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창간기념 특별기고] 그리스 문명의 ‘생명론적 시간’, 한반도 평화의 ‘운명적 시간’

Posted by 히키신
2016. 4. 15. 22:52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도올 김용옥 창간기념 특별기고] 그리스 문명의 ‘생명론적 시간’, 한반도 평화의 ‘운명적 시간’ 

“남북한 화해 이니셔티브, 왜 미국과 중국에 맡기나?” 

도올 김용옥
그리스인의 ‘생명론적 시간’에 한반도 시운(時運) 살필 수 있는 예지 깃들어… 자기보존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북한을 여유 있게 조망해야

▎도올 김용옥은 특별기고를 통해 “우리민족의 중대한 위기는 오직 우리민족 스스로의 무지가 만들고 있을 뿐”이라 일갈했다. / 사진·중앙포토
4월 창간호부터 도올 김용옥의 장녀 김승중 토론토대 교수(그리스 미술고고학)가 <그리스 예술과 문명, 그 절정의 순간들>을 연재한다. 김승중 교수는 미 프린스턴대에서 천체물리학 박사, 이어 콜럼비아대학의 예술사고고학과에서도 박사학위를 받은 독보적 재원이다. 도올은 김승중 교수의 연재글이 갖는 ‘시간사적’ 의미를 그리스 미술사의 독창적 개관을 통해 웅대하게 전개했다. 20세기야말로 시공에 대한 다양한 인식이 만개한 백화노방의 시기다. 도올이 특별기고를 통해 주목한 것도 김승중 교수가 개진한 그리스인의 ‘생명론적 시간의 계기’다. 도올은 한반도 역시 평화와 생명의 분수령적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본다. 필요한 것은 발상의 대전환이다. 그 이니셔티브를 잡아야 국운이 열린다는 도올의 주장을 독자와 함께 경청해본다. <편집자>


▎사모스 섬에 남아 있는 헤라 신전.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을 모신 신전으로 BC 7~6세기에 건립되었다. 그리스 신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한다. 여러 번 파괴되고 수복되어 34개의 기둥만 남았다. / 사진·중앙포토
그리스미술사는 사계의 학자들에 의하여 대강 다음의 몇 시기로 구분되어 논의된다.(학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 암흑기(Dark Age): BC 12세기~BC 9세기

2) 기하학적 시기(Geometric Period): BC 900년경~BC 700년경

3) 동방화 시기(Orientalizing Period): BC 700년경~BC 600년경

4) 아르케익(상고) 시기(Archaic Period): BC 650~BC 480년경

5) 초기 고전시대(Early Classical Period): BC 500년경~BC 450년경

6) 전성기 고전시대(High Classical Period): BC 450년경~BC 400년경

7) 후기 고전시대(Late Classical Period): BC 400년경~BC 323년

8) 헬레니스틱 시대(Hellenistic Age): BC 323~BC 30년


‘암흑기(Dark Age)’라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희랍적 예술을 탄생시키기 위한 태동기를 말하는 것이며, 이 시기까지의 희랍문명[정확하게 말하면 에게문명(Achaeans)]의 주축은 아테네가 아니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 잡고 있었던 미케네(Mycenae)였다. 미케네 문명은 리니어B문자(Linear B script: 크레테Crete 섬에서 BC 3000년부터 BC 1100년까지 융성한 미노아 문명Minoan Civilization이 남긴 리니어A문자Linear Ascript와 대비하여 부르는 고문자. 이 문자들은 모두 희랍어의 조형인데, B는 A로부터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다. 그러나 현재 A문자는 해독이 어렵고, B문자는 1952년 미카엘 벤트리스 Michael Ventris에 의하여 해독되었다. 이 B문자는 희랍방언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최고最古의 형태이며 호머의 언어의 조형임을 알 수 있다. 희랍언어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데 지극히 중요하다)를 남겼기 때문에 최근 그 문명의 실제 모습에 관하여 일상적 생활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미케네 문명을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말’이다. 미케네의 전사는 항상 전차를 활용한다. 포세이돈(Poseidon: 히포스Hippos, 히피오스Hippios) 숭배의 족보는 미케네 문명으로 올라간다. 말의 관념은 희랍인의 신화적 상상력의 복합구조 속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말은 습기(moisture), 지하수, 지하세계, 풍작(fertility), 바람, 폭풍, 구름, 태풍과 연상되어 있다.

기원전 15세기부터 미케네 사람들은 에게 바다를 건너 크레테의 미노아 문명을 정복한다(BC 1450년경). 그리고 이집트를 치고, 히타이트 제국을 공략한다. 그리고 로도스(Rhodes) 섬을 정복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고,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 지역)의 에게 바다 해안 도시들을 식민지로 삼는다. 아마도 트로이전쟁(Troyan War)은 이 팽창시기에 이루어진 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트로이는 히타이트 제국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강력한 도시국가였다. ‘미케네 사람들(the Mycenaeans)’이라는 이름은 호머의 대서사시 속에서 아가멤논왕(King Agamemnon)의 수도로서 그려진 언덕 위의 성채, 미케네(Mycenae)에서 따온 것이다. 아가멤논이 희랍사람들의 연합세력을 이끌고 트로이전쟁을 주도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이다. 전통적으로 고전희랍사가 들은 이 전쟁을 BC 1184년의 사건으로 말하는데, 그보다는 더 빠른 시기에 이루어진 사건일 것이다.

미케네 사람들은 지중해 동부지역과 매우 활발한 무역을 행하였으며 말타, 시실리, 이탈리아 등 서부지역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미케네 문명은 BC 13세기 말엽부터 서서히 퇴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12세기경에는 미케네 문명의 모든 중심도시들이 문명의 사이클이 과시하는 쇠락의 보편적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BC 1100년경, 미케네 문명은 ‘바닷사람들’(the Sea Peoples: 19세기 사가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조어로서 청동시기 말기, BC 12세기에 미케네 문명과 히타이트제국과 레반트 도시들을 멸망시킨 세력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반드시 ‘해양세력’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민족대이동이 있었던 것이다)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미케네 문명을 멸망시킨 세력을 우리는 보통 발칸반도에서 내려온 도리아인(Dorians)이라고 추정한다.

미케네 문명 멸망한 자리에 개화한 희랍문명


▎크레타 섬의 동굴. 크레타 섬의 백악 지층에는 천여 개의 해안 동굴이 있다. 레아가 막내 아들 제우스를 동굴에 숨겨 살림으로써 그리스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사진·중앙포토
잠깐, 우리는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희랍’, ‘그리스’ 이런 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희랍사람들은 자기들을 ‘그리스’라고 부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나라가 ‘헬라스’로 불리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희랍(希臘: 시라, Xila)’은 ‘헬라’라는 말의 중국식 음역이다. ‘그리스’라는 영어 명칭은 라틴어 ‘Graecia’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인들이 처음 알게 된 헬라스인들이 아드리아 해(Mare Adriaticum) 건너편의 서북부 헬라스에 살고 있던 ‘그라이코이(Graikoi)’ 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살던 곳을 ‘그라이키아’라고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비하면 ‘ 헬라스’라는 말은 ‘ 헬렌의 후 손들(Hellenes)’이라는 어원에서 유래된 것이다. 희랍신화에도 <구약>의 대홍수에 비견되는 대홍수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대홍수와 관련된 주인공은 노아가 아닌 데우칼리온(Deukalion: 프로메테우스의 아들)과 퓌라(Pyrrha: 에피메테우스의 딸)이다.

제우스가 이 세계를 홍수에 잠기게 만들었는데, 데우칼리온과 퓌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충고에 따라 상자(larnax)를 짓고 그 안에서 9일 밤과 9일 낮을 지내다가 테살리(Thessaly)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 부부의 아들 헬렌(Hellen)이 테살리에 세운 나라를 ‘헬라스(Hellas)’라고 불렀다. 이 헬렌에게는 세 아들, 도로스(Doros), 크수토스(Xouthos), 아이올로스(Aiolos)가 있었는데, 도로스의 후손이 도리아 부족이 되었고, 아이올로스의 후손은 아이올리아 부족이 되었다. 그리고 크수토스에게는 두 아들 아카이오스(Achaios)와 이온(Iōn)이 있었는데, 전자의 후손이 아카이아 부족이 되었고 후자의 후손이 이오니아 부족이 되었다. 훗날 이들 모두를 합쳐 ‘헬렌의 후손들’이라 일컬었고, 이 후손들이 산 지역 전체를 헬라스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스보다는 헬라스라는 명칭이 보다 정통성 있는 이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두 이름이 다 역사성이 있기 때문에 방편적으로 사용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려는 것은 희랍지역의 원래 문명은 미노아-미케네 문명이었고, 이것은 실상 비희랍적인 문명이었다는 것이다. 이 미케네 문명이 멸망하고 희랍어를 쓰는 도리아족이 새롭게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열었다. 대홍수의 전설도 제우스의 분노가 그 주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질서(a new world-order)를 위한 새로운 시작을 창조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의 담지자다. 그 불의 상징인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이 물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동방의 천지수화론(天地水火論)적 사유의 한 실마리를 엿볼 수도 있다.

미케네 문명의 특징은, 리니어B문자 문서의 해독이 전해주는 바로는, 지독하게 관료주의적이면서 독재적인 왕권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쟝 삐에르 페르낭트Jean-Pierre Vernant는 <희랍사유의 기원>에서 미케네 왕권 Mycenaean Royalty을 ‘a bureaucratic royalty’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다). ‘관료주의적’이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우나 여기서 말하는 관료는 근대적 국가질서의 관료가 아니라, 왕에게 직속된 복종적인 궁정관료였으며 이들은 매우 치밀하고, 철저하게 국민에 대한 압제를 행하였다. 이러한 미케네 궁정의 왕을 와나카(wa-na-ka=와낙스 wanax)라고 불렀는데, 이 와나카는 나라의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 종교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는 강력한 정치체제의 중심이었다.

와낙스는 충직한 특수군인귀족계급(warrior aristocracy)에 의하여 지원되었고, 그들은 와낙스에 대한 복종으로 인하여 특권을 누렸다. 지방의 농촌공동체는 다모스(damos)라고 불리는 자체조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모스는 궁정에 철저히 복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궁정의 조직은 매우 치밀한 행정체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 서기들이 남긴 방대한 문헌들만 보아도 얼마나 세세한 분야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삶을 직접 관리하고 기록을 남기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미케네의 궁정 중심의 권위주의적 행정체계는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붕괴되고 와낙스(wanax)는 정치적 어휘로부터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와낙스의 자리를 바실레우스(basileus)라는 단어가 차지하게 된다. 바실레우스(lord, master, householder, chief)는 결코 모든 형태의 권력을 한 몸에 집중시킨 한 개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왕적인 기능만을 상징하며 복수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들은 사회적 위계의 최상부를 점령하는 그룹이었으며, 귀족의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들어간다. 와낙스로부터 바실레우스에로의 변화는 폐쇄적인 사회로부터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리고 최고의 지배권력은 반드시 시민의 동의를 얻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쌍방적 원리가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와낙스의 폐지와 더불어, 서민들에게 보편화될 수 없었던 리니어B문자(궁정서기들의 문자: 그 음절기호 syllabic signs가 90개가 되며 그 체계가 매우 복잡하다)가 사라지고, 페니키아의 22개 문자를 차용한 순수한 표음문자의 도입이 이루어졌다. 이 필기의 방식은 서민문화의 성격을 완전히 혁명시켰다. 문자의 사용이 궁정 와낙스의 사적 목적을 위한 아카이브의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되었다. 새로운 문자체계는 시민의 사회적·정치적 삶의 다양한 측면이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노출되는 것을 허락했다. 표음문자는 매우 단순하고 정확하게 사람의 말을 시각화해 주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왜 폴리스 철학정신을 사수했나?


▎네덜란드 화가 아드리안 반 데르 베르프(1659~1722)의 <파리스의 심판>을 일부 변형했다. 파리스가 미(美)를 다투는 헤라·아프로디테·아테나를 심판한 그리스신화를 담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인간의 ‘말(speech)’, 즉 언설이라는 것은 애초에는 매우 신비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타인에게 명령을 내리고 타인을 지배하는 강력하고도 신령스러운 수단이었다. 언설은 폴리스 공동체의 가장 탁월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왕의 선포는 마지막 심판으로 들렸다. 인간의 언어 자체가 신격화되고 종교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희랍의 폴리스에서 말은 더 이상 종교적 의례를 구성하는 신비적 힘이 아니었다. 모든 선포는 논박될 수 있었다. 그것은 공적인 개방포럼을 통하여 토의되고, 논박되고 쟁의되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연설은 일자가 타자를 승극(勝克)하는 것이며, 위대한 연설은 더 많은 공적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폴리스의 정치는 비밀스러운 과정이 아닌 공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지식과 가치, 그리고 모든 정신적 기술이 공동 문화의 성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중의 심사를 거쳐야 했으며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폴리스의 분위기를 전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소피스트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또 왜 소크라테스가 유감없이 사약을 들이키면서까지 그의 폴리스 철학정신의 이상을 고수하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희랍문명이 새롭게 탄생되는 전환의 시기를 제1의 시기인 암흑기라고 규정하게 된다. ‘암흑기’라는 의미는 다양한 비희랍적인 선행요소들이 새로운 놀이판에 자리 잡으면서 아직 가시적인 희랍문화를 태동시키지 않고 있을 시기였다. 이때는 아시리아 제국이 강력한 주축을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그 침묵을 깨치고 태어난 최초의 그리스예술이 기하학적 스타일의 문양을 지닌 다양한 도기였다. 도기뿐만 아니라 테라코타와 작은 청동조각들이 있다. 이 기하학적 문양은 단순한 선모양(뇌문雷紋meander, 지그재그, 삼각형, 스와스티카, 크레넬레이션crenellation 등의 패턴)을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점차 인간과 동물의 형상이 선율패턴과 엮여 들어갔으며, 아주 복잡한 신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는 구도로 발전해나갔다.

이 도기들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였는데 저장용의 단지로 쓰이기도 하고, 드링킹 파티(심포지움, symposium)를 위한 여러 목적의 용기로 쓰이기도 했고, 개인의 치장이나 목욕을 위한 물단지·기름단지, 또는 종교적 목적을 위한 제기로도 쓰였다. 사이즈와 형태에 있어서 매우 다양한 이름이 있으며, 그에 따라 단지의 회화양식이 결정되었다. 초기에는 코린트에서 유래된 ‘까만형상도기(black-figure pottery)’가 유행하였는데(700년경부터 530년경까지) 후대로 오면서(6세기 후반에서 4세기 말까지) ‘붉은형상도기(red-figure pottery)’로 대치되었다. 까만형상도기는 광택 나는 까만 물감을 자연점토 표면 위에 발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붉은형상도기는 광택 나는 붉은 물감으로 형상을 나타낸 후에 배경은 모두 까만 물감으로 처리한다. 까만형상도기의 경우, 디테일은 칼로 파서 점토 자체의 색깔로 선을 나타내는 기법을 썼지만, 붉은형상도기의 경우에는 붉은 형상 위에 자유롭게 까만 물감으로 디테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자유롭고 생동하는 표현을 창출해낼 수 있었다. 도기는 자기만큼 고온의 소성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페인트 문양이 더 정교하게 구워지는 과정에서 보존될 수 있었다. 그리스 베이스 페인팅은 그 나름대로 유니크한 문화적 특성과 섬세함, 예술성을 과시한다.

그리스는 자원이 풍족하지 못한 나라이며, 광물자원이 적고, 토지 또한 넓지도 비옥하지도 않다. 기원전 8세기에는 증가하는 인구와 그들의 새로운 욕구에 걸맞은 물질적 만족을 위해 외국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BC 700년경으로부터 600년경에 이르는 시기에는 동방의 다양한 문명의 성과, 그리고 이집트의 예술이 집중적으로 유입된다. 이러한 동방의 영향으로 그리스 예술은 타 문명의 문양이나 신화적 요소, 그리고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여 과감한 표현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 문명은 단지 그리스인의 고유한 색깔에 의하여 그림 그려진 것이 아니라 당시 고대문명의 다양한 요소를 융합하면서 발전적으로 형성되어간 것이다. 그리스 문명의 위대함은 바로 그러한 이색적 요소들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성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피타고라스의 기하학은 엄밀한 연역적 사유의 소산이거나, 과학적 추상성의 논리가 아니었다. 괴이한 종교적 터부와 윤회사상(transmigration thought), 그리고 관조(contemplation)의 사상이 결부된 신비주의였다. 피타고라스에 있어서는 수학은 신비였고, 신비로운 우주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였다. 수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엑스타시였다. 우리는 수학을, 특수한 몇몇 천재가 아니고서는, 매우 지겨운 사고의 훈련으로 생각한다. 입시공부하기 위하여 거쳐야만 하는 끔찍한 오딜(ordeal, 시련)의 관문일 뿐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시대와 같이 ‘대학입시’가 없었던 자유로운 사유의 황무지 속에서는 수학처럼, 경험적 관찰이나 사실의 유무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일시에 거대한 우주를 조직하고 통찰하고 발견하는 황홀경을 제시하는 그런 체험은 없었다.

“수학적 깨달음은 황홀한 기쁨이었다”


우리는 오르지(orgy, 오르기아)라는 말을 알고 있다. 혼음의 축제, 바카스제식의 황홀경, 모든 비밀스러운 제식과 관련된 말이다. 그런데 이론(theory)을 의미하는 테오리아라는 말이 있다. 이 테오리아라는 단어도 오르기아와 모종의 관련이 있다. 이 둘은 모두 오르페우스 종교의 고유한 어휘에 속한다. ‘테오리아’를 희랍철학의 권위자인 콘퍼드(F.M. Conford, 1874~1943)는 “정열과 공감에 휩싸인 관조(passionate sympathetic contemplation)”라고 해석하였다. 그것은 매우 정적인 관조인 듯이 보이지만 기실 열정과 수난과 감정이입의 격렬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관조자는 수난을 겪는 신과 동일한 존재로 취급되며 신의 죽음 속에서 죽음을 체험하고, 신의 새로운 탄생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피타고라스에게 있어서 정열과 공감에 휩싸이는 관조는 지성적 관조(intellectual contemplation)였다. 그것은 결국 수학적 인식의 경지를 의미했다.

테오리아는 황홀경 속에 드러난 계시이며, 수학적 깨달음은 황홀한 기쁨이었다. 그것은 돈오(頓悟)의 도취적인 열락(悅樂)이었다. 경험만을 맹신하는 철학자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에 얽매이는 노예로 전락하지만, 순수한 수학자는 음악가처럼 질서정연한 미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희랍어의 ‘테오리아’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봄(a looking at)’을 의미한다. 이 봄은 일차적으로 눈의 시각작용을 통하여 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진리를 본다,” 즉 불교에서 ‘견성(見性)’이라 할 때의 ‘견’ 즉 ‘다르사나’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견성은 견불(見佛)의 경지인 것이다. 결국 테오리아나 다르사나나 같은 함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옥스포드대학의 희랍어사전을 펼쳐보면, 테오리아의 두 번째 의미는 ‘관조(contemplation), 사색(speculation)’이 된다. 보는 것은 곧 관조하는 것이다. 즉 수학과 같은 명철한 사유에 의하여 우주를 통찰하는 것이다. 사전에 나오는 세 번째 의미는 ‘극장이나 공적 게임에 있어서 관조자가 됨(the being a spectator at the theatre or the public games)’이다.

다시 말해서, 테오리아는 희랍인들이 흔히 인간세에 세 부류가 있다고 생각한 분류방식에 있어서 최상층을 점유하는 사람들의 특권에 속한다. 가장 낮은 계층은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그 위의 계층은 경기 속에서 능동적으로 활약하는 경기참가자들이다. 그러나 가장 높은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저 멀리 편안한 스탠드에 앉아서 경기를 총체적으로 관조하는 스펙테이터다.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전시됐던 강의 신 일리소스의 머리 없는 조각상. 1800년대 초 영국의 엘긴 경이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떼어내 영국에 반입한 조각상, 이른바 ‘엘긴 마블스’ 중 하나다. / 사진·중앙포토
이 스펙테이터의 마음의 상태가 곧 테오리아인 것이다. 현대의 대중사회(mass society)에서는 경기참가자들(연예·스포츠계의 스타들)이야말로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지위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요즈음 사람들은 이 관조적 삶의 우위라는 테제를 이해하기 어려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폴리스 공동체의 대전제는 노예계급의 엄존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개명한 사상가도 노예와 여자는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가치를 천성적으로, 자연적으로 결여한 존재로서 규정하였다. 지배당하고 복종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였다. 노예제를 묵인한 사회체제 속에서 관조적 삶의 이상은 순수수학의 창조를 이끌어내었으며, 이 관조의 특권은 신학·윤리학·형이상학·정치학의 모든 분야에서 지배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수학적 예지는 상기(Reminiscence)의 소산


▎한 관광객이 그리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서 의회 건물 사진을 찍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있어서 질료와 형상이 뒤엉킨 가치의 사다리(entelekheia)도 결국 형상 없는 질료(formless matter), 즉 순수질료(pure matter)와 질료 없는 형상(matterless form), 즉 순수형상(pure form)을 양극으로 설정한 우주의 장(場)에 펼쳐진 복합체들의 가치론적 배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장(場)은 또다시 인간의 몸(Mom)이라는 소우주로 축약될 수도 있다. 인간의 몸에 있어서 가치론적으로 저열한 하초(下焦)에 순수질료라는 극이 성립하고, 가치론적으로 고귀한 상초(上焦)에 순수 형상이라는 극이 성립한다고 보면, 인간의 가장 순결한 정신(nous)은 순수수학(질료가 없는 순수형식적 사유)을 펼쳐내는 자유로운 지성이며, 이러한 지성은 바쿠스의 무녀들(Bakchai)의 광란, 즉 엔투시아스모스(enthousiasmos)를 벗어난 관조의 해탈을 지향한다.

관조는 하초의 신들림이 아닌, 상초 즉 이성 및 지성의 신들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피타고라스주의에서 파생된 지류다. 플라톤 역시 피타고라스-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ontology)의 홍류 속에서 벗어나는 인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기하학주의를 탈피하여 보다 생성론적인 생물학주의를 자설의 본류로 삼았다고는 하나 파르메니데스의 이원론적 존재론의 틀은 상재(尙在)한다.

플라톤의 이데아설은 그의 인식론인 상기설(the Doctrine of Reminiscence)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데, 그것 역시 영혼의 불멸, 즉 영혼의 윤회라는 우주론적 인식체계를 전제하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는다. 윤회의 핵심에는 영혼의 아이덴티티가 육체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지속된다는 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절대적 같음(absolute equality)은 현상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다. 근접한 같음(approximate equality)만이 경험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대적인 같음의 관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영혼이 전생에서 절대적인 같음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수학적 예지가 모두 배움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상기의 소산인 것이다. 존 버넷트(John Burnet, 1863~1928)는 그의 역저 <초기희랍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다니러 온 손님이고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세의 무덤에서 탈출하려 자살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목자인 신의 종복들로서 신의 명령이 없다면 무덤을 떠날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올림픽경기의 상인, 경기참가자, 관람객) … 가장 고귀한 인간은 단지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정화활동(purification) 가운데 최고 단계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공평한 학문이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한 학문에 헌신하는 철학자만이 가장 효율적으로 자기자신을 생사의 수레바퀴(the wheel of birth)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플라톤의 상기론적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수레바퀴가 똑같이 굴러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논리도 똑같이 설교되고 있다. 결국 무여열반의 성취는 이데아를 추구하는 플라톤의 정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에서 달성된다. 이데아론적 지혜만이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희랍인들의 사유는 결국 <요한복음> 제1장에 나타나는 로고스적 사유와 동일한 패러다임에 있으며 소크라테스의 삶과 예수의 삶은 동일한 문명의 동일한 패러다임의 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임마누엘 칸트의 실천이성론의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의 절대성에까지 일관되게 계승되어 내려오는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법칙’은 예지계에 속하는 것이며, 개별적 행위의 자연스러운 경향성(Neigung)은 감성계에 속한다. 진정한 자유라는 것은 감성계의 인과법칙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 속에 내재하는 이성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자의 자기한정이며, 그것이 곧 ‘자율(die Autonomie)’이다. 다시 말해서 실천이성의 근본법칙인 정언명령에 입각하여 행동함으로써 끊임없는 이성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는 하나의 ‘요청(postulation)’이다.

내가 말하려 하는 것은 희랍사상에 통관되어 있는 플라톤적 이원론(Platonic Dualism)은 화이트헤드가 말했듯이 서구사상사 전체를 일관하는 것이며, 그 뿌리에는 윤회나 혼백의 분리와 같은 매우 소박한 인간의 원시 관념이 내장되어 있는데 그 원형은 동방문명과 교류되면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희랍미술사에 나타나는 동방화 시기라는 것도 단순히 디자인이나 문양상의 문제뿐 아니라 사상의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아테네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그리스가 미국의 J 폴 게티 미술관으로부터 반환받은 두 점의 유물. 왼쪽이 기원전 4세기 무렵 제작된 황금 화관, 그 옆은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젊은 여성의 대리석상이다. / 사진·중앙포토
동방화 시기 다음에 아르케익 시기가 따라온다. 동방화 시기에는 다에달릭 조각(Daedalic sculpture: 전설적인 크레테 예술가 다에달루스Daedalus에게서 비롯된 조각양식)이 그 특징으로서 대변되고 있는데 아르케익 시기에 오면 쿠로스(kouros=복수는 쿠로이kouroi, 여성조각은 코레kore라고 한다)라는 웅장한 통돌조각이 주종을 이루는데, 이집트와 교역이 활발히 진행되면서(BC 672년경부터) 이집트의 조각양식이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메소포타미아 조각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쿠로스 조각상은 보통 2m가 넘는 거대한 석상인데 초기작품은 매우 양식적이며 배리에이션이 별로 없다. 조각상은 완벽하게 입체적인 통조각이며, 똑바로 정면을 향해 있다. 어깨가 널찍하고 허리는 건장하게 잘록하며 팔은 양 옆으로 몸에 가깝게 드리워져 있으며 주먹은 쥐고 있다. 두 다리는 뻣뻣하게 땅을 밟고 있으며 무릎이 곧게 펴져 있다(rigid). 그런데 가장 큰 특징은 왼발이 약간 앞으로 나와 있다는 것이며, 얼굴에는 대체적으로 ‘아르케익(Archaic) 미소’라고 하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쿠로스 상은 그리스 세계 내에서 표준이 된 상호교류의 상징, 즉 그리스다움(Greekness)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쿠로이 조각들은 이집트의 조각과는 달리 종교적인 목적을 나타내거나, 종교적 제식이나 건조물의 일부분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때로는 아폴로신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그들은 그들 지역 자체의 로컬한 영웅들이나 출중한 운동가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 쿠로스 상이 기원전 6세기 말까지 총 2만여 개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은 당시의 이 양식 하나를 얼마나 치열하게 세련시키기 위해 노력했는가, 그리고 당시 그리스 세계가 문명의 진보를 위해 얼마나 활발히 노력했는가를 말해준다. 초기의 이집트 양식적 표현은 점점 희랍화되어 간다. 즉 경직된 양식이 보다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는 것이다. 희랍인들은 인간의 신체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을 증가시켰고, 그에 따라 신체의 활동과 밸런스, 그 역동적 순간을 자유롭게 포착하는 방식으로 발전해나갔다. 여성조각인 코레(복수 코라이korai)는 머리를 땋고 옷을 입었는데, 초기에는 페플로스(peplos)와 같은 헤비한 튜닉을 입었으나 점점 키톤(chiton)과 같은 가벼운 튜닉으로 바뀌어갔다. 이 치마들은 점점 자연스러운 주름과 맵시를 과시하게 된다.

고전시대(Classical Period)라 하는 것은 소위 우리가 보통 ‘희랍문명’이라고 부르는 인상의 총체, 그 철학과 미술, 조각, 건축, 그리고 특이한 정치체제 등등의 모든 것을 집약하여 부르는 것이다. 초기 고전시대의 출발은 아테네가 BC 490년과 479년 두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 대제국의 침공을 극적으로 물리치면서 BC 500년경부터는 자기확신의 새로운 느낌으로 충만한 문명을 건설하면서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희랍문명이야말로 전 유럽세계문명의 모태이며 근원인 것처럼 착각하는 인상을 견지하고 있으나, 실상 희랍문명의 외연은 아테네 도시문명과 일치되는 것도 아니며, 고전시대 이전의 희랍문명은 자체로 축적된 것이 별로 없었다. 오리엔트나 이집트의 육중한 문명의 축적에 비하면 청동기시대의 아테네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앞서 논의한 대로, 우리가 보통 희랍문명이라고 하는 것의 핵심적 발아는 에게 문명권의 중심 노릇을 한 크레타섬의 미노아 문명이었다. 문자와 도시, 그리고 무역기술을 갖추었던 이 문명은 다시 미케네 문명에 흡수되었고, 이 미케네 문명은 다시 도리아인의 침공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고전시대 이전의 아테네는 희랍문명의 리더가 아니었다. 희랍문명권은 지정학적으로 산맥들에 의하여 갈라진 지형이었기 때문에 거대한 국가의 출현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군사공동체인 폴리스가 수백 개 밀집되어 있는 형국이었는데, 이들은 혈연공동체라기보다는 전우애를 통한 로고스적 결합을 한 인위적 공동체였다. 따라서 농경생활의 터부에서 생겨난 씨족신을 섬기기보다는 군신(軍神)들의 판테온인 올림푸스를 숭배하였던 것이다. 이 수많은 폴리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과 체제와 문화를 갖춘 두 개의 폴리스가 스파르타와 아테네였다. 아테네의 전성기라고 해봐야, 그 시민의 인구는 10만 정도였다(외국인 1만 명, 노예 15만 명을 합치면 26만~30만 명 정도).

솔론은 희랍인의 이상적 덕성을 구현한 인물

이러한 소국이 당시 다리우스 대왕의 영도력 아래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페르시아 대제국의 대군을 패퇴시킨 기적적인 이야기는 마라톤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년 9월)의 무용담으로 우리에게도 잘 전달되고 있다. 마라톤전투 이래로도 그레코-페르시안 전쟁은 BC 449년까지 집요하게 계속된다. 그러나 이 모든 전쟁에서 아테네는 계속 승리의 행운을 누린다. 이것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아테네를 잘 도왔기 때문에도 가능했지만, 페르시아 군대는 해전에 약했을 뿐 아니라, 천기(天氣)의 상태가 항상 페르시아에게 불리한 조건을 형성했다. 아테네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결국 이 페르시아전쟁에서의 아테네의 승리가 세계 역사의 주축을 바꾸는 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페르시아제국의 문화적 성취는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오직 혁혁한 아테네문명의 현시만이 인류문명의 연속태를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테네의 천운(天運)은 결코 우연일 수만은 없다. 결국 운이란 그것을 준비하고 발견하고 활용하는 자에게만 찾아오게 마련이다. 우리는 아테네야말로 모든 ‘전통의 원천’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지만 기실 아테네는 무전통의 황무지에서 갑자기 솟아난 전통의 집결지라는 성격으로 보다 정확히 규정될 수 있다. 비어 있던 곳이기 때문에 모든 모이라(moira, 운명의 신)를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타 인간세가 구현해보지 못한 제도와 예술, 그 문명의 모험(Adventure of Civilization)을 감행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Politica)>에서 인간세의 국제(國制)를 6개로 나누어 다양한 논변을 펼친다. 국제를 6개로 나누는 기준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지배자의 사이즈에 관한 것이다. 지배자가 한 사람인가, 소수인가, 다수인가라는 척도이고, 또 하나의 척도는 지배자가 지배를 행할 때, 그것이 보편적 이익, 즉 공동의 복지(common welfare)를 위한 것인가, 또는 지배자의 사적 이익(private interest)을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보편적 이익을 위한 일자, 소수, 다자의 정치는 군주제(monarchy), 귀족제(aristocracy), 입헌공동체(polity, politeia)라고 부른다. 이 삼자는 모두 좋은 정부(good government)다. 그런데 이 정체들이 사적 이익을 위한 나쁜 정부(bad government)로 바뀌면, 군주제는 참주제(tyranny)로, 귀족제는 과두제(oligarchy)로, 입헌공동체는 민주제(democracy)로 변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러 정체 중에서 제일 나쁜 정부의 형태가 민주제일 수가 있다. 민주제의 구체적 의미는 빈민 다수의 자유를 위한 것인데, 정치적 결정에 있어서 어떠한 경우에도 다수는 현명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던 것이다. 과두정치도 소수 부자의 부가 유지되는 것이 최대목표이므로 좋을 수가 없다. 참주정치란 우리가 흔히 체험하고 있는 독재정치(despotic government)를 말하는 것이므로 좋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허무맹랑한 이론적·논리적 열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아테네 역사의 연변을 근거하여 논의한 것이다. 아테네는 기원전 8세기경까지는 왕제(monarchy)였다. 그런데 그 왕제가 왕권을 제약하고자 하는 대귀족들의 대두로 인하여 귀족제(aristocracy)로 이행해간다. 이 귀족제가 과두제(oligarchia, timocratia)로 변하는 것은 역사의 필연적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두제는 다시 참주제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어리석은 참주가 다수에 의하여 타도되면 민주제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아테네는 이미 솔론(Solon, BC 630~560, BC 594년경 아르콘archon으로 집정하여 20년간 전권을 행사하였다)의 시대 때부터 빈민을 해방시키는 경제적 개혁(빚 탕감)을 감행하였고, 동전화폐와 도량형의 혁신을 이룩하였다. 정치적으로도 모든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제너럴 어셈블리(the general Assembly)인 에클레시아(Ecclesia)를 제도화시켰고 또 이 에클레시아의 준비회의인 400인회의(Council of Four Hundred)에 빈민들이 자기들의 과제상황을 호소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정치적 권력이 혈연의 관계에서 유지되는 모든 통로를 제도적으로 단절시켰다. 그리고 이전의 드라코(Draco: BC 621년경의 법령제정자)의 철권 같은 가혹한 법조문을 보다 인간적인 법으로 개혁하였고, 모든 시민이 소송하고 검찰할 수 있게 만들었다.

솔론의 개혁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아무 계층(부자나 빈자나)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선각자의 비애일 뿐이다. 헤로도토스는 솔론을 성자며 법률의 창조자이며 시인으로서 예찬한다. 솔론은 중용이라는 희랍인의 이상적 덕성을 구현한 인물이며 진정한 최초의 아테네 시인(아테네적인 컬러와 언어를 구사하는)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농민계층을 창조하여, 귀족정의 기반을 무너뜨렸고, 시민공회의 권력을 강화하였으며, 보다 민주적인 사법제도를 확립하였다. 솔론은 아테네가 향후 자유롭고도 찬란한, 그리고 안정된 고전시대로 진입할 수 있는 모든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시간의 피로에 감염되지 않는 그 화려한 자태여!


▎아테네 아고라에서 올려다본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 사진·중앙포토
하여튼 전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모나키(monarchy) 아니면 타이러니(tyranny)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근원적 개혁을 시도할 생각을 하지 못한 암울한 시대에, 아테네가, 아무리 문제성을 내포한다 할지라도(데모스demos라는 개념에 노예나 여자가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크라티아kratia라는 개념에 확고한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 데모크라시의 시도를 했다는 것, 즉 치자가 일방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지 않는 어떤 제도를 확립하려 했다는 그 노력에 대해 우리는 경외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비록 장시간 지속되지 않은 매우 특수한 실험(experimentation)이었다 할지라도, 리얼한 것이었다.

이러한 리얼리티는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429)라는 탁월한 정치가의 역사적 실존성으로 입증되는 것이다. 페리클레스야말로 아테네의 민주정치와 아테네의 제국화를 성취한 패러곤이었다. 페리클레스 한 개인의 존재가 아테네를 희랍세계의 정치문화 중심으로 격상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시 데모크라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법치(法治)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제상황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반드시 ‘기인(其人: 그 사람, <중용> 제20장의 개념)을 기다려서만 성취되는 인치(人治)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 460년경에 태어나 404년 이후에 죽음. 희랍사가로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썼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에 비해 40세가량 어렸으므로 페리클레스 생애 전기前期에 관해서는 직접적 지식이 없었다)는 페리클레스에 대한 어떠한 부정적 언급도 거부한다. 사가에게 그러한 존경심을 얻는다는 것은 페리클레스가 실제로 얼마나 위대한 정치가였나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언해준다. 500년 후에 <페리클레스의 생애, The Life of Perikles>(AD 100년경)라는 위대한 저작물을 통해 페리클레스를 더 리얼하게 그려낸 플루타크는 다음과 같은 멋들어진 평어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아~ 페리클레스가 창조한 건물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새로움의 꽃을 피우고 있네. 시간의 피로에 감염되지 않는 그 화려한 자태여! 언제나 새롭게 피어나는 생명의 꽃, 나이를 먹지 않는 신비로운 기운이 아테네의 작품들에는 스며들어 있다네.”

이것은 페리클레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아테네를 이 지구상에서 있어본 적이 없는, 가장 콤팩트하고 가장 장엄하고 가장 완벽한 설계구도를 가진 도시로 변모시키려 한 그 열정적 작업을 예찬하는 한 구절이다. 신도시 아테네의 중심에 솟은 아크로폴리스, 또다시 그 중심에 위치한 위대한 신전, 파르테논(Parthenon)의 위용 하나만으로도 그 웅대한 스케일과 정교한 운치의 극상, 그 문명의 전형을 전관할 수 있게 해준다.

파르테논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이 파르테논은 아테나 여신(goddess Athena)을 모시기 위해 지은 신전인데 도리아식 오더(order는 기둥양식과 엔타블라쳐entablature 양식을 함께 지칭하는 건축용어다. 오더에는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투스칸식, 혼합식의 5종이 있다)의 장엄한 절정을 이루고 있다. 파르테논의 어원은 ‘처녀 아테나’에서의 ‘처녀(Parthenon)’를 의미한다. 실제는 처녀성보다는 아테네의 수호신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런데 이 신전은 BC 447년에 착수하여 그 전체 모습이 BC 438년에 완성되었고, 바로 그해에 아테나의 순금과 상아로 치장된 거대한 상이 봉헌되었다. 이토록 장엄한 신전이 불과 9년 만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육체노동이라는 인간능력에 과연 한계를 설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페리클레스 본인이 총지휘를 맡았고 피디아스(Phidias)라는 조각가의 감독 아래 이크티누스(Ictinus)와 칼리크라테스(Callicrates)라는 두 건축가의 설계로 지어진 것이다. 아테나 여신의 상은 피디아 본인의 작품이다. 이 건물의 외부 치장은 BC 432년까지 계속되었다.

파르테논의 완성미에 관해서는 지금 그 디테일을 내가 논할 수 있는 계제가 아니다. 이 건물은 단지 건조물일 뿐 아니라,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예술양식의 정화라 할 수 있는 문화복합체다. 아테네에 지어진 건물과 예술품들은 대부분 불과 50여 년의 그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것은 아테네의 기술력과 노동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희랍세계 전체의 조각가, 석공, 화가, 건축가, 도공 등 온갖 예술가가 합심하여 이룩한 것이다. 이 위대한 예술이 불과 고전시대 전성기 50년 사이에 꽃을 피웠다는 이 사실이 말해주는 진리는 너무도 명백하다. 예술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성의 존중만이 그 걸작의 표현을 얻는다.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예술적 창진의 모태


▎파르테논 신전은 완전한 대칭을 이루기 위해 각 면들이 9대 4의 비율로 지어져 있다. 도리아식 기둥은 높이 3분의 1 부분이 불룩한 배흘림(엔타시스) 기법으로 사람의 착시현상을 이용해 전체적으로 더 자연스러운 느낌을 갖게 한다. / 사진·중앙포토
더구나 돌의 조각이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은 인간노동의 정성과 숙련과 예술적 감성의 응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모든 것이 플루타크가 평한 대로, ‘새로움의 개화(bloom of newness)’를 과시하는 그러한 창진의 과정 속에 융화되는 계기들은 페리클레스라는 탁월한 리더의 민주정신(democratic spirit)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설명될 길이 없다. 아테네의 민주야말로 아테네 예술의 창진(creative advance)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어느 미친 예술가가 강제로 끌려와 독재정권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그토록 발랄하고 다양한 걸작품을 생산해낼 수 있으랴!

파르테논만 해도 그 조성 연대와 예술가들의 이름이 확실히 전해오는 역사적 구체적 리얼리티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나는 이 파르테논을 197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별로 가본 적이 없었던 그 시절에 가보았다. 그때 아크로폴리스의 폐허 위에서 홀로 느낀 나의 감성은 나의 생애를 지배하는 어떤 영감의 구조로 남았다.

파르테논은 기원후 5세기까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피디아스의 거대한 금조각 아테네 여신상이 이방인의 우상으로 간주되어 파괴되고 기독교교회로 변모할 때까지 존속되었던 것이다. 7세기에는 일부분 기독교 교회로서의 구조변경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458년 터키가 이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면서, 2년 후 이 신전은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바뀌었고 남서 코너에 ‘알라 아크바르’를 외치는 미나레(minaret)가 세워졌다. 1687년 베니스공국 군대가 터키와 싸울 때, 이 건물의 중심부가 폭파되었다. 터키군대가 이 신전 안에 화약을 쌓아두었던 것이다. 1801~1803년 사이에 영국귀족 토마스 부르스(Thomas Bruce)와 로드 엘진(Lord Elgin, 엘진 경은 당시 오토만제국의 영국대사였다)이 터키 정부의 허락을 받아 폐허의 돌조각을 영국으로 운반해갔고, 1816년에 런던 영국박물관에 팔아 넘겼다(자기자신이 투입한 전체비용의 반값에).

나는 부서진 파르테논을 온전한 파르테논보다 더 사랑한다. 불완전한 기둥 사이로 투과되는 기운의 싱그러움이 모든 종교적 색조를 퇴색시키고 오로지 그 조각가와 예술가의 원시적 족적만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새벽에 올라가서 보는 싱그러움과 황혼에 물들여진 그 거대한 공간, 그 폐허에는 천지대자연의 조화된 질서가 끝없는 괘상(卦象)을 그리고 있다.

페리클레스의 전성시기는 펠 로폰네소스전쟁(BC 431~BC 404)이라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비극적 싸움으로 곧 쇠락하고 만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과두정치의 타락으로 역사의 장을 넘기고 만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의 궁극적 승자가 스파르타라고는 하지만, 이 전쟁은 영웅들의 휘브리스(hybris, 오만)가 아닌, 절정에 달한 국가들의 휘브리스가 모든 그리스세계 사람의 파멸을 몰고 온 사건이다. 스파르타에 의하여 아테네의 목이 떨어졌을 때, 그것은 희랍세계의 모든 문화의 꽃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전 희랍 세계가 마케도니아의 말발굽 아래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BC 323) 이전의 고전시대를 보통 헬레닉 에이지(Hellenic Age)라 하고, 그 이후를 헬레니스틱 에이지(Hellenistic Age)라 부른다. 전자는 폴리스의 시대라고 한다면 후자는 코스모폴리스의 시대다.

헬레니스틱 시대의 예술품들은 고전시대의 작품들을 변용한 것이고 매우 화려한 표현이 그 나름대로 유니크한 희랍 예술의 색채를 보전하고 있지만 창조성(creativity)이라는 의미에서는 고전시대에 못 미친다. 우리가 잘 아는 미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BC 150년경)나 사모트라케의 니케(Nike of Samothrace, BC 200년경), 바티칸 박물관의 라오쿤(Laocoon, BC 2세기)과 같은 작품이 모두 이 시기의 것이다. 사실 그 이후의 로마시대의 작품들은 모두 이 헬레니스틱 시대의 양식을 카피한 것이다. 그들의 고전시대에 대한 동경은 모두 헬레니스틱 시대의 표현을 통해서 연출된 것이다.

서구 예술의 2000여 년 지배한 그리스 예술형식


▎그리스의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올림픽 스타디움으로 이어지는 국도변에 마라톤의 기원이 된 페이디피데스의 청동상이 있다. 그는 실존했던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 사진·중앙포토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의 말대로, 고차원의 창조적 양식을 지향하는 불완전성은 답습된 저차원의 완벽성보다 훨씬 더 고등한 가치의 소산이다(There are in fact higher and lower perfections, and an imperfection aiming at a higher type stands above lower perfections). 이미 고전시대의 창조성은 헬레니스틱 에이지의 반복 속에 목이 조였다. 그 생명 없는 반복은 끊임없이 로마세계를 통해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다. 정치도 습관적 경건을 고수하는 고례만을 반복하였고, 철학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울타리를 넘어가지 않았고, 문학은 깊이를 상실했고, 과학은 의심되지 않는 전제로부터의 연역만을 정교하게 일삼았다. 모험의 우직함을 상실한 감성의 세련만이 서구예술의 2000여 년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19세기말 인상파의 혁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구예술은 희랍예술의 형식적 완벽성을 해탈하기 시작한다.

김승중(金承中)은 나의 맏딸이다. 나는 1972년에 고려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을 다니다가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석사과정)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중문학연구소 중국언어학 박사반 학생이었던 최영애(崔玲愛)를 만나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이듬해에 잠깐 귀국하여 이화대학교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1973년 1월 27일), 바로 그해 겨울에 김승중이 태어났다. 그때 우리는 모두 학위과정의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아내만 귀국하여 김승중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젖도 주지 못하고 갓난아기를 바로 나의 모친에게 맡긴 채 다시 대만으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했다. 승중이는 타이베이의 기운 속에서 생성되어 서울의 하늘 아래서 할머니의 가호를 받으며 자라났다.

나는 대만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 도쿄대학으로 다시 유학을 갔고, 치열하게 공부한 끝에 도쿄대학 문학부 중국철학과 대학원에 정규 학생으로 입학했다. 도쿄대학에 입학한 후 와세다대학 근처의 신쥬쿠쿠(新宿區) 토츠카마치(戶塚町)라는 곳에 2층짜리 테라스 하우스를 한 채 빌렸다. 아주 일본적인 작은 골목이 오순도순 뻗쳐있는 조용한 마치였다. 아내는 75년 가을, 대만대학 중문과에서 외국학생으로는 처음 중국어학 방면으로 박사논문을 완성하고 영예로운 학위를 획득했다. 그리고 서울로 가서 할머니 슬하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던 승중이를 데리고 내가 공부하고 있던 도쿄 집으로 합류했다. 그때 승중이는 두 돌이 채 되지 않았는데 매우 똘똘했다. 할머니가 승중이를 떼어 보내면서 무척 서운하여 우셨다고 했다.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졌나 보다 하고 승중이가 떠나간 공허감을 달래는데 근 1년 넘게 고통을 겪으셨다고 했다.

나는 승중이를 하네다공항에서 처음 보았는데 ‘아버지’라는 낯선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나의 어머니께서 초록색 영국 털실로 예쁘게 뜨개질하여 만든 옷을 입었고 빵모자까지 쓰고 있었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세 사람이 단란한 살림을 꾸려나가기에 도쿄는 너무도 아름답고 질서 있는, 매우 평화로운 곳이었다. 나는 생활하기에 충분한 장학금을 독일 에큐메니칼 재단으로부터 받았고, 또 일본 로타리장학금까지 받았기 때문에 유학생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독채 집을 세내어 꿈같은 초혼의 감미로움을 만끽했다. 회상해보면 인생의 모든 단계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또 아름다운 추억이 있지만 나의 삶의 모든 로맨스가 극대화되어 있었던 순결한 시기로서는 도쿄에서의 2년을 꼽을 수밖에 없다.

주말이면 승중이를 목마 태우고 도쿄의 모든 공원과 박물관을 다니곤 했던 추억은 항상 봄바람처럼 훈훈하게 나의 의식을 스친다. 그리고 나는 도쿄대학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고전학자로서의 모든 엄밀한 스칼라십의 기초를 굳건하게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승중이는 쿠야쿠쇼(신쥬쿠 구청)에서 직영하는, 집에서 가까운 보육원을 전액장학금으로 다녔는데, 보육원의 교육이 매우 훌륭했다. 선생님들의 인품과 교양이 진실로 탁월했다. 승중이는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고 일본노래를 100개 이상 암송하여 불렀다. 보육원의 하루가 노래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승중이의 무의식 속에는 일본어의 저류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내 딸 김승중 교수의 성장과정

승중이는 내가 하버드대학에 재학하고 있는 기간 동안에 하버드 구내에 위치하고 있는, 퍼블릭 스쿨이지만 아주 유서 깊은 명문으로 알려진 애거시즈 스쿨(Agassiz School)을 다녔다. 옥스포드 스트리트(Oxford Street) 변의 아주 고색창연한 아담한 건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초등학교였다. 승중이 동급반 학생으로 아주 절친한 친구 이름이 에탄 굴드(Ethan Gould)였는데, 바로 그 유명한 진화론의 대가 스테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의 아들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조깅하는 길에 그의 부인과 만나(꼭 같은 시간에 그녀도 나와 같은 코스를 뛰었다)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나는 그녀를 에탄의 엄마로만 알았지, 그 남편이 위대한 학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데보라 리(Deborah Lee)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매우 섬세하고 동양적인 감각이 있는 미녀였는데 아티스트라고 했다. 그때 굴드는 생물학과의 강사였고, 전혀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굴드를 사귀었더라면 그가 말하는 ‘펑츄에이티드 이퀼리브리엄’(punctuated equilibrium: 단속 평형설. 진화는 다윈이 생각했던 것처럼 일정한 속도로 서서히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 제이 굴드는 이 학설의 완성자로 평가받는다. 단속 평형설에 의하면 진화는 짧은 기간에 급격한 변화에 의해 야기되나 일단 그 변화가 완료되면 다시 안정된 상태가 장기간 유지된다-편집자)에 관하여 조기에 통찰을 얻었을지 모르겠다. 하여튼 승중이가 다닌 애거시즈 스쿨의 분위기가 하버드의 교수나 천재 학자들의 자녀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승중이는 애거시즈 프리스쿨(pre-school)부터 다녔는데, 1학년을 마칠 즈음 재미난 고사가 하나 발생했다. 승중이는 그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과외활동으로 짐내스틱스(gymnastics, 체조)를 선택했는데, 아크로바트(곡예)에 가까운 묘기를 보여줄 정도로 학습을 잘했다. 승중이는 그 학교 다니는 것을 몹시 사랑했다. 그런데 1학년을 마치었을 때, 담임선생이 승중이는 2학년을 다닐 필요가 없으니 3학년으로 월반시키라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승중이의 학습능력이 좋아 2학년을 하게 되면 지루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월반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까 교장실에 가서 신청하라는 것이다. 교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보니 고상하게 생긴 중년부인이 앉아있는데 매우 거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사정을 말한 즉,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학교업무상 예외를 허락할 수 없으니 그냥 2학년을 다니게 하라는 무뚝뚝한 대답뿐이었다. 잘라 말하는 품새가 더 이상의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자세였다. 나는 내 몰골에서 풍기는 동양인의 모습에 대하여 그녀가 인종차별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때만 해도 동양인은 극소수였고 미국은 충분히 개화되어 있질 않았다.

나는 다시 담임선생을 찾아가 상의를 했더니, 내일 모레 캠브리지 교육위원회의 카운슬(council) 열린다는 것이다. 캠브리지 퍼블릭 라이브러리(Cambridge Public Library) 옆에 있는 캠브리지 린지 앤 래틴 스쿨(Cambridge Rindge and Latin School)의 체육관에서 대회의가 있으니까 거기 가서 호소해보라는 것이다. 퍼블릭 스쿨이기 때문에 퍼블릭 카운슬의 의사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대회의장에 가서 말하는 것이 어색할 것 같아 내 딸의 교육에 관한 나의 근본철학과 소신을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 같은 명문을 밤새 집필하였다. A4 사이즈 종이에 두 장 가득 담길 내용이었는데, 미국과 같이 개인의 능력과 소망을 존중하는 자유주의 국가에서 담임선생의 권고에 의한 월반에 대한 요청이 이렇게 묵살되는 상황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전통에 위배되는 불행한 일이라고 호소하였고, 나는 토마스 제퍼슨의 문장까지 인용해가면서 나의 호소가 관철되기를 희망한다고 정중한 문투로 마감했다. 사실 나는 언제 어떻게 일어나서 이야기를 해야 할지를 몰랐다. 뭔가 공백이 있다 싶은 순간에 나는 일어나서 내 페이퍼를 읽었던 것이다. 내 목소리가 얼마나 낭랑했고, 또 나의 문장이 매우 심각한 고전투의 명문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저지하지 못했다(불행하게도 이 명문장은 이사통에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 승중이를 데리고 갔다.

낭독이 끝나자 바로 그 자리에서 승중의 월반은 결정이 났다. 교장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나에게 찾아와 바로 월반시켜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승중이는 애거시즈에서 4학년까지 다녔다. 떠날 때 승중에게 짐내스틱스를 가르쳐주었던 선생이 나에게 승중이는 정말 고집이 세면서도 사리가 밝은 아이라고 말하면서 매우 예언자적인 말을 했다: “노 원 캔 트램플 온 허(No one can trample on her).” 그 선생님은 페미니스트 같은 느낌을 주는 멋있는 여인이었는데, 승중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누구에게든지 짓밟힐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뜻으로 나에게 말한 것이다.

하늘의 감각으로 땅의 예술을 공부하다

승중이는 귀국하여 금란여고를 나왔고 서울대학교 천문학과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박창범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내가 어느 날 박 교수를 우리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 했는데, 나의 방대한 서재를 구경하면서, <한서> <후한서>의 선장본 책들을 보더니, 말로만 들어왔던 천문학 정보가 담겨 있는 고전을 직접 눈으로 보니까 가슴이 뛴다고 고백했다. 그때만 해도 박창범 교수는 고사료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의 저자로서 일반인에게도 천문학이라는 과학적 성과와 고문헌의 천문자료를 결합하여 고대사의 강역이나 사료들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데 많은 가설을 세운 학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사료에 대한 치밀한 검증이 없이 너무 쉽게 가설적 사유만으로(비록 그것이 수리적으로 입증된다 할지라도) 그 역사적 사태의 실재성을 단언하는 것은 위험성이 있기는 하나, 그의 연구의 성과는 학계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승중이가 프린스턴대학 천문학과에 들어가 천체물리학의 여러 분야 중, 우주론(cosmology)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박창범 교수의 지도와 추천의 힘이 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승중이는 프린스턴대학의 아스트로피직스(Astrophysics,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학위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논문제목은 ‘Clusters of Galaxies in the Sloan Digital Sky Survey’였다. 슬로안 디지털 스카이 서베이(SDSS)라는 것은 뉴멕시코의 아파치 포인트 관측소에 설치한 2.5m 너비의 광학망원경을 사용하여 다중필터 이미징과 스펙트로스코픽 레드쉬프트 서베이(spectroscopic redshift survey)를 행하는 천체관측 프로젝트다. 이 데이터 콜렉션은 2000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미징 데이터는 전천(全天)의 35% 이상의 범위를 관측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이 시설을 만드는 데 자금을 댄 알프레드 슬로안 재단(Alfred P. Sloan Foundation)에서 따온 것이다.

승중이의 논문은, 이 새로운 데이터방식이 기존의 천체 관측의 4배 정도의 면적을 커버하고 우주를 매우 깊고 넓게 관측할 수 있으므로, 그 많은 정보를 육안으로만 식별하는 작업이 한계가 있다는 전제 아래, 우주 은하단을 식별하는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든 자신의 선구자적 작업을 학문적으로 소개한 것이다.

승중이는 아인슈타인이 강론한 그 훌륭한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얻은 후, 발티모아의 죤스 홉킨스 대학의 천문학과에 박사과정 후 연구교수(post-doctoral research fellow)로서 좋은 직장을 구해 2년간 근무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하늘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공허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땅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 땅의 역사, 미술사를 공부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가 철학과 고전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나에게는 숨길 수 없는 천부적인 예술적인 재능이 있다. 나의 부인 최영애도 성운학(聲韻學)이라는 매우 딱딱한 학문을 평생 전업으로 삼았지만 본시 화가 지망생이었다. 이러한 핏줄의 영향 탓인지 우리 아이들에게도 숨길 수 없는 예술적 재능이 있다. 나는 세 자녀와 아내와 함께 세계의 어느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하나의 작품을 놓고 한없이 담론을 펼치는데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나는 승중에게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으면 누구나 전공하는 근현대미술사를 기웃거리지 말고, 아예 서구문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고대미술사를 전공해보라고 권유했다. 희랍 미술사는 우리나라에 제대로 전공하는 학도가 거의 없고, 또 세계적으로도 동양인으로서 그 방면에 성취가 큰 인물이 별로 없으니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고 했다. 하늘의 감각을 가지고 땅의 예술을 공부하는 것은 재미있을 것이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희랍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서 승중이가 먼저 도전한 곳이 버지니아대학의 미술 사학과 석사코스였다. 버지니아대학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토마스 제퍼슨에 의하여 1819년에 만들어진 유서 깊은 대학이래서 고전학에 대한 매우 깊은 존중이 있다. 희랍 철학과 예술 방면으로 매우 훌륭한 학자들이 포진되어 있는 것이다. 승중이는 이 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는 동안 훌륭한 교수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리스·로마에 관한 스칼라십이 수만 개가 되는 그 많은 데이터를 어떻게 통계학을 이용해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논구한 석사논문을 썼다. 승중은 버지니아대학에 있을 동안 많은 현지발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고고학의 생생한 지식을 얻었다. 승중은 곧 콜럼비아대학의 예술사고고학과의 박사과정에 풀 스칼라십을 얻어 들어갈 수 있었다. 제2의 박사반 인고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희랍미술사 연구에 영감 준 천체물리학적 감각


▎그리스의 매력을 만날 수 있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산토리니, ‘빛에 씻긴 섬’이라 불리며 파란 하늘과 하얀 건물의 조화가 아름답다. / 사진·중앙포토
승중이가 토론토대학의 희랍미술고고학 교수가 된 것은 본인의 실력도 출중했지만 행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미국의 일류대학에서 박사를 딴다고 해서 다 교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자리가 나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희랍미술고고학 방면이라는 것은 학생 수도 적으니만큼 교수자리가 전 세계에 손꼽을 만큼 적다. 그런데 토론토대학에서 2012년 겨울에 그 방면에 테뉴어 트랙(tenure track: 조교수로 채용된 뒤 일정 기간이 지나 심사에 통과하면 종신교수직을 얻을 수 있는 자리)의 교수 한 명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낸 것이다. 그 한 자리에 전 세계의 우수한 박사들이 눈독을 들이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런데 승중이는 당시 박사반 학생이었고 아직 논문도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하버드, 컬럼비아, 예일, 시카고, 버클리 등 유수 대학 출신의 쟁쟁한 박사들이 모두 지원서를 냈다.

승중이가 생각하기에도 그 자리에 지원한 사람들은 모두 학회에서 만난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승중이는 자신이 없다고 했다. 2012년 11월에 토론토에 집결하여 한 사람당 2일에 걸치는 집중심문, 토론, 공개 강의가 벌어지는데 승중이는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 지역을 강타하여 막대한 재산·인명피해를 내고 도시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승중의 인터뷰만 다음 해 다른 시기로 미루어졌던 것이다. 승중은 오히려 차별화될 수 있었고, 인터뷰에 새롭게 마음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그런데 더더욱 고마운 것은 컬럼비아대학의 스태프 7명이 모여 승중에게 모의 인터뷰 회합을 열어준 것이다. 그래서 승중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교수들의 질문에 응대할 수 있는 자세한 정보를 전달해주었다. 승중이는 완벽한 마음의 준비를 지니고 교수채용 인터뷰 강단에 설 수 있었다. 승중이는 완벽한 바이링구얼(bilingual, 2개국어 사용자)이라서 영어가 외국인 티가 나질 않는다. 이틀에 걸친 심사가 끝날 즈음, 학과장이 뉴욕보다 토론토가 살기가 더 좋다는 등 농담을 던지더라는 것이다. 교수채용이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접한 순간, 맨해튼의 늦은 오후, 승중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컬럼비아대학 교정을 올라가 선생님이 계신 연구실을 노크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선생과 학생이 같이 따스한 시선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에도 이러한 사제지정이 있다. 인간의 감정이란 동서고금을 통해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학의 교수임용 사건 하나가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을까? 한 진실한 학자를 만들어가는 교육체제가 아직도 미국에는 건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승중이의 컬럼비아대학 학위논문은 토론토대학의 교수생활을 시작하면서 완성한 것인데(2014년), 그 논지의 핵심이 이 잡지에 같이 실렸으므로 부연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승중의 논문제목은 [Concepts of Time and Temporality in the Visual Tradition of Ancient Greece ─고대 희랍의 시각 전통에 있어서 시간과 시간성의 개념들]이다.


▎미국이 한반도 배치를 원하는 ‘사드’는 탐지거리가 최대 2000㎞에 달하는 레이더 때문에 중국이 반대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천체물리학(Astrophysics)이라는 학문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간의 개념, 그 인식론적 층차에 관하여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그래서 승중이는 희랍미술사를 전공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추상적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뉴턴이 절대공간·절대시간을 말한 것은 매우 상식적인 얘기 같지만, 이미 시간·공간을 추상적인 주제로서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론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시간·공간의 개념은 칸트에 있어서 의식내부의 사건, 의식외적 사건이라는 인식론적 테제로 철학화되었고, 이 시·공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시공연속체로 발전하면서 무수한 철학적 변양을 일으켰다. 20세기야말로 시공에 대한 다양한 인식이 만개한 백화노방의 시기라 할 것이다. 승중이는 이러한 20세기의 인식론적 성과를 빌어 희랍인들의 생명론적 시간의 계기를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매우 잘 아는 말로서 <신약>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마가복음> 1:15에 예수의 말로서 다음과 같은 외침이 적혀있다. 이때는 세례 요한이 체포된 직후였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북한 어린이들이 지난 2월 22일 개성시내 도로변에 모여 놀이를 하고 있다. 개성공단은 지난 2월 11일 전면 가동 중단된 후 폐쇄된 상태다. / 사진·중앙포토
여기서 막상 “때가 찼다(The time is fulfilled)”라는 표현은 깊게 생각해보면 참으로 난해한 것이다. ‘때’가 마치 객관적인 물체처럼 대상화되어 있고 그것이 주격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인식의 속성이 아닌 것처럼. ‘때’를 물병에 비유한다면 때라는 물병에 물이 다 찼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여기서 ‘때’가 곧 승중이가 말하는 ‘카이로스(Kairos)’다. 크로노스가 양적인 개념이라면 이 카이로스는 질적인 개념이고, 보편적인 균일한 시간의 개념이 아닌 특정한 시점, 그것은 인간의 ‘삶의 시간’과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의 최대의 특징은 철저히 ‘현재화’된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때’는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가 임재하는 기회이며, 그것을 맞이하는 인간의 인식이 바뀌어야(메타노이아: 생각의 회전, ‘회개’라는 죄의식 개념은 오역이다)하는 시점이며, 좋은 뉴스(복음)를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시각이다.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崔水雲, 1824~1864) 선생은 1861년 남원(南原) 서쪽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수도할 때 다음과 같은 칼춤 노래(검결, 劍訣)를 지었다.

시호(時乎)! 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時乎)로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丈夫)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時乎)로다!

용천검(龍泉劍)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舞袖長衫) 떨쳐 입고

이칼저칼 넌줏 들어

호호망망(浩浩茫茫) 넓은 천지

일신(一身)으로 비껴 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 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日月)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舞袖長衫)

우주(宇宙)에 덮여있네

만고명장(萬古名將) 어데 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 무장사(無壯士)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身命) 좋을시고!


여기서 말하는 ‘시호 시호’의 ‘시(時)’가 바로 카이로스이다. 이 카이로스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때요, 만세(萬世)에 한 번 날까 말까 하는 장부에게 5만 년 만에 찾아온 카이로스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수운은 이러한 기개로서 조선의 근세 최대 규모의 혁명을 완수시켰다. 동학이 없이 우리는 조선민족의 근대성(modernity)을 말할 수 없다. 동학이 없이 3·1독립항쟁을 말할 수 없고, 3·1독립항쟁이 없이는 우리의 헌법 전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헌법전문이 무시되는 한 우리 민족에게 민주주의는 찾아오지 않는다. 일본민족이 메이지유신(1868~1912)을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 민족은 인내천의 근대적 동학사상을 완수했다. 그것이 비록 정치제도적인 결실을 당대에 못 맺었다 해도 그 사상에 깔려있는 만민평등적 휴머니즘과 인간 개개인의 존재성을 신과 동격으로 규정한 인내천의 존엄평등주의는 서구의 어떠한 민주사상의 인식론·존재론도 뛰어넘는다.

지금 우리는 수운의 우주적 기개를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때’다!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있네(칼춤을 추는 소매 적삼의 늘어진 천이 우주를 휘덮는다는 뜻). 만고명장 어데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나 장부를 당해낼 장사는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이다. 장부는 평화요 장사는 폭력을 상징한다).

지금 우리 민족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위기는 항상 기회였다. 그것은 만세일지 장부에게 찾아온 오만년지 카이로스였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 카이로스를 놓치기만 했다. 이제 우리는 그 ‘때’가 찼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때가 왔다! 조선의 민중이여! 생각(노이아)을 바꾸라(메타)! 복음을 받아들여라! 그리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신질서(바실레이아)가 도래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 우리의 문제는 야(野)의 문제도, 여(與)의 문제도 아니다. 한 개인의 정치적 권세나 안락이나 정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오직 ‘국운(國運)’ 전체의 문제이다. 국운이란 곧 국가 전체의 카이로스라는 의미이다. 왜 우리는 이 카이로스를 잡지 못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카이로스를 전관(全觀)할 수 있는 총체적 비전을 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우리가 이렇게도 결핍한 인간들이 되었는가? 왜 카이로스의 비전을 결하고 있는가? 그 이유 또한 매우 단순하다! 민족 전체가 가위에 짓눌려 있기 때문이다. 왜 가위에 눌렸는가? 그 이유 또한 매우 단순하다. 첫째는 일제 식민지를 거쳤기 때문이요(국체상실의 체험), 둘째는 6·25를 거쳤기 때문이다(동족의 상잔, 相殘). 첫째로 우리는 대일본(對日本) 굴종주의의 비속함을 배웠고, 둘째로 우리는 미국의 메시아니즘에 대한 환상을 배웠다. 전자는 자기배반의 역사를 만들었고, 후자는 맹목과 절대의 반 공주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 모두가 역사적 현실에 뼈저린 뿌리를 둔 것이나, 이 진흙 속에 머무르면 우리는 흑암의 미로만을 헤맬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 미로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몸부림치는 북한, 여유 가지고 조망해야

북한의 핵문제는 우리의 반공사상의 어리석음이 조장(助長)해온 것이요, 미국의 친일·반중적 아시아정책이 장조(長助) 해온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는 중국의 책임이 아니라, 그 책임소재를 밝히자면 오직 미국의 무지에 있는 것이다. 미국의 무지라는 것은 한민족에 대한 무시를 의미하는 것이요, 미·일공조를 통한 세계대축의 이득을 위해 중·러·한을 가지고 놀자는 천박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타 지역에서는(유럽·쿠바·중동·이란 등등) 근원적으로 냉전적 사고를 벗어나려고 하는 미국이 이 동아시아지역에서만은 철저히 냉전적 사고를 유지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냉전의 묘미를 지구상에서 싹 쓸어버리기에는 미국은 아직 냉전의 꿀맛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군사제국의 권위와 체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가상의 대적세력을 살려놓아야 한다.

생각해보라! 클린턴만 해도 임기 말년에 북한을 친히 방문하여 근원적인 화해를 성취하고자 했다. 북한의 문제가 지금 이렇게 대립국면으로만 치닫는 이유는 그 제1의 이유가 미국의 세계질서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 있는 것이요, 그러한 인식을 조장하는 것은 우리민족이 평화의 이니셔티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남북한이 화해와 양보의 미덕으로 쌓아 올린 공든 탑인 개성공단을 폐쇄하는가? 정치, 외교가 고작 그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게 막대한 출혈도 불사하는 용기를 가진 정부라면 왜 백악관에 찾아가서 카스트로를 응대하듯 보다 근원적인 대응책을 찾아 달라고 호소하고 세계인들의 평화지원을 호소하지 않는가? 내가 독방에 앉아 관념의 망상을 짓고 있는 것일까? 사드(THAAD)는 우리가 중국과 미국을 우리 편에 유리할 수 있도록 핸들링할 수 있는 카이로스의 카드이거늘, 어찌하여 그패를 까버리고 중국과 미국이 서로 협상하며 우리를 가지고 놀게 만드는가?

지금 우리 민족의 중대한 위기는 오직 우리민족 스스로의 무지가 만들고 있을 뿐이다. 북한을 대적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여쁜 마음으로 조망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가냘픈 생명이 자기보존과 자기인식을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그 가련한 모습을 어찌하여 막강한 상전으로 모시고만 있느뇨?

아~ 이 민족은 정녕코 또다시 멀어져만 가는 카이로스의 민 대머리 뒤통수만 쳐다볼 것이냐! 모두가 반성할 때다!

도올 김용옥 - 도올 김용옥은 우리시대의 문제의식을 다양한 학문 분야의 시각에서 천착해가면서 6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낸 철학자·의사·예술가·교육자다.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동서양의 고전을 공부한 후 오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국립대만대학 철학과에서 노자철학으로 석사, 일본 도쿄대학 중국철학과에서 명말청초의 사상가 왕 후우즈(王夫之, 1619~1692)의 우주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왕 후우즈의 <주역> 해석을 둘러싼 문제들을 동·서 고전철학의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하여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만 10년간의 유학생활을 통해 그는 황 똥메이(方東美), 후쿠나가 미쯔지(福永光司), 야마노이 유우(山井湧), 벤자민 슈왈츠(Benjamin I. Schwartz) 등 세계학계의 거장 밑에서 배움을 얻었다.

1982년 고려대 철학과 부교수로 부임해 1985년에는 정교수로 승진했고, 1986년 군사정권에 항거하여 양심선언을 발표하며 교수직을 떠났다. 그 뒤로 올해까지 30년간 타협 없는 학문의 길을 걸었다. 1999년 EBS 노자강의를 시작으로 KBS, MBC, SBS, EBS 등에서 행한 수백 회의 고전강의는 인문학의 대중소통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난 3월 6일부터는 JTBC에서 <차이나는 도올> 강연을 시작하며 방송에 복귀했다. 2014년 중국 옌벤대에서 객좌교수로 1년간 강의하며 얻은 새로운 식견과 통찰이 방송 강의의 테마다. 그 성과물인 <도올의 중국일기>도 마침 5권까지 나와 지식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스크랩]사마천에게 인간학을 배우다

Posted by 히키신
2016. 4. 15. 22:35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글쓴이 -천리향

 

사람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며 뛰어난 것은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사람은 갈대와 같은 연약한 존재이나 생각하는 것에 의하여 만물의 영장이

되었음은 이제는 진부(陳腐)한 내용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국민이 잘 살고 생각하는 국민이 더 많은 감동을 자아내며

오늘날 겨우  이 정도의 생각만으로도 이 정도의 문화생활을 가능하게 하는데

완전에 가까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누런 안경을 쓰면 세상이 누렇게 보이고 파란 안경을 쓰면 세상이 파랗게

보이는 것처럼 다채롭고 공정함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우리의 지평은 넓어지고 뜻은 온후해지며 정신은 더욱 정교하고 심화될 것이다.

그야말로 정신의 거인(巨人) 생각의 대인(大人)들이 즐비하여 세상은 사통팔달하고

여기가 무릉도원(武陵桃源)이고 유토피아임을 저절로 깨달을 것이다.

그때는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입장이

바뀌고 주관이 확고해지며 편견 증오 반목 대결 전쟁 등은 사라지고 생명 정의

화해, 용서 일치 등이 득세하고 행세할 것이다.

그것은 부품이나 소재산업이 발전해야 한국의 국제경쟁력이 확보되는 것처럼

우리 국민도 생각을 바로해야만이 우리의 지적성숙과 정치문화가 향상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국제사회에서의 인적 경쟁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지금으로부터 34 년 전 내 나이 20세 때에 읽은 저자의 이름은

잊었지만 「사기(史記)의 인간학(人間學)」이라는 책에서 사유세계 사유방법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책에 의하면 사마천(史馬遷)이 이상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그 생각들이 활달할 뿐만 아니라

기개가 높았다는 사실이다.

사기열전(史記列傳)의 사람들은 생각도 기술이고 경쟁력이라는 생각아래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나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관념적인 말의 성찬을 즐긴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찾아보았으며 사고(思考)를

증진시키며 이해의 폭을 넓히고 갈등을 줄였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총괄적 사고(總括的 사고) 양면적 사고(兩面的 思考)

우회적 사고(迂廻的 思考)의 따라 하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첫째 총괄적 사고란- 부분이나 단면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는 것이다.

저장의 개념이 아니라 흐름의 개념이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한 때의 흥망이나 성패(成敗)에 울고 웃고 했던고.

절(節)하나 문구(文句)하나에 치우쳐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렸고

원래의 취지를 무시했다.

종합하고 체계적으로 파악을 못하다보니 지식은 단편적이고 편견은 다반사요

행동에는 절제나 무게가 있을 수 없으며 임시변통이나 미봉책을 재주라 알고 있고

하루살이가 그 하루가 전부라고 알듯 우주의 묘리나 역사정신을 몰랐던 것이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짧은 지식과 좁은 시야를 탓하지 않고 균형 있는 시각 드넓은 시야를 비판한 것이

그동안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부분들의 모순을 극복하고 그것들의 연결을 통한 전체를 읽는 눈을 기르게 되면

"박사라는 학위는 대학이 주나 승부사는 인생이 주며 도사(道士)라는 학위는 역사가 준다"는

시정의 말이 정확함을 깨닫게 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파종자(播種者)라는

내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양면적 사고란-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 같이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 쪽이 올라가면 한 쪽이 내려오고 햇살이 강하면 그늘은 더욱 짙다.

길흉 화복 선악이 같이 하며 지고의 절대선도 없으며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위기는 기회이자, 오늘의 실패는 내일 성공의 예약이며  아! 아!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지 막을 수 있는 방패의 공존이 이 생각이다.

내 마음에는 천사와 악마가 있어 매일 나로 하여금 선택을 강요하게 하고

사물에는 한 성질뿐만 아니라 그에 대칭되는 성질도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희망도 덧없음을 보니 절망도 덧없을 것」이라는 헝가리 시인

페퇴피 샨도스의 생각에서는 양면적 생각의 절정(絶頂)을 보는 것이다.

이 생각을 가질 때에 황희(黃喜)정승의 두 종의 진술과 관련된 상반된 평결이

체득되는 것이다.

셋째 우회적 사고란- 급할수록 돌아가는 것이다.

시쳇말로 인식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말이다.

생각의 물구나무서기를 해보라는 것이다.

무리는 서두르고 생기고, 실패는 기다릴 줄 몰라서 초래하는 것이다.

왜 광야나 사막에서 종교가 생기고, 일명경인(一鳴驚人)이라고 한 번 울음에

삼년의 부진이 씻어지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견지에서 서 보면 항우 앞에 지푸라기 같아 던 유방이 천하를 얻은 까닭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우리가 어떤 생각의 여과기를 거치며 어떤 생각의 방직기를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 빛깔이 다르고 모양도 다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생각의 옹졸함에서 벗어나 일찍이 사마천이 터득한 생각을 익힌다면

우리도 신선이 되고 하느님의 성품에 다가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래야만 우리는 리처드 닉슨(R Nixon)이 1972년 중국 상하이를 방문하고

빌리 브란트(W Brandt) 가 무릎을 꿇으면서 동방정잭(Ostpolitlk)을 취하며

넬슨 만델라(Mandela))가 「용서와 화해」를 주창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옛날에는 맹자가 공자를 알아보는 길이었으며

장자가 노자를 알아주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또 탁문군(卓文君)과 사마샹여(史馬相如)가 만나 로맨스를 불태우며,

황진이가 화담(花潭)선생을 만나 사사(師事)할 수 있었던 소이이다.

그렇다면 지적 분화(知的分化)나 통찰력(洞察力)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완미(完美)하게 함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가져온 곳 : 
카페 >▣▶━Fighting 배금자 ━◀▣
|
글쓴이 : o가야o| 원글보기

[스크랩]몽골여행에 대하여

Posted by 히키신
2016. 4. 15. 22:33 etc

[ 몽골여행에 대하여 ]

 

1. 몽골여행은 언제 가장 좋은가?.

 

몽골여행의 가장 좋은 계절은 여름인 7~8월이다.
즉, 7월 중순 나담축제(7.11~7.13일)기간이 끝나고 8월중순까지 약 한달 정도이다

 이 기간은 한국의 휴가철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한국의 여름더위와 열대야 시기지만,

몽골은 한국의 초가을 날씨처럼 습도가 적은 시기이다.

초원은 가장 푸른색을 띠고 있고,

하늘도 가장 맑으므로 여행의 최적기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시기에는 몽골 최대 축제인 나담축제와

많은 관광객인 이 시기에 몰리기 때문에 항공권 구매하기가 쉽지 않다.

미리 여행계획을 세우시고

항공티켓을 3월~4월에 확보해야만 한다....
만일, 번잡한 이시기를 피하신다면 6월 또는 9월여행도 좋다. 

 < 사진 : 아르항가이 아이막 차강노르 >

 

 

2. 몽골여행은 페키지가 좋은가?. 아니면 자유여행이 좋은가?.

 

몽골여행에 가장 고민꺼리가 이문제이다.

몽골여행을 하고는 싶은데 혼자 여행하기는 걱정이고

팀을 만들어 여행을 하고자하나 팀만들기도 어렵다

그러나 몽골여행은 페키지든 자유여행이든 서로 장.단점이 있다.

 

내가 추천하고 싶은 여행방식은

소그룹의 3~5인정도의 자유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페키지 여행처럼 짜여진 코스, 서로 모르는 사람과의 서먹함은.

몽골 푸른초원에서 자유스러움이 적을것이다.

 

 < 사진 : 몽골 나담축제 부흐 씨름경기 >

 

자유여행의 준비는

몽골 현지에 있는 교민이나 여행업에 종사하는 한국인과 여행계획을 협의하여

현지에서는 차량, 가이드만 준비하고

한국에서는 항공권과, 여행준비물만 챙기면 된다.

 

 한국에서는 충분한 여행정보와 여행계획, 팀구성, 

현지에서는 차량+ 가이드+음식+숙박에 대한 준비가 있으면

충분히 페키지여행처럼 즐길 수 있는 몽골여행이 될 수 있다.  

 

 

 < 사진 : 남고비지역 바양작 >

 

3. 여행기간 및 여행코스는?.

 

몽골여행 기간은 단기일정과 장기일정으로 갈 수 있다.

몽골의 면적은 우리나라 남한의 15배, 한반도의 7.5배정도 크기이므로

단기일정으로 여행할 경우에는 몽골의 전체를 보기는 어렵다.

 

단기 일정(3~4일)으로 여행할 경우에는 수도 울란바타르 시내 관광과

수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뿐이다.

 

장기일정 중 일주일 가량으로 여행할 경우는

남고비 또는 홉스골 또는 왕복 2,000km이상 지역 중 한곳만 택하여 여행할 수 있다.

대부분 유럽권 여행자들은 1~2개월 동안 몽골 전체 지역을 여행하는 경우도 있으나

우리나라 대부분 여행자들은 일주일 정도 여행하는 경우가 많다.

 

  < 사진 : 남고비지역 옹고린 엘스 모래언덕 >

 

* 자세한 여행 추천코스는 다음 기회에 자료를 정리하여 올리겠습니다. *

 

  < 사진 : 나담축제 >

  

4. 몽골여행 경비와 몽골로 가는 방법

 

몽골여행에 소요되는 여행경비는 정확하게 어느정도 소요된다는 말은 못한다.

항공권만 가격이 있고

현지에서 소요되는 경비는

현지에서의 여행코스, 여행방식, 숙박, 음식등 

현지 상황에 따라 틀리기 때문이다.

 

매년 몽골의 경제상황에 따라 물가가 매년 오르고 있는 실정임.

 

몽골여행 경비에서 가장 중요하며 가장 많이 지출되는 경비는

자유여행기준으로 차량 임대비(기사포함), 유류비, 가이드비

숙박의 경우 호텔, 게스트하우스 및 게르 사용료

그리고 식대, 입장료 등이다.

 

 

몽골여행에서 경비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팀을 차량 1대정도 탐승가능 인원으로 구성하고,

숙박은 현지 게스트하우스나, 캠프등 저렴한 시설을 이용하고

음식은 현지에서 충분히 준비하여 여행을 하면서

직접 취사를 하면서 여행을 하면

많은 경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몽골로 입국하는 방법은

국제선 항공기를 이용하여 직접 들어 가는 방법과

제3국을 통한 육로로 입국하는 방법이 있다.

항공을 이용할 경우에는 인천공항에서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 까지

대한항공과 몽골항공이 운항하고 있으며, 소요시간은 3시간 30분(직항)이다.

 

기타 육로는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서 입국하는 방법이 있으나,

경비는 적은 반면, 소요기간이 길다(2~3일)

 

 

 

( 위 내용은 개인적인 여행경험을 바탕으로 적은 것입니다)

 

아래의 손바닥 모양을 누르시면 더 많은 정보를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푸른 몽골초원의 갈색 늑대
|
글쓴이 : Hairtai shuu ~| 원글보기

기 철학(스크랩)

Posted by 히키신
2016. 4. 15. 22:26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기 철학

緖論

 

 

1. 氣 範疇의 槪觀

 

1) 氣는 안개 또는 雲氣이다.

2) 氣는 浩然之氣와 精氣이다.

3) 氣는 元氣이다.

4) 氣는 無이기도 하고 有이기도 하다.

5) 氣는 識이 드러낸 境이다.

6) 氣는 導引法에서 말하는 神氣이다.

7) 氣는 太虛이다.

8) 氣는 電氣, 質點 또는 에테르이다.

 

2. 氣 範疇의 發展

 

1) 殷나라에서 春秋時代까지 氣는 雲氣.陰陽의 氣.沖氣였다.

2) 戰國時代에 氣는 浩然之氣와 精氣였다.

3) 秦漢時代에 氣는 元氣, 自然의 氣였다.

4) 魏晋南北朝時期에 氣는 有無의 氣였다.

5) 隋唐時期에 氣는 佛敎.道敎의 氣였다.

6) 兩宋 時期의 氣는 理의 氣였다.

7) 元明時期의 氣는 良知流行의 氣이다.

8) 明淸 交替期에는 氣는 絪縕의 本體 또는 實體였다.

9) 近代에 氣는 빛.電氣.質點이다.

 

3. 氣 範疇의 特徵

 

中國 氣 範疇는 다른 範疇와의 縱的.橫的 關聯 속에서 自體의 體系를 構成하고 그 自體으 特徵을 形成하였다.

氣는 客觀存在의 實體로서 西洋哲學에서 말하는 物質과 비슷하다.

西洋의 傳統哲學에서 말한 物質에는 몇 가지 特性이 있다.

① 物質槪念에는 延長性의 意味가 있다. 空間을 차지하고 있기때문에 形象이나 質量 等의 規程性을 갖는다.

② 物質槪念에는 不可入性의 意味가 있다.

③ 物質槪念에는 惰性, 즉 慣性이 있다.

中國傳統哲學에 나오는 氣는 物質과 마찬가지로 延長性을 가지고 있지만, 自身만의 特性을 가지고 있다.

① 中國 古代哲學者들은 氣體를 模型을 삼아 客觀存在를 標示하는 槪念인 物質로 삼았다.

② 氣와 物質은 存在形式에는 差異가 있다. 中國의 氣는 氣體를 模型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氣의 絪縕.聚散.振蕩 等의 運動形式을 構想하였다.

 

 

 

 

 

 

 

第 1 章 先秦時代

 

客體를 認識하는 過程에서 固定되어 있지 않고 모든 곳에 퍼져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認識하여 氣思想이 나오게 되었다.

氣範疇가 發生하고 形成되는 時期이다.

① 氣範疇의 基本 含意에 대해 初步的 規程이 이루어졌다.

일반 개념에서 자연과 사람 및 그 생각과 정신을 구성하는 공통 물질 원소로 추상화되었다.

② 제자 백가가 기범주에 대해 탐구하였다.

③ 기의 자연적 성질을 분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하늘 땅 사람이라는 체계 가운데에 놓고 전체 사유를 진행시켜 자연 사회 인간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법칙을 찾고 그것을 사회정치와 인생활동의 지도 원칙으로 삼았다.

 

1. 기 개념의 발생

 

갑골문,서주 금문,동주 금문 에서 기라는 글자가 나온다.

허 신의 설문해자에서 기는 운기이며 모양을 본뜬 문자하였다.

① 인온,취산하며 만물을 형성하는 기를 나타내는 쪽으로 확대되었으며 운기 말고도 연기,수기,풍기등의 순환 변화를 통해 기가 만물을 구성하는 공통의 근원적인 물질이라고 인식하였다.

② 사람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결을 나타내는 쪽으로 확대되었다.

③ 사람의 혈기를 나타내는 쪽으로 확대되었다.

④ 화기 용기 지기 골기 같은 사람의 도덕정신과 해 달 별 하늘 땅 산 시내 같은 자연기상을 나타내는 쪽으로 확대되었다.

 

2. 『좌전』과 『국어』의 기 범주

 

1) 육기설 - 『좌전』

육기(음양풍우회명)의 변화가 네 계절을 이루며 오행을 만든다고 생각하여 사람의 여섯가지 감정도 육기에서 나온다 하였다.

자연의 기의 운동 변화로 인체,사회,정치의 법칙을 찾아 현상을 해석하였다.

기의 함의와 그것의 사회, 인간 관계를 초보적으로 규정하였다.

2) 천지음양의 기 - 『국어』

음양의 기는 하늘과 땅,산과 시내,만물 가운데 들어 있으며 하늘과 땅,산과 시내,만물을 구성하는 정미한 근원적 물질이다.

일정한 방위와 질서를 가지고 운동변화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

질서를 잃으면 이상한 현상 발생한다.

 

3. 호연지기와 정기가 사물이 된다 - 유가

 

1) '혈기' 관념 - 공자

철학 범주로 쓰지는 않았다.

기가 심성과 관련된다는 사상이 후세에 영향을 주었다.

⑴ 기는 숨이다.

⑵ 기는 혈기이다.

⑶ 기는 말투이다.

⑷ 기는 태도이다.

2) 호연지기 - 맹자

호연지기는 몸 안에 담겨 있는데 끝 없이 넓고 크며 가장 굳세다. 사람들이 만일 호연지기를 정확하게 길러서 채우고 해치지 않는다면 전체 하늘과 땅사이에 가득찰 수 있다. 이같은 호연지기는 의와 도에 짝하지 못하면 곧 위축된다 - 자연계의 하늘과 땅의기이거나 사람 몸안의 음양의 기가 아니라 일종의 도덕정신이다. 공자의 혈기 관념을 심화시켜 유가 심성 학문의 기초를 이루었다.

3) '자연의 기' - 순자

순자는 기를 자연 만물과 사람을 이루는 공통의 근원 물질로 보았고 천지 만물의 운동변화가 음양 두기가 교감하는 변화에서 생긴다고 여겼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산을 하고 사회를 다스리며 기를 다스리고 마음을 기르는 것(治氣養心) 모두가 반드시 천지 음양의 기가 법칙을 따라야만 목적에 다다를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4) '정기가 사물이 된다' ( 精氣爲物 ) - 『역전』

기범주에 담긴 뜻을 정기로 명확히 규정,정기는 천지 만물과 사람을 이루는 정미한 근원 물질로 보았다. 역경을 통해 볼때 정기는 고정 불변의 존재가 아니며 음양의 상반상성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끊임 없이 운동 변화한다. 한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이 정기가 운동 변화하는 근본 법칙이다.

 

4. 沖氣와 음양의 기 - 도가

 

1) 충기 - 노자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짊어지고 양을 껴안고 있으며,충기로써 조화를 이룬다.

한대 사람들은 '하나'를 기로 해석했다.

도가 변화 생성하여 혼돈의 기가 나오고 기가 변화해서 음양의 기가 나오고 음양의 기가 변화하여 하늘 땅 사람이 나오고 나아가 만물이 생성 변화된다.만물은 모두 안에 음양 두기를 담고 있으며,음양 이기의 교감과 운동이 만물을 어울려 자라게 한다.

노자의 기는 '하나'이며 우주의 나뉘어 지지 않은 혼돈의 기이고 충기는 멈추지 않고 운동하고 있는 음양의 기로, 기라는 범주에 물질성과 운동성을 가진다. 노자 철학에서 기는 도가 변화하여 만물을 생성하는 중간 고리고 기범주는 도범주에 종속된다.

2) 음양의 기 - 장자

장자는 기를 도가 낳은 일종의 정미한 원시물질로 보고 그것이 하늘, 땅, 사람, 사물의 형체를 포함한 우주 만물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기는 천지 만물과 사람을 이루는 공통의 근원 물질이다. 또 장자는 기가 모여 사람이 되면 사람 몸 안에는 기를 담고 있게 되고, 이것이 사람의 신기 곧 사람의 정신세계가 된다고 보았다.

장자와 노자는 모두 기를 자기 철학의 최고 범주로 삼았으며 도를 기의 본체로 삼았다. 도는 천지보다 앞서 생겼고 기 또한 도에서 나왔다. 기는 만물을 변화 생성해내는 과정의 중간 고리에

해당하며 만물의 모양과 정신을 직접 만드는 물질 재료이다.

 

5. 정기 -『관자』

 

기범주에 담긴 뜻을 精氣라고 규정하고 정기에 음양 오행이 변화하는 특성과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고 정기가 운동하고 변화하는 법칙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몸을 닦도록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여러 학파의 사상을 두루 담고 있다.

1) 精은 氣의 精이다.

하나의 기가 능히 변화하는 것이 정이며, 정은 운동의 변화할 수 있는 정미한 기이다.

2) 음양의 기

음양이라는 상반상성하는 모순운동의 특성이며 그것이 음양의 기이다.

3) 오행의 기

정기의 운동 변화하는 특성을 또한 오행의 기라고 표현한다.

4) 나라를 편안히 다스리려면 "정기에 맞아야 한다"

5) "기는 몸에 가득찬 것이다"

 

 

선진시대의 기범주가 발생하고 형성되는 시기였다.

그 형성과 발전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① 기범주의 기본 함의에 대해 초보적인 규정이 이루어졌다.

② 선진의 제자백가는 기범주에 대해 탐구했는데, 그 가운데 도가.유가.관가가 세밀하다.

③ 선진 각 학파의 기론은 모두 기의 자연적 성질을 분석해내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제 2 장 진한시대

 

 

1. 생리의 기 - 『황제내경』

 

황제 내경은 선진 시기의 기론 사상을 의학에 응용하였으며 기를 사용하여 천지인의 구성과 운동 변화를 해석하였다. 특히 인체의 구성과 대사의 법칙, 질병의 발생 원인, 병리 기제와 진단치료,병을 치료하는 약물의 성능,보건 양생 등의 생리의 기를 핵심으로 하는 기론 사상을 형성하였다. 또한 의학이라는 각도에서 기를 논의하여 자연의 기, 생리의 기, 병사의 기, 약물의 기로 규정하여 인체의 복잡한 생명운동과 질병현상에 따라 광범위하게 기의 구체적인 표현 형태를 분석하였으며 음양의 기가 대립 교감 운동하는 것을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삼투하며 포함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2. 우주가 기를 낳는다 - 『회남자』

 

기가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정미한 원시물질이며, 기는 본체인 도에 의해 낳아진다고 보았다. 기는 무시 유시 유유 의 과정을 거쳐 천지 만물을 변화 생성한다고 하여 기가 만물을 생성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묘사하려고 시도하였다.

회남자에서는 조화를 기의 운동에 내재된 가장 큰 영향으로 보아 기와 음양이 조화하는 법칙으로 천지인과 사회를 하나의 전체로 연결시키고 이것으로 자연,사회와 인류가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운동하며 발전하는 공통적인 기초와 보편적인 법칙으로 삼았다.

회남자는 도 기 물 이라는 선진시대 도가의 우주 생성관을 계승하였다.

 

3. 음양 오행의 기 - 동중서

 

동중서가 말하는 기는 주로 천지 음양이 조화를 이룬 기를 가리킨다.

음양 조화를 이룬 기는 원기라고도 부르며,그것을 만물과 인류를 낳는 근원 물질이다. 천지 음양의 기는 원기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형식이며 음양의 기는 본래 합일된 것이라고 하였다.

동중서는 양은 존귀하고 음은 비천하다고 하였으며, 하늘의 음양의 기 또는 인간의 음양의 기를 막론하고 그 운행하고 변화하는 모든 추세는 중화에 도달하여야 한다고 하여 음양 중화의 법칙이 양생 수신과 국가 통치에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동중서의 사상은 유가를 바탕으로 백가를 종합한 것으로 천인 감응설의 이론 아래 기를 하늘이 상벌을 시행하고 의지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생각하여 참위적인 성격이 짙다.

 

4. 원기 - 양웅 장형 왕부

 

1) 원기음양 - 양웅

양웅은 기란 현에 의해 생산된 근원 물질로 여겼다.

현은 온갖 것을 발생시키는 무형무상의 근원으로 원기를 낳고 음양을 펼친다고 하였다

2) 원기 - 장형

장형은 현으로 기를 논하였으며 현이 기를 낳고 기는 천지만물을 낳는다는 사상을 제시하였다.

3) 원기는 도의 부림이다 - 왕부

왕부는 도를 최고의 범주로 보아 기는 도에서 생산된 원기이며 원기의 운동 변화는 도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기는 도의 부림이다'라는 사상을 내놓았다.

 

5. 원기는 변역한다 - 위서

 

위서에서는 우주의 최초 본원을 원기가 아니고 태역이라고 보았다.

대저 형이 있는 것은 형이 없는 것에서 태어난다. 太易이 있으며 太初가 있고 太始가 있고 太素가 있다. 태역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기이고, 태초는 기의 시작이며,태시는 형의 시작이고, 태소는 질의 시작이다.

기는 형질이 갖추어져 있으나 아직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渾淪이라고 한다. 혼륜이란 만물이 서로 뒤섞여 이루어져 아직 서로 분리된 것은 아니어서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고, 좇아도 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역이라고 한다.

위서에서는 원기 변역으로써 기를 논하고 또 이것에 의거하여 역경 괘효의 구조와 의의를 분명히 해석하였는데, 이것은 역전의 기론에 대한 중요한 발전이다. 그것과 함께 거기에서 세워 놓은 태역 태초 태시 태소 만물의 우주 발생 모형은 역시 장형의 태시 태소 만물의 형에 비해 더욱 완전한 것이다.

 

6. 음양 오행의 기 - 백호통

 

백호통에서 기를 논한 핵심은 음양 오행의 기 및 그것과 인간의 성정 도덕의 관계를 논술하는데 있다.

기는 우주만물,인류 및, 그 정신도덕을 구성하는 근원 물질로 음양 오행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그것의 운동변화에 서로 다른 특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 백호통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태역 태초 태시 태소 만물의 순서로 우주 만물이 생성된다는 사상을 해석하면서, 그것을 고쳐 태초 태시 태소 만물 의 네 단계로 우주만물이 생성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즉 백호통에서는 기는 처음부터 우주의 가운데에 존재하며, 교역변화를 거쳐 천지 만물을 낳는다고 보아 태역의 단계를 없앴다.

 

7. 자연의 기 - 왕충

 

왕충은 자연 사회 인간의 심성 도덕의 각 방면에서 기범주의 함의를 규정하였다.

원기는 스스로 존재하며, 천지 만물과 인간의 도덕 정신을 낳고 인간의 심성과 운명을 결정하는데 바로 이것이 우주 만물의 본원이라고 왕충은 생각하였다. 아울러 기를 최고 범주로 보아 元氣自然論의 철학체계를 세웠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은 원기에서 생산되어 원기가 운동하는 법칙의 지배를 받으므로 일체의 자연 현상은 모두 하늘이나 신의 의도적인 작위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게 발생한 것이어서 인간이 생각하고 행위하는 것과 상호 감응하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왕충은 중국철학사에서 기를 최고 범주로 삼아 철학 사상의 체계를 세운 첫번째 철학자이다.

 

8. 태평의 기 - 태평경

 

태평경의 기론 범주는 선진 도가의 기범주와 기론 사상을 이어 받았으나, 태평경에서는 동중서 왕충등이 말한 원기를 흡수하여 노장의 기를 대체하고 원기로 기를 해석하였으며, 회남자, 동중서, 왕충의 음양 중화의 사상을 흡수하여 태평의 기 사상을 내놓았으며, 이사상이 도교 사상의 중요한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발전적이다.

 

 

진한시대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① 진한시기철학자의 기에 대한 인식은 한걸음 깊이 들어갔고,원기의 개념을 제시하여 원기는 바로 기의 시작이라 보았으며, 기를 만물의 본원으로 삼는 사유의 길을 열었다. 동한시대의 왕충은 원기자연론을 철학체계를 세웠다.

② 진한시기에 사회가 통일되어 각 학파의 기론은 국가의 통일을 옹호하여 음양의 기의 중화와 태평을 중요하다고 보았다.

③ 진한시기 각학파의 철학은 기를 천지인 전체 체계속에 놓고 인식하여 지역 사회 인생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이런 이유로 원기와 사회 인생의 관계를 특별히 중시하였고, 원기의 운동 법칙을 심성 수양과 국가와 백성을 다스리는 법칙으로 규정하였다.

④ 진한시기의 우주 본원에 대한 연구는 두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하나는 선진 시기의 도 기 사물(인간)의 보형을 발전시켜 태역 태초 태시 태소 만물의 우주 발생 모형을 제시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선진 시기의 순자 관자의 기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으로, 왕충을 대표로 원기를 우주 만물의 본원을 삼는 사상을 제시한 것이다.

 

 

제 3 장 위진 남북조 시대

 

1.유와 무로 기를 논하다 - 현학

 

1) 혜강 왕필 상수 양천

음양이란 그 기를 말한다.

性氣는 천리의 스스로 그러함이다

사람의 장수와 요절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에 달려 있다

기를 머금고 신을 응집하면 늙지 않고 장수한다.

기는 스스로 그렇게 쌓여 있다.

2) 기는 스스로 有이고 본래 無가 아니다 - 곽상

곽상은 기는 본래 존재하는 것으로 무가 근본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기는 시작하지도 끝나지도 않고 무한히 변화하나 기의 변화는 일정한 법칙의 제약을 받아 분수를 넘지 못한다고 보았다. 또 자연의 바른 기를 받은 것이 성인이고 오묘한 기는 양생의 정수라고 하였다.

 

2. 至無는 形氣의 근본이다 - 열자와 장담

 

열자 장담의 주에서는 지무를 온갖 변화의 종주이며 형기의 주인인 것으로 보았다. 장담은 곽상의 사상을 받아 기가 끊임 없이 순환 변화한다고 보았다. 또 기는 천지를 구성하는 물질의 본질을 가리키며 음양은 기의 두가지 상반된 성질로 보았고, 유자나무가 회수를 건너면 탱자로 변하는 것의 예로 기와 성의 상관 관계를 말하고 있으며, 기가 모이면 형체가 존재하고 기가 흩어지면 형체가 없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3. 만물은 기를 따라 태어난다 - 도교

 

1) 사람은 기 가운데 있다 - 갈홍

갈홍의 철학은 玄道를 근본으로 하는데 현이란 스스로 그러함(自然)의 시조이고 온갖 변화의 큰 마루이다. 현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를 운행하고 보존해야 하므로 갈홍의 기는 현도의 논리적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된다. 갈홍은 玄은 우주와 천지의 신비한 본체이므로 사람 몸은우주의 기 안에 존재하고 기도 사람 몸 안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또 그는 음양의 기를 조절하는 것이 장생의 중요한 고리라고 보아 그의 기범주는 寶精行氣 의 기공태식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그는 기를 생명의 근원으로 보았고 기를 오로지 하고 부드러움을 다하여 천리를 보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기를 생명 물질의 기초로, 리는 생명의 자연 법칙이라는 뜻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2) 도홍경

도홍경은 천지가 하나의 기가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기범주를 도교 양생의 길로 끌어 들여 양생 연명록을 지어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4. 유교와 도교의 기범주에 대한 흡수와 개조

- 불교

 

불교 철학은 마음과 대상이 모두 공이라고 주장하므로 본래 세계의 객관 존재를 반영하는 물질 범주인 기가 없다. 그러나 중국의 불교 학자들은 삼교간의 논쟁과 융합과정에서 기범주를 흡수하고 개조하면서 부분적으로 기범주를 받아 들였다. 남조시대 혜원은 유교와 도교학자 들이 인생은 하나의 기를 타고 나며 기가 있으면 신도 존재하고 기가 없어지면 신도 없어진다는 논점에 반대하며 비판하여 정신적 존재는 나고 죽지 않으며 약간의 변화에도 드러나면서도 소멸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선지는 기를 영구불변의 정신실체로 바꾸고 神明한 성질을 기에 부가하여 기에 생멸이 있음을 부정하고 영혼불멸을 선양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는 유교와 도교의 기범주를 섞어 흡수와 개조하여, 우주의 구성물질에서 관조 방법이나 참선수련의 입정공부로 기범주의 함의가 풍부해지고 발전되었다.

 

 

한대에 비한 발전된 것으로는

① 한대의 원기론은 양천,곽상,갈홍 등의 논술에서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② 열자는 기의 동태적인 기능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켜 기를 변화 발전의 무한 과정으로 인식하였다.

③ 불교는 기범주에 대하여 많이 발휘하지 않고 유교와 도교와의 논변 중에서 기와 원기 범주를 연용하였고, 또한 불교의 관상 방법이나 입선 공부 안으로 혼합해 들여와 불교화의 방향에 따라 기범주를 진전 발전시켰다.

 

 

제 4 장 수당시대

 

 

1. 境으로 기를 해석한다 - 불교

 

1) 識이 드러낸 境으로 기를 해석하다 - 종밀

종밀은 원기는 지각도 없고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있고 없음도 아니라고 보아 원기에서 만물이 생성된다는 유가와 도교의 설을 비판하였다. 즉 모두 원기에서 생성되었다고 하면 지각이 없는 기에서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지각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비판한 것이다. 종밀은 기가 허공중의 큰 바람(大風)이라고 생각하여 고대 인도의 불교 철학과 통하는 점이 있다. 또 도교의 이른바 세계에는 하나의 발단이 있어 무로부터 유에 이른다는 말은 틀린 것이고, 세계는 혼돈스러운 일기 이전에 이미 수만 차례의 성주괴공의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心과 境은 모두 空이라는 대승불교의 진실한 이치(大乘實理) 로 도교의 원기설을 비판하고 경으로 기를 해석하였다. 즉 원기는 제 8 식이 변화하여 드러내는 대상계(境界)로 근본은 마음이고 마음이 대상을 낳고 마음과 대상이 합하여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된다고 하였다. 또 습기를 끊어 없애는 것이 부처가 되는데 중요하다고 하였는데 이때 습기는 장애 번뇌 를 뜻한다.

2) 법림 지의 법장 언종

법림은 도교의 관점에서, 하늘 땅 인간의 근본은 기인데 그 안에 지존무상한 道神이 있다고 하는 모순을 비판했다.

지의는 기범주를 불교수행 이론에 끌어들여 음식과 잠을 조절하여 神氣를 깨끗이 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며 행동이 거칠면 氣息이 따라 거칠어 진다고 하는 등 기범주를 불교화 하였다.

법장은 기식에 의존하지 않고 호흡을 조정하고 잡념을 제거하여 정신을 고도로 집중하는 것으로 선정의 기본 공부로 삼았다.

언종은 기가 이름과 형상이 있는 것이기에 불교의 불가사의하며 언어로 표현해 낼 수 없는 최고의 진리를 다 탐구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2. 道引神氣 - 도교

 

1) 신기를 도인하여 늙음을 막고 수명을 연장시킨다 - 성현영

성현영은 위로는 장자 곽상 을 잇고 도교 불교의 사상을 혼합하였다.

그는 기가 만물을 낳는 근원이라고 보았고 유가 사상을 계승하여 성인은 음양의 빼어난 기운을 타고 났다고 하였다. 또 신기를 이끌어 들여 늙지도 생명도 연장시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성현영은 도는 근원이고 기는 도에서 생기는 것으로 기는 또 생물의 근원이라 보았다. 기가 응결되어 형체를 이루며, 형 질 기는 서로를 낳고 기는 음양으로 나뉘고 음양은 기를 퍼뜨려 만물을 변화 생성한다.

여기에서의 기의 중요한 함의는 기가 만물을 변화 생성하는 근원이며, 물질적 실질이고,음양 속성의 상호작용,발생 변화의 과정이다.

2) 운급칠첨

운급칠첨에서는 원기는 만물을 생성하는 본체로 성이 하나(一性)인데 나뉘어 음과 양 두체(二體)가 된다고 하였다.

원기가 만물을 생성하는 것에 대하여 원기론서에서는 기의 청탁 운동으로 말미암는 다고 하였다.

혼돈에 앞서 太無가 텅빈 채로 있었고 혼돈이 시작할 때 太和가 그 곳에 붙었다. 적막하고 텅비어 精氣神 셋이 하나로 합하여 元이 되고(三一合元), 여섯이 하나로 합하여 기가 되어(六一合氣) 형상이 없고 아득하니 이를 太易이라 한다.

원기는 형체는 없으나 (형체가 있는 것으로 )점점 자라는데 그것을 太初라 부른다. 형기는 질이 있으나 (질 없는 것으로 ) 다시 복귀하는데 이를 太極이라 부른다.

질이 변하여 기가 생기지만 기는 형체로 갈리지 않고 계란처럼 胚를 형성하는데 기가 원만하여 형체가 갖추어진 것을 太一이라 한다.

원기는 처음에는 맑아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된다. 원기는 나중에는 혼탁하여 아래로 깔려 땅이 된다.태무의 도가 여기에서 생긴다.

도는 이미 생명도 없고 (無生) 스스로 그러함의 근본이므로 이름지어 부를 수 없다. 이에 자연이라는 것이 도의 부모요 기의 근본임을 알 수 있다.

또 원기는 생명의 근본으로 두 신장 사이에서 운동하는 기로,오장육부, 열두 경맥의 근본이고 호흡을 장악하고 삼초를 관장하는 핵심적인 것이라 하였다.

운급칠첨의 기의 함의는 주로 만물의 본체,생명의 본원,생명의 정화, 장수의 도술등이 된다. 그것은 원기를 도 (태극 일)에 종속시키면서, 천지 만물을 생성하는 본원, 인간생명의 근원, 장생익수의 관건이 원기를 회복하고 도기를 보존하는 동시에 약물로써 보충하거나 기타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운동과 결합시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운급칠첨에서는 기와 도,심의 관계에 대한 논술에서 혹은 도를 근본으로 삼고 기가 도에 종속되거나 , 혹은 심을 근본으로 삼아 도가 심에 종속되거니 , 혹은 도와 기를 서로 같다는 등 모순되는 곳이 없지 않다.

 

3. 和氣를 타고나 正性과 합치한다 - 유가

 

1) 화기를 타고나 정성과 합치한다 - 유종원

유종원은 먼 옛날 하늘과 땅이 형성되기 이전에 오직 원기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원기는 저절로 존재하고 의식이 없으며 잘한 일에는 상을 주고 잘 못한 일에는 벌을 주는 행위도 없다고 보았다.또 그는 윤리 도덕의 명에서 자연으로부터 품부받은 기를 말했고, 도가의 삶과 죽음은 기의 모임과 흩어짐이란 학설을 받다 들이면서도 도가의 도인복기,복식등의 도술에 비판적이었다.

2) 왕통 한유 유우석

하늘은 원기를 통솔한다.

하늘은 精氣를 偉人에게 부여한다

원기 음양이 인간을 낳았는데 인간은 원기음양을 해롭게 한다

 

 

수당시기의 유학자들을 도가의 원기사상을 계승하였으며, 기를 윤리도덕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인간이 타고난 기를 다루었다.

종밀을 대표로 하는 불교학자들은 심식이 드러낸 경으로 기를 해석했고, 성형영을 대표로 하는 도교학자들은 생명의 근원과 양생도술로 기를 해석하였다.

 

 

제 5 장 북송시대

 

 

1. 기가 만물을 낳는다 - 이구 왕안석

 

1) 음양이 합하여져서 오행을 낳는다 - 이구

이구는 元과 氣를 서로 결합하여 원기가 우주의 시원, 곧 만물의 시작이자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구는 기를 음과 양 두기로 나눠 음양 두기가 상호 작용하고 결합함으로써 오행과 만물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구는 음양의 기가 오행과 만물을 낳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實有 이고 기에 형체가 없는 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또 무인 것으로, 기의 두가지 측면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 원기는 도의 본체이다 - 왕안석

왕안석 철학의 최고 범주는 도이나 도와 기가 나뉠 수 없게 연관되어 있다.

그는 사물을 낳는 것은 기라고 생각하였고,기를 원기와 충기로 나눠, 원기는 도의 본체이며 충기는 도의 작용으로 여겼다. 그의 원기는 도의 본체가 된다는 사상은 원기와 도는 같으며 똑같이 우주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원기가 만물을 낳는 과정은, 원기에서 충기가 낳아지고 충기가 가지고 있는 음양 대립의 속성은 원기로부터 근원하며, 충기의 음양변화로 말미암아 오행과 만물을 낳기에 이른다.

오행으로부터 만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립하는 '짝'의 요소가 존재하며, 이 때문에 만물의 변화를 추동한다.그의 철학체계 속에서 도의 본체란 원기이며 그것은 운동하지 않는다.

 

2. 태허가 곧 기이다 - 장재

 

장재는 북송시기 기일원론 철학의 집대성자이며 기를 우주의 본체로 삼는 철학을 내놓았다. 그는 형체가 없는 태허는 기의 본래 상태로 기는 우주 만물과 그 운동변화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다. 기가 모여 형체를 이루면 사물이 되고 기가 흩어져서 형체가 허물어지면 근원으로 돌아가 태허로 되돌아가니, 태허는 기의 다른 이름이고, 태허의 무형과 만물의 유형은 상호전화한다고 하였다. 그는 허가 기를 낳는다는 관점은 도가의 무에서 유가 생겨난다는 이론으로 이를 비판하였다.여기서 그의 기일원론적 경향을 뚜렷이 볼 수 있다. 그는 '기의 변화로부터 도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여 도는 물질적 기가 운동 변화하는 과정으로, 기의 모이고 흩어짐의 변화는 비록 여러 방식이 있지만 각종 변화하는 가운데서 모두 질서가 있어서 제멋대로 하지 않는 조리 곧 법칙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理라고 보았다. 또 그는 기가 모여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이 유이고, 기가 흩어져 아직 모이지 않은 것이 무라고 하여 유와 무가 기의 두종류의 속성이라고 하였다. 그는 만물이 서로 같지 않는 것을 기에 강유 청탁 완속의 차이가 있음으로 보았고, 기에는 음양이 있다는 이론을 내놓아 기의 음양대립의 속성으로 물질세계는 음과 양 두 기의 상호작용 하에서 끊임 없이 운동 변화하는 것을 강조하여 사물이 운동할 수 있는 근원을 이러한 사물 내부의 모순성으로 보았다.

그는 기 위에 다시 태극을 두어 본원으로 삼는 것을 반대하고 태극이란 범주는 태허에 해당하는 본연상태의 기라고 하였고, 음양 두 기의 상호 감응과 굴신 변화는 영원하여 그침이 없으며 이러한 변화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데 사람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까닭에 이를 신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그는 음양의 변화 중 급격한 것은 變이고 점진적인 것은 化라 하여 이것이 상호 전화한다고 생각하였고, 음양이 대립하면서 상호 감응하는데 감응에 같음이나 다름이나 기뻐함이나 두려워함으로 감응하는 등 다양한 방식이 있어 이것으로 끊임없는 물질세계의 운동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3 리는 근본이고 기는 운동변화한다

- 이정 (정호,정이)

 

이정의 철학체계에 있어서 리는 우주의 본체이자 최고 범주이며,기는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로서 기의 변화 과정 중에서 만물을 생성한다. 그렇지만 음과 양 두기의 운동 변화와 만물의 생성은 그 근원이 기 자체에 있지 않고 기 위에 존재하는 리에 있어서, 기는 리에 종속되는 까닭에 리를 그 존재의 근원으로 삼는다. 비록 이정은 리가 근본이고 기는 운동변화한다 (리본기화) 는 이론 체계 속에서 장재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 기를 말한 형식을 흡수는 하였지만, 사물이 흩어진 후에 그 기는 소멸되고 말아 다시 본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정은 기를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로 보아 기가 만물을 생성한 뒤에 기화의 형식은 사라지며, 그것에 이어 형화, 곧 형질이 있는 사물이 발생하는 변화가 나타나게 되므로 형화는 기화의 바탕 위에 생겨난다 보았고 음양이 사라지고 자람에 있어 기는 같지 않으나 리는 일정하다고 보아 기가 모이고 흩어짐이 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정은 '리가 있으면 기가 있고, 기가 있으면 수가 있다. 귀신을 행하는 것은 수이다. 수는 기의 작용이다.'고 했고 나아가 리와 기의 관계를 형이상과 형이하로 규정지었다.

 

 

제 6 장 남송시대

 

 

1. 기는 성에 근본한다 - 호굉 장식

 

호굉은 성이 우주의 본체이고 기는 성에 종속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철학의 특징은 성을 최고 범주로 상정하는 것으로 기의 유행 변화가 만물을 생성하지만 그 배후에는 그것을 주재하는 성이 있어 기화의 과정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였다. 기화를 통해 만물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상이한 사물은 상이한 성을 가지게 되지만 만물은 모두 하나의 본원의 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이 만물의 주재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장식은 스승 호굉의 사상을 계승하여 성 본체는 하나이고 사물은 다양하며, 만물은 모두 본체인 성에 통일되고 본체인 성은 유행의 과정을 통해 만물로 발현된다고 보았다. 기와 성의 관계에 대해 그는 성은 체이고 기는 용이며 성과 기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2. 우주의 본원으로서의 원기 - 양만리

 

그는 태극을 만물을 초월하는 정신적 본체로 보는 주돈이의 사상을 부정하고 '원기가 혼돈한 상태에 있어서 음양이 분화되지 않은 것을 태극이라 한다'고 보아 태극을 리가 아니라 기로 보아 당시의 리학자들과 구분된다.

그는 원기를 본원으로 우주 발생관을 천명했다

태극은 一氣의 태초 상태이다. 일기는 二氣의 조상이며, 이기는 오행의 어머니다. 이기가 분화되어 순순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건과 곤이다. 이기가 흩어져 잡된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 진손감리간태이다. 건은 천이고 곤은 지이다.진손은 목이고 감은 수이다. 이는 화이고 간은 토이며,태는 금이다. 또 그는 태극은 기의 처음,곧 음양이 분화되지 않았을 때의 혼돈한 상태의 기이며, 음양은 일기가 분화된 기이고, 도는 음양의 영원하고 끊임 없는 운동변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또 도가 사물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사물이 있어야만 도가 부착될 곳이 있게 되며, 그렇지 않으면 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3. 리가 근본이고 기는 말단이다 - 주희

 

주희는 송대 리학의 집대성자로 장재의 기본리화론을 흡수하고 개조한 기초 위에서 이정의 리본기화론을 계승 발전시켜 우주의 본체로서의 리와 만물을 구성하는 재료로서의 기라는 리본기말론을 제시하였다.

주희는 기가 우주에 충만해 있어서 모든 사물 속에 침투해 있으며 인간과 만물은 모두 기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생각하였고 기 가운데에는 상호 대립하고 상호 작용하는 음기와 양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음과 양 두 기의 상호 감응이 곧 사물이 생성되는 원인으로 보았다. 그는 취산을 통해 기를 설명하는 장재의 관점을 흡수하였으나 기가 흩어지면 다시 태허로 돌아가며, 태허의 기가 모여 만물을 생성한다는 장재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가 흩어져 사물이 소멸된 후에는 기도 곧 소멸된다고 보았다. 또 그는 기에는 취산이 있으나 리는 취산이 없다고 말하였다.

주희는 호연지기와 혈기의 관계를 설명하여 호연지기는 단지 혈기의 기일 따름이므로 양자를 두개의 기로 분리해서는 안되며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 몸 가운데 충만할 수 있는 것은 이 기 때문이며 단지 점차 의를 집적하고 충만하게 되었을 때 하늘을 우러르나 땅을 내려보나 부끄러움이 없게 되면 그 기가 곧 호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희는 리와 기의 관계에 대해 우주의 본원이라는 각도에서 볼 때 리가 먼저 존재하고 그 이후에 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고, 만물의 품부라는 측면에서 보면 기가 존재한 이후에 리가 존재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때의 리는 기가 많으면 리도 많고 기가 적으면 리도 적다고 하여 주로 사물의 법칙을 뜻한다. 또 리기는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이미 리가 있으면 곧 기가 있고, 이미 기가 있으면 리가 또 기 가운데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주희는 '리와 기는 본래 선후를 말할 수 없다'고 하여 리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말하였다.

'리가 존재하면 반드시 기가 존재하니 나누어 발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리이고 모든 것이 기이다. 어떤 것이 리가 아니고 어떤 것이 기가 아니던가' 라 하였고 '사물을 말하면 기과 리가 모두 그 가운데 존재한다'라 하여 리기의 불리를 강조하였다.

리기의 본말에 관해 리는 형이상이라 형질이 없고 기는 형이하이라 형질이 있다고 하였고, 리는 근본이고 기는 말단(리본기말)이라는 설을 내세워 리는 형이상의 도이고 사물을 생성하는 근본이고, 기는 형이하의 그릇으로 사물을 생성하는 도구로 보았다. 그러므로 리는 본체와 본원의 뜻을 지니고, 기는 작용 파생 현상 이라는 의미를 지녀 주희 철학에서 리가 최고의 범주가 되며 기는 리에 종속되는 물질적 범주가 된다.

그는 장재를 비판하여, 형이하의 기를 형이상의 본체로 생각했다고 하였고, 육구연을 비판하여, 기를 말하지 않고 기품의 사물을 심 속의 리로 보아 형이상과 형이하의 구별을 혼동하였다 하였고, 맹자를 비판하여,성만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4. 기는 심에서 나온다 - 여조겸

 

여조겸은 '천하가 모두 하나의 기일 뿐이다'라는 장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일원의 기가 만물에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만물은 그것을 통해 생장 양육된다'고 하였다. 여조겸은 생성에 있어서 기의 작용을 중시하기는 하였지만 주자학과 육학을 조화시킴과 동시에 심을 우주의 본원으로 파악하는 사상을 제시하여 심이 기를 통솔하고 기는 심에 종속된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우주가 곧 나의 마음이며, 나의 마음은 곧 우주다'라는 육구연의 우주관과 대단히 유사하나 육구연은 기를 거의 얘기하지 않았고 심을 많이 논했으며 여조겸은 심과 기의 관계를 함께 논하였다.

 

 

제 7 장 원명시대

 

 

1. 기는 음양이다 - 허형

 

허형의 철학에서 기범주의 기본적 함의는 음양의 기로 그것의 상호 전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날 때 기를 부여 받은 것이 고르지 않아 부귀 귀천 등의 차이가 있다고 하였으며, 그의 기품론은 음양 오행의 기의 청탁 선악이 서로 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품성과 도덕은 전화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철학의 최고 범주는 도로, 도가 태극과 기에 앞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도는 태극을 낳고 태극은 기를 낳고 기는 음양오행으로 나뉘어지고 음양오행의 기는 왕성하게 작용하고 교감하여 천지인 만물을 낳는다.

정주는 도를 곧 태극으로 여겼으나 허형은 도를 태극 보다 앞서 존재한다고 보았고, 기는 도가 만물을 낳는 과정 중의 고리로 본체가 아니라 본 것은 일치한다.

 

2. 기가 있으면 리가 있다 - 오징

 

오징은 기는 천지가 처음으로 생겨날 때 존재하던 물질이며 천지 만물은 혼돈의 기로부터 생성된다고 생각하였다. 천지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이 혼돈 상태의 기를 太一이라고 하였으며 기가 천지 만물을 이루는데, 가볍고 맑은 밖의 부분은 하늘을 구성하고 무겁고 탁한 안의 부분은

땅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였다. 하늘의 기는 땅 밖을 둘러 싸는데 기의 선회 운동 때문에 빠르고 힘이 있기 때문에 땅이 비로소 하늘 가운데 떠서 실려 있으면서 추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氣旋說 은 앞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이다. 또 그는 '리는 형상이 없고 변화하는 것은 음양의 기이다. 음양이 변화할 수 있는 까닭은 리이다. 음양의 변화 밖에 하나의 존재가 있어서 리가 되고 변화의 본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리가 앞서고 기가 뒤따른다는 이론이 잘못인 까닭은 이러한 관점이 리를 기 밖으로 분리시켜 리가 놓일 곳을 잃어 버리고 붙일 곳이 없는 존재로 변하게 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징은 보았다. 그는 기가 있으면 리가 있고 리기는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지만 그의 철학은 여전히 리를 최고 범주로 생각하였다.

진실 되어 거짓됨이 없는 것을 誠이라 하고, 전체가 저절로 그러한 것을 天이라 하며, 조화를 주재하는 것을 帝라 하고, 신묘하게 작용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을 神이라 하며, 만물에게 부여한 것을 命이라 하고, 사물이 받아서 태어나는 것을 性이라 하며, 이 성을 얻는 것을 德이라 하고, 마음에 갖춘 것을 仁이라 하며, 천지만물을 통일하고 모은 것을 태극이라 한다. 도 리 성 천 제 신 명 성 덕 인 태극은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

 

3. 마음은 形氣에 존재한다 - 담약수

 

그는 기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무한한 객관적인 존재이고, 기로 말미암아 구성된 천 지 인 사물은 소멸될 수 있지만, 우주의 본체인 기는 사그라져 없어질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도와 기,리와 기는 합일되며, 성과 기도 일체라고 생각하였다. 기를 버리고 도를 어디서 찾겠는가? 왜냐하면 기와 도는 한 몸이다. 기의 적절하고 올바름(中正)을 얻은 것이 성이고 리이며 도이다. 그러므로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하지만, 음이나 양에 치우친 것은 도가 아니다. 기를 무시하고 성 도를 구하는 것을, 나는 다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안다. 기가 곧 도이다. 氣는 그 현상세계(器)이고, 도는 그 이치(理)이다. 천지의 근원은 현상세계와 원리가 하나이다. 옛날에 성을 말할 때 리와 기를 대립시켜 말한 적이 없었다. 리와 기를 대립시켜 말한 것은 송나라 유학자들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는 두가지 단서이다. 역의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에서 도는 음양의 적절함이다. '형이상자를 도라고 하고, 형이하자를 기라고 한다' 에서 器는 곧 氣이다. 氣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형이하라고 말하고,그 적절함은 도이다. 적절함은 어떻게 형체를 갖겠는가? 그러므로 형이상이라고 말한다. 형이상과 형이하가 한 몸이다. 리와 기를 대립시켜 말한다면 두 몸이다.

이와 같이 담약수는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여 들어 맞는 것이 바로 도여서 음양 가운데에 곧 도가 있는 것이지, 반드시 음양 밖에서 이른 바 '음하고 양하게 하는 까닭'인 본체의 도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또 그는 '우주는 한 마음일 뿐이다' 라는 명제를 제시했을 뿐 아니라 '우주는 하나의 기일 뿐이다' 라는 관점도 제시하여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점이 있다.

 

4. 기는 양지가 운행하는 것이다(良知流行)

- 왕수인

 

왕수인은 명대 심학의 집대성자이다.

왕수인은 양지설을 제시하여 마음의 양지로써 기를 논하는데 그는 '원기, 원정, 원신'은 삼위일체이며 모두 양지의 구현이라고 생각하여 기는 양지가 운행한 것이라는 사상을 이룩했다. 양지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으로 신묘하게 작용하는 측면에서 신이라 하고, 운행하는 측면에서 기라 하고,엉겨 뭉치는 측면에서 정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왕수인은 자연의 천지의 기 음양의 기를 주체화 하여 사람 마음의 양지의 표현으로 변화시키고 사람의 원기 정신으로 만들었다. 또 왕수인은 원기에는 음양이 있지만 음양은 두 기가 아니라 하나의 기 즉 사람의 양지에서 통일된 기라고 생각하였다. 양지는 본래 혼연일체여서 음과 양, 안과 밖의 구분이 없고 음과 양이 각각 하나의 사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가 屈伸盈縮하고 운동변화하는 특징을 말한 것이다. 또 그는 원기는 양지가 운행하는 것이므로 뜻은 기를 통솔하고 뜻이 이르면 기가 뒤따른다고 보았다. 그는 마음의 본체를 성으로 보았고 기의 영묘함이 사람의 성을 형성하므로 성은 곧 기라고 하였다. 또 리는 비록 다양하게 나뉘어지지만 모두 내 마음에 갖추어져 있으며 리란 기의 조리이고 기는 리의 작용이라 하였다.

 

5. 기는 바로 태허이다 - 위교

 

위교는 장재의 기론을 계승하였다. 그는 태허가 곧 기라는 선명한 기본체론 사상을 가지고 기의 특징이 첫째는 알짜배기(精英)와 찌꺼기(渣滓)의 구분이 있으며, 둘째는 음양 오행의 구분이 있는 것이라 하였다. 맑고 가벼운 알짜배기의 기는 하늘을 이루고 사람에 있어서는 오장이 되고, 무겁고 탁한 찌꺼기의 기는 땅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육체를 이룬다. 사람의 마음의 도덕 정신은 마음의 알짜배기 중에서도 가장 알짜배기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천지 음양 강유의 리와 인의예지신의 오상의 덕을 가지게 된다.

기의 찌꺼기가 엉겨 형체가 되고, 그 알짜배기는 신이 된다.

위교는 리를 '마땅히 이와 같은 것' 곧 기가 갖추고 있는 조리 법칙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리는 비록 다양하게 나누어지지만, 궁극적으로 말하면 다만 하나의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면 이곳에서는 마땅히 이와 같고, 저곳에서는 마땅히 저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하나의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 천만개의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

위교는 도 태극을 기 속에 갖추어진 리를 가리키는 속성범주의 말로 보았고 마음은 기에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기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또 그는 성이란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사람이 날 때부터 기의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리가 있으니, 사람의 성이다' 라고 하였다.

성은 生과 心으로 이루어지는데, 사람이 태어나면서 이 리를 마음에 갖추는 것을 성이라고 말한다.

리는 하늘에서 元亨利貞이 되고 사람에서는 인의예지가 되는데 이때문에 사람의 본성에는 인의예지가 있다

 

6. 기는 조화의 핵심이다 - 왕정상

 

왕정상은 명대 중기의 유명한 기본체론 사상가로 원기위에 도와 리는 없고 도와 리는 기에 종속되어 기 위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정신적인 본체는 없다고 하였다. 그는 기는 천지가 형성되기 전에 존재하는데 형질이 있는 만물의 본체이며, 하나의 기가 왕성하게 운동하여 만물을 낳는다고 하여 장재를 계승하고 뒤로 왕부지의 기본체론을 열었다. 나아가 '기는 조화의 핵심이니 어찌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기는 사물의 생성과 조작 변화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다. 기가 근본이라는 기초 위에 기의 변화를 논하여 기본체론과 기의 변화를 결합시킨 것은 정주가 다만 기의 변화만을 얘기하고 기의 근본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또 그는 기는 형체가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며 기에는 음양이 있고 동정할 수 있다고 하여 장재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그는 태극은 천지가 나뉘어지기 전의 太始의 혼돈 상태의 맑고 빈 기라고 보아 주희가 태극은 리를 태극으로 간주한 것을 비판하였다. 성과 기의 관계에 있어 성은 기에서 생겨나며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성은 기질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성에는 반드시 악이 있다고 함으로써 성은 다만 선할 뿐 악이 없다는 관점을 비판하였다.

그는 기와 신에 관해 '어느 기이든 변화하지 않겠으며, 어느 변화든 신묘하지 않겠는가? 어찌 신령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또한 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기 속에 정밀하고 세밀한 부분이 신과 영명함을 낳는다고 생각하였다. 신과 기의 관계는 기가 본체이고 신은 작용이라고 하여 기일원론적 관점을 견지하였다.

신은 반드시 형기를 빌려서 존재하는 것이다. 형기가 없으면 신은 사라진다. 가령 있다 하더라도 아직 흩어지지 않은 기를 타서 드러나는 것이다.

 

7. 기는 천지 만물의 조상이다 - 오정한

 

오정한은 명대 중기의 주기론적 객체리철학자이다.

그는 왕정상의 뒤를 이어 기는 음양의 기로 본래 혼돈상태이지만 그것을 음양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기가 동정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장재의 '태허는 곧 기'라는 사상을 이어 받았다. 그는 역전에 근거하여 기가 천지 만물을 낳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태극이 처음으로 음양을 낳아, 양의 가볍고 맑은 것은 위로 떠서 하늘이 되고, 음의 무겁고 탁한 것은 아래로 뭉치어 땅이 된다. 이것이 양의이다.

대개 하나의 기가 나누어진 것이다.

음양이 나누어져 천지가 되면, 천지 또한 각각 스스로 음양이 되어 하늘은 양을 주로 하고, 하늘의 양은 땅의 양과 합하여 태양이 된다.땅은 음을 주로 하고, 땅의 음은 하늘의 양과 합하여 소음이 되고, 땅의 음은 하늘의 음과 짝하여 태음이 된다. 이것이 사상이다. 사상이 두루 퍼지어, 소양은 봄이 되고, 태양은 여름이 되고,소음은 가을이 되고,태음은 겨울이 된다. 나아가고 물러서고 사그라들고 커지고 따뜻하고 서늘하고 춥고 더움이 순환 변화하여 일주하여 다시 시작하여 사시를 형성한다. 사시가 번갈아 자극하여 뭉치고 모여 절정에 이르지만 형질이 비로소 갖추어지면서, 소양은 목이 되고,태양은 화가 되고, 소음은 금이 되고, 태음은 수가 된다. 목화금수 가 생기어 형질이 땅에서 갖추어지고 사람과 사물이 생겨나고 많은 종류가 번성하고 삼라만상의 세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기 음양 사상은 기가 아직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의 단계지만 목화금수와 동식물이나 사람과 사물은 이미 형질을 이룬 단계이다.

오정한은 기가 곧 도이고 도가 곧 기인 것으로 보았는데, 도는 천지 만물의 법칙으로 곧 하늘의 법칙은 음과 양이고,땅의 법칙은 강과 유이고, 사람의 법칙은 인과 의인데, 하늘과 땅과 사람이 따라야 할 규칙이기 때문에 도라고 일컫고, 도와 리는 같이 기의 속성이고, 기의 운동변화의 규칙이다.

그는 태극을 기로 보았고, 리는 기의 속성이며 기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성이란 마음에서 생겨나며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람이 태어날 때 기를 얻어서 낳고 낳는 것의 근본으로 삼는데 순수정일한 것을 성이라 하였다.

마음이란 성이 생겨나고 있는 곳이라 하였다.

 

8. 기는 형체를 변화시키고 기로 돌아 간다

- 송응성

 

송응성은 명말 청초의 유명한 과학자로 천공개물을 저술하였다.

그는 '천지에 가득찬 것은 모두 기이다' 라고 하였으며, 기는 혼돈 미분의 세밀한 물질이며, 운동변화하여 기의 운동변화를 기화라 하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세가지 특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기를 원기라 하였다.

그는 원기는 기체 와 같지 않아 원기는 일종의 '스스로 가지는 티끌'로서 일반적인 존재이지만, 기의 본체는 '날리는 재와 흙의 티끌'인 구체적인 사물이라 하여, 만물의 본체인 원기는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사유를 통해 인식하고 묘사할 수 있고, 구체적인 사물인 공기는 감각 기관을 통해 그 존재를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원기는 맑음과 탁함,정밀함과 엉성함, 두터움과 얇음의 구분이 없어 '뼈나 살, 풀이나 나무는 같은 기의 부류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기가 변화하여 형체가 되고 형체는 기로 돌아 간다는 장재 왕정상 오정한의 주기론적 객체리철학을 이어 받았다.

송응성은 과학적인 관찰에 근거하여 리를 사물의 규칙으로 환원시키고, 태극을 자연현상으로 해석하며, 리 태극은 모두 기로부터 생겨난 물체의 속성이라고 하였다.

 

 

원명시대 기범주와 기론 사상은 송대 기론의 계승일 뿐만 아니라 비판 경향을 명확히 드러냈다.

① 허형은 기의 음양 청탁이 서로 전화한다는 사상을 명확이 제시하고, 그것으로 품부 받은 기가 고르지 않다는데서 형성된 사람의 智愚善惡도 상호 전화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② 오징 등이 여전히 '리는 기를 주재한다'는 것을 주장하였지만 '리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고','기가 있으면 리가 있고','리 밖에 기가 없고', '기 밖에 리도 없다'는 것을 더 강조하여 리는 앞서고 기는 뒤따른다는 송대 철학의 사상을 뛰어넘었다.

③ 위교 왕정상 오정한 송응성 등은 송대 장재의 기본론을 계승 발전시켜 기를 최고의 범주로 삼아 기본론 철학을 명대의 강력한 사조로 형성시켰으며 송응성은 기를 물질 일반에 더욱 접근하도록 하였다.



제 8 장 명청 교체기

 

 

1. 천지에 가득찬 것은 모두 기이다 - 유종주

 

그는 '천지에 가득찬 것은 모두 기이다' 라고 하여 기를 천지와 만물의 존재 근거로 삼았다.

천지를 꽉 채운 것은 一氣일 따름이다. 기가 있으면 數가 있고, 수가 있으면 象이 있으며, 상이 있으면 名이 있고, 명이 있으면 物이 있으며, 물이 있으면 性이 있고, 성이 있으면 道가 있다. 그러므로 도는 뒤에 나오는 것이다. 또 객관 사물 뿐 아니라 주체인 인간 자신도 기로써 존재 근거를 삼는다.

천지 사이에 가득찬 것은 일기일 따름이다. 기가 모여서 형체가 있게 되고,형체가 실려서 실질을 갖게 되며, 실질이 갖추어져 몸체가 있게 되고, 몸체가 기능을 발휘하여 감각기관이 갖추어지며, 감각기관이 활동하여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그는 우주만물 모두를 기로 규정하여 허가 곧 기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사이에 유이고 무이니 이를 太虛라고 하고, 태극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또 기는 生生의 근본이다. 기의 굴신 변화를 표현한 것이 음양 대립의 운동으로 더욱 진행하여 가장 원초적인 다섯 종의 원초적 물질적 원질이 되고 이 원질이 각종 각양의 다양한 조합을 거쳐서 천지만물을 생성해낸다. 이 과정 중에 정신의 주재 작용은 없으며 신령의 개입도 없이 모두 일기의 저절로 그렇게 되는 변화이다.

그는 리는 기의 리일 뿐이라 하여 리가 기에 앞서 있지 않고 기 밖에 있지 않음을 말하였고, 리의 主宰는 사물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기에 내재한 자체 제약이라 하였다. 또 그는 기와 성이 하나로 통합되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았고 성이 '기질 가운데 의리를 집어서 가리킨' 본질 규정으로 보았다.

인의예지는 인성의 항구한 내용이고, 기질은 가변적이고 습의 영향을 직접 받는다. 기질의 규정은 바로 성과 습의 차이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며, 후천적으로 획득한 성품을 인간의 본성으로 여기는 사태를 피하려는 것이다.

장재가 성을 기질지성과 의리지성으로 나눈 뒤로 이것이 송명리학의 인성론의 기초가 되었는데 유종주는 형이상자인 리가 형이하자인 기에 깃드는 것과 같이 의리지성은 기질지성 가운데 깃들어 있어 기질을 떠나서 따로 하나의 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근본에서 논하면 의리는 곧 기질의 본성에 대한 규정이라 보았다. 또 유종주는 명말의 심을 중심으로 하는 주관적 리학파의 대표로 기를 심의 제약 아래 있는 것으로 한정한다. 심은 기의 순수 지선한 主宰로 천지 사이에 가득찬 것은 다만 이 음양의 이치일 뿐이니 모두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고 하였다.

 

2. 천지 사이에 一氣가 있을 뿐이다 - 황종희

 

황종희는 천지를 통하고 고금에 걸쳐서 일기일 따름이라고 하였으며 기의 유일성은 기의 표현 형식이 유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 사이에 각종 형식으로 표현되는 사물은 본질적으로 모두 일기의 변화에 의한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어떤 초월적 존재나 허망하여 실재하지 않는 존재를 반대하여 리와 태극의 구별은 기에 대한 어떤 성질의 규정이지 독립적 실체는 아니라 하였다. 그는 기를 만물을 만드는 본원으로 최고의 존재로 보았고 기는 스스로 자체를 주재하여 이른바 태극의 동정이 음양을 생성한다는 것을 기 밖에 다시 음양의 본체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 자체의 상생 곧 자체 운동의 결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태극이 음양을 낳는다'는 문장을 '기 스스로 상생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는 기에 두 종류가 있어 하나는 지각 없는 혼탁한 기이고 또 하나는 지각 있는 청명한 기로 기를 정신성을 가진 것으로 규정했다.

그는 기가 우주 사이의 유일한 물질이고 리는 기의 속성임을 강조하여 리의 실체성을 부정하여 '이른바 리라는 것은 기가 스스로 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명칭이 성립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그는 리는 기 가운데 主宰라고도 하여 속성을 실체 위에 둔 문제점이 있다. 또 기와 리는 동일 사물의 다른 측면이고 , 한 사물이면서 두 이름이며, 두 사물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승강하는 기는 반드시 법칙이 있으니 기는 리를 포용할 수 있으나 승강하는 법칙은 기화 운동에 딸린 것이니 리가 기를 내포할 수 없어서 리는 다만 기의 속성이고 리와 기는 대등하지 않다는 리와 기의 본질적 차이를 무시한 것이다.

그는 심은 기의 산물이나 일반적 기와 같지 않고 지각이 있는 靈氣로 보았다.

그는 성은 기를 떠날 수 없고 기가 다르면 성도 다르다고 하여 인간과 만물은 기는 같으나 리에 차이가 있다는 주희의 관점과 틀리다. 또 성은 기질의 본성이니 곧 인의예지의 리이고 기질지성은 곧 성의 치우친 것으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고 보았다.

 

3. 氣火는 한몸이다 - 방이지

 

방이지는 기의 시간 좌표인 無始 와 공간 좌표인 兩間이 모두 기라고 하여 허공과 실체가 모두 기임을 강조할 뿐 아니라 소리 빛 등과 같은 모든 현상도 기의 표현이라고 여겼다. 그는 기에 만물 존재의 근거 본체라는 의미와 만물을 구성하는 질료라는 의미를 두었고 나아가 허공과 형체 있는 물체를 기의 서로 다른 표현형식으로 보았다. 또 기는 탄생과 소멸이 없는 최고의 존재로 보았으며 모든 사물의 탄생 발전 소멸은 기의 일시적인 표현형식으로 보았다. 그러나 방이지는 禪으로 도피한 후 萬法唯識 一切唯心의 이론으로 나아갔다.

그는 음양과 기의 관계에 대해 음양은 규정된 질이 없어 특정한 다른 상황 아래서 음양 분별은 기의 서로 다른 특성을 규정한다고 하여 음양이 기에 대한 종속성을 말하였다. 또 기와 형은 본원적 의미에서 기는 형체를 결정하고 생성하며, 기와 형체는 같은 사물의 다른 표현 양식이기 때문에 이 둘은 대립 통일의 관계를 갖는다고 보았다. 기와 리의 관계에 관해서는 초기에는 리가 사물의 법칙으로 기 가운데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불교에 빠진 후 리를 객관 정신을 초월하는 것으로 보아 기를 결정하는 주재고 본질이라 보았다. 또한 이것이 설명을 위한 개념일 뿐으로 모두 잊어도 된다고 했다.

그는 기는 음양을 가지고 있으나 기 가운데 음양의 지위와 작용은 대등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천도는 양기로써 중심을 삼고, 사람의 신체도 양기로써 중심을 삼는다'고 하였고, 氣라는 글자가 无와 火를 따라 화가 기의 고유한 속성이며 나아가 화가 곧 기라고 하였다. 그는 화는 氣火一體 로 건조한 기이고 참된 양기이고,만물의 본원이며,운동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은 그의 家學 에서 연유된 바가 크다.

 

4. 기는 인온의 본체이다 - 왕부지

 

전통 철학의 기범주 발전사에서 왕부지는 종합 정리자이다.

그는 태허는 곧 우주 공간이며,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 아니라 음양의 기로 꽉 차 있으며 다른 사물이 없다고 하였다. 또 기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유형 무형의 구별이 있을 뿐 유무의 구분은 없다고 하였으며,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변화는 그 자체의 내부 교환이며, 결코 양의 증감을 일으키지는 않아, 기가 한 사물을 생성해도 본체는 결코 그 때문에 감소하지 않는다는 물질 불멸 사상을 내어 놓았다.

만약 완전히 흩어져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이 태극의 혼돈 속에서 어느 곳이 소멸하여 되돌아가는 것을 흡수하는 장소가 되겠는가? 또 조화는 날로 새로운 기를 만들고 옛 기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또한 이 태허 속 어디에서 이 무진장한 저장물을 얻어 끊임 없이 소멸해 가면서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그는 기를 만물의 질료이며 본질로 보았고, 기를 사용하여 복잡한 사회 현상을 설명할 때, 사회 발전은 세가지 요소 즉 氣 理 勢 로써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기 리 세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공통의 사회 심리나 가치 경향 속에 깃들어 있는 어떤 객관적 필연성이다.

또 왕부지는 기의 성질과 상태 기능에 대해서도 논술하였다.

기는 음양 모순의 통일체로 음양은 재능과 쓰임이 틀리며, 음양은 서로 포함하고, 음양은 교감하고 상호 작용하며, 음이 양일 수도 있고 양이 음일 수도 있어 양자는 서로 전화한다고 하였다. 음양은 음양이 극도로 왕성하여 대립면으로 전화할 수 있고, 음양이 제각기 자체 내의 다른 측면에 의해 음은 양이 될 수 있고 양은 음이 될 수 있는 것이라 보았다. 이와 같이 음양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고 실체의 속성인 것을 왕부지는 '음양은 일정한 本性은 있으나 일정한 실질(定質)은 없다'고 표현했다.

또 그는 음양의 모순 대립은 기의 운동 변화를 형성하니 운동은 기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하였다. 동정은 기의 기미라고 하였고, 음양은 동정을 가지고 있으며 동정은 음양을 드러낸다고 하여 동정은 음양의 본질적 속성으로, 음양은 동정에 의하지 않고서도 있는 것이지만, 동정에 의해 나누어지고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태극이 동정하여 음양을 생성한다'는 관점이 음양과 동정의 관계를 뒤집어 놓았다고 비판하였다. 또 동정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동하면서 정하고 정하면서 동한다고 하여 동정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실질적으로 각기 상대방의 요소와 메커니즘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또 정은 고요한 움직임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정지는 다만 잠시적인 상황이며 운동의 특수한 형식으로 동은 절대적인 것이며 정은 상대적인 것이라 하였다.

또 그는 취산 통일로 기의 존재 형식을 규정하였다.

모임과 흩어짐(聚散)은 기의 서로 다른 존재 형식이라 하였다. 모인 기는 형체를 가지고 불투과성을 가진다. 기의 모이고 흩어짐은 기 자체의 음양 모순에 의해 결정되어 '그 가운데에서 양의 성질은 흩어지고, 음의 성질은 모인다. 음은 양을 안고 모이며,양은 모이는 것에 안정할 수 없어 반드시 흩어진다.'라고 하였다. 또 모임과 흩어짐은 서로 없애니(蕩), 흩어진 것을 모으고 모인 것을 흩어 버리며 둘은 상호 전화하고 상호 작용한다고 하였다.

또 모임은 잠시의 모습이고 흩어짐은 본래 모습이며 기는 여전히 기라고 하였다. 또 왕부지는 이와 같은 취산의 전환이 흩어진 사물의 소멸이고 새 사물의 탄생이라고 하여 취산 변화가 새로운 창조이며 발전임을 밝혔다.

왕부지의 철학체계에서는 태허 태극 태화는 다른 이름이지만 실체는 같은 범주이며, 본체의 기에 대한 다른 각도의 개념 규정이다.

태허는 기로써 절대 허무를 배제하는 존재이고, 만물의 본체 및 세계의 물질성을 긍정하는 것이고, 태극은 본체의 기가 음과 양으로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통일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구체적인 有形의 기와 구별함과 동시에 기의 최고의 지위를 나타낸 것이다.태화라는 것은 본체인 기의 모순 통일이 고도의 안정성과 조화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합해지면 태극이고 나뉘어지면 음양이 되는데, 억지로 같게 하지 않으나 서로 어그러지고 해침이 없으면 태화라 일컫는다'

왕부지의 도는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모든 사물이 근거로 삼는 본체라는 의미와 사물이 공통으로 통과하는 법칙이란 의미이다.

또 왕부지는 實有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중용의 誠 개념을 개조한 것으로 성은 실제로 있는 존재이다(實有). 그는 허무와 대립되는 물질적 존재를 총괄하여 실유로 파악하였다.

왕부지의 기론에서 태허 태극 태화는 본체적 기의 내재적 모순 통일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도는 본체와 현상의 의존적인 관계를 규정한 것이며, 실유는 본체와 현상의 물질적 통일의 개괄이다. 이것이 바로 실유가 기타 범주보다 높은 점이다.

왕부지는 기와 리의 관계를 규정하여, 기는 리가 의지하는 바로 리가 기의 속성이라 하였고, 리와 기는 서로 포함하며 서로 붙어 떨어지지 않아 기가 리를 얻는 것을 일컬어 리라 한다고 하였으며, 기가 리를 어겨도 리가 어그러진 것이 아니라 기가 법칙을 벗어난 것 또한 기의 리 속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또 왕부지는 주자의 관점에 반대하여 기가 구별된 후에 리가 구별되므로 기가 리를 결정한다고 하여 만물 각각의 천차만별은 만물 각각에 각기 갖추고 있는 다른 이치 때문으로 이치의 다름은 사물의 질적인 차이를 규정하며, 또한 기의 차이를 반영한다.

또 왕부지는 인성은 기에 근본하고 인성을 곧 기질지성이라 하고 기와 질에 대해 세밀하게 구분했다.

그는 기는 인간 생명의 근원이며 質은 기가 인간의 몸에 응결한 것이라 하였다.

기질이라는 것은 기가 질을 이루고, 질은 다시 기를 생성하는 것이다. 기가 질을 이루니 기가 응집하여 형체에 제한되고(局), 그 대상(物)에서 재료(資)를 얻어 그 질을 자라게(滋) 함이다. 질이 기를 생성하니 친화와 배척(同異攻取)을 통하여 각기 그 同類를 모방한다.

 

5. 기는 천기이다 - 안원 이공

 

안원의 철학에서 도는 만물의 본체이고, 음양이 혼돈 상태로 미분화된 통일체이다. 기는 음양 오행이 형체를 띠지 않은 존재 형식이고, 자연적 물질 존재이다. 形은 음양 오행을 인간이 감각기관으로 느낄 수 있는 존재상태이다. 안원은 만물이 형과 기의 통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안원의 기론은 본체론 측면에서 기에 물질성을 부여하였으나 사회 윤리 영역에서는 기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맹자의 '호연지기'의 영향을 받아 참다운 리(眞理)는 生理이고 참다운 기(眞氣)는 生氣라는 명제를 내놓았다.

이 주장은 인간의 정당한 욕구를 버리고 순수 지선한 천리를 추구한 리학의 금욕주의 학파의 학설을 깨려는 시도이다. 안원은 어떤 사물이든지 운동 변화는 모두 이른바 기의 기틀(氣機) 또는 사회영역에서는 氣數라고 불리는 일종의 내재적 필연성을 간직하고 있다 하였다. 또 그는 리와 기가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였다. 그는 성을 리기로 나누어 둘로 만드는 것에 반대하고 아울러 의리의 성은 선이고 기질의 성은 악이란 관점에도 반대하였다.

안원은 정주학파의 인성론에 반대하고 기질과 의리가 모두 천명이고 성은 인간의 천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기질의 기능과 속성임을 강조하였다.

안원의 제자 이공은 안원의 사상을 계승하였고 리와 기가 같은 사물의 두 측면임을 강조하여 정주 도학의 기와 리 문제에 대한 잘 못 된 사상을 비평하였다. 그는 기내부의 음양 대립 통일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였는데 음양은 서로 의존하고 스며들며, 밀접하여 분리될 수 없고, 음이 없는 절대 순수한 양이 없고,양이 없는 절대 순수한 음이 없다고 하였으며, 음은 양을 포함하지만 양을 잴 수 없기에 음이라 하고,양은 음을 포함하지만 음을 잴 수 없기에 양이라 한다고 하였다.

 

6. 기는 변화 운행한다 - 대진

 

대진은 기에 대한 서로 다른 규정은 기의 서로 다른 존재 형식이라 하였다.

형은 이미 형질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형이상은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形以前) 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형이하는 형질이 이루어진 후(形以後)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음양이 형질을 이루지 않은 상태를 형이상자라고 말하니 형이하가 아님은 분명하다. 음양이 형이하가 아닐 뿐이다.

오행인 금목수화토도 質을 볼 수 있으니 바로 형이하이고 器이다. 그 오행의 기는 인간과 만물이 이것에서 품부받으니 형이상자이다.

그는 만물은 음양 오행의 기로 존재 근거를 삼고, 기는 만물의 존재 및 그 성질을 결정하며 , 기는 만물의 근원이고 만물은 모두 기화를 통해 생긴다고 하여 기가 형이상의 본체임을 말했다. 또 그는 기가 또한 형이하의 존재이고 만물을 이루는 질료 이며, 현실적으로 그것은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온갖 사물로 직접 표현된다고 하였다. 그는 만물 생존의 기를 탄생 초기에 획득한 내의 本受之氣 와 탄생 이후에 받은 기인 외의 所資以生之氣로 나누어, 본수지기가 바탕이 되어 안에 있는 기의 감응 작용으로 소자이생지기를 불러온다고 하였다.

그는 기는 변화하고 유행하여 생성이 끊이지 않으며, 기화 유행은 스스로 주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도는 아직 형체를 이루지 않은 기로 음기와 양기의 통일체로 보아, 아직 형체를 이루지 않은 기를 도라 부르고, 이미 형질을 이룬 기를 器라 불렀다. 또 기는 실체를 말하고 도는 변화를 말한다고 하였다.

그는 리를 기의 고유한 속성으로 보았고, 살펴서 반드시 기미가 구별되는 것에 대한 이름인 分理와 그 구분을 얻으면 질서가 있어 문란하지 않은 조리를 구분하였다. 또 그는 기는 자연이고 리는 필연으로, 자연은 기 자체의 운동의 자기 주재를 표현한 것이고, 필연은 기화 운동의 내재적 관계, 곧 어길 수 없는 법칙을 표현한 것이므로 자연과 필연은 근본적으로 일치하며, 필연의 실현은 자연 자체의 승화이지 자연에 대한 외래적 강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성은 사물의 본성으로 서로 다른 사물이 음양 오행의 기에서 분배 받은 바 맑고 흐림, 많고 적음 등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만물은 서로 다른 본성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이시기 사상가들의 기범주 발전에 대한 공헌의 측면은 다음과 같다.

① 역사상 기론의 성과를 종합 정리하였다.

② 과거 이론의 오류를 비판하고 기본론 철학의 권위를 세웠다.

③ 기범주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한걸음 발전된 추상적 개괄을 하려고 애썼다.

 

 

제 9장 근대

 

 

1. 기가 갈려서 만물을 발생한다 - 강유위

 

그는 근대사상가로서 서양 과학문화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였고, 그것을 이용하여 전통의 기범주를 보충하고 개조하였다. 그의 기론은 곧 서로 다른 동서문화간의 충돌과 결합의 산물이었다.

1) 기는 만물의 근본이다

원기가 천지를 만들었으며 우주만물의 근원이다.

기는 전기로서 과학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물질적 존재이다.

기는 지기로서 도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객관적 정신이다.

2) 기와 여러 범주의 관계

(1) 기와 음양

강유위의 양은 뜨겁고 음은 차갑다는 이론은 다르다. 하늘은 양을 근본으로 하고 양은 뜨거운 기운이 된다. 열은 운동을 발생 시키고 운동은 빛을 발생시키는 까닭에 해와 별을 드리운다. 땅은 음으로 음은 차가운 기운이 되고 차가움은 응결된다.

(2) 기와 리

리란 법칙으로 기의 속성이며 기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3) 기와 성

성은 기와 떨어질 수 없으며, 성은 곧 기의 성으로 기가 성을 결정한다.

 

2. 기는 원소이다 - 엄복

 

1) 만물은 모두 기로 변화할 수 있다.

⑴ 기는 특정한 물리적 성질을 갖춘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될 수 있는 물질적 실체이다.

⑵ 기는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물질형태로서 만물을 구성하는 모든 종류의 원소들은 모두 기로 귀결될 수 있다.

⑶ 기는 우주만물의 근원이다.

2) 기와 리.성의 관계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지만 각각의 작용과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해 분별적으로 고찰하나 의의상에서, 또는 그들 본질의 관계에 따라서 말한 것을 보면, 리는 기로서 기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3. 소리와 빛은 모두 기이다 - 담사동

 

1) 기는 왕래하고 흡인하며 운동하여 쉬지 않는다.

⑴ 기는 지구를 감싸고 있는 대기층의 공기이다.

⑵ 기는 천지 사이를 왕래하는 기로서 이것은 천지만물의 근원이다.

⑶ 기는 온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일종의 물질적 매개이다.

2) 기와 음양.심과의 관계

⑴ 기와 음양

음양은 똑같은 기로서 그것들은 기 내부에 있는 모순의 요소여서 서로 의존하고 서로 마주하며 상호작용하는 까닭에, 서로 돕고 생성시켜 떨어질 수 없다.

⑵ 기와 심

담사동은 기가 사람의 몸으로 변화하며 일정한 수양을 거쳐 내재적 정신으로 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3) 기의 에테르로의 전화

에테르는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없는 곳이 없으며, 구체적 감각형태가 없지만 만물을 낳는 근원이자 존재의 근거라고 생각하였다.

 

4. 장태염과 손중산의 기사상 변천

 

1) 아톰이 기의 실질이다 - 장태염

기는 근대 물리학이 제시한 물질성분으로 내용이 채워지게 되었고, 구체적인 존재는 실한 것이며, 하늘도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그 본질은 곧 기라고 말하였다.

2) 기로부터 태극에 이르고 물질에 이른다 - 손중산

만물의 시초와 근원의 구체성과 추상성의 모순된 방법을 해결하였다.

 

 

근대 기론은 중국 전통 기범주 발전과 변천의 최후의 시기이다.

강유위의 습역의 기, 엄복의 질점이 있고 애력과 거력이 있다는 규정, 담사동의 공기.몽기는 바로 기범주의 끊임없는 과학화의 과정을 반영해주었다.

 

 

이상으로 기의 철학에 대한 요약을 마쳤다.

한의학에 기와 음양오행설이 들어온 것은 미개한 자생적 한의학이 논리를 획득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현대에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옛선인들의 이러한 기와 음양오행의 논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잃어버린 기에 대한 논리의 일부에 대해서 막연하나마 조금은 감이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한의학 하나하나의 단편을 형성하고 있는 선인들의 생각은 무엇인지 좀 더 고민해 보아야겠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DEt6&articleno=13372929&categoryId=771776&regdt=20070807084533 나의 꿈 나의 철학)

[2015.6.21~26] 제주도 여행 셋째 날~마지막 날까지. 휴대폰이 셋째날 오후에 침수되어 한번에 몰아 씀!

Posted by 히키신
2015. 8. 30. 13:52 etc

오늘까지는 흐리기만 하고 비는 안내릴거라더니 어제보다 더 굵은 빗줄기가 내얼굴을 때린다.

따갑고, 아프고, 추웠다.

그러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잠시 숨 돌릴겸 멈춰세우면, 날씨는 거짓말같이 빗줄기가 약해졌고-아니 실은 약하게 느껴진 것이 맞을지도-몸은 다시금 따뜻해졌다.

날씨가 화창한 날엔 바이크를 타고 달릴때가 쉬어가는 느낌인데, 날씨가 사나울땐 달리지 않고 머물러있는 것이 휴식이 되는 구나.

 

중문관광단지 근처 식당에서 제주도 전통 음식 몸국을 한그릇 마시고, 다시 달리고 달려 이중섭거리에 도착했다. 도중에 얼굴이 도저히 따가워 때마침 보이는 이마트에서 아무 모자나 하나 사가지고 갈까 하여 잠시 멈췄으나, 이내 돈이 아깝다는 생각에 다시 달렸다. 그러나 다시 달리는 동안 또 퍼붓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그냥 모자하나살걸...'하는 생각에 또 후회했다.

 

아마 모자를 사건 안사건 후회했을 것이다.

 

인생은 결국 '苦' 라지만, 그 속에 때때로 '樂' 이 있어 살 맛이 난다.

이번 여행동안이 딱 그랬다.

여행은 삶의 축소판인가. 

 

~~~

 

그리하여 내가 미리 리스트에 적어뒀던 곳, '이중섭 거리'에 도착했다.

때마침 비도 딱 그쳤다.

거리 중간 적당한 곳에 바이크를 세워두고 나서 옆을 바라보니 6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를 전시해둔 벽이 있었다.

 

 

너무너무 멋진 글이다. 그냥저냥 지나치는 사람들 틈에 나는 카메라 셔터를 연방 눌러댈 수밖에 없었다.

 

 

 다문화가정 멘토링을 하며 본 요즈음의 교과서는 이 시절의 교과서랑 비교했을땐 완전 '판타지'였다!

너무 많이 변해서 교과서라기보다 문제집, 참고서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60년대 어린이가 쓴 시.

 나도 초등학교 시절엔 시로 교내대회 최우수상도 수상하고 도 대회에도 나가고 그랬었는데...어쩌다가.....

 

 이중섭 거리의 전경 모습. 차량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두어 천천히 걸어다니기 좋은 환경이었다.

 

 

 

 

거리가 너무 예뻐서 어디 아무데나 들어갈까 하고 있는 찰나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멋진 공간을 발견했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유명 건축가가 지은 카페 '유토피아'. 도심에 있는 여느 카페들처럼 실내 인테리어가 멋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건물 전체가 투박하지만 자연스러운 제주도를 그대로 빼닮은 인상적인 카페이다.

 

 

 카페에 들어오기 전, 조그만 공방에서 이중섭 화백 작품이 그려져 있는 동 책꽂이를 하나 구입했다. 지금도 요긴히 잘 쓰고있는 책꽂이이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가지고온 기형도 시집을 읽고 몸과 마음을 정화한 뒤

다시금 거리를 나섰다.

 

 

 이 곳은 서귀포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장터처럼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공간인 듯 한데 내가 간 날은 궂은 날씨 탓인지 휑했다.

 

 사진의 설명 대로 옛날 초가집을 새로이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하여 문화예술 커뮤니티 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다.

 

 이중섭 거리엔 이중섭 화백의 생가도 함께 있다. 사진은 생가 내에서 촬영한 것.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라는 글귀가 마음에 와닿는다.

 

 

 이중섭 화백이 살아 생전 사용했던 팔레트. 놋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동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세월이 흘러 빈티지함이 더해져 더욱 멋스럽다.

예술가가 사용하던 도구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작품이 되는...

 

 

 가장 유명한, 이중섭 화백이 살아 생전 가장 많이 그렸던 '소'.

 

아쉬움을 뒤로 한채, 이중섭 거리를 나서서 준형 형님이 추천해준 사려니 숲길로 향했다.

이중섭 거리에서는 꽤 거리가 멀었지만, 좋은 날씨 다시 험악해지기 전 어서 가자 싶어 스로틀을 힘껏 감았다.

 

 

 사려니 숲길로 접어드는 입구 부근에서 우연히 잘못 눌려져 찍힌 사진.

가라는 길로 안가고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내 바이크는

마치 내 현재 모습을 비유하는 듯해 묘한 감정이 들었다.

 

 

 

 

수상하다...

어째 차도 사람도, 개미도, 강아지도, 고양이 한마리도 없지...?

내가 잘 가고 있는게 맞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계속 갔다.

 

 

 맞게 왔구나-!

 

 

 울창한 나무 숲길 사이로 뻥 뚫린 길. 어디까지고 달려나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잠시 멈추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입구 부근에 바이크를 세워두고

 숲길을 거닐어 보았다.

 

 

 길 보수 공사로 인해 한쪽 길은 출입이 통제되 있었다.

뭐든지 하지말라 하면 더 하고 싶은게 사람들의 심리인지라

나도 옆으로 슬쩍 들어가서 가볼까 하는 마음도 올라왔지만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울창한 나무 숲. 영화 '아바타'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듯 온세상이 푸르렀다.

 

 

 길가에 피어있는 꽃들과 비에 젖어 촉촉한 길바닥.

그리고 지저귀는 새소리.

풀 냄세.

그야말로 완벽한 자연 숲속 산책길이다.

 

 

 

 아무렇게나 막 찍어도 작품이라는 건 바로 이럴때 쓰는 표현인 듯!

 

 우연히 노란점백이 풍뎅이를 발견!

내가 발견한걸 눈치챘는지 죽은 척 꼼짝안고 있기에

그 모습이 귀여워서 사진만 한장 찍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뒤돌아보니 다시 제갈길 잘 가고 있더군.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사려니숲 길을 거닐던 그 때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져 떨린다.

 

사려니 숲길을 매우 매우 길다. (내 기억에 꼬불꼬불 이어진 길이 족히 20km는 됬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걸 다 걸어서 통과할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도로 거슬러 나와 다음 숙소로 향했다.

 

 

 뻥 뚫린 작은 일차선 길과 바로 옆에 뻥 뚫린 바다.

제주도에서 익히 자주 봐왔던 해안도로이지만

지나칠 때마다 가슴이 탁 트이며

잠시 멈춰서게 될 수밖에 없었다.

 

 

 

 

 모래사장이 앞에 있는지 돌들이 앞에 있는지

사람들이 많이 있는지 없는지

화창한 날인지 어둑어둑한 날인지 새까만 밤인지

수평선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바다만 보이는지

등대나 고기잡이 배가 보이는지 다리가 있는지

등등...에 따라

바다는 제각각 나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제각각 다 매력이 있지만,

나는 사람이 없는 곳에 뻥 뚫린 수평선이 보이는 곳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좋다.

 

 

 

이후 날씨는 다시 험악해졌고

숙소까지 거리는 한참 남았는데 해도 저물어가는 시간이어서

조급한 마음에 멈추지 않고 계속 스로틀을 감았다.

바보같이 휴대폰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거치대에 달아 놓고 계속 비를 맞춘 바람에...

결국 내 휴대폰은 이성을 상실했다!

 

이후에도 사진을 찍을 곳이 너무도 많았는데...

특히 넷째 날에 머문 모모 게스트하우스(드림 게스트하우스)의 캡슐 집에서 머문 하루는 정말 잊지 못할 기억이다.

모모 게스트하우스의 인자하시고 친절하신 사장님. 그리고 사장님이 배풀어주신 배려와 드림 게스트하우스의

일일 운영자가 되어 손님들을 맞이하게 된 우연.

하루 동안 숲 속의 캡슐집과 바닷가의 캡슐집에 모두 가보게 된 행운.

푹 자고 일어난 아침 통나무 캡슐집 창문밖으로 바라본 제주 앞바다의 풍광은

현재 내 짧은 필력으로는 담아내지 못하겠다.

언젠가 시로 은유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음악으로.

 

(밑의 사진들은 각각 구글에서 '모모게스트하우스' 및 '드림게스트하우스' 로 검색하여 얻은 이미지입니다.

 사진의 원작자분께 허락받고 퍼온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된다면 그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숲속에 위치한 모모게스트하우스의 캡슐집.

다음 카페 '제주모모' 에 몇일에 묵을 것인지, 어떤 연유로 여행을 왔는지 등을 간단히 작성해 글을 남기면

인자하신 사장님께서 일자를 확인하신 후 머물게 허락해주신다.

가격은 놀랍게도 '무료'이다!

 

바닷가에 위치한 드림게스트하우스의 캡슐집.

이곳은 숲속 모모 캡슐집보다 한층 더 쾌적하며 깨끗하고 옆의 게스트하우스의

샤워실, 여러 음식을 사먹거나 해먹을 수 있는 공간도 이용 가능하다.

하지만 이곳은 유료(1일 2만원)이다.

그러나 충~분히 2만원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곳이니

각각 자신에게 맞는 곳을 선택하여 가면 될 것이다.

 

드림게스트하우스의 맞은편 전경. 풍력발전기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위에 있는 캡슐집 내부 창문 밖에서 바라본 바닷가는

이 이상으로 훨씬 더 아름답다!

 

 

사진을 남기지 못함이 너무나 아쉽지만, (그리고 휴대폰 고치는 데 왔다 갔다한 수고로움과 비용...ㅠㅠ)

휴대폰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가슴에 담아 왔기에

휴대폰 없이 돌아다닌 제주도가 더욱 더 의미있게 남았다.

 

또 생각 밖의 저렴한 가격으로(약 6만 얼마 정도의 돈) 유상 리퍼를 받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침수된 것이 훨씬 더 잘된 일이라 여겨진다.

 

역시...같은 일이라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감정은 천지차이로 바뀐다.

 

 

마지막 날 밤에 머문 '아프리카 게스트하우스' 역시 인상적이었다.

제주도에 있지만 그 이름에 걸맞게(?) 아프리카 스러운 내부 인테리어와 더불어 인상 좋은 촌장님(여기선 사장님을 전부 촌장님이라고 부르시는 듯했다)께서

버스에 내린 나를 픽업해 주셨다.

이날 아프리카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밤은 예상을 훨씬 더 뛰어넘는 신선함과 즐거움이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여행지에서 만나 어우러지니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떠들어도 취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부산으로 떠나는 비행기 시간도 뒤로 늦출 정도로 나는 제주도에 빠져버렸다.

 

그날 밤에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지나간 후,

월정리 해변가로 간다는 형님 차편에 함께 실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을 정리한 후 부산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있어 제주도는 단순한 관광지 그 이상으로 의미가 깊다.

제주도는 갈때마다 느낀 바지만

항상 기분 좋은 추억을 가득 안고 돌아오게 된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틈날 때마다 제주를 찾을 것이다.

나중엔 제주도에 머물러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베어하트(Bearheart) -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 중...

Posted by 히키신
2015. 8. 11. 10:28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우리가 삶에서 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서 비롯된다. 재충전을 위해서는 계속해서 자신을 비우고 더 많은 것을 받아야 한다. 말하자면 빈 그릇이 되는 것이며, 한쪽 손을 들고 축복을 받은 후에 다른 손을 열어서 그것을 통해 그 축복이 다른 이들의 삶 속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

내가 알고 있던 것들, 내가 갖고 있던 것들을 더 많이 내려놓을 수록 더 많은 것으로 채울 수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남에게서 받은 기운들을 내 속에서 잘 소화해내어 다시 남에게로 전달해주는 것. 그러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를 만들 수 있는 삶이 아닐까.​

도올 김영옥의 혁세격문(革世檄文) 중

Posted by 히키신
2015. 8. 10. 00:48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2012년 12월 17일
도올 김용옥

환인 하느님께서는 이 신시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거룩한 건국 치세이념을 내리셨다. 그런데 지금 어떠한가? 지금 우리는 홍익弘益이 아닌, 홍해弘害, 홍살弘殺의 정치를 자행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인의仁義를 망각하고 솔수식인率獸食人의 사리私利를 앞세우며, 진현進賢의 정도正道를 거부하고 착복과 부패의 한계를 없이 하며, 국고를 털어 치자治者 본인의 사욕을 충족시키며 주변의 승냥이들에게 떡고물을 분배하고 있다. 국토의 산수대강山水大綱을 파괴하고 4대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왜곡·오염시키며, 백두대간의 대혈인 국립공원에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케이블카의 설치를 획책하고, 인천공항과 같은 공익의 자산을 사유의 질곡으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다. 농촌을 해체시키고 도시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양극화의 괴리는 재벌의 독재를 흥륭興隆케 하며 서민대중의 삶을 노예 이하의 나락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추락은 영락이요 죽음이다. 그런데 서민대중의 죽음을 현 정권의 치자들은 환호하고 재벌은 환희의 박수를 친다. 그리고 전국 골목골목의 상권을 대형마트라는 탱크와 기관총으로 후려 갈겨대고만 있다. 어찌 미국의 총기난사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쳐다보고만 있는가? 자기 가슴에 총알이 박히고 있는 바로 그대들이!
...민중이여! 두 손에 가슴을 얹고 잘 생각해보라! 누가 과연 그대들의 민생을 도와 주었는가? 누가 과연 그대들에게 돈 한푼이라도 거져 준 적이 있는가? 민생은 아사달의 신시로부터 지금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민중 스스로 해결해온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정치는 민생을 해결하지 못한다. 민생은 어디까지나 민중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민중의 간절한 염원이란 그 민생경단의 번영을 훼방하는 행위를 정치가 제발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일 뿐이다. ...

-----------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이 좀 더 나아질까'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궁리를 해오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 고민은 끝나지 않고 계속될테지만, 현재까지 이르러 내린 나의 결론은 '​사람들이 깨어나야 한다.' '사람들이 추구해야 될 근본적인 가치, 근원적인 사고 그 자체가 먼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정치 제도나 구조, 경제, 법 따위는 그 다음이다.' 이다.
사람들이 변해야 정치가 바뀐다. 정치에 기대거나 헛된 희망에 부풀거나 속아 넘어가서는 결단코 자신은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도올 선생께서 위의 명문 중에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민생이 아닌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자! 그리하면 민생은 저절로 해결된다. 도덕이 바로서고 민생이 풍요롭게 되지 아니 하는 역사는 인간세에 있어본 적이 없다.'

'혁명은 왜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가? 이제 혁명은 폭력이 아니다. 이제 혁명은 광포한 영감이 아니다. 이제 조선의 혁명은 체제의 룰에 따라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는 정의로운 상식적 작업이다. 그러나 이번 우리의 혁명은 바스티유감옥의 철창을 터뜨린 불란서인들의 인권선언보다, 차르왕정을 무너뜨린 러시아혁명보다, 아편전쟁 이래 열강의 침탈을 종식시킨 마오쩌똥의 공산혁명보다도 더 막중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혁명이다. 우리의 혁명은 열강의 모든 근대적 노략질과 이데올로기적 대결의 결과물인 세계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 진정한 세계평화의 출발이다. 동·서의 언어적 편견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며 남·북의 불필요한 이념의 기미羈縻를 절단하며, 문명과 자연의 조화를 회복하고, 도농都農의 균형을 꾀하고, 세조의 찬탈 이래 끊임없이 왜곡되어온 정의의 패배를 설욕하는 대업이다. 훈구파들의 끊임없는 득세, 선조의 파렴치한 임란책임회피, 그 뒤로 이어지는 노론의 장악, 세도정치, 일본제국의 식민지통치와 친일파의 발호, 이승만의 권력찬탈과 무능한 6·25전쟁대처, 일제 만군출신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폭정, 이 모든 흐름이 “불의라도 박박 우겨대면 역사의 정의가 된다”는 왜곡된 가치관에 대한 통렬한 국민적 반성의 기회를 박탈해왔다. 반성이 없는 역사는 미래가 없다.

'​반성이 없는 역사는 미래가 없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학업에 임해야 할지 조금씩 구체화되가고 있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마태오 10,26)

Posted by 히키신
2015. 7. 19. 11:10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이미지 출처 : https://embracinginspiration.wordpress.com/tag/truth/)

 

삼성그룹의 불법 비자금 조성 그리고 검찰에 대한 로비의혹 등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대국민 호소문에서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마태오 10,26)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이 구절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살해된 최종길 교수 사건이나 KAL 858기 폭파 사건 등 독재정권에 온갖 흉악한 범죄라도 결국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염원을 담은 수많은 희생자들이 자주 인용되기도 했다.

(http://blog.daum.net/woorihim/7909194 의 친일파 관련 포스팅에서 인용)

 

 

현실이 절망적이라는 게 희망을 포기할 이유은 될 수 없다. 체념과 냉소를 전염시키는 일 역시 부패의 공범이다. "다 그런거지" 라는 체념과 냉소 속에서 부패는 관행이 되고, 결국 거스를 수 없는 구조가 된다.
ㅡ 김용철 변호사, <삼성을 생각한다> 중

 

 

진실이 은폐되고 거짓이 판치는 여러 사건들을 볼 때마다 왜 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올라올까. 김어준은 성향이 타고나는 것 같다고 하는데, 나도 그냥 원래부터 타고난 것일까. 타고난 것이건 자라면서 형성된 것이건 아무렴 어떠냐.

 

 

요즈음의 상황에 매우 잘 맞아떨어지는 좋은 글귀인 것 같다. 나 또한 항상 가슴에 새겨둬야 할 것이다.

 

 

 

 

 

수사법의 기교

Posted by 히키신
2015. 6. 29. 16:24 글쓰기와 관련하여

*출처 : http://sophiako.tistory.com/228 초하뮤지엄.넷,  표현의 맛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문장, 수사법의 기교 (3편) 중에서

 

'일하기'에도 좋고, '공부하기'에도 좋은, 그래서 '책 읽기'에도 좋은 계절입니다. 그러나 놀기에는 좀 아까운 그런 5월이 벌써 다 가버렸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다가온 시련이 무엇보다 더욱 가슴 아팠던 5월이었습니다. 이제 그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6월의 첫 날을 맞고 있습니다.

   이제 저도 자신을 돌아보며 블로깅(blogging)의 초심을 다시 정비하려고 합니다. 평생을 '글 쓰기(문장론)' 연구에 헌신해 오시다 지난 2008년 6월에 작고하신 장하늘
선생님의 책, "글 고치기 전략(2008, 다산초당)"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글 쓰기 능력(문장력)을 키우는 10가지 방법(1편)"과 문장력 향상을 위한 "명쾌한 글 쓰기를 위한 10가지 원칙(2편)"을 중심으로 '글 쓰기의 기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표현의 맛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문장과 수사법

   오늘의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 약속한 3편입니다. 즉 글 쓰기의 핵심인 "설득의 기법"들 가운데, 문장을 맵시있고 맛깔나게 꾸밀 수 있는 "수사법(修辭法)의 기교"에 대해 정리하고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이 글은 "글 고치기 전략"과 "수사법 사전(2009, 다산초당)"을 참고하였습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했던 국어 문법이 아닌, 블로깅을 위한 글 쓰기 기술로 점검해두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먼저 '수사법'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봅니다. 수사법이란, "말이나 글을 다듬고 꾸며서 보다 효과적이고 미적인 표현을 위해 문장을 아름답고 정연하게 꾸미는 여러 방법이나 그런 기술", 즉 문장에 아름다움과 매력을 더해주는 방법이나 기술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말부림새', 곧 조사법(措辭法)을 말합니다.

   "수사법(rhetoric)이란, 발전기에서 튕겨져 나오는 푸른 불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미국, 1899.7.21-1961.7.2)의 말입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문장술에 익숙해지려면 수사법의 장인이 되라.(Be a caftsmou man is speech so that you may be strong.)"는 격언이 있습니다.

   글이란 수사법의 영원한 처녀림이라는 말입니다. 진한 화장의 여인은 거부감을 일으키고 맨 얼굴의 여인은 촌스럽습니다. 살짝 화장한 여인은 교양과 품위가 느껴지는 은근한 매력으로 눈길을 끕니다. 수사법도 마찬가지로 문장에 매력을 더해 줍니다.

   일본 핫토리(服部) 교수의 분류(1950)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수사법은 "비유법", "변화법", "강조법"으로 나뉩니다. 오늘 여기서는 크게 5가지로 나누어 55가지의 수사법에 대해 알아봅니다. '낱말과 구절 중심의 수사법'과 '비유나 비교 중심의 수사법', '문장의 구조나 형태를 바꾸는 수사법', '재미와 효과를 노리는 수사법', 그리고 '말을 에둘러 부드럽게 하는 수사법'이 그것입니다. 

    1. 낱말, 구절 중심의 수사법

 
   의성법, 의태법, 미화법, 대구법, 열거법, 열서법, 점층법, 점강법, 연쇄법, 대칭법, 반복법을 들 수 있습니다.

     1) 의성법(擬聲法, onomatopoeia) : 성유법(聲喩法), 사성법(寫聲法)이라고도 합니다. 소리시늉말(의성어)로써 사물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에서 보리피리 불며/봄 언덕/고향 그리워/피-ㄹ 닐리리. 처럼 피리에서 나는 소리를 사실적인 의성어 '피-ㄹ 닐리리'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2) 의태법(擬態法, mimesis) : 시자법(示姿法), 의상법(擬狀法)이라고도 합니다. 짓시늉말(의태어)로써 사물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토끼에 대해 두 귀는 쫑긋, 두 눈은 도리도리, 꽁지는 모똑, 앞발은 잘룩, 뒷발은 깡총, 허리는 날씬하고...와 같이 의태어로 생김새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3) 미화법(美化法, euphuism) : 미칭법(美稱法), 과식법(誇飾法)이라고도 합니다. 미문체에서 자주 보이던 감상적 특징이나 추켜올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변소를 화장실로, 도둑을 양상군자(梁上君子)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4) 대구법(對句法, parallelism) : 대우법(對偶法), 대치법(對峙法), 균형법(均衡法)이라고도 합니다. 비슷한 내용을 비슷한 리듬으로 맞세워 안정감을 노리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 없는 여인은 그만큼 허전하다. 사랑이 없는 남자는 그만큼 거칠다.'와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5) 열서법(列敍法, accumulation) : 열서법이란 말이나 관념을 덧쌓아가는 기교입니다. 열서법은 열거법과 점층법, 점강법으로 나뉩니다. 같은 종류의 것을 들 경우엔 '열거법', 다른 종류의 것을 단계적으로 들 경우엔 '점층법'이나 '점강법'을 다룹니다.

     6) 열거법(列擧法, enumiration) : 이것도 저것도 많이 예를 듦으로써, 자세한 내용을 표현하려는 수사법입니다. 마틴 루터의 말처럼, '술과 여자와 노래를 사랑하지 않은 자는 일생을 바보로 산 것이다."와 같은 표현 방법을 말합니다.

     7) 점층법(漸層法, climax-incrementum) : 약한 것 → 강한 것/옅은 곳 → 깊은 곳/좁은 곳 → 넓은 곳/낮은 곳 → 높은 곳/가벼운 것 → 무거운 것/ 대강의 것 → 세밀한 것/덜 중요한 것 → 중요한 것으로 표현하여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잃는 것은 적게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와 같은 표현법입니다.

     8) 점강법(漸降法, anti-climax, bathos) : 점층법이 상승적인 데 비해, 점강법은 하강적입니다. 예를 들어, 한글 학자 공병우가 '한글은 금이요, 로마자는 은이요, 일본 가나는 동이요, 한자는 떡쇠다.'라고 한 표현법을 들 수 있습니다.

     9) 연쇄법(連鎖法, chain-writing, concatenation) : 앞의 말꼬리를 잡아, 뒤의 말머리로 삼고 이어나가는 수사법으로 반복법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크레민크스톤이 성공전략법으로 강조한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뀐다.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와 같은 표현법이 좋은 예입니다.

     10) 대칭법(對稱法, kenning) : 한 낱말의 단조로운 반복을 피하여, 복합어나 완곡 표현으로 시적 효과를 노리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올빼미를 → 미네르바의 새로, 별을 → 밤의 촛불로, 태양을 → 여행하는 램프로, boat(배)를 → wave traveler(파도타는 여행자)로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11) 반복법(反復法, repetition) : '강조'를 노리거나 '문체적 효과'를 노리는 수사법입니다. 이 반복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나의 신이시여! 나의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마태 복음)"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여 표현하는 '첩어법(疊語法)'과 첫머리의 낱말을 다음 문장에서 반복하여 표현하는 '첫머리 반복법', "사랑은 미움의 원인이 되기 쉽고, 덕은 원한의 원인이 되기 쉽다."처럼, 문장의 끝맺음을 같은 말로 반복하여 표현하는 '끝맺음 반복법'이 있습니다.

   세실 존 로즈(Cecil John Rhodes, 남아프리카, 1853-1902년)가 말한 "돈만 있어도 안 된다. 꿈이 있어야 한다. 꿈만 있어도 안 된다. 돈이 있어야 한다. 몽상적인 것과 상업적인 것을 결합하는 것 - 이것이 하나의 철학이다."와 같은 표현처럼, 'A + B → B + A' 형식으로 반복하는 '교차 반복법', 그리고 앞 구문을 반복하는 '앞말 반복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2. 비유나 비교 중심의 수사법


   직유법, 은유법, 활유법, 의인법, 제유법, 환유법, 비교법, 중의법, 상징법, 풍유법을 들 수 있습니다.

     12) 직유법(直喩法, simile)
: '명유법(明喩法)'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같이', '처럼', '-양', '-듯이'와 같은 연결어를 사용하는 기교입니다. '비유의 표현'이 드러나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박목월의 "나그네"에서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쓸 수 있습니다.

     13) 은유법(隱喩法, metaphor) : 암유법(暗喩法)이라고도 합니다. '비유의 표현'을 줄임으로써 본래의 뜻과 숨은 뜻을 밀착시키는 수사법입니다. 작고하신 수필가, 김소운의 "이상은 현실을 견디는 진통제다."와 같은 숨은 표현으로 본래의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4) 활유법(活喩法, prosopopoeia) : 생명 없는 물체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수사법입니다. '파초'에서 김동명 시인이 "조국을 언제 떠났노./파초의 꿈은 가련하다./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나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라며 빗대어 노래한 것과 같은 표현법입니다.

     15) 의인법(擬人法, prosopopoeia, personification) :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으로 다루거나 감정이 없는 것을 감정을 가진 것으로 다루는 수사법입니다. 소설가 윤홍길이 "우리 옹기는 양은 그릇에 멱살을 잡히고, 플라스틱류에 따귀를 얻어맞고, 아파트 문화에 걷어 채였다."와 같이 쓴 것처럼, 마치 옹기를 사람으로 표현하는 기술입니다.

     16) 재유법(提喩法, synecdoche)과 환유법(換喩法, metonymy) : 제유법과 환유법의 구별은 어렵습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우선 제유법은 '~의 일종(부분)'을 가르키는 비유로, '일반 ↔ 특수', '보통명사 ↔ 고유명사'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펜(진리)은 칼(무력)보다 강하다."처럼 '재료(추상, 부분) ↔ 제품(구체, 전체)'를 가리켜 표현합니다.

   이에 비해 환유법은 '지시대상을 빗대는' 표현으로, '기호, 상징 ↔ 본체'의 관계로 나타냅니다. "유니폼(퇴직)을 벗고서, 붓을 들기(글 쓰기) 시작했다."처럼, '원인 ↔ 결과'의 관계로 표현하는 방법이 이에 해당합니다.

     17) 비교법(比較法, comparison) : 두 사실을 비교함으로써 작가의 주장을 더욱 드러내려는 수사법입니다. 조류학자 원병오가 "새 1종이 멸종하면, 곤충은 90종이, 식물은 45종이 사라진다."고 보고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2종류 이상의 것을 서로 비교하여 명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18) 중의법(重義法, syllepsis) : 양의법(兩意法), 겸용법(兼用法), 사유법(詞喩法)이라고도 합니다. 한 낱말에 두 가지 뜻을 곁들임으로써 언어의 단조로움을 피하려는 수사법입니다.

     19) 상징법(象徵法, symbolism) : 글 쓴이의 원뜻이 멀고 깊게 숨겨져 있어 쉽게 파악하기 힘든 수사법입니다. 은유법보다 더 멀고 때로는 환유법과도 겹치는 기교입니다. "아름다운 장미를 꺾으러 갔다가, 황량한 낙엽을 안고 우는 이 얼간아."와 같이 쓰일 수 있습니다.

     20) 대조법(對照法, antithesis, contrast) : 대립, 반대되는 것을 들어, 차이점이나 거리를 드러내려는 수사법입니다. 하세가와 뇨제칸의 말처럼, "소녀의 사랑은 시이며, 중년 여인의 사랑은 철학이다."처럼 대립적으로 비교하여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21) 풍유법(諷喩法, allegofy) : 우화법(寓話法)이라고도 합니다. 원"관념인 본래의 뜻을 감추고, 비유만을 제시하는 수사법입니다. 성경 창세기 책의 "살을 맞대는 기쁨 못지않게 뼈를 나누는 아픔도 나눌 수 있는 부부가 되라."라는 말처럼 쓰일 수 있습니다.

   3. 문장의 구조나 형태를 바꾸는 수사법


   도치법, 도장법, 설의법, 영탄법, 돈호법, 인용법, 현재법, 생략법, 문답법, 묵언법, 형용어구법, 추가법, 삽입법을 들 수 있습니다.

     22) 도치법(倒置法, inversion, anastrophe) : 정치법(正置法)의 문법적인 말차례를 바꾸어서, 강조하려는 것을 맨 앞에 놓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답답하다. 어처구니 없다. 사건이 이렇게 곪아터지도록 교육당국은 뭘 했나?"처럼 '답답하다. 어처구니가 없다'를 앞으로 옮겨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3) 도장법(倒裝法, hypallage) : 대환법(代換法), 환치법(換置法)이고도 합니다. 상식에서 벗어날 망정 '발상의 전환'을 중시하며, 재미있게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의 밤을 구경한다.(→밤의 서울을 구경한다.)"처럼 표현하는 경우입니다.

     24) 설의법(設疑法, interrogation) : 의문법(疑問法)이라고도 합니다. 부재의 인물, 초월적 존재, 어떤 사물에 물음을 던지는 것처럼, 읽을이에게 직접 묻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도대체 누가, 어느 법에 의해서 죽여 버렸더란 말이냐?"처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25) 영탄법(設疑法, exclamation, ecphonesis) : 감탄법(感嘆法)이라고도 합니다. 돌연히 말을 중단하고, 사무치는 감정을 곧이곧대로 나타내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영국, 1564.4.26-1616.4.23)가 '맥베드(Macbeth)'에서 "오 죽음! 이제 그도 그 발작적인 열이 식어 고이 잠들게 되었구나."처럼 쓸 수 있습니다.

     26) 돈호법(頓呼法, apostrophe) : 별안간 말을 중단하고 제3자(가공, 또는 실제 사람이나 사물)에게나, 청중에게나, 독자에게 말을 거는 형식의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바다에게 주는 시'에서 신석정이 "바다여./날이 날마다 속삭이는/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해안선의 바위는 베토벤처럼 귀가 먹었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27) 인용법(引用法, allusion) : 인유법(引喩法)이라고도 합니다. 고전의 명구나 유명한 사람의 말, 또는 격언이나 자기가 감동한 말 따위를 인용함으로써, 문장의 권위나 변화를 꾀하려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글을 쓸 때는 붓을 두 자루를 가지라. 하나는 쓰기 위해서이고, 하나는 깎기 위해서이다."처럼 쓰인 경우입니다.

     28) 현재법(現在法, rision, hypotyposis, enargia) : 박진법(迫眞法), 공상법(空想法), 현사법(現寫法)이라고도 하며, 역사적 현재법(historical present)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립니다. "7년 전 얘기다. 길 가던 사람이 묻는다. '혹시 당신 장 선생 아니시오?'"처럼, 과거의 사건이지만, 현재형처럼 서술하는 기법입니다.

     29) 생략법(省略法, ellipsis, omission) : 글 뜻이 상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중복, 군더더기 따위를 줄임으로써 글의 간결, 인상, 여운을 꾀하려는 수사법입니다. 묵언법(默言法)이나 체언종지법도 하나의 생략법입니다. "서울 시내의 번화가는 25개의 국어가 난무한다. (………) 북한에서 온 사람도 남한의 언어는 개판이라고 비꼬았다."처럼 중간을 생략해서 쓸 수도 있습니다.

     30) 문답법(問答法, dialogismus) : 평서문으로도 가능한 것을, 표현력,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문답형식, 또는 대화형식으로 꾸미는 수사법입니다. 소설 따위의 대화형식은 제외합니다. 예를 들어, "간결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짧은 말에 많은 지혜를 갈무리한 표현이 아닌가."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31) 묵언법(默言法, aposiopesis) : 묵설법(默說法), , 단절법(斷絶法), , 중단법(中斷法), 돈절법(頓絶法)으로도 부릅니다. 감정의 막힘에서든, 의도적인 기교에서든, 말을 도중에서 갑자기 끊어 버리는 수사법입니다. 과거나 미래의 일이, 마치 눈 앞의 일인 양 나타내어 실제 느낌과 마치 현장에 있는 것같은 느낌을 꾀하는 방법입니다.

     32) 형용어구법(形容語句法, epithet) : 사람이나 물건의 성질, 특성을 나타내는 꾸밈말을 명사에 덧달아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영어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에서 '대왕'이 그 예입니다. 국어에서는 명사 앞에 놓이는 구절을 가리킵니다.

     33) 추가법(追加法, hyperbaton) : 도치법은 문장이 끝났는가 했는데, 새삼 덧다는 하나의 강조표현입니다. 위 22번의 '도치법'과 이 '추가법'을 묶어서 전치법(轉置法)으로 보기도 합니다.

     34) 삽입법(揷入法, parenthesis) : 문장 안에 삽입구(parembole)를 넣고, 반성적, 감정적인 것을 끼워 넣는 수사법입니다. 삭제해도 문장의 짜임에는 지장이 없는 기법입니다. "폭탄에 마구 불타 버리는 현실과 생명을 보고서도 - 아니, 그 이상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서도 - 눈을 감을 수 있는 의지가 그립다."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4. 재미와 효과를 노리는 수사법


   이에는 반어법, 풍자법, 냉조법, 과장법, 경구법, 억양법, 역설법, 희언법, 양도논법, 모순어법, 정정법, 흉내법을 들 수 있습니다.

     35) 반어법(反語法, irony, antiphrasis) : 말하려는 뜻과 정반대의 표현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예측이나 약점, 또는 급소를 찌르려는 수사법입니다.

     36) 풍자법(諷刺法, innuendo, satire) : 풍시법이라고도 합니다. 곧이곧대로의 표현이 아닌, 약간 빗대거나 에둘리면서 독자로 하여금 수긍케 하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고전이라는 항아리에 대가리를 3년쯤 푹 박아 장아찌처럼 돼야 해요."라는 말로 고전철학에 대한 깊이와 긍지를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37) 냉조법(冷嘲法, sarcasm) : 이는 조소법(嘲笑法)이라고도 합니다. 노골적인 야유, 비꼼, 비난, 경멸을 나타내는 기교의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비평가란 문학이나 예술에 실패한 사람을 말한다."라고 말한 디스랠리(Disraeli)의 표현처럼 쓸 수 있습니다.

     38) 과장법(誇張法, hyperbole) : 실제보다 크게 떠벌리거나 작게 줄이어 실체를 더욱 강하게 드러내려는 수사법입니다. 소설가 이문열이 "늙은 주모 장단에 첨버덩 해 떨어진 소리."처럼 쓴 표현이 좋은 예입니다.

     39) 경구법(警句法, epigram) : 날카롭고 짧은 말로 사람을 찌르는 것으로 일깨우거나 변죽을 올리는 수사법입니다. 코웅리즈가 "경구란 간결성이 몸이고, 기지(機智)가 영혼인 난장이."라고 했듯이, 경구법은 날카로움과 짧음을 전제로 합니다. 예를 들어, "그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범에게 개를 빌리는 것이네."처럼 쓸 수 있습니다.

     40) 억양법(抑揚法, modulation) : 추어 올렸다가 처 내린다든지, 또는 그와 반대로 표현하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황금은 모든 자물쇠를 연다. 그러나 못 여는 자물쇠가 딱 하나 있다. 신(神)의 대문을 잠근 자물쇠다."와 같이 표현한 기술입니다.

     41) 역설법(逆說法, paradox) : 얼른 보면 상식과 어그러진 듯하나, 실제는 일면의 진리가 번뜩이게 하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승리의 순간적 쾌감보다, 패배 뒤의 긴 새김질!"처럼 쓰인 경우입니다.

     42) 희언법(言法, pun/play upon words) : 같은 말을 다른 뜻으로 쓰거나 동음이자를 사용해 언어유희를 꾀하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PR론이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일이다."처럼 표현할 수 있습니다.

     43) 양도논법(兩刀論法, dilemma) : 두 사실(命題)에서 이리도 저리도 하기 어려운 논리적 망설임을 보여주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잠자코 있으면 의심 받는다. 말한다면 오해 받는다. 그러나 선택은 침묵 아니면 해명뿐이다. 어차피 '의심'이냐 '오해'냐 두 길밖에 없다."와 같은 표현을 들 수 있습니다.

     44) 모순어법(矛盾語法, oxymoron) : 당착어법(撞着語法)이라고도 합니다. 어울릴 수 없는 말의 이음으로써, 새로운 뜻을 나타내려는 수사법입니다. 극시인 피에르 코르네이유(Pierre corneille, 프랑스, 1606-1684)가 표현한 "뭇 별에서 떨어지는 이 어두운 밝음"처럼 쓰인 경우을 말합니다.

     45) 정정법(訂正法, epanorthosis) : 이미 말한 것을 되짚어 부드럽게 하든지, 강조하든지, 수정하든지 하는 수사법입니다.

     46) 흉내법(parody) : 잘 알려진 글이나 작품을 환골탈태(換骨奪胎)시켜 더 좋은 글을 만드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16대 링컨(Abraham Lincoln, 미국, 1809-1865) 대통령의 연설을 변형하여 "이 나라의 정치는 3김에 희한, 3김을 위한, 3김의 정치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표현한 김광원 의원의 표현을 들 수 있습니다.

   5. 말을 에둘러 부드럽게 하는 수사법


   그 이름도 낯선 수사법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에는 우언법, 군말법, 탈선법, 완곡법, 완서법, 완화법, 중단법, 예언법, 함의법을 들 수 있습니다.

       47) 우언법(迂言法, periphrasis) : 간결함과 단순함을 저버리고 멀리 에두르거나 빗대어 말하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우러러 붙잡을 별(그리운 임)은 너무 먼 하늘에 있습니다."처럼 '완곡법'과 '미화법'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48) 군말법(pleonasm)
: 용언법(冗言法)이라고도 합니다. 같은 어구, 절, 문장 안에 이미 표현된 내용을 다시 되풀이하는 수사법입니다. 말의 늘음새(용장성, 冗長性)를 단적으로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으레껏인, 너무나 당연한, 말할 나위도 없는 자명한 결과였다."처럼 말을 여러번 늘여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49) 탈선법(脫線法, digression) : 말의 원 줄거리에서 벗어난 내용을 넣는 듯하지만, 글쓸이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 미국, 1807-1882)가 "'일하고 기다리는 것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일생을 일만 하고 기다리기만 하기란 인생의 수명이 너무 억울한 듯만 싶다."와 같이 쓰일 수 있습니다.

     50) 완곡법(婉曲法, enphemism, enphemusumus)
 : 완곡어법(婉曲語法), 또는 원곡법(遠法)이라고도 합니다. 직접 표현에서 간접 표현으로, 노골적인 것에서 우화적인 것으로, 불쾌한 것을 유화시키는 표현으로 에둘리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서 나오셔서 옆으로 되시더니, 곧 숨을 거두셨습니다."와 같은 표현을 들 수 있습니다.

     51) 완서법(緩敍法, litotes) : 폄칭법(貶稱(緩敍法), 곡언법(曲言法)이라고도 합니다. 약한 표현으로 오히려 강한 전달을 노린다든지, 직선적 표현을 꺾어 반대를 부정한다든지 하는 수사법입니다. "저 여성은 내가 좋아하는 여배우 K 씨의 타입입니다."와 같이 간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내가 그녀를 좋아함을 나타냅니다.

     52) 완화법(緩和法, attenuation) : 어조완화법(語調緩和法)으로도 불립니다. '나'를 '저, 저희들'로, '이다'를 '이겠다, 일까'로, '간다'를 '갑니다'로 완화하듯이, 일방적인 단정을 피하여 부드럽게 나타내는 수사법입니다.

     53) 중단법(中斷法, interruption, suspension)  : 말을 일단 멈추었다가 뒤에 잇다는 수사법입니다. 읽을이를 인단 허공에 내던졌다가, 이어지는 표현 속으로 이끌리게 함으로써 고빗사위(절정)을 느끼게 하는 표현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신석정이 '망향의 노래'에서 "버리고 온 '생활'이여/나의 벅차던 청춘이/아직도 되살아 있는/고향인 성만 싶어 밤을 새운다."와 같이 쓴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54) 함의법(含意法, implication) : 35)번의 반어법과 51)번의 완서법이 어우러진 수사법입니다. 그 의미, 내용에서 다른 뜻을 읽어내도록 하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바보가 아니다."와 같이 표현함으로써 '그가 꽤 영리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55) 예변법(豫辨法, prolepsis)  : 예상되는 반론을 앞질러 눌러 두는 수사법입니다. '단연코 ……이다.' '하지만 ……이다.' '……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리도 생각할 수 있다.……'는 문장의 짜임을 지닙니다. 예를 들어, "고독은 모든 뛰어난 인물들의 운명이라고 했다. 나도 수긍한다. 그러나 뛰어나지 않은 사람은 고독의 멍에 밖이라는 것인가? 고독은 모든 삶의 당연한 부산물인 것이다."와 같은 표현을 들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아름다운 문장'을 만드는 수사법의 55가지 종류에 대하여 모두 알아 보았습니다. 이는 시험공부를 하듯, 암기해야 할 문법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블로그의 글에 매력을 더하고, 설득을 위한 기교의 한 방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소 많은 가지수와 다소 긴 내용이었지만 보기 편하게 하나의 글로 정리하였습니다. 저도 정리하다 보니, 심지어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명제도 많아서 적쟎이 놀랐습니다. 또한 이제는 하나의 문장을 쓰더라도 한번씩 더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읽는 이들 모두 부담 없이 읽어 두고,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참고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위 우리말의 수사법들을 잘 익혀서 모두 문장의 달인이 되길 바랍니다. 소리 내어 읽고 싶은 문장을 꾸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으로
'글 쓰기 능력을 위한 10가지 향상법'과 '명쾌한 글을 위한 10가지 원칙', 그리고 오늘 소개한 '표현의 맛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문장을 위한 55가지 수사법'에 대한 3편의 글을 모두 마무리 짓습니다. 앞의 글을 아직 못 보신 분들은 이 기회에 확인해 두시고 평안한 한 주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2015.6.21~26] 제주도 여행 둘째날, 행복함과 고통스러움의 반복

Posted by 히키신
2015. 6. 22. 22:54 etc

간밤에 밤새 모기때매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조금 더 잠을 청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씻고 나와버렸다.


아침 6시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길거리에 보이는 어느 백반집에서 된장찌게를 하나 시켜 먹었다.




바이크 렌트가 오후 2시이니 그 전에 샵 근처로 가서 시간을 떼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렌트 샵이 위치한 동문시장을 향하는 버스에 올라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일어나보니 이미 몇 정거장 지난게 아닌가!


퍼뜩 일어나 그대로 내렸으나 걸어서 동문시장까진 꽤나 걸릴 듯했다.


그래서...


가다가 발견한 영화관에서 영화나 한편 보자 싶어 그대로 영화관으로 턴!



담담한 어조의 스릴러물. 지극히 한국적인, 그리고 훈훈한 결말까지. 

'기대하지 않고 봤는데 괜찮더라' 

기분좋게 영화를 보고 나오니 


마침 바이크샵에서 전화가 와서 얼른 센터로 향했다.


어제 설명들었던 이런 저런 유의사항을 전해 듣고 기분좋게 바이크를 끌고 나왔다.

(이번엔 비본이어서 손쉽게 몰 수 있었다!)


신나게 바이크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바다! 제주에 도착한 지 이틀만에 본 바다였다.(용두암)


용두암에서 애월로 향하는 길. 제주를 주제로 다룬 과제를 할때 얼핏 본 장면인 것 같기도하고, 여하튼 아름다웠다.


막 찍어도 아이폰 화질 괜찮구만! (요새 그래서 6는 아에 사진기능 하나만 두고 광고를 해대더군)


'아, 날씨가 화창했더라면 정말 기가막혔을텐데...!아쉽다...!'


그러나 어제에 비하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이 해안도로를 질주했다.


그리고 곧이어 도착한 협재해수욕장.

에메랄드 빛 바닷빛이 아름답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해수욕장 옆에서 낚시대를 던지는 미래의 강태공(?) 꼬마아이.


여기까지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고 '흐린 날씨여도 이정도면 충분해!' 라고 자위하며


신나게 해안도로를 질주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서귀포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굵게 떨어지는 빗방울에 얼굴은 미친듯이 따가웠고 몸은 점점 추워져만 갔다.


이대로 가다간 감기걸리겠다 싶어 잠시 쉬어가자 판단하고, 비를 피할곳을 찾았다.



송악산에 다다를 무렵 몸에 한기가 들어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근처에 있는 정자로 몸을 피했다. 

그러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평범한 시골길이지만 나는 여기서 다시금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궂은 날씨 탓에 무리하지 말자고 판단하고 얼른 전날 미리 예약해둔(어제의 쓴 경험을 토대로) 


서귀포 내에서도 아주 깊숙한 곳에 위치한 '아일랜드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조용하고 아담한 게스트하우스엔 말레이시아 주인장 아이링이 날 친절히 맞이해주었다.


내부는 아기자기하고 이색적으로 인테리어되어있었고, 그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미처 사진을 찍을 생각도 않고 있다 다음날 떠나게 된 바람에 밑의 게스트하우스 내부 사진은 아이링에게 따로 요청하여 메일로 받은 사진들이다.

거실모습. 아이링은 큰 개 두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두마리 이름이 뭐였더라...(젠장! 이래서 여행일기는 나중에 쓸게 아니라 바로바로 써야되는데!)

 

바. 아이링이 직접 만들어주는 커피와 차를 마실 수 있다. 다양한 책들과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은 그야말로 '휴식'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거실. 이색적인 인테리어. 나중에 원룸 꾸미기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나도 꼭 나만의 스타일로 내 집을 꾸미고 싶다.

 

8인실. 내가 묵었던 도미토리. 내가 묵은 날엔 손님이 없었어서 나 혼자 이방을 다 썼다!

 

4인실. 이 방에 독일에서 거주하는 젊은 신혼 부부가 거주했었다. 늦은 저녘 사장님과 부부는 도란도란 사는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아침에 제공되는 아이링이 직접 만든 식빵. 난 다음날 너무 숙면을 취한 탓인지 거의 정오가 다되서 눈을 떴으므로 일어나자마자 대략 씻고 바로 가게되어 먹어보진 못했다.

 

 


주인장이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한국인 수준으로 한국어를 잘하기에 하도 궁금해서 여쭤보니


한국에 정착한지 6년째라고 하였다. 한 얼만큼 지내고 나니 적응이 되고 지낼만해졌냐고 다시 물어보니 


거의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적응되더라며, 큰 불편함은 없다고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여기저기 많이 여행해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이곳 제주도에서 정착해 지내는게 생각보다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한 후, 완전히 회복된 나는 허기가 져서 밥을 먹으러 나갔다.

(주인장이 추천해준 돈까스탕수를 먹으러 갔으나, 사실 주인장이 때마침 준비하고 있던 저녘상이 내 코를 찔러 참기 힘든 식욕을 불러일으켰다.

연어를 굽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에선 비싸서 자주는 못먹는다며.)



아이링이 추천해준 흑돼지돈까스누룽지탕수. 맛있었으나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아서였는지, 완전히 한 그릇을 뚝딱 비우지 못하고 조금 남기고 나와버렸다.(신선식당)


밥을 먹고 나오니 시간도 조금 남았고 날도 아까보다 더 많이 개인 듯해 미처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던 송악산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스로틀을 감았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겠군)



멀리 희미하게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가 보인다.


  사진에서는 찍히지 않았지만 어느 아버지가 딸과 함께 RC(모형헬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훈훈한 풍경이었다. 밑에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도 보인다. 


 조금만 날씨가 좋았더라면, 시간이 조금만 더 일렀더라면 저 송악산 언덕 끝까지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갔다. 아쉬움을 뒤로 남긴 채. 

 

P.S. 여행 기간 도중 휴대폰이 침수되고 그 이후엔 하계 인턴 근무를 하게 되어 부득이하게 아이링에게 진작 받은 내부 사진을 이제야 업데이트 하게 되었다. 

사진 늦게 올려서 미안해요 사장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