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어당(林語堂)(1895-1976) - 생활의 발견

Posted by 히키신
2017. 3. 12. 18:51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생활의 발견


행복이란 무엇인가-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인생의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 자신의 즐거움, 가정생활의 즐거움, 나무 꽃, 구름, 시내, 폭포 그 밖의 삼라만상을 보는 즐거움, 그리고 또 어떤 형태의 마음의 교류, 시가, 미술, 사색, 우정, 유쾌란 대화, 독서의 즐거움 등이 그것이다. 맛있는 음식, 유쾌한 모임, 가족의 단란, 아름다운 봄날 소풍 등의 즐거움처럼 분명한 것도 있고, 시가, 미술, 자색의 즐거움처럼 그다지 분명치 않은 것도 있다.

 이들 두 부류의 즐거움을 물질적인 것이라든가 정신적인 것이라고 부르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내가 이 구별을 믿지 않으며, 그리고 이렇게 분류하려고 생각할 적마다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남녀노소의 유쾌한 소풍 모습 등을 보고, 그들의 줄거움 중 어느 것이 물질적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지 구별할 수 있겠는가? 한 아이는 풀숲 위에서 깡총거리고, 다른 아이는 들국화를 따서 화환을 만들며 놀고 있고, 어머니는 한 조각의 샌드위치를 들고 있고, 삼촌은 잘 익은 사과를 먹고 있으며, 아버지는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풀 위에 누워 있고, 할아버지는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다. 누군가가 축음기를 틀고 있을 수도 있으며, 멀리서는 음악이나 물소리가 아득히 들려 오기도 한다. 이러한 즐거움 중 어느 것이 물질적인 것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 것이겠는가?

 샌드위치를 먹는 즐거움과, 우리가 시정(詩情)이라고 부르는 경치를 감상하는 즐거움에 경계선을 긋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음악의 즐거움이, 물질적이라 일컬어지는 파이프 취미보다 고급스런 즐거움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물질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을 구별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당혹스러운 일이며, 그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기도 하거니와 별로 신통치 못한 사고방식처럼 생각된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를 엄밀히 구별하고, 참된 즐거움을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음미하지 않는 그릇된 철학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내 주장이 너무 독단적인 것일까? 또는 인생의 본래 목적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함에 있어 논점의 중심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생활의 목표는 그 참된 즐거움에 있다고 말해왔다. 사실이 그러니까 그렇다는 것뿐이다. 오히려 나는 '목표'나 '목적'이라는 말을 쓰기를 주저한다. 참된 즐거움을 취지로 하는 인생의 목표나 목적 등은, 인생에 대한 인간 본래의 태도가 어떠한가라는 그런 의식적 목적이 아니다. '목적'이라는 말은 공부나 노력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당면하는 문제는 이제부터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평균 5, 60년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인생 최대의 행복이 발견되도록 인생을 규정해 나가자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것과 같으며, 광대한 우주의 섭리 속에서 인생의 신비적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내려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보다는 훨씬 더 실제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비하는 철학자들은, 처음부터 인생에는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고 독단하고 나서기 때문에 논리가 일목요연하지 않다. 서구의 사상가들이 너무나 맹렬히 파고든 이 문제가 오늘날에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신학의 영향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설계니 목적이니 하는 것을 지나치게 가정한다. 사람들이 이 문제에 해답을 주려고 노력도 하고 논쟁도 벌이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 같은 문제가 매우 헛되며 불필요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생에 목적이나 설계가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토록 난해하고 막연하며, 귀찮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결국 두 가지이다. 즉, 신이 인간을 위해서 정한 신성한 목적 아니면, 인간이 자기에 대하여 정한 인간적인 목적 중 하나이다.

 전자에 관한 한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의 배려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상상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능으로써 신의 지능을 추측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흔히 이 같은 이론의 최종 결과는, 신을 우리 군대의 기수로 삼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맹목적 애국자로 만드는 것이다.

 다음으로 후자에 있어서 논점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것은 아니다. 즉, 실제 문제이지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것에 대해서라면 누구든 자기의 사고방식이나 가치판단을 들고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항상 논쟁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가치판단이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너무 철학적이 아니고 좀더 실제적이면 족하다. 나는 인생에는 반드시 목적이나 의의가 있어야만 한다는 따위의 억측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월트 휘트먼도 말한다.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아마도 아직 수십 년이나 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문제는 간단해지고, 두 가지의 다른 해답이 나오지 않고 오직 한 가지만이 있을 따름이다. 즉, 인생을 즐기는 것 외엔 인생에 어떤 목적이 있는가.

 모든 이교도 철학자에게는 커다란 문제인 이 행복론을 기묘하게도 기독교 사상가들은 등한시하고 있다.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큰 문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참혹한 말이지만 인류의 '구제'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침몰중인 배 안의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꼼짝없이 최후의 운명이라거나,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가를 생각하는 심정이다. '망해가는 그리스와 로마의 마지막 탄식'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기독교에는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구제라는 문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구제받아 이 세상에 살고 싶다고 하는 문제 속에서는 망각되어 있다. 멸망할 운명이라는 것은 생각하면서도 구제라는 것에 대해 왜 그토록 신경을 써야만 하는 것인가.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구제라는 것에 너무도 열중하여 인생의 행복이라는 걸 별로 생각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그들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그저 막연히 천국이 있다는 것뿐이며, 인간이 거기서 무얼 하며 천국에 가면 어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성가소리가 들리고 백의의 천사가 날아다니고 있다는 극히 막연한 소리를 하는 데 불과하다. 그런데 그중 마호메트만은, 좋은 술과 과일이 가득하고, 검은 머리에 큰 눈을 한 정열적인 처녀들이 놀고 있는 천국의 행복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것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천국이라는 것이 좀더 분명하여 확신이 서게 되지 않는 한, 이 지상의 생활에 대한 것까지 잊어버리고 천국에 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누군가가 "내일의 씨암탉보다는 오늘의 계란"이라고 말했다. 여름휴가 계획을 세울 때 적어도  우리는 가려는 곳에 대해 이모저모를 알아보게 된다. 이때 관광 안내소가 전혀 아는 것이 없다면 싱겁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아무 곳에도 가지 말고 가만히 있는 편히 낫다.

 진보와 노력을 믿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천국에도 진보와 노력이 있다고 믿으리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우리는 천국에서까지 분투 노력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인간은 이미 완전한 존재인데, 어떻게 그 이상 노력하고 진보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천국에서는 그저 무위도식하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천국생활을 준비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무위도식하는 법을 배워 두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

 만일 우리가 한 우주관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면, 모름지기 자아를 잊고 우주관을 인생에 한정하는 짓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좀더 널리 생각하고, 우리의 생각 속에 바위나 나무나 동물 등 우주만물의 의의까지도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사물에는 일정한 짜임이라는 것이 있다(그러나 이 말은 내가 몹시 싫어하는 목표나 목적이라는 말과는 뜻이 다르다). 이 말은 자연과 사물에는 하나의 규범이 있음을 의미하며, 궁극론까지는 못 되더라도 이 온 우주에 대한 어떤 견해에 도달하고, 그후에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를 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연과 자연 사이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은 자연과 분리시킬 수 없으며,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격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꾀하여 단번에 결론에 도달하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천문학ㆍ지리학ㆍ생물학ㆍ역사 등은 모두 우리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하여 분명한 사고방식을 안출(案出)시켜 줄 것이다.

 조화의 목적을 이처럼 크게 생각한다면 인간의 위치는 다소 빈약해지겠지만, 그런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위치가 있으므로 주위의 자연과 조화 있는 생활을 한다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해 실질적으로 분별 있는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행복은 관능적인 것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모두 생물학적인 행복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매우 과학적이다. 오해를 살 위험은 있지만 이 점을 좀더 분명히 해두어야만 하겠다. 되풀이해 두지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란 모두 관능적인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심론자와 유물론자는 언제까지나 서로 오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같은 언어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말을 하더라도 서로 다른 뜻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도 또한 이 행복보전론 가운데서 유심론자에게 속아 넘어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참다운 행복이란 다만 정신의 행복이라는 것을 승인하기로 하자. 그리고 곧 우리의 논지를 내세워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정신이란 내분비선의 기능이 완전히 행해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나에게 있어서는 행복이란 주로 소화가 잘 되느냐 여부에 달려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주로 오장 육부의 운행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하며 내가 사회에서 받고 있는 명성이나 존경을 잃지 않도록 하려고 생각한다면 저 미국의 어떤 대학 총장의 소매 밑에서라도 숨어야만 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미국의 대학총장은 신입생의 각 클라스에서 훈시를 할 때면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될 일이 꼭 두 가지 있다. 즉(성서)를 읽을 것과 용변을 잊지 말 것." 실로 대단한 슬기를 가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총장의 몸으로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현명하고 온정이 넘치는 분인가. 내장만 제대로 움직이고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움직이고 있지 않으면 불행하다. 문제는 다만 이것뿐인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추상적인 문제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진정 행복한 때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사실에 비추어 해부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세상에는 행복이라는 것은 소극적인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다시 말해서 슬픔, 괴로움, 육체적인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은 적극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는 그러한 경우를 환희하고 부르고 있다. 이를테면 가령 내 경우라면 진짜 행복한 한때란 바로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푹 잠을 자고 난 뒤 아침에 눈을 뜨고 새벽의 공기를 마시면 폐가 충분히 부푼다. 그러면 마음껏 깊이 숨을 들이쉬고 싶어하는 가슴게의 피부나 근육에 유쾌한 운동의 감각이 일어난다. 따라서 일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한때. 손에 파이프를 들고 의자 웨에 길게 발을 뻗고 있노라면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가는 그러한 한때. 여름 여행길에서 목이 타는데, 아름답고 깨끗한 샘물이 있어서 물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흐뭇하게 들려온다. 나는 신발도 양말도 벗어던진 채 펑펑 솟아오르는 그 차가운 물 속에 발을 담근다. 이러한 한 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다음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는다.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꼭 드는 친구들뿐이다. 두서도 없는 정담이 끝없이 경쾌하게 계속된다. 몸도 마음도 천하태평인 그러한 한 때. 어느 여름날 한낮이 겨워,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15분쯤 지나면 초여름의 소나기가 틀림없이 퍼부을 것 같다. 비를 흠뻑 맞고 싶지만 우산도 받지 않은 채 빗속으로 나가는 것도 어쩐지 쑥스럽다. 그래서 얼른 밖으로 나가 들 한복판에서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구실을 댄다. 이윽고 흠뻑 젖어서 돌아와 집안 식구들에게는 '허, 그만 비를 만났지, 뭐야' 화고 말하는 그 한때.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는 것을 듣거나 그 통통하게 살찐 종아리를 볼 때면 도대체 나는 아이들을 육체적인 뜻에서 사랑하는 것인지, 정신적인 뜻에서 사랑하는지 그런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느끼는 기쁨과 육체가 맛보는 기쁨을 구별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육체적으로 이성을 사랑하지 않고 정신적으로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자기가 살아하는 여인의 아름다움 즉 그 여인의 웃음, 미소, 머리를 가누는 모양, 여러 가지 일들을 대하는 태도, 이러한 것들을 해부하거나 하는 것이 남자에게 있어서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결국 어떤 처녀이거나 좋은 옷을 입었을 때에는 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입술 연지나 볼 연지에는 여인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또 미용의 지식에서 오는 정신적인 차분함이나 고요함이라는 것도 있다. 이런 느낌은 곱게 단장한 그 처녀 자신에게 있어서는 진실하고 뚜렷한 것이지만, 세상의 정신주의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이런 심정은 전혀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육신을 지닌 몸이기 때문에 육체와 정신을 딱 갈라 놓는 차이란, 있다면 정신의 세계에서 높이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무시하고 그런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촉각, 청각, 시각에는 도덕성이라든가, 비도덕성이라는 것은 없다.

 인생의 적극적인 기쁨을 받아들일 힘이 없어지는 것은 주로 관능적인 감수성이 줄었기 때문이며, 또는 만족스럽게 그것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이란 매우 많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공연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그보다는 재빠르게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동서양의 모든 위대한 인생 애호자들의 쓴 글 가운데에서 다소의 문례를 뽑아서 그들이 스스로 즐거운 한때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또한 그들이 귀로 듣거나 코로 맡거나 눈으로 보는 그런 소중한 감각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가를 고찰해 보자.

 다음에 인용하는 것은 숲의 시인인 도로우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얻은 시취이며, 굉장히 심미적인 감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귀뚜라미는 돌틈어가 얼마든지 있다. 한 마리뿐이라면 더욱 흥취가 깊다. 그 울음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무언지 모르게 유장한 놈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승에서의 짧은 동안의 목숨이 다하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생물의 운명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는 벌레 소리를 유장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한 헛되이 발버둥치며 허덕이는 인간의 번뇌를 생각할 때 그런 느낌도 도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디 온갖 시간의 관념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유장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봄의 욕정이나 여름의 광열이 한창일 때에 홀로 가을의 서늘함과 원숙함을 연상하게 해 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새를 향해 귀뚜라미는 말한다. "너희들은 어린이들처럼 일시적 충동으로 울고 있구나. 자연은 너희들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원숙한 슬기가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계절의 변화는 없다. 우리들은 4계절의 자장가를 부르는 것이다. " 그리하여 그들은 노래한다. 풀숲에서 영원한 노래를. 미리 그것이 천국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을 새삼스럽게 끌어올려 천국으로 보내려고 할 필요도 없다. 5월에도 11월에도 영원히 변함이 없다. 안 그런가?

 고요한 슬기, 그 노래에는 산문과 같은 확실성이 있다. 술은 마시지 않지만 이슬을 마신다. 교미기가 지나면 사라지는 속절없는 사랑의 선율이 아니다. 신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원히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4계절의 변천하는 테두리 밖에서 그 가락은 진리와 같이 변하지 않는다. 마음이 그지없이 고요하게 맑은 그 마음으로만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

 휘트먼이 지녔던 후각, 시각, 청각이 그의 정신성을 높이는 데에 얼마만한 힘이 되었는지, 그리고 또한 그가 그러한 감각들을 얼마나 중대시했는지, 다음의 글에서 찾아내어 보라.

 아침부터 내리는 눈보라는 온종일 그칠 줄 모른다. 휘날리는 눈을 맞으며 같은 숲, 같은 길을 두 시간 가량이나 나는 걸었다. 바람은 멎었다. 그러나 소나무 사이로 낮은 음악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매우 뚜렷한 이상한 소리, 마치 폭로 떨어지는 소리 같다. 때로는 다시 흘러 떨어지는 듯한 소리, 온갖 감각, 시각, 청각, 후각의 형용하기 어려운 기쁨, 눈은 내려 쌓인다. 상록수, 물푸레나무, 월계수, 그 밖의 모든 나무라는 나무의 수많은 잎과 가지 위에 쌓이고 쌓여 잎사귀는 하얗거나 부풀어 오르고 에머랄드 빛깔의 가장자리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방에 빽빽이 들어찬 청암송의 높고 꼿꼿한 기둥...... 아려한 송지 냄새가 눈 냄새와 한데 섞인다(냄새가 없는 것은 없다. 눈까지도 향기는 있다. 다만 여러분이 냄새를 맡아 낼 수 있느냐가 문제다. 똑같은 두 장소란 없고 또 시간의 경우에도 한 때와 한 때는 어딘지 다르다. 전혀 같을 수는 없다. 정오와 한밤중, 겨울과 여름, 바람이 부는 한 때와 조용한 한 때, 그 향기가 얼마나 다른가!)

 정오와 한밤중의 향기, 겨울과 여름의 향기, 바람 부는 한때와 고요한 한때에서 풍기는 향기를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시골에서 사는 것보다 도시에서 사는 편이 대개 불쾌하다는 것은 도시의 시각, 후각, 청각의 변화와 뉘앙스가 시골보다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바라보나 단조로운 잿빛 담장과 시멘트를 깐 보도 속에 그것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른바 흐뭇한 한 때의 참된 한계, 참된 자격, 참된 성질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을 따지게 되면 중국인과 미국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 절에서 소개하는 어느 중국 학자가 쓴(유쾌한 한때에 관한 33절)을 번역하여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주기 전에 그가 쓴 글과 비교하는 뜻에서 휘트먼의 글 가운데서 다시 대목을 인용할 생각이다. 이 글을 읽으면 중국인의 감각과 닮은 점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맑게 갠 상쾌한 어느 날, 공기는 마르고 바람은 산들거리며 산소로 가득차 있다. 나를 감싸고 나를 녹이는 건전하고 말 없는 아름다운 갖가지 기적들...... 나무, 물, 풀, 햇빛, 첫서리...... 그 가운데서 내가 오늘 가장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가을에 특유한 이상할 만큼 투명한 하늘이다. 구름이라고는 크고 작은 흰 구름뿐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이 푸른 하늘을 난다. 아침나절에는 줄곧(아침 일곱 시부터 열 한 시까지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빛은 투명하고 생생한 푸른빛이다. 그러나 한낯이 가까워지면 빛은 엷어져 두서너 시간 동안은 마치 잿빛이다...... 그리고는 점점 더 빛은 바래서 황혼으로 접어든다...... 커다란 나무가 서있는 언덕 위의 짬 사이로 찬란한 빛을 던지는 낙조를 바라본다. ..... 불꽃의 방사, 장대한 담황색 경관, 그리고 붉은빛이다. 수면에 비스듬히 넓은 은빛 광택...... 맑게 가라앉은 그림자, 사광, 섬광, 그림으로도 그려낼 수 없는 선명한 색조.

 굉장히 흐뭇한 가을의 몇 시간 동안 분명히 나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무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주로 이 하늘이 있기 때문에 가을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뒤로 날마다 하늘을 보지만 제대로 똑바로 참다운 하늘을 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간들을 더 바랄 나위 없는 유쾌한 한때라고 말할 수 없겠는가. 예전에 읽은 일이 잇는데 시인 바이런은 숨을 거두기 전에 친구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전 생애를 통해서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는 단 세 시간밖에 없었노라고 했다고 한다. 이와 똑같은 내용의 임금님의 종에 관한 오랜 전설이 독일에도 있다. 가까운 문밖으로 나가 숲의 나무 사이로 빛나는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바이런과 종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러자 자신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었다(매우 즐거웠던 한 때의 기억을 기록해 본 일이라곤 없다. 그런 순간을 맞게 되면 메모를 쓰느라고 모처럼의 아름다운 느낌을 잃게 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나는 그저 기분에 맡길 따름이다. 마음내키는 대로 간다. 고요한 황홀감 속에 몸을 내맡긴 채).

 그러나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그런 순간의 하나를 말하는 것인가. 또는 그것과 비슷한 한 때를 말하는 것인가. 굉장히 미묘하여‥… 삽시간에 사라지는 색조인가, 뭐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내키는 대로 알지 못하는 즐거움을 즐기게 해 주소서. 신이여, 당신은 그 투명한 짙푸른 심연 속에 나와 같은 환자를 위한 명약이 있나이까(오, 편안하지 못한 몸의 상태와 마음이 번거로움이 지난 3년 동안 계속되었나이다). 신은 대기를 통하여 나에게 신묘한 명약을 남 몰래 떨어뜨려 주셨나이까.

 임어당 의 생활의 발견에서

이해와 감상

 임어당의 생활철학은 미래보다 현실에 중점을 두고 있다가 지적하여거니와, 그렇다고 이상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인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은 이른바 '이상'을 추구하는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진실로 영원한 것 또는 진실로 절대적인 것은 끝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는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를 극복해야 할 무엇이라고 믿는 까닭에 보다 나은 삶에 대한 동경을 단념할 수가 없다. 이러한 보다 나은 삶에의 동경과 추구가 그의 모든 에세이를 궤뚫고 있는 기본 테마이다.

 이상의 세계를 어떠한 방향으로 구하는가는 각 개인의 성격과 환경을 따라서 여러 가지로 결정될 것이다.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을 빌려 영원한 것을 잡으려고 할 때 종교적인 이상의 추구될 것이며, 스스로의 인간적인 노력을 통하여 보다 아름다운 지상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꾀할 때는 도덕적인 이상이 추구될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현실의 세계 안에 현실의 개조를 통하여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상의 세계 안에서 창조하고자 꾀할 때는 예술적인 이상이 추구될 것이다. 이상의 세계를 어떤 방면에서 구하더라도 그 이상의 실현을 위한 노력의 초점이 되는 것은, 또는 그 이상 실현의 전제 조건으로서 요청되는 것은 스스로의 인격의 향상이다. 비록 절대자(신)에 의지하여 구제의 길을 얻으려 할 경우에도 현실적인 노력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내 자신의 인격을 향상시키는 일이다. 예술을 통하여 짧은 인생에 긴 생명을 담아 주고자 꾀할 경우에도 내 인격의 향상이 그 바탕이 될 것이다. 예술 방면에 대성하기 위하여서는 비상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예술작품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란 결국 인간 정신 속에 조성된 아름다움의 표현이라는 점으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상을 향하여 접근하는 원동력으로서의 내 인격의 무게를 저울질할 때, 그리고 이상 실현의 선결 목표로서 내 인격의 향상을 희구할 때 우리가 또다시 부닥치는 것은 내 사람됨이 어리석고 옹졸함이요, 동물이 인간에 붙어 다니는 가지가지의 제약이다.

 우리가 어떤 인격을 '위대하다'고 할 때 그 말이 언제나 똑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인격에는 적어도 한 가지 특색은 있는 듯이 보이는데, 그 특색이란 상식적인 의미의 '나'에 대한 애착이 지나치지 않다는 것, 즉 대아(大我)의 성품을 지닌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앞날에 대한 확고한 보장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이러한 효과가 생기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뜻하지 않은 불운의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날에 대한 보장이 주어지지 않았다 해서 만사를 될대로 돼라고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운명을 거역할 수는 없음을 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운명에만 내맡길 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저러한 결과가 생기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 결과를 지향함이 옳다고 믿는 까닭에 힘을 다하여 그 길을 시험해 볼 따름이다. 시험하던 일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았을 때 슬픔에 잠기는 대신 스스로의 실패를 웃음으로 바라볼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저 인간적인 것 중에도 가장 인간적인 기분인 유머를 즐기게 된다.

 20세기의 석학인 임어당은 가난과 절망의 속에서도 언제나 유머는 잃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생활 수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내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할 때, 내 아내가 병이 나서 입원했다. 돈은 완전히 떨어지고, 아내의 물건까지 다 내다 팔아 이제는 끼니조차 어렵게 되었다."고 생활의 고달픔과 어려움을 파악하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스스로의 결단력과 의지, 생활에의 신념과 자부로써 이겨 나가고 있었다. '나'에 대한 사랑이 내 힘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운명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하여 심기일전의 용기와 신념의 계기를 마련한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힘의 한계를 짐작하면서도 꾸준히 할 일을 계속하고, 그 일을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저주대신 사랑으로써 운명을 대할 마음의 여유를 가질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임어당이 말하는 '서정 철학'이다. 그는 '생활의 발견'을 펴내면서 이 책의 부제(副題)를 '현대생활과 서정철학'이라고 붙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은 '나'라는 사람은 철학의 객관성이라는 것을 오히려 경멸하는 자이다.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객관적 진리보다는 오히려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서정 시적이라는 말을 개성이 강한 독자적 견해라는 뜻으로 해석해서 이 책을 '서정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책을 집필하는데 나를 가르치고 나에게 조언을 주고, 나에게 힘이 되어 준 몇 사람의 지기지우(知己之友)가 있다. 즉 8세기의 백난천, 11세기의 소동파, 16세기 및 17세기의 독창적인 인물의 대집단, 그리고 로맨틱하고 쾌변가(快辨家)인 도적수(屠赤水), 놀기 좋아하고 독자적인 원중랑(袁中郞), 민감하고 쾌변가인 장조(張潮), 엉터리 수작을 잘하는 해학가며 흥분가인 김성탄(金聖嘆)……이 모두가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지기지우라기보다는 내가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들로 장자가 있고 도연명이 있다. 나는 때로 이런 인물들의 말을 직접 인용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내가 내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때에도 사실은 그들 선철(先哲)의 대변(代辯)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또한 한 사람의 중국인으로 서뿐만 아니라 근대 생활을 영위하는 한 근대인으로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듯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인들'의 모습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슬기를 찾고 있다. 그것이 곧 유머감각을 터득하고 여유의 멋을 일깨워주는 서정 철학이 아니겠는가. 임어당은 말한다. "보다 중요한 현실주의로 이상주의를 억제할 수 있다는 그 점이다."      

참고 자료

임어당(林語堂) 린위탕 (1895-1976)

중국의 소설가 ·문명비평가.

 원이름은 위탕[玉堂]. 푸젠성[福建省] 룽치[龍溪]의 가난한 목사 집안 출신. 상하이[上海]의 성 요한대학[聖約翰大學] 졸업 후 베이징 칭화학교[北京淸華學校] 영어교사가 되었다. 1919년 하버드대학에 유학, 언어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1921) 예나, 라이프치히 두 대학에서 수학했다.

 1923년 귀국하여 국립 베이징대학 영문학 교수가 되었는데, 음운학(音韻學)을 연구하는 한편 루쉰[魯迅] 등의 어사사(語絲社)에 가담하여 평론을 썼다. 1926년 군벌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아모이[厦門]대학 문과 주임, 이듬해 우한정부[武漢政府]에 가담하여 그 외교부 비서가 되었다.

 1932년 유머와 풍자를 주장하는 《논어》, 1934년 소품문지(小品文誌) 《인간세(人間世)》 등을 창간, 소품문을 유행시켰으며, 1935년 평론집 《나의 국토 나의 국민 My Country and My People(我國土我國民)》을 쓰고, 이듬해 영국으로 가서 《생활의 발견 The Importance of Living》(1938) 등으로 중국문화를 소개하였다. 소설 《Moment in Peking(北京好日)》(1937) 《폭풍 속의 나뭇잎 A Leaf in the Storm》(1941) 등에서는 근대중국의 고민을 표현하였다.

 영문 저작으로는 모국문화의 옹호, 중국문으로는 모국의 속물성(俗物性)을 풍자하였으며, 뛰어난 세계문화 창조에는 상식 ·이성(理性)·생활감정 등을 교묘하게 조화하는 중국정신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미래소설 《The Unexpected Island》(195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자유주의자로 불리며 세계정부를 제창하였다. 1970년 6월, 제37차 국제 펜클럽 대회 참석차 한국에 왔었다.

보조 자료

 임어당(1895∼1976)은 상해의 세인트 존슨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 라이프치히 대학에 유학하여 언어학을 수학하였다. 귀국 후 북경대학 영어 교수를 거쳐 북경사범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불순교수'로 지목되어 북경으로부터 추방당했다. 1926년의 3.18사건 이후는 북경의 군벌정부에 반대하여 아모이〔厦門〕대학으로 옮겼으나, 무한(武漢)혁명정부가 성립하자 참가, 외교부 비서가 되었다. 무한정부 해체 후는 상해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1932년 그는 유머 잡지 '논어'를 창간했으며, 이 무렵부터 그의 기지에 넘친 풍자적 문필 활동이 크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후 미국에 건너가 구미인 상대로 중국 문화를 소개하는 저작에 착수 '나의 국토 나의 국민', '생활의 발견', '사랑과 풍자' 등을 영문으로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 소설 '북경호일(北京好日)', '마른 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있다' 등을 써서 항일 운동에 기여하였으며, 국민당을 지지하고 반공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948년 유네스코 예술부장, 1953년 UN총회 중국 대표 고문, 1954년 남양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임어당의 문명(文名)을 떨치게 한 에세이들은 그의 생활철학과 인생에 대한 체험을 위트와 유머로 재치있게 피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맹목적인 국수주의에서 탈피하여 세계주의, 즉 어느 민족에게나 공통된 보편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미래보다는 현실에 중점을 두는 그의  인생철학은 서정적이며 정통적인 것이다. 정통적이란, 중국 고유의 정통철학에 입각했음을 뜻함인데, 고루하고 진부한 것에는 유머와 냉소로 도전하였으나 진취적인 것에는 고무와 격려로 이를 추진시키고 있다.

이상 전집 1. 시

Posted by 히키신
2017. 3. 12. 18:39 글쓰기와 관련하여

이상 전집, 권영민 엮음, 문학에디션뿔, 2009

 

<정식>

 

정식

웃을수있는시간을가진표본두개골에근육이없다

 

정식

너는누구냐그러나문밖에와서문을두다리며문을열라고외치니나를찾는일심이아니고또내가너를도무지모른다고한들나는차마그대로내어버려둘수는없어서문을열어주려하나문은안으로만고리가걸린것이아니라밖으로너는모르게잠겨있으니안에서만열어주면무엇을하느냐너는누구기에구태여닫힌문앞에탄생하였느냐

 

<무제>

 

내 마음에 크기는 한개 궐련 기러기만하다고 그렇게보고,

처심은 숫제 성냥을 그어 궐련을 붙여서는

숫제 내게 자살을 권유하는도다.

내 마음은 과연 바지작 바지작 타들어가고 타는대로 작아가고,

한개 궐련 불이 손가락에 옮겨 붙으렬적에

과연 나는 내 마음의 공동에 마지막 재가 떨어지는 부드러운 음향을

들었더니라.

 

처심은 재떨이를 버리듯이 대문 밖으로 나를 쫓고,

완전한 공허를 시험하듯이 한마디 노크를 내 옷깃에남기고

그리고 조인이 끝난듯이 빗장을 미끄러뜨리는 소리

여러번 굽은 골목이 담장이 좌우 못 보는 내 아픈 마음에 부딪혀

달은 밝은데

그 때부터 가까운 길을 일부러 멀리 걷는 버릇을 배웠 드니라.

 

*-삼차각설계도

<선에관한각서 6>

 

숫자의방위학

**4 4 4 4

숫자의역학

시간성(통속사고에의한역사성)

속도와좌표와속도

***4+4

4+4

4+4

4+4

etc

 

 사람은정력학의현상하지아니하는것과똑같이있는것의영원한가설이다, 사람은사람의객관을버리라.

 주관의체계의수렴과수렴에의한*오목렌즈.

 

4 제4세

4 1931년9월12일생.

4 양자핵으로서의양자와양자와의연상과선택.

 

 원자구조로서의모든운산의연구.

 방위와구조식과질량으로서의숫자와성상성질에의한해답과해답의분류.

 숫자를대수적인것으로하는것에서숫자를숫자적인것으로하는것에서숫자를숫자인것으로하는것에서숫자를숫자인것으로하는것에

 (1 2 3 4 5 6 7 8 9 0 의질환의구명과시적인정서의기각처)

 

 (숫자의모든성상 숫자의모든성질 이런것들에의한숫자의어미의활용에의숫자의소멸)

 

 수식은광선과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는사람과에의하여운산될것.

 

 사람은별ㅡ천체ㅡ별때문에희생을아끼는것은무의미하다, 별과별과의인력권과인력권과의상쇄에의한가속도함수의 변화의조사를우선작성할것.

 

*'삼차각'은 수학 용어로서는 부정확한 말이다. 수학에서 말하는 '각(角)'이라는 것은 3차원 이상의 공간에서도 언제나 2차원 평면에서의 '각'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삼차각'이란 수학적 개념이라고 하기 어렵다. 다만 세 모서리가 만나는 각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본디 위의 시에서 숫자의방위학 다음의 4는 차례대로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뒤집어져 있으며, 속도와좌표와속도 다음의 4+4 역시 그 방향이 제각각 뒤집어진 채로 쓰여졌다. 이는 숫자 '4'와 같은 방위 표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시하면 방향이 서로 달라진다는 것을 기호로 표시한 것이다. 또한 4+4의 수식은 물리학의 기본을 이루는 물체의 운동량을 힘(속도)와 방향으로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목렌즈' 를 시에서는 기호로 표시하였다.

 

-삼차각설계도

<선에관한각서 7>

 

 공기구조의속도ㅡ음파에의한ㅡ속도처럼330미터를모방한다(광선에비할때참너무도열등하구나)

 

 빛을즐기거라,빛을슬퍼하거라,빛을웃어라,빛을울어라.

 

 빛이사람이라면사람은거울이다.

 

 빛을가지라.

 

 ㅡ

 

 시각의이름을가지는것은계획의효시이다. 시각의이름을발표하라.

 

  이름

 

 △의아내의이름(이미오래된과거에있어서의 AMOUREUSE는이와같이도총명하니라)

 

 시각의이름의통로는설치하라, 그리고그것에다최대의속도를부여하라. 

 

 ㅡ

 

 하늘은시각의이름에대하여서만존재를명백히한다(대표인나는대표적인일례를들것)

 

 창공, 추천, 창천, 청천, 장천, 일천, 창궁(대단히갑갑한지방색이아닐는지)하늘은시각의이름을발표하였다.

 

 시각의이름은사람과같이영원히살아야하는숫자적인어떤일점이다, 시각의이름은운동하지아니하면서운동의코오스를가질뿐이다.

 

 ㅡ 

  

 시각의이름은빛을가지는빛을아니가진다, 사람은시각의이름으로하여빛보다도빠르게달아날필요는없다.

 

 시각의이름들을건망하라.

 

 시각의이름을절약하라.

 

 사람은빛보다빠르게달아나는속도를조절하고때때로과거를미래에있어서도태하라.

 

*-건축무한육면각체

**<출판법>

 

 Ⅰ

 

 허위고발이라는죄목이나에게사형을언도했다. 자태를감춘증기속에서몸을가누고나는아스팔트가마를비예하였다.

 ㅡ직에관한전고한구절

 ***기부양양 기자직지(其父攘羊 其子直之)

  나는안다는것을알아가고있었던까닭에알수없었던나에대한집행이한창일때나는다시금새로운것을알아야만했다.

  나는새하얗게드러난골편을주워모으기시작했다.

  '거죽과살은나중에라도붙을것이다'

  말라떨어진고혈에대해나는단념하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Ⅱ 어느경찰탐정의비밀신문실에서

 

 혐의자로검거된남자가지도의인쇄된분뇨를배설하고다시금그걸삼킨것에대해경찰탐정은아는바가하나도있지않다. 발각될리없는급수성소화작용 사람들은이것이야말로술이라고말할것이다.

 '너는광부에다름이없다'

 참고로부언하면남자의근육의단면은흑요석처럼빛나고있었다고한다.

 

 

Ⅲ 호외

 

 자석수축하기시작하다

 원인극히불분명하나대외경제파탄으로인한탈옥사건에관련되는바가크다고보임. 사계의요인들이머리를맞대고비밀리에연구조사중.

 개방된시험관의열쇠는내손바닥에전등형의운하를굴착하고있다.

 곧이어여과된고혈같은강물이왕양하게흘러들어왔다.

 

 

Ⅳ 

 

낙엽이창호를삼투하여내정장의자개단추를엄호한다.

 ****<암살>

지형명세작업이아직도완료되지않은이궁벽한땅에불가사의한우체교통이벌써시행되었다. 나는불안을절망했다.

 일력의반역적으로나는방향을잃었다. 내눈동자는냉각된액체를잘게잘라내며낙엽의분망을열심히방조하는수밖에없었다.

 (나의원후류에의진화)

 

*'육면각체'라는 용어는 수학에서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정육면체나 정사면체는 '삼면각체'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섯 개의 면이 만나는 입체라는 무리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오일러의 다면체 공식(v-e+f=2)'에 의하면 육면각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무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경우, '무한육면각체'를 여섯개의 면이 한 점에서 만나고 반대쪽으로 무한이 벌어진 입체라고 볼 경우 그 존재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 (김명환, <이상 시에 나타나는 수학기호와 수식의 의미>, <<이상 문학 연구 60년>>, 권영민 편, 180~181쪽 참조.) 여기서 '육면각체'를 '육면체'로 볼 수 있다면, 수많은 육면체가 결합된 형태로 이루어진 현대건축의 기하학적 모형을 상징하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제목으로 내세워지고 있는 '출판법'은 글자 그대로 인쇄 출판의 방법을 의미하는 이른바 타이포그래피(typography)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지만, 출판과 인쇄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의미하는 각종 규범들, 특히 식민지 시대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강행하였던 언론 출판에 관한 검열제도(censorship)의 문제를 우회적(迂廻的)으로 비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편에 등장하는 구절을 패러디한 부분이다. 논어 원문에서, '其父攘羊 而子證之(기부양양 이자증지)'를 '其父攘羊 其子直之(기부양양 기자직지)'라고 고쳐 써놓았다. 이렇게 고침으로써,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그 아들이 그것을 증언하였다.'는 뜻에서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그 아들이 그것을 바로잡았다.'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타이포그래피에서는 공자의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인간적 도리와 정서 같은 것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조판 과정에서 식자공(植字工)이 잘못 조판된 것을 원고에 따라 교정하여 바로잡는 과정은 엄격성과 정확성을 기본으로 한다.

 

****박스 속의 '암살(暗殺)'이라는 글자는 종이에 글자가 인쇄된 모양을 기호로 표시한 것임.

 

-건축무한육면각체

*<차8씨의출발>

 

균열이생긴장가이녕의땅에한대의곤봉을꽂음.

한대는한대대로커짐.

수목이자라남.

 이상 꽂는것과자라나는것과의원만한융합을가르침.

사막에성한한대의산호나무곁에서돼지같은사람이생매장당하는일을당하는일은없고쓸쓸하게생매장하는것에의하여자살한다.

만월은비행기보다신선하게공기속을추진하는것의신선이란산호나무의음울함을더이상으로증대하는것의이전의일이다.

  **윤부전지(輪不輾地) 전개된지구의를앞에두고서의설문일제.

곤봉은사람에게지면을떠나는아크로바티를가르치는데사람은해득하는것은불가능인가.

 ***지구를굴착하라.

   동시에

 생리작용이가져오는상식을포기하라.

 열심으로질주하고 또 열심으로 질주하고 또 열심으로질주하고 또 열심으로질주하는 사람 은 열심으로질주하는 일들을 정지한다.

 사막보다도정밀한절망은사람을불러세우는무표정한표정의 무지한한대의산호나무의사람의발경의배방인전방에상대하는자발적인공구때문이지만사람의절망은정밀한것을유지하는성격이다.

 지구를굴착하라

   동시에

 사람의숙명적발광은곤봉을내어미는것이어라*

    *사실차8씨는자발적으로발광하였다. 그리하여어느덧차8씨의온실에는온화식물이꽃을피우고있었다. 눈물에젖은감광지가태양에마주쳐서는히스므레하게빛을내었다.

 

*이 작품은 제목에 드러나 있는 '且8氏'에 대한 수많은 해석과 함께 이상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난해시의 하나로 지목되어 왔다. 특히 이 작품을 성적 이미지로 확대하여 해석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상 자신이 그와 가장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한 사람인 화가 구본웅(具本雄)을 모델로 하여 그의 미술 활동을 친구의 입장에서 재미있게 그려낸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且8氏'는 구본웅의 성씨인 '구(具)씨'를 의미한다.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된 '8'을 한자로 고치면 '팔(八)'자가 된다. 그러므로 '구(具)'자를 '차(且)'와 '팔(八)'로 파자(破字)하여 놓은 것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더구나 '차(且)'자와 '8'자를 글자 그대로 아래위로 붙여 놓을 경우에는 그 모양이 구본웅의 외양을 형상적으로 암시한다. 이것은 구본웅이 늘 쓰고 다녔던 높은 중산모의 모양인 '且'와 꼽추의 기형적인 모양을 본뜬 '8'을 합쳐 놓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구본웅을 지시하는 말은 또 있다. '곤봉(棍棒)'과 '산호(珊瑚)나무'가 그것이다. '곤봉'은 그 형태로 인하여 남성 상징으로 풀이된 경우가 많지만, 가슴과 등이 함께 불룩 나온 구본웅의 외양을 보고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말은 '구본웅'이라는 이름을 2음절로 줄여서 부른 것이므로, '말놀이'의 귀재였던 이상의 언어적 기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산호나무'라는 말도 역시 구본웅의 마른 체구와 기형적인 곱사등이의 형상을 산호나무의 모양에 빗대어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은 <장자(莊子)>의 '천하편'에서 인유(引喩)한 것이다. 원문은 "윤부전지(輪不蹍地)"이며, 그 의미는 '바퀴의 둘레서 땅에 닿는 곳은 한 점에 지나지 않으며 둘레가 아니다. 그러므로 바퀴는 땅을 딛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이 작품에서는 '윤부전지(輪不蹍地)'의 '전(蹍)'을 '전(輾)'으로 바꾸어 쓰고 있는데, 그 의미도 '수레바퀴는 땅에 구르지 않는다.'로 변하게 된다. 이 구절을 통해 인유하고자 하는 것은 구본웅의 걸음제라고 할 수 있다. 커다란 중산모를 쓰고 걸어가는 구본웅의 모습을 그의 성씨인 '구(具)'를 다시 파자하여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且)'와 '8'이라는 글자의 결합은 '且'의 아래쪽에 '8'을 세운 형태가 된다. 여기서 '且'자의 아래에 '8'자를 뉘어놓으면 수래 아래 두 바퀴가 붙어서 땅 위로 굴러가는 모양이 되지만, '8'자가 '且'밑에 서 있는 모양으로 되면 바퀴가 굴러가는 모습을 이루지 못한다. 참으로 재미있게 '문자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구절의 패러디는 바로 뒤에 오는 "棍棒은사람에게地面을떠나는아크로바티를가르치는데사람은解得하는것은不可能인가."로 이어진다. 구본웅이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모자(且) 아래 '8'자가 서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지구의 굴착'은 구본웅이 조각을 하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임.

 

*<최후>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 최후.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이 작품은 근대과학의 등장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 문명이 오히려 인간의 정신을 억압할 수 있다는 점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상 문학의 중심적 주제와 맞닿아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대목은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에 관련된 일화를 패러디하고 있다. 뉴턴의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근대적 계몽사상의 근거를 만들어낸다.

윌리엄 제임스

Posted by 히키신
2017. 3. 9. 19:57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자꾸만 산만해지는 정신을 자발적으로 다잡을 수 있는 능력은 판단력과 성격, 의지를 만드는 깊은 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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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대니얼 호손

Posted by 히키신
2017. 3. 9. 19:55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전기의 도움을 받으면,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이 거대한 신경이 되어 눈 깜짝할 사이 수천 마일 진동할 수 있다. 이것은 과연 사실일까, 아니면 내가 꿈을 꾼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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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심리와 관련하여...

Posted by 히키신
2017. 3. 9. 19:39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게스트 하우스와 같다. 아침마다 새로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기쁨, 우울함, 비열함, 그리고 몇 가지 찰나의 인식이 예고 없는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 전부 환영해 주고 즐겨라. 모든 손님을 훌륭하게 접대하라. 어두운 생각, 수치심, 악의가 담긴 마음, 모든 문간에서 웃으며 맞이하고 들어오라고 하라. 누가 오든 고마워하라. 모두 저 멀리에서 가이드가 보낸 손님들이니까.
- 루미 Rumi

한 사람에게는 수많은 사회적 자기가 있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종류마다 각자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 윌리엄 제임스, <심리학의 원리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정신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자기 조절 시스템이다. 구성 요소들끼리 서로 다투고 경쟁을 벌이고 모순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 상태다. 서로 상반되는 부분들끼리 화해시키는 것이 주된 문제다. 그러므로 다른 부분은 적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다른 나'이다.
- 칼 구스타프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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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키츠

Posted by 히키신
2017. 3. 9. 18:41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환상이었나, 아니면 꿈속을 거닐었던가?
사라졌구나, 그 노랫소리는
나는 깨어 있는가, 자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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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 로렌스

Posted by 히키신
2017. 3. 9. 18:31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면, 마음은 질식해 버린다. 기억은 다시 평범한 상황이 올 때까지 하얀 백지로 남아 있다.
- <지혜의 일곱 기둥 Seven Pillars of 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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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

Posted by 히키신
2017. 3. 7. 21:14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김영사, 2014


1확신과 성찰

p44

한국 사회에 있어서아마 그 상실이 가져오는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예의의 상실에서 오는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의 증가일 것이다. (...) 의례가 사람의 삶의 순진한 풍부함을 보증하여 준다는 것이다사람은 마음으로 존재하기 전에 몸으로 바르게 존재하여야 한다


2이성의 방법과 서사

p69~71

확신의 근거

(...)되풀이하여사고의 명증성과 확실성은 진리의 보장으로서 보편성을 갖는 것인가세상에서 사람들이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사유와는 관계없는 경우도 많다. (...) 어떤 때 조금 더 논박하기 어려운 확실성의 증거는 어설픈 논리보다는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스토아 철학자 제논은 모든 확실한 지식은 특별한 지각적 인상ㅡ그 체험의 질과 성격에 있어서 저절로 참이라고 느껴지는 데에서 오는 확신에 기초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확신이라고 한 것은 카탈렙시스(Katalepsis)의 번역인데이것은 그 이외에도그 말을 현대에까지 확대하여 생각하면심신이 굳어서 움직임이 어려워지는 강경증(catalepsy)을 의미할 수 있다확실한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유연성을 잃고 그리하여 논리적 또는 이성적 설득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직 상태를 말할 수도 있다물론 이 경직 상태가 반드시 진리로부터 이탈을 증표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의 제논의 카탈렙시스는 미국의 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이 설명한 것을 빌려온 것인데그는 이와 관련하여고통의 경험을 통하여 사랑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된 것과 같은 경우를 들고 있다. 사실 사랑의 경험에서도 그러하지만다른 개인적 체험에 있어서도그것이 참으로 그렇다는 느낌은 그것 자체가 진리의 보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경우들이 있다그러나 많은 경우 그러한 느낌은 우연하고 일시적인 현상이라기보다도 오래된 체험의 한 절정으로서 일어나는 것이다그것은 개인의 깊은 체험과 체험이 매개하는 인간 현실 또 거기에 개입되는 외부적 세계에 대한 복합적 의미를 밝혀주는 듯한 순간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 이것은 사실 깨달음을 수반하는ㅡ즉 직관적인 형태일망정성찰의 계기를 지닌 직접 체험이다.

 데카르트의 경우에도 이 명증성의 기준은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그가 기준으로 내세운이성의 빛에서만 나오는맑고 주의 깊은 마음의 확실한 생각은 이성적 기준인 듯하면서도 강한 감각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을 놓치기 어렵다여기에는 일종의 카탈렙시스적 체험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물론 그러한 경우에도 그것은 다른 경우보다도 과학의 세계에서의 객관적 업적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라는 이유로 하여 그 점을 분명히 드러내주지 않는다그러나 데카르트가 중요한 철학자가 되게 하는 것은 과학이나 철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적 진실에 충실하고 그의 사고가 그의 삶 전체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p90

이성 체험의 카탈렙시스(katalepsis; 확신)


p91~92

결국 이성적인 것도 감각적 흐름의 삶 속에서 발견되고 또 감각적으로 체험되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또 그럼으로써만그것은 삶에 대하여 살아 있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이성의 개념은 현상으로서의 세계나 감각적 체험에 대응하는 것이어서 마땅하다세계의 실체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이성의 활동이라고 하더라도우리가 아는 세계는 이 이성의 활동과 어떤 질료와의 맞부딪침에서 생겨난다이 부딪침에서 세계를 초월하는 지적인 세계에 대한 긍정이 일어난다.


에피파니(epiphany; 顯現[현현])의 역사

p94

문학의 서술은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을 기술하면서도 대개의 경우 그것을 보다 높은 어떤 본질적인 것의 계시인 것처럼 제시하려고 한다문학적 서술특히 시적 서술이 형이상학적 전율(frisson metaphysique)을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러한 관련에서이다이 전율이 일어나는 사건을 제임스 조이스는 에피파니라고 부른다에피파니는ㅡ사물의 본질의 계시가장 하잘것없는 사물의 혼이 환히 밝아지는 순간을 말한다. 여기의 요점은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이 직접적으로 다른 지적인(intelligible) 한 세계에 마주치는 듯한 경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체험이성도덕적 이성

p97~99

데카르트 이후 유럽의 주된 조류가 된 카르테시아니슴(cartesianism)에 대한 비판을 체계화한 최초의 이론가의 한 사람은 비코이다그에게는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의지에 방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이성의 추상적인 보편성이 아니고 어떤 집단인민민족 또는 인류 전체가 이루는 공동체가 드러내 보여주는 구체적 보편성이다. 데카르트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되는 과학적 이성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지금도 계속된다방금 인용한 것은 20세기에 와서 윤리와 문화의 원리로서의 과학적 이성이 부족함을 비판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원리를 정리하고자 한 한스 게오르크 가디머가 요약한 비코의 입장이다비코가 과학적 이성에 대체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의 양식(공통감각, sensus communis)인데이것은 가디머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인문주의의 전통에서 삶의 지혜프로네시스나 프루덴티아에 통하고또 이러한 지혜가 언어에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는 점에서능변(eloquentia)에 통하는 것이다그러한 주장들은 물론 적절한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데카트르적 이성이 인간의 사회적 삶에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그것은 다시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된다.

 (...) 데카르트의 관심이 과학적 이성과 그 가능성을 향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그것은 그에게 보다 큰 이성의 일부를 이루는 것일 것이다. (...) 어느 쪽이나그것은 위에서 인용한 데카르트의 말대로반복된 명상 또는 사고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그리고 덧붙이면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업적에 대한 새로운 검토를 요구한다이것은 다시 말하여 계속적인 정신의 훈련ㅡ그리고 이것도 덧붙인다면현실 행동의 훈련ㅡ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것은 아마 일생의 정신의 역정에 관계된 것일 것이다데카르트의 방법의 추구가 자전적 형식으로 쓰여 있는 것은 그의 방법이 간단한 학습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지속적인 삶의 훈련으로 얻어지는 것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그러나 그것이 삶의 훈련이기를 그치고 방법이 되어버린 것이 그 후의 역사에 있어서의 데카르트적인 전개라고 할 수 있다그리하여 그것이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3삶의 지혜

p113~4

 한 특정한 집단의 상식이 되어 있는 문화를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중국이나 서양이 범해 온문화제국주의의 원인이다여기에 대하여 단순한 문화다원주의는 문화의 다원성이나 쉬운 보편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그것은 또 대중문화에 있어서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심각한 의미에 있어서의 문화는 주체적 능력으로 존재한다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경우 자신의 문화의 주체적 능력으로써 그것을 대상화하거나 파편화하여 자신의 안에 흡수하는 것을 말한다진정으로 공동체적 상식의 보편화를 겨냥하는 것은 두 공동체가 주체가 되고 다시 갈등과 종합의 변증법적 과정의 고민을 통하여 하나의 보편적 주체로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p128~130

(...) 위의 것들은 학문 연구자 자신의 가치와는 관계없이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치 또는 가치 체계에 대한 분석의 방법을 말한 것이다여기에서 가치는 순수하게 가치가 정하는 정향에 부수하는 현실 관계 속에서만 분석되고 그 자체에 대한 판단과 선택은 조심스럽게 유보된다ㅡ적어도 베버의 주장은 그렇다그러나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이러한 엄정한 태도 자체가 가치 선택의 결과이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베버는 학문인의 바른 기능은 어떤 특정한 가치의 입장을 옹호하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엄정한 사실적 분석과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그것이 학문과 교육의 윤리이다교육자가 학생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윤리의 태도이다그러면서 그런 일에 성공할 경우 그리하여 학생들은 자신의 입장에 배치되는 좋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그리고 그 자신 이러한 엄정성ㅡ사실의 존중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도덕적 성취라고 부른다그리고 학생들로 하여금 가치와 사실을 있는 대로 엄정하게 이해하게 하여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하는 일은 교사가 도덕적 힘에 바르게 봉사한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이러한 발언에서 드러나듯이 베버의 가치중립의 태도는 이미 도덕적윤리적 선택을 나타내고 있다뿐만 아니라이 태도에는 다른 많은 가치가 함축되어 있다학문의 반성적 고찰이 이미 그러한 고찰을학문을 위하여사회를 위하여또 개인의 실천적 선택에서핵심적 가치로 선택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 거기에 여러 입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민주적 태도를 전제한다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입장과 관계없이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관용의 덕을 나타낸다.

 (...)

 베버의 방법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나 주어진 과제로서의 가치 현상을 다룰 때에사실을 존중하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이다이것은 방법이면서 삶 전체의 교양적 수련에서 생겨날 수 있는 전인격의 소산이다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입장에서는 습득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헤겔이 고전 언어나 학문의 습득 또는 장인들의 작업에서 요구되는 객체적인 것에 대한 헌신ㅡ자기소외라고 부를 수도 있는 헌신이 정신을 보편적인 것으로 높이는 역할을 한다고 한 데에 이미 그러한 과정에 대한 관찰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사실에 대한 과학적 태도는 도덕 교육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p132

물론 가치와 사실 사이에는 그리고개인적 자율과 집단적 의무 사이에는아무리 근접하는 경우라도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다그러나 이 심연을 받아들이면서실천적 선택에 있어서암묵적으로ㅡ그것은 이 모순으로 인하여 암묵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에ㅡ최대의 이성적 숙고를 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 숙고 자체가 깊은 도덕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숙고의 결과는필연의 요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남아 있어야 하지만불가피하게 그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이것은 이성이 그 자체로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또는 이성은 도덕 안에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원리가 된다이것은 개인의 자율성이 모든 도덕의 기초라는 칸트적인 명제를 확인하는 것이다즉 이성은 도덕적 가치로부터 초연할 때 그것은 가장 도덕적인 것이 될 수 있다물론 그것은 숨은 이해관계에 대하여서도 초연하여야 한다그때 그것은 도덕 안에서 숨은 이성이 된다


4성찰시각실존

p142~3

존 롤스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은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에서 중요한 흐름을 이룬 사회계약론을 계승하는 것이면서이 계약에서 이성적 요소를 적극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는자유롭고 동등하며 이성적인 개인들이 모여 선입견 없이ㅡ그렇다는 것은 자신이나 타인의 사회적 위치신분계급능력지능체력또는 선악관 등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즉 그가 무지의 베일이라고 부르는 공평한 정보의 상태에서 자신의 특권이나 불리함을 알지 못한다고 상정하고ㅡ공평한 사회 정의의 이념에 동의하기로 한다면두 가지 원칙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한다하나는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를 평등하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가령부와 권위의 불평등은 그것으로 모든 사람에게특히 가장 불리한 위치의 사회 구성원에 보상이나 이익이 돌아올 때만 정당화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부자가 부를 많이 누리게 된다면그와 동시에 그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에게도 이익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시된 두 개의 원칙은ㅡ또는 다른 원칙이라고 하더라도 그럴 것이다ㅡ간단히 제시되어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개인적집단적 성찰의 절차를 거쳐서 비로소 정당성의 원칙으로 정착될 수 있다가령 종교에 의한 차별 또는 인종 차별또는 부와 권력의 배분에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판단들이 여기에 어떻게 맞아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처음 상정된 상황과 나의 판단을 조정해 나가면서그 원칙을 시험하는 것이다이것이 나올 수 있는 성찰의 상태를 그는 성찰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이라고 부른다이것은 모든정의롭고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의 방법론의 역할을 한다이것은 일반화될 수 있다이러한 또는 어떤 윤리적인 원칙 또는 원리가 주어지면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신중하게 고려된 신념에 맞아 들어가는가 또는 그것의 연장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거기에 맞지 않는 경우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고칠 수도 있고최초에 설정한 상황이 옳은 것인가 또 거기에 추가해야 할 것이 있는가를 새로 검토할 수도 있다그리하여 상황의 설정과 판단과 원리 사이를 왕래하면서 원리와 우리의 판단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 이르게 될 수가 있다


p149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그는(너스바움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하다그리고 거기에는 서로 다른 원리가 작용한다하나는 성찰적 영역즉 비록 구체적인 사건에 의하여 자주 시정되어야 하는 것이기는 하나일반적 행동 원리와 숙고가 작용하는 영역이다그 다음에는 감정 이입과 상상력에 의한 공감을 요구하는 보다 구체적인 영역이 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해될 수 없는 개인의 실존적 영역이 있다


p154~6

지각적 균형의 예시를 설명함에서 너스바움이 예로 들고 있는 문학작품은 헨리 제임스의 <대사들(The Ambassadors)>이다. (...) 너스바움은 그(스트레더대사들에 등장하는 인물)의 열의에는 초연함이 있고무관심이 있고관측자의 무사공평함이 있다이것은 지각의 명료성을 위하여또는 지각의 균형을 위하여 불가피한 조건이다그것은 삶에 대한 독자나 작가의 자세는 감정의 깊이를 희생하여 시각적 명료성을 얻는어둡고난잡한 성적 정열에 빠져드는 것을 포기하는또는 경멸하는, ...... 그것을 단순화하고 독자의 관점에서 일반적 이야기로 줄여버리는......자세이다. 너스바움의 생각에는 스트레더가 유지하고 있는 초연한 자세지각의 도덕(the morality of perception)에 의지하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일이다스트레더의 태도로는 채드와 마담 드 비오네 사이에 존재하는 성적 사랑의 깊은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마련이다사랑이라는 것도너스바움의 해석으로는자신들의 관계의 내밀성으로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둘러 보는 것이라면그것은 참다운 사랑일 수 없다사랑의 이해는 지각의 또는 이성적 균형 속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맹목과 열림배타성과 일반적 관심인상의 독해와 사랑의 몰입 사이의 불안정한 진동으로써만 가능하다그런데 이러한 어려움은 윤리적 문제 일반에도 해당되는 것이다윤리적 질문은 우리를 윤리의 임계선으로 이끌어간다고 그는 말한다사람의 윤리적 삶에 있는 깊은 요소들은 그 폭력성이나 열도에 있어서 우리를 윤리적 태도의 너머로균형잡힌 비전의 추구 그리고 완전한 적합성의 밖으로 이끌어간다.


5해체와 이성

p175

사실 두 개의 이미지가 겹친다고 할 때그 겹침은 동심원처럼 확대되는 것이다삶의 두 순간삶의 두 계기에서의 삶의 스타일어떤 삶의 궤적과 자연의 모습이나 과정의 일관된 유사성ㅡ이러한 것이 겹치는 것이다아마 동아시아의 천지인(天地人)을 하나로 잇는 태극설(太極說)들에 들어 있는 통찰은 인간의 삶의 전체 사이에 있는 어떤 아날로지를 말한 것일 것이다다만 이 아날로지가 지나치게 도식화되어 그 설득력은 약화된다이 수많은 삶과 세계의 중첩에 어떤 로고스가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ㅡ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ㅡ그것을 정식화하기는 지난한 것일 수밖에 없다거기에 큰 패턴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그것은 많은 경우 우연적인 사건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190~2

[프랑스의 철학자시몬 베이유(Simone Weil)가 다른 곳에서 말한 것에 비추어 보면이러한 자기 소멸을 통한 신과의 일치는 다른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꿰뚫어 비추는 빛처럼 작용하는 데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했다어떤 사람의 마음에 신이 임하고 있는가 아니한가는 그가 지상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나타난다.” 또 마음에 심은 신은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빛이다신을 증언하는 것은 말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영혼이 창조자를 경험한 다음에 그 피조물이 새로 드러내 보이는 바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이다. 

(...)

 지각 체험 자체도 이러한 과정에 대한 가장 기초적이면서 또 원형적인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감각적 체험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는 예술 그리고 시가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이러한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과정(창조된 것의 해체와 새로운 창조 둘 사이의 회로)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지각에서 사물은 그 모습을 나타낸다예술은 그것을 보다 분명한 형상으로 포착하고자 한다이 형상에는 쉽게 논리로 환원할 수 없는ㅡ그러면서 그것에 이어져 있던ㅡ이념이 들어 있다그렇다고 이 형상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그것은 형상의 끊임없는 변용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또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예술가의 마음의 역정의 일부이기도 하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심리적인 현상인 것은 아니다그것은 형이상학적 계시의 성격을 갖는다

(...)

 우리가 생각을 하는 경우에주의가 집중되는 것은 생각의 대상이다그러나 참으로 근본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대상과 아울러 대상을 생각하는 주체를 생각한다는 것을 뜻한다그것은 움직임으로서의 마음과 움직임의 정지로서의 사유의 관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그리고 생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실재 또는 어떤 분명한 명제이지만그것은 움직이는 마음의 해체와 형성의 과정에 결과물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후설의 현상학에서 사유와 사유된 것(cogito-cogitatum)의 관계는 핵심적 주제이다여기의 구분은 지각이나 인식의 현상이 마음의 움직임의 소산이라는 것을 시사한다물론 후설의 현상학적 연구는 사유 또는 지향성으로서의 사유가 구성해 내는 것들즉 노에마타(noemata)의 구조에 집중되었다

p197~8

 퇴계의 <자성록(自省錄)>은 성리학의 저서이면서주자의 저서를 비롯하여 유교의 많은 경전들이 그러하듯이일상적 관찰과 고전의 주석을 유연하게 담고 있는 저서이다제목의 자성(自省)이란 말이 논어의 삼성(三省)의 요청에 이어진 자신에 대한 되돌아봄을 뜻한다는 것은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동서고금에서 많은 것의 근원은 되돌아봄의 공간 속에서 또 그것을 다듬는 데에서 되찾아진다물론 유교에서 맨처음 되찾아져야 하는 것은 마음이다. <자성록>에서부한(富翰김돈서(金惇敍)에게 주는 편지는 주로 마음의 수련에 대한 여러 권고로 이루어져 있다마음에 관한 퇴계의 담화는 대체로 주자의 말 주일무적수초만변(主一無適酬酢萬變)이라는 구절에 대한 끊임없는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마음은 하나에 집중하고 자기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그러면서 그것은 하나에 머물지 않고 많은 것에 대응하여 움직인다.


p199


 일이란 좋은 일나쁜 일큰 일작은 일을 막론하고 그것을 마음속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이 둔다는 자는 한 군데 붙어 있고 얽매여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正心助長計功謀利의 각종 폐단이 주로 여기에서 생기기 때문에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두고 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불교나 노장에 있어서의 枯橋寂滅을 가장 높은 경지로 생각하는 것이다일일三省한다든지중을 잡으라든지(윤궐집중允厥執中 <書經>), 스승의 말을 존중하고 실천하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필요한 일이다마음에 두는 것도 아니요아니 두는 것도 아닌 것(非著意非不著意)이것이 그 요체이다.


p205

퇴계와 같은 철학자가 2천 수 이상의 시를 남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면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모든 것은 정확한 시적 관찰에서 시작한다.


 이슬 맺힌 풀은 부드러이 물가르 두르고

 연못 맑고 산뜻하여 그 맑음 모래 한 톨 없어라.

 구름 날고 새 지나감은 본디 서로 비춤이라.

 다만 두려운 것은 때로 제비 물결 찰까 함이라.

 

6직선의 사고와 공간의 사고


p209~211

종교의 돈오의 체험은 어떤 강렬한 순간에 일어난다그러나 그 순간은 모든 시간에 열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이것을 공간으로 옮겨보면이 체험은 하나의 점과 그것으로부터 방사하는 일정 크기의 또는 무한한 크기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말할 수 있다다만 그 점은 하나의 점이면서 공간 전체에 일체가 된 것으로 느껴진다호직(胡直)의 체험에서 불이 내 몸을 꿰뚫고 환하게 비추었다......사람과 하늘 안과 밖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었다.....나는 전 우주가 나의 마음이며그 영역이 나의 몸이고그 고장이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할 때 이것은 모든 것이 일체가 된 것을 말한다그 내적인 구조에는 자아가 있고 우주가 있다결국 체험의 게슈탈트는 하나와 전체이 두 가지 극의 분리와 혼융으로 이루어진다

(...)

호직(胡直)의 깨우침또 그리고 다른 동아시아의 구도자들의 깨우침의 순간이 깊은 산에서 경험한 것이라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산은 거대한 자연의 모습ㅡ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테두리의 모습을 시각적 체험으로 제시해 준다그것은 숭고의 체험이다그렇다는 것은 그것의 총체적인 지각이나 인식이 사람의 능력을 넘어간다는 말이다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주변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땅의 모습을 볼 수 있다그것이 지구 위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어떤 예외적인 영역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그것이 우리에게 비일상적 체험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의 체험이 너무나 그 근원적인 형태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특히 과학 기술의 사고가 지배하는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 그러하다어ᄄᅠᆫ 경우나 산의 체험은일상적 삶에도 있으면서 압축된 종교적 체험에 근접 하는 것이기도 한세계의 지평에 대한 의식을 결정화(結晶化)하는 자연 현사에 대한 체험이다이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수 있다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어떻게 거기로부터 멀리 있는가를 알게 한다.


p215~7

 삶의 과정이 그 과정을 사는 사람에게 열의를 전달하는 경우는어디에서나 그 삶은 의미 있는 것이 된다이 열의는 어떤 때에는 신체의 동작에어떤 때는 지각에어떤 때에는 상상 활동에어떤 때에는 반성적 사유에 엮여 들어가 있다그것이 어디에 엮여져 있든지거기에는 재미가 있고열기가 있고현실의 흥분이 있다그리고 중요함이라는 말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게 실감 있는 그리고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중요함이 있다.


로이스가 그의 글에서 말하는 것은 이웃과 그의 고통과 기쁨 그리고 모든 생물체와의 사심 없는 공감에서 오는 해방감이다그것은 지금까지 죽은 듯한 외적인 접근으로 알던 것을 그 내적인 의미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게 될 때 느껴진다


이러한 내적인 의미에 대한 신비스러운 느낌은 사람이 아닌 자연물에 의하여 자극된다드 세낭쿠르(De Senancour)나 워즈워스 또는 셸리와 같은 시인들이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비슷하게 영국의 박물지 저자리처드 제퍼리스(Richard Jefferies)는 대지와 태양과 먼 바다ㅡ이런 자연 현상이 주는 일체감을 말한다제임스는 제퍼리스를 인용한 다음그런 자연과의 공감의 시간이 상업적 가치의 관점에서는 값없이 보낸 시간일 거서이라고 한탄하여 말한다그러나 무가치를 무릅쓰고 그러한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용적인 이해관계가 그렇게 막무가내가 되어 죽음의 아우성으로 몰려오기에개인을 넘어가는 가치 그것의 세계에 대하여 어떤 넓이의 통찰을 가지려면삶의 ㅋ느 규모의 의미에 대한 통찰을 갖고자 한다면우리는 실제적인 세계에 대하여서는 전혀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p221

...여기에 비치고 있는 농업의 양의성은 실용적인 일과 심미적인 관조의 대조에 일치한다뿐만 아니라 그것은 세계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두 태도에 깊이 이어져 있다이 대조 또는 모순은 이보다 깊은 대조로 인한 것이다세상을 이념화하는 근본적인 방법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그러니까 그것은 단순히 실용과 심미ㅡ얼핏 생각하면 현실과 관조의 세계가 서로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두 이념이 대조되고그것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제임스는 정황의 이념성을 이야기할 때 농부들의 이념성을 자신의 이념서에 대조하여 서로서로 다른 사람의 일의 이념성을 보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나의 케임브리지에서의 실내 생활 스타일을 보았더라면그들이 나의 정황의 이념성에 대하여 맹목일 것처럼나는 그들의 정황의 특이한 이념성에 대하여 맹목이었던 것이다.


 제임스는 여기에서 이 두 개의 이념성을 단순히 타자의 이념성의 독해의 어려움으로 생각한다그러나 사실은 이 이념성은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그것들은 한 세계 속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한 세계를 달리 구성하는 관점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p226~227

생물은 조작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해되어 마땅하다.

현상학도 주어진 지각 현상을 주어진 대로 이해하고 기술 하는 것을 그 최대 목적으로 생각한다어떤 경우에나 사물의 윤곽을 그리는 것은 대부분의 겨우 일정한 관점을 포함하는 불완전한 스케치(Abschattung)가 될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것을 최대한으로 선입견 없이 주어진 대로의 형상에 접근하려는 거서이 형상학적 환원의 목적이다이러한 주어진 것을 사람의 의도적 개입이 없이 그 자체로서 보면서도 그 안에서 어떤 질서를 발견하고자 하는 태도는 심미적 태도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참으로 엄정한 세계 이해에 이르고자 하는 철학적 성찰의 밑에 들어 있는 것도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세계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실천적 함의를 갖는다.  

 

p229

사람의 생존은 필수적으로 자연에 대한 실천적 개입ㅡ부분적 이점의 동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실천적 개입을 요구한다

(...)

전통적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이 일에 열중한다고 하여 주변의 자연의 풍경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는 일일 것이다그 결과가 결국 지주나 시장에 보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여 심어 놓은 곡식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일의 즐거움이 없을 수는 없다곡식의 성장 자체가 사람을 보다 큰 자연 환경에 연결시켜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또 작물에 대한 관심은 저절로 하늘과 땅의 조건과 그 변화에 대하여 의식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대체적으로 전통적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의식과 삶의 정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자연을 떠나서 사는 것은 아니고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에서 보건대능동적 집중의 실제적 태도와 수동적 관조의 심미적 태도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아마 그것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는 관계 속에 있을 것이다이것은 우리의 삶의 일상적 연속 속에서 그러하고 일의 삶에서 그러할 것이다일상적 순간에 일어나는 의식의 방향은 너무나 교체 작용이 빠른 까닭에 우리가 별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 한 관점에서 산을 본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그리고 조용하게 서서 한 자리에서만 자연을 느끼고 거기에서 기쁨을 얻는 것은 아니다땅도 발로 걸어서 우리읭 삶의 일부가 되는 부분이 있다.

 실용과 심미의 구분은 자연을 떠난 삶에서 일어난다이탈리아의 사회학자가 토리노의 노동자들과 한 농촌의 농민을 비교 조사한 바에 의하면농민들은 공장 노동자들에 비하여 오락을 덜 필요로 하고 그런 만큼 삶 자체가 즐거움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 있다오늘날 실제적인 일로 인하여 지평적 의식의 협소화를 경험하는 것은 도시의 근로자들일 것이다이것은 공장에서 일을 하나 회사에서 일을 하나 마찬가지일 것이다더구나 오늘날 도시에서 주거의 형태까지도 사람을 보다 큰 지평으로 열어놓기보다는 삶의 세계에 그것을 한정하며 특히 사람의 욕망 충족의 필요가 규정하는 대상들에 한정하게끔 설계되어 있어서 이러한 지평의 협소화는 더욱 조장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삶의 만족의 문제를 떠나서 삶의 일면적 실요화는 그 관점에서도 문제를 가질 수 있다오늘날 실요적 태도의 문제점은 환경의 문제 드에서 드러난다이것은 사실 지구 전체를 우리의 부분적인 이해관계에서 나오는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것에 관계되어 있다그것은 다시위에서 시사된 바와 같이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사실적 이해가 잘못된 데에로 이어진다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자연의 전체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높여주고 이것을 포함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폭넓은 의식의 화폭을 열어주는 성찰적 태도는 한가한 도락의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세계의 균형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할 수 있다이것은과학적으로선형 사고의 모델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에 대조되는 새로운 큰 체계의 이론으로 뒷받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그러니까 관조와 성찰은 단순히 주관적인 선택이 아니라 보다 충실한 과학적 이해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프리고진은 고정적인 역학과 열역학의 궁극적인 통합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관조와 성찰은 실용적 태도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자연경제에 입각한 삶에서 그것은 늘 하나로 조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이 조화의 가능성은 현대인도 잊지 못한다이것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느끼는 것이다.


7산에 대한 명상

p244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대상의 규모의 크기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규모는 보다 조심스러운 인식을 위한 정서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p251

지각심리학은 우리의 모든 지각 행위가 형상(figure)과 그 배경(background)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ㅗ 말한다현상학의 큰 발견의 하나는이미 비쳤듯이 우리의 모든 행위ㅡ의지적개연적 또는 실제적 행위가 일정한 지평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언어나 체험 또는 행위의 깊고 참된 의미는 단순히 표면에 나타난 것만 가지고는 알 수 없다이것은 실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우리가 하는 일 또는 하고자 하는 일도 배경이나 바탕에 관계없이 기획될 때그것은 결국 삶의 보다 큰 테두리에 의하여 부정되고 말 것이다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이 결국은 큰 테두리를 파괴하고 교란하여 의도한 것ㅡ우리의 의도가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것이라고 가정한다면ㅡ우리가 의도한 것과는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259

거리의 관조_형이상학적인 것이 이념성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그 체험이 정서나 감각의 직접성을 가진 듯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적으로 주어지지는 아니하기 때문이다. ...후설은 입체적 사물에 대한 지극은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부분우리의 눈이나 촉각에 와 닿을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이념적 구성을 포함한다고 생각하였다그러면서도 우리는 앞에 있는 책상과 같은 물체를 전체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느낀다이와 같이 거리나 깊이는 이념적으로 구성되고거기에 실존적 느낌이 따르면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바로는 이념보다 정서이다이 정서가 먼 것을 현존하게 한다.


p261

사람 사는 데에삶의 테두리의 전체에 대한 의식이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관조적 태도는 실용성을 떠나면서도 유용한 삶의 일부분을 이룬다고 보아야 한다.


P264

...그렇다고 한다면우리는 개성적인 것이 보편성에 가까이 갈 수 있고보편성이 개성적인 것에 가까이 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 심신을 도야한다는 것은 보편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그렇다고 도야된 인격이 아무 특징이 없는 평균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자신의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ㅡ또는 더 넓게 심신을 닦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자신의 것으로 닦으면서 동시에 보편성을 구현한다는 것을 말한다거꾸로 우리가 보편성을 알게 되는 것은그것이 인간의 삶과 관련되는 한에 있어서는뛰어난 개인에 구현됨으로써이다


p269

예술에 있어세계의 드러남은 어디까지나 예술가의 내면적 수련과 기량적 연마에 대응하여 나타난다.


p271

사회적 소통을 겨냥하는 것이 아닌 것까지도언어는 사회적 성격을 갖는다언어적 표현은 그 자체로 잠재적으로 투쟁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8진리의 길:부정과 긍정

p285

테일러가 근본적 반성ㅡ아우구스티누스적이든 데카르트적이든ㅡ근본적 반성을 서양의 전통만이 지닌 문화적 특성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이것은많은 전통에서 발견될 수 있는 정신적 체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다만 서양에서 그 가능성의 두 가닥으로의 분리는 인간성의 단편화를 가져오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방법적 역점으로 하여 역사적 일관성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지 않나 한다그 결과 내면적 탐구로 나아가는 내면화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통하여 진리의 확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 현실에 밀접 하게 연결되어 있는 발견의 가설과그것을 초월하여 있는 형이상학적 계기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었다또 이러한 애매성의 고뇌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적 이성의 방법적 집요함의 모범으로 뒷받침되었다물론 과학적 진리의 도구적 성격과 그 확신이 가져온 인간 세계의 단편화 또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p287

테일러는 서양의 근본적 반성을 설명하면서내면으로의 전환에 부정의 순간이 있고 긍정의 순간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몽테뉴는위에서 잠ᄁᆞᆫ 언급한 바와 같이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간다아우구스티누스도 영혼의 어두운 밤을 거쳐서 신앙으로 나아간다데카르트는 철학적지리적 방랑을 거쳐서 독일 울름의 더운 방에서 악마의 속임수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방법적 확실성을 예감한다이 부정과 긍정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그것은 정신의 역정의 불가피한 변증법이다. ...논어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여러 저자의 자전의 제목이 곤학기(困學記)가 되어 있는 것도 그러한 과정의 불가피함을 표현한 것이다. 16세기의 호직(胡直)의 <곤학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학문의 길에는 병과불안과 잠 못 이루는 밤과 괴이한 환각의 괴로움이 있다그러나 마지막에 호직은 인간계와 비인간계를 꿰뚫는 전 우주와도 일치하는 자아의 한없는 연속성을 발견한다. 16세기 후반 17세기 초의 고반룡(高攀龍)의 긍정적 진리의 체험은 더 극적이다이 진리의 순간은 대체로 자연과의 교감이 일어나는 때이다긴 여로의 끝에 깊은 산속에서 잠을 깬 그는 물소리가 차고그 맑음이 뼈에 사무침을 느낀다그 다음에 곧 그는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한다.


 내 마음에 남아 있던 불안은 말끔히 사라졌다내 어깨를 누르던 만근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나는 마치 번갯불에 얻어맞은 듯불이 내 몸을 꿰뚫고 환하게 비추었다나는 이 변화와 완전히 일체가 되었다사람과 하늘 안과 밖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었다나는 전 우주가 나의 마음이며그 영역이 나의 몸이고그 고장이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모든 것이 밝고 허령하였다.


p289

학문은 이러한 계시의 순간보다는 반성과 성찰의 일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그 원리는 합리성이나 이성적 질서이다그러나 우리의 반성과 성찰은 합리적 일상화를 통하여 외면적기계적인 수단으로 전락한다그것이 외적인 방법과 형식을 넘어서 계속적으로 열림과 숙고의 공간으로 유지되는 것은 그것이 그 합리성을 너머어가는 깨우침의 체험에 이어짐으로써이다


p290

진리는 오류로부터의 유기적인 성장의 결과이다그리하여 오류는 진리의 한 부분이 된다과정은 최종의 결과 속에 완전히 흡수되지 아니한다중요한 것은 진리를 찾는 정신이 지속되는 것이다우리의 지각 체험의 형성에진리의 깨달음에 그리고 윤리적 실천에서그것의 인간적 의미를 살리는 것은이 진리를 찾고 있는 정신의 지속이다.


2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1장 진화와 인간혼돈의 가장자리


p301~3

심정적 반감의 문제를 떠나서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과학이 시사하는 인간관의 상당 부분이 반드시 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다시 사회생물학 문제로 돌아가보면 그것에 대한 비판은 그 법칙들이 엄밀한 과학적 사고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유추에 의존하고 있다는 데 기초해 있다이것은 지금의 단계에서 사회생물학이 충분히 과학적이 아니라는 말이 되고다른 어떤 것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물어보아야 할 것은 과학이 어떻게 인간 이해에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보다도오히려 거꾸로 분명하게 검토되지 않은 관념들이 어떻게 과학에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이다.

 ...

과학이 시사하는 인간관은 그 방법적 구속으로 인해 벌써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인간 이해로부터 비껴나간다는 느낌을 준다인간 이해에서 그 자신의 직관으로 접근되는 자료를 버리는 것은 증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버리는 것이다사람의 지능에 관한 논쟁에서 철학자 설(Searle)은 두뇌에서 진행되는 운산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재생한다고 하더라도그때 컴퓨터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바와 같은 의식 또는 더 나아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제기하고 의식의 부재가 컴퓨터와 인간을 갈라놓는 것이라고 주장한 일이 있다내면의 모든 성찰이 반드시 신뢰할 만한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내면에 대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외면적 증거가 체험의 직관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또는 적어도 그에 대한 적절한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면 그러한 인간 이해의 기획은 성공한 것이 될 수 없다.


*p304~5

일정한 형태로 조직된 분자와 세포들은 새로운 성질요즘 더러 쓰는 용어로 말하건대창발적인 성질(emergent property)을 드러낸다인간을 과학적으로 살펴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이 새로운 존재론적 차원을 어떻게 그 관찰에 포함시키느냐 하는 것이다오늘날 이 차원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없는 것 같다그러나 과학에서도 복잡한 조직의 어떤 국면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성질과 작용이 과학적 연구의 새로운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전통적 인간 이해는 이러한 차원에 삽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할 때 궁극적으로 철학적 인간학이나 자연과학의 인간 이미지는 서로 수렴될 가능성도 있다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자각적 이해는 서로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날지도 모른다이러한 수렴은 사람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학문에 인간에 대한 어떤 전제가 들어 있고모든 사람의 일에 인간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들어 있다면우리의 인간 이해가 객관적 사실과 인간의 내면적 요구에 적절하게 맞아들어간다는 것은 인간경영의 토대가 믿을 만한 것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

 생물학이 인간론의 일부를 이루어야 할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반대로 생물학은 철학적 인간론의 물음에 답해야 할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그러한 문제점들을 생각하는 것은 생물진화론의 관점을 넓히고 세련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p305~6

다윈은 과학을 말한 것일 뿐인데다윈주의자들은 그의 생각을 유추적으로즉 정당한 이유 없이 도덕과 형이상학의 영역에까지 확대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윈 자신은마르크스가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던 것과 같이넓은 의미의 다윈주의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p315

투쟁적 생존에 대한 생각은 다윈이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영감을 얻은 것으로투쟁은 먹이의 결핍상황이나 그 압박이 커진 상황에서 일어난다다윈은 생존경쟁을 말하면서개체와 개체의 투쟁보다는 결핍으로 특징되는 환경과의 투쟁을 더 많이 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궁핍의 상황에서 늑대 두 마리가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경우는 차라리 드문 경우이고오히려 더 많은 것은 사막 변두리에서 식물이 가뭄과 싸우면서 살아남는 경우였다결핍상황에서는 피나는 싸움은 다른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먹이의 양을 줄임으로써 살아남는 경우나경쟁자에게는 쓸모없는 먹이를 활용하는 경우도 살아남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다또 종과 종 사이에 경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서로 다른 종은 대체로 환경 내에서 다른 종류의 지위(ecological niche)를 차지하기 때문에 늘 직접적 대결이 그 생존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p316~8

일본의 생물학자 기무라의 중립진화(neutral evolution) 이론이다이 중립진화론은 세포 내의 핵산이나 아미노산의 진화가(의미있는 변화라는 관점에서중립적인 변이의 고정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개체 차원에서 적자생존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진화를 의심스럽게 한 것이다.  ....

 다윈주의에 도전하거나 수정을 요구한 발견과 이론 가운데마이어가 언급하는 것으로 굴드(Stephen Gould)의 단절적 평형(punctuated equilibrium) 이론이 있다고생물학자 굴드의 관찰에 의하면 화석으로 증거되는 생물의 진화는다윈과 그 후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을 통한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진행되어온 것이 아니라급격하게 변화와 정지ㅡ수백만 년 간격의 변화와 정지의 되풀이로서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진화의 과정에 대한 이러한 관찰은 독일의 생물학적 쉰데볼프(Schindewolf)가 말하는 도약적 진화 이론과 비슷한 것이다. ... 그러나 단절적 평형이론의 함의는 진화의 리듬과 시간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굴드의 주장은 설사 그것이 궁극적으로 다윈주의 속에 수용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다윈적 진화론의 많은 개념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갖는 것이 틀림없다그리고 그것이 그의 의도였다그의 생각으로는 생명의 진화 또는 변화를 지배한 것은 어떠한 필연적 법칙이 아니라 우연성(contingency)이다따라서 진화에는 발전의 일정한 방향도 종착점도 없다진화에 필연성 또는 법칙성을 부여하는 것은 자연도태와 환경적응이다.  다윈주의는 생존경쟁에서 작은 이점들이 누적되는 것을 통해 환경에 보다 더 잘 적응하는 형태로 바뀌어가는 것이 생물진화의 기제라고 말한다그러나 굴드의 관점에서 적자생존을 보장하는 자연도태는 한정된 국지적 현상을 말한 뿐이고생명의 폭발과 느린 변화 또는 정지라는 것으로 특징되는 큰 범위와 긴 시간의 생명현상에는 적용되지 아니한다생명형태의 급격한 폭발은 적응과 도태의 균형을 깨어버리고,  그 엄격한 균형이 가능하게 하는 법칙성을 깨어버린다. ... 이 형태적 실험은 점진적으로 다시 소수의 형태로 표준화된다고 말하면서이 과정에 작용하는 것은 제비뽑기의 우연이라고 주장한다현대적 생명의 체계는 기본적 법칙ㅡ자연도태든해부학적 설계의 우수성이든기본법칙에 의해 보장되었던 것이 아니다그것은 대개 우연성의 산물이다. 


p323

하나의 신종이 이미 다른 종이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는 생태계의 지위(ecological niche)를 침입해 들어갈 때그것은 생존투쟁에 이겨야 한다ㅡ이것이 자연도채라는 개념에서 나오는 상식이다그러나 케이스(Ted Case)의 컴퓨터 모델연구에 의하면이러한 경우에 침입자가 상대로 싸워야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개체나 종이 아니라 일정한 지역의 생태공동체 전체이다이 공동체가 서로 강한 상호작용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ㅡ다양한 종이 영양배분이나 먹이망의 구성에 깊은 상호의존 관계 속에 짜여져 들어가 있는 경우그것은 약한 상호작용의 공동체보다도 강력하게 우수한 침입자를 막아낸다그 겨로가 약한 경쟁자도 다양한 종의 공동체에서는 더 높은 생존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이 공동체는 어디에서나 대개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이러한 공동체조직에 일정한 규칙이 있음을 시사한다.


p326~9

 생태학적 사고에 적용될 수 있는 카오스는 일반적으로 진화의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카우프만(Stuart A. Kauffman)은 복잡계의 수학으로 생명현상ㅡ분자 차원에서 생명의 발생과 진화 그리고 거시적 시간에서 생명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에게 진화의 주요한 계기의 하나가 자연도태인 것은 틀림없다그러나 그것은 보다 복잡계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 달리 말하면 유기체가 분자의 차원에서든 보다 큰 사회의 차원에서든자연 도태는 전체적 상황을 지배하는 메타다이내믹스를 타고 작용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전체를 포함하는 복잡계의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이다그가 말하는 복잡한(complex)체계는 일사불란한 규칙이 지배하는 질서정연한(ordered)체계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그것은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질서와 혼돈 사이를 파동하며 그 사이에 성립하는 체계이다생명은 분자의 차원개체 발생의 차원이나 생태적 또는 진화적 차원에서 이 체계의 특징을 나타낸다개체와 종의 생존과 적응은 다른 개체와 종들과 투쟁적 관계에서 이루어지지만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다른 개체와 종의 생존의 총체에 영향을 준다그 때문에 한 종의 진화는 다른 종과 환경과의 공진화(coevolution)가 된다하나의 종의 진화는 그 종의 총체적 적응성(inclusive fitness)을 증가시키고 또 공진화자에게도 도움을 주는 쪽으로 진행된다각각의 행동자들이 미세한 이익을 추구하면서 상호조정이 이루어지는 이러한 공진화의 체계는 혼돈의 가장자리에 균형을 잡는 데까지 공진화한다.

...

생물의 진화에서 메타다이내믹스의 존재는ㅡ특히 법칙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을 포함하는 메타다이내믹스의 존재는 생명의 문제가 선형적이고 기계론적인 합리적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 전통적으로 인문과학의 인간에 대한 사고는위에서 비친 바와 같이과학적 연구에 완전히 폐쇄적이지는 않으면서도 기계론적인 인간이해에 늘 유보를 표명해 왔다체험적 직관에서 오는 인간현실의 자유와 필연의 계기는 과학의 입장에서도 다시 존중되어야 하는 사실로 인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

 사실 핵심적인 것은 과학에 대하여 과학성을 옹호하는 것보다도 과학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이 비판의 가치는 반드시 사실에 대립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말해 과학 이데올로기의 비판은 과학의 건강 그 자체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p331

한 영역에서의 생각은 다른 영역에서그렇지 않았더라면 간과했을 어떤 특징을 발견하고 고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그리하여 한 시대의 과학과 문화는ㅡ물론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이론의 잠정적 성격에 대한 겸허한 인정이 있어야겠지만ㅡ상부상조하며 공진화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그러나 이 공조관계는 쌍방통행이어야만 마땅할 것이다.

 

p336~7

과학적 표상은 자연의 본질을 포괄할 수 없다그렇다는 것은 자연의 대상성은 처음부터 자연이 스스로를 보여주는 한 가지 모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물음을 통해 과학의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 것을 되찾는 일이다그것은 성찰(Besinnung)을 통해 물음에 값하는 것에 몸을 맡김으로써 가능하다. ...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결국 세계와 진리 또는 존재에 대한 인간의 열림 없이는 어떠한 진리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생명학적 진리도 이 열림의 시원 또는 더 전통적인 관점으로 말하면인식론적 토대와의 관련 위에서 생각해야 마땅하다진화가 사실이라고 한다면그것도 이 인간의 시원적 열림에 관계하여 이행되어야 한다이 열림으로부터의 과학이 나오고 수학의 논리의 세계가 나오며윤리와 도덕 그리고 아름다움의 세계가 나온다.


p339

그러나 진화론에서 말하듯이 자연도태와 적응이 진화의 기준이라고 한다면사람이 다른 생물에 비해 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그러한 생각은 인간중심주의 사상에 관계되어 있다공룡시대에 이어 오늘의 시대를 포유류시대라고 하지만이것은 사람의 관점에서 나온 생각이다어떤 생물학자는 실제로는 절지동물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그 학문적 관심을 개미에 주로 쏟은 윌슨과 같은 사람의 눈에는세상의 주인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나 포유류보다도 곤충이다오늘날의 생물의 생체량(biomass)으로만 따져도곤충은 오늘날 세계 생체량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그것은 북극권에서 티에라 델 푸에고와 테즈메이니아까지 세계의 방방곡곡에 서식한다. 그 수나 공간적 점유의 범위를 떠나 그 활동의 복합성정교성 등으로 보더라도곤충의 세계는 미묘하기 짝이 없다윌슨은마음의 크기에 사로잡혀 있기에망정이지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코뿔소보다 개미가 더 경이로운 존재라고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적응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나무는 그 화학적 환경에 극히 섬세하게 조율되어 있고나방은 바람을 타고오는 페로몬 분자의 실마리에 의지하여 몇 마일 떨어진 거리에 있는 다른 나방을 자기짝으로 알아낼 수 있다이러한 능력도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리키는 인간이 진화의 마지막 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p340~1


 그러나 인간중심의 생각은 문화적 사회적 이유보다는 더 깊은 곳ㅡ과학의 인식론적그러니까 자기비판에 철저하지 못한 과학의 인식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하이데거의 말대로과학적 사고는 자연을 대상화하고 합리성의 규칙 하에 정리하는 사고이다이러한 정리 밑에는 조종의 의도가 숨어 있다하이데거는 기술에 들어 있는 일반적인 태도를 설명하면서 그것은 사물로 하여금 제 자리에 서 있으라고 시키는 것또 다른 시킴을 위하여 시킴을 받을 수 있게 대령하고 서 있으라고 하는 것이다. ... 사람이 자연을 연구관찰의 대상으로그 자신의 표상영역으로 포착하려고 할 때그는 자연에 연구대상으로 다가가 대상이 용도품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러한 추구를 계속하라는 요청에 답하고 있는 것이다.


p342

 과학의 일방적인 입장을 극복하는 것은 반드시 반()과학주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과 관련될 때 가능하다과학이 가장 위대한 진리의 한 방식이라는 것은 분명하다다만 인간본질에 이어져 있는 보다 근원적인 드러남으로서의 진리에 과학이 복귀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경로를 경유해야 할 것이다.


p344~5

...이것은 소위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의 입장에서 어떤 학자들이 주장해온 바이다. 이들의 주장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으며시인이나 철학자들의 직관을 포용한다그것은 결국 인간의 관리능력이나 이해능력을 넘어가는 부분이 자연에 존재함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 

 생태계의 파괴에서 오는 충격은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만지구 생태계의 현황은 단순히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없어져가는 종의 수로서 극적으로 표시될 수 있다오늘날 생명의 종은 일 년에 3만 종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물론 어떤 경우에나 종이 영생하는 것은 아니다종은 300~400만 년의 주기로 소멸된다.(여기에는 인간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

 ...리키는 지금 지구의 생명은 공룡 절멸 때 있었던 것과 비슷한 또는 그것을 넘어서는 절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이것은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위기가 여섯 번째의 절멸 위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종의 다양성이다.]


p346

윌슨은 사람은 오랫동안 다른 생물체와의 공진화를 통해 다른 생명체에 대한 감정적인 유대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이것을 그는 생명친화감(biophilia)이라고 부른다여기에 이어져 있는 ㄹ것이 인간이 자연에 대해 갖는 심미적 만족감이다인간이 스스로를 정신적이라고 느낀다면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생명친화감 더 나아가 자연친화감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이것은 많은 문화에서 종교와 철학과 시가 말해온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지구 전체의 위기로 등장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에서 그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나 그렇지 않은 접근 역시 모두 어느 한쪽을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여러 면ㅡ또는 인간이 세계와 우주라는 공간에 열려 있는 존재로서 가지고 있는 여러 선택들을 나타낸다그것들은 서로 상보적이기도 하고 상충하는 것이기도 하다그러나 동시에 여러 선택들이 오늘에와서 단순히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며더 나아가 일치점에 이르고 있다는 느낌은 강해져가는 것으로 보인다.


p347

콘라드 로렌츠의 표현으로 제방을 쌓은 것은 강을 관에 넣은 것과 같다. 리키는 케냐의 자연보호사업 책임자로 오랫동안 일했지만이 보존정책의 수행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과 복잡성의 과정을 이해하고 수긍하고통제 가능하다는 무지에 근거한 생각을 버리고인간의 통제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p349~351

 근본적으로 공리적인 동기 또는 시킴과 부림의 틀도 신비에 맞닿아 있다그 속에 움직이는 사고의 끝에도 신비가 나타난다그리고 그 신비는 공리를 초월한다그러면서 그것은 어떤 질서를 수렴한다이것은 심미적-정신적 태도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열림 속에 포함된다하이데거에게 철학적 사고의 근본은 존재에 대한 경이감(Erstaunen)이다또 자연이 드러난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비를 느끼게 한다신비는 세상만물이 드러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감추는 까닭에 생겨난다드러남은 감춤 가운데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드러남은 감춤과 더불어 존재의 무한한 신비를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여기에 대응하여 움직이는 것이 사람이다. ... 오늘의 정보 생산과 여론 형성을 목표로 하는 언술과 그 언술이 지향하는 목표들은 모두 사무로가 사람을 대령시키고자 하는 언어이다여기에 대하여 하이데거 식의 생각은 스스로를 있음대로의 사물에 맡기는 사고이다그것은 차라리 존재에 대한 경건한 열림의 느낌이다여기에는 심미적 또는 정신적 정서를 동반한다그러나 그것이 비논리에 스스로를 맡기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의 언어가 철학 속에 남아 있는 데 주목해야 한다그의 언어는모든 참다운 철학언어가 그러했듯이논리 속에 있으면서 논리를 초월한다그것은 더러 지적되듯이 신학에 비유될 수 있다신학은 논리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면서가장 논리적인 사변의 언어를 쓴다자크 데리다는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논한 일이 있다. 그가 지적하는 것처럼이것은 신학의 수법이다그러나 그것이 하필 신학에 한정되고 또 수법에 불과한 것인가인간의 언어는질서가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파동하고 출현하고 소멸하듯이생성소멸한다그리고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보이는 모든 형식화된 언어와 이념도 질서와 혼동 사이에서 출현하고 소멸한다인간의 도덕과 윤리도 그러한데명멸하는 하나의 질서의 암시일는지도 모른다과학의 진리 또는 가장 믿을 만한 질서의 암시 중 하나이다우리가 분명하게 규명할 수는 없지만시와 철학과 과학의 언어는 보다 근원적인 혼돈과 질서의 파동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p351

 ..... 始原의 아름다움은 암석의 결과 알갱이 속에 살아 있다.

 우리의 벼랑을 타고 오르는 끝없는 태양처럼그러나 사람은?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조금은 비인간화하여야 한다그리고 우리가 거기서 온 

 바위와 대양처럼 자신을 가져야 한다.

 <카멜 곶중에서


 

박동환,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Posted by 히키신
2017. 3. 7. 21:11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박동환,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고려원, 1993


1부 마음의 논리학은 있는가?

1.사사(私私)로운 출발

p17

3.3 유년시절에는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 같았는데소년시절에는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하려고 마음먹은 모든 일이 여기저기에서 부딪치고 꺾였다그래서 나는 나의 현재의 모습은 내가 지금까지 시도했던 모든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라고 말한다


p19

4.1 미국의 어느 상원의원이 한 연회장 구석에서 수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비서가 다가와서 물었다

 다음 가실 곳을 잊으셨나요?

 아니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그들은 시간에 쫓기며 일한다그들은 휴가시간에 더욱 바쁘다언제나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해야 할 아무 일도 없는 시간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무엇이든지 해서 업적을 이루어야 그들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다. (...)

 싸우는 자는 서로 닮는다닮은 것이 없는 자는 경쟁에서 제외된다경쟁은 닮은 자들끼리 서로 닮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제거하는 운동이다이러한 경쟁에서 거세될 가능성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 자는 없다이렇게 자기 존재를 실현하고 증명하기 위한 업적성취는 경쟁으로경쟁은 자기 상실의 불안으로 이어지는 모순과 역설에 빠진다그들의 세계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노동과 성취의 욕구가 어째서 그러한 역설에 빠지는가그들의 존재실현 또는 증명의 논리에노동과 업적성취에 어떤 철학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p20

 도대체 목적성취라는 현실행위에서 합리적인 모순해소를 가장(假裝)하는 것은 온 세계의 사람들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놀이의 판도로 압축시키려는 서양적 지성의 유희로 볼 수밖에 없다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이그것이 노동이든 자기 성취든 간에 무자비한 경쟁과 자기 상실의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야수시대의 흔적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서양사람의 동물적 지성에 대한 경고가 있어야 한다.


p21~22

4.3 유학에서 돌아온지 10년 후에 이루어진 제2의 서양 견문과 체험의 기회는 자기 망각과 상실의 과정이었던 보다 젊은 시절의 유학체험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 되었다그것은 나에게 동양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자기의 정체를 다시 찾도록 강요당한 기회였다.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유학시절처럼 이방인으로서의 자기 처지를 잊어버리고 현지의 사상과 문화에 몰입해 안주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나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개방사회라는 것이 연역논리같은 엄밀한 추리에 바탕을 두는 것이고그와 대조되는 이른바 폐쇄사회는 음양논리와 같은 관용과 개방적 사유에 바탕이 있다는 것을 세우기 시작했다.

 엄밀한 연역논리를 지지한다면 추론이 그 자신의 전제의 함축범위 밖으로 펼쳐지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그것은 자신의 전제에 반대나 모순되는 것을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엄밀논리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각자가 가진 전제의 함축범위 밖의 다른 사람의 전제나 그로부터의 귀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따라서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다원화와 대결관계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말하자면 엄밀논리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전제를 달리할 때 서로 폐쇄된 자기 밖의 타자와의 대결대화교류를 피할 수 없는 개방사회의 관계로 강요받는 것이다.

 서양의 과학자나 철학자가 논쟁에서 각자의 이론적 전제를 펼쳐나가는 집요한 연역적 일관성은 감탄할 만한 것이다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끝없는 모순긴장과 모순해소의 역학관계가 이루어진다그러한 집요한 일관성을 일찍이 포기하는 개방논리의 소유자들 사이에서는 다른 전제들 사이의 대대(對待)와 조화의 질서가 쉽게 이루어져 결국 폐쇄사회로 정착 또는 정체될 수 있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열심히 일하는 것말하자면 노동과 자기 실현이라는 하나의 척도가 경쟁을 일으키고 경쟁은 자기 상실의 모순을 낳는 경우처럼어디서나 일어나는 발전의 패러독스


p31

6.1 철학은 고대의 언어와 문헌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철학은 기록과 기억의 무덤에 은폐된 삶과 존재의 깊은 뿌리에 대한 회고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그것은 언제나 자기 시대의 가능한 가장 원시적 물음과 반성에 대한 증언이며 아무도 보장하지 않은 미래를 향하여 몸을 던지는 탐험이다


p32

6.5 아직도 철학적 물음이 비철학적 물음과 함께 섞여 있다철학적 물음이란 어떤 것인가그것은 다른 모든 물음들이 떨어져 나간 다음에 남는 가장 순수한 것이다더 이상의 이런 저런 정보가 흔들릴 수 없는 영원의 사태에 관한 것이다.

 철학은 어느 경우에나 피할 수 없는 숙명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에 관한 것이다철학은 어쨌든 겪게 될 그런 사태의 우주적 구도그것을 찾는다.


p33~34

2.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1. 자연사에 일어난 생존전략인 논리

1.1 자연을 무대로 인류의 발달사를 이끌어 온 상징적 사건과 계기들을 돌이켜 엮어 본다.

 

 (1) 인류는 자연회전의 한 고리가 되어 살다어떤 개별자의 목적도 의식작용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자연의 부분으로서.

 (2) 동굴이나 숲을 찾아서 가능한 한 자연의 적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하여 자기를 방어적(defensive)으로 은폐하다.

 (3) 손이 자유롭게 해방되고 손의 연장(延長)으로서의 도구를나무창돌도끼 그리고 불을 만들어 쓰다손과 도구를 구사하여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려는 공격적(offensive) 행위가 자연에 대하여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가해자다.

 (4) 그릇될 만한 것을 찾아서 또는 질그릇 따위를 만들어서 자기에게 필요한 자연의 산물을 긁어 모으고 나누어 담다자연에 대하여 자기 본위의 질서매기기말하자면 근본적으로 공격적인 분류와 동일화의 원칙을 적용하기 시작하다.

 (5) 이 분류와 동일화의 원칙을 바탕으로 모든 범주체계(category system)와 제도가 자리잡히다그 제도와 범주체계에서 이른바 합리성과 논리의 체계가 싹트다옛날 그리스 철인들의 논리학과 존재이해가 여기에 바탕을 두다.

 (6) 다시금 자신의 분류와 동일화의 원칙을 더욱 적극적으로 자연에 강제하는 방법을 시도하다실험조작으로써 허구와 분류와 동일화의 체계를 깨고 보다 현실적인 분류와 동일화의 체계를 만들어 자연을 조작하려는세계의 지배가가 되려는 이른바 과학혁명을 하다.

 (7) 20세기에도 여전히 공격적이며 방어적인 그리고 물리적이거나 개념적인 도구조작기술의 혁명이 계속되다그러나 자기 본위의 분류와 동일화 체계에 의한 세계지배주의가 부딪칠 모순과 반전 가능성을 반성하는 새로운 철학적 양심의 등장이 기다려지다


p35

1.2 (...) 

 인류의 세계이해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동서(東西)의 고대 철학사를 인류의 원시적 삶이 시작된 석기시대 이전으로부터 다시 조명하는 데서 가능하게 될 것이다원시인류의 탄생으로부터 지난 2500년에 걸친 철학사상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다만 생명의 자기 지탱과 확장을 위한 전략곧 세계의 다름을 같음으로 돌리는 행위가 지배해 왔다개척적공격적 행위와 상향추론은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한 탐험과 확인의 길로서보존적방어적 행위와 하향추론은 탐험과 확인의 소산을 연장하고 관리하는 길로서 개발되어 온 것이다.


p36

1.4 발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다름으로의 논리적 맥락에서 나타난다다름으로의 논리적 맥락이 발전의 유력한 작용이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그 단순화 작용에 있다한 영토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자기 같음으로의 확장운동은 그 모든 것들의 논리적 모순관계를 이끌거나 그 모든 것들의 공존 가능성을 포화상태로 몰아감으로써 그 복잡성으로의 경향을 다름으로의 운동으로써 단순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임계점에 부딪친다.

(...) 이러한 다름으로의 발전형식은 물질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정신과 사회의 영역에서도 혁명의 불가피한 상황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p37

1.6 논리란 무엇인가논리적 추론이란 다만 물음의 행위일 뿐이다이 물음의 형식을 찾는 데에 논리학의 뜻이 있다. (...)

 무엇을아니 어떻게 물음인가? (...)

 어떻게 물음인가물음이 지향하는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의 같음을 물음이다그 같음을 추적하는 물음으로서 이런 저런 상향추론과 하향추론의 형식이 이루어진다자연 또는 세계와 관계함에 있어서그러나 대상의 성격에 관계없이 던져지는 인간의 물음이 그렇게 형식화되는 것이다세계에 대한 개척 공격적 물음으로서 상향추론의 여러 형식이보존 방어적 물음으로서 하향추론의 여러 형식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왜 그 같음에 대하여 다름을 묻지 않는가자연에서도 그 밖의 세계에서도 부딪치는 사물에 대하여 그 다름을 물을 수 있다그것도 부딪치는 세계의 특성에 상관없이 일어나는그러나 지금까지 논리에서 간과된 물음의 길이다.


p39~40

2.2 사물들을 같음의 지평으로 눕히려는 의식은 말한다.

 이것은 나무다.

 이것은 돌이다.

 이것은 바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거부하는 몸짓을 한다.


 나는 나무가 아니다.

 나는 돌이 아니다.

 나는 바람이 아니다.


 그러니 나무이면서 나무가 아니다돌이면서 돌이 아니다바람이면서 바람이 아니다.


 나는 본다.

 그러나 보지 않는다.

 나는 듣는다.

 그러나 듣지 않는다.

 나는 잡는다.

 그러나 잡지 않는다.


p40

2.3 진리를 찾아 광야를 헤매는 자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아무것도 잡지 않는다.


2.4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그것은 어떤 틀에 묶어 놓을 수 없는 것마음은 언제나 잉여에 산다자신을 어떤 같음으로 묶는 울타리를 떠난다.

 마음은 어디에 잡아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마음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그것은 다만 아니다.


2.5 세계의 다름을 견딜 수 없는 의식그래서 세계를 어떤 같음으로 돌려 놓으려는 의식그것이 세계에 대한 폭군으로서 아니면 철부지 망나니로서 행세하는 것이다.


2.6 의식이 그의 원칙으로서 고집하는 동일률x(x=x), 그것은 세계를 향한 폭력의 도구다.


p44

2.14 세상에 자신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 수 있는 영원한 어떤 것도 없다면가장 보편적인 지속자(持續者)는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닌 논리적인 것에 있다모두 수많은 이음을 따라 같음으로의 길로 돌아가고 수많은 매듭으로 끊어지는 다름으로의 길로 흩어져 간다이것이 세상에 자리잡고 자기를 드러내는 모든 것이 예외 없이 거치는 이면서 아닌’ 길이다그러나 세상이 이면서 아닌’ 길을 따라 펼쳐지며 돌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아직도 관찰하는 자보는 자에게 나타나는 길이며 세상이다보지를 말아라길을 버려라길을 버리고 보라세상은 혼돈과 무질서의 바다일 뿐이다세상은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이다세상은 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그러니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짓고 그 마지막 책임을 지는 자가 있다면 그의 마음과 논리를 무엇으로 잡을 수 있겠는가그는 언제나 다름으로서 사라져 갈 뿐이다.


3. 호모 에렉투스의 돌도끼에 얽힌 철학사

 2. 생산력과 생산관계그보다 보편적인 하부구조

p48

 2.1 최근의 인류 역사가 사랑보다는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인류의 생활양식이 수렵채집에서 농경생활로 변천한데 기인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 수렵채집인은 자연 질서의 일부를 이루지만 농경인은 필연적으로 그 질서를 왜곡시킨다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점은 정착 농경사회에서는 재산축적이 가능해져 그것을 지킬 필요성이 대두했다는 사실이다. (리처드 리키로저 레윈 , <오리진> , 김광억 옮김(서울,1983), 16~17)


p51

 2.4 (...) 돌도끼노예과학과 같은 대리자 혹은 도구를 매개로 하는 인류의 목적실현행위는 그 왜곡에 따르는 추상성 때문에 자연의 총체적 질서와의 위태로운 긴장관계에 놓인다이렇게 인류가 자연을 그의 생존목적에 매개하기 위하여 도끼를 들었을 때부터 과학혁명에서 과학기술에 의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삶에 얽힌 노동그런 목적에 얽힌 집요한 사유와 조작의 절차가 변함없이 개발되어 왔다.


p53

 생산력 형성의 원시적 단계로부터 일정한 생산관계와 사회체제의 발전단계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의식이 존재의 규정성에 성실하게 따랐는가?

 3의식과 존재의 관계그럼에도 암호상자에 갇힌 존재의 비밀

3.1 처음에 의식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파도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이는 의식은 다만 흔들리며 흐르는 것이었다공중에 떠도는 바람에 주인이 없듯이 처음에 이는 의식에도 주체가 없다.

 그에게는 우리집도 우리마당도 없었고더구나 나의 집나의 것은 있을 수 없었다ㅊ처음부터 아예 우리니 나니 하는 주체란 있는 것이 아니었다세상을 오고 가는 말에도 오랫동안 주어가 없었다벼락치다라는 놀라움에서 그 힘의 주인으로 하늘님이’ 떠오르고 배고프다’ 라는 느낌에서 먹을 것을 찾는 내가’ 나서게 되었다.

 

p55

3.7 세계를 절대적으로 결정하고 지배하는 자사람들은 그를 신()이라고 혹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일컫고 그에게 이런 저런 성질을 매기려고 하지만나는 그 알 수 없는 자를 향하여 물음을 던질 수 있을 뿐이다그 알 수 없는 자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다만 그 알 수 없는 자로부터의 반향이 인간의 경험에인간의 논리적 사유에인간의 의지에 어떻게 부딪쳐 오는지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그것이 그 알 수 없는 자가 인간의 세계를 결정하고 지배하는 논리적 형식인지도 모른다세계를 태초부터 결정하고 지배하는 자는 기다리며 찾아야 할 어떤 것이지 인식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모든 살아 있는 것이 공유할 수 있는 것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이해할 수 있고 따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 사이에서 불일치를 일으킨다그러므로 공유할 수 있는 진리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그런 파국의 마지막 사태에 숨겨져 있다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 자에 대하여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재난과 이변 앞에서 우리의 말문은 막힐 수밖에 없다거기에 모든 살아 있는 것들모든 있는 것들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자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철학적 사유의 수천 년 역사 가운데서 이어져 온 착각은 세상에 나타난 사물들의 본질에서증거의 객관성과 논리적 합리성에서최고의 선()에서이런 저런 신의 속성들에서 모든 살기 위하여 경쟁하는 것들이아니 모든 있는 것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를 찾은 데에 있다.

 

 4.자기 분열자로서의 의식 그리고 존재의 보편원리로서의 비동일성

p59

4.5 (...) 철학자들은 모든 일어나는 사건들이 이행해 가고 의존하는 타자의 영토를 대상화한다모든 사건들이 결국에 귀속할 만한 대상을 만들어서 그 대상을 확인하고 자기화하려고 한다결국 자기 의식의 영토로 다시 끌어들여지지 않는 대상은 없다대상화 행위에는 이미 자기화가 전제되어 있다그것은 의존과 귀속의 대상인 동시에 그것으로 자기를 확인하고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세계에 자기 몸을 드러내는 모든 것들의 숙명인 타자에의 이행을그 숙명의 비동일성을 자기 동일자 또는 절대자에 호소해서 구제하려는 세계인식의 노력은 결국 다시금 좌초해서 타자화될 수밖에 없다


 5. 철학의 양심철학적 문명론

p61

5.1 (...) 삶을 위한 문제해결만이 철학적 사색이 추구하는 최선의 목표는 아니다당장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제에의 해답이 아닌 진리를아니면 해답을 외면한 의문을 던지는 행위의 높은 뜻을 버릴 수 없는 것이 철학자다자신의 삶에 승리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지복(至福)의 영생이 약속된다고 할지라도 철학자의 의문과 그의 인간적 방황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철학자는 그러므로 석가와 예수의 구원을 믿는 사람공자와 맑스의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는 사람이다애초부터 해답의 능력과 권리가 허용되지 않을 것이 뻔한 영토에서 여전히 잠재울 수 없는 의문 때문에 고뇌하는 자만이 철학자가 된다.


5.2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철학현실에 실천을 낳지 않는 철학을 그들은 규탄한다그들은 현실에 대한 철학과 행동을 요구한다그러나 그들은 현실의 애매성과 다의성에 무감각하다현실은 특별히 어떤 철학도 어떤 행동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을 감는다그러나 실은 현실의 철학과 행위는 언제나 선택의 임의성 위에 서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최선의 선택의 현실적 뿌리를 찾아가면 언제나 애매성에 부딪친다는 충격적 사실을 발견한다.


4. 세계 철학사와 주변화의 논리

 p66

1,4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결국의 어떤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시간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모든 사태의 운명이 양보하고 있다결국 다가오는 미래의 사태에 양보할 수밖에 없는 모든 주체의 논리적 숙명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철학자들조차 모든 사물이 이루어져 가는 성취의 논리적 꼴에 대하여 급급할 뿐이다그들조차 주관적이며 관념적이다그러나 모든 이루어져 가는 사태는 반드시 사라져 가는 것이다그것이 모든 사태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법칙이라면 그 숙명의 논리적 꼴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왜 고립과 소외를 두려워하는가그 자신의 존재를 군거와 집단에 남겨주어 거기에 파묻어 버리려는 것인가그럴 리가 없다오히려 그 자신의 존재를 좀더 지탱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그는 결코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그는 결국 사정없이 다가서는 운명의 법칙그 자신의 지속에는 개의치 않는 참 보편의 어길 수 없는 명령에 비로소 복종한다그는 언제나 차선(次善)의 선택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주변자다개체들이 펼치는 자기 지탱의 노력과 그럼에도 사정없이 내려치는 운명의 명령여기에 세계를 주름잡는 최고의 논리적 꼴이 숨겨져 있다.


p72

3.3 무문자(無文字)시대의 논리는 기존의 철학사를 넘어 고고학의 시대로 진입해서 모든 인류가 공유할 만한 철학사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그런 시대에 이미 인류의 이른바 자연에 대한 상상과 실험그리고 철학적 사색이라는 것이 일어나고 있다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수십수백만 년을 또는 그 이상을 거슬러서 그 사이에 펼쳐진 자연사를 다시 구성하려는 현대과학이 취하는 하나의 탐구방향에 따르는 것이다그런 탐구방향은 유물사관에도 관념사관에도 모순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그것은 사회 문화적 생존 이전에 자연의 원시적 적응원리로서의 관념과 사상의 출현과 그 동기를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 나타나는 사회 문화적 변혁과정을 본다.

 자기 동일성을 지탱하려는 생명체의 환경에 대한 매개행위로서특히 인간의 경우 어떤 생물에게서보다도 더 개발된 매개형식이 자기 동일성을 지지확장하는 기발한 발상으로서 과학과 철학이 나타난 것이다이 보편적인 자연사의 원리는 유물변증법적 인식론에 따르는 것이다다만 자연에 대한 원시적 보편주의 또는 평등원리를말하자면 인간의 고유한 특권에 대한 과감한 양보를 의미한다그러나 모든 생명의 보편적 도덕원리로서 투쟁과 승리를 포기해야 하는데서 그들은 아주 곤란한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p74

3.7 일반 철학사란 무엇인가그런 것이 세상에 있는가그것은 중국 철학사도 인도 철학사도 아니다옛날 그리스나 유럽의 철학사도 서양 철학사도 물론 아니다그런 지역 철학사를 합쳐 놓은 세계 철학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동양사람이든 서양사람이든 간에 기독교도든 불교도든 간에 이런 저런 우연한 경위를 거쳐 주조된 언어의 체계 또는 이런 저런 문화에 소속하기 전에 모두 매한가지로아니 어쩔 수 없이 자연의 삶이라는 원시적 사태에서 출발하는 사유의 모습을 그리지 못한 것이 오늘까지 철학사의 관행이다동서의 철학사가 2500년 전으로부터 돌연히 발생한다는 것은 이상하고도 부당한 일이다이제 철학사는 그런 언어의 체계와 문화라는 조작된 장벽을 넘어 모두 같은 보편적 조건을 지닌 자연의 사람으로 돌아가야 하는말하자면 원시적 바탕을 이탈해 본 적이 없는 자의 지속적인 생존활동의 사변적인 부분으로서 다시 짜야 한다그러니 해체의 논리는 철학사 가운데서언어의 견고한 구조와 거기에 세워져 있는 장벽으로서 온갖 사회학물리학 존재론의 전통과 체계를 꿰뚫고 세계의 가장 원시적인 그러나 가장 필연적인 삶의 질서에 도달하는 것이다.


3.8 철학사는 어떻게 다시 방향을 잡을 것인가? (...) 일반 철학사는 서양이 주도하는 세계 철학사의 판도에서 소외된 동양 철학사의 자리를 회복시키며 문명인과 석기시대의 원시인에게도 동등한 논리적 능력을 부여하는 길을 찾는다


p75

3.9 (...)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순환이 하나의 법칙 안에 묶여 있음을 어떻게 보여 줄 수 있는가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으로부터 그가 나타날 때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정보들이 그 생명의 시작을 향하여 모이는그렇게 모태에서 하나의 개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그리고 그 잉태된 한 점의 세포가 주변의 물질과 정보를 긁어 모으며 증식되어 가는 과정을그러나 증식을 거듭하다가 어느 때가 되면 긁어 모으기는커녕 지탱하기도 어려워서 지니고 있는 물질과 정보를 주변으로 돌려보내야만 하는그래서 드디어 게걸스럽게 정보를 긁어 모으던 한 개체의 중심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는 모두에게 평등한 과정을그렇게 주변자로서 각기 최선의 모험을 연출하는 모두의 모습을 컴퓨터 위에 그래프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임시의 중심이었던 그 개체는 그러나 그 자신을 형성하는 정보의 수집과 관리에서조차 기실 주체는 아니었다그렇게 고장성쇠(枯長盛衰)하는 세계의 과정을 이해하는 논리학은 모든 것의 가장 원시적인 질서를 지배하는 모순과 반전의 규칙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세계로 던져진 주변자가 자기화할 수 없는생존하는 한 자기화할 수 없는거기에다 해체시대의 모험과 비극으로 가득 찬 삶의 모습을 외면한이른바 체제의 철학자에겐 보이지도 않는 참 보편의 논리가 있다이 보편의 논리를 따라야 비로소 주변자로서 평등한 모든 사람들의 참다운 세계 철학사를 쓸 수 있다철학자는 세상사람들에게 허구의 전문(專門)을 가르치기 전에 그들이 숨긴 원시의 삶과 논리를 대변해야 한다.


p77

4.1 (...)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직 그들의 관찰의 논리적으로 일반화하는 데 주저한다그들은 이렇게 일반화할 수 있다. [P · ~P] 라는 것은 현실의 사태가 이미 선험적으로 미래를 향하여 갈림길에 선 존재양식을 설명하는 것이다현재의 시점에 있어 모든 가능한 사태는 P이면서 ~P이다세상에 오직 P로서 또는 오직 ~P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명제 P든지 ~P든지 그 자체로서 독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콜링우드에 따르면, P는 이미 전제된 어떤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타나며 그때에만 비로소 그 명제의 진리값이 결정된다. P든지 ~P든지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진리값)를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말하자면 P는 그것에 얽힌 그 밖의 어떤 것에 의존해 있다이처럼 하나의 명제 P가 서술하는 사태가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문제다어떤 사태 P가 그 밖의 어떤 사태 ~P에 관계하지 않고서는 P가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말 P인가? P는 아마 ~P의 부분으로서 그리고 명백하게 [P · ~P]의 부분으로서밖에는 있을 수 없다.  

 이상(李霜)이 그 자신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그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그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자기를 잃어 가는 과정(<李霜의 철학적 이해>에 대한 이경숙의 노트)은 모든 존재하는 사태가 이미 논리적으로 마련되어 있는 우주적 프로그램 [P · ~P]에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다우주의 탄생 또는 존재의 출현이라는 사태 자체가 이미 그 이전의 사태에 대하여 반전과 모순의 관계로서 이루어진 것이다그러니 그의 소산(所産)들이 그들이 인간이거나 자연의 사물이거나 간에 각각 모순과 반전의 관계로 등장하면서 임시의 동일성을 현실에서 찾아 서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p79

4.2 이 논리는 반드시 끼여들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을 버린다그래서 철학자는 최소한의 것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찾는다미처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를그럼에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박혀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것들에 집착해 있다유교든지 불교든지 기독교든지 문화혁명(文化革命)이든지 이런 저런 교리와 예언에 자기 생명에 매달리듯이 집요하다.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것에다 꼭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붙이는 고집스러움이 사람들에게 있다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것들우연한 것들을 벗겨 버린다면 플라톤이나 후설의 본질직관그들이 말하는 본질을 찾을 수 있는가나는 쉬지 않고 바꾸어 새로운 것을 본다여기서 못 본 것을 저기서 찾으려는 것인가아니면여기서 본 것을 저기서 확인하려는 것인가? (...) 이런 것과 저런 것들을 거쳐 가는 사이에 남을 만한확보할 만한 보편자가 있을 수 있는가없다.

 버려야 할 것을 쉼 없는 새로움에서 발견한다아니새로움에 부딪치는 데서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을 쉼 없이 버린다그렇게 쉼 없는 새로움에 부딪침에서 무엇이 견뎌 남겠는가? (...) 기대하며 쌓고 쌓은 것이 그 이전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경험의 거치는 꼴을 수없이 볼 뿐이다.

 이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위안과 희망을 준다이것이 그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도 속임수 많은 현실의 미로(迷路)에 잡혀 헤매는 자다현실을 버티고 있던 모든 것이 쓰러져 가는 과정에서 잡히는 틀과 같은 것그 틀을 넘어서 모든 것이 쓰러져 가는 과정에서 잡히는 틀과 같은 것그 틀을 넘어서 모든 것이 사라져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이 피안(彼岸)에 대한 위대한 철학자의믿는 자의 장담이 허구에 가득 찬 것임을 충분히 시달린 20세기 사람들은 알고 있다.

 

p81

5.대화의 논리로 본 역사

 1. 대화의 논리

 1.1 대화 가운데서 묻는 자와 응답하는 자는 각기 그 자신의 고유한 개념정의와 공리(公理)들을 중심에 놓고 있다.


 1.2 각자의 개념과 공리들은 일정한 범위의 함축성을 지닌다.


 1.3 묻는 자는 응답하는 자의 개념과 공리들로부터 유도되는 논리적 귀결들이 미결정성과 모순이 노출되면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개념과 공리들을 고치거나 확장하는 일을 한다.


 1.4 그러나 미결정과 모순은 한 대화의 영역 또는 중심에서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밀어내거나 감추어질 수 있을 뿐이다대화의 영역 또는 중심이 옮겨지면 이에 대응해서 미결정과 모순의 구석자리도 옮겨진다한 대화의 영역이 만들어내는 잉여지대인 미결정과 모순의 이행성(移行性)은 (힐베르트와 러셀화이트헤드가 추구하던 완전하고 일관된 공리체계의 불가능을 증명한괴델의 불완전성이론과 후기 비트켄슈타인의 모순의 주변성을 일반화할 때 얻을 수 있다.


 1.5 미결정과 모순의 이행성을 드러내는 논리적 구조는 괴델과 비트켄슈타인 이전에 헤겔 그리고 오래 전에 엘레아의 제논과 소크라테스 그리고 비슷한 시대의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

 그러나 그들은 소크라테스적 대화의 영역 가운데서 비로소 언제나 미완결로 끝날 수밖에 없는그래서 다시 미결정과 모순의 초점이 잡히지 않는 잉여지대로 옮겨 가는 논리전개의 역동적 구조가 드러난다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모순과 미결정의 잉여지대는 대화의 영역 안으로 함축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끝없이 이탈해가는 것이다.


 2. 잉여에의 끝없는 대화인 역사

 2.1 사회와 문화의 체계는 그 중심을 차지하는 기본적 개념과 공리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구석에 방치소외되어 있는 모순과 미결정의 잉여로 이루어진다.


 4. 주변자에 관한 추가 노트

 [체제가 새로운 체제에 의해 교체되는 과정은 체제의 중심에서가 아니라 주변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이집트 태생의 경제이론가 사미르 아민이 그의 <불평등발전론>(Le Développement inégal, Paris:1973)에서 제출한 명제다. (...)

 다윈과 맑스프로이트비트켄슈타인과 포스트모던’ 데리다는 각기 자기가 소속한 서구문명의 전통을 지탱해 온 뿌리깊은 기본원리와 신념을 거부한 혁명의 사상가다그럼에도 그들은 자기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대안(代案)의 개척자가 되지는 못하였다그들은 아직도 근본적인 물음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딛고 선 존재와 논리의 확고함에 의문을 품었으면서도 그 동요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에 대하여 돌이켜볼 어떤 아르키메데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지점도그들이 살았던 세계의 중심인 유럽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이는 자기의 터전으로부터 쫓겨난 일이 없는그래서 자기 언어와 사상을 지닐 수 있었던 지배권의 사상가에게 거는 지나친 기대인지도 모른다따라서 근본적인 물음은 자신이 수천 년 누려 온 안전한 터전으로부터 쫓겨나 20세기의 주변지대를 떠도는 비()서구계의 국외자(局外者)에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 세계의 중심을 잡고 거기에다 자기의 꿈 같은 구도를 실현하려는 지배자의 귀와 철학자의 눈은 이미 그 자신의 끝없는 존재를 향한 욕망으로 어둡게 가려져 있다.

 

 p89~90

6. 동양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1. 논리적 숙명으로서 다름

 1.2 새옹지마(塞翁之馬

 (...) 한 사건경험의 우연성말하자면 다름으로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그러니 일어나는 사건의 논리적 무규정성이 아니다그것은 다름으로 열려 있음으로 해서 무엇으로인지 알 수 없는 같음으로의 예측 불가능성이다그것은 이미 논리적으로 그렇게 규정조건지워진 세계에 들어 있는 것이다.

 1.3 사람과 나무가 각기 그의 운명을 개척하고 자유를 실현하는데 쓰는 방법과 부딪치는 한계에서 무엇이 다른가현상으로서는 다른 듯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 없다.

 제각기 흩어져 가는 가을의 나뭇잎보다 사람의 떠나가는 길이 나을 게 뭐랴그들의 붙박이 삶이나 그러다가도 결국 계절이 되면 덧없이 사라져 가는 그들의 운명에 비해서 사람의 삶과 운명이 다른 게 뭐냐?

 

1.4 다만 우연한 것들이본디 아무것도 아니었던 있지도 않았던 라고 하는 이 한 점에 밀려 왔다가 그리고 물러가면 그 하나의 점과 자리조차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우연한 것들로 채워졌다가 빠져 나가는 그 빈 껍질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덧없는 그 자리는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니다잡히지 않는 그런 것들의 오고 감이 혹은 무엇 같음으로 드러나고 다시 다름으로 사라져 가는 길이 되풀이되는 것이다이것은 관념적 허무주의가 아니라 물리적 현실사태다.


p98

 3. ()과 허() : 다름의 논리전략

 3.1 동양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언행이 일치하지 않음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과 실()혹은 이론과 실제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에도 일치될 수 없는 숙명의 논리적 관계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표리부동(表裏不同)의 현실을표면(表面)(과 명분과 이면(裏面)의 배려 사이에 끝없이 일어나는 논리적 괴리를 진지하게 익힘에 있다.


 3.2 옛날로부터 중국인들은 왜 실()과 허()를 잡고 오늘의 이른바 논리라는 것을 버렸는가그들에게 논리는 다만 이름(또는 개념의 분석과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개념의 분석과 조작은 같음의 논리를 만들어 낼 뿐이다그 같음의 논리는 그들이 이미 같음으로서 잡고 있는 것밖에 아무것도 가져다 줄 수 없다.

 그들은 개념의 유희와 사변에 지나지 않는 같음으로의 길을 벗어나 다름으로의 길을 잡으려고 실과 실의 바탕으로서 허를 본다.


 3.3 서양인의 마음이 실에 없는 것은 아니다서양인의 마음이 실에 있는 것은 그것이 실제의 경험과 실험으로서 귀납법이나 그 밖의 상향추론에서처럼 같음의 환원논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p101

 3.9 입 안으로 들어간 생선구이는 즐거움인가 고통인가즐거움으로의 먹음인 같음으로의 길과 고통으로의 먹힘인 다름으로의 길이 하나로 얽힌 이 모순과 혼돈의 총체적 사태는 옛날 그리스 로마사회의 전통에서 말하는 정의(正義)나 동아시아 문화권에 정착되어 온 도덕(道德)이나 기독교의 교리로서 전도하는 사랑이라는 척도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다.

 세계의 총체적 사태가 언제나 모순과 혼돈으로 빠져 버린다는 사실은 어떤 같음의 논리도-그것이 존재이해의 논리든지 도덕판단의 논리든지-허구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3.10 온갖 사물의 무상(無常)함이란 무엇인가있는가 하면 없는 것이다개체로서 있으면서 개체로서 있지 않은 것이다이 무상함을 세계의 질서로 받아들이는 데에 자유의 첫걸음이 있다그러니 자유는 X로 있으면서 X로 있지 않음을 저항 없이 수행하는 데에 있다.


 p102

 4. 허사(虛辭결정론 주변자의 논리

 4.1 (...)

 주변을 잡고 중심을 흔듦으로써 문제해결을 꾀한다주변자의 동의에 의해서 비로소 중심자의 보편성이 세워지기 때문이다주변을 잡는 자에게 참 보편에의 길이 있다.


 p105

 5.2 개인주의는 개인에게 자유를 가져 오는가개인주의를 원리로 하는 이른바 개방사회에서 개인은 그 자신에 대한 마지막 책임자다누가 그를 대신하여 선택하고 결정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

 끊임없이 위협하는 타자와 대결하고 경쟁하는 그의 마음과 영혼 그리고 자아는 외롭고 고집스러우며 타자를 향하여 닫혀 있다그의 마음과 영혼은 타자와의 외로운 대결에서 그 자신을 흔들리지 않게 버텨 줄 절대타자에게 열려 있을 수 있다. (...) 그러나 그의 절대의 타자는 그의 마음과 영혼에게 참 자유와 평화를 주는가?

 개인주의가 허용되지 않는 통제사회에서 개인에게 자유가 없는가이른바 폐쇄사회에서 개인은 전체의 조화라는 질서 가운데로 해체되어 버린다전체를 지배하는 질서를 떠나서 그 자신의 고유한 정체그의 같음은 찾을 수 없다.

 그의 운명과 정체를 결정하는 배려와 선택이 타자에게 양도된다그가 개인적으로 고유하게 확보할 수 있는 자기의 같음그의 정체는 애매하다그가 고집할 수 있는 그에게 고유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의 마음도 영혼도 자아도 근본적으로 그의 것이 아닐 수 있다마음과 영혼과 자아는 세계의 타자성그 다름을 향하여 열려져 있다그에게는 전통적 유교와 불교사회에서처럼 또는 공산주의 사회에서처럼 그의 마음과 영혼과 자아의 개별적 같음을 지키기 위하여 집요하게 매달려야 할 아무런 이유도 터전도 없다.

 

5.3 서양의 과학과 철학사의 전통이 발젼시켜 온 모순으로서 보편주의와 개인주의의 관계가 있다그들의 과학체계에서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은 보편의 질서 가운데로 해체된다. (...) 개체들이 지닌 자기 동일성이란 결국 타자성으로 그래서 보편성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이 제행무상(諸行無常)에 다를 바 없는 과학의 논리는 서기 전 천 년 중앙아시아를 떠돌던 아리안이 남긴 한 우파니샤드로부터 피타고라스파르메니데스플라톤을 거쳐 서양인들에게 들어온 것이 아닐까?


 7. 한국 사상사의 과제-맑스주의

p110

  1. (...) 둘째로 문명의 끝없는 듯 보이는 발전에도 불구하고 더욱 명백해지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결국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한계에 대한 깊고 정직한 인식이 우리 세계관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전통적인 삶으로부터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운명의 개척과 발전 가능성에 착안할수록 그 실험을 가로막는 근본적 타자성(他者性)을 무시하는 의식에 젖고 그것이 오늘의 세대로 하여금 소박한 낙관과 시대착오적 확신에 안주하도록 이끄는 것이다확신과 낙관은 대화하는 마음에 착각과 단절을 가져 오고 자기 부정과 지양(止揚)이라는 변증법적 운동을 정지시키고 만다이것이 우리 사상계에 흘러 들어오는 모든 조류들이 각기 떨어져 우왕좌왕하거나 만남이 없이 다만 평행하는 이유다.
  2. p112 (...) 한국의 산업사회로의 진입은 다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파악과 해결에 있어서도 이미 앞서서 산업사회와 그 문제를 생각한 구미(歐美)학계의 현대산업사회 비판론에 호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그리하여 70년대에 걸쳐서 우리나라 사상계에서 각광받은 철학사조는 실존주의도 실용주의도 실증주의도 아닌이런 모든 철학의 사회의식 결여를 공격하는 호크하이머아도르노마르쿠제 등의 이른바 비판이론이라는 것이었다그들은 교조적 맑스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그것이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켜 기계화하고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에서와 같은 결과를 가져 왔다고 비판한다그들은 공산주의에서도 자본주의에서도 인간이 전체주의 체제에 매몰되어 가는 세계적 현상을 놓고 인간성의 해방과 비판적 이상의 회복을 외치는 것이다이러한 비판이론은 그동안 경제개발 제일주의를 추진해 온 70년대 한국의 몰인권적 정치현실과 몰인간적인 문화 도덕적 상황에 대하여 심각하고도 충격적인 경고로 다가올 수 있었다.

p114. (...) 그러나 새로운 현실창조를 위하여 철학은 현실에이론은 실천에 언제나 밀착관계에 있어야 하는가현실과 그 현실이 강요하는 실천은 오히려 이론적으로 다시 반성되고 다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인간이 현실창조를 위하여 향유해야 하는 자유실천의 자유는 현실에 근시적으로 밀착하는 데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시시각각으로 다가와 결돤과 행동을 요구하는 현실에 대하여 상상적 실험의 자유를 허용하는 거리를 유지함으로써만 현실이 지닌 제약조건을 극복지양하는 창조적 실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학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는 특수성 태제와 현대과학의 이론연구를 모델로 하는 실증주의그리고 변증법적 부정의 논리를 정신으로 하는 비판이론은 서로 대립하고 배척하는 삼각관계를 이루었을 뿐 토론과 상호지양에 의한 보드 큰 한국사상의 잉태과정이 되지를 못하였다


4. (...) p117 

 실천은 목적실현의 행위다그러나 그 목적하는 바가 아무리 최선의 것일지라도 목적을 실현하려는 실천행위만이 우리의식과 관념활동의 전부를 규정하고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우리는 현실에서의 실천행위를 그 행위 밖의 무한정한 가설적 시각으로부터 바라보는 의식활동의 자유를 가진다그리하여 의식활동은 실천행위의 현실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초월(극복)하는 자유를 행사한다그리고 우리는 흔히 실천에 옮길 수도 없는그러나 언젠가는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를 의식과 관념에 종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실천행위가 이루어지는 현실과 현재에 사는 것이 아니다하루종일 실험실에 갇혀서 일하는 과학자를 보라그의 의식활동은 그가 현재 조작하는 온도계나 압력계 혹은 플라스크 속의 반응장치로부터 멀리 떠나 그가 증명하게 될지도 모를 이런저런 가설의 세계에 있다이러한 사실은 철학자에게사업가에게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따라서 우리의 실천행위는 현실과 현재로부터 해방된 의식과 관념의 자유로운말하자면 존재의 현실 또는 현재에 구속되지 않는 가설행위에 의존한다만약 현실의 사태와 실천행위가 관념비판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면 모든 과학자와 철학자는 그의 연구활동을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의 삶을 정지해야 한다


p120~1211. 5. (...)

그런데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적 관계는 이미 서양의 중세시대에 형성된 기독교적 자연관에서 싹트고 있다오래된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자연을 하느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용하도록 만들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따라서 자연을 이용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특권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이것보다 더 오래되고 더 보편적인 세계관말하자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지배적인 관계가 이미 2500년 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파르메니데스와 프로타고라스고르기아스 같은 소피스트들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논리적이성적 능력에 의한 존재질서의 완전파악을 이룩했던 것이다그 이전의 호메로스 같은 시인들의 이야기에서는 이런 저런 신()들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이 그리스의 철학자들이야말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지배적 관계를 확립한 선구자들이다.

 그러므로 맑스는 헤겔과 칸트플라톤과 파르메니데스 같은 자기 이전의 철학자들을 관념론자로 몰아쳐 버리기 전에 자기 자신이 아직도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적착취적 관계로서의 생산력의 발전관을 버리지 못한 자기 이전의 전통에 머물러 있는 관념론자이며일관성을 잃은 인류 본위의 주관적인 형평론자임을 스스로 반성했어야 한다따라서 맑스주의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유물론적 관념비판에 토대한 실천이론은 여전히 주관적인 관념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이제 진정한 탈()관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p123

 6. (...)

 주인과 노예에 대한 헤겔의 변증법과 계급모순에 대한 맑스의 형평론은 그러한 행위에 있어서 주객(主客)의 반향관계를 고려한 정의로운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적 관계가 일으키는 자연 또는 (암호상자[black box]에 숨겨진존재의 근원으로부터의 반향을 감안하는 데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그러므로 생산과 창조의 주체적 행동이 더 이상 최고 목표이거나 최고 선()일 수 없다그것이 자연이든지 타인이든지 간에 타자로부터의 반향을 보편적으로 감안한그리하여 우주적으로 정의로운 형평을 유지한 생산과 창조만이 우리의 목표이며 선일 수 있다우리의 목표와 선은 맑스주의자가 외치는 해방과 자유를 어느 특정자에게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실현하는 데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와 선은 맑스주의자가 외치는 해방과 자유를 어느 특정자에게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실현하는 데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근원적 타자로부터의 반동과 반향을 경청하는 보편적 형평질서 위에 서는 평화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인간과 인간의 타협에 의한 평과가 아니라 우주적 정의 위에 서는 평화가 필요한 것이다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과제는 주체적 실천에 의한 혁명이 아니라 보편적 형평질서 위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로의 혁명이다


2부 동아시아 문화론

  1. 사례의 합리성과 반()추상화의 논리

1.2 (...)p131

 인간이 부딪치는 현실체험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 합리적 판단은 논증적 추리나 기술적으로 처리되는 계산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이러한 논리와 기술의 한계 때문에 합리성과 합리적 판단에 대한 논리적 정의를 다시 구성해야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모든 연결된 요인들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유기적 판단이 동원돼야 하는 인체 질병의 진단에 있어 각 분야별 전문가의 기계적 검사에 의존하는 현대의학은 옛날처럼 노련한 명의(名醫)의 종합적 통찰과 직관이 아쉬운 상황을 불러일으킨다각 분야별로 특수화된 전문의들의 기술적 검사들을 모두 동원해도 이른바 명의의 오래 숙련된 직관과 판단을 따르지 못하는 사례에서 기술의 발달과 전문화의 허구를 본다.

 (...)

 예로부터 동아시아문화에서 고유한 삶의 지혜는 일면적이며 추상적인 것을 경계한다아버지의 뜻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은 효()이나 매가 지나쳐서 까무러칠 때까지 맞는 것은 효가 아니라고 가르치는 공자는 추상적인 원칙을 경계하며 실제사례에 따르는 판단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그렇지 않을 경우 효는 아버지로 하여금 살인의 죄에 이르도록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 (조우현, <컴퓨터와 명의와 효에 얽인 사례에 대하여>, <<理性과 感性사이에서>>(서울,1980)참고).


p133

3., (...)

 사례에 의존하는 모범 또는 범례의 추리에서처럼 중국인의 실제주의의 합리성의 개념과 논리가 명백하게 나타나는 데는 없다그들의 실제적인 세계이해가 사례에 의존하는 추론방법으로 밑받침되어 있고이 사례에 의존하는 추론방법은 그들의 일상적인 담화와 대화의 형식으로 틀지워진다과도한 추상화 또는 절대화를 경계하여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상황 가운데서 찾아져야 할 중용의 판단 원리를 강조한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그뿐 아니라 옛날 그리스인들이 예술의 영역에서 추구했던 조화균형비례의 질서는 극단의 추상화를 삼가며전체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그러면서도 그들의 조화와 균형과 비례에 대한 배려는 결국 산술적으로 추상호되는 형식적 질서를 지향하며 그 형식의 질서를 절대화형상화하고 있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서구의 지성을 지배하는 것이다.

p134

 이와는 반대로 중국적 합리성의 표현으로서 사례에 의존하는 모범 또는 범례추리는 추상적 일반화 또는 보편본질의 실체화를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추론의 실험과정의 극한점에서 만날 수 있는 모순과 잉여의 사태를 이른바 중도(中道또는 시중(時中)이라는 안전한 중심지대 가운데에 은닉하려는 것이다모순과 잉여의 사태를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중국과 그리스의 문화가 각각 발전시킨 논리적 추론과 합리화의 형식 차이에서 두 개의 다른 지혜의 개념이 서구와 동아시아 문화권에 정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동아시아 과제로서의 서구의 정신

p140 (...) 

 그러나 포퍼는 자신이 제외하는 과학의 논리가 이미 옛날 그리스인들의 논리적 방법에서 시작되었으며그 논리적 방법이 실험과 관찰의 계기를 근세시대에 얻음으로써 과학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말하자면 포퍼가 사회이념과 과학방법의 정신으로서 제시한 추측과 반박의 논리는 이미 옛날 그리스의 수학적 방법으로부터 시작돼 근대과학혁명을 거쳐 온 서구문명의 정신과 논리에 대한 한 현대적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3. 문화의 전통으로서의 실증주의

 p144

 2. (...)

 현대 사회학의 주요이론의 학파가 형성된 기원을 우리는 맑스(1818~67), 뒤르켐(1858~1917), 베버(1864~1920)의 사상으로서 밝힐 수 있다물론 이들의 사상 원류는 홉스로크루소칸트헤겔존 스튜어트 밀오귀스트 콩트 그리고 역사주의 학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사상가들의 공헌 없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지만적어도 우리들이 논하려는 사회이론 또는 사회과학에서의 인본주의실증주의 논쟁의 계보를 밝히기 위한 충분한 배경이 된다.

 뒤르켐은 사회적 현상을 개개인들의 심리적 작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말하자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그에 의하면 개인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실재 자체가 지닌 어떤 법칙이다자살행위와 같은 아주 사적인 결단도 그 개인이 처한 사회적 관계 또는 구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

 뒤르켐의 자살론 또는 맑스의 경제 결정론에서 전제된 방법론적 견해와 대결하는 견해를 베버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보여 주고 있다여기서 베버는 사회구조 또는 더 구체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어떻게 개신교 윤리의 정신에 의해서 형성되었는가를 밝힌다말하자면 사회구조 또는 체계가 인간 행위와 관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와 관념이 구조 또는 체계를 형성한다고 하는 생각이다이는 인간 활동(노동또는 창조적 행위가 역사를 만들어 간다고 갈파한 젊은 맑스의 인본주의 사상과 함께 오늘 정통파 사회과학 방법론을 비판하는 현상학적 지식사회학의 개척자 알프렛 슈츠(A. Schutz)와 피터 버거(P. Berger) 그리고 인본적 맑스주의자 마르쿠제와 호크하이머의 새로운 방법적 이념의 선구적 자리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

p146 

그러므로 서양사람들의 사회과학 방법론에 관한 논쟁을 보다 깊은 철학사적 조명에 의하지 않고 그 논쟁에서 드러난 피상적 측면들만을 우리나라에서 되풀이하는 것은 아주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우리나라 학자들이 남(서양사람)의 쉼 없는 지적 활동의 결과(이론체계)들을 배우고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태도는 해방 이후 오늘까지 계속되어 왔다근래 우리나라 사회학계의 논쟁에서도 마르쿠제하버마스알벵 굴드너(A. Gouldner), 피터 버거어빙 고프먼파슨스스키너레스리 화이트(L. Whyte) 같은 사람들이 써 놓은 수많은 말들을 그대로 반복한 것밖에 거기에 어떤 새로운 자기 사상을 첨가한 일이 있었던가 반성해 볼 때 그러한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학자로서 이런 저런 선구자들의 단순한 반복자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4. 문화의 논리-동아시아와 서구의 사례

p157

서구적 합리성의 구현으로서의 과학혁명

(...) 그렇지만 알렉산더 코이레는 갈릴레이에 대한 책 속에서 그리스인들의 공헌에 대한 지나치게 좁은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사변은 최소한 관찰만큼 중요하다.

(...)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하며 자연에 물음을 던지고 그 응답을 해석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연역이며 또한 <상상적인개념들이다.’ (Koyré, 37)


p160

(...) 

노자에게 있어 도가 되돌아온다는 것은 그 뿌리인 이름지을 수 없는 없음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유가의 고전으로서 역경(易經)이나 중용에서 도는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끊임없이 반전하는 과정을 함축한다(Fung, 1962, 99~111). 도가나 유가 어느쪽도 양극 사이의 반전이라는 순환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그렇다면 가장 합리적인 행동은 엄밀하게 극단으로 나아가지 않고 중간점에 처하는 것곧 시중(時中)에 있다그래서 전통적으로 최고의 지혜 또는 가장 합리적인 행위는 극단을 피하라는 격률 속에 표현되어 있다

 (...) ()을 잃은 촌부에 대한 이야기를 왓츠(A. Watts)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것은 아주 운이 좋지 못한 사건이었으므로 이웃 사람들은 모여서 그를 위로하였다그러자느 그는 글쎄요라고 말했다다음날 도망갔던 말은 여섯 마리의 야생마를 데리고 돌아왔다이웃사람들은 다시 와서 그의 행운에 대해 떠들었다그러자 그는 글쎄요라고 말했다다음날 그의 아들이 야생마들 가운데 한 마리에 안장을 얹고 타려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분질러졌다이웃사람들이 다시 와서 그의 불운을 동정하는 말을 했다그러자 그는 글쎄요라고 말했다전쟁이 일어나자 징병관이 마을에 와서 젊은이들을 병정으로 뽑아 갔다그러나 농부의 아들은 부러진 다리 덕에 이를 면했다이웃 사람들이 와서 모든 것이 다 행운으로 결말지어졌다고 말하니 그는 글쎄요라고 대답했다. (Watts,<Tao>, Penguin Books,1979, 31)


p161

 맺음말

 현대 논리학 발전에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논리실증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많은 20세기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기본적인 논리의 법칙이 추상적이고 공허하며 논리외적 조건말하자면 문화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게 되었다그러나 그 이후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경험주의 관점을 대변한다논리의 법칙은 합리적인 신념의 체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또 이것을 다음과 같이 보다 엄밀하게 진술한다논리의 법칙도 마찬가지로 이상화된(ideolized) 합리적인 신념체계의 이상화된 부분들에만 직접적으로 적용된다.(Ellis, 100). 그러므로 각 문화권 안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기본적인 논리의 규칙들은그것이 형식화된 것이든 아니든그 문화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논리의 규칙들은 각 문화권 안에서 고유하게 추구되는 합리성의 가장 이상화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5. 문화의 다름을 비교할 수 있는가?

p164 인본주의 경향의 사회이해가 구미학계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사회이해에 있어서 탈식민주의와 인본주의는 20세기 역사에 도전해 온 인간 사상의 이대주류(二大主流)라고 볼 수 있다여기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온 탈식민적 역사이해나 서구의 사회이해의 논리가 아직 현대철학의 비판과 세례를 충분히 받지 못한 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


  1. <한국적>시야가 지니는 문제점

p165~167

그러나 우리는 왜 특별히 과거를 통해서 자기 존재의 고유성을 확인하고 보존하려고 하는가그러한 경향은 약소민족의 불안정한 현재상황그러한 현실을 직면할 수 없는 뿌리깊은 도피의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 반성의 질문을 던져 볼 수는 있을 것이다자기 존재의 입지를 현재에서 찾을 수 없는 노인은 과거의 영광을 회상해야 하는 것이다.

(...)

 첫째로한국인의 문화와 사상 또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 시야에서 볼 때 비교될 수 없는 특수성과 고유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폐쇄적 태도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이러한 종류의 특수성과 고유성의 주장은 우리민족이 동양사 내지 세계사의 흐름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할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 한국적인 것한국적 시야의 특수성은 세계사적 관점으로 연결통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레브스트로스에서 비롯한 근래의 구조주의 인식론은 보편성을 강조하며 역사주의적 이해를 비판하기 때문에 때때로 서구문명으로부터 소외된 원시단계의 민족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특수성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그러나 이러한 보편주의의 사회이해도 경험론적 분석에 의해서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 
 오늘 우리의 주변적 존재상황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를 가장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의식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역사의 주류에서 소외된 자는 자신의 처지와 예리하게 대조되는 사물의 다른 측면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철학적으로 충분히 세련된 주변자는 반드시 비실재(非實在)의 실재화(가능성)를 그리고 실재의 비실재화(가능성)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이러한 경험은 소외된 존재로서 세계를 볼 때뿐만 아니라 자신의 습관적 생활과 사고의 궤도가 깨어지는 문화적 충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따라서 소외된 자로서 똔믄 이방인(異邦人)으로서 부딪치는 충격의 체험은 제한된 영역 안에서의 특수한 세계이해를 넘어서게 하는 계기가 된다.

 

2. <서양적>사회과학의 문제점

p169~171

서양에서 이루어진 보편주의 사회과학의 체계는 비교적 우월한 위치에서 안정통합되어 있었던 서양 문화권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그러한 사회인식의 체계가 열세(劣勢)에 몰려 있는 문화권 가운데서 온갖 이질적 세력들 사이의 갈등을 체험하는 민족들의 다양한 주관적 세계들을 표현해 줄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이질적 문명권에 의한 지배라고 하는 갈등적 상황체험을 지니고 있는 비서구세계에서는 그 복합적인 혼돈상을 어떤 하나의 통일된 사회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 철저한 경험현상적 이해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다율다중적(多律多重的)더 나아가서는 모순적인 세계를 보도록 인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렇게 얻어지는 세계관이 토마스 쿤툴먼(S. Toulmin)과 같은 과학사가의 설명으로부터도 유도되는 것을 발견한다툴먼에 의하면,


 서로 다른 이상과 모형들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들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어떤 공통의 이론적 용어도 없다그들이 공유하는 어떤 동일한 문제조차도 있을 수 없다한 사람의 눈에는 설명을 요하는 문제적 현상으로 보이는 사건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과될 것이다.


 따라서 가치판단의 기준(이상또는 인식체계(모형)를 서로 달리 하는 개인 또는 집단들이 공존하는 사회문화의 다원화된 세계에서 갈등과 모순은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

(...) 오늘의 시점(時點)에서 볼 때 우리세계의 특징은 통일인가 분열인가?

 결국 서양적 사회인식의 편협성은 혼돈과 갈등그리고 무모순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불합리한 것에 대한 그들의 비()포용성에서 싹트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질서를 형성하는 것논리적인 것합리적인 것이것은 과학과 철학그리고 예술에 있어서도 서양인들 사고의 중요한 지도원리 또는 이념이 되어 왔다현실세계가 드러내는 혼돈과 갈등은 논리적으로 제거되어야 하며그것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홉스루소로부터 맑스와 듀이에 이르기까지 서양 전통의 철학자정치사상가들이 흔히 갈등의 제거를 선결조건으로 하는 사회체제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ᄄᆞ라서 사회체제 질서의 기초가 되는 어떤 합리적인 행동선택의 기준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떠날 수 없었던 사상사적 전통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

 논리적인 것합리적인 것에 호소하는 습관-이것은 합리주의경험주의 어느 철학 전통에 속하든지 상관없이 서양인들 마음 가운데 깊이 자리잡고 있는 신앙과도 같다물론 실천과 행동의 세계에서 제거될 수 없는 비()논리불합리성에 주의시킴으로써 논리와 이성에의 과도한 신뢰를 위험시한 흄에드먼드 버크앙리 베르그송버트런드 드 쥬브넬(Bertrand de Jouvenel)과 같은 예외의 철학정치사상가들이 서양에 있기도 했다어떤 논리나 이성에 의해서 제거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불합리와 모순에 대해서 침묵미결정신비주의카리스마공감의 수단으로 접근하는 동,서양의 인물들이 많았으나 결코 이러한 희귀한 행동과 실천이 서양인들의 환원적합리적 보편주의 세계관과 사회역사인식의 체계를 반성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3. 보편-특수 논쟁 반성과 지양

p180~182

e......A B C D

d......A B C E

c......A B D E

b......A C D E

a......B C D E


 가령 우리가 e, d, c, a에 대하여 어떤 하나의 이름을 특별하게 부여하게 되었다고 하자그러나 e, d, c, a라는 사물들 사이의 공통적 요소인 때문에 그 집합의 사물들에 한 일반적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타당성이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한 일반적 이름이 다양한 개별적 사물들의 집합에 대하여 적용되는 것은 결코 그 집합을 지배하는 어떤 공통성보편성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태곳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의 인류에 대하여 그리고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는 미래에 태어날 존재들에 대해서도 인간이라고 하는 한 일반적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한두 가지의 변치 않는 공통점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비트켄슈타인의 유사성 이론에 의하면 한 일반적 이름의 근거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다어떤 변치 않는 공통적 요소를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모든 인간들을 인간답게 보이도록 하는 본질적 특성은 아닐지도 모른다기계적으로 발견된 단순한 (최대공약수로서의공통성이란 다양한 특수개체들로 이루어지는 집합의 다채롭고 풍부한 특성을 진실대로 파악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철학사가(哲學史家)가 한 계통의 사상가들로 구성되는 학파의 특징을 밝히려고 할 때도 발생하는 것이다예를 들면 현상학자들의 공통적 핵심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현상학이라는 일반적 이름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런데 슈피벨버그는 그러한 공통적 핵심을 지정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음을 밝혀 준다.


 이와 같은 핵심을 발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이한 현상학들에서 불변적(不變的)인 것(공통적인 것)을 찾고 가변적인 것을 무시해 버리는 데 있을 것이다이 방법의 주요한 약점은 이렇게 구체적 현상들의 다양성으로부터 추출해 낸 것이 빈약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현상학의 특징을 흔히 서술적인 철학으로 규정하는 것이 그 한 예이다그러한 규정은 현상학을 몇몇의 결정적으로 비()현상학적인 철학들로부터 구별해 주는 역할조차 못할 것이다본질적인 것에 대한 보다 의미 있는 설명은 적어도 현상학으로 하여금 두드러진 외양(外樣)과 영감적 힘을 얻도록 해 주는 가변적인 것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물(또는 요소)들의 한 집합이 이루어 내는 특징 또는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단순한 공약수나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 비공약수적(非公約數的)인 가변성일 수 있다고 암시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그 비공약수적 가변성이란 무엇인가비트켄슈타인이 말하는 부분적이고 막연한 유사성곧 가족적 유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공통적공약수적 요소를 가지고 한 집합의 사물 또는 개체들을 정의할 수 있는가한 집합의 개체 또는 사물들이 단 하나의 공약수적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집합을 대표하는 한 일반적’ 이름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앞의 도표가 나타낸다그리고 비록 e, d, c, a라는 개체들이 B라는 공약수적 요소를 지닐지라도 그러한 공통성 때문에 그 개체들의 집합이 한 일반적 이름어떤 전체적 특성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이미 언급되었다.

 여러 요소들의 한 집합으로서의 개체 또는 사람들은 각기의 고유한 배열(configuration) 또는 모형(paradigm)을 가지고 있다가령 e, d, c, a라는 개체들에 있어서 B(공통적 요소)가 차지하는 의미역할중요성곧 각 개체들에 있어서 B가 다른 요소들과 가지는 관계는 다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에 있어서 B가 A, C, D와 가지는 관계, d에 있어서 B가 A, C, E와 가지는 관계, c에 있어서 B가 A, D, E와 가지는 관계, a에 있어서 B가 C, D, E와 가지는 관계는 일정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공통적 요소인 B는 모든 개체들에 있어서 같은 의미같은 역할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동일한 요소 B는 다른 배열방식 또는 모형을 가진 각 개체들(e, d, c, a)-이 개체들은 하나하나의 사물이나 인물이라고 해도 좋고 서로 다른 형태의 사회 또는 문화라고 해도 좋다-가운데서 완전히 다른 의미와 중요성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철학자들툴먼과 쿤 그리고 인류학자 루드 베네딕트(Ruth Benedict)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강조된 바 있다툴먼에 의하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모형을 지니고 있는 개체들이라고 할 때 한 사람의 모형 안에서는 해소되어야 할 문제의 현상으로 보이는 요소가 다른 사람의 모형을 통해서 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베네딕트도 우리문화의 배열방식에 의하면 비정상적인 행위가 어떤 문화의 배열방식에 의하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관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서로 다른 배열방식과 모형을 지닌 개체들에 있어서 공통적 요소는 서로 다른 의미역할중요성을 가진다고 할 때그러한 공통성 또는 공약수들을 근거로 성립하는 보편개념과 일반이론이 어떤 타당성을 가지는 것인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각기 고유하고 특수한 배열방식 또는 모형을 지닌 특수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적 요소는 다만 기계적으로 추출된 공약수거나 또는 각 특수자들 사이의 근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있을 수 있는 우연한 일치성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특히 개체로서의 다양한 인격들 또는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여러 사회문화체계들의 서로 일치할 수 없는 근본적 특수성을 보더라도 부분적이고 막연한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우연한 유사성을 넘어서는그리하여 그 이상으로 의미 있는 일치성보편성일반성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6. 왜 중국에는 과학혁명이 없었는가?

1.과학발전의 원인을 찾을 수 있는가?

p187~188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이집트중국인도 등 어떤 문명권에서도 탄생시키지 못한 이른바 근대과학문명이 유럽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특히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중국은 서구세계보다 앞선 과학기술을 가졌었을 뿐만 아니라그 앞선 과학기술-예를 들면 자석에 관한 지식천체관측법측지학제철기술화약시계와 같은 것들-을 서구세계에 수출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이와 뉴턴류의 과학이 중국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과학사가 조세프 니덤의 질문이다그는 이른바 근대과학이 중국에 발생할 수 없었던 것은 중국인의 지적(知的결함에 있는 것도 아니요중국의 사상적 전통에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오히려 그는 중국의 사상적 전통으로 말하자면 막스 베버가 가리키는 기독교 문화권보다도 근대산업사회와 근대과학기술을 낳을 수 있는 훨씬 유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중국의 역사가 이와 같은 지적 조건들그리고 일식의 예측과 달력의 계산법을 알아낼 만큼 정교한 경험적 귀납과 실험방법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근대과학을 탄생시킬 수 없었던 결정적 원인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그 원인은 중국이 서구세계에서와 같은 상업주의를 싹트게 할 수 없는 농업 관료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기술과 순수과학 또는 경험적 관찰실험과 논리적수학적 추리가 결합해서 이루어지는 근대과학 발생의 어떤 사회 경제적 동기도 마련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니덤이 시도하는 대로 기술과 학문실험과 논리를 결합한 근대과학이 중국에 탄생하지 못한 원인을 이렇게 사회 경제적 조건들로써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볼 만한 것이다근대과학의 발생을 사회 경제적 요인으로 돌리기를 거부하는 이론가는 베버 이외에도 있다알렉산더 코이레(A. Koyré)나 에른스트 카시러(E. Cassirer)에 따르면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이 플라톤을 거쳐 르네상스 이후에 다시 발견됨으로써 옛날 그리스 전통의 수학에 자극된 순수이론적 탐구를 바탕으로 근대과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

 철학자 라이프니츠에 의하면앞에 열거한 모든 현상(우리가 일상적으로 결과와 원인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상 서로 어떤 인과관계도 없이 다만 우연히 공존하는 것이다무수한 개체들은 각각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실현 가능성의 범위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개체들이 실행하는 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무한히 많은 가능한 관계에서 어떤 것이 어떤 것의 원인이거나 결과라고 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무수한 사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무수히 많은 관계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지정하려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책임을 어떤 임의적 사건에게 뒤집어씌우는 심리적인 환원주의이다.

 이렇게 보면우주는 일정한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서가 아니라 무한한 공존 또는 동반관계들의 그물(web)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왜냐하면 어떤 것이 어떤 것의 원인 또는 결과라고 한정해서 묶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어떤 것을 어떤 것의 원인 또는 결과라고 밝히는 것이 이렇게 임의적인 것이라면 고정된 원인도 고정된 결과도 없는 것이며우리는 사회와 자연의 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하여 임의적으로 설명의 근거를 선택할 뿐이다무한한 공존 또는 동반관계들의 그물로써 이루어지는 우주의 체계를 우리는 언제나 임의적으로 (또는 심리적사회적으로결정된 관심을 중심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다따라서 우리가 이해하고 구성하는 인과(因果)의 그물은 임의적 근거와 임의적 귀결에 관계들로써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2.합리성에 대한 논리적 접근

p192

(...) 

수학적 개념체계가 구체적 현상관찰이 일일이 미치지 못하는 물리과학의 대사에 대하여 선구적 개척의 역할을 해 온 것을 회고할 때 오늘의 역사사회과학이 그 일회적구체적 현상관찰에서 이상형을 구성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반성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과거의 사변 철학의 시대에는 구체적 현상관찰에 의한 검증을 무시했기 때문에 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으나 오늘의 역사사회과학은 구체적 현상관찰에 집착하기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역사와 문화와 사회가 임의적이고 다양한 모양으로 이루어지고 변하는 만큼 다양하고 자유로운 철학적논리적 개념체계를 요청한다.

 역사와 사회과학에 수학적 연역체계를 적용할 때 지나친 형식주의를 초래하게 되고 그렇다고 어떤 논리적추상적 범주체계도 배격하는 것은 지나친 현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다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수학의 연역체계를 자연관찰에 적용하여 검증하고 객관화할 수 있듯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리와 철학의 개념체계를 역사와 사회관찰에 적용하여 검증함으로써 객관화할 수 있는 것이다.


 3.과학혁명의 논리적 방법은 무엇인가?

p195

(...)

 사실 비교문명의 이론가들이 근대과학의 고유한 논리적 방법에 착안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구 문명권 밖에서도 근대과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자주 있었던 것처럼 착각했던 것이다근대적 과학혁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이집트인도중국 또는 이슬람 문명권에서도 훌륭한 과학이 있었으며 그러한 선구자들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많은 과학사가들이 지적한다특히 8세기로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의 동서문명을 흡수해서 서구에 넘겨줌으로써 근대적 과학혁명이 가능하게 한 것은 이슬람 문명권의 기여한 바라고 한다예를 들면, 11세기 초에 활약했던 알하겐(11세기 아랍의 과학자 이름같은 과학자는 과학연구에서 실험과 수리적 엄밀성을 결합한 근대과학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고 말한다그리고 수학과 의학그 밖의 기술방면에 대한 인도와 중국의 공헌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

p197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비율이 정수들로서 표현될 수 없는 사례들말하자면 어떤 공약수도 갖지 않는 비율이 존재함을 발견했을 때 그들의 합리주의에 대한 신념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직각을 이루는 삼각형의 두 변이 각각 1일 때 그 빗변은 2일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1이라는 정수를 가장 작은 공약수라고 보았기 때문에 1:1:2라는 비율에 대하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1:2라는 비율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2라는 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수의 원자 또는 가장 작은 공약수는 정수 1이라고 하는 수의 개념정의를 고집하는 논리적 일관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그들의 논리적 일관성은 분수(分數)조차도 반드시 정수들 사이의 비율로서 정의할 정도였으므로 2같은 무리수(無理數)의 발견은 그들의 수(원자론(number atomism)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되는 것이다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빗변이 가지는 무리수를 알고 있었으나 그 근사치(近似値)에 만족하는 실제적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

P198

실제적 효용에는 지장이 없는 근사치에 양보하지 않는 순수 논리적 일관성의 추구가 어떤 극한점에 도달할 때 그 일관성으로 넘을 수 없는 잉여현상에 부딪치게 되고 여기서 이미 주어진 가정 또는 전제에 대한 재구성의 계기가 이루어진다엘레아 학파의 제논도 그리고 소크라테스도 이러한 논리적 방법의 대가들이다그들은 언제나 겸손하게 상대방이 내놓은 전제 또는 주장에 충실히 따라간다그리고 상대방의 전제가 내포하는 것들을 연역해 내는 과정이 어떤 극한점에 도달하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문제점 곧 모순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P199

(...)

 근대적 과학혁명에 기여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논리적 방법의 강점(强占)은 실제적 효용치에 타협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연역적 일관성의 추적에 있다고 할 수 있다이 철저한 연역적 일관성에 의존하면 이미 가지고 있는 전제나 공리(axiom) 또는 공약수적(commensurable) 개념과 기준을 가지고서는 넘어설 수 없는 어떤 극한점에 도달하게 된다말하자면 이렇게 철저한 연역적 일관성에 의해서만 이미 가지고 있는 공약수적 개념으로서의 공리 또는 전제가 적용될 수 없는 예외특수자또는 잉여와 같은 주변적 사태들을 관찰하게 되고 이러한 예외특수자잉여의 사태와의 끊임없는 부딪침에서 기존의 공약수적 개념 또는 공리체계가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근세의 과학혁명에 있어 관찰과 실험은 이미 가지고 있는 공약수적 개념 또는 공리의 연역적 극한 또는 한계를 검증하는 계기로서 주어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근대적 과학혁명을 가능하게 한 이러한 논리적 방법을 나는 주변유도(periphery-leading)의 논리라고 부르며이것이 서구적 합리성의 고유한 특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만약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이러한 주변유도의 논리적 방법의 전통이 세워지지 않았다면그 이후 어떤 관찰과 실험 그리고 어떤 사회 경제적 조건이 주어졌어도 근대의 과학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4.중국의 합리성의 논리적 특징은 무엇인가?

p201~204

(...)

 도가사상을 대변하는 노자와 유가사상을 대변하는 공자는 적어도 천하의 질서를 조직적이고 강제적인 힘에 의해서 찾을 수 없다는 점에 공감한다백성을 제도로써 다스리고 형벌로써 질서를 세우면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빠져 나갈 궁리를 하게 된다백성을 덕으로써 다스리고 예로써 질서를 지키면 그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 따르게 된다’ (논어, 2:3),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도덕경, 25). 그들은 아무 억지도 부리지 않는 물처럼 자유자재로운 자연의 변이과정을 본받아 사물의 질서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말하자면 그들이 체험하고 관찰한 자연의 원리에서 그들의 도()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그들의 지혜와 행위는 언제나 궁극적으로 자연의 법을 본받도록 운명지워져 있으며그러한 숙명을 이탈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말하자면 자연의 궤도 밖에서 대안(alternative)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았던 데서 그 후 2500년 동안의 중국문명 및 사상사를 이루어 온 고유한 논리와 방법이 결정된 것이다.

 도의 개념이 음덕(陰德)과 겸양과 중용이라고 하는 덕목들을 포함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의 질서와 운동의 논리적 형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도가사상의 원천을 이루고 있는 노자의 <도덕경>이나 유가의 형이상학을 담고 있는 <중용그리고 유가 및 도가의 자연사상의 근거를 제공한 <주역>에 나타난 도의 개념특히 그 논리적 형식은 다음과 같이 동일하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1) 하나의 완성된 담론의 영역(the universe of discourse)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alternative) 담론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2) 따라서 주어진 담론의 영역 안에서 가능한 논리적 형식은 반(또는 복()의 과정이다.

 우리는 위에서 중국의 정신세계와 사회질서말하자면 중국적 담론영역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예와 도의 개념이 그들의 자연의 개념에서 본받은 것이라고 논하였다농경생활에서 얻은 수천 년의 체험 가운데서 그들은 자연의 자율성과 충족성을 굳게 믿게 되었던 것이다농사라는 것은 자연을 인공적으로 조작하거나 서둘러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자라나도록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자연의 변화는 다른 힘을 빌리지 않는 충분하고 자족한 운동이며 그것을 거부하거나 이탈해서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그러므로 이러한 자연관은 인간의 생활 또는 사상의 영역으로 하여금 벗어날 수 없는 한계에 스스로 갇히도록 만드는 것이다인간의 생활과 사유의 영역이 이렇게 어떤 한계 안에 제약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담론의 영토까지도 그렇게 제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문명과 사상이 넘어설 수 없는 제약조건으로서의 자연의 질서와 운동과정은 어떤 논리적 형식을 드러내는가유가나 도가의 도의 개념의 모형이 되었던 자연은 자족하고 완벽하므로 자연 아닌 어떤 가상세계에 대한 사변적논리적 추적을 할 수 없는 것이다말하자면 도의 논리적 형식은 자연의 운동 자체가 지닌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크다는 것은 두루 간다()는 것이고멀다는 것은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도덕경, 25). 두루가다()->멀다()->되돌아오다()의 과정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다시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도덕경, 40)이라고 노자는 말한다노자에 있어서의 뿌리로 되돌아감이란 무()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데 반하여유가의 역()이나 중용에 있어서 도의 운동은 유()에서 유에의 끊임없는 반복을 의미한다도가는 형상(形象)을 초월하는 도의 뿌리가 무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고유가는 도의 뿌리가 구체적 형상을 초월하면서도 유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계(有限界)로서의 자연의 궤도를 따르는 도는 음극에서 양극으로다시 이 극에서 저 극에로 돌아가는 반복의 운동이라고 하는 공통적 형식을 피할 수 없다말하자면 반()과 복()이라고 하는 도의 과정은 모든 중국적 합리성의 체계가 지닌 고유한 논리적 형식이며 방법이다그리하여 이 극에서 저 극으로 그리고 다시 역()으로 반복하는 논리적 과정에서 어떤 극단으로도 지나치게 미치지 않는 가운데의 자리말하자면 시중(時中)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중국의 문명과 사상이 목표로 하는 지혜에 함축된 논리적 형식이 서구적 합리성이 지닌 논리적 형식과 대칭적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중국적 합리성에서 볼 때 극단은 다만 반복의 치우진 계기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가능한 한 회피하고 절충과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서구적 합리성은 연역적 일관성에 따라 스스로 극한점을 추구한다그것은 오히려 연역적 일관성에 따라 도달한 극한점에서 공약수적 체계가 붕괴될 가능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말하자면 서구적 합리성은 극한점 또는 주변을 하나의 공약수적 체계가 붕괴되고 또 하나의 보다 포괄적인 공약수적 체계가 이루어지는 발전적 계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실제적 효용치에 타협하지 않고 순수 연역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중국적 합리성에서 볼 때 아주 지혜롭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러한 연역적 일관성의 한계점에서 기존의 공리체계의 한계와 위기를 노출시키는 논리적 방법 위에서 근대적 과학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적 합리성은 자연의 유한성의 제약하에 있기 때문에 극한점에 이르기까지 연역적 일관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실제적 효용치에 타협하거나 절충점에 머무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따라서 중국적 합리성에서 볼 때순수한 연역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 극단의 위기와 실패를 향해서 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연역적 한계점의 위기와 실패를 (실험과 개혁의 계기로서보다는회피하여 절충하는 중심에 머물러 있으려는 중국적 합리성을 중심유도(center-leading)의 논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중심유도의 논리가 지니는 최대의 약점은 기존체계에 내포된 공약수적 개념과 공리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주변저 ㄱ존재사태들을 발전적 계기로서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있다주어진 체계의 연역적 극한점을 끊임없는 한계검증 또는 개혁의 계기로 삼지 않고 다만 체계의 극한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중심의 원형보존(原形保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이것이 모든 사회 경제적(과학 논리외적조건들이 주어졌더라도 근대적 과학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중국적 합리성의 논리적 특징이다.


 7.한국 사상사의 방법문제

1.

p211~213

(...) 

 한문문화가 고전의 전수 또는 암송을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사도 그러한 답습의 전통 안에서 전개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불교와 유학그리고 오늘의 서양학문까지도 원형대로 유지하고 전수하는 경향이 있다동양학은 물론이고 서양학을 연구한다고 할 때도 우리학계는 원전을 거의 절대시한다원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무슨 비판과 새로운 발견이 있을 수 있느냐는 태도는 중,고등학생으로부터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다그러나 서양에서는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누구든지때로는 깊은 사려 없이원전에서 벗어난 해석과 비판을 하면서까지자기의 사상을 구축하는 자유정신을 발휘하는 것을 본다왜냐하면 서양문화와 학문의 정신은 고전으로 돌아가는 데 있지 않고고전에 대결하는 독창성(originality)의 실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양사상 및 과학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서양의 역사지향은 독창성에 있고동양의 역사정신은 그 학풍이 드러내는 바와 같이 정통성에 있다고 하겠다.

 중국의 학자 첸무 자신이 중국문화와 학문의 본질을 그 역사의 전통성에서 찾으려고 하였다(<中國의 歷史精神>, 추현수 역서울, 1977). 그러므로 한문 문화권의 학문전수와 전통정신에 의하면 불교와 유학과 서양학문이 받아들이는 자의 주관적 비판과 독창성에 의한 개조 없이 원형 그대로 수용될 수 있겠으나서양의 학문과 역사정신에 의하면 어떤 사상과 학문도 원형대로 보존될 수도 없고 그것이 동양문화를 침식하게 되어 있지도 않다.

 독창성을 성취의 척도로 삼는 서양의 과학철학역사정신을 진정으로 터득할 때 오히려 한국문화와 사상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물리적 현실에 침체됨이 없이 초월의 정신으로 현실을 지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본디 다윈적 사회문화사상의 갈등 속에서 변형성장해 온 서양철학과 과학은 언제나 폐쇄적 완결성(完結性)보다는 대결적(對決的운동의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한문 문화권에는 모든 후세의 학문과 사상의 원형이 되는 사서삼경그리고 공자와 같은 성현이 존재한다또한 후세의 어느 누구도 이를 초월하거나 개혁할 천재로 자처하지 않는다그 폐쇄적 완결성은 새로운 것과 이질적인 것에 대한 근본적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향을 지닌다.

 이 폐쇄적 완결성 때문에 한문 문화권에서는 새로운 것이질적인 것을 배제하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모습 또는 원형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어째서 과거 전통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이루는 본질인가오늘의 자아 또는 민족자아의 주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이며그것은 과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오늘의 새로운 정신문화의 발견에는 우리가 처한 현재의 장()을 원점(原點)으로 하는 외래사상과 학문에 대한 수용(受容및 지양(止揚)의 논리가 요청된다말하자면 새로운 것 또는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수용 및 지양을 방법으로 하는 새시대의 정신문화 형성을 위해서는 동양사가 지녀온 폐쇄적 완결성의 논리가 아니라 서양사가 지닌 대화적 지양의 논리가 요청된다이러한 서양의 역사정신을 참고할 때 우리가 주체성을 잃거나 서양문화에 예속되는 것은 아니다한국문화 가운데에 이러한 서양의 역사정신이 뿌리를 내린다면 주체의 정신과 물질 초월의 정신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고나아가 서양문화의 제국주의적 침식을 막을 수 있으며더 나아가 서양문화를 우리의 문화로 지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한문문화의 관행이 지닌 역사방법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실을 원점으로 하는 주체적 사유능력을 잃게 하며 과거의 성현과 고전들의 권위에 다시 예속하도록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한문문화의 역사방법은 과거 한국인의 주체적 사유를 빼앗고 모화정신을 우리에게 심어 주었으나서양 과학문명 가운데에 전제된 역사정신에 따르면 모든 위대한 서양사상과 고전들이 우리의 주체적 사유에 의해서 이해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된다.

 우리는 새로운 정신문화를 창조하는 데 있어 역사가 깊지 않은 미국 철학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미국은 최초에 그들 고유의 어떤 철학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처음 백 년 동안 그들은 다만 유럽의 철학사상을 흉내내는 아류(亞流)에 불과했다퍼스제임스듀이도 모두 흄칸트헤겔을 포함하는 유럽철학의 수용에서 출발해서 개척시대 경험과 사상에 뿌리깊은 근거를 가지고 있는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으로 전화(轉化)시킨 것이다.

 그러나 현재 어느 미국 철학자도 프래그머티즘이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이라고 주장하지도 않거니와사실 오늘의 미국 철학도들은 프래그머티즘 철학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프래그머티즘의 시대가 지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대부분의 미국 철학자들은 미련 없이 이를 버렸고 자기 시대의 현실을 원점으로 해서 다시 모든 비()미국적 철학들-현상학실존철학맑스주의유럽 전통의 고전 철학자들그리고 동양사상들을 받아들이고 비교분석하기 시작했다앞으로 이 외래의 철학사상들에 대한 수용과 전화의 충분한 시간이 지난다면 아마도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을 지양하고 능가하는 그들의 새로운 주체성을 표현하는 철학과 사상을 만들어 낼 것이 틀림없다.

 우리들이 서양의 과학문명 가운데서 물질주의와 물질문명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들의 전통적 사유가 그러한 이해력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p214~217

2.

(...)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민족 자아 발견의 운동으로서 우리나라의 국학연구는 대부분이 상식적 역사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다우선 여기서 많은 국학연구의 기초와 방법으로서의 역사이해에 있어서 저지르는 두 가지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많은 한국학 연구가들이 복원적 역사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국적(國籍)있는 사상 또는 교육이라고 할 때 그것을 많은 사람들은 어떤 외세(外勢)의 영향 이전의 전통에서 발견하려고 하는 것 같다우리는 자주 순수한 단일민족과 단일문화의 전통을 자랑한다그러나 그렇게 순수한 단일문화의 실체를 과연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

 오늘 우리나라의 철학과학경제교육예술의 전통 가운데 어떤 것이 중국일본을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와 미국유럽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의 영향과 공헌 없이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

 둘째로우리나라의 국학개념 가운데는 현대의 문제를 해결지양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vision)이 없다아마 그 원인도 많은 국학연구가들의 잘못된 역사이해에 있는 것 같다그들은 역사라는 것을 현재와 ㅜ 미래에 연결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미 과거에 끝나 버린 사건들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따라서 오늘의 한국인의 정체(正體또는 민족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하여 과거만을 자꾸 들추게 되는 것이다자기 존재의 긍지를 현재에서 찾을 수 없는 노인은 과거의 영광을 회고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미래가 있는 민족이라면어떻게 우리 자아의 정체를 단군신화에서 신라의 화백(和白)정신에서 조선의 건국 이념에서 찾음으로 끝날 수 있겠는가오늘 한국인의 성격행동자아를 규정하고 움직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그런 것들이 아닌 것이다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이 말은 과거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말이 아니다과거를 부정하고 미래를 향하여 역사를 만들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인간을 지배하고 결정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미래인 것이다그러므로 오늘의 민족 자아의 정립과정으로서의 국학연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재상황그리고 미래에의 비전을 향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학과 한국사상의 기초개념 정의와 체계구성 이전에 선결되어야 할 또는 적어도 전제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그것은 동서사상과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이다. 여태까지 많은 국학연구가들은 우리나라의 사회와 문화역사와 사상이 세계의 역사문화사상에 비할 때 어떤 특수성과 보편성이 있는 것인지 검토하지 않았다그 보편성과 특수성의 의미 또는 관계가 논리적으로 또는 인식론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수천 년의 서양 철학사 가운데서도 논쟁점이 되어 왔다), 이른바 국학이라는 것이 어떻게 한 독자적 영역이 되는 것인지 도대체 국학 또는 한국사상 존립의 근거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p220~223

5.

 이제 문제는 오늘의 한국인이 이러한 역사적 단절과 소외의 체험 또는 그 체험의 특수성을 어떻게 극복하며 지양시키려고 하는가 하는 태도와 방법에 있다. (...) 첫째는 원형보존(原形保存)의 전개방법이다전통이나 관례에 내포된 공약수적 개념과 척도에서 벗어나는 특수한 단절의 현실이 다가올 때 이를 무의미한 것으로 배격하는 것이다또는 전통이나 관례에 이미 주어진 원형개념과 척도로써 어떠한 사상과 현실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고집하는 태도이다.

 (...) 한 나라의 독자적인 말과 글을 떠나서는 그 나라 고유의 사상과 문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오늘의 상식에서 볼 때과연 한국의 과거 사상사가 정말로 한국인의 것이었는지 질문해야 한다그것은 넓은 기층민중의 체험에 바탕을 둔 말이나 사상의 역사가 아니었다.

 단절의 충격에 대한 둘째의 반응은 대치해 있는 양자(兩者)를 혼합절충종합하려는 태도이다어느 한편에도 극단으로 치우치기를 꺼리는 조화사상의 소유자로서 가지는 당연한 태도인 것 같다중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사람들은 옛날부터 반()과 중()의 논리를 존중해 왔다자연의 질서와 인간 문명에 관한 사상의 원천으로서 <()>과 노자의 <도덕경>이나 유가의 <중용>은 다 같이 도()가 극에서 극으로다시 이 극에서 저 극에로 돌아가는 반복의 운동을 한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어떤 극단으로도 지나치지 않는 가운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였다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최고의 지혜는 시중(時中)과 조화에 있다역시 극단의 실수나 주변(周邊)의 예외를 중심변혁의 발전적 계기로 인식하지 못한 중심유도(中心誘導)의 논리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절충과 조화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양문명으로부터 도전이 왔을 때 중체서용(中體西用)이니 동도서기(東道西器)니를 주장하였다그러나 극을 피하고 중()의 자리를 취한다는 것은 흔히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본질을 철저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양편을 절충하여 큰 실수를 면하자는 적당주의 태도일 수도 있다동양의 정신문명은 뼈대이므로 그대로 간직하고 서양의 과학문명은 응용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절충론은 다음과 같은 모순들을 안고 있다하나는 서양의 과학문명이 물질주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이미 논한 바와 같이 주관과 독단의 일상세계를 탈피하고 초월하려는 정신(객관정신자유정신)에서 이루어진 먼 결과라는 점이다그리고 만약 한국인이 바라는 것은 그러한 과학의 정신이 아니라 그것이 응용되어 만들어진 실제적 기술과 그 산물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물질주의현실주의가 한국인의 사상 자체로부터 조성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또 한편으로 근본이 되는 것(도덕정신)과 응용된 것(과학기술)을 이렇게 각각 동서문명의 전체적 틀에서 분리시켜 결합할 수 있다고 하는흔히 떠도는 발상 자체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지 못하고 다만 문화적사상적 혼란을 가져 오게 하는 것이다.

 앞에 언급한 원형보존의 전개방식이나 혼합과 절충의 방식은 다같이 단절과 소외에서 오는 특수성과 잉여성 또는 극단과 주변을 개혁의 계기로서 인식하지 못한 데서 고착된 것이다.

 (...)

 해방 이후 한국인이 다시금 다른 외래문화와 사상을 서양세계로부터 받아들이고 있지만역시 과거 한국인의 생존과 사고방식을 지배해 온 중심유도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특수 주변적 처지를 뚜렷이 반영하는 독자적 문화와 사상을 오늘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그래서 우리는 흔히 전통으로의 복귀 또는 혼합이나 절충 또는 배타주의와 같은 창조적이 아닌 역사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지금 한국인은 서양으로부터 온 과학과 철학을 연구한다고 하면서도 과거에 한문문화의 전통에 얽매이듯이 다만 거기에 예속되어 있다이렇게 오늘까지 계속되는 문화사상의 식민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이 오래된 중심유도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그런데 프랑스영국독일은 비록 그 문화적 원천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와 히브리사상에 두면서도 각각 그들 자신의 특수상황과 체험에서 우러난 생각을 가지고 독자의 전통과 사상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이와 같이 주변유도의 논리로써 이끌어져 온 서구 문명권에서는 예외와 주변의 존재들이 역사발전과 중심변혁의 중요한 공헌을 해 왔다.


 제 3

서양 철학사론-논리적 탐구의 한계

  1. 옛날 그리스 비극의 사족으로서의 서양 철학사

 1. 타자와의 만남인 철학사의 마디

  1-1 운명에 도전하는 그리스의 이성

p230

 인간의 내적 감정이나 마음의 세계를 찾았다고 하는 서정시인들조차도 운명의 기로에서 책임있는 결단과 사려 깊은 행동에 도달하기 위한 깊은 내면의 갈등이나 투쟁의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는 그의 좌절한 마음을 다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음이여

 절망으로 흐트러진 마음이여

 일이서 다오.

 적을 향하여

 네 가슴을 내밀고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키며

 한 치도 뒤로 물러나지 말아 다오.


 그러나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영웅은 그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의지할 수 있는 것이 그 자신의 통찰과 결단밖에 없음을 깨닫는다그는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비아(非我)의 세계를 향하여 자신의 결단과 행동으로써 대결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비극의 영웅들은 숙명의 대결자인 비아의 세계로 둘러싸여 차츰 고독해진다그럴수록 그들은 자아의 의식을 확대하고 독자적인 결단과 행동의 가능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그들의 의사와 결단 그리고 행동은 더 이상 전통적인 도덕이나 관습 혹은 어떤 외적인 권위와 힘에 호소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그럼에도 이 비극의 영웅들의 결단과 행동은 아직도 보다 확고한 인간적인 바탕 위에 서서 닥쳐오는 운명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지배자인 운명의 질서를 절대의 지위에서 다만 이런 저런 합의와 결정말하자면 규약의 바탕으로 끌어내린 것은 소피스트들이었다


 1.2 유럽에 나타난 제2의 계몽시대

p239~240

 (...) 과연 세계사는 자아와 이성의 자기 실현의 과정인가아니면자아와 이성의 통일과 조화기능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파국이 자아와 이성 저편의 세계로부터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인가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해체시대가 자아와 이성이 가장 성숙해 버린 다음에서 시작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옛날 그리스의 비극적 비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아와 이성이 그의 한계를 넘어 타자의 영역을 집어삼키는 오만(hybris)에 빠질 때 보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서양적 자아와 이성의 정복대상이 된 것은 숲속에 잠자는 아프리카와 장구한 역사를 회고하는 아시아였다지금도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끝없이 확대하는 서양적 자아와 이성의 부분으로 전락하는 인상을 준다그러나 이제 서양의 타자정복의 길이 벽에 부딪치고 있다아프리카아시아적 자아와 이성도 세계를 대상으로 깨어났기 때문이다.

 

 p241~242

 동양에는 왜 비극이 없는가?” 라고 문학가들은 시비를 벌여 왔다개인이 인격 주체로서 그의 단독적 의사와 결단을 행동에 옮기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갈등과 투쟁 그리고 숙명적인 파멸이 없다는 점에서 동양에는 비극이 없다그러나 존재와 자아 자체가 이미 겪은그리고 특히 그의 20세기 역사가 겪은 바와 같은반전과 허무 그리고 한()의 체험을 비극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숙명적인 파멸에 임하는 동서(東西기질의 차이에서 야스퍼스가 그렇게 하듯이서양적인 전통을 전제로 하는 것일 뿐이다. (K. Jaspers, <The Tragic : Awareness ; Basic Characteristics ; Fundamental Interpretations>, Tragedy, eds. L. Michel & R. Sewall(Englewood Cliffs, N. Y. : Prentice-Hall, 1963 6~66)

 서양에는 비극이 있는가?” 적어도 니체나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사상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사에는 비극이 없다그들의 역사에 나타난 철학적 자아는 언제나 성공적으로 타자를 매개하고 통일하는 주체로서 극대화하기 때문이다그들은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에서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자아와 이성의 타자매개가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그래서 파국이나 비극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일이 없다타자 자기화에 대한 이러한 서양철학의 지극히 관념적인 낙관주의 전통 가운데서 19세기 헤겔에 의하여 절대자아의 철학체계가 완성되었고, 20세기 역사의 비극적 현실 앞에서 파산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보면수천 년 철학사의 전통으로 내려온 체계와 그의 합리성이 여지없이 깨어져 간 20세기 동,서양의 쓰라린 체험은 서로 유사하면서 대조적인 것이다말하자면 니체키에르케고르사르트르의 실존사상에서뿐만 아니라 러셀슐리크비트켄슈타인포퍼의 실증주의와 논리분석에서도 이성과 그의 본질파악에 의한 존재 및 가치매개의 가능성을 배격한 것은 타자 자기화의 서양적 체계와 합리성에 대한 종말을 고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세기 서양 철학사의 흐름은 참으로 외적인 타자타자의 전통에 의해서 송두리째 끊기거나 충격받은 것이 아니다그 흐름은 우리의 흐름과는 달리 아직도 그들의 전통적 문제의 장()에 머물러 있고 전통의 합리성을 줄기로 하고 있다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파르메니데스플라톤플로티누스에서 헤겔로 이어져 온 존재와 사유를 잡고 그의 타자인 존재 아님’ 과 그 불합리에 대하여 폐쇄적인 존재론과 합리성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 있다말하자면 존재와 자아와 이성의 질서 자체가 그의 타자인 존재 아님불가해(不可解)애매성에 의해서 뿌리뽑히는 비극의 비전을 그들의 존재론과 합리성의 역사에서 실현하고 이해한 일은 없다.


 2. 가장 높은 진리에의 길인 비극

(...)

p248~249

 타자를 자기화하는 자아의 동일성이 무너지지 않고 지탱되는 한그것은 그가 타자에게 매긴 진리가 증명되었음을 말해 주는가그것은 아직 반증되지 않았을 뿐그 밖에 아무것도 말해 주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왜냐하면 모든 증명은 그의 무모선 동일성이 최후의 순간에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초월의 타자에 부딪쳐서 그의 허구성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보다 높은 진리는 증명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증과 반전으로서 부딪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형식을 논하는 가운데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발견은 모름에서 앎으로의 변화이며최선의 발견 형식은 반전에 따르는 것이다앎이나 발견은 언제나 다름을 확인하는 데서 일어난다. (...)

 진리는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인가증명이나 실험으로써 찾아 내는 것인가무엇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인가아니면믿음과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인가아니면명상이나 직관에 비쳐 오는 어떤 것인가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서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다가오는 꼭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진리는 사람의 이런 저런 엮음으로만듦으로(actus)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실은 사람이 의도한 엮음과 만듦과 함이 여지없이 부서지는 비극적인 꼴(형식)에다 의도 밖에서 엮고 만들고 하는 자가 그의 뜻을 남기고 사라져 가는 것이다우리는 전쟁이 지나간 재난의 폐허에서 사람이 실현하려는 진리보다 언제나 큰비극 아닌 어떤 다른 꼴이나 논리로서도 잡을 수 없는 질서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 비극적인 꼴과 논리가 바로 20세기의 서양과 동양이 부딪치는 한 극점여기에서 싸우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진리로서 다가오고 있다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고백한 소크랕체스도 하지 않음으로써 안 함이 없다는 <도덕경>의 노자도 행위의 결실을 버리는 자는 진리에 이른다는 힌두의 지혜를 간직한 <바가바드 기타>의 작자도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그런 진리의 비극적인 꼴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옛날 지혜자들의 한결같은 깨침이 또한 자아와 존재 자체의 끝없는 자기 실현을 고집해 온 2500년 서양 철학사의 큰 흐름에 반성이 있어야 함을 알려 주는 것이다.

  

 2.()스콜라시대의 신과 논리와 경험주의

  1. 근세철학의 방법은 새로운 것인가?

p253~254

(...)

 근세철학의 시작은 수학적 실재관과 수학적 분석방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홉스와 데카르트는 (심지어 경험주의자인 로크까지도갈릴레이가 보여 준 수학적 실재관 또는 수학적 분석방법(분해와 결합의 방법)에 대한 진지한 추종자들이다. (...)

 홉스는 복잡한 명제들의 집합이 몇 개의 단순하고 자명한 명제들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기하학의 방법에서처럼 인간성에 관한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명제들로부터 그의 정치학의 체계를 유도해 내려고 하였다인간성에 관한 단순하고 기본적인 명제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인 개인들에 관한 관찰들로부터 얻어진다한 복잡한 사회의 움직임을그것을 구성하는 요소 곧 개인적 동기의 움직임으로 분해하는 것은 상상적 가설절차에 의한 것일 뿐이다이는 마치 갈릴레이가 한 운동하는 물체의 실제궤적을 상상적으로 분해해서 그 구성요인(실제로는 관찰할 수 없는 좌표 위의 수치(數値))들의 결합에 의해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이러한 상상적 분해 및 추리에 의해서 홉스는 인간성에 관한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두 가지의 가설에 도달했다고 한다그 하나의 명제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누를 힘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투쟁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다다른 하나의 보다 중요한 명제는 모든 사람은...해로운 것무엇보다도 자연이 가져다 주는 것 가운데서도 가장 해로운 것곧 죽음을 피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가설적 명제로부터 연역해 낼 수 있는 명제는 다음과 같은 자연상태에 관한 서술이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할 만한 어떤 공통적 힘이 없이 살아가는 한그들은 전쟁이라고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그리고 이 전쟁은 마치 모든 다른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람의 전쟁과 같다.


 이러한 상태에서 노력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왜냐하면 노력의 결과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지구상에 어떤 문화도 있을 수 없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곤란한 것은 계속되는 공포와 횡사(橫死)의 위험이다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쾌하고 동물적이고 짧을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기본가설에 바탕을 둔자연권(自然權)의 행사와 자연상태에 대한 연역적 설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생명의 보존을 위해서 반성적으로 보다 나은 수단을 추구하도록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이리하여 자기 생명의 궁극적 안전을 위해서 행사할 수 있는 자연권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의 자연권의 제약을 보장하는 절대권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 귀결이다홉스는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의 질서정연한 체계가 있는 것처럼 인간 사회의 통치관계를 지배하는 원리들이 논리적으로 체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2. ()스콜라시대 신의 섭리와 논리적 질서

한 시대의 고유한 모습 가운데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그 시대의 논리학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논리적 고유성을 순수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그 대안으로 우리는 논리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구체적 표현들 가운데서 그 시대의 핵심되는 정신 또는 논리를 파악하려고 한다따라서 흄의 경험주의에서 극치를 이룬 영국 계몽주의 철학의 발전을 지배한 논리와 정신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그들의 사회와 도덕방면에 관한 사상의 근원을 돌이켜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맥킨타이어(A. MacIntyre)는 서구의 고전 윤리학의 역사 가운데서 도더적 규범을 정당화하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고 말한다첫째로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규범의 정당성은 인간의 욕구와 성향이 일정한 가치를 지향하도록 훈련하고 이끄는 데서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다둘째로기독교에서처럼 신()의 계명을 지킬 때는 보상이 주어지고 어길 때는 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셋째로옛날 그리스의 소피스트와 홉스에서처럼 정당성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원하는 것을 보다 많이 가져다 줄 행위에서 찾아간다는 것이다이 마지막의 경향이 홉스로 시작해서 벤담의 공리주의에 이르는 영국 계몽주의 사회사상의 발전과정에서 확고하게 되었다.

 이 철학에서 인간성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고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과 그것을 공급하기 위한 수단이 행위의 기준이 된다따라서 이러한 필요를 실현하려는 개인의지들의 대결장소가 바로 사회이다여기서 새로운 시대의 존재곧 개인(individual)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이는 권위와 권리 등 가치를 배분하고 계층들 사이의 차등적 관계를 규정해 주던 중세시대의 사회적 유대가 무너지면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3. 영국 경험주의의 이중구조 증명의 합리성과 관습의 합리성

 p263~269


 14세기 서구세계에 나타난 계시와 이성이라는 대립구조는 엄밀한 증거에 대한 이념(理念)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증거를 묻고 추적하는 엄밀한 태도 때문에 세계는 실체 없는 속성들 또는 속성 없는 실체들로 이루어지게 되었고변화 또는 인과에 관한 법칙은 하나의 관찰사태와 그에 관련된 다른 하나의 관찰사태에 대한 단칭명제들에서 연유된 기대이며 가정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제생활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앙과 지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직관적 증거나 논리적 증명도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놓여 있음이 확실하다. (...)

 20세기 영국 분석철학의 한 주류를 대표하는 무어(G.E. Moore)에 의하면철학의 주요한 활동은 주어진 결론 또는 주장에 대한 이유를 찾는 데에 있다고 한다주어진 결론에 대한 적절한 또는 적절하지 못한 이유는 어떤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이 바로 철학자들의 의견을 다양하게 만들어 온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비추어 볼 때 지금까지의 철학체계의 발달사는 적절한 이유를 갖지 못한 결론 또는 주장을 버리면서 보다 적절한 이유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결론과 주장을 찾아온 역사라고도 생각된다여러 세기를 거친 스콜라시대 사상의 발전 끝에 얻어진 결론이성과 신앙의 분리는 정당화될 수 있는 적절한 이유가 이원화(二元化)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리고 적절한 이유의 세계가 이원화된 것은 철학적 이성이 추구한 이상적인 적절한 이유가 궁극적으로 엄밀한 증거 또는 증명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실제영역에서 통용되는 신앙과 지식이 엄밀한 증거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이론적 결론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난 잉여(剩餘)의 세계에 놓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근세시대의 선구적 계몽주의 철학자 로크의 경험주의 철학은 이른바 본유관념(innate idea)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어떤 원리가 본유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면 인간은 그것을 그의 이성과 경험의 능력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믿음으로써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로크에 의하면진정한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주어진 정보에 대한 우리 자신의 판단에서 이루어진다로크가 본유관념을 배격하는 이유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감각(sensation)이나 반성(reflection)으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경험적 증거에 의해서도 떠받쳐지고 있지 않은 가설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사유내용을 구성하는 관념들 가운데 어떤 경험적 증거도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관념들도 궁극적으로 소급해 올라가면 어떤 감각 또는 반성의 경험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감각과 반성에 의한 경험이 지식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따라서 우리의 관념세계는 감각이나 반성이라고 하는 경험적 증거의 기준에 의해서 검토되어야 한다경험적 증거에 의해서 주어지는 세계와 주어지지 않은 세계의 구별이 아직 소박하긴 하지만 경험주의의 중요한 원칙으로 생겨난 것이다.

 주어진 하나의 사건에 관련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흄은 물었다한 사건에 관련된 어떤 사건에 대해서 관찰을 할지라도 그 두 사건 사이의 관계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고 하는 어떤 직관적 증거도 논리적 증명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흄의 주장이다하나하나의 사건은 각기 독자적인 존재이며 서로 다르고 구별될 수 있고 떨어져 있는 것이다사건 A와 사이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직관적논리적 증거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A와 B사이에 걸쳐 있는 연결에 대한 어떤 관찰도 할 수 없고우리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건 A로부터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건 B가 연역되어야 할 어떤 논리적관계도 찾을 수 없다. (...)


 어떤 대상도 그 자체 안에 그 대상 밖의 것에 대한 어떤 결론을 연역해 낼 수 있게 해 주는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그리고 대상들이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병행되는 것을 관찰한 다음에도 우리들이 관찰한 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관한 어떤 추리를 전개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는 우리가 몸을 담고 살아야 하는 자연 또는 현실 가운데 직관이나 논리로서 증명할 수는 없지만우리가 의존할 만한 법칙과 질서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믿는다그리고 정밀한 이유에 의해서 짜여진 논리의 사상보다는 자연의 법칙과 현실의 질서에 대한 소박한 믿음이 실제생활에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인정한다. (...)

 이 믿음들은 논리적으로는 아무 정당한 이유를 갖지 못하면서도 가장 생생하고 확고한 현실로서 우리 앞에 다가오고우리의 사유 가운데서 다른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며 우리의 정열과 상상을 일으키는 큰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이 믿음들은 모든 우리의 행위들을 지배하는 원리들이 된다.

 마치 물리학자 뉴턴이 자연의 모든 운동을 지배하는 기계적 원리를 인력작용에서 발견하였듯이흄은 인간의 신념과 행위의 지배원리를 상상 또는 연상의 규칙들에서 찾으려고 하였다상상 또는 연상의 규칙들은 세계에 대한 인상들을 제멋대로 결합하거나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그 규칙들은 경험의 쌓임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궤도를 따라 주어진 인상들을 일정한 관념 또는 신념으로 결합하고 구성한다. (...)

 그러나 흄은 경험적 증거에 대한 직관적논리적 기준 때문에 홉스의 이기주의 심리학의 가설에 의한 또는 로크의 자연권 사상에 근거한 도덕 및 사회질서 구성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사회에서 통용되는 규칙들예를 들면 도덕법률그리고 관습들이 선험적으로 주어졌거나 자연법칙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그 규칙들은 필요에 따라서 사람이 지어내는 것(artifice)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그러나 그것들을 일일이 어떤 합리적 이해타산을 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약속과 같은 것이 아니다그것들은 오랜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다그러므로 흄에 의해서 규약(convention)이라고 불리는 이 규칙들의 유일한 정당성은 그것들이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관습의 원리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흄은 규약과 관습의 존재이유를 밝힘으로써 계시또는 자연이라든가 계약과 같은 비경험적 근거에서 어떤 도덕 및 사회질서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초월주의 또는 합리주의적 태도를 포기할 수 있었다.  


4.맺음말

(...)

p271

 A라는 원인에 대하여 B라는 결과를 연결하는 대신 또 다른 하나의 사건 또는 D라는 결과를 연결하더라도 어떤 모순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 인과관계에 대한 흄의 분석배후에는 엄밀한 지각적 증거에 대한 요청뿐만 아니라무모순(無矛盾)의 추리곧 연역적 증명에 대한 논리적 이념이 움직이고 있다이러한 직관적논리적 증거에 대한 요청은 바로 정확한 이유에 대한 요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흄은 개연(蓋然)주의자경험주의자회의주의자이기 전에 연역주의자였다정확한 이유에 의한 추론무모순의 증명이야말로 서유럽의 철학사가 공유하는그리고 특히 영국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경험주의개연주의의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형식화되기 이전의(unformalized) 순수논리로서 체계 밑바닥에 지니고 있는 이론적 이상이며 정신이다.

 그러나 영국 경험주의자특히 흄이 지니는 또 하나의 특이한 태도는 정확한 이유무모순의 증명에 대한 요청이 어디까지나 논리적이론적 기준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실제와 실천의 현실에서는 별도의 이유 또는 별도의 합리성을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실제와 현실세계를 어떤 정밀한 이유로 잘 짜여진 이론이나 논리적 질서로 이해하고 취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그들은 현실의 삶은 이론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흄은 현실의 삶에서의 습관과 관습의 존재 이유를 밝힘으로써 이론적 합리성 밖에 실제의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밝히는 데 성공하였다그러나 이론(증명)의 합리성과 실제(관습)의 합리성 사이의 경계선은 고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애매하게 놓여지기도 한다.


3. 현대철학의 방향ㅡ합리적 토대의 붕괴

p276

...그런데 고도성장을 위해서 요청되는 전체주의적 계획과 관리는 개인적, 사적(私的) 생활영역의 침해 내지 지배를 가져 온다. 말하자면 고도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한 계획과 통제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의 생명인 개인의 노동 및 이윤추구에 대한 의욕과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 체제가 요청하는 국가의 통제와 개인의 의욕(동기)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현상이다.

p277

사회학자 알벵 굴드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를 다른 측면에서 분석한다. 그에 의하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지탱해 주는 것은 물질적 생활수준(말하자면 GNP)의 향상, 소비성향 및 감각적 쾌락의 충족이라고 한다.

 이러한 수단 이외에 그 사회체제의 다변화된 계층들을 통합시켜 줄 어떤 다른 수단, 말하자면 그럴 만한 도덕 또는 이데올로기가 결핍되어 있음으로 해서 이 사회의 정당성은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어떤 도덕적 질서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소비성향과 감각적 쾌락의 충족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을 통치한다. 그리고 사회의 통치계층이 이데올로기를 조작해 내는 문화에 무력함으로 인해서 그 자신을 합리화해 줄 이데올로기는 더 찾기 힘들게 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라기 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실패'에 따르는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라는 것이다.

...

말하자면 기술, 과학, 경제의 합리화 체제와 일반문화의 반주지주의적 쾌락주의적인 경향 사이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그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어떤 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벨은 지적한다.


p278

물질적 생산양식이 또는 공동의 가치체계가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고 말하는 하버마스와 파슨스의 일원론적 해석에 대하여 그는 사회실재의 다원론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사회라는 것은 불안정하게, 그러나 각각 독자적인, 때로는 서로 반대적인 원리들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는 몇 개의 영역들로 구성된다고 본다. 능률과 합리성에 의존하는 사회-경제영역, 정의와 정당성을 문제삼는 정치영역, 그리고 자아실현과 쾌감의 원리에 따르는 문화영역이 있다. 앞에 지적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사회,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의 영역들을 지배하는 원리들 사이의 갈등을 의미한다.


 2. 이데올로기(합리성) 분석의 역사

p279

인류는 언제나 그들의 사상과 실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합리성에 호소해 왔다. ... 그리고 이러한 합리성이 특정한 실천대상과 정책에 적용될 때 이데올로기의 구조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구조 또는 이데올로기적 사유에 대한 분석은 합리성에 대한 분석에 의존하게 된다.

p280~1

인간 이성의 제약조건과 한계에 대하여 분석하기 시작한 체계적 철학자들은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이다. 이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중요한 관심사는 생존과 행복에 있다. 인간 이성은 그 자체의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생존과 행복이라고 하는 실제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 특히 흄에 의하면 과학과 도덕을 구성하는 원리는 습관과 감정의 작용이며, 인간 이성은 그러한 작용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과학체계와 도덕질서에 부여된 합리성이란, 습관과 감정에 주어진 원초적 믿음들을 변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 칸트에 의하면 합리성은 인간적 이해력의 형식이며 세계 자체의 질서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합리적 질서는 인간 이성이 지닌 선험적 제약조건들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다. 헤겔은 개인, 집단, 국가, 시대들이 세계사를 지배하는 정신의 특수한 표현양식이며 특수한 도덕과 법률, 과학과 종교들이 한 사회, 한 시대의 특수한 조건들에 의해서 규정되는 산물들이라고 본다. 한 특정한 개인과 집단이 지지하는 합리성 그리고 한 사회의 도덕과 법률의 합리성이 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제약조건들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헤겔의 역사주의적 분석에 따라 맑스는 인간의 사유와 관념체계들의 합리성이 각기 특수한 역사적, 사회 경제적 제약조건들에 의해서 조작되는 것이라고 밝힌다. 어떤 사유와 관념체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분석'이라는 것은 한 체계의 합리성이 그와 같은 조건들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라고 밝히는 데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분석을 모든 사유와 관념체계들의 구조에 적용한다면 인간의 이성 내지 합리성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맑스가 현대의 지식사회학에 대하여 제시한 길은 바로 이러한 인간 이성 또는 합리성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맑스의 암시에 따라 칼 만하임이 수행했떤 것처럼 이데올로기의 분석은 인류가 오랫동안 의지해 오던 합리성의 근거를 여지없이 흔들어 놓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은 합리성의 위기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사유와 관념체계들의 위기를 몰고 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전적 합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분석은 결국 이데올로기적 사유 자체의 자폭(自爆)을 초래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은 한편으로는 이와 같이 이데올로기적 사유의 자폭에서 오는 당연한 결론이며, 그리고 한편으로는 불가피하게 다원화되고 개방적인 사회체제의 피할 수 없는 징조로서 나타난 것이다.


3. 비판철학 방법으로서의 탈(脫)이데올로기 

그러나 우리사회에서도 수백 년을 유지해 오던 경제, 정치, 교육체제가 단절되고 무너졌으면서도 새로이 잡히는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는 아직도 정착되지 않은 채 신구시대(新舊時代)의 것들이 갈등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전통의 단절, 현실과 이념의 불협화 속에서 어떤 것을 정당화해 줄 이데올로기를 찾을 수 있는가? 단일한 이데올로기(유교 전통의 500년) 사회를 탈피하여 황급히 뛰어든 이 불연속, 불협화의 세계를 이해하고 다스릴 우리의 새로운 사유체계는 무엇인가?


p282

이데올로기 또는 이데올로기적 사유가 불가결한 것인가, 아니면 탈피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경험론과 관념론 사이의 오랜 논쟁은 사회이론 내지 사회과학에 적용함으로써 제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논리경험주의자들에 의하면, 우리는 인간의 희망적 사유나 신념에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 세계에 관한 이론과 가설을 형성하는 기초는 경험적 관찰자료이다.

 그런데 경험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관찰자료 또는 관찰자료의 타당성을 결정하는 기준 자체가 인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선험적 관심, 전제 또는 제약조건들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세계에 관한 관찰자료들은 있는 대로의 실재를 소박하게 그려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직관과 사유형식에 의하여(칸트), 또는 이데올로기적 사유에 의하여(맑스, 만하임), 또는 '패러다임'이라고 불리는 것에 의해서(토마스 쿤) 조작된 것이라고 하는 견해이다. 현대 서구 및 영미 철학계의 방법론에 영향을 주고 있는 이러한 접근방식은 관념론의 전통에 의해서 분명하게 부각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가정 또는 전제도 밑받침으로 하지 않은 객관의 세계를 인식하거나 서술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전통적 관념론의 공헌이 무엇이냐 하면, 세계에 대한 관찰 또는 경험적 서술 이전에 이미 그 밑바탕에 이러한 전제조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 준 점이다. 현대 영미 철학계의 방법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paradigm), 비트켄슈타인 또는 피터 윈치의 삶의 형식(forms of life) 그리고 지식사회학의 이데올로기적 분석은 모두 영미 철학계에 침투된 관념론적 요소이다.


p284

이데올로기의 분석, 그리고 탈이데올로기는 비판정신의 표현이다. 그것들은 실재에 관한 어떤 형이상학이나 이데올로기에도 안주(安住)하지 않으려는 비판철학의 입장이다. 실재에 관한 어떤 사유체계도 이데올로기적 조건분석에 의하여 그 합리성이 파멸되는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견해는 20세기 방법론의 첨단을 걸어가는 현대 분석철학자들의 의도와 비슷한 점이 있다. ...

 우리는 다양한 이데올로기, 형이상학, 과학이론(다양한 합리성)들이 충돌하는 상쇄작용에 의해서 보다 높은 '객관의 세계'로 해탈하려는 것이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객관세계는 탈합리성(脫合理性)의 틀 위에 설 수 있다.

 ... 합리외적(合理外的) 세계에 대하여 개방적일 때 자기 반성과 비판의 자세가 이루어진다. 합리성에의 단순한 호소는 독단적 철학을 낳는다.

 

 4. 비판철학 정신으로서의 실증주의

p285~6

객관적, 가치중립적 과학 그리고 인간의 주관적 의식활동의 영향이 배제된 자연 및 사회체계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가? 또 그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현상학적 세계이해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은 이러한 세계이해의 태도를 인간 정신의 굴복이라고 진단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주체의식과 정신세계를 포기하고 객관의 자연질서 및 사회체제에 예속되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연, 사회, 역사가 인간의 정신과 주관으로부터 독립해 있는(소외된), 그리하여 역으로 인간의 정신과 주체의식에 대하여 위협적인 괴물로 화해 버렸다는 것이다. 후설에 의하면 과학의 대상인 자연도 사회도 역사도 모두 인간 정신의 구성물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시작된 근대과학의 발전에 기초를 둔 객관주의적이며 몰인간적인 과학문명은 자연, 사회, 역사로부터 인간을 추방하는 현대의 비극을 낳게 된 것이라고 한다.

 객관과 몰인간의 과학과 과학문명 가운데서 다양한 인간체험, 의식세계 그리고 순수정신과 같은 것은 다만 주관적 환상이라고 배척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관성과 정신의 세계를 추방하려는 근대과학의 발전은 현대문화 또는 문명을 반정신(反精神) 또는 반철학(反哲學)의 경지로 몰아넣게 된 것이다.


p287

실증주의는 과학이 성립하는 과정을 지배하는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과학이 불가피하게 지니는 인간적이고 철학적인 전제들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전제들을 반성하고 그러한 제약조건들로부터의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탈출 가능성을 추구하는 비판적 전략 또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증주의는 일정한 과학체계이기 전에 사유의 방법이며, 방법이기 전에 객관의 정신이다.


p288~9

대상세계와 인간 정신 사이의 관계는 현대물리학, 예를 들면 상대성 이론이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도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현상과 현실세계는 그것이 자연에 관한 것이든지 사회에 관한 것이든지 간에 인간 정신의 활동이 전제되지 않고서 이해되거나 구성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막스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이와 같은 관계, 즉 현상 또는 현실세계의 구조와 그 근거로서 전제되어 있는 인간 정신의 활동 사이의 관계를 특히 사회영역 가운데서 잘 해명해 준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현상 내지 현실구성의 원동력으로서의 정신활동을 전제하면서도 관념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객관성에 대한 높은 기준을 지킨 훌륭한 비판철학의 선구자였다. 그는 선험적 정신활동에 의해서 구성된 현상세계 밖에 절대 객관성의 척도로서의 본체세계가 있을 수 있음을 상상(想像)하는 자기 탈출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선험적 전제 또는 제약조건을 객관화하려는 칸트의 정신에서 그리고 후기 실증주의 과학철학의 전개에서 똑같이 이데올로기적 합리성은 인간 정신의 불가피한 동반자이기는 하지만 반성하고 해방되어야 할 제약조건이라고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객관성에 대한 선험적(先驗的) 기준을 제시한 칸트의 정신을 대변하는 철학자로서 칼 포퍼를 들 수 있다. 그는 귀납의 논리 또는 검증의 논리를 배격하고 추측과 반박(conjecture and refutation)의 논리를 주장함으로써 객관에 대한 칸트적 비판의식을 표현하였다. 폴 파이어아벤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지식의 객관성에 대한 고도읫 ㅓㄴ험적 비판의식을 가지고 지식의 무정부론(anarchism)을 제의하였다.)


4. 현대 사회의 분열구조

p292~3

 그러나 한 국가체제가 그 생존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요청하는 전체계획과 거대산업의 조직은 필연적으로 개인적 자유 또는 사적 생활영역을 침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딜레마에 몰린 많은 철학자, 사회이론가들이, 과연 개인의 자유와 사적 생활세계는 회복될 수 있는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를 논해 왔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회복에 관한 문제의식과 사상으로써는 이해하거나 해결될 수 없는 후기 산업사회에서의 인간 과제의 새로운 측면을 밝힐 필요를 느끼게 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오늘의 산업사회에서 제기되는 심각한 인간 과제들은 인간회복의 사상들이 공유하는 철학적 전제, 곧 일차원적 과학과 문명비평론으로써는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1. 일차원적 사회와 인간회복의 사상

 p295

 그러나 현상학적 세계이해에 의하면 모든 인간적, 주관적, 환상적 체험세계는 어떤 객관적 자연 및 사회적 사실로도 설명될 수 없는 독자적 실재성을 지닌 현상이다. 그것은 어떤 객관주의의 선입견도 없이 우리 경험에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느껴지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물리적 또는 객관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마음의 현상으로 의식될 수 있는 모든 주관적 차원의 경험들을 인식대상으로 한다. 이것은 인식영역의 확장을 의미한다. 여태까지 인간 주체의 지위와 역할이 무시되었던 객관적 자연 및 사회세계에서 인간적 차원이 회복됨을 의미한다.

 객관적으로는 인간 및 사회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통일체계로 서술할 수 있을지 모르나 현상학적으로 현실세계는 여러 개의 다중적 세계들로 파악된다. 이 다중적 생활세계들은 인간 위에 군림해서 인간을 지배하거나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객체로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주체적, 자율적으로 만들어지는 체험세계이며 현상세계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세계이해는 현대사회체제의 객관적 구속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거의 모든 사회이론들의 철학적 기초가 된다.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간(소외된) 사회체제, 그 거대한 객관적 법칙의 체계에 노예로 된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인간 본래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길을 마련해 주고 있다.


 2. 모순구조의 전개 : 공적 및 사적 세계의 분열

 현상학적 세계이해에 따르면,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객관적 사회의 전체주의 체계를 떠나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사회집단 또는 개개인은 각기 그 고유의 생활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를테면 개인은 아무리 사회적 유대관계 또는 전체주의 지배체제가 강화될지라도 이러한 객관적 환경과는 완전히 격리된 별도의 의식세계, 생활세계를 사적(私的)으로 보유할 수 있다. 인간을 배제하고 소외시킨 일차원적 공적(公的) 사회체제가 현상학적 인간회복에 의해서 인간화되거나 인간에게로 접근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자신이 일원화된 공적 사회체제로부터 스스로 떨어져서 자기 안의 사적 생활세계를 개척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

 그리고 이러한 괴리관계는 단순히 서로 다른 사회이론, 곧 체제중심적 사회이론과 현상학적 인간중심의 사회이론에 의해서 두드러진 문제라기보다는 현대의 산업사회체제가 지속됨에 따라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실제적 추세로 보인다. 현대산업사회의 비(非)인간화 소외의 경향이 지속되고 깊어질수록 사람들의 개별적 생활세계ㅡ그 내면의 의식, 그 진정한 의도, 그 개인적 사고와 가치들은 더욱 격리된 고독한 곳에서 전개될 것이다.

 인간을 소외시켜 사물화(objectification)하는 사회체제의 추세와 인간 자신이 스스로 객관화된 체제를 떠나 개별적, 사적 세계로 수렴(privatization)되어 가는 경향 사이의 괴리관계는 현대산업사회 또는 국가체제가 정착됨에 따라 더욱 심화되어 가는 것이다. 


p297

 18세기 사회사상가 루소는 이러한 근대문명 또는 현대사회체제의 필연적 귀결을 일찍 간파했던 사람이다. 사회체제가 거대하고 강력해질수록 인간은 그 체제로부터 소외되며, 따라서 인간 자신이 스스로 체제로부터 벗어나 개인적, 사적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됨을 암시하였다. 예를 들면 국가 구성원의 수가 증가할수록 국민 개개인은 국가적 결정에 행사할 영향력을 잃게 되며, 따라서 국가적 결정에 덜 공감하게 되고 덜 동조하게 되면 그럴수록 국가는 더 큰 강제력을 동원해야 하고 이는 다시 개개인으로 하여금 국가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소외의) 길을 택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사회체제 속에서 인간은 능동적으로 자기의 세계를 소외시키려고 한다.

 현대의 많은 사회이론가와 철학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현대사회체제를 개탄한다. 그러나 이제 다가오는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의 세계를 외부적 환경, 사회체제로부터 소외 또는 도피시키려고 하는 데서 (또 그러한 개체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데서) 그 심각성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사회가 부딪치게 될 과제는 몰(沒)인간적 사회체제에 대하여 자율적 인간의 회복을 꾀하는 데 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사회체제의 인간 소외와 개개인의 능동적 자기 소외의 상호호응적 경향은 치유 불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차원적 사회에 있어서 인간회복운동이란 돌이킬 수 없는 경향에 거슬리는 시대착오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p298~9

...그러나 이렇게 해서 발굴된 사적 생활세계들, 그리고 서로 모순되는 세계이해의 틀들이 어떻게 한 일원화된 사회체제 내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 서로 모순되는 방향으로 심화된 사적 세계와 공적 세계 사이의 모순 또는 갈등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적어도 마르쿠제가 제시한 일차원적 인간 및 사회비판의 논리로써는 이해되거나 해답될 수 없는, '70년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후기 산업사회의 새로운 사태라고 생각된다.

 ...

 마르쿠제를 비롯한 많은 산업사회 비판가들은 오늘도 개인들 위에 그들의 공적, 사적 생활세계들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하나의 커다란 사회체제가 군림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일차원적 사회체제의 이해는 플라톤, 루소, 헤겔, 파슨스에게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은 사회 전체를 묶어 놓은 한 통일적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실재를 진단하는 다렌돌프와 다니엘 벨 등에 있어서는 그러한 원리가 없다. 그들은 물질적 생산양식 또는 공동의 가치규범이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고 말하는 마르쿠제와 파슨스의 일원론적 견해에 대항해서 사회적 실재의 다원론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벨이 암시하는 현대사회의 실재라는 것은 각각 독자적인 때로는 서로 반대적인 원리들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는 몇 개의 불안정하게 결합된 영역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질적 영역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사적, 공적 생활세계들의 불연속적 구조 또는 모순적 구조를 포함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새로운 공존양식 또는 거기에 따르는 사유형식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철학자-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가 일찍이 전통적 형이상학, 종교, 이념체계들의 종말을 선언했음에도 그것은 아직 시대적 필연성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195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벨이 사회실재의 다원화라고 하는 시대의 추이를 명확히 관찰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역설할 수 있었다. 그의 이데올로기 종말론은 단일화를 지향하는 합리주의의 쇠퇴와 문화의 대중화 경향 또는 복합경제체제의 등장과 같은 해체확산적 시대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3. 모순구조 속에서의 인간교육

p300

본디 인간의 사상과 사고방식은 사회현실의 변화를 흡수하고 거기에 적응함에 있어 시간적으로 지체되는 경향이 있다.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공적, 사적 생활세계의 분열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대사회에 적합한 어떤 기존의 사유체계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현대인은 여전히 구(舊)시대의 사유체계 속에 머물러서 자기 사유와 행위의 좌표에 차질과 무리를 일으키고 있는 많은 예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론과 사상이 현실세계의 발전을 미처 따르지 못하는 상태를 이론과 사상의 지체(遲滯)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현대사회의 급속한 발전으로 일어난 공적 및 사적 생활세계의 분열과 갈등은 공유하는 현실세계의 상실을 그리고 통일성을 지향하는 사유에 혼란을 가져 오고, 이것은 다시 기존하는 사유 및 행위체계의 무효를 뜻하는 것이다. 지체현상으로서 현존하는 사유 또는 행위체계는, 그것이 하나의 철학으로 표현된 것이든 정치,사회,이데올로기로 표현된 것이든 간에, 현실적으로 무용(無用) 무력한 것이라고 하는 인상을 현대인에게 준다. ...

 그럼에도 어떤 설득력도 지닐 수 없는 기존의 이념이나 가치체계들이 아직도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에 그대로 강요되고 있다.

  3-1. 소외는 회피해야 할 것인가?

p302

...이미 논의된 바와 같이 후기 산업사회에서의 의식의 움직임은 그러한 사회체제에 무조건 반항하거나 그 체제의 인간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그러한 체제에 기능적으로 적응하고 한편으로는 그러한 공적 생활체제와는 격리된 각기의 사적 생활영토를 확보하려는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공적 체제와의 괴리 또는 소외관계는 후기 현대사회를 형성하는 인간 존재의 필수적 조건이다. 

...

 그러나 동양사람들은 특별히 그들의 오랜 사회 공동체에 대한 비(非)개인주의적 귀속감 때문에 위와 같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이행함에 있어 보다 큰 충격을 받는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유교의 가르침에 의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곧 부자(父子),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 사이의 유기적 결속관계가 강조되어 온 동아시아사회에서 소외 또는 괴리관계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일 수 있다. 


p303

소외 또는 괴리관계는 현대사회에서의 인간 존재의 필수조건일 뿐만 아니라 역사발전의 한 단계로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외관계는 일차원적 사회지배체제로부터 개별적 생활영토를 해방시켜 주는 자유로운 존재(또는 삶)의 조건이기 때문에 오히려 독립된 개별자로 하여금 창의와 독립의 정신을 갖게 하는 발전의 계기로 수용될 수 있다. 소외자는 체제 속에 파묻힌 일상적 자기를 분리시킴으로써 반성하고 따라서 떨어져나간 세계를 재(再)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소외관계의 체험 없이 자기 반성과 세계 재해석의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소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개인과 사회, 개인과 개인 사이의 긴장관계가 반성과 창조의 역사적 계기를 만든다. ...

 소외관계의 체험으로써 인간은 성숙한 자아 및 세계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객관적 과학이 추구하는 성숙한 세계인식이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 또는 역사와의 소외 또는 모순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듯이 자아의 진정한 반성과 성숙도 소외된 또는 객체화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주체적으로만 파악된 역사, 사회, 자연은 성숙한 과학적 인식의 기초가 될 수 없고 그러한 기초는 오직 소외관계를 계기로 해서 다시 이루어지는 객관의 차원에만 주어지는 것이다. 후기 현대사회에서의 소외관계는 인간이 보다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3-2. 무정부상태는 극복될 수 있는가?

p304~5

...이제 그 제약조건인 사회체제 자체가 갈등관계에 있는 생활영역들로 분열될 때 보편적 가치 또는 인식의 타당성에 근거한 대화 또는 담화세계(universe of discourse)의 형성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분열과 단절의 세계 위에 군림하는 어떤 보편적 가치와 인식의 타당성도 발견하지 못할 때 인간은 허무주의나 무정부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세계가 하나의 역사 공동체로 돌입하던 20세기 초에 이미 시대변천의 잠재적 가능성을 예견한 니체, 키에르케고르 등 철인들에 의해서 거론되기 시작한 무규범, 무정부상태 그리고 허무주의를 이제 사회적 현실로서 우리는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3-3. 대화는 가능한가?

산업사회의 급격한 진행과정에서 전통이 단절되고 공적 사회체제와 개별적 생활영토들 사이의 분열이 심하면 심할수록 보다 많은 이데올로기, 가치와 인식체계들이 난무하며 제각기 세계의 패권을 향하여 다투게 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념, 가치, 인식체계들이 충돌, 상쇄되는 무정부상태 가운데서 미래사회의 인간은 반드시 그러한 무정부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그러나 연속성과 통일을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는 새로운 대화 또는 사회관계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

 아직도 우리는 흔히 서로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대결자들이 각기 상대자에게 대화의 광장으로 들어올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각자의 생활세계들이 분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공동의 광장을 찾아 대화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속할 것이다. 이렇게 공동의 광장을 찾을 수 없는 세계에서는 비(非)연속성과 모순관계를 전제로 해서 대화가 전개될 수밖에 없다.

 고도로 훈련된 대화는 본디 소크라테스와 포퍼에 의해서 암시되었던 것처럼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와 모순으로부터의 반응을 추구하고, 불연속, 단절의 계기를 확인함으로써 보다 역동적인 합의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언제나 반대와 모순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이미 박힌 가치기준과 세계인식의 편견에서 탈피하여 보다 객관적인 그러나 반드시 그 실현을 전제하지 않는 동의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 현대사회에서 이해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교육과제는 훈련된 대화능력의 습득이라고 생각된다. 미래사회의 구조적 특징인 모순과 분열관계는 단련된 대화관계로써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3-4. 어째서 물질주의적인가?

p306~8

 서양 문화권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한국인의 물질주의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후기 산업사회에로 진행하는 한국사회, 한국문화의 실상(實相)을 반성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될 것이다.

 첫째로, 도덕 실천주의와 실학사상의 전통을 수용해 온 한국사회가 최근에 받아들인 현대과학문명 가운데서 실제적 효용성의 추구 밖에 다른 차원을 전혀 습득하지 못하게 만드는 풍토와 사조에 그 원인이 있다. 

 ...

 그러나 실제 효용성을 추구하는 오늘의 한국문화와 교육의 불균형적 발전은 반성능력을 결여한 결과주의와 물질주의를 초래하고 과학문화의 지속적 저력으로서의 순수이론 정신, 말하자면 비효용의 효용의 차원을 망각하도록 만들어 가고 있다.

 둘째로, 다원주의를 토대로 한 사회질서 형성에 체험이 없는 한국인이 현대산업사회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자유경쟁의 시장체제를 받아들였다는 데서 물질만증주의가 유래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 특히 한국사회에서 오래 지속되어 온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층질서가 현대산업사회체제에 의해서 여지없이 붕괴되었음에도 가치서열의 일원주의 척도는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산업사회에서 피상적으로 부각되는 실제적 효용가치, 곧 물질적 재화(財貨)를 최고의 결정적 가치로서 받아들인 한국인에게 다른 종류의 가치가 으뜸이 될 수 있는(예를 들면 명예, 자유, 공의, 지식 자체 같은 것이 최고의 결정적 가치가 되는) 가치서열의 척도를 상상해 볼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 본디 서양에서는 자본주의가 가치서열에 관한 다원주의를 배경으로 해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산업사회에서의 자유경쟁은 한국사회에서처럼 물질적 재화에 국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치서열의 일원주의 개념을 지닌 한국문화에서의 자유경쟁은 산업사회에서 피상적으로 중요한 측면 곧 물질적 가치(실제 효용성)에만 집중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

 일원주의 가치서열의 개념은 물질 이외의 영역, 즉 이차적 가치영역에도 그대로 이행, 적용되어 어느 영역에서나 자유경쟁은 총화(總和)가 영(零)이 되는 치명적 경쟁을 연출하는 경향이 있다. 그 가장 좋은 예로서 우리는 한국교육과 정치에서의 치열한 대결상(對決狀)을 들 수 있다. 사회적으로 부각되어 있는 가치 이외의 것을 최고에 놓을 수 있는 가치서열의 비(非)한원주의 또는 비(非)연속성 개념이 한국문화에 뿌리내리기 전에는 한국인이 물질만능주의 또는 '네가 얻으면 내가 잃는다'고 하는 영총화(zero-sum)의 야만적이고 출구 없는 경쟁관계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5. 잉여지대로서의 역사

p311

...따라서 국가의 통제력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갈등은 곧 내란 또는 혁명으로 유도될 수 있다.

1. 자연의 사회학(1) : 홉스의 탈역사(脫歷史)

p313

어떤 기존하는 정치 도덕적 합법성도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상태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서로 다른 목표와 가치를 추구하는 개인 또는 집단들을 가지고 어떻게 또는 어떠한 사회질서를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 자연의 사회학(2) : 다렌돌프의 역사입문

... 예를 들면 죠셉 슘페터(J. Schumpeter)는 18세기 철학자들로부터 유래하는 고전적 민주주의의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그 비(非)현실성을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맑스주의의 분석을 빌리면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개인과 집단들이 그들의 논의과정을 통하여 공동의 선(the common good) 또는 일반의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케넷 애로우(K. Arrow)도 모든 사회구성원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공동의 선이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투표의 역설(the paradox of voting)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증명하였다. ... 애로우가 제시한 투표의 역설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x, y, z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서열을 매기는 A, B, C라고 하는 투표자(말하자면 사회구성원)가 있다고 하자.

서열 투표자

A

B

C

1 순위

x

z

y

2 순위

y

x

z

3 순위

z

y

x


A와 B의 집단은 y보다 x를 우선적으로 택하고, B와 C의 집단은 x보다 z를 우선적으로 택한다면 이전(移轉)의 원리(the principle of transitivity ; 말하자면 어느 누가 y보다 x를 우선적으로 택하고 그리고 x보다 z를 우선적으로 택한다면, 그는 y보다 z를 우선적으로 택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에 의해서 A, B, C로 구성되는 사회 집단은 y보다 z를 우선적 순위에 놓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AC의 집단은 z보다 y를 우선적으로 택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3개의 선택지(選擇肢)에 대한 어떤 다수결도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가치 또는 이해관계를 결합하는 완전한 사회복지의 질서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구성원들의 요구가 합리적으로 반영되는 사회적 선택의 방법이 있을 수 없다는 발견은 현대사회이론에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p315~6

빈곤과 소외의 구석자리에서 참여적 민주주의에 대한 드높은 요구가 외쳐지는 20세기 후반기 사회운동의 흐름을 대변하는 사상으로서 존 롤즈의 공정성(fairness)으로서의 정의 또는 맑스주의자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한 정의의 개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를 마감하는 오늘, 사회체제의 가능한 현실이라기보다는 현대사회에 팽만해 있는 기대와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평등관계를 시정하는 공정성의 추구는 사회적 선택이 합리적으로 구성될 것을 요청하는 근거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이 합리적으로 반영되도록 하는 사회적 선택의 방법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슘페터, 애로우, 다니엘 벨을 비롯한 많은 사회이론가들에 의해서 논의되었다. 특히 애로우에 의하면, 개인적 입장에서는 상이한 가치들에 대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합리적 선택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구성원 다수가 참여하는 사회적 선택에서는 그러한 합리적 순위가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적 선택의 합리적 근거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완전한 평등 사회의 실현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므로 이제, 사회적 선택과 평가 또는 사회적 질서의 구성을 지배하는 새로운 논리가 발견되어야 한다. ... 홉스의 원시상태는 현대사회이론이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전제하고 설명해야 할 실제적 과제이다.

 

2.2 랄프 다렌돌프는 홉스의 원시적 자연상태를 사회학적 분석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렌돌프는, ... ‘정치의 강제성 이론이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불확실성의 사회적 존재양식은 자유와 경쟁이다.

자유와 경쟁은 인간의 원시적 존재양식 또는 원시적 관계이다. ... 강제에 의한 통합 또는 질서구성 이전의 인간의 원시적 존재 및 관계양식이러한 상태는 다만 원시사회의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전환적 상황에서는 언제나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전환은 역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으로부터 갈등과 불평등 관계라는 필연적 산물이 나타난다. 따라서 계급갈등 또는 불평등관계에 관한 그의 이론은 홉스의 원시 자연상태에 대한 그의 사회학적 분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p318

불평등 또는 갈등관계는 억압에서 자유에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주는 역사적 동력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불평등관계가 소멸된 사회란 사회학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속한다. 모든 사회의 계층적 구조는 지배적 규범에 의해서 소외된 자들의 반발에 직면할 수 있는 역학적 관계 위에 세워져 있으므로 언제나 변화에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2.3 ... 사실 모든 규범 또는 평가기준들은 그 정당성을 확대시킴으로써 지배적 자리를 차지하려는 경향을 지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서로 갈등 내지 불평등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정당화과정(legitimation process)이 성공적으로 실현됨으로써 지배적 지위를, 실패함으로써 피지배적 지위를 얻게 된다.

 

p319

(다렌돌프)는 갈등이론과 균형이론의 모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갈 등 이 론

균 형 이 론

(1) 모든 사회는 어느 순간에서나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그리고 사회변화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2) 모든 사회는 어느 순간에나 반대와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갈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3) 사회 안의 모든 요소들은 해체와 변화에의 길을 걷고 있다.

 

(4) 모든 사회는 어떤 구성원들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한 강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1) 모든 사회는 비굦거 지속적이고 안정된, 요소들의 구조이다.

 

(2) 모든 사회는 잘 통합되어 있는, 요소들의 구조이다.

 

(3) 사회 안의 모든 요소들은 하나의 체계가 유지되도록 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4) 사회구조의 모든 기능은 그 구성원들 사이에 이루어진 가치에 관한 합의에 의해서 수행된다.

 

다렌돌프는 사회적 실재의 갈등과 균형의 두 측면이 마치 개별적으로 독립해서 다만 병존하는 것처럼 본다. 그러나 균형이론으로 설명되는 사회적 실재라는 것은 한 집단의 평가와 정당화의 논리적 과정이 성공적으로 정착해서 유일한 지배적, 공통적 규범 및 존재양식으로서 군림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렇게 구성된 사회질서 안에 잠복된 불평등관계 가운데는 긴장이나 갈등이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평가와 정당화의 과정에서 어떤 공통적 규범 및 존재양식도 절대적 자리에 군림할 수 없을 정도로 이단적(異端的) 규범 및 존재양식이 환원되거나 해소되지 않고 잉여집단으로 남아 있을 때 갈등 또는 불평등의 긴장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p320

말하자면 갈등과 균형상태는 평가와 정당화라는 생존활동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변동에서 나타나는 두 개의 시점(時點)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극단의 갈등상태(구조 1)에서 극단의 균형상태(구조 2)로 나아가는 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예시할 수 있다.

평등 갈등관계(구조 1) -> 불평등 갈등관계  -> 불평등 균형관계(구조 2)

(도식을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으나 붙여넣어지지 않아 생략함)

여기서 구조 2의 상태, 즉 완전한 불평등 균형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 과연 이렇게 잉여집단이 중심의 가치 및 존재양식에 완전히 통합된 균형구조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느냐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사회적 평가 및 합의과정에 대한 듀이의 합리주의적 해법에 대한 비판 그리고 모순해소에 대한 20세기의 몇몇 논리 사상가들의 생각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p321~2

3. 이성의 사회학 : 듀이에게서 파산된 합리주의

3.1

...

한 공동의 문제상황에 처한 각자는 그들의 상황을 다르게 파악하고 정의할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왜냐하면 각자는 한 주어진 상황 안에서 그리고 그 밖의 상황에 대하여 여러 다른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상황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각각-그 공동의 상황 속에서 차지하는 각자의 위치 그리고 공동의 상황 밖의 집단 또는 상황들에 대하여 가지는 각자의 관계에 따라서-서로 다르게 문제의 상황을 파악하고 정의하게 될 것이다.

한 주어진 상황에서 A라는 집단은 어떤 사건을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보는데, B라는 집단은 그 사건이 전혀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 문제라고 파악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상황이 문제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가치 있는 또는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 대상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적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은 한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어떤 대상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해결할 문제인가?’ 라는 토론을 아무리 거듭한다고 할지라도 각각 서로 다른 위치와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불일치(不一致)의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어떤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회적 합의 또는 질서를 구성하려고 할 때 고려해야 하는 현실적 조건 또는 출발점은 홉스가 제기한 갈등과 불일치의 원시적 자연상태라는 것이다.

 

3.2

p323

어떤 종류의 결과들이 최종선택의 근거가 되느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며 또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되기를 원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상황을 구성하는 자들이 여러 다른 선택 가능성들을, 거기에 따라올 결과들에 관련시켜서 비교하는 평가과정을 충실히 수행한 뒤에도 각 구성원은 서로 모순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보다 중요한 질문은, 만약 한 문제의 상황을 구성하는 상이한 개인, 집단, 정당, 국가들이 동일한 가설적 선택지를 각기 다른 상상적 결과들에 연결시킬 때 무엇이 공동의 평가 또는 선택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냐 함이다. 다양한 구성원 또는 집단들이 최종적 선택에 있어서 각각 다른 결과들을 더 바람직하다고 또는 의미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갈등을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가?

 

4. 잉여세계에 건네는 대화인 역사

p324~5

모든 구성원들의 상이한 이해관계를 조화시켜서 사회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듀이의 사회적 합의의 방법이 결국 불편부당의 넓은 관점(a broad and impartial view)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의 현실적이고도 강력한 사회이론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듀이 역시 홉스에 의해서 제출된 문제를 외면해 버린 것이다.

...

그러나 사회적 선택에 관한 듀이의 탐구 및 평가의 논리적 과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서 나오는 결과는 다만 사회질서가 구성원들의 평등한 관계와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간단한 결론일 수는 없다. 듀이의 탐구 및 평가의 과정에 관한 비판적 분석의 결과는 : (1) 사회적 선택, 말하자면 사회질서가 합리적으로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논리적 한계를 명시해 줄 뿐만 아니라 (2) 이러한 사회질서, 예를 들면 사회계층의 형성근거로서의 평가와 합의의 과정은 언제나 다시 논란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미완서엥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임을 밝혀 준다. 언제나 다시 논란될 수밖에 없는 것은, 피지배의 위치에 놓여 있는 구성원들이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도전 때문에) 지배의 위치에 놓여 있는 구성원들이 결코 완결(합의)될 수 없는 새로운 탐구(모색) 및 평가의 과정을 전개해서 각각 그들에게 보다 만족스러운 사회질서를 재구성하려는 투쟁을 다시금 시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평가의 논리적 과정이 미완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떤 공통의 규범이나 인식체계도 절대의 자리에 군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주변적 존재 및 가치의 소유자가 공동의 체계에로 환원되거나 해소되지 않고 잉여지대로 남아서 불평등관계를 구성한다. 이렇게 구성원들의 평등한 참여와 합이에서가 아니라 지배하는 자(중심)와 지배받는 자(주변)의 불평등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와 사회질서의 형성과정은 언제나 중심과 주변 사이의 지배, 대치(對峙) 또는 교체라고 하는 역사적 관계로써 이어지게 된다.

 

p326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내는 창조적 주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거시적 차원에서 돌이켜볼 때 인간은 역시 자연의 부분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법칙의 커다란 테두리를 벗어나서 그의 운명과 역사를 개척하거나 그의 평등과 보편에 대한 이념을 완전하게 실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념과 실천의 능력으로써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 또는 저항으로서의 운명과 자연의 질서를 시인하지 않으려 함은 인간의 부질없는 환상임에 틀림없다.

잉여이론은 이러한 제약조건하에 있는 탐구와 평가 또는 이념실천의 의지가 지니는 편협한 목적지향성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는 정신적 자세의 표현이다. 만약 비판정신(또는 반성정신)으로서의 잉여론의 계보를 칸트의 선험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잉여론의 가장 중요한 방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현상세계의 정연한 논리적 질서를 철저하게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다만 인간의 선험적 사유체계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며 진정한 본체세계는 그 선험적 논리 밖에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한 칸트의 비판정신, 그 이념비판의 객관정신이야말로 잉여론이 추구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는 무한히 반복된 사실관찰과 경험에 의해서도 가장 엄밀하고 체계적인 논리의 추적에 의해서도 본체세계의 진리는 우리의 편이 될 수 없다고(검증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인간적 논리와 이념의 벗어날 수 없는 주변성을 그 한계로써 자각하는 훌륭한 객관정신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객관정신에 의해서 이해되는 것은 무엇인가? 논리적 추적 저편에 논리로써 넘을 수 없는 잉여지대 곧 미결정의 세계가 언제나 존재하는 것처럼 이념과 실천 저편에 이념과 실천으로써는 정복할 수 없는 잉여지대, 곧 무리(無理)와 비정(非情)의 현실세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p327~8

과학도가 기존의 논리로써 설명할 수 없는 잉여현상에 부딪쳐 다만 침묵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이념실천으로써는 해소할 수 없는 무리와 비정의 잉여현실 가운데서 시달리며 좌절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인간적 이념과 실천의 결단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목적관념과 행위의 편협성을 끊임없이 제약하고 좌절시키는, 아직 전모를 알 수 없는 잉여의 벽 앞에서 오히려 이념과 논리의 노예인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주변자로 밀어내는 객관의 질서와 냉혹한 현실에 부딪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인간의 자기(그것이 이념이든 욕망이든 그 밖의 무엇이든) 실현의 운동이 아니라 인간이 아직도 통제할 수 없고 실현할 수도 없는 잉여세계를 향하여 건네는 대화의 운동이다.

그 대화에 있어서 응답자는 누구인가? 아직도 세상에 그 자신의 최후의 구도를 펼치기 위하여 기다리는 잉여의 주변자다. 그 주변자가 때로는 노도 같은 물결을 타고 덮쳐 와 일껏 자리잡힌 중심자의 판도를 뒤집어 놓는다. 그 주변자는 소외된 인간인가? 그는 말없는 자연의 질서인가?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초월자인가? 그러나 그들은 어떤 이름으로 불려지든 간에 다만 아직 실현되기를 또는 응답하기를 기다리는 잉여지대의 대변자이며 대행자일 뿐이다.

만약 누구든지 이념실천에 의해서 또는 그러한 것들을 지닌 인간 주체의 창조적 활동에 의해서 오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해한다면, 그러한 역사는 인간의 아주 가벼운 일시적 유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우주의 역사 가운데서 인간 이념의 창조적 활동이 그렇게 실현되어 본 일도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19세기말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히 한국사의 전개과정은 과연 어떠한 이념과 실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 일반적으로 제 3세계에 속하는 주변자들의 역사현실은 세계사의 주류에서 밀려난 잉여지대에서 이루어진다. 자신의 이념과 의도와는 판이하게 전개되어 온 수모(受侮)와 좌절 또는 은폐와 변명의 역사를 어떤 시대의 이념이나 보편정신의 실현과정이라고 합리화하려는가?

박동환,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

Posted by 히키신
2017. 3. 7. 21:10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박동환, <서양의 논리동양의 마음>, 1987, 까치


*아님과 존재의 밖

*타자와 잉여

*얽힘

*제거와 부정의 길

**다름의 인정

여러 의문들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볼 것


p9 – 징검다리에 서서 머뭇거리다

 이 세상은 전부가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 토막극들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이것을 저것으로 저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려고 한다그의 추론과 상상이 이것으로 저것을저것으로 이것을 넘을 수 있는가.


p16 

0034 : 믿음의 체계를 만들지도 부수지도 않고버리지도 갖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다스리는 길을 찾는다.


p20

경쟁도 평등도 각자가 지닌 고유한 능력과 인격을 무너뜨리는 행위이다경쟁에서 이기는 자는 없다참으로 경쟁에서 이기는 길은 그것을 벗어나는 데에 있다. 서양과 동양의 오랜 흐름이 지닌 생각의 역사에서 현대의 무자비한 경쟁과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데 방법될만한 것을 찾기는 어렵다

 

 하나와 같음이라는 허구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존재의 논리를 찾을 수 있는가.


0073 : 자루 속에 세상을 넣을 수 있는가사람들은 자루를 버리지 못한다자루에는 압력이 쌓이고 그러므로 파국에 이른다파국은 언제나 보다 큰 힘타자로부터의 보복이다.


p23

왜 우리들은 서로 싸우도록 지어졌습니까?

지어진 자가 지은 자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의문이해할 수 없는 지은이의 도덕성.


0092 : 사람이 찾는 것은 무엇인가.

 믿을 만한 대상그의 삶에 희망과 활기를 주는 것.

 그런데 그 대상에는 정함이 없다아무것이라도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참으로 주착이 없다사람은 아무것으로 채워도 상관이 없는 빈 껍질이다무엇이든지 그의 삶에 희망과 활기를 준다면 그것은 그의 믿음의 대상이 된다.


p29

0104 : 어떤 것도 거부되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진리로 남아 있지 않은 다만 거부하는 행위로서 이어지는 철학의 역사.


 (...) 이만 하면 참으로 진리될 만한 것은 모든 철학자들이 세우는 주장 이다에 대하여 언제나 아니다라고 하는 뿌리깊은 거부행위 뒤에 숨어 있는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p30

0105 : 문학자그는 해답을 위하여 어떤 체계를 만들지 않는다체계가 없어도 혼란에 빠지지 않는 강심장의 그는 탈논리(脫論理)의 직관으로 세상을 헤쳐놓는다신학자그는 문제에 대한 하나의 완전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처음의 결단에 따라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도록 운명지어져 있다그러나 모든 문제에 해답이 있는가이것이 철학자가 놓이는 의문의 사태이다.

 철학자는 처음의 결단을 믿지 않는다현실은 하나의 완전한 해답을 허락하는 것도끝없는 혼란의 소용돌이도 아니다철학은 현실주의자의 사색이다.


p31

0107 : 아무도 모든 것을 볼 수도느낄 수도 없다누구든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모든 것과의 얽힘을 떠날 수 없다어떻게 얽히는가거기에 논리와 존재의 샘이 있다.


p32~33

0152 :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어느 편에 드는 것이 철학자의 길인가. (...) 

존재의 사태나 무()로부터 물러설 수 있는가. 달라짐이나 같음의 사태로부터 물러서는 길이 있는가가지를 치는 갈림길의 뿌리를 어떤 대상이나 실재로 못 박을 수 있는가갈림길에서 뒷걸음 쳐 어디론가 알 수 없는 데로 끝없이 물러서면 무엇을 만나는가.


p45 – 자아는 나의 것인가

0201 : 참 자기의 모습을 찾기 위하여 자기가 가진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 하는가청년기에 참 자기를 찾을 수 있는가그의 생각과 행동의 많은 것은 자기자신의 표현이 아니라 사정에 밀려 잡히는 대로 얻은 것이거나 부러움으로 모방해서 지닌 것에 불과하다이른바 불혹(不惑)의 나이에는 순수한 자기로 돌아갈 수 있는가.


 어느 나이에 인간은 자기 아닌 것으로부터 취한 것을 모두 버리는가.


p51

0252 : 의식의 노력은 극대화할 것인가극소화할 것인가의식이 지닌 아니다’ 혹은 다름의 행위능력으로 세계가타자가 지닌 아니다의 힘에 대결할 수 있는가.


p52

0253 : (...) 타자에게 넘겨줌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자. 타자와의 얽힘에서 자아의 영토를 극소화하는 자극소의 생각으로 깨닫는 철학자. 극소의 힘으로 일하는 물리학자자아의 동일성을 버리는 자.

p55

0290 : (...) 영혼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없다그것은 세상으로부터 숨겨진 뒷길현실을 바라보고 가늠하는 먼 거리에 서 있다그것은 세상의 현실과 같이하지 않는다그것은 자기 아닌 자로부터 자기를 거두어 거리를 지키는 고독자이다


 그러면서도 영혼은 세상을 외면하지 못하는 갈등의 주인공이다영혼이 가지고 있는 것은 없으니까우주가 파도치는 대로 춤을 춘다그것은 언제나 자기 아닌 것을 따라서 행세하는 외로운 거리의 여행자.


p62

0302 : 사람이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생각에 사물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한 점이다. (...) 

 

 생각을 끊음으로사람의 믿음을 거두어들임으로 오히려 파노라마 뒤로 물러나 있는 자의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p63

0303 : (...) 생각이 다름에 머물 수 있는가생각은 같음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아닌가.


p67

0353 : 어떻게 사물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가그 자체가 지닌 자체’ 것으로써 밝힐 수 있는가그 자체 아닌’ 것으로써 밝힐 수 있는가

그 자체에 자신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가.

그 자체가 그러함의 참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그 자체에 그런 것이 없다면 어디서 그러함의 이유와 뿌리를 찾을 수 있는가그 자체 아닌 그 밖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그 밖의 타자가 그 자체를 한정하는 이유와 뿌리가 되지 않겠는가

 꿈이 실제인지 아닌지가 꿈 속에서 드러나는가꿈이 아닌 현실에서꿈 밖에서 정체가 드러난다현실에 주어진 사물의 정체는 그 사물의 현실이 아닌현실 밖의 타자로서 드러나지 않겠는가.  


p69

0354 : (...) 무엇이 사물을 사물 되게 하는가무엇이 사물을 사물로 한정하는가사물을 정의하는 본질이나 형상은 사물을 사물 되게 하는 바탕인가사물을 사물로 한정하는 정체인가사물의 본질이나 형상은 사물의 정체나 바탕과 같은 것인가같음의 지평 위에 사물의 정체와 바탕이 드러나는가같음으로 이어지는 지평에서 사물을 사물 되게 하는 뿌리를 만나는가아니면다름으로 얽히어 사물의 뿌리에 이어지는가.

(...) 있음을 있음 되게 하는 있음의 뿌리는 있음과의 다름으로 얽힌다.


p82

0403 : 이해한다는 것은 뒤로 물러선다는 것이다.

 인상에 주어진 직접의 사태로부터 물러서는 것이다그래야 그러한 사태를 받쳐줄 가설에 이를 수 있다물러섬으로써 얻은 가설의 타당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그것은 발견되는 것이지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p85

0407 : 그 밖에 없는가?

 이 물음이 시원(始原)의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그것이 자기를 한정하는 자기 아닌 자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이다스스로 있는 무한자초월의 일자절대자(), ()는 자기 아닌 것을 향한 물음으로 만나는 개념이다이것들은 끝없이 밀려오는 타자에 부딪쳐서 떠오르는 상상의 대상이다.


p92

0473 : 왜 시원(始原)분석인가시원(始原)분석이 아닌가시원(始原)분석은 일어난 사태의 시작을 드러냄이다헤겔의 순수 있음은 하나의 시원(始原)일 수 있다왜 원시(原始)분석이 아닌가원시도 역사의 한 시점에 놓여 있는 사태이다그것은 이미 끝난 지난날의 사태이다시원(始原)분석은 시작에 놓여 있는 어떤 사태를 찾음이 아니다그것은 지난날에서처럼 지금도 되풀이되는 보편의 바탕을 찾는다.


p94

0476 : 시원(始原)분석은 버림으로써 마지막에 이르는 것이다. 버리지 않고 이를 수 있는 마지막은 끊임없이 맴도는 쳇바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다름으로 얽히는 길을 따라 다름이 끊기는 저편에 이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같음과 다름이 언제나 맴보든 쳇바퀴 속 시시각각의 잡다로부터 휴식하는 절대자를 만날 수 있는가.


p97

0493 : (...) 있음에서 있음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추론은 있을 수 없는가있음으로부터 있음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추론이 없다면 그것은 있음의 참 시원에 대한 망각이 아닌가.


p98

0494 : 현실의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으로다시 형상의 형상으로 올라가는 플라톤의 시원분석은 어떤 존재론을 일으키는가올라가 찾은 정상에 인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그 정상에 놓일 수 있는 어떤 것이 없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서의 규정을 끊임없이 피하여 사라질 뿐이다그것은 모든 존재로 하여금 그런 존재 되게 하는 것이다그러나 그것이 무엇인가아니다무엇이 아니다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사라져가는 것이다

 현실의 감각에다 순간에 지나지 않는 존재의 빛을 던지고 사라져가는 형상들형상들로부터 다시 사라져가는 형상의 형상사라져가는 것이야말로 세계에 펼쳐지는 모든 자의 뿌리될 만한 것이다존재하는 자는 모두 자기를 저버림으로써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존재하는 자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의 길은 자기 긍정자기와의 같음이 아니라 자기 배반자기와의 다름이다.


p103

0500 : 서양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동 아시아 사람의 반응체질동 아시아 사람의 대답은 그렇소인지 아니오인지 알 수 없는 때가 많다고 한다그의 대답은 흔히 그렇소그러나 아니오’ 혹은 그렇소그리고 아니오로 들린다고 한다두 문명에서 서로 다른 논리가 통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서양 사람들은 그들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철학적 이견(異見)에도 불구하고 다같이 이다나 아니다의 분명한 선택을 강요하는 무모순의 형식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무모순의 형식논리가 현실 생각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인 경험주의자실용주의자실존주의자 그리고 변증론가조차도 여전히 이다아니다’ 사이의 딱 부러지는 갈림을 피할 수 없게 하는 논리의 바탕을 버리지 않는다


 이다아니다의 또렷한 갈림은 논리적으로 어떤 짜임에 달려 있는가그러나신의 절대자유의 능력을 믿는 그리스도교 철학자나 해탈로 나아가는 도가(道家)나 선가(禪家)가 이다아니다의 분명한 선택에 메달릴 이유가 있는가이다아니다의 분명한 선택을 거부하는 자는 논리적으로 어떤 짜임에 달려 있는 것인가.


p107

0541 : 어떤 타자에게도 달려 있지 않은 자그리하여 어떤 타자의 한정도 받지 않고 오히려 한정하는 절대의 타자그런 것은 추리의 귀결이 될 수 없는가귀결은 반드시 전제로 한정받거나 매개되는 것인가. 귀결은 언제나 전제에 달려 있는 것인가전제에 달려 있지 않은 귀결은 얻을 수 없는가오히려 전제를 한정하는 자를 귀결로 이끄는 길이 있는가.


p109

0542 : (...) 순수 존재는 규정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도 있지 않음이나 규정될 수 없는 것으로 있음조차 될 수 없는 것을 향한 자기 한정이나 부정은 왜 일어나지 않는가순수 존재가 자기 한정이나 자기 부정을 함으로써 규정될 수 없는 것으로 있음조차도 아닌 어떤 다름으로 옮겨가지 않는가.


 그것은 아니다로써 가장 높은 (초월의자기 한정 혹은 자기 부정에 이르게 되는 행위이다. (...) 그것은 시원(始原)의 사태인 순수 존재 밖에 놓인 잉여의 타자로 옮겨 순수 존재 자체를 한정하는 것이다


이는 순수 존재라는 시원(始原)의 사태에 안으로 얽힘과 밖으로 얽힘이 짜는 두 갈래의 길이 함께 깃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p110

0543 : 반성과 부정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반성하는 자의 이성에 내재하는 것인가아니면반성하는 자의 이성 밖에 있는 것인가반성과 부정의 뿌리인 타자는 어디서 일어나는 것인가반성하는 자의 이성 자신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헤겔과 그를 따르는 변증론가들은 생각한다.

 

 반성과 부정의 매개자인 타자가 이성 초월적임을 말하는 철학자들의 역사는 아직도 미완성에 있다십사세기의 유명론자도 이십세기의 실증주의자나 실존주의자도 타자의 이성 초월을 논리화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성과 부정의 샘은 이성 내제와 이성 초월의 두 갈래로 펼쳐지는 타자의 길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p111

0544 : x 아닌 것은 x에 내적인가외적인가. x 아닌 것이 x에 내재함으로 얽히는가 혹은 x에서 초월함으로 얽히는가.

 x와 x아닌 것 사이의 얽힘 자체는 내적인 것도 외적인 것도 아니다그 얽힘이 내적인지 외적인지를 좌우하는 것은 순수 논리의 사태가 아니라 말과 관념의 습관이 만드는 개념의 질서이다.

 아니다로 얽히는 순수 논리의 사태로 말과 관념이 짓는 질서인가.


0545 : 아니다로 얽히는 시원(始原)의 사태에 모든 논리적인 추리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p112

0547 : 논리적인 추리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것은 이미 주어진 것에 따르는 어떤 것을 찾거나 풀어내는 일에 매달린다그 따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전건에 후건이 따라 이어짐에는 두가지의 길이 있다.


 그 길은 동의와 반대 혹은 이다와 아니다라는 두 가지 반응행위로서 나아간다. 하나는 이미 주어진 것에서 이탈하지 않는 이다로 이어지는 계열을 풀어내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이미 주어진 것에서 이탈하는 아니다로서 이어지는 계열을 찾아내는 길이다한쪽에는 내재와 동일성으로 수렴되는 계열로 흘러서 추리가 일고 다른 한쪽에는 끝없이 일어나는 잉여의 타자로 확산되는 계열로 나아가는 추리가 인다


p113

0548 : 다름은 사람에게 견딜 수 없는 불안을 가져온다. 다름은 알 수 없는 데로 가로 놓인 거리이다그 거리를 잇는 다리는 두 가지의 질문공법으로 가설되는 것이다저 편에 놓인 것은 이 편에 놓인 것과 같은 것인가다른 것인가.


0560 : 추리의 흐름은 무엇에 따르는가다만 공허한 개념의 그믈과 그 얽힘에 따르는가아니면존재의 흐름을 따라 추리가 일어나는가오히려추리를 따라 존재의 흐름이 드러나는가어떤 가능한 존재의 흐름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서 추리와 상상의 그물이 주어져 있지 않은가추리와 상상의 그물이 존재의 흐름을 만들지는 않더라도 존재인지 존재 아닌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어떤 것으로 하여금 가능한 존재의 흐름들로 가지쳐서 나가도록 길들이지 않는가.


p116 

0564 : 다른 명령은 같은 전제로 하여금 다른 귀결을 낳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명령받는 자가 백지의 사태가 아니라면 그것은 다만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백지의 사태가 아닌 전제라는 것에 대한 명령은 전체에 대한 물음이다따라서 같은 물음에 대하여 다른 전제는 다른 귀결로 응답하는 것이다.


0565 : 허위나 모순을 지닌 명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무엇을 끌어안는가그것은 어떤 의미도규정도 거부한다그것은 어떤 규정도 지니지 않는다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어떤 제한도 없다따라서 그것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어떤 것도 밀어내지 않는다그것은 어ᄄᅠᆫ 잉여도 놓아두지 않는다그의 끌어안는 둘레 가운데에 모든 명제그 자신의 부정이나 모순을 뜻하는 것까지도 들어 있다.


p118

0565 : 흄은 이어지지 않은 조각들로 주어진 인상들에서 인과의 얽힘이나 물체의 있음을 지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인과의 얽힘이나 물체의 있음이 조각들로 주어지는 인상들 밖의 잉여세계 x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p119

0566 : 어느 경우에나 pq라는 논리적인 얽힘은 후건이 전건의 안으로 얽히는 짜임으로ㅆ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에서 헤겔의 변증논리를 거쳐 오늘의 기호논리에 이르기까지 전건의 안으로 얽힘으로 후건이 매달리는 짜임을 추리의 방법으로 삼아 왔다.

->인도유러피안어군 주부-술부 종속관계. vs 한국 주부 생략 가능술부로써만 문장구성.


p125

0596 :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상상의 노력은 어디서 시작하는가상상이 일어날 때 그것은 어디를 향하는가.


그것은 확실한 사태를 떠나 확실치 않은 타자의 사태로 나아가는 행위이미 확정된 지평선 너머로 퍼져나가는 잉여추적의 행위잉여추적의 행위로써 확률귀납이나 음양대대(陰陽對待)의 논리적인 얽힘이 이루어진다.


p127

0598 : 전제에 어긋나거나 모순되는 결론을 만날 수 있는가?

베이컨은 실험이나 관찰에서 추론의 전제에 반대를 일으키는 사태를 찾는다전제로 하여금 자신의 안으로 얽히는 짜임 밖에서 자신의 반대를 만나도록 이끄는 것이다.

 헤겔은 전제의 안으로 얽히는 짜임 안에서 전제 자신의 모순을 만나도록 풀이를 한다전제를 시작으로 하여 그 전제 안으로 얽힘을 풀어가는 가운데서 모순이 드러나므로 그것을 결론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p128

0599 : 얽어짬의 논리를 초월성으로 푸는 자는 없는가. (...) 플라톤은 그 갈림길에 서 있던 철학자이다


p132

0630 : 왜 경험에 대한 추론이 연역의 규칙에 따를 수 없는가경험의 흐름은 어떤 연역적인 귀결에 대해서도 언제나 아니다라고 반대할 수 있으니까그러한 반대의 가능성에 대한 배려가 귀납논리에 들어 있는가.

 아니면귀납논리는 다만 경험 일반화의 규칙으로 여겨질 뿐인가. 이러한 귀납논리는 경험주의의 발상을 참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경험주의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모든 연역적인 귀결이나 일반화에 부딪칠 반역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p137

0636 : 경험에 필연이 있는가경험은 그의 확률로서 0이나 1을 빼놓은 사태이다경험은 확률 0과 사이에서 일어난다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어떤 확률이나 어떤 논리에 좌우되는가1/100의 확률을 가지는 사태와 99/100의 확률을 가지는 사태는 필연도 모순도 아닌 우연이라는 논리적으로 같은 지대에 놓여있다.


p139

0671 : 변증론가가 주장하듯이 부정성의 결여를 실증주의에 돌릴 수 있는가. (...) 실증주의에는 현실체제에 대한 부정의 자세가 없는가실증주의나 경험주의의 부정성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

 이성은 참 부정의 바탕이 되는가

 참 부정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객관에의 매개자인 참 부정의 능력은 어디에 있는가이성에 내재하는 것인가아니면이성의 테두리 밖의 말할 수 없는 어떤 자에 달려 있는가.


p140

0673 : 참으로 자기 밖의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자기를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어떻게 자기를 떠날 수 있는가어떻게 참으로 자기 아닌 타자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가공허한 관념과 개념 밖의 경험으로써인가자아반성의 이성으로써인가아니면아니다로써 시원(始原)의 사태를 거슬러올라가는 순수 논리의 얽힘으로써인가.


p142

0675 : 비트켄슈타인은 왜 아니다에 아니다를 더함으로 반드시 이다(긍정)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는가. 그는 왜 아니다라고 하는 낱말에게 논리학자나 상식인이 매기는 뜻을 거부하였는가그는 왜 하나의 말이 하나의 정해진 뜻이나 사태를 나타내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사람의 말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그는 왜 모순이라는 것을 어떤 말의 그물이 임시로 쫓아낼 수는 있어도 영원히는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보았는가그렇다면 말의 짜임은 참으로 있는 어떤 사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일 뿐이다


p144

0675 : 말의 짜임에 대하여 처음으로 해체를 선고한 철학자는 하이데거비트켄슈타인데리다인가개념의 논리적인 풀이로 만들어지는 관념론에 대하여 실험과 반증을 제창한 프래그머티스트 퍼스인가논리실증주의자 카르납인가혹은 포퍼인가개념의 사변과 본질을 배격한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인가헤겔의 관념변증법에 자연과 실천의 변증법으로 맞선 마르크스인가.


 그들은 모두 말의 믿음으로 이어져온 서양철학의 흐름에 해체를 선고한다그러나 말의 믿음에 해체를 처음 던져 역사의 길을 돌린 철학자는 누구인가해체를 말하는 데리다조차 하이데거나 니체나 헤겔로 시론하면서도 유명론자 오캄이나 경험주의자 흄을 말의 믿음에 해체를 일으킨 선구자로 잡지 않는 것은 서양철학의 흐름에서 모처럼 자각된 그의 해체의 바탕이 아직 보편에 이르지 않았음을 알린다.


p151

0700 : 철학자들은 모두 물러나 바라보려고 한다물러나 바라보며 왈가왈부를 한다뒤로 물러나 그 앞에 놓인 세계를 내려다보는 한 계단 높은 디딤돌이 언제나 있다.


 그러나참으로 있는가물러남으로 얻은 조망의 디딤돌을 철학자들은 참으로 있음이라 혹은 가장 높은 참이라 한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물러남으로 얻은 그것에 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실체니 형상이니 정신이니 물질이니 개체니 보편자니 무()니 허()니 혹은 그밖에 말할 수 없는 무엇이니 하는 참들이란 


 뒷걸음쳐 물러나며 밟는

 끝없는 연장선 위의

 점,

 점들이 아닌가.


p156

0733 : 사람들은 관찰대상을 믿는다그러나 경험주의자들조차도 관찰되는 것을 가지고 세계를 파악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관찰되는 것은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그것은 언제나 다른 것으로 바뀌어지는 숙명을 지닌다.


p160

0771 : Nothing is x

 라고 말할 때 Nothing은 다만 해당 주어가 없음을 말함인가이 명제는 술어 is x를 매길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가어째서 술어 is x를 매길 수 있는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겠는가.

 Nothing is unicorn.

 Nothing is self-creative.

 is unicornis self-creative라는 술어를 지니는 대상은 있을 수 없는가이것은 다만 논리적인 요구이며 실험적인 물음일 뿐이다이 물음은 허구에 대한 말놀이인가사람이 대상을 찾는 길이 아닌가.


p162

0772 : 지각에 주어진 사태의 뿌리는 그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든지 사물 자체라는 것이든지 스스로 있음이라는 것이든지 없음이라는 것이든지간에 모두 전제로서의 지각이 지닌 규정의 내제함축의 바깥에 놓인 것잉여로 얽히는 것을 귀결로 하는 것이다플라톤과 칸트와 하이데거와 老子가 말하는 서로 다른 존재론적 실재들은 잉여함축의 귀결로서 주어진 다만 순수 논리적인 사태에 상상으로 이름 붙인 대상에 지니지 않는 것이다.


0773 : 도대체 찾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놓여 있는 데서 어느 길로 들어서야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나아갈 길을 자유자재로 돌이킬 수 있는가자유자재로운 길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찾음의 길을 좌우하는가찾음을 향한 추리와 상상의 길은 어떻게 열리는가찾음의 대상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추리와 상상의 길에서 떠오르지 않겠는가.


p165

0775 : 의문의 사태는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일어나는 것도사람 자신의 추리나 상상 밖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그 사태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타자로부터 덮쳐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언제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의문의 사태로부터 추리와 상상이 흘러 논리가 짜이고 그 흐름이 가로 막히는 데서 대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일어난다.


p166

0777 : 가장 높은 형상도이념도 여전히 그의 밖으로 얽히는 잉여의 타자에 대하여 우연을 면치 못하는 가능의 사태일 뿐이다.


0779 : 참으로 있는 대상은 어떤 것이라거나 어디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사람은 어떤 것으로부터 밀려오는 여러 가지 암호를 만날 뿐이다의식이니 물체니 핵이니 존재니 니 하는 것은 실제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암호현상에 붙힌 여러 가지 이름이다.


p167

0790 : 한결같지 않음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보편의 대상에 귀의할 것인가보편의 횡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을 것인가. 자아실현의 목적과 대상이 있는가아니면자아와 대상은 풀어버려야 할 매듭인가. 빠져나갈 수 없는 선택의 굴레 속에서 얽혀 이어지는 존재의 매듭을 번갈아가면서 방황하는 사람들철학자정치가신앙가.


p171

0801 : 언제나 뜻밖의 재난이 닥칠 수도 있다고 하는 상상은 합리적인 생각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공포망상증 환자에 대한 한 정신과 의사의 견해다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망상증에 지나지 않는가뜻밖의 사태를 언제나 상상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인가. (...) 재난과 같은 타자로부터의 피할 수 없는 충격과 부정이것을 예상하는 것이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최대의 합리성이 아닌가.


p172

0802 : 생각이란 파도처럼 일며 깨지는 것.

 파도가 이는 방향으로 생각의 그물이 퍼져가고 파도가 일 때마다 깨져 다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방향도 알 수 없는 거친 풍랑을 만나면 산산이 찢겨진 그물에 얽힌 채로 바람과 바다가 지닌 무한한 자유와 힘을 상상해야 한다.


0820 : 파국은 왜 언제나 있는 것인가동일성이란 어떤 존재에게도 허락된 바탕이 아니기 때문이다.

p176

0826 : 어떤 철학자가 자기 아닌 것을 찾아헤매었던가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으로 시작된 자기 아닌 것을 찾아헤맨 서양 철학자들의 노력은 성공하였는가변증법과 경험주의의 역사는 자기 아닌 것과의 만남을 위한 어떤 전략인가.


 독재자의 최후의 몰락과정을 보라.

 그것은 그가 거부했던 자기 아닌 것과 이루는 파국적인 만남이 아닌가.


p176~177

0850 :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것들은 가능한 세계를 완전하게 갖추도록 만드는 마디들이다그 가능한 세계에서 어떤 반대나 모순의 마디를 쫓아낼 이유가 없다서로 반대 모순되는 것들은 시간 가운데서나 추리의 펼침에서 서로 얽히어 따르지 않겠는가

 겨울의 추위가 극에 이르면 머지않아 따뜻한 봄날이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겠는가. <주역(周易)>의 작자는 음과 양으로서헤겔은 과 으로서 끝없이 이어지는 우주적인 반복(反覆)의 완전한 얽힘을 그리지 않는가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며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웃게 될 것임이라말하지 않는가.


 지금 주어진 사태에 반대 모순되는 것을 귀결로 삼은 것은 어떠한 추리의 얽힘에 따름인가주어진 사태에서 건너뛰지 않고 한결같이 펼쳐지는 연장선 너머에 얽혀 있는 잉여의 사태에 대한 상상으로 귀결이 나오지 않겠는가이러한 귀결은 내재함축을 따르는 추리의 영역밖으로 나아가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참 파국의 사태에 대한 추리는 이미 주어진 마디 밖(잉여)으로 얽히는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다.


P181

0870 : 같음의 지평에서 깨달음이 이루어지는가깨달음이란 다름의 사다리를 딛으며 거슬러올라감이 아닌가.



P182

0872 : 끝없는 싸움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싸움에 참여하는 자가 각기 다른 바탕을 지니기 때문이다그 다른 바탕의 안으로 얽힘을 풀어가는 과정이 싸움이다바탕의 밖으로 얽힘을 풀어나가는 일은 싸움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P183 

0874 : 어떤 믿음이나 생각에 대해서도 그것을 거짓이라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그것은 각기 누구에겐가 닫혀 있는 문을 열어주는 열쇠와 같기 때문이다다만 그들이 이 세상에서 서로 거부하는 사이로 얽히는 데에 문제가 있다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 어떤 문으로도 자유로이 드나드는 믿음과 생각의 맛쇠라 할 만한 것이 없을까.


P183~184

0875 : 망치송곳까뀌집게나사틀이대패이 연장들이 지닌 하나의 쓰임을 물을 수 있을까모든 연장들의 쓰임을 한 가지로 묶을 수 있을까아니면모든 연장들을 대신하는 만능의 연장이 있을 수 없는가모든 자물쇠들을 열 수 있는 맛쇠처럼 어느 모로나 쓰임이 되는 만능의 연장은 어떤 모양일까.

 그것은 각각의 고유한 모양을 절제해버리고 각기의 모양을 파형시킨 그 어떤 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겠는가.


 카타스트로피 머신(catastrophe machine)을 만들 수 있을까어떤 파국의 충격도 흡수하므로 거듭 되는 해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서 그 구실을 다하는 반응체는 어떤 원리 위에 세워지는가그 카타스트로피 머신은 어떤 정체어떤 같음의 원리를 지닐 수 있는가.


P186

0879 : 사람이 경험하는 불합리불가해불확실불안재난은 타자로부터 불어와 부딪치는 바람소리사람을 향한 타자의 거부반응.

 

 


P189

0900 : 우주에 가득한 파도치는 소리는 끝내 사라지고야 말 사람의 야망과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경고.


0902 : 타자를 정복하거나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거나 그것은 일시적인 자유의 환상이다타자가 허용하지 않는 자유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P190 

0903 : 비관주의자도 낙관주의자도 아닌 자그가 일 수 있는 것은 현실주의자그러나 그는 현실에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안다현실이 없는 세계그것이 최상의 세계. 


P193

0935 : 눈을 감으면 죄어짜오는 듯한 세상이 물러가버린다그것이 거부의 가장 원시적인 실험이다


P199

0976 :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막상 신의 존재를 거부하기를 꺼린다왜 믿지도 않으면서 거부하지 못하나신은 왜 아직도 그들을 떠나지 않고 있나.


 사람에게 어떤 증거도 증명도 주어지지 않는데 여전히 원인으로 얽힘이니 스스로 있음이니 절대자니 말하거나 믿거나 하는 것은 사람의 쪽에서 끊을 수 없는 그러나 알 수 없는 어디에 얽히어 달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0977 : 갈림길에 서서 엉거주춤 머물러 있는 자의 모습이 있다진리는 초월과 내재의 갈림길에서관념과 실재의 갈림길에서구원과 해탈의 갈림길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진리의 신()은 싸우는 생각들 가운데서 어느 편에 들 것인가


P203

0990 : 한 가지 대상을 놓고 많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처럼 한 깨달음으로 이런저런 말을 하는 철학자는 언제나 다하지 못한 말 때문에 미완성에 머물러 있다다할 수 없는 말이 남기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p205

0992 :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은 이미 자기를 떠나는 것이다모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닌 다름으로서 세상에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이다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이 다름 아닌 자기이며 자기밖에 어떤 것도 아닌 자기로 있는 것이다.

 자기를 드러내지도 알리지도 않는 자는 누구인가다름으로 얽히어 드러나는 파노라마 뒤 암흑 속에 참으로 자기자신으로의 같음을 지킴이것이 절대의 모습이다모습을 지니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P213~214

1006 : 긴장과 결단으로 해서 다다르는 완전성을 바라볼 것인가아니면자유자재로운 해탈의 경지에 들 것인가.

 두 갈래의 정신이 찾아가는 정점(頂點)이 다른 이유는 그들이 각기 다른 논리적인 이상을 지니기 때문이다한쪽에서는 이다와 아니다의 갈림이 명백하기 때문에 긴장과 결단의 극치점을 피할 수 없고 다른 쪽에서는 이다와 아니다의 갈림이 애매하기 때문에 반논리(反論理)와 해탈(그러나 그것이 또하나의 논리가 아니겠는가?)의 영역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


 갈림을 명백하게 해서 펼쳐지는 엄밀한 폐쇄논리는 논쟁과 분규가 허용되는 결국의 개방사회를 낳고 갈림을 애매하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달관(達觀)의 개방논리는 용해와 화합을 달래는 결국의 폐쇄사회를 가져온다.


P215

1008 : (동양 사람들은 타자로써 끊김의 충격따로이 밀려난 세상에 익숙하다현대의 문명에 넋을 잃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영 뿌리 뽑히지 않는 원시의 습관이 웅크리고 있다연속성과 내재함축이라는 서양 사람들의 논리에 밀리면서 불연속과 개방의 논리로 넘어가야 하는 시대가 동양 사람들 앞에 놓여 있다.


P216~218

1040 : (열린 생각열린 논리로써 열린 체계열린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가.

()열린 생각열린 논리는 열린 체계열린 사회를 가져오는가동일성을 넘어 타자와의 모순으로 얽히어 열린 생각열린 논리에서는 참으로 초월하는 실재와 현실참 불연속의 사태에는 열려 있지 않다열린 생각열린 논리는 타자와의 파국적인 만남이나 자기 밖의 현실과의 만남을 밀어내는 닫힌 체계닫힌 사회를 거느린다.


 왜 인류구원을 향한 박애와 보편의 정신을 외치는 종교는 오히려 더 닫히거나 배타적일 수 있는가왜 동양 사람은 옛날부터 공()과 무(혹은 중용의 대도(大道)를 지니고 자유자재의 열린 생각과 논리를 펼치면서 전제정치와 획일주의의 더 오랜 흐름을 가지고 있는가.


P220

1060 : 인류공동체의 바탕은 흔들리고 있는가. 하나의 선택과 행위에 대하여 합의에 이를 수 있는 바탕이 흐려져가고 있는가하나의 장을 이루어사는 사람들을 잇는 같음의 끈이 없어져가는가언제나 다름으로서 세상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인 사람과 그의 영혼을 어떤 같음으로 바탕지어 편안히 자리잡게 할 수 있는가


P221

1061 : (참 보편과 객관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는가


 사람이아니 자아가 물러섬으로 다다르는 진리인 보편과 객관을 서양 사람에게서는 찾을 수가 없다아니이십세기의 모든 사람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


1062 : 계급과 소외를 없애서 약육강식의 갈등과 경쟁이 없는 사회 그리하여 각자가 지닌 희망과 능력을 자유로이 펼치는 세상이 될 것인가. 갈등과 경쟁이 사라지게 하려는 사회도경쟁의 자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도 하나의 같은 원리를 그 바탕에 지니지 않는가계급과 소외를 없애서 하나와 같음으로 다스리는 것이며 경쟁을 보편화함으로써 역시 하나와 같음을 향해 애쓰지 않을 수 없게 한다하나와 같음을 머리에 두지 않고는 경쟁의 체제가 지탱될 수도 없으며 경쟁이 사라진 평등의 사회를 바라볼 수도 없다.


 경쟁을 없애든지 경쟁을 붙이든지 사회는 아직 하나와 같음이라는 존재 논리적으로 무리한 바탕을 떠니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을 하나와 같음이라는 테두리에 두들겨넣을 수 있는가. 류는 하나의 생존권에 매어 있는 운명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기의 다름이 하나로 모여 흐르는 존재의 강과 바다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찾아 아직도 세계의 철학자와 정치가와 종교가는 해매지 않는가.


P222

1063 : 분쟁이 없는 시대가 되려면 사람마다 자기 동일성이라는 바탕을 내세울 만한 허구의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이 사라져야 한다그렇다면 비동일성의 바탕 위에 사람의 자아와 사회가 일어설 수 있는가

 그것이 후세기의 문명과 철학의 생각거리가 아닐까.


P228~229

1097 : 글이 있기 전의 원시문명을 거슬러올라가는 인류학자와 세련된 글의 해석을 바탕으로 현대과학을 쪼개보는 철학자는 어떤 생각을 같이하는가글이 있기 전과 그 다음의 인류는 어떤 짜임에 같이 있는가. 선사시대나 현대의 사람이 함께 피할 수 없는 굴레는 무엇인가.


 원시의 신앙인 샤머니즘과 현대과학을 같은 자리에아니 같은 마음 안에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수천년의 바뀐 흐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그것들은 사람이 변함 없이 찾을 수밖에 없는 무엇을 함께 지니는가.

  

1098 : 동양 사람이 서양의 과학을 처음 만났을 때 무엇을 깨달았는가그것은 좋은 것과 함께 나쁜 것도자연과 함께 초()자연의 기적도 모두 원인과 결과이유와 귀결로 짜인 질서의 부분이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동양의 마음으로 돌아왔을 때 무엇을 찾았는가. 이유 있는 것과 함께 이유 없는 것도인과로 엮어진 이승과 함께 인과를 풀어버리는 저승도 모두 알 수 없는 우주의 조화(造化)라는 깨달음.


08. 파국의 논리

 

p145~6

 

0822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은 두 개의 다른 창을 번갈아 던진다. ‘이다’(긍정)아니다’(부정)라고 하는 두 개의 창.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낸 경험의 논리인 귀납법을 보라. 그것은 이다의 사례를 모아서 일반 법칙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가. ‘아니다의 사례는 그러한 일반화에 걸리적거리는 것을 떼어버리는 일을 한다. 과연, 경험의 신이 부정의 사례로부터 면제된 긍정의 일반 법칙을 찾는 사람에게 마지막 승리를 주기 위하여 귀납법의 절차를 따라 한결같이 창을 던질 것인가.

 

그가 다음 순간에 던지는 창은 이다일까 아니다일까. 경험의 신에게 사람이 명령할 수 있는가. ‘이다의 창을 던지라고.

 

0823

 

현실은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는가. 현실은 어떤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것인가.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원하였기 때문에 부모를 떠나게 되었던가. 능터로 소풍을 간 학교 아동이 사격장에서 날아온 유탄에 맞아 숨지는 것은 누구의 계획에 따른 것인가. 불시에 일어난 전쟁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입대한 청년이 설계할 수 있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각자가 바라보고 뜻하는 것 밖으로부터 밀려오는 운명의 부름은 어떤 질서나 계획에 따르는 것인가.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파국과 미결의 사태, 부조리와 무의미를 밀어내버릴 수 있는가.

 

p154

0890

 

산에 올라가 풀과 나무들의 무성한 자람을 보거나 바다에 나가 우레 같은 파도의 부서지는 소리를 듣거나.

줄기찬 생명의 일어남이며 바쁜 생명의 사라짐이다. 생명은 거부하는 힘으로 태어나 거부에 둘러싸여 잠든다. 존재 아닌 자의 힘으로 나타나고 존재 아닌 자의 힘이 거두어간다.

 

09. 해탈의 논리

p157

0900

 

우주에 가득한 파도치는 소리는 끝내 사라지고야 말 사람의 야망과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경고.

 

0901

 

달려 있음흔들림으로 얽히는 존재의 자리를 뜰 수 없는 자에게 허락된 믿음은 어떤 것인가.

 

0902

 

타자를 정복하거나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거나 그것은 일시적인 자유의 환상이다. 타자가 허용하지 않는 자유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p160

0935

 

눈을 감으면 죄어짜오는 듯한 세상이 물러가버린다. 그것이 거부의 가장 원시적인 실험이다.

 

0936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다시 찾고 싶어 추억으로 간직하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은 짐승의 부자유를 지고 태어나 완전 자유를 얻으려고 일생을 바친다.

완전 거부를 조건으로 완전 자유를 얻는 것이 사람이다. 신은 사람에게 자유를 가르치려고 가장 고통스러운 거부의 연습을 어릴 때에 시킨다.

 

p169

0992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은 이미 자기를 떠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닌 다름으로서 세상에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이 다름 아닌 자기이며 자기밖에 어떤 것도 아닌 자기로 있는 것이다.

자기를 드러내지도 알리지도 않는 자는 누구인가. 다름으로 얽히어 드러나는 파노라마 뒤 암흑 속에 참으로 자기 자신으로의 같음을 지킴, 이것이 절대의 모습이다. 모습을 지니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10. 철학적 문명론

p175~6

1003

 

서양 사람의 생각은 사태의 실상을 그 변화의 극단에서 파악한다. 그는 극단의 실험과 모험에서 파국과 모순에 부딪친다. 그는 극단에서 일어나는 파국과 모순에 도전한다. 그것을 밀어내기 위하여, 그는 연역논리와 변증법으로, 확률과 귀납논리로 파국과 모순 제거의 절차를 찾는다. 그가 추구하는 합리성은 파국과 모순의 제거행위에 있다.

동양 사람의 생각은 극단의 모험을 즐기지 않는다. 사태는 언제나 극단에서 극단으로 반환운동을 하는 것. 어느 극단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에 자리함이 가장 합리적인 것이다. 파국과 모순은 거부할 수 없는 사태의 숙명. 음양의 대대(對待)나 도()의 반복(反覆)에서 파국과 모순은 일상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관리자가 될 수 있을 뿐. 그가 추구하는 최대의 합리성은 파국과 모순의 원만한 수락행위에 있다.

 

1004

 

서양 사람의 논리는 애매함을 밀어내는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논리는 이론의 정신을 나타낸다. 이론은 말의 그물 안에서 펼쳐진다. 그의 논리는 말의 그물을 따라 이어지는 내재함축으로 얽히는 것이다.

동양 사람의 논리는 애매함을 받아들이는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논리는 실제의 정신을 나타낸다. 실제의 사태는 말의 그물 밖에 걸쳐 있다. 그의 논리는 잉여포섭으로 얽혀짜인다.

 

1006

 

긴장과 결단으로 해서 다다르는 완전성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자유자재로운 해탈의 경지에 들 것인가.

두 갈래의 정신이 찾아가는 정점(頂點)이 다른 이유는 그들이 각기 다른 논리적인 이상을 지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이다아니다의 갈림이 명백하기 때문에 긴장과 결단의 극치점을 피할 수 없고 다른 쪽에서는 이다아니다의 갈림이 애매하기 때문에 반논리(反論理)와 해탈(그러나 그것이 또 하나의 논리가 아니겠는가?)의 영역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

 

갈림을 명백하게 해서 펼쳐지는 엄밀한 폐쇄논리는 논쟁과 분규가 허용되는 결국의 개방사회를 낳고 갈림을 애매하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달관(達觀)의 개방논리는 용해와 화합을 달래는 결국의 폐쇄사회를 가져온다.

 

p177

1007

 

현악기를 연주하는 서양의 음악가를 볼 때마다, 옛날 도승(道僧)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 가운데서 맞서는 두 갈래의 정신. 긴장의 갈림과 자유자재. 실현과 해방.

 

p183

1063

 

분쟁이 없는 시대가 되려면 사람마다 자기 동일성이라는 바탕을 내세울 만한 허구의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이 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비동일성의 바탕 위에 사람의 자아와 사회가 일어설 수 있는가.

그것이 후세기의 문명과 철학의 생각거리가 아닐까.

 

p184

1090

 

갈등과 모순으로 얽힌 당면의 현실에 대한 관심이 순수 논리의 연구로 바꿔질 수 있는가.

현실의 문제는 논리의 문제인가.

현실의 복잡한 과제들이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사변적인 철학자들의 논리문제, 그 가운데서도 같음과 다름 혹은 이다’, ‘아니다의 논리문제로 돌아가버리는가. 동서사상의 갈등과 비교문명(比較文明)의 난관이 어떻게 이다’, ‘아니다의 문제로 낙착되는가.

그러한 순수 논리의 문제는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좌우하는 운명의 법칙에 대한 원시적인 의문과 두려움 때문에 오래전에 일어났던 필연과 자유에 대한 터무니없는 상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가. 누구든지 수없이 거듭해서 자신을 뒤집었던 모색의 우여곡절을 넘으면서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흔들린 불확실한 밤길을 돌이켜볼 수 있다.

 

p188

1098

 

동양사람이 서양의 과학을 처음 만났을 때 무엇을 깨달았는가. 그것은 좋은 것과 함께 나쁜 것도, 자연과 함께 초()자연의 기적도 모두 원인과 결과, 이유와 귀결로 짜인 질서의 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동양의 마음으로 돌아왔을 때 무엇을 찾았는가. 이유 있는 것과 함께 이유 없는 것도, 인과로 엮여진 이승과 함께 인과를 풀어버리는 저승도 모두 알 수 없는 우주의 조화(造化)라는 깨달음.

 

풀이말

 

서양의 바람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p191~2

 

논리와 현실은 서로 마주보는 극단이다. 논리의 극에 서서 보는 사람에게 논리에 앞서는 현실이 있는가. 논리에 달리지 않고 다가오는 현실이 없다. 그렇다면 논리 자체는 무엇에 달려 있는가. 논리의 흐름을 좌우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 흐름을 펼치는 자가 있지 않겟는가. 그것이 자아든가, 스스로 움직이는 자든가, 스스로 있는 자든가.

 

현실의 극에 서서 보는 사람에게 현실에 앞서는 논리가 있는가. 현실에 달리지 않고 펼쳐지는 논리가 없다. 그렇다면 현실 자체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다만 다가올 뿐이다. 어디로 다가오는가. 어디로도 아니다. 그 어디든지 비어 있는 자리일 뿐이다. 다만 자리일 뿐인 마음이든가 허()이든가 공()이든가.

 

사회현실이나 인생의 현실이나 헤어날 수 없는 혼란에 빠질 때면 그 바탕에는 결국 논리적으로 부딪친 혼란이 있다. 그것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여지가 있다면 논리란 무엇이냐?’라고 다시 물어 논리학의 마당 자체를 바꾸거나 넓혀야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현실의 흐름이 크게 바뀔 때마다 그 바탕에 걸린 논리의 반성이 일어왔다. 근래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데카르트, 헤겔이나 포퍼가 그러한 반성을 꾀했던 사람들이다. 동양 사람은 지금 서양으로부터 밀려오는 대세(大勢)에 부딪쳐 일어나는 소용돌이를 휘어잡아 나아갈 길을 찾는다. 그것은 왜 논리의 문제인가. 그것은 왜 서양 사람이 부딪쳤던 어느 시대의 혼란보다 복합적이며 그의 어떤 해결보다 단순할 수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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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환 교수가 그의 인생 말미에, 박사 학위를 마친 후 자신의 철학의 개론과 같이 써내려간 글을 다시금 퇴고해 냈다. 글은 위와 같이 끝난다. 그러나 맨 마지막 문장, ‘그 어떤 해결보다 단순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말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직접 여쭤보고 싶지만, 그럴 기회도 없거니와 설령 그런 기회가 있다 손 치더라도, 아마 미소지으며 침묵하시지 않을까. 박동환 선생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그 자신만의 철학의 신호탄을 쏘아올렸으니, 이제 그 해답은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