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 팡세
파스칼 - 팡세
(이환 옮김, 민음사, 2003)
-일반적으로 사람은 타인의 머릿속에서 생겨난 이유보다 자신이 발견한 이유에 의해 더 잘 납득한다.
-한 작품을 만들 때 최후로 깨닫는 것은 무엇을 제일 먼저 써야 할지를 아는 일이다.
-하찮은 일에 대한 인간의 예민함, 가장 중대한 일에 대한 무감각, 이것은 기묘한 전도의 표시이다.
-신앙은 증거와는 다르다. 증거는 인간적인 것이고 신앙은 신의 선물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로마' 1:17) 신이 인간의 마음속에 넣어주는 것은 믿음이고 증거는 흔히 수단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로마' 1:17) 그러나 믿음은 마음속에 있으며 scio(나는 안다)가 아니라 credo(나는 믿는다)라고 말하게 한다.
-인간의 삶의 비참이 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이것을 원하였으므로 위락을 택하였다.
-근신하고 참아라(스토아주의자들의 격언)
-말들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뜻을 나타내고, 뜻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각자가 지닌 지배적인 정열이 무엇인지를 알면 확실히 그의 환심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제각기 행복에 대한 생각 속에 그 자신의 행복과는 어긋나는 변덕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참으로 당황하게 만드는 기이한 사실이다.
-열쇠의 <여는>힘. 갈고리의 <끌어당기는>힘.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나의 모든 욕구에 전반적으로 응할 수 있는 교양인이다.
-생략의 아름다움, 판단의 아름다움.
-교양인. 그는 수학자다, 설교자다, 웅변가다라는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그는 교양인이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이 보편적인 성격만이 나를 만족시킨다. 어떤 사람을 볼 때 그의 저서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이다. 나는 우연히, 그리고 이것을 사용해야 할 기회가 주어질 때를 제외하고는 Ne quid nimis(모든 일에 지나치지 말 것. 고대 그리스의 격언이다.) 그 재능이 눈에 띄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한 재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그것으로만 이름이 불려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말재주가 문제 될 때가 아니라면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그 때가 되면 (마땅히) 그렇게 기억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성을 해치는 것처럼 감성도 해친다. 지성과 감성은 대화에 의해 길러진다. 또 지성과 감성은 대화에 의해 망가진다. 이렇듯 좋은 대화나 나쁜 대화는 지성과 감성을 기르거나 망가뜨린다. 이것들을 기르고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대화를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 길러지고 망가지지 않은 지성과 감성이 없으면 그러한 선택을 할 수가 없다. 결국 하나의 악순환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빠져나오는 자는 행복하다.
-이성의 최후의 한걸음은 자신을 초월하는 무한한 사물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넘어선다
-인간의 결함은 이것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 가운데 더 잘 나타난다.
-너무 많은, 너무 적은 술. 그에게 술을 주지 말라. 그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술을 너무 많이 주어보라. 이것도 마찬가지다.
-원래의 대상은 조금도 찬양받지 않은데 닮았다는 것으로 찬양받는 그림이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이성이 상상력을 완전히 정복한 일은 결단코 없다. 차라리 반대의 경우가 일쑤이다.
-찬란한 궁전 안에서 4만의 근위병으로 둘러싸인 터키 왕을 한 인간으로 보기 위해서는 참으로 순화된 이성을 가져야만 한다.
-지극히 정당한 사건에 패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가까운 친척들에게 사건을 부탁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법관의 정신도 주위의 사소한 소음에 이내 뒤흔들리지 않을 만큼 초연하지는 않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만약 좀더 낮았더라면 지상의 모든 표면은 달라졌을 것이다.
-짐승들은 서로 칭찬하지 않는다. ... 말이 달릴 때 그들 사이에 경쟁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구간에서 가장 둔하고 흉한 모양의 말이라고 해서 다른 말에게 귀리를 양보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의 특성은 그 자체로써 충족된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재물을 갖는 데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재물을 정당하게 소유할 근거도 없고 확실하게 소유할 힘도 없다. 학문도 쾌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는 진리도 행복도 없다.
-인간은 종종 상상을 심정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회심할 생각을 하자마자 벌써 회심했다고 믿는다.
-우리는 너무나도 불행하기에 어떤 일을 즐길때에도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조건하에서만 즐긴다. 실제로 숱한 일들이 그렇게 될 수 있고 또 수시로 그렇게 된다. 그 반대의 불행을 걱정하지 않고 행복을 즐기는 비결을 발견한 [사람]은 요점을 찾은 셈이다. *그것은 계속적인 움직임이다.
-지나치게 자유로운 것은 좋지 않다. 필요한 모든 것을 갖는 것은 좋지 않다.
-전쟁을 일으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지, 그 많은 스페인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인지를 결정짓는 것이 문제될 때 이것을 판단하는 것은 단 한 사람이고 더욱이 이 일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다. 아무 관련도 없는 제삼자가 할 일인데 말이다.
-영예. 찬사는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그르친다. 아아! 참 잘도 말했다! 아아! 참 그 애는 잘도 했구나! 정말 얌전도 하지! 등등.
이와 같은 욕구와 영예의 자극을 전혀 받지 않은 포르루아얄(학교)의 아이들은 무기력 속에 빠진다.
-내 것, 네 것. <이 개는 내 것이야.> 이 가엾은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양지 쪽의 이 자리는 내 것이야. 이것이 온 땅위에서 벌어진 찬탈(贊奪)의 시초이고 그 양상이다.
-*내 생애의 짧은 기간이 그 전과 후의 영원 속에 흡수되는 것을 볼 때, 내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공간이 내가 모르고 또 나를 모르는 무한대의 공간 속에 흡수되는 것을 볼 때, 나는 저곳이 아닌 이곳에 있는 나를 바라보며 공포에 떨고 놀란다. 왜냐하면 저곳이 아닌 이곳에, 다른 시간이 아닌 이 시간에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이곳에 태어나게 하였는가. 누구의 명령과 행동으로 이 장소와 이 시간이 나에게 지정되었는가. Memoria hospitis unius diei praetereuntis.(악인의 소망은 바람에 날리는 가는 양털과 같고 폭풍에 흩어지는 거품과 같고 바람에 불리는 연기와 같고_ 하루 머무른 길손의 추억과 같다 <구약 외전> '솔로몬의 지혜' 5:15)
-In omnibus requiem quaesivi. (모든 일에 나는 평안을 찾았다_ 구약 외전 <솔로몬의 지혜>)
만약 우리의 상태가 진정 행복하다면 이것을 생각하는 것에서 굳이 마음을 돌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순. 모든 비참과 균형을 이루게 하는 자존심. 인간은 자신의 비참을 숨긴다. 그렇지 않고 이것을 드러내 보일 때는 이것을 아는 것으로 자랑삼는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실을 찾는데 유용하지 않다면 적어도 자신의 삶을 규제하는 데는 유용하다. 이보다 더 옳은 일은 없다.
-현재의 쾌락이 거짓이라는 느낌, 아직 경험하지 못한 쾌락의 공허를 모르는 무지- 이것이 변덕스러움의 원인이다.
-불의. 그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욕망(邪慾, 또는 정욕)을 만족시킬 다른 방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Felix qui potuit rerum cognoscere causas. 사물의 원리를 깨달은 자는 행복하도다.(베르길리우스 '전원시')
-nihil mirari prope res una quae possit facere et sevare beatum.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는 것은 행복을 얻고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호라티우스 '서한집')
-만약 이성이 합리적이라면 아마도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성은 아직 어떤 확고한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하는 한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성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 아니, 반대로 이 탐구에 여느 때나 다름없이 열을 올리고 또 이 정복에 필요한 힘이 자신 안에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결말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이성의 능력을 그 결과로써 검토한 다음 그 자체로서 재인식하자. 이성이 과연 진리를 붙잡을 수 있는 힘과 장악력이 있는지 알아보자.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미쳐 있다. 그래서 미치지 않은 것도 다른 형태의 광기라는 점에서 미친 것과 같다.
-자존심은 모든 비참과 균형을 이루고 또 비참을 휩쓸어간다. 여기 기이한 괴물이 있고 너무나도 명백한 방황이 있다. 자신의 위치에서 추락한 그는 불안 속에서 이것을 찾는다.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누가 그것을 발견하였는지 보자.
-타락한 본성.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이성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Quod crebro videt non miratur, etiamsi cur fiat nescit ; quod ante non viderit, id si evenerit, ostetum esse censet. Cic. 흔히 보는 일은 설사 그 원인을 모른다 해도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일찍이 본 일이 없는 것은 경이로 생각한다.(키케로, '숭고함에 관하여')
-악은 행하기 쉽고, 악은 무수히 있다. 선은 거의 하나뿐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악은 선이라고 불리는 것 만큼이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 특성 때문에 종종 이 특수한 악은 선으로 간주된다. 이 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선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비상한 위대함까지도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을 가장 크게 사로잡는 것들, 가령 소유하고 있는 약간의 재산을 숨기려는 따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산더미같이 확대시킨 무(無)이다. 상상의 방향이 바뀌면 우리는 쉽사리 이 사실을 발견한다.
-악 중에는 다른 악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붙어 있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기둥을 제거하면 나뭇가지처럼 없어진다.
-불의. 오만이 필연과 결부될 때 그것은 극도의 불의가 된다.
-자연은 현상태에 적합한 정열과 욕망을 준다.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는 두려움뿐이다. 이 두려움은 지금의 우리의 상태에, 우리가 있지 않은 상태의 욕망들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적어나갈 때 이따금 그 생각이 내게서 빠져 나갈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내가 줄곧 잊어버리곤 하는 내 결함을 되새기게 한다. 이것은 내가 잊어버린 생각만큼이나 교훈적이다, 나는 내 허무를 알기만을 원하니까.
-우리는 사물들을 다른 면에서 볼 뿐만 아니라 다른 눈으로 본다. 우리는 애당초 그것들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모른다. 그래서 건강할 때 죽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이 임박했을 때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열병이 더 다가오고 농창이 생기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어찌된 판단의 착란인가! 이 착란으로 인해 다른 모든 사람들 위에 자기를 세우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또 자기 자신의 재물, 자신의 행복과 수명의 영속을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전(流轉). 인간이 소유한 모든 것이 떠내려감을 느끼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인간의 묘사 ㅡ 예속, 독립하려는 욕구, 결핍.
-애착을 느꼈던 일을 그만둘 때 사람들은 울적해진다.
-*권태. 열정도, 할 일도, 오락도, 집착하는 일도 없이 전적인 휴식 상태에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 참기 어려운 일은 없다. 이때 인간은 자신의 허무, 버림받음, 부족함, 예속, 무력, 공허를 느낀다. 이윽고 그의 마음 밑바닥에서 권태, 우울, 비애, 고뇌, 원망, 절망이 떠오른다.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자연이다, omne animal. (모든 짐승들. <창세기>, <구약 외전> '벤시락의 지혜')
-우리의 본성은 움직임에 있다. 전적인 휴식은 죽음이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에게 하나의 전체이다. 그가 죽으면 그에게서는 모든 것이 죽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자기가 모든 사람에 대해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자연을 우리 기준에서가 아니라 자연 자체로서 판단해야 한다.
-다른 모든 재능들을 규제하는 주된 재능.
(규제는 주재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존경은 <부자유를 참으라>는 것이다.
-아마도 재산의 평등은 옳다. 그러나 정의에 복종하는 것을 힘으로 강요할 수 없었으므로 힘에 복종하는 것을 정의로운 것이 되게 하였다. 정의를 힘있는 것으로 만들 수 없었으므로 힘을 정의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정의와 힘이 결합하여 평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 평화야말로 최고선이다.
-지혜는 우리를 어린이로 돌아가게 한다. Nisi efficiamini sicut parvuli. (만일 너희가 마음을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_ <마태>)
-***세상 사람들은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한다. 그들은 인간의 참된 자리인 무지(無知)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식은 서로 맞닿는 두 극단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극단은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자리 잡은 본래의 순진한 무지이다. 또 하나의 극단은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도달하는 무지이다. 그들은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편력한 다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출발했을 때와 같은 무지 속에서 자신을 만난다. 그러나 이것은 현명한 무지이다. 그 중간에 본래의 무지에서 벗어났지만 또 하나의 무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 충족한 지식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으면서 모든 것에 통달한 체한다. 이자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모든 것을 그릇되게 판단한다.
민중과 식자들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 이 식자들은 민중을 멸시하지만 스스로 멸시당한다. 이들은 만사를 잘못 판단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올바르게 판단한다.
- 현상의 이유. 배후의 숨은 생각을 가져야 하고, 설사 민중처럼 말은 하더라도 이 생각으로 만사를 판단해야 한다.
- 최대의 재난은 내란이다.
- 인간의 결함은 사람들이 수많은 미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 절름발이는 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는데 절름발이 정신이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절름발이는 우리가 똑바로 걷는 것을 인정하지만 절름발이 정신은 젓는 것은 바로 우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으면 우리는 동정할 뿐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 Corrumpunt mores bonos colloquia prava. (악한 교제는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 - 고린도 전. 15;33)
-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 우리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으레 학자들의 풍성한 옷차림으로만 상상한다. 이들도 선량한 사람이었고 남들처럼 친구와 담소하기도 했다. 그리고 '법학'이나 '정치학'의 집필을 즐길 때에도 오락 삼아 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생애 중에서 가장 철학자답지 않고 또 가장 마음 가벼웠던 시기였다. 가장 철학자다운 시기는 단순하고 조용하게 살 때였다.
- 세상의 가장 불합리한 것이 인간의 착란으로 인해 가장 합리적인 것이 된다.
-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나의 사유의 규제에서이다.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내가 더 많이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간으로써 우주는 한 점처럼 나를 감싸고 삼켜버린다. 사유로써 나는 우주를 감싼다.
- 인간의 위대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점에서 위대하다.
-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하나도 없을 때는 위로받지 못한다.
- 신을 느끼는 것은 심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
- 우리를 무찌르고 우리의 목을 짓누르는 그 모든 비참을 바라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억누를 수 없는, 우리를 끌어올리는 하나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 사람이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 극단에 도달함으로써가 아니라 동시에 두 극단에 닿을 때 그리고 양자의 중간을 충분히 채울 때요. ㅡ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옮겨가는 정신의 민첩한 움직임일 뿐이고 불붙은 불등걸처럼 단지 한 점 안에 있을 것이오. ㅡ 그렇소. 하지만 이것이 정신의 넓이를 표시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정신의 민활성을 표시하오.
- 사유. 인간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에 있다.
그러나 이 사유란 무엇인가. ... 본성으로서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 결함으로서는 얼마나 저속한가!
- 온 땅위에, 심지어 우리가 죽은 후에 태어날 사람들에까지 알려지고 싶어할 만큼 우리는 오만하다. 그런가 하면 주위의 대여섯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을 느낄 만큼 공허하다.
- 인간에게 그의 위대를 밝히지 않고 그가 얼마나 짐승과 동등한지를 보여주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에게 그의 저속을 밝히지 읺고 그의 위대를 지나치게 보여주는 것도 위험하다. 그중 어느 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은 더 위험하다. 그러나 둘을 다 보여주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인간은 자신을 짐승과 같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또 천사와 같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며, 둘 다 몰라서도 안 된다. 둘 다 알아야 한다.
- 상반된 것들. 인간은 천성적으로 쉽게 믿는가 하면 의심이 많고, 소심한가 하면 통이 크다.
- 습관은 제 2의 본성이다.
- 두 가지가 인간에게 그의 본성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 본성과 경험.
- 그가 자만하면 나는 그를 낮추고
그가 낮아지면 나는 그를 추어올린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와 반대로 말을 한다,
마침내 그 자신이
불가해한 괴물임을 깨달을 때까지.
-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것을 회의할 것인가. 깨어 있는지, 꼬집히는지, 불태워지는지도 회의할 것인가. 회의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자기가 전재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우리는 거기까지는 갈 수 없다. 실로 완벽한 회의론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는 단언한다. 자연이 무력한 이성을 지탱하여 그렇게까지 극단을 달리지 못하게 견제한다.
- 자연은 회의론자들을 꺾고 이성은 독단론자들을 꺾는다.
-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넘어선다.
- 성서는 여러 곳에서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Decliciae meae esse cum fillis hominum. (내가 ... 사람의 아이들과 함께 있음을 기뻐하였느니라 /잠언/ 8:31)
Effundam spiritum meum super omnem carnem. (나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요엘/ 2:28) Dii estis(너희는 신들이다 /시편/ 81:6) 등등. 또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Omnis caro foenum (모든 육체는 풀이다 /이사야/ 40:6) Homo assimilatus est jumentis insipientibus, et similis factus est illis.(사람은 생각 없는 짐승에 비교되고 짐승과 같이 되었도다 /시편/ 48:13)
-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직업의 선택이다. 우연이 그것을 좌우한다.
습관이 석공, 군인, 기와장이를 만든다. ... 어렸을 때 사람들이 어떤 직업은 찬양하고 그 외의 것들은 멸시하는 것을 들은 나머지 선택한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덕을 사랑하고 어리석음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말들이 마음을 정하게 할 것이다. 단지 적용에 있어서 사람들은 실수를 저지른다.
습관의 힘은 이다지도 큰 것이어서 지연이 단순히 인간으로 만들어낸 것을 가지고 인간은 모든 신분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어떤 지방은 온통 석공들인가 하면 또 다른 지방은 온통 군인들 등등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연은 그렇게 획일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만드는 것은 습관이다, 습관이 자연을 속박하기 때문에. 그러나 자연은 종종 습관을 이기기도 하며, 좋고 나쁜 모든 습관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신의 본능 속에 머물게 한다.
- 정신은 자연적으로 믿고 의지는 자연적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진정한 대상이 없으면 그것들은 그릇된 것에 집착해야만 한다.
-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천사가 되려는 자가 짐승이 된다.
- 단 한 가지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채운다. 우리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하지 못한다. 그중 좋은 것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신을 따라서가 아니라 세상을 따라서.
- 위락. 사람은 죽음과 비참과 무지를 치유할 수 없으므로 자기의 행복을 위해 이것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 ...인생은 온통 이렇게 흘러간다. 사람들은 장애물과 싸우면서 안식을 찾는다. 그러나 이 장애물을 극복한 다음에는 안식이 낳는 권태로 인해 이 안식이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거기서 빠져나와 소란을 구걸해야 한다. [소란과 위락 없이는 어떤 신분도 행복할 수 앖고, 어떤 위락이건 즐기고 있을 때에는 모든 신분이 행복하다. 그러나 자기를 생각하는 것에서 마음을 전환시키는 것으로 성립되는 이 행복이 과연 무엇인지 판단하여 보라.)]
- 위락 없이는 기쁨이 없고, 위락이 있으면 슬픔이 없다.
- 위락. 죽음은, 위험 없는 죽음을 생각할 때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때 더 견디기 쉽다.
- 인간의 마음이란 이 얼마나 공하하고 오물로 가득 차 있는가.
- 싸움보다 더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승리가 아니라 싸움 말이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동물들의 싸움이지 패자에게 맹렬히 달려드는 승자가 아니다. ...오락에서도 그렇고 진리의 탐구에서도 그렇다. ... 우리는 사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추구를 추구한다.
- 철학자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으로부터 신에게로 가라고 외치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자기를 아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 철학자들은 인간의 두 상태에 적합한 마음가짐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은 순전한 위대의 감정을 고취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상태가 아니다.
그들은 순진한 비속의 감정을 고취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상태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본성에서가 아니라 참회에서 생겨나는 비속의 감정이고, 그것은 그 안에 마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대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이다. 또 필요한 것은 사람의 공로에서가 아니라 은총에서 생겨나는 위대한 감정이고, 비속의 감정을 통과한 다음이어야 한다.
- 회의주의. 극도의 정신은 극도의 결함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으로 비난받는다. 중간 외에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중간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중간에 머물 줄 아는 데 있다.
- 나는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하나의 정의가 있다고 믿어왔다. 이 점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신이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원하는 데 따라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에 내 잘못이 있었다. 나는 우리의 정의가 본질적으로 정의이고 또 내가 정의를 판단할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하였고 그래서 마침내는 나 자신을 그리고 타인들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모든 나라와 사람들이 쉽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진정한 정의에 대한 판단을 여러 번 수정한 다음 우리의 본성이 부단한 변화일 뿐임을 깨달았다. 그 후로 나는 변하지 않았다. 만약 변한다면 나는 내 의견을 확증하게 될 것이다.
독단론으로 돌아온 회의론자, 아르세실라.
- ...불가해한 일이라고? 불가해한 것이라고 해서 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령 무한수. 유한과 동일한 무한.
- 인간은 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상태를 보고 혼란스러워진 나머지 그는 신과 교제할 능력을 신이 인간에게 줄 수 없다고 감히 말한다.
- 두 부류의 사람들이 신을 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또 높거나 낮거나 그 어떤 정도의 정신을 가졌거나 기꺼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 또는 그 어떤 반대에 부딪혀도 진리를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
- 우리가 신을 생각하려고 할 때 우리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더록 유혹하는 것은 없는가. 이 모든 것은 악이고 우리와 함께 태어났다.
- 인간은 어느 자리에 자기를 두어야 할지 모른다. 인간은 분명히 길을 잃었고 본래의 있을 자리에서 추락했으나 그 자리를 찾지 못한다. 꿰뚫어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불안을 안고 헛되이 그것을 사방으로 찾아 헤맨다.
-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은 거짓이고, 그렇게 되려고 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이성적이고 공평무사하게 태어났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과 타인을 잘 안다면 이런 성향을 우리의 의지에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의하다, 모든 것이 자기를 향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모든 질서에 어긋나며 우리는 마땅히 전체를 향해야 한다. 자기를 향한 성향은 전쟁, 정치, 경영, 인간 개개의 육체에 있어서 모든 무질서의 시초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타락한 것이다.
만약 자연적, 시민적 공동체의 각 지체(肢体)가 전체의 행복을 지향한다면 공동체 그 자체도 그것의 지체가 되어 있는 더 보편적인 다른 전체를 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체를 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의하고 타락하였다.
- 여러 가지 경우. 이 여러 가지 가정에 따라 세상에서 다르게 살아야 한다.
1. 여기서 영원히 사는 경우,
2. [영원히 사는지 아닌지 불확실한 경우],
3. [영원히 살지 않는 것이 확실한 경우],
4. [영원히 살지 않는 것이 확실하고, 오래 사는 것이 불확실한 경우, ㅡ 그릇된 가정.],
5. 오래 살지 않는 것은 확실하고 한 시간을 사는지 불확실한 경우.
이 마지막 가정이 우리의 것이다.
- 만약 생애의 일주일을 바쳐야 한다면 백년도 바쳐야 한다.
- 영혼이 죽는지 영생하는지를 아는 것은 삶 전체에 중대한 문제이다.
- 우리는 절벽이 보이지 않게 무엇인가로 앞을 가린 다음 그곳을 향해 태연하게 달려간다.
- 도박하는 사람들은 모두 불확실하게 얻기 위해 확실하게 건다. ... 거는 것의 확실성과 얻는 것의 불확실성 사이에 무한한 거리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사실은 득(得)의 확실성과 실(失)의 확실성 사이에 무한이 있다. 그러나 득의 불확실성은 득과 실의 확률비에 따라 거는 것의 확실성과 비례한다. 득과 실 쌍방에 같은 확률이 있을 때 승부가 대등하게 진행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때 거는 것의 확실성은 얻는 것의 불확실성과 비등해진다. 그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다는 것은 당치도 않다. 이렇듯 득과 실의 확률이 같은 내기에서 유한을 걸고 무한을 얻으려 할 때 우리의 제안은 무한한 힘을 갖는다. 이것은 설득력이 있다. 만약 인간이 어떤 진리를 붙잡을 능력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 진리다. ...
나는 당신에게 말하겠다 ㅡ 당신은 이 세상의 삶 속에서 득을 보게 되고, 당신이 이 길을 걸어가는 걸음걸음마다 확실하게 얻을 가능성이 얼마나 크고 거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지를 알게 되며, 결국은 확실하고 무한한 것을 얻되 이것을 위해 아무것도 내놓지 않은 내기를 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라고. ...
만약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고 힘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바라건대 이것을 말한 사람이 그 전과 후에 무릎 꿇고, 자신의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무한하고도 부분이 없는 존재자에게, 당신도 당신 자신의 행복과 이 존재자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복종시키도록 기도드렸다는 것을, 그리고 힘은 이렇게 자신을 낮춤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 당신은 신이 무한하고 부분이 없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ㅡ 그렇다. ㅡ 그렇다면 무한하고 불가분(不可分)의 것을 당신에게 보여주겠다.
그것은 무한한 속도로 사방으로 움직이는 점(點)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지점에서 하나이고 또 각 지점에서 전체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전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자연의 이 사실이, 당신이 아직 모르고 있는 그 외의 것들도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 바란다. 당신이 지금까지 알게 된 것에서, 이제 아무것도 알아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 결론짓지 말고, 반대로 알아야 할 것이 무한히 있다고 결론지어라.
- Facinatio nugacitatis.(헛된 일의 유혹은 좋은 것을 흐리게 하고 사악함의 발동은 때묻지 않은 감각을 타락시킨다 - 구약 외전, <솔로몬의 지혜>, 4:12)
정욕이 해를 끼치지 않도록 목숨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하자.
- 복종. 복종해야 할 때 복종하고 회의해야 할 때 회의하고 확신해야 할 때 확신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이성의 힘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이 세 원리에 어긋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확신하거나, 복종할 경우를 모르기에 모든 것을 회의하거나, 판단해야 할 경우를 모르기에 모든 것에 복종하거나 한다.
회의주의자, 기하학자, 기독교도, 회의, 확신, 복종.
- 권위.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 당신의 믿음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그래서 당신은 전혀 듣지 않은 것 같은 상태에서가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않아야 한다.
당신을 믿게 하는 것은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동의, 그리고 타인들의 이성이 아니라 당신의 이성이 내는 지속적인 목소리이다.
믿는다는 것은 이다지도 중요하다!
서로 반대되는 수많은 것들도 진실된 것일 수 있다.
오래된 것이 믿음의 기준이라면 옛날 사람들은 기준이 없었다는 것인가.
만약 전체적 동의가 기준이라면, 사람들이 죽어 없어질 때는?
거짓된 겸손은 오만이다.
막을 올려라.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ㅡ 만약 믿거나 부정하거나 회의하거나 해야 한다면.
그렇다는 우리는 기준이 없는 것일까.
우리는 동물에 대해, 그것들이 할 일을 한다고 판단한다.
인간들을 판단할 기준은 없는 것일까.
인간이 부인하고 믿고 회의하는 것은 마치 말이 달리는 것과 같다.
죄를 짓는 자들에 대한 징벌, 잘못된 생각.
- ...왜냐하면 결국 인간이란 자연 속에서 무엇인가. 무한에 비하면 허무, 허무에 비하면 전체, 허무와 전체 사이에 걸려 있는 중간자이다. 양극(兩極)을 이해하는 데서 무한히 동떨어진 인간에게는 사물의 종극도 그 근원도 다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비밀 속에 숨겨져 있다. 인간은 그가 빠져나온 허무도, 그 안에 삼키어지는 무한도 다 같이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 만물은 허무에서 나와 무한을 향해 나아간다.
- 우리는 모든 점에서 제한되어 있으므로 양극 사이에 중간을 유지하는 이 상태는 우리의 모든 능력 가운데 나타난다. 우리의 감각은 어떤 극단의 것도 느끼지 못한다. 지나친 소음은 귀멀게 하고 지나친 빛은 눈멀게 하며 지나치게 멀거나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잘 보지 못하게 한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거나 지나치게 짧으면 뜻이 흐려지고 지나친 진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나는 영(零)에서 4를 빼면 영이 남는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안다). 기본 원리들은 우리에게 지나치도록 자명하다. 지나친 쾌락은 괴로움이 되고 음악에서 지나친 화음은 불쾌감을 준다. 그리고 지나친 은혜는 화나게 한다. 우리는 빚진 것 이상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을 갖기 원한다. Beneficia eo usque laeta sunt dum videntur exsolviposse ; ubi multum antevenere, pro gratia odium redditur. (은혜는 이것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고맙다. 지나치면 감사는 원망으로 변한다. - 타키투스, <연대기> 4, 18. 몽테뉴,'3',8 에서 인용.) 우리는 극도의 뜨거움도 극도의 차가움도 감지하지 못한다. 극단적인 성질의 것들은 우리의 적이고 지각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다. 너무 젊거나 너무 늙어도 이성이 방해받고 교육이 지나치거나 부족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극단적인 사물들은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우리도 그것들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우리에게서 빠져나가거나 우리가 그것들에게서 빠져나간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상태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도 없고 완전히 모를 수도 없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정처 없이 떠다니며 한끝에서 또 한끝으로 떠밀려 광막한 중간을 표류한다. 어느 끝엔가 우리를 비끄러매 고정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그 끝은 흔들리며 우리를 떠나간다. 그래서 뒤쫓아 따라가면 잡히지 않고 우리에게서 빠져나가 영원히 도주한다. 어떤 것도 우리를 위해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본래의, 그러나 우리의 성향과 가장 반대되는 상태이다. 우리는 어떤 견고한 기반, 최후의 변함없는 근거를 발견하고 그 위에 무한에까지 뻗어오를 탑을 세우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기초는 무너지고 대지는 심연에 이르도록 입을 벌린다.
그러니 확신과 견고함을 찾지 말자. 우리의 이성은 변화무쌍한 외관에 끊임없이 기만당하고, 아무것도 유한을 두 무한 사이에 고정시키지 못한다, 유한을 둘러삼키고 또 피하는 두 무한 사이에.
이것을 잘 깨닫기만 하면 사람들은 각자 자연이 정해 준 상태 안에서 조용히 머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몫으로 주어진 이 중간에 언제나 양극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더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볼 것이다. 그러나 종극(終極)에서는 여전히 한없이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은 십년이 더 연장되더라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것이 아닌가.
이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은 동등하다. 무슨 이유로 인간이 자신의 상상력을 어떤 특정한 유한 위에 세우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를 유한과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인간이 먼저 자신을 탐구하면 그는 그 이상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어떻게 부분이 전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인가. ㅡ 하지만 적어도 그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만이라도 알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부분들은 매우 긴밀하게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부분들 혹은 전체를 모르고 한 부분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자기를 두기 위한 장소, 지속하기 위한 시간, 살기 위한 운동, 자신을 구성하기 위한 원소들, [자기를] 양육하기 위한 열과 음식, 숨 쉬기 위한 공기 등이 필요하다. 그는 빛을 보고 물체를 지각한다. 결국 모든 것은 그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알려면 어떻게 해서 그가 생존하기 위해 공기를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공기를 알려면 어떻게 공기가 인간의 생명과 이런 관계를 가지는지 등등.
불은 공기 없이는 존속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알아야 한다.
이렇듯 모든 것은 결과이자 원인이고, 도움 받으면서 돕고, 간접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또 가장 멀고 가장 상이한 것들도 연결하는 자연적이고도 감지할 수 없는 연관으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으므로, 나는 전체를 모르면 부분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분을 개별적으로 알지 못하면 전체를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물들의 그 자체로서의 혹은 신 안에서의 영원성은 우리의 짧은 인생을 다시 놀라게 할 것이다. 자연이 확고하고 변함없는 부동성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계속적인 변화와 비교하면 우리에게 동일한 느낌을 줄 것이다.]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에 결정타를 가하는 것은, 사물들은 단일한 것인데 우리는 종류가 다른 상반된 두 성질, 즉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울림을 내는 부분이 정신적인 것 외의 다른 것일 수 없기에 말이다. 그리고 우리를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면, 물질이 물질 자체를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므로 이것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물질이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우리가 단순히 물질이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고,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었다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단일한 사물은 완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사물의 관념을 혼동하여 물질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또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무모하게도 물질은 밑을 지향한다, 물질은 물질의 중심을 그리워한다, 물질은 파괴를 무서워한다, 물질은 진공을 두려워한다, 물질은 성질, 공감,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성질들은 오직 정신에만 속한 것들이다. 그리고 정신에 대해서는 마치 어떤 장소에 있기라도 한 듯 생각하여,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움직이는 운동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오직 물질에만 있는 속성이다.
우리는 순수한 사물들의 관념을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가 지닌 성질로써 그것들을 채색하고 또 우리가 보는 모든 단일한 사물들에 우리의 복합적인 존재를 새겨 넣는다.
우리가 모든 사물을 정신과 물질로 합성시키는 것을 볼 때, 이 혼합은 우리에게 매우 이해하기 쉬우리라고 그 누가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연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인간은 육체가 무엇인지, 더더구나 정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하나의 육체가 어떻게 하나의 정신과 결합될 수 있는지는 그 무엇보다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난해한 문제의 극치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그의 고유한 존재이다. Modus quo corporibus adhaerent spiritus comprehendi ab hominibus non potest, et hoc tamen homo est. (정신이 어떻게 육체에 결합되었는지 인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곧 인간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21, 10 . 몽테뉴,2,12에서 인용)
- H. 3.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
-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 ...어떤 사람들은 본성을 타락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본성을 치유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모든 악덕의 두 원천이라 할 오만 아니면 나태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무기력으로 인해 이 악덕으로 빠져들거나, 오만으로 인해 그것에서 빠져나오거나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우월성을 자각하였으나 타락을 몰랐으며 그 결과 나태는 피했어도 오만에 빠졌는가 하면, 한편 본성의 결함을 깨달았으나 그 존엄성을 몰랐으며 그 결과 허영은 피했어도 절망에 사로잡혔다.
이로부터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파, 독단론자들과 회의론자들 등 갖가지 학파가 유래하였다.
- 참된 종교는 우리의 의무와 우리의 무력함[오만과 정욕]을 가르치고 그 치유책[겸손과 금욕]을 가르친다.
-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 가운데서 알려지지 않았던 것처럼 진리도 외관에서는 아무 차이 없이 보통의 의견들과 섞여 있다.
- 신앙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는 여러 진리들을 포용한다.
- 사악한 자들은 진리를 알고 있어도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 있을 때만 이것을 지지한다, 그 외의 경우에는 이 진리를 버린다.
- 기적을 부인하면서 합리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성서의 뜻을 가르치려고 하면서 그것을 성서에서 얻지 않는 자는 성서의 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 교리론 De Doctrina Christiana>
- <요한복음> 8장 : Multi crediderunt in eum. Dicebat ergo Jesus : <Si manseritis ..... VERE mei discipuli eritis et VERITAS LIBERABIT VOS.> Responderunt : <Semen Abrahae sumus, et nemini servimus unquam.>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ㅡ <요한>, 8: 30-33)
제자와 참된 제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진리가 그들을 자유케 하리라고 그들에게 말해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우리는 자유로우며 악마의 예속에서 벗어날 힘이 있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과연 제자일지는 몰라도 참된 제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 <미드라슈 엘 코헬레트 Misdrach el Kohelet> : <가난하고 지혜로운 아이는 앞날을 예측할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 훌륭하다.>
(<전도>, 4:13)
아이는 덕이고 왕은 인간의 사악함이다. 그것이 왕이라 불리는 것은 모든 지체들이 복종하기 때문이고, 늙었다는 것은 어린아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또 어리석다는 것은 인간이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멸망]의 길로 그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 기적들과, 순결하고 티 없는 성자들과 학자들, 위대한 증인들과 순교자들, 세워진 왕들(다윗)과 혈통으로 왕이었던 이사야 등에 있어서 그처럼 위대한 이 종교, 지식에 있어서 그처럼 위대한 이 종교는 그 모든 기적들과 예지를 펼쳐 보여준 다음 이 모든 것을 부인한다. 그리고 이 종교는 지혜도 표적도 없고 단지 십자가와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표적과 지혜로써 당신들의 신뢰를 차지하기에 합당하고 또 그것들의 본질을 당신들에게 증명해 보인 사람들이, 지혜도 표적도 없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의 능력 외에는 그중 어떤 것도 우리를 변화시킬 수도 없고 또 우리에게 신을 알고 사랑할 수 있게 하지 못하며, 이 능력이 결여된 표적으로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의 종교는 실제적인 원인으로 보면 어리석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예지로 보면 지혜롭다.
- 육체에서 정신에 이르는 무한한 거리는 정신에서 사랑에 이르는 무한히 더 무한한 거리를 표징한다. 사랑은 초자연적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영화의 모든 찬란함도 정신의 탐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광채도 없다.
정신적인 사람들의 위대는 왕, 부자, 장군, 이 모든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신의 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 가치도 없는 지혜의 위대는 육적인 사람에게도, 정신적인 사람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들은 각기 종류가 다른 세 질서이다.
- 인간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경박함, 변심, 감언이설, 재물의 유혹에 쉽게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 이 점을 유의하라.
- 이성이 타락했다는 것은 그 많은 잡다하고 기괴한 풍습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이 더 이상 제멋대로 살지 않도록 진리가 내려와야 했다.
- 인간의 의지 자체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능력이 있을 때에도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버리면 그 순간부터 만족하게 된다. 이것을 버리면 불만이 있을 수 없고, 이것에 의지하면 만족이 있을 수 없다.
- 그들은 정욕이 발동하게 내버려두고 양심의 발동을 억제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해야 하는데.
- 악인들이 존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죽여야 하는가. 이것은 한쪽 대신 양쪽을 악인으로 만든다. Vince in bono maluml. St. Aug.
(선으로 악을 이겨라 ㅡ <로마>, 12 : 21, 아우구스티누스의 <'로마서'에서 발췌한 주제들의 해설> 가운데 설명된 것이다.
- 세상을 따라 살아가기에 가장 쉬운 조건들은 신을 따라 살아가기에 가장 어려운 조건들이다. 이와 반대로 세상을 따르면 종교적 삶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무것도 없고, 신을 따르면 종교적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아무것도 없다.
- 문란하게 사는 사람들은 질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에서 동떨어진 것은 당신들이라고 말하며 자기들은 자연을 따른다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멀리 떠나가는 것은 바닷가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말은 어느 편에서나 같다.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한 점이 필요하다. 항구는 배 안의 사람들을 판단한다. 그러나 도덕에 있어서는 어디에 항구를 두어야 할 것인가.
- 모든 것이 똑같이 움직일 때는 마치 배 안에서처럼 외견상으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모두가 방종으로 흐를 때 아무도 방종으로 가는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걸음을 멈추는 사람이 고정된 한 점같이 다른 사람들의 격한 움직임을 알아보게 한다.
- 연옥의 가장 큰 고통은 심판의 불확실성이다.
Deus absconditus. (숨어 계시는 하느님)
- 신을 아는 것에서부터 신을 사랑하기까지는 얼마나 먼가!
- 신은 이들에게 은총으로 빛을 주시되 이들이 신을 찾고 따르기를 원하면 되돌아갈 수 있기에 충분한 빛을, 또 신을 찾거나 따르기를 거부하면 그들을 벌하기에 충분한 빛을 주신다.
- 우리의 종교의 증거, 예언, 나아가서는 기적까지도 절대적으로 설득력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믿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만큼의 설득력은 있다. 이렇듯, 확실성과 모호함이 있어 어떤 사람들은 분명하게 보게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확실성은 그 반대되는 것의 확실성을 넘어서는 혹은 적어도 같은 정도의 것이다. 그래서 이 확실성을 따르지 못하게 막는 것은 이성이 아니며 따라서 정욕과 마음의 사악함일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으로 정죄하기에는 충분한 확실성이 있어도 설득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확실한 것을 따르는 사람들의 경우 이것을 따르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은총이며 또 이것을 피하는 자들의 경우 이것을 피하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정욕이라는 것을 나타나기 위해서이다.
- 예수는 의인(義人)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었다. 태어나기 전에는 무(無) 속에서, 태어난 후에는 죄(罪) 속에서 그들이 잠자는 동안에.
- <스스로 위로받아라. 이미 나를 보지 않았다면 너는 나를 찾지 않으리라.>
- <아직 있지도 않은 일을 잘할 수 있을까 미리 궁리하는 것은 너 자신을 시험하기보다 오히려 나를 시험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네 안에서 내가 이루리라.>
- <너의 회심, 이것이 곧 나의 일이다. 두려워 마라, 나를 위해 기도하듯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
- 모든 것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유익하게 만들어진 사물까지도. 가령, 자연 속에서 담도 우리를 죽일 수 있고 계단도 정확히 발을 딛지 않으면 우리를 죽일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운동도 전 자연에 영향을 준다. 돌 하나로 온 바다가 변한다. 이렇듯 은총에 있어서도 극히 작은 행동이 그 결과로써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모든 것이 중요하다.
하나하나의 행동에 있어서도 그 행동 외에 우리의 현재, 과거, 미래의 상태와, 그 행동의 영향을 받는 다른 행동들의 상태들을 관찰하고 또 이 모든 것의 관련성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사람은 매우 신중해질 것이다.
- 단식하고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것보다 단식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더 좋다.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 힘쓰시오. (<빌립보>, 2 : 12)
...Petenti dabitur.
(구하는 자에게는 주시리라. ㅡ <마태> 7:7. 라틴어 원본은 이와 달리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 Petite et dabitur'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받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있지만 기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더 이상 신에게 바라서는 안 될 것이다. 바랄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을 얻로고 힘써야 하기 때문이다.
- 사람은 확실성을 좋아한다.
- 과거에는 죄를 피하기도 어려웠고 속죄하기도 어려웠다. 지금은 수많은 구실로 죄를 피하기도 쉽고 속죄하기도 쉽다.
- Nihil turpius quam cognitioni assertionem praecurrere. CIc.
(알기도 전에 주장을 내세우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은 없다 - 키케로, <아카데미아 Academia> 1, 13)
Nec me pudet ut istos fateri nescire quid nesciam.
(또한 나는 그들처럼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 키케로, <투수쿨롬에서의 논쟁 Tusculanae disputationes>, 1, 25)
Melius non incipiet.
((중지하는 것보다)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 쉽다 - 세네카, <서한집>, 72)
- ......성자(聖者)들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보고 자신들의 최선의 행위도 비판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한다. 그런데 이자들은 가장 악한 행위도 용서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한다.
- 3만 명에 대항하여 나는 혼자인가? 아니다. 당신들은 궁정을 지키고 허위를 지켜라. 나는 진리를 지키겠다. 이것이 나의 모든 힘이고, 이것을 잃으면 나는 끝장이다. 나에게는 비방자와 박해자가 그치지 않으리라. 그러나 진리는 나의 편에 있다. 승리는 누구의 것인지 보게 될 것이다.
- 사람은 양심에 따라 악을 행할 때 가장 마음껏 그리고 가장 즐거이 행한다.
- A fructibus eorum... ㅡ 그들의 도덕으로 그들의 믿음을 판단하라.
(그들의 열매로써...<마태> 7 : 16)
- 부정한 심판자들이여, 임시변통의 법을 만들지 마시오, 기존의 법으로 그리고 당신들 자신에 따라 심판하라.
Vae qui conditis leges iniquas.
(불의한 법을 만드는 자에게 화 있을지어다 ㅡ <이사야> 10 : 1)
- 그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 능력과 그의 어리석음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불균형이 있어서 어떻게 그처럼 자신을 착각할 수 있는지 믿기지 않는다.
- *진리 외에 확신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진리의 성실한 추구 외에 평안을 주는 것은 없다.
- 잘못 말하고 잘못 생각하는 데 길들여진 사람들.
- *오늘날 진리는 너무나도 흐려지고 허위는 너무나도 확고히 세워진 나머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한 진리를 알 도리가 없다.
910-[1] 기하학의 정신과 섬세의 정신의 차이.
전자에 있어서는 원리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명백하지만 일상적 용도에서는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이 안 된 탓으로 그쪽으로 머리를 돌리기가 힘들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머리를 돌리기만 하면 원리들은 넘치도록 잘 보인다. 그리고 완전히 그릇된 정신을 가지고 있지만 않다면 이 원리들에 대해 잘못 추론할 수가 없다. 이 원리들은 너무나도 굵직하기 때문에 빠져나가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섬세의 정신에 있어서는, 원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또 모든 사람의 눈앞에 있다. 굳이 머리를 돌릴 필요도 없고 억지를 쓸 필요도 없다. 다만 좋은 눈, 진정 좋은 눈을 갖는 것만이 문제다. 왜냐하면 이 원리들은 너무나도 섬세하고 수가 많은 탓으로 그중 어떤 것들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 하나의 원리라도 놓치면 필시 오류를 범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모든 원리들을 보기 위해 참으로 명확한 눈을 가져야 하고, 다음으로는 알게 된 원리에 대해 그릇되게 추론하지 않기 위해 바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 정신을 다소 풀어주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큰 방종으로의 길도 연다. 그러니 그 한계를 정해야 한다.
사물에는 어떤 한계도 없다. 규범은 한계를 정하려고 하고 정신은 이것을 용인하지 못한다.
- 심정(직관)으로 판단하는 데 길들여진 사람들은 추리를 요하는 사물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먼저 한눈에 꿰뚫어 보려고 하고 원리를 찾는 데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원리에 따라 추리하는 데 길들여진 사람들은 심정을 요하는 사물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안에서 원리를 찾으려 하고 한눈에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릇된 정신의 소유자들이 많다.
- 사람이 고통에 굴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쾌락에 굴하는 것이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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