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스 루이스 보르헤스 - 만리장성과 책들
호이스 루이스 보르헤스 – 만리장성과 책들, 정경원 옮김, 열린책들, 2008
만리장성과 책들
p16
...모든 형상은 자기 형상 아넹 본질을 지니고 있을 뿐 결코 추정적인 <의미>속에 본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베데데토 크로체의 이론과 합치된다.
(*Benedetto Croce[1866~1952]. 이탈리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역사가. <정신의 철학>, <역사의 이론과 역사>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모든 현실에 내제하는 정신에는 예술과 논리라는 이론적 활동과, 경제와 윤리라는 실천적 활동이 있다고 보고, 이들 네 가지 활동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1877년 페이터는 모든 예술은 형식 그 자체에 다름 아닌 음악에의 표방을 지향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음악, 행복한 상태, 신화, 숨 가쁜 시간의 면면들, 때때로 만나게 되는 황혼과 어떤 특정한 장소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고, 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이미 말해 버렸기도 하고, 또는 지금 말하고 있기도 하다. 아직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절박하게 뭔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학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Walter Horatio Pater[1839~1894]. 영국의 비평가. 1873년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타첼리 등 르네상스 화가를 중심으로 한 평론집 <르네상스사[史]의 연구>를 발표하면서 19세기 말 데카당스적 문예 사조의 선구자가 되었다.
파스칼의 구
p17
우주의 역사는 어쩌면 몇 가지 은유들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p20~22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Gargantua et Pantagruel> 마지막 권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원주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지적 구체>를 언급하고 있다. 중세적 사고로 보자면 이 말의 의미는 아주 명백하다. 즉 신은 모든 피조물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되, 그 피조물 가운데 어느 것으로도 신을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터인데> 라고 솔로몬은 말했다.(‘열왕기상’8장 27절). 구체라는 기하하적 은유는 결국 이 구절에 대한 주석으로 보인다.
...
아리스토텔레스->프롤레마이오스->코페르니쿠스
천동설 -----------------------지동설
하늘 덮개의 무효화는 어떤 사람, 즉 조르다노 브루노같은 사람에게는 일종의 해방이었다. (*Giordano Bruno[1548~1600]. 이탈리아 철학자. 신학적으로는 인격신, 성모 마리아 예배, 삼위일체 등을 부정하고, 천체 이론에서는 태양 중심설을 제기함으로써 당시 절대적 권위를 누리던 가톨릭에 정면 도전하여 화형당한다.)
그는 <성회 수요일 만찬Cena de las cenizas>에서, 세계는 무한한 원인으로 인한 무한한 결과이며, 신성은 가까이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 우리 안에 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우리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들을 찾아낸 뒤, 한 유명한 저서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우주 자체가 완전한 중심이라고, 즉 우주의 중심이 도처에 있으며, 원주는 그 어느 곳에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원인, 원리 그리고 일자에 관하여De la causa, principio e uno>, 제5권)
p23
만일 미래와 과거가 무한한 것이라면, 시간 속에서 실제로 <어느 한순간>은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존재가 무한한 것과 무한소(無限小)로부터 등거리 상에 있다면 공간 속에서 <어떤 곳>은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어떤 날, 어느 장소에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p24
로버트 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도 아담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으며, 아테네도 에덴동산의 흔적에 다름 아니다>라는 유명한 글귀를 남겼다. (*Robert South[1634~1716]. 미국의 설교자. 영국의 청교도 운동이 배출한 훌륭한 선교자로, 교회 생활과 표준을 성서의 순수성으로 회귀하는 데서 찾고자 했다. 특히 지나치게 정밀하거나 변덕스러운 설교 형태를 경시했다.
이 침체된 17세기에, 루크레티우스에게 영감을 주어 6운각시를 탄생시킨 절대 공간, 그리고 브루노에게 해방 그 자체였던 절대 공간은 파스칼에 있어서는 미로이자 심연이었다. (*Titus Lucretius Carus[B.C. 94~B.C. 55]. 로마의 시인이자 유물론 철학자. 철학서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De rerum natura>를 썼다.) 파스칼은 세상을 증오했다. 그는 신을 숭배하고자 했지만, 그에게 있어 신은 증오스러운 세상보다도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는 하늘이 침묵하고 있음을 개탄했고, 우리 인간의 삶을 무인도에 남겨진 조난자들의 삶에 비했다. 그는 끊임없이 물리적 세계의 중압감을 느꼈으며, 현기증과 두려움과 고독을 느꼈기에, 이 모든 것들을 다음과 같은 한마디에 담았다. <자연은 하나의 무한 구체이다. 중심이 도처에 있으며 원주는 그 어느 곳에도 없는 그런 무한 구체.> 그런데 브륀슈비크판에 이렇게 기록된 데 비해, 초고에서 삭제되거나 수정된 부분까지 원형으로 재생해 낸 투르네 비평판(1941년 파리에서 간행)을 보면 파스칼이 첫 구절을 <가공할effroyable>이라는 형용사로 시작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가공할 만한 구체, 중심이 도처에 있으며 원주는 그 어느 곳에도 없는 그런 가공할 구체.>
우주의 역사는 어쩌면 몇 가지 은유들에 대한 다양한 음조들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콜리지의 꽃
(*Samuel Taylor Coleridge[1772~1834]. 영국의 시인, 평론가, 윌리엄 워즈워스와 1798년 공저한 <서정 가요집Lyrical Ballads>으로 영국 낭만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영어로 쓰인 최초의 초현실주의 시라고 일컬어지는 <쿠빌라이 칸Kubla Khan>을 비롯하여 다수의 시 작품을 남겼으며 셰익스피어론을 비롯한 많은 평론으로 평론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p26~28
1938년 경, 폴 발레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문학의 역사는 작가들의 역사나, 작가의 생애나 작품의 전개 과정 속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의 생산자 혹은 소비자로서의 <성령(聖靈)>의 역사이다. 유일무이한 그 단 하나의 작가를 논하지 않고는 문학의 역사는 결코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성령에 대하여 이런 식의 견해가 피력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1844년에도 콩코드 마을의 한 작가가 이런 언급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책들은 오직 한 작가가 집필한 것 같다. 그 모든 책들의 중심에 일종의 통일성이 존재하는 것을 볼 때, 모든 책들이 진지한 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에머슨, <에세이집Essays>, 제2권, 8장)
(*Ralph Waldo Emerson[1803~1882]. 미국 사상사 겸 시인. 에머슨, 소로, 올커트 등과 함께 콩코드 그룹[1830~1850년대 미국사상계를 휩쓸던 초월주의자 그룹]을 이끌었다.)
또, 그로부터 20년 전에도 셸리가 <과거에 쓰였고, 현재 쓰이고 있고, 앞으로 쓰이게 될 모든 시들은 결국 온 세상 모든 시인들이 추앙해 마지않는 단 한편의 무한 시에서 파생된 일화들이거나 파편들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시의 옹호A Defence of Poetry>, 1821).
..제일 먼저 볼 작품은 콜리지가 쓴 글이다. .. 그는 분명 이렇게 쓰고 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에덴동산에 갔다가 그곳에 갔었다는 증거로 꽃을 한 송이 받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보니 그 꽃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그렇다면?>
독자 여러분은 작가의 이런 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완벽한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상상을 또 다른 행복한 상상을 도출해 내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콜리지의 상상 속에서 이미 궁극적 도달점terminus ad quem의 반영인 통일성과 단일성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모든 것들에서도 그렇듯이 문학의 흐름 속에서도 모든 행위는 무한 결과를 낳는 무한 원인과 원천의 집대성이기 때문이다. 콜리지 착상의 기저에는 수 세대를 거쳐 연인들은 징표로써 꽃을 받고자 했다는 보편적이고 오랜 착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과 J.W.던
p44~45
파울 도이센(Paul Deussen[1845~1919].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철학적 해석 및 유럽 사상과 인도 사상의 종합을 시도하였다.)에 따르면, 수많은 인도 철학에서 제7학설은 자아가 즉각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부정한다. <만일 사람의 영혼이 인식 가능하다면, 그 영혼을 인식하기 위해 또 다른 영혼이 필요하며, 그 두 번째 영혼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과는 또 다른 세 번째 영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그들이 이처럼 내면적 자기 성찰을 철저히 부정하고 나선 것은 8세기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그 후, 1843년 무렵, 쇼펜하우어가 그들의 사상을 재발견한다. 그는 이렇게 되풀이한다. <인식의 주체는 주체로만 인식될 수 없다. 그것은 또 다른 인식 주체의 인식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19장) 헤르바르트Herbart또한 그 존재론적 증식의 유희에 동참하였다. 나이 스물이 되기 전의 자아는 불가피하게 무한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일이 자기 자신을 알아 가는 또 다른 자아를 필요로 하며, 그 또 다른 자아 역시 또 다른 자아를 필요로 하기 때문임을 논증해 낸 것이었다(도이센, <근대 철학Die neuere Philosophie>, 1920, p.367).
...
영국 유명론의 충실한 계승자인 헉슬리는 사람이 고통을 감지하는 행위와 한 사람이 고통을 감지하고 있음을 깨닫는 행위는 표현의 차이일 뿐이라며, 모든 지각 행위마다 <감지하는 주체와 감지당하는 객체와 소위 <자아>라 불리는 그 무소불위의 인격체>를 구분 지으려 드는 순수 형이상학자들을 비웃었다(<에세이집Essays>, 제6권, p.87). 구스타브 스필러(Gustav Spiller[1864~1940]. 영국의 작가. 백인 여성과 미국 인디언 남성 간의 결혼을 그린 <이스트맨과 루한Eastmans and Luhans>을 통해 인종 문제를 다룬 바 있다.)는 (<인간 심리The Mind of Man>, 1902년에서) 고통을 지각하는 것과 고통 자체는 서로 별개의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사람의 목소리와 얼굴을 동시에 인지하는 것처럼 이 두 가지 역시 하나로 압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견해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
p46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지적했다. <만일 사람이 생각했던 것을 다시 생각하고자 한다면 그 생각했던 것을 생각하려는 뜻을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면 그 생각에 대한 생각, 그 생각에 대한 생각에 대한 생각들이, 이런 식으로 무한히 이어질 테니 말이다.>(<신(新)인간오성론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제2권,1장).
p49~50
신학자들은 매 찰나에 대한 동시적이고 순간적인 점유를 일컬어 영원이라 규정하면서, 그 영원은 신성(神性)의 속성 가운데 하나에 다름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던은 놀랍게도 영원이 이미 우리 인간의 속성이 되었다면서 매일 밤 꾸는 꿈을 통해 이 논지가 더욱 공고히 되고 있다고 한다. 던에 따르면, 꿈속에는 즉각적 과거와 즉각적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똑같은 속도로 흐르는 순차적 시간만을 경험하게 되지만, 꿈속에서는 무한대로 이어지는 광활한 영역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우리가 지켜본 것들의 배열이며, 그것들로 만들어 낸 한 편의 역사이거나 일련의 역사들이다. ... (쇼펜하우어는 이미 실제의 삶과 꿈은 동일한 책 속의 서로 다른 책장에 불과하다며, 그 책을 순서대로 읽는 것은 실제의 삶을 사는 것이고, 여기 저기 건너뛰며 읽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라고 했다.)
던은 사람들이 죽음을 통해 영우너을 적절히 다루는 방법을 배울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현세적 삶의 매 순간들을 돌이켜 조화롭게 배치시켜야 한다. 신과 친구들과 셰익스피어가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이론을 제시하고도 그 제창자가 오류를 저질러 버리면 그 이론은 무의미한 것이 돼버리고 마는 법이다.
창조와 P.H.고스
(*Philip Henry Goose[1810~1888]. 영국의 동물학자. 기원전 4004년에 세상을 일시에 창조했다는 어셔Ussher 대주교의 설에 모든 과학적 자료를 꿰맞추고자 했다. 그러나 다윈보다 더 급진적인 이 사상은 일반에 수용되지 못했다.
p53~54
우연의 법칙을 다룬 <논리학 체계>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매 순간의 상태는 그에 앞선 순간의 상태의 결과물이며, 어느 한순간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무한 지성이 될 수 있는 바, 이로써 지나간 과거의,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역사를 알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또한 그는...어느 한 상태의 반복이 다른 모든 상태들의 반복을 가져올 것이며 이로써 우주의 역사까지도 하나의 순환하는 연결 고리가 될 것이라고도 한다.) 어느 정도 환상성이 가미된 것으로 보이는 라플라스의 온건한 판본에서, 밀은 미래에 외부적인 간섭으로 인해 순환하는 연결 고리가 파괴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라플라스는 이론적으로 보자면 우주의 현 상태는 어떤 하나의 공식으로 요약해 낼 수 있는데, 바로 그 공식으로부터 누구든지 원한다면 모든 미래와 모든 과거를 추론해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숙명적으로 q단계는 r단계를 야기하게 될 것이며, 이 r단계는 다시 s단계를, s단계는 t단계를 야기시킬 것이라 확신한다. 다만 t단계에 이르기 전에 신의 재앙이 내려 지구가 멸망해 버릴수는 있다. 이것을 소위 세상의 종말consummatio mundi이라 부른다. 미래가 필연적임은 분명한 사실이나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은 곳곳에 숨어 있으니까.
p55~57
이론적으로 보자면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원인들은 또 다른 원인들을 필요로 하고,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서 무수한 원인들을 요하게 된다.(*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사실과 논평Facts and Comments>, 1902, pp.148~151참조.) 마찬가지로 모든 원인들은 구체적인 결과를 남기기 마련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결과들은 천지 창조 이후의 것들뿐이다. 필립 헨리 고스가 종교계와 과학계에 제시한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기 이전에) 탁월하다고 해야 할 이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 다 헛수고이기는 했지만 고스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근거까지 제시해 보았다. 직전의 순간과 직후의 순간이 무한히 이어질 수 없다면 시간 속 어느 한 순간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과연 라파엘 칸시노스 아센스의 탈무드 선집 첫머리에 등장하는 <바로 다름 아닌 첫 번째 밤이지만, 이미 수 세기라는 세월이 이 첫 번째 밤을 앞서 흘러갔다>라는 전래 격언을 들어 본 적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잊혀 버린 고스의 이론을 위하여 그 이론의 두 가지 특성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는, 약간 기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우아함이고, 두 번째는 본의 아니게 부조리한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로 요약되어 버린 사실, 즉 베단타와 헤라클레이토스, 스피노자, 기타 원자론자들이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가 무한하다는 견해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버트런드 러셀은 고스의 이론을 현실화시켰다. 러셀은 자신의 저서 <심리 분석The Analysis of Mind>(런던:1921) 제 9장에서 몽환적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인류로 가득 찬 이 세상은 불과 몇 분 전에 창조되었다고 쓰고 있다.
[참고. 유튜브 ‘KBS 다큐멘터리-경이로운 지구’에서 지구의 역사 속에는 온 지구가 산소의 과잉 분출로 인해 거의 모든 생명체가 절멸한적 도 있으며, 지구의 모든 면이 얼음으로 뒤덮여 생명체가 절멸한 적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생명체[여기서는 아주 작은 세균이나 박테리아 역시 생명체로 포함한다]는 살아남았고, 공룡이 모두 절멸한 뒤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메리코 카스트로 박사가 우려하는 것들
(아메리코 카스트로Américo Castro. <아르헨티나의 언어적 특성과 그 역사적 의미La peculiaridad lingüística rioplatense y su sentido histórico>(부에노스아이레스: 로사다, 1941))
p59
<문제>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음험한 소망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유대인 문제>라는 말은 곧 유대인들이 하나의 문제 거리임을 뜻하는 말이다. ... 이런 적절치 못한 문제라는 단어의 또 다른 해악은 적절치 못한 해결책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서글픈 우리의 개인주의
p70
애국심이란 환상에는 끝이 없는 모양이다. 1세기에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네의 달이 코린토스의 달보다 더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17세기의 밀턴은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 누구보다 앞서 영국인들에게 계시하신다고 했고, 19세기 초의 피히테는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다는 것과 독일인이라는 것은 동일한 의미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민족주의자들도 바로 이런 사람들 주위로 꼬인다.
p71~72
미국인이나 대다수 유럽인들과 달리,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개인과 국가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에서 정부는 늘 형편없는 존재라거나 국가는 형태조차 없는 추상적 개념이라는 의식이 팽배하다.(국가는 비인격적 존재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개인 대 개인 관계만을 인식할 뿐이다. 따라서 아르헨티나 사람에게 있어 공금을 횡령하는 일은 범죄일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잘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다만 실상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분명한 것은, 아르헨티나 사람은 각자가 하나의 개인일 뿐, 결코 시민일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는 윤리적 이상의 실현>이라는 헤겔의 말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주인공 남자가(통상적으로 기자로 그려진다) 범죄인 친구와 우정을 나누지만 결국에는 그 친구를 경찰에 넘기고 마는 상황에 끊임없이 박수를 보내도록 만들곤 한다. 하지만 우정은 열정과 통하고 경찰은 마피아에 다름없다고 여기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할리우드 영화 속의 <영웅>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달로 여겨질 뿐이다. 또한 <각자 죗값은 알아서 치르게 될 것>이라거나 <어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죄를 묻는 사형 집행인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말라>(<돈키호테>, 제1편, 22장)고 한 돈키호테에 대해서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사실 나는 스페인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우리의 부질없는 행위를 지켜보면서 줄곧 우리는 아무래도 스페인과는 다르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돈키호테의 한마디에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말은 스페인과 아르헨티나가 얼마나 유사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침착하고 비밀스런 상징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유사성을 다시 한 번 깊이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르헨티나 문학에 등장하는 어느 절망적인 밤의 일화를 통해서이다. 그날 밤, 지방 경찰 소속 한 경사는 용맹스런 한 남자를 죽여야 하는 범죄 행위에 공감할 수 없다고 절규하면서 오히려 도망자 마르틴 피에로 편에 서서 동료 군인들에 맞서 싸웠다.(보르헤스의 1949년 작품 <알렙El Aelph>에 수록된 ‘타데오 이시도로 크루스의 전기(1829~1874) Biografía de Tadeo Isidoro Cruz(1829~1874)속에 담긴 일화이다.)
유럽인들에게 있어 세상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코스모스>인 반면, 우리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있어 세상은 <카오스>일 뿐이다.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은 어떤 문학 작품이 상을 받게 되는 경우 그 책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데 비해, 우리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제아무리 상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저 나쁜 책이 아닐 가능성이 있는 것 정도로 받아들인다. 통상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주변 정황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p74~75
물론 지금까지 내가 언급한 내용들이 너무 부정적이라거나 무정부주의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또 어쩌면 이런 것들로는 정치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정반대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이 시대에 우리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어느덧 잊혀 가고 있지만 한때 스펜서가 그의 명철한 예지력에 힘입어 지적한 바 있듯이) 국가가 점차적으로 개인의 행동에 틈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공산주의라 불리기도 하고 때로는 나치즘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런 사회악과 싸워 나가는 속에서, 지금까지는 거의 무용지물이었거나 유해한 것으로 여겨지던 아르헨티나의 개인주의가 그 정당성과 당위성을 취득하게 될 것이다.
... 다시 말해,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을 가능성 말이다.
민족주의는 영원히 번거로운 존재로서의 국가라는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끌어들이려 하지만, 언젠가 이 땅에 민족주의라는 유토피아가 건설된다면, 그곳은 모든 구성우너들로 하여금 안달하게 만들어 결국에는 그 반대되는 것을 만들어 내고야 말게 하는 그런 섭리가 가득 찬 곳일 것이다.
케베도
(Francisco Gomez de Quevedo y Villegas[1580~1645]. 스페인의 시인이자 소설가. 기지주의Conceptismo의 대가. 풍자와 유머가 넘치는 시를 통해 현실에 대한 환멸을 표현하고자 했다. 다수의 시 작품과 소설, 극작품들을 남겼다.)
p77~78
실제로 케베도의 역랴이 다른 작가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한 상징으로 우뚝 서지 못했다는 점이다. 호메로스에게는 살인을 저지른 아킬레우스의 두 손에 입맞춤한 프리아모스가 있었고, 소포클레스에게는 수수께끼를 풀었지만 숙명에 의해 자기 자신의 운명과 직결되는 무시무시한 수수께끼를 풀게 된 한 왕이 있었으며, 루크레티우스에게는 무한한 별들의 심연과 원자들의 부조화가, 단테에게는 9계로 이루어지는 지옥과 천국의 마리아가, 셰익스피어에게는 폭력과 음악이 가득한 세상이, 세르반테스에게는 흥겨운 유의변전을 거듭하는 산초와 돈키호테가, 스위프트에게는 명마들과 거친 성격의 야후들이 사는 공화국이, 멜빌에게는 바예나 블랑카를 향한 애증이, 프란츠 카프카에게는 말없이 커져만 가는 미로가 상징으로 존재했는데 말이다. 세계적 작가 가운데 자기만의 상징을 빚어내지 못한 작가는 없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상징이라는 것이 늘 객관적이고 외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공고라나 말라르메 같은 작가들은 심혈을 기울여 비밀스런 작품을 만들어 간 작가의 전형으로 남아 있으며, 휘트먼은 <풀잎>이란 작품에 등장하는 반신(半神)적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 반면 케베도의 경우에는 단지 풍자적 이미지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p79
철학사를 보면, 인간의 상상력에 검은 유혹의 손길을 보내는, 허위임에 틀림이 없어 보이는 온갖 학설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영혼이 다양한 사람들의 육신을 전전한다는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의 학설, 세상은 성격이 포악하거나 조잡한 잡신들의 작품에 다름 아니라는 그노시스파의 학설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오로지 진리만을 탐구하는 케베도는 이런 검은 유혹에 결코 굴하지 않는다. 그는 영혼이 윤회한다는 학설을 <한량없는 무지의 소치>라거나 <총체적 광기의 소산>으로 치부했다.
p82~3
케베도는 자신이 사용했던 위엄이 넘치는 문체를 완벽히 완성해 낸 바 있다. 작품 속 그의 간결한 문체를 보면 스페인어가 세네카와 타키투스, 루카누스식의 엄격한 라틴어나 백은시대(白銀時代[라틴 문학에서 황금시대에 뒤이어 찾아온 이에 버금가는 문학적 업적의 시대로 기원전 18년에서 기원전 133년까지를 지칭한다.])의 간결하고 건조한 라틴어로 회귀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과장된 간결함, 도치법, 거의 대수학(代數學)에 가까울 정도의 엄격함, 대립되는 어휘의 사용, 건조함, 단어의 반복들로 그의 작품은 놀랄 만큼 정밀하다. 완벽하다는 판단을 내리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거나 요구된다.
... <언어는-체스터턴에 따르면(<G.F.와츠G.F.Watts>1904, p.91)-과학적이지 않고 예술적이며, 언어를 발명한 자들은 전사(戰士)들과 사냥꾼들로, 과학에 훨씬 앞서 발명되었다.> 그러나 케베도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본질적으로 논리적인 도구였다. 시가 갖는 진부함 또는 영속성은-수정 같은 물, 흰 눈 같은 손, 별처럼 빛나는 눈과 눈처럼 사물을 바라보는 별들-평이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위적이어서 그를 불편케 했다. 시의 이런 속성들을 비판하면서 그는 은유가 두 사물의 조직적 동화가 아니라 두 이미지의 순간적인 부닥침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관용구를 혐오했다. ....
p85~86
또 다른 시들에서는 케베도의 내면이 드러나는 시구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속에서 그의 슬픔, 그의 분노 또는 그의 환멸이 감지되는 것이다. 일례로, 토레 데 후안 아바드에서 돈 호세 데 살라스에게 써 보낸 소네트(<뮤즈2>, 109)가 있다.
몇 권 안 되는 훌륭한 서책들과 더불어
이 황량한 평화 속에 침잠한 채
나는 고인들과의 대화 속에 살면서
사자(死者)들을 나의 눈으로 듣는다.
항상 (고인들을) 이해할 순 없지만, 항상 열려 있기에,
나의 문제들을 바로잡아 주거나 도와준다.
음악적인 침묵의 대위법 속에
삶이란 꿈을 향해 깨어서 (고인들은) 말한다.
죽음이 자리를 비우게 하는 위대한 영혼들,
보복적인 세월의 모욕으로부터,
오 위대한 주세페여, 박식한 그 인쇄물을 해방시켜라.
(*Don Jusepe Antonio Gonzalez de Salas. 당대의 편집인으로, 케베도 사후에 케베도의 유작을 출간한 인물이다.)
돌이킬 수 없는 도피 속에 시간이 도망치누나.
그러나 최고의 셈법인 시간은
교훈과 학문 속에서 우리를 개선시킨다고 가늠한다.
이 시에서는 기지주의적 면모가 넘친다(눈으로 듣고, 삶이라는 꿈을 향해 깨어 있는 자들이 말하는 등).
(*conceptismo. 다양한 관념이나 단어의 절묘한 결합, 혹은 연결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주로 사고의 예리함과 표현의 날카로움에 집중하는 문학적 경향이다. 지나치게 간결한 문장을 추구해 난해성을 증폭시키기도 하는데, 대표 주자가 바로 케베도이다.)
그러나 이 소네트는 기지주의 덕분에 유효하다기보다는 기지주의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시다. 내가 보기에 이 시는 현실을 묘사한 시는 아니다. 어차피 현실이란 언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네트의 시어들은 그 시어들로 인해 떠오르는 장면들이나 시어들을 전달해 주는 남성적 어감들에 비해 그리 중요할 것 없어 보인다.
너대니얼 호손
p100
18세기에 애디슨(Joseph Addison[1672~1719]. 영국의 수필가. 시인. 정치가)은 은유에 대해 좀 더 세심한 묘사를 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꿈을 꾸는 동안, 영혼은 연극의 무대이고, 배우이며, 관객이다.> 오래전, 페르시아의 오마르 하이얌(Omar Khayyam[1048?~1123]. 페르시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철학자 시인. 중세 최대의 수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항정리를 증명하였다. 시집 <루바이야트>의 작가이며, 이 시집이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에 의해 번역됨으로 유명해졌다.)은 세계의 역사는 신, 즉 범신론자들이 말하는 그 온갖 잡신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기획하고 공연하고, 관람하는 한 편의 연극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랜 뒤, 스위스 출신의 융은 매혹적이고 아주 면밀한 저서들을 통해 문학적 창안은 몽환적 창안을, 문학은 꿈을 가능케 한다고 했다.
p111
...이런 현상의 근원, 전통적 뿌리는 <일리아드>이다. <일리아드>에서 트로이의 헬레나는 직물을 짜는데, 사실 그녀가 ᄍᆞ는 것은 곧 전쟁이고, 또 트로이 전쟁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런 면이 베르길리우스에게 영감을 준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아이네이스>에서 트로이의 전사 아이네이아스가 카르타고 항구에 입성해서 어느 신전에 갔을 때 그곳 대리석 판에 자신이 참전한 전쟁 장면이 새겨진 것을 보고, 또 수많은 전사들의 형상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만든 것이다. 호손 역시 상상된 것과 현실의 것의 접촉을 좋아했는데, 그것이 곧 예술의 투영성이거나 자기 복제성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문구들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은 곧 다른 사람들이며, 한 사람은 곧 모든 사람이라는 범신론적 논리를 깨닫게 된다.
p113~5
<주홍 글씨>를 이루고 있는 스물네 개의 장들에는 저마다 훌륭하고 감성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진 빼어난 풍광들이 넘쳐흐른다. 하지만 그 수많은 풍광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트와이스 톨드 테일스Twice-Told Tales>에 실려 있는 <웨이크필드Wakefield>만큼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호손은 아무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고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 가까이에 거처를 정하고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장장 20년을 숨어 지낸 어느 영국인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거나 읽은 척하는 것 같다. 그 긴긴 세월 동안 그는 날마다 자기 집 앞을 돌아다녔고, 골목 어귀에서 자기 집을 바라봤으며, 수도 없이 아내를 멀찍이서 쳐다볼 수 있었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의 아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과부가 되어 버린 상황을 수용한 상태에서 마침내 어느 날 그는 자기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치 몇 시간 외출했다 돌아온 사람처럼.(그 후 그는 죽는 날까지 모범적인 남편으로 살았다.) 그 희한한 사건을 접하고 흥분한 호손은 그 사건을 파악하고 상상력을 덧붙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주제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았다. 결국 <웨이크필드>라는 단편은 가출한 남자에 대한 추론으로 쓴 이야기인 것이다. 수수께끼에 대한 해석은 무한하리만치 분분할 수 있다.
호손은 웨이크필드를 평범하고, 약간 허영심이 있으며, 이기적이고 유치한 미스터리를 즈릭며, 쓸데없는 비밀을 간직하려는 성향이 있는 남자로 상상한다. 즉 미온적이고 상상력과 정신력이 부족한 사람, 늘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는 그런 남편 말이다. ... 웨이크필드는-참 신기한 일이지만-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를 불행히도 아직 알지 못한다. ... 웨이크필드는 여기저기를 배회하다가 결국 미리 마련해 놓은 새집으로 들어간다. ... 그는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으며, 무척 행복했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 눈에 띄어 발각되면 어쩌나 걱정스럽기도 했다. ... 큼지막한 쓸쓸한 침대 위에 벌렁 누워 두 팔을 벌린 채 그는 큰 소리로 반복한다. <오늘 하룻밤만 나 혼자 여기서 자는 거야!> 다음 날,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난 그는 당혹해하면서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하고. 스스로도 뭔가 목적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규정할 수가 없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집을 비우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모범적인 웨이크필드 부인에게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키는지 알아보는 것이 목적임을 깨닫는다. 호기심은 그를 거리로 내몬다. ... 길모퉁이까지 간 그는 뒤돌아 자기 집을 쳐다본다. 집은 예전과 달라 보인다. 이미 그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 하룻밤 만에 그의 내면에서 변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영적으로 윤리관이 변하면서 추후 20년간 그에게 추방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의 기나긴 모험의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웨이크필드는 빨강 머리 가발을 구해 쓰고, 일상의 습관도 바꿔 머지않아 전혀 새로운 생활 방식을 수립한다. 그는 자신의 부재로 인해 아내가 그다지 고통 받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괴로워한다. 그래서 아내에게 큰 충격이 있기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하루는 약제사가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게 목격되고, 또 어떤 날에는 의사가 왕진오는 모습이 목격된다. 웨이크필드는 가슴 아파한다. 하지만 자신의 갑작스런 등장이 오히려 아내의 병세를 더욱 악화시키는 건 아닐ᄁᆞ 걱정스럽다. 그래서 돌아가고픈 마음을 억누른 채 세월을 보낸다. 전에는 <며칠만 있다가 돌아가야지> 했는데, 이제는 <몇 주만 있다가 돌아가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10년이 지난다. 어느덧 자신이 기행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다. 그의 가슴이 담아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은근한 애정으로 그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그를 잊어 가고 있지만. 어느 주일 아침, 두 사람은 인파로 가득한 런던의 어느 거리를 서로 스쳐 지난다. 야윈 모습의 웨이크필드. 그는 마치 몸을 숨기려 하듯이, 도망치기라도 하듯, 그렇게 구부정한 자세로 지나간다. 떨군 이마에는 온통 고랑처럼 주름이 잡혀 있다. 예전에는 평범했던 그의 얼굴은 그가 행한 기행으로 인해 기이하게 변해 버렸다. 가느다란 두 눈은 사방을 눈치 보듯 두리번거리든가 초점을 잃고 멍한 상태가 된다. ...아내의 한 손에는 성경책이 들려 있고, 그녀의 모습은 평온하면서도 달관한 듯한, 그야말로 과부의 전형적인 모습 그대로다. 어느덧 슬픔에 너무 익숙해져, 그 어떤 행복과도 그 슬픔을 바꾸려 들지 않을 성싶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쳤고, 서로의 시선이 부딪쳤다. 두 사람 사이로 숱한 인파가 파고들면서 둘을 갈라놓는다. 웨이크필드는 자기 숙소로 돌아온다. 열쇠를 두 번이나 돌려 문을 걸어 잠그고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흐느껴 운다. 순간,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단조로운 비참함으로 점철되었는지 확인한다. <웨이크필드! 웨이크필드! 넌 정말 미쳤어!> 그는 스스로에게 소리친다. 아마 그는 정말 미쳤으리라. 런던의 한가운데서 그는 세상과 분리되어 살아 왔다. 죽지 않았으면서도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공간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걸 모르거나 거의 모른다. 그는 <곧 돌아갈거야>라고 다시 되뇌지만, 20년전에도 똑같은 말을 되뇌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한다. 웨이크필드는 냉기가 파고드는 걸 느낀다. 자기 집이 코앞에 있는데 이렇게 비에 젖어 서 있다는 게 우습게 느껴진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어 계단을 올라간 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의 얼굴에 우리 모두가 알고 있던 예의 그 기괴하고 교활한 미소가 번진다. 마침내 웨이크필드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호손은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죽어 가고 있다는 걸 암시하고 있다. 그 작품의 마지막 문구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언뜻 보아도 무질서한, 우리가 이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어찌나 가혹한지 자칫 어긋났다가는 영원히 제자리를 잃어버리는, 그런 끔찍한 위험에 처하게 되는 체계에-체계들은 또 다른 쳬게들에, 모든 것이 모두에-순응해 가고 있다. 웨이크필드처럼 <우주적 주변인>이 되는 위험을 말이다.>
이 단순하고 불길한 비유 속에서-18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이미 우리는 허먼 멜빌과 카프카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수수께끼 같은 형벌과 뷸가해한 죄악의 세계 말이다. ... 사실 무시무시한 웨이크필드 이야기와 카프카의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는 공통된 윤리 의식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공통의 수사법도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보여 주는 뿌리 깊은 진부함은 한없는 자기 상실과 대조를 이룸과 동시에 주인공을 훨씬 더 무기력하게 하면서 스스로를 푸리아이(*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복수(復讐)의 여신들. 에라니에스라고도 한다. 대지(大地)의 여신 가이아, 또는 밤의 여신 닉스의 딸들이라 하며, 온갖 죄를 처벌하지만 특히 근친 살해에 복수를 가하며, 현세에서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도 벌을 준다.)에게로 넘겨 주게 만든다. 또한 배경은 희미하기만 한데 악몽은 그와 대조적으로 또렷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p120~1
19세기 초에 호손이 발표한 단편 속의 기이한 상황이 20세기 초에 카프카가 쓴 단편들에서 느껴지는 것과 동일한 맛을 낸다 해도, 카프카적인 맛은 카프카에 의해 창조되고 정립되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웨이크필드>가 프란츠 카프카보다 앞서 등장했지만, 카프카가 <웨이크필드>읽기를 수정하고 정련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빚진 셈이다. 그래서 위대한 작가는 선구자들을 창조한다고 하는 것이다. 선구자를 창조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을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셰익스피어 없이 과연 말로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
쇼펜하우어는 사람이 행동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질병에 걸리는 것도 다 의지의 발현일 뿐이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이 말이 맞다면, 너대니얼이 여러 해 동안 사람사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지냈던 것은 오히려 세상과의 괴리감을 느끼지 않기 위함이었고, 그래서 취한 최선이 아마도 변화, 즉 웨이크필드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었으리라. 만일 카프카가 웨이크필드 이야기를 썼더라면, 아마도 웨이크필드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호손은 웨이크필드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그의 귀가는 기나긴 부재보다 훨씬 더 처량하고 처참할 뿐이다.
p121~4
대단한 권위를 얻을 뻔했으나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함으로써 호손의 윤리관에 상처를 입히고 만 호손의 또 다른 비유가 바로 <세상이라는 홀로코스트Earth’s Holocaust>이다. 이 알레고리적 픽션에서 호손은 불필요한 축적에 지쳐 버린 인간들이 과거를 모조리 파괴해 버리는 순간을 상정한다. ... 평원 한 가운데 높이 높이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 속에 모든 종류의 족보, 증명서, 메달, 칙령 포고문, 판결문, 문장과 왕관, 홀과 교황의 관, 추기경이 자색 옷, 천개(天蓋), 왕좌(王座), 술, 커피 봉지, 차 상자, 담배, 연애편지, 대포, 검, 깃발, 군용 북, 고문 기구, 단두대, 교수대, 귀금속, 화폐, 소유 등기 문서, 법률과 규범집, 서책, 성직자의 모자, 고대 로마의 하얀 두루마리, 오늘날 이 ᄄᆞᆼ에 널리 유포되어 세상을 힘겹게 옥죄고 있는 성스러운 경전들을 모두 던져 넣는다. 호손은 타오르는 불길을 놀란 눈으로, 충격적인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러자 심각한 분위기의 한 남자가 그에게 슬퍼하지 말고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 불구경을 하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는-악마이다-홀로코스트를 집행하는 사람들이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고 지적한다. 세상의 정수이자 모든 죄악의 근원인 인간의 마음은 불 속에 던져 넣지 않고, 그저 그것이 외형적으로 드러난 몇 가지 형상만을 태워 없애고 있다는 것이다. 호손은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사람의 마음, 마음, 그것은 모든 죄악의 진원지인 작지만 무한한 구체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범죄와 고통은 그 죄악이 빚어내는 몇몇 상징에 불과하다. 그 내면의 구체를 정화시켜 보자. 그러면 이 가시적인 세계를 어둡게 만드는 온갖 악의 형상들이 환영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만일 우리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거나,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들을 추출해 내고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모든 업적도 한낱 꿈으로 화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공허하기 그지없다 보니, 앞서 내가 그토록 상세히 묘사했던 모닥불이 실재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상상의 산물로서 그저 하나의 비유에 불과했는지조차 도무지 중요할 것 없는 그런 꿈으로.> ... 관념론에서 말하듯이 이 세상이 <누군가>의 꿈이라면, 그리고 그 <누군가>가 지금도 우리 모두가 등장하는 꿈을 꾸고 있고 이 우주의 역사를 꿈꾸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종교와 예술을 모조리 말살시켜 버리고 도서관을 통째로 불태워 버린들 어느 한 편의 꿈속에서 세간 몇 점 소멸시켜 버리는 것보다 대수로울 것 없을 것이다. 일단 한 번 세간을 꿈꾸어 냈던 정신이라면 또 다시 그것들을 꿈꾸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이 꿈꾸기를 지속한다면, 잃을 것은 하나도 없다. 환상처럼 느껴지는 이 사실을 납득하게 된 쇼펜하우어는 <소품과 단편집Parerga und Paralipomena>에서 역사를 셀룰로이드 조각은 그대로이되 나타나는 형상은 다양하게 바뀌는 만화경에, 배우는 바뀌지 않고 다만 역할과 가면만 바뀌는 무한하고 복잡한 희비극에 비교한 바 있다. 세상은 우리 영혼의 투사에 불과하고, 우주의 역사는 각자 속에 잠재해 있다는 이 같은 직관은 또한 에머슨으로 하여금 <역사History>라는 제목의 시를 창작하게 만들었다.
과거를 철폐시켜 버리는 호나상과 관련하여, 불행하게도 이일이 기원전 3세기에 중국에서도 시도된 적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는 일이 적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허버트 앨런 자일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재상 이사(李斯)는 시황제라 이름 한 새로운 군주와 더불어 새 역사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공연히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몰수하고, 영농, 제약, 천문학을 가르치는 책들을 제외한 모든 서책들을 불살라 버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책을 숨기고자 했던 사람들을 벌겋게 달군 인두로 지지고 만리장성 축성에 강제로 내몰았다. 많은 소중한 작품들이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훗날까지 공자의 저술들이 전수될 수 있었던 것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지식인들의 자기희생과 용기 덕분이었다....> 17세기 중반 영국에서도 청교도들, 그러니까 호손의 조상님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시도된 바 있었다. <크롬웰이 소집한 한 인민의회에서-새뮤얼 존슨은 이렇게 지적한다-런던탑에 소장된 모든 문서들을 불태워 버리고, 지난 과거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 버린 후, 생활의 모든 규범이 새롭게 시작되도록 하자는 견해가 매우 진지하게 제기된 바 있었다.> 말하자면, 과거를 지워 버리려는 시도는 이미 과거에도 있었던 일로-역설적이지만-이런 시도야말로 과거는 절대 지워질 수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과거는 결코 소멸될 수 없다. 모든 세상사는 언젠가 반복되기 마련인 바, 과거를 지워 버리려는 시도 역시 그 반복되는 세상사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p127
살아가기보다는 읽는 것으로 점철된 내 삶의 여정 속에서, 나는 온갖 문학적 의도와 문학 이론들은 그저 하나의 자극에 불과할 뿐, 마지막 작품에서는 그 모든 의도와 이론들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그와 대치되는 말들을 쏟아 내기까지 한다는 걸 꽤 여러 차례 확인한 바 있다. 정말 작가 안에 뭔가가 내재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의도도-설사 그것이 허황되고 오류투성이인 의도라 하더라도-치명적으로 작가의 작품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물론 작가는 부조리한 편견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순수하고, 순수한 시각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부조리하지 않을 수 있다.
p129
새뮤얼 존슨은 어느 작가라도 동시대인들에게는 빚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호손은 동시대인들을 가능한 한 무시하려 들었다. 잘한 일인 것 같다. 어쩌면 우리의 동시대인들은 우리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에-동시대인들은 늘 그렇지만-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옛것에서 새로움을 찾는 게 훨씬 용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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