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 전환시대의 논리

Posted by 히키신
2017. 2. 15. 16:19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1974, 창비

소위 국가기밀이나 국가이익이라는 것이 민주사회의 국민을 시종일관 기만하는 정부채제와 세력에 의해서 이용될 때 그 집권자와 집권세력의 기만을 폭로하는 것 이상으로 애국적인 행위는 있을 수 없다. 지성인의 최고의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p26

가장 진실을 잘 알고 있는 국민이 가장 국가를 위할 줄 안다. 진실은 비판을 낳는다. 어떤 사회도 어떤 정부도 비판의 여지없이 최선이거나 만능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민주제도는 진실-비판-개선의 끊임없는 과정을 걸어갈 수 있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체제나 정부는 반드시 비판에 견딜 수 없는 체제와 정부이다. 그러기에 비판을 봉쇄한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개선과 향상이 없고 그 결과는 더한층의 타락이며, 타락한 제도를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은 탄압에 호소하는 악순환 속에 침체할 수밖에 없다.
-p28

언론기관이 통킹만의 진상을 알았던들, 알아낸 신문이 그것을 용감하게 보도했던들 이런 일은 ‘그날의 현실’로 끝나고 내일의 현실은 직선의 연장선상에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각도의 선상에 있었을 것이다. 집권세력과 어떤 권력집단, 예로 군부 같은 것이 국민을 구렁텅이로 끌고가는 수법이 이 현실주의이다. 오늘의 현실을 수정하지 않으면 내일의 현실이 우리를 구속할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사관만이 이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미국의 지성인들은 역사의 ‘현실’을 수락할 뿐 역사에 ‘작용’하려 하지 않았다.
-p33~34

매카시즘의 결과

‘뉴욕타임즈’ 대 정부의 소송사건이 언론의 승리로 끝나고 그 충격을 완화하려는 듯 닉슨의 중공방문이 발표되었을 때 오웬 라티모어 박사는 미국의 30년에 걸친 불행은 매카시즘의 반지성주의 때문이라고 한마디로 진단했다. 월남전쟁도 그렇거니와 오늘날 미국사회의 와해와 국민도덕의 타락은 ‘부정적 가치’, 즉 반공주의(反共主義)의 사상통제의 결과라고 그는 단정하였다.
그는 1950년대에 매카시즘의 공포분위기와 사상통제라는 반지성주의가 미국국민의 창조력과 자유를 철저하게 위축시킨 탓에 정부와 학계와 여론지도층에는 거의 어용적 성격의 지식인만이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민주주의는 자체가 ‘적극적 개념’이며 창조적 상상력이다. 반공주의란 부정(不定) 개념이며 그것 자체로서 소모적이며 파괴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p34

‘빨갱이잡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 법조계에서 가장 존경받던 라네트 핸드 판사는 “시민이 그 이웃을 적이나 간첩이라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될 때 그 사회는 벌써 분해의 과정을 걷고 있다”고 미국국민이 영원히 기억하는 날카로운 경고를 한 바 있다.
-p35

…신문, 잡지, 방송 등을 보고 있노라면 이와 같은, 그리고 무수한 냉전용어가 문장과 대화를 구성하고 있음을 본다. 자유, 괴뢰, 독재, 기아선상, 강제노동, 집단농장, 평화, 민주, 자유경쟁경제, 침략, 간접침략, 동맹, 진영, 안보, 파괴활동, 우방, 적, 공산주의, 자본주의, 현대화, 역사법칙, 국제적 고립, 반공전초, 귀순, 의거, 해방전쟁, 호전적, 숙원, 공존…… 한장의 신문 단 한 페이지의 일부분만 훑어보아도 이렇게 많은 낱말이 나온다.
그밖에 얼마나 많은 냉전용어가 아무런 비판 없이 쓰이고 있으며 얼마나 우리 국민의 진실확인 능력을 제약하고 얼마나 고정관념의 반응조건을 형성해왔는지 모른다. 앞서의 모든 용어가 반드시 냉전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전인수 격으로 지성적 정의, 규정에 앞서 애증의 감성적 사용법에 동원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이 모든 용어에 기성관념, 고정관념, 감성적 친화감 또는 저항감 같은 심리적 작용이 병행할 때 세계의 모든 사상은 흑과 백, 천사와 악마, all or nothing, 죽일 놈 살릴 놈 등의 양(兩)가치적 사고형태를 결과한다. 이것처럼 지성을 마비시키고 중독시키는 요소도 드물다.
이런 양가치적 사고방식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사회와 국가의 기본 목적인 ‘진리를 구현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굳어져버린 사람이나 세력은 세계와 국내의 모든 ‘사실이 사실대로’ 보도, 전달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런 진실 또는 진리에 반대하는 힘 또는 세력은 대중이 진리를 배우도록 훈련, 교육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가르치는 대로 믿을 것을 강요하고 가르치는 것은 흑백뿐이다. 이제는 용어에서 ‘정치성’을 빼고 ‘학문성’으로 대치해야 할 상황에 와 있다.
“오늘날 교육(직접,간접)이라는 것은 문자를 통해서 기만당하는 것을 가르치는 기술이라고 정의해도 결코 부당한 말은 아니다. 이와 같은 기만으로써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현재로는 사회의 지배자들이다.” 라고 갈파한 서양의 유명한 석학의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자유의 나라 서구에서도 그렇다. 하물며…….
마지막 남은 다니엘 엘즈버그라는 소년이 ‘뉴욕타임즈’라는 입을 빌려 진실을 밝힐 때까지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미국국민과 지도자들의 가치관이 이런 것이었다. 남의 실패는 나의 교훈이 돼야 한다. 미국국민의 실패가 자칫하면 같은 전철을 밟을 위험이 있거나 현재 이미 전철 속에 깊이 빠져 있는 딴 국민에게 아무런 교훈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배우지 못하는 국민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 또 인류와 더불어 향상하고 진보하기를 바라는 점에서 어느 한 국민이 그 교훈을 통해서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 인류의 손실이겠다.
-p42~43

권력과 언론

월남전쟁 비밀문서 보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분쟁은 위에서 훑어본 바와 같이 많은 교훈을 내외에 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귀중한 교훈이다. ‘뉴욕타임즈’와 엘즈버그의 행동은 미국국민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의 통치자들과 국민 일반, 특히 지식인에게 다음과 같은 효과를 이룩한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정부의 독선과 비밀주의는 국민 전반의 성격과 지식을 변칙적일 만큼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독선과 비밀주의는 본래 사회를 위해서 이용될 수 있을 국민의 정력과 능력의 광범한 해방을 저해한다. 또 모든 권력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을 때 다연한 결과로서 다수의 욕구, 견해, 필요, 복지가 버림을 받는다. 이 두가지 결과는 사회의 손실일 수밖에 없다.
둘째, 소수의 권력자나 정책수립자들의 비밀주의의 결과는 또 그 세력자 내지 지배계급(층)과 국민대중과의 대립을 초래하고 만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되어 국민과 유리되며 마침내는 권위만을 강요하는 것으로 만사는 해결된다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것은 미국정부와 지난 몇해 동안에 일어나고 있는 미국사회의 분해현상과 국민의 저항으로 입증되었다. 소수 집권세력의 이와 같은 권위는 반드시 국민으로 하여금 회의를 갖게 하여 그에 대한 집권자의 반응이 탄압일수록 회의는 번지고 심화한다. 결과는 미국에서처럼 집권세력의 권위의 분쇄로 끝을 맺는다.
셋째, 소수 권력자들의 자유 억압정책은 국민에게 운명적인 열등감을 갖게 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억압 속에서 자라고 살아온 인민은 민주주의의 두개의 기둥인 질서와 지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욕망도 상실해버린다. 말하자면 구실과 명분이야 어떻든 실질적으로는 소수자의 체면, 이익, 권위, 안전만이 주안인 그런 정치와 체제는 인민에게서 주체성과 책임감을 박탈해버린다. 이 현상은 후진사회일수록 그 위험성이 크다.
끝으로 이와 같은 통치세력과 피치(被治)대중 사이의 모순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산속 굴에 들어가서 ‘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소리도 그 소리가 모이면, 몰랐던 사람에게도 진실이 알려질 뿐 아니라 언젠가는 맞대놓고 ‘임금은 벗었다’고 말하는 많은 소년이 나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p46~47 (원저: ‘문학과 지성’ 1971년 가을호)

6. 중공 군사력과 정치력 전환

…중공은 69년 4월의 제9기 전국공산당대표자대회에서 중고의 국가이념을 종래의 미 제국주의 타도에 곁들여 소련 수정주의, 사회제국주의의 타도를 추가, 미소 양대국에 대한 투쟁을 ‘국가이념’으로 확인했다.
소련에 대한 불신은 핵전략면에서는 프랑스의 미국에 대한 불신과 통한다. 꾸바 사건으로 미소 양 핵대국이 전쟁 일보 직전상태에서 화해했을 때, 중공은 소련을, 프랑스는 미국을 그 동맹국에 대한 핵공격이 있을 겨우 자국에 대한 핵보복을 각오하면서까지 보호해주지 않으이라는 확증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의 독자적 핵군(核軍)건설을 드골 대통령이 결심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택동은 미국의 핵 또는 재래식 공격에 대해 소련의 핵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중공이 핵무기를 갖지 않는 한, 미소가 지배하는 현 국제정치 질서 속에서는 언제나 미소 양대국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2류국가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결국 중공의 핵군사력은 궁극적으로 모든 요소가 그렇듯이 정치적 의의로 전환된다. 여기서 1.미소를 상대로 대국으로서의 위신을 가지고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높여야 한다는 정치적 이유와 2.미소의 핵공격에 대항하는 전쟁억지력을 확보하려는 군사적 동기가 결합된다.
이것은 마치 미소가 군사,정치적으로 대결했던 40년대 후반과 50년대의 미소 정치,군사 사상과 꼭 같다.
-p81~82

중국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에서는 유덕(有德)한 인간이 천(天)의 명(命)을 받아 천하를 다스린다. 덕을 잃으면 왕은 혁(革, 革命)된다. 중국인은 이것을 실천해왔으며 덕치(德治)의 지배자에게는 마땅한 존경을 갖는다. 모택동이 과거의 중국역사상의 치자보다 유덕자냐 아니냐는 데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입장에 따라 평가가 다르겠다.
그러나 중국대중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숭배나 존경은 중국인으로서 순수하고 자연발생적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남는 문제는 모택동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여태까지 그에게 직접 물어본 사람이 없었으니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작년 10월, 외부세계에서 궁금히 여기는 이 문제를 에드가 스노우가 모(毛) 자신에게 물었다. 스노우가 10월 1일의 건국기념일, 모의 거실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건물 밖 천안문광장을 누비는 군중이 ‘모주석 만세’를 외치며 끝없이 행진하고 있었다. 스노우가 “저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기분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모는 극히 솔직하게 “번거로운 일”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스노우는 중공이 처한 현 역사적 단계에서는 이것이 불가피한 하나의 ‘필요 악’으로 모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는 인상을 적고 있다. 물론 모의 심중은 그만이 아는 일이라 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숭배라고 하지만 약간 다른 데가 있다. 스딸린은 당과 정부로 구성되는 관료화된 권력체제의 거대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관료적 방법으로 숭배를 강요했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휘한 당 관료기구의 타파로써 민중과 자기와를 직결시켰다. 차이는 이것이다.
-p112

-권력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
역사에서 배우려는 마음가짐

민중에게서 버림받은 ‘영웅’처럼 가련한 신세는 없다. 민중의 버림을 받은 사실을 모르고, 아직도영웅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채 권력으로 민중을 억압하여 권력의 유지나 권좌에의 복귀를 꿈꾸는 ‘영웅’의 모습에는 일말의 연민이 따른다. 그러나 그 영웅의 소유물일 수는 없는 백성이나 민중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감상에 앞서는 준엄한 논리가 있다. 영웅은 민중이 만드는 것이며, 민중에게서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그에 앞서서 그가 민중을 배반했다는 엄연한 인과응보의 논리이다.

‘장개석’이라는 하나의 영웅의 일대사를 통해서 우리는 ‘민중의 논리’를 배우게 된다. 어떤 측면에서는 진정으로 위대했던 근대 중국의 한 영웅을 아끼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가 대표했던 권력과정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준다.
이 작업에 가장 끼어들기 쉬운 위험성은 우리의 정치적 편견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최근에는 과거의 역사와 눈앞의 현실이 어느정도 공정하게 그리고 사실대로 비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편견과 선입감이 판단을 지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편견과 선입감은 우리 한국국민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국민적 현명을 얼마나 가리어왔는가를 생각할 때, 싫건 좋건 우리는 한 영웅과 민족 또는 민중의 역사를 허심탄회하게 살펴봐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검토과정에 불가피하게 관련되는 장개석과 모택동(毛澤東)의 개인적 주장이나 저서는 다같이 인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가능한 한 광범위한 제3자적 관찰과 공식문서를 토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p117~129

국가와 민족이 존망지추(存亡之秋)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 권력자와 정권이 그 권력의 궁극적인 토대가 되는 민중과의 관계에서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를 검토하는 것은 중요하다. 거기에서 그 권력자나 정권의 장래가 거의 수학적 법칙성을 가지고 예언될 수 있기 때문이다.
-p133

국민당군대가 어쩌다가(드문 일이었지만) 일본군을 물리치고 어느 지역을 해방하면, 그 주민들은 그 ‘해방자’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가질 않았다. 정부의 직업군인 집단은 민중의 반감을 사고 민중은 오히려 일본군에게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기대하는 사례가 일반화하기에 이르렀다.
항일전쟁도 말기에 가까워질 무렵 장개석과 국민당정권의 운명에는 이미 회생 가능성을 상실한 듯한 징조들이 나타났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 권력과 정권이 민중에 의거하지 않고 직업군인, 재벌, 직업 정치가, 대지주,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계급, 즉 당시 중국의 소수 지배계급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때 가난한 중국의 민중은 4억이었다. 그리고 그 계급은 민족이나 국가나 백성보다는 권력과 재산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세력이었다.)

공산당은 10년간의 내전과 7년간의 일본군 공격을 견디었다. 그들은 장개석의 중앙정부에 대한 일본군 압력의 몇배의 일본군 압력을 이겨냈을 뿐 아니라, 장개석 자신에 의한 철저한 봉쇄도 이겨냈다.
그들은 이 고난을 이겨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서 성장했다. 1937년 연안에 도피해왔을 때는 겨우 10만 평방킬로미터의 지역과 150만 민중을 지배할 뿐이었던 중국공산당은 지금은 전쟁과 포위 속에서 85만 평방킬로미터의 땅과 약 9천만의 민중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이적인 생명력과 힘의 원칙은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다. 그것은 민중의 지지와 민중의 참여이다. 공산당과 공산당군은 근래 중국사상 처음으로 능동적이고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누리는 정부이고 군대이다. 그들이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은 그 정부와 군대가 진정으로 민중의 정부이고 민중의 군대이기 때문이다. (John Stuart Service, “Memoranda by Foreign Service Officers in China 1943~1945, “중국백서” 567면)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의 침범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의 도전을 받은 것이다. 이 새로운 이념에 이기는 길은 그보다도 더 큰 호소력을 지니고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이념으로 대항하는 것 밖에 없다. 이 이념이란 정부가 정부와 사회의 모든 분야, 계층에서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부패를 도려내고 무능과 안일을 제거하여 민중에게 평등과 사회정의를 제공하고 개인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여 개인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토대는 가난한 농민과 민중을 존중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무력으로 이기려 한다면 중앙정부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오직 정치적, 경제적 개혁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민중의 충성과 열성과 지지를 얻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알버트 C. 웨드마이어 中將이 중국 행정원과 국민정부 각료 전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종합정세평가, ‘중국 백서’ 1947년 8월 22일)
-p152~153

사상적 변천으로 본 중국 근대화 백년사
-서구문명 극복의 100년

洋務論의 功과過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적 충격은 중국인의 마음에 주로 군사적 과학 기술의 신비주의를 낳게 하였다. 이것은 밖으로 서방 제국주의와 안으로 혁명의 압력 사이에 몰린 청조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서양무기에 의한 군사적 현대화와 공장, 도로를 세우는 물량주의적 발전을 하기만 하면 밖으로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안으로 민중을 계속 억압,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상으로서의 양무론을 낳게 하였다. 이와 같은 양무론적 사상은 오늘날에도 근대화를 서두르는 많은 나라의 정권이나 지도자들이 빠져 있는 하나의 사상적 유형이다. 양무론은 그 자체로서는 구질서의 유지를 위한 것이었지만 수많은 지식인과 민중을 서양사상에 접하게 하는 기회를 줌으로써 구질서를 부정하고 개혁의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역사적 역할’을 했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혁명의 관계는 중국 특유의 형태로서 정치적 근대화사상에 작용했다. 그것은 흔히 오늘날에도 ‘근대화독재’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예속국가에서의 외세의 ‘강자정책’이다. 태평천국혁명이 거의 결정적으로 기진맥진한 청조와 그 부패한 전체적 지배계급의 숨통을 끊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영국, 프랑스 등 외세는 농민혁명정권에 대한 초기의 묵인 태도를 버리고 그들의 전통적인 ‘강자정책’ (Strong Man Policy)으로 중국지배를 강화했다. ‘스트롱 맨 폴리씨’란 “외국의 명령이나 지배를 수락할 정도로 충분히 약하되 국내의 민중에 대해서는 명령과 지배를 계속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자”를 골라 그에 대한 지원을 통해서 약소국에 대한 지배를 지속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외세의 중국지배 방식은 청조말기의 이홍장(李鴻章)에서 장개석(蔣介石)으로 끝나는 20세기 중엽까지의 중국정치를 특징지은 추악한 군벌정치의 본질이다. 그러나 외세에의 예속 및 민중의 탄압과 착취를 토대로 해서 이루어지는 ‘스트롱 맨 폴리씨’와 군벌지배정치에 대항하는 근대화사상은 손문을 중심으로 하는 ‘미완의 혁명’투쟁으로 금세기 초기에 구체화했다.
중국의 근대화사상은 1919년에 일어나 오늘의 중국을 이끈 주동 역할을 담당한 문화혁명을 제외하면 ‘농민비밀결사의 신앙의 이념화’라고 할 수 있다. 하긴 5-4문화운동도 지식인에게서 출발하였으나 농민지향적이었다는 점에서 예외라고 할 수는 없다.
-p162~163

2.지도체제 형성과정의 특성
1. 지도권의 투쟁은 이론과 실천능력의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졌지 정적을 개인적으로 살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스딸린 수법이나 그밖의 몇몇 공산국가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과 그 성질을 달리하는 가장 큰 특성이다. 지도권투쟁에서 패배한 라이벌(경쟁자)은 모두가 그대로 국내외에서 생존해 있거나 자연사했거나 자기비판으로 혁명대열에 되돌아왔다.

2. 좌우 노선의 제거에 의한 이념투쟁이라는 것
3. 지도권 투쟁의 反蘇的 경향
반세기에 걸친 당 지도권투쟁사를 통해서 두드러지는 성격의 하나는 사회주의혁명의 선배인 소련에 따르려는 세력이 꾸준히 배제되어온 과정이다. …중국혁명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일본, 소련, 프랑스 또는 독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외국에라고는 혁명과 중국통일을 완성한 1950년에 처음으로 잠시 외국(소련)을 방문한 일밖에 없는 모택동과의 대조는 중공혁명 지도권투쟁에서 중요한 뜻을 갖는다. 외국 유학 경험과 소련에서의 훈련은 오히려 중공혁명의 각 단계에 대처함에 있어서 중국적 특성의 파악과 실천적 경험의 폭과 깊이에 있어 모택동을 따르지 못했다…외국의 경험을 모방하거나 중국인민의 ‘위대성’과 독립성에 합치하지 않는 노선은 앞으로도 중국공산당 지도권에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4. 정신주의와 물질주의의 대립
5. 민중지성에의 신뢰와 당내 민주주의
혁명초기의 ‘지식인 주도’적 혁명노선과 관념이 파탄한 것은 중국공산당 내에 농민과 비인텔리적 대중의 지성에 의거하는 지도이념을 확립케 했다. 최하 단계의 대중적 비판, 토론, 결정, 실천, 비판, 토론, 결정, 실천의 무한한 과정이 당 정치국의 최고 단계까지 상향적으로 계속되는 ‘당내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 이 기풍과 전통은 일부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론과는 달리 지켜지지 않은 현실과 아주 대조적인 중국공산당의 강점이라 하겠다. 토론과정에서는 직위, 연령, 경력의 차가 해소되고 누구나가 평등, 자유의 권리가 보장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민대중의 지성과 에너지에 의거하는 결정과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 문화대혁명에서의 홍위병(紅衛兵)운동이다. 한 공장노동자가 공장장, 소속 지방당 위원장은 물론 국가주석[元首]까지도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의 사상과도 일치한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각 단계 집단에서 민중의 자발적 결정이 생겼을 때, ‘그러나 그렇게 이 문제를 해결하면 이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문제제기를 하는 형식으로 지도한다. 여기서 다시 민중의 집단적 토의가 계속된다. 긴 농민전쟁 과정에서 발전되고 확립된 이 ‘대중노선’은 중공사회에서 군부, 관료, 정치의 어느 한 집단 또는 소수인에 의한 독재적 통치를 예방하는 구조적인 제동장치가 된다. 하물며 민주주의라는 이름 밑에 이루어지는 어떤 개인의 1인 독재는 중국에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주로 당과 관료세력에 의존하여 모택동에 대항한 유소기, 주로 군과 관료기관에 의존해서 모택동에 대항한 고강(高岡), 팽덕회 또는 임표가 지도권투쟁에서 실패한 것도 당, 관료, 군 지도간부보다도 언제나 대중의 지성과 지지에 의거하는 모택동의 지도자적 역량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확립된 ‘당내 민주주의’와 인민대중의 높은 주권의식의 전통 때문에 어느 단일 집단, 어느 소수인 그룹, 또는 어느 1인의 독재적 지도권은 수립되기 어려울 것이며, 혹시 생긴다 하더라도 장기적일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 중국공산당 지도권의 기본적 성격이다.

6. 끊임없는 ‘젊은 피’의 순환

끝으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구성과 성격을 특징짓는 것이 이를 테면 ‘노인지배’에의 반항이다. … 지도부에의 상승운동은 폐쇄적이 아니라 개방적이다. 중국사회의 침체와 노인지배의 유교 통치이념을 타파하기 위해서 혁명의 길에 뛰어든 현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젊음’에 대한 일종의 존경심과 친근감을 생리적으로 지니고 있다. 혁명의 사회적 격동기에는 연령보다 능력(지도력)이 먼저라는 사회학적 진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p176~184

어느 사회, 국가, 정치조직에서나 ‘후계자’는 영원히 임명자의 그림자로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는 필연적인 인간적 속성 때문이다. … ‘계승자’는 선임자의 생존까지의 타이틀이고 권위일 뿐이다. 선임자의 퇴장과 동시에 그는 이미 계승자가 아니며 독자적 이념, 정책, 실천 스타일, 야심을 갖는 지배자가 된다.
-p185

조건반사의 토끼

우리나라의 지적 풍토를 생각할 때 언제나 연상에 떠오르는 것이 미국의 미씨씨피주이다. 이 미씨씨피주는 지금도 인간진화론을 주법(州法)으로 금지하고 있다. … 문제는 이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 사상, 이성의 발전을 법률이라는 인위적인 것으로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다. 작년 봄, 미씨씨피주의 한 젊은 초급중학 여교사가 인간진화론을 불법화하고 있는 주법에 도전하여 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얼마 후 주 대법원은 인간은 진흙과 하나님의 콧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성경에 씌어져 있는 이상 인간진화론은 주법 규정대로 위법이라고 판시했다.
로마 교황청이나 신교의 신학과 교리에 의한 규정은 비신도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니 별로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 그러나 법률이 이것을 시민에게 강요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것은 주건 국가건 정치권력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이고, 그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그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따라서 그 제도나 질서 또는 체제에서 이익을 보는 세력이 국가 또는 주라는 이름으로 제정한 법률의 형벌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
중세에 인간말살 역할을 담당했던 신학교리라는 미신은 오늘날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퇴색하는 교리로 바뀌어 있다. 퇴색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중세기의 신학교리보다도 강력하고 완고한 ‘권위’를 휘두르고 있다. 정치화한 현대의 교리는 무엇이든 여태까지 지켜온 사고나 가치나 체제나 질서의 변화는 그 사회의 기틀을 위태롭게 한다는 보수적 정치교리로 경화되어 있다. 그것은 곧 국가의 안녕과 안정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국가이익’ 신학으로 정치화한다.
이와 같은 ‘신앙’이 이성의 도전을 받음이 없이 횡행하는 곳에서는 이성과 진실은 정치화한 교리에 의해 위험시된다. 소크라테스조차 기성질서의 법률이라는 권위 앞에서 거적을 깔고 앉아 독배를 마셔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존재조차 없는 오늘날의 시민이 그 희생물이 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치 이데올로기가 ‘국가 공인’의 원칙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그 ‘공리’에 대해서 ‘왜’니 ‘무엇 때문에’니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라느니 하는 의문을 말하는 사람은 위험하고 유해한 존재로 간주된다.
그렇지만, 인류라고 거창하게 예를 들 필요도 없이 한 제도, 한 국가, 한 사회는 항상 이와 같이 ‘기성공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 의해서 향상되고 발전되고 세련되어져왔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그 낡은 공리가 깨어지면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인 지배세력은 그들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최근 ‘뉴욕타임즈’와 미국정부 사이의 베트남전쟁에 관한 정부비밀문서 폭로 보도사건을 둘러싼 소송은, 현대사회에서의 미신 대 과학, 권위 대 이성, 허위 대 진실, 공리 대 의문이 엮어 내려온 인류 발전과 진보의 현대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미신과 권위와 공리를 고집하는 것이 결코 그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
베트남전쟁에 관한 이 미국정부의 비밀문서는 그동안의 미국정부 발표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국민에게 알린 것은 모두 허위이고, 그 비밀문서 속의 허위가 모두 사실이다. 모든 베트남정책이나 군사행동이 바로 그것을 꾸민 사람들이 대표하는 국가라는 권위의 명령에 따라 낯선 땅에서 쓰러져 죽은 그 국민을 속였다. 한마디로 가장 민주주의적이라는 국가의 권위를 대표하는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다. 그것도 웬만한 문제에서의 사기가 아니라 바로 국민의 생명을 값으로 치르는 사기이다.
책 한권이 되는 그 정부문서라는 것을 쭉 읽어 내려가노라면 미국정부의 지도자들이 위는 대통령에서 밑으로는 하나의 조사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도착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생각은 다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투쟁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절대적인 가치라는 관념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것이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처럼 되어 있고, 따라서 한 체제가 딴 체제를 파괴하는 것만이 신의 축복을 받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전쟁 정책을 꾸며내는 모든 차원의 과정에 관계한 사람들이 마찬가지다. 다만 조지 볼이라는 한때의 국무차관만이 그 중세적 사상풍토 속에서 다소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결국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조지 볼은 그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관직을 떠나버렸다.
이쯤 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법칙은 경제법칙만이 아니라, 정치에서 더욱 그 해독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미국국민의 인간적 타락과 사회질서의 와해, 30만에 달하는 애꿎은 미국 젊은이들의 사상(死傷)과 몇천억 달러의 파괴적인 자원소모는 두말할 것도 없고, 수백만명의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을 죽이고 죽게 하고 몇 나라의 국토를 황폐케 만든 그 행위가 모두 한가지의 집념 때문이라는 것을 그 비밀문서는 증언해준다. 그 한가지의 신앙이란 소위 체제간의 ‘냉전(冷戰)’의식이다.
일체의 사상(事象)을 흑과 백, 죽일 놈과 사랑할 놈, 천사와 악마,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미국 대 타국, 민주주의와 뭣, 자유주의와 뭣 이라는 식으로 그들은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종전 이후 오늘날까지 미국을 지배해온 사상이다. 50년대의 냉전구조 속에서 활동하고 지적 형성을 하고, 그 속에서 출세하여 미국의 지배적 세력권에 들어올 수 있었던 그들은 이와 같은 이치관념(二値觀念), 즉 흑-백 사상의 포로들인 감이 있다.
그러기에 자기가 믿는 신앙과 대립하거나 그 신앙에 질문을 던지는 체제나 제도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허위, 사기, 음모, 부정, 불의는 용서받는다는 식이다. 실제로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이 비밀문서로써 밝혀진 베트남전쟁이다.
그 결과는 이미 세상에 드러난 대로다. 그토록 한 국가와 국민이 치욕과 위기에 처한 예는 로마제국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민주주의라는 창조적 에너지에 넘치는 기본원리와 정신과 제도가 이토록 멍들게된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큰 원인인 냉전사상이라는 것을 다시금 꼼꼼히 음미하게 만들어준다.
모든 가치를 흑과 백으로만 가리려는 그러한 관념과 사상은 결국 그것이 파괴하려 했던 대상에 끼친 피해의 몇십배의 피해를 자기 자신에게 끼쳤다. 구체적으로 닉슨은 미국정책과 냉전의식이 행동의 대상으로 삼았던 중공방문을 간청함으로써 그 권위의 일부를 회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냉전의식에 바탕을 둔 허위의 정책은 남을 속이지는 못하고 자기 자신만을 속여온 결과가 되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역설인가.
비밀문서 사건이 났을 때, 오웬 라티모어라는 미국 출신의 석학은 그것이 냉전십자군의 사상적 표현이었던 50년대와 60년대 초기의 매카시즘의 논리적인 결과라고 개탄했다. 매키사즘에 관한 설명을 새삼스럽게 할 필요는 없겠다. 요컨대 학문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신앙의(종교적 신앙뿐이 아니라 누구든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가질 수 있는)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근본적 가치들이 반공(反共)이라는 단 한가지의 가치 때문에 부정된 사상통제의 선풍이다. 매카시즘과 매키시즘적 사고방식은 미국정부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사실을 사실대로 진실을 진실대로 보고, 말하고, 주장할 수 있는 지적 정신을 뿌리부터 뽑아버렸다. 50년대의 유능하고 양심적인 관리, 학자, 전문가들이 모두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국외로 추방됐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침묵을 강요당했기 때문에 미국정부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허위만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라티모어는 개탄한다. 매카시즘의 지적 풍토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목적으로 하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사실 아닌 환상의 최면술을 걸어버린다는 것이다. 미국의 통치세력이 발명한 이 매카시즘이라는 최면술의 주술(呪術)은 베트남전쟁의 파탄과 닉슨의 중공방문 등의 형태로 겨우 풀리려 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적극적인 가치이고 원리이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 속에 무한한 창조의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을 부인하기에 앞서 그것이 지니는 높은 이상과 능력을 긍정하는 사상이다.
매키시즘은 이토록 훌륭한 사상체계를 ‘무엇을 반대하는 것’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그토록 적극적, 창조적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자동적으로 엄청난 공격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무엇을 반대하기 위한’ 부정적, 소극적, 보수적 사상으로 타락시키고 만 것이다.
그것은 끝없이 발전, 진보할 수 있는 인간, 특히 지성인을 위축시킴으로써 그 사회에서 지성인의 공헌을 박탈한 셈이다. 이것은 매카시즘의 희생물인 국민 일반과 지식인만의 슬픔이 아니다. 국민과 지성인의 건전한 자유의 향유와 행사를 통해서만 발전되고 안정될 수 있는 사회에서 발전과 안정을 빼앗았다는 점에서 지배자 자신의 피해가 아닐 수 없다. 지배자도 궁극적으로는 그 사회 속에 있고 그 사회의 성쇠는 바로 그 지배자의 성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냉전의식은 그 표현수단으로서 언어의 기능을 전제로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언어가 의식(인식,관념)의 그릇인 이상, 의식이 일그러지면 그 언어라는 그릇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일그러진 언어로 전달되는 사상은 일그러진 사상을 그 커뮤니케이션의 상대에게 재구성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사각형을 보고 삼각형이라는 표면의 언어로 전달된 사상이 상대방에게 삼각형의 형상을 재구성케 하는 절차이다. 사각형을 놓고 삼각형의, 또는 원을 놓고 직선의 관념을 국민에게 재구성케 하려는 의도는 현대 국가사회에서는 주로 통치자들의 정치적 목적에 있다.
그 좋은 예가 어제는 베트남전쟁이고 내일은 중공의 관계이다.
매카시즘의 정치적 카운터파트인 덜러스는 그만두고라도, 얼마 오래되지도 않은 과거의 국무장관이던 러스크도 “중국 대륙에는 정권이나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인식을 미국국민과 이른바 자유세계의 기본관념으로 강요해왔다.
닉슨이 “어디까지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용어로 호칭하게 되고, 그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서 북경방문을 간청하게 된 사태변화에 우리 국민은 당황하고 있는 듯하다. 어디까지나 ‘무(無)인 것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나오고, 미국대통령의 재선이 나오고, 극동의 평화니, 4대국 보장하의 평화니, 미중 한반도 중립화안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중국인이 곰을 시켜서 하는 요술도 재주도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이 사실 그대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제임스 레스턴이라는 ‘뉴욕타임즈’의 저명한 기자(부사장)가 북경에서 바깥세계에 기사를 내보내오고 있다. 중공 하면 소련의 괴뢰이고 민중은 기아선상에서 피골이 상접해 있고, 인민은 금세라도 폭동과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타도하려 하고 있고, 농민은 모두 강제수용소에서 웃음을 잃은 동물이 되었고, 과학이니 문화는 모조리 파괴되어 야만상태가 되었고……. 이 모든, 여태까지 가르치고 교육하고 선전해온 것을 무엇으로 해명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레스턴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이와 같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우리들의 인식론적 기능은 냉전사상과 체제 속에서 조건반사(條件反射)의 토끼가 되어버린 감이 있다. 예로 ‘중공’이라는 용어는 즉각적으로 ‘기아’ ‘괴뢰’ ‘피골상접’ ‘야만’ ‘무과학’ ‘반란’ ‘정권타도’ ‘침략’ ‘호전(好戰)’ 등의 냉전용어와 그것이 담고 있는 그와 같은 관념을 우리에게 일으켜왔다. 우리는 강요된 조건반사의 토끼가 되어 있다. 예로 든 중공이 그런지 안 그런지는 알 길이 없다. 레스턴이라는 사람이 권위 있고 양심적인 기자이며 세계 최대의 권위지인 ‘뉴욕타임즈’의 부사장이라 하더라도 “그 친구는 빨갱이야”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객관적 사실이 교육되고 선전되고 세뇌된 대로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아니다. 진실로 문제인 것은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믿어야 했고, 어떤 사상(事象)에는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하고, 그 용어를 사용하면 반드시 일정한 스테레오타이프적 관념을 머릿속에 형성하게끔 우리들이 냉전용어의 조건반사 법칙에 충실한 토끼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계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다고들 한다. ‘잠을 깨고 나면 세상이 변해 있다’고들 한다.
그 잠은 생리적인 잠이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사상적, 지적, 이성적 ‘잠’일지도 모른다. 이런 ‘잠’을 자게 하는 자가 누군지는 따지기가 어렵다. 어쨌든 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은 잠을 깨고 나서 ‘세상이 변해있다’는 진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므로 그것도 사실이다.
한반도의 주변에는 워싱턴, 북경, 동경, 사이공 또는 베를린에서 일어나는 진동(震動)의 파동이 밀어닥치고 있다. 벌써 지난 몇 개월 사이에만도 몇 파(波)의 진동이 한반도의 지각을 흔들었다. 저 멀리 수평선상에 아득히 주름살 같은 파도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주름살처럼 분간도 할 수 없는 작은 파도가 우리의 시야 속에 들어설 때는, 그 하나하나가 해일과 같은 폭발력을 가진 파도인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발 밑에 시선을 둘 것이 아니라 세계라는 넓은 수평선 위로 시선을 옮겨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닥쳐오는 세계정세의 파도 속에서 굳건히, 현멍하게 그리고 평화스럽게 우리의 생을 영위하기 위해서 해야 할 제1의 과제는 사상의 조건반사적 토끼가 되지 말아야 하는 일이겠다.
-‘韓半島’ 1971년 9월호
-p199~208

…모두가 누릴 수 없는 소수의 문화형식을 마치 그 사회의 무슨 큰 발전인 듯, 전체를 대표하는 듯 제시하려는 의도에는 반감이 앞선다. 한마디로 우리의 텔레비전 문화는 전체 사회를 식민지화한 소수의 식민수혜자의 문화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 그것을 보면서 기뻐지기보다는 슬퍼지니 딱한 일이다.
또 한가지 볼 때마다 불쾌해지는 것에 우리 집 식구들이 열중하는 단막 또는 연속의 사회물이 있다. 한 스토리에 주인이 있고 그에 매인 사람이 있으면 주인은 으레 서울말을 쓰고, 매인 사람은 사투리를 쓰면서 등장한다.
또 유심히 보았더니 가정극에 나오는 식모에게는 어느 도의 사투리로 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 같고, 사회풍자극 등에서는 또 건전치 못한 행위를 하거나 수모를 당하는 역의 출신지도 대게 정해져 있고, 쾌감을 주거나 용기와 정의를 상징하는 역의 언어는 거의 예외없이 또 어느 도 ㅏ투리가 독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 만약 그것이 각본을 쓰는 이나 극을 꾸미는 책임자들 사이에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한 시기의 사회권력 분포를 반영한 결과라면 참으로 문제는 중대하다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역 배치와 사투리 배치의 드라마를 볼 때마다 가족과 어린것들에게 어려운 사회과학적인 해설을 해야 할 고통을 당한다. 우리 역사 속의 사색(四色)당쟁 이야기에서 현재의 정치, 경제 권력의 성격까지. 그리고 일본식민지하의 한국의 지방별 산업과 지방별 민중의 생산수단, 그 소유관계. 소작제도와 반상(班常)제도가 빈민에게 강요한 축적된 성격화 특성,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지방의 민중이 그 사회제도의 소수를 위해서 어느 딴 지방의 민중보다 고초를 겪어야 했고, 그 결과로서 당연히 누렸어야 할 권리와 혜택에서 배제되거나 부당한 배척을 받게 되는 사회적 경향이 생겨났다는 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결론으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민족사회를 분열, 파괴했으며 그것이 결코 인간성의 본질 문제가 아니라 다름아닌 사회적 조건에 기인한다는 사실 같은 것을 설명하자니 그게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다. 알아듣는 듯, 못 알아듣는 듯, 심지어 긴 이야기를 귀찮아해 보이는 어린것들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원망하기도 한다. 텔레비전이 문자미디의 특성인 이성과 사고로써가 아니라 눈과 귀를 통해 호소하는 무서운 감각미디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더욱 고민하는 것이다.
사투리와 지방, 도의 드라마 역 배치의 편견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사르트르가 “유태인”이라는 책에서 말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유럽사회에서의 유태인 문제라는 것은 사실은 유태인 문제가 아니라 ‘반(反)유태인’ 문제라고 분석한다. 유럽사회는 유태인을 하층천민으로 둠으로써 자신들의 긴 역사를 통해 부르주아적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 유태인에 대한 집단적인 편견을 일반화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만약 유럽의 부르주아들이 그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태인이라는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인간적, 지방적 또는 민족적 우열과는 전혀 무관한 사실임을 논증한 그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견해와는 달리, 유태인의 성격이 반유태주의를 야기시킨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반유태주의가 유태인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현상으로는 역행적이며 세계관으로서는 전(前)논리적이다. (…) 유태인은 동화를 원했으며 지난 1세기 동안은 어딘가의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들을 거부했다.”
나는 이와 같은 편견을 깨우치고 바로잡는 일의 중요성을 텔레비전 방송에 기대하고 싶다. 너무도 많은 비이성과 편견이 “텔레비전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라는 ‘매스미디어 기능론’의 허울 밑에 너무도 비판 받지 않은 채 수용되고 있는 것 같다. 편견을 깨우치고 이성을 되찾는 사업은, 텔레비전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사고형성의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현실에서 볼 때 텔레비전이 회피해서는 안될 임무이겠다.
-p220~221

…언젠가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로즈벨트 대통령 시대에 미국정부 농무성(農務省)에서 사회과학 여러 분야를 망라한 지도급 학자들의 회의가 열렸다. 미국의 국민생활, 특히 농민생활의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하는 문제를 토의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지도적 권위자라고 하는 경제학자, 정치학자,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사회심리학자들은 며칠 동안의 토의 끝에 그 문제를 무시하는 데 합의했다. 이유인즉 과학자라는 것은 오직 ‘사실’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목표’라든가 ‘바람직한 것’의 문제는 ‘가치’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철학이나 종교의 지도자들이 할 일이라는 견해 때문이었다.

어떤 나라나 어떤 사회나 그 속에 사는 지식인은 자기 사회의 정치를 정치인에게 맡겨놓을 수만은 없다.
-p231~232
당시 미국 법조계에서 가장 존경받던 핸드 판사는 이 시대를 이렇게 평하면서 개탄했다.
시민이 그 이웃 시민을 적이나 간첩처럼 생각하고 살피도록 명령될 때, 그 사회는 벌써 분해의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p235

하나는 소련의 권력기구를 중심으로 한 제반 사회기구가 레닌의 혁명의도와는 달리 점점 관료화하고 있는 현상이다. 이 현상에서는 국민은 정치에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폴리티컬 애파시라고 할까, 몰정치적이라 할까. 권력조작과 관료통제가 심할수록 민중은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무관심의 도피방법을 택하기 마련이다. 사회의 정치는 이미 이 상태에서는 개체를 중심으로 국가가 회전한다는 합리적인 확신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개체와 국가는 단절된 상태가 된다. 침묵이 자기보호 수단이다. 소련시민들은 자기의 사회에 대해서 ‘자기의 책임있는 태도’의 표현을 꺼리게 된 듯 보인다. 소련에서뿐 아니라 많은 후진국가에서, ‘모든 자유는 국가의 이익이 될 때만 허용된다’는 국가지상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신성화될 때 일체의 항의, 반대, 이견은 파괴로 단죄되는 것을 우리는 싫도록 보고 있다. 이 국가 신성불가침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교조적으로 적용되면 그 반지성주의는 짐작할 수 있다.
둘째는 소련시민의 물질적 풍요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물질적 충족감과 마찬가지로 개인주의, 몰정치적 태도를 낳게 하는 사실이다. 알랙산더 워스는 “두개의 세력-권력의 압박과 체제비판운동의 사이에서 소련의 일반 시민들은 거의 무감각상태이다. 그들에게 있어 관심거리는 자기와 가족이 언제 새 아파트에 이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또는 여름휴가는 어디로 갈까 하는 궁리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체코나 베트남 사태 같은 것은 대부분의 소련시민에게 있어 다음 일요일에 있을 축구시합에 대한 흥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정신적 태도라고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양심을 가지고 정치의 부정의(不正義), 제도의 부조리에 대해 항의하려는 지식인은 별수없이 권력과 대중의 겹 공격을 받게 마련이겠다. (…)
이런 말이 있다. “레닌은 소련인민에게 빵을 제대로 주지 못했으나 삶의 의욕과 꿈을 주었다. 스딸린은 빵과 함께 이데올로기를 입에 넣어주었다. 흐루시초프는 큰 빵 덩어리에 이데올로기를 양념으로 발라 주었다.” 현재의 소련지도자들은 그렇다면 빵과 함께 이데올로기 대신 스테이크만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사회주의사회가 비정치화하고 개인적, 물질적 자극에 의존하게 될 때 당, 정부, 사회기구는 점점 더 관료화되고 그것은 민중의 민주적 참여를 배제하게 되며, 나아가 사상적 통제와 획일주의를 요구하게 될 위험이 있다. 악순환의 반복이라고 할까.
어느 사회건, 게마인샤프트적 성격에서 게젤샤프트적 성격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즉 자본주의적으로 될수록 이 물질주의적 경향은 강해진다.
-p237~239

급변하는 국제사회에서 한 국가나 한 국민이 서 있는 위치는 전체적 정세의 변동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객관적인 자기위치의 인식’없이 한 정부나 지도자나 국민이 내일의 생존을 기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국제사회에서의 ‘객관적인 자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국민에게 ‘주체적인 자기’가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월 10일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정부에 주한미군의 감축 또는 ‘일부 철수’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지만)를 통고했다는 사실이 발표된 이후에 나타난 이 사회에서의 반응은 이 국민이 얼마나 객관적 정세변동에 어두웠고 그 결과로서 얼마나 심한 사고와 행동을 위한 ‘주체의 상실’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역력히 보여준다.
미군의 감축은 확실히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국민 전체의 정세변화에의 ‘불감증’과 ‘주체상실증’이 아닐까 한다.
-p246

50년대를 ‘냉전체제’의 시대라고 한다면 60년대는 세계적 규모로서의 ‘냉전 해소’ 또는 ‘군사적 양극화와 정치적 다원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전환의 시대’라고 한다. 물론 모든 국부 현상이 이 특성을 따랐다거나 따른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국과 한반도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국가적 안보라는 문제를 50년대의 냉전시대적 사고방식으로 재단할 수는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된다.
반공주의와 ‘반공전초(前哨)’를 유일한 국가생존의 이데올로기로 내세우며 미국과의 ‘혈맹관계’가 ‘영원한 형제애’로 지속될 것이라는 사고는 너무도 단선적이고 불모적이 아닐까 한다. 50년대, 60년대의 시대적 성격의 변화는 이제 70년대에서 우리의 자세의 변화를 아울러 요구하고 있다. 70년대의 극동은 중공, 즉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 미국의 앙땅뜨 모색의 시대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여기에 소련까지 곁들인 중,미,일,소의 강국정치가 현재의 불균형 상태를 안정시키려고 모색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한반도의 위치가 정해지지 않을까 한다. 주위에서 형성되고 조성되는 이들 강대국들에 의한 파워 폴리틱스의 변화하는 국면에 처해서 분단된 남, 북한 민족이 또 한번 민족상잔의 비극을 치르지 않으려면 이들 강대국들의 의도, 능력과 제약을 명찰(明察)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어쩌면 70년대는 1800년대 말기에서 1900년대 초기의 이 민족과 한반도를 싸고 전개된 역사와 흡사하게 재구성되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청국(淸國)이 강하면 청국을 섬기고, 노국(露國)이 세력을 확장하면 통치자는 이를 불러들여 아관(俄館)에 몸을 피하려 하고 일본이 득세하면 김옥균(金玉均)과 개화파 세력의 삼일천하가 시도되고, 그러다가 꿈이 깨어질 때 미국에 청원하면 이미 ‘카쯔라-테프트’ 비밀협정이 있었다는 식의 우리의 조상들의 불각(不覺)과 몽매에서 70년대의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찾을 만큼 현명해야겠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p251

(3)한미안보체제의 제측면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보호의무는 두가지 법적 근거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나는 한미방위조약이고 또 하나는 유엔 결의에 의한 결의발의국 및 유엔군총사령관 국가로서의 그것이다.
우리는 이 모두가 법적(法的)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의무를 영구히 불변하게 규정한 것으로 흔히 생각하지만 사실은 미국의 법적, 정치적 의무는 오히려 그 의무를 제한, 축소, 폐기하는 데 용이하게 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 미국 방위의무의 법적 한계
한미방위조약의 일방성 : 한국 방위의 방패로 믿고 있는 한미방위조약은 한국 측의 권리보다 미국 측이 군사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권리가 훨씬 많다. 그것은 한반도 정세의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미국의 집약적 의사표시이다.

제1조: 당사국은 관련될지도 모르는 어떠한 국제적 분쟁이라도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하고 (…)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의 행사를 삼갈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조약목적인 북쪽으로부터의 어떤 무력행사에 대항하는 것을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에 의한 여하한 도발이나 분쟁조성의 가능성도 사전에 방지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국의 현상유지 목적을 수행하는 군사적 보장은 다름아닌 주한미군사령관(명목상 유엔군사령관)에 의한 대한민국 작전권의 장악이다. 6.25 직후에 체결된 소위 대전(大田)협정과 그 뒤 매카서 유엔군사령관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사이에 교환된 각서로서 대한민국 군대의 작전권은 유엔군사령관을 겸하는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할 때 기록된 미국 측의 ‘일방적인’ 양해사항이 있다.

미국은 전시(前示) 조약 제3조에 있어서 어느 당사국도 타 당사국에 대한 도발되지 않은 외부로부터의 무장공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타 당사국을 원조할 의무가 없으며……

방점부분의 뜻은 미국이 남쪽에 의한 무력도발 가능성과 그로 인한 만약의 분쟁발생 및 분쟁에의 본의 아닌 법적 개입을 세심하게 회피하려 하고 있다는 분명하고도 강력한 의사표시이다. 즉 북쪽에서의 공격이 있더라도 그것이 남쪽에서의 선제행동에 의한 것이거나 도발에 의한 것일 때는 군사적 보호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약에 부기된 양해사항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또 대한민국의 행정관할권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미국이 인정한 영토에 대한 무장공격의 경우 이외에는 미국이 한국에 대한 원조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해석할 아무 조건도 없다고 이해한다.

방점 부분은 이 조약의 첵ㄹ 당시의 휴전선 이남 지역민에 대한 책임은 지되 만일 한국이 어떤, 미국이 합법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방법과 수단(즉 무력행사)으로 추후 획득할지도 모를 영토나 지역에 대해서는 책임을 안 지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휴전 당시의 상태를 미국으로서는 ‘현상유지’하고 싶다는 것이고, 일체의 무력에 의한 대북괴 행동을 사전에 억제하겟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한미방위협정의 이중, 삼중의 일방적인 미국 측 ‘안전장치’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책임을 최소한도로 줄이려는 정책이 오늘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휴전 때부터 확고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1.21 사태와 동해지구 공비 대량투입 사건 및 최근의 서해에서의 방송선 피폭(被爆) 사건 때마다 우리 정부가 요구하는 국군 작전권의 일부 이양 요구마저 미국정부가 거부하고 있는 것도 이 현상유지 정책의 일부라고 해석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미국 상원의 타이딩스 의원이 상원에서 증언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미방위조약은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미국정책의 문서화라고 할 수 있다.
-p257~258

그러면 일본군대는 절대로 한반도의 분쟁에 지상전의 요원으로서 개입하지 않느다는 것일까.
일본 국민은 정치적 좌, 우를 막론하고 과거의 침략자로서의 반성과, 고도성장을 누리는 높은 생활수준의 지속을 위해서라도 타국이나 타지역의 분쟁에서 죽게 되는 것을 반대하는 게 일반적 경향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중적 희구와는 반대로 일본 군사력은 꾸준히 키워져 왔고, 그것은 이제 자기충족적인 자기전개를 하고 있다.
일본국민의 강한 염원과 평화헌법에도 불구하고 일본군대가 오늘날의 현실로 증강된 것을 생각한다면 이 땅에서 일본군대를 다시 보게 되지 않으리라는 절대적인 보증도 없을 것 같다.
한반도의 긴장을 지속시키거나 촉진함으로써 자기의 이(利)를 찾는 사람이나 세력이 혹시라도 생겨난다면 일본군대를 끌어들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가능성도 절대로 없다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김유신(金庾信)이 당군(唐軍)을 불러들여 신라 통일을 이룩하고 연후에 당의 세력을 이 반도에서 밀어낸 역사의 한 단면이 그대로 되풀이될 수 있기에는 시대가 다르고 파괴무기가 너무나도 발전했다 할 것이다. 외세의 도입은 어느 시대나 어느 경우에나 위험하다.
-p279~280

9. 남는 문제들

이상 여러 가지 각도에서 주한미군의 감축 혹은 철수와 관련해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꽤 넓게 살펴보았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관찰을 하고 나도 문제는 남는다. 많은 문제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1. 차원 높은 의식구조
우리는 반공주의와 반공전초를 자처하기만 하면 모든 서방 우방국가가 영원토록 국가안전을 보호해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국가들은 특히 강대국들은 우리가 중요시하는 신의나 약속보다는 자국의 국가적 이익을 국제사회에서의 행동원리로 삼는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 국가적인 인격형성이 시급하다 하겠다.

2. 시대사조, 국제정세에의 감각
우리는 아직도 6.25 당시의 전쟁의식과 덜러스, 스딸린 시대의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가를 스스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다.
한국의 운명이 결코 강대국의 자의로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허용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한 국가나 국민이 국제사회 속에서 생존하려면 국제정치의 변동과 시대적 정신에 많은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이에 대한 편견 없는 이해와 파악 없이는 민족을 움직여나가는 역사에 대해서 주체로서 작용할 수 없지 않을까 한다.

3. 국가안보 개념의 재평가
우리는 흔히 안보 하면 병력 수, 무기의 양과 수준 등 순수군사적 견지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 국가의 안보는 순수군사력에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도 더 그 국가사회의 전반적 체제와 그 기능, 이익과 기회의 균배(均配), 맹목적이 아닌 이성적인 민족애와 애국심 등에 바탕을 두는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구주(歐洲) 최강육군이나 마지노선(線)도 프랑스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은 생각해볼 만하다. 다시 말하면 국방이나 안보 개념의 재인식이 필요하다.

4. 의타심은 자기를 망칠 수 있다.
미국에 대한 한국의 지난 25년간의 관계를 어떻게 성격 지을 것인가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의타심과 나쁘게 말해서 예속적 생존이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있었다면 국제사회에서 떳떳한 국가, 국민, 민족으로 존경받긴 힘들 것이다. 미군 감축의 발표와 함께 이번에는 일본군대에 눈을 또 돌려야 하게 되는 것도 ‘진정한’ 자주의식의 결핍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5. 한반도에서의 긴장의 단계적 완화
한반도 안팎으로 긴장이 계속되고 증대되는 한 한반도는 제각기 하나는 소-중공으로 , 하나는 미-일로 강대국들에의 의존을 찾게 될 것은 당연한 국제적 원리라 하겠다. 동-서독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또 실제로 다른 점도 많지만, 적어도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가 전혀 없는가를 생각할 필요는 있다. 우리가 북괴에 앞서서 그러한 방안을 마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장기적인 생존형식을 상호간에 모색하고 정립하지 않는 한 같은 민족의 군비경쟁은 그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강대국에 대한 경제, 군사, 정치적 의존상태를 영속화할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유혈 없는 민족통일이라는 역사적, 민족적 목표에 도움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안보나 군사문제를 생각할 때의 사고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고 이번 미군 감축문제가 줄 수 있는 하나의 교훈이 될 수 있다.
-p284~286

일본국민이 제2차대전 전부터 갖추고 있던 높은 교육-기술 수준, 개국 백년 동안에 선진 자본주의국가들과의 경쟁과정에서 쌓은 정부관료와 기업가들의 기획-관리 능력, 좁은 여토내에 많은 연구가 제공하는 잠재적 국내시장 등, 일본 국내의 내재적인 원인들은 대체로 알려진 사실들이다. 여기에서는 국제관계를 배경으로 문제를 다루는 입장에서 객관적 조건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허먼 칸은 대충 다음과 같이 그 원인을 지적하고 있다.
1. GNP의 불과1%도 안되는 군사비밖에 지출하지 않은 점.
2. 한국동란(및 그후에는 월남전쟁)의 강력한 자극적 효과
3. 미국자본 도입.
4. 무역관계에서 미국이라는 풍부한 고객을 가졌던 점.
5. 미국과 유럽국가들로부터 선진기술을 싸고 쉽게 도입할 수 있었던 점.
6. 자유무역의 기운이 높아지고 세계무역의 규모 자체가 확대경향을 지속한 점.
7. 대규모의 원료공급 지역을 새로 확보할 수 있었던 점.
8. 해운의 발달.
이상과 같은 몇가지 조건들이 모두 사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칸은 중요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원칙적인 조건을 못 보고 있다. 그것은 미국의 전후 아시아 대공산권 정책이 일본경제의 강화를 계획적으로 촉진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강대국화는 경제적으로나 정치, 군사적 면에서도 주로 미국의 대중공정책 전환의 부산물이다. 그것은 마치 1차대전에 패망한 독일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인 소련에 대항세력으로 키울 필요를 느꼈던 미국, 서구자본주의의 요청과 동일하다.
-p294~295

그렇다면 일본을 국제정치의 대국으로 만들려는 것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환으로서만 그런 것인 것. 그렇지는 않다. 일본의 국가적 현실과 목표라는 면에서 그것은 일본정부와 일본국민의 간절한 의지이기도 하다. 다만 그 다음 단계로서 필연적으로 문제될 ‘군사대국’에 관해서는 정치적 입장이나 학식, 연령 등에 따라 찬-반으로 갈라지지만 정치대국의 지위에 관해서만은 일본의 현 보수당 정권뿐 아니라 대체적으로 전 국민의 일치된 의향인 것 같다. 객관적인 국제정세 변화보다도 이 일본국민에 내재하는 희구와 충동이 정치대국을 지향하는 더 강력한 에너지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1. 패전 피점령 국민의 반발의식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및 독립 이후에도 미국의 사실상의 지배하에서 4반세기를 살아온 일본인은 패전국민, 피점령국민이라는 열등한 지위에서의 급속한 탈피를 희구하고 있다.
2. 불패(不敗) 민족이라는 역사의식
2차대전에 패하기는 했지만 섬나라의 탓이었건 지도자의 현명 탓이었건 타민족을 지배했지 지배받지 않고 이어온 민족사에서 우러나온 우월감.
3. 가해자 의식의 망각
좌익정당이나 좌익적 의식의 인사들에게는 아직도 청일전쟁 이후의 침략행위에 대한 가해자 의식이 있지만 노장년층이나 그밖의 복고주의적 인사, 더욱이 침략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패전 전후에 태어난 청년층에게는 가해자 의식이 없다. 그들은 패전이라는 것으로 속되는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 이상 정치적으로 삼등국민의 지위를 감수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반문한다.
4. 우익 지도인사들의 노스텔지어와 자신
현재 자민당의 많은 지도층 인사가 대동아공영권 시대의 Good old days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패전 이후 미국의 반공 일본정책의 뒷밤침으로 경제발전과 장기집권의 과정에서 자신을 얻었다.
5. 미국에의 군사예속에서의 해방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통한 국가방위를 원하건 원치 않건, 미국의 군사기지와 외국군대가 주둔해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일본의 미국 예속상태를 인식시킨다. 이 ‘예속상태’에서의 해방을 대외적, 정치적 독립에서 찾으려 한다.
6. 대중공 관계의 정상화
여러 가지 통계와 여론조사 결과는 많은 국민이 중국과의 긴 역사, 문화적 친화감을 강조하거나 가해자 의식에서 대중공친선을 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지식인층의 이 경향이 뚜렷하다. 이 의식은 최근까지 미국의 대중공 적대정책에서의 이탈과 독립적 대중공정책 결정능력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세계적 강대국이 된 중공과의 관계정상화는 역시 일본의 정치적 지위의 향상을 전제로 한다는 현실정치의 감각이 싹트고 있다.
7. 산업계, 재계, 군부의 이익 고려
일본경제의 군수산업화에서 이득을 계산하는 산업, 재계의 강력한 세력은 일본의 정치세력권 확대에 기대한다. 진정한 일본의 자체방어를 목표로 하는 군부지도자건, 직업군대의 생리와 운동법칙이라 할 수 있는 일본군 세력권 확대 및 그와 병행해서 진행될 군부의 위신, 독립적 발언권의 강화를 희구하는 군부지도자건 자체 이익의 전제로서 일본의 정치적 강국화를 요구한다. 이른바 ‘산(産)-군(軍) 결탁체제’의 속성의 표현이라 하겠다.
이렇듯 일본의 내외조건은 군사대국에의 억제할 수 없는 에너지에 충동을 받고 있다.
-p309~311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정치적 능력이 과히 높이 평가되지 않은 8년간의 백악관 생활을 마치고 떠났다. 그에 대한 미국역사의 기록은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보다도 그가 젊은 케네디 후임 대통령에게 “미국군부와 산업계가 결탁하여 대통령의권한과 국가정책 결정과정에 개입하려 드는 강력한 압력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경고하는 간곡한 충고를 남긴 사실을 더 중요시할 것이다.
-p316~317

일본이 헌법에 유보되어 있는 ‘고유의 자위권’의 ‘범위’를 확대 설명함으로써 일본군대의 행동범위를 확대하려는 의도 내지는 가능성이 적절히 지적되었다. 그 범위를 확대하는 단계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그에 편입될 지리적 위치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과 한반도이겠다. 한반도에까지 확대된 행동범위를 갖는 일본군대가 한반도의 현재 및 내일의 정세에서 어떤 역할을 하려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 그리고 일본의 원료시장은 중동의 석유를 제외한다면 그 대부분이 아시아와 극동국가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품과 원료시장의 안전을 군사적으로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시아를 덮는 대해군력이 요청된다. 이것이 이른바 ‘대말라카 함대’론의 진의읜 것이다.
-p327~328

1905년 7월 27일 오후 카츠라 백작과 태프트 미 국방장관과의 사이에는 장시간의 비밀회담이 이루어졌다.

제1 : 미국에 있는 유력한 친로파(親露派)의 어떤 자는, 일본의 승리(露日戰爭)가 필리핀 제도(諸島) 방면으로의 일본 침략의 서막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태프트 장관은 필리핀에 대한 일본의 유일한 관심은 차라리 미국과 같은 강대하고 우호적인 국가가 필리핀을 통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그의 관찰을 피력했다.
카츠라 백작은 태프트 장관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강조 및 확인하고 또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서 하등의 침략적 의도가 없다는 뜻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제2 : 카츠라 백작은 일본의 외교정책의 기본적 원칙은 극동에 있어서의 일반적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전기(前記)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서 일-미-영 3국 정부간에 이 지역에 관한 선의의 요해(了解)를 형성하는 일이다.
제3 : 카츠라 백작은 조선 문제에 관해 조선은 일본이 노국(露國)과 싸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곳이므로 전쟁의 논리적 결과로서 반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일본에 있어 절대로 중요한 사항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만일 조선이 그대로 방치된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분별하게 타국과의 협정이나 조약을 체결하는 습벽(習癖)을 되풀이하게 되어, 이렇게 해서 전쟁에 존재한 국제 분규를 재현할 것이다.
위와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일본은 조선이 구태(舊態)로 돌아가 일본으로 하여금 다시 외국과의 전쟁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그런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 단호한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태프트 장관은 카츠라 백작의 견해의 정당성을 십분 인정하여 그의 개인적 견해로서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종주권을 확립하고, 그 범위로서는 조선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려면 일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 이런 전쟁의 논리적 결론이며 아울러 동양에 있어서의 항구적 평화에 직접 기여할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동 장관은 이에 대한 보장을 줄 권한은 없지만 자기의 판단에 의하면 루즈벨트 대통령도 이 점에 관하여 그의 견해에 동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1905년 7월

이상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승인한 유명한 일본 카츠라 총리 대신과 태프트 미국 육군장관 사이에 교환된 이른바 ‘카츠라-태프트 각서’의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전문이다.
-p331~332

이상에서 개관한 바와 같이 유엔과 한국의 긴 역사적 관계는 군사적 측면에서는 종지부를 찍으려는 단계에 들어섰고, 정치적 측면에서는 남북 동등한 입장을 전제로 하는 화해를 촉구하고 있다. 이는 휴전 이후 20년간에 걸쳐서 변화한 세계의 정세와 그것을 반영한 유엔 내의 사조의 방향이다.
그것은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와 장기적인 공존질서 속에서의 새로운 생활방식의 설정을 요구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 복합적인 현실상황은 종래와 같은 이른바 ‘명분’만으로는 국가안전과 평화를 보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화학적(化學的)인 통합으로서의 통일은 장래의 일로 돌리더라도, 통일을 지향하는 단계적인 민족내부적 해결은 세계의 대부분 국가들이 강력히 바라는 것이라는 사실도 입증되었다.
예견되는 유엔군과 미군의 철수 및 유엔과의 관계단절은 한국의 독자적인 군사적 안전보장책을 선행조건으로 하고 있지만 주변 열강의 의지와 한민족의 염원이 전쟁회피와 평화에 일치하는 한 앞으로의 시대는 군사주의보다는 정치와 외교로써 공존질서를 정립해야 할 시대로 비쳐진다.
이와 같은 새로운 민족적 생활방식은 전쟁정책이나 군사위주의 상황에서보다 더 높은 슬기와 얼을 요구한다.
전쟁은 동물적 생존본능의 에너지를 발생케 하는 것이지만, 이체제(異體制)간의 공존은 그와는 전연 다른 이성과 이상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활방식이기 때문이다.
-‘新東亞’ 1971년 11월호
-P352~353
프랑스가 식민통치하의 호지명세력을 끝까지 거부한 것이나 현재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개입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동기는 민족주의자는 베트남의 독립과 양립할 수 있으나 공산주의자는 베트남의 주권, 독립을 국제공산주의에 예속시킨다는 견해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 실천적 과정을 사태발전의 역사 속에서 검토해보는 것은 ‘학문적으로’ 유익하겠다.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고정관념이나 이해관계의 입장을 일단 벗어나는 학문적 태도가 전제로 요구된다.
(1) 민족해방과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프랑스 제국주의와 식민지지배에 대한 베트남인의 투쟁은 그들의 일부가 소련혁명으로 어떤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되는 1930년대에 훨씬 앞서서 100년 가까이 계속되어왔다. ‘민족주의자’라는 규정으로 프랑스와 미국의 총애를 받은 고 딘 디엠이나 ‘공산주의자’라는 규정으로 배척받은 호지명이나 이미 그 이전부터 베트남의 식민지해방과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다. 이 사실에서 볼 때, 식민지 베트남민족의 해방,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은 누구나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인 셈이다. 내셔널리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정치학자들의 정의를 따른다면 베트남의 반식민-반제국주의는 그대로 내셔널리즘이다. 베트남에 관한 한 민족주의는 본질이고 나머지의 철학은 해방투쟁의 방법론과 식민에서 해방된 사회의 체제에 대한 구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외세에 대한 투쟁과정에서는 전부가 민족주의자라는 데 더 큰 중요성이 있다. 그러기에 차이점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적 민족주의자인가로 다루어진다. 이것은 베트남의 경우는 그렇거니와 모든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자본주의였다는 역사적 사실로 말미암아서 같은 민족주의자이면서 자본주의와 이해관계가 밀착하는 세력은 민족해방운동에서 소극적이었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는 반식민지투쟁에서 적극적이었다는 차이를 낳게 한다.
-P368~369

(2) 민주적 지도자의 자격의 차원에서
현대의 민주주의가 고전적 정치민주주의의 측면에서뿐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측면의 민주주의를 그 기본요건으로 한다는 학설에 따른다면 여기에서 베트남에 관한 고정관념은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더욱이 고전적, 정치적 민주주의의 경제적 토대였던 자유시장, 경쟁경제, 사유재산의 제반제도가 반드시 민주주의의 ‘절대적’ 요건으로 인정되지만은 않게 된 현대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겠다.
민주주의냐 아니냐는 기준은 그 국가사회의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권리와 기회가 민중, 인민, 시민 또는 국민(명칭이야 어떻든)에게 얼마나 균등하게 배분되고 보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미 차지한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박애심 이상의 어떤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자기희생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민족주의자’가 반드시 민주주의적이고, 비계급적이고, 비외세의존적이고, 대중의 이익을 제1차적 관심으로 생각하고, 아울러 민중의 정치적 자유도 보장하는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예스’이면 어떤 구실과 수단으로써도 그 세력을 돕는 것은 타당하다 할 것이다. 그 답변이 ‘노우’이면 베트남사태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관념이나 선전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이 어떻든 ‘진실’이라는 것을 모든 판단의 토대로 해야 한다는 바로 ‘민주주의’의 원리와 정신 때문에도 더욱 그렇다. 딴 중요한 정치적 덕성이 없이, 단순히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식민주의 세력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나 정권이 얼마나 반민중(인민,국민)적인가 하는 좋은 증언이 있다.

본인은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께 지난 일요일자 ‘뉴욕 해럴트 트리뷴’ 지에 실린 사이공주재 미국인 특파원의 흥미있고, 또 본인이 보기에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지낸 지난 한달 동안 나는 가끔 불안했던 중국의 장개석정권과 바오 다이 정권을 비교해보았다. 한가지 면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바오 다이 정부가 1947년 말 장개석이 중국내란에서 패배한 거나 다름없을 때의 장개석정권보다도 국민의 지지가 없었고 권위의 전통도 더 약하며 정권을 위해서 일하는 국민과 인물들의 비율도 더 낮고 투쟁의 열의도 더 약하다. 바오 다이 정권이 분명히 더 강한 단 한가지는 동(同)정권이 프랑스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프랑스행 정관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강점은 또한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프랑스군대가 베트남 땅에 있는 한, 바오다이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불행한 나라의 경제재건과 민중의 복지는 호지명이 지배하는 대단히 광대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등한시되고 있습니다. 호지명은 진보적이고 번창하는 사회주의 복지국가로 보이는 나라를 만들어놓았습니다. 바오 다이 황제는 사이공에서 3백 마일 떨어진 그의 산장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고 있습니다. (영국 하원의 사록초, 1950년 4월 14일 영국 외무성 인도지나에 관한 공식문서집 부록 문서 제11호)
-P372~373

독재, 탄압 통치가 있는 곳에 인민의 반항이 싹트기 시작했다.
-p401

미국의 압도적인 물량과 과학무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물질적 위력이 강해지면 질수록 인도지나 민족의 민족해방세력은 강대해지기만 했다. 인도지나 전역에 대한 비치사성 각동 독가스와 식물고사용의 화학무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됨으로써, 인도지나전은 처음으로 생태학적 대량 파괴의 문제를 인류에게 제기하였다. 해방전선 측을 돕는 소련과 중공은 상호간의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공화국을 통한 현대무기 원조의 필요성으로 미국과의 전쟁 일보전 상태에까지 깊이 관련되었다. 쌍방 전쟁방법의 잔인성은 세계의 양심과 국제여론을 자극하여 미국에게 날로 불리한 국제적 조건으로 굳어져갔다. 미국 내의 국론분열과 반전세력은 내부에서 국가적 일체성을 파괴하는 작용을 하여, 미국은 마침내 닉슨으로 하여금 1970년, “미국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선언과 함께 20년에 걸쳤던 정치, 군사 간섭정책에서 물러나기 시작하도록 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으로 무장한 거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일개 후진 약소민족과 협정을 맺고 1973년 2월, 27년 만에 이 파란 많은 땅에서 물러서기를 약속했다. 모든 사태는 드골 프랑스대통령이 예언한 대로 끝났다.

인도지나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망하고 떠난 뒤, 미국은 고 딘 디엠 정권을 뒷받침하면서 경제원조라는 표면적 간판 아래 미국 원정군의 제1진을 베트남에 들여놓기 시작했다. 존 케네디는 나에게, 미국의 목적은 그곳에 소련 포위용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임을 이해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가 요청하는 승인과 동의 대신에 (케네디 대통령에게) 그가 잘못된 길을 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이 지역에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당신은 끝없는 미로에 빠져들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한번 눈을 뜨고 궐기한 다음에는 아무리 강대한 외부적 세력도 그 의사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부의 현직 지도자들이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와 목적에서 당신을 섬길 생각이라 하더라도 민중은 그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당신을 원치 않을 것이다. 당신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는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불러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인도지나의 민중은 당신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를 당신의 지배욕과 동일시할 것이다. 당신이 그곳에서 반공주의를 내세워 깊이 개입하면 할수록 그곳 민중에게는 공산주의야말로 그들의 민족적 독립의 기수로 보이게 되리라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민중은 공산주의자들을 더욱 따르고 지지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우리 프랑스가 떠난 그 지점에 들어서려 하고 있고, 우리가 끝맺은 전쟁을 다시 되살리려 하고 있다. 한마디로 당신네 미국인들은 인도지나에서 과거의 프랑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싫도록 그것을 경험했다. 당신에게 한마디 더 충고하고 싶은데, 그것은 당신이 아무리 돈과 인원을 인도지나에 쏟아넣어도, 오히려 그럴수록 당신네들은 그곳에서 밑이 없는 군사적, 정치적 늪 속으로 몸을 가눌 수 없게끔 한발 한발 빠져들어갈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이다. 불행한 아시아와 아시아의 민족들을 위해서 당신이나 우리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 민족이나 국가의 살림살이를 우리가 떠맡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서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나 전횡적이고 억압적인 정권을 낳게 하는 원인인 인간적 고통과 욕된 상태에서 그들이 빠져나올 수 있게끔 도와주는 일이다. (Memories d’Espoir에서)
-p443~445

*제 5부 – 직업 수필 4제(題) / 기자 풍토 종횡기(縱橫記)

“우리 모든 인간은 국가라는 사회 속의 생활이 당연히 요청하는 그 집단에 대한 의무와 함께 그보다 한층 더 높은 의무를 아울러 지니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만 국가라는 특정 조직체의 유지라는 것에만 예속시킨다면 그 순간 우리 개개인의 내적 자아에 대한 의무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충성이라는 가치는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국가지상이라는 신념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서 그 심판자로서의 자기를 지켜나갈 각오가 없는 한 불충분하다. ‘국가의 이익’이라는 것만을 기뻐하는 것으로 애국자일 수는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국가의 이익 또는 승리라는 것이 우리 시민 개개인의 내적 자아가 승인할 수 있는 가치와 명분에 대한 승리인가를 먼저 확인한다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해럴드 J. 러스키)
-p459 [한국기자협회보韓國記者協會報, 1970년 9월 25일자]

대상을 보고 그대로 묘사-기술하는 것만으로는 하나의 생동하는 사회를 꿰뚫어보거나 역사의 움직임을 파악하기는 어렵겠다. 거기에는 이른바 엄격한 ‘객관주의’적 보도와 아울러 그것 이상의 무엇이 요구되리라고 생각된다. 취재의 대상을 관찰하는 단계에서 그것을 해석해야 할 단계가 올 것이다. 거기에는 현상을 관찰하는 객관주의의 토대로서 풍부한 지식과 ‘건전한 주관’이 요구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와는 다른 원리, 철학, 이론, 그 역사성은 물론, 그와 같은 자기의 것과는 다른 가치관에 입각해서 실현하려는 사회의 형태와 내용, 그 염원과 이상과 그것을 지향해서 움직이는 지도자들과 민중…… 이런 것들을 이해해야 할 단계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현상 관찰, 묘사, 기술의 객관주의적 수법과 능력만으로써는 어려운 차원의 과제이겠다. 이것은 그 철학이나 제도에 대한 공감이나 동조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대상이 현실이기때문이다. (…)이제 기자도 공부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까지의 기자라는 직업은 다소의 눈치와 부지런으로 가능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여태까지는 과거와 현재(상)를 놓고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으로 족했다. 이제는 ‘미래’가 기자직업의 영역 속에 크게 제기된 것이다.
미래와 대결하는 기자에게 새로이 요구되는 것은 첫째는 적어도 권력과 관료보다는 의식이 앞서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그러기 위해 꾸준한 자기 교양을 통해서 세계관을 넓혀야 하겠다는 절실한 생각이다.
-p469~471 [한국기자협회보韓國記者協會報, 1972년 9월 8일자]

기자 풍토 縱橫記
- 누가 먼저 돌로 치랴

자기가 속하는 사회를 평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그것은 간부(姦婦)를 치기 위해서 돌을 드는 사람과 다름없다.
오늘날 모든 가치가 전도되고, 단테의 연옥(煉獄)을 연상케 하는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기자라면 기자풍토를 논하기 위해 돌을 쳐들어도 먼저 자기의 머리를 치지 않고서는 한줄의 글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기자사회라는 숲 속의 한 그루의 나무에 지나지 않는 사람은 자기와 자기의 직업적 동료들로 구성되는 숲이 어떤 모양인지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기인하는 수많은 제약을 전제(前提)적으로 인식하고 나서라도 아직 기자가 할 일을 하고 있는가를 따져 물어볼 여지는 충분히 남아 있다.
첫째 문제는 기자의 사회학적 귀속감각이다. 현재 이 사회의 기자는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의 경제적 토대나 직업적 활동의 대가로서의 물질적 보수는 엄청나게 낮은 경제적 계층에 속한다. 여기서 기자라는 표현은 수습기자에서부터 ‘회전의자에 앉은 높은 기자’까지를 포함해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물질적 토대와는 지극히 동떨어지고 비약한 형태의 사회집단에 대한 귀속감을 지니고 있다.
기자는 수습 또는 견습이라는 ‘미완성’의 자격으로서도 출입처에 나가면 위로는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은행총재로부터 아래로는 국장, 부장, 과장들과 동격으로 행사하게 된다. 그들이 취재 대상의 하부층과 접촉하는 기회는 오히려 드물다. 장관이나 정치인이나 사장, 총재들과 팔짱을 끼고 청운각(淸雲閣)이니 옥류장(玉流莊)이니 조선호텔 무슨 라운지니 하면서 기생을 옆게 끼고 흥청될 때, 그 기자는 일금 1만 8천원 또는 고작해서 일금 3만 2천원이 적힌 사내 사령장(辭令狀)을 그날 아침 사장에게서 받을 때의 울상을 잊고 만다.
점심은 대통령 초대의 주식(晝食), 그것이 끝나면 은행총재의 벤츠차에 같이 타고 무슨 각(閣)의 기생 파티에서 최신 유행의 트로트 춤을 자랑하고 이튿날 아침은 총리니 국회의장의 “자네만 오게”라는 전화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참석하는 꿈이 남아 있다. 이런 기회는, 많고 적고의 차이는 있지만 출입처에 나간다는 기자에게는 반드시 있다.
소속 계층에 대한 착각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거나 돼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기자도 얼마쯤 혼탁한 물에서 헤엄치다보면 의식이 달라진다. 면역이 된다.
경제, 재계, 정계의 상층부에서 어울리는 동안 기자는 자기의 물질적 소속이 그 사회의 하층민중임을 망각한다. 여러 해가 걸리는 것이 아니다. 어제 수습기자로서 선배기자들의 무력과 타락과 민중에 대한 배반을 소리 높여 규탄하던 사람이 내일은 벌써 “골프는 결코 사치가 아니야. 건전한 국민오락이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이 나라의 현체제의 수익집단인 지배계층과 자기를 동일시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지배계급의 그것으로의 동화과정을 걷는다.
고등학교를 남의 집의 눈총밥으로 마쳤다는 사실이나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어제의 불우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 개인의 문제이기에 크게 탓하지 않아도 좋다. 문제는 부장이 되고 국장이 된 그의 머리에서 기획되는 특집기사가 ‘매니큐어의 예술’이니 ‘바캉스를 즐기는 법’따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논설위원이 되거나 평론의 한편이라도 쓸 때면 ‘학생의 본분은 공부만 하는 것, 현실은 정부에게 맡기기를’ 따위가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나오게 된다. 서울의 종합병원의 환자가 레지던트의 파업으로 하루 이틀 치료를 못 받는 것에 격분하는 기자는 이 나라의 1천 342개 면 가운데 거의 반절인 630개 면이 의사 없는 무의촌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 많은 농촌에서 일생동안 의술이라는 현대문화의 혜택을 거부당한 채 죽어가는 무수한 백성이 왜 있어야 하느냐의 문제를 사회의 체제와 결부해서 생각해볼 리 없다. 도시 위주이고 근원도 모를 퇴폐문화 위주이다.
모든 것이 ‘가진 자’의 취미와 입장에서 취재되고 기사화된다. ‘지배하는 자’의 이해와 취미에서 신문은 꾸며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진 자와 지배하는 자는 대연각(大然閣)의 음밀한 방에서 나오면서 이(李)기자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린다.
“역시 이완용 기자가 최고야, 홍경래 기자는 통 말을 알아듣지 못한단 말이야.”
그리고는 득의만면해서 돌아서는 이완용 기자의 등 뒤에서 눈을 가늘게 하여 회심의 웃음을 짓는다.
국민의 소시민화, 백성의 우민화, 대중의 오도(誤導)라고 말하는 학생들의 비난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적으로 부인할 용기를 가진 기자가 몇사람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권력 측 발표 그대로 사실화

“정치문제는 폭력이 두려워서 못 쓰고……”라는 일반의 인식이 뜻하는 폭력이란 물론 국가권력의 불법적 압력으로 해석된다. 그런 뜻에서의 폭력에 관해서는 몇해 전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 당시, 야당에서 신문-통신사 내에 중앙정보원이 상주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정치적 논쟁이 일어났었다. 이때 소위 언론계 지도자의 한 사람이요, 한때 국가 권력의 폭력에 대항해서 싸운 경력으로 이름난 기자가 중앙의 대신문 사설로 그런 일이 없다고 야당의 주장을 되려 반박, 비난한 일이 있다.
모든 신문은 그것을 본받았다. 정확하게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지만 소위 ‘기관원’이라는 범주에 드는 국가권력의 일선 대리인은 그때 신문사 내에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 높은 기자는 지금도 여전히 한국 언론계의 지도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국가권력의 폭력은 여러 가지 형태로 기자에게 가해지고 있다. 일선 취재기자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에 ‘안보관계’라는 것이 있다. 한번 당국이 이 딱지만 붙여버리면 기자의 발은 거기서 멈춰버린다. 아무리 정상적인 지식과 판단력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결정이나 사건이라 해도, ‘안보관계’라고 권력 측에서 발표하기만 하면 발표내용 이상으로 깊이 파고들어갈 수는 없다. 그 발표 자체의 진위의 여부조차 국민은 알 도리가 없다.
기억에도 생생하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소위 ‘군 특수범 난동’사건이라는 것도 권력 측에서 여러 가지 상황 고려 끝에 그것이 공비가 아니라 막바로 대한민국 국군이라고 일단 사실대로 고쳐 발표했으니 말이지, 공비라고 하는 것이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이롭다고 판단했더라면 국민은 그대로 속아넘어갔을지 모른다. 웬만한 휴전선에서의 충돌사건, 간첩사건, 반공법 적용사건 같은 것은 권력 측의 ‘발표’가 그대로 ‘사실화’된다. 이런 문제에 관해 그 진실과 내용을 외국에서처럼 기자는 신문의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구명하고 추구해 들어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적이라고 하는 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최근에 말썽난 월남전쟁 정책의 비밀문서 폭로를 통해 미국정부가 월남전쟁에 관해서 20년을 두고 국민에게 발표해온 것은 전부가 ‘허위’와 ‘날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도 미국의 언론은 기어이 그 허위를 밝혀낸 용기가 있었지만 우리의 신문은 처음부터 그 직업적 책임과 공적 의무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있다.
취재된 기사도 외부로부터의 전화 한마디로 부장 선에서 주물러진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나 세력을 위해서 커지기도 하고, 절반으로 줄기도 하고, 영영 쓰레기통 속에 버려지기도 한다.
유명한 ‘한강변 정여인 살해사건’이라는 것도 사건 발생 첫 이틀 동안은 미묘한 윤곽이 드러날 듯하더니, 사흘째부터는 ‘국가이익’이라는 ‘폭력’ 때문에 신문은 발표문만을 실었다. 처음부터 사건을 취재한 기자들은 그동안 모여 앉으면 마치 국민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자랑하듯이, 그러나 뭣 때문인지 주위를 살피면서 이상한 표정과 음어(陰語)로 수군거렸다.

약자에게만 강한 건 ‘깡패’

기자의 사기와 지위는 자유당의 문민정권(文民政權) 때에 비해 현저히 저락했다. 11년 전만 하더라도 기자의 ‘임의동행’이나 ‘연행’은 큰 사건이었다.
“기자협회보”에 실린 보도자유분위 조사에 의하면 지난 2년 동안에 국가권력에 의해서 취재기자가 테러를 당한 사건은 굵직한 것만 골라도 11건이나 된다. 그러나 그 기자의 소속사는 거의 그 사건을 보도하지도 못하고 우물우물 넘겨버렸다. 발행인은 자기의 신문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다가 권력의 폭력의 희생이 된 기자에 관해서나 그 사건 자체를 보도하기를 꺼려한다. 권력과의 사이에 긴장관계가 생기는 것을 극력 회피하는 것이 발행인의 이익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차장, 부장, 국장에 이르면 ‘무료 해외여행’ ‘생활보조’의 혜택으로 이미 기자이기보다는 어떤 뜻에서 권력 측에 가까운 예도 드물지 않다. 기사재료를 독점으로 준다는 미끼로 그 ‘죽음의 키스’를 받게 되고, 이권청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폭력 앞에 무력해지고 만다. 그 지위가 되면 벌써 생각은 행정부의 국장, 차관, 무슨 비서관이니 국영기업체의 자리에 가 있다.
이와 같은 유혹과 압력, 그리고 요구하면 얻어지는 이권과 혜택을 거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본가인 보도기관 사주(社主)의 이익은 바로 권력의 그것과 일체적인 까닭에 원칙을 지키려는 기자(어느 급이건)는 거추장스럽고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소위 언론기관에는 그런 소수의 기자를 귀양 보내는 데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구실과 부서가 마련되어 있다.
이쯤 되고 보면 ‘듣건대 고생스런 취재는 부-차장 선에서 잘리기 일쑤요, 힘들게 부-차장 손을 벗어나면 국장 선에서 난도질한다니 이 무슨 해괴한 굿거리인가’라는 말도 전적으로 거짓은 아니다. 언론을 출세의 밑천으로 삼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문기자들 사이에서는 현정권은 ‘기자를 뭣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자학어린 말이 나돌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권력 측에게만 돌릴 책임은 아닐 것 같다. 그토록 존경받던 기자의 지위와 권위를 떨어뜨린 것은 딴 누구도 아닌 바로 기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엄격한 뜻에서 강간(强姦)은 없다. 참으로 그렇다.
‘붓을 휘두르는 깡패’라는 말은 좀 가혹한 표현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말에 뭣인가 짚이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권력과 금력 앞에 무력해진 기자(통틀어 언론)가 강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안간힘을 다해야 고작 희화(戱畵)나 야유의 정도이고 언론의 칼에 얻어맞아 목숨을 잃는 것은 약자뿐인 상태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몇해 전 진주인지 마산인지 분명치 않지만 형무소에서 수용자들이 형무소 관리들에게 난동을 부린 사건이 있었다. 이 기사를 보내온 기자는 그들의 행패를 상세한 내용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그 뒤에 알려진 바로는 이 난동의 원인은 형무소 당국이 급식과 후생의 면에서 수용자들의 거듭된 진정과 불만을 묵살한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현지의 기자는 약한 자의 행패만 규탄했고, 서울 본사의 부 담당장이나 편집 책임자도 난동의 원인을 추가 취재시켜 보도하자는 편집회의에서의 한 사람의 의견을 묵살했다. 정당한 권리를 묵살당하고 박탈당한 약자의 입장보다 권력의 질서가 도전받는 것이 더 중대한 문제라는 듯이.
생활난으로 자살한 사건도 지금은 무슨 딴 이유나 동기로 돌려쓰는 경향이 있다. 깡패라는 것이 강한 자에 아부하고 약한 자에 군림하는 것이라면 ‘펜을 휘두르는 깡패’라는 말을 뭣으로 반박할까.

‘척지(尺志)’ 횡납(橫納)과 포커판

기자는 도둑의 파수꾼을 자처한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고 직업적 기능으로서 아직도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일본의 모 자동차 제작회사는 제품 가운데 인간 생명을 제일차적으로 좌우하는 브레이크 장치에 치명적 결함이 있음을 입증하고 전부 회수했다. 그러나 그 제품과 관련이 있는 우리나라의 어떤 자본은 그 기사가 나오는 것을 통신사에서부터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했고, 그 자본이 경영하는 신문과 그 신문의 기자들은 딴 신문에서 그것이 보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슨 음료수에 건강에 해로운 화학성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외국에서 밝하져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것을 만드는 국내자본은 그것이 경영하는 통신사와 기자들을 시켜 그 사실이 보도되지 못하게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모 재벌의 대규모 밀수에 대해서 그 자본의 기자는 ‘자본주의에 밀수는 불가피하다’고 써야 했다.
국가권력의 횡포에 대해서도 기자는 어쩌면 파수꾼의 위치에서 망보기꾼으로 바뀌었는지 모른다. 누군가가 과감히 일어나서 ‘아니다’라는 소리를 질러주었으면 좋겠다.
기자가 축재( )한다는 주장은 많은 기자들의 강력한 반박을 받아서 마땅하다. 어느 정도를 ‘축재’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기자는 축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
기자는 가난하다(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적 계층에 대한 소속의식에서는 환상 속에 살고 있지만).
1971년 3월 현재의 기자 봉급 통계를 보면 전국(서울과 지방)에는 신문 37사, 통신 6사가 있다. 여기에 근무하는 각급 각종 기자 26,964명의 봉급을 보면 2만원 이하가 47.7%, 1만원 이하가 3.8%여서 한달에 2만원도 못 받는 ‘기자’가 합쳐서 51.5%로 반을 넘는다. 더욱이 지방의 신문에서는 2만원 이하가 73.5%를 차지한다.(한국기자협회보, 제197호, 1971년 9월 3일). 갑종( ) 근로소득세의 면세점 이하의 ‘극빈자’가 많은 것으로는 어떤 자본의 기업체보다도 심할 것이다.
그러나 이 통계숫자로 진실과 진상을 호도할 수는 없는 일면이 있다.
월급으로 사는 기자는 주로 내근자뿐이다. 보도기관에는 외부에 나가거나 외부의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및 각동 단체, 기업, 기관과 연결을 갖는 기자의 수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안에서 치다꺼리만을 하는 기자의 수가 약 반반으로 맞먹는다. 그리고 앞서의 통계가 뜻하는 것은 내근자들의 경우이며, 외근 기자에게는 이 통계숫자가 설명해주지 않는 일면이 있다.
기자사회에서 ‘촌지( )’라고 불리는 이 소속사의 봉급 외 수입은 기자가 직무상 관계하는 대상의 재정적 규모에 따라 문자 그대로 수천원의 ‘촌지’에서 수십만원의 ‘척지( )’로 가지가지다. 출입처의 기자단은 국민에 진실을 알리기 위한 취재의 편의에서보다 이와같은 과외수입을 ‘징수’하는 압력단체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적으로 매달 엄청난 상납 아닌 ‘횡납금( )’을 거둬들이는 것은 경제계나 재계와 관련된 기자단이다. 1인당 2만원이 횡납되자 ‘기자를 무시하느냐’고 하여 3만원씩으로 낙착되는 것은 비교적 가난한 출입처의 기자단이다. 허가사무와 관련된 이권청탁 한건에 얼마라는 액수는 해당 기자이외에는 영원한 비밀사항이다.
‘촌지’는 나오는 대로 기자실에서 ‘섰다’의 밑천이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척지’는 포커의 밑천이 되고서도 저택, 기업체의 투자, 승용차, 골프 멤버 등의 형태로 ‘확대재생산’된다.

특파원 기사, 천편일률

정부 최고위 지도자들의 외국 예방( )을 수행하는 기회는 얼마나 ‘광고 대행’을 잘하느냐에 따라 촌지의 기회도 되고 척지의 기회도 된다. 그러기에 정부 최고위 지도자들의 외국 예방이나 외국 지도자와의 회담에 관한 ‘어디 어디에서, 무슨 무슨 특파원 기( )’의 기사치고 ‘열광적인 환영’이 아닌 것이 없고, ‘요구한 대로 모두 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대성공’이 아닌 회담이 없다.
그러기에 수행 기자들의 기사는 한 신문만 보면 된다. 두 신문을 돈 주고 살 필요가 없다. 출발하기 전부터 ‘이하동문( )’ 의 기사를 한 사람이 작성하여 해외공관 통신망을 통해 송고하는 방법이 정부 측과 물샐 틈 없이 협의된다. 기자는 경쟁에 생명감을 느끼는 직업이지만 여기에는 ‘아름다운 협조정신’이 십분 발휘된다.
수행기자가 제 나름의 독자적 취재를 하거나 그것이 본사에서 활자화되기 위해서는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권력의 위협을 물리칠 용기는 물론이려니와 동료 기자들이 앉아서도 누리는 ‘혜택’을 땀흘려 뛰어다님으로써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기자는 국가 원수나 정부 지도자들의 외국 방문 기사를 이렇게 쓰는 것이 애국심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방향이 있다.
우리의 지도자가 상대방 국가의 지도자에게서 어떤 대접과 어느 정도의 수준의 환영을 받았는가라는 평가나, 숙소 앞에는 ‘OO고우 홈’의 플래카드와 데모가 있었는지의 여부 같은 것을 사실대로 보도하는 것은 ‘비애국적’이라는 학설이 기자 사회에서는 신봉되고 있다.
외국인 특파원들은 30명이나 월남전쟁에서 취재중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하지만 우리 특팔원은 그럴 필요가 없다. 사이공 호텔의 안락의자에 앉아서도 외국기자에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생생한 전투 묘사와 창의력이 넘쳐 보이는 종군기사를 써보내거나 사진을 찍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외국인 특파원이 피를 흘려가면서 쓴 기사보다 언제나 하루가 늦게 나온다는 것쯤은 문제되지만…….
물론 훌륭한 기자정신을 발휘한 기자도 많다. 그러나 안이와 무력이 기자 풍토의 한 면임도 부인할 수 없다.
실습( )때 실력에서 퇴보하는 지성

기자 풍토의 하나의 특징은 남의 권리쟁취나 민주화, 자유화 운동에는 당사자처럼 열을 내면서도 자체 내부의 권리투쟁이나 민주화나 자유화는 아직 원시적 상태라는 현실이다.
기자가 신문사나 통신사의 봉급에 대해 품는 불만은 최근 심각한 정도로 비등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사에서도 판사들과 같은, 대학교수들과 같은, 또는 병원의 수련의, 심지어는 간호원들과 같은 단결심과 기개를 보인 일은 없다.
4-19직후와 5-16직후 한두 달 동안 기자사회 내부의 숙청론, 정화론이 거론된 일이 있지만 1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자리에 그 사람이 둥지를 틀고 앉아 있기는 마찬가지다.
봉급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닌 까닭에 기자는 횡납액( )의 단위가 높은 취재처로 나가기 위해서 윗사람에 잘 보여야 하고, 윗사람의 심부름은 충실히 집행해야 한다. 기자라는 신분이 그 모든 밑천이기에 아무리 불평과 불만이 있어도 기업주의 애총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해고는 지금도 기업주의 손에 달려 있고, 기자라는 신분을 상실하면 봉급의 몇배, 몇십배 되는 부수입이 송두리째 사라지기에 경영측에 대해서는 어떠한 부당성도 지적하기를 꺼린다.
무보수 기자라는 괴이한 존재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월급을 안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신문사에 돈을 내놓고 기자증을 받거나 출입처를 배당받음으로써 그 몇배의 수입을 올리는 제도이다.
기자사회에서는 ‘사이비 기자’라는 것이 요새 한창 말썽이 되고 있다. 기자의 대외적 이미지를 흐리게 한다는 사이비 기자의 정의가 그와같은 무보수 기자니 ‘대학을 안 나온’ 기자니 하는 식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도 한심한 일이다.
대학을 나온 기자는 기자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라면 현재 서울의 주요 보도기관은 그에 해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자협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본사( ) 기자의 압도적 다수인 77.58%가 학사( )이기 때문이다. 그 대학 졸업자만이 만든다는 중앙지나 통신사의 몰골이과연 어떤 것인가를 한번 기자들은 자문할 필요가 있겠다.
필자의 견해로서는 오히려 식민지적인 가치관, 문제의식, 세계관을 주입하는 것을 소임으로 하는 이 나라의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이보다는, 차라리 공장노동자나 농사꾼이나 지게꾼이 뭣인가를 느끼고 분발해서 기자가 될 수 있는 길이 트여 있었다면 우리의 기자풍토가 오늘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대학지식을 자못 대단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이 사회가 타파해야 할 권위주의가 아닐까 한다. 지식, 기술의 신비주의, 권위주의는 노력하지 않고 지배하려는, 그리고 그에 도전하는 사람에 대해서 자기를 보호하려는 명분에 타락하기 쉽다.
그 많은 출입처나 근무부에서 책을 보는 기자를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권위주의의 탓이 아닐까 한다.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수습 기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실생활 속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꾸준히 공부하고 연구하려는 것이 소원이었다고들 한다. 그러면서도 기자실에 늘어놓여진 것이란 한결같이 여자 나체 사진을 찍은 주간지가 아니면 좀 정도가 높다는 것이라야 월간지 정도이다.
단행본 한권 사지 않고 1년을 보냈다는 기자가 많은 것도 아마 이 사회의 기자풍토의 특징일 것 같다. 10년 기자생활을 하고 나니 수습때의 지식이나 문제의식보다도 퇴보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사이비 기자의 기준을 대학 졸업자 이하에 두자는 것부터가 우습지 않은가.
사이비 기자란 사실을 보고도 기사화하지 못하거나, 기자가 애써 취재해온 기사를 사리( )와 권력 때문에 자의( )로 조작, 요술을 부리거나, 백성의 이익이 뭣인지를 알면서도 강자의 대변자 노릇에 만족하는 각급의 기자 이외에는 없다.

조건반사적 토끼들

끝으로 우리 기자 풍토의 가장 통탄스러운 특정은 그 고질적인 냉전의식이라 하겠다.
최근 우리 국민들은 ‘잠을 깨고 나면 세상이 한바퀴씩 뒤집힌 것을 본다’고 놀라고 불안해하고 있다.
세계의 사조와 정세의 변화를 두고 하는 말들이다. 만약 기자들이 진정 진리를 탐구하고 진실을 추구하며, 민중의 귀와 눈과 입이 되었더라면 이미 20년 전부터 변화해온 국제 정세와 사조에 국민이 이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국민들보다는 기자들이 더 놀라게 되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사회의 기자의 인식론적 기능은 냉전사상과 흑백의 이데올로기적 가치관 때문에 강요된 의식형태의 조건반사적 토끼가 되어버린 감이 있다.
최근 ‘뉴욕 타임즈’ 레스턴이 북경에서 기사를 보내주었다. ‘중공’하면 소련이 괴뢰이고, 인민은 기아선상에서 피골이 상접해 있고, 백성은 금시라도 폭동과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타도하려 하고 있고, 농민은 모두 강제수용소에서 웃음을 잃은 동물이 되며, 종교-예술-문화-는 모조리 파괴되어 야만상태가 되었고, 그리고 침략야욕에 여념이 없고 등 여태까지 이 사회의 기자가 중공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믿어왔을 뿐만 아니라 기사마다 그렇게 써온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레스턴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이와같이 이 사회의 의식수준을 생각하게 된다. 진실로 문제인 것은 지배세력이 말하면 그대로 믿어야 했고, 어떤 사상( )에는 반드시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그 용어를 사용하면 반드시 일정한 고정관념을 머릿속에 형성하게끔 되어버린 기자의 의식구조이겠다. 기자의 의식은 정부와 관료의 의식보다도 뒤져 있다. 혹평하자면 기자는 지배자가 내려 맡긴 의식형태의 노예가 되어 있다.
자기만이 그렇다면 문제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조건반사의 토끼가 되어버린 기자가 그 가치관과 의식구조를 통해서 취재하고 그것을 그런 각도에서 국민에게 전달해온 결과가 최근 우리들 사회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국민이 넋을 잃게 된 것이라면 기자는 모름지기 의식구조를 뜯어고쳐야 하겠다.
기자는 이와같은 비정상을 애써 찾아내어 정상적 형태를 부여해야 할 것이지 그것을 비웃는 풍조마저 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여태까지의 불평, 비민주, 부자유를 평등, 민주주의, 자유로 추구해나가는 사회운동이기에 말이다.
기자가 마련하지 못한 것을 민중이 스스로 쟁취하려 하고 있다.
그럴수록 격동의 역사적 싯점에 처한 기자는 민중에 능동적인 가치관과 사상을 가지고 이제부터라도 민중의 앞장을 서는 정신적 풍토를 구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p472~487

2. 전후의 극동정책
전후의 미국 극동정책은 중공을 주요대상으로 하는 외교목표 변화에 따라 크게 3단계의 전개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그리고 전과정을 통한 정책성격은 중공에 대한 ‘포위와 고립화’로 요약된다.
제 1단계: 중극을 아시아의 지도국으로 인정하고 국공합작과 국민당정부의 육성을 꾀한 단계(1945~49), 재 2단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한국전쟁 이후의 대중공 군사대결정책(1950~69), 제 3단계: 대중공 긴장완화와 장기적으로 관계개선을 모색하려는 정책전환ㅡ닉슨 독트린의 시기(1970~현재).
미국의 국가정책 심의 결정과정에 있어 우리나라가 지니는 중요성과 우선순위의 변화는 전적으로 미국의 대중공정책의 변화과정에 대응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과 한국안보의 관계를 측량하는 척도가 되어준다.
(1) 제1기: 우호적 불간섭(1945~49)
미국은 2차대전 종결 후 전시동맹국인 중국을 전후아시아의 지도국으로 만들려 했다. 장개석 영도하의 국민당정부와 모택동 영도하의 공산당세력과의 사이의 내전을 조정하려 한 마샬 원수의 국공합작 노력은 미국의 전후 아시아 질서를 위한 정책표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일본을 ‘비무장 3류 국가’로 억제하려 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민주당정부가 ‘중국백서(1950)’를 발표하여 중공집권의 원인을 장개석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돌렸을 때 미국정부는 국민당정권보다도 중국본토를 장악한 공산정권과의 관계에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트루먼 정권은 ‘중국 불간섭’ 정책을 결정했고 1950년 1월에는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대만을 제외하고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발표했다.(애치슨 선언)
미국은 장개석 정권의 대만(한국의 경우도 해당되지만 별도 기술)의 방위책임을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트루먼 대통령은 이 아시아 전략을 확인하면서 대만은 중국의 영토라는 얄따, 포츠담 양 선언을 재확인하는 성명마저 발표했다.(1950년 1월 5일). 심지어 국무성은 1949년 12월 23일자 미국 해외공관에 송발한 비밀 동문( )통첩을 통해 ‘대만이 함락될 경우 미국은 이에 불간섭정책을 취할 것’에 대비, 미리 정책 해명의 준비를 시키기까지 했던 것이다.(D.F.Feming, ‘냉전과 그 기원’ 제3부 ‘동아시아의 냉전’, 1945~1955). 이것이 제1단계 시기의 정책이다.

(2) 제2기: 군사적 대결(1950~69)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 중국 불간섭정책을 완전히 뒤엎고 그후 1969년까지 계속되는 대중공 군사대결정책, 한국-대만-태국-필리핀 등 중공 주변국가의 반공군사기지 강화, 일본의 재군비 및 경제대국화 촉진 등 육성보호정책을 통한 대중공 포위고립화정책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한국동란은 공산세력의 팽창위험에 대한 미국의 공포를 자극하였다. 이리하여 미국은 일본을 잠재적인 경제, 군사적 대국으로 정신케 하여 장기적으로 중공과 극동에서의 세력균형을 이룰 수 있는 강력한 요소가 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당시는 아직 중-소 단계가 표면상 ‘한 덩어리’ 국제공산주의로 긴밀한 때였으므로 중-소를 배경으로 한 공산주의세력의 한반도 지배는 전후 일본의 강력한 사회주의세력을 도와 일본의 좌경화를 가져오지 않을까 미국은 우려했다. (…)
애치슨 선언에 표시된 바 한국-대만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미국 아시아전략이 확정된 지 불과 5개월이 못되어 한국전쟁에 미국이 군사개입을 결정한 것은 미국 국내정치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 트루먼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가깝고 애치슨 장관이나 국방성과도 가까웠던 의회인사들이 “만약 공화당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국 상실의 책임과 대공유화노선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그토록 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한국문제에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국강철협회장 어네스트 T. 웨어 ‘미국 해외정세에 관한 정책성명’, 1951년 1월 5일)라고 말한 것은 이를 입증해준다.

(3) 대일정책의 변전
점령 초의 미국의 대일본정책은 일본경제를 ‘일로( )전쟁 직후’수준으로 억제함으로써 아시아에서 일본이 위협적 존재로 재기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제2차대전의 피침( )국가들에게 미국이 지정한 일본의 잔존공업시설 기계류를 현물로 철거, 분배 보상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중국대륙에 공산주의정권이 수립되자 1946년부터 계속된 850개의 일본 공업시설의 철거 반출을 즉시 중지하고(52년 4월 26일), 또 일본의 무기생산금지명령을 완화하면서(52년 3월 8일), 일본의 아시아피침략 국가에 대한 배상을 그들의 경제발전을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일본의 공업 생산품과 일본 용역, 기술을 이들 동남아제국에 제공하는 것으로 함으로써 일본이 공업국으로서 재기하는 기틀을 만들어 주었다. 즉 미국은 일본의 배상내용(총액 10억 1,290만 달러, 대한국분 제외)을 이와같이 기존공업시설의 반출에서 제품-용역의 제공으로 변경함으로써 일본공업의 부활을 도왔다.
일본의 자본재 위주 배상은 공업국 일본과 아시아(한국을 포함) 후진국가의 경제적 종속관계를 구조화하였고, 60년대를 거치는 동안 아시아국가들의 시장화로 일본은 자본주의세계에서 미국 다음가는 국민총생산을 이룩하게 되었다. 40년대 말에 취해진 이와같은 미국의 일본정책 전환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일본을 ‘아시아의 지도국’(사또오 일본수상과 닉슨 미국대통령 회담에서의 용어, 1969년 11월 21일)으로 만들었다. 중공과 맞서는 대항세력으로서 한국, 일본, 국부( )등 극동 3국과 동남아시아의 반공국가들의 정치, 사회, 경제적 안정을 육성, 강화하려는 것이 약 20년간에 걸친 미국정책의 제2단계(1950~69)였다.
-p498~503

7.미-일 안보체제와 그 전략

닉슨-샤또오 성명으로 새로운 실질적 의미를 갖게 된 안보조약을 법적 기초로 하여 구상된 미-일 양국의 극동전략은 1.오끼나와의 일본반환(72년까지) 2.일본-한국-대만의 방위를 위한 그후의 미군의 오끼나와 사용권 확인 3.오끼나와를 포함한 일본본토를 한국을 포함하는 극동안전을 위해 미군이 발진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실질적 권리의 사실상의 보장 4.미국 핵보호하의 일본 재래식 군사력의 증강 5.한국-대만 등에 대한 간접적 군사지원을 위한 일본 역할의 증대 등을 내용으로 하게 되었다. 20년 전 한국동란 발생 직후 국내좌익세력에 대항하는 ‘경찰예비대’로서 창설된 일본 군사력은 20년 동안의 내부지향적인 성격에서 극동전역의 군사적 안보를 담당하려는 외부지향적 성격으로 변했다.
-p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