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인간관 토막 자료
마르크스의 인간관 자료
● 독일이데올로기』에서
“ 분업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인간이 자연발생적인 사회에 머무르는 한, 다시 말해서 특수이익과 공동이익 사이에 균열이 존재함으로써 활동이 자유의지에 의해서 분배되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분배되는 한, 인간 자신의 행동은 그에 대립하는 낯선 힘으로서,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구속한다는 사실의 최초의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동이 분화되자 각 개인은 하나의 일정한 배타적 영역을 갖게 되고, 이 영역이 그에게 강요되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한 사람의 사냥꾼, 한 사람의 양치기, 한 사람의 어부, 또는 한 사람의 비평가이며, 그가 그의 생계 수단을 잃지 않고자 하는 한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이에 반하여 아무도 배타적인 영역을 갖지 않고 각자가 그가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나 스스로를 도야시킬 수 있는 공산주의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조절하기 때문에, 사냥꾼, 어부, 양치기, 도는 비판가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곧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목축을, 밤에는 비판을 할 수 있게 된다.”
●『자본 3권』-「48장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자유(Freiheit, freedom)의 왕국은 사실상 궁핍과 외적 합목적성에 의하여 지시되는 노동이 없어지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따라서 그것은 사물의 본성으로 보아 본래의 물질적 생산분야의 맞은 편에 있다. 미개인이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자기의 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하여 자연과 투쟁하지 않을 수 없듯이, 문명인도 그러한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떠한 사회형태 아래서도, 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생산양식 아래서도 그러한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발전함에 따라 이 자연적 필연(필요, Notwendigkeit, necessity)의 왕국이 확대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욕구(Bedürfnis)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욕구를 충족시키는 생산력도 확대된다. 이 왕국에서의 자유는 오직 사회화된 인간, 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자기들의 이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이 물질대사가 맹목적인 힘으로서 그들을 지배하지 않도록 자기들의 공동 통제 밑에 두며 가장 적게 힘을 들이고 그들의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가장 적합한 조건 아래서 그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데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역시 필연의 왕국이다. 필연의 왕국 맞은 편에서, 자체 목적으로서의 의의를 갖는 인간의 힘의 발전이 시작되고 자유의 진정한 왕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은 이 필연의 왕국을 토대로 해서만 꽃피울 수 있다. 노동일을 줄이는 것이 기본 조건이다.”
● 정치경제학비판 서문
“인간은 자기 삶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에, 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바로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한 사회의 실제적 토대를 이루며, 그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다시 여기에 조응하는 일정한 사회적 의식의 형태들이 출현한다...그런데 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일정한 생산관계 내에서 전개되다가도 그것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도달하면 기존의 생산관계들, 또는 그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들과 모순을 빚게 된다. 그러면 이 생산관계들은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질곡으로 변한다. 바로 이 때가 사회혁명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함께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느리게 또는 급속하게 변혁된다. 이러한 변혁을 고찰하는 데 있어, 자연과학적으로 엄밀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경제적 생산조건들의 물질적 변혁과 법, 정치, 종교, 예술, 철학의 제형태, 즉 이데올로기의 제형태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인간이 갈등을 의식하고 그 갈등과 싸우는 것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의 제형태를 통해서 이다...한 사회구성체는 그의 모든 생산력이 완전히 전개되기 전에는, 즉 생산력이 아직 발전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또한 더 상위의 새로운 생산관계들은 이전 사회의 태내에서 자신의 물질적 존재조건들이 성숙되기 전에는 결코 자리잡지 못한다...부르조아적 생산관계들은 적대적 형식을 취하는 사회적 생산과정 중 최후의 것이다. 이 때 적대적이라 함은 개인적인 적대라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들의 사회생활 조건에서 발생하는 적대성을 뜻한다. 한편 부르조아 사회의 태내에서 발전하고 있는 생산력은 이 적대성을 해결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해 낸다. 그러므로 이 사회구성체를 끝으로 인류사회의 전사(前史)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MEW. Bd. 13, S. 8-9.
● 「경제학․ 철학 수고」(1844) 中에서
[소외된 노동]
1. <노동자는 부를 보다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그의 생산이 힘과 범위에 있어 더욱 증대되면 될수록, 더욱더 가난해진다. 노동자는 상품들을 보다 많이 창조하면 창조할수록 더욱더 값싼 상품으로 된다. 사물 세계의 가치 증식에 인간 세계의 가치 절하가 정비례한다. 노동은 단지 상품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자기 자신과 노동자를 하나의 상품으로서, 게다가 그것이 일반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것에 비례하여 생산한다.>
이 사실은 다음의 것을 표현할 따름이다 : 노동이 생산하는 대상, 즉 노동의 생산물이 하나의 낯선 존재로서, 생산자로부터 하나의 독립적인 힘으로서 노동과 대립한다는 것, 노동의 생산물은 하나의 대상 속에 고정된, 사물화된 노동인 바, 이는 노동의 대상화이다. 노동의 이러한 현실화는 국민 경제학적 상태에서는 노동자의 탈현실화로서,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서, 자기화는 소외로서, 외화로서 나타난다...
<노동자가 더 힘을 들여 노동하면 할수록, 그가 자신에게 대립되도록 창조한 낯선 대상적 세계는 더욱 더 강력해지며, 그 자신, 즉 그의 내적 세계는 더욱 더 가난해지며, 그에게 그자신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은 더욱 더 적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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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더 많이 창조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더 적게 소비해야 한다는 것, 그가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더 무가치해지고 더욱 더 값어치 없게 된다는 것, 그의 생산물이 더 정형화되면 될수록 노동자는 더욱 더 기형화된다는 것, 그의 대상이 더 문명화 될 수록 그는 더욱 더 야만화 된다는 것, 노동이 더 강력해질 수록 노동자는 더욱 더 무력해진다는 것, 노동이 더 똑똑해질수록 노동자는 더욱 더 어리석어지고 자연의 노예로 된다는 것으로.>
2. 우리는 지금까지 노동자의 소외, 외화를 하나의 측면, 즉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만 고찰해왔다. 그러나 소외는 생산의 결과에서 뿐만 아니라, 생산의 행위에서도, 즉 생산활동 자체 내부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며, 즉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노동자는 그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 그의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느끼며, 노동 속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떠나 있다고 느낀다.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는 편안하지 못하다. 그의 노동은 그러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강제노동이다. 그 노동은 그러므로 어떤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그의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의 노동의 낯설음은, 어떠한 육체적 혹은 기타의 강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노동이 마치 페스트처럼 기피된다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외적 노동, 즉 그 속에서 인간이 외화되는 노동은 자기 희생의 노동, 고행의 노동이다. 끝으로 노동자에 대한 노동의 외적 성격은 노동이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의 것이라는 것, 노동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노동자가 노동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종교에서 인간의 환상, 인간의 두뇌, 인간의 심장의 자기 활동이 개인으로부터 독립되어, 즉 신적인 혹은 악마적인 낯선 활동으로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노동자의 활동은 그의 자기 활동이 아니다. 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 속하며, 그 자신의 상실이다.>
그러므로 인간(노동자)은 그의 동물적인 기능들, 즉 먹는 일, 마시는 일, 생식하는 일등에서만, 기껏해야 그의 거주와 의복 등등에서만 가까스로 자신이 자유롭게 활동한다고 느끼고, 그의 인간적인 기능들에서는 기껏해야 동물로서의 자신을 느낀다는 결론이 나온다.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된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생식하는 일 등등은 물론 인간적인 기능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인간적 활동의 여타 영역으로부터 분리하여 최종적이고도 유일한 궁극 목표로 만들어 버리는 추상 속에서는, 그러한 일들은 동물적인 것이다...
3.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두가지 규정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의 제 3의 규정을 이끌어 내야 한다...
인간에게서 1)자연을 소외시키고, 2)그 자신을, 즉 그의 고유한 능동적 기능, 그의 생활 활동을 소외시킴으로서,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유를 소외시킨다 ; 소외된 노동은 인간의 유적 생활을 개인적 생활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첫째로 소외된 노동은 유적 생활과 개인적 생활을 소외시키고, 둘째로 추상 속에 있는 후자를, 마찬가지로 추상된, 소외된 형식 속에 있는 전자의 목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과 직접적으로 하나이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활 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지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은 의식적 생활 활동을 가진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그것에 융합되는 규정성이란 없다. 의식적 생활 활동은 인간을 동물적 생활 활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구별짓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유적 존재인 것이다. 혹은 인간이 바로 유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의식적 존재이며,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생활이 그에게 있어 대상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인 것이다.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전도 시켜서 급기야 인간은 자신의 생활 활동, 자신의 본질을 단순히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이는 바로 인간이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4.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신의 생활 활동, 자신의 유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의 하나의 직접적 귀결은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대립할 때에는, 그는 다른 인간과 대립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있어 유효한 것은 다른 인간, 다른 인간의 노동 및 그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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