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문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진오 교수님이 강의하신 <동아시아미학과예술> 시험 문제에 대해 끄적거린 글이다.
대학 시험에 대비한 글이다 보니 수업 내용을 우겨넣은 게 다분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다양한 미학적 관점을 약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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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는 조금은 즐거워서 가끔의 작은 행복에 시름을 잊지만 서울살이는 결국엔 어려워서 계속 이렇게 울다가 웃겠지, 계속 이렇게 울다가 웃겠지...”
무심코 그냥 걷다가 우연히 이어폰을 통해 들려온 음악이 참 가슴에 와닿을 때가 있다. 위 노랫말은 서울살이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건 부산살이도 마찬가지고 뉴욕살이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졌다. 쉽게 말해서 ‘요즘살이는’ 참 어렵고 힘겹다.
행복하게 사는데 필요한 수단인 자본이 거꾸로 삶의 목적이 되어버리고 있는 요즘이다. 사람들은 이를 쫓다가 자기를 잃어가고 소외되고 고독해진다. 이러한 시대에 나는 ‘과연 아름다움이라는 게 존재는 하나?’ 하는 의문이 든 적이 많았다. 만약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이 아름다움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지만 가끔의 작은 행복에, 적어도 그 순간만이라도, 기분좋게 웃을 때가 있다. 나는 이러한 행복이 진정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자, 그렇다면 바로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왔을까? 먼저 서양의 관점에서 바라본 아름다움을 간략하게나마 시대적 변천 과정을 통해 알아보자.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대표적으로 “현실은 이데아를 비추는 환영에 불과하다” 고 주장하며 이데아를 쫓는 것, 즉 ‘모방(mimesis)’가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이원론적 사유방식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람들의 사고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후 중세에 ‘데카르트’ 가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주장한 이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시작되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백과전서파’의 예술에 관한 논쟁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서양은 ‘아름다움’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놀라움에 기반을 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라 정의했다. 몽테스키외는 이를 조금 더 발전시켜 약간 소흘하게 다루어진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 이면에 훨씬 많은 우아함, 세심함을 숨기고 있는 부차적인 것이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바움바르텐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미학’의 최초의 명명자로써 그 학문적 기초를 확립했다. 그는 감성적 인식의 학, ‘취미에 관한 학’을 ‘미학’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 대해 칸트는 판단력이 쾌와 불쾌의 감정을 취미판단함으로써 반성하는 과정이 ‘미학’이라고 말하며, 이는 그 자체로 만족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작업은 그러한 능력을 이미 부여받은 ‘천재’의 재능에 의해 구현된다고 보았다. 반면 헤겔은 모든 예술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며 따라서 예술은 궁극적으로 ‘정신의 소산’이라고 보았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프로이드가 인간의 무의식과 내면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한 이후로 예술 역시 객관적 세계가 아닌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초현실주의’의 경향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사르트르의 사유에도 그 영향이 있다고 여겨진다. 사르트르는 대자존재(타인의 시선에 포착된 주체로서의 나)라는 개념을 말하며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타인의 시선을 영영 벗어나지 못하므로 구속된, 저주받은 인간이라고 보았다. 서구의 현대적 사고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니체는 미학이 삶의 고통을 예술적 언어로 표현한, ‘삶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존의 전통을 비판하고 시대와 문명을 치유하며 인간을 미학적 윤리적으로 완성시키고자 하였고, 이는 예술을 통해 자기 극복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니체의 이러한 사유는 이후 아방가르드 운동 및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 그렇다면 동양에서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먼저 동양에서는 고대로부터 사유와 신체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서양에서는 세계를 구분 지어 바라보았다면, 동양에서는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있다고 생각하였다. 서양은 수직적 사고가 주를 이루었다면 동양의 사고는 수평적 사고가 주를 이뤘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또한 동양의 철학, 사상가들은 서구의 논리정연하고 직설적인 표현과 달리 상대방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 한 마디 한 마디를 시적으로,비유적이고 은유적인 화법으로,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동양은 서구식의 그러한 논리가 상대적으로 덜 발달하였고,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도 서양에 비해서는 뚜렷하게 그 계보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이 서양보다 아름다움에 대해 사유를 덜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서양보다도 훨씬 더 다양한 관점으로 깊이있게 사유하였다. 우선 서양식으로 그 말부터 뜯어보자면, 아름다움(美)는 ‘양羊’자와 ‘큰大’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직역해보자면 ‘큰 양이 아름답다’는 뜻이된다. 이는 고대 원시적 관점으로 ‘실용적인 것이 좋은 것(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잉여생산물이 증대되고 국가 체제로 접어들면서 아름다움은 더 이상 실용적인 것을 뜻하지 않게 되었다. 동양의 역사는 예로부터 철학과 정치, 기술, 예술, 그리고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져왔다. 따라서 동양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이 가장 이상적인, 즉 ‘天人合一된 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큰 공통분모 아래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방편적 서술에 있어서 유교와 불교, 도교 및 힌두교는 조금씩 다르게 설명한다. 가령 도가에서는 ‘自然’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보았고, 소박한 것, 여백의 미를 이야기했다. 유교에서는 ‘천지의 마음은 만물을 생하는데에 있다(天地之生物之心)’고 보고 모든 것들이 ‘中庸’ 의 덕을 지킬 때 가장 생명력있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았다. 불교에서는 일체가 ‘空’ 한줄을 알고 ‘中道’의 길을 걷는다면 그가 바로 보살이요, 궁극적으로 해탈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정된 시간에 함축적으로 동서양의 아름다움의 관점을 서술하기엔 아직 나의 공부가 부족하지만, 대략적으로 한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수천년전부터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아름다움’에 대해 탐구하고 또 노래했을까. 추측컨대 그들이 살던 시대 역시 지금과는 다른 차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또 힘들어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더 이상을 꿈꾸고 또 노래해왔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결국 아름다움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더 가치있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런 관점으로 보자면, 내가 꿈꾸는 아름다움은 “和而不同하여 모든 것들이 제 자리에 살아 있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알 순 없지만 그래도 나는 꿈꿔본다. 많은 사람들이 걷다 보면 그곳이 길이 만들어지듯, 그저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다. 서두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랫말로 글을 마무리지을까 한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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