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다노 브루노 [Bruno, Giordano] - 이탈리아 철학자

Posted by 히키신
2016. 5. 16. 13:09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브루노 [Bruno, Giordano, 1548~1600.2.17]
이탈리아의 철학자·천문학자·수학자·신비주의자.

개요
현대 과학을 예상하는 이론들을 제시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무한한 우주에 관한 이론과 다양한 세계에 관한 이론이다. 브루노는 이 이론들을 통해 지구 중심의 전통 천문학을 거부했으며, 나아가 여전히 항성 천구를 가진 유한한 우주를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이론을 직관으로 넘어섰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혁 교회가 모두 유럽의 복음화를 위한 투쟁 속에서 엄격한 아리스토텔레스적·스콜라적 원리들을 재확인하던 시기에 비정통 사상을 집요하게 고수하다가 화형대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직업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필리포였고, 나중에는 태어난 곳의 지명을 따서 '일 놀라노'라고 불렸다. 1562년 나폴리로 가서 그리스·라틴의 고전문학, 논리학, 변증론(논증법)을 연구했다. 아베로에스주의(이슬람 철학자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에 영향을 받은 여러 서구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의 사상)에 경도된 것으로 알려진 G.V.데 콜레의 강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기억장치와 기억술에 관한 저작의 영향도 받았다. 1565년 나폴리에 있는 산도메니코마지오레의 도미니쿠스 수도원에 들어갔고 조르다노라는 이름을 받았다. 비정통적 태도 때문에 이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지만, 1572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같은 해 나폴리 수도원으로 배치되어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시시콜콜한 신학 논의들로 짜증을 느꼈지만 1575년 7월 정규과정을 마쳤다. 그에 앞서 금서인 에라스무스의 주석서를 2권 읽고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한 아리우스파의 이단 학설을 거리낌없이 논의한 일 때문에 수도원장이 이단죄로 재판을 하려 하자 1576년 2월 로마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자신이 부당하게 살인자로 고발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다시 파문 절차가 시작되어 1576년 4월 다시 도망쳤다. 도미니쿠스 수도회를 나와 북부 이탈리아를 떠돌아 다니다가, 1578년 제네바로 가서 교정일로 생계를 꾸려갔다. 형식적으로는 칼뱅주의를 받아들였으나, 칼뱅주의자 교수에 대한 격렬한 비판문을 공표한 뒤 개혁 교회도 가톨릭 못지않게 비관용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포되어 파문당했지만 발언을 철회함으로써 복권되었다. 마침내 제네바를 떠나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프랑스 툴루즈로 갔다. 그곳에서 가톨릭 교회의 사면을 받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브루노는 툴루즈에서 철학강사로 임명되었고 1581년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브루노는 마침내 마음 편하게 일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자리를 발견했다. 가톨릭과 위그노(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당시 앙리 3세의 궁정은 ' 폴리티크'(1584년 프로테스탄트로서 프랑스 왕위의 법정추정 상속인이 된 나바라 왕 엔리케 3세에게 동조하는 온건 가톨릭 교도들)라는 관용파가 지배하고 있었다. 종교에 대한 브루노의 태도는 이 집단과 양립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는 앙리 3세의 보호를 받았다. 앙리 3세는 그를 임시 임명했다. 1582년 기억술에 관한 3권의 책을 펴냈고 이 책에서 그는 실재를 깊이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양초쟁이 Il candelaio〉(1582)라는 이탈리아어로 쓴 희극을 발표했는데 이 희극은 당시의 나폴리 사회를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당대의 도덕적·사회적 부패에 저항하고 있다.
1583년 봄 브루노는 앙리 3세의 소개장을 가지고 런던의 주영대사 미셸 드 카스텔노를 찾아갔다. 그는 곧 옥스퍼드로 불려가 그해 여름에 연속 강의를 시작했고, 이 강의에서 지구가 운동한다고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설명했다. 그러나 옥스퍼드 출신자들의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프랑스 대사의 초청을 받아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을 자주 드나들면서 필립 시드니 경과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같은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교분을 맺었다.

저작
1584년 2월 시드니 모임의 회원인 폴크 그레빌의 초대를 받아 옥스퍼드대학의 몇몇 박사와 함께 지구의 운동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토론은 말다툼으로 끝나고 말았다. 며칠 뒤 그는 이탈리아어로 대화편을 쓰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이 대화편은 6편으로 3편은 우주론, 3편은 도덕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재의 수요일 성찬 Cena de le Ceneri〉(1584)에서 태양중심 이론이 참임을 재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우주가 무한하고 태양계와 실질적으로 비슷한 수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대화편에서 그는 동료인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앞서 성서는 천문학적 함축들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 가르침 때문에 추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영국사회의 예의범절과 옥스퍼드대학 박사들의 박식한 체하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원인·원리·일자(一者)에 관하여 De la causa, principio e uno〉(1584)에서는 자신의 우주관의 토대를 이루는 물리학 이론을 정교히 가다듬었다. 그는 '형상'과 '질료'는 긴밀히 결합되어 있고 '일자'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전통적 이원론을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대체했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실체는 기본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대립자들은 존재의 무한한 통일 속에서 일치되어 있다. 〈무한한 우주와 무한한 세계에 관하여 De l'infinito universo e mondi〉(1584)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을 체계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우주론을 전개했다. 또한 그는 철학과 종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아베로에스주의적 견해를 정식화했는데, 이에 따르면 종교는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고 통치하는 수단이고 철학은 스스로 처신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통치할 수 있는 선택된 사람들의 학문이다. 그의 도덕 3부작의 첫번째 대화편 〈승리에 도취된 짐승의 추방 Spaccio de la bestia trionfante〉(1584)은 당대의 미신과 악덕에 관한 풍자로서 그리스도교 윤리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브루노는 특히 신앙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칼뱅주의 원리에 반대하면서 인간의 모든 활동이 존엄하다고 떳떳하게 주장했다. 이 저작과 비슷하지만 비관주의적인 〈페가소스의 음모 Cabala del cavallo Pegaseo〉(1585)는 인간영혼과 보편영혼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고 인간영혼의 절대적 개별성을 부정하는 결론을 내린다. 〈영웅적 열광 De gli eroici furori〉(1585)에서는 신플라톤주의적 심상 표현을 사용해 인간영혼에 의한 무한한 일자와의 결합을 다루고 사람들에게 덕과 진리를 얻도록 열심히 권고하고 있다.
1585년 10월 파리로 돌아온 브루노는 정치적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앙리 3세는 이미 프로테스탄트와의 평화조약을 폐기했고 엔리케 3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브루노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가톨릭 분파의 하수인인 수학자 파브리치오 모르덴테와 논쟁을 시작했다. 브루노는 4개의 〈대화편 Dialogi〉에서 모르덴테를 비웃었고, 1586년 5월에는 〈소요학파에 반대하는 자연과 세계에 관한 120편의 글 Centum et viginti articuli de natura et mundo adversus Peripateticos〉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공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격했다. 정치가들은 그와의 관계를 부인했고, 그는 파리를 떠났다.
브루노는 독일로 갔다. 독일에서는 대학 도시들을 떠돌아 다니면서 강연을 했고 여러 소규모 저작들을 발표했다. 그중에는 당대의 수학자와 철학자를 비판한 〈160편의 글 Articuli centum et sexaginta〉(1588)이 있는데, 이 저작에서 그는 자기의 종교관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의 종교관은 상호이해와 상호토론의 자유를 바탕으로 모든 종교의 평화공존을 추구했다. 그러나 1589년 1월 헬름슈테트에서 지역 루터 교회에 의해 추방되었다. 봄까지 헬름슈테트에 머무르면서 자연적·수학적 마술에 관한 저작들(사후 출판)을 완성했고 라틴어로 3편의 시, 〈3중의 극소와 척도에 관하여 De triplici minimo et mensura〉· 〈단자·수·도형에 관하여 De monade, numero et figura〉·〈측정할 수 없는 것과 셀 수 없는 것에 관하여 De immenso, innumerabilibus et infigurabilibus〉를 썼다. 이 저작들은 모두 이탈리아어로 쓴 대화편에서 설명한 이론들을 재정리한 것으로 물질과 존재의 원자적 기초에 관한 브루노의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 이 저작들을 출판하기 위해 그는 1590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 행정부는 그의 체류 신청을 기각했다. 그런데도 그는 카르멜 수도원에 거처를 정하고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에게 강의를 했고 '보편인'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수도원장은 그가 "종교의 흔적을 갖고 있지 않고", "주로 글쓰기와 새로운 것에 관한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상상에 몰두한다"고 생각했다.

말년
1591년 8월 베네치아의 귀족 조반니 모체니고의 초청을 받아 이탈리아로 운명의 발길을 돌렸다. 당시에는 그다지 큰 위험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도시국가 가운데 가장 자유로웠고, 유럽의 긴장은 1590년 비타협적인 교황 식스투스 5세의 죽음 이후 일시적으로 이완되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인 엔리케 3세는 프랑스의 왕이었고, 종교적 평화 조약은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더욱이 브루노는 여전히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강단을 찾고 있었다. 그는 파도바대학교의 수학교수 자리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파도바로 가서 1591년 늦여름 동안 개인적으로 독일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하학 강의 Praelectiones geometricae〉와 〈변형술 Ars deformationum〉을 썼다. 겨울이 시작되었을 때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할 것처럼 보이자(그 자리는 1592년 갈릴레오가 차지했음) 모체니고의 손님으로 베네치아로 돌아갔다. 거기서 자신처럼 신학적 함축과는 상관없이 철학적 연구를 좋아하던 베네치아의 진보적 귀족들과 토론했다. 그러나 기억술에 관한 브루노의 개인 교습에 실망한 데다가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 새 작품을 출판하려는 브루노의 생각에 격분한 모체니고가 그의 이단적 이론들을 이유로 1592년 5월 베네치아 종교재판소에 고발했을 때 브루노의 자유는 끝났다 (→ 종교재판). 브루노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는 몇몇 사소한 신학적 오류를 시인했지만, 자신의 기본 교의의 신학적 성격보다는 오히려 철학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했다. 베네치아 종교재판은 브루노에게 호의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때 로마의 종교재판소가 그의 인도를 요구했다. 1593년 1월 27일 브루노는 로마 교황청 감옥에 수감되었다. 로마에서 7년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처음에 브루노는 똑같은 노선에 따라 자신을 변호하면서 신학적 문제에 대한 어떤 특별한 관심도 부인했고 자신이 가진 사변의 철학적 성격을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에 종교재판관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종교재판관들은 브루노에게 자신의 이론을 무조건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브루노는 자신의 견해가 신과 창조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와 양립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재판관들은 그의 변호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공식적인 철회 압력을 가했다. 마침내 브루노는 자신은 철회할 것이 전혀 없고 자기에게 무엇을 철회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교황 클레멘스 8세는 브루노를 회개할 줄 모르는 완강한 이단자로 선고하도록 명령했다. 공식으로 사형이 선고된 1600년 2월 8일 브루노는 재판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고를 받는 나보다 선고를 내리는 당신들의 두려움이 더 클 것이요." 얼마 후 그는 캄포디피오리로 이송되어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불에 타죽었다. /브리태니커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년 ~ 1600년 2월 17일)는 이탈리아의 사상가이며 철학자이다.
로마 가톨릭의 도미니코회의 수사로 활동했으나, 수도원에서 이단으로 여겨졌다.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1576년에 나폴리를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전설을 말하거나 학문을 가르쳤다. 라틴어·희랍어에 능통하였고 다방면에 박식하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피치노나 피코등의 영향을 받고 있어 마술이나 점성술에도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591년 베네치아 공화국(현재의 이탈리아의 일부)에서 잡혀 8년 간의 감옥 생활을 했고, 로마 교황청 이단 심문소로부터 이단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화형을 당할 때 "말뚝에 묶여 있는 나보다 나를 묶고 불을 붙이려 하고 있는 당신들(사형 집행인) 쪽이 더 공포에 떨고 있다" 라는 내용의 발언으로 유명하다.
브루노의 발언이나 주장 가운데 가장 이단으로 여겨진 부분은 그의 세계관과 우주관이었다. 그의 우주관은 말하자면, "우주는 무한하게 퍼져 있고 태양은 그 중에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들도 모두 태양과 같은 종류의 항성이다"라는 무한 우주론을 주장했다. 물론 이 학설은 지금은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당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할지라도 분명히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브루노의 무한 우주론은 지동설과는 직접은 관계없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 주장되고 있던 지동설은 우주의 중심에 태양이 있고 항성은 천구라고 하는 공에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브루노의 화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자유로운 문화 활동의 시대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가톨릭과 대립하고 있던 개신교측에서 보면 가톨릭의 횡포를 나타내는 모습의 사례이기도 했다.)

재판과 처형
로마에서 그는 7년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감옥에 갇혔고, 마지막에는 노나 탑에 갇혔다. 심리 과정의 일부 중요한 문서들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어떤 문서는 남아있으며, 그 중 하나는 1940년 발견된 요약집이다. 그가 지은 책과 그가 증언했던 데 대한 혐의를 받고 있었으며, 죄목에는 신성모독, 비윤리적 행동, 교리에 대한 이단적인 해석, 그리고 그의 철학과 우주론에 대한 이론들에 대한 것이었다. 루이지 피르포(Luigi Firpo)는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전한다.
1. 가톨릭 믿음과 교리, 그리고 성직자들에 배치되는 의견.
2.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함.
3.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의견.
4. 성체와 미사에 대한 잘못된 의견
5. 복수의 세상이 있으며, 그들의 영원성을 주장함.
6. 윤회와 인간 영혼이 짐승에게 들어간다고 믿음.
7. 마법을 다루고 점을 침.
8. 마리아의 처녀성을 부인함.
브루노는 베네치아서 변호에서 교회의 교리적 가르침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을 유지하는 방법을 썼다. 특히 브루노는 세상이 하나뿐이 아님을 믿었고 그 생각을 포기하라고 강요당했다./위키백과

(출처 :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5VDx&articleno=15951095
다음 블로그, '깨달음과 평안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