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에 대한 여러 관점들
1. 유신론(有神論)
인격신(人格神)론이라고도 하는 유신론은 말 그대로 신(神)이 존재한다는 사상입니다. 또한 그렇게 존재하는 ‘신이 우주에 대해 초월적으로 존재하며 늘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격적인 신’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여기서 ‘인격’은 신을 논하는 데 있어 면밀히 인식해야할 중요한 개념으로 ‘자기 결정적이고 자율적 의지를 가진 개인’을 의미하는데, 유신론의 개념에서 신은 이성과 의지를 가진 그러한 인격으로서 초월적인 힘을 시공간 전체에 걸쳐 미치고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은 신에 대해 일방적인 의존관계가 되며 신은 늘 인간 위에 위치하게 됩니다.
유신론은 신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무신론과 대립하며, 자연이 곧 신이라는 범신론(汎神論)과도 대립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되 신이 인격적 존재로서 숭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신론과 구별되며 과학적 세계관과도 대립합니다. 또한 신은 존재하되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불가지론은 유신론과 무신론 모두를 부정합니다.
한편, 유신론에서 신의 인격적인 특성은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를 자신의 의식 속에 투영시켜 표상화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즉 초월적이며 전지전능한 존재를 인간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면서 신의 존재가 인격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인격신에서의 신은 인간과 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인간적인 이미지를 통해 확대된 개념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신론(理神論)
자연신교(自然神敎)라고도 하는 이신론은 ‘신을 우주 저 멀리에 초월해 있는 인격적인 것에서 찾지 않고 이성(理性)과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우리 곁에 펼쳐져 있는 자연(自然) 속에서 찾고자 하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17~18세기 계몽주의 시기에 발생한 신관으로 전지전능하며 우주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과 신의 세계 창조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유신론과 비슷하지만 그 신이 인격신이 아니며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사유로써 파악할 수 있는 비물질적이며 추상(抽象)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무엇보다 이신론에서의 신은 세계 창조 후 더 이상 자신이 펼쳐놓은 세계에 관여하지 않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유신론과 이신론의 이와 같은 차이에 대해 칸트(I. Kant)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신론자는 한 하나님을 믿으나, 유신론자는 한 살아 있는 하나님(최고예지)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신론의 이와 같은 특성은 계몽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몽주의의 이념은 중세의 신적 권위와 광신적 신앙을 멀리하여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신에게 의지하기보다는 각 개인이 평등 가운데 존중되고 인간이 자신의 이성을 발휘하여 자유와 주체성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사유로써 스스로 삶을 개척해나가고자 함에 따라 신관에 있어서도 자연히 신은 세계를 창조만 했을 뿐 인간과 세계 위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중세적 교회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아 삼위일체나 계시, 기적 등과 같은 비합리적인 것을 부정하고 성서를 합리적이며 비판적으로 연구하고자 함으로써 이론적이며 과학적인 방식의 신 해명을 추구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헤겔은 『종교철학』에서 이신론을 “지성적 종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3. 범신론(汎神論)
범신론에서 정의하는 신은 곧 우주 만물입니다. 유신론과 이신론에서처럼 신이 인격적이거나 세계를 초월한 곳에 따로 존재해 있지 않습니다. 세계와 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신이 현실 속에 드러난 모습이 바로 우주 만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만물 하나하나가 신이 자신의 모습을 펼쳐 보인 결과입니다. 이러한 범신론의 이론에서 신과 만물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닌 존재와 그 존재 스스로의 드러난 모습의 관계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과 만물에게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상대적 위계 관계가 없어지며, 따라서 창조자로서의 인격적 신도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오로지 신은 만물 위에 군림하는 존재도 아니며 그저 만물 전체이며 만물 스스로인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간의 위계가 수평화 되는 범신론은 유신론자들로부터 극단적인 무신론이라고 비난받으며 대립하게 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순수하게 종교적인 측면보다는 사회, 정치적인 면에서 이해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서양 중세의 봉건제에서 교황은 최고의 권력자였는데, 그 권력을 근거하고 있던 것이 유신론적 정통 신학이었습니다. 범신론은 그 신학, 즉 그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론으로 당시 봉건제에 대항한 사회세력이 정통 신학의 이론을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에서 범신론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당시 신의 대변자로서의 교회 권력에 대한 반발로 교회를 통하지 않고 바로 신과 통하려던 민중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범신론적 사상은 이미 고대 그리스나 인도에서 오래 전에 발전된 사상이었고 르네상스기의 그와 같은 사회 정치적인 상황에서 피지배계급의 입장 속에서 발현된 것입니다. 이것은 계몽주의 시기의 이신론의 배경과도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4. 범재신론 : 범재신론(panentheism)은 세계가 신에게 포함되나, 신이 세계 그 자체는 아닌 것을 말한다. (만유내재신론, 세계내재신론, 범재신론이라고도 한다.)
만유재신론에서 신은 인격적 존재로서 우주 만물을 포괄하고 있으며 또한 만물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주 만물에 초월해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신은 세계에 내재하면서도 세계보다 더 크고 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인데, 이렇듯 만유재신론은 범신론과 유신론의 모순되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한꺼번에 종합하려고 한 이론입니다.
5. 범이신론
범이신론(pandeism)은 이신론에 대한 '왜 신은 세계를 만들고 방관하는가.' 하는 질문과, 범신론에 대한 '세계가 왜 만들어졌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범이신론에 따르면, 세계는 곧 신이므로, 신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면서 신과 동일한 세계도 동시에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6. 불가지론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은 몇몇 명제(대부분 신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명제)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 또는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관점이다.[1] 이 관점은 철학적 의심이 바탕이 되어 성립되었다. 절대적 진실은 부정확하다는 관점을 취한다. 불가지론의 원래의 의미는 절대적이며 완벽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 교조주의(敎條主義)의 반대 개념이다.
불가지론자들 중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입장에 있는 이들은 인간이 감각을 통해서 인식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본질의 거짓 모습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본다.[1] 이 경우 본질적 실재는 완전히 불가지(不可知)라는 흄의 설과, 그것은 신앙의 영역에 관한 문제라 하여 남겨 놓는 칸트의 설도 있다. 감각이나 표상은 본질적 실재가 자기를 인간에게 제시하기 위한 상형문자(象形文字), 혹은 기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프레하노프 등의 상형문자설도 불가지론의 일종이다
어원
서양 제어에서 불가지론은 언어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Agnosti-'와 주의를 나타내는 어미로 이뤄져 있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 Agnosticism이고 프랑스어에서는 Agnosti"cisme"이라고 사용한다. 이는 그리스어 αγνωστικισμός(Agnosticismos)에서 나온 단어이고, 이 단어 역시 '모르는'이란 뜻의 그리스어 agnôstos와 "앎 혹은 지식"이란 뜻의 gnosis, 두 개가 합쳐져서 나왔다. 여기서 앎 혹은 지식이란 단순히 사전적 의미의 앎이 아니라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말하는 지식 (gnosis)을 말한다.[2]
불가지론은 자주 형이상학, 계시, 예언 등의 적절성에 자주 문제 제기를 하는 인식론적 입장을 취한다. Agnosticismos이란 단어는 토머스 헉슬리가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오해
불가지론은 종종 철학의 다른 개념과 연관 혹은 결합하여 잘못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불가지론은 무신론(無神論)과는 다르게 신의 존재를 논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소개되어 있는 신(들)의 존재나 초자연적 현상의 가능성에 대해서 논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불분명함 아래에 있다는 회의주의와도 구분이 된다. 또한 불가지론은 설명할 수 없는 한 명의 절대자가 있다고 가정하는 이신론(理神論)과도 다르다.[3] 결국 불가지론은 철학적 관점이지 종교 자체는 아니다.
*러셀의 찻주전자
러셀의 찻주전자 또는 우주의 찻주전자는 버트런드 러셀이 기독교와 불가지론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유추이다. 러셀의 찻주전자는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글의 일부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 글은 1952년 Illustrated지에서 청탁한 것이지만 출판하지는 않았다.
“만일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도자기 찻주전자 하나가 타원 궤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하고 이 찻주전자는 너무나 작아서 가장 좋은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다고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내 주장을 반박할 수 없기에, 내가 이를 의심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억측이라고 주장한다면, 모두들 당연히 내가 헛소리 하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찻주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고대의 책에도 나오고 일요일마다 신성한 진리로 가르치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주입한다면, 이 존재를 믿기 망설이는 것은 기행의 표식이 되고 이를 의심하는 자들은 현대의 정신과 의사나 옛날의 이단 재판관의 관심 대상이 될 것이다.”
“If I were to suggest that between the Earth and Mars there is a china teapot revolving about the sun in an elliptical orbit, nobody would be
able to disprove my assertion provided I were careful to add that the teapot is too small to be revealed even by our most powerful telescopes.
But if I were to go on to say that, since my assertion cannot be disproved, it is an intolerable presumption on the part of human reason to
doubt it, I should rightly be thought to be talking nonsense. If, however, the existence of such a teapot were affirmed in ancient books,
taught as the sacred truth every Sunday, and instilled into the minds of children at school, hesitation to believe in its existence would become
a mark of eccentricity and entitle the doubter to the attentions of the psychiatrist in an enlightened age or of the Inquisitor in an earlier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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