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Posted by 히키신
2017. 3. 7. 00:48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그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다른사람이 뭐라 하든 신경쓰지말고 그대의 길을 가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말테의 수기

Posted by 히키신
2017. 3. 5. 19:15 글쓰기와 관련하여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말테의 수기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P11

중요한 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는 것이 중요하다.

 

p12~3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보이는 모든 것이 내 마음속 깊이 가라앉는다. 그것은 여느 때와는 달리 일정한 깊이에서 멈추지 않고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간다. 나에게는 내가 모르는 내면이 있다. 모든 것이 지금 그곳으로 흘러들어간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전혀 모른다. ...

이제 앞으로는 편지도 쓰지 않겠다.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을 남에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다른 사람이 되고 나면 나는 이미 옛날의 내가 아니다. 옛날의 나하고는 다르다. 나는 이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미지의 사람들,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편지를 쓸 수 있겠는가.

 

p14

불상한 사람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는 그들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실이 툭 끊어지듯 생각이 그대로 중단되어 버릴 수 있으니.

 

p20~1

해산할 날이 가까워진 여인이 가만히 서 있는 모습에는 얼마나 슬픈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지. 자신도 모르게 가녀린 두 손을 살짝 올려놓은 그 부푼 배 속에는 두 개의 열매가 들어 있으니, 하나는 아기이고 또 하나는 '죽음'이다. 그녀의 정결한 얼굴에 함초롬한 미소가 짙게 번지는 것은, 이따금 그 두 개의 열매가 자라고 있음을 느끼는 희미한 안도 때문이 아닐까? ...

그러나 나는 지금 외톨이이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트렁크 하나와 책을 담은 상자 하나만 들고 아무런 호기심도 없이 세상을 떠돌 뿐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삶이란 말인가. 집도 없고, 물려받은 물건도 없고, 개도 없다. 그저 추억만이 얼마간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무슨 추억이란 말인가? 아직 유년기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이에게 추억은 땅속에 묻혀 있는 것과 같다. 추억을 되살리려면 사람은 먼저 나이를 먹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이 먹는 것이 좋다. 

 

***p22~4

나는 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무언가 나 자신의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는 스물여덟 살이다. 그런데 스물여덟 살이 되도록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다. ... 어린 나이에 쓴 시는 대단치가 못하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일생을 걸고, 되도록이면 70년이나 80년쯤 걸려서 벌꿀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야 한다. 그래야 겨우 마지막에 가서야 가까스로 열 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 시는 사실 경험이다. 한 줄의 시를 위해 많은 도시와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 한다. 수많은 짐승과 새를 알아야 한다.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갯짓을 느끼고, 아침에 피어나는 조그만 풀꽃의 고개 숙인 수줍은 몸짓을 알아야 한다. 미지의 나라로 가는 길과 예기치 않았던 만남,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보이는 이별,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 자식에게 기쁨을 주려고 했건만, 자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모진 상처를 주고 만 부모(다른 아이 같았으면 틀림없이 뛸 듯이 기뻐했겠지만). 여러모로 깊고 중대한 변화와 함께 야릇한 발작으로 시작되는 소년시절의 병, 조용하고 적막한 방에서 보낸 나날, 바닷가의 아침, 바다 그 자체의 모습, 그곳의 바다와 이곳의 바다, 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과 함께 덧없이 사라진 여행지의 밤들. 시인은 그런 것들을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그저 그 모든 것을 떠올리는 것뿐이라면 실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하룻밤 하룻밤이 전날 밤과 조금도 닮지 않은 숱한 사랑의 밤들과 산고(産苦)의 외침. 하얀 옷 속에서 깊이 잠든 채 오로지 육체의 회복을 기다리는 산모. 시인은 그런 것들을 추억으로 지녀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머리맡을 지켜보아야 하고, 열어둔 창문이 바람에 덜컹거리는 방에서 죽은 이 곁을 지키며 밤을 보내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추억을 지니는 것만으로는 또한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추억이 많이 쌓인 다음에는 그것을 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추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추억이 우리의 피가 되고, 눈이 되고, 표정이 되고, 이름도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더 이상 우리 자신과 구별할 수 없게 되어야 비로소, 그 추억의 한복판, 추억의 그늘에서 불현듯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최초의 말이 떠오르는 것이다. ...

나는 모든 인생 속에, 그리고 모든 문학 속에 있는 이 제삼자, 그러나 사실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이 제삼자라는 '환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그것은 언제나, 가장 깊은 비밀로부터 인간의 눈길을 돌리기 위해 심술궂게 왜곡하는 자연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 틈에 섞여서 살아가는 것은 그 제삼자가 아니라, 다만 이 두사람이다. 이들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들에 대한 작품은 단 한 편도 쓰이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고뇌하고 행동하며 서로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모른다.

 

***p24

사람들이 지금까지 정말 진실한 것,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능할까? ...

그래,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수많은 발명과 진보가 있었음에도, 문화와 종교 그리고 성현의 지혜가 있었음에도, 인간이 다만 삶의 표면에만 머물러 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 그래,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의 모든 역사가 잘못 이해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떤 죽어가는 낯선 사람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죽어가는 사람에 대해 말하지 않고 모여든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역사는 항상 군중에 대해서만 말해 왔기 때문에 과거는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 그런 어리석은 일이 있을 수도 있다.  

태어나기 전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서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존재가 지나간 모든 과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또한 이를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의 이런저런 견해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모든 사람이 있지도 않은 과거를 확실하게 안다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오히려 모든 현실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그의 현실생활은 무엇과도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빈 방의 시계처럼 그저 지나가 버리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래,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살면서 어린 소녀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가능할까? '여자들' '아이들' '소년들' 같은 단어를 말하면서, 평생 단 한 번도 (그의 교양 수준과는 관계없이) 이 단어들이 복수가 아니라 다만 셀 수 없이 많은 단수들을 뜻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래, 그럴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말하는 '신'이 세상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

그래, 그럴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아니,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 이런 불안한 생각을 해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늘 놓쳐버리는 일을 되잡아 시작해야 한다. 설령 그가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p30

할아버지에겐 시간의 흐름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겐 죽음도 아주 하찮은 우연일 뿐이었고, 그것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했다. 한번 그의 기억 속에 머문 사람은 그대로 계속 실재하는 것 같았다. ... 사람들은 그가 자기 편리할 대로 미래를 마치 현재인 것처럼 여겼다고 얘기했다.

 

p34

열람실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조금도 그런 기척을 느낄 수가 없다. 모두들 책 속에 파묻혀 있다. 그들은 이따금 책갈피 속에서 움직이곤 하는데 이것은 마치 사람이 잠을 자며 두 개의 꿈 사이에서 몸을 뒤척이는 것과 같다. 책 읽는 사람들 틈에 있으면 마음이 즐겁다. 어째서 인간은 늘 지금과 같을 수가 없는 것일까?

 

p35~6

진정한 시인은 3백 명이 채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이란 참으로 신비롭다. 나는 이곳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 가운데 아마 가장 가난하리라. 게다가 외국에서 왔다. 그런 내가 한 시인을 품고 있다! 나는 가난하다. 날마다 입고 다니는 옷은 이미 해지기 시작했고 신고 다니는 신발도 구멍이 났다. ... 이대로 어딘가 큰길가의 찻집에 들어가서 당당하게 과자가 담긴 커다란 접시에 손을 뻗는다 한들 어떠하랴. 나를 가로막거나 욕하면서 내쫓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하지만 내겐 수염을 다듬지 않을 권리조차 없다는 건가? 바쁜 사람들은 대개 수염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다고 해서 그를 부랑자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확실히 부랑자는 부랑자다운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거지와는 다르다. 이 둘은 뚜렷이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인생의 떨거지, 운명의 신이 씹다 뱉어버린 열매 껍질과 같은 존재이다.

 

p37

그리하여 나는 책 사이에 안전하게 숨는다. 아예 죽은 살마처럼 바깥 세상에 등을 돌린 채.

 

**p38~9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의 고요한 방 안에서, 한결같이 자리를 지켜온 고요한 가구들에 둘러싸여, 창밖 초록빛 뜰에서 들려오는 박새의 지저귐에 귀 기울이며, 한가로이 먼 곳의 마을 시계탑을 바라보는 새애활은 얼마나 복된가! 가만히 앉아 벽에 비치는 따뜻한 오후 햇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 과거의 소녀들에 대한 온갖 추억을 간직한 채 그렇게 한 사람의 시인이 된다는 것. 이 세상 어딘가에 나만의 집이 있었다면, 나 또한 그런 시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흔히 볼 수 있는 수수하고 소박한 시골집. 그런 집의 방 한 켠이면 충분하리라(다만 햇빛이 잘 들어오는 지붕 밑 방이면 좋겠다). 방 안엔 나의 오래된 물건들, 가족사진과 책, 팔걸이의자 하나와 꽃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동무가 되어줄 개 몇 마리와 자갈길을 걸을 때 쓸 튼튼한 지팡이 하나. 그 밖에 무엇이 더 필요하랴. 그래, 공책, 노란빛이 은은히 도는 상아색 가죽으로 장정된, 옛날 꽃무늬 면지가 들어간 공책이 한 권 있으면 좋겠다. 나는 거기다 글을 쓸 것이다. 내가 가진 온갖 생각과 기억을 다 적으려면 아주 긴 글이 될 테지.

 그러나 현실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내 오래된 가구들은 따로 둘 데가 없어 헛간에서 썩고 있다. 그렇다, 나로 말하자면, 몸을 가릴 지붕 하나 없다. 빗물이 사정없이 내 눈에 스며든다.

 나는 센 강변 거리의 작은 가게 앞을 자주 지나간다. 골동품, 헌책, 동판화 등을 파는 가게들이 진열장 가득 물걸들을 늘어놓고 있다. 아무도 들어가는 사람이 없다. 얼핏 봐서는 장사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무심한 얼굴로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내일에 대한 걱정도 없고 성공해 보겠다고 안달하는 마음도 없다. 그들 발치엔 개 한 마리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누워 있다. 아니면 고양이가 책 선반을 따라 마치 책등의 글자를 지우려는 것처럼 옆구리를 비비며 걷는다. 그런 고양이의 존재는 가게 안의 고요를 더욱 깊게 만든다.

 그런 생활도 있다. 나는 그 가게를 통째로 사고 싶다. 개를 한 마리 데리고 그런 가게에서 20년쯤 살아보고 싶다. 문득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나는 크게 소리 내어 말해 본다. "아무 일도 아냐."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한 번 더. "아무 일도 아냐." 효과가 있나?

 

P41

나는 단번에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적막하고 메마른 경치는 대번에 내 마음 속에 뛰어들어왔다. 그것은 차라리 오롯한 내 마음의 내적인 풍경일지도 몰랐다.

 그런 곳을 걸어오면 몹시 피곤해졋다.

 

*P44~6

그렇다, 그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등을 돌리려 하는 자기 자신을 의식했다. ...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싸우고 있다. 내 가슴은 이미 찢겨나가 저 너머 허공에 매달려 있을지라도, 나는 아직 굴복하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나는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다. 그걸 잘 알면서도 나는 저항을 멈출 수 없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내가 그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에서도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져 세상과 분리되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 만약 내 공포가 그렇게 크지 않다면, 모든 걸 다르게 바라봄으로써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내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두렵다.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변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섭다. 내겐 현실세계가 낯설다. 너무나 낯설다. 아름다워 보이는 이 세계조차도 말이다. 이런 내가 또 다른 낯선 세계에 적응할 수 있을까? 나는 친숙한 세계에 남고 싶다. 바뀐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면, 하다못해 개들의 세상에서라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개들의 세상이라면 어느 정도는 우리의 세상과 비슷할 테니까.

 아직은 내가 그 모든 것에 대해 쓰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언젠가 내 손이 내게서 멀어질 그날이 오면,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말을 쓰게 될 것이다. 나의 생각이 전혀 다른 의미로 옮겨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 하지만 이런 두려움에도, 나는 내가 어떤 위대한 존재 앞에 선 인간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 그러나 이제 써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인상을 글로 옮겨야 한다. 그 글을 내가 이해하고 또 받아들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단 한 걸음만 더 내디딜 수 있다면, 나의 이 절망적인 고통은 곧 축복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없다. 바닥에 쓰러진 나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다. 나는 이미 산산조각 나버린 파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도움을 받을 날이 올 거라 믿어왔다. 지금 내 앞에는 그동안 매일 밤 기도하면서 이런저런 책들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손수 베껴 적어 둔 공책이 있다. 내 손으로 직접 써두면 마치 그것들이 나 자신의 말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는 그것들을 다시 한 번 써보려고 한다. 이편이 눈으로 읽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런 만큼 한 단어 한 단어가 좀 더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불만스럽지만, 이렇게 한밤의 고독과 적막 속에 혼자 있으면, 나는 기운을 되찾아 조금이나마 자긍심을 되살리고 싶어진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영혼이여, 내가 찬미한 사람들의 영혼이여. 내 마음이 강해지도록 도와주오, 내게 힘을 주오, 이 세상의 모든 거짓과 더러운 악취로부터 나를 멀리 떼어 놓아주오. 그리고 그대, 나의 주, 나의 하느님이시여! 저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제 손으로 아름다운 시 몇 줄을 쓸 수 있게 해주소서. 적어도 제가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형편없는 인간이 아님을, 제가 경멸하는 사람들보다 못하지 않은 인간임을 저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는 몇 줄의 아름다운 시를 쓰게 해주소서(보들레르의 시 <밤의 한때에>에서 인용)".

 

P46

의사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설명하기 매우 어려웠다.

 

***P49

운명이란 참으로 기묘한 행로를 더듬어가는 법이다. 

 

P50~2

어린 시절 열병에 걸려 누워 있을 때, 나에게 처음으로 바닥 모를 깊은 공포를 가르쳐 주었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터무니없이 큰 어떤 것. 사람들이 내 침대에 둘러서서 맥을 짚어보며 무엇이 그렇게 무서우냐고 물으면 나는 그때마다 '그 커다란 것'이 무섭다고 말했다. 이윽고 의사가 불려와, 내 머리맡에 와서 뭔가 말을 걸면 나는 "'그 커다란 것'을 쫓아내 주세요, 그것이 무서워요"말하곤 했다. 그러나 의사도 소용없었다. 그것을 쫓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직 어린아이였고, 어린아이를 달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끝내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느 도시에 와 있는 건지, 어디에 내가 잘 집이 있는지, 이렇게 무작정 걸어다니는 것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의 기이한 병이 재발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병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다. 그들이 다른 온갖 질병을 이상하게 과장하고 싶어 하는 것과 신기하게도 대조적이다. 이 병에는 특별한 고유증상이 없다. 병에 걸린 사람의 성질에 따라 증상도 다르게 나타난다. 그것은 이미 먼 옛날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내면의 깊은 두려움을, 마치 최면술사처럼 확실하게 끄집어내어 그 사람의 바로 눈앞에 들이댄다. 이를테면 학창시절에 못된 짓을 저질렀던 사람이 과거와 똑같이, 꼬마 아이의 서툴고 거친 손에나 어울릴 법한 그 뿌그러운 짓을 어느 순간 다시 저지르려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또는 예전에 극복했다 여겼던 질병이나 버릇이 도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 있었던 고개를 돌릴 때의 특이한 버릇 같은 것이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옛날의 것들과 함께, 한번 바다 속에 빠진 물건에는 젖은 해초가 뒤엉켜 따라오듯이, 반드시 애매하게 뒤엉킨 기억의 찌꺼기가 딸려나오는 법이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생활의 단편이 심연에서 솟아올라 실제 과거의 일들과 뒤섞인다. 그리하여 그것이 이제까지 확실하다고 믿었던 과거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머릿속에 처음 떠오르는 풍경은 푹 쉬고 난 뒤의 정신처럼 새로운 힘으로 넘치는 반면, 평소에 익숙했떤 과거는 너무 자주 떠올린 까딹에 지쳐 버렸기 때문이다.

 

P53

나는 어린 시절을 갈구했고, 이제 그것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힘겹게 느껴졌다. 이만큼 나이가 들었음에도 달라진 건 없다.

 

P58~9

때로는 아무리 끔찍한 것이었다 해도 그동안 현실이라 믿어왔떤 모든 것을 내가 이토록 쉽게 포기해 버렸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답니다.

 아, 내 현실의 일부분만이라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런 현실이 과연 존재할까요? 아니, 그럴 순 없습니다. 자기만의 고유한 존재가치를 희생하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바람일 것입니다.

 

P59

빈 공간을 더욱 공허하게 만드는 빛을 경계하라.

 

P60

어머니. ... 아이에게로 서둘러 가기 위해서는 그 어떤 장애라도 뛰어넘을 듯이, 등 뒤로는 영원한 사랑의 비행의 궤적을 그리며.

 

P63~4

명성은 아직 형성되고 있는 인간을 공공연하게 파괴합니다. ...

젊은 영혼이여,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당신의 내면에 차오르는, 당신을 전율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모른다는 사실에는 장점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을 평가절하하는 누군가가 당신을 반대한다면, 또는 당신과 교제하는 누군가가 당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당신의 사상을 문제 삼아 당신을 매장시키려 든다면ㅡ이런 눈에 보이는 위협은 당신을 내적으로 강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뒤에 찾아올 명성이라는 음험한 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명성은 당신을 온 세상에 흩뿌려 놓음으로써 당신을 무미건조한 대상으로 바꿔놓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당신에 대해 말해달라 하지 마십시오. 찬사가 아닌 혹평을 바라는 것조차도 안 됩니다. ... 당신 이름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고 그 이름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름을 택하십시오. 그 이름으로, 한밤에 신이 당신을 부를 수 있도록. 그 이름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고이 간직하십시오.

 

P65

의지의 무게 감소에 따른 미묘한 낙차, 한 방울의 갈망 속에 깃든 우울의 크기....이 모든 것이 당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온 삶, 우리 내면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삶, 우리 내면으로 너무나 깊숙이 파고들어가서 더 이상 우리가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멀어진 과거의 삶은 바로 이러한 미세한 변화들 속에서 재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66

그토록 완고했던 당신이 인생의 막바지에 카페 창가를 떠나려 하지 않았던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작업을 시작할 때가 되면 지금의 고나찰을 써먹을 때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P67~8

그러나 잉게보르크 이야기를 할 때면 어머니는 완전히 기운이 되살아났다. 목소리도 훨씬 커졌고 잉게보르크의 웃음을 떠올리며 웃기도 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잉게보르크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저절로 눈앞에 떠올랐다. "그 애는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해주었어."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까지도 무척 행복해하셨단다. 그런데 그 애가 약간 아픈 것 같았는데, 의사가 곧 죽을 거라는 진단을 내렸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숨겨 버렸던 거야. 어느 날 그 애는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자기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하면 어떻게 들리는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혼잣말로 이렇게 말하더구나. '그렇게 조심하실 필요 없어요. 모두 다 아는 사실인데요. 걱정 마세요. 이렇게 돼서 좋아요.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그 모습을 상상해 보렴. 그 애는 이렇게 말했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우리 모두의 기쁨이었던 그 애가... 말테야, 네가 커서 어른이 되면 이해할 수 있을까? 나중에 더 크면 돌이켜 보렴, 그러면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다가올지도 모르지. 그런 일을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참 좋겠다." ...

***아무튼 시작이 없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것만 확실하게 파악한다면 이미 반도 넘게 알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니? 오, 말테야, 우린 모두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어. 다들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있거나 일에 쫓겨서 제대로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는 거야. 그래서 별똥별이 떨어져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소원을 빌지도 않지. 하지만 말테야, 너는 마음에 소원을 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원빌기를 포기하면 안 돼. 소원이라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진정한 소원은 평생을 가기도 한단다. 평생을 품어도 충분치 않을 그런 소원이 있는 거야."

 

P69

"읽어도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말테야,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얘기뿐이야." 어머니는 세상 모든 일들이 죄다 난해하고 복잡한 것뿐이라며 혼자 단정하고 있었다. "우리 인생에 인생 초보자를 위한 학교 같은 건 없어. 세상은 우리에게 늘 다짜고짜 가장 어려운 것만 내밀거든."

 

***P73~4

...하지만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을 표현하는 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 같은 어린아이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갑자기 나는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금방이라도 그런 말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 같았고, 그래서 그 말을 해야 한다면 그보다 무서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조금 전 책상 밑에서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내 식대로 재구성하여 이야기해야 한다니, 더욱이 그것을 내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니. 맙소사, 내겐 도저히 그럴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

그때 나는 인생이란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정해진 일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들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것임을 막연히 예감했다. 조금씩 어떤 서글프고 무거운 자긍심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어린 나는 내면에 비밀을 가득 품은 채 침묵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인간을 상상했다. 그러자 불현듯 어른들에게 크나큰 연민을 느꼈다.

 

P75~6

병에 걸려 누워 있는 오후는 한없이 길고 지루하다. ... 나중에 다시 기력이 돌아오면 높이 올린 배게에 몸을 기대앉아,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기울어진 침실용 탁자 위에서 장난감 병정은 쉽게 쓰러지고, 병정 하나가 쓰러지면 일렬로 선 나머지들도 차례대로 쓰러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시 처음부터 같은 일을 되풀이하기에는 아직 힘이 모자라고, 그러면 갑자기 그런 장난감까지 싫증이 나서 금방 저쪽으로 치워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저 얌전하게 앉아 아무것도 없는 이불 위에 다시 두 손을 올려놓고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

 "그때의 소피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구나." 어머니는 함께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 말에 말테인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소피는 죽은 것으로 치자고 말하면 나는 끝까지 반대하면서, 확실히 죽었다는 소식이 없는 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P77

그때를 돌아보면, 어렸을 때의 내가 그 열병에 들뜬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서로를 이해하고 감정을 공유하기 바라는 친밀한 공동체의 세계로 어떻게 다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새삼 놀라울 때가 있다. ... 이해를 하고 나면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 하지만 혼자 놀다 보면, 내 경우가 늘 그랬는데, 이 모든 악의 없는 세상을 넘어서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들어설 때도 있었다.

 

P81~2

나는 마침내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 나는 무릎을 꿇고 그들을 향해 팔을 쳐들며 애원했다.

"제발 날 좀 꺼내 줘." 그러나 그들은 듣지 못했다. 나의 애원은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P83

어릴 때부터 조용히 방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먼 뒷날 절망에 빠지는 데 이를 때까지 신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숱한 시기를 지나왔다. 그 연결고리는 그 형태가 갖춰지기가 무섭게 산산이 부서질 정도로 격렬한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에는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물론 홀로 그 길을 걷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때 이미 어머니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고 난 뒤였다.

 

P84

두 사람은 곧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어머니에 대한 얘기인 듯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 사람 이젠 너무 많이 상했어."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아버지가 그 말을 하기까지는 틀림없이 큰 용이가 필요했을 거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존심이 현실을 인정하는 데 따르는 괴로움을 이겨내고 그렇게 말하게 했을 것이다.

 

P93~4

나는,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나는 음악을 의심스럽게 여겼다(그것은 음악이 나를 강하게 우주 속으로 끌어올려서가 아니라, 그런 다음 나를 다시 본디의 장소로 데리고 돌아오지 않고, 더욱 깊은, 어딘지 모를 혼돈의 땅속으로 밀어넣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2부

 

p98

위험이 안전보다 더 신뢰를 얻는 세상이다.

...

그런데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많이 몰리지 않는 곳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아예 발길을 멈추려는 기색조차 없다. 그것이 가진 이런저런 특징에 대해 한번 봐두는 것이 자신의 공부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닌 한, 그들은 결코 눈을 돌리려 하지 않는다.

 

p99~100

...그렇게 변하는 것이 마치 진보인 듯 생각한다. 삶이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고, 하나의 쾌락이 충족되면 또 다른 쾌락을, 그 다음엔 또다시 다른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일 뿐이며, 욕망을 거부하는 건 바보짓일 뿐이라는 세상의 주장에 거의 설득당한 모습이다. 그녀들은 이미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진정한 힘은 언제나 스스로의 내면에 존재해 왔음에도.

 이런 자포자기에 이르게 된 것은 그녀들이 너무나 지쳤기 때문이리라.

 

p101

겉보기엔 전문가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경박한 쾌락에 물든 아마추어와 같다.

 

 p105

"난 그 집을 보러 가려는 거야." 하지만 그녀는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계단 위의 커다란 집 말이야." "이런 바보!" 그녀는 재빨리 나를 붙잡았다. "거긴 이제 집 같은 건 없어." ...

나는 한 사람씩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집이 불타서 사라지면 그저 없어졌구나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그들을 나는 경멸했다.

 

p108

우리 시대엔 이야기하는 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p109

그때부터 그녀는ㅡ내가 이해한 게 옳다면ㅡ몇 시간이고 밤의 창문 앞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그것이 자신과 관계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난 꼭 죄수가 된 기분으로 창가에 서 있었단다. 별들은 자유로운 존재였지." 그러고 나면 그녀는 쉽게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사실 '잠에 빠진다'는 표현은 그 시절의 아벨로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차라리 잠은 '솟아오르는'어떤 것이라고 해야 했다. 이따금 눈을 떴다가 새로운 잠의 세계로 떠오르는 그런 것이었다. 가장 높은 세계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는데 아직 날이 새기도 전에 눈이 떠지곤 했다.

 

P110

브라에 백작이 회고록을 쓰고 있다는 소문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기대한 것처럼 정치나 군사에 관한 회고록은 아니었다. 누가 그런 문제에 대해 백작에게 말을 꺼내면, 노인은 그저 퉁명스럽게 그런 건 이제 다 잊어버렸다고 대답하곤 했다. 반면 그가 잊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은 어린 시절이었다. 그는 그 추억을 몹시 소중하게 여겼다. 먼 옛날 아득한 시절이 온통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내면으로 눈을 돌리면 언제든 어린 시절 잠 이루지 못하던 북극의 여름밤이 펼쳐졌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P111

"물론 그가 자신의 과거 경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꽤 있었단다. 그들은 사람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직 제 안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피와 살로 녹여낸 것뿐임을 몰랐던 거야."

 "책은 헛된 물건에 불과해." 백작은 벽 쪽을 향해 분노가 치미는 듯한 몸짓을 하며 소리쳤다. "중요한 건 책이 아니라 피다. 피를 읽어야 해."

 

P115

나도 모르게 다시 아름답게 균형 잡힌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불현듯 아버지는 확실한 죽음을 원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확실성이야말로 아버지가 평생 바라던 것이었다. 이제 아버지는 원하던 걸 얻게 될 것이었다.

 

*P116

이미 그때 나는 더 이상 절망을 믿지 않았다. 그러니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니다. 우리의 상상력이 재현해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개별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급하게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그런 개별요소들의 존재를 놓칠 뿐만 아니라, 놓ㅊ텼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 실재는 느리게 흐르며 말할 수 없이 섬세한 것들로 가득하다.

 예컨대, 이렇게 저항에 부딪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P117

나는 나 자신의 심장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내 혈통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만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은 벌써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힘차게 뛰고 있었다.

 

*P118

저 과거의 영향력과 그 연관관계로부터 내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비록 흐릿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어느 날 내가 몰래 버려두고 떠나온 것들이 분명했다. 유년시절을 영원히 잃지 않으려면, 그것을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어떻게 내가 그 시기를 잃어버렸는지를 깨달았고, 동시에 그 빈 자리를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

 

P121

게다가 나는 혼자 있을 때도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 그리고 이러한 공포는 대개 지금처럼 우연히 묵게된 방으로 찾아왔다. 그 방들은 마치 모든 게 잘못 돌아가기만 하는 불길한 존재인 내게 휘말리기를 원치 않는다는 듯이, 사정없이 나를 고독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혼자 앉아 있었다. ... 언제나 창문만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 절박한 마음으로 그래도 저 바깥에는 아직 내게 속한 어떤 것이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막상 창문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창문이 벽처럼 막혀 있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나는 창문 저편에도 마찬가지로 구원은 없으며 오로지 무한한 고독만이 계속될 뿐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스스로 불러들인 고독이었고, 이미 그 고독의 크기를 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P126~7

그는 숫자에는 정말 문외한이었다. 그런데도 숫자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실수의 원인이라는 것을 그는 이해하게 되었다. 숫자란 건 말하자면, 정부가 도입한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종이 위에서 말고 숫자를 실제로 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그런데도 시간은 금이라느니 하면서 시간이 돈과 같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고 한심찬 착각일 뿐이다. ....

 마음대로 흘러가라. 그러나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무언가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불현듯 그의 얼굴에 바람이 느껴졌다. ... 깜깜한 방 안에서 혼자 크게 눈을 뜨고 앉아 있는 동안, 점점 방금 스치고 지나간 것이 바로 흘러가는 시간의 실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실제로 모든 일 초 일 초를 느꼈다. 미지근하고, 한결같으며, 대단히 빠른, 순간순간들을. 무엇을 하려던 시간들이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시리라. 바람이라면 왜 하필 어떤 종류든 닿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제 평생 그가 앉아 있을 때면 어김없이 시간이 바람처럼 그의 얼굴에 불어오리라. 그 탓에 그는 신경통이 도져 고생하게 될 것이 뻔했다. 이 생각에 이르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P132~4

이렇게 한번 가정해 보자ㅡ온전한 상태의 뚜껑, 비틀리거나 휘어지지 않고 본디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그런 뚜껑이 가진 유일한 욕망은 오직 자신이 있어야 할 그 온전한 상태의 원통 위에 제대로 덮이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뚜껑으로서는 이보다 더 완벽한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테고, 그것이야말로 뚜껑이 바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자아실현일 테니까. ... 아,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덮이는 것을 감시하는 뚜껑이 얼마나 될까. 인간과 관련된 사물들은 이처럼 자기 존재에 대한 혼란에 빠져 있다. 인간을 뚜껑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깔고 앉은, 직업이라는 원통을 몹시 마뜩찮아 한다. 어떤 이는 너무 서둘러서 자신이 앉을 통을 고른 것일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그곳에 놓인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가장자리가 찌그러진 통에 앉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연은 가지각색일 테니까.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기로 하자. 사람들은 어떻게든 현재 자신이 앉아 있는 통에서 굴러 떨어지자마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굴러갈 생각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네의 저 온갖 기분전환거리며 야단법석들이 생겨났을 리가 있겠는가?

 수백 년 동안 사물들은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보아왔다. 그러니 어느새 타락하여 본디 자연스럽고 심오했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고, 주위 사람이 하는 방식대로 자신을 허비하게 된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 그러나 만약 깨어 있는 자, 이를테면 밤낮없이 자신의 내면에서 충만을 구하는 한 고독한 인간이 나타나면, 타락한 사물들은 곧 그에게 적의와 조소와 증오를 드러낸다. 더 이상 온전히 자기 존재에 뿌리내릴 수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추구할 수도 없게 된 그것들은 한데 힘을 합쳐 그를 방해하고, 위협하고, 잘못된 길로 빠지도록 유혹한다. ... 그 강력한 힘은 끝도 없이 자라나 모든 생명체, 심지어 신조차 이 고독한 인간의 적으로 돌아서게 한다. 이 단 한 사람, 끝까지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고독한 성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

 그렇지만 우리 자신이 그런 길을 걸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성자의 삶이 너무나 힘든 길임을 예감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길과는 다른 우리만의 길을 걸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우리의 길 또한 성자의 길만큼이나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옛날 동굴이나 텅 빈 처소에서 홀로 살아가는 신의 제자를 에워싸던 그 모든 유혹이 고독한 모든 이들에게도 똑같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고독한 인간에 대해서 너무 쉽게 속단한다. 마치 그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아니, 사람들은 모른다. 그들은 고독한 인간을 만나본 적조차 없다. 고독한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막연히 미워할 뿐이다.  ... 그들은 그에게 역병을 옮기는 자라는 오명을 씌웠다. 그에게 돌을 던지고, 그를 마을에서 내몰았다. 어찌 보면 이들은 오랜 세월 뿌리내려온 본능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고독한 인간은 보통 사람들의 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독한 인간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들을 상대하려 들지 않자, 사람들은 다시 궁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오히려 고독한 인간의 의지를 북돋아주어, 그의 고독을 더욱 견고해지도록 만든 꼴이 아닌가 의심했다. 결국 그가 영원히 세상과 담쌓고 살도록 그들이 도와준 셈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방식을 바꿔, 정반대 되는 접근방식을 취했다. 명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떠들썩한 유혹 앞에서는 누구든 반색하며 고개를 들기 마련이니까.

 

****모순마저 뛰어넘을 강력한 표현력이 필요하다. (P138)

 

P143~5

바꿀 수 없는 사실이라면 그 일을 한탄하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하는 것보다 순순히 인정하는 편이 현명하다. ... 예전에는 오로지 안에서부터 시작된 삶이. 방향을 바꿔 밖으로부터 시작될 것이었다. 그런 전환의 순간이 오면 모든 게 분명해져서 내 인생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어떤 모호한 구석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고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내게 있어 인생이란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복잡하며 어렵지만, 적어도 눈에 보이듯 분명했다. 그래서 이 불안정하고 예상할 수 없는, 어린 시절 특유의 자유로운 세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날이 어떻게 올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인생은 스스로를 사방의 벽에 가둔 채 갈수록 부풀어올랐고, 바깥세상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오히려 나의 내면만이 더욱더 또렷하게 깨어났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된 조화인지는 하느님만이 아시리라. 어쨌든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테고, 어느 순간 한계에 이르면 단번에 끝이 날 거라고 믿었다. 어른들을 보더라도 그랬다. 그들은 내적인 문제로 괴로움을 겪는 일이 거의 없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어른들은 언제든 척척 판단을 내리고 사건을 처리했으며, 어려움에 봉착한다 해도 그 대부분은 외적인 요인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

나는 다른 생활이 시작됐다고 해서 그 시절이 끝나지는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모두가 자유로이 인생의 단락을 나누지만, 그것을 꾸며낼 수는 없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난 이 문제를 혼자 힘으로 명확히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는 못했다. 시도할 때마다 인생은 그 문제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 내게 일러주었다. 내가 만약 유년기는 끝났다고 주장한다면, 그 순간 내게 다가오던 모든 것이 전부 지나간 것이 돼버리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은 장난감 병정이 차지한 자리만큼이나 딛고 설 데가 좁아져 위태위태해질 것이었다.

 이런 발견이 나를 더욱더 고립된 상태로 내몰았음은 쉽게 짐작이 가리라. 이 문제는 나의 내면을 온통 사로잡았고, 내 마음을 최후의 기쁨으로 가득채웠다. 나는 이 기쁨을 슬픔이라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이제까지의 나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기억하건대, 그것은 또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불분명한 나날이 계속됨으로써 나도 모르게 수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울스고르로 돌아왔을 때 나는 옛 장서들을 보자마자 거의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만큼 그것들을 허겁지겁 읽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때 내겐 끝까지 다 읽을 생각이 아니면 아예 책을 펼쳐서도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는데, 이런 강박관념은 그 뒤로도 종종 나타나곤 했다.

 

***P146

전체의 충만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안에 하나로 녹아들어야 하리라, 그 안에서 숨 쉬며 그 어떤 것도 놓쳐서는 안 되리라.

 

***P148

그녀의 본성이 일으키는 모든 일은 마치 영원에서 비롯되는 듯했다. 이 영원의 세계야말로 그녀가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곳이었다. 영원과 분리될 때 그녀는 마치 돌아가는 길을 몰라 방황하는 불멸의 영혼처럼 고통스러운 듯했다.

 

***P149

운명은 갖가지 무늬와 패턴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운명의 난관은 바로 이 복잡성에서 오는 것이다. 반면 인생 자체가 힘든 이유는 그것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는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들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성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신에게 닿기 위해 바로 이런 드문 일을 추구한다. 

 

p150

세상 이치라는 것이 얼마나 얄궂은지 사람들은 그가 소리칠 때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다가, 그가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보다 더 조용하게, 마치 그늘이나 시간처럼 움직이고 있을 때만 지나갔다.

 그를 보기 꺼려했던 나의 태도는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부끄럽게도 나 또한 그의 곁을 지나갈 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곧 아예 그가 거기 없는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p152

오, 하느님, 그 순간만큼은 분명 당신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엔 당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모든 증거를 잊어버렸고 또한 다시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존재한다는 확신 속에는 너무나 두려운 의무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바로 여기 당신의 존재를 가리키는 증거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를 통해 행복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저희가 배운, 다만 모든 걸 받아들이고 판단하려 들지 말라는 격언은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고통이며, 또 무엇이 축복입니까. 그 답은 오직 당신만이 알고 계십니다.

 다시 겨울이 오고, 제게 새 외투가 필요해질 때ㅡ부디 저로 하여금 새 외투를 오래 새것으로 입을 수 있도록 하소서.

 

p154

영광은 한순간이지만 비참은 그 무엇보다 오래가는 법이다.

 

p157

그는 행복이 멀리 사라져 영원히 돌아오지 않게 되어서야 진정한 위안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159

왜냐하면 이 세기는 실제로 지상에 천국과 지옥이 더불어 존재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의 실재야말로 그 시대를 존속케 한 원동력이다.

...

그의 왜소한 몸은 두려움 때문에 더더욱 마르고 단단해졌다.

 

**p161

하지만 이처럼 일찍 성자가 되어 버린 사실 자체가 무언가 그 시대의 절망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

세상은 이토록 혼돈으로 가득한데도, 저 천상에서 누군가는 천사와 사이좋게 몸을 기댄 채 하느님의 무한한 빛과 보살핌 아래 평화로이 살고 있으리라고 상상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지독한 아집이 필요할 것인가?

 

p162

그 어떤 실수도 눈감아 주지 않는 차가운 도시의, 무겁고 텅 빈 낯선 거리를.

 

p164

성숙한 여인만큼이나 어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사생아 아들의 눈길이다. ...

 *그 자신의 손. 이 두 손 사이에는 어떤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또는 어떤 물건을 쥐거나 놓는 데 미리 정해진 순서가 있을까? 아니다. 모두가 협력하는 동시에 대립한다. 한 행동이 다른 행동을 상쇄한다. 정해진 질서란 없다.

 

p166~7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신이 없는 것처럼, 극장 또한 없다. 그것은 우리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나 두려움을 갖고 있지만,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할 때에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공동의 고난이라는 벽을 향해 외치는 대신에, 우리의 이해력이 부족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묽게 희석시키고 있다. 고난의 벽 뒤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모여들어 힘을 모으고 있는데도.

 

*p168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삶은 별 가치가 없다. 그것은 차라리 위험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받는 사람은 스스로를 극복하여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면 좋으련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다. ... 그 슬픈 울음소리는 오직 한 사람을 향한 부름이지만, 온 자연이 화음을 맞추어준다.

 

p169~170

...하지만 어디선가 새 한마리가 울고 있을 뿐, 그 무엇도 당신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당신은 생각했으리라, 아 나는 이미 죽어 버린 존재란 말인가?

 아마도. 그나마 새로운 점이 있다면, 우리가 세월이나 사랑보다 더 오래 견딘다는 사실일 것이다.

 

p171~2

완벽한 개방성과 통일성을 가진 고대 문화가 예전부터 많은 이의 눈에는 그저 과거의 유산으로만 비칠 뿐이라는 사실에 그는 전혀 얽매이지 않는다. 그 시대에는 확실히 삶을 이루는 천상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이 존재라는 잔에 꼭 들어맞았다. 마치 두 개의 반구가 오나벽하게 합쳐져 하나의 황금빛 공을 이루듯이. 하지만 합일이 이루어지기가 무섭게 그 안에 갇힌 정신은 그 실현이 그저 비유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그러자 거대한 구는 무게를 잃고 허공으로 떠올랐고, 그 황금빛 곡선은 다만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슬픔을 조심스레 비출 뿐이었다. ...

 그는 무심코 사과를 하나 집어들어 바로 앞 탁자에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이 과일 곁에 존재하는 걸까, 하고 생각한다. 이미 완성되어 가는 사물들 곁에 완성된 상태이면서 동시에 계속해서 더해지는 존재로 있다는 것을.

 

p173

그는 깊어가는 밤의 정적 속에서 진실한 사랑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랑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잠 못 이루는 밤 홀로 깨어 그녀를 위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사랑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성적인 결합은 오히려 서로를 더욱더 고독하게 만들 뿐이라고 보았던 사포의 생각은 얼마나 올바른가. 그녀는 성(性)이라는 덧없는 목적을 초월하여 무한을 향했다. 그녀는 포옹의 어둠 속에서 만족이 아닌 동경을 구했다.

 

p178

한 번도 나 그대를 붙잡지 않았으므로

그대는 영원한 나의 것

...

나는 그녀가 자신의 사랑에서 모든 수동적인 면을 없애 버리기를 몹시 갈망했음을 안다. 하지만 그토록 진실했던 그녀는 신이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사랑의 방향일 뿐이라는 걸 몰랐단 말인가?

 

**p179

사랑받음은 불타오르는 것이다. 사랑함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기름으로부터 피워 올린 불꽃이다. 사랑받음은 소멸하는 것, 사랑함은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다. 

 

p180

이렇듯 공상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생략하는 법이 없었다. 또한 상상력을 아무리 잘 통제한다 해도 공상과 공상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어떤 특정한 새가 아닌, 그저 한 마리 새가 되어 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오, 하느님!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마음속에서 털어내고 잊어버려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p181

하지만 '사랑을 받는' 여인, 다시 말해 사랑받는 것에 관대한 여인은 '사랑을 주는' 여인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p182

그 어떤 시인이 찰나의 인생과 그가 견뎌내야 했던 그 기나긴 나날을 조화롭게 엮어낼 수 있는가?

 

p183

오랜 고독을 통해 통찰력과 평정심을 얻고 자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그는 눈부신 빛처럼 내면을 뚫고 들어오는 신의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깨우치게 되리라. 하지만 그렇게 사랑받기를 바라면서도,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에 익숙한 그의 감정은 신과의 무한한 거리를 인식했다. ...

 이런 배움의 길만큼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것은 다시없다.

 

***p184~5

어쩌면 결국 그가 얻고자 했던 것은 '영혼의 무게를 견뎌낼 인내심'인지도 모른다. ... 인생의 즐거움과 괴로움도 그 신선한 맛을 잃고 내면의 순수한 자양분으로 변화했다. 그의 존재의 뿌리로부터 자라난 강인한 식물은 겨울을 이겨내고 기쁨의 열매를 맺었다. 그는 내적인 삶을 일구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 무엇 때문에 용서를 한단 말인가? 사랑. 그렇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

 가족들은 돌아온 그에 대해서 무엇을 알았을까? 이제 그를 사랑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오직 신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느꼈다. 하지만 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상 전집 4. 수필 외

Posted by 히키신
2017. 3. 5. 18:42 글쓰기와 관련하여

4이상 전집 4. 수필 외, 권영민 엮음, 문학에디션 뿔, 2009

 

1부

 

문학과 정치

 

: 문학자는 그 생활하는 성격상 생활이 다른 어떤 종류의 부문의 생활양식에 비교하여도 정신적인 고뇌가 훨씬 더 많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이래서 그들은 생활의 물질적인 고뇌에 다른 어떤 부문의 누구보다도 강인한 인내력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다.

 만약 한 문학자가 생활 혹은 그것에 유사한 보통 원인으로 하야 그 자신의 일명(一命)을 스스로 끊었다면 이 비극성이야말로 절대(絶大)하다.

 문학자가 문학해 놓은 문학이 상품화하고 상품화하는 그런 조직(組織)이 문학자의 생활의 직접의 보장(保障)이 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대라는 정세가 이러면서도 문학자ㅡ가장 유능한ㅡ의 양심을 건드리지 않아도 꺼림칙한 일은 조금도 없는 그런 적절한 시대는 불행히도 아직 아닌가 보다.

 이런 데서 문학자와 그의 생활 사이에 수습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기고 모순으로 하여 위와 같은 끔찍끔찍한 비극도 일어난다.

 보면 사회, 아니 문학 한다는 이들까지가 이 비극에 대하기를 '냉담' 한마디에 다한다는 것은 한심하고 참괴(慚愧) 참아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생활난 때문에 일가(一家) 구몰(俱沒)의 보도를 조석으로 듣고 상을 찌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세월에 하나 정신 패배자의 죽음쯤이야 사회적 현상으로 내려다볼 때에 혹은 너무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르나 그 패배의 모양이 정신적인 점, 우리 문학하는 사람들과 친근자인 경우에 좀 더 절실한 무엇이 우리 흉리(胸裏)에 절박하는 것을 아니 느끼고 족히 베길까.

X X X

문학자가 제 문학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제 생활을 기피하였다는 당대의 비극이 있다.

 흔히 있는 또 있어야 할 유서(遺書) 한 장 없으니 더 슬프다.

 고 매운 눈초리를 나는 눈에 선-하니 잠시 잊을 수도 없었다.

...

 문학도 결국은 투기사업(投機事業)일 것이다. 되든지 안 되든지 둘 중의 하나, 이 냄세나는 '악취미 자극'을 나는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고 어디까지든지 버틸 결심이다.

 

실낙원(失樂圓) - 월상(月傷)

 

: 나는 엄동(嚴冬)과 같은 천문(天文)과 싸워야 한다. 빙하와 설산 가운데 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나는 달에 대한 일은 모두 잊어버려야만 한다ㅡ. 새로운 달을 발견하기 위하여ㅡ

 

병상(病床) 이후

 

: 그동안 수개월! 그는 극도의 절망 속에 살아왔다.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죽어왔다'는 것이 더 적확하겠다.) 

...

 '참을 가지고 나를 대하여 주는 이 순한 인간에게 대하여 어째 나는 거짓을 가지고만 밖에는 대할 수 없는 것은 이 무슨 슬퍼할 만한 일이냐.' ...

 '그렇다. 나는 확실히 거짓에 살아왔다ㅡ. 그때에 나에게는 체험을 반려(伴侶)한 무서운 동요(動搖)가 왔다ㅡ.

 

편지

 

<1>

기림(起林) 형

...

빌어먹을 거ㅡ세상이 귀찮구려!

불행이 아니면 하로도 살 수 없는 '그런 인간'에게 행복이 오면 큰일나오. 아마 즉사할 것이오. 협심증(狹心症)으로ㅡ.

'一切誓ふな(일체 맹서치 마라.)', '一切を信じないと誓へ'(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맹서하라.) 의 두 마디 말이 발휘하는 다채(多彩)한 파라독스를 농락하면서 혼자 미고소(微苦笑)를 하여보오.

형은 어디 한번 크게 되어보시오. 인생이 또한 즐거우리다.

사실 전(前)에 FUA '장미신방(薔薇新房)' 이란 영화를 보았소. 충분히 좋습디다. 'ききやかなる幸福' (소소한 행복)이 진정의 황금(黃金)이란 タイトル(주제)는 ア-ノルド  フアンダ(아르놀트 판크의) 영화에서 보았고 'ききやかなる幸福' (소소한 행복)이 인생을 썩혀 버린다는 タイトル(주제)는 장미(薔薇)의 침상(寢床)에서 보았소. 아ㅡ '哲學の限りなき無駄よ' (철학의 끝없는 헛됨이었소.) 그랬오.

 '一切の法則を嗤へ?' 'それも誓ふな.' (일체의 법칙을 비웃어라? 그것도 맹서하지 마라.)

...

退屈で、退屈ならない(따분하고 따분해서 견디기 어려운) 그따위 일생도 또한 사(死)보다는 그래도 좀 자미가 있지 않겠소?

 연애라도 할까? 싱거워서? 심심해서? 스스로워서?

...

 여보 편지나 하구려! 내 고독과 울적(鬱寂)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소? 자ㅡ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꾿빠-이

 

<2>

...구인회는 인간 최대의 태만(怠慢)에서 부침(浮沈)중이오. ...

 

<3>

...해변에도 우울 밖에는 없소. 어디를 가나 이 영혼은 즐거워할 줄을 모르니 딱하구려! 전원(田園)도 우리들의 병원(病院)이 아니라고 형은 그랬지만 바다가 또한 우리들의 약국(藥局)이 아닙디다.

 독서(讀書)하오? 나는 독서도 안 되오. ...

 고황(膏肓)에 든, 이 문학병(文學病)을ㅡ 이 익애(溺愛)의 이 도취(陶醉)의......이 굴레를 제발 좀 벗고 표연(飄然)할 수 있는 제법 근량(斤量) 나가는 인간이 되고 싶소. ...

 세상 사람들이 다ㅡ제각기의 흥분, 도취에서 사는 판이니까 타인의 용훼(容喙)는 불허하나 봅디다. 즉 연애, 여행, 시, 횡재, 명성ㅡ이렇게 제 것만이 세상에 제일인 줄들 아나 봅디다. 자ㅡ기림 형은 나하고나 악수합시다. 하, 하.

 

<6>

암만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사구니에 끼워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오.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

 그들은 이상(李箱)도 역시 20세기의 スポーツマン(스포츠맨)이거니 하고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들에게 낙망을(아니 환멸)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만날 때 오직 20세기를 근근히 ポーズ(포즈)를 써 유지해 보일 수 있을 따름이구려! 아! 이 마음의 아픈 갈등이어.

 생(生)ㅡ 그 가운데만 오직 무한한 기쁨이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이미 ヌキサツナラヌ程(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전락하고 만 자신을 굽어살피면서

 생에 대한 용기, 호기심 이런 것이 날로 희박하여 가는 것을 자각하오.

 이것은 참 제도(濟度)할 수 없는 비극이오! ... 환멸이라기에는 너무나 참담한 일장(一場)의 ナンセンス(넌센스)입니다. ...

 오직 가령 자전(字典)을 만들어냈다거나 일생을 철(鐵) 연구에 바쳤다거나 하는 사람들만이 エライヒト(위인)인가 싶소.

 가끔 진짜 예술가들이 더러 있는 모양인데 이 생활 거세(去勢) 씨들은 당장에 ドロ礻ズミ(시궁창의 생쥐)가 되어서 한 2,3년 만에 노사(老死)하는 모양입디다.

 

<7>

한화(閑話) 휴제(休題)ㅡ 차차 마음이 즉 생각하는 것이 변해 가오. 역시 내가 고집하고 있던 것은 회피(回避)였나 보오. 흉리(胸裏)에 거래(去來)하는 잡다한 문제 때문에 극도의 불면증으로 고생 중이오. 2,3일씩 이불을 쓰고 문외(門外) 불출(不出)하는 수도 있소. 자꾸 자신을 잃으면서도 양심 양심 이렇게 부르짖어도 보오. 비참한 일이오.

 한화 휴제ㅡ 삼월에는 부디 만납시다. 나는 지금 쩔쩔매는 중이오. 생활보다도 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모르겠소. 논의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만나서 결국 아무 이야기도 못하고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저 만나기라도 합시다. ... 이러다가는 정말 자살할 것 같소.

... 여기 와보니 조선 청년들이란 참 한심합디다. 이거 참 썩은 새끼조차도 주위에는 없구려!

 진보적인 청년도 몇 있기는 있소. 그러나 그들 역 늘 그저 무엇인지 부절히 겁을 내고 지내는 모양이 불민(不憫)하기 짝이 없습디다. ...

조금 어른이 되었다고 자신하오. (중략)

망언(妄言) 망언. 엽서라도 주기 바라오.

 

<8>

...

저에게 주신 형의 충고의 가지가지가 저의 골수에 맺혀 고마웠습니다. 돌아와서 인간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서의 옳은 도리를 가지고 선처하라 하신 말씀은 참 등에서 땀이 날 만치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저는 지금 사람 노릇을 못하고 있습니다. 계집은 가두(街頭)에다 방매(放賣)하고 부모로 하여금 기갈(飢渴)케 하고 있으니 어찌 족히 사람이라 일컬으리까. 그러나 저는 지식의 걸인은 아닙니다. ... 살아야겠어서, 다시 살아야겠어서 저는 여기를 왔습니다. 당분ㄱ단은 모든 죄와 악을 의식적으로 묵살하는 도리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친구, 가정, 소주, 그리고 치사스러운 의리 때문에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전연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분간 어떤 고난과라도 싸우면서 생각하는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편의 작품을 못 쓰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말라 비틀어져서 아사(餓死)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지금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도저히 '커피' 한 잔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고독과 싸우면서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있습니다. ...

 가끔 글을 주시기 바랍니다. 고독합니다. 이곳에는 친구 삼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3부. 단상 또는 창작 노트

 

무제

(원문에 제목이 없음)   

 

손가락 같은 여인이 입술로 지문(指紋)을 찍으며 간다. 불쌍한 수인(囚人)은 영원(永遠)의 낙인(烙印)을 받고 건강을 해쳐 간다.

*

같은 사람이 같은 문으로 속속 들어간다. 이집에는 뒷문이 있기 때문이다.

*

대리석(大理石)의 여인이 포오즈를 바꾸기 위해서는 적어도 살을 깎아내지 않으면 아니된다.

*

한 마리의 뱀은 한 마리의 뱀의 꼬리와 같다. 또는 한 사람의 나는 한 사람의 나의 부친(父親)과 같다.

*

피는 뼈에는 스며들지 않으니까 뼈는 언제까지나 희고 체온이 없다.

*

안구(眼球)에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안구뿐이다.

*

고향(故鄕)의 산(山)은 털과 같다. 문지르면 언제나 빨갛게 된다.

(<現代文學>, 1960, 11, 164쪽, 김수영 역.)

 

얼마 안 되는 변해(辨解) (혹은 일년이라는 제목)

ㅡ몇 구우(舊友)에게 보내는ㅡ

 

 한 개의 임금(林檎)의 껍질을 벗기자 한 개의 배로 되었기 때문에 그 배의 껍질을 벗기자 한 개의 석류(石榴)로 되었기 때문에 그 석류의 껍질을 벗기자 한 개의 네이블로 되었기 때문에 그 네이블의 껍질을 벗기자 이번에는 한 개의 무화과로 되었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포학(暴虐)한 질서가 그로 하여금 그의 손에 있던 나이프를 내동댕이쳐 버리게 하였다.

 내동댕이쳐진 소도(小刀)는 다시 소도를 낳고 그 소도가 또 소도를 낳고 그 소도가 또 소도를 낳고 그 소도가 또 소도를 분만(分娩)하고 그 소도가 또......

 

무제

(원문에 제목이 없음)

 

'오전 4시와 제 1초(秒). 지상의 나변(那邊)에도 나는 있지 않았다.' ...

'나는 유모차에 태워진 채로 추락하였다. 기억의 심연 속으로' 

 

무제

(원문에 제목이 없음)

 

생사의 초월ㅡ존재한다는 것은 생사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인가.

 

무제

 

만사는 나에게 더욱 냉담한 사념(思念)이 되어간다.

 신(神)을 엄습하는 가을의 사색(思索), 그럴 때마다 느끼는 생존의 적막과 울고(鬱苦)에 견뎌낼 수 없다. 나의 전방에 선명한 문자처럼 전개하는 자살에의 유혹.

 그러나ㅡ

 나의 냉각(冷却)한 피는 이 경(磬)쇠처럼 꽃다운 맥박 속에서 포옹처럼 따뜻해지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석반(夕飯)

 

별이 나왔다. 일찍이 아무도 촌사람에게, 하늘에서 별이 나온다는 걸 가르쳐준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은 별이란 걸 모른다. 그것은 별이 송두리째 하느님에 틀림없다. 더구나 일등성(一等星) 이등성(二等星) 하고 구별하는 사람의 번쇄(煩鎖)야말로, 가히 짐작할 수 있도다. 불행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

무슨 일이건 다 불쾌하다는 걸 계속해서 생각는 것은 불쾌하다. 그러자 이번은 이웃 방 사람들의 식사하는 소리가 들리어온다. 꼭 개가 죽(粥) 먹을 때의 그 소리다. 인간이 식사하는 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들을 때, 개의 그것과 똑같다는 것을 발견함은 일대(一大)의 쾌사(快事)라 하겠다. ...

 이렇게 오고 가는 방향이 서로 어긋나는 생리 상태와 심리 상태는 도대체 어쩌자는 셈일까. 심리 상태가 뭣이든 사사건건마다 생리 상태에 대하여 몹시 노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라면 그 반대일 것이다. 오로지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수습할 수 없는 상태며 난국이다. 나는 건강한지 불건강한지, 판단조차 할 수 없다. 건강하다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건강한 사람의 그 누구와도 (조금도) 닮지 않았다. 불건강하다면 이건 얼마나 처치 곤란하리만큼 뻔뻔스러운 그렇게 약해 빠진 몰골인가.

...

암담할 뿐이다. 그러나 개도 개지, 글쎄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열심히 몇 번씩이나 냄세를 맡는 것은 얼마나 우열한 일이뇨.개는 개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행복하다. ㅡ역시 이런 걸 생각하는 자체부터가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냄세 맡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도 가버렸다. 나는 이제 무엇을 관찰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

 그러나 구름이 있다. ... 구름의 존재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가 된다고? 나는 아직 한 번도 구름이 비가 된다는 것을 믿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저건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완전히 부운(浮雲)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아침의 이 세상의 어느 나라의 지도와도 닮지 않은 백운(白雲)을 망연히 바라보며 인생의 무한한 무료함에 하품을 하였다.

 

무제

 

(2)

꽃이 매춘부의 거리를 이루고 있다.

...

......죽음을 각오하느냐, 이 삶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느니라...... 이런 값 떨어지는 말까지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개의 눈은 마르는 법이 없다, 턱은 나날이 길어져 가기만 했다.

 

(3)

가엾은 개는 저 미웁기 짝 없는 문패(門牌) 이면(裏面) 밖에 보지 못한다. 개는 언제나 그 문패 이면만을 바라보고는 분만(憤懣)과 염세를 느끼는 모양이다. 그리고 괴로워하는 모양이다.

 

회한(悔恨)의 장(章)

 

가장 무력(無力)한 사내가 되기 위해 나는 얼금뱅이였다

세상에 한 여성조차 나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나의 나태(懶怠)는 안심(安心)하다

(이 대목에서 '안심(安心)'이라는 말은 '근심 걱정 없이 마음을 편안히 가짐.'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안심(安心)의 경지' 즉, '불법을 굳게 믿어 어떤 충동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지에 이른 상태.'를 인유(引喩)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말하자면, '나의 나태는 어떤 충동에도 고칠 수 없고 변화가 없음.' 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원문 주-)

 

양팔을 자르고 나의 직무를 회피한다 더는 나에게 일을 하라는 자는 없다

내가 무서워하는 지배(支配)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역사(歷史)는 지겨운 짐이다

세상에 대한 사표 쓰기란 더욱 무거운 짐이다

나는 나의 글자들을 가둬버렸다

도서관에서 온 소환장을 이제 난 읽지 못한다

 

나는 이젠 세상에 맞지 않는 입성이다 봉분(封墳)보다도 나의 의무는 많지 않다

(여기서 '봉분'은 '죽은 자'에 해당함.)

나에게 그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고통은 깡그리 없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는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 아무것에게도 또한 보이진 않을 게다

비로소 나는 완전히 비겁해지기에 성공한 셈이다

 

단장(斷章)

 

죽음은 알몸뚱이 엽서나처럼 나에게 배달된다 나는 그 제한된 답신밖엔 쓰지 못한다.

...

헌 레코드 같은 기억 슬픔조차 또렷하지 않다.

 

첫번째 방랑

 

- 출발

 

나의 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여행에 대해 변명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나로선 괴로운 일이다. 나는 기차 칸에서도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

나는 왜 이렇게 피로해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어제는 엊그제 같기도 하고, 또한 내일 같기조차 하다. 나에겐 나의 기억을 정리할 만한 끈기가 없어졌다. 나는 이젠 입을 다물고 있는 수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거대한 바위 같은 불안이 공기와 호흡의 중압이 되어 마구 짓눌렀다. ...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 자신을 암살하고 온 나처럼, 내가 나답게 행동하는 것조차도 금지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

책을 덮었다. 활자는 상(箱)에게서 흘러 떨어졌다. 나는 엄격한 자세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는 이제 혼자뿐이니까.

 

-차창(車窓)

...

나는 나의 기억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정신에선 이상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

 적토 언덕 기슭에서 한 마리의 뱀처럼 말라 죽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름다운ㅡ꺾으면 피가 묻는 고대(古代)스러운 꽃을 피울 것이다.

 이제 모든 사정이 나를 두렵게 하고 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는 그것이, 승천하려는 상념 그것이, 그리고 사람들의 치매증(癡呆症) 그것 마저가.

 그러한 온갖 위협을 나는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의 침범으로 정신의 입구를 공허하게 해서는 안 된다.

...

 

아주 딴 방향으로부터 저 하현달이 다시금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다른 것으로 보아 그것은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약간 따스함조차 띠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사치(奢侈)로 해서 참을 수 없이 빛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나에게 표정을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짓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는 기꺼이 표정을 선택할 것이다.

 이런 떄, 내가 해야 할 표정은 어떤 것이 제일 좋을까? 어떤 것이 제일 달의 자랑에 알맞은 것이 될까?

 나는 잠시 망설인다.

 

-산촌(山村)

...

그들은 도대체 나한테서 무엇을 탐지하려는 것일까? 내 악(惡)의 충동에 대해 똑똑히 알고 싶은 것이리라ㅡ. 나는 위구(危懼)를 느껴 마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누구를 보고도 싱글벙글했다. 무턱대고 싱글벙글 함으로써 나의 그러한 위구감(危懼感)을 얼버무리는 수밖엔 없었다. ...

 하지만 이제 나는 귀뚜리를 향해 어찌 싱글벙글할 수 있겠는가? 너의 혜안은 나의 위에 별처럼 빛난다. ...

 귀뚜리여, 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너는 능히 나의 이 모자란 글을 읽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정녕 선지자 같은 정돈된 그 이지적인 모습을 보면, 나는 그렇게 생각되니 말이다. 그러나 어떠냐, 나는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얄미운 놈이라고 생각하느냐, 요사한 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너만은 알 것이다. 보다 속 깊이 싹트고 있는 나의 악에 대한 충동을, 그리고 염치도 없는 나의 욕망을, 그리고 대해 같은 나의 절망까지도. 그리고 너만이 나를 용서할 것이다. 나를 순순히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러나 귀뚜리는 다시 흰 벽으로 옮아앉았다. 그것이 내가 필설로서 호소할 수가 전혀 없는 수많은 깊은 악과 고통마저 알고 있다는 꼭 그런 얼굴인 것이다. 나는 나의 무능함이 폭로되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던 것이다. 나는 더욱 깊이 절망할 수밖에 없다.

 

불행한 계승(繼承)

 

한여름 대낮 거리에 나를 배반하여 사람 하나 없다.

패배에 이른 패배의 이행(履行), 그 고통은 절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ㅡ. 자살마저 허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래 그렇기에ㅡ

나는 곧 다시 즐거운 산 즐거운 바다를 생각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ㅡ달뜬 친절한 말씨와 눈길ㅡ그리고 나는 슬퍼하기보다는 우선 괴로워하기부터 실천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한여름 대낮 거리 사람들 모두 날 배반하여 허허(虛虛)롭고야.

...

 

2

...

피해자를 낼 만한 농담은 금해야 할 것이다. 그의 뇌리에 첫째로 떠오르는 금제(禁制)의 소리는 몽롱하나마 그것은 피해자에의 경계(警戒)인 것 같았다. 그렇다, 상의 앞에 피해자는 육안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상을 위협하는 포즈를 계속할 것이다. 그것은 괴롭다.

 차라리 이렇게 하자. 저 언짢은 그림자의 사나이가 나중에 무엇이라고 나무라든지 아랑곳할 것이 뭐냐.

 옳지, 하고 그는 후회보다도 더욱 냉정한 푼돈을 집어 던지고 오뎅집 콘크리트 바닥을 차고 일어섰다.

 그리곤 가을바람처럼 비틀거리면서ㅡ노(路)ㅡ

 차압(差押)이다. 특히 네놈이 이번엔 지명당하고 있단 말이다. 그런 기세로 상의 속도(速度)에는 시뻘거니 발홍(發紅)한 노여움이 충만해 있었다.

 

3

불길한 예감에는 그는 무섭도록 민감했다. 불길한 사건 앞에선 반드시 무슨 일에나 불길한 조짐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항상 전전긍긍하여 겁을 먹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

이젠 더 내 평생엔 사랑을 한다든가 하는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단다. 설령 어느 경우 이쪽에서 연연한 연정을 느낀다손 치더라도, 결국은 바닷가 조가비의 짝사랑이 되고 말 것이라고 굳게 체념하고 있었단다. 불긋불긋 녹슨 들판만 아득한 천(千) 리(里)란다.

 사귀면 손해 본다. 허나 되레 반갑다. 두세 친구 이외에 내 자살을 만류해 줄 이유의 근원이 있을 턱이 없다.

 자넨 혹은, 하필이면 네가 그러느냐 그럴지도 모른다. 허나 난 정당방위 그것마저 준비하고 있었단다ㅡ. 아니지, 어느 경우이건 놀림받기는 싫단 말이야. 그래서 그 손쉬운, 즉 조그마한 희생을 택했던 게야. 이러한 점에서 내가 하수인이라는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점에서만 말하자면 난 굳이 그 책임을 회피하라곤 하지 않을 작정이다.

 아니, 자넨 아주 무관심한 것 같군. 하나의 조소 거리를 얻을 것 같을지도 모르지. 허나,

 

 이런 날에도 어쩌다 떠오르는 추억의 조각 한강(漢江)물 반짝이는 여름 햇살 보누나

 

4

...

피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 피해서 안전한 것을 어째서 피하지 아니하였느냐 말이다. 한 줄기의 백금선을 백일(白日)에 드러냈던 때의 후회ㅡ. 아니다ㅡ.

그래 그것은 나중이야, 아니면 정녕 먼저냐? 예감이라니 정말이냐.

 허나 분명 얻은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송두리째 잃은 것만은 사실이다. 속일 순 없다. 이건 또 치명적인 결석(缺席)이었다.

 무엇일까. 누이인 줄 알고 있던 두 가지의 성격을 두 가지의 방법으로 생각했던 그것일까. 아니면, 한꺼번에 십 년 후로 후퇴해 버린 자신의 위치일까. 아니면, 십 년이란 먼 곳에 미소짓는 해변의 소운ㅡ그 친구일까.

 아니면,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무엇일까.

 

5

...

자아, 가자구. 그러지 말고 가자구. 고집부리지 말고. 멋꼬라지 없게, 새삼스레, 자아, 자아.

그렇지, 상은 결국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ㅡ전연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것. 그래,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대체 그는 어떻게 하고 있으면 좋단 말인가. 결국 가만히 있는 것.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거든.

 가만히 있기는커녕, 정녕 가만히 있진 못하겠다. 이건 또 불가사의한 처지인 것 같았다. 왜 가만히 있지 못한단 말인가?

 소운은 집에 가겠노라 했던 것이다. 집에 가서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슬픈 심정을 주체스러워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괴로워해 하겠노라고ㅡ.

 괴로워해?

 그 괴로움이야말로 사람들이 원해도 쉬이 얻을 수 없는, 말하자면 괴로움 같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닌, 어떤 그 무엇이지 않을까.

 조용한 시간만큼 적어도 두 사람에게 있어서 싫은 것은 없을 터이다. 설상 상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외톨이로 남게 되어ㅡ상은 소운의 팔을 잡아끎변서, 절일 만큼의 서러움을 몸에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이 자리를 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아니다, 소운으로 하여금 이 '눈물의 장(場)'에서 달아나게 해선 안 된단 말이다.

 억지로, 오기(傲氣)로도ㅡ. (혹은 있고 싶지 않단 말이다. 혼자 있는 건 무서워.)

 혼자서? 혼자서 있는 것일까 그것이? 그리고 그런 내용을 가지고서의 혼자서 있는 것. 그것이 허용될 수 있는 일일까.

 숫자는 3이다. 2와 1이라는 짝 맞춤밖에는 전혀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무엇을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이냐? 얌전하게 단념해야지ㅡ.

 그러고 싶어. 사실은 그래도 좋다곤 생각해. 허나 그저 가만히 있지는 못하겠다 그런 소리일 따름이야. 이걸 달래주는 법은 없을까.

...

절망의 새끼줄을 붙잡고ㅡ이 무슨 멋꼬라지 없는 하룻밤이었던가. 이미 분리된 것을 끌어당긴다는 것은 적어도 비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밤이 밝아온다. 절망은 절망인 채, 밤이 사라져 없어지듯 놓아주지 아니하면 아니 될 성질의 것이다. 날뛰는 망념(妄念) 위에, 광기 어린 야유(揶揄) 위에, 그야말로 희디흰 새벽빛 베일이 덮쳐 오는 것이었다.

 

6

...

모든 것은 현관 신발장 께에 구두와 함꼐 벗어던져져 있다. 이제 이 지폐 냄새 물씬거리는 실내엔 고독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

ㅡ그래 웃지 않기는 커녕 입을 열지 않는다구. 그런 아주 색다른, 어쩌면 내일 당장 자살해 버리지나 않을까 싶은 염세형(厭世型)인데,

 그러면서도 개성이 강해서 남의 말은 쉬이 들어먹지 않거든.

 

황(獚)의 기(記)ㅡ작품 제 2번

ㅡ황은 나의 목장을 사수하는 개의 이름입니다.

(1931년 11월 3일 명명)

...

기(記) 2

...

지식과 함께 나의 병(病)집은 깊어질 뿐이었다

...시간의 습관이 식사처럼 나에게 안약을 무난히 넣게 했다

병집이 지식과 중화(中和)했다ㅡ세상에 교묘하기 짝이 없는 치료법ㅡ그 후 지식은 급기야 좌우를 겸비하게끔 되었다

 

기(記) 3

복화술이란 결국 언어의 저장 창고의 경영일 것이다

한 마리의 축생은 인간 이외의 모든 뇌수일 것이다

 

기(記) 4

...

언제나 나는 나의 조상ㅡ육친을 위조하고픈 못된 충동에 끌렸다

치욕의 계보(系譜)를 짊어진 채 내가 해부대의 이슬로 사라질 날은 그 어느 날에 올 것인가?

...

그래 나는 나의 신분에 걸맞게시리 나의 표정을 절약하고 겸손하고 하는 것이었다

...

나의 사상의 레터 나의 사상의 흔적 너는 알 수 있을까?

나는 죽는 것일까 나는 이냥 죽어가는 것일까

나의 사상은 네가 내 머리 위에 있지 아니하듯 내 머리에서 사라지고 없다

 

모자 나의 사상을 엄호해 주려무나

나의 데스마스크엔 모자는 필요 없게 된단 말이다!

...

별들은 흩날리고 하늘은 나의 쓰러져 객사(客死)할 광장

보이지 않는 별들의 조소

...

한 줄기 길이 산을 뚫고 있다

나는 불 꺼진 탄환처럼 그 길을 탄다

...

화살처럼 빠른 것을 이 길에 태우고 나도 나의 불행을 말해 버릴까 한다

한 줄 기 길에 못이 서너 개ㅡ 땅을 파면 나긋나긋한 풀의 준비(準備)ㅡ 봄은 갈갈이 찢기고 만다

 

작품 제3번

 

2

...

신(神)은 사람에게 자살을 암시하고 있다......

...

나의 눈은 둘 있는데 별은 하나밖에 없다 폐허(廢墟)에 선 눈ㅁ불ㅡ눈물마저 하오(下午)의 것인가 불행한 나무들과 함께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

 

폐허는 봄 봄은 나의 고독을 쫓아버린다

나는 어디로 갈까? 나의 희망은 과거분사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폐허에서 나는 나의 고독을 주워 모았다

봄은 나의 추억을 무지(無地)로 만든다 나머지를 눈물이 씻어버린다

낮 지난 별은 이제 곧 사라진다

낮 지난 별은 사라져야만 한다

나는 이제 발을 떼어놓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이다

바람은 봄을 뒤흔든다 그럴 때마다 겨울이 겨울에 포개진다

바람 사이사이로 녹색 바람이 새어 나온다 그것은 바람 아닌 향기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묻어버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나는 흙을 판다

 

 흙 속에는 봄의 식자(植字)가 있다

 

지상에서 봄이 만재(滿載)될 때 내가 묻은 것은 광맥(鑛脈)이 되는 것이다

이미 바람이 아니 불게 될 때 나는 나의 행복만을 파내게 된다

 

월원등일랑(月原橙一郞)

(츠키하라 도이치로[原橙一郞]. 1930년대 활동했던 일본 시인.)

 

나의 마음이 죽었다고 느끼자 나의 육체는 움직일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달이 둥그래지는 내 잔등을 흡사 묘분(墓墳)을 비추듯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참살당한 현장의 광경이었다.

 

공포의 기록(서장)

 

...

아, 피곤하다. 그에게 아방궁을 준다 해도 더는 움직일 수 없다. 그는 그렇도록 피곤한 것이다. ...

ㅡ자아, 나르자! 저 악취에 싸여 있는 육친의 한 뭉치를 그는 낡은 짐수레에 싣고 날라와야 한다.

노동이다. 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한다든지 하는 일 따위는 엄두도 못낼 지경이었다.

성격 파산ㅡ무엇 때문에?

그의 교양은 그의 겉모양새와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남루. 수염도 텁수룩하다. 거리. 땀.

...

공복ㅡ절망적인 공허가 그를 조소하는 듯했다. 초조하다.

그다음에는 무엇이 왔는가.

적빈.

쓸 만한 넝마는 남의 손에 의해 모두 팔려 나갔다. 그리하여 보다 더 남루한 넝마들이 병균처럼 남아 있다.

...

 

 밤이 되자 그는 유령처럼 흥분한 채 거리를 누볐다. 이제 그에게는 의지할 곳이 없다. 오로지 한 가닥 공복을 메꾸기 위해 행동할 뿐이었다.

 성격의 파편, 그는 그런 것은 돌아볼 생각도 않는다. 공허에서 공허로 그는 역마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술이 시작되었다. 술은 그의 앞에서 향수처럼 빛났다.

 왼팔이 오른팔을 오른팔이 왼팔을 자꾸만 가혹하게 구타한다. 날개가 부러져서 흔적이 시퍼렇다.

 소량의 구조 깃발은 이미 효력이 없다.

 

공포의 성채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 즉 애완용 가축처럼 귀여움을 받은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이다.

 

 무서운 실지(實地)ㅡ특기해야 할 사항이 없는 흐린 날씨와 같은 일기(日記)ㅡ긴 일기다.

 

 버려도 상관없다. 주저할 것 없다. 주저할 필요는 없다.

 

 ...

 그것도 정말일까. 모두를 미워하는 것과 개과천선하는 일이 양립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개과한다는 것은 바로 교활해 간다는 것의 다른 뜻이다. 그래서 그는 순수하게 미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때는 민족마저 의심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번쩍임도 여유도 없는 빈상스런 전통일까 하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가족을 미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는 또 민족을 얼마나 미워했는가. 그것은 어찌 보면 '대중'의 근사치였나 보다.

 사람들을 미워하고ㅡ반대로 민족을 그리워하라, 동경하라고 말하고자 한다.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덩어리의 그늘 속에 불행을 되씹으며 웅크리고 있는 그는 민족에게서 신비한 개화를 기대하며

 그는 '레프라'와 같은 화려한 밀탁승의 불화(佛畵)를 꿈꾸고 있다.

(lepra. 나병(癩病). 문둥병.) (밀타승[密陀僧]. 일산화연[一酸化鉛]의 별칭. 색상의 농도에 따라서 금[金] 밀타, 은[銀] 밀타 등의 명칭이 있음.)

 새털처럼 따뜻하고 또한 사향처럼 향기 짙다. 그리고 또 배양균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다.

...

성은 재채기가 날 만큼 불길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창들의 세월은 길고 짧고 깊고 얕고 가지각색이다.

 시계 같은 것도 엉터리다.

 성은 움직이고 있다. 못쓰게 된 전자처럼. 아무도 그 몸뚱이에 달라붙은 땟자국을 지울 수는 없다.

 스스로 부패에 몸을 맡긴다.

 그는 한난계처럼 이러한 부패의 세월이 집행되는 요소요소를 그러한 문을 통해 들락거리는 것이다.

 들락거리면서 변모해 가는 것이다.

 나와서 토사(吐瀉) 들어가서 토사. 나날이 그는 아주 작은 활자를 잘못 찍어놓은 것처럼 걸음새가 비틀거렸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하여 모든 것이 간단하게 끝나 버릴 아리송한 새벽이 올 때까지만이다.

 

야색(夜色)

 

한꺼번에 이처럼 많은 별을 본 적은 없다. 어쩐지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달 없는 밤하늘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귀기마저 서린 채 마치 커다란 음향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느낌이다. ...

 과연 이 한 몸은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티끌만 한 가치도 없다. 그런데도 이 야망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 불안은 뭔가. 이 악에의 충동은 또 뭔가. 신은 이 순간에 있어서 건강체인 나의 앞에선 단연 무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신을 이길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신에 대해 저주의 마음 같은 것은 추호도 갖고 있지 않다. 신을 이기겠다는 의욕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나의 이 불안감은 끝없는 환희 속에서 신의 의지, 신의 제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곻 나의 이 바윗덩이 같은 우울의 근거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전혀 불명이다. 그 원천이 내 자신의 내부에 있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나 자신에 의해 고통을 받는 것일까? 그건 우스운 이야기다.

 

 인간 세상이 온통 제멋대로인 것처럼 자꾸만 생각된다. 그것은 사실 신이 관여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한 몸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고 간섭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지녔다. 자살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수단, 시기. 유서에 대한 것 등 세세히 냉정하게 생각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나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다가 자살하지 않고 있는 것도 역시 자유다. 모든 곤란과 치욕을 견더내며 아랫배에 힘을 주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자살자들은 모두 자살하는 것의 자유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며 더 큰 고난과 치욕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는 것도 또한 자유라는 데 대한 인식을 얻은 사람들이다.

 ...

 이상하게도 그들은 자살하지 않는다. 자살하지 않는다. 그들이 마음 속으로 자살을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토인처럼 검게 탄 얼굴 모습을 일별하면 그들은 결코 단 한 번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런데 나는 뭔가. 자살하는 일 자살하지 않는 일 등을 번갈아 가며 생각하는 데 몰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연히 정신 상태를 어지럽게 해서 그 때문에 몹시 비관하거나 실망하는 등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불행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나의 일생은 끝나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산다는 것이 이 얼마나 불쾌와 고통의 연속인가 하는 것에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야색은 권태로운 경치를 한층 더 권태롭고 혼연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방대한 공포의 광경마저 내장한 채 버티고 있다. 이러한 우매한 자연에 대해서 나는 언제까지나 털끝만 한 친밀감도 발견할 수 없다.

 

단상(斷想)

 

(1)

 

나의 생활은 나의 생활에서 1을 뺀 것이다.

나는 회중전등을 켠다.

나의 생활은 1을 뺀 나의 생활에서 다시 하나 1을 뺀다.

나는 회중전등을 끈다.

감산이 회복된다ㅡ그러나 나는 그것 때문에 또 다른 하나의 생활을 잃어버린다.

나는 회중전등을 포켓 속에 집어넣었다.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다. 나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빈둥빈둥ㅡ나의 사상마저 빈둥거리게 하기 위해 회중전등이 포켓 속에서 켜졌다.

나는 서둘러야 한다. 무엇을?

나는 죽을 것인가? 그게 아니면 나는 비명의 횡사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내게는 나의 생활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생활의 국부를 나는 나의 회중전등으로 비추어본다.

1이 빼어져 나가는 것을 목전에 똑똑히 보면서ㅡ나는 나에게도 생활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2)

병자가 약을 먹고 있다.

병자는 약을 먹지 않아도 죽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은 약을 먹어도 건강하기 때문이다.

 

(3)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ㅡ이 편지 읽는 대로 곧 답장을 보내 주세요ㅡ

단지 이 한마디만을 써서ㅡ

그러자 답장이 왔다.

ㅡNo, 이것을 Yes로 생각하세요ㅡ

No 이것을 번역하면 '아니다'

Yes 이것을 번역하면 '맞다'

'아니다'를 '맞다'로 한다면 아무리 '맞다', '맞다'라고 해본들 이 '맞다'는 '아니다'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니다'나 '맞다'나 매한가지다. 어느 쪽이든 '아니다'인 것이다.

결국 No는 Yes가 있어서 비로소 No가 되며 Yes는 No가 되는 것이다.

...

 

(9)

여자의 손은 하얗다. 그리고 파란 줄이 잔뜩 있다.

여자는 그 파란 줄 하나를 선택한다. 앞으로 간다 갈라진다.

여자는 그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앞으로 간다. 또 갈라진다.

여자는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 앞으로 간다. 역시 갈라진다.

ㅡ지팡이로 해봐야지ㅡ

물론 지팡이라도 쓰러뜨려 보지 않는 이상 어떤 지식으로 어떤 감정으로 어떤 의지로 길을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No와 Yes 두 통의 편지를 써서 지팡이를 쓰러뜨려 봉함에 넣는다.

그리고 또 지팡이를 쓰러뜨려 주소를 쓴다. 그리고 또 지팡이를 쓰러뜨려ㅡ

ㅡ당신은 Yes라고 말했군요. 고맙습니다ㅡ

ㅡ그치만 그게 정말 Yes인지 아닌지는 이걸 쓰러뜨려 봐야 알지요ㅡ

아ㅡ아무리 쓰러뜨려 본들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을까?

 

(10)

누군가가 밥을 먹고 있다. 몹시 더러운 꼴이다.

그렇다. 분명히 밥을 먹는다는 것은 더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라고 하는 작자가 바로 내 자신이라면 이걸 어쩐다?

 

(11)

나는 매일 아침 양치질을 한다.

나는 또 손톱을 깎아 마당 가운데 버린다.

나는 폐의 파편을 토한다.

나는 또 몸뚱이의 도처가 욱신거린다.

나는 서서 오줌을 갈기면 눈이 녹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또 내가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소리를 질러본다.

내일이 오늘이 될 수 없는 이상 불안하다.

내일이야말로 정말 미쳐버릴거다 ㅡ나는 항상 생각하며 마음을 들볶기 때문이다.

 

나는 왜 한쪽 장갑을 잃어버렸을까?

나는 나머지 장갑도 마치 잃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내 마음대로 그것을 없앨 수가 있을까?

나는 욕을 먹는다. 한쪽 장갑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내일은 내게 편지가 오려나

내일은 좀 풍성해지려나

내일 아침 몇시쯤 나의 최초의 소변을 볼 것인가.

비애-결핍에서 출발 허무로 귀착하는 비극뿐인 자괴감

Posted by 히키신
2017. 3. 3. 23:26 글쓰기와 관련하여

김수영은 말했다. 시인은 모든 면에서 백치가 될 수 있지만, 단 하나 시인을 발견하는 일에서만은 백치가 아니라고. 윤대녕의 소설 ‘천지간’은 죽음만이 죽음을 알아보는 세상 이치를 잘 보여준다. 병자의 눈에는 병자가 띄며,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슬픈 사연은, 마음에 슬픔을 간직한 사람만이 보는 법이다. 1939년 망명지 북유럽에서 브레히트(1898~1956)는 노래했다.

해협의 산뜻한 보우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 왜 나는 자꾸 /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김광규 옮김)

브레히트는 평생 해맑은 세상을 그린 서정시를 쓰지 않았다. 이는 그가 세상의 슬픈 사연을 인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의 수모를 자기 수모로 받아들이고, 또 사람들의 슬픔을 자기 슬픔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똑같은 바다이건만 어부와 유람객의 세계가 명암으로 나뉜다. 그는 가난한 어부의 찢어진 그물이 눈에 밟혀, 돛단배 위의 아름답고 축복받은 세계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의 슬픔과 세상의 슬픔이 교호하는 가운데 문학은 태어난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문사들의 비애는 우선 생활고에서 발생한다. 자고로 문인 학사의 생활고란 경제적인 궁핍은 물론이요, 자신의 능력이 대접받지 못한다는 심리적인 수모감 때문에 가중되는 법이다. 1786년 정월 박제가는 조선 사회를 뒤흔들 만한 장문의 개혁책을 정조에게 올리면서, 끝에 “특별히 하루 휴가에 말을 받아 쓸 사람 10명을 보내주면 폐부에 담긴 생각을 모두 쏟아낼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임금에게 사자관(寫字官) 10명을 보내달라고 요구할 만큼 36살 박제가의 흉중에는 조선의 100년 대계가 꽉 차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미동도 없었고, 박제가는 그 이전이나 뒤나 규장각의 비정규직 말단 서기에 지나지 않았다. 서른 살 즈음에는 읊조렸다. “앉아서 왕도 패도 손에 놓고 논하여도 / 당장에 소금과 쌀 갖추기도 어렵구나”(坐談王覇易, 立辦鹽米難)라고. 이상과 현실, 경륜과 처지 사이의 거리가 까마득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패기가 넘쳤다. 하지만 마흔 살 즈음이 되자 세상 이치가 눈에 보였고, 패기를 자극했던 그 거리는 비애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close
지사는 쓸쓸하게 늙어감을 슬퍼하고 / 초인(楚人)은 영락하여 꽃향기 탄식하네.(志士凄凉悲老大, 楚人搖落歎芳香.)

그토록 형형했지만 어느덧 체념이 감도는 지사의 눈동자가 눈에 잡힌다. 미국 망명 시절 브레히트도 글을 팔아 극심한 생활고의 일부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침마다 밥벌이를 위하여 / 거짓을 사주는 장터로 간다.”(‘헐리우드’, 1942) 끊임없이 문학으로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했던 브레히트도 굶주림 앞에서는 글을 써 들고 시장에서 값을 흥정해야만 했다.

1735년 1월 조선 왕실에 뒷날의 사도세자가 태어났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어미 곁을 떠나 내시와 나인들 손에서 자랐다. 자라면서 부왕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었다.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이는 난폭함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 뒷날 난폭한 살생에 대해 묻는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마마께서 사랑해 주지 아니 하시기에 서글프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火)가 되기에 그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혜경궁 홍씨도 남편 사도세자의 문제점이 모두 어려서 자애를 받지 못한 때문이라고 여겼다. 부자 사이의 어긋난 인연은 끝내 1762년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한중록’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자 사이의 대화 불통과 애정 결핍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문제가 놓여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200여년의 시대와 대해를 건너뛰어 카프카(1883~1924)의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기골이 크고 독선적이었던 아버지는, 병약하고 소심한 아들 카프카를 이렇게 몰아붙였다. “난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만큼 해냈는데, 부족한 게 없는 너는 왜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 카프카는 수모감에 사로잡혔다. 합리적이고 도덕적 외양을 띤 모욕은,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저항하지 못하고 내면화하게 한다.

뒷날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에게는 세 개의 세계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하나는 노예인 자신이 사는 곳, 다른 하나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인 아버지가 사는 곳, 세 번째는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남들의 세계이다. 자기 글쓰기의 주제는 모두 아버지라고 털어놓았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벌레가 되고(‘변신’),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어 심판을 받고(‘심판’), 목적지인 성에 끝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배회하는(‘성’) 인물들은 모두 카프카의 분신들이다. 카프카의 모든 소설에는 유년기부터 축적된, 수치심에서 비롯된 비애감이 운무처럼 끼어있다.

18세기 후반 이웃 청나라에서는 ‘홍루몽’이 탄생했다. ‘홍루몽’은 청나라 전성기 금릉(金陵, 지금의 난징)의 최고 가문인 영국부(榮國府)의 몰락 과정을 여성 인물들의 생활상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임대옥(林黛玉)이다. 대옥은 여섯 살 때 엄마를 여의고 외가인 영국부로 보내졌다. 원체 병약했던 대옥은 번화한 집안의 한 구석에서 차츰 소외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녀는 외사촌 오빠 가보옥(賈寶玉)과 애틋한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은 금기시된다. 소심한 대옥은 더욱 상심하여 고개를 숙인 채 시름에 잠겨있거나,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늦봄 망종(芒種) 무렵, 집안 여인들은 모두 꽃의 신을 전송하는 화신제(花神祭)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대관원(大觀園)의 꽃나무들은 화려하게 장식되고 분위기는 들썩거렸다. 그 시간 대옥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떨어진 꽃잎들을 모아 비단주머니에 담아 장례식을 치러주다가, 거기서 자신의 운명을 느끼고 슬픈 노래를 부른다. 뒷날 사랑을 빼앗긴 임대옥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삶의 허무를 자각한 가보옥은 출가한다. 이보다 앞서 태허환경(太虛幻境)의 경환선녀(警幻仙女)는 두 사람의 운명을 “깨우친 이는 불문에 몸을 숨기고 / 어리석은 자는 헛되이 목숨 버리리”(看破的遁入空門, 痴迷的枉送了性命)라고 예언했는데, 이것이 곧 ‘홍루몽’의 주제이다. ‘홍루몽’ 비애의 근원은 허무이다.

프란츠 파농(1925~1961)은 “식민지 사회는 본질적으로 병적이고 신경증 사회이며, 이는 개인에게 그대로 전이된다”고 했다. ‘예기(禮記)’는 “망한 나라의 음악은 슬프면서 옛일을 떠올리니, 그 백성들이 괴롭기 때문”(亡國之音, 哀以思, 其民困)이라고 말한다. 이들 말대로라면, 식민지 현실을 회피하지 않은 우리 문학은 본질적으로 병적이며 슬플 수밖에 없다. 망국의 망명자 신채호(1880~1936)는 백두산을 찾아가는 길에 이렇게 읊조렸다.

인생살이 마흔이 너무나도 지루해라 / 가난과 병 이어져 잠시 아니 떨어지네 / 그중 가장 한스러운 건 물과 산 다한 곳에서도 / 목 놓아 통곡하고 노래하지 못함일세.(人生四十太支離, 貧病相隨暫不移. 最恨水窮山盡處, 任情歌哭亦難爲.)

조국의 땅이 다한 곳에 이르러서도 망국의 지식인은 마음껏 노래하지도 목 놓아 통곡할 수도 없었다. 신채호는 터져 나오는 비탄도 흘러내리는 피눈물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출처 : 경향신문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25) 비애-결핍에서 출발 허무로 귀착하는 비극뿐인 자괴감

원문보기:
http://m.khan.co.kr/view.html?artid=200807041739335&code=900305#csidx460a099960262cd96657ec0c1098189

'글쓰기와 관련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말테의 수기  (0) 2017.03.05
이상 전집 4. 수필 외  (0) 2017.03.05
안티고네 (소포클레스)   (0) 2017.03.02
이상(李箱)  (0) 2017.02.27
자주 쓰이는 라틴어 인용구  (0) 2016.12.09

염세주의 厭世主義/ Pessimism

Posted by 히키신
2017. 3. 3. 21:44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나는 모든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다. 나는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증오한다." - W. C. 필즈

한자 뜻풀이대로 세상 모든 것, 특히 인간과 그 사회에 대한 것들을 싫어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상으로 보통 비관주의와 허무주의가 안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을 때 이르는 가치관이다. 영어로는 페시미즘(Pessimism)이라고 한다.

염세주의적 사상은 주로 인간 사회의 모순이나 부조리함 등에 실망하여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체적으로 염세주의자들의 사회적 혐오가 동반되며, 현실적인 사회구조의 헛점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실제로 이야기를 해보면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지만 논리가 확립된 경우 그렇다고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긍정적인 부분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염세주의는 동시대에 환멸감을 느낀 젊은이, 불행을 체험한 개인, 불행 속에서 성장한 세대에 발견된다. 즉 젊은이는 세상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데 그런 낙관주의가 환멸을 겪은 후에 염세주의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염세주의에도 여러가지가 있으며, 외향적 염세주의자라고 항상 사회 파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내향적이라고 해도 그 끝이 항상 자살인 것은 아니다. 염세주의자에겐 자살(또는 그 행위)조차도 네거티브하게 볼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염세주의자 중 외향적인 사람들은 칼 마르크스처럼 기존 사회의 탈피를 위한 이론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염세주의를 작품에 반영하는 예술가는 염상섭 등이 있으며, 문학 중에서도 이를 주제로 쓴 디스토피아는 꽤 찾아볼 수 있다. 비극의 카타르시스와 일맥상통한다는 설이 있다. 루쉰이 염세주의적이라는 해석도 있다.

+

염세주의 철학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세상을 바꿔보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진정한 발전은 문제를 인식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지성이 문제다. 순수하지 않은 지성은 그것의 원인이 되는 의지에 구속되어 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런 의지를 거부한다. 의지로부터 분리되면 될수록 지성은 순수한 면모를 갖춰나간다. - 97p

그런데 우리는 왜 굳이 자기 자신의 내면을 알아야 할까? 왜 굳이 내면의 의식 세계와 관련한 순수한 지성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것 없이도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삶은 가치를 모르고 살다가 허무하게 죽어가는 가련한 인생이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은 그런 삶을 극복해보자는 의도에서 시작한다. - 98p

지식이나 통찰력의 증진은 경험의 결과이며 한편으로는 우리의 관점을 부단히 변화시키는 삶의 단계를 거쳐 지나가는 여러 가지 변화의 결과이다. 그것에 의해 사물들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면을 보여준다. 이렇듯 정신력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로운 진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며 인생에 늘 신선한 매력을 준다. 그러는 가운데 동일한 것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 103p

쇼펜하우어는 "내적인 재보 중에서도 행복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라고 말한다. 명랑한 마음이 행복의 관건이다.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명랑한 마음만 있으면 모든 것은 즐거운 상황으로 변한다. 그래서 마음 속에 명랑함이 들어오면 그것을 소중하게 다뤄 고이 간직해야 한다. 명랑함이 다시 나가지 않도록 온 정성을 쏟아 보듬어야 한다. 명랑함을 잃으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삶이 불행에 빠지면 살기 싫어지는 법이다. 삶은 그 순간 위기에 처한다. - 145p

<지극히 인간적인 삶에 대하여>(이동용 지음 / 동녘 / 2015.04.)

*참고 : http://omn.kr/ec5j 오마이뉴스, <김성호의 독서만세 62. 누가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라 하였나>

안티고네 (소포클레스)

Posted by 히키신
2017. 3. 2. 20:26 글쓰기와 관련하여

​​​​​​​​​​​​​​​​​​​​​​​​​​​​​​​​​​​​​​​​​​​​​​​​​​​​​​​​​​​​​​​​​​​​​​​​​​​​​​​​​​​​​​​​​​​​​​​​​​​​​​​​​​​​​​​​​​​​​​​​​​​​​​​​​​​​​​​​​​​​​​​​​​​​​​​​​​​​​​​​​​​​​​​​​​​​​​​​​​​​​​​​​​​​​​​​​​​​​​​​​​​​​​​​​​​


​​폴리네이케스의 시체 앞에 선 안티고네
​​​저자 소포클레스
원제
ντιγόνη
언어 고대 그리스어
장르 비극​​

​《안티고네》(그리스어: Ἀντιγόνη)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기원전 441년에 만든 비극이다. 테바이의 왕 크레온과 어린 소녀 안티고네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안티고네는 테베의 오이디푸스 왕의 딸이다.

소포클레스가 만든 희곡은 123편이나 전해지는 것은 7편이며,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왕과 함께 오랫동안 공연되어 왔다.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B.브레히트와 프랑스의 극작가인 장 아누이에 의해 새로 쓰여져 공연되었다.

줄거리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의 딸이다. 아버지이자 왕인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한 채로 떠돌아 다니게 되고, 두 오빠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 왕권을 놓고 다투다 모두 죽는다. 그리하여 안티고네의 삼촌인 크레온이 왕이 된다.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만 성대히 장례를 치러주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는 들에 그냥 버려두라는 포고를 내린다. 안티고네는 혈육의 정에 이끌려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들에 버려진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몰래 묻어준다. 이 사실을 안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생매장형에 처한다. 안티고네를 연모하던 크레온 왕의 아들 하이몬도 안테고네를 따라 죽기로 결심하는데 크레온은 아들이 죽게 된 것에 놀라서 안티고네의 생매장 처형지로 달려간다. 하이몬은 아버지를 보자 격분하여 칼로 찌르려고 하고 크레온은 도망친다. 하이몬은 자살하고 이 사실을 안 크레온왕의 아내 에우리디케도 침대에서 자살한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인 구조를 택하고 있으며 그 어떤 극작품보다 정교한 플롯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은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압축된 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모든 내용이 안티고네의 큰오빠이며 크레온의 생질인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이란 단일한 사건을 중심으로 빈틈없는 인과관계의 맥락 속에서 치밀하게 전개된다.

<안티고네>의 내용은 이 작품과 더불어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 왕>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연결된다. 오이디푸스가 죽고 난 후에 오이디푸스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안티고네>에서 펼쳐진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간의 불화가 깊어져 치열한 싸움이 진행된다. 결국 그들은 서로의 목숨을 빼앗게 된다. 테베의 왕인 크레온은 조국인 테베를 상대로 싸움을 벌였던 조카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들판에 그대로 방치하고 매장을 금지했으며,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매장을 금하는 크레온의 명령에 모든 백성들은 침묵한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안티고네는 테베의 왕인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오빠의 시체를 묻어 주기로 결심한다.

크레온의 명령과 경고에 대한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대사로 <안티고네>는 시작된다.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둘러싼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 즉 신의 법을 크레온 왕의 명령보다 우위에 두는 안티고네와, 국법을 고집하는 크레온의 갈등이 이 극의 가장 근원적인 갈등이다.

안티고네는 동기간의 사랑으로 인해 왕명을 거역하는 인간이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인간이고 어느 한순간도 천박하고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리하여 라캉은 이 작품을 가장 숭고하고 가장 완벽한 예술 작품 중의 하나이며 여주인공 안티고네는 “지상에 나타난 인물 중 가장 고결한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고대 자연법사상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안티고네는 양심(자연법)과 국왕의 명령(실정법)의 대립 속에서 양심을 선택,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묻어주려고 하다 형사처벌되었다.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반대하다는 의미의 안티(Anti)라는 말은 안티고네에서 유래된 말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불경 숫다니파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Posted by 히키신
2017. 3. 2. 17:31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하여 존재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행위에 매여 있다.


<무소의 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고, 살아 있는 그 어느 것도 괴롭히지 말며,
또 자녀를 갖고자 하지도 말라. 하물며 친구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만남이 깊어지면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
사랑으로부터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친구를 좋아한 나머지 마음이 거기 얽매이게 되면 본래의 뜻을 잃는다.
가까이 사귀면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집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나무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 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숲속에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동행이 있으면 쉬거나 가거나 섰거나 또는 여행하는 데도 항상 간섭을 받게 된다.
남들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동행이 있으면 유화와 환락이 따른다. 또 그들에 대한 애정은 깊어만 간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싫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남을 해치려 들지 말고, 무엇이든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출가한 처지에 아직도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수행하는 재가자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흔히 있다. 남의 자녀에게 집착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잎이 진 코빌라라 나무처럼, 재가 수행자의 표적을 없애버리고 집안의 굴레를 벗어나 용기 있는 이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는 친구를 얻는 행복을 바란다.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대등한 친구는 가까이 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친구를 만나지 못할 때는 허물을 짓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금세공이 잘 만들어 낸 두개의 황금 팔찌가 한 팔에서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와 같이, 두 사람이 함 있으면 잔소리와 말다툼이 일어나리라.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살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마음을 어지업힌다.
욕망의 대상에는 이러한 근심 걱정이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이 내게는 재앙이고 종기이고 화이며, 질병이고 화살이고 공포이다.
이렇듯 모든 욕망의 대상에는 그와 같은 두려움이 있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치 어깨가 떡 벌어진 얼룩 코끼리가 그 무리를 떠나 자유로이 숲속을 거닐 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연회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잠시 동안의 해탈에 이를 겨를도 없다. 태양의 후예가 이 말을 명심하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다투는 철학자들의 논쟁을 초월하여 진정한 깨달음의 도를 얻은 사람은 ‘나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남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알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도 말며,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친구를 멀리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널리 배워 진리를 아는, 생각이 깊고 현명한 친구를 가까이하라. 그것이 이익이 됨을 알고 의심을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유희나 오락 또는 쾌락에 젖지 말고 관심도 감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재산도 곡식도, 친척이나 모든 욕망까지도 다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은 집착이구나. 이곳에는 즐거움도 상쾌함도 적고 괴로움뿐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낚시이구나.’ 이와 같이 깨닫고,
지혜로운 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물 속의 고기가 그물을 찟듯이, 한번 불타 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눈을 아래로 두고, 두리번거리거나 헤매지 말고, 모든 감각을 억제하여 마음을 지키라.
번뇌에 휩쓸리지 말고 법뇌에 불타지도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잎이 져 버린 파리찻타 나무처럼, 재가자의 모든 표적을 버리고 출가하여 가사를 걸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여러 가지 맛에 빠져들지 말고 요구하지도 말며 남을 부양하지도 말라. 누구에게나 밥을 빌어먹고 어느 집에도 집착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음속의 다섯 가지 장애물을 벗어 던지고 온갖 번뇌를 버리고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욕망의 고리를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전에 경험했던 즐거움과 괴로움을 모드 던져 버리고, 또 쾕과 근심을 떨쳐 버리고 맑은 고요와 안식을 얻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최고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마음의 안일함을 물리치고 수행에 게으르지 말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홀로 앉아 명상하고 모든 일에 항상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근심인지 똑똑히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집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벙어리도 되지 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빨이 억세며 뭇 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핍하고 외딴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를 따라 익히고, 모든 세상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속박을 끊고,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사귀고 또한 남에게 봉사한다.
오늘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은 보기 드물다.
자신의 이익만을 아는 사람은 추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다니파타

"숫다니파타" 의뜻은 '경들의 모음' 즉 '경집(經集)이다 '숫다니파타는 1000 여개의 게송이 5품 70경으로 되어있다.
"숫다니파타" 전체가 한문으로 번역되지 않고 오직 4품만 "의족경(義足經)이라는 이름으로 한역되었다.
"불설의족경"은 2권으로 되어있다. 인도의 재가 불자인 지견이 중국에 와서 기원후 233년과 325년 사이에 번역한것이다.

팔리어본은 팔리대장경 속에 있거니와 이 의족경 직접적인 범어 원본은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단지 한역본과 일치하지 않는 범어본 숫다니파타의 파편이 나타났는데 많은 불경과 논장 에서 이 숫다니파타가
중국어로 음역된 범어 이름으로 인용되고 있다.

숫다니파타도 한글을 비롯해 영어, 독어, 일어등의 현대어로 수차례번역되었다.
한글로 번역된 것은 두 가지가 있다. 민족사에서 일본어를 번역한것과 법정스님이 번역한 것이다.

숫다니파타는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간결하고 소박하게 담고있다.
부처님의 입김과 숨결이 풍겨오는듯한 원음으로 담겨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현학적인 교리가 없다.
해탈의 피안을 향해 구도자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 간단 명료하게 설해져 있다.

여기에서는 부처님이 멀리 있는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숫다니파타의 말씀들은 인간이 봉착하는 문제들을 통달한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인생이 고뇌로부터 해탈하는 방법과 초탈한 사람의 생활등에 대해서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다.

숫다니파타는 가장 오래된 불경중의 하나로 근본불교 사상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경전이다.

이 경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형태로 모아져있지는 않았고 각품의 경들이 따로 떨어져 다니다가
뒷날 모아졌기 때문에경전의 앞뒤가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져 있지않다.

그래서 각품의 각경을 떼어서 읽어도 된다. 이경을 읽고 우리가 어떻게 받아드려야할지 생각해 보아야한다.

불교방송의 법주사 주지 석지명스님의 교리공부 내용중에서 ---

'숫다니파타(Sutta-nipata)'는 경을 모은 집성(集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경집(經集)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은 수많은 불경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초기 불교를 이해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하여 역사적인 인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경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이 부처님 생전의 말씀을 암송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12전(傳)시킨 것이
최초의 경전 결집이라 한다. 그러다가 팔리어라는 언어를 통하여 비로소 문자화되면서 경전이
그 체제를 새로이 갖추게 되었다. 『
숫다니파타』는 바로 팔리어 성전에 들어 있는 경으로, 운문체의 짧은 시와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 부분도 있다.
마치 『법구경』과 비슷하게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은 모두 다섯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개의 경전이 그러하듯이 각 장이 따로따로 독립되어 전해지다가
어느 시기에 와서 함께 묶여진 것으로 본다. 제 3결집이 이루어진 시기인데, 그때를 대략 아소카 왕 재세시로 보기도 한다.
어떻든 이 경이 초기 경전을 대표하는 최고의 경으로 알려져 있다.

제1장의 이름이 '뱀의 장'이라고 되어 있다.
한자로 뱀 '사(蛇)'자 '사품(蛇品)'으로 되어 있는데, 경의 중간중간 노래가사의 후렴처럼
"수행자는 이 세상 저 세상 다 버리는 것이 뱀이 묵은 허물을 벗는 것 같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치료하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세상 저 세상을 모두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연못에 핀 연꽃을 물 속에 꺾듯이, 애욕을 말끔히 끊어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此岸) 저 세상(彼岸)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안으로 성냄이 없고 밖으로 세상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초월한 수행자는 이 세상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출가수행자는 모든 데서 독립되어 세상 경계에 의지하는 곳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제2장 소품(小品)에는 부처님이 아들인 라훌라를 타이르는 말이 나온다.
"라훌라야, 늘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너는 어진 이를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
모든 사람을 위해 횃불을 비춰 주는 사람을 너는 존경하고 있느냐"라고 하시자,
라훌라는 "어진 이를 가볍게 보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횃불을 비춰 주는 사람을 저는 항상 존경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또 부처님은 오욕(五欲)의 대상을 버리고 믿음으로 집을 떠나 괴로움을 없애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제3장 대품(大品)에는 출가를 권장하는 이야기에서부터 정진행(精進行)을 강조하는 12개의 짤막한 경이 들어 있는데
<바삿타>에서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 나누어진 사성 계급에 대해 사성(四姓)이 본래 평등함을 설하여
계급 타파를 밝혀 놓기도 하였다.

또 많은 바라문들과 청년들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부처님께 귀의하는 장면들도 나온다.
부처님은 이들에게 때로 "눈이 있는 자 빛을 보리라"는 말로 수행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
"눈이 있는 자 빛을 보리라"고 한 이 말은 부처님의 진리는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누구든지 눈이 있으면
사물을 보듯이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다만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이 빛을 밝혀 어둠을 물리쳤으니
누구든지 보고 싶은 사람은 와서 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제4장 의품(義品)은 여덟 편의 게송시(偈頌詩)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두 번째 이야기 <동굴>에서는 사람의 육신을 동굴에 비유하여 말하는데
"동굴 속에 머물러 집착하고 온갖 번뇌에 덮이어 미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참으로 이 세상 욕망은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여
몸에 집착한 것이 동굴에 갇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분노>에 대한 이야기로 이런 말이 나온다.
"마음으로부터 화를 내고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마음이 진실한 사람이라도 남을 비방하는 일이 있다.
비방하는 말을 들을지라도 성인은 그것에 동하지 않는다. 성인은 어떠한 일에도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는다."

제5장 피안에 이르는 길(彼岸 道品)은 열여섯 명의 바라문들이 한 사람씩 부처님께 질문을 하고
부처님이 답해 주는 문답이 전개된다.

"존자 아지타(Ajita)가 물었다.
세상은 무엇으로 덮여 있습니까?
세상은 무엇 때문에 빛나지 않습니까?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커다란 공포는 무엇입니까?"

"스승은 대답하였다.
아지타여 세상은 무명의 어둠에 덮여 있다. 세상은 탐욕과 게으름 때문에 빛나지 않는다.
욕심은 세상의 때이고 고뇌는 세상의 커다란 공포라고 나는 말한다."

제5장의 내용 중 제4장 의품(義品)만이 한역으로 번역되어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고 전품이 한역되지 않았는데
한역된 별도의 경명(經名)이 『불설의족경(佛說義足經)』이다.
두 권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역자는 인도인 지겸(支謙)이 중국에 와서 오나라 초기 곧 3세기 초엽에 번역하였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9월 (제22호) 에서 ...
------------------------------------------------------------------------------------
*출처 :

임어당(林語堂)의 차ㆍ담배ㆍ술 예찬 - 임어당,『생활의 발견』(1938) 中

Posted by 히키신
2017. 3. 2. 17:26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임어당(林語堂)의 차ㆍ담배ㆍ술 예찬 - 임어당,『생활의 발견』(1938) 中



4. 차와 교우에 대하여


인간의 문화와 행복이라는 면에서 볼 때 나는 담배와 술과 차의 발명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정과 사교와 한담을 즐기는 데 이만큼 직접적인 효력을 지닌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모두가 만남에 소용이 된다는 점이다.
둘째, 음식처럼 배가 부르지 않으므로 식사 중에도 즐길 수 있다.
셋째, 후각을 자극시켜 코를 통해서도 즐길 수 있다.

이런 담배와 술, 차를 즐기는 풍습은 한가롭게 우정이나 사교를 나누는 분위기가 아니라면 결코 발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정을 알고, 심성이 세심하면서 천성이 한가로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들을 즐기기 위해서는 적당한 상대가 있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꽃은 어떤 인물과 어울리는 정감이 있다. 빗방울 소리는 한 여름 산사에서 듣는 것이 제격이다. 또 어떤 경치는 그에 알맞은 여성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즉 사물의 기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물에는 저마다 정감이 있어서 적당한 상태와 함께 하지 않으면 제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성격이 잘 맞는 친구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온 정성을 기울여야만 한다. 마치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유지하고자 애쓰고, 바둑의 고수가 천리가 멀다 않고 적수를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분위기란 이처럼 중요하다. 함께 즐기고자 하는 친한 친구가 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와 즐기고자 하는 종류가 다르면 그에 알맞은 친구를 선택해야 한다. 학문과 사색을 즐기는 사람과 운동을 같이 하려 하거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을 음악회에 초청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이다.



차와 함께 나누는 마음


차를 즐기는 핵심은 그 색채와 향기와 풍미를 감상하는 것이며, 그 만드는 원칙은 청순, 건조, 청결에 있다. 따라서 차를 마시는 데는 조용한 분위기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차에 대한 평론서인 "다소"에서는 차를 마실 때 어울리는 분위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도 손도 한가로울 때
시를 잃고 난 후 피로할 때
마음이 산란해졌을 때
음악을 감상하고 있을 때
노래가 끝났을 때
휴일에 집에 있을 때
그림을 감상할 때
깊은 밤 대화를 나눌 때
아름다운 벗이나 고운 애인과 함께 할 때
소나기가 내릴 때
잔치가 끝나고 손님이 돌아간 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한적한 별장에 있을 때

차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냉철한 머리로 세계를 관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위가 소란스럽거나 신통찮은 사람이 시중을 들거나 하면 맛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무심코 마셔 버리게 되고 만다. 그래서야 어찌 차의 참맛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함께 마시는 상대도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란스러워지고, 차의 고상한 매력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혼자서 차를 마시면 속세를 떠났다고 하며, 둘이서 마시면 한적하다고 하고, 서너 명이 마시면 유쾌하다 하며, 대여섯이 마시면 저속하다고 하고, 예닐곱이
마시면 비꼬는 말로 박애라고 한다.

또 차를 마실 때 커다란 주전자에서 거듭 따르거나, 단숨에 꿀꺽 들이마시거나, 식은 차를 데워 마시거나, 진한 차를 원하는 것은 심한 노동 끝에 배를 채우고자 하는 농민이나 노동자의 기갈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차의 풍미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리하여 예로부터 다도에 정통한 사람은 깨끗한 심신을 갖춘 다음 손수 차를 끓여내는 즐거움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다도처럼 까다로운 의례로 발달하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평온하고 고상한 취미로 승화될 수 있다. 그것은 수박 씨를 깨무는 것처럼 차를 끓이는 행위조차 차를 마시는 즐거움만큼의 만족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옛날 채양이란 사람은 늙어서 차를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손수 차를 끓이고 그 내음을 맡은 즐거움을 가졌다. 또 주문보라는 학자는 매일 여섯 차례씩 정해진 시간에 차를 끓여 마시고, 죽을 때 자신의 관에 찻주전자를 넣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이렇듯 스스로의 정결한 마음과 취미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차이지만 다음과 같은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도를 갖춘다면 그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차는 순하여 냄새가 옮기 쉽다. 그러므로 술이나 진한 향이 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둘째, 차는 시원하고 습기가 없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
셋째, 차의 맛은 물에 있다. 산의 샘물이 가장 좋고, 냇물, 우물물이 순이다. 혹 논물이라도 방죽의 물이라면 본래 산간의 물이므로 괜찮다.
넷째, 진귀한 찻잔을 감상할 때는 조용한 친구와 함께 한다.
다섯째, 일반 차의 순수한 빛깔은 엷은 황금색이다. 검붉은 색깔의 차는 우유나 레몬 등 향이 강하여 차의 맛을 지울 수 있을 만한 것을 넣어서 마셔야 한다.
여섯째, 좋은 차에는 뒷맛이 있다. 그것을 마시고 나서 30초쯤 지났을 때, 차의 성분이 침샘에서 작용하는 신간이 지난 뒤에 느껴지는 맛이다.
일곱째, 차는 신선한 것을 끓여 곧 마셔야 한다. 그리고 한번 따를 뒤에 나머지도 너무 오랫동안 두어서는 안 된다.
여덟째, 차는 갓 길어온 물로 끓여야 한다.
아홉째, 순수한 차에 다른 것을 넣는 것은 좋지 않다. 단지 사람에 따라서 약간의 향료를 넣는 것은 괜찮다.
열째, 최상의 차에서는 마치 갓난아이의 살갗처럼 미묘한 향이 있다.




5. 담배와 향에 관하여 - 임어당(林語堂)

번역출처: http://infol.isfreeweb.com/?mid=friend&listStyle=webzine&document_srl=4954



오늘의 세계는 끽연가와 금연가의 둘로 구분된다. 끽연가가 금연가에게 다소의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방해가 육체적인 것인 반면, 금연가가 끽연가에게 끼치는 방해는 정신적인 것이다. 물론 끽연가에게 간섭하지 않으려는 금연가도 많이 있으며, 부인들은 남편들이 침대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참아낼 수 있도록 훈련할 수도 있다. 이것은 결혼이 행복스럽게 잘 되어가고 있다는 가장 정확한 증거다.

그러나 금연가가 인류 최대의 쾌락의 하나를 잃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도덕적으로 우수하다든가, 무엇인가 자랑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든가 하는 억측이 왕왕 이루어지고 있다. 끽연이 도덕적약점이라는 것은 나도 서슴치 않고 인정하지만, 그 반면에 약점이 없는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경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약점이 없는 인간은 신용이 안 간다. 그러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늘 근직 그대로이며, 실수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끽연가보다 그 습관은 대체로 규칙적이고 생활이 기계적이며, 언제나 이성이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

나는 이성적인 인간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완전한 이성인이라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러므로 재떨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집에 들어가면 언제나 마음이 조마조마하며 불안해 죽을 지경이다. 방은 대체로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고, 쿠션은 일정한 장소에 놓여 있고, 집안사람들은 새색시 모양으로 단정하고, 인정미라곤 찾을 길도 없다. 그러면 나도 대번에 손님티를 낸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불유쾌한 행동이다.

린위탕(林語堂(림어당),
1895.10.10~1976.3.26)

중국의 소설가 겸 문명비평가. 음운학(音韻學)을 연구하고 루쉰[魯迅] 등의 어사사(語絲社)에 가담하여 평론을 썼다. 자유주의자로 불리며 세계정부를 제창하였다. 소품문지(小品文誌) 《인간세(人間世)》 등을 창간, 소품 문을 유행시켰으며, 평론집을 발표해 영국에 중국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본명 위탕[玉堂]
국적 중국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푸젠성[福建省] 룽치[龍溪]
주요저서 《나의 국토 나의 국민》(1935) 《폭풍 속의 나뭇잎》(1941)

원이름은 위탕[玉堂]. 푸젠성[福建省] 룽치[龍溪]의 가난한 목사 집안 출신. 상하이[上海]의 성 요한대학[聖約翰大學] 졸업 후 베이징 칭화학교[北京淸華學校] 영어교사가 되었다. 1919년 하버드대학에 유학, 언어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1921) 예나, 라이프치히 두 대학에서 수학했다.

1923년 귀국하여 국립 베이징대학 영문학 교수가 되었는데, 음운학(音韻學)을 연구하는 한편 루쉰[魯迅] 등의 어사사(語絲社)에 가담하여 평론을 썼다. 1926년 군벌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아모이[厦門]대학 문과 주임, 이듬해 우한정부[武漢政府]에 가담하여 그 외교부 비서가 되었다.

1932년 유머와 풍자를 주장하는 《논어》, 1934년 소품문지(小品文誌) 《인간세(人間世)》 등을 창간, 소품문을 유행시켰으며, 1935년 평론집 《나의 국토 나의 국민 My Country and My People(我國土我國民)》을 쓰고, 이듬해 영국으로 가서 《생활의 발견 The Importance of Living》(1938) 등으로 중국문화를 소개하였다. 소설 《Moment in Peking(北京好日)》(1937) 《폭풍 속의 나뭇잎 A Leaf in the Storm》(1941) 등에서는 근대중국의 고민을 표현하였다.

영문 저작으로는 모국문화의 옹호, 중국문으로는 모국의 속물성(俗物性)을 풍자하였으며, 뛰어난 세계문화 창조에는 상식 ·이성(理性) ·생활감정 등을 교묘하게 조화하는 중국정신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미래소설 《The Unexpected Island》(195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자유주의자로 불리며 세계정부를 제창하였다.
이런 근엄한 도덕가들, 즉 정서라곤 전혀 없고 시적 정서라곤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끽연의 도덕적. 정신적 이익을 상완(賞煙)할 수가 도저히 없다.

그러나 우리들 애연당(愛煙黨)이 공격을 받는 것은 예술적 방면으로부터가 아니라 반드시 도덕적 방면으로 부터이기 때문에 우선 금연가보다 높은 표준에 서있는 끽연가의 도덕을 위하여 한 마디 변명의 말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는 사람은 내 성미에 맞는 사람이다. 파이프를 입에 물었을 때의 끽연가는 보통 때보다 명랑하고 사교적 이고 비교적 격의 없는 무례한 태도를 발휘하며, 때로는 그 담화에도 매우 명랑한 재치가 넘쳐흐르는 수가 있다. 어쨌든 이편과 마찬가지로 저편도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새커리①에게 전폭적으로 찬의를 표한다.

「파이프는 철학자의 입술로부터 예지를 끌어내며, 우매한 자의 입을 닫치게 한다. 파이프는 명상적이며 생각이 깊고 인자하며 허식 없는 청담(淸談)을 조성한다. 」

끽연가의 손톱은 비교적 더럽지만 마음만 따뜻하면 그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어쨌든 명상적이며 생각이 깊고 인자하며 허식이 없는 청담이라는 것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다 어떠한 희생이라도 기꺼이 바칠 것을 사양치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파이프를 입에 문 사람은 늘 행복하다는 것이며, 행복은 결국 도덕적 가치 중에서 가장 취어난 것이다.

W. 매긴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치고 아직 자살한 사람이 없다.」 파이프의 애용가는 절대로 마누라와 싸우지 않는다는 말은 더욱더 진실에 가까운 명언이다.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하지 않은가 !

파이프를 이빨 사이에다 물고 어떻게 제 마음대로 큰 소리로 마누라에게 호통을 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아무데도 없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을 때에는 자연히 작은 목소리로 말하게 된다.

끽연가인 남편이 화를 낼 때에 일어나는 현상은 화를 내는 즉시로 권련이나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불쾌한 낯을 짓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감정은 벌써 돌파구를 발견하고 있는지라, 자기의 분개나 모욕감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언제까지 골난 얼굴을 하고 있으려고 별러도 그것을 계속하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파이프에서 타오르는 고요한 연기와 냄새는 자못 기분이 좋고 은근히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연기를 내뱉고 있는 동안에 울적한 성난 감정도 숨을 쉴 때마다 내뱉어 버리게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기 때문에 영리한 아내는 이제라도 당장 울화를 터뜨리려고 하고 있는 남편의 태도를 알아챘을 때에는 공손히 남편에게 파이프를 물려주며 「자, 그런 것은 어서 잊어버리세요, 네 ! 」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이 공식은 언제나 효과 백 퍼센트다. 아내는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파이프가 실패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끽연의 예술적 문학적 가치는 우리들 애연당들이 잠시 금연하였을 때 무엇을 잃어버리는가를 상상해 보면 가장 잘 알 수 없다. 어떠한 끽연가라도 단연코 니코틴 부인에 대한 충성을 끊어 버리려고 벼르는 어리석은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 후 잠시 공상적인 양심과 싸우고는 결국 제정신으로 되돌아간다. 나도 그러한 어리적은 짓을 하여 약 3주간이나 금연을 시도해본 일이 있었으나, 3주간이 끝날 무렵에는 내 양심은 다시 정도(正道)로 되돌아가라고 완강히 꾸짖는 것이었다.


▲ 파블로 카잘스(Pablo Carlos Salvador Casals y Defillo)
나 는 다시는 아예 사도(邪道)에 빠지지 않으리라고 맹세하고 노년에 이를 때까지 길이 니코틴 신전(神殿)의 경건한 신자가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노년이 되고 보면 교풍회(矯風會) 부인들의 포획물이 될 것이 예상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그러한 불행한 노경에 들 때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의지력과 도덕감이 나에게 남아 있는 한 나는 다시는 그러한 것을 되풀이 할 생각이 전연 없다. 담배라는 유익한 발명의 덕택으로 인간에게 제공된 정신력과 도덕적 행복감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큰 부도덕이 어디 있으랴? 마치 나는 금연이라는 어리석은 짓은 구경도 못했다는 듯이 아예 다시는 그런 짓은 되풀이 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의 위대한 생물화학자 할데인에 의하면, 끽연은 연류문화에 심심(深甚)한 생물학적 영향을 끼친 인류사상 4대 발명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연을 결의한 3주간, 내가 내 마음속의 보다 양식적연 자아에 대하여 비겁한 짓을 하고 또 정신을 앙양하는 위대한 무엇인가를 고의적으로 완강히 거절한 이야기야 말로 참으로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다. 이제는 그래도 당연한 이치를 붙여서 회고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도덕적 무책임감의 발작이 무슨 까닭으로 그처럼 오래 지속되었는지 나 자신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 3주간을 주야로 내 오디세이적 심리를 조이스류로 상기해 보자면 3천 행(行)의 훌륭한 호머식 시나 혹은 빽빽이 연쇄해서 1백50면이나 되는 산문이 될 것이 분명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목적부터가 싱겁기 짝이 없었다. 인간은 왜 인류와 우주의 이름에서 금연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일까? 나는 이런 상태로는 대답을 못하겠다.

하지만 생각컨대 오로지 인간이 자기에게 저항한다는 힘을 정복한다는 즐거움을 위해서만 자기 성벽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고, 또 그렇게 해서 일시적인 도덕적 정력(精力)의 과잉을 소진해 버리려고 할 때에는 왕왕 이러한 불합리한 기분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 내가 갑자기 금연을 하리라 하고 성스럽지 못한 결심을 하게 된 이유를 그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바꿔 말하면, 나는 세상 사람이 스웨덴식 체조에 탐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에게 도덕적 시련을 부과하였던 것이다. - 즉 이러한 시련은 사회를 위해서 실제로 하등의 유익한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위한 운동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성질의 것이다. 내가 자신에게 부과한 것은 확실히 이러한 종류의 사치이며 다만 그뿐이다.

물론 최초의 3일간은 소화기관의 어디인가가, 특히 상부가 이상하리만큼 힘이 빠진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이상한 감각을 없애려고 더블민트의 추잉검이나 품질이 좋은 복건차(福建茶)나 몬테세라트 산의 라임과(果)의 향정(香錠) 따위를 사용해 보았다. 이 이상한 감각은 꼭 사흘 만에 완전히 정복하여 없앨 수가 있었다.

이것은 육체에 속하는 문제로, 따라서 조금도 힘들 것이 없는 일이어서 내게는 가장 경멸할 만한 부분에 속하는 문제였다. 끽연과의 성스럽지 못한 싸움의 전부가 이 육체적인 문제에만 있는 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금연의 의미를 전연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끽연이 정신적 문제에 속해 있다는 걸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끽연의 정신적 중요성을 분별치 못하는 사람은 이 문제에 절대로 관여 할 자격이 없다.

사흘이 지한 후에 나는 제 2차적인 단계에 부닥쳤다. 정말로 정신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나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즉 끽연가 중에는 두 가지 인종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끽연가라는 명칭을 붙일 만한 가치가 전연 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 제 2단계란 있을 수 없다.

수많은 끽연가들이 전연 아무런 괴로움도 없이 담배를 끊었다는 그 「용이한 전환」이라는 말을 흔히 듣지만 그 이유를 나는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다 못쓰게 된 칫솔을 버리는 것처럼 그들이 용이하게 이 습관을 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담배맛을 전연 몰랐다는 증거다. 세상 사람들은 「의지력이 강하다」고 칭찬하지만 실은 진짜 애연가가 아니었다는 것과 일평생 한 번도 진짜 애연가인 적이 없었다는 것뿐이다. 그들에게 끽연은 아침마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체적 행위다. 이러한 행위는 심혼(心魂)을 만족시키는 성질이라곤 전혀 없는 단순한 육체적. 동물적 습관에 불과하다.


이러한 무미건조한 인종이 셀리②의 <종달새>나 쇼팽의 소야곡에 심금이 울리어 무아황홀의 경지에 과연 들어갈 수 있을까?

이러한 사람들은 끽연을 버리고도 능히 편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교풍회의 부인회원들과 함께 <이솝 이야기)라도 읽는 편이 훨씬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들 진짜 애연당에게는 교풍회의 부인회원들이나 <이솝 이야기> 남성 애독자에게는 전연 알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우리들의 경우라면 각자에 대한 불공평한 점이라든가 또는 금연의 무의미한 점이 대번에 모두 분명해진다.

우리들의 양식과 이성은 즉시로 금연에 반발을 일으키고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즉 그 훌륭한 정신적 행복, 그 예민한 공상적 지각, 그 발랄하고 풍부한 창조적 정력을 우리들 작가가 얻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하여 왜 의식적으로 의지의 힘을 행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일까?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육체적 내지 경제적으로 보아 어떠한 이유가 거기 있다는 것일까? 이러한 상태야 말로 참으로 벽난로 곁에서 벗과 청담을 마음껏 즐기거나 고서를 읽고 그 속에 있는 따뜻한 맛을 감득하거나, 문인으로 이름 있는 사람들의 말과 사상을 완전히 재현하거나 하는 일에 대하여 절대로 필요한 조건이 아니겠는가?

이러할 때 담배에 손을 내미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유일한 행위가 아닐까? 담배 대신에 추잉검을 씹는다는 것은 범죄적인 죄악이다. 이만한 정도의 일이라면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범한 몇 가지 예를 여기 소개해 보겠다.

내 친구 B가 북평(北平)에서 상해(上海)에 도착하여 나를 찾아왔다. 헤어진 지 3년만의 일이다. 북평(당시에는 北京이라 하였음)에서 우리는 흔히 담배를 피우며 밤늦게까지 정치․ 철학․ 현대 미술 등에 관하여 서로 논하는 때가 많았다. 그 친구가 이제 왔기에 우리들은 회고담에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북평에서 안 여러 교수․ 시인․ 변덕쟁이가 화제에 오르내렸다.

기발한 비평이 튀어나올 때마다 내 기분은 자꾸만 저절로 여송연 쪽으로 갔으나 꾹 참고는 그저 일어났다 앉았다 하기만 하였다. 이에 반하여 내 친구는 여송연 속에 파묻힌 채 자못 기분 좋게 도도히 논담(論談)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담배를 끊었다는 것과. 그의 방에서도 파금(破禁) 못하는 프라이드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좋은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이서 무릎을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흉금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는데 실제론 냉담히 딴 생각이 있는 것만 같은 얼굴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라는 것이 절반밖에 없기 때문에 이야기는 어쩐지 일방적으로 진전되어 얼마 안 있다가 그만 친구는 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럭저럭 완강히 버티어 최후까지 견디어 나갔다. 예의 그「의지력」으로 해서 된 이야기로 나는 이기기는 했지만 가슴에 남은 것은 다만 불행과 불쾌라는 기분뿐이었다. 며칠 지난 후 그 친구는 선중(船中)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네는 그전처럼 친밀감도 없고 발랄하지도 못하고 쾌활하지도 못하니 그게 어찌된 일이냐고 하고는, 그것은 아마 상해 생활의 탓이 아니냐고 하였다. 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날 밤 담배를 피우지 않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어느날 밤, 어떤 인텔리들의 클럽 집회가 있었는데, 이 회는 언제나 몽롱한 담배 연기에 싸이는 것이 예사였다. 성대한 식사가 끝난 후에는 대게 회원 중의 한 사람이 논문을 낭독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날 방은 C의 차례로서 논제는 「종교와 혁명」이라는 꽤 기발한 비평을 포함한 특색 있는 것이었다. 그 논평에 풍옥상(馮玉祥)은 북방파 메더디스트 교회에 입신(入神)하였는 데 반하여 장개석(蔣介石)은 남방파 메더디스트 교회에 입신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을 지적한 곳도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오패부(吳佩孚)는 머지않아 서방파 메더디스트 교회이 입신할 게 아니겠느냐고 비꼬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기발한 비평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담배연기는 자꾸만 자욱해질 뿐, 방안의 분위기 그것에 쓸데없는 망념이 싸여있는 것만 같이 나에게는 생각되었다.

회장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던 시인 H는 물고기가 거품을 뿜는 것처럼 그 육중한 공기 속으로 연달아 담배 연기 동그라미를 내뿜으면서 사색에 잠겨 자못 유쾌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으로, 나는 마치 신의 버림을 받은 죄인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금연의 무의미함이 나에게 자꾸만 분명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분명하게 의식된 순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제 정신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금연하게 된 이유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하였으나, 수긍할 만한 이유라곤 무엇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집회가 있은 후, 내 양심은 신령을 좀먹기 시작하였다. 나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상상력을 동반치 않은 사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는 상상력이 무미건조한 금연이라는 파익(破翼)을 타고서 무슨 수로 허공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겠는가?


▲ 영화배우 김지미 씨
그 후 어느 날 오후, 나는 어느 부인을 방문하였다. 마음속으로는 그때 벌써 재 개종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 외에 그 누구도 방안에 없었다. 나는 그녀와 진정한 밀담을 할 작정이었다. 그 젊은 부인은 책상다리한 무릎에다 한쪽 팔을 괴고 조금 앞으로 몸을 수그리고는 그 무엇을 생각하는 듯한 태도와 가장 우아하고 고운 맵시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이제야 정말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 부인이 담배통을 내밀어 주기에 나는 그 한 개를 힘껏 쥐고는 가만히 빼내었다. 그 행위로 말미암아 벌써 도덕적 타락의 일시적인 발작에서 회복하였다는 것을 의식 하면서 .

돌아오는 즉시로 나는 곧 보이를 시켜 가늘게 만 「캡스란」 한 통을 사오게 하였다. 내 책상 오른편에는 한 곳만 정해 놓고 탄 자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불붙은 권련을 늘 습관적으로 그 자리에 놓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내 계산에 의하면 두께 2인치의 책상 뚜껑을 태워 뚫는 데에는 거의 7, 8년 동안이 걸리게 되는 셈이었으나 예의 그 불명예스러운 결심을 실행한 뒤 그 널판이 아직 반 센터미터쯤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볼 때마는 유감천만이었다. 그러므로 타다 남은 자리에다 또 다시 불이 붙은 담배를 놓게 된 것은 매우 기뿐 일이었다.

이제부터 또 오랫동안 걸려 2인치의 구멍을 뚫는 그 작업을 계속할 셈으로, 내 궐련은 솔솔 연기를 내면서 즐거운 듯 타들어 가며 뚫는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문학에는 술에 비하며 담배의 예찬이 비교적 적다. 풍습으로서의 끽연은 겨우 16세기에 이르러 포르투갈의 선원에 의해 수입된 것이 기 때문이다.

나는 16세기 이후의 중국 문학 전반에 걸쳐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영묘한 향초를 예찬한 어귀라곤 불과 여기저기서 산견(散見)할 수 있는 너무나도 무의미한 몇 행에 지나지 않았다. 담배를 예찬하는 서정시는 확실히 옥스퍼드 대학생에게서나 수입해 들여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은 차나 술이나 음식을 상완(賞玩)하는 그 태도에서 보더라도 명백한 것처럼, 항상 냄새에 대하여 너무나도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담배가 없었던 시대에 그들은 벌써 향을 피운다는 술법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중국 문학에서 향은 언제나 차나 술과 동일한 범주로 분류되었고 같은 기분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다. 중국 제국이 인도차이나까지 판도를 넓힌 그 먼 한대(漢代)적 옛날부터 공물로 헌납되었던 남부 여러 영토의 향은 궁정이나 부호의 가정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생활술(生活術)을 논하는 책은 반드시 몇 항에 걸쳐서 향의 종류. 성질. 피우는 법 등을 논한 것이다. 도적수(屠赤水)가 저술한 <고반여사(考槃餘事)>의 향에 관한 장(章)에 향의 즐거움을 논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_훈향(燻香)의 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유거(幽居)하는 고결한 학자들이 진리와 종교를 논할 때 향 한 줄기를 피우면 신혼(神魂)이 맑아지고 마음이 상쾌해질 것이다.

심야사경 (深夜四更)에 이르러 외로운 달이 중천에 걸리고, 냉기가 살에 스며들며 속계를 멀리하였다고 느낄 때 향은 사람의 마음을 해방시켜 주며 , 저도 모르게 한가한 휘파람이 입에서 새어 나온다.

밝은 창 옆에서 고서의 필적을 살피거나, 혹은 파리채를 손에다 들고서 한가로이 시를 읊거나, 혹은 밤에 등불 밑에서 독서삼매에 잠길 때 향은 사람의 수마(睡魔)를 몰아내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향을 「고반월(古拌月)」이라 부르는 것이다.

빨간 잠옷을 입은 여자가 남편 옆에 서있고, 또 남자가 향로에 손을 걸친 여자의 손을 잡고는 서로 비밀의 속삭임을 주고받을 때 향은 남자의 마음을 뜨겁게 하며 한층 더 애정을 북돋아 준다. 그러기에 향을「고조정(古助情))이라 부르는 것이다.

또 비오는 날 오후 낮잠을 자다 깨어 꼭 닫힌 창가에 앉아서 글씨 연습을 하면서 차의 부드러운 풍미를 맛보고 있을 때 향로는 이제 겨우 따뜻해지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윽한 방향이 사방에 떠돌며 몸을 싸고돈다. 주연을 끝내고 한참 자다 깨면 중천에 걸린 만월이 밤하늘에 교교히 빛나고 있다.

손가락을 올리어 현을 타고 청산(靑山)의 모습을 저 멀리 중공(中空)에 바라보며 사람 없는 누각 위에서 홀로 긴 휘파람을 분다. 타다 남은 향에서 피어오르는 보일까 말까 한 연기는 문에 친 발 가에 떠돌고 있다.

이러한 정경들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정경이다. 향은 또 악취를 막고 습지의 악기(惡氣)를 막는 데도 필요하여 적어도 사람이 가는 데는 어디서나 긴요한 물건이다. 가장 질이 좋은 향은 가남향(伽南香)연데 이것은 좀처럼 구하기 어렵다. 산중에 사는 사람에게는 전혀 구할 가망이 없다.

가남향 다음 가는 것은 침향목(沈香木), 일명 가라목(伽羅木)이라고도 일컫는 것으로 세 등급이 있다. 일등품은 너무 냄새가 강하고 날카로워서 자극이 심한 결점이 있고, 삼등품은 지나치게 건조하고 연기도 지나칠 정도로 많다. 양당(兩當) 6,7푼으로 살 수 있는 이등품의 냄새가 가장 온당하며 최우수품이라 할 수 있겠다.

차를 달인 후의 숯불을 향로에 넣고서 서서히 향을 피울 수도 있다. 마음이 흐뭇해진 그러한 한때는 마치 인계(人界)를 떠나 우화등선(羽化登仙), 선경에 노는 기분이 든다. 아, 이 얼마나 큰 기쁨이랴!

요새 사람들에게는 참된 방향(芳香)을 상완하는 감상력이 결핍되고 이상한 이국적인 향명(香名)만을 찾아서 몇 종류의 향을 혼합해가지고는 헛되이 고래의 향과 다투려고만 하고 있다.

침향목의 향기야말로 참으로 자연의 향기이며, 그 최상의 향기에는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가훈청향(佳蒸淸香)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부자 시인 모벽강(胃辟彊)은 재원인 그 애첩과의 생활을 그린 <영매암억어 (彰梅底憶語)>에다 그들의 향에 대한 즐거움에 관한 여러 가지 수록(朧錄)을 실었는데 다음의 글은 그 몇 구절이다.

내 애첩은 그윽한 항기가 풍겨 오는 규방에서 나와 함께 고요히 앉아 명향(名香)을 시훈(試蒸)하거나 혹은 그 품평 (品評)을 하는 때가 많았다. 소위 「궁향(宮香)」이라는 것은 그 질이 선정적이라 할 것이요. 침향목(沈香木)은 속법(俗法)이다.

흔히 사람들은 침향(沈香)을 바로 불에다 직접 놓는 수가 많은데 그러면 수지(樹脂)가 타서 방향(芳香)이 곧 사라져 버린다. 그러한 방법은 방향을 죽여 버릴 뿐만 아니라, 연기가 나서 질식할 것만 같은 취기(臭氣)를 신변에다 남긴다.

횡격침(橫隔沈)이라 일컫는 목문(木紋)이 가로 뻗은 질이 굳은 향은 가장 우수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침향(沈香)에 속하는 네 종류 중의 하나인데, 섬유가 가로 뻗은 것이 그 특징이다. 또한 철향의 별종(別種)에 봉래향(蓬萊香)이라 일컫는 향이 있는데 그것은 채 덜 핀 버섯처럼 원추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집에는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향이 늘 떨어지는 일이 없이 비치되어 있었다. 내 애첩은 연기가 보이지 않도록 약한 불 위에 고운 모래를 깔고서 그 위에다 향을 놓고 태웠다. 그 유현미묘(幽玄微妙)한 방향을 고요히 맡고 있노라면 미풍이 실어다 주는 가남(伽南)의 향기처럼, 이슬이 반짝이는 장미꽃 냄새처럼, 몹시 문지른 한 조각 호박(琥珀) 냄새처럼, 뿔로 만든 잔에 따른 물 냄새처럼 그 향기는 방안 이 구석 저 구석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이리한 방법으로 침상을 향기로 뒤덮어 놓으면 그 그윽한 향기는 여자의 살 냄새와 섞이어, 꿈속에서 까지 달콤하게 취하는 기분을 자아내 준다.


註 1) 새커리: 영국의 소설가(1811~63)2)
2) 쉘리: 영국의 시인 (1792-1822)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William Makepeace Thackery, 1811-1863)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는 상류계층의 위선을 풍자적으로 비웃는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인도 주재 영국 대표부의 한 문관의 아들로 칼카타에서 태어났다. 캠브리지 대학 졸업시까지 영국내의 여러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디킨슨과는 달리 그의 교우 관계는 상류계층의 청년들과 이루어졌다. 독일과 파리 등지에서 미술학도로서 구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여유있는 한가로운 자들이 생활에 익숙한 점도 디킨슨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 후 새커리는 신문사 설립으로 얼마 안 되는 재산의 손실을 보았으나 생활비 조달을 위해 신문사 일을 계속하였다. Pickwick Papers의 작가가 사망하였을 때 새커리가 후임 삽화담당자로 물망에 올랐으나 디킨슨이 거절하였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화이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서서히 상승시킨 잡지에 발표한 연속적 수필에 그는 익살맞은 삽화를 곁들였고 중요한 소설에서도 삽화를 넣어 생동감을 보여주었다. 결혼 수년 후 아내가 발광하자 런던 사회 계에서 관심사를 찾으려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인간성은 호평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의 생애의 온 전망은 디킨슨 전망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쉘리,『종달새에게』

오라 그대 활기찬 영혼이여!
그대는 새가 아니어라
하늘 혹은 그 가까이에서 그대 온 심장을 퍼부어
즉흥적인 기교로 풍요한 가락을 이루어내나니

더욱 높이 더 높이
땅에서 그대는 솟아올려 마치 불꽃튀는 구름 같어라
푸른 하늘을 그대는 날으며 노래하고 계속 올라가고 또 올라가며
끝없이 노래하도다

지는 해의 황금 광채 속 구름이 번쩍이는 그대는 떠서 달리니
육체를 벗어나 막 달리기 시작한 즐거움 같아라

연보라 저녁 노을이 그대가 나는 둘레에서 녹으니
마치 넓은 한낮의 하늘의 별 같아라
그대 보이지 않지만 내 듣느니 그대 예리한 기쁨이여

은빛 누리의 화살처럼 날카로워라
그 강열한 불빛은 밝아오는 흰 여명으로 흐려지고
드디어 거의 볼 수는 없지만―여전히 있음을 느끼노라

온 대지와 온 대기가
그대 소리로 요란하여라
마치 밤이 지새며 한 외로운 구름에서
달이 광채를 쏟아부어 하늘을 뒤덮는 듯

그대가 무엇인지 알지 몰라라
그대 무엇에 가장 가까우뇨?
무지개 구름에서도 이렇게
보기에 찬란한 빗방울을 쏟지는 않았도다
그대 존재에서 선율의 빗줄기를 쏟듯이

사상의 광채 속에 숨어있는 시인 같아라
자기도 모르게 찬가를 노래하자
드디어 세계가 움직여
일찍이 들은바 없는 희망과 두려움으로
공감하는 듯하여라

호화궁궐 탑속의 고귀한 처녀 같아라
은밀한 틈을 타 사랑에 불타는 넋을 달래며
사랑처럼 달콤한 가락에 자기방이 넘치여라

이슬 덮인 골짜기의 황금빛 반딧불처럼
보이지도 않게 신비한 빛을 꽃과 풀 사이에
뿌리되 시야를 가리고 마누나

스스로의 초록 잎속에 숨겨진 장미와도 같이
따뜻한 보람에 시달려 드디어 뿜어내는
그 향기가 너무나도 달게 날개달린 도적들의 얼을 빼는구나

반짝이는 풀위 비에 눈을 뜨는 꽃위에
쏟히는 봄 소나기 소리며
일찍이 존재한 즐겁고 맑고 신선한 모든 것들을 그대
가락은 능가하도다

우리에게 가르쳐다오 요정이냐 아니면 새냐
그대 아름다운 생각은 어떠한 것인가
나는 일찍이 이렇게 신성한 황홀의 향수를 쏟아내는
사랑이나 술의 찬미를 들어본 일이 없도다

혼인축가의 합창도 승리에 찬가도
그대에게 견주면 모두 공허한 자랑에 지나지 않는 것―
어딘가 결함이 숨겨진 것임을 우리는 느낀다

그대 즐거운 가락의 샘은 어떤 대상인가?
어떤 뜰 아니면 물결 산인가?
어떤 모습의 하늘 평얀가?
어떤 사랑의 그대 동포앤가?
어떤 고통의 초월인가?

그대 맑고 날타로운 즐거움엔 권태가 있을 수 없는 것
범민의 그림자가 결코 가까이할 수 없는 것
그대는 사랑하되 사랑의 서글픈 물림은 절대로 모르는 것

눈을 뜨고 있거나 자거나 그대는 죽음에 대해 우리 인간이 꿈꾸는 것보다
더 깊고 참된 것을 생각함이 틀림없다
아니면 어떻게 이토록 수정 같은 흐름으로 그댄 선율이 솟구칠 수 있는가?

우리는 앞을 보고 또 뒤를 보며 없는 것을 그리워한다
가장 진지한 우리의 웃음엔 어떤 괴로움이 지워지고
우리의 극치의 아름다운 노래는 슬픔의 절정을 말하는 것

비록 우리가 미움과 오만과 두려움을 비웃을 수 있을지라도
눈물을 무시하도록 태어난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대 즐거움에 감히 가까이할
수 있을지를 모른다

기쁨에 넘치는 온 가락의 소리보다도
책에서 찾아지는 모든 보배보다도 더
그대 재주는 시인보다 뛰어났도다 그대 대지를 비웃는 자여!

가르쳐다오 내게 그대 머리에 지닌 분명한 기쁨의 반이라도
그러면 내 입에서 흘러나올 이처럼 조화로운 영광에
세계가 귀를 기울이리 지금 내가 네게 귀를 기울이듯이




6. 어떻게 취할 것인가 - 술과 술좌석 놀이에 대하여

술이란 다른 어느 것보다 문학적으로 위대한 공헌을 했다. 또 술은 담배와 함께 절묘한 파트너로서 인간의 창조적인 정신을 일깨워준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음주의 쾌감, 이른바 거나함이란 것은 신비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 여성이 술취한 기분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저는 얼근한 기분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제일 좋고 행복하답니다.'

사실 그런 기분일 때는 의기양양하여 어떤 장애라도 극복할 자신이 생긴다. 감수성도 예민해지고 현실과 공상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는 듯한 예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런 기분은 곧 해방감이다. 정신의 해방감, 육체의 해방감. 그리하여 그것은 예술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술을 욕심내는 마음은 당연하다. 사람이 어떤 감흥을 갖기 위해서 술과 차를 마시는데, 이 두 가지는 가장 극적인 대비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가장 좋은 표현이 있다.

'차는 세상을 버린 사람과 같고 술은 기마무사와도 같다. 술은 아름다운 우정을 위해 있고, 차는 덕 있는 조용한 사람을 위해 있다.'

중국의 한 작가는 음주에 알맞는 심경과 장소를 이렇게 분류해 놓았다.

'엄격한 자리에서의 술은 유장하게 마시고,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은 로맨틱하게 마셔라. 병자의 술은 소량이어야 하며, 슬픔의 술은 취할 정도로 마셔라. 봄 술은 정원에서, 여름 술은 들판에서, 가을 술은 쪽배 위에서, 겨울 술은 집에 틀어박혀서, 밤 술은 달빛 아래서 마시는 것이다 좋다.'

또 다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취하는 데는 때와 장소가 있다. 꽃의 색향과 조화되려면 햇볕 아래서 꽃을 대하고 취해야 하며, 상념을 씻으려면 눈을 향해 취해야 한다. 성공을 기뻐하여 취하는 사람은 그 기분에 화합하여 노래를 한 곡 불러야 하고, 송별연에 임하여 취하는 사람은 이별의 저에 곁들여 한 곡의 음악을 연주하라. 선비가 취하면 수치를 면하기 위해 행동을 삼가야 하며, 군인이 취하면 위용을 높이기 위해 크게 술을 분부하여 위엄을 더해야 한다. 누각 위에서의 잔치는 서늘한 기운을 이용하기 위해 여름이 좋으며, 강물 위에서의 잔치는 의기양양한 자유 감회를 갖기 위해 가을이 좋다.'

술에 대한 여러 가지 예의 범절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비난할 점도 있다. 반면에 칭찬할 점도 있다. 비난할 점이라면 술을 억지로 권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쾌하고 허물없는 기분에서 나오는 것으로 술자리의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흥취가 술맛을 나게 한다. 한데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칫 술 많이 마시기 경쟁으로 치닫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최고의 술자리는 유쾌하고 신나게 마시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얼근하게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도도한 즐거움을 갖지 말란 법은 없다. 일자 무식이라도 시흥을 알고 기도를 하지 못해도 신앙이 있으며 술 한 방울 못해도 함께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함께 임하는 사람들의 어울리고자 하는 마음일 뿐이다.

*출처 : [이글루스] 임어당(林語堂)의 차ㆍ담배ㆍ술 예찬 - 임어당,『생활의 발견』(1938) 中 http://m.egloos.zum.com/imjohnny/v/2074082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스 속담  (0) 2017.03.07
단테  (0) 2017.03.07
에드가 앨런 포  (0) 2017.02.27
이솝 우화집  (0) 2017.02.27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0) 2017.02.27

<일상>

Posted by 히키신
2017. 3. 2. 15:22 순간의 감상[感想]

<일상>

0. 빈 담배갑과 소주병들이 늘어간다. 그럴수록 나는 어둠과 가까워지는줄 알면서도 무엇에든지 취하지 않으면 안 될것만 같네. 순간을 취하자니 영원을 잊어버릴 듯하네. 이대로도 괜찮지. 아직은...버틸만하지 않나? 글쎄, 점점 지나간 일들이 기억이 잘 나질 않아. 노래의 책이 노래를 속삭여도 흥이 전혀 돋질 않는군. 이봐, 굳이 그렇게 애쓸 필요 없어. 그건 그렇고, 올 여름은 유난히도 덥구만그래. ...

0. 주위 풍경이 비애에 젖어 있는만치 그 속의 생활 역시 비애롭다. 제각각 제멋대로 멋을 부리고 희희낙락 떠들어대는 꼴을 보면 나 홀로 딴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하다. 기쁠적보다 무력한 비애감에 빠져들적에 시가 나오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내 생활에는 안정의 시간이 너무도 짧고 하찮은 감상에 빠져있을 여유는 내겐 없다. 더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차가워지더라도 그 겉을 따사롭게 보듬을 수 있을까. 아, 피곤하구나...

0. 점점 병원이 익숙해져 간다. 병원에만 가면 꼭 세상 천지가 병든 환자로만 가득찬 것 같네. 하기사 세상이 병들었으니 병원이든 아니든 환자투성인게 당연하지. 그런데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가 안좋은 거지. 말짱해 보이는구만. 또 의사에게 사정해야만 하는건가. 어쩔 수 없지. 여기선 그네들이 왕이요 진리요 신이지 않나. 그나자나, 아침을 굶었더니 배가 고프네. 끝나고 뭐 먹을까. ...

0. 잘지내나. 그럭저럭. 언제쯤 내려오누. 글쎄.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어서. 그래. 난 다음 달이면 일본으로 간다. 잘 됬군. 학교는. 휴학. 그래 나도. 혹시 볼 수 있으면 보자. 그래. 또 연락하자. 힘들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하루종일 전화해야 겠는데. 하하, 그것도 좋지...

⁃ '16. 08. 25.

'순간의 감상[感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제 단상  (0) 2017.03.20
'15년 어느 가을 날에...  (0) 2017.03.16
성패와 확률  (0) 2017.02.27
고래  (0) 2017.02.27
2016. 08. 20.  (0) 2017.02.27

또 하루의 마감

Posted by 히키신
2017. 3. 2. 15:16 時쓰는 詩人의 始

<또 하루의 마감>

사랑도 차마 잡지 못하고
분노도 차마 힘껏 쥐지 못하네
선명하게 그려놓은 스케치는
실상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나

뭐하러 그랬을까
한 치 앞을 못내다 볼거면서
수없이 반복되는 수많은 실수의
기억에 멈춰진 순간
끊임없이 내 귀를 간지럽히는
쾅쾅거리는 소리, 아무때나 떠들어내는 소리,
쉬지않고 울어대는
차가운 소리......

...너는 무엇이 두려운가
글쎄, 두려울 것도 희망도 없는데
도대체 왜 나는 이다지도 쉽게
희미한 바람결에도 소스라치게
떨어대는가 도대체 무엇이...왜...?

⁃ 16. 08. 25.

'時쓰는 詩人의 始'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왜  (0) 2017.03.20
아름다움에 대하여  (0) 2017.03.16
<간병인의 하루>  (6) 2017.03.02
<자화상>  (0) 2017.02.26
섬 안의 섬  (0) 2017.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