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 인빅투스 Invictus

Posted by 히키신
2023. 11. 24. 01:23 Poetry#1


Out of the night that covers me,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

Black as the pit from pole to pole,

온통 칠흑 같은 암흑

I thank whatever gods may be

나는 그 어떤 신이든, 신께 감사하노라

For my unconquerable soul.

내게 정복 당하지 않는 영혼을 주셨음을


In the fell clutch of circumstance

잔인한 환경의 마수에서

I have not winced nor cried aloud.

난 움츠리거나 소리내어 울지 않았다

Under the bludgeonings of chance

운명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아

My head is bloody, but unbowed.

내 머리는 피 흘리지만 굴하지 않노라


Beyond this place of wrath and tears

분노와 눈물의 이 땅을 넘어

Looms but the Horror of the shade,

어둠의 공포만이 어렴풋하다.

And yet the menace of the years

그리고 오랜 재앙의 세월이 흘러도

Finds and shall find me unafraid.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It matters not how strait the gate

비록 문이 좁을지라도

How charged with punishments the scroll,

아무리 많은 형벌이 날 기다릴지라도 중요치 않다.

I am the master of my fate:

나는 내 운명의 주인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나는 내 영혼의 선장




인빅투스(Invictus)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 1849–1903)의 짧은 시이다. 라틴어로 "정복되지 않은"을 의미하는 인빅투스는 1875년에 작성되었고 1888년 그의 첫 번째 시집인 Book of Verses의 삶과 죽음(메아리) 섹션에 출판되었다.

헨리는 16세였을 때 결핵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를 다잡는 강인한 결기, 긍지가 느껴진다.

수많은 명사들과 문학, 영화 등에서 인용되어온 이 시는 아직까지도 생명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준다.

[스크랩]스콧니어링과 헬렌니어링의 동지적인 삶

Posted by 히키신
2023. 11. 24. 01:05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https://m.blog.naver.com/iamurim/30031957843

스콧니어링과 헬렌니어링의 동지적인 삶

스콧니어링과 헬렌...어떻게 生을 살고 마감했나?     스콧니어링은 미국의 사회운동가였다. 'T...

blog.naver.com


나는 바닷가에 서 있다.
내 쪽에 있는 배가 산들바람에 흰 돛을 펼치고 푸른 바다로 나아간다.
그 배는 아름다움과 힘의 상징이다.
나는 서서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맞닿는 곳에서 배가 마침내 한 조각 구름이 될 때까지
바라본다. 저기다. 배가 가버렸다. 그러나 내 쪽의 누군가가 말한다. ‘어디로 갔지?’

우리가 보기에는 그것이 전부이다.
배는 우리쪽을 떠나갔을 때의 돛대, 선체, 크기 그대로이다. 목적지까지 온전하게 짐을 싣고 항해할 수 있었다.
배의 크기가 작이진 것은 우리 때문이지, 배가 그런 것이 아니다.
‘저기 봐! 배가 사라졌다!’ 고 당신이 외치는 바로 그 순간, ‘저기 봐! 배가 나타났다!’ 하며
다른 쪽에서는 기쁜 탄성을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이며 연장인 것이다.
...
죽음은 옮겨감이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전인권 - 물고기

Posted by 히키신
2023. 5. 30. 00:42 영혼의 위로_Music

https://youtu.be/QbTGAQhilQg

 

<가사> (작사, 작곡 : 호연주)
내 고향은 우리 엄마 뱃속 
혹은 커다란 우주의 한복판 
살길 찾아 많은 생각 끝에 
가고 가다 보니 어느새 이곳에 
세상 끝에 다다르면 숨을 고르고 
사랑해온 날들을 위로해야지 
푸른 바다 저 멀리 헤엄쳐 
달빛으로 물든 섬에 가려나 봐 
어기야디야 어야디야 이어차 
견뎌내고 이겨내 무엇을 위하여 
세상 끝에 다다르면 숨을 고르고 
사랑해온 날들을 위로해야지 
(물고기의 말) 
불꽃들이 비추는 저 바다 곁으로 
산을 넘어 그리운 흙냄새 취해 가야지 
모자랐던 넘쳐났던 모든 걸 안고

 

좋은 노래와 노랫말. 발매 당시 히트하지 못했는데 언젠가 역주행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상(李箱) - 권태(倦怠)

Posted by 히키신
2020. 2. 11. 12:02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권태(倦怠)

- 이상(李箱)


   어서, 차라리 어둬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십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해는 100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서(炎署)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나는 최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보다. 최서방네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 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시 지난 후니까,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최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장기를 한판 벌이기로 한다. 최서방의 조카와 열 번 두면 열 번 내가 이긴다.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둔다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낫지―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여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의례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이리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 줄 만큼 져 주면 이 상승장군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 출물에 가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나면 도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인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 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사세(些細)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 이욕(利慾)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해 버려야 한다.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 빈약한 물이 소리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다 축 늘어져서 허더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域)에서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100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 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漂着)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한 구렁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이냐? 이윽고 겨울이 오면 초록은 실색(失色)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루를 갈기갈기 찢는 것과 다름없는 추악한 색채로 변하는 것이다. 한겨울을 두고 이 황막(荒漠)하고 추악한 벌판을 바라보고 지내면서, 그래도 자살 민절(悶絶)하지 않는 농민들은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거대한 천치다. 그들의 일생이 또한 이 벌판처럼 단조한 권태 일색으로 도포된 것이리라. 일할 때는 초록 벌판처럼 더워서 숨이 칵칵 막히게 싱거울 것이요,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겨우 황원(荒原)처럼 거칠고 구지레하게 싱거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흥분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은 뇌성(雷聲) 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에 지나지 않는다. 촌동(村童)이 범에게 물려가도, 그것은 맹수가 사는 산촌에 가끔 있는 신벌(神罰)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전선주 하나 없는 벌판에서 그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흥분할 수 있으랴. 팔봉산 등을 넘어 철골 전선주가 늘어섰다. 그러나, 그 동선은 이 촌락에 엽서 한 장을 내려뜨리지 않고 섰는 채다. 동선으로는 전류도 통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방이 아직도 송명(松明)으로 어둠침침한 이상, 그 전선주들은 이 마을 동구에 늘어선 포플라나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흉리(胸裏)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奴役)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 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대싸리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덩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 데는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어왔으니까 그저 들었을 분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마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蓬髮)이 작소(鵲巢)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서 희귀한 겸손한 겁장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旅人)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 연변에 있지 않는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마을의 김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한 시악시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맞기 수운 위험한 지대이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랜동안──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은 이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인제는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느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가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비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서방네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서방네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良久)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본다. 밤낮 다니던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개들은 천부의 수위술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 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전연 알 길이 없다.

   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소위 승합자동차라는 것도 통과하지 않으니, 도회의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알랴? 오관이 모조리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 가운데서 나는 이리 디굴 저리 디굴 굴고 싶을 만치 답답해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태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아니,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도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상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自意識)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가 폐쇄되었다. 이렇게 한산한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아무것도 생가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조차가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 뜬 채 졸기로 하자. 더워 죽겠는데 목욕이나 할까? 그러나 웅덩이 물은 썩었다. 썩지 않은 물을 찾아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썩지 않은 물이 여기 있다기로서니, 나는 목욕하지 않았으리라. 옷을 벗기가 귀찮다. 아니! 그보다도 그 창백하고 앙상한 수구(瘦軀)를 백일 아래 널어 말리는 파렴치를 나는 견디기 어렵다. 땀이 옷에 배이면? 배인 채 두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더위는 무슨 더위냐?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 도중에서 교미하는 개 한 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의 기교가 없는 축류(畜類)의 교미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리 동해(童孩)들에게도 젊은 촌부(村婦)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함석대야는 그 본연의 빛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그들의 피부색과 같이 붉고 검다. 아마 이집 부인 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세수를 해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가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례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리고 호박 넝쿨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 넝쿨의 뿌리 돌친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너라도 좀 생기를 내라고. 땀내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앉았다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하여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일투족을 어찌하였으면 좋을까 당황해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 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보았다는데 지나지 않는다.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村童)들을 원숭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대싸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런 나는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는 중의 웅덩이 속을 들여다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도한다. 무수한 오점이 방향을 정돈해 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소택 속에 이런 앙징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벌레를 먹겠지. 그러나,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벌레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있지 않는다. 저물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와 같은 모양으로들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를 향하여 군중적으로 이동한다. 저렇게 하류로 하류로만 가다가 또 어쩔 작정인가? 아니 그들은 중로(中路)에서 또 상류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덩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덩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그 웅덩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러나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 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학자를 위한 표식이다. 야우(野牛)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습니다──하는, 마치 폐병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수소의 그것보다도 더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 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위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인가보다. 내 생면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는 소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렸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략하는 체해보임이리요?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불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길 복판에서 6,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赤髮銅膚)의 반라군(半裸群)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두른 베두렁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6세 내지 7,8세의 <아이들>임에는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 온다. 풀──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으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 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니까 풀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하다. 한 10분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본다. 10분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도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중겅중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듯 불행하다. 그 짓도 5분이다. 더 이상 더 길게 이 짓을 하자면, 그들은 피로할 것이다. 순진한 그들이 무슨 까닭에 피로해야 되나? 그들은 위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 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 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 각각 대변을 한 무더기씩 누어 놓았다. 아아 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런 그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아 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날이 어두웠다. 해저(海底)와 같은 밤이 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자기 부패작용이나 하고 있는 웅덩이 속을 실로 송사리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 속으로도 나로서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떼가 준동하고 있나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詩想)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彼岸)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별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 갔다 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자살의 단서조차를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한 형리처럼──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 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 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방 좁은 것이나 우주에 꼭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끝>


* 작자 이상(李箱,1910년 9월 14일-1937년 4월 17일)은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1910년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12년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보(普成高普),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거쳤고 졸업 후에는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가역반응’,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4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중단하였다.

   1936년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내고 그만두고,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이해,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종생기' ,'권태', '환시기' 등을 쓰고, '봉별기'가 <여성>에 발표되었다. 1937년 사상 불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향년 만26년 7개월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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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강상중 - 고민하는 힘(2009), (주)사계절출판사

Posted by 히키신
2020. 1. 7. 23:04 글쓰기와 관련하여

'당신은 진지합니까?'

...

'나는 과거의 인과 때문에 사람을 잘 믿지 않습니다. 사실 당신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지요. 그렇지만 당신만은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의심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한 사람이거든요. 나는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누군가를 믿으며 죽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 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뱃속까지 진지합니까?'"

1장, 나는 누구인가

p42~43

- 어중간한 태도가 아닌, 뼛속 깊이까지 진지하게 파고들어 진짜 담백한 내 모습을 찾는 것. 그것이 선행되어야 진짜 '나'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 어디서든 당당하며, 아우라를 풍기기 마련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보면 세상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려는 야심가나 시대에 대한 꿈과 의욕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대부분은 부자 아버지에게 기생하는 젊은이, 은둔 생활을 하는 지적 교양인, 먹고 살 만큼의 자산이 있어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 있는 백수', 또는 먹고 살 만큼만 일하는 사람 등이 주인공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시대에 대해 나름대로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불만을 타파하기보다는 포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세상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 의문의 눈초리를 들이대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 달관한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즉 '돈만 있으면 되는 세상은 더럽고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말은 그렇게 해도 시대의 추세가 그러니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2장,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p53

- 지난 20대의 나를 돌이켜보면, 시대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으나 끝까지 다가가지 못한 채 결국 현실로 되돌아온 듯하다. 내 속의 분노를 표출하거나 혹은 승화시키기 보다 그때그때 적당히 삭혀가며 넘어간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내 나름의 방식대로 나의 삶을 걸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걸어온 길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불공정한 경쟁과 가혹한 부의 편중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경제 발전이 벽에 부딪힌 나라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이것이 20세기 세계전쟁의 원흉이 된 '제국주의'입니다. ... 막스베버는 이 점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런 문화 발전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마지막 사람들(letzte Menschen)'에게 다음과 같은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 이들은 인간성이 과거에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이미 올랐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할 것이다.'"

2장,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p55

- 주위를 둘러보면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 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미디어에 등장해 자신을 뽐내는 자칭 OO 전문가들과, 그들이 방송에서 내뱉은 한마디는 마음이 없는 향락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나는 영혼이 순수한 이들을 사랑한다. 그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진정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의미를 묻는다

'해답이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한다'. 그것은 결국 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달관한 어른이라면 그런 일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사회에 이익이 되든 그렇지 않든 '알고 싶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같은 것을 솔직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좌절과 비극의 씨앗이 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숙하기 때문에 의문을 능숙하기 처리하지 못하고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위험한 곳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

4장, 청춘은 아름다운가?

p85

- 대학 3학년 때부터 해답이 없는 물음에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나는 그 물음을 더 깊이 붙드느라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제학을 전공한 동창과 술자리 중 서로의 대화가 시작되지 않는 지점이 있었다.

'간단하게 설명해줄게. 세상은 A라고 가정하자. 이건 누구나 동의하니 서로 간 약속이 된 거지. 그런데...'

'잠깐, 그걸 왜 모두가 동의한다고 생각해? 나는 그 최초의 전제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데.'

'그러면 우린 더 이상 얘기를 할 수 없어. 해답을 내릴 수 없는 물음을 자꾸 붙잡고 왜 그러냐고 얘기하면 세상에 누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

'음... 하지만 난 이해가 안 되는데. 그리고 그 최초의 지점에서 '왜'를 묻는 게 철학이라 어쩔 수 없네.'

'참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구만. 쯧쯧...'

모든 규칙과 전제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최초의 전제는 왜 해답이 없다고 하면서도 모두가 맞다고 동의하고 그냥 넘어가는지 당시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물론 그때처럼 학문적으로 매달려있진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그렇다 치고' 넘어가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나는 여전히 청춘인지도 모른다.

무수한 좌절과 비극의 연속이었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이 나에게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는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장 눈에 띄는 수확은 아닐지 모르나, 나는 이것이 매우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청춘 시절부터 '나'에 대한 물음을 계속하며 '결국 해답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그보다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라는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음 위를 지치듯 모든 일의 표면만 지친다면 결국 풍성한 것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춘은 좌절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실패가 있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도 청춘의 향기를 잊고 싶지 않습니다.

4장, 청춘은 아름다운가?

p91~92

그러나 늦게 온 우리 뮤즈의 이 발명품도

우리 병든 인종이 젊음에 바치는

깊은 흠모를 막지 못하리,

ㅡ 성스러운 젊음, 순박한 모습, 다정한 이마

흐르는 물처럼 맑고 깨끗한 눈동자,

그 향기, 그 노래, 그 부드러운 열기를

하늘의 푸름처럼, 새처럼, 꽃처럼 무심코

모든 것 위에 널리 퍼트려 주는 젊음에!

ㅡ 보들레르의 <저 벌거숭이 시대의 추억을 나는 좋아한다> 중에서

-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할 뿐, 더 이상 꼭 들어맞는 해답을 찾고자 하지 않는다. 그렇게나 당연한 걸 이제서야 깨달았냐고 묻는다면, 그저 미소로 답할 뿐이다. 표면만 거친 사람과 깊숙이 파고든 후 밖으로 나온 사람은 바라보는 풍경이 다르다.

요컨대 '그것이 그 사람에게 믿음을 주기에 충분한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는지 믿을 수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믿는다'가 아니라 '자기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인 종교', '자기가 교주'인 것입니다.

5장,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p102~103

- 니체는 '창조자는 자신의 믿음을 믿는다'라고 하였다. 믿음의 근거가 모두 무너져 내려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이는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결과는 결국 그것이 옳든 그르든 갈 때까지 가본 후에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가 뭐라든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믿고 갈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도락과 직업>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개화가 진행될수록, 또한 직업의 성질이 분화될수록 우리는 단편적인 인간이 되고 마는 묘한 현상이 일어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이라고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6장,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p114~115

- 이상의 '부채꼴 인간'과 같은 단편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점은 분명 아쉽다. 옛날 지역의 고명한 의원이 아픈 이의 진맥을 짚어 본 후, 증상을 찾아 치료하는 일과 현대의 많은 분과로 나누어진 전문의를 비교해보면, 이따금 아쉬워지곤 한다. 그러나 요즘은 옛날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분야별로 전문지식이 깊어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기존엔 전혀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가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미래엔 비록 단편적인 인간일지라도, 서로의 지식이 융합되어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자유스럽기 때문에 잘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유로워지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 이런 것을 자유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7장,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p131

- 경제적인 어려움, 불우한 가정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겐 현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지 잘 안다. 경제적인 자유, 화목한 가정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온 이들에겐 지난한 삶을 살아온 이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화목한 가정 속에서 살아온 이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부자유로 운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부자유롭기 때문에 더 잘 볼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

정신의학자이며 사상가인 빅터 E. 프랭클은 사람들이 고뇌에 견디는 힘을 많이 지니고 있지만 의미 상실에는 견디지 못한다는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하나하나의 의미를 일일이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니고 의미를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가 무의식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그것이 사람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따라서 의미를 확신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8장, 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p143

-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제각각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예기치 못한 부조리한 사고 등으로 의미의 상실에 빠지면 으레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당초 그 의미 또한 자신이 부여한 것이 아닌가! 진정한 의미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상실된 의미가 자신의 삶의 유일한 의미라는 것 역시 자신의 생각일 따름이라면, 절망에 빠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성적인 사고와 실제 현실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우리는 모두가 도통한 선승처럼 해탈한 것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 뿐이므로.

그러므로 뜻하지 않은 의미 상실을 겪게 되었을 땐, 재빨리 또 다른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그 어떤 것도 자신에게 의미가 없다고 여겨질 때에도, 그 무엇에라도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확신하게 되면 마음이 열립니다. 프랭클이 말한 것과 비슷하지만 자기의 의미를 확신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고민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확신할 때까지 계속 고민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중간하게 하지 않고 진지하게 끝까지 고민하는 것. 나는 거기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8장, 왜 죽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p153

-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너무나도 스트레스라 생각하여, 어중간한 상태에서 고민하길 그치곤 했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의 답을 찾지 못한 채 중도에 그만두었기 때문일까, 나는 다시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지난 10년과 같은 반복을 하지 않으리라! 끝까지 스스로 묻고 또 되물었다. 그 끝에서, 현재 나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았고 새로운 삶을 앞둔 상태다.

하지만 분명 앞으로도 또 시련과 고난은 여지없이 나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 내 역량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은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헤쳐나갈 뿐이다.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인 공포는 바로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의 힘'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아이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죽음에 대해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이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둘 다 '두렵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아이처럼 '모르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것이 아니라 적어도 죽음에 대해 다양하게 고민하고 마음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두렵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 인생에 대해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민을 피한다면 끝없이 두려움에 떨어야겠지요.

나는 그 경험 덕분에 과거보다 대담해졌고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활이든 대포든 얼마든지 덤벼라'라는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9장, 늙어서 최강이 되라

p162~163

- 죽음 앞에서도 대담해지려면 인생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것과 더불어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조금만 아파져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기 마련이다. 죽진 않지만,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만 받게 되면 사람은 '그저 하루라도 빨리 죽었으면, 그래서 이 고통이 멎었으면'과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따라서 될 수 있는 한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된다.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가혹한 경쟁 시스템. 점점 얇아지고 약해지는 사회 안전망, '승자'와 '패자'사이의 격심한 차이. 젊은이들이 견뎌야 할 현실은 너무나도 혹독합니다. 따라서 잔혹하고 박정한 취급을 받는 그들, 그녀들에게 세련된 정신론을 제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할 바에야 살아 남기 위한 노하우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나 실업자의 경우처럼 살아남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루바삐 자기방어책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고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적인'고민을 '인간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지요.

글을 마치고

p172~173

- '인간적인'고민을 '인간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제대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함석헌은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며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끝까지 탐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고민하는 힘을 가진 이들은 제대로 살아갈 힘이 있다.

- 2020. 01. 07.

죽음을 알리는 신호

Posted by 히키신
2019. 12. 11. 00:29 카테고리 없음

사람들은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본인과 가족 모두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다.
– 2주 전: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다.
– 1주 전: 물도 삼키기 힘들어지고 걸을 수 없게 된다. 의식이 명료하지 않고 자는 시간이 길어진다.
– 6일 전: 환시, 환청이 생기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섬망 증상이 나타난다.
– 5일 전: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목에서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난다.
– 4일 전: 소변이 안 나오게 된다.
– 3일 전: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전혀 거동을 못하고 누워 지낸다.
– 2일 전: 불러도 반응이 없다.
– 1일 전: 몸에서 철이 녹슨 듯한 냄새가 난다.
– 한나절 전: 손발이 차가워지고 자줏빛으로 면한다. 혈압이 떨어진다.
– 임종: 호흡이 멈추고 온몸이 차가워진다.
<오가사와라 분유, 더 없이 홀가분한 죽음, 위즈덤하우스, 2018, p. 184>

[포스팅 원문 : https://www.soyoyoo.com/archives/4608]

호흡과 발성, 오해와 진실/ 우상전 2013년 1월 2일 TTIS

Posted by 히키신
2019. 4. 22. 17:18 etc

이하의 글은 연극배우 우상전 님이 오늘의 서울 연극(TTIS)에 게재한 <호흡과 발성, 오해와 진실> 이라는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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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과 발성, 오해와 진실

우상전(연극배우)

연기학회가 연기교육에서의 호흡과 발성을 모색하는 자리를 가졌다. 실제로 현재 발행된 연기교재 중에 호, 발성에 관한 서적이 가장 많은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가장 미진한 게 호, 발성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호흡과 발성에 대한 필요를 실제로는 못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가 다 잘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교육에 대한 효과가 별로라고 여겨서 그러는 것일까?

우리는 왜 호흡과 발성에 취약한가?
몇 해 전 SPAF의 축제에서 헝가리팀이 공연한 를 보면 작은 아르코소극장을 그나마도 객석까지 포함해 반절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또 루마니아의 는 3분의 2 정도만을 사용했다. 좀 의아해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그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하나같이 작품의 진정성을 살리기 위해서 작은 공간을 사용한다는 거다. 즉 배우들이 불필요하게 목소리를 높여 등장인물들의 정서와 심리를 훼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치 카페에서 대화를 하듯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란다.
또 올해의 개막작인 폴란드연극은 커다란 아르코대극장 무대에서 배우들이 작은 목소리로도 공연의 진정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자그마치 2억 원이나 나가는 음향기기를 직접 가지고와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더욱 우리를 경탄케 한 것은 배우들이 ‘덧 마루’ 위에서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발자국 소리’까지 내어 표현하는 경이로운 연기를 보인 루마니아의 공연이었다. 그 후 러시아의 레프도진이 연출한 LG아트센터에서의 역시도 ‘발자국 소리’를 살려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 공연들은 목소리를 내든, 발소리를 내든 이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없고, 인물의 성격과의 상관관계에도 무관심 한 게 현실이다.
가장 난감한 게 ‘낭독공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공연들이다. 왜 그런 공연을 하는 것일까? 이런 식이라면 연극인 모두가 희곡을 읽기 귀찮아서 행하는 ‘변칙공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격식도 갖추지 못한 공간에서 속절없이 배우들은 머리를 대본에 처박고 읽어대기만 하는 공연, 우리는 이걸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경험에 의하면 배우의 머리 위에서는 끌 수조차 없는 극장의 공기정화기가 계속 돌아가 집중도 안 되는 곳에서, 심사위원이라는 사람들은 멀찍이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다. 평론가협회장도 러시아유학파 배우인 대학교수도 ‘그래 내 귀에 들리게만 해다오’하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끝나자 오히려 배우를 보고 들리지 않게 작게 읽었다고 아우성이다.
희곡은 소리를 죽여 감정을 드러내도록 쓰여 있는데도, 우리들은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저 작품의 분위기만을 알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배우가 대사를 외워 머리를 쳐들고 하는 공연도 아니고, 고개 숙여 대본을 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어떻게 널찍한 공간에서 대사를 전달하라는 것인가? 고개를 처박고라도 소리를 질러대라는 말인가? 아니면 순간순간 고개를 들어 들리게 하라는 말인가? 차라리 그럴 바에는 각자가 시간을 갖고 신경을 곤두세워 찬찬히 집에서 읽어보는 게 작가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밑천을 뽑겠다고 모노드라마를 1500석 체육관에서 관객을 모아놓고 공연하는 나라에서 연기자의 호흡과 발성이 안중에 있을 턱이 있겠는가?
그러니 ‘발자국 소리’까지 내면서 인물의 미세한 내면의 정서까지도 전달하고자 노력하는 유럽의 연극공연들과 배우들보고 무작정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고 아우성치는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거리가 멀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호흡과 발성에 대한 개념이 없음을 증명하는 한 단면일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아직 청맹(聽盲)상태에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무조건 들리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더 들리지 않게 된 게 작금의 우리 공연 현실이다.

호흡과 발성을 방해하는 무대발성
우리 연극배우들이 호, 발성에서 무력감을 드러내는 배후에는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무대발성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객석에 전달을 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게 오히려 호, 발성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연극계는 무대발성이 배우들의 연기 전반에 미치는 심각한 부작용을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실질적으로 무대발성은 오로지 육성으로 공연하는 연극배우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자칫 연극배우들이 삶이나 연기에서 희생(?)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는데도 우리 연극계는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작은 목소리로 언어생활을 영위한다. 그래서 커다란 무대를 사용해야 하는 연극배우들이 연기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당연히 위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일로서, 이게 결과적으로 호, 발성과 연기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1. 우선 배우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내려면 목에 힘이 들어가는 몸의 경직을 피하기 힘들다.
2. 목소리를 높이면 배우가 감정을 잡기 힘들어진다.
3. 호흡을 운용(컨트롤)하기 힘들어진다.
4. 두뇌를 작동시키기 힘들어진다. 즉 작은 목소리로 말할 때보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어려워진다.
5. 발음도 잘되지 않는다.
6. 깊이 있는 연기가 힘들어진다.
7. 이로 인해 TV와 영화연기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렇게 많은 어려움에 시달려야 하는 게 무대발성을 위한 목소리의 높임이다.
그런데도 무대발성을 해야 하는 당사자인 연극배우들은 위험을 모르고 있고, 비연기자들 역시 사정을 몰라 배우가 무조건 크게 목소리를 내도록 독려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오죽하면 발성이 좋은 유럽배우들도 연기의 자연스러움을 얻고자 소극장을 절반만 사용할까?
그러니까 연기자가 좋은 호, 발성을 하려면 일상처럼 작은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연극배우들이 무대발성을 시도하다 되레 호, 발성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대사를 치면서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호, 발성을 하려면 외려 일상보다 더 작은 소리를 내야 한다. 왜냐하면 일상과 달리 복식호흡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실보다 더욱더 이완된 상태를 유지해야만 여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게 화술이다. 따라서 무대발성에 호흡과 발성근육을 위한 신체의 이완이 급선무다. 그런데도 무작정 목소리를 높이려다 경직을 유발하고 있다.
또 무대발성이 두뇌와 호흡의 접촉을 방해하는 것이다. 말하기에서 호흡을 발생시키는 것은 말을 하고자 하는 욕구(충동)이다. 이게 호흡을 움직여 발성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다 보면) 자연히 충동이 약화되고 이게 호흡과의 접촉을 방해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호, 발성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가득이나 암기로 인해 충동을 일으키기 힘든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접촉마저 이루어지지 않으니 당연히 호, 발성은 물론이고 화술까지 억지스러울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일상에서 자기 말을 할 때는 충동이 명확히 작용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도 호, 발성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지만 화술은 등장인물의 말을 하는 것이어서 ‘충동’의 약화가 필연적이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연기는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습장에서 연극배우들이 흔히 듣는 “그래가지고 소리가 들리겠니!”하는 호통이 자신들의 호, 발성을 망치는 주범이 되고 있다는 것을 연극배우들은 인식하고 처음부터 큰소리를 내려고 덤빌게 아니라 먼저 (일상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난 후에 호흡과 접촉해야 호, 발성에 무리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 점점 목소리를 높여가 무대발성을 완성해야 한다. 따라서 연출가들도 배우들이 자기의 두뇌를 작동시키기 전에 먼저 전달을 목적으로 크게 목소리를 내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배우는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아야
연극배우들에게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이 또 하나 있는데, 이건 대본만 읽으면 자기 목소리를 버리고 딴 사람이라도 된 냥 목소리를 바꾸려 드는 것이다. 흔히 듣게 되는 “왜 자기 말을 하듯 소리를 못내니!”하는 핀잔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연극배우들이 쉽게 빠지는 왜곡현상이다.
특히 나처럼 나이든 오랜 경력의 배우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고, 또 이들로부터 지도를 받은 젊은 배우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상대방과의 거리감이나 자기의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목소리의 조절력을 상실해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게 된다. 이게 심화되면 TV나 영화연기가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연극배우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는 연극이라는 장르가 배우들에게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내도록 강요하는 데 있다. TV나 영화연기에서는 연기자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면 인물이 되고 인물의 성격을 만들어 갈 수 있는데 반하여, 연극에는 등장인물의 성격이 두드러지므로 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특히 번역극의 경우는 더욱 심한데, 이는 배우들이 인물을 설정하도록 강하게 강요받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악화되면 배우가 무대에서‘노랑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목소리를 바꿈으로 해서 자기 말을 할 때의 언어메커니즘(충동, 호흡, 어휘, 발성으로 이어지는)이 손상되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설정된 인물의 목소리로 바꾸려다 일상에서 습관화된 자기의 언어메커니즘에 오류가 발생해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게 자기 목소리의 조절력을 잃게 해 자연스러운 말하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즉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내려다 호흡, 발성, 발음에 이르는 자기 자신의 언어메커니즘에 오류가 발생해 생기는 왜곡현상이다. 그리고 이게 무서운 게 습관화되면 설령 자기 목소리를 잃었다는 핀잔을 들어도 무슨 꾸지람인지조차 알기 어렵게 되는 – ‘귀가 마비돼’개선마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습과정에서 처음부터 섣불리 인물을 창조하겠다고 나설게 아니라 연극배우들이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임을 인식하고 자기 목소리를 고수한 후에 서서히 인물의 내면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호, 발성도 화술도 자유를 얻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연극배우치고 여기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다른 장르와 마주치게 되면 연극배우들이 얼마나 이런 왜곡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지금은 정치가가 됐지만 배우 문성근은 공개적으로 영화판에서 10년 동안‘연극대사 좀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이것도 이런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상에서는 자기 말을 하는 것이어서 자기 충동에 따라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낸다. 따라서 자기의 언어메커니즘이 그대로 작동해 호, 발성은 물론이고 말을 할 수 있게 돼 이런 왜곡현상은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연기에서도 이런 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자기의 목소리를 고수한 채 등장인물의 내면에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게 평생 배우생활을 괴롭히는 주범이 될 수 있다.

결론
1.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호흡과 발성이 되도록 해야 한다.
2. 무대발성에 신중히 접근해 호, 발성이 왜곡현상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인물창조로 목소리를 바꾸려다가 자기의 호, 발성과 화술을 망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호, 발성교육은 이런 잘못된 접근방법만 바꾸어도 훨씬 좋아질 것이다.

지나치게 기능적인 설명만 하는 우리의 호, 발성
이런 우리의 왜곡된 관행을 도외시한 채 지나치게 교과서적으로 호흡과 발성에 접근- 신체훈련에만 매진하는 것은 자칫 호, 발성훈련을 따분하고 재미없는 지루한 훈련으로 인식시킬 우려가 크다. 실제로 많은 강사료를 들여 해외에서까지 교수를 초빙해 실시해도(연극원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이와 전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연기교육도 지나치게 이론으로, 또는 기능적인 훈련만으로 접근하려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책으로만 호, 발성을 이해하려고 들어 흥미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현상은 연기학회의 세미나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분명한 것은 화술의 음성화를 위해서 호, 발성이 필요한 것이지 호, 발성을 위해서 화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호흡과 발성을 교육하고 훈련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호흡과 발성을 효과적으로 교육하고 훈련할 수 있는가?
이게 실제 화술에서 어떤 효과를 내는가를 아는 게 급선무다.
현재 호, 발성교재들의 내용은 대체로 이렇다. 1) 신체의 이완 2) 호흡의 접촉 3) 호흡과 발성을 위한 훈련 4) 발음을 위한 훈련 5) 공명 등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음성화와 연결된 설명이 부족한 게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호흡
한국에서 특히 호흡은 ‘숨’ 또는 ‘기(氣)’라는 이름으로 신비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물론 이는 요가나 단전호흡 등의 영향에 의한 것일 수 있다. 또 동양의학적인 측면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좌우간 연기에서도 호흡은 신비주의적인 냄새가 강하다. 특히 연기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의도되고 있는 분위기다. 그래야만 훨씬 학문적이고 이론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대사를 치기 위해서 연기자가 호흡을 운용하는 것이지 마치 호흡을 잘해야, 또 호흡을 하는 요령을 알아야만 말을 잘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을 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이런 현상은 자기 입으로 직접 대사를 내뱉는 연기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지 못하는데서 비롯할 수도 있다.
호흡(숨)은 일차적으로는 인체의 생존을 위한 생리적인 작용이다. 물은 마시지 못해도 상당기간 생존이 가능하지만 숨은 5분정도만 멈추어도 치명적일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이 말을 하는데도 호흡은 그야말로 기능적으로 밀착되어 있다.
흔히 신비하게 설명되는 복식호흡만 해도 잠잘 때는 누구나 하는 호흡이고, 인간이 무심한 상태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게 복식호흡이다. 또 심한 운동을 할 때는 많은 호흡을 필요로 해서 자동적으로 복식호흡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밀착된 생리적 작용을 신비화하거나 지나치게 이론화하여 설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어 흉식호흡으로 말을 하게 되는 것도 언어생활에 편리함을 도모하고자 하는 방편이지 인간이 타고난 좋은 본성을 잃어서 복식호흡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화술에서 호흡이 중요시 되는 것은 글말을 음성화하는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리적 호흡
사실 일상의 생리적 호흡에서는 ‘날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들숨’만이 있을 뿐이고, 날숨은 그저 체내의 탄산가스를 배출하기 위한 들숨의 반작용일 뿐이다. 그러니까 생존에서 호흡이란 산소를 들이마시는 ‘들숨’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무가치한(?) 날숨을 활용해 인간이 언어행위를 시도하고 노래 부르기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능을 더욱 확대해 예술적으로까지 재활용, 재생산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능이 없는 ‘날숨’을 기능화 해서 이를 예술적 작업으로 승화시킨 게 바로 ‘화술’과 ‘노래 부르기’인 것이다.
따라서 ‘날숨’의 활용은 분명 인간의 의지의 산물이다. 즉 노래를 부르고 말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날숨을 활용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하기나 노래 부르기에서 호흡은 인간의 의지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에 따라 호흡이 만들어지고 어휘의 길이가 결정되고, 자극을 받는 감성에 따라 호흡이 요동치게 되는 것이다.
‘들숨’만으로 생존을 유지하고 있던 인간이, 말을 해야겠다는 충동(욕구)이 용솟음치면 중추신경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발성을 위해서) 호흡을 자극, 작동시킨다. 그런 후에 어휘를 떠올려 성대와 발성기관을 움직여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말하기에서 호흡과 발성이야말로 ‘충동’의 발로인 것이다.

어째서 화술에서는 호, 발성이 중요한가?
따라서 말을 하고자 하는 ‘충동’(욕구)이 자신의 내면에서 발생하여 말을 하게 되는 일상의 소리 말에서 호흡과 발성은 자동적(본능적)으로 이루어져 전혀 걱정할 일이 못된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상대방한테 “잘 안 들려, 크게 말해!”하는 말은 들을지언정 “너 지금 호흡과 발성이 안 돼!”와 같은 말은 절대 듣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화술에서는 호흡과 발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1) 대사가 글말이라는 것 2) 암기해서 말을 해야 해서 ‘충동’이 잘 일어나지 않는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암기한) 상태에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어려움이 호흡과 발성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글말이라 해도 자기 말을 하듯 ‘충동’을 일으켜 말을 할 수 있으면 호, 발성도 역시 전혀 어려운 일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연기자의 화술능력이란 따지고 보면 등장인물인 ‘남의 말’을 자기 말처럼 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셈이다. 대사를 평소의 자기 말처럼 인식해 목소리를 내는 능력만 있다면, 즉 자기 말을 하듯 ‘충동’을 일으켜 호흡을 자극하고 자연스럽게 어휘를 떠올려 말을 할 수만 있으면 호흡과 발성은 걱정할 일이 못된다. 또 이러한 현실적인 기능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훈련할 수 있으면 호, 발성은 그다지 따분하지 않게 교육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화술에서 호, 발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단 일상에서는 짧게 말을 하게 되어 호흡량이 전혀 문제 되지 않지만 화술은 다르다. 따라서 길게 말을 하려고 들면 당연히 호흡량이 있어야 하고 이를 운용하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상에서 길게 말을 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하는가를 잘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저,저,하면서·말을 더듬거리거나 침을 삼키면서(입맛을 다시면서) 호흡의 지지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혀를 널름거리며 호흡의 변화(횡격막을 움직여)를 꾀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횡격막을 밑으로 내려 지지력을 확보하려는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심각한 말을 하거나 속 깊은 말을 하려고 할 때도 횡격막을 내려 복식호흡으로 전환 하는 것도, 또 목소리를 낮추려 드는 것도 다 이런 행위의 일환이다.
그래서 화술에서도 호, 발성을 지나치게 신비화할 게 아니라 생활 속의 무의식적인 호, 발성의 작동을 충분히 활용하는 게 훨씬 더 유용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화술에서 일상처럼 호, 발성이 잘되지 않는 이유
하나, 등장인물의 말을 하는데 따른 ‘긴장’이다. 자기 말을 하지 않는데 따른 생경함과 기질적으로 쑥스럽거나 자신감을 갖지 못한데 따른 ‘긴장’이 발생해 자연스러운 호, 발성을 방해한다.
둘, 자기 말이 아닌 등장인물의 말을 하는데 따른 요령부득으로 일상처럼 ‘충동’을 일으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말을 할 때처럼 ‘충동’을 일으켜 중추신경을 자극해 호흡을 접촉시켜야 하는데, 대사를 쳐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이런 요령을 잃게 되는 데 있다. 그래서 이게 화술(연기) 재능의 첫걸음이 되기도 한다.
셋, 글말은 일상의 소리 말과 달리 길다. 따라서 말이 길어지면 연기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개념을 놓치기 쉬워(암기에만 몰두하게 되어) 두뇌의 기능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 따라서 연기자가 자기가 해야 말의 개념을 빨리 파악하는 게 중요한 연기술이 되는 셈이다.
넷, 등장인물의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의해서 말을 하려고 들기보다 목소리를 바꾸거나 톤을 조절하는 데에만 전념하게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다섯, 사극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언어의 리듬 감각에 눌려 자신 있게 자기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당연히 호, 발성이 난조를 이루게 된다.
여섯, 무대공연이라는 강박감으로 인해 목소리를 높이려고 들어 목과 입에 경직현상이 나타나도 호, 발성에 장애가 발생한다.
일곱, 일상에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전혀 사용하지 않는 어휘를 사용해야 하는 부담감이 원인이 될 수 있다. 특히 화법(특히 작가가 고약하게 쓴 말)이나 말투가 다를 때 더욱 심해진다.
이런 경우에 자기 말을 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호, 발성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당연히 호, 발성이 연기의 기초교육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호흡과 발성을 지나치게 걱정할 것도, 그렇다고 지금처럼 지나치게 무시하거나 개념조차 없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복식호흡의 필요성
화술에서 복식호흡을 거론하는 것은 음성화를 위한 호흡의 지지력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지지력은 성악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차용한 것인데. 가수의 가창력을 결정하는 것도 바로 지지력이다. 폭발적인 가창력운운 하는 것은 이를 말하는 것으로 노래 실력을 결정하게 되는 것 역시 지지력의 결과다. 화술에서도 샤우팅은 전적으로 지지력에 의존하게 된다.
일단 인간은 태어나면 복식호흡을 시작한다. 누워있는 아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성장기를 벗어날 때까지 복식호흡을 하게 된다. 따라서 어렸을 때 복식호흡에 의한 발성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흉식호흡을 하게 되고 말을 할 때도 흉식호흡에 의한 발성을 하게 된다.
이는 이러한 장점 때문일 것이다. 짧게 말하면서 순발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고 자기의 의사를 신속하게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또 머리를 굴리면서 많은 말을 하려면 이게 편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것은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나 자기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말을 할 때는 횡격막을 사용해 복식호흡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일상에서의 호흡은 편리함과 기동성을 갖춘 언어활동에 위한 운용의 결과라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두뇌작용에 의해서 의도되는 게 확실하다.
따라서 화술에서 복식호흡을 하는 것도 음성화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기능성이 전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1) 글말은 소리 말에 비해서 길다. 당연히 긴 호흡이 필요하다.
2) 소리 말에서는 감정이 격해지면 말을 안 하거나 외마디소리를 내는데 반하여 글말은 작가의 요구에 의해서 길게 말을 하면서 감정도 실어야 한다. 가령 일상에서는 감정표현을 대체로 감탄사를 통해서 한다. ‘아휴!’ ‘정말!’ 등으로 말이다. 그런데 글말인 대사에서는 목소리에 실어야 한다. 따라서 그렇지 못하면 연기자가 감정표현이 없거나 약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3) 소리 말은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 자의적으로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는데 반하여 글말은 그렇지 못하다. 움직임이 많으면서 말도 많이 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호흡이 지지력을 갖지 못하면 움직임이 말하기를 방해한다.
4) 무대발성을 하기 위한 것이다. 연기자가 대사를 객석 깊숙이 침투시켜야 한다. 즉 에너지가 아랫배에 있어야 목소리에 힘을 실을 수 있어서 그렇다.
따라서 연기자가 복식호흡을 하지 못하면 지지력을 얻지 못해 당연히 발성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외에도
1. 글말을 일상처럼 발성을 하면(말하면) 우리말의 리듬을 얻을 수 없다. 억양(특히 어미처리- 핵 억양), ‘끊어 말하기’와 ‘찍어 말하기’가 잘되지 않아 우리말의 억양(리듬)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못하는 연기자로 취급된다는 말이다. 문어체가 강한 번역극 등에서 연기자가 ‘말을 못한다!’는 핀잔을 듣는 주된 원인은 우선 복식호흡에 의한 발성을 하지 못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가슴에 울림이 없이 ‘목으로만’ 소리를 내는 것으로 식별할 수 있다.
2. ‘혀 짧은소리’를 낸다. 연기자가 혀가 짧지 않은데도 ‘혀 짧은 소리’를 내게 된다. 장음 발음이 되지 않는다.
3. 말의 단락을 바꿔야 할 때 리듬과 톤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지력이 없으면 단락에 따른 변화를 줄 수가 없다. 복식호흡에 의한 발성의 핵심은 호흡지지력을 얻는데 있다. 특히 긴 대사를 칠 때나 문어체가 강한 대사를 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실천이 반드시 필요하다.
1. 처음부터 큰 소리를 내어 대사를 치면 안 된다. 그러면 자연히 목으로 소리를 내게 되는 데, 이는 복식호흡이 영원히 불가능해짐을 의미하게 된다.
2. 항상 가슴이 울리게 발성을 해야 한다.
3. 호흡의 근원이 몸의 중심의 하반부에 있다고 상상하라. 그래야 처음 대사를 내뱉을 때 목소리가 위로 뜨지 않고 횡격막에서 소리가 나오게 된다. (횡격막호흡이 되게 하라)
호흡이 지지되면

1. 어두가 부드럽고 어미가 쳐지지 않는다.
2. 말을 약간 장음으로 발음할 수 있어 발음이 명확해지고 전달이 잘된다.
3. 지지력이 생겨 ‘찍어 말하기’와 ‘끊어 말하기’를 잘할 수 있다.
4. 걸음걸이, 제스처, 표정연기가 가능해진다.
글말의 음성화는 복식호흡에 의한 지지력이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호흡 운용의 세 가지
무호흡’과 ‘찍어 말하기 :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단지 숨을 멈출 뿐, 호흡은 하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다. 말이나 구절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시 숨을 멈추는 것을 가리킨다. 일상에서도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때 강한 힘을 내기 위해서 잠시 숨을 멈추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강한 에너지를 낼 때에는 숨을 멈추는 생리작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반 호흡’과 ‘끊어 말하기’: 일명 ‘도둑 숨’이라고도 한다. 긴 문장의 (문어체)대사를 칠 때 계속 숨을 쉬어 주어야 하는데 이때 중간에 살짝 숨을 쉬어 주어야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런 상태의 호흡을 ‘반 호흡’ 또는 ‘도둑 숨’이라고 한다. 이때 말의 의미단락에 맞게 숨을 쉬어 주어야 말에 의미를 전달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숨을 쉬지 못하거나 아무 곳에서나 숨을 쉬게 되면 말에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기자가 호흡에 쫓겨 발음도 불안해지고 어미처리도 불확실해진다. 따라서 ‘반 호흡’을 정확하게 잘 할 줄 아는 연기자가 화술구사력도 뛰어나다. 왜냐하면 이게 화술에서 ‘끊어 말하기’의 핵심이자 호흡운용의 테크닉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 호흡’을 잘 구사하는 것은 연기자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는 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반 호흡’에 의한 ‘끊어 말하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온 호흡’과 톤의 변화 : 말이 하나의 단락(의미가 완결되면)으로 마무리 되면 호흡도 일단 단락을 져야 한다. 그런 다음에 새롭게 호흡을 해서 다음 말을 이어가야 한다. 그래야 목소리의 톤에 변화가 유도된다. 따라서 이를 쉽게 터득하는 방법으로는 일단 단락이 끝나면 ‘침을 삼키도록’ 하는 게 좋다. 이를 통해 호흡을 조절한(고른) 다음에 대사를 치는 습관을 들이면 좋다. 일상의 언어행위에서도 얼마든지 목격되는 게 ‘침 삼키기’다.
이렇게 호흡의 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강조구를 살리기 위한 무호흡, ‘끊어 말하기’를 위한 ‘반 호흡’과 단락마다 변화를 주기 위한 ‘온 호흡’이다.
화술에서는 대사암기에 치중하느라고(충동 없이 말을 하게 되어) 제대로 호흡을 하기 힘들다. 따라서 목소리에 톤과 리듬의 변화가 생기기 어렵다.

호흡은 발성을 위해서
화술에서 호흡을 거론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발성을 잘하기 위함이다. 호흡이란 결국 발성을 위한 에너지원일 뿐이다. 거기다 말하기에서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호흡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는 발성이어서 훈련도 발성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발성은 표현력
아무리 음감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를 목소리로 표현할 재능이 없으면 가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언어감각이 좋아도 발성능력이 없거나 요령을 모르면 연기자가 되기 힘들다. 발성능력이 결국 표현력이자 연기력이 되기 때문이다. 또 발성능력이 있어야 글말에 정확한 리듬을 붙일 수 있다. 따라서 연기에서 가장 중요시 되어야 할 것은 연기자의 발성능력이다.

발성은 ‘악기의 성능’
음성화에서 발성능력은 바로 악기의 성능에 해당한다. 성능이 뒤떨어진 악기로는 아무리 연주자가 재능이 뛰어나도 표현력에 한계를 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악기의 성능은 연주자인 연기자의 연주력을 높여주는 핵심이 된다.
그런데 화술에서의 악기는 바로 연기자 자신일 수밖에 없어 연기자 자신의 노력이 없이는 악기의 성능을 개선시키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악기의 성능이 바로 연기력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화술에서 악기의 성능의 결함에 의한 표현력(음성화에서)의 결핍은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1. 악기의 성능은 타고난 신체조건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2. 성능의 개발은 연기자 자신의 몫이다. 그래서 호, 발성도 연기자가 책임져야 한다.

발성의 5원칙


연기자가 발성을 잘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5원칙을 지켜야 한다.
1. 긴장하지 마라!
암기한 말을 하려면 자기 말을 할 때와 달리 긴장이 쉽게 발생한다.
2. 생각을 하고 말을 하라! – 무슨 말인지 알고 소리를 내라!
암기한 대사는 자기 충동으로 하는 말이 아니어서 ‘생각’ 없이 소리를 내기 쉽다. 특히 경계해야 할 게 ‘용도’가 없이 말을 하는 것이다. 즉 ‘말을 하는 목적’이 없이 소리만 내면 안 된다. 이게 말의 억양(리듬)을 주도한다.
3. 가슴을 울려라
사람들은 목소리가 목에서 나온다고 여긴다. 목소리를 내는 성대가 목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소리는 가슴을 울려나온다. 왜? 가슴 밑에 있는 횡격막이 기능하기 때문이다. (횡격막의 기능 참조)
따라서 화술도 일상처럼 목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고 가슴을 울려나오도록 해야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된다. 횡격막에서 확장되어, 가슴을 거쳐 소리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목소리가 가슴을 울려 나오게 하려면 소리의 에너지가 몸의 아래쪽에 있어야 한다.
물론 흥분 상태에서는 목소리가 머리(두성)를 울려 나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화술은 가슴이 울려 나와야 한다. 이를 확인하려면 대사를 칠 때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울림이 있는지(공명이 생기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또는 상대에게 기대어 등이 울리면 가슴이 울리는 상태다.
가슴이 울리면
* 목 눌림이 없어 음폭이 커진다. 그리고 울림이 좋아 목소리가 멀리 간다.
* 몸 전체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처럼 느껴져 목소리의 톤에 안정감이 있다.
* 감정이 풍부한 소리가 된다.
* 두성과 달리 목소리에 깊이가 생긴다.
* 목소리에 진실성이 높아진다.
목에서 소리가 나면 감정을 낼 때 ‘목을 짜는’ 소리가 되거나 입공명이 강해져 입안에서 소리를 오물거리게 된다. 따라서 연기자는 항상 가슴이 울리도록 횡격막을 안정시키고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이완 상태를 유지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발성법이다.
목으로 소리를 내면 간단한 대사를 칠 때는 별반 문제가 되지 않으나,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경우에는 당연히 목에 힘이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무대발성을 시도할 때도 목소리만 커질 뿐 어미가 쳐지고 리듬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4. 코에 걸리는 소리를 내라
내가 젊었을 때 선배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대사를 잘 치는 배우치고 코가 낮은 사람은 없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발성에서 코에 걸리는(울림이 있는) 소리는 연기자에게 좋은 발성과 발음을 선사한다. (단 ‘코 공명’과 ‘코에 걸리는 소리’를 구별해야)
왜냐하면 ‘코에 소리가 걸리면’ 일단 소리가 멀리 가고, 우아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소리의 침투력도 좋아져 무대발성에도 이롭다. 성악가들이 무대에 등장하기 전 ‘미, 미, 미’하고 소리를 내는 것은 코에 적당한 울림을 살려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코에 축농증이나 비염 등이 있으면 소리가 코에 걸릴 수 없어 좋은 소리를 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개개인의 코의 태생적 생김새가 화술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런 점에서 동양 배우들이 서양 배우들 보다 불리한 게 현실이다.
5. ‘윗니’를 통해 소리가 나가게 하라
목소리는 반드시 ‘윗니’의 뒤를 치면서 나오게 해야 한다. 그래야 몸(구강에서부터 전신에 이르기까지)에 공명이 살아나 발성도 좋아지고 발음도 명확해진다. 화술에서 칭찬받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입 끝으로 소리가 나오게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훈련을 통한 습관화가 아주 필수적이며, 따라서 무대배우를 꿈꾸는 연기자는 ‘이’의 성형(의치)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무대발성에 결정적인 흠결이 되므로 성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발성의 장애
1. 긴장으로 인해서
2. 비정상적인 신체 및 구강구조
3. 평소의 잘못된 습관
4. 발성에 대한 개념부족
발성이 되지 않거나 잘못된 발성을 하면
1. 발음이 되지 않아 전달기능을 상실한다.
2. 소리 말의 리듬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3. 목소리의 조절력을 상실해 현실감을 잃는다.
4. 공명이 되지 않는다.
5. 무대발성이 불가능해진다.
6. 인물창조가 힘들어진다.
7. 감정을 실지 못해 감정처리가 되지 않는다.
8. 극에 에너지가 없어 관객이 흥미를 잃는다.
9. 극의 양식(스타일)을 살려낼 수가 없다.
10. 움직임이 둔해져 신체표현력을 잃는다.

발성과 인물창조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당연히 부드럽고 여유로운 인물의 창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물창조는 전적으로 발성력에 의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발성이 비극도 코미디 같은 장르 연기도 가능하게 한다. 연기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물창조여서 발성능력이 좌우하게 된다.
감정이 풍부한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도 실상은 연기자의 발성능력에 좌우된다. 더욱이 몸의 움직임- 제스처나 걸음걸이, 표정연기도 – 발성이 잘되어 몸이 이완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따라서 발성이 좋다는 것은 한마디로 호흡이 원활하고 연기자가 이완상태에 있음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발성이 좋다는 말은 소리를 통한 호흡의 흐름이 좋아서 연기자가 자유자재로 자기의 목소리를 크고 작게 조절할 수 있는 조절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무대발성
먼저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잘라 이를 어금니에 (세로로)물고 말을 해 보면 복부근육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즉 힘을 가해 목소리를 낼 때 어떻게 복부의 근육이 움직이는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무대발성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화술에서의 발성법(요령)을 이해하고 공명을 이용해 소리를 증폭시켜야 한다.
1. 복부근육의 활용
2. 공명의 활용
연기자의 훈련과 경험이 만들어내는 게 무대발성이다.

공명의 중요성
화술에 공명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가슴공명과 코 공명, 구강공명의 활용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다. 또 무대발성을 위한 필수요건이다. 듣기 좋은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바로 공명이다.
인물창조에서 무거운 대사나 권위 있는 인물을 창조할 때는 가슴공명(흉성)을 키워 목소리에 무게를 실어야 하고, 가벼운 대사나 부드러운 인물을 창출할 때는 코 공명을 잘 활용해야 한다. 두성과 흉성을 적절히 잘 배합해야 인물의 됨됨이와 목소리의 분위기를 만들어내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억지스러운 소리를 내거나 목을 짜는 듣기 싫은 소리밖에 낼 수 없게 된다.
무대발성의 요령과 공명의 활용방법은 추후에 훈련방법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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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과 직장인의 단상

Posted by 히키신
2019. 3. 20. 11:36 순간의 감상[感想]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인 노혜진(42) 시인이 1월 시상식에서 밝힌 당선 소감. “머리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미 하고 있거나,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었다. 이해타산을 따지며 막아 보려 해도 어쩔 수 없었고 그것이 마음이 진짜 가리키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

...전자님 말씀 격공합니다
모든 경험이 쌓이면 실력. 명함. 얼굴이 되네요... ^^

월급쟁이 별거 있습니까
스펙 쌓고 살아남고 살아남아서 인정 받고 그리고 더 좋은 곳으로 가려하고 그리고 다시 살아남고 살아남아서 인정 받고 그러다 생애주기 끝나는 40대말 50대초에 안짤리게 버틸 수 있는 체력 키워두는게 직장생활 아입니까 ㅋ

//

내 마음이 가리키는 진짜 방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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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2월의 어느 겨울 날

Posted by 히키신
2019. 3. 20. 08:22 순간의 감상[感想]

취업 준비를 하다 너무 피로해서 면접 준비를 그치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마침 형의 집 앞을 지나던 길이었는데 눈 앞에서 형이 들어오는게 아닌가.
“어 행님! 마침 잘 됬다!”
학과사무실에서 부탁한 간단한 설문 일을 하고서 받은 도서상품권 5만원을 형에게 건네 주었다. 그 때 길 건너편에서 어떤 남루한 차림의 노파가 손짓하였다. 수레 위의 고물들이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내가 하루종일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손에 힘이 없어가...이 것 좀 주워주오.”
나와 형은 널부러진 고철과 재활용 쓰레기들을 주워 수레에 쌓았다. 그러나 날이 너무 추웠고, 형은 너무도 얇은 옷차림으로 있었다. 덜덜 떨면서 서 있기에 혹시라도 면역이 약한 형이 감기에 걸릴까봐 걱정이되어 말했다.
“행님은 들어가라. 감기 걸리겠다. 여는 내가 알아서 하께.”
“그래도...”
“괜찮다. 들어가라 행님.”
“그래, 담에 밥이나 같이 먹자.”
형은 내심 주저하는 듯 했지만,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잘 한 것이다. 형은 본인의 건강을 신경쓰는 데에 최우선으로 신경 씀이 마땅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노파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가뜩이나 추운 한 겨울날, 이 무거운 것들을 혼자서 어떻게 다 지고 간단 말인가.
“고맙소 총각. 여기 선원에서 할아버지가 오늘 죽었어요. 너무너무 가난해서 병들어 제대로 먹지도, 치료하지도 못해서 오늘 갔다우. 그래서 오늘 이렇게 물건이 많이 나왔어요.”
“예...이거 이렇게 묶으면 되나요?”
“아니, 이거는 그냥 이렇게 한번만 묶으면 되요. 그래도 안떨어져. 아이고 괜히 힘들게 묶고 있었네.”
사실 이런 파지 더미 쌓인 수레를 한번도 끈으로 묶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파지 줍는 할머니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래 뵌 적도 없었다. 갑자기 나는 할머니의 사정이 궁금해졌다.
“우리 아저씨가 뺑소니를 당했어요. 그런데 H 해상에서 딱 2천만원이 나왔는데, 이런 저런 비용으로 1980만원이 한번에 나가고 딱 20만원만 남았지요. 그런데 그렇게 보험사에서 돈을 받으면, 의료 보험도 적용 못 받는다대요? 그래서 그 뒤로 수술비에 병원비에 살림은 순식간에 거덜났지요. 내가 몇 년이나 똥오줌 받아주고 수발했는데, 결국은 죽었어요. 아이고 힘들다....영감은 내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거 알까? 모르겠지. 이미 죽어버렸는데...”
“아...”
어떤 말을 하는게 좋을지 순간 많은 생각을 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너무 안타깝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날도 추운데 너무 힘드시겠어요. 이거 끌고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여기 쓰레기도 다 정리하고 가야되고 이 통도 어디다 맡겨놓고 가야되요. 그럴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요. 이만하면 충분히 고마워요. 얼른 가보세요. 나 때문에 친구하고 얘기하던것도 못하고...”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거 끌고 가는 것까지 도와드릴게요.”
몇 번이고 할머니는 이제 괜찮으니 가보시라 고 하였다. 손주 뻘 되는 나에게 그렇게 할머니는 존대하며 얘기하셨다.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도저히 그대로 갈 수는 없었다.
내가 계속 남아 있자 할머니는 나에게 이것 좀 묶어 달라, 이것 좀 위에 얹어 달라며 부탁하셨다. 역시, 남아 있길 잘했다.
“여기 이 선원에서 날 잘 챙겨줘요. 여기 이 참기름도 이렇게 주고..그런데 여기서 오늘 할아버지 한사람이 죽었어요. 너무너무 가난해서 아픈데 치료도 못받고 고생하다 갔지요. 아이고....그래서 이렇게 오늘은 폐품이 많이 나온거에요.”
과연 수레에 다 실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갖가지 폐품들이 가득했다.”
“이 정도면 한 얼마쯤 받을 수 있어요?”
“한 8500원 정도?”
“아... 그것 밖에 안되요?”
“네. 요즘 경기가 어려워서 많이 싸졌어요. 그래도 이건 좀 많이 나오는 거에요. 어제는 고물상에 가니까 다해서 6500원 쳐주더군요.”
할머니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듯 보이는 손수레 한가득한 폐품들이 고작 8500원이라니.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아무렇지 않게 쓰는 하루 한끼 식사에 담배값에 교통비로만도 1만원은 족히 쓰는 나를 되돌아보니 괜시리 부끄러워졌다.
할머니를 도와 수레를 끌고 갔다.
“이렇게 더 올려야 힘이 덜들어요. 더, 더.
내리막에서는 더많이 올려들어야 되요. 안그럼 잘못하면 미끄러져요. 그러다 대형사고나지.”
“이 정도로 들어올리다 쏟기는거 아니에요?”
“아냐, 안 쏟겨요.”
역시 어떤 일이든 매일같이 하는 사람의 조언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얻은 지혜가 깃든 법이다. 과연 할머니 말대로 손잡이를 높이 올리고 수레를 끄니 한결 수월하다.



할머니와 인사하고 나와 시계를 보니 어느덧 두어시간이 훌쩍 지났다. 할머니를 돕고 있는 동안 길을 지나며 힐끔 힐끔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참 아쉬운 건, 그들 중 단 한사람도 거들겠다며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함이 지나간다. 내일도 어김없이 하루종일 폐지를 주으실 할머니를 생각하며 짠한 안쓰러움도 지나간다. 헤어질 때 연신 고맙다며 허리를 숙이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내 도움으로 누군가가 고마워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작은 뿌듯함을 느꼈다.
장전역에서 인사드리며 돌아서는 찰라, 할머니는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총각! 고마워요! 총각은 반드시 잘 될거에요!”

할머니의 외침은 분명 나를 위한 축복의 말이었지만 왠지 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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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09. 28.

Posted by 히키신
2019. 3. 20. 08:13 순간의 감상[感想]

순간적인 판단

학교를 가려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라 내려가는 길이었다. 어느 아줌마
"저기요, 안평역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해요?" 하고 물어오는데, 나는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였고 내 옆에는 젊은 여자도 같이 있었다. 그 여자는 잠깐 망설이더니, 도착해있는 전철을 보고 뛰어내려가 전철에 쏙 탄다. 나는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역행해서 몇걸음 오르려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아줌마를 두고 하는 수 없이 내려왔는데, 전철은 내 눈앞에서 딱 문이 닫히고 출발한다. 결국 나는 아줌마에게 길을 알려주지도, 전철을 타지도 못한 채 혼자 허탈히 섰다.
어느 누군가의 묘비에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라고 써있었다던가. 망설이는 사이에 인생은 흐른다.
기다리다 다음 전철을 타려는 순간, 어떤 고등학생이
"얼~씨구시구 들어간다 절~씨구시구 들어간다..." 하며 박수를 치며 전철에 탄다. 전철을 보면서 각설이를 떠올리는 학생을 보니 시인이 될 소질이 있는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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