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 아Q정전 / 광인일기

루쉰 – 아Q정전 · 광인일기, 정석원 옮김, 문예출판사, 1966

*아Q정전, 광인일기, 고향, 백광
- 루쉰전집(魯迅全集) 은 총 10권, 그 중 루쉰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집은
<<눌함呐喊>>, <<방황傍徨>>. 이 책은 전집 제1권 <<눌함>>에 수록되어 있는 것들.
베이징대학에서 실시한 강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 소설사 연구 분야 개척.
자서自序

나 역시 젊었을 때는 수많은 꿈을 간직했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대부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무엇을 회상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수도 있지만 때로는 적막감을 금치 못하게도 하는 법이다. –p7

의사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사람을 속이는 일종의 사기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와 함께 그들에게 속아넘어간 환자나 그 가족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느꼈다. –p9

(…)그러나 내가 난생 처음으로 적막감을 느꼈던 것은 그 일이 있고 나서였다. 처음에는 내가 왜 그런 적막감을 느끼는지 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마침내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즉 어떤 사람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는 전진할 수 있게 되고 또 반대에 봉착하면 분발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멀쩡한 사람에게 호소했는데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찬성도 아니고 반대도 아니므로 이럴 때 사람은 끝없는 황야에 홀로 내팽개쳐진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이 얼마나 비참한 노릇이겠는가? 나는 바로 그런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적막감에 빠졌던 것이리라.
적막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것은 마치 독사처럼 나의 영혼을 친친 감고 있었다.
나는 이렇듯 까닭 없는 비애에 잠겨 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비분해하지는 않았다. 그와 같은 경험은 오히려 나 자신을 반성케 했으며 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흥분하며 열변을 토했다고 해서 호응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드는 그런 영웅은 결코 아닌 것이다.
다만 나는 나 자신을 휘감고 있는 그 적막감을 당장 떨쳐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갖은 방법을 다 써가면서 나 자신의 영혼을 마취시키기 위해 힘썼다. 그리하여 나를 대중 속에 깊이 파묻어보기도 했으며 또한 먼 옛날로 되돌아가게도 해보았다. 그 뒤에는 더욱더 적막하고 서글픈 일들-내가 더 이상 회상하기조차 싫은-을 직접 체험해보거나 방관하면서 기꺼이 그들과 나의 영혼과 함께 진흙 속에 소멸시켜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마취법이 도리어 효과가 있었는지 더 이상 젊을 때처럼 비분강개하거나 격앙하지 않게 되었다.
-p11~12
“가령 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거기에는 창문도 없고 또 절대로 부숴버릴 수도 없는 그런 방이야. 그 속에는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지. 그러니 머지않아 모두 죽을 판이야. 하지만 혼수 상태에 빠져 곧장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고 치세. 그런데 자네가 마구 소리쳐 약간 의식이 맑아 있던 몇 사람을 노라 깨우게 함으로써 불행한 그 몇몇 사람들에게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맛보게 한다면 과연 자네가 그들에게 잘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겠나?”
“그러나 다만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나?”
그렇다. 비록 내 나름대로의 확신은 서 있었다 할지라도 희망을 말했을 때 그것을 말살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희망이란 미래에 존재하는 것인 만큼 희망이 없다고 하는 아무 근거도 없는 나의 확신을 가지고 그가 있을 수도 있다고 보는 희망을 꺾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나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글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처녀작인 <광인일기>였다. (…)
나 자신을 두고 볼 때, 절박한 상황에 부딪치면 절규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런 사람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옛날 나 자신이 겪었던 적막한 슬픔을 아직도 못 잊는 탓일까? 가끔 몇 번 함성을 질러서 적막 속을 달리고 있는 용맹한 투사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을 줌과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전진하는 데 두려움이 없도록 해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가끔 곡필(曲筆)도 서슴지 않았다. (…) 스스로가 고통스럽게 여겼던 적막감을 내가 젊었을 때처럼 청운의 꿈에 부풀어 있을 젊은이들에게 또다시 전염시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p14~15

아Q정전
꽤 따뜻한 어느 날이었다.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것이 여름기분이 들었지만 아Q에게는 꽤 춥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배고픔이었다. (…) 아Q는 오래전부터 길거리에서 돈을 좀 주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았지만 오늘까지 한 푼도 줍지 못했다. (…) 하는 수 없이 그는 구걸하기로 마음먹고 문을 나섰다.
아Q는 길거리르 헤메면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낯익은 술집에 역시 낯익은 만두가 보였다. 하지만 그는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시 머뭇거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말조차 꺼내지도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p48~49

웨이짱 사람들의 관례에 따르면 좀 그럴듯한 인물을 만나게 되면 으레 존경심을 표하곤 했다. 상대방이 아Q임에 틀림없지만 옛날 말에 ‘선비는 사흘만 못 봐도 괄목상대해야 한다’ 라고 했다. 그러니 점원이나 주인, 술꾼, 나그네 할 것 없이 모두가 의아해하면서도 존경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p52

갑자기 아Q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처형이 아닌가? 아Q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눈앞이 캄캄해졌고 귀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까무라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까무라치지는 않았다. 당황하면서도 때로는 태연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처형을 당하는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p80

광인일기
만사는 연구를 해보야지만 명백해지는 법이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이 옛날부터도 종종 있어왔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지는 못한다. 나는 역사책을 한번 훑어보았다. 그러나 역사 책에는 연대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저 비뚤비뚤하게 ‘仁義道德’ 이란 몇 자만 씌어 있었다. 나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제서야 글자와 글자 사이에 온통 ‘食人’ 이란 두 글자가 빽빽이 박혀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역사 책에도 ‘식인’ 이란 글자가 수도 없이 씌어 있고 또 소작인의 말에도 온통 그런 말로 가득했으며 사람들은 히죽거리면서 괴상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나도 사람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잡아먹으려고 한다!
-p92

“싹 먹어버립시다”
(…) 떼거리를 규합하여 나를 잡아먹겠다는 자는 바로 나의 형이었던 것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자는 나의 형.
나는 사람을 잡아먹는 자의 형제!
나 자신이 잡아먹혀도 나는 여전히 사람을 잡아먹는 자의 형제가 아닌가!
-p94~95

사실 이 같은 도리는 지금 그들로서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웬 사람이 하나 왔다. 나이는 고작 20세 전후쯤 되었고 얼굴 모습은 그리 분명치 않았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의 웃음도 진짜 웃는 것은 아니리라. 나는 그에게 물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짓이 옳으냐?”
그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흉년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을 잡아먹겠습니까?”
순간 나는 이자도 한 패거리로서 즐겨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용기백배해서 다그쳐 물었다.
“옳단 말이냐?”
“어찌 그런 것을 묻습니까? 참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오늘 날씨가 매우 좋군요.”
날씨도 좋고 달빛도 밝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었다.
“옳은 것이냐?”
그자는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얼버무리듯이 대답했다.
“아니오……”
“아니라면 그들은 왜 사람을 잡아먹었지?”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그런 일이 없었다구? 랑쯔 촌에서는 지금도 사람을 잡아먹고 있으며 또 책에서도 그렇게 씌어 있단 말이다. 온통 선혈이 낭자하단 말이야!”
순간 그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고 말았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어쩜 있을지도 모르긴 해요. 옛날부터 그래 왔으니까……”
“옛날부터 그래 왔으니 옳단 말이냐?”
“저는 나으리와 그런 도리에 대해 논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나으리께서도 그런 말씀은 안하셔야 해요. 나으리의 말씀도 잘못된 거예요!”
나는 벌떡 일어났다. 눈을 떠보니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의 나이는 큰형님보다 훨씬 적었지만 한패거리이다. 그것은 그의 부모가 시킨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까지 가르쳤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조차 증오에 찬 표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남을 잡아먹으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에게 잡아먹히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 가득찬 눈초리로 서로 눈치만 살핀다.
그런 마음만 버린다면 마음놓고 일할 수 있을 것이며 길을 걷는다든가 식사를 하고, 또 잠을 자는 것이 얼마나 편할 것인가? 이는 곧 문지방이나 관문과 같아 이것만 넘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러나 그들은 부자나 형제, 부모, 친구, 스승과 제자, 그리고 원수나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한패가 되어 돕거나 견제하면서 죽어도 그 문턱을 넘으려고 하지 않는다.
-p98~100

“큰형님, 아마도 최초의 야만인들은 모두 사람 고기를 약간은 먹었을 거에요. 그러나 뒤에 와서 생각이 달라져 어떤 자는 먹지 않았을 테지요. 줄곧 그렇게 해와 하나의 사람으로 변했고 더 나아가 진정한 사람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는 그래도 계속 먹었지요. 마치 벌레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물고기나 새, 원숭이로 변했다가 다시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을 겁니다. 착하게 변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벌레 신세인 자도 있을 테구요. 사람을 잡아 먹는 자는 그렇지 않은 자에 비해 얼마나 창피할까요? 아마도 이는 벌레가 원숭이 앞에서 느끼는 창피함보다도 훨씬 더할 것입니다. (…)
사람을 잡아먹는 자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놈들은 저를 잡아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형님까지도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놈들끼리도 서로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발짝만 물러서서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끔찍한 사태는 그 즉시 개선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로울 수 있지요. 비록 그것은 옛날부터 그랬다손 치더라도 오늘 우리들은 각별히 선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p100~101

약

가을의 새벽, 달은 졌으나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검푸른 하늘만이 외로웠다.
-P117

내일

하지만 빠오얼의 증세는 낮에는 좋아졌다가 밤만 되면 심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내일 해만 뜨면 열은 물러갈 테고 기침 또한 가라앉을 것이다. 이것은 환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니까.
딴쓰 아줌마는 우둔한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하지만’이란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고 있었다. 하긴 여태껏 보면 궂은 일도 그 말 한마디로 좋아진 경우가 적지 않았고 반대로 잘될 일도 그놈의 말 한마디로 망쳐버린 때가 많긴 했다.
-P134

그녀는 이제 아들 빠오얼이 틀림없이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방이 보기 싫어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옛날의 일이었다. (…) 그때는 정말이지 자아내는 실오라기 마디마디가 신이 났고 활기에 넘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사실 그녀는 현재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그녀는 우둔한 여자였다. 그러니 그녀가 무엇을 생각해낼 수 있겠는가? 그녀가 느낀 것이라고는 방이 너무 조용하고 크며, 너무 공허하다는 것 뿐이었다.
-P142

작은 사건

시골에서 서울로 온 지 어느새 6년이 지났다. 그동안 귀로 듣고 눈으로 직접 목격한 소위 국가 대사를 헤아리자면 무척이나 많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그 어느 것 하나 이렇다 할 흔적을 남겨놓지 못했다. 만일 그 사건들이 미친 영향을 생각해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의 못된 기질만 부채질하고 말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것들은 나로 하여금 나날이 남을 경시하도록 만들 뿐이었다.
-P145

두발 이야기

“그놈의 두발 수난이 우리에게 닥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유학을 가자 변발을 잘라버렸지. 어떤 뜻이 있어서가 결코 아니었고 단지 너무 불편해서였다네. 그런데 뜻하지도 않게 변발을 머리 위에 얹은 몇몇 학생들은 나를 무척이나 증오했고 학생 감독도 노발대발하면서 관비(官費)를 끊어버리고 중국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거야.”
-P152

“현재 자네 같은 이상주의자들은 여자도 머리를 잘라야 한다고 외쳐대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 이득도 없이 고통받는 자들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가?
머리를 자른 여자들이 그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또 제적당하는 자가 벌써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개혁? 무기가 어디 있는가? 일하면서 배운다고? 그럼 일할 공장은 있는가?
그런 논리에 휩쓸리지 말고 머리를 늘어뜨린 채 시집이나 가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게 행복이란 말일세. 그녀들이 평등이니 자유니 따위를 생각하고 있다면 오히려 일생 동안 고통만 받을 뿐이야!
알쎄바세프가 한 말처럼 자네에게 묻고 싶네. 자네들은 황금 시대의 출현이라는 것을 그들의 자손에게 기약했네만 그들 자신에게는 무엇을 주려고 하나?
아! 조물주의 가죽 채찍이 중국이라는 등줄기에 후려쳐지지 않는 한 중국은 영원토록 이 모양 이 꼴일 뿐이야. 스스로는 손끝만큼도 개혁을 하려 들지 않거든!
자네들의 입 속에는 애당초부터 독이빨이 없었거늘 어쩌자고 이마에다가는 ‘독사’라는 두 글자를 붙여놓고 거지들을 잡아다 때려 죽이는가?
-P155

고향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에 그렇게도 신기한 일이 많은지 몰랐다. 해변에는 형형색색의 조가비가 있고 수박에도 이렇듯 위험한 내력이 있다니. 옛날에는 수박이란 그저 과일 가게에 내놓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
아! 룬투의 가슴속에는 신기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두가 당시 내가 사귀고 있던 친구들은 모르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일들을 알지 못했다. 룬투가 바닷가에서 노닐고 있을 때, 그들과 나는 뜰의 높은 담장에 갇힌 채 네모진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
-P179

나는 누웠다. 배 밑바닥에서는 찰싹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제 나의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결국 룬투와는 이 지경까지 격리되고 말았지만 우리들의 후손은 그래도 한 덩어리다. (…) 나는 그들이 나처럼 남들과 담을 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한 덩어리가 되기 위해 나처럼 고생스럽게 전전해가면서 살기도 원치 않을뿐더러, 룬투처럼 고달프고 마비된 생활을 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들에게도 새로운 삶, 우리들이 미처 영위해보지 못했던 삶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게 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요구할 때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나는 그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며 한시도 잊지 않고 있구나 하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 역시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우상이 아닐까? 다른 점이라면 그의 희망은 절박한 것인 데에 비해 나의 희망은 막연하고 아득한 것이라는 점뿐이다.
몽롱한 가운데 눈앞에는 해변의 푸르른 모래밭이 떠올랐다. 짙은 남색 하늘에 바퀴처럼 두우근 황금의 보름달이 떠 있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희망은 본디 있다고 할 것도 아니고 또 없다고 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원래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P188

백광

눈빛이 이상하리만큼 번쩍였다. 수많은 물건들을 쳐다보았지만 모두가 모호할 뿐이었다. 무너져 내린 설탕탑처럼 되어버린 앞길이 자기 앞에 가로누워 있다. 그 길은 자꾸만 커지면서 자신의 모든 길을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
하늘은 한 조각의 벽해(碧海) 같고 간혹 구름만이 분필 가루를 흘린 듯 뿌옇게 그어져 있었다.
-P192~193

작가와 작품세계 (역자 주)
그는 일생 동안 끊임없는 집필 활동을 통해 실로 방대한 저술과 번역서를 생산해냈다. 이러한 양적이고 질적인 커다란 문학적 성취로 인해 그에게는 중국 현대문학의 창시자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주어졌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깊은 사상과 열렬한 혁명정신이다. 그는 숨기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중국의 피의 역사와 중국인의 추잡함, 격변과 소용돌이에 휩싸인 근대 이후 중국 사회의 모습을 거리낌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가식이나 에누리 없이 투명하게 펼쳐 보인다.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