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단편전집

Posted by 히키신
2017. 3. 19. 18:36 글쓰기와 관련하여

카프카 전집 1 - 변신[단편전집], 이주동 옮김, 솔출판사, 1997

 

*<변신>, <어느 투쟁의 기록>, <프로메테우스>, <굴>, <법 앞에서>,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어느 단식 광대>, <돌연한 출발>

*정리해둔 자료가 소실되었다. 후에 책을 구입하여 다시 정독 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카프카의 단편선을 보면 그가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였는지 실감하게 된다. 가령 '나는 어느 지역의 다리이다' 라든지 화자를 원숭이나 개 등의 동물로 하는 류의 다양한 활유(喩)가 인상적이다. 그의 작품의 난해성은 다양한 수사 기법을 활용한 측면도 일조한 점이 분명 있겠으나, 그보다는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에 '모순(paradox)'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프카 하면 떠오르는 주된 이미지로 방황, 미로 속에 갇힘, 모순 등이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의 글 곳곳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한 페이지가 채 안되거나 1~2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의 단편이 상당하다. 짧은 글이지만, 그의 사상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글들이다.

 

어느 투쟁의 기록

(4) 뚱보와 기도자와의 계속되는 대화

 - ...인간이란 황혼 속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실제 모습이 아닐까. ...

 당신은 삶의 괴로움을 아주 이상적으로 견디어내는군요.

 

시골의 결혼 준비

-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이 한 마리의 커다란 딱정벌레나 하늘가재 아니면 쌍무늬바구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런 착상을 발전시켜 쓴 글이 그 유명한 <변신>일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 선생

- "당신은 자발적으로 그 보람도 없는 일을 용인했고 이제는 역시 자발적으로 물러서고 있군요. 모든 것이 정말 옳아요!"

 

마당문 두드리는 소리

- 내가 감옥 속의 공기와는 다른 공기를 여전히 맛볼 수 있을까? 그것이 큰 문제이다. 아니면 내가 아직 석방될 전망이 있는 것인지. 그것이 오히려 큰 문제일지 모른다.

 

이웃

- 나는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반복된 '불평하지 않는다'가 묘한 울림을 준다.)

 

튀기

- 나는 그 작은 짐승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모든 이웃집 아이들은 내 주위에 빙 둘러선다.

 그러면 인간으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정말 멋진 질문들이 나온다. 왜 그런 짐승밖에 없는지. 왜 하필이면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있기 이전에도 그와 같은 동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이 외로워하는지. 그것은 왜 새끼들이 없는지.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지 등등.

 나는 대답하려 애쓰지 않는다. 나는 별달리 생각하지 않고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만족한다.

 (이 대목은 철학자 박동환의 <안티호모에렉투스> 속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연상케 한다. 박동환은 자신의 논문 <X의 존재론>에서 카프카를 여러번 인용하기도 하였다.)

 

**- 그것은 양이면서 고양이라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아 개이고 싶어한다ㅡ한 번은 내가,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듯이, 사무 및 그것과 연관된 모든 것에 빠져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고 만사를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두고 싶기만한 그런 기분으로 집에 와서 그 동물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흔들의자에 누워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내려다보았더니 그의 수북한 수염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ㅡ그게 나의 눈물이었을까, 그의 눈물이었을까? 

 

- 어쩌면 이 동물에게는 푸줏간 주인의 칼이 구원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구원을 유품인 그에게 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숨이 저절로 다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제아무리 이따금씩 분별 있는 인간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듯하더라도 말이다.

 

일상의 혼란

- 일상적인 사건 하나: 그것을 견디어내는 일이 일상적인 혼란을 초래하다.

(이 단편은 위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사이렌의 침묵

- 미흡한, 아니 유치하기까지 한 수단들도 구원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

(이 단편 역시 위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카프카의 글은 첫 문장이 매우 강렬하면서도 독자를 몰입시키는 힘이 있다. 또한 그의 글은, 위대한 작가들의 글들이 으레 그렇듯이, 상당히 깊이 있는 고뇌 속에 탄생한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다.) 

 

**프로메테우스

- 프로메테우스에 관해서 네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첫번째 전설에 따르면 그는 신의 비밀을 인간에게 누설하였기 때문에 코카서스 산에 쇠사슬로 단단히 묶였고 신이 독수리를 보내어 자꾸자꾸 자라는 그의 간을 쪼아먹게 하였다고 한다.

 두번째 전설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는 쪼아대는 부리가 주는 고통으로 자신을 점점 바위 속 깊이 밀어 넣어, 마침내는 바위와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세번째 전설에 의하면, 수천 년이 지나는 사이에 그의 배반은 잊혔고, 신도 잊었고, 독수리도, 그 자신도 잊었다고 한다.

 네번째 전설에 의하면, 한도 끝도 없이 되어버린 것에 사람들이 지쳤다고 한다. 신이 지치고, 독수리가 지치고, 상처도 지쳐 아물었다고 한다.

 남은 것은 수수께끼 같은 바위산이었다ㅡ전설은 그 수수께끼를 설명하려고 한다. 전설이란 진실의 바탕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다시금 수수께끼 가운데서 끝나야 한다. (전문)

 

밤에

- 그런데 너는 깨어 있다. 너는 파수꾼의 하나다. 너는 네 곁 섶나무 더미에서 꺼낸 타는 장작을 흔들어 바로 옆사람을 찾는다. 너는 왜 깨어 있는가?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한 사람은 여기 있어야만 한다.

 

시험

- "왜 도망치려 하는 거야? 이리 와서 앉게. 그리고 뭐 좀 마시지! 내가 한잔 사겠네!"

 그래서 나는 앉았다. 그는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나는 그 질문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너는 지금 후회하고 있겠지. 나를 초대한 것을 말야. 그렇다면 나는 가겠네." 그리고 나는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탁자 너머로 손을 뻗쳐서 나를 주저앉혔다.

 "그냥 있게나"라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시험일 뿐일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사람이 시험에 합격한 것이라네."

 

*작은 우화

- "아아." 하고 쥐가 말했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만 해도 세상이 하도 넓어서 겁이 났었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마침내 좌우로 멀리 벽이 보여 행복했었지. 그러나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마주 달려오는지 어느새 나는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모퉁이엔 내가 달려들어갈 덫이 놓여 있어." ㅡ "넌 오직 달리는 방향만 바꾸면 되는 거야"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 (전문) 

 

귀향

- 문 앞에서 오랫동안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점점 더 낯설어지는 법이다. 지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에게 무엇인가를 묻기라도 한다면 어떠할 것인가. 그렇다면 나 역시도 자신의 비밀을 간직하려는 사람과 같지 않을까.

 

돌연한 출발

-"주인나리, 말을 타고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하고 나는 말했다. "다만 여기를 떠나는 거야. 다만 여기를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나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네."

 "그러시다면 나리께서는 목적지를 아신단 말씀인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는가. '여기에서 떠나는 것.' 그것이 나의 목적지일세."

 "나리께서는 어떤 예비 양식도 갖고 있지 않으신데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따위 것은 필요 없다네." 내가 말했다. "여행이 워낙 긴 터라 도중에 무얼 얻지 못한다면, 나는 필경 굶어 죽고 말 것이네. 예비 양식도 날 구할 수는 없을 걸세. 실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 여행이야말로 정말 엄청난 여행이라는 걸세."

 (죽음을 불사한 이의 여정에는 예비 양식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짐을 가벼이 하는 편이 그에게는 보다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 개의 연구

- 내 생활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근본에 있어서 달라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 단편의 첫 문장이다.)

- 내가 이상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정말이지 결코 타락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잘 생각해보면ㅡ나에게는 생각할 만한 여유가 있고, 생각할 만한 기분이 들며, 또 생각할 능력도 있다ㅡ개란 희한한 족속이다.

(이 단편의 화자는 '개' 이며, 인간을 바라보며 조소하기도 하지만, 끝까지 읽어보면 알레고리(諭)를 활용하여 풍자한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카프카는 이러한 류의 단편을 여럿 서술하였다.)

*- 우리의 법과 제도들, 우리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몇 가지, 또는 내가 모조리 잊어버린 수많은 것들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복, 즉 따뜻한 공동 생활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그런데 내가 완전히 빠져 있는 일들이 있다. 어째서 나는 다른 개들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나의 종족들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간혹 조화를 깨뜨리는 일이 있어도, 그저 어떤 계산을 하다가 생기는 사소한 잘못 정도로 간과해버린다. 나의 마음은 늘 우리를 서로 뭉치게 하는 것으로 향해 있다. 그러나 우리 종족의 테두리로부터 우리를 잡아 끌려는 것(그것은 언제나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닥쳐오긴 하지만)에 대해서는 등을 돌린다.

-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오히려 가장 우스꽝스러운 천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뒷다리로 똑바로 서서 간다. 어유 저 꼬락서니라니! 그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그 알몸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랑거리인 것이다.

- 어린애가 하는 일은 일단 의심을 받지만 나중에는 모든 것이 인정되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어린시절의 성질을 버리지 못하고 늙은 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시절에 그 사건을ㅡ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까지 평가하고 있지 않지만ㅡ나는 언성을 높여가며 지껄여대고, 사건이 지닌 요소를 분석하며, 내가 속하는 사회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가까이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사건 규모를 측정하는 노력을 계속했었다. 나는 번거로운 일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으며, 지금도 역시 계속하고 있다. 조용하고 평범하며 행복한 생활이 단 한 번만이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끊임없이 탐구를 계속하고 해결하려고 힘을 기울였다.

- ***몇 해를 두고 언제나 맛볼 수 있는 행복에 가득 찬 청춘은 나에겐 불과 몇 달밖엔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좋다. 세상엔 유년 시절보다도 훨씬 소중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고달픈 생활에 단련되어 노경에 이른 나에게는, 정말 어린애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린애 이상으로 어린애다운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행복에 견디어낼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 내가 내 자신 속에 묻혀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와 전혀 다름이 없고, *나는 스스로 던지는 질문에 저항하며 불안에 몸을 떨고 있다.

- **"내가 자연사할 때까지 반드시 견디어낼 것이다. 불안에 가득 찬 질문에 대해서는 노년기에 느끼는 마음의 평화가 더욱 좋은 대답이 될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침묵을 지키고, 또 침묵에 싸이면서, 어쨌든 평화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려고 한다. 나는 확고한 태도로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 놀랍도록 강한 심장, 때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쇠약해지는 법이 없는 폐ㅡ이런 것은 어떤 악의에서 개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모든 질문에 대하여, 아니 우리 자신의 질문에도 저항감을 느낀다. 침묵의 보루란 바로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 물론 진리가 드러날 리는 없을 것이지만ㅡ결코 그 상태엔 이르는 법이 없을 것이다ㅡ그러나 허위에서 비롯된 심한 혼란과 같은 것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생활에서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는 현상 모두에는, 특히 가장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는 것에는 정당한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 물론 나는 그것이 철저하게 입증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ㅡ철저하게라는 말은 얼마나 엄청나게 들리는가. 그러나 저 견딜 수 없는 질문에서 나를 방어하려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 ...불가능한 것을 참아낸다는 것은 좋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이상의 요구를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두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 ...그러므로 이렇게 결론내리게 된다ㅡ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이 있으므로 우리의 머리로는 잘 해결될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일단 발생한 개의 종류는ㅡ그것이 어떠한 변종이라 할지라도ㅡ결코 저절로 소멸되는 일이 없다. 적어도 간단히 절멸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떤 종류이건 교묘히 자기 방위를 하기 때문이다.

- ...이것은 결코 신기한 일이 아니다. 신기한 것은 내 존재뿐이다.

- ***일반적으로 말해서 질문은 개들 족속의 특성의 하나이다. 모두들 혼란스레 질문을 곧잘 한다. 그렇게 해서 올바른 질문을 말살하여버릴 작정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안 된다. 젊은 세대들 가운데 질문을 하는 이 중에는 나와 같은 동료가 없다. 그리고 지금 나도 그 일원인 늙은이ㅡ이 침묵하는 축들 중에도 역시 없다. 그런데 질문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나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 우리는 토지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바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고독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사리를 곧잘 판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반 수준에 있는 개가 그다지 나쁘다고는 볼 수 없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큰 재난에서 몸을 지키자면 상당히 머리를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학문은 규칙을 세운다. 그러나 이 규칙은 단지 그 윤곽만 이해하고자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 규칙을 이해한 연후에야 비로소 이를 토지 문제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새로운 문제가 시간마다 일어난다. 새 토지는 한 조각마다 각기 특수한 문제를 갖고 있다. 자기는 얼마 동안 조용히 숨어 살 수 있으며 자기 생활은 흐르는 물과 같이 사라진다고 단언할 수 있는 자는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욕망이 날이 갈수록 현저히 줄어가는 나의 경우도 그렇다. 이렇듯 끝없는 모든 노력은 무슨 목적을 갖고 있는 걸까? 그것은 오직 내 몸을 더욱더 침묵 속에 묻어두기 위해서이며, 앞으로도 그리고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더 이상 거기에서 끄집어내어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내가 대학 내의 아카데믹한 연구에 흥미를 잃은 이유도 이와 유사하다.) 

 세월에 따른 개들의 일반적인 진보는 곧 학문의 발달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흔히 칭찬의 대상이 되어왔댜. 학문은 분명히 발달한다. 그리고 그 발달의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진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칭찬받을 만한 것이 있단 말인가? 누구나 해가 갈수록 늙어가고, 더욱 빨리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당연한 일을 훌륭하다고 칭찬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바람직한 과정이 아니므로 칭찬할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기에서 쇠퇴만을 볼 뿐이다. 그렇다고 옛 세대가 본질적으로 낫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현재보다는 젊었었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엄청난 감정이다. ...

 나는 우리 세대의 망설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수천 번이나 저녁마다 꿈을 꾸고도 잊어버린 상태이다. 다른 이유라면 모르지만, 이 수천번째의 망각 때문에 우리에게 화를 내는 자가 있을까?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밖에는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죄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우리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남의 손에 의하여 이미 어두은 그늘이 깃들이어 있는 세계에서 침묵을 지키면서 죽음을 향하여 서두르는 것이 허용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복이 있을지어다'라고.

- 그들은 모두가 자기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비록 가망 없는 연구가 항상 그렇듯이, 나름의 성과가 없고 침묵을 지키거나 혹은 교활하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 나처럼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하면서도, '밖으로 나가는 자는 아무도 없으며, 모든 혼잡스러움이란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오성이 나에게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 "이것이 굶주림이라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이렇게 나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굶주림과 나와는 언제든지 별개의 것이라, 마치 귀찮게 구애하는 자를 뿌리치는 것처럼 굶주림을 뿌리칠 수가 있다. 이것은 물론 관념적으로 한 말이며, 실은 굶주림과 나는 하나로 되어 있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존재이다.

 "이것이 굶주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말할 때, 진정 지껄이고 있는 것은 굶주림이며, 놈은 나를 이렇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정말 기분 나쁜 시절이었다! 그 당시 일을 생각하면 몸에 전율이 온다. 그것은 당시에 실컷 맛본 고통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만 해도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굶주림만이 나의 마지막 제일 강한 연구 방법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무엇인가 성취하려면 다시 한 번 그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길은 굶주림을 뚫고 지나간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최고의 행위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행위란 우리의 경우에 자유 의지에 의해 단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할 때마다ㅡ당시의 일이라면 나는 평생이 걸려도 기꺼이 더듬어보려고 한다ㅡ나는 마땅히 앞으로 닥쳐올 시대의 일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다. 이런 시도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거의 한평생을 소비해야 할 것 같다.

- 이 세계에는 허위의 주민인 나를 포함해서 그로부터 진실을 배울 수 있는 개는 하나도 없다. 아마도 진리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또한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버림받지는 않았다. 그렇다. 분명히 남에게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거부한 나 자신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뿐이고 그리고 그 때문에 죽는 것이다.

- "오늘은 사냥을 그만두지 않겠나?" 하고 나는 부탁하였다.

 "안 돼. 난 사냥을 해야만 해." 그가 말했다.

 "내가 물러나야 하겠군. 네가 사냥을 해야 할 테니까. 꼭 해야만 한다니. 넌 왜 꼭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니?" 내가 말했다.

 "그런 건 나도 몰라. 굳이 알 것도 없지. 그거야 자명하고도 당연한 일이지."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네가 나를 몰아내는 것을 미안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넌 그런 짓을 하고 있잖아"라고 내가 말했다.

 "그건 그래." 그가 말했다.

 "그건 그렇다고." 나는 화가 나서 상대방의 말을 되내었다. "그래서는 대답이 되지 않아. 사냥을 포기하는 것과 나를 쫓아내는 것을 포기하는 것 중에서 어느것이 너에게 쉬운 일이지?"

 "사냥을 포기하는 일이지." 그는 주저하지 않고 말하였다.

 "그럼 이야기가 모순되지 않니?" 내가 말했다.

 "무엇이 모순이야? 예쁘장하고 몸집이 작은 네가 나한테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정말 모르고 있다는 거니? 뻔한 일을 모르고 있다는 거야?" 그가 말했다.

 나는 이제 입을 다물어버렸다. 알 만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새 생명이, 몸서리쳐지는 생명이 내 온몸을 스쳐 지나간다. 나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생각되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징후들에게서 이 개가 가슴속 깊이로부터 하나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음악에 관한 학문은 만약 내 지식이 확실한 것이라면, 영양에 관한 학문보다 더욱 광범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기초가 훨씬 튼튼하게 보였다. 그것은 음악의 영역이 영양의 영역보다 객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탐구될 수 있다는 사실과, 전자는 단지 관찰과 체계화가 보다 큰 목적인데, 그에 반하여 후자는 실제로 유용한 결론이 목적인 데서 설명될 수 있다. 음악 이론에 대한 경외심은 영양학에 대한 경우보다 훨씬 크지만, 전자가 후자만큼 민중 속에 침투할 수 없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실제로 유용한 결론을 얻기 위한 연구, 특히 '몸'에 관한 연구는 실로 어려운 것임을 몸소 절감한다.)

 

부부

- 오늘날의 불안정한 관계에서는 종종 아무것도 아닌 일이, 어떤 분위가 결정을 내릴 때가 있다. 그러다가 또다시 아무것도 아닌 일이, 한마디 말이 전체를 해결해준다.

 

*포기하라!

- 나는 그에게 달려가 숨가쁘게 길을 물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서 길을 알려고 하는가요?"

 "네"라고 나는 말했다. "나 스스로는 길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요."

 "포기하라, 포기해!" 라고 말하면서 그는 거만하게 몸을 돌렸다. 마치 혼자 웃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이 단편은 <법 앞에서> 와 메세지의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법 앞에서>에서는 한 시골 사람이 문지기 앞에서 법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거절하였고, 시골 사람은 법이란 누구에게나 언제고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애를 쓴다. 그렇게 수 년이 흐르고 시골 사람은 지쳐 쓰러져 죽어 가면서, 문지기에게 도대체 지난 수 년 동안 나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요구한 이가 없었던 이유를 묻는다. 그에 문지기가 답한다. "이곳에서는 너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 없어. 왜냐하면 이 입구는 단지 너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나는 이제 가서 그 문을 닫아야겠네.") 

 

비유에 대하여

- 만약 현자가 '저쪽으로 가라'라고 말한다면, 그는 우리가 저편 다른 쪽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ㅡ그 길의 결과가 가치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ㅡ그 어떤 전설적인 저편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고, 그것조차도 더 이상 자세하게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우리에게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이러한 모든 비유들은 원래 파악할 수 없는 것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죽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은 다른 것들이다.

 그러자 어떤 한 사람이 말했다.

 "너희들은 왜 거부하는가? 만약 너희들이 비유를 따른다면 너희들 자신이 비유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일상의 노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그 말 역시 비유라는 것을 내기해도 좋소."

 첫번째 사람이 말했다.

 "당신이 이겼소."

 두번째 사람이 말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비유 속에서뿐이오."

 첫번째 사람이 말했다.

 "아니오, 현실 속에선 그렇소만 비유 속에서는 진 것이오."

 (이 단편은 투철한 논리로 무장한 정신으로는 현실 속에서는 인정받을 지 모르나, 현자가 말하는 전설적인 저편[불교에서 말하는 피안(彼岸)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추측된다], 즉 비유 속에서는 통하지 않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