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08. 13.

Posted by 히키신
2017. 3. 25. 21:56 순간의 감상[感想]

하루하루 강렬한 순간의 연속. 무더운 날씨 속 흐르는 땀방울에 지금 순간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수없이 느끼며 되새겨본다. 내 생애 가장 뜨겁고 값진 여름이다.
...결국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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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Posted by 히키신
2017. 3. 25. 21:55 순간의 감상[感想]

이성이 빛으로 의지가 사랑으로

비어있는 삶

가슴이 순수하며 마음이 가난한 자

- '16. 0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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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

Posted by 히키신
2017. 3. 25. 21:53 時쓰는 詩人의 始

다짐

살펴본다
지나온 길의 발자욱
나아갈 길의 저편을
다시 제자리에서

흘러간다
한 걸음씩 천천히
살기 위해서
안 아프기 위해서
자연으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서
인생이란
부서지기 쉬운 것이므로

그려간다
간소하게 단순하게
영원 속으로

고맙고 또 고마운 시간
인생이란
부서지기 쉬운 것이므로

기다린다
한가로운 삶을 위해서
예상 못할 시간에 다가올
가장 짧고 강렬한
작별을 위해서

- '17.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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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02. 05.

Posted by 히키신
2017. 3. 25. 21:51 時쓰는 詩人의 始

침묵하라
그저 이야기를 들어줄 뿐
기도하라
부디 x에게 평화와 안식이 깃들기를
필요한 것은 오직 그것 뿐
명심하라
필요한 것은 오직 그것 뿐
그 무엇에도 끄달리지 말고
묵묵히 그대의 길을 가라
머무르지 않으니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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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02. 14.

Posted by 히키신
2017. 3. 25. 21:48 순간의 감상[感想]

김해 공항에서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한다. 오십분의 연착은 형이 혈변을 본다는 것, 곧이어 뒤따르는 단식과 삶과 죽음따위에 대해 떠들다보니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물론 형은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많이 힘들어했다. 육지에서 떠오름과 동시에 멀어져 가는 나의 고향. 그 속의 추억도 언젠가 다시 올 그날 또 만나리라 여기며 남겨 두고 떠난다. 씁슬한 발렌타인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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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綠音)

Posted by 히키신
2017. 3. 25. 21:44 時쓰는 詩人의 始

<녹음(綠音)>

뜨거운 대지위로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은 침묵속에 스쳐지나고
나무는 푸르름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삶의 끝자락에서
운명의 상대를 부르짖는 매미들의
절규. 그리고 방 안에 있는
간신히 버티고 있는 가냘픈
고독한 존재여

삶이란 무엇인가
고통의 의미를 고통밖에 모르는 자가
깨달을 수 있나
자연은 변함없고 세상도
큰 움직임 속에 가만한데
나는 왜 모두의 고통을
끌어안고 슬퍼하고 있는지

태양은 이글거리며 불타올라
유난히도 오래토록 머무르고
어스름한 저녁에만 거리를 배회하는
고독한 영혼 슬픈 뒷모습
그렇다면 이 고독마저 나는
따스히 끌어안으리라...!

굳은 다짐에도 반복되는 나날에
지칠 적이면 어디선가 흘러드는 소리
성장하기 위해선 뜨거운 열기와 폭풍우를
그대로 맞아야 한다는데
강물은 말없이 흐르는데
결국 나는 영원히 슬픔을
아름답게 승화시켜야 하는지

-'16. 08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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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유전(流轉)

Posted by 히키신
2017. 3. 25. 21:24 순간의 감상[感想]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를 정확히 반 씩 꼭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분들이다. 유쾌하고 쾌활하며 밖으로 나돌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겉으론 잘 표현하지 못하고 말수가 없으며 집에 홀로 앉아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을 최고로 치는 어머니. 아버지가문의 헐통을 흐르는 지독한 가난과 그에 따른 조금은 짧은 가방끈에 절절히 흐르는 어두운 삶의 그림자. 어머니 가문의 부족함 없는 살림과 법 없이 살만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순수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어머니.
그러나 이쯤 회상하다보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두 분의 가계 속에 저민 불화와 그로 인해 그들의 삶 역시, 당신들은 원치 않으셨던, 슬픈 삶을 살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기묘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나는 둘 중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정확히 내 속에 꼭 절반씩을 차지하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 속에서 늘상 방황하였고, 결국 당신들과 같이 질곡의 삶이라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에 젖어 소름이 돋았다.
그런 느낌이 든 이후로 나는 어떻게든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닥치는대로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나를 매료한 한 마디는 '네 운명에 순응하라' 라는 어디서 울려퍼지는 목소리인지 알 순 없지만 왠지 거역하기엔 너무나도 큰 울림의 외침이었다.

-'17. 0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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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기타

Posted by 히키신
2017. 3. 25. 21:18 時쓰는 詩人의 始

소리 없는 기타

내방 한켠에 늘 기대어 서 있는
숨 죽이고 선 기타를 보며
추억에 젖어 드는 이 밤

첫사랑의 애틋함
방황의 나날들 함께한 이들
얼굴 아스라이 피어나는
청춘의 한 장 싸늘하게
불탄 잔해의 기억
밀려드는 회상 후의 비애

흐릿한 손끝의 느낌
자그마한 홀 속에는 고독한
뮤지션의 몸부림치는 흑백 사진
나를 지긋이 응시하는 그의
시선 빛바랜 지판 속에서
나는 흘러가는 시간에 젖어 울었다

언제나 내 곁에서 아무말 없이
날 바라보며 기대어 있는 기타
언젠가는 나만의 노래를 켜 보이리라
문득 끄적이고 또 기다리고
자그맣게 추억을 노래할 그 날을
잔잔하게 설레며 잠드네
마지막 남은 징표로써 충분한
어제와 내일의 오늘을 이어주는
침묵 속에서 날 부르는
절대로 잊을레야 잊히지 않는
그대를 생각하며

- '17.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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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르니에 - 섬

Posted by 히키신
2017. 3. 24. 18:37 글쓰기와 관련하여

장 그르니에, <Les Iles>, 김화영 옮김, 민음사, 1997

 

*

짤막한 감상

: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지독한 무에 맞닥뜨린 인간의 고독과 허무함으로부터 힌두교적인 진아眞我의 발견(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일)을 거쳐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여정을 풀어낸 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적 사유를 문학적으로 감싸안은,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뱀발 : 까뮈와 그르니에는 사제 지간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각각 큰 영향을 끼치며 깊은 우정을 나눴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LkBS&articleno=6940178 참고. 

*

 

- 적어도 생애에 한 번은 저 열광에 찬 복종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닌게아니라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의 지식인 사회가 자랑하여 마지않는 어정쩡한 진리들 중에는 저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원하는 저 흥분의 진리도 섞여 있다. 그 사회에서는 곧 우리들 자신 모두가 스승이요 노예가 되어 서로 죽이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나 스승이라는 말은 다른 뜻도 지니고 있다. 그 의미로 인하여 스승과 제자는 오직 존경과 감사의 관계 속에 서로 마주 대하게 된다. 이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의 투쟁이 아니라, 일단 시작하면 그 생명의 불이 꺼질 줄 모르며 서로서로의 생애를 가득 채워 줄 수 있는 대화인 것이다. 이 오랜 기간에 걸친 교류는 예속이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장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을 야기시킨다. 끝에 가서 제자가 스승을 떠나고 그의 독자적인 세계를 완성하게 될 때실재에 있어서 제자는 언제나 자신이 모든 것을 얻어 가지기만 하였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니면서 자신은 그 어느 것에도 보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스승은 흐뭇해한다. 이와 같이 해서 여러 세대에 걸쳐 정신이 정신을 낳는 것이며 인간의 역사는 다행스럽게도 증오 못지않게 찬미의 바탕 위에서도 건설 되는 것이다.

요컨대 <>은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발 딛고 있는 땅으로부터 뿌리를 뽑아내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 알베르 까뮈의 <섬에 부쳐서>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비밀'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李箱 역시 '비밀이 없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찰나의 번쩍하는 순간은 어차피 전할 래야 전할 수 없으므로, 나는 이미 그 비밀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의 매혹

*-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 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저 자신 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 빛이 찾아들 것 같지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득 수의를 밀어붙이며 나사로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란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수의란 다름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던 것이다.

(<>은 위의 글로 시작한다. 좋은 글은 대개 그 시작에서부터 독자들을 몰입시킨다.)

- 나에게 새삼스럽게 이 세계의 헛됨 vanité을 말해줄 필요는 없다. 나는 그보다 더한 것을, 세계의 비어 있음 vacuité을 체험했으니 말이다.

-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멸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입을 딱 벌린 그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모든 것이 삼켜져 버릴 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란 실로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을 되씹어보기 시작했다.

**- 나는 그냥 살아간다기보다는 왜 사는가에 의문을 품도록 마련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물음을 나는 누구나 다 던지며 살아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살면서 가만히 보면 그러한 류의 사람은 매우 희소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는 많이 외로워하곤 했다.)

- 나는 자신이 밤의 어둠 속에서 어떤 나룻배를 타고 있다는 상상을 해보곤 하는 것이었다. 방향을 가늠할 표적 하나 없었다. 길을 잃은 채, 어쩔 도리도 없이 길을 잃은 채, 눈에 보이는 별 하나 없었다.

 (서울에서의 생활이나 제주에서의 생활이나 매한가지였지만, 서울에서는 별이 보이질 않았고, 제주에서는 별이 많이 보였다. 그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 줄 아는가!)

*- 사람이 자기의 주위에 있는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어떤 중립적인 영역 속에 담을 쌓고 들어앉아서 고립되거나 보호받을 수는 있다. 그것은 즉 자신을 몹시 사랑한다는 뜻이며 이기주의를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신을 세상만사 어느 것과도 다를 바 없는 높이에 두고 생각하며 세상의 텅 비어 있음을 느끼는 경우라면 삶을 거쳐가는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에 혐오를 느낄 소지를 충분히 갖추는 셈이다. 한 번의 상처쯤이야 그래도 견딜 수 있고 운명이라 여기고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바늘로 콕콕 찔리는 것 같은 상태야 참을 길이 없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다. <이것><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라고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떠한 선택도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진정 고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고양이 물루

**- 대양 속의 소금같이, 허공 속의 외침같이, 사랑 속의 통일같이, 나는 내 모든 겉모습 속에 흩어져 있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그 모든 겉모습들은 저녁의 지친 새들이 둥지에 들듯 제 속으로 돌아올 거예요. 고개를 돌리고 순간을 지워버리세요. 생각의 대상을 갖지 말고 생각해 보세요. 제 어미가 입으로 물어다가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도록 어린 고양이가 제 몸을 맡기듯 당신을 가만히 맡겨보세요.

*여기에 우파니샤드의 어조가 깃들여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물루는 행복하다. 세계가 저 혼자서 끝없이 벌이는 싸움에 끼여들면서도 그는 제 행동의 동기가 한갖 환상일 뿐임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놀이를 하되 놀고 있는 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 고양이가 다리를 반쯤 편다면 그것은 다리를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또 다리를 꼭 반쯤만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희랍 꽃항아리들의 가장 조화로운 윤곽에도 이토록 철저한 필연성은 없다.

 

***- 삶을 살아가노라면 만사가 신비로운 수수께끼이다.

**-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지게 마련이어서, 그런 것은 사실 우리들 자신에게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절한 순간에 늘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보편적인 생각들만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들이라야 이른바 그들의 <지성>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이러한 생각을 하고서, 나는 나도모르게 자꾸만 말이 새어나오는 것을 꾹 눌러담은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분명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인간들을 서로 구별지어 주는 것은 그들의 이른바 사상이란 것이 아니라 행동이다.  

 (사상이라는 것을 백날 떠들어봐야 아무런 소용 없다. 그저 묵묵히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감언이설, 달변에 속지 말지니.)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갓 수증기라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오는 날들을 견디어내려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단 한 가지의 대상을 정하여 그것에 여러 시간씩 골똘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 ... 나는 <연구>라는 것에 그 이외의 다른 흥미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들로 하여금 최후를 기다리는 동안 인내하는 놀이를 배운다는 것은 타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상의 여러 수필에서도 엿볼 수 있는 생각이다. 파스칼 역시 '인간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때 공허를 느끼기 마련이며, 이어서 불안과 권태, 무기력,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라고 하였다.)

 

*- 어떤 도시를, 어떤 짐승을 사랑하는 것과 어떤 여자를, 어떤 친구를 사랑하는 것우리는 머릿속으로는 이런 것을 서로 구별하려고 애쓰고, 마음속으로는 이런 것이 다 같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이런 모든 애정을 표시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 ...

사실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긴 하지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마음속에서 모든 순간들과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합쳐주는 것입니다.”

 

- ...그는 라 퐁텐의 우화에 나오는 <나무꾼>처럼 대답했을 것이다. 이른바 불행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지만 사실은 그 존재들의 비참한 모습을 눈으로 보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다. 또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당사자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아버지는 결혼한 그의 딸들이 날이 갈수록 더한 어려움에 빠져들게 되자, 그렇게도 부족한 것이라곤 모르고 자랐던 그 아이들이 헐벗음 속에서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꼴을 보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케르겔렌 군도

 

- <억세고 활동적인 데다가 남의 사정에 궁금해하기보다는 자기 일에 더 골몰하는 그 대단한 백성들의 무리에 섞인 채, 사람의 왕래가 가장 잦은 대도시가 갖추고 있는 편리함은 골고루 다 누려가면서 나는 가장 한갓진 사막 한가운데서 사는 것 못지않게 고독하고 호젓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선택은 적절한 것이었다. 그는 생활을 완전히 개방해 놓음으로써 정신은 자기만의 것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 내가 원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라 잡다한 현실로부터 벗어나서 <자연 그대로의 상태 état de nature>로 되돌아가는 일이었다(그렇지만 나도 정말 자연은 그런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정말 자연은 투쟁이요 공포이기 때문이다).

 

*** - 처음은 항상 멋지기 마련이다. 다만 그 다음은 멋이 덜해진다.

(과연 누구라도 이에 동의하지 않을 이 있으랴! 물론 처음은 시큰둥했는데 점점 매력에 빠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 인간의 정신과 시간 사이에는 견디기 어려운 관계가 맺어져 있다. 청춘, 자유,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항상 스탕달이 생 피에르 인 몬토리오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풍경을 앞에 두고 썼다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말이 왜 생각나는지 까닭을 모르겠다. <오늘 내 나이 쉰 살이 되었다.> 이야기를 더 계속하지 말자. 그러다가는 또 파스칼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 하나의 정열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고자 한다. 그때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 그러므로 이런 비밀스러운 삶이 반드시 부자연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런 삶은 우리들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의당 파스칼은 이런 것을 아니했다는 둥, 파스칼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라는 둥 떠들어대게 마련인 문학 비평가와 대화를 하느니보다는 트럼프 놀이를 하고 있는 미장이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파스칼과 더 가까워지는 길이다.

 

- 지금까지 내가 말한 모든 것은 부분적으로만 정확하다. 만인에게 감추어진 삶에는 어떤 위대함이 있다.

 

- 러시아 사람들이 태형과 시베리아 수용소에 의하여 얻어낸 안이한 효과에 매달리는 대신 비밀과 가난 속에 은신할 때 우리는 <겸허함을 통하여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그것은 불가능한 일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신자들이 육체적 단련을, 불교 신자들이 아편을, 화가가 알콜을 사용하듯이, 그럴 경우 여행은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일단 사용하고 나서 목표에 도달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데 썼던 사닥다리를 발로 밀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데 성공하고 나면 바다 위로 배를 타고 여행할 때의 멀미 나던 여러 날과 기차 속에서의 불면 같은 것은 잊어버린다(자기 자신의 인식이라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 다른 그 무엇의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인식 reconnaissance>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을 맛보았던 시기라고 해서 가장 추억에 남거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 짧은 황홀과 정열의 순간들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이라 할지라도아니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인생 행로의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찍힌 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이어서 어떤 상태를 이루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항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강렬한 것이 전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는 그 속에서 극도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 희열은 비극성의 절정인 것이다.

** - 나의 목적은 시간에 좌우되지 않는다.

- 사람들은...우연을 싫어하며 미래를 설계한다.

 이제 내가 말한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고 나서도 또 살 수 있을까?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예기치 않은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저 살아남아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아무러면 어떠랴? 내게는 이미 <획득하는> 일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 말의 힘을 당신은 제대로 느낄 수 있겠는가? 제로에서 무한으로 옮겨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海草)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ㅡ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 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굉장히 아름다운 문장이다. 마치 조동진의 음악을 들을 때처럼, 묘한 감정에 빠져든다.)

 

부활의 섬

- 밤중에, 그가 말하던 그런 시각에 잠이 깨면 어떤 극중 인물이 극 전체를 요약하듯이 <눈물이, 눈물이> 하고 말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그때 나는 반항했고 거부했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도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제발 공범은 되지 않았으면 싶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제 곧 죽게 될 사람들을 정면으로 똑바로 볼 수 있게 되고 싶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렇게 될 사람들 중의 하나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다 동시에 죽는 것은 아닐 터이니 항상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푸줏간에서 양을 잡을 때는 떼지어 잡지요ㅡ그런데 <그들은> 나를 혼자 죽게 만드는 거예요" 하고 그는 말했다.

**- "...단 석 달 동안도 혼자서는 못 살 겁니다. 당신도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남들과 교제하고 싶어하고 재미있게 놀고 싶어해요. 다만 당신은 신경이 예민한 분이라 다른 사람들 때문에 기분을 상하고 싶지 않아서 속으로 웅크리기만 하는 거예요. 나도 당신 같았어요. 그 때문에 나는 죽게 된 거예요. 나는 나만을 위해서 사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남들을 위해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 

(대부분의 이기적이라 생각하는 삶은 실은 타인의 기준, 사회에 발맞춰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위하는 삶을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 그때 나는 너무 젊어서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주 약해지면 마음도 따라서 약해져 가지고 별것 아닌 아픈 기억만으로 자살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걸 내가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도 이러한 점에 대해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 내세를 믿는다는 것이 그리도 위안이 된다고들 하지만! 그러나 나로서는 그 죽음이라는 맹목적이고 숨막히는 사실에 대하여 고집스러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그쪽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마치 끝없이 헛돌아가는 나사못이나 빙글빙글 도는 복도 속으로 이끌려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긍정을 하는 것도 부정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내 감옥의 드높은 벽을 따라만 가고 있었다. ... 공통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우리들 사이에 대화가 가능했떤 것은 죽는다는 저 공통적이고 일상적인 시련 때문이었다. 그 이후 그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는 변할 수 있었지만 본능적이고 터무니없으면서도 깊이 뿌리 박힌 나의 감정은 고스란히 남았다.

 이 끔찍한 시련에 대한 느낌을 마음속에서 쫓아내기 위하여 그때 나는 전혀 필요도 없는 연구에 몸을 던져 아무 글이나 닥치는 대로 맹렬하게 읽어대기 시작했다. 박물관과 도서관들이 내 관심을 끌었다. 저 형언할 길 없는 과거의 냄세를 맡고 있노라면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맹목적이고 엄청난 힘들로부터 헤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인식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무(無)에 대한 섬뜩함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정신적인 생활을 하게 된 셈이지만 그것은 실상은 거꾸로 된 정신적 생활이었다. 저 성벽처럼 쌓인 책들 속에는 얼마나 대단한 매혹이 깃들여 있었던가! 그것은 일체의 위협에 대한 얼마나 굳건한 방벽이었던가! 그러나 도서관 밖을 나설 때면 머리가 아팠고 마음은 더욱 메말라가는 듯 느껴졌다.

(마치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작가가 글로 옮겨놓은 것만 같다.)

**- 우리가 삶에 그토록이나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몸이 마련하곤 하는 그 예기치 않은 놀라움 떄문인지도 모른다. 병이 낫지 않을 거라고 절망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다. 우리가 잔뜩 믿고 있었는데 돌연 그 믿음이 무너진다. 끝장은 항상 똑같은 것이면서도 거기에 이르는 우여곡절은 러시아 산맥의 비탈들만큼이나 다양하다.      

- <섬들을 생각할 때면 왜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난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으로 자유스럽게 터진 바다를 섬 말고 어디서 만날 수 있으며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isole>ㅡ'섬Ile'의 어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섬, 혹은 <혼자뿐인> 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일 뿐인> 인간들.

(제주에서 지내며 '자발적 유배 생활' 이라 웃으며 말하곤 했다. 확실히 섬은 격리된 느낌을 주곤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느낌은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아니 그 어디서든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지극히 일반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느낀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될 수는 없다.)

 

상상의 인도

-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도를 유럽인의 눈으로 보느냐 혹은 인도인의 눈으로 보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ㅡ도대체 그것은 터무니없는 야심이다. 인도는 코르네이유와 바레스 Barres가 스페인을 보았던 것과 같은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인도를 어떤 <상상의 나라>로 간주함으로써 비로소 그 실체와 가장 가까워질 수 있다. 이 글 속에서 우리가 해보려는 것도 다름아닌 바로 그것이다. ...

*** 인도의 사상 역시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을 가져올 만큼 충분히 <오래된> 것이다.

 (오랜 세월을 전승되어온 그 무엇은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장소도 시간도 아닌 Ni Lieu ni temps>

- 미슐레, 르낭, 텐이 계절의 변화나 강우량이나 유전 등을 통하여 프랑스 역사와 예수의 생애와 영국 문학을 설명한 이래, 고비노가 인종이라는 개념을 창안하고 바레스가 그것을 이용한 이래, 이제는 역사와 지리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이든 설명을 하기가 어려워져 버렸다.

- 역사학이 모든 지식을 다 포괄하기 시작할 때(그러나 아직은 진화라는 말은 쓰지 않을 때였다. 불연속적인 것을 연속적인 것으로ㅡ연속적인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ㅡ둔갑시킴으로써 모든 문제를 다 제거해 버리는 편리한 방법이 진화라는 개념이다)인 1874년에 니체는 <삶에 있어서 역사적 연구의 유용성과 난점>에 대한 유명한 에세이를 썼다. 오늘날은 <사상에 있어서 지리적 연구의 유용성과 난점>에 대한 책을 하나 써야 할 적절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후에 내가 보다 더 성숙하고 지혜로워 졌을 때쯤, 한번 글로 풀어보고 싶다.)

- ... 고팔 무케르지가 자신의 동포인 간디를 찾아갔을 때 그는 간디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 민족은 기후 때문에 명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말로 위상학적 결정론을 긍정한 듯한 간디는 즉시 그 성급한 결론을 부정했다.

 같은 기후 조건 속에 사는 민족들에게 이 말이 다 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그건 결정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한 기온 조건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명상은 하지 않는다. 히말라야 꼭대기 눈 덮인 굴 속에 사는 성인들은 신(神)에 대하여 명상을 한다. ***따라서 기후가 영혼을 만든다고 말할 일은 아니다. 영혼이 기후를 이용할 뿐이다......  

(기후가 영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기후를 이용할 뿐이다...!)

- ...이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가 그 문헌학자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죽을 때 우리들 자신에 대하여 죽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죽지 않는 줄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거점은 사회일 뿐 절대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큰 착각이라는 것을 작가는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인도와 그리스 L'lnde et la Grece>

- 우리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어디서나 성스러움의 벌겋게 달군 부젓가락으로 낙인을 찍어 그것을 파괴한다.......***예술의 절정은 예술을 무(無)로 만드는 일이다.   

(예술의 절정은 예술을 無로 만드는 일이다...!)

- ...니체는 말한다. <쇠사슬을 차고 춤을 추도다.> 이토록 강력한 구속은 동시에 그에 버금가는 해방을 낳는다는 것이 바로 그 구속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파스칼은 오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만을 알고 찬미하고자 했을 뿐 <철학자들의 신>은 알고자 하지 않았다. 그 철학자들의 신을 극한에까지 밀고 나가보라, 그러면 인도의 신을 얻게 될 것이다. 가장 비개인적인 사상은 이미 그 신에게는 하나의 <현현 manifestation>이다. 그의 속에서는 이것이 저것보다 더하고 덜하지 않으니 순수하고 부정적이다. <이 공간들의 침묵이 나는 두렵다>라고 파스칼이 말할 때 그는 그 신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과 그 <절대 존재> 사이에 있는 것은 과연 공간들이라니...... 

(<팡세>를 읽을 때 딱 한 가지, 유일신(唯一神)적 사고가 아쉬웠는데 장 그르니에는 이를 아주 적절하게 짚어낸다.)

- ...사실 인도는 서로 다른 여러 민족들에게 번갈아가면서 정복당했다. 그런데 그 지배 민족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고 나면 브라만 문명에 흡수되고 말았다. 하여간 인도는 아무런 애국도 부르짖어본 일이 없었고 정복을 꿈꾸어 본 일도 없다.

(그 긴 세월 동안 인도는 비폭력적으로 살아남았다. 과연, 대단한 저력이 아닐 수 없다.)

*- 인도로부터 온 어떤 바람이 디오게네스에서 플로티누스에 이르는 그리스 사상을 <도(度)를 넘어> 팽창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스와 인도의 혼합인 고행자 아폴로니우스 드 티안 Apollonius de Tyane의 생애는 얼마나 흐뭇한 것인가! 그러나 그토록 명확한 두 가지 대립을 화해시키려 한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참으로 없을 터이다. 불교는 박트리안 Bactriane을 통해서 그것을 시도해 보았다. 그리스와 불교 혼합의 예술은 매력적이며 그리스의 왕 메앙드르 Meandere가 어떤 불승(밀린다판하 Milindapanha)을 개종시키려고 물어보았던 질문은 지극히 정신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사생아 같은 결과밖에 낳지 못했다. 그로 인하여 그리스 정신은 그 날카로움이 무디어졌고 인도 정신은 그 음악을 잃었다.

<계시 L'Illumination>

- 플로티누스는 두 가지의 죽음을 구분한다. 그 하나는 자연적인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죽음에 앞서 올 수 있는 철학적 죽음이다. 철학적 죽음은 힌두교도의 목표다. 그러므로 작품을 이룩한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직 정신의 방향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실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또 다른 세계와의 사이에 새로운 다리가 놓인 것이다. 소위 세계라고 이름하는 것에 대한 점진적인 혐오를 상상해 보라.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저 영원한 쌍(雙)의 소멸을, 그리하여 마침내 얻게 되는 계시를 상상해보라.

- ...그는 나에게 무어라고 말하는 것일까? 사물도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그 누구도 아니다. 아니다. 그대는 <그것>이다. 항구적이지 않은 것을 통해서 항구적이며 부재 속에 존재하며 공(空) 속에 산재한다. 이해할 필요도 없이 나는 그것을 만져보기만 하면 된다. 비록 내가 그것에서 헤어난다 한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아니 과연 이제 내가 그것에서 헤어날 수 있기나 한가? 내게는 그것이 아쉽지만 그것은 나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세계는 저절로 주어지는 구경거리이며 나는 그 구경거리의 장면들이 현실이며 그 배우들이 현실임을 믿는다. 세계는 오직 내가 깨어 있는 순간에만 제가 부재함을 알린다. 어깨에 기대어오는 머리처럼 존재의 가벼운 움직임. 그러면 어느새 세계는 홀연히 사라지고 그는 세계의 버팀대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나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것과 하나가 될 수는 없을까? 내가 나의 가장 깊숙한 것 위로 기울어지면 나는 존재하기를 그치며 나는 이제 내가 아닌 것이 된다ㅡ그리고 남도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 나의 사고와 나의 욕망들은 그것들을 불러일으키는 그이에 비한다면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잠들면 나는 <그것>에 가까워지고 내가 죽으면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려 한다. 나는 돌이 우물 속 깊이 떨어지듯 그의 속으로 떨어진다.

 어느 힌두교도의 말: 중요한 것은 우주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ㅡ꿈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 그저 꿈에서 깨어날 뿐이다. (무케르지 Mukerji, <브라만과 파리아 Brahmane et Paria>

(neti neti. I am That.)

-인식의 가치-

 *** 서양인은(여기서 내가 말하는 서양인이란 그가 살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것에 의하여 규정되는 일종의 정신 상태를 뜻한다) 날이 갈수록 오로지 자기의 귀와 눈과 손, 그리고 그의 영향력과 힘을 증대시키는 모든 수단들 즉 도구와 논리밖에 믿지 않는다. 그가 그런 것들에 속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라. 그러면 그는 회의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를 회의주의에서 구제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즉 인간의 정신 속에는 여러 가지 범주들이 존재하는데 그 범주들 때문에 과학은 상대적이 되지만 그래도 그 범주들 덕분에 과학은 확실해진다. 왜냐하면 그 범주들은 모든 정신 속에 다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사실 칸트가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ㅡ그러나 우리가 절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칸트는 믿지 않는다)라고 그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다. 인도에서 샹카라 역시 여러 가지 범주들을 긍정한다. 그러나 그의 경우 그중 한 가지 범주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각 세계의 인식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한 것이 된다. 우리가 절대를 생각할 때는 그 모든 범주 따위가 우리들에게는 불필요해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인식은 값 있고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 근본적인 대립성은 내 마음을 황홀하게 한다. 세계와 신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세계를 통해서만 세계로 갈 수 있고 신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갈 수 있다.

- 파스칼의 말: 머리 위로 흙을 한 삽 쏟아붓고 나면 마침내 영원히......

 불교도 나가세나의 말: 한 생명이 이 땅 위에 태어났다가 여기서 죽는다. 여기서 죽은 그는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나 거기서 죽고 운운.

*** - 인간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몫은 바로 인간을 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그것이니까...... 폭력에 의하여, 힘에 의하여, 터무니없는 제도에 의하여, 견딜 수 없는 속박에 의하여 인간으로부터 신성이 분출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실현 La Realisation>

- ...저들은 절대를  <실현>했다. 저들은 절대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고 절대는 저들 속에서 육화되어 매순간 저들의 살과 피와 생명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신 사이의 거리를 헤아려보라. 기독교도들, 유태교도들, 회교도들과 그들의 신 사이의 거리를 헤아려보라. 저들은 저들의 지혜를 통해서 절대를 송두리째 명상하고 있다. 플로티누스가 명상의 분명한 우월성에 대하여 한 아름다운 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와 같은 의견이다. 우리가 혹시라도 그와 의견을 달리할 때 우리는 밀수꾼들의 철학인 가장 천박한 실용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인도는 지극히 <이해 관계에 집착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무사(無邪)를 초월하는 집착이다. 우리들에게는 교감, 육화, 구원, 신비ㅡ때로는 광기ㅡ가 있지만 저들에게는 일상의 현실, 눈부신 자명함이 있다.

*** 무케르지는 최근에 펴낸 그의 책에서 이야기하기를, 자기가 그냥 순진하게 왜 윌슨은 피케 카드 노름에서 <14점> 패를 잡지 못했느냐고 간디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이 만약 한 점 한 점마다 각기 일 년씩 명상을 하고, 단식을 하고, 한 점 한 점마다 불멸의 생명을 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신에게 기도를 했다면?"하고 간디가 그에게 반문하더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존재 etre에 의한 사고 idee의 전체적이고 완벽한 표현이다. 서양에서는 실용주의 덕분에 그 완벽한 표현의 위조 제품을 하나 얻어 갖게 되었으니 그것이 넌센스다(태도가 사고를 창조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고대 사람들의 이상이었던 그 완전한 표현(감옥과 죽음에서 도망치기를 거절하는 소크라테스, 의사가 자기에게 주는 약을 마시는 알렉산더 대왕)은ㅡ비록 고대 사람들이 성스러움이 아니라 예지의 한계 속에, 경시가 아니라 명상의 한계 속에 묶여 있기는 했지만ㅡ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것이 된 나머지 우리는 언어라는 그 불완전한 (그러나 예술을 위해서는 그렇게도 중요한) 표현을 업수이 여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사람들이 문학 같은 것은 집어치우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고는 아무런 실현이나 표현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 경우 출발점을 도달점으로 착각하는 결과가 된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프루스트의 다음과 같은 짤막한 한 마디는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가.

 "아마도 지적이고 정신적인 작업이 도달하게 된 경지는 예술적 장르가 어던 것인가를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질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변할 수가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인간은 지금까지 변화밖에 한 것이 없다. 기독교의 성인은 고대의 현자와 닮은 것도 아니고 현대의 시민과 닮은 것도 아니니 말이다.

- 탐구의 종착점이 <존재 l'Etre>냐 아니면 <무 le Neant>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도대체 탐구 같은 것은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대상은 매순간 발견되고, 하나의 사실이 여러 사실들 사이의 어떤 관계에 의하여 대치되듯이 현실이 진실에 대치되기 때문이다. 만약 서양 사람이 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그보다는 덜 위선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행복의 감정이 존재의 표시라면, 그렇다, 존재는 실제로 있다. 천분의 일 초 동안만 정신을 딴 데 팔아보면 distraire(원문강조) 충분하다. 쇠사슬은 끊어져 버린다. 

 1830년대의 낭만주의자들은 오늘날의 낭만주의자들에 비해 본다면 얼마나 행복했던가! 낯선 풍경 속에 잠기려면 그저 딴 고장에 가보기만 하면 되었다(다만 네르발과 노발리스만이 예외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성을 지워버리고자 하고 삶의 경계선을 뛰어넘어 보려고 한다. 이 새로운 낭만주의자는 다만 그 방향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들 인간의 감정과는 거리가 먼 감정을 가진 동물들의 생활은 교훈적이다. 개나 새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반면 고양이와 원숭이들은......그들은 우리들이 커다란 도약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사르트르는 대자(對自) 존재인 인간은 즉자(卽自) 존재(사물 따위와 같은)를 꿈꾸나 운명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절대적 무(無)에 빠지게 되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불안한 존재라고 하였다. 반면 사르트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그르니에는 인도의 금욕적 명상을 통한 절대 자아(自我)의 체득으로 인간 역시 즉자 존재의 상태를 현세에서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존재와 무>는 1943년 출간되었고, <섬>은 1933년에 출간되었음) 물론 그르니에가 즉자 존재니, 대자 존재니 따위의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섬>에서 인간과 동물을 대비하는 지점은 그 의미상 사르트르의 즉자-대자 존재적 개념을 차용해도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사라져버린 날들

- 아침 새들의 비상과 저녁 새들의 비상을 서로 마주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기쁨 이상의 것이다. 오늘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일기 수첩agenda(어원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이라는 뜻)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나는......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공백의 페이지다. 완전한 공백 상태인 오늘만이 아니다. 내 일생 속에는 거의 공백인 수많은 페이지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흐드러지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국부적인 이해 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지 않는 일이다.

*- 나는 나의 떨어져나옴과 나의 향수라는 항상 현전하는 추억과 서로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시 가까워지다...... 나는 오직 나무들, 하늘, 동물들, 침대, 탁자의 일상적인 되풀이를 통해서만, 육체적이고 자연적인 향수에 의해서만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어디 가나 우리를 따라다니는 어떤 존재를 우리들의 마음 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다른 존재는 단순한 정신적 애착만으로도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나약한 나는 기껏 죽은 자의 입이 흙에서 가까워지듯 가까워지는 것이 고작이다.

보로메의 섬들

- 가장 먼 곳에 대한 사랑을...... : 차라투스트라

- 가장 먼 곳과도 이제는 작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것 속에서 피난처를 찾지 않으면 안 될 모양이었던 것이다.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두자. ...

 그럼 무엇을? 에ㅡ또,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그리도 가냘프게 그리도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마른 돌담 하나만으로도 나를 격리시켜 주기에 족할 것이고 어느 농가의 문턱에 선 두 그루의 시프레 나무만으로도 나를 반겨 맞아주기에 족할 것이니......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ㅡ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인하게 가까운ㅡ나의 보로메 섬들일 터이다. 

막심 고리키 - 그들도 한때는 인간이었다

Posted by 히키신
2017. 3. 22. 17:42 글쓰기와 관련하여

막심 고리키, <그들도 한때는 인간이었다>, 서은주 옮김, 큰나무, 1999

*제목에서와 같이 한때는 '인간'이었던 이들, 지금은 '동물'처럼 살아가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절망적인 상황 속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묘사,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밝혀내는 좋은 수작이다.

고리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1세부터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가혹한 삶의 현실을 채험해야만 했다. 학교는 겨우 문턱에만 다니고 거의 독학으로 글을 깨우친다. 그의 예명 고리키는 '견디기 어려운, 신랄한'이란 뜻이다.

'막심 고리키는 비범한 명예를 얻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또한 러시아 농민들에 대한 압제와 학대에 끊임없이 대항했다. 그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작품에서 드러난다. 그의 문체가 다른 작가들, 특히 학식 있는 작가들보다 세련되지 못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 그의 세련되지 못한 문체가 오히려 그의 주제에 사실상을 부여한다. 역사적으로 고리키의 작품은 러시아의 혼란, 혁명과 초기 소련 집권 당시 러시아 서민들의 삶을 가장 이해력 있게 설명해 주기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옮긴이 해설 중)

자신의 삶을 그대로 작품에 녹여낸 작가의 글은 훨씬 생생하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수많은 경험, 특히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직접 체험해 본 사람의 글은 뭇 서민들에게 감동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생존하기에 급급한 이들에게 책을 펼쳐볼 작은 여유가 주어진다면...



- 눈앞에 펼쳐진 큰 길 양옆으로 창문을 걸어 닫은 채인 오래된 벽들이 서로를 짓누르며 앞으로 쓰러질 듯한 초라한 모습의 오두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낡아빠진 오두막들의 지붕은 온통 구멍 투성이여서 여기저기 욋가지를 덮어놓았고 그 아래로는 곰팡이 핀 서까래가 불쑥 솟아나와 있었다. 그 위로는 이파리에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오래된 딱총나무와 휘어진 하얀 버드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외곽 지역의 비루한 식물상(植物相)이 아닐 수 없었다.
(가난한 이들의 거주지 풍경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이 글은 시작한다.)

- 죄를 짓지 않으면 후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야. 우리는 첫번째 것은 했어. 하지만 후회는 쓸데없는 짓이야. 우리는 즉시 구원받도록 하자고. 강으로 나가서 일을 해.

- "인생이 그렇게 대위님을 괴롭혔는데도 허사였네요. 어울리는 자리에 계셨더라면 굉장한 분이 되셨을 거에요."
...
"'어울리는 자리'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어떤 사람도 자기 인생에서 어울리는 자리가 어딘지 몰라. 우리는 모두들 꾸물꾸물 기어서 자신의 일을 찾아가지. ...
인생은 우리를 카드처럼 뒤섞어 버리지. 우리가 제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단지 우연에 의해서, 그것도 잠깐일 뿐이야."

- 귀족인 그가(그의 장광설로 보아 알 수 있다), 생각이 있는 그가, 비록 운명의 뒤틀림이 그의 처지를 바꿔놓긴 했지만 가까운 곳에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보며 자신의 결점을 애석해 하는 법이다.

- "대부분의 경우 운명과 맞서 싸우기란 불가능하지."
누구에겐가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나 하려는 듯 그가 말했다.

- 가난한 사람들은 자식 농사에 있어서만은 부자였다. 이 거리의 흙먼지와 물웅덩이 속에는 굶주리고 발가벗고 씻지도 않은 아이들이 아침이고 저녁이고 발견되었다. 아이들은 살아 있는 꽃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일찍 시들어 버린 꽃 같았다.

- "내참 빌어먹을! 세상에 이유가 있어서 사는 사람 있어요? 그냥 사는 거지. 왜냐구요? 그냥요!"

- "그런데 왜 우리는 신에게 버림받은 거죠? 신은 왜 벌도 안 내리고 선지자도 안 보내시는 건가요? 도대체 누가 우리를 가르치죠?"

-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이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실제보다 더 나쁘게 그린다는 점이었다. 내부에 미덕을 가진 사람은 때로 자신의 나쁜 면을 보여 주기를 꺼리지 않았다.

- "모든 게 바보 같은 환상이에요. 부질 없는 짓이에요."
그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이상해 보였다. 그들은 삶에서 추방당한 사람들, 술과 심술에 절어 있는 사람들, 더럽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이런 대화는 대위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 아무리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상대방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생각, 더 강하다는 생각, 심지어 더 잘 먹는다는 생각이 들 때의 희열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 "난 속임수를 안 쓰고는 카드 못 해. 그게 내 습관이야."
"습관이 널 잡아먹을 거야."

- 그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별로 없었으며 회상한다 하더라도어렴풋이만 기억하고 있었다. 말을 하더라도 빈정거리는 투였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많은 이들에게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모든 의욕을 불살라 버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몰살시키는 것이기에.

-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제 몸도 튼튼하고 건강해야 쓰지만 아이들도 튼튼하고 건강해야 해. 내 말이 틀렸나?"

- "우리는 어둠 속에서 살아요. 굴뚝 안으로 들어간 굴뚝 청소부처럼."

*** - "우리 인생은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가요, 형제들이여! 우리한테는 어디에도 안식처가 없어요."
"실수로 마누라를 때릴 때도 있잖아."
누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밤이 깊도록, 아니면 술이나 그런 얘기로 인한 열정의 당연한 결과로 다툼이 일어날 때까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고 바깥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술집은 담배 연기로 가득 찼지만 따뜻했다. 거리는 차갑고 축축했다. 가끔씩 바람이 술집의 창문을 무섭게 두드렸다. 마치 이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와 땅 위의 만지처럼 흩어지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울부짖는 바람 소리 속에서 억눌린 듯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들려 왔으나 이내 차갑고 잔인한 웃음 소리에 묻혀 버렸다. 아러한 음악 소리에 어떤 사람은 저주받을 만큼 짧고 흐린 낮과 긴 밤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슬픈 생각을 했고, 어떤 사람은 따뜻한 옷과 충분한 음식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긴긴 겨울밤을 나기란 쉽지 않았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그랬다, 겨울이 다가 오고 있었다. 어떻게 살까?
우울하고 불길한 예감에 이 거리의 사람들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이마 위의 주름살과 함께 '한때는 인간이었던 동물들'의 한숨도 깊어만 갔다. 목소리는 둔탁해지고, 서로들 더 난폭하게 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잔인한 죄가 저질러졌다. 냉혹한 그 적이 다가올수록 가난하고 불행한 부랑자들은 점점 더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적은 그들 모두의 삶을 한 편의 잔인한 어릿광대극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 적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붙잡을 수도 없었다. ...
심장을 갉아먹는 고통을 느끼며, 악의적인 인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더 잔이난 겨울날을 두려워하였다. ...
"다들 정신 차리게, 형제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니까. 그게 바로 인생이라는 거거든. 겨울이 지나면 여름이 올 거야. 그 황홀한 시간이 다가오면 참새들이 기쁨에 겨워 짹짹거릴 거야."
하지만 이런 얘기도 소용없었다. 아무리 신선하고 맑은 물을 배불리 마신다 해도 배고픈 사람의 배가 채워지지는 않는 것이었다. ...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몇 시간이고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그리고 또다시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들어 등불의 연기가 검게 피어오르는 술집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갈가리 찢긴 서글픈 심정으로 서로 나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바람이 거칠게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정신이 나가도록 보드카를 마실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손이 아무에게나 날아갔고 아무나의 손이 그들에게로 날아왔다.

(소외된 이들의 처절한 삶을 적절히 묘사한 대목이다.)

-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어서 최악의 상태가 되지는 않았다.

('최악'이라고 말하는 순간도 최악이 아니다라는 말이 기억난다.)

- "습관적인 도둑질이란 게 뭘까? 사람은 때로 남의 것을 훔치는 실수를 할 수 있어. 하지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법이지."

- "그래, 인생이란 우리 편이 아니야, 형제들. 가까운 시람에게 침을 뱉으면 침 몇 방울은 자기 얼굴에 튀기 마련이야."

**- "그럼 전 어디로 가죠?"
"불쌍한 영혼 같으니. 그건 운명이 정해 줄 일이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
"우린 그저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 "우리를 쫓아내겠다고 할 때 새 집을 찾아보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으로 인생을 망칠 필요는 없어.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은 더 활기가 생기는 법이지. 인생이 활기로 가득 차 있다면, 언제나 인생을 갈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매 순간이 짜여져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더 생기 있어지고 관심과 열정으로 가득 찰걸세."

-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나도 한때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부랑자일 뿐이야. 난 아무 의무도 없어. 그러니까 난 누구에게나 내 맘대로 침을 뱉을 수 있어. 내 현재 삶은 한마디로 과거를 부정하는 거야. 잘 먹고 잘 입는 사람들, 단지 먹고 입는 문제에 있어서 저희들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나를 경멸스럽게 쳐다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끊는 거야. 난 내 안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개발해야 해, 이해하겠나?"

- "자네가 뭘 알겠나? 자네가 아는 게 뭐야? 자넨 사유할 줄 아나? 난 사유할 줄 알고 책도 읽었어, 자네는 한마디도 이해 못할 책들을."
"어련하시겠어요! 사람은 손이 없으면 국을 못 떠먹어요. 그런데 대위님은 책을 읽고 생각할 줄 알고 나는 책 근처에도 안가봤는데 대위님이나 나나 처지는 뭐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네요. 안 그래요?"
"염병할 놈!"

- 말없이 있기란 남의 얘기를 들어 주는 것만큼이나 따분했던 것이다. '한때는 인간이었던 동물들'에게는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는데, 그들 중 아무도 자신이 남들보다 잘 낫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애쓰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인정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예고르 바빌로비치는 이를 앙 다물고 손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질질 끌려 가고 있으며 그가 자신의 운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 같았다.

- "아! 산다는 게 정말 힘들어요."
...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는 법이죠."
... "배우는 법이라.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걸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살고 있늕 모르겠냐구요? 전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어요. 저한테는 그렇게 바라는 행동의 자유가 없어요. 망령 같은 선생이 저에 대해 신문에 쓸 거에요. 그러면 위생 검사관이 올 가고 바로 세금이 매겨질 거에요. 아니면 여인숙 사람들이 이 집을 불태우고 물건을 훔쳐가거나 저를 죽일 거에요. 저는 저놈들한테 꼼짝할 수가 없어요. 저놈들은 경찰한테 눈도 깜짝 안 하고 감옥에 가는 것도 마다 하지 않아요. 감옥에서는 공짜로 먹여주잖아요."

- "아!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 죽어 가고 있을 때 사람은 서글픈 법이야."

- 죽은 사람을 옆에 두고 있을 때의 침묵은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사인이 뭡니까?"
"본인한테 물어보시오. 빌어먹을 인생이 명을 재촉한 것 같소."

***- "당신 뭐야, 누구냐니까?"
페투니코프가 소리쳤다.
"인간이야."
그가 거칠게 대답했다. 이 거친 어조가 페투니코프를 진정시키고 기쁘기 했다. 그는 미소짓기까지 했다.
"인간이라! 당신 같은 인간도 있나?"
그는 옆으로 비켜서며 노인이 지나가도록 했다. 그가 걸어가며 천천히 말했다.
"인간도 여러 종류가 있지, 신의 의지만큼이나. 나보다 나쁜 인간도 있어. 훨씬 더 나쁜, 정말이야."
지저분한 마당 위로, 뾰족한 수염을 달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 위로 흐린 하늘이 말없이 걸려 있었다. 남자는 이리저리 걸으며 발걸음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길이를 재고 있었다. 오래된 그 집의 지붕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아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깍깍 울었다. 온통 하늘을 가리고 있는 잿빛 구름 속에는 뭔가 혹독하고 무자비한 것이 숨어 있었다. 잔뜩 몰려온 구름은 마치 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슬픔에 가득 찬 땅 위에서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려 하는 것 같았다.
(가난한 이들의 거주지 식물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강렬한 대화 이후의 하늘을 묘사하는 것으로 글은 끝난다.
당신 누구야 라는 물음에 서슴없이 '인간이다' 라는 답을 할 자가 몇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