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자유에 관한 새로운 물음,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

Posted by 히키신
2017. 3. 16. 20:10 etc

<제목 : 자유에 관한 새로운 물음,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

  1.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소멸되어가는 개인의 주체성
    1.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치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시인 이상, 연작시 오감도烏瞰圖   1,1934 7 25 조선중앙일보

13명의 아이는 불안·초조·공포에 떠는 현대인의 초상을 상징한다 실존주의 철학을 끌어들인다지금  순간 숨쉬고 있다는 실존 말고는 우리에게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실존주의를   편으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가수이자 화가이기도  조영남이  이상  해설서 李箱 異常 以上이었다에서 조영남은 이상의  유명한 오감도  1호를 이렇게 평하였다. 그는 또한  시를 1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세계적인 사회적 불안과 허무감으로 나타난 다다이즘 정수를 담은 시라며 극찬하였다. 

부르디외는 신자유주의를 일러 개인의 자유와 소망 아래 세워진  경제질서의 궁극적 토대는 사실상 실업, 불안정취업, 해고 위협에 의한 공포 등의 구조적 폭력 이라고 말한다. 이때 그가 고발하는 것은 실업, 불안정, 해고라는 객관적인 현실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있었던 평범한 객관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자유 소망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구조적 폭력 이라   있을 것이다. 부르디외 역시 아마 그런 역설적인 현실에 전율했을 것이다. 자유와 폭력이라는 양립할  없는 것처럼 간주되는 것들 사이에 놓인 기묘한 조화, 개인들의 자유로운 삶에의 의지, 자신을 돌보고 향상시키려는 의지를 통해 작동하는 권력,  주권적인 지배자의 모습으로 자신 위에 군림하는 것도 아니고, 훈육과 규율의 규칙적인 질서를 통해 규범화의 권력을 부과하는 것도 아닌 새로운 권력, 그것이 신자유주의라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뚫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신자유주의의  앞에서 어떻게 해야 주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있을 것인가

    1.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 신자유주의 체제의 발생 배경

인류는  2 세계대전에서  가지 교훈을 얻었다. 하나는 다시는  이상 세계대전 같은 전쟁이 있어서는  된다는 깨달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계대전의 원인이기도  대공황 같은 경제적 재앙이  이상 있어서는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세계적 차원에서 평화와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서 국제연합인 유엔이 출범했다. 또한 1944 7,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튼 우즈에서 44 연합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후의 국제통화 질서를 규정하는 협정을 채결하면서 브레튼 우즈 체제가 이루어졌다. 

 협정은 미국을 중심에 놓은 국제적인 통화제도 협정으로, 미국의 압도적인 힘에 바탕을  달러를 기축통화(국제간의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이 되는 통화) 하고, 금화를 국제통화의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금본위제를 실시하여 환율을 안정시키고, 자유무역과 경제성장의 확대를 추구하려 했다. 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각국에 필요한 외화를 공급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전쟁  경제 부흥과 후진국 개발을 위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설립되었다. 

이렇게 2 세계대전 이후 국제경제는 브레튼 우즈 체제가  버티고 서서 질서를 만들어 갔고대부분 나라의 경제 정책은 국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과 재정 지출에 근거를  케인스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결과 세계경제는 1960년대 말까지 엄청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닉슨이 우리 모두는 케인스주의자들이다. 라는 유명한 말까지 남길 정도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닉슨이  말을 하자마자 케인스주의는 위기에 봉착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 재정 지출이 확대되고 국제수지가 계속 악화되면서, 결국 1971 닉슨 대통령은 금본위제와 미국 달러의 고정환율제를 폐지하여 위기를 돌파하려고 하였다. 이로써 종전 이후 호황을 이끌어 왔던 브레튼 우즈 체제는 공식적인 종말을 맞게 됐다.

또한 1973 10월부터 1974 1월까지 석유수출국기구OPEC 석유 가격을 3 이상 인상함으로써  1 석유파동이  세계를 강타해 미국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또한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의 부작용이 계속 드러나면서 미국의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가 심화되고,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되는  온갖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이렇게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미국과 영국의 경제는 극심한 불황과 혼란에 휩싸이는데,  틈에 세력을 확장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미국에서는 레이건 대통령영국에서는 대처 수상이 집권하면서  신자유주의는 거침없이 본격화되었다. 실물 경제가 위기에 봉착한 사이에 변동환율제를 도입하여 환차익에 따른 막대한 이익을 챙길  있는 좋은 기회였다. 변동환율제란 중앙은행이나 기타 외환 당국에 의한 시장 개입 없이 자유롭게, 외환시장의 수요-공급에 따라 환율이 결정되는 체제이다. 따라서 고정환율일 때에는 기대할  없었던, 환율 변동에 따라 생기는 환차익을 챙길  있게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1980년대에 도입되기 시작한 컴퓨터 시스템 덕에 금융 네트워크가 발달하였고, 금융시장은 국내를 넘어  지구적으로  규모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대처와 레이건은 이런 국제금융의 자유화와  지구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내었다.  결과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일을 잃었던 국제통화기금은 신자유주의의 전도사가 되어 성공적으로 부활하였다. 

이제  나라가 국내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금융 부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엄격한 규제 정책들은 속속 철폐되었다. 그것이 악명 높은 국제통화기금의 구조 조정 프로그램이다.  3세계 국가는 국가적 수준의 경제 위기를 경험할 때마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구조 조정 프로그램을 받아들이지 않을  없었다. 대표적인 구조 조정 조치로는 공공 재정의 축소, 공기업의 사영화, 고정환율제의 폐지, 금융 부문의 자유화 등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 월스트리트와 영국 런던에 똬리 틀고 있는 금융자본의 좋은 먹이가  뿐이었다. 한국의 외환위기와 이후 강제된 경제정책만 돌아보더라도  폐해가 어떠한지 어렵지 않게   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돈을 굴리고 부풀릴 새로운 넓은 마당으로 금융을 발견하고 개척하였다.

    1. 신자유주의에 포박된 개인들의 

새로운 경제적 가상(신자유주의) 출현해 정착하는 과정은 경제라는 영역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전반에서 행해는 행위를 규정하고 지배한다. 1980년대부터 한국 자본주의가 겪은 과정 역시 이에 근거해 재구성해볼  있다. 1970년대 후반 본격화된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1980년대 초반의 산업구조조정이라는 순전히 경제적인 선택과 정책의 변화로 나타났고, 그것은 특정하는 경제적 행위주체의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1990년대 초반의 신경제정책은 국가 주도의 축적체제를 포기하고 탈규제와 개방이라는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단순히 경제적 행위 방식의 변화를 넘어 전체 사회체계를 재조직하려는 구상을 품고 있었다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본의 위기였을  사회의 위기 아니었다.  탓에 신경제정책은  이데올로기적인 술책으로 간주되어 저항과 도전에 직면하지 않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7년의 외환위기는 상황을 바꿔놓았다. 외환위기는 이미 내연하고 있었고  부분적으로 현상한  있던 위기가 다시 폭발한 것이란 점에서 특별히 질적으로 구분되는 위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위기라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 자본주의를 지배하던 경제적 가상이 직면한 위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환위기  이미 장기적으로 진행되어왔고  이를 조정하기 위한 대응 역시 여러 차례 시도되어왔다는 점을 염두에  , 그것은 경제적 질서의 위기라기보다는 경제적인 삶을 재현하는 기존의 경제적 가상의 위기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위기라   있다.

외환위기는 재벌로 불리는 특별한 경제적 행위주체나 그들을 지원하고 부양하는 편파적인 정부가 자기이해를 실현하는  난관에 봉착한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 성원 전체의 위기로 수용됐다   있다. 그런 점에서 이는 객관적인 위기인 동시에 그것을 인식하고 체험하는 사회적인 주체들이 겪은 위기이기도 했다. 더불어 신경제정책이니 세계화니 신경제니 하는 담론의 경우 단지 이데올로기적인 허울에 불과하다는 냉소적인 저항에 직면했던 것과 달리, 이후 이런 변화들은 지배의 합리성 자체를 변화시켜야  필요성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과 이는 행정, 교육, 복지  통치 영역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방향을 규정하는 담론적인 힘으로서, 나아가 거시적 경제정책을 넘어 기업과  안에서 활동하는 개별적인 주체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자체를 변형시키는 가늠자로서 영향력을 더없이 증폭시키고 확장했다.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는 스포츠와 연예 산업,  산업과 같은 주변부 노동뿐만이 아니라 주류의 모든 노동 역시 자영업화되고 있다. 노동자가  이상 노동자로서 자본가와 노동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자기 노동력에 대해 스스로 자본가나 투자가가 되어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해 노동자가 자기 몸과 시간에 대한 경영자가 되어, 다른 (진짜) 경영자와 노동 계약을 맺는 황당한 방식으로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바뀌고 있다. 

  년째 곪은 부위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좋은 예이다. 화물연대 노동자는 법적으로는 노동자가 아니다. 자기 화물차의 소유주이기 때문에 사업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모든 비용과 위험 부담을 져야 한다. 또한 노동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파업권 등이 제한되며, 오히려 업무개시명령 이라는  조항에 의하여 강제 노동을 해야 한다.

 이렇게 노동을 자영업화하면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부과된다. 그전까지 노동자는 언제나 개별 노동자로서만이 아니라 집단으로 존재해 왔다. 노동자는 사용자와 개인적으로 계약을 맺지만,  노동 계약은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통하여 전체 노동자 집단이 책임지면서 보호해 왔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서 노동이 자영업화되면서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질과 성과에 대해 혼자서 책임을 지게 된다. 집단으로 존재할  없는 노동자는 그저 자기 몸에 대한 자영업자일 뿐이다.

산업 노동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해고의 책임을 지우는 방식을 보면    있다. 신자유주의 이전에는,  회사가 어려움을 겪게 되면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기업을 잘못 운영한 회사가  책임을 져야 했다. 이는 경제 위기를 불러온 시장의 실패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후에는 이러한 위기가 닥치면, 기업은 노동자를 대량해고하여 위기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비정규직 문제로 심하게 몸살을 앓았던 이랜드 그룹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있다. 

 이랜드 그룹은 무리하게 사세를 확장하고 유통산업에 뛰어들었다. 이랜드 그룹은 까르푸를 인수하기 위해 17천억 원을 들였는데  가운데 15천억 원이 대출이었다. 고작 자기 자본 2천억 원으로 17천억 원을 삼켰으니 새우가 고래를 삼킨 셈이다. 결국 이랜드 그룹은 이후 만성 재정 문제에 시달리자,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애초 약속을 깨고 기존 까르푸 직원을 대거 비정규직으로 돌렸다. 깊게 따지고 들지 않아도, 이랜드 사태의 근본 원인은 명백하다. 바로 무리한 대출과 사세 확장, 무책임한 인력 운용, 수수방관하는 정책이  원인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기업의 실패이고, 시장의 실패이고, 정부 정책의 실패이다. 하지만 시장과 기업, 정부는 결코 책임을 지지 않으며, 이러한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그나마 이랜드의 경우에는 기혼 여성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먹고살기 위해서 악다구니 쓰는 아줌마 이미지가 커서 동정 여론이  많았지만, 다른 비정규직 해고의 경우에는 기업도, 국가도, 여론도, 심지어 정규직 노조도 무서울 정도로 냉담하기 짝이 없다. 비정규직이 되고, 해고가  책임은 모두 개인에게 있다고 한다. 개인이 공부를 제대로  했고, 무능했고, 게을렀고, 근무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탈락했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들은 되묻는다. 대량해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잘리지 않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잘린 사람도, 비정규직도, 자신이  잘리고 정규직이   있도록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기 관리를 했어야 한다. 라고. 이는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가장 흔한 방법이다.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당연히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이 있고, 도태의 원인은 개인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자 개인이 탈락하지 않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사회보장 강화를 주장해 사회를 통해 보장받으려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신자유주의는 줄곧 이야기한다. 노조나 국가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으려는 나약한 생각을 깨뜨려야 한다고. 무엇보다 노동자 개인은 자기 관리, 자기 계발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노동자 개인의 경쟁 상대는 국가나 기업이 아니라  옆의 동료이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을 못하고, 자신의 몸과 시간을  관리하지 못한 사람은 탈락할 테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다.

  1.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1. 자기계발하는 시민

언제부터인가 서점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은 자기계발 혹은 자기관리 서가이다. 이미 1980년대부터 이에 관련된 책들이 꾸준히 팔리기 시작해 1990년대 초반부터 이른바 자기계발이란 이름으로 묶이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거의 매년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자기계발 서적들이 석권했다. 이제 2000대에는 누구나 자신의 책꽂이에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누가  치즈를 옮겼을까? 공병호, 구본형 같은 자기계발 전문가들이  책을 꽂아두고 있다. 2004년에는 아침형 인간이란 일본 자기계발 서적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됨은 물론 상당한 소동을 불러일으키면서, 이제 자기계발 이라는 용어는 거의 누구나  번쯤 들어본 말이 됐다. 이러한 자기계발서들은 자아를 빚어내는 새로운 이상이 됐고, 신자유주의적으로 사회가 전환된 이후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거의 모든 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서동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동원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이다.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에 따라 등장한 윤리, 혹은 정치 규범이 바로 자기계발이다. 우리는  자기계발을 통해 자유를 꿈꾸고 실현한다.

일터에서 주체성을 지배하고 관리하기 위해 생산된 수많은 경영 담론과 테크놀로지, 예를 들어 기업 문화권한위임, 경력개발, 연봉제를 위시한 성과배분제, 다면평가제와 목표관리제 등의 성과평가체계, 인적자원관리 등은 항상 자기 겨냥한다. 그런 점에서 일터에의 경제적 주체성의 생산과 지배는 자아  생산과 지배란 과정과 불가분한 것이다. 

자기계발과 함께 사용되는 용어도 성공학, 모티베이션motivation, 동기부여, 셀프헬프Self-help, HRD등으로 복잡하다. 다양한 용어만큼이나  해석도 제각각이다. 국내 시장 규모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이구동성 추산이 어렵다 라고 말한다. 워낙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교육과 세미나와 컨설팅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계발붐이 의미하는 코드는 확실하다. 자기계발 붐은 IMF외환위기와 개인 신용위기를 겪은 직장인들이 독립해야  연령대가 점차 낮아지고, 평생직장이 평생직업으로 바뀌고 있는 추세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인터넷 소호몰(Small Office Home Office), 프랜차이즈, 네트워크 마케팅  1 산업  급성장하며 개인의 역량 강화는 어느 때보다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대마불사와 철밥통의 신화가 깨어지면서 많은 개인들이 스스로를 구제해야  필요성을 느끼게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건국 이후 줄곧 지속되는 자조自助 전통이 대한민국에선 그제야 싹트게  것이다.()많은 이들이 창업과 전직이라는 낯선 단어를 자신의 목표로 인식하게 됐고, 자기계발은 그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런 경향은 경제신문 구독률 상승과 더불어 출판시장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각종 재테크 서적과 자기계발에 관련된 책들이 출간 붐을 이뤘다 이와 더불어 한국에서도 서서히 책이 아닌 세미나를 통해서도 지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와는 비교될  없지만 일반인들이 자기계발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기사와 텍스트에서  알수 있듯이 개인들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계발하는데에 총력을 기울인다. 이런 개인들의 자기계발붐을 일으킨데에는 기업교육이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물질적 배경을 제공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상당수 기업들이 인적자원관리의  분야로 기업의 인재 육성 아웃소싱함에 따라 그에 관한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대학교의 취업  진로 상담에 관련한 프로그램은 이런 자기계발 산업의 가장  시장 가운데  부분이다. 따라서 자기계발 산업에 관련한 기업이나 전문가들은 실적과 효험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활용한 기업, 학교, 정부기관을 열거하기 일쑤이다.  탓에 상당수의 자기계발 담론의 전문가들은 사내 강사가 아니면 기업이나 대학을 대상으로  자기계발 전문 강사로 활동한다. 

이들은 자기들 회사 이름에 HRD 혹은 인재개발 따위의 이름을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자기계발 산업에 관련한 기업들은 OO문화원OO아카데미 등의 이름을 달고 있던 것에서 벗어나 대부분 OO인재개발OOHRDOO컨설팅OO리더십센터등으로 이름을 바꿔왔다. 그리고 자기계발 산업의 전문가들은 자신을 부르는 명칭들이 구구하지만 전문적인 자격과 기준을 갖추고 인증제도를 도입하는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기업교육이나 직장인교육에 관련한 전문가들이 자기계발 담론의 중요한 생산자들이며 보급자들로서 역할하고 있음을   있다. 

따라서 자기계발 담론은 경제적 행위자의 주체성을 그려내고 규정하는 모든 담론적 실천들과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 자본주의 초기의 자수성가인이나 기업가정신 담론에서부터 최근의 벤처정신이나 경영 마인드 혹은 비즈니스 마인드 이르는   일상적인 용어들까지, 자기계발 담론은 경제적 행위자의 주체성을 제시하는 담론적 실천과 떼어놓을 수가 없다. 따라서 어떻게 사업에서 성공할 것인가?어떻게 직장에서 꿈을 실현할 것인가?어떻게 유능한 노동자가  것인가? 등과 같은 물음을 던지고 이에 대한 답변을 구하는 일련의 담론적 실천은 언제나 자기계발 담론을 생산하고 증식하는 중요한 매개적 공간이었다고   있다.

 인간이 시간의 시간이 노동과 여가, 공적 시간과 사적 시간으로 나뉘지 않고 24시간  일하고 자기계발하는 존재가  것은, 단지 경쟁이 가속화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연봉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한 경쟁의 산물이며 그것을 가속화시키는 임금 체계의 변화인 듯하지만, 사실은 노동자 자신의 경제적 삶을 주체화하는 방식이 극적으로 변했음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가 자기 삶을 경영하는 일종의 자영업자, 경영자가  것이다. 우리들 모두의 시간과 공간, 관계는 이제 투자와 관리의 대상이 되었으며우리는 그것을 자유 라고 부른다.

    1. 점점 지쳐가는 사람들과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

하지만 이러한 자기계발서의 범람과 더불어 더불어 최근  년간에는 이른바 힐링 열풍 한반도 전체를 휩쓸었다. TV 유명 토크쇼 프로그램인 힐링 캠프 비롯해서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유시민의 어떻게  것인가 같은 에세이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속에서 점점 지쳐가는 사람들이 상처를 위로받고 싶어하는 심리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라고 본다.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얼마나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고발서로는 리처드 세넷의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있다.  책에서 세넷은 자본주의의 공격 아래 상호신뢰와 헌신성 같은 가치가 삶의 현장, 노동 현장에서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고발하고 있다. 이렇듯 유연한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아들 세대가 가족에 대한 위기의식 등을 경험하면서 결국에는 자기 중심의 문화적 보수주의자  된다는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삶은 점점  바빠지지만 오히려 우리가 노동하고 살아가는 방식은 점점  수동적이 되어  걸리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도덕적 해이에 빠지게 된다. 도덕적 해이를 질타하며 복지의 축소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가 아이러니하게도 노동 현장에서 사람을 도덕적 해이로 밀어 넣고 있는 셈이다.

 화이트칼라의 위기 라는 저작을   안드레스키 프레이저는 그의 저서에서 18~25 미혼 남녀의 경우 지난 25 동안 평균 실질임금은 11% 감소했고 대졸 남성의 초임은 89~97 6.5% 하락했지만 같은 기간 CEO 보수는 44.6% 상승했다고 한다. 죽어라고 일했지만 번영의 열매는 경영진과 전문 투자자의   셈이다. 신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계급 지배를 강화한  불과하다는 데이비드 하비의 말이 공연한 이데올로기적 선동이 아니라 사실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수많은 일련의 자기계발서들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왜일까? 이는 성공했으니까 저렇게 말하지실패했으면 저렇게 말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위와 같은 비아냥거림만이 아닌, 사람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의 통찰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따름이리라. 일련의 자기계발서들은 단지 신자유주의사회 속에서 패배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방책에 불과할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는 이르지 못한다.

자기 혁명을 통해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니다. 혁명을 통해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자체이다. 삶은 일상이다. 좋은 삶은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일상을 통해 자기 삶을 살면서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의 빛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행복한 일상적  이야말로 자기혁명이 추구하는 비전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본형의 위와 같은 텍스트는-비록 그가 대한민국의 유명한 자기계발 스타이기는 하지만-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1. 새로운 자유를 위한 사유

바틀비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안에 대해 분명한 거부도 인정도 하지 않는 독특한 말법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그것은 주어진 삶의 환경에 대한 거리두기이고 자신의 독자적인 삶을 구성하는 방식이기도 하다그것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불명료하고 식별불가능하며 애매한 지대로 보인다다른 이들에게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바틀비의 말법은 참담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지속되어 다른 세계를 만들고 비참한 결말을 맞지만  자체로 우리의 세상에서 결코 몰아낼  없는 사례를 만들고 있다이것이 (국가-)(-자본) 폭력 앞에서 무력화되지 않는 삶의 존재가 아니면 무엇일까?

들뢰즈는 바틀비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I would prefer no to  라는 상투적 표현을 타인들의 언어를 우회하면서 코드화된 언어적 교환에서 이탈한다고 본다 I would prefer no to /아니오선호/비선호라는 이항을 넘어서는 비구분의 지대를 드러낸다여기서 바틀비는 순수한 수동성규정 바깥의 불확정적인 존재가 된다. 

위의 인용문처럼 주어진 삶의 환경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 역시 자신의 독자적인 삶을 구성할  있는 방편  하나일 것이다.  하나의 인용문을 보자

우리 시대의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문제는 국가나 국가기관들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국가로부터 그리고 국가에 연결되어 있는 개별화 유형  다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이 결론이라   있다. 우리는  세기 동안 우리에게 부과되어온 이런 종류의 개별성을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추구해나가야 한다.

일정한 거리두기에서  나아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주체성을 잃지 않을  있고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창조할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유를 함으로써 아는 것을 넘어 행하게 되고 행동한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임을 깨닫게  것이며,  소통을 통해 서로 공감하며 해방된 자들의 세상 꿈꿀  있게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당하는 텍스트 전체를 인용함으로써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이제 사유한다는 것은 진리에의 열망(선의지) 순수한 발현이라는 자연스러운 사실 아니라 인간주의적 권리 주장일 뿐이다들뢰즈의 말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같은 돌발적인 충격  의해 사유한다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식능력을 초과해서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사태 마주친다는 것은 혹은 우리의 주어진 경험과 기억 그리고 지성의 메커니즘 바깥에서 미지의 사유 능력과 존재 능력을  세계 속에 낳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식능력의 파열,  고장을 예상할 수도 있다. 어떤 말할  없는 상태가 주는 곤경, 어떤 괴물과 같은 폭력적인 생명력, 어떤 무정부 상태의 카오스적 사회상에 의해 완전한 무능력(  없음) 빠지는 두려움과 더불어,  아우슈비츠라든지 게르니카, 알제리의 폭력과 살육의 역사적 경험이 우리를 덮쳤던 것처럼 말이다. (들뢰즈 시네마2 : 시간이미지 에서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우리를 사유의 무능력 상태에 처하게 하는 임상적 죽음의 상태라고 단언한다.)

이러한 철학적 곤경 앞에서 들뢰즈는 아르토(A.Artaud) 통해 미세한 출구를 찾아낸다. 아르토는 사유란 언제나 존재하지는 않는 산파와도 같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라는 논리적 가능성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유할  없는 문제 상황 속에서 실제로 사유를 작동시킬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사유 속의 비사유(impense)    있는 사유의 무능력이 사유의 고유한 역량으로 전화되어  속에서 다시 사유가 발굴될 뿐이지  이외의 다른 출구는 없다. (들뢰즈Ibid, 335) 이제 사유의 권리는 새로운 자리를 찾는다. 사유할  없는 어려움에 봉착해서 우리의 공통감과 양식에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 바로 사유의 구조가 지닌 본성이다. 

나는 삶에 대해 사유한다. 내가 건립할 모든 체계는 삶을 새로이 만들고자 하는 나의 인간으로서의 외침에 결코 필적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삶을 잃어버렸던 사람, 그래서 온갖 수단을 써서 삶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게 해주려는 사람이다. (들뢰즈, Ibid, 각각 335, 340. 아르토에 대한 들뢰즈의 인용구를 재인용.)

죽음이야말로 자신의 현재와 과거에 대한 총체적인 물음을 발생시키기 때문일 것이다하이데거적 실존적 죽음  세계의 본래적 연관을 드러낸다는 것은 이런 지점일 것이다.

내가 존재하고 사유하는 바깥에서,  나의 존재와 사유의 극한에서 외부의 존재, 외부의 인식을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나의 죽음이 만드는 홀로 죽어가는 단절과 달리타인의 죽음을 대면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기이한 체험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가운데 어떤 공동-현존의 가능성,  우리 가능성이 열리는 시간성이 드러나게 된다.

훌륭하게 구성된 주체, 독립적이며 능동적인 주체들은 이러한 시간 앞에서 순수하게 역동적인 강도적 차이를 견디지 못한다. 애벌레-주체  불리는 수동적 자아야말로 존재에게 계속되는 불일치와 같은 내적 차이를 감당할  있을 것이다이러한 강도적 차이를 통해 개체는 무화되고다시 진화되는 역량을 갖게 된다. 세계는 하나의 알이다우리는 거기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욕망의 작동과 흐름이란 어떠한 규정된 존재방식을 결정화시키는 조건인 비결정화된 상태와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존재 방식을 바꾸는 힘으로   있다 나의 자아를 넘어서서 나의 자아를 구성하는   힘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란 느끼고 행동하고 회상하는 자아가 아니라 정서(affect) 갖고 있고 운동과 속도 속에서 현재 자아의 문턱,  한계를 맞닥뜨릴  있는 0 강도로 내려가는 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관 없는 신체는 주체의 해체를 지향하기보다는 지배적인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최소한의 주체성을 보호하는 신중함 가지고 0 강도에서 생산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결국 새로운 주체는 기관 없는 신체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내적 차이의 운동인 창조적이고 동시간적인 역행에서만 찾을  있다. (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 307, 314-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