역(易)이나 중용에 있어서 도의 운동은 유(有)에서 유에의 끊임없는 반복을 의미한다. 도가는 형상(形象)을 초월하는 도의 뿌리가 무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고, 유가는 도의 뿌리가 구체적 형상을 초월하면서도 유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계(有限界)로서의 자연의 궤도를 따르는 도는 음극에서 양극으로, 다시 이 극에서 저 극에로 돌아가는 반복의 운동이라고 하는 공통적 형식을 피할 수 없다. 말하자면 반(反)과 복(復)이라고 하는 도의 과정은 모든 중국적 합리성의 체계가 지닌 고유한 논리적 형식이며 방법이다. 그리하여 이 극에서 저 극으로 그리고 다시 역(逆)으로 반복하는 논리적 과정에서 어떤 극단으로도 지나치게 미치지 않는 ‘가운데’의 자리, 말하자면 시중(時中)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의 문명과 사상이 목표로 하는 지혜에 함축된 논리적 형식이 서구적 합리성이 지닌 논리적 형식과 대칭적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중국적 합리성에서 볼 때 극단은 다만 반복의 치우진 계기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가능한 한 회피하고 절충과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서구적 합리성은 연역적 일관성에 따라 스스로 극한점을 추구한다. 그것은 오히려 연역적 일관성에 따라 도달한 극한점에서 공약수적 체계가 붕괴될 가능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구적 합리성은 극한점 또는 주변을 하나의 공약수적 체계가 붕괴되고 또 하나의 보다 포괄적인 공약수적 체계가 이루어지는 발전적 계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실제적 효용치에 타협하지 않고 순수 연역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중국적 합리성에서 볼 때 아주 지혜롭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연역적 일관성의 한계점에서 기존의 공리체계의 한계와 위기를 노출시키는 논리적 방법 위에서 근대적 과학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적 합리성은 자연의 유한성의 제약하에 있기 때문에 극한점에 이르기까지 연역적 일관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실제적 효용치에 타협하거나 절충점에 머무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중국적 합리성에서 볼 때, 순수한 연역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 극단의 위기와 실패를 향해서 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연역적 한계점의 위기와 실패를 (실험과 개혁의 계기로서보다는) 회피하여 절충하는 중심에 머물러 있으려는 중국적 합리성을 중심유도(center-leading)의 논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중심유도의 논리가 지니는 최대의 약점은 기존체계에 내포된 공약수적 개념과 공리에서 벗어나는 예외적, 주변저 ㄱ존재사태들을 발전적 계기로서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주어진 체계의 연역적 극한점을 끊임없는 한계검증 또는 개혁의 계기로 삼지 않고 다만 체계의 극한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중심의 원형보존(原形保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사회 경제적(과학 논리외적) 조건들이 주어졌더라도 근대적 과학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중국적 합리성의 논리적 특징이다.
7.한국 사상사의 방법문제
1.
p211~213
(...)
한문문화가 고전의 전수 또는 암송을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사도 그러한 답습의 전통 안에서 전개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교와 유학, 그리고 오늘의 서양학문까지도 원형대로 유지하고 전수하는 경향이 있다. 동양학은 물론이고 서양학을 연구한다고 할 때도 우리학계는 원전을 거의 절대시한다. 원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무슨 비판과 새로운 발견이 있을 수 있느냐는 태도는 중,고등학생으로부터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누구든지, 때로는 깊은 사려 없이, 원전에서 벗어난 해석과 비판을 하면서까지, 자기의 사상을 구축하는 자유정신을 발휘하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서양문화와 학문의 정신은 고전으로 돌아가는 데 있지 않고, 고전에 대결하는 독창성(originality)의 실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양사상 및 과학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서양의 역사지향은 독창성에 있고, 동양의 역사정신은 그 학풍이 드러내는 바와 같이 정통성에 있다고 하겠다.
중국의 학자 첸무 자신이 중국문화와 학문의 본질을 그 역사의 전통성에서 찾으려고 하였다(<中國의 歷史精神>, 추현수 역, 서울, 1977). 그러므로 한문 문화권의 학문전수와 전통정신에 의하면 불교와 유학과 서양학문이 받아들이는 자의 주관적 비판과 독창성에 의한 개조 없이 원형 그대로 수용될 수 있겠으나, 서양의 학문과 역사정신에 의하면 어떤 사상과 학문도 원형대로 보존될 수도 없고 그것이 동양문화를 침식하게 되어 있지도 않다.
독창성을 성취의 척도로 삼는 서양의 과학, 철학, 역사정신을 진정으로 터득할 때 오히려 한국문화와 사상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물리적 현실에 침체됨이 없이 초월의 정신으로 현실을 지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본디 다윈적 사회, 문화, 사상의 갈등 속에서 변형, 성장해 온 서양철학과 과학은 언제나 폐쇄적 완결성(完結性)보다는 대결적(對決的) 운동의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한문 문화권에는 모든 후세의 학문과 사상의 원형이 되는 사서삼경, 그리고 공자와 같은 성현이 존재한다. 또한 후세의 어느 누구도 이를 초월하거나 개혁할 천재로 자처하지 않는다. 그 폐쇄적 완결성은 새로운 것과 이질적인 것에 대한 근본적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향을 지닌다.
이 폐쇄적 완결성 때문에 한문 문화권에서는 새로운 것,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모습 또는 원형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째서 과거 전통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이루는 본질인가? 오늘의 자아 또는 민족자아의 주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과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오늘의 새로운 정신문화의 발견에는 우리가 처한 현재의 장(場)을 원점(原點)으로 하는 외래사상과 학문에 대한 수용(受容) 및 지양(止揚)의 논리가 요청된다. 말하자면 새로운 것 또는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수용 및 지양을 방법으로 하는 새시대의 정신문화 형성을 위해서는 동양사가 지녀온 폐쇄적 완결성의 논리가 아니라 서양사가 지닌 대화적 지양의 논리가 요청된다. 이러한 서양의 역사정신을 참고할 때 우리가 주체성을 잃거나 서양문화에 예속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문화 가운데에 이러한 서양의 역사정신이 뿌리를 내린다면 주체의 정신과 물질 초월의 정신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고, 나아가 서양문화의 제국주의적 침식을 막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서양문화를 우리의 문화로 지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한문문화의 관행이 지닌 역사방법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실을 원점으로 하는 주체적 사유능력을 잃게 하며 과거의 성현과 고전들의 권위에 다시 예속하도록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한문문화의 역사방법은 과거 한국인의 주체적 사유를 빼앗고 모화정신을 우리에게 심어 주었으나, 서양 과학문명 가운데에 전제된 역사정신에 따르면 모든 위대한 서양사상과 고전들이 우리의 주체적 사유에 의해서 이해,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된다.
우리는 새로운 정신문화를 창조하는 데 있어 역사가 깊지 않은 미국 철학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미국은 최초에 그들 고유의 어떤 철학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처음 백 년 동안 그들은 다만 유럽의 철학사상을 흉내내는 아류(亞流)에 불과했다. 퍼스, 제임스, 듀이도 모두 흄, 칸트, 헤겔을 포함하는 유럽철학의 수용에서 출발해서 개척시대 경험과 사상에 뿌리깊은 근거를 가지고 있는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으로 전화(轉化)시킨 것이다.
그러나 현재 어느 미국 철학자도 프래그머티즘이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이라고 주장하지도 않거니와, 사실 오늘의 미국 철학도들은 프래그머티즘 철학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의 시대가 지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대부분의 미국 철학자들은 미련 없이 이를 버렸고 자기 시대의 현실을 원점으로 해서 다시 모든 비(非)미국적 철학들-현상학, 실존철학, 맑스주의, 유럽 전통의 고전 철학자들, 그리고 동양사상들을 받아들이고 비교, 분석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 외래의 철학사상들에 대한 수용과 전화의 충분한 시간이 지난다면 아마도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을 지양하고 능가하는 그들의 새로운 주체성을 표현하는 철학과 사상을 만들어 낼 것이 틀림없다.
우리들이 서양의 과학문명 가운데서 물질주의와 물질문명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들의 전통적 사유가 그러한 이해력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p214~217
2.
(...)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민족 자아 발견의 운동으로서 우리나라의 국학연구는 대부분이 상식적 역사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선 여기서 많은 국학연구의 기초와 방법으로서의 역사이해에 있어서 저지르는 두 가지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많은 한국학 연구가들이 복원적 역사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국적(國籍)있는 사상 또는 교육이라고 할 때 그것을 많은 사람들은 어떤 외세(外勢)의 영향 이전의 전통에서 발견하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자주 순수한 단일민족과 단일문화의 전통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렇게 순수한 단일문화의 실체를 과연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
오늘 우리나라의 철학, 과학, 경제, 교육, 예술의 전통 가운데 어떤 것이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와 미국, 유럽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의 영향과 공헌 없이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
둘째로, 우리나라의 국학개념 가운데는 현대의 문제를 해결, 지양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vision)이 없다. 아마 그 원인도 많은 국학연구가들의 잘못된 역사이해에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역사라는 것을 현재와 ㅜ 미래에 연결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미 과거에 끝나 버린 사건들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인의 정체(正體) 또는 민족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하여 ‘과거’만을 자꾸 들추게 되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긍지를 현재에서 찾을 수 없는 노인은 과거의 영광을 회고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미래가 있는 민족이라면, 어떻게 우리 자아의 정체를 단군신화에서 신라의 화백(和白)정신에서 조선의 건국 이념에서 찾음으로 끝날 수 있겠는가? 오늘 한국인의 성격, 행동, 자아를 규정하고 움직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그런 것들이 아닌 것이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 이 말은 과거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말이 아니다. 과거를 부정하고 미래를 향하여 역사를 만들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지배하고 결정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미래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민족 자아의 정립과정으로서의 국학연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재상황, 그리고 미래에의 비전을 향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학과 한국사상의 기초개념 정의와 체계구성 이전에 선결되어야 할 또는 적어도 전제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동서사상과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이다. 여태까지 많은 국학연구가들은 우리나라의 사회와 문화, 역사와 사상이 세계의 역사, 문화, 사상에 비할 때 어떤 특수성과 보편성이 있는 것인지 검토하지 않았다. 그 보편성과 특수성의 의미 또는 관계가 논리적으로 또는 인식론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수천 년의 서양 철학사 가운데서도 논쟁점이 되어 왔다), 이른바 국학이라는 것이 어떻게 한 독자적 영역이 되는 것인지 도대체 국학 또는 한국사상 존립의 근거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p220~223
5.
이제 문제는 오늘의 한국인이 이러한 역사적 단절과 소외의 체험 또는 그 체험의 특수성을 어떻게 극복하며 지양시키려고 하는가 하는 태도와 방법에 있다. (...) 첫째는 원형보존(原形保存)의 전개방법이다. 전통이나 관례에 내포된 공약수적 개념과 척도에서 벗어나는 특수한 단절의 현실이 다가올 때 이를 무의미한 것으로 배격하는 것이다. 또는 전통이나 관례에 이미 주어진 원형개념과 척도로써 어떠한 사상과 현실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고집하는 태도이다.
(...) 한 나라의 독자적인 말과 글을 떠나서는 그 나라 고유의 사상과 문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오늘의 상식에서 볼 때, 과연 한국의 과거 사상사가 정말로 한국인의 것이었는지 질문해야 한다. 그것은 넓은 기층민중의 체험에 바탕을 둔 말이나 사상의 역사가 아니었다.
단절의 충격에 대한 둘째의 반응은 대치해 있는 양자(兩者)를 혼합, 절충, 종합하려는 태도이다. 어느 한편에도 극단으로 치우치기를 꺼리는 조화사상의 소유자로서 가지는 당연한 태도인 것 같다. 중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사람들은 옛날부터 반(反)과 중(中)의 논리를 존중해 왔다. 자연의 질서와 인간 문명에 관한 사상의 원천으로서 <역(易)>과 노자의 <도덕경>이나 유가의 <중용>은 다 같이 도(道)가 극에서 극으로, 다시 이 극에서 저 극에로 돌아가는 반복의 운동을 한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어떤 극단으로도 지나치지 않는 ‘가운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최고의 지혜는 시중(時中)과 조화에 있다. 역시 극단의 실수나 주변(周邊)의 예외를 중심변혁의 발전적 계기로 인식하지 못한 중심유도(中心誘導)의 논리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절충과 조화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양문명으로부터 도전이 왔을 때 중체서용(中體西用)이니 동도서기(東道西器)니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극을 피하고 중(中)의 자리를 취한다는 것은 흔히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본질을 철저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양편을 절충하여 큰 실수를 면하자는 적당주의 태도일 수도 있다. 동양의 정신문명은 뼈대이므로 그대로 간직하고 서양의 과학문명은 응용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절충론은 다음과 같은 모순들을 안고 있다. 하나는 서양의 과학문명이 물질주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논한 바와 같이 주관과 독단의 일상세계를 탈피하고 초월하려는 정신(객관정신, 자유정신)에서 이루어진 먼 결과라는 점이다. 그리고 만약 한국인이 바라는 것은 그러한 과학의 정신이 아니라 그것이 응용되어 만들어진 실제적 기술과 그 산물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물질주의, 현실주의가 한국인의 사상 자체로부터 조성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 한편으로 근본이 되는 것(도덕정신)과 응용된 것(과학기술)을 이렇게 각각 동서문명의 전체적 틀에서 분리시켜 결합할 수 있다고 하는, 흔히 떠도는 발상 자체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지 못하고 다만 문화적, 사상적 혼란을 가져 오게 하는 것이다.
앞에 언급한 원형보존의 전개방식이나 혼합과 절충의 방식은 다같이 단절과 소외에서 오는 특수성과 잉여성 또는 극단과 주변을 개혁의 계기로서 인식하지 못한 데서 고착된 것이다.
(...)
해방 이후 한국인이 다시금 다른 외래문화와 사상을 서양세계로부터 받아들이고 있지만, 역시 과거 한국인의 생존과 사고방식을 지배해 온 중심유도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특수 주변적 처지를 뚜렷이 반영하는 독자적 문화와 사상을 오늘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전통으로의 복귀 또는 혼합이나 절충 또는 배타주의와 같은 창조적이 아닌 역사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인은 서양으로부터 온 과학과 철학을 연구한다고 하면서도 과거에 한문문화의 전통에 얽매이듯이 다만 거기에 예속되어 있다. 이렇게 오늘까지 계속되는 문화, 사상의 식민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이 오래된 중심유도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프랑스, 영국, 독일은 비록 그 문화적 원천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와 히브리사상에 두면서도 각각 그들 자신의 특수상황과 체험에서 우러난 생각을 가지고 독자의 전통과 사상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와 같이 주변유도의 논리로써 이끌어져 온 서구 문명권에서는 예외와 주변의 존재들이 역사발전과 중심변혁의 중요한 공헌을 해 왔다.
제 3부
서양 철학사론-논리적 탐구의 한계
- 옛날 그리스 비극의 사족으로서의 서양 철학사
1. 타자와의 만남인 철학사의 마디
1-1 운명에 도전하는 그리스의 이성
p230
인간의 내적 감정이나 마음의 세계를 찾았다고 하는 서정시인들조차도 운명의 기로에서 책임있는 결단과 사려 깊은 행동에 도달하기 위한 깊은 내면의 갈등이나 투쟁의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는 그의 좌절한 마음을 다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음이여
절망으로 흐트러진 마음이여
일이서 다오.
적을 향하여
네 가슴을 내밀고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키며
한 치도 뒤로 물러나지 말아 다오.
그러나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영웅은 그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의지할 수 있는 것이 그 자신의 통찰과 결단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비아(非我)의 세계를 향하여 자신의 결단과 행동으로써 대결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 비극의 영웅들은 숙명의 대결자인 비아의 세계로 둘러싸여 차츰 고독해진다. 그럴수록 그들은 자아의 의식을 확대하고 독자적인 결단과 행동의 가능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의사와 결단 그리고 행동은 더 이상 전통적인 도덕이나 관습 혹은 어떤 외적인 권위와 힘에 호소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그럼에도 이 비극의 영웅들의 결단과 행동은 아직도 보다 확고한 인간적인 바탕 위에 서서 닥쳐오는 운명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지배자인 운명의 질서를 절대의 지위에서 다만 이런 저런 합의와 결정, 말하자면 규약의 바탕으로 끌어내린 것은 소피스트들이었다.
1.2 유럽에 나타난 제2의 계몽시대
p239~240
(...) 과연 세계사는 자아와 이성의 자기 실현의 과정인가? 아니면, 자아와 이성의 통일과 조화기능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파국이 자아와 이성 저편의 세계로부터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인가?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해체시대가 자아와 이성이 가장 성숙해 버린 다음에서 시작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옛날 그리스의 비극적 비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아와 이성이 그의 한계를 넘어 타자의 영역을 집어삼키는 오만(hybris)에 빠질 때 보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서양적 자아와 이성의 정복대상이 된 것은 숲속에 잠자는 아프리카와 장구한 역사를 회고하는 아시아였다. 지금도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끝없이 확대하는 서양적 자아와 이성의 부분으로 전락하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제 서양의 타자정복의 길이 벽에 부딪치고 있다. 아프리카, 아시아적 자아와 이성도 세계를 대상으로 깨어났기 때문이다.
p241~242
“동양에는 왜 비극이 없는가?” 라고 문학가들은 시비를 벌여 왔다. 개인이 인격 주체로서 그의 단독적 의사와 결단을 행동에 옮기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갈등과 투쟁 그리고 숙명적인 파멸이 없다는 점에서 동양에는 비극이 없다. 그러나 존재와 자아 자체가 이미 겪은, 그리고 특히 그의 20세기 역사가 겪은 바와 같은, 반전과 허무 그리고 한(恨)의 체험을 비극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숙명적인 파멸에 임하는 동서(東西) 기질의 차이에서 야스퍼스가 그렇게 하듯이, 서양적인 전통을 전제로 하는 것일 뿐이다. (K. Jaspers, <The Tragic : Awareness ; Basic Characteristics ; Fundamental Interpretations>, Tragedy, eds. L. Michel & R. Sewall(Englewood Cliffs, N. Y. : Prentice-Hall, 1963 6~66쪽)
“서양에는 비극이 있는가?” 적어도 니체나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사상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사에는 비극이 없다. 그들의 역사에 나타난 철학적 자아는 언제나 성공적으로 타자를 매개하고 통일하는 주체로서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자아와 이성의 타자매개가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파국이나 비극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일이 없다. 타자 자기화에 대한 이러한 서양철학의 지극히 관념적인 낙관주의 전통 가운데서 19세기 헤겔에 의하여 절대자아의 철학체계가 완성되었고, 20세기 역사의 비극적 현실 앞에서 파산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수천 년 철학사의 전통으로 내려온 체계와 그의 합리성이 여지없이 깨어져 간 20세기 동,서양의 쓰라린 체험은 서로 유사하면서 대조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니체, 키에르케고르, 사르트르의 실존사상에서뿐만 아니라 러셀, 슐리크, 비트켄슈타인, 포퍼의 실증주의와 논리분석에서도 이성과 그의 본질파악에 의한 존재 및 가치매개의 가능성을 배격한 것은 타자 자기화의 서양적 체계와 합리성에 대한 종말을 고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세기 서양 철학사의 흐름은 참으로 외적인 타자, 타자의 전통에 의해서 송두리째 끊기거나 충격받은 것이 아니다. 그 흐름은 우리의 흐름과는 달리 아직도 그들의 전통적 문제의 장(場)에 머물러 있고 전통의 합리성을 줄기로 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플로티누스에서 헤겔로 이어져 온 존재와 사유를 잡고 그의 타자인 ‘존재 아님’ 과 그 ‘불합리’에 대하여 폐쇄적인 존재론과 합리성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 있다. 말하자면 존재와 자아와 이성의 질서 자체가 그의 타자인 ‘존재 아님’, ‘불가해(不可解)’, ‘애매성’에 의해서 뿌리뽑히는 비극의 비전을 그들의 존재론과 합리성의 역사에서 실현하고 이해한 일은 없다.
2. 가장 높은 진리에의 길인 비극
(...)
p248~249
타자를 자기화하는 자아의 동일성이 무너지지 않고 지탱되는 한, 그것은 그가 타자에게 매긴 진리가 증명되었음을 말해 주는가? 그것은 아직 반증되지 않았을 뿐, 그 밖에 아무것도 말해 주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증명은 그의 무모선 동일성이 최후의 순간에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초월의 타자에 부딪쳐서 그의 허구성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다 높은 진리는 증명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증과 반전으로서 ‘부딪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형식을 논하는 가운데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발견은 모름에서 앎으로의 변화이며’, ‘최선의 발견 형식은 반전에 따르는 것이다’. 앎이나 발견은 언제나 다름을 확인하는 데서 일어난다. (...)
진리는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인가? 증명이나 실험으로써 찾아 내는 것인가? 무엇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인가? 아니면, 믿음과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인가? 아니면, 명상이나 직관에 비쳐 오는 어떤 것인가?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다가오는 꼭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진리는 사람의 이런 저런 엮음으로, 만듦으로, 함(actus)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은 사람이 의도한 엮음과 만듦과 함이 여지없이 부서지는 비극적인 꼴(형식)에다 의도 밖에서 엮고 만들고 하는 자가 그의 뜻을 남기고 사라져 가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이 지나간 재난의 폐허에서 사람이 실현하려는 진리보다 언제나 큰, 비극 아닌 어떤 다른 꼴이나 논리로서도 잡을 수 없는 질서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 비극적인 꼴과 논리가 바로 20세기의 서양과 동양이 부딪치는 한 극점, 여기에서 싸우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진리로서 다가오고 있다.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고백한 소크랕체스도 ‘하지 않음으로써 안 함이 없다’는 <도덕경>의 노자도 ‘행위의 결실을 버리는 자는 진리에 이른다’는 힌두의 지혜를 간직한 <바가바드 기타>의 작자도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그런 진리의 비극적인 꼴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옛날 지혜자들의 한결같은 깨침이 또한 자아와 존재 자체의 끝없는 자기 실현을 고집해 온 2500년 서양 철학사의 큰 흐름에 반성이 있어야 함을 알려 주는 것이다.
2.탈(脫)스콜라시대의 신과 논리와 경험주의
- 근세철학의 방법은 새로운 것인가?
p253~254
(...)
근세철학의 시작은 수학적 실재관과 수학적 분석방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홉스와 데카르트는 (심지어 경험주의자인 로크까지도) 갈릴레이가 보여 준 수학적 실재관 또는 수학적 분석방법(분해와 결합의 방법)에 대한 진지한 추종자들이다. (...)
홉스는 복잡한 명제들의 집합이 몇 개의 단순하고 자명한 명제들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기하학의 방법에서처럼 인간성에 관한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명제들로부터 그의 정치학의 체계를 유도해 내려고 하였다. 인간성에 관한 단순하고 기본적인 명제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인 개인들에 관한 관찰들로부터 얻어진다. 한 복잡한 사회의 움직임을,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 곧 개인적 동기의 움직임으로 분해하는 것은 상상적 가설절차에 의한 것일 뿐이다. 이는 마치 갈릴레이가 한 운동하는 물체의 실제궤적을 상상적으로 분해해서 그 구성요인(실제로는 관찰할 수 없는 좌표 위의 수치(數値))들의 결합에 의해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상적 분해 및 추리에 의해서 홉스는 인간성에 관한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두 가지의 가설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 하나의 명제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누를 힘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투쟁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보다 중요한 명제는 ‘모든 사람은...해로운 것, 무엇보다도 자연이 가져다 주는 것 가운데서도 가장 해로운 것, 곧 죽음을 피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가설적 명제로부터 연역해 낼 수 있는 명제는 다음과 같은 자연상태에 관한 서술이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할 만한 어떤 공통적 힘이 없이 살아가는 한, 그들은 전쟁이라고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전쟁은 마치 모든 다른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람의 전쟁과 같다.
이러한 상태에서 노력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력의 결과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구상에 어떤 문화도 있을 수 없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곤란한 것은 계속되는 공포와 횡사(橫死)의 위험이다.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쾌하고 동물적이고 짧을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기본가설에 바탕을 둔, 자연권(自然權)의 행사와 자연상태에 대한 연역적 설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생명의 보존을 위해서 반성적으로 보다 나은 수단을 추구하도록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리하여 자기 생명의 궁극적 안전을 위해서 행사할 수 있는 자연권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의 자연권의 제약을 보장하는 절대권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 귀결이다. 홉스는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의 질서정연한 체계가 있는 것처럼 인간 사회의 통치관계를 지배하는 원리들이 논리적으로 체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2. 탈(脫)스콜라시대 : 신의 섭리와 논리적 질서
한 시대의 고유한 모습 가운데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그 시대의 논리학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논리적 고유성을 순수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대안으로 우리는 논리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구체적 표현들 가운데서 그 시대의 핵심되는 정신 또는 논리를 파악하려고 한다. 따라서 흄의 경험주의에서 극치를 이룬 영국 계몽주의 철학의 발전을 지배한 논리와 정신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그들의 사회와 도덕방면에 관한 사상의 근원을 돌이켜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맥킨타이어(A. MacIntyre)는 서구의 고전 윤리학의 역사 가운데서 도더적 규범을 정당화하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고 말한다. 첫째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규범의 정당성은 인간의 욕구와 성향이 일정한 가치를 지향하도록 훈련하고 이끄는 데서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에서처럼 신(神)의 계명을 지킬 때는 보상이 주어지고 어길 때는 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셋째로, 옛날 그리스의 소피스트와 홉스에서처럼 정당성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원하는 것을 보다 많이 가져다 줄 행위에서 찾아간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의 경향이 홉스로 시작해서 벤담의 공리주의에 이르는 영국 계몽주의 사회사상의 발전과정에서 확고하게 되었다.
이 철학에서 인간성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고,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과 그것을 공급하기 위한 수단이 행위의 기준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필요를 실현하려는 개인의지들의 대결장소가 바로 사회이다. 여기서 새로운 시대의 존재, 곧 ‘개인(individual)’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는 권위와 권리 등 가치를 배분하고 계층들 사이의 차등적 관계를 규정해 주던 중세시대의 사회적 유대가 무너지면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3. 영국 경험주의의 이중구조 : 증명의 합리성과 관습의 합리성
p263~269
14세기 서구세계에 나타난 계시와 이성이라는 대립구조는 엄밀한 증거에 대한 이념(理念)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증거를 묻고 추적하는 엄밀한 태도 때문에 세계는 실체 없는 속성들 또는 속성 없는 실체들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변화 또는 인과에 관한 법칙은 하나의 관찰사태와 그에 관련된 다른 하나의 관찰사태에 대한 단칭명제들에서 연유된 기대이며 가정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제생활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앙과 지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직관적 증거나 논리적 증명도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놓여 있음이 확실하다. (...)
20세기 영국 분석철학의 한 주류를 대표하는 무어(G.E. Moore)에 의하면, 철학의 주요한 활동은 주어진 결론 또는 주장에 대한 이유를 찾는 데에 있다고 한다. 주어진 결론에 대한 적절한 또는 적절하지 못한 이유는 어떤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이 바로 철학자들의 의견을 다양하게 만들어 온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비추어 볼 때 지금까지의 철학체계의 발달사는 적절한 이유를 갖지 못한 결론 또는 주장을 버리면서 보다 적절한 이유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결론과 주장을 찾아온 역사라고도 생각된다. 여러 세기를 거친 스콜라시대 사상의 발전 끝에 얻어진 결론, 이성과 신앙의 분리는 정당화될 수 있는 적절한 이유가 이원화(二元化)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리고 적절한 이유의 세계가 이원화된 것은 철학적 이성이 추구한 이상적인 적절한 이유가 궁극적으로 엄밀한 증거 또는 증명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영역에서 통용되는 신앙과 지식이 엄밀한 증거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이론적 결론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난 잉여(剩餘)의 세계에 놓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근세시대의 선구적 계몽주의 철학자 로크의 경험주의 철학은 이른바 본유관념(innate idea)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원리가 본유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면 인간은 그것을 그의 이성과 경험의 능력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믿음으로써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로크에 의하면, 진정한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주어진 정보에 대한 우리 자신의 판단에서 이루어진다. 로크가 본유관념을 배격하는 이유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감각(sensation)이나 반성(reflection)으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경험적 증거에 의해서도 떠받쳐지고 있지 않은 가설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사유내용을 구성하는 관념들 가운데 어떤 경험적 증거도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들도 궁극적으로 소급해 올라가면 어떤 감각 또는 반성의 경험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감각과 반성에 의한 경험이 지식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념세계는 감각이나 반성이라고 하는 경험적 증거의 기준에 의해서 검토되어야 한다. 경험적 증거에 의해서 주어지는 세계와 주어지지 않은 세계의 구별이 아직 소박하긴 하지만 경험주의의 중요한 원칙으로 생겨난 것이다.
주어진 하나의 사건에 관련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흄은 물었다. 한 사건에 관련된 어떤 사건에 대해서 관찰을 할지라도 그 두 사건 사이의 관계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고 하는 어떤 직관적 증거도 논리적 증명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흄의 주장이다. 하나하나의 사건은 각기 독자적인 존재이며 서로 다르고 구별될 수 있고 떨어져 있는 것이다. 사건 A와 B 사이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직관적, 논리적 증거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A와 B사이에 걸쳐 있는 ‘연결’에 대한 어떤 관찰도 할 수 없고, 우리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건 A로부터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건 B가 연역되어야 할 어떤 ‘논리적’관계도 찾을 수 없다. (...)
어떤 대상도 그 자체 안에 그 대상 밖의 것에 대한 어떤 결론을 연역해 낼 수 있게 해 주는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대상들이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병행되는 것을 관찰한 다음에도 우리들이 관찰한 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관한 어떤 추리를 전개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는 우리가 몸을 담고 살아야 하는 자연 또는 현실 가운데 직관이나 논리로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의존할 만한 법칙과 질서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정밀한 이유에 의해서 짜여진 논리의 사상보다는 자연의 법칙과 현실의 질서에 대한 소박한 믿음이 실제생활에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인정한다. (...)
이 믿음들은 논리적으로는 아무 정당한 이유를 갖지 못하면서도 가장 생생하고 확고한 현실로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우리의 ‘사유 가운데서 다른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며 우리의 정열과 상상을 일으키는 큰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이 믿음들은 ‘모든 우리의 행위들을 지배하는 원리들이 된다.’
마치 물리학자 뉴턴이 자연의 모든 운동을 지배하는 기계적 원리를 인력작용에서 발견하였듯이, 흄은 인간의 신념과 행위의 지배원리를 상상 또는 연상의 규칙들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상상 또는 연상의 규칙들은 세계에 대한 인상들을 제멋대로 결합하거나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 규칙들은 경험의 쌓임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궤도를 따라 주어진 인상들을 일정한 관념 또는 신념으로 결합하고 구성한다. (...)
그러나 흄은 경험적 증거에 대한 직관적, 논리적 기준 때문에 홉스의 이기주의 심리학의 가설에 의한 또는 로크의 자연권 사상에 근거한 도덕 및 사회질서 구성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규칙들, 예를 들면 도덕, 법률, 그리고 관습들이 선험적으로 주어졌거나 자연법칙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 규칙들은 필요에 따라서 사람이 지어내는 것(artifice)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일일이 어떤 합리적 이해타산을 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약속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랜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흄에 의해서 규약(convention)이라고 불리는 이 규칙들의 유일한 정당성은 그것들이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관습의 원리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흄은 규약과 관습의 존재이유를 밝힘으로써 ‘계시’또는 ‘자연’이라든가 ‘계약’과 같은 비경험적 근거에서 어떤 도덕 및 사회질서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초월주의 또는 합리주의적 태도를 포기할 수 있었다.
4.맺음말
(...)
p271
A라는 원인에 대하여 B라는 결과를 연결하는 대신 또 다른 하나의 사건 C 또는 D라는 결과를 연결하더라도 어떤 모순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 인과관계에 대한 흄의 분석배후에는 엄밀한 지각적 증거에 대한 요청뿐만 아니라, 무모순(無矛盾)의 추리, 곧 연역적 증명에 대한 논리적 이념이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직관적, 논리적 증거에 대한 요청은 바로 정확한 이유에 대한 요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흄은 개연(蓋然)주의자, 경험주의자, 회의주의자이기 전에 연역주의자였다. 정확한 이유에 의한 추론, 무모순의 증명이야말로 서유럽의 철학사가 공유하는, 그리고 특히 영국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경험주의, 개연주의의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형식화되기 이전의(unformalized) 순수논리로서 체계 밑바닥에 지니고 있는 이론적 이상이며 정신이다.
그러나 영국 경험주의자, 특히 흄이 지니는 또 하나의 특이한 태도는 정확한 이유, 무모순의 증명에 대한 요청이 어디까지나 논리적, 이론적 기준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실제와 실천의 현실에서는 별도의 이유 또는 별도의 합리성을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실제와 현실세계를 어떤 정밀한 이유로 잘 짜여진 이론이나 논리적 질서로 이해하고 취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현실의 삶은 이론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흄은 현실의 삶에서의 습관과 관습의 존재 이유를 밝힘으로써 이론적 합리성 밖에 실제의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밝히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론(증명)의 합리성과 실제(관습)의 합리성 사이의 경계선은 고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애매하게 놓여지기도 한다.
3. 현대철학의 방향ㅡ합리적 토대의 붕괴
p276
...그런데 고도성장을 위해서 요청되는 전체주의적 계획과 관리는 개인적, 사적(私的) 생활영역의 침해 내지 지배를 가져 온다. 말하자면 고도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한 계획과 통제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의 생명인 개인의 노동 및 이윤추구에 대한 의욕과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 체제가 요청하는 국가의 통제와 개인의 의욕(동기)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현상이다.
p277
사회학자 알벵 굴드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를 다른 측면에서 분석한다. 그에 의하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지탱해 주는 것은 물질적 생활수준(말하자면 GNP)의 향상, 소비성향 및 감각적 쾌락의 충족이라고 한다.
이러한 수단 이외에 그 사회체제의 다변화된 계층들을 통합시켜 줄 어떤 다른 수단, 말하자면 그럴 만한 도덕 또는 이데올로기가 결핍되어 있음으로 해서 이 사회의 정당성은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어떤 도덕적 질서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소비성향과 감각적 쾌락의 충족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을 통치한다. 그리고 사회의 통치계층이 이데올로기를 조작해 내는 문화에 무력함으로 인해서 그 자신을 합리화해 줄 이데올로기는 더 찾기 힘들게 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라기 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실패'에 따르는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라는 것이다.
...
말하자면 기술, 과학, 경제의 합리화 체제와 일반문화의 반주지주의적 쾌락주의적인 경향 사이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그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어떤 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벨은 지적한다.
p278
물질적 생산양식이 또는 공동의 가치체계가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고 말하는 하버마스와 파슨스의 일원론적 해석에 대하여 그는 사회실재의 다원론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사회라는 것은 불안정하게, 그러나 각각 독자적인, 때로는 서로 반대적인 원리들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는 몇 개의 영역들로 구성된다고 본다. 능률과 합리성에 의존하는 사회-경제영역, 정의와 정당성을 문제삼는 정치영역, 그리고 자아실현과 쾌감의 원리에 따르는 문화영역이 있다. 앞에 지적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사회,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의 영역들을 지배하는 원리들 사이의 갈등을 의미한다.
2. 이데올로기(합리성) 분석의 역사
p279
인류는 언제나 그들의 사상과 실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합리성에 호소해 왔다. ... 그리고 이러한 합리성이 특정한 실천대상과 정책에 적용될 때 이데올로기의 구조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구조 또는 이데올로기적 사유에 대한 분석은 합리성에 대한 분석에 의존하게 된다.
p280~1
인간 이성의 제약조건과 한계에 대하여 분석하기 시작한 체계적 철학자들은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이다. 이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중요한 관심사는 생존과 행복에 있다. 인간 이성은 그 자체의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생존과 행복이라고 하는 실제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 특히 흄에 의하면 과학과 도덕을 구성하는 원리는 습관과 감정의 작용이며, 인간 이성은 그러한 작용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과학체계와 도덕질서에 부여된 합리성이란, 습관과 감정에 주어진 원초적 믿음들을 변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 칸트에 의하면 합리성은 인간적 이해력의 형식이며 세계 자체의 질서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합리적 질서는 인간 이성이 지닌 선험적 제약조건들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다. 헤겔은 개인, 집단, 국가, 시대들이 세계사를 지배하는 정신의 특수한 표현양식이며 특수한 도덕과 법률, 과학과 종교들이 한 사회, 한 시대의 특수한 조건들에 의해서 규정되는 산물들이라고 본다. 한 특정한 개인과 집단이 지지하는 합리성 그리고 한 사회의 도덕과 법률의 합리성이 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제약조건들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헤겔의 역사주의적 분석에 따라 맑스는 인간의 사유와 관념체계들의 합리성이 각기 특수한 역사적, 사회 경제적 제약조건들에 의해서 조작되는 것이라고 밝힌다. 어떤 사유와 관념체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분석'이라는 것은 한 체계의 합리성이 그와 같은 조건들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라고 밝히는 데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분석을 모든 사유와 관념체계들의 구조에 적용한다면 인간의 이성 내지 합리성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맑스가 현대의 지식사회학에 대하여 제시한 길은 바로 이러한 인간 이성 또는 합리성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맑스의 암시에 따라 칼 만하임이 수행했떤 것처럼 이데올로기의 분석은 인류가 오랫동안 의지해 오던 합리성의 근거를 여지없이 흔들어 놓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은 합리성의 위기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사유와 관념체계들의 위기를 몰고 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전적 합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분석은 결국 이데올로기적 사유 자체의 자폭(自爆)을 초래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은 한편으로는 이와 같이 이데올로기적 사유의 자폭에서 오는 당연한 결론이며, 그리고 한편으로는 불가피하게 다원화되고 개방적인 사회체제의 피할 수 없는 징조로서 나타난 것이다.
3. 비판철학 방법으로서의 탈(脫)이데올로기
그러나 우리사회에서도 수백 년을 유지해 오던 경제, 정치, 교육체제가 단절되고 무너졌으면서도 새로이 잡히는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는 아직도 정착되지 않은 채 신구시대(新舊時代)의 것들이 갈등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전통의 단절, 현실과 이념의 불협화 속에서 어떤 것을 정당화해 줄 이데올로기를 찾을 수 있는가? 단일한 이데올로기(유교 전통의 500년) 사회를 탈피하여 황급히 뛰어든 이 불연속, 불협화의 세계를 이해하고 다스릴 우리의 새로운 사유체계는 무엇인가?
p282
이데올로기 또는 이데올로기적 사유가 불가결한 것인가, 아니면 탈피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경험론과 관념론 사이의 오랜 논쟁은 사회이론 내지 사회과학에 적용함으로써 제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논리경험주의자들에 의하면, 우리는 인간의 희망적 사유나 신념에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 세계에 관한 이론과 가설을 형성하는 기초는 경험적 관찰자료이다.
그런데 경험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관찰자료 또는 관찰자료의 타당성을 결정하는 기준 자체가 인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선험적 관심, 전제 또는 제약조건들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세계에 관한 관찰자료들은 있는 대로의 실재를 소박하게 그려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직관과 사유형식에 의하여(칸트), 또는 이데올로기적 사유에 의하여(맑스, 만하임), 또는 '패러다임'이라고 불리는 것에 의해서(토마스 쿤) 조작된 것이라고 하는 견해이다. 현대 서구 및 영미 철학계의 방법론에 영향을 주고 있는 이러한 접근방식은 관념론의 전통에 의해서 분명하게 부각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가정 또는 전제도 밑받침으로 하지 않은 객관의 세계를 인식하거나 서술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전통적 관념론의 공헌이 무엇이냐 하면, 세계에 대한 관찰 또는 경험적 서술 이전에 이미 그 밑바탕에 이러한 전제조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 준 점이다. 현대 영미 철학계의 방법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paradigm), 비트켄슈타인 또는 피터 윈치의 삶의 형식(forms of life) 그리고 지식사회학의 이데올로기적 분석은 모두 영미 철학계에 침투된 관념론적 요소이다.
p284
이데올로기의 분석, 그리고 탈이데올로기는 비판정신의 표현이다. 그것들은 실재에 관한 어떤 형이상학이나 이데올로기에도 안주(安住)하지 않으려는 비판철학의 입장이다. 실재에 관한 어떤 사유체계도 이데올로기적 조건분석에 의하여 그 합리성이 파멸되는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견해는 20세기 방법론의 첨단을 걸어가는 현대 분석철학자들의 의도와 비슷한 점이 있다. ...
우리는 다양한 이데올로기, 형이상학, 과학이론(다양한 합리성)들이 충돌하는 상쇄작용에 의해서 보다 높은 '객관의 세계'로 해탈하려는 것이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객관세계는 탈합리성(脫合理性)의 틀 위에 설 수 있다.
... 합리외적(合理外的) 세계에 대하여 개방적일 때 자기 반성과 비판의 자세가 이루어진다. 합리성에의 단순한 호소는 독단적 철학을 낳는다.
4. 비판철학 정신으로서의 실증주의
p285~6
객관적, 가치중립적 과학 그리고 인간의 주관적 의식활동의 영향이 배제된 자연 및 사회체계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가? 또 그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현상학적 세계이해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은 이러한 세계이해의 태도를 인간 정신의 굴복이라고 진단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주체의식과 정신세계를 포기하고 객관의 자연질서 및 사회체제에 예속되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연, 사회, 역사가 인간의 정신과 주관으로부터 독립해 있는(소외된), 그리하여 역으로 인간의 정신과 주체의식에 대하여 위협적인 괴물로 화해 버렸다는 것이다. 후설에 의하면 과학의 대상인 자연도 사회도 역사도 모두 인간 정신의 구성물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시작된 근대과학의 발전에 기초를 둔 객관주의적이며 몰인간적인 과학문명은 자연, 사회, 역사로부터 인간을 추방하는 현대의 비극을 낳게 된 것이라고 한다.
객관과 몰인간의 과학과 과학문명 가운데서 다양한 인간체험, 의식세계 그리고 순수정신과 같은 것은 다만 주관적 환상이라고 배척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관성과 정신의 세계를 추방하려는 근대과학의 발전은 현대문화 또는 문명을 반정신(反精神) 또는 반철학(反哲學)의 경지로 몰아넣게 된 것이다.
p287
실증주의는 과학이 성립하는 과정을 지배하는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과학이 불가피하게 지니는 인간적이고 철학적인 전제들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전제들을 반성하고 그러한 제약조건들로부터의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탈출 가능성을 추구하는 비판적 전략 또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증주의는 일정한 과학체계이기 전에 사유의 방법이며, 방법이기 전에 객관의 정신이다.
p288~9
대상세계와 인간 정신 사이의 관계는 현대물리학, 예를 들면 상대성 이론이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도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현상과 현실세계는 그것이 자연에 관한 것이든지 사회에 관한 것이든지 간에 인간 정신의 활동이 전제되지 않고서 이해되거나 구성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막스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이와 같은 관계, 즉 현상 또는 현실세계의 구조와 그 근거로서 전제되어 있는 인간 정신의 활동 사이의 관계를 특히 사회영역 가운데서 잘 해명해 준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현상 내지 현실구성의 원동력으로서의 정신활동을 전제하면서도 관념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객관성에 대한 높은 기준을 지킨 훌륭한 비판철학의 선구자였다. 그는 선험적 정신활동에 의해서 구성된 현상세계 밖에 절대 객관성의 척도로서의 본체세계가 있을 수 있음을 상상(想像)하는 자기 탈출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선험적 전제 또는 제약조건을 객관화하려는 칸트의 정신에서 그리고 후기 실증주의 과학철학의 전개에서 똑같이 이데올로기적 합리성은 인간 정신의 불가피한 동반자이기는 하지만 반성하고 해방되어야 할 제약조건이라고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객관성에 대한 선험적(先驗的) 기준을 제시한 칸트의 정신을 대변하는 철학자로서 칼 포퍼를 들 수 있다. 그는 귀납의 논리 또는 검증의 논리를 배격하고 추측과 반박(conjecture and refutation)의 논리를 주장함으로써 객관에 대한 칸트적 비판의식을 표현하였다. 폴 파이어아벤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지식의 객관성에 대한 고도읫 ㅓㄴ험적 비판의식을 가지고 지식의 무정부론(anarchism)을 제의하였다.)
4. 현대 사회의 분열구조
p292~3
그러나 한 국가체제가 그 생존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요청하는 전체계획과 거대산업의 조직은 필연적으로 개인적 자유 또는 사적 생활영역을 침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딜레마에 몰린 많은 철학자, 사회이론가들이, 과연 개인의 자유와 사적 생활세계는 회복될 수 있는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를 논해 왔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회복에 관한 문제의식과 사상으로써는 이해하거나 해결될 수 없는 후기 산업사회에서의 인간 과제의 새로운 측면을 밝힐 필요를 느끼게 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오늘의 산업사회에서 제기되는 심각한 인간 과제들은 인간회복의 사상들이 공유하는 철학적 전제, 곧 일차원적 과학과 문명비평론으로써는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1. 일차원적 사회와 인간회복의 사상
p295
그러나 현상학적 세계이해에 의하면 모든 인간적, 주관적, 환상적 체험세계는 어떤 객관적 자연 및 사회적 사실로도 설명될 수 없는 독자적 실재성을 지닌 현상이다. 그것은 어떤 객관주의의 선입견도 없이 우리 경험에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느껴지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물리적 또는 객관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마음의 현상으로 의식될 수 있는 모든 주관적 차원의 경험들을 인식대상으로 한다. 이것은 인식영역의 확장을 의미한다. 여태까지 인간 주체의 지위와 역할이 무시되었던 객관적 자연 및 사회세계에서 인간적 차원이 회복됨을 의미한다.
객관적으로는 인간 및 사회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통일체계로 서술할 수 있을지 모르나 현상학적으로 현실세계는 여러 개의 다중적 세계들로 파악된다. 이 다중적 생활세계들은 인간 위에 군림해서 인간을 지배하거나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객체로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주체적, 자율적으로 만들어지는 체험세계이며 현상세계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세계이해는 현대사회체제의 객관적 구속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거의 모든 사회이론들의 철학적 기초가 된다.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간(소외된) 사회체제, 그 거대한 객관적 법칙의 체계에 노예로 된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인간 본래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길을 마련해 주고 있다.
2. 모순구조의 전개 : 공적 및 사적 세계의 분열
현상학적 세계이해에 따르면,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객관적 사회의 전체주의 체계를 떠나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사회집단 또는 개개인은 각기 그 고유의 생활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를테면 개인은 아무리 사회적 유대관계 또는 전체주의 지배체제가 강화될지라도 이러한 객관적 환경과는 완전히 격리된 별도의 의식세계, 생활세계를 사적(私的)으로 보유할 수 있다. 인간을 배제하고 소외시킨 일차원적 공적(公的) 사회체제가 현상학적 인간회복에 의해서 인간화되거나 인간에게로 접근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자신이 일원화된 공적 사회체제로부터 스스로 떨어져서 자기 안의 사적 생활세계를 개척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
그리고 이러한 괴리관계는 단순히 서로 다른 사회이론, 곧 체제중심적 사회이론과 현상학적 인간중심의 사회이론에 의해서 두드러진 문제라기보다는 현대의 산업사회체제가 지속됨에 따라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실제적 추세로 보인다. 현대산업사회의 비(非)인간화 소외의 경향이 지속되고 깊어질수록 사람들의 개별적 생활세계ㅡ그 내면의 의식, 그 진정한 의도, 그 개인적 사고와 가치들은 더욱 격리된 고독한 곳에서 전개될 것이다.
인간을 소외시켜 사물화(objectification)하는 사회체제의 추세와 인간 자신이 스스로 객관화된 체제를 떠나 개별적, 사적 세계로 수렴(privatization)되어 가는 경향 사이의 괴리관계는 현대산업사회 또는 국가체제가 정착됨에 따라 더욱 심화되어 가는 것이다.
p297
18세기 사회사상가 루소는 이러한 근대문명 또는 현대사회체제의 필연적 귀결을 일찍 간파했던 사람이다. 사회체제가 거대하고 강력해질수록 인간은 그 체제로부터 소외되며, 따라서 인간 자신이 스스로 체제로부터 벗어나 개인적, 사적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됨을 암시하였다. 예를 들면 국가 구성원의 수가 증가할수록 국민 개개인은 국가적 결정에 행사할 영향력을 잃게 되며, 따라서 국가적 결정에 덜 공감하게 되고 덜 동조하게 되면 그럴수록 국가는 더 큰 강제력을 동원해야 하고 이는 다시 개개인으로 하여금 국가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소외의) 길을 택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사회체제 속에서 인간은 능동적으로 자기의 세계를 소외시키려고 한다.
현대의 많은 사회이론가와 철학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현대사회체제를 개탄한다. 그러나 이제 다가오는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의 세계를 외부적 환경, 사회체제로부터 소외 또는 도피시키려고 하는 데서 (또 그러한 개체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데서) 그 심각성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사회가 부딪치게 될 과제는 몰(沒)인간적 사회체제에 대하여 자율적 인간의 회복을 꾀하는 데 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사회체제의 인간 소외와 개개인의 능동적 자기 소외의 상호호응적 경향은 치유 불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차원적 사회에 있어서 인간회복운동이란 돌이킬 수 없는 경향에 거슬리는 시대착오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p298~9
...그러나 이렇게 해서 발굴된 사적 생활세계들, 그리고 서로 모순되는 세계이해의 틀들이 어떻게 한 일원화된 사회체제 내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 서로 모순되는 방향으로 심화된 사적 세계와 공적 세계 사이의 모순 또는 갈등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적어도 마르쿠제가 제시한 일차원적 인간 및 사회비판의 논리로써는 이해되거나 해답될 수 없는, '70년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후기 산업사회의 새로운 사태라고 생각된다.
...
마르쿠제를 비롯한 많은 산업사회 비판가들은 오늘도 개인들 위에 그들의 공적, 사적 생활세계들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하나의 커다란 사회체제가 군림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일차원적 사회체제의 이해는 플라톤, 루소, 헤겔, 파슨스에게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은 사회 전체를 묶어 놓은 한 통일적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실재를 진단하는 다렌돌프와 다니엘 벨 등에 있어서는 그러한 원리가 없다. 그들은 물질적 생산양식 또는 공동의 가치규범이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고 말하는 마르쿠제와 파슨스의 일원론적 견해에 대항해서 사회적 실재의 다원론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벨이 암시하는 현대사회의 실재라는 것은 각각 독자적인 때로는 서로 반대적인 원리들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는 몇 개의 불안정하게 결합된 영역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질적 영역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사적, 공적 생활세계들의 불연속적 구조 또는 모순적 구조를 포함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새로운 공존양식 또는 거기에 따르는 사유형식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철학자-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가 일찍이 전통적 형이상학, 종교, 이념체계들의 종말을 선언했음에도 그것은 아직 시대적 필연성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195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벨이 사회실재의 다원화라고 하는 시대의 추이를 명확히 관찰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역설할 수 있었다. 그의 이데올로기 종말론은 단일화를 지향하는 합리주의의 쇠퇴와 문화의 대중화 경향 또는 복합경제체제의 등장과 같은 해체확산적 시대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3. 모순구조 속에서의 인간교육
p300
본디 인간의 사상과 사고방식은 사회현실의 변화를 흡수하고 거기에 적응함에 있어 시간적으로 지체되는 경향이 있다.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공적, 사적 생활세계의 분열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대사회에 적합한 어떤 기존의 사유체계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현대인은 여전히 구(舊)시대의 사유체계 속에 머물러서 자기 사유와 행위의 좌표에 차질과 무리를 일으키고 있는 많은 예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론과 사상이 현실세계의 발전을 미처 따르지 못하는 상태를 이론과 사상의 지체(遲滯)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현대사회의 급속한 발전으로 일어난 공적 및 사적 생활세계의 분열과 갈등은 공유하는 현실세계의 상실을 그리고 통일성을 지향하는 사유에 혼란을 가져 오고, 이것은 다시 기존하는 사유 및 행위체계의 무효를 뜻하는 것이다. 지체현상으로서 현존하는 사유 또는 행위체계는, 그것이 하나의 철학으로 표현된 것이든 정치,사회,이데올로기로 표현된 것이든 간에, 현실적으로 무용(無用) 무력한 것이라고 하는 인상을 현대인에게 준다. ...
그럼에도 어떤 설득력도 지닐 수 없는 기존의 이념이나 가치체계들이 아직도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에 그대로 강요되고 있다.
3-1. 소외는 회피해야 할 것인가?
p302
...이미 논의된 바와 같이 후기 산업사회에서의 의식의 움직임은 그러한 사회체제에 무조건 반항하거나 그 체제의 인간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그러한 체제에 기능적으로 적응하고 한편으로는 그러한 공적 생활체제와는 격리된 각기의 사적 생활영토를 확보하려는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공적 체제와의 괴리 또는 소외관계는 후기 현대사회를 형성하는 인간 존재의 필수적 조건이다.
...
그러나 동양사람들은 특별히 그들의 오랜 사회 공동체에 대한 비(非)개인주의적 귀속감 때문에 위와 같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이행함에 있어 보다 큰 충격을 받는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유교의 가르침에 의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곧 부자(父子),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 사이의 유기적 결속관계가 강조되어 온 동아시아사회에서 소외 또는 괴리관계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일 수 있다.
p303
소외 또는 괴리관계는 현대사회에서의 인간 존재의 필수조건일 뿐만 아니라 역사발전의 한 단계로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외관계는 일차원적 사회지배체제로부터 개별적 생활영토를 해방시켜 주는 자유로운 존재(또는 삶)의 조건이기 때문에 오히려 독립된 개별자로 하여금 창의와 독립의 정신을 갖게 하는 발전의 계기로 수용될 수 있다. 소외자는 체제 속에 파묻힌 일상적 자기를 분리시킴으로써 반성하고 따라서 떨어져나간 세계를 재(再)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소외관계의 체험 없이 자기 반성과 세계 재해석의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소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개인과 사회, 개인과 개인 사이의 긴장관계가 반성과 창조의 역사적 계기를 만든다. ...
소외관계의 체험으로써 인간은 성숙한 자아 및 세계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객관적 과학이 추구하는 성숙한 세계인식이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 또는 역사와의 소외 또는 모순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듯이 자아의 진정한 반성과 성숙도 소외된 또는 객체화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주체적으로만 파악된 역사, 사회, 자연은 성숙한 과학적 인식의 기초가 될 수 없고 그러한 기초는 오직 소외관계를 계기로 해서 다시 이루어지는 객관의 차원에만 주어지는 것이다. 후기 현대사회에서의 소외관계는 인간이 보다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3-2. 무정부상태는 극복될 수 있는가?
p304~5
...이제 그 제약조건인 사회체제 자체가 갈등관계에 있는 생활영역들로 분열될 때 보편적 가치 또는 인식의 타당성에 근거한 대화 또는 담화세계(universe of discourse)의 형성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분열과 단절의 세계 위에 군림하는 어떤 보편적 가치와 인식의 타당성도 발견하지 못할 때 인간은 허무주의나 무정부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세계가 하나의 역사 공동체로 돌입하던 20세기 초에 이미 시대변천의 잠재적 가능성을 예견한 니체, 키에르케고르 등 철인들에 의해서 거론되기 시작한 무규범, 무정부상태 그리고 허무주의를 이제 사회적 현실로서 우리는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3-3. 대화는 가능한가?
산업사회의 급격한 진행과정에서 전통이 단절되고 공적 사회체제와 개별적 생활영토들 사이의 분열이 심하면 심할수록 보다 많은 이데올로기, 가치와 인식체계들이 난무하며 제각기 세계의 패권을 향하여 다투게 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념, 가치, 인식체계들이 충돌, 상쇄되는 무정부상태 가운데서 미래사회의 인간은 반드시 그러한 무정부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그러나 연속성과 통일을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는 새로운 대화 또는 사회관계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
아직도 우리는 흔히 서로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대결자들이 각기 상대자에게 대화의 광장으로 들어올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각자의 생활세계들이 분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공동의 광장을 찾아 대화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속할 것이다. 이렇게 공동의 광장을 찾을 수 없는 세계에서는 비(非)연속성과 모순관계를 전제로 해서 대화가 전개될 수밖에 없다.
고도로 훈련된 대화는 본디 소크라테스와 포퍼에 의해서 암시되었던 것처럼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와 모순으로부터의 반응을 추구하고, 불연속, 단절의 계기를 확인함으로써 보다 역동적인 합의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언제나 반대와 모순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이미 박힌 가치기준과 세계인식의 편견에서 탈피하여 보다 객관적인 그러나 반드시 그 실현을 전제하지 않는 동의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 현대사회에서 이해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교육과제는 훈련된 대화능력의 습득이라고 생각된다. 미래사회의 구조적 특징인 모순과 분열관계는 단련된 대화관계로써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3-4. 어째서 물질주의적인가?
p306~8
서양 문화권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한국인의 물질주의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후기 산업사회에로 진행하는 한국사회, 한국문화의 실상(實相)을 반성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될 것이다.
첫째로, 도덕 실천주의와 실학사상의 전통을 수용해 온 한국사회가 최근에 받아들인 현대과학문명 가운데서 실제적 효용성의 추구 밖에 다른 차원을 전혀 습득하지 못하게 만드는 풍토와 사조에 그 원인이 있다.
...
그러나 실제 효용성을 추구하는 오늘의 한국문화와 교육의 불균형적 발전은 반성능력을 결여한 결과주의와 물질주의를 초래하고 과학문화의 지속적 저력으로서의 순수이론 정신, 말하자면 비효용의 효용의 차원을 망각하도록 만들어 가고 있다.
둘째로, 다원주의를 토대로 한 사회질서 형성에 체험이 없는 한국인이 현대산업사회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자유경쟁의 시장체제를 받아들였다는 데서 물질만증주의가 유래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 특히 한국사회에서 오래 지속되어 온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층질서가 현대산업사회체제에 의해서 여지없이 붕괴되었음에도 가치서열의 일원주의 척도는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산업사회에서 피상적으로 부각되는 실제적 효용가치, 곧 물질적 재화(財貨)를 최고의 결정적 가치로서 받아들인 한국인에게 다른 종류의 가치가 으뜸이 될 수 있는(예를 들면 명예, 자유, 공의, 지식 자체 같은 것이 최고의 결정적 가치가 되는) 가치서열의 척도를 상상해 볼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 본디 서양에서는 자본주의가 가치서열에 관한 다원주의를 배경으로 해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산업사회에서의 자유경쟁은 한국사회에서처럼 물질적 재화에 국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치서열의 일원주의 개념을 지닌 한국문화에서의 자유경쟁은 산업사회에서 피상적으로 중요한 측면 곧 물질적 가치(실제 효용성)에만 집중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
일원주의 가치서열의 개념은 물질 이외의 영역, 즉 이차적 가치영역에도 그대로 이행, 적용되어 어느 영역에서나 자유경쟁은 총화(總和)가 영(零)이 되는 치명적 경쟁을 연출하는 경향이 있다. 그 가장 좋은 예로서 우리는 한국교육과 정치에서의 치열한 대결상(對決狀)을 들 수 있다. 사회적으로 부각되어 있는 가치 이외의 것을 최고에 놓을 수 있는 가치서열의 비(非)한원주의 또는 비(非)연속성 개념이 한국문화에 뿌리내리기 전에는 한국인이 물질만능주의 또는 '네가 얻으면 내가 잃는다'고 하는 영총화(zero-sum)의 야만적이고 출구 없는 경쟁관계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5. 잉여지대로서의 역사
p311
...따라서 국가의 통제력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갈등은 곧 내란 또는 혁명으로 유도될 수 있다.
1. 자연의 사회학(1) : 홉스의 탈역사(脫歷史)
p313
어떤 기존하는 정치 도덕적 합법성도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상태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서로 다른 목표와 가치를 추구하는 개인 또는 집단들을 가지고 어떻게 또는 어떠한 사회질서를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 자연의 사회학(2) : 다렌돌프의 역사입문
... 예를 들면 죠셉 슘페터(J. Schumpeter)는 18세기 철학자들로부터 유래하는 고전적 민주주의의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그 비(非)현실성을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맑스주의의 분석을 빌리면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개인과 집단들이 그들의 논의과정을 통하여 공동의 선(the common good) 또는 일반의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케넷 애로우(K. Arrow)도 모든 사회구성원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공동의 선이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투표의 역설(the paradox of voting)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증명하였다. ... 애로우가 제시한 투표의 역설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x, y, z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서열을 매기는 A, B, C라고 하는 투표자(말하자면 사회구성원)가 있다고 하자.
서열 투표자 |
A |
B |
C |
제 1 순위 |
x |
z |
y |
제 2 순위 |
y |
x |
z |
제 3 순위 |
z |
y |
x |
A와 B의 집단은 y보다 x를 우선적으로 택하고, B와 C의 집단은 x보다 z를 우선적으로 택한다면 이전(移轉)의 원리(the principle of transitivity ; 말하자면 어느 누가 y보다 x를 우선적으로 택하고 그리고 x보다 z를 우선적으로 택한다면, 그는 y보다 z를 우선적으로 택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에 의해서 A, B, C로 구성되는 사회 집단은 y보다 z를 우선적 순위에 놓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A와 C의 집단은 z보다 y를 우선적으로 택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3개의 선택지(選擇肢)에 대한 어떤 다수결도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가치 또는 이해관계를 결합하는 완전한 사회복지의 질서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구성원들의 요구가 합리적으로 반영되는 사회적 선택의 방법이 있을 수 없다는 발견은 현대사회이론에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p315~6
빈곤과 소외의 구석자리에서 참여적 민주주의에 대한 드높은 요구가 외쳐지는 20세기 후반기 사회운동의 흐름을 대변하는 사상으로서 존 롤즈의 공정성(fairness)으로서의 정의 또는 맑스주의자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한 정의의 개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를 마감하는 오늘, 사회체제의 가능한 현실이라기보다는 현대사회에 팽만해 있는 기대와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평등관계를 시정하는 공정성의 추구는 사회적 선택이 합리적으로 구성될 것을 요청하는 근거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이 합리적으로 반영되도록 하는 사회적 선택의 방법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슘페터, 애로우, 다니엘 벨을 비롯한 많은 사회이론가들에 의해서 논의되었다. 특히 애로우에 의하면, 개인적 입장에서는 상이한 가치들에 대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합리적 선택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구성원 다수가 참여하는 사회적 선택에서는 그러한 합리적 순위가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적 선택의 합리적 근거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완전한 평등 사회의 실현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므로 이제, 사회적 선택과 평가 또는 사회적 질서의 구성을 지배하는 새로운 논리가 발견되어야 한다. ... 홉스의 원시상태는 현대사회이론이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전제하고 설명해야 할 실제적 과제이다.
2.2 랄프 다렌돌프는 홉스의 원시적 자연상태를 사회학적 분석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렌돌프는, ... ‘정치의 강제성 이론이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불확실성의 사회적 존재양식은 자유와 경쟁이다.
자유와 경쟁은 인간의 원시적 존재양식 또는 원시적 관계이다. ... 강제에 의한 통합 또는 질서구성 이전의 인간의 원시적 존재 및 관계양식ㅡ이러한 상태는 다만 원시사회의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전환적 상황에서는 언제나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전환은 역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으로부터 갈등과 불평등 관계라는 필연적 산물이 나타난다. 따라서 계급갈등 또는 불평등관계에 관한 그의 이론은 홉스의 원시 자연상태에 대한 그의 사회학적 분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p318
불평등 또는 갈등관계는 억압에서 자유에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주는 역사적 동력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불평등관계가 소멸된 사회란 사회학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속한다. 모든 사회의 계층적 구조는 지배적 규범에 의해서 소외된 자들의 반발에 직면할 수 있는 역학적 관계 위에 세워져 있으므로 언제나 변화에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2.3 ... 사실 모든 규범 또는 평가기준들은 그 정당성을 확대시킴으로써 지배적 자리를 차지하려는 경향을 지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서로 갈등 내지 불평등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정당화과정(legitimation process)이 성공적으로 실현됨으로써 지배적 지위를, 실패함으로써 피지배적 지위를 얻게 된다.
p319
그(다렌돌프)는 갈등이론과 균형이론의 모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갈 등 이 론 |
균 형 이 론 |
(1) 모든 사회는 어느 순간에서나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그리고 사회변화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2) 모든 사회는 어느 순간에나 반대와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갈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3) 사회 안의 모든 요소들은 해체와 변화에의 길을 걷고 있다.
(4) 모든 사회는 어떤 구성원들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한 강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
(1) 모든 사회는 비굦거 지속적이고 안정된, 요소들의 구조이다.
(2) 모든 사회는 잘 통합되어 있는, 요소들의 구조이다.
(3) 사회 안의 모든 요소들은 하나의 체계가 유지되도록 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4) 사회구조의 모든 기능은 그 구성원들 사이에 이루어진 가치에 관한 합의에 의해서 수행된다. |
다렌돌프는 사회적 실재의 갈등과 균형의 두 측면이 마치 개별적으로 독립해서 다만 병존하는 것처럼 본다. 그러나 균형이론으로 설명되는 사회적 실재라는 것은 한 집단의 평가와 정당화의 논리적 과정이 성공적으로 정착해서 유일한 지배적, 공통적 규범 및 존재양식으로서 군림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렇게 구성된 사회질서 안에 잠복된 불평등관계 가운데는 긴장이나 갈등이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평가와 정당화의 과정에서 어떤 공통적 규범 및 존재양식도 절대적 자리에 군림할 수 없을 정도로 이단적(異端的) 규범 및 존재양식이 환원되거나 해소되지 않고 잉여집단으로 남아 있을 때 갈등 또는 불평등의 긴장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p320
말하자면 갈등과 균형상태는 평가와 정당화라는 생존활동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변동에서 나타나는 두 개의 시점(時點)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극단의 갈등상태(구조 1)에서 극단의 균형상태(구조 2)로 나아가는 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예시할 수 있다.
평등 갈등관계(구조 1) -> 불평등 갈등관계 -> 불평등 균형관계(구조 2)
(도식을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으나 붙여넣어지지 않아 생략함)
여기서 구조 2의 상태, 즉 완전한 불평등 균형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 과연 이렇게 잉여집단이 중심의 가치 및 존재양식에 완전히 통합된 균형구조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느냐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사회적 평가 및 합의과정에 대한 듀이의 합리주의적 해법에 대한 비판 그리고 모순해소에 대한 20세기의 몇몇 논리 사상가들의 생각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p321~2
3. 이성의 사회학 : 듀이에게서 파산된 합리주의
3.1
...
한 공동의 문제상황에 처한 각자는 그들의 상황을 다르게 파악하고 정의할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왜냐하면 각자는 한 주어진 상황 안에서 그리고 그 밖의 상황에 대하여 여러 다른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상황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각각-그 공동의 상황 속에서 차지하는 각자의 위치 그리고 공동의 상황 밖의 집단 또는 상황들에 대하여 가지는 각자의 관계에 따라서-서로 다르게 문제의 상황을 파악하고 정의하게 될 것이다.
한 주어진 상황에서 A라는 집단은 어떤 사건을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보는데, B라는 집단은 그 사건이 전혀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 문제라고 파악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상황이 문제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가치 있는 또는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 대상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적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은 한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어떤 대상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해결할 문제인가?’ 라는 토론을 아무리 거듭한다고 할지라도 각각 서로 다른 위치와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불일치(不一致)의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어떤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회적 합의 또는 질서를 구성하려고 할 때 고려해야 하는 현실적 조건 또는 출발점은 홉스가 제기한 갈등과 불일치의 원시적 자연상태라는 것이다.
3.2
p323
어떤 종류의 결과들이 최종선택의 근거가 되느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며 또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되기를 원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상황을 구성하는 자들이 여러 다른 선택 가능성들을, 거기에 따라올 결과들에 관련시켜서 비교하는 평가과정을 충실히 수행한 뒤에도 각 구성원은 서로 모순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보다 중요한 질문은, 만약 한 문제의 상황을 구성하는 상이한 개인, 집단, 정당, 국가들이 동일한 가설적 선택지를 각기 다른 상상적 결과들에 연결시킬 때 무엇이 공동의 평가 또는 선택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냐 함이다. 다양한 구성원 또는 집단들이 최종적 선택에 있어서 각각 다른 결과들을 더 바람직하다고 또는 의미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갈등을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가?
4. 잉여세계에 건네는 대화인 역사
p324~5
모든 구성원들의 상이한 이해관계를 조화시켜서 사회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듀이의 사회적 합의의 방법이 결국 불편부당의 넓은 관점(a broad and impartial view)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의 현실적이고도 강력한 사회이론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듀이 역시 홉스에 의해서 제출된 문제를 외면해 버린 것이다.
...
그러나 사회적 선택에 관한 듀이의 탐구 및 평가의 논리적 과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서 나오는 결과는 다만 사회질서가 구성원들의 평등한 관계와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간단한 결론일 수는 없다. 듀이의 탐구 및 평가의 과정에 관한 비판적 분석의 결과는 : (1) 사회적 선택, 말하자면 사회질서가 합리적으로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논리적 한계를 명시해 줄 뿐만 아니라 (2) 이러한 사회질서, 예를 들면 사회계층의 형성근거로서의 평가와 합의의 과정은 언제나 다시 논란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미완서엥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임을 밝혀 준다. 언제나 다시 논란될 수밖에 없는 것은, 피지배의 위치에 놓여 있는 구성원들이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도전 때문에) 지배의 위치에 놓여 있는 구성원들이 결코 완결(합의)될 수 없는 새로운 탐구(모색) 및 평가의 과정을 전개해서 각각 그들에게 보다 만족스러운 사회질서를 재구성하려는 투쟁을 다시금 시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평가의 논리적 과정이 미완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떤 공통의 규범이나 인식체계도 절대의 자리에 군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주변적 존재 및 가치의 소유자가 공동의 체계에로 환원되거나 해소되지 않고 잉여지대로 남아서 불평등관계를 구성한다. 이렇게 구성원들의 평등한 참여와 합이에서가 아니라 지배하는 자(중심)와 지배받는 자(주변)의 불평등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와 사회질서의 형성과정은 언제나 중심과 주변 사이의 지배, 대치(對峙) 또는 교체라고 하는 역사적 관계로써 이어지게 된다.
p326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내는 창조적 주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거시적 차원에서 돌이켜볼 때 인간은 역시 자연의 부분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법칙의 커다란 테두리를 벗어나서 그의 운명과 역사를 개척하거나 그의 평등과 보편에 대한 이념을 완전하게 실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념과 실천의 능력으로써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 또는 저항으로서의 운명과 자연의 질서를 시인하지 않으려 함은 인간의 부질없는 환상임에 틀림없다.
잉여이론은 이러한 제약조건하에 있는 탐구와 평가 또는 이념실천의 의지가 지니는 편협한 목적지향성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는 정신적 자세의 표현이다. 만약 비판정신(또는 반성정신)으로서의 잉여론의 계보를 칸트의 선험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잉여론의 가장 중요한 방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현상세계의 정연한 논리적 질서를 철저하게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다만 인간의 선험적 사유체계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며 진정한 본체세계는 그 선험적 논리 밖에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한 칸트의 비판정신, 그 이념비판의 객관정신이야말로 잉여론이 추구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는 무한히 반복된 사실관찰과 경험에 의해서도 가장 엄밀하고 체계적인 논리의 추적에 의해서도 본체세계의 진리는 우리의 편이 될 수 없다고(검증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인간적 논리와 이념의 벗어날 수 없는 주변성을 그 한계로써 자각하는 훌륭한 객관정신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객관정신에 의해서 이해되는 것은 무엇인가? 논리적 추적 저편에 논리로써 넘을 수 없는 잉여지대 곧 미결정의 세계가 언제나 존재하는 것처럼 이념과 실천 저편에 이념과 실천으로써는 정복할 수 없는 잉여지대, 곧 무리(無理)와 비정(非情)의 현실세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p327~8
과학도가 기존의 논리로써 설명할 수 없는 잉여현상에 부딪쳐 다만 침묵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이념실천으로써는 해소할 수 없는 무리와 비정의 잉여현실 가운데서 시달리며 좌절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인간적 이념과 실천의 결단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목적관념과 행위의 편협성을 끊임없이 제약하고 좌절시키는, 아직 전모를 알 수 없는 잉여의 벽 앞에서 오히려 이념과 논리의 노예인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주변자로 밀어내는 객관의 질서와 냉혹한 현실에 부딪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인간의 자기(그것이 이념이든 욕망이든 그 밖의 무엇이든) 실현의 운동이 아니라 인간이 아직도 통제할 수 없고 실현할 수도 없는 잉여세계를 향하여 건네는 대화의 운동이다.
그 대화에 있어서 응답자는 누구인가? 아직도 세상에 그 자신의 최후의 구도를 펼치기 위하여 기다리는 잉여의 주변자다. 그 주변자가 때로는 노도 같은 물결을 타고 덮쳐 와 일껏 자리잡힌 중심자의 판도를 뒤집어 놓는다. 그 주변자는 소외된 인간인가? 그는 말없는 자연의 질서인가?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초월자인가? 그러나 그들은 어떤 이름으로 불려지든 간에 다만 아직 실현되기를 또는 응답하기를 기다리는 잉여지대의 대변자이며 대행자일 뿐이다.
만약 누구든지 이념실천에 의해서 또는 그러한 것들을 지닌 인간 주체의 창조적 활동에 의해서 오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해한다면, 그러한 역사는 인간의 아주 가벼운 일시적 유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우주의 역사 가운데서 인간 이념의 창조적 활동이 그렇게 실현되어 본 일도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19세기말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히 한국사의 전개과정은 과연 어떠한 이념과 실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 일반적으로 제 3세계에 속하는 주변자들의 역사현실은 세계사의 주류에서 밀려난 잉여지대에서 이루어진다. 자신의 이념과 의도와는 판이하게 전개되어 온 수모(受侮)와 좌절 또는 은폐와 변명의 역사를 어떤 시대의 이념이나 보편정신의 실현과정이라고 합리화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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