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간 노자 - 도덕경의 태초 원본 (죽간본)

Posted by 히키신
2017. 2. 6. 18:04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도덕경의 태초 원본-

초간 노자
(도덕경 죽간본)

<갑본>

1

꾀를 끊고 말재간을 버리면
백성들은 백배 이로워지며

재주를 끊고 이익냄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지며

거짓됨을 끊고 생각을 비우면
백성들은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세 문장으로는 부족하여
가르침을 덧붙인다.

본연의 모습을 바라보고 순수함을 간직하라.
사사로움(私)을 줄이고 바램을 작게 하라.













2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계곡의 왕이 되는 까닭은
그가 수많은 계곡의 아래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수많은 계곡의 왕이 되는 것이다.

성인이 백성들의 앞에 있는 것은
자신을 뒤로 물리기 때문이며
그가 백성들의 위에 있는 것은
스스로 말을 낮추기 때문이다.

그가 백성들의 위에 있어도
백성들은 무겁게 느끼지 않으며
그가 백성들의 앞에 있어도
백성들은 해롭게 느끼지 않는다.
천하가 그를 즐거이 받들며 꺼려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다툼이 없기 때문에
천하가 그와 다툴 수 없다.












3

죄는 과도히 바라는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이 없고
허물은 가지려 욕심부리는 것보다 더 참혹한 것이 없으며
화는 충족함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충족해할 줄 알게 될 때 비로소 충족해지고
그것은 영원한 충족함이니라.














4

도로써 사람들을 돕는 지도자는
군대로써 천하를 강압하려 하지 않는다.
훌륭한 자는 일을 이루기만 할 뿐
강건함(强)을 취하지 않는다.

일을 이루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며
일을 이루어도 오만하지 않으며
일을 이루어도 자랑하지 않는다

이를 일러 ‘일을 이루되 강건하지 않음’이라 하며
그것은 좋은 것이다.











5

태고에 도를 행하였던 현자는
틀림없이 ‘은은한 검은 경계’를 통하였으며
[玄(현): 검음, 고요, 무한]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것을 표현해 보자면
그 앞서 살핌이여, 겨울 시내를 건너는 듯하며
그 신중함이여, 사방의 적군을 경계하는 듯하며
그 정중하고 의젓함이여, 손님과 같으며
그 유연하고 부드러움이여, 녹아 내리는 얼음과 같으며
그 진실함이여, (갓 베어낸) 통나무와 같으며
그 알 수 없음이여, 흐린 물과 같다.

누가 흐릿함을 안정시키어 서서히 고요하게 할 수 있을까.
누가 고요함을 유지시키어 서서히 생기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러한 도를 간직한 자는
(스스로를) 높이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6

하려고 하는 자는 그르치고
잡으려고 하는 자는 멀어진다.

고로 성인은 하려함이 없기에 그르침이 없고
잡으려 하지 않기에 잃는 법이 없다.

일에 임하는 바탕은
일의 끝을 처음처럼 신중히 하는 것이며
(일의 처음에서 끝까지 한결같이 임하는 것이며)
이렇게 처사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느니라.

성인은 바라지 않음을 바라며
얻기 힘든 재물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가르치지 않음을 가르치며
(관념 입히지 않음을 가르치며)
뭇사람들이 지나쳐온 곳으로 되돌아간다.

이렇듯 성인은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울 뿐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7

도는 항상 무위이다.
[무위: 형상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무형의 근원 경계]

나라의 왕이 무위에 머무르면
만물은 스스로 다스려진다.

도중에 욕심이 일어나면
이름 없는 통나무(도)로써 본처로 돌아오게 하라.

대저 충족함을 알지라.
충족함을 알게 되어 고요해지면
만물은 스스로 제 자리를 찾는다.










8

함 없이 하며
일 없애기를 일삼으며
무맛을 맛보라.

크고 작은 일들을 쉽게 대함이 잦아지면
반드시 어려움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쉽더라도 오히려 어렵게 대하며
고로 마칠 때까지 어려움이 없다.












9

온 천하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추함이며
모두 선함을 선함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함이 아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를 형성하고
길고 짧음이 서로를 만들고
높고 낮음이 서로를 메우고
음과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고
앞과 뒤가 서로를 뒤따른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에 머물러 일에 임하며
말 없는 가르침을 편다.

만물은 일어나지만 그것을 시작 삼지 아니하고
운행하지만 그것에 기대지 아니하며
완성되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저 머무름이 없으며
고로 사라지지 않는다.








10

도는 항상 이름이 없으며
소박하고 조그마하지만
천지도 감히 부릴 수 없다.

나라의 왕이 도에 머무르면
만물이 스스로 따르며
하늘과 땅이 서로 모여 단이슬을 내리며
백성들에게 명령함이 없어도 스스로 다스려지느니라.

(통나무는) 비로소 깎고 난 후에는 이름이 생기는데
이름이 있게 되면
대저 그칠 줄을 알아야 하며
그칠 곳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

나직한 도가 천하에 깃들어 있는 것은
작은 계곡에 강바다가 더불어 있는 것과 같다.

11
무언가 있는데
알 수 없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지에 앞서 생겨났다.
고요하고 텅 비어 있으며
홀로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다.
가히 천하의 어미라 할 만하다.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도’라고 글자 지어 부른다.
나는 구태여 그것에 이름을 붙여 '크다'라고 한다.

크면 뻗어나가고
뻗어나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시 되돌아온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도도 크고
왕 또한 크다.

나라 안에는 네 가지 큰 것이 있으니
왕(성인)은 그 가운데 하나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12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은
풀무와도 같다.
[풀무: 바람을 불어 불을 붙이는 도구]

그것은 텅 비어 있으나 쇠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욱 샘솟는다.











13

텅 빔에 이르름이 영원같고
텅 빔에 머무름이 지극하면
만물이 다 함께 일어나게 되고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간다.

하늘의 도는 둥글고 둥글어서
만물은 각기 그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14

안정된 것은 간직하기 쉽고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일을 꾸며나가기 쉬우며
연한 것은 식별하기 쉽고
조그마한 것은 이행하기 쉽다.

생기기 전에 처리하고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리라.

아름드리 나무도 한 터럭의 싹에서 시작하고
구층누대도 한 줌의 흙에서 시작하며
백길의 높은 산도 한 발자국에서 시작한다.









15

아는 자는 말이 없으며
말하는 자는 앎이 없다.

(의식이 반응하는) 그 구멍을 닫고 문을 막으면
빛과 어우러져 티끌과 하나되며
날카로움이 다듬어지고 어지로움이 가라앉는다.
이 경계를 일러 현동(검은 하나됨)이라 한다.
고로 (이 경계를)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또한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롭게 여길 수도 없고
또한 해롭게 여길 수도 없으며
귀하게 여길 수도 없고
또한 천하게 여길 수도 없다.

고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된다.

16

바름(正)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써 군사를 부리며
일하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얻으라.

내가 어떻게 이러한 이치를 아는가.

대저 임금이 바라거나 꺼리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지며
백성들에게 편리한 물건들이 많아질수록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지며
사람들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기이한 것들이 더욱 일어나며
법률이 요란할수록 도적들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나서서 일을 벌이지 않으면
백성들은 스스로 넉넉해지고
내가 무위에 머무르면
백성들은 스스로 다스려지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들은 스스로 올바르게 되고
내가 바라지 않기를 바라면
백성들은 스스로 순박해진다.




17

덕을 품음이 지극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다.

벌, 전갈, 벌레, 독사도 쏘지 못하고
사나운 새나 맹수도 덮치지 못하며
뼈가 연하고 근육이 부드럽지만 붙잡음이 굳세다.

암수의 합을 모르는데도 곤두서는 것은
정기가 지극하기 때문이며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조화로움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조화로움을 ‘영원함(常)’이라 하고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하며
생명을 보태는 것을 ‘길함(祥)’이라 하고
마음으로 기운을 통제하는 것을 ‘강건함(强)’이라 한다.

모든 것은 굳세지면 노쇠하게 되며
이를 일러 도가 아니라고 한다.










18

명예와 몸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
몸과 재물 중 무엇이 더 귀중한가?
얻음과 잃음 중 무엇이 더 문제인가?

과도히 애착하면 반드시 큰 댓가를 치르게 되고
무겁게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망한다.

그러므로 충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장구하게 된다.









19

되돌아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며
은은함은 도의 방식이다.

천하 만물은 있음으로부터 비롯되며
있음은 없음으로부터 비롯된다.












20

가져 쌓으려는 것은
그만둠만 못하다.

많이 뭉쳐 쌓으면
오래 보존하지 못한다.

금과 옥으로 가득 찬 집은
지켜낼 수가 없다.

귀복하다 하여서 교만해지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는 것이다.

공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다.

<을본>

21

사람들을 다스리고 하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아낌’만한 것이 없다.

대저 아낄지라.
이렇게 함으로써 미리미리 갖추게 된다.

미리미리 갖춤을 일러 ‘덕을 두둑이 쌓는 것’이라 하며
덕이 두둑이 쌓이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고
해내지 못할 일이 없으면 그 끝을 알 수 없으며
그 끝을 알 수 없으면 나라를 맡을 만하며
(이렇게) 나라의 근본을 맡으면 (그 나라는) 장구할 수 있다.

이것을 이르기를 깊은 뿌리, 굳은 토대의 덕이라 하며
오래오래 존재하는 도라 한다.













22

학문을 하는 자는 나날이 쌓아가며
도를 닦는 자는 나날이 덜어낸다.

덜고 또 덜어내어
마침내 무위에 이르게 된다.

그는 함이 없는데도
하지 않음이 없다.











23

학문(관념 입히는 배움)을 끊으면
근심(번뇌)이 없다.

공손함과 성냄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사람들이 걱정하는 모습을
되려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24

사람들은 명예와 수치를 갓끈처럼 여기며
번뇌를 자신의 몸뚱이처럼 귀중히 여긴다.

어째서 명예와 수치를 갓끈이라 하는가?
명예는 아랫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어도 그것에 얽매이게 되고
그것을 잃어도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
그렇기에 명예와 수치를 일러 갓끈이라 한다.

어째서 “번뇌를 자신의 몸뚱이처럼 여긴다”고 하는가?
나에게 번뇌가 있는 까닭은
나에게 ('나'라고 여기는) 몸뚱이가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없는 경계에 이른다면
어찌 번뇌가 일어나겠는가.

그러므로 천하를 다스리듯 자신을 다스리면
가히 천하를 맡을 수 있느니라.

천하를 사랑하듯 자신을 사랑하면
가히 천하를 이끌 수 있느니라.









25

높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그 정수를 행하고
중간 사람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해하고
낮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큰 비웃음을 사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느니라.

고로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듯하며
평탄한 도는 굴곡진 듯하며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듯하며
높은 덕은 골짜기처럼 낮으며
큰 순백함은 탁한 듯하며
큰 덕은 부족한 듯하며
건실한 덕은 박한 듯하며
바탕되는 본성은 변화하는 듯하며
거대한 모서리는 모가 없으며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거대한 소리는 희미하게 들린다.

하늘의 형상은 형체가 없고
도는 성대하지만 이름이 없으며
훌륭한 느슨함으로써 만물을 완성시킨다.


26

(의식이 반응하는) 그 문을 닫고 구멍을 막으면
죽는 날까지 어려움이 없다.

그 구멍을 열고 일을 좆으면
죽는 날까지 돌아오지 못한다.










27

진정 완전한 것은 부족한 듯하며
하지만 그 쓰임은 모자람이 없다.

진정 가득한 것은 비어있는 듯하며
하지만 그 쓰임은 끝이 없다.

큰 재주는 둔한 듯하고
큰 완전함은 곤궁에 빠진 듯하고
큰 곧음은 굽은 듯하다.









28

화롯불은 차가움을 이기고
고요함은 뜨거움을 이긴다.
고요하디 고요함은 천하의 바탕이 된다.










29

(도를) 잘 심은 자는 뽑혀지지 않고
잘 간직한 자는 벗어남이 없으며
자손들로부터 제사가 끊이질 않는다.
(도로써) 자신을 다스리면 덕이 본처에 이르며
집안을 다스리면 덕이 넘쳐나며
마을을 다스리면 덕이 자라나며
나라를 다스리면 덕이 흥왕해지며
천하를 다스리면 덕이 모든 곳에 두루 미친다.

집안을 집안으로써 바라보고
마을을 마을로써 바라보고
나라를 나라로써 바라보고
천하를 천하로써 바라보라.

내가 어떻게 천하의 그러함(이치)를 알 수 있는가?
이로써다.
(모든 것의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스칼 - 팡세  (0) 2017.02.13
몽테뉴 - 수상록  (0) 2017.02.13
박이문 -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0) 2016.12.10
Marcus Aurelius Antoninus 명상록  (0) 2016.11.29
황산덕 - 복귀(復歸)1975  (0) 2016.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