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 질펀한 축제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답을 얻었다
출처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22067241
한국경제 뉴스, 2009. 02. 21.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문학자 미하일 바흐친(1895~1975)은 '카니발' 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단순히 시끌벅적한 놀이처럼 보이는 카니발에서 문학과 인간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는 유용한 열쇠를 찾아냈다. 그의 '카니발'은 우선적으로 라블레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의 문학적인 특이점을 설명해 주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학이론을 넘어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 말로 사육제라 번역되기도 하는 카니발은 원래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사순절 직전에 행해지던 전 민중적인 제전이었다. 그것은 부활 대축일 이전 40일 동안의 금욕적인 삶을 앞에 두고 마음껏 놀아보자는 취지의 축제였다. 40일 동안이나 고기도 못 먹고 수시로 단식을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에너지를 비축하는 의미에서 실컷 먹고 마시고 춤추는 질펀한 축제를 벌였다. 오늘날 유명한 관광 상품으로 부상한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이나 베네치아 카니발,혹은 뉴올리언스의 마디그라,그리고 러시아의 마슬레니차 축제에는 이런 그리스도교적인 전통이 깔려있다.
바흐친은 카니발을 비롯한 모든 민중적인 축제의 형식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카니발은 해방된 삶이다. 카니발(모든 민중 축제) 시기에는 일상적인 생활 질서가 무너진다. 보통의 삶에 제약을 가하던 모든 금기와 구속과 제재가 일시적으로 제거된다. 사람들은 위계질서라든가 예절이라든가 하는 것은 완전히 무시하고 그저 한데 어울려 자유롭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춤춘다. 연령도 지위도 재산도 그 어떤 사회적인 규범도 사람과 사람 간의 자유로운 접촉을 방해하지 않는다. 리우 카니발에서 사람들이 거대한 가면을 쓰고 거의 벌거숭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해방과 자유분방함의 표출이다.
둘째 카니발은 거꾸로 된 삶이다. 모든 금기가 제거된 카니발 공간에서는 거꾸로 된 논리,뒤집힌 논리,반대로 된 논리가 상식을 제압한다. 왕이 거지가 되고 거지는 왕이 되며 성직자는 모독당하고 광대는 추앙받는다. 익살과 욕지거리와 불경이 경건한 기도를 대신하고 겉과 안,위와 아래,앞과 뒤,우매함과 현명함이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권위는 추락하고 엄숙주의는 조롱당한다. 카니발 퍼레이드에서 참가자들이 종종 옷을 뒤집어 입거나,성별이 뒤바뀐 의상을 걸치거나,모자 대신 양말이나 냄비 같은 것을 머리에 쓰거나 하는 것은 뒤집힌 세상,거꾸로 된 세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다.
그러면 이렇게 뒤집히고 해방된 축제의 형식에서 바흐친은 어떤 의미를 찾아냈을까. 카니발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질서를 뒤집고 권위를 조롱하는 것이 카니발의 의미는 결코 아니다. 바흐친에 의하면 그런 것은 카니발에 대한 "천박한 보헤미아적인 이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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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친은 소란스럽고 무질서한 카니발에서 상생과 공존의 원리를 발견했다. 요컨대 카니발의 거꾸로 된 세상은 극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의 공존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사실 카니발은 시간적으로 연중 가장 심오한 고난의 시기인 사순절과 접경한다. 그러므로 카니발이 보여주는 분방함의 극치에는 곧이어 시작될 사순절의 참회와 극기가 내포되어 있다. 같은 원리에서 카니발의 모든 부정적인 의미는 긍정적인 의미와 경계를 접한다. 카니발은 긍정하기 위해 부정하고,존중하기 위해 조롱하며,올라오기 위해 내려간다. 궁극적으로 카니발 속에서 삶은 죽음을 내보이고 죽음은 또 삶을 내보인다. 그래서 바흐친은 카니발적인 세계관의 핵심을 '교체와 변화,죽음과 갱생의 파토스'라 부른다. 즉 카니발은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부활과 갱생의 축제라는 것이다.
바흐친은 이렇게 이해한 카니발을 인간 의식의 대화적인 관계로 연장시킨다. 그의 유명한 '대화주의'는 카니발 이론에서 출발한다. 대립적인 것들의 공존은 인간의 삶 자체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의 의식도 단독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인간과 부딪히고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의 의식도 끊임없이 다른 의식과의 대화를 요구한다. 사람의 삶과 관련하여 그 어느 것도 일방적인 관계 속에서는 존속하기 어렵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도 그렇고,집단과 집단의 관계도 그렇고,국가와 국가의 관계도 그렇다. 일방적이고 독백적인 관계는 종국에는 자멸로 끝날 수밖에 없다.
바흐친이 카니발에서 찾아낸 것은 결국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에 답하기 위해서는 타인이라고 하는 거울이 필요하다. 인간은 타인 속에 투영된 자기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도 사고도 모두 마찬가지다. 사랑과 증오,선과 악,진실과 거짓 등 이 모든 대립하는 것들은 상호 조명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를 드러낸다. 바흐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모든 인간은 서로를 알아야 하고,서로에 관해 알아야 하고,서로 접촉해야 하고,얼굴을 맞대야 하고,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모든 것은 서로를 대화적으로 비춰주어야 하고 다른 모든 것 속에서 되비쳐져야 한다. " 이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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