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가짐

Posted by 히키신
2017. 3. 20. 22:23 순간의 감상[感想]

마음가짐.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다른 무언가가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르게 보는 것이다. 관점이 새로워지자 모든 것에 변화가 생긴다.
문제는 도대체 그 '마음'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도 모를 내 마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

들어온 것은 언젠가는 나간다. 그런데 나갈 것이 없는 빈털털이 일때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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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키신
2017. 3. 20. 22:20 순간의 감상[感想]

준비 없이 한 행동은 화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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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 미츠오 -난치병자연치유단식요법

Posted by 히키신
2017. 3. 20. 19:12 etc

고다 미츠오, <난치병자연치유단식요법>, 강호걸 옮김, 태웅출판사, 1992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치러야 합니다

-현대인을 위한 소식 건강법에서-

- '소식에 병 없다'는 것도 그것이 죽을 때까지의 습관이 되어 버려야만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시적인 전략으로서는 지속성이 없고, 다시 본래의 대식이나 포식으로 돌아가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예입니다. 중요한 것은 '소식의 습관'을 들이는 일입니다. 소식의 실행도 이런 경지에까지 가지 않고는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몸에 베인 습관에 의한 것이 크기 때문입니다. '습관이 운명을 바꾼다'는 말은 새겨둘 말입니다.

- ...그러므로 우선 그 사람의 기근의 정도에 알맞는 가르침을 설하여 현재의 단계에서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다음은 또 한 단계 높이고, 이렇게 한 단계씩 올라가서 결국은 최고의 경지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기까지는 갖가지 방편이 필요하며, 그 어느 것 하나 가벼이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로지 하나의 방편을 고집하여 원래의 목표를 잃고, 그 방편이 전부인 듯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래서는 본말전도라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건강법에 있어서도, 진정한 건강법을 처음부터 가르치면 너무 힘들어서 엄두도 못 내는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갖가지 방편을 이용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 쉽도록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건강에 이르는 문은 참으로 좁다는 것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에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
(마태복음 7장 13.14절)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20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그 빛늘 잃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현대에 와서 그 진실성의 빛이 더욱 크고 밝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와 같은 정보 범람의 시대에는 넓은 문이 너무나 많으며 또한 대중을 현혹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에서나 건강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건강법 중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건강법이라면 역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만이 있습니다.

- 미식(美食), 포식하는 자는 죽음을 재촉한다

- 기원이 소식의 실행을 가능하게 한다

- 자기암시로써 용기를 북돋우자

....
이 공복으로 건강하게 된다
이 공복으로 장수하게 된다
이 공복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몸이 된다
이 공복으로 머리가 좋아진다
이 공복으로 아름다워진다
이 공복으로 운명이 열린다
....
이런 자기암시는 단지 미식의 유혹에 닥쳤을 때만이 아니고, 식사의 전후, 취침시, 또는 냉온욕시 찬물에 들어가 있을 때, 배복운동을 하고 있을 때 등등 수시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잠재의식 속에 소식 실행의 의욕을 투입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암시의 반복은 마침내 소식의 실행을 스스로 하고 싶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무슨 일이거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으로 하고 있을 동안은 몸에 베인 것이 아닙니다. '꼭 하고 싶다'는 굳센 의지야말로 자신을 그 길로 달려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마침내 그 소망을 성취하게 됩니다. 소식의 실행도,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고 끊임없이 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면 정말로 자기의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전탁의 생활(全託의 生活)
자력으로 아무리 애써도 악습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은 이제 타력문(他力門)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길이 없겠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신불(神佛)에 전탁하는 생활을 권하기로 했습니다.
힘든 소식의 벽을 자력으로 뛰어넘는 사람은 사실 놀랄 정도로 그 수가 적습니다.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분들이 이 소식의 실행을 하셨습니다만, 그 대부분이 오래 가지 못하고 도중에 좌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분이라면 틀림없이 해낼 거야'하고 생각했던 사람도 역시 '안 되는군'하는 실망을 안겨 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지가 약한 우리들 범부는, 아무래도 신이나 부처님의 커다란 힘을 빌어서 구원을 받을 수밖에 길이 없다고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이나 부처님에 데한 믿음을 갖고 계신 분들은 그 신불께 식생활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방법을 쓰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양학의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 배운 뒤에, 대체 자기에게는 어떤 식품이 알맞으며 또한 그것을 알마나 먹으면 좋은가를, 자신의 식사를 마련해 주는 분에게 자세히 일러두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일임해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눈 앞에 차려진 식단의 내용에 대해서 영양학적으로 하나하나 귀찮게 따지지 말고, '아, 이것이 오늘 하루 내 생명을 잇게 해줄 음식이구나'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수저를 들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곧 전탁의 생활입니다.
매일 식단 내용을 자세히 따지면 당연히 여러 가지 불미한 점이 발견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자질구레한 점까지 신경을 쓰고 있으면 오히려 음식물에 구애되어 마음을 비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계속되는 정신의 긴장으로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좌절하게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주는 것은 뭐든지 고맙게 생각하고 먹으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이닙니다.
흔히 종교가들이 '어떤 음식물이든 주는 것은 고맙게 먹어야 한다.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먹는다면 결코 독이 되지 않는다'라고 설교하는 것을 간혹 듣게 되지만 여기에는 동조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감사하면서 먹어도, 꿀만두를 과식하면 혈액은 아치도지스에 빠지고 혈중의 칼슘은 줄어듭니다. 이런 영양학을 무시한 정신 일변도의 건강법 역시 한쪽으로만 치우친 것이며, 심신 상관의 법칙에서 벗어나서는 결코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양학의 공부를 먼저 충분히 한 다음에 그 지식을 일상의 식생활에 활용하는 것이 전탁의 생활로 들어가는 전제조건입니다.
그러나 범부란, 영양학을 공부하게 되면 그 영양학의 지식에 휘둘리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섭생을 착실히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식탁에 오른 식단에 대해서도 일일이 따지는 버릇을 가진 분이 계십니다.
'오늘 점심에는 해조류와 작은 생선이 없었으니 칼슘이 조금 모자랄 것 같군.', '오늘은 종일 생채소를 조금도 먹지 않았다. 이런 식단으로는 건강해질 수가 없어' 등등, 언제나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수저를 드는 겁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식단을 생각하니 과연 건강하게 되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식단은 영양 만점이라도 식사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탐욕으로 과식을 하거나 또는 야식이나 간식에 단 것을 먹기나 하여, 그날 하루의 정진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섭생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마 매일밤 후회하면서 잠자리에 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섭생지옥이라고 합니다만, 이런 식으로는 건강법을 실행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 자유는 조금도 없으니 그것은 언제나 식사에 관한 일에 구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양으로 단식을 하거나 소식건강법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매일밤 스스로 부끄러워 눈물 흘리고 후회로 땅을 치면서 잠자리에 들 바에야 무엇을 위한 건강법이라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구에되는 마음에서해방되기 위해서 전탁의 생활로 들어가도록 권하는 것입니다만, 요는 먹고 싶다고 생각되는 것이 머리에 문득 떠오르면 즉시 염불을 외우거나, 나무 묘법 연화경이라는 일곱 글자를 외워서 그 생각을 신불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자기의 뇌리에 떠오르는 상념을 신불께 맡기고 새로운 지혜를 신불로부터 얻는 겁니다. 이와 같이 그 신불의 힘에 의해서 자신이 정화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 마음은 언제나 구애되는 일 없이 자유로운 것입니다.
'오늘부터 단것을 먹지 말자'라든가 '내일부터 야식을 먹지 않는다'라는 등의 맹세를 하고 불편해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굳은 결의로 맹세를 해봐야, 한 달이 채 안 되어 허무하게 무너져버리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더구나 그 동안 맹세에 묶여 있는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런 고생을 하고 있는 것보다야 하루빨리 전탁의 생활로 들어가는 편이 좋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면 정신적인 스트레스에서도 해방되어, 그날부터 구원 받은 자유로운 마음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힘든 소식의 실행도 이로 말미암아 오래 계속되고 평생의 습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공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카프카 단편전집

Posted by 히키신
2017. 3. 19. 18:36 글쓰기와 관련하여

카프카 전집 1 - 변신[단편전집], 이주동 옮김, 솔출판사, 1997

 

*<변신>, <어느 투쟁의 기록>, <프로메테우스>, <굴>, <법 앞에서>,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어느 단식 광대>, <돌연한 출발>

*정리해둔 자료가 소실되었다. 후에 책을 구입하여 다시 정독 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카프카의 단편선을 보면 그가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였는지 실감하게 된다. 가령 '나는 어느 지역의 다리이다' 라든지 화자를 원숭이나 개 등의 동물로 하는 류의 다양한 활유(喩)가 인상적이다. 그의 작품의 난해성은 다양한 수사 기법을 활용한 측면도 일조한 점이 분명 있겠으나, 그보다는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에 '모순(paradox)'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프카 하면 떠오르는 주된 이미지로 방황, 미로 속에 갇힘, 모순 등이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의 글 곳곳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한 페이지가 채 안되거나 1~2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의 단편이 상당하다. 짧은 글이지만, 그의 사상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글들이다.

 

어느 투쟁의 기록

(4) 뚱보와 기도자와의 계속되는 대화

 - ...인간이란 황혼 속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실제 모습이 아닐까. ...

 당신은 삶의 괴로움을 아주 이상적으로 견디어내는군요.

 

시골의 결혼 준비

-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이 한 마리의 커다란 딱정벌레나 하늘가재 아니면 쌍무늬바구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런 착상을 발전시켜 쓴 글이 그 유명한 <변신>일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 선생

- "당신은 자발적으로 그 보람도 없는 일을 용인했고 이제는 역시 자발적으로 물러서고 있군요. 모든 것이 정말 옳아요!"

 

마당문 두드리는 소리

- 내가 감옥 속의 공기와는 다른 공기를 여전히 맛볼 수 있을까? 그것이 큰 문제이다. 아니면 내가 아직 석방될 전망이 있는 것인지. 그것이 오히려 큰 문제일지 모른다.

 

이웃

- 나는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반복된 '불평하지 않는다'가 묘한 울림을 준다.)

 

튀기

- 나는 그 작은 짐승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모든 이웃집 아이들은 내 주위에 빙 둘러선다.

 그러면 인간으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정말 멋진 질문들이 나온다. 왜 그런 짐승밖에 없는지. 왜 하필이면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있기 이전에도 그와 같은 동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이 외로워하는지. 그것은 왜 새끼들이 없는지.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지 등등.

 나는 대답하려 애쓰지 않는다. 나는 별달리 생각하지 않고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만족한다.

 (이 대목은 철학자 박동환의 <안티호모에렉투스> 속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연상케 한다. 박동환은 자신의 논문 <X의 존재론>에서 카프카를 여러번 인용하기도 하였다.)

 

**- 그것은 양이면서 고양이라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아 개이고 싶어한다ㅡ한 번은 내가,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듯이, 사무 및 그것과 연관된 모든 것에 빠져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고 만사를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두고 싶기만한 그런 기분으로 집에 와서 그 동물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흔들의자에 누워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내려다보았더니 그의 수북한 수염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ㅡ그게 나의 눈물이었을까, 그의 눈물이었을까? 

 

- 어쩌면 이 동물에게는 푸줏간 주인의 칼이 구원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구원을 유품인 그에게 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숨이 저절로 다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제아무리 이따금씩 분별 있는 인간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듯하더라도 말이다.

 

일상의 혼란

- 일상적인 사건 하나: 그것을 견디어내는 일이 일상적인 혼란을 초래하다.

(이 단편은 위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사이렌의 침묵

- 미흡한, 아니 유치하기까지 한 수단들도 구원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

(이 단편 역시 위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카프카의 글은 첫 문장이 매우 강렬하면서도 독자를 몰입시키는 힘이 있다. 또한 그의 글은, 위대한 작가들의 글들이 으레 그렇듯이, 상당히 깊이 있는 고뇌 속에 탄생한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다.) 

 

**프로메테우스

- 프로메테우스에 관해서 네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첫번째 전설에 따르면 그는 신의 비밀을 인간에게 누설하였기 때문에 코카서스 산에 쇠사슬로 단단히 묶였고 신이 독수리를 보내어 자꾸자꾸 자라는 그의 간을 쪼아먹게 하였다고 한다.

 두번째 전설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는 쪼아대는 부리가 주는 고통으로 자신을 점점 바위 속 깊이 밀어 넣어, 마침내는 바위와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세번째 전설에 의하면, 수천 년이 지나는 사이에 그의 배반은 잊혔고, 신도 잊었고, 독수리도, 그 자신도 잊었다고 한다.

 네번째 전설에 의하면, 한도 끝도 없이 되어버린 것에 사람들이 지쳤다고 한다. 신이 지치고, 독수리가 지치고, 상처도 지쳐 아물었다고 한다.

 남은 것은 수수께끼 같은 바위산이었다ㅡ전설은 그 수수께끼를 설명하려고 한다. 전설이란 진실의 바탕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다시금 수수께끼 가운데서 끝나야 한다. (전문)

 

밤에

- 그런데 너는 깨어 있다. 너는 파수꾼의 하나다. 너는 네 곁 섶나무 더미에서 꺼낸 타는 장작을 흔들어 바로 옆사람을 찾는다. 너는 왜 깨어 있는가?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한 사람은 여기 있어야만 한다.

 

시험

- "왜 도망치려 하는 거야? 이리 와서 앉게. 그리고 뭐 좀 마시지! 내가 한잔 사겠네!"

 그래서 나는 앉았다. 그는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나는 그 질문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너는 지금 후회하고 있겠지. 나를 초대한 것을 말야. 그렇다면 나는 가겠네." 그리고 나는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탁자 너머로 손을 뻗쳐서 나를 주저앉혔다.

 "그냥 있게나"라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시험일 뿐일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사람이 시험에 합격한 것이라네."

 

*작은 우화

- "아아." 하고 쥐가 말했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만 해도 세상이 하도 넓어서 겁이 났었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마침내 좌우로 멀리 벽이 보여 행복했었지. 그러나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마주 달려오는지 어느새 나는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모퉁이엔 내가 달려들어갈 덫이 놓여 있어." ㅡ "넌 오직 달리는 방향만 바꾸면 되는 거야"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 (전문) 

 

귀향

- 문 앞에서 오랫동안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점점 더 낯설어지는 법이다. 지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에게 무엇인가를 묻기라도 한다면 어떠할 것인가. 그렇다면 나 역시도 자신의 비밀을 간직하려는 사람과 같지 않을까.

 

돌연한 출발

-"주인나리, 말을 타고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하고 나는 말했다. "다만 여기를 떠나는 거야. 다만 여기를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나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네."

 "그러시다면 나리께서는 목적지를 아신단 말씀인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는가. '여기에서 떠나는 것.' 그것이 나의 목적지일세."

 "나리께서는 어떤 예비 양식도 갖고 있지 않으신데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따위 것은 필요 없다네." 내가 말했다. "여행이 워낙 긴 터라 도중에 무얼 얻지 못한다면, 나는 필경 굶어 죽고 말 것이네. 예비 양식도 날 구할 수는 없을 걸세. 실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 여행이야말로 정말 엄청난 여행이라는 걸세."

 (죽음을 불사한 이의 여정에는 예비 양식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짐을 가벼이 하는 편이 그에게는 보다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 개의 연구

- 내 생활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근본에 있어서 달라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 단편의 첫 문장이다.)

- 내가 이상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정말이지 결코 타락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잘 생각해보면ㅡ나에게는 생각할 만한 여유가 있고, 생각할 만한 기분이 들며, 또 생각할 능력도 있다ㅡ개란 희한한 족속이다.

(이 단편의 화자는 '개' 이며, 인간을 바라보며 조소하기도 하지만, 끝까지 읽어보면 알레고리(諭)를 활용하여 풍자한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카프카는 이러한 류의 단편을 여럿 서술하였다.)

*- 우리의 법과 제도들, 우리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몇 가지, 또는 내가 모조리 잊어버린 수많은 것들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복, 즉 따뜻한 공동 생활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그런데 내가 완전히 빠져 있는 일들이 있다. 어째서 나는 다른 개들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나의 종족들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간혹 조화를 깨뜨리는 일이 있어도, 그저 어떤 계산을 하다가 생기는 사소한 잘못 정도로 간과해버린다. 나의 마음은 늘 우리를 서로 뭉치게 하는 것으로 향해 있다. 그러나 우리 종족의 테두리로부터 우리를 잡아 끌려는 것(그것은 언제나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닥쳐오긴 하지만)에 대해서는 등을 돌린다.

-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오히려 가장 우스꽝스러운 천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뒷다리로 똑바로 서서 간다. 어유 저 꼬락서니라니! 그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그 알몸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랑거리인 것이다.

- 어린애가 하는 일은 일단 의심을 받지만 나중에는 모든 것이 인정되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어린시절의 성질을 버리지 못하고 늙은 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시절에 그 사건을ㅡ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까지 평가하고 있지 않지만ㅡ나는 언성을 높여가며 지껄여대고, 사건이 지닌 요소를 분석하며, 내가 속하는 사회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가까이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사건 규모를 측정하는 노력을 계속했었다. 나는 번거로운 일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으며, 지금도 역시 계속하고 있다. 조용하고 평범하며 행복한 생활이 단 한 번만이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끊임없이 탐구를 계속하고 해결하려고 힘을 기울였다.

- ***몇 해를 두고 언제나 맛볼 수 있는 행복에 가득 찬 청춘은 나에겐 불과 몇 달밖엔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좋다. 세상엔 유년 시절보다도 훨씬 소중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고달픈 생활에 단련되어 노경에 이른 나에게는, 정말 어린애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린애 이상으로 어린애다운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행복에 견디어낼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 내가 내 자신 속에 묻혀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와 전혀 다름이 없고, *나는 스스로 던지는 질문에 저항하며 불안에 몸을 떨고 있다.

- **"내가 자연사할 때까지 반드시 견디어낼 것이다. 불안에 가득 찬 질문에 대해서는 노년기에 느끼는 마음의 평화가 더욱 좋은 대답이 될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침묵을 지키고, 또 침묵에 싸이면서, 어쨌든 평화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려고 한다. 나는 확고한 태도로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 놀랍도록 강한 심장, 때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쇠약해지는 법이 없는 폐ㅡ이런 것은 어떤 악의에서 개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모든 질문에 대하여, 아니 우리 자신의 질문에도 저항감을 느낀다. 침묵의 보루란 바로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 물론 진리가 드러날 리는 없을 것이지만ㅡ결코 그 상태엔 이르는 법이 없을 것이다ㅡ그러나 허위에서 비롯된 심한 혼란과 같은 것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생활에서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는 현상 모두에는, 특히 가장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는 것에는 정당한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 물론 나는 그것이 철저하게 입증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ㅡ철저하게라는 말은 얼마나 엄청나게 들리는가. 그러나 저 견딜 수 없는 질문에서 나를 방어하려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 ...불가능한 것을 참아낸다는 것은 좋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이상의 요구를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두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 ...그러므로 이렇게 결론내리게 된다ㅡ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이 있으므로 우리의 머리로는 잘 해결될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일단 발생한 개의 종류는ㅡ그것이 어떠한 변종이라 할지라도ㅡ결코 저절로 소멸되는 일이 없다. 적어도 간단히 절멸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떤 종류이건 교묘히 자기 방위를 하기 때문이다.

- ...이것은 결코 신기한 일이 아니다. 신기한 것은 내 존재뿐이다.

- ***일반적으로 말해서 질문은 개들 족속의 특성의 하나이다. 모두들 혼란스레 질문을 곧잘 한다. 그렇게 해서 올바른 질문을 말살하여버릴 작정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안 된다. 젊은 세대들 가운데 질문을 하는 이 중에는 나와 같은 동료가 없다. 그리고 지금 나도 그 일원인 늙은이ㅡ이 침묵하는 축들 중에도 역시 없다. 그런데 질문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나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 우리는 토지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바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고독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사리를 곧잘 판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반 수준에 있는 개가 그다지 나쁘다고는 볼 수 없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큰 재난에서 몸을 지키자면 상당히 머리를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학문은 규칙을 세운다. 그러나 이 규칙은 단지 그 윤곽만 이해하고자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 규칙을 이해한 연후에야 비로소 이를 토지 문제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새로운 문제가 시간마다 일어난다. 새 토지는 한 조각마다 각기 특수한 문제를 갖고 있다. 자기는 얼마 동안 조용히 숨어 살 수 있으며 자기 생활은 흐르는 물과 같이 사라진다고 단언할 수 있는 자는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욕망이 날이 갈수록 현저히 줄어가는 나의 경우도 그렇다. 이렇듯 끝없는 모든 노력은 무슨 목적을 갖고 있는 걸까? 그것은 오직 내 몸을 더욱더 침묵 속에 묻어두기 위해서이며, 앞으로도 그리고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더 이상 거기에서 끄집어내어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내가 대학 내의 아카데믹한 연구에 흥미를 잃은 이유도 이와 유사하다.) 

 세월에 따른 개들의 일반적인 진보는 곧 학문의 발달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흔히 칭찬의 대상이 되어왔댜. 학문은 분명히 발달한다. 그리고 그 발달의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진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칭찬받을 만한 것이 있단 말인가? 누구나 해가 갈수록 늙어가고, 더욱 빨리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당연한 일을 훌륭하다고 칭찬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바람직한 과정이 아니므로 칭찬할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기에서 쇠퇴만을 볼 뿐이다. 그렇다고 옛 세대가 본질적으로 낫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현재보다는 젊었었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엄청난 감정이다. ...

 나는 우리 세대의 망설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수천 번이나 저녁마다 꿈을 꾸고도 잊어버린 상태이다. 다른 이유라면 모르지만, 이 수천번째의 망각 때문에 우리에게 화를 내는 자가 있을까?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밖에는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죄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우리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남의 손에 의하여 이미 어두은 그늘이 깃들이어 있는 세계에서 침묵을 지키면서 죽음을 향하여 서두르는 것이 허용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복이 있을지어다'라고.

- 그들은 모두가 자기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비록 가망 없는 연구가 항상 그렇듯이, 나름의 성과가 없고 침묵을 지키거나 혹은 교활하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 나처럼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하면서도, '밖으로 나가는 자는 아무도 없으며, 모든 혼잡스러움이란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오성이 나에게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 "이것이 굶주림이라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이렇게 나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굶주림과 나와는 언제든지 별개의 것이라, 마치 귀찮게 구애하는 자를 뿌리치는 것처럼 굶주림을 뿌리칠 수가 있다. 이것은 물론 관념적으로 한 말이며, 실은 굶주림과 나는 하나로 되어 있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존재이다.

 "이것이 굶주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말할 때, 진정 지껄이고 있는 것은 굶주림이며, 놈은 나를 이렇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정말 기분 나쁜 시절이었다! 그 당시 일을 생각하면 몸에 전율이 온다. 그것은 당시에 실컷 맛본 고통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만 해도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굶주림만이 나의 마지막 제일 강한 연구 방법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무엇인가 성취하려면 다시 한 번 그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길은 굶주림을 뚫고 지나간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최고의 행위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행위란 우리의 경우에 자유 의지에 의해 단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할 때마다ㅡ당시의 일이라면 나는 평생이 걸려도 기꺼이 더듬어보려고 한다ㅡ나는 마땅히 앞으로 닥쳐올 시대의 일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다. 이런 시도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거의 한평생을 소비해야 할 것 같다.

- 이 세계에는 허위의 주민인 나를 포함해서 그로부터 진실을 배울 수 있는 개는 하나도 없다. 아마도 진리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또한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버림받지는 않았다. 그렇다. 분명히 남에게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거부한 나 자신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뿐이고 그리고 그 때문에 죽는 것이다.

- "오늘은 사냥을 그만두지 않겠나?" 하고 나는 부탁하였다.

 "안 돼. 난 사냥을 해야만 해." 그가 말했다.

 "내가 물러나야 하겠군. 네가 사냥을 해야 할 테니까. 꼭 해야만 한다니. 넌 왜 꼭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니?" 내가 말했다.

 "그런 건 나도 몰라. 굳이 알 것도 없지. 그거야 자명하고도 당연한 일이지."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네가 나를 몰아내는 것을 미안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넌 그런 짓을 하고 있잖아"라고 내가 말했다.

 "그건 그래." 그가 말했다.

 "그건 그렇다고." 나는 화가 나서 상대방의 말을 되내었다. "그래서는 대답이 되지 않아. 사냥을 포기하는 것과 나를 쫓아내는 것을 포기하는 것 중에서 어느것이 너에게 쉬운 일이지?"

 "사냥을 포기하는 일이지." 그는 주저하지 않고 말하였다.

 "그럼 이야기가 모순되지 않니?" 내가 말했다.

 "무엇이 모순이야? 예쁘장하고 몸집이 작은 네가 나한테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정말 모르고 있다는 거니? 뻔한 일을 모르고 있다는 거야?" 그가 말했다.

 나는 이제 입을 다물어버렸다. 알 만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새 생명이, 몸서리쳐지는 생명이 내 온몸을 스쳐 지나간다. 나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생각되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징후들에게서 이 개가 가슴속 깊이로부터 하나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음악에 관한 학문은 만약 내 지식이 확실한 것이라면, 영양에 관한 학문보다 더욱 광범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기초가 훨씬 튼튼하게 보였다. 그것은 음악의 영역이 영양의 영역보다 객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탐구될 수 있다는 사실과, 전자는 단지 관찰과 체계화가 보다 큰 목적인데, 그에 반하여 후자는 실제로 유용한 결론이 목적인 데서 설명될 수 있다. 음악 이론에 대한 경외심은 영양학에 대한 경우보다 훨씬 크지만, 전자가 후자만큼 민중 속에 침투할 수 없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실제로 유용한 결론을 얻기 위한 연구, 특히 '몸'에 관한 연구는 실로 어려운 것임을 몸소 절감한다.)

 

부부

- 오늘날의 불안정한 관계에서는 종종 아무것도 아닌 일이, 어떤 분위가 결정을 내릴 때가 있다. 그러다가 또다시 아무것도 아닌 일이, 한마디 말이 전체를 해결해준다.

 

*포기하라!

- 나는 그에게 달려가 숨가쁘게 길을 물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서 길을 알려고 하는가요?"

 "네"라고 나는 말했다. "나 스스로는 길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요."

 "포기하라, 포기해!" 라고 말하면서 그는 거만하게 몸을 돌렸다. 마치 혼자 웃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이 단편은 <법 앞에서> 와 메세지의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법 앞에서>에서는 한 시골 사람이 문지기 앞에서 법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거절하였고, 시골 사람은 법이란 누구에게나 언제고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애를 쓴다. 그렇게 수 년이 흐르고 시골 사람은 지쳐 쓰러져 죽어 가면서, 문지기에게 도대체 지난 수 년 동안 나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요구한 이가 없었던 이유를 묻는다. 그에 문지기가 답한다. "이곳에서는 너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 없어. 왜냐하면 이 입구는 단지 너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나는 이제 가서 그 문을 닫아야겠네.") 

 

비유에 대하여

- 만약 현자가 '저쪽으로 가라'라고 말한다면, 그는 우리가 저편 다른 쪽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ㅡ그 길의 결과가 가치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ㅡ그 어떤 전설적인 저편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고, 그것조차도 더 이상 자세하게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우리에게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이러한 모든 비유들은 원래 파악할 수 없는 것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죽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은 다른 것들이다.

 그러자 어떤 한 사람이 말했다.

 "너희들은 왜 거부하는가? 만약 너희들이 비유를 따른다면 너희들 자신이 비유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일상의 노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그 말 역시 비유라는 것을 내기해도 좋소."

 첫번째 사람이 말했다.

 "당신이 이겼소."

 두번째 사람이 말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비유 속에서뿐이오."

 첫번째 사람이 말했다.

 "아니오, 현실 속에선 그렇소만 비유 속에서는 진 것이오."

 (이 단편은 투철한 논리로 무장한 정신으로는 현실 속에서는 인정받을 지 모르나, 현자가 말하는 전설적인 저편[불교에서 말하는 피안(彼岸)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추측된다], 즉 비유 속에서는 통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장자

Posted by 히키신
2017. 3. 17. 21:06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其殺若秋冬 以言其日消也
기살약추동 이언기일소야
가을과 겨울처럼 죽어간다는 것은 나날이 죽어간다는 것을 말한다.

其溺之所爲之 不可使復之也
기닉지소위지 불가사부지야
반복적으로 빠져들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其厭也如緘 以言其老洫也
기염야여함이언 기로혁야
폐쇄성이 편지를 봉하듯 단단함은 늙어감이 깊어 망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近死之心 莫使復陽也
근사지심 막사부양야
죽음에 다다른 마음은 다시 젊어지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출처 : http://m.blog.naver.com/ariadne0/90160162354 <한가한씨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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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산책]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 질펀한 축제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답을 얻었다

Posted by 히키신
2017. 3. 17. 20:51 etc

출처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22067241
한국경제 뉴스, 2009. 02. 21.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문학자 미하일 바흐친(1895~1975)은 '카니발' 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단순히 시끌벅적한 놀이처럼 보이는 카니발에서 문학과 인간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는 유용한 열쇠를 찾아냈다. 그의 '카니발'은 우선적으로 라블레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의 문학적인 특이점을 설명해 주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학이론을 넘어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 말로 사육제라 번역되기도 하는 카니발은 원래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사순절 직전에 행해지던 전 민중적인 제전이었다. 그것은 부활 대축일 이전 40일 동안의 금욕적인 삶을 앞에 두고 마음껏 놀아보자는 취지의 축제였다. 40일 동안이나 고기도 못 먹고 수시로 단식을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에너지를 비축하는 의미에서 실컷 먹고 마시고 춤추는 질펀한 축제를 벌였다. 오늘날 유명한 관광 상품으로 부상한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이나 베네치아 카니발,혹은 뉴올리언스의 마디그라,그리고 러시아의 마슬레니차 축제에는 이런 그리스도교적인 전통이 깔려있다.

바흐친은 카니발을 비롯한 모든 민중적인 축제의 형식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카니발은 해방된 삶이다. 카니발(모든 민중 축제) 시기에는 일상적인 생활 질서가 무너진다. 보통의 삶에 제약을 가하던 모든 금기와 구속과 제재가 일시적으로 제거된다. 사람들은 위계질서라든가 예절이라든가 하는 것은 완전히 무시하고 그저 한데 어울려 자유롭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춤춘다. 연령도 지위도 재산도 그 어떤 사회적인 규범도 사람과 사람 간의 자유로운 접촉을 방해하지 않는다. 리우 카니발에서 사람들이 거대한 가면을 쓰고 거의 벌거숭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해방과 자유분방함의 표출이다.

둘째 카니발은 거꾸로 된 삶이다. 모든 금기가 제거된 카니발 공간에서는 거꾸로 된 논리,뒤집힌 논리,반대로 된 논리가 상식을 제압한다. 왕이 거지가 되고 거지는 왕이 되며 성직자는 모독당하고 광대는 추앙받는다. 익살과 욕지거리와 불경이 경건한 기도를 대신하고 겉과 안,위와 아래,앞과 뒤,우매함과 현명함이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권위는 추락하고 엄숙주의는 조롱당한다. 카니발 퍼레이드에서 참가자들이 종종 옷을 뒤집어 입거나,성별이 뒤바뀐 의상을 걸치거나,모자 대신 양말이나 냄비 같은 것을 머리에 쓰거나 하는 것은 뒤집힌 세상,거꾸로 된 세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다.

그러면 이렇게 뒤집히고 해방된 축제의 형식에서 바흐친은 어떤 의미를 찾아냈을까. 카니발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질서를 뒤집고 권위를 조롱하는 것이 카니발의 의미는 결코 아니다. 바흐친에 의하면 그런 것은 카니발에 대한 "천박한 보헤미아적인 이해"일 뿐이다.

x
바흐친은 소란스럽고 무질서한 카니발에서 상생과 공존의 원리를 발견했다. 요컨대 카니발의 거꾸로 된 세상은 극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의 공존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사실 카니발은 시간적으로 연중 가장 심오한 고난의 시기인 사순절과 접경한다. 그러므로 카니발이 보여주는 분방함의 극치에는 곧이어 시작될 사순절의 참회와 극기가 내포되어 있다. 같은 원리에서 카니발의 모든 부정적인 의미는 긍정적인 의미와 경계를 접한다. 카니발은 긍정하기 위해 부정하고,존중하기 위해 조롱하며,올라오기 위해 내려간다. 궁극적으로 카니발 속에서 삶은 죽음을 내보이고 죽음은 또 삶을 내보인다. 그래서 바흐친은 카니발적인 세계관의 핵심을 '교체와 변화,죽음과 갱생의 파토스'라 부른다. 즉 카니발은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부활과 갱생의 축제라는 것이다.

바흐친은 이렇게 이해한 카니발을 인간 의식의 대화적인 관계로 연장시킨다. 그의 유명한 '대화주의'는 카니발 이론에서 출발한다. 대립적인 것들의 공존은 인간의 삶 자체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의 의식도 단독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인간과 부딪히고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의 의식도 끊임없이 다른 의식과의 대화를 요구한다. 사람의 삶과 관련하여 그 어느 것도 일방적인 관계 속에서는 존속하기 어렵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도 그렇고,집단과 집단의 관계도 그렇고,국가와 국가의 관계도 그렇다. 일방적이고 독백적인 관계는 종국에는 자멸로 끝날 수밖에 없다.

바흐친이 카니발에서 찾아낸 것은 결국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에 답하기 위해서는 타인이라고 하는 거울이 필요하다. 인간은 타인 속에 투영된 자기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도 사고도 모두 마찬가지다. 사랑과 증오,선과 악,진실과 거짓 등 이 모든 대립하는 것들은 상호 조명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를 드러낸다. 바흐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모든 인간은 서로를 알아야 하고,서로에 관해 알아야 하고,서로 접촉해야 하고,얼굴을 맞대야 하고,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모든 것은 서로를 대화적으로 비춰주어야 하고 다른 모든 것 속에서 되비쳐져야 한다. " 이것이 인생이다.

유한준

Posted by 히키신
2017. 3. 16. 21:07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곧 참으로 보게 되니, 볼 줄 알고 모으는 것은 그냥 모아 놓아 놓은 것이 아니다. - 유한준(兪漢雋, 1732-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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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문제] 노동의 소외 /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

Posted by 히키신
2017. 3. 16. 20:22 etc

이 당시에는 '~에 관하여 논하라' 에 대한 제대로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저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과 그에 대한 내 생각 조금정도였으니...

B+밖에 받지 못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사회철학

1. 경철수고’ 노동의 소외(疏外, alienation)에 관하여 논하라.


 마르크스는 매우 기본적인 상식즉 삶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자신의 사유를 풀어나간다그에 따르면인간은 인간적인’ 자연 존재다시 말해 인간은 역사적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연적인 존재라는 것이다여기서 자연적인 존재란 인간 역시 동물과 같이 생명에의 충동을 느끼며살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살기 위해선 먹어야 하고먹기 위해선 노동해야 한다노동을 하기 위해서 인간은 일자리를 얻어야 하고 그러한 일자리는 사회가 준다인간은 생존을 위해 사회 속에서 노동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생산물을 넘어서 생산 수단을 생산한다그러나 근대의 산업혁명 이후이러한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는 극소수의 자본가(부르주아)뿐이었고절대다수(프롤레타리아)는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채 자신의 노동력을 소비할 뿐이다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1844)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에게 있어 노동은 대상화 또는 탈현실화 됨에 따라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고 보았다이러한 소외 현상을 그는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노동 행위로부터의 소외그리고 적 본질로부터의 소외라고 말하며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인간은 다른 인간으로부터 소외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인간이 지닌 욕망이다이 욕망은 개체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인 욕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욕망(desire)을 포함하는 개념이다마르크스는 자본3권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자유의 왕국은 필연(필요)의 왕국을 토대로 꽃피울 수 있다고 하였다쉽게 말해 인간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이 충족된 이후 궁극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필수적인 욕구와 사회적으로 구성된 욕망을 분리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앞서 언급했듯이 필연의 왕국에서 말하는 인간의 욕구 속에는 자연적(필수적욕구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개된 욕망이 함께 뒤섞여있다존재의 필수적 욕구는 분명 충족되어야 마땅할 것이다그러나 사회적 욕망은 그 사회에 의해서 끊임없이 자극되고 생산되므로 한계치가 없다고 본다또한 이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희생과 결핍즉 타자의 소외를 낳게 마련이다

 본인은 마르크스가 자본제 사회의 모순즉 노동자들의 소외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궁극적 해결 방편으로 제시했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연대그리고 이를 통한 공산사회에로의 혁명’ 만으로는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조금 부족함이 있다고 본다거기에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먼저 전제되어야 하며나아가 이를 극복해낼 수 있는 방안에 관한 철학적 탐색작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회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엮여 있으므로 간단히 도식화된 해결방안으로는 근본적 문제 해결에 이르기는 힘드리라고 본다특히 화폐가 최고의 가치라고 여겨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욕망을 토대로 하여 계속해서 발전해가므로이 욕망의 절제나 해소를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보다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적으로 구성된 이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깊은 궁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과연그것은 가능한 문제인가? 그것의 근원적 해소가 불가능하다면적절히 다스릴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2.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에 관하여 논하라.


 엄밀한 사료비판을 통해 근대 사학을 확립한 랑케는 역사란 결국 객관적인 사실이며있었던 그대로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보았다그러나 E.H.카에 따르면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대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결국 역사를 판단하는 기준은 전적으로 역사가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함에 있어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이는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실(事實)에 기술자의 해석(interpretation)이 가미된 사실(史實)이 되는 순간이며이를 통해 후대인들은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이를 잘 숙지한 채 보다 객관적이며 비판적 사고를 유지한 채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살펴보자.

 주지하듯이마르크스의 사관(史觀)은 유물사관이다그에 따르면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한 사회의 실제적 토대를 이루며그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다시 여기에 조응하는 일정한 사회적 의식의 형태들이 출현한다다시 말해 생산관계의 총체인 사회의 하부구조가 역사적으로 먼저 발생하였고이후 생산력의 발달로 인해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의 의식구조와 같은 상부구조가 결정지어진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는 생산구성의 3요소로서 노동력과 노동대상그리고 노동수단을 들고 있다그에게 있어 생산력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포함하는 개념이며이러한 생산력은 인간이 도구를 만듦과 동시에 자연과 관계 맺는다한편 인간은 사회 속에서 함께 생활하며 존재하므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이 또한 생산관계와 조응한다그러나 이러한 생산관계는 일정한 발전 단계에 도달하면 기존의 생산관계들즉 소유 관계들과 모순을 빚게 되며바로 이때 사회적 혁명이 발생한다그의 유명한 역사발전 5단계설은 이러한 사유를 토대로 성립되었다.      

 역사란 곧 시간의 흐름이다마르크스는 시간의 흐름다시 말해 사회의 흐름을 혁명적 순간을 기점으로 5단계로 나누어 말한다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과연 역사를 그렇게 단순하게 재단할 수 있는가역사는 진보하는 것인가

 마르크스는 물질적 하부구조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이러한 사회의 물질적 토대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전해왔으므로 역사는 진보해왔다라고 생각한 듯하다그러나 이러한 단선적인 진보사관은 한 가지 편견을 가져다 줄 우려가 있다원시 전통사회는 미개하며 서구적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더 진보된 사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과연 이러한 생각은 타당한가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역사의 제1전제로 역사를 형성하기 위해서 인간은 생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점을 들고 있다이러한 대전제의 측면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자본주의의 첨단에 있다는 미국의 경우 모든 국민이 생존을 보장받으며 생활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우리는 차라리 원시 공동체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몇 몇 소수국가에서의 삶이 훨씬 이 제1전제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화폐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굴러가는 사회이며화폐를 쥐지 못한 인간은 그 사회에서 제대로 된 생존조차 보장받기 어렵다.

 서두에 언급했듯이한 사관은 수많은 사관 중 하나에 불과하다비트켄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지식을 절대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사회는 과거의 기준을 수정하고 재검토하면서 발전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간단히 말하자면 보수와 진보가 함께 가는 것이다나는 이러한 측면에서 역사는비코의 말을 빌리자면나선형으로 순환하며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어쩌면마르크스가 꿈꾼 사회는 태초의 인류사가 가장 바람직한 이상사회라고 본 것이 아닐까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그러한 사회로 돌아감혹은 나아갈 수 있을까?  

[Report]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Posted by 히키신
2017. 3. 16. 20:18 etc

박준건 교수님이 강의하셨던 <사회철학> 의 레포트이다.

A4용지 2매 이하로 간략하게, 단상을 서술하는 정도로 제출하라고 하시기에,

그야말로 떠오르는 대로 휘날려 썼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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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철학 Report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선택의 기로에 서서 우리 운명의 열쇠는 우리가 쥐고 있다


1. 현재 대부분의 국가는 신자유주의라는 레일에 올라탄 이래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흔히 많이들 이야기하듯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우리들이 탄 열차는 어떻게든 탈선하지 않고 정차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나아가는 듯하다그러나 올바른 나침반이나 지도가 없어 나아갈 목적지도 정확치 않고현재 열차의 상태는 매우 위태롭다매우 아슬아슬하지만 아직까지도 열차를 세우거나 브레이크를 고칠 만한 방법을 찾진 못한 듯 여겨진다열차에 탄 승객들은 불안감에 어쩔 줄 몰라 성경 따위를 읽고 읊조리고 있기도 하고어떤 이는 자신의 업무를 보느라 지금 상황과는 관계없이 그저 정신없으며어떤 이는 음악을 들으며 또래들끼리 그저 신나있는 이도 있다그러나 그 중 몇 몇은 열차 밖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긴 듯 고민에 빠진 이들도 있다.        


2.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레일에 올라타 있지 않은 나라도 적지만 존재한다이들의 공통점은 소국과민(小國寡民)이며 자연 속에서 더불어 생활한다는 점이다이들은 부모나 가족지역 공동체의 전통문화 속에서 각각 자신이 맡은 바에 충실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마을마다 지혜로운 이가 꼭 한 명쯤은 있어 곤란한 문제나 갈등이 생겼을 때는 현명하게 대처할 조언을 구하고 문제는 대부분 크게 커지지 않고 해결이 된다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정신적 스트레스는 크지 않은 편이며 행복 지수가 대체로 높은 점이 특징이다한 가지 매우 우려되는 점은 이들에게 신자유주의의 레일 위에서 질주하는 열차가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다


3. 숲 속에 버젓이 존재하는 호수를 없애고 사막 위에서 오아시스를 찾고 있다몇 몇 이들은 계속해서 이대로는 안 된다며 목이 터져라 외쳐대지만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의 폭주를 멈추기에는 역부족인 듯 보인다어떤 이들은-자신들의 말에 따르면 현실적인’ 대안으로써-브레이크를 고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그러나 내가 보기엔 근본적으로 내가 서 있는 길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고치거나 나침반을 만드는 것 따위로는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그렇다면 방법은 이 레일에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탈출하는 방법 뿐 인데굴레를 벗어나려면 그 굴레를 통과할 만큼 자신의 몸 사이즈를 맞추어야 한다내 몸이 지금 이 굴레보다 크다면몸을 줄여서 통과해 나가면 그만이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그 속에서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4. 번쩍이는 레일위에서 달리는 호화로운 열차 속에 탄 승객들과 자연 그대로의 땅 위에서 머물며 볼품없지만 본연의 의무를 다하는 집 속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지구 속에 공존하고 있다과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만약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이 매우 위태롭다면그리고 나아가야 할 길이 깜깜하여 보이지 않는다면그저 계속 나아가기 보다는 잠시 멈춰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생각을 돌이키기까지가 힘들 뿐이지 한번 돌이키고 나면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본다생각의 반전(反轉)이 필요한 시점이다.      

 

마르크스의 인간관 토막 자료

Posted by 히키신
2017. 3. 16. 20:16 etc

 마르크스의 인간관 자료


 ● 󰡔독일이데올로기에서


“ 분업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곧 인간이 자연발생적인 사회에 머무르는 한다시 말해서 특수이익과 공동이익 사이에 균열이 존재함으로써 활동이 자유의지에 의해서 분배되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분배되는 한인간 자신의 행동은 그에 대립하는 낯선 힘으로서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구속한다는 사실의 최초의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노동이 분화되자 각 개인은 하나의 일정한 배타적 영역을 갖게 되고이 영역이 그에게 강요되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한 사람의 사냥꾼한 사람의 양치기한 사람의 어부또는 한 사람의 비평가이며그가 그의 생계 수단을 잃지 않고자 하는 한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이에 반하여 아무도 배타적인 영역을 갖지 않고 각자가 그가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나 스스로를 도야시킬 수 있는 공산주의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조절하기 때문에사냥꾼어부양치기도는 비판가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곧 아침에는 사냥을오후에는 낚시를저녁에는 목축을밤에는 비판을 할 수 있게 된다.



자본 3-48장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자유(Freiheit, freedom)의 왕국은 사실상 궁핍과 외적 합목적성에 의하여 지시되는 노동이 없어지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된다따라서 그것은 사물의 본성으로 보아 본래의 물질적 생산분야의 맞은 편에 있다미개인이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자기의 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하여 자연과 투쟁하지 않을 수 없듯이문명인도 그러한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어떠한 사회형태 아래서도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생산양식 아래서도 그러한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인간이 발전함에 따라 이 자연적 필연(필요, Notwendigkeit, necessity)의 왕국이 확대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욕구(Bedürfnis)가 확대되기 때문이다그러나 동시에 욕구를 충족시키는 생산력도 확대된다이 왕국에서의 자유는 오직 사회화된 인간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자기들의 이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이 물질대사가 맹목적인 힘으로서 그들을 지배하지 않도록 자기들의 공동 통제 밑에 두며 가장 적게 힘을 들이고 그들의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가장 적합한 조건 아래서 그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데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역시 필연의 왕국이다필연의 왕국 맞은 편에서자체 목적으로서의 의의를 갖는 인간의 힘의 발전이 시작되고 자유의 진정한 왕국이 시작된다그러나 자유의 왕국은 이 필연의 왕국을 토대로 해서만 꽃피울 수 있다노동일을 줄이는 것이 기본 조건이다.



● 󰡔정치경제학비판 서문󰡕


 인간은 자기 삶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에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바로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즉 한 사회의 실제적 토대를 이루며그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다시 여기에 조응하는 일정한 사회적 의식의 형태들이 출현한다...그런데 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일정한 생산관계 내에서 전개되다가도 그것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도달하면 기존의 생산관계들또는 그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들과 모순을 빚게 된다그러면 이 생산관계들은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질곡으로 변한다바로 이 때가 사회혁명의 시기이다이 시기에는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함께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느리게 또는 급속하게 변혁된다이러한 변혁을 고찰하는 데 있어자연과학적으로 엄밀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경제적 생산조건들의 물질적 변혁과 법정치종교예술철학의 제형태즉 이데올로기의 제형태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인간이 갈등을 의식하고 그 갈등과 싸우는 것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의 제형태를 통해서 이다...한 사회구성체는 그의 모든 생산력이 완전히 전개되기 전에는즉 생산력이 아직 발전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또한 더 상위의 새로운 생산관계들은 이전 사회의 태내에서 자신의 물질적 존재조건들이 성숙되기 전에는 결코 자리잡지 못한다...부르조아적 생산관계들은 적대적 형식을 취하는 사회적 생산과정 중 최후의 것이다이 때 적대적이라 함은 개인적인 적대라는 의미가 아니라개인들의 사회생활 조건에서 발생하는 적대성을 뜻한다한편 부르조아 사회의 태내에서 발전하고 있는 생산력은 이 적대성을 해결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해 낸다그러므로 이 사회구성체를 끝으로 인류사회의 전사(前史)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MEW. Bd. 13, S. 8-9.



● 경제학․ 철학 수고(1844) 에서 

[소외된 노동

                                  

1. <노동자는 부를 보다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그의 생산이 힘과 범위에 있어 더욱 증대되면 될수록더욱더 가난해진다노동자는 상품들을 보다 많이 창조하면 창조할수록 더욱더 값싼 상품으로 된다사물 세계의 가치 증식에 인간 세계의 가치 절하가 정비례한다노동은 단지 상품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노동자를 하나의 상품으로서게다가 그것이 일반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것에 비례하여 생산한다.>


이 사실은 다음의 것을 표현할 따름이다 노동이 생산하는 대상즉 노동의 생산물이 하나의 낯선 존재로서생산자로부터 하나의 독립적인 힘으로서 노동과 대립한다는 것노동의 생산물은 하나의 대상 속에 고정된사물화된 노동인 바이는 노동의 대상화이다노동의 이러한 현실화는 국민 경제학적 상태에서는 노동자의 탈현실화로서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서자기화는 소외로서외화로서 나타난다...


<노동자가 더 힘을 들여 노동하면 할수록그가 자신에게 대립되도록 창조한 낯선 대상적 세계는 더욱 더 강력해지며그 자신즉 그의 내적 세계는 더욱 더 가난해지며그에게 그자신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은 더욱 더 적어진다.>...

.

<노동자가 더 많이 창조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더 적게 소비해야 한다는 것그가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더 무가치해지고 더욱 더 값어치 없게 된다는 것그의 생산물이 더 정형화되면 될수록 노동자는 더욱 더 기형화된다는 것그의 대상이 더 문명화 될 수록 그는 더욱 더 야만화 된다는 것노동이 더 강력해질 수록 노동자는 더욱 더 무력해진다는 것노동이 더 똑똑해질수록 노동자는 더욱 더 어리석어지고 자연의 노예로 된다는 것으로.>


2. 우리는 지금까지 노동자의 소외외화를 하나의 측면즉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만 고찰해왔다그러나 소외는 생산의 결과에서 뿐만 아니라생산의 행위에서도즉 생산활동 자체 내부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며즉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따라서 노동자는 그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자유로운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 그의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느끼며노동 속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떠나 있다고 느낀다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노동할 때는 편안하지 못하다그의 노동은 그러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강제노동이다그 노동은 그러므로 어떤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그의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그의 노동의 낯설음은어떠한 육체적 혹은 기타의 강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노동이 마치 페스트처럼 기피된다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외적 노동즉 그 속에서 인간이 외화되는 노동은 자기 희생의 노동고행의 노동이다끝으로 노동자에 대한 노동의 외적 성격은 노동이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의 것이라는 것노동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다는노동자가 노동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종교에서 인간의 환상인간의 두뇌인간의 심장의 자기 활동이 개인으로부터 독립되어즉 신적인 혹은 악마적인 낯선 활동으로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듯이노동자의 활동은 그의 자기 활동이 아니다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 속하며그 자신의 상실이다.> 


그러므로 인간(노동자)은 그의 동물적인 기능들즉 먹는 일마시는 일생식하는 일등에서만기껏해야 그의 거주와 의복 등등에서만 가까스로 자신이 자유롭게 활동한다고 느끼고그의 인간적인 기능들에서는 기껏해야 동물로서의 자신을 느낀다는 결론이 나온다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으로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된다


먹는 것마시는 것생식하는 일 등등은 물론 인간적인 기능들이다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인간적 활동의 여타 영역으로부터 분리하여 최종적이고도 유일한 궁극 목표로 만들어 버리는 추상 속에서는그러한 일들은 동물적인 것이다...


3.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두가지 규정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의 제 3의 규정을 이끌어 내야 한다...

 인간에게서 1)자연을 소외시키고, 2)그 자신을즉 그의 고유한 능동적 기능그의 생활 활동을 소외시킴으로서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유를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의 유적 생활을 개인적 생활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첫째로 소외된 노동은 유적 생활과 개인적 생활을 소외시키고둘째로 추상 속에 있는 후자를마찬가지로 추상된소외된 형식 속에 있는 전자의 목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과 직접적으로 하나이다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인 것이다인간은 자신의 생활 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지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인간은 의식적 생활 활동을 가진다인간이 직접적으로 그것에 융합되는 규정성이란 없다의식적 생활 활동은 인간을 동물적 생활 활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구별짓는다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유적 존재인 것이다혹은 인간이 바로 유적 존재이기 때문에그는 의식적 존재이며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생활이 그에게 있어 대상인 것이다바로 이 때문에 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인 것이다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전도 시켜서 급기야 인간은 자신의 생활 활동자신의 본질을 단순히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는데이는 바로 인간이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4.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자신의 생활 활동자신의 유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의 하나의 직접적 귀결은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이다인간이 자기 자신과 대립할 때에는그는 다른 인간과 대립하는 것이다자신의 노동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있어 유효한 것은 다른 인간다른 인간의 노동 및 그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