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 철학강의

Posted by 히키신
2017. 2. 15. 16:18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김용옥 선생의 ‘철학강의’ ,1986, 통나무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인간은 모르는 것을 철저하게 모를 때만이 아는 것을 철저하게 알 수 있다.…너무도 많은 것을 너무도 쉽게 알고 있다.안다는 것은 때때로 인간을 기만한다. …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무지로부터의 탈출이라고 생각했다.…인간은 궁극적으로 무지에서 탈출해야 하지만 무지로부터의 탈출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지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p62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철학은 인간의탐구라는 과제를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철학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인간적이다.너무도 인간적이다.그래서 나는 나의철학을 인간학이라고 부른다.
-p80

철학은 상식의 끊임없는 새로운 해석이다.…움직일 수 없이 확고부동한 너무도 뻔한 사실의 끊임없는 확인이다.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인간의 삶의 과정이다.그런 의미에서 철학처럼 겸손한 것은 없다.우주를 다 안다고 말하지도 않고 우주의 창조와 종말을 논하지도 않는다.그런 의미에서 너무도 인간적이고 겸손하다.…우리는 모두 진리앞에서 겸허해야 할 것이다.우리마음을 비워야 할 것이다.우리마음을 툭 터 놓아야 할 것이다.우리마음에 꺼리낌없이 무슨 이야기든지 다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P95~97

나는 학자로서의 나의 지적활동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교섭이 없다면 그것은 매우 무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나의 지적활동은 반영해야 하며 또 현실과 맞물려가면서 나의 탐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p100

어렵고 쉬운 것의 궁극적인 기준은 쉬운 데에 있다.궁극적으로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말짱 헛것이다.어려운 것은 쉬운 것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만,궁극적으로 쉬운 것이 어려운 것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p103
인류에 공헌한 모든 천재는 정상적인 보통의 삶의 과정속에서 자기 천재성의 괴리감을 인정하면서도 그 괴리감을 극복한 사람밖에는 없다.보통사람들속에서 같이 울고 웃으면서 그들을 뛰어넘은 사람들이다.…천재는 결코 3살 때 고등수학을 푸는 구경꺼리가 아니다.
-p123
동양은문(학),사(학),철(학)의 통합을 고집해 왔다.

우리나라의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괴리현상 그리고 그것이 서로 아무런 교섭작용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물과 기름처럼 따로 따로 노는 것이다.대중문화를 의식하는 사람은 대개 대중문화에 영합하는 사람들일 뿐 대중문화를 끌고 나갈 수 있는 비전과 힘이 없다.쉬운 것 가지고 쉽게 울궈 먹을 것이 아니라 어려운 것 가지고 쉬운데로 나아가는 헌신적 자세가 필요하다.그리고 지성인 자신은 끊임없이 어려운 것을 극복해나가는 작업을 중단해서는 아니된다.
-p153

철학에 대한 모든 정의는 정의자의 관심의 표현에 불과하다.…내가 접해본 모든 철학의 정의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사람의 관심,그리고 그 관심을 규정하고 있는 사회적 요구와 문화적 형태의소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자체가 분석명제가 될 수 없다.예를 들어 “1더하기 1은 2다”라는 분석명제는 “1더하기 1”이라는 주부속에“2다”라는 술부가 이미 들어가 있다. 그러나 철학은 무엇 무엇이다 라는 명제는 모두 종합명제일 수밖에 없다.다시 말해서 철학이라는 개념을 놓고 아무리 뜯어보아도 무엇 무엇이다라는 개념이 분해되어 나오지 않는다.
-p158~159

…서양철학을 아는 사람은 동양철학을 모르고,동양철학을 아는 사람은 서양철학을 모르기 때문이다..,..사실 철학에는 동양 서양이 없다.동은 이쪽에서 보면 동이지만 그 동은 또다시 저쪽에서 보면 서가 될 수도 있다.알고 보면 동양철학이란 말과 서양철학이란 말 자체가 모두 20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조어들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그런 것 가지고 생각해 보거나 쌈박질 한 사람은 없었다. 철학은 무규정적이며 동서가 없다.
-P160

철학은 생각의 길의 탐색과정이다.헤겔의 말을 배우지 말고 헤겔의 생각의 길을 배워라!
…칸트 :나는 철학(philosophie)을 가르치지 않는다.나는 철학하는 것(philosophieren)을 가르칠 뿐이다.…칸트의 문제의식 속에서 칸트의 개념이 제기한 어려운 문제들을 풀려고만 노력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칸트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칸트의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다.우리는 칸트의 문제의식을 우리의 문제의식으로 삼을 수는 없다.칸트의 문제의식은 분명 독일언어라는 약속,그리고 독일역사라는 사회상황,그리고 계몽주의 시대의 과제들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러한 문제의식은 이미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한국언어 속에서 살고 있는 문제의식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우리의 철학은 분명 우리의 문제의식에 해답을 주는 것이어야만 한다.
-p135~136

철학을 수입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자멸의 길이다.우리민족문화의 말살의 길이다.우리가 수입해야할 것은 바로 철학이라는 완제품이 아니라 철학하는 것이라는 방법이다.칸트,헤겔,그리고 예수일랑 잊어버려라!
-p138

어떻게 본다면 우리는 계속 속고 사는 것이다.계속 수준미달의 부정확한 정보에 의하여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속는 지를 알고 속는 것과,속는지도 모르고 속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철학은 이러한 거짓말을 밝혀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p146

철학(밝을哲학문學) :철학은밝은배움이다.
Philosophy(Philo:사랑한다, Sophia:지혜)
필로소피아의의미를전형적으로부여한희랍의가장대표적사상가인플라톤에게있어서는소피아가그러한의미를지니지않는다. ‘테아에테투스’라는플라톤의대화편145절e란에나오고있는것처럼,소피아는지혜가아니라참된지식을의미하는에피스테메(episteme)와동의어로쓰이고있다.에피스테메란…존재의형상(eide)에관한지식이며이것은매우인식론적발상이다.희랍인들은우리가말하는지혜를무시한사람들이다.최소한후대의인류에게끼친실제적영향의각도에서바라본다면분명히그러하다.그들이관심을가졌던것은지혜가아니라지식이며,우주의객관적실재모습에관한우리의참된앎의정체에관한것이었다.따라서필로소피아는지혜의사랑이아니라지식의사랑이다.그렇기때문에서양철학은그전반철학사의경향이지혜를결핍한철학이되고있다.이러한반면에동양철학은지혜가중심이되고지식이결핍된경향이강하게나타나고있다.
-p162

나는철학을무전제의사고라고규정한다.이것은물론철학의성격이나내용을정의하는말이아니며,단지철학적생각을가능케하는가장중요한조건을의미한다.여러분들이앞으로철학을하고싶다면,진정으로철학적사고를하고싶다면,바로이제1의조건을받아들이지아니하고서는영원히철학을할수없다고나는단언한다.그럼무전제의사고란무엇인가?그것은나의사고즉나의생각을어떠한특정한믿음이나체계의전제에서출발시키지아니하는것을의미한다.

불교에서 잘 쓰는 말로서 대도무문(大道無門)이란말이있다.큰길에는문이없다라는뜻이다.철학도이와마찬가지로마음대로들락날락할수있어야한다.
…여러분들의머리를들락날락거리는생각(개념)이라는놈들은아무도통제할수가없다…여러분들이인간으로서태어난최대의특권을마음껏향유해야(누려야)겠다고느끼지않느냐?그런데철학이인간세상에존재하는이유는바로인간들이이러한특권을포기하고살려고노력하기때문이다.참이상하다. …
철학은반드시회의로부터출발한다.…이러한인간의회의의자유에는어떠한종류의믿음도강요될수없다.…어떠한종류의믿음도강요될수없다고했을때,그믿음에는예수의믿음도콩쯔의믿음도불타의믿음도예외가될수는없다.그들은모두나의자유앞에선피고인들에불과하다.우리는우리에게주어지는모든것을의심해야한다.
-p167~169

*분석명제(1+1은2다.주부‘1+1은’. 술부’2다’에서주부를보았을때술부가유추가능한명제)와종합명제(논리적수단과절차에의해참/거짓이결정되지않고명제를이루는요소명제들의참/거짓에의해서명제의진리치가다르게결정되는명제)->비트켄슈타인언어철학및분석철학참고.
*연역적추론(대전제,소전제->결론.삼단논법)과귀납적추론(다양한소전제->원리.다양한경험및실험,관찰)
연역추리에서는우선대전제를검토하라!나의믿음으로받아들일수있는가를ㅡ. 안젤므스(스콜라철학의창시자)의신존재의엉터리증명
-p188
(성 안젤므스는 서양철학사에서 두고 두고 문제가 되는 유명한 신의 존재증명을 했다.즉 하나님은 꼭 존재하신다는 것을 기발하게 증명해낸 것이다.사실 오늘날까지도 신의 존재증명에 관한 모든 정교로운 논리가 기본적으로 이 안젤므스의 논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그런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시한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다(대전제)
완전성은 존재성을 포함한다(소전제)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한다(결론)
(대전제: 신은 그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존재이다.
소전제: 그러나 이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론: 그러므로 신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한다.)
오늘날 20세기의 발달된 러셀의 논리학체계에서 말하는 기술이론으로도 이 안젤므스의 이론은 깨지지 않는다.그러나 안젤므스의 이론을 깨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여러분이 “하나님은 완전하다”라는 대전제를 나의 믿음으로써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야기는 끝나는 것이다.안젤므스도말짱 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야!하나님이 어떻게 완전하니?하나님이라는 것은 말야,히읗과 니은과 미음이라는 자음과 아와 이라는 모음으로 만든 말장난이야!그거 다 말짱 황이야!뭬가 임마 완전하니?완전하긴ㅡ.” 이라고 말해버리면 안젤므스는 찍소리 못하고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p190~191

신의 존재증명 중에서도 설계도적 증명(design argument) 혹은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이라고 하는 것인데 기독교인들의 주장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며 또 가장 반박하기 쉬운 시시한 것이다.이러한 논증은 전혀 경험적인 사실이 아니며,그것은 매우 단순한 믿음위에 기초하고 있다.이러한 논증에 깔려있는 대전제는 다음의 두가지 명제로 요약된다.
제 1은 모든 존재는 반드시 존재하는 목적을 가지며 그 목적은 반드시 그 존배 밖에서 온다.
제 2는 모든 존재는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 정교한 구조는 자연상태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그 구조는 그 존재 밖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제 1의 주장은 매우 시시하게 깨부실 수 있다.우리는 술잔을 들고 술을 마실 때 “위하여”라고 외치면서 술을 든다. 그런데 요새 사람들이 그냥 “위하여”라고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무엇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니까 장난으로 그냥 “위하여” 라고 말한다.우리는 술을 먹을 때,어느 때마다 반드시 무엇을 위하여 술을 먹을까?모든 존재는 반드시 무엇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이세상에는 그다지도 그냥 그러한 것이 없을까?
어린 아이들이 내는 수수께끼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여러분 왜 손가락이 열개 있는지 아십니까?” 그러면 나는 어쩔 줄 몰라서 어리둥절 하고 있는데 그 아이는 나에게 히죽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도 몰라요?철학박사가?장갑이 열개니까 그렇죠!”
손가락의 모습이 장갑의 모습 때문에 그러하다.즉 장갑의 설계도 때문에 손가락이 그렇게 설계되었다.아니면 손가락의 존재이유가 바로 장갑을 위해서 있다.손가락은 장갑에 끼워지기 위한 것이다!

솔로몬적 비단옷보다 더 아름다운 백합꽃의 설계를 빙자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어떠한 논리도 그 대전제는 손가락이 장갑을 위하여 있다는 수수께끼,누구든지 픽 웃어버릴 그러한 소아병적 오류를 한치도 벗어나질 않는다.그리고 모든 존재의 구조는 자연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신념도 모든 존재의 구조는 자연상태에서 발생한다로 바꾸어 버리면 더 이상 그 따위 존재증명,설계도적 혹은 목적론적 증명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즉 나의 믿음체계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뿐이다.모든 존재의 구조는 자연상태에서 발생한다.모든 존재의 구조는 그 존재의 자연상태에 구족(具足)되어있다, 모든존재의구조는그존재의스스로그러함이다라는주장을인류역사상가장체계적으로한철학자가바로중국의라오쯔(노자)라는사람이다.…이철학은그의후계자인주앙쯔(장자)에의하여발전되었고매우정교롭게집대성되었는데,이들의철학을두사람의이름앞머리만따서,라오주앙철학혹은노장철학이라고부른다.이인류문명사에는다행스럽게도기독교사상(신학)이있는가하면노장철학도있다.이렇게다양한믿음의대전제들이동등한자격을가지고있다.

철학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들이 만든 조직의 유지를 위하여 존재하지는 않는다.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란 보편적 문제 그자체를 대상으로 할 뿐이다.
-p195
철학은 플라톤에서부터 화이트헤드까지 그리고 라오쯔에서부터 정약용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경서들을 나의 생각의 전재를 위한 참고서로 생각할 뿐이다.나의 생각 이외의 어떠한 경서의 권위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p196
철학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전도주의(evangelism)가 없다.즉 나의 믿음을 타인의 믿음으로 강요하거나,나의 믿음이 복을 가져다 주는 소리(복음)라고 선포하고 다니지 않는다.어떠한 철학자도 자기의 철학체계를 전도사처럼 전도하고 다닌 적은 없다.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보편성에 자연적으로 공감되어 호소력을 가질 뿐이며,전도를 위한 조직을 인위적으로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

베이컨 – 종족의 우상 :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것만 믿을려고 한다.
BUT, 우리의 감각은 실상 엉터리 거울(false mirrors)과 같을 수 있다.
-p221
Vs 장자 – ‘제물’편. “아름다운 인간. 붕어,새,사슴은 무섭다고 도망. 과연 넷 중 누가 정색(올바른 아름다움)인가?! –P219

서양사람들은 사실 우리만큼 서양을 모른다. 변소간에 오래앉어 있으면 쿠린내를 못맡는다는 나의 비유가 지적하는 대로, 그들은 너무 말엽적인 문화현상을 침소봉대하여, 확대하여 매우 치밀한 듯이 보이는 이론을 세우지만 사실 우리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이야기를 말만 바꾸어 놓고 흥분할 때가 많다. 그리고 항상 전체적이고 대국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우리는 서양 사람들의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여 주고 가르쳐 줄 의무도 있다. 언젠가는 그들도 우리지적이 정확하기만 하다면 알아 들을 것이다.
-P233~234

우물안 개구리비유(장자, ‘추수’편)VS동굴의 비유(플라톤)
…우물안 개구리비유에서는 개구리의 세계와 거북이의 세계가 하나의 동질적 흐름속에서 단지 구분되고 있는데 반하여, 동굴의 비유에서는 동굴 안 세계와 동굴 밖 세계가 완전히 이원적으로 분리되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해달라. 이 구분과 분리의 문제는 동.서양의 철학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매우 핵심적인 것이다.
-P237

…그런데 아고라는 별게 아니고 우리나라의 장 서는 곳과 똑 같은 장바닥이다. 그러니까 희랍철학은 이 장바닥 사람들의 철학, 즉 장사꾼의 철학, 좀 솔직한 우리말로 표현하면, 장똘뱅이 철학이다. 원래 장똘뱅이란, 말이 많다. 그리고 권위에 대한 존중이 별로 없다. 장똘뱅이들끼리 싸울 때는 고전을 인용해야 별 소용이 없다. 그저 입씨름으로 해재껴야 된다. 즉 싸움을 하는 당사자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논리, 그 논리의 맥락에서 서로가 가진 이성에 호소하여 이기는 수밖에는 없다. 우리나라 동대문,남대문 시장에서 닳고 닳아빠진 장사꾼들끼리 입씨름하는 장면을 연상하는 내 말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인류역사를 통해서 양반들에게서 나온 적은 없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바로 이들 장똘뱅이들의 철학이다. 그리고 이성의 발달이나 논리의 발달은 바로 이 시장바닥에서부터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희랍철학의 온실이 바로 시장바닥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 소크라테스도 바로 이 장똘뱅이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반해서 동양철학, 특히 중국철학은 사관이라는 궁정관료계급에서부터 싹튼 것이기 때문에, 희랍의 장똘뱅이들에 비하면 전통의식이나 역사의식이 강하고 보수적인 데가 있다. 그래서 희랍인 만큼 합리적 논리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대신 은유나 비유, 풍자 같은 것은 비상하게 발달했다. 관리들이 철학을 말하는 대상은 같은 동료들이나 장똘뱅이가 아니라 주로 권력자, 통치자들이었기 때문에 자기자신의 합리적 말로 직사포를 쏘는 것보다는, 고전의 출전을 인용하여 은유적으로 빗대어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했기 때문이다.
-P240~241

인간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바로 유학의 기본이념인 수신(修身) 정신이다.
-P245

내 마음의 우상은, 내 마음의 독단은 모든 사회적 독재의 온상이다. 내 마음의 우상이야말로 독재의 비닐하우스다. 우리 마음에 우상이 제거될 때 우리사회의 독재는 없어질 것이다. 아직도 대통령을 나랏님이나 임금님으로 생각하는 백성들의 마음의 우상이 존속하는 한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시민사회에 있어서의 대통령은 단순히 시민들이 세금내어 부리는 월급쟁이 공무원의 총책임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없다. 그 직분에는 권한보다는 의무가 더 큰 것이며, 향유하는 것보다는 책임지는 것이 더 많은 것이다.
-P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