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미상

Posted by 히키신
2019. 3. 5. 23:31 순간의 감상[感想]

나와 대립하는 상대의 시선은 내가 보지 못하는 곳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될 수 있다.

//

반드시 명심하고 언제든지 배우는 자세로 생에 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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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중의 한 글귀 - 반 집의 승리

Posted by 히키신
2019. 3. 5. 23:29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순간 순간의 성실한 최선이 반 집의 승리를 가능케 한다.
순간을 놓친다는 건 전체를 잃고 패배한다는 걸 의미한다.

//

매일 반복되는 순간 속에서도 끊임없이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성실할 수 있는가?

태세의문(泰世醫門)

Posted by 히키신
2018. 8. 20. 22:24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이하의 글은 약초 연구가이신 운림 최진규 선생의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선생님과는 2016년 여름 경에 평창동 선생님의 저택에서 딱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후에 인연을 이어 가지 못했지만,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제 뇌리 깊숙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또 뵐 날을 기다리며...

 

///

 

서양에 구약성서 전도서가 있다면,

동양에는 이 글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

 

다음의 글은 태세의문(泰世醫門)에서 오래 전부터 글로 전해 오는 가르침이다. 이를 이름으로 지어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한다.

 

師曰泰世醫門 自古傳之遺訓也 於此現門主不器書之傳之雲林也


스승께서 가라사대 '태세의문'에서 옛적부터 전하시는 유훈이니라. 이를 받들어 현 문주인 불기가 쓰고 운림이 풀이하여 전하노라

 

註釋 - 乾坤否世之末 當於老陰老陽之世 救天地與萬物之 欲死大病 尋覓大藥之事也


주석 = 건곤비세(乾坤否世)의 말엽(末葉) 천지(天地)와 음양(陰陽)의 기력이 쇠잔(衰殘)해진 때를 당하여 천지와 만물의 대병(大病)을 치료할 대약(大藥)을 찾으러 온 것이 오늘날 이 시대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인생의 목적이다.

 

人依山河니라 其作方便幾千頭也--鳥頭=


사람은 산하대지(山下大地)에 의지해 사는지라 그 먹고 살기 위해 방편을 지으려고 수천 갈래로 머리를 쓰는지라 이를 일러서 새대가리라고 하며

 

神乘人心이라 其投釣網累萬目也--魚目이며=


귀신은 사람의 마음을 타고 사는지라 그 던져 놓은 낚시와 그물이 몇 만 코인지라 이를 일러서 고기눈이라고 하며

 

鳥飛虛空이라 上巢下泉知消息也--調息이라 =


새는 허공을 나는지라 날아오르면 구천(九天)이요 날아 내리면 구천(九泉)이라. 소식을 다 아는지라. 이를 일러서 숨결을 고른다라고 하느니라.

 

鸞鳳沖霄必假羽翼이어늘 嗚呼可以人으로 不如鳥乎=


난새나 봉황이 천상에 오를 적에는 반드시 깃털 날개의 힘을 빌린다고 했거늘 오호라 가히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새만도 못하단 말인가?

 

참조(參照) - 난경(鸞鏡), 난령(鸞鈴), 난도(鸞刀), 난기(鸞旗), 난가(鸞駕), 봉황기(鳳凰旗), 봉각(鳳閣), 봉문(鳳門), 봉개(鳳蓋), 봉련(鳳輦), 봉력(鳳曆).

以天覆我하시고   

하늘로써 나를 덮어 감싸시고


以地載我러시다   

땅으로써 나를 실어 안으시다


以日照我하시고   

해와 달과 별로써 앞길을 밝게 비쳐 주시고


以氣護我러시다   

온갖 기운으로써 나를 보호하시고


以物育我하시고           

만물로써 나를 기르시고


以師敎我러시니           

스승을 내시어 나를 가르치시니


嗚呼大恩   

오호라 이 큰 은혜를


何堪當乎리오              

내 어찌 다 감당 하리요


欲報其恩이로대        

그 은혜를 갚고자 하지만


莫能一毫일새    

한 터럭만큼도 능히 보은(報恩)하지 못하거늘


何以廉恥     

무슨 염치가 있어서


再加伏乞이리오           

또 다시 애걸복걸(哀乞伏乞) 하리요

 

天也生生하시고   

하늘은 온갖 생명을 낳으시고 또 낳으시며


地也育育하삿다     

땅은 온갖 생명을 기르시고 또 길러 내시니


天陽旣老하시고   

하늘의 기운은 이미 다 늙으셨고


地陰己衰하삿와        

땅의 기력은 이미 다 쇠약하시어


森羅中病     

삼라만물(森羅萬物)이 이미 대병(大病)이 들었으니


火牛之勢로다    

마치 소 꼬리에 불이 붙은 듯한 형세로다


孝忠仁義     

효자와 충신과 어질고 의로운 이와


賢良英傑     

현량과 영웅과 호걸들이


欲求大藥     

천지의 대병(大病)을 고칠 대약(大藥)


如意寶珠     

풍운조화(風雲造化)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


霹靂快刀내지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할 수 있는 벽력쾌도(霹靂快刀)


龍宮藏經하야    

용궁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장경(藏經) 등을 구하려고


萬死險地에                 

()이면 만()이 억()이면 억()이 모두 불귀(不歸)의 객()이 되는 험난한 곳에


爭投身命이로다    

앞을 다투어 신명(身命)을 던지듯 내달리는 것이로다.

天上天下第一寶     

천상과 천하에서 제일가는 보물은


隱以藏之玄武洞  

현무동(玄武洞)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다고 하고


 

洞在北嶽離火谷 

현무동은 북악(北嶽)의 이화곡(離火谷)에 있다고 하네.


千險萬難九絶地 

지극히 위험한 구절지(九絶地)라서


 

萬乘累萬龍虎子 

백천만억(百千萬億)의 수많은 용과 같고 범과 같은 젊은이들이


死生谷口肅然立 

목숨을 걸고 사생(死生)의 골짜기 입구에 숙연(肅然)하게 늘어서서


 

怒目壯力待谷開 

눈을 크게 노려 뜨고 장력(壯力)을 한껏 돋우고 골짜기 문이 열릴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以頭作斧破關門 

머리를 도끼로 삼아 앞을 막은 관문(關門)을 깨트리고


 

顚沛跌蹇投險谿 

엎어지고 자빠지고 미끄러지고 절룩거리면서 험악한 골짜기에 몸을 던지듯 뛰어드니


萬乘萬死死生路 

()이든지 억()이든지 돌아올 수 없는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는


飛流直下萬丈瀑 

만 길 높이에서 곧장 떨어져 내리는 폭포와


靑苔斷崖逆流登 

푸른 이끼가 끼어 있는 도끼로 자른 듯한 천애(天涯)절벽을 거꾸로 거슬러 오른다.


 

險中平險廣狹岐  

험난한 중에도 약간 편하고 넓은 길이 있고 더 험악한 길목이 있으니


步步岐岐死生岐 

 걸음마다 갈림길이오, 갈림길마다 삶과 죽음의 교차하는구나.

 

初無首長問何處  

처음부터 이정표도 없고 인솔자가 없으니 어디에 가서 길을 물을 것인가?


誰知絶危藏寶事  

뉘라서 제일 험악한 곳에 보물이 감추어져 있음을 알리요



萬乘萬死一得寶 

백천만 억이나 되는 헤아릴 수 없는 현량(賢良)과 충의열사(忠義烈士)와 영웅호걸 중(百千萬億無數無量賢良忠義英傑中)에 오직 한 사람만이 보물을 얻어


天時三變乘紫霞    

천시(天時)가 세 번 변한 뒤에 붉은안개수레를 타고 되돌아오네.


 

不忘不忘初不忘 

잊지 말아야지. 천지(天地)를 구할 '대의(大義)'와 '대약(大藥)'을 잊지 말아야지.


不迷不迷志不迷 

오욕칠정(五慾七情)에 끄달려서 지동지서(之東之西)하지 말고 초지일관(初志一貫)하여야지.


 

不覓不覓外不覓  

허령망신(虛靈妄信) 기적영험(奇跡靈驗) 찾다가는 내 몸의 조화(造化)를 찾지 못하리라.


不照不照散不照     

부귀공명(富貴功名)의 꿈을 좇아서 머슴 공부(功夫)에 진력(盡力)를 다하다가는 내 몸의 진원(眞元)이 고갈(枯渴)되리.


 

若忘覓照何面歸   

내 한 몸(一身)에서 이룰 수 있는 천지조화(天地造化)를 외면(外面)하고서 무슨 면목(面目)으로 하늘에 있는 고향(故鄕)에 돌아가리.


億千萬歲莫知歸  

억천만 년 동안을 구천(九泉)을 헤맨다고 해도 영-(-) 돌아갈 길 찾지 못하리.

 

출처 : https://blog.naver.com/wun12342005/221342285583 최진규의 약초학교

 

뉴지엄(Newseum)에 적혀 있는 글귀

Posted by 히키신
2018. 8. 19. 02:31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워싱턴 D.C.의 세계에서 가장 큰 언론 박물관 '뉴지엄(Newseum)'은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나오는 종교, 언론, 출판, 결사, 청원 등 5가지 자유의 가치에 대하여 전시하고 교육하는 곳이다. 그곳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고 한다.
 
“If a person goes to a country and finds their newspapers filled with nothing but good news, there are good men in jail.”

한 사람이 어떤 나라에 갔을 때 그 나라의 신문들이 모두 좋은 뉴스로만 채워진 것을 발견한다면, 그 나라의 좋은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있을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Posted by 히키신
2018. 8. 19. 02:28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마태 7 : 1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보고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심판이 아닙니까?'
"아니다."
"어째서 아닙니까?"
"나는 보이는 대로 보았을 따름이다."
"누구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 너희가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은 다르다."
"어떻게 다릅니까?"
"보이는 대로 보는 것과 보는 대로 보이는 것의 차이다."
"......?"
"좀더 자세히 말하면, 사심(私心)없이 보는 것과 사심을 품고 보는 것의 차이다. 나는 보이는 대로 보거니와, 너희는 보고자 하는 대로 본다. 위선자를 위선자로 보는 것은 심판이 아니다."
"사심없이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을 비워라."
"마음을 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을 비우면 된다."

- 우헌서당 이상재 선생님의 페이스북 ‘길에서 주운 생각들’ 중에서

- 선생님 글이 너무 좋아 살포시 가져왔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

올드보이의 개미

Posted by 히키신
2018. 8. 19. 02:25 순간의 감상[感想]

영화 올드보이의 초반부에 주인공 오대수(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가 15년간 감금되있던 옥중씬에 나오는 개미. 이 개미는 분사된 가스에 취한 오대수의 환상 속에서 온몸을 뒤덮는다. 간혹 외롭고 고립된 사람들이 개미를 본다고 한다. 개미는 단체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이번 여름은 유난히도 덥다. 유사 이래 최고의 더위라 하고, 그 더위에 13년을 함께한 우리집 강아지 시마도 숨쉬기를 그쳤다. 그리고 얼마 뒤, 개미들이 그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개미가 끓는 원인을 없애려 분리수거한 쓰레기봉투들을 자꾸만 집밖으로 냈지만, 부모님께선 도로 쓰레기를 집안 제자리에 놔두곤 하셨다. 이에 계속 개미에 대해 투덜거린 날 보고 어느날 아버지께선 개미를 박멸하는 약을 뿌리고 트랩을 설치해두셨다. 그 후 개미떼가 들끓던 거실 마루엔 더이상 개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내 방 벽에 유유히 개미가 지나간다.

남에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세치 혀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 그리고 긴 시간 슬픔속에서 신음하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올드보이의 인물들. 잔인한 복수심으로 삶을 지탱해왔지만 그 복수가 끝나고 난 뒤엔 한꺼번에 슬픔이 덮쳐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비극.
영화는 픽션이지만 삶은 논픽션이다. 그러나 픽션은 논픽션으로부터 시작된다.

극중 인상깊은 명대사가 많지만, 아직까지도 내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는 말이 있다.
‘웃어라, 온 세상이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되리라.’
시궁창같은 현실을 살아가게 지탱해주는 것이 피의 복수라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낳는 복수보다는 차라리 해탈, 그리고 용서의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진정 웃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아는 것과 직접 걷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그 길에 아직 다다르지 않았다.

- ‘18. 8월의 어느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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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 카리마조프 가의 형제들 (작성중)

Posted by 히키신
2018. 4. 23. 17:01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도스토예프스키, <카리마조프 가의 형제들>, 김연경 옮김, 민음사, 2007


p23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란 심지어 악인들조차도 우리가 대략적으로 단정 짓는 것보다는 훨씬 더 순진하고 순박한 법이다. 이건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p53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진리가 있단 말이냐? Il faudrait les inventer.(그것을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 돼.)

[볼테르가 한 말을 아이러니하게 인용한 것이다. - 원주]


p55

리얼리스트를 믿음으로 이끄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진정한 리얼리스트는 만약 그가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라면 기적마저도 믿지 않을 힘과 능력을 언제라도 자기 내부에서 발견할 것이고, 반면 기적이 자기 앞에서 물리칠 수 없는 사실이 된다면 그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감각들을 믿지 않는 쪽을 택할 것이다. 설사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건 그저 자기가 지금까지는 몰랐던 자연적인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리얼리스트에게는 기적에서부터 믿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부터 기적이 나오는 것이다. 

[니체가 창조자는 자신의 신앙을 신앙한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한편 철학자 박동환은 현실이 없는 세계가 진정한 현실주의자의 이상세계라고 말하였다.]


p57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생을 희생한다는 것이 어쩌면 이와 같은 많은 경우에 치를 수 있는 희생 중 가장 손쉬운 것이라는 점을 이런 청년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젊음이 한창 끓어오를 때 인생의 오륙 년을 힘들고 지난한 학업과 학문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비록 예의 그 진실과 위업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그것을 기필코 이루겠노라고 다짐한 뒤 그것을 위해 자기 내부의 힘을 열 배로 늘리기 위한 목적에서라고 할지라도ㅡ그런 희생은 그야말로 대부분의 청년들과 정반대되는 길을 선택했을 뿐, 어서 빨리 위업을 이루고 싶다는 열망에 있어서는 똑같았다. 진지하게 심사숙고해 본 결과 불멸과 신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얻어 감동하자마자, 당장에 그는 응당 스스로에게 "불멸을 위해 살고 싶다, 어정쩡한 타협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그가 불멸과 신은 없다고 단정 지었다면, 당장에 그는 무신론자와 사회주의자의 길로 나갔을 것이다.(왜냐면 사회주의는 노동의 문제 내지는 소위 제4계급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주로 무신론의 문제요 무신론의 현대적 구현의 문제이며 땅에서 하늘에 다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을 땅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그야말로 신 없이 건설되는 바벨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산다는 것이 심지어 이상하고 불가능하다고까지 알료샤는 생각했다. 성경에도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모든 것을 나눠 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마태오복음서 19 : 21, 마르코복음서 10 : 21, 루카복음서 18 : 22. - 원주]


p62

사실, 인간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와 정신적인 완성에 이르기 위해 정신적으로 재탄생함에 있어서 이미 천 년에 걸쳐 온갖 시험을 거쳐 온 도구도 양날의 무기로 변할 수 있는 노릇이고, 따라서 어쩌면 겸허와 완전한 극기가 아니라 정반대의 것인 가장 악마적인 오만함을, 즉 자유가 아닌 굴레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나도 적확한 통찰이다.]


p92

"그러니까 디드로 얘기 말씀이십니까, 예?"

"아니요, 디드로 얘기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결국 자기 내부에서도, 자기 주위에서도 어떤 진실도 분간하지 못하게 되며, 그리하여 자기 자신도, 타인들도 존경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도 존경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고,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껏 즐기고 기분을 풀자니 정욕에, 조잡한 음욕에 빠져들게 되고 결국 완전히 짐승과 다름없는 죄악의 소굴로 빠져들게 되는 법이니, 이 모든 것이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거짓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화가 나는 것도 이따금씩 아주 통쾌한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또한 사람이란, 아무도 자기의 화를 돋우지 않았건만 그저 저 혼자 잔뜩 화가 났노라고 지어내고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장식 삼아 거짓말과 과장을 부풀리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 겨우 콩알 몇 개로 산 하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ㅡ그 자신이 이 점을 잘 알면서도 그럼에도 스스로 버럭 화를 내는데, 그것도 통쾌할 때까지, 커다란 만족을 얻을 때까지 화를 내서 모욕감에 시달리다가 결국엔 상대방을 진정으로 적대시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거짓된 세상을 창조하여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리플리 증후군이 생각난다. 특히 고도의 이성적인 사고와 학습을 하는 이가 이러한 병을 앓게 되는 경우, 그 치료 역시 매우 힘들며 사회 속에서 큰 문제를 낳을 소지가 있다. 더이상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 시작된 거짓말이 결국 사람들의 기피 속에서 스스로 상처를 돋우는 결과를 낳게 된다.]


p101

민중에게는 말없이 끈덕지게 참아 온 괴로움이 있다. 그것은 자기 속으로 침잠하여 침묵한다. 하지만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괴로움도 있다. 그것은 일단 눈물과 함께 터져 나오면 통곡으로 변한다. 여성들에게선 특히나 그렇다. 하지만 이 괴로움이 말 없는 괴로움보다 가벼운 건 아니다. 이 경우 통곡이란 이처럼 가슴의 상처를 점점 더 벌리고 찢어 놓음으로써,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달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괴로움은 위안을 바라지도 않고, 그저 달랠 길 없는 괴로움의 느낌으로 연명한다. 그러니까 통곡은 끊임없이 상처를 자극하고자 하는 욕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통곡의 외침은 일시적인 후련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방법은 될 수 없다. 그것은...]


p122

"그 말씀, 진정이시겠지요? 자, 지금 부인께서 그렇게 인정하셨으니, 저는 부인께서 진실되고 착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을 믿겠습니다. 설령 행복에까지는 다다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인이 좋은 길로 들어섰음을 늘 기억하시고 거기서 일탈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무엇보다도, 거짓을, 어떤 것이든 거짓을 피하고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을 피하십시오. 자신의 거짓을 관찰하고 매 시간, 매 순간 그것을 들여다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이건 자기 자신이건 누군가를 거리껴하지도 마십시오. 부인의 내부에서 어떤 것이 부인께 추잡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인께서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인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정화되는 겁니다. 공포도 역시 피하십시오, 공포란 그저 온갖 거짓의 결과일 따름이지만, 사랑을 성취함에 있어 자신의 옹졸함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이와 관련하여 부인의 어떤 고약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큰 두려움을 갖지는 마십시오. 부인께 이보다 더 즐거운 얘기를 더 이상 들려 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니, 몽상적인 사랑과 비교할 때 실천적인 사랑이란 잔혹하고 무서운 것이니까요. 몽상적인 사랑은 어서 빨리 만족할 만한 위업을 달성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봐 주길 갈망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그렇게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 목숨조차도 내놓을 것이지만, 다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마치 연극 무대에서처럼 어서 빨리 성사된다는 조건으로만 말이죠. 하지만 실천적인 사랑, 그것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말하자면 완전히 학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리 말해 두건대 부인께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멀어졌음을 목도하고 공포감을 느끼게 될 바로 순간ㅡ바로 그 순간에, 부인께 미리 말씀 드리지만, 부인은 갑자기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부인 앞에서 언제나 부인을 사랑했고 언제나 부인을 인도했던 주님의 기적적인 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부인과 더 오래 머물 수가 없군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부인은 울고 있었다. 


 

광명진언

Posted by 히키신
2017. 12. 15. 15:42 etc

“뜻모르고 중얼거린 기도는 혀의 부질없는 무용(舞踊)이며, 뜻모르고 중얼거린 주문은 입술의 부질없는 풀무질이다.”
- 윤노빈, <신생철학(新生哲學)> 머리말 중

세간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에 관심을 접은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진실로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러한 주문을 외는 행위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어차피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며 당장 눈앞에 닥칠 위험도 전혀 알 수 없고,대비할 수도 없으니...

“행위의 결과를 바라지 않는 자는 진실로 자유롭다.”
- 바가바드 기타


///


광명진언 이란?



광명진언



[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광명진언은 비로자나불의 진언이요 모든 불보살의 총주(總呪)이며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지혜의 대광명으로 살아있는이와 죽은이 모두에게 새로운 태어남을 얻게하는 신령한 힘을 지니고 있읍니다



수 백만년 동안 어둠에 휩싸여 있던 암굴(暗窟) 일지라도 불을 밝히면 한 순간에 모든 어둠이 사라지고 밝음이 깃드는것과 같이 아무리 깊은 죄업(罪業)과 어둠이 마음을 덮고 있을지라도 부처님의 광명이 비치면 저절로 맑아지고 밝아지고 깨어나게 된다는 것이 이 진언을 외워 영험을 얻는 원리 입니다



1) 만일 중생이 이 진언을 두번이나 세번, 또는 일곱번을 귀로 듣기만 하여도 죄업이 소멸 된다는것.

2) 중생이 십악(十惡)과 오역죄(五逆罪)와 사중죄(四重罪) 둥의 무거운 죄를 지어서 죽은다음 악도에 떨어질지라도 능히 해탈을 얻을수 있다는것.

3) 그릇에 흙이나 모래를 담아놓고 이 진언을 108번 외워 그 모래를 시신위에 흩거나 묘지 또는 묘탑(墓塔) 위에 흩어주면 비로자나 부처님의 광명이 망인에게 이르러 모든 죄업을 소멸지켜줄 뿐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연화대로 인도 하게 된다는것.

또 일타 스님 께서는 강조 하셨다.


1) 우리 불자들도 성묘 또는 묘사를 지내러 갈때 광명진언을 108번 외운 모래를 준비 하여 조상님들의 묘 위에 뿌려주자.

2) 집안의 상(喪)을 당하였을때, 절에서 49재를 지냄과 동시에 그 49일 동안 집에서 망인(亡人)의 사진을 앞에 놓고 앉아 매일 광명진언을 외워주자.

이상은 광명진언을 망인과 관련지어 이야기 한 것입니다.

따라서 광명진언을 '망인을 위한 진언' 으로만 생각 하는 이 들이 많은것 같읍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원래 광명진언이 수록되어 있는 "불공 견삭 신변 진언경 佛空견索神變眞言經" 이나 불공견삭비로자나불 대관정경 을 살펴보면,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광명진언의 영험함이 매우 크다는걸을 알수 있습니다


먼저 보통 사람이 이 진언을 외우면 다생다겁의 업장(業障)을 소멸하여 지혜를 얻고 자유 자재 함을 얻으며, 장수는 물론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고 합니다.

불공 견삭 비로자나불 대관정경 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 하고 있읍니다



광명 진언을 외우면

1. 일체 악귀와 악령이 사라지고
2. 맹수와 독사가 침범치 못하고
3. 벼락이나 살귀가 침노 하지 못하고
4. 삼세의 업장이 소멸되며
5. 칠대 선망 조상들 까지 이고 득락 하고
6.각종 마(魔)가 해 를 끼치지 못하며
7.백천 재앙이 이르지 못하며
8. 일만 소원이 다 풀리고
9. 천만 소원이 다 이루워지며,
10. 여의 광명의 본색이 다 발현 한다.

또 역대의 큰 스님들은 광명진언을 다음과 같이 찬탄 하였읍니다.


나에게 여의 보주가 있으니 곧 광명진언이다. 일원 대사

나는 대 우주의 둘도 없는 큰 보물인 광명진언을 가지고 있다 해운 대사

나에게 복과 지혜를 불러들이는 미묘한 큰 보배가 하나 있으니 광명진언이다 대명대사

나에게 만사를 성취 시켜주는 조화 방망이가 있으니 광명진언 이다 도광 대사

나에게 하늘과 통하는 보인이 있으니 광명진언 이다. 언공 대사

나에게 복과 운을 마음대로 지어내는 기묘한 화수분이 있으니 광명진언 이다 천현 대사


옛날 분들은 이상의 경전과 큰 스님들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복락(福樂)을 구할때 뿐 만이 아니라 혼인, 임신과 아기의 순산을 기원 할때, 가옥을 지을때, 이사 할때, 여행 할때, 개업 할때 등에도 광명진언을 수백, 수천독씩 위워 영험을 얻었다.


그리고가족 사이에 불협화음이 잦고 애정이나 경제적인 문제 등에 시달릴 때에도 광명진언을 외워 가정의 평화와 경제적인 해결을 본 경우가 많읍니다.

또 재난, 시비, 구설수에 빠지거나 악몽을 꾸웠을때. 아들을 얻고자 할때에도 광명진언을 외워 큰 효염을 보았다고 합니다.


특히 이 광명진언을 꾸준히 외우게 되면 세세생생 불국토에서 자유롭게 노닐수가 있고, 연꽃처럼 청정한 삶을 누리며, 불변의 대금강심(大金剛心)을 얻을뿐만 아니라, 뒤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지위에 올라 대해탈법륜(大解脫法輪)을 능히 굴릴수 있게 된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광명진언이 대 참회의 진언인 동시에 대 해탈의 진언 이라는 것을!

광명진언을 통하여 부처님의 대지혜 광명과 우리 본성의 광명을 발현시켜 업장의 어둠을 물리친다면, 그 자리가 곧 해탈과 행복의 불국토로 바뀌지 않을수 없을것 입니다.


아울러 병든 사람이 광명진언을 직접 외우거나 병든이를 위해 이 광명진언을 외우면 능히 쾌차 할수 있읍니다 또 수험생, 고시생, 취업준비생, 사업가 등이 이 광명진언을 외우면 능히 앞길이 열리게 됩니다


왜?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나" 를 비춤과 동시에 우리의 앞을 밝게 비추어주고 있기 때문 입니다.

한치 앞도 분간 할수 없는 어둠속의 길은 가기도 두렵고 위험도 많지만, 밝은 빛이 비추기만 하면 순식간에 모든 불안과 위험이 사라집니다. 왜? 밝은빛으로 인해 앞이 잘보이기 때문이요, 잘 보이는데 또렷한 앞길을 쉽게 나아가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겠읍니까?

이제 광명진언의 의미와 함께 그 기도 법을 살펴 봅시다.




광명 진언의 의미


먼저 광명진언 각 글자속에 담긴 의미를 풀어 봅시다.

원래 진언의 뜻은 풀이 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진언을 매우 중요시 했던 밀종(密宗)에서는 진언의 각 글자를 풀이 하였읍니다

왜냐 하면 뜻을 잘 알아야 관(觀)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요, 관이 잘돠어야 보다 빨리 성취를 할수 있다는이유에서 였읍니다

이 광명 진언은 아홉 단어로 구성 되어 있읍니다



1] 옴 2] 아모가 3] 바이로차나 4] 마하 무드라 5] 마니 6]파드마 7]즈바라 8] 프라바를타야 9] 훔



이 아홉 단어가 모여 신령한 힘을 발현 하는 것 입니다
그럼 이 한 단어 한 단어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1] 옴 (OM) 은 대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 진리 불멸의 부처님께 귀명(歸命) 하고 공양 한다는 뜻 입니다

원래 "옴"은 "a + u + m + ㅡ" 의 결합 문자로서, 아(a)는 창조. 출발. 시작. 우(u)는 유지. 존립. ㅁ(m)은 끝. 소멸을 상징 하고 있읍니다.

곧 이 세상의 모든것의 시작과 존립과 소멸, 인생의 태어남과 살아감과 죽음등을 아 + 우 + ㅁ 으로 나타낸 것 입니다. 그럼 마지막의 "ㅡ"은 무엇인가 ? 시작과 끝을 넘어선 진리 또는 영원한 본체를 뜻 함니다.

말로는 표현 할수 없는 불생불멸( 不生不滅) 불구부정( 不邱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의 진리, 그리고 모든 부처님과 중생들의 근본 체(體)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 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옛부터 이 '옴' 은 매우 신령스러운 주문으로 받들어 졌읍니다

생겨나서 유지 하다가 소멸되는 세간의 모든 흐름들과 그 흐름들을 넘어선 영원. 완성, 조화, 통일, 성취등의 성스러운 본체에 귀명 한다는 뜻으로 ' 옴ㅡ' 을 외웠던 것 입니다.



2] 아모가 ( a m o g h a ) 불공(不空)으로 번역 됩니다.

' 공'이 아니다. 빈것이 아니다. 는 뜻 입니다 공(空) 불교 에서는 참으로 공을 많이 강조 합니다

공! 비워라. 무엇을 비우라는 것 입니까? '나' 를 비우라는 말 입니다 무아(無我)가 되라는 것 입니다.
왜 '나' 를 비우라는 것 인가?
'나' 때문에 참된 나를 모르는 어리석음(我痴), 나에 대한 사랑(我愛), 나의 교만(我慢), 나의 고집(我見)

때문에 모든것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할 분 아니라 영원, 완성, 조화, 통일, 성취가 가득한 '옴ㅡ'의 자리와 하나가 되지 못한채 괴롭고 덧없고 슬프고 비참하게 살아가기 때문 입니다


고무 풍선을 예를 들어 조금더 쉽게 풀어 보겠읍니다

우리가 사는곳은 허공처럼 탁 트인 대우주법계 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읍니까

허공에 떠있는 고무풍선 처럼 존재 하고 있읍니다 자아(自我)의 고무풍선이 되어 살고 있는 것 입니다.



내가 '나' 로 삼고 있는 자아(自我) ! 그 자아는 스스로가 '나' 에 대한 사랑 으로 정립한 '나' 요, 주관과 망상과 어리석음으로 만든 '나' 일 뿐 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거짓 자아 속에 갇혀 살고 있읍니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가 불어 만든 특정한 형태의 고무풍선 속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읍니다.


과연 고무풍선 속의 세계가 자유롭 습니까? 갇혀 있으니 자유롭지 못할뿐만 아니라 두렵고 불안 합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상처를 잘 입고 혼자만의 망상과 공상이 많을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풍선속의 세계를 우리는 벗어 나려고 하지 않읍니다. 풍선에 집착 하여 '나' 를 지키며 살고 내 것을 고집 하며 삽니다

풍선이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풍선 속에서 계속 고집을 부리고 욕심을 부리며 자아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읍니다. 그리하여 풍선이 쪼그라 들때 까지 바둥 거리며 살다가 이 생을 하직하고 업에 따라 다음 생 에는 도 다른 풍선이 되어 살아가는 것 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요 풍선 안의 공기와 풍선 밖의 공기가 다른 것 입니까? 풍선 안의 허공과 풍선 밖의 허공이 다른 것 입니까?

아닙니다.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수있을 것 입니다 그럼 풍선을 터트리면 어떻게 되는가? 터트리는 그 순간 풍선 속의 허공은 그냥 그대로 풍선 밖의 허공과 하나가 됩니다 그 자리에서 곧 대우주법계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어 본체를 회복하고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되면, 답답함 없이 자유롭고 불안감 없이 평안 하며 치 없이 맑은 본래의 삶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 아모가 ' 곧 불공의 진리 입니다

불공은 빈 것이 아니라 꽉 차있다는 것 입니다 무엇이 꽉차 있는가? 영원 생명(常), 무한행복( 樂) 무애자재(我), 청정무구(淨) 로 가득 채워져 있읍니다

대자비, 대지혜 대평화가 꽉 채워져 있읍니다. '나' 만 비우면, 자아의 고무풍선만 터트리면 "옴ㅡ의 아모가(不空)" 가 그대로 펼처지는 것이며, 그래서 바이로차나 라 한 것 입니다



3] 바이로차나 (v a i r o c a n a) 는 광명변조(光明변照). 변일체처(邊一切處) 라고 번역 합니다

법, 진리, 부처님, 불공의 '옴ㅡ' 은 어디서나 어느때에나 있는것이며, 그 광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발현되고 있다는 것 입니다. 곧 광명변조의 비로자나 부처님은 바로 이러한 법신불을 인격화 한 것 입니다.

원효 대사 께서는 [ 대승기신론소] 에서 법신(法身) 그 자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 하셨읍니다



1. 크나큰 지혜요 광명이며( 大智慧光明)

2. 세상 모든것을 남김 없이 비추며(邊照法界)

3. 참되게 아는 힘을 간직 하고 있으며 (眞實職知)

4. 맑고 깨끗함을 본성으로 하고 (自性靑淨心)

5.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재하고 번뇌가 없으며 (常樂我淨)

6. 인연에 따라 변동 됨이 없이 스스로 존재 한다 (淸凉不變)



이와 같은 덕성을 갖춘 것이 법신 입니다. 광명진언을 외우는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법신 비로자나불의 대 지혜광명이 늘 우리를 비추고 있으며, 자아의 고무풍선을 터트린 우리 자체가 ' 바이로 차나 ' 라는 것을 !


4] 마하무드라 (m a h m u d r a) 의 마하는 (大), 무드라는 도장 인(印) 이므로 대인(大印)으로 번역 됩니다.

대인은 대 우주의 도장 입니다. 진리의 도장 입니다. 이 도장은 '아주 결정적인 것' 이어서 '결코 변동이 있을 수 없다' 는 뜻을 지니고 있읍니다 임금의 도장인 옥새가 찍히면 그 문서는 그 나라 어디에서 나 통용 됩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권위를 지닙니다

그런데 대 우주의 도장이요 진리의 도장인 마하 무드라 가 찍히면 어떻게 되겠읍니까? 정녕코 영원불변의 효력을 발휘 할 것 입니다.

곧 이제까지 살펴본 영원불멸, 진리, 성취등의 '옴ㅡ'과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아모가' 그리고 어디에나 '법신불의 광명이 두루 하다(바이로차나)' 는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는 것을 ' 마하무드라' 로 다시금 확인 시켜 주고 있읍니다.



5] 마니 (m a n i ) 는 마니보주(摩尼寶珠) 로써, 무었이든 하고자 하는대로 이루워 진다고 하여 여의보주(如意寶珠) 라고도 하며, 모든 불행과 재난을 없애주고 탁한 물을 맑힌다고 하여 수청주(水淸珠 라고도 합니다.



이 보주는 무색 투명하여 볼수가 없읍니다. 그런데 붉은 것이 오면 붉은색을 나타내고 푸른것이 오면 푸른색을 띕니다. 하지만 그 색들이 가고나면 조금도 물듦이 없이 무색투명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 옵니다



6] 파드마 (p a d m a) 는 연화(蓮花), 곧 연꽃 입니다.

진흙탕 속에서 자라나지만 물들지 않는 처염상정(處染常淨) 의 꽃입니다. 잡되고 혼탁한 속세에 있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청정함을 유지하는 ' 참된 나'를 상징화 하고 있읍니다.



7] 즈바라 (s u v a r a) 는 광명(光明) 입니다.

생사 윤회의 원인인 미혹의 어둠을 한 순간에 없애주는 때 광명을 뜻 힙니다



이제 5] 마니 6] 파드마 7] 즈바라 를 함께 묽어 이야기 하겠읍니다

불교 에서는 이세상 무었인가를 분석하고 관찰할때 한 가지 측면만 보지 않읍니다. 기본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관찰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 셋이 무었인가 하면 체(體) 와 상(相)과 용(用) 입니다.

이 중 체(體)는 본질, 본체, 근원, 근본 등을 뜻하고, 상(上)은 나타나 있는 모습을, 용(用)은 작용이나 능력을 가리킵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반드시 체, 상, 용이 있읍니다. 체, 상, 용이 없는 것은 존재 하지 않읍니다 과연 체,상,용이란 어떠한 것 인가 예를 들도록 하겠읍니다.

옆의 시계가 있다면 그 시계를 바라보십시요. ' 나 ' 의 눈으로 보는 시계의 모습이 바로 상(相)입니다.

그 시계의 용(用)은 무었입니까? 우리에게 시간을 알수 있게 해주는 것 입니다 이렇듯 시계의 상과 용은 쉽게 알수가 있읍니다.

그럼 체(體)는 무었인가? 체는 그와 같은 시계의 모습을 낳게 하고 시간을 알게 하는 작용을 할수 잇도록 해준 근원이요 근본 입니다 그렇다면 체가 무었이겠읍니까?

바로 그 시계를 만들어 낸 사람의 아이디어 입니다

시간을 알수 있게 하는 작용을 표출 시키기 위하여 여러 부품들을 조합하여 지금의 시계 모양으로 만들어 낸 발명가의 아이디어가 그 체 입니다 바꾸워 말하면 아이디어는 마음 입니다. 발명가의 마음이 시계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볼펜도 마찬가지요 안경도, 물컵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두가 '이런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요러한 모양으로 만들면 되겠다' 고 하는 아이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와같이 상과 용은 반듯이 체를 떠나서는 상과 용이 존재 하지 않읍니다

하지만 이 체는 보이지 않읍니다 그렇다고 하여 없는것도 아닙니다. 체는 언제나 상과 용의 밑바닥에 숨어 있읍니다.


이제 5] 마니 6] 파드마 7] 즈바라 로 돌아 갑시다.

우리의 體인 근본마음, 깨달음의 마음, 이것이 있어 무엇이든 뜻과 같이 이룰수 있읍니다.

또 남자의 업이 다가오면 남자의 속에 숨고, 여자의 업이 다가오면 여자의 속에 숨습니다. 그러나 남자도 여자도 가고나면 원래의 무색 투명한 마니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참된 마음, 근본 마음의 모습은 어떠한가? 연꽃(파드마) 과 같읍니다 어떠한 세파 속에 잇을지라도 오염되지 않고 늘 깨끗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맑디 맑은 본래 마음의 본모습 입니다



이 마나보주에서는 빛, 곧 광명(즈바라)을 뿜어 냅니다. 모든 무명과 미혹을 밝음과 지혜로 바구어 놓는 대광명을 발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 참된 마음의 작용(用) 입니다.

이제 광명진언을 외우는 우리가 꼭 명심 하여야 할것이 있읍니다

그것은 ' 광명진언을 외우고 있응 내가 바로 여의보주(마니)요 연꽃(파드마) 이요 광명(즈바라)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뜻과 같이 이룰수 있는 여의보주를 지니고 있어 능히 맑히고 밝힐수 있다는 것과 나는 능히 생사의 탁류 속에서도 고요하고 맑은 연꽃과 같은 모습을 갗추고 살겠다는 것과, 대 광명을 발하여 나와 모든이의 미혹을 지혜로 바꾸어 놓고자 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8] 프라바를타야(p r a v a r t t a y a) 는 ' 전변(轉變)한다 ' 는 뜻 입니다.

나의 본심. 보리심. 진심. 일심을 개발하여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9] 훔( h u m) 은 완성, 성취의 의미를 지닌 단어 입니다.

'미혹과 더러움을 벗어나 청정과 밝음을 이루고 본심. 보리심. 진심을 회복해 가졌다' 로 해석하면 됩니다.



이상의 아홉가지 단어를 하나로 연결 시켜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읍니다

" 이 대법계에는 어디에나 어느때에나 영원. 완성. 조화. 통일. 진실. 행복. 자유 그 자체인 법신불의 결정적인 광명이 가득하며, 나 또한 마니요 연꽃이요 광명의 존재이다 이제 부처님의 대자대비광명 속에서 참된 나의 체. 상. 용을 개발하여 생사 윤회 세계를 벗어나 참다운 깨달음을 성취 하노라 "



다소 복잡 하지만 광명진언의 뜻이 이러 하다는 것을 대충이라도 새겨 두실 것을 청 합니다. 뜻을 대충이라도 알면 마음이 잘 모여 훨씬 기도의 성취가 빠를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성원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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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지조론(志操論)

Posted by 히키신
2017. 11. 24. 19:54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지조론(志操論)
―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者)이기 때문에 지조 없는 지도자, 배신하는 변절자들을 개탄(慨歎)하고 연민(憐憫)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지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 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 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 운동의 단계의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들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 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 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 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名利)를 위한 부동(浮動)은 무지조(無志操)로 규탄되어 마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 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 정치인(職業政治人)보다 지사적(志士的) 품격(品格)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 전체의 충정(衷情)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 공정(廉潔公正) 청백 강의(淸白剛毅)한 지사 정치(志士政治)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 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 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적인 이욕의 계교와 음부적(淫婦的) 환락의 탐혹(耽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 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 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나 환부(鰥夫)가 사랑하는 옛 짝을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또한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하기 어러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이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의 고귀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時勢)에 따라 아무 권력에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口腹)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名利)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덕대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부린다고 굶주리고 얻어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正道)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 문제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놓은 것은 분반(噴飯)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 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困辱)을 무릅 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自尊) 자시(自恃)를 위해서는 자학(自虐)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단재(申丹劑)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출처 : 옥맹선의 설목(Snowy tree) 입선작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지조 때문에 낳은 많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백성을 속여 야당(野黨)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란 뜻이 깃들어 있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 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日帝)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 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하다가 친일파(親日派)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狹義)의 변절자, 비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전선(野黨戰線)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에 김상헌(金尙憲)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民族正氣)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瀋陽)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朴重陽), 문명기(文明琦)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日帝) 말기 말살되는 국어(國語)의 명맥(命脈)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의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 모음>, <큰사전>을 편찬한 <조선어 학회>가 국민 총력 연맹 조선어 학회지부(國民總力聯盟 朝鮮語學會支部)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족히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友), 육당(六堂), 춘원(春園)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 말의 대일 협력(對日協力)의 이름은 그 변신(變身)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었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은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 특위(反民特委)>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벗겨 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야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 정기의 사표(師表)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

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伯夷)·숙제(叔齊)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이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에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다거나 바람이 났거나 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한 번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燕山主)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强姦)도 나중에는 화간(和姦)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는가.

만근(輓近) 30년래에 우리 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의 남로당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착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同軌)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제 자신도 율(律)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더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 천선(改過遷善)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 일단 모욕을 자취(自取)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妓女)라도 그늘막에 남편을 좇으면 한평생 분냄새가 거리낌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貞操)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 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晩年)을 더욱 힘 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 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히 깨우치라. 한일 합방(韓日合邦) 때 자결(自決)한 지사 시인(志士詩人)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이 매운 분으로 매천 필하 무 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 야록(梅泉野錄)>에 보면, 민충정공(閔忠正公), 이용익(李容翊) 두 분의 초년(初年行績)을 헐뜯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들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滔滔)히 밀려 오는 망국(亡國)의 탁류(濁流)―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이완용(李完用)은 나라를 팔아먹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행색(行色)은 딱하기 짝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少忍飢)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故事)가 있다.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청담(淸談)으로 소일(消日)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赤貧)이 여세(如洗)라,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들을 위하여 점심에는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실 얘기를 하고 추연( 然)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나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로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에 그 주인은 첫 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反正) 때 몰리어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刑場)으로 가는데 길가 숲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내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永訣)하였다.

그 때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할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밥 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 꼴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 맛을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는 것은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少忍飢 少忍飢)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은 있다. 야당에서 권력에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란 것이다.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다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게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은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 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은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 1960. 3. <새벽>


시인은 정의를 위하여는 원수 앞에 총칼을 들고 병정과 같이 용감하고 잔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승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비루(鄙陋)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 자가 아니요, 이기는 것만으로 영광을 삼지 않고, 패자로서도 영광을 누리고 역사 앞에 개가(凱歌)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조지훈, <시의 원리> 중



조지훈 - 병(病)에게

Posted by 히키신
2017. 11. 24. 19:39 Poetry#1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