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노래하며

Posted by 히키신
2016. 12. 10. 23:45 순간의 감상[感想]

꿈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누군가처럼 따라 내려가보는 흉내를 내었습니다 그러다 빛과 어둠이 하나라는 이야기에 당황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속에서 노니는 것도 괜찮겠지요 이따금 가슴이 답답해지고 두려울때도 물론 있습니다만 그것이 곧 삶이라면 그 속에서 노니는 것도 괜찮겠지요

- 16.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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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속의 꿈

Posted by 히키신
2016. 12. 10. 23:43 時쓰는 詩人의 始

어제의 검푸른 가면과
내일의 알 수 없는 가면
그리고 지금
가면을 벗어던진
나와 나의 파편들
부정할 수 없는 슬픈 진실이여

꿈에 그리던 그대의 손을
한번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나는 내 모든 가면을
어둠 속에 던져버리고
빛 속으로 날아가겠소
멀고 먼 길일테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더라도

- 16.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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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상념

Posted by 히키신
2016. 12. 10. 23:41 순간의 감상[感想]

유토피아는 이미 우리네 속에 있으나
우리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마치 자기가 자기 얼굴을
마주볼 수 없듯이

- '16.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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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쓰이는 라틴어 인용구

Posted by 히키신
2016. 12. 9. 10:05 글쓰기와 관련하여

자주 쓰이는 라틴어 인용구들이다. 영어를 사용할 때도 간단한 라틴어 인용구들이 종종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인용구를 몇 개 알아두면 영어 작문을 할 때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bona fide - 선한 의도의, 진심으로, (교묘한 속임수가 아니라) 진짜로. 직역하면 '좋은 신념으로'.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 내일을 생각하지말고 오늘을 즐겨라. 앞부분만 따서 많이 인용된다.
Ceteris paribus - other things being equal.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경제학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용어이다.
De facto - 실제의. 누구누구가 무슨 조직의 실세다 할때 주로 쓰인다. 반대로 명분만 있는 경우는 De jure.
Deus ex machina - 기계장치로 온 신.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Deus Non Vult
Deus vult: 신께서 원하신다.
Faber est suae quisque fortunae - 운명을 만드는 사람은 그 자신이다.
et cetera - 기타등등. 영어문장에서 종종 보이는 etc. 가 바로 이 단어의 축약이다.
exempli gratia - 예를 들면. 주로 e.g.로 축약되어서 쓰인다.
Exitus acta probat -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
Ex nihilo nihil fit - 무에서는 아무 것도 탄생하지 않는다.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게 누구였더라
id est - 다시 말하면. 영미문화권에서는 i.e.로 축약되어서 쓰인다. 직역하면 'that is'.
in bello, parvis momentis magni casus intercedunt - 모토에서 거대한 사건은 작은 원인들이 모인 결과이다.
Magnum opus - 최고의 걸작. 한 작가의 가장 빼어나거나 인기있는, 또는 분량이 가장 크고 아름다운 (...) 작품을 말한다. 매그넘 오푸스라고 불리려면 작가의 인생이 담겨있어야 하며, 따라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은 매그넘 오푸스라고 불러주기가 좀 곤란하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도스토예브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 정도는 되야 매그넘 오푸스라고 불러주는듯. (모나리자는 미완성이었고 도스트예브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가 완성된 4달 후에 죽었다.) 복수는 magnum opera 이지만 아무도 신경 안 쓰는듯 (...)
Mea culpa - 나의 죄. '내 잘못이오'라는 뜻으로 쓰인다. 출처는 가톨릭 기도문 Confiteor(나는 고백한다)로,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라고도 쓰인다. 이 구절은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로 번역된다.
Modus operandi - 일을 처리하는 방식(method of operation).
Non sequitur - 불합리한 추론.
panem et circenses - 빵과 서커스. 직역하면 '빵을 그리고 서커스들을'.
pax - 평화. 작문에 쓰일때는 보통 평화 그 자체보다는 '~ 하의 평화'식으로, '~의 통치 하에 모두가 평화를 누림'식으로 언급된다.
pax Romana - 로마의 평화.
pax Sinica - 중국의 평화.
pax Coreana - 한국의 평화.
pax Japonica - 일본의 평화.대동아공영권
pax mongolica - 몽골의 평화.
pax Americana - 미국의 평화.
pax Britanica - 영국의 평화.
pax Ottomana - 오스만 제국의 평화.
per se - 그 자체는(in itself). 예: I don't hate the assignments per se(과제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냐).
Quid pro quo - Something for something. '기브 앤 테잌' 생각하면 된다.
Semper Fidelis - Always Faithful(언제나 충실하게/충성을). 미국 해병대의 구호 'Semper Fi'는 이것을 줄인 것이다.
Senatus PopulusQue Romanus: 원로원과 로마 시민. 고대 로마의 공화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맨홀 뚜껑에 이 구절의 약자인 'SPQR'이 적혀있다.
Subpoena - 증인 소환장.
Sine qua non: 필수 불가결한 조건. "Conditio sine qua non", 즉 "a condition without which there is nothing"를 줄인 말이다.
Status quo: 현상, 현상유지. 역사 과목에서 볼 말이 많을 것 이다. 많은 평화조약에서 이런 구절이 사용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전쟁 이전의 상태로 국경등을 돌려놓거나, 현 상태를 유지한다는 조항에 사용된다.
Sui generis: 독특한, 유일무이한. 영어에서 쓸 때는 수아이 제너리스라고 읽어도 되고 수이 제너리스라고 읽어도 된다.
vae victis - 패자는 무참하도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패자에게 슬픔을'로 번역했다. 성염 교수는 '패자에게 저주를!'이라고 번역했다.
verbatim - 원문 그대로(word for word).
veritas - 진리.
veritas vos liberabit -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뜻만 맞추려면 Vos Veritas Liberabit으로 써도 된다.
veritas lux mea - 진리는 나의 빛
veni,vidi,vici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말 그대로 이 말이다. 로마의 한 사람이 한 말로도 유명.
veto - 거부권.
vice versa - (문장 뒤에 써서) 그 반대도 성립.
예컨대 앞 문장에서 A는 B라고 쓴 뒤 vice versa를 덧붙이면 B는 A다도 맞는 말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거의 영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흡수되었다.예: I hate you, and vice versa(난 네가 싫다. 너도 날 싫어한다.)
Quod erat demonstrandum - 증명 완료. 줄여서 Q.E.D.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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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Aurelius Antoninus 명상록

Posted by 히키신
2016. 11. 29. 00:40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제 1 장
배움에 대하여


1 나는 할아버지 베루스Verus로부터 예절바른 행실과 격한 감정을 억제하는 법을 배웠다.

2 아버지에 대한 숱한 명성과 추억으로부터 나는 겸양과 강인한 기질을 배웠다.

3 나의 어머니는 남을 이해하는 넓은 도량을 가진 분이었다. 조용한 품성의 어머니는 언제나 잔인한 말과 행동을 경계하셨는데, 사악한 행위뿐 아니라 그런 언행을 불러일으키는 악한 마음조차도 삼가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로부터 부자들의 습성과는 거리가 먼 검약하는 생활 태도를 익힐 수 있었다.

4나의 증조부는 내게, 공립학교에 다니는 대신 훌륭한 교사를 집으로 초빙하여 배우도록 충고하셨고, 아울러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이셨다.

5 나의 스승은 경기장에서 어느 한 편만을 일방적으로 응원하거나 그 일원이 되지 말라고 가르쳤다.
또한 힘든 일을 피하지 말며, 헛된 욕망을 줄이고 원하는 것은 스스로 땀흘려 성취하되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며, 남을 비방하는 소리에 귀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6 디오그네투스(마르쿠스에게 처음으로 스토아 철학을 일깨워 준 철학자이자 화가)는 경솔한 일에 몰두하지 말 것, 주술이나 악귀를 쫓는 미신을 믿지 말 것, 닭싸움 따위의 저급한 오락에 매달리지 말 것 등을 충고했다.
그의 충고를 좇아 나는 주위의 선한 언행에 귀기울였고, 철학을 가까이 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바키우스Bacchius와 탄다시스Tandasis, 마키아누스Marcianus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서부터 말과 생각을 글로 쓰는 법을 익혔으며,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행했던 것보다 더 엄격한 자기 수련의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7 루스티쿠스Rusticus(마르쿠스의 친구, 마르쿠스에게 법률을 가르쳤으며 스토아학파 철학자)에게서는 마음을 수양하는 법을 배웠는데, 그는 공리공론을 꾸미거나 사변적인 회고록이나 쓰며 잘난 체하는 궤변론자들을 경계하라고 일렀다.
또 인격자인 양 자기를 내세우거나 과시를 위한 자선 행위, 혹은 수사학과 언어의 유희를 삼가고, 집 안에 있을 때는 화려한 의상을 입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다.
글을 쓸 때에는 쉬운 문체로 써여 한다고 말했으며, 또한 언쟁을 벌이거나 무례하게 행동하여 사이가 나빠진 사람일지라도 그쪽에서 화해를 청한다면, 즉시 응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기풍을 가지라고 말했다.
아울러 독서를 할 때는 피상적인 이해에 만족하지 말고 내용을 정확하게 읽을 것, 말 잘하는 사람에게 쉽게 설득 당하지 않도록 경계할 것 등을 배웠다.
그는 또, 자신이 아끼던 장서 에피테토스Epictetus의 논설문 <인생 강의>를 내게 선물하녀 기쁨을 안겨 주었다.

8 나는 아폴로니우스Apollonius(마르쿠스의 철학교사)로부터 의지와 확고한 결심의 진정한 가치를 배웠으며, 냉철한 의지 외에는 그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느 불치병, 자식의 죽음 등 견디기 힘든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또한 가장 격정적인 힘과 온전히 휴식할 수 있는 능력은 양립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 주었다.
그는 철학상의 여러 원리를 해석함에 있어 자신의 경험과 학식은 사소한 가치밖에 되지 않음을 명확하게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9 섹스투스Sextus(마르쿠스의 철학교사)에게서는 사랑과 위엄으로 가정을 다스리는 법과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법, 자신을 다스리는 엄격함, 동료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 무지하고 무분별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에게 너그러운 관용을 베푸는 법 등을 배웠다.
섹스투스는 누구와도 쉽게 융화하는 성격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 실생활에 필요한 처세술을 터득하여 그것을 조직적인 형식과 질서에 맞추는 재능도 두루 갖추었다.
그는 분노를 비롯한 아떠한 감정의 동요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항상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모든 감정으로부터 초월해 있으면서도 매우 다정다감했다. 누군가를 칭찬할 때에는 과장이 없었으며, 단 한 번도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는 일이 없었던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10 문법학자 알렉산더Alexander(그리스인으로 문법학자)로부터는 남을 헐뜯는 행위는 그릇된 것임을 배웠다. 그는 누군가 비속어나 문법에 어긋난 문장을 사용할 때에도, 그것을 비난하거나 헐뜯지 말고 올바른 표현 방법을 맘시하되, 그 방법은 직접적인 말이 아닌 그 사실에 관한 질문이나 답변 형식으로 할 것을 배웠다.

11 나는 프론토Fronto를 통해 시기심이나 이중심리, 그리고 위선 등이 폭군의 일반적인 특징임을 알게 되었으며, 대체로 귀족 가문 출신들은 따뜻한 인간미가 결여되기 쉽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Fronto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Marcus Cornelius Fronto). 마르쿠스의 수사학 교사. 카토, 키케로 등과 대등하게 취급되었으며 그는 용어에 있어 문학상의 순수 어휘를 쓰는 키케로의 순수주의에 반대하여 일상어나 고시古詩를 다루어 새로운 표현 방법을 연구하였다.

12 플라톤학파의 알렉산더(마르쿠스의 비서)는 내게 여러 면에서 모범이 되었다. 그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하거나 쓸데없이 일핑계를 대어, 주위 친지들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거나, 우정과 인간관계를 등한시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13 나는 스토아학파인 카툴루스Catulus로부터, 친구의 과실을 발겨했을 때 무심히 내버려 두지 말고 그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과, 늘 스승을 존경하고, 자녀들에게 진실한 사랑을 베풀 것 등을 배웠다.

14 나의 형 세베루스Severus로부터는 친척을 사랑하고 진리와 정의를 실천할 것을 배웠다.
세베루스는 모든 사람에게는 똑같은 법이 존재한다는 것, 즉 평등의 권리와 언론의 자유에 기초한 국가관을 가르쳤으며, 통치자는 국민의 권익 옹호를 최대 관심사로 삼아야 한다는 것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철학에 대한 일관된 입장과 선행을 베푸는 것의 중요성을 배웟다.
모든 일에 명료한 그는 자신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도 일부러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에 대해 구구한 억측을 품을 필요조차 없었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Claudius Severus 마르쿠스에게는 형제가 없다. 그럼에도 그를 형제라고 부른 것은, 세베루스의 아들과 마르쿠스의 딸이 결혼했기 때문인 것 같다.

15 막시무스Maximus는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확고부동ㅇ한 목표를 흩뜨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몸이 아프거나 혹은 그 밖의 시련 속에서도 항상 밝은 표정을 지었고, 자신의 의지대로 말하고, 옳다고 판단되는 것을 묵묵히 실천하는 모습을 보요 주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악의를 품거나 범하는 일이 없었고, 놀라거나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으며, 당황하거나 실망하지도 않았다. 또 거짓 웃음으로 고통을 포장하는 일도 없었고, 미심쩍은 일을 한 적도 없었으며, 자비와 덕행과 용서에 인색하지 않았고, 모든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러한 그의 성품은 그가 수양을 쌓아서라기보다 그 자신이 정의 자체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막시무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로 마르쿠스의 총애를 받았으며 집정관을 지냈다.

16 온화한 성품의 아버지는 매사를 심사숙고하고, 한 번 결정한 일은 단호하게 실행에 옮기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분이었다. 그는 노동을 사랑하고, 명예 따위는 구하지 않았으며,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고, 남자로서의 욕망을 억제하고 인내할 것을 가르쳤다. 또한 상벌을 가함에 있어 그 공과에 따라 공정할 것과, 상황에 따라 준엄할 것인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지 그 판단 기준으로, 경험이 소중하다는 것을 충고해 주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신하들에게도 식사 때나 멀리 출타할 때 갖추어야 할 절차의 번거로움을 면제해 주었고, 설사 그것을 소홀히 한다고 해도 늘 변함없이 관대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오래 사귀고 또 그들을 보호했으며, 싫증을 내거나 지나치게 애정을 남발하는 일이 없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쾌활하게 행동하고, 모든 일은 미리 살펴 사소한 일이라도 빈틈없이 처리했으며, 세속적인 갈채나 아첨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다. 또한 대중 연설, 법률, 윤리학 등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인재들을 발굴하는 데 힘썼고, 그들에게 각자의 분야에서 명성을 얻을 기회를 주고자 노력했다.
또한 아버지는 국가 통치에 필요한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 좋은 관리자가 되도록 힘썼으며, 정당한 행위로 인해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서는 강인한 인내로 맞섰다. 그는 신神을 맹목적으로 신봉하지 않았으며, 공연한 선심을 베풀어 민중의 환심을 사지 않았고, 국민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농락하는 일이 없었으며, 만사에 냉철함과 성실함으로 임했으므로 누구 앞에서나 당당했다. 반면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지면, 주저 없이 그 방법들을 선택했다. 새로운 것을 얻게 되었을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 즐거움을 누렸으며, 그렇지 못할 때에도 자유로움을 느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그런 그를 궤변론자나 뿌리 없는 이상론자라고 비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원숙하고 완성된 인격의 소유자로서, 세상의 어떤 일도 성실하게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올곧은 철학자는 존경하는 반면 위선적인 철학자들은 가차없이 비난했다.
아버지는 건강에 많은 신경을 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달리 오래 사는 것에 연연하지는 않았으며, 외모에 대해서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또한 누구보다도 건강했기에 특별히 의사의 진료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에게는 비밀이 별로 없었다. 설혹 있다 해도 그것은 극히 드문 일로, 오직 국가의 안녕에 관한 것뿐이었다. 전시회나 관공서의 건축, 구호품 분배 따위의 행사를 주관할 때에도 항상 신중을 기했으며 그런 행사 뒤에 따르는 갈채나 영광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 정해진 시간 외에 목욕을 하는 일이 없었고, 화려한 저택을 짓는 일이나 먹는 음식, 입는 옷, 심지어 시중드는 여종의 미모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일을 행하거나 구상하더라도 늘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임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견실하고 질서 정연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하면 불안해하고, 많은 것을 소유하면 오만해지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소유했을 때는 적절히 이용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절제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기록에 있는 것으로 그에게 꼭 들어맞는다. 자신의 의지력으로 절제와 향락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영혼이 건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리라.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나는 병석에 누운 막시무스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여기서의 아버지는 친아버지인 P.안니우스 베루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양아버지인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황제를 뜻한다.

17 나는 훌륭한 조부와 부모, 위대한 스승, 선량한 형제, 좋은 벗들을 갖게 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 이들과 반목할 수 있는 기질을 지녔음에도 내가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낼 수 았었던 것은, 순전히 신의 은총을 입은 덕택이다. 또한 나는 한때 할아버지의 후처들 손에서 자랐는데, 그 기간이 짧게 끝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신의 도움이다.
더불어 감사하고 싶은 것은, 하나밖에 없는 내 형제가 늘 곁에서 나를 각성시켜 주었으며 따뜻한 애정과 사랑으로 내 가슴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는 점이다.
내가 수사학이나 시, 기타 다른 학문에 깊이 빠져들지 않았던 것 또한 신의 은총이다. 만일 그러한 것들에 대한 연구가 쉽다고 느끼고 거기에 몰두했다면, 아마 많은 시간과 정열을 허비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내 스승들의 높고 낮음을 나이가 아닌 능력을 기준으로 정했는데, 그렇게 하도록 지도해 준 것 역시 신이었다. 내가 아폴로니우스, 루스티쿠스, 막시무스 등과 사귈 수 있었던 것도, '자연스런 삶'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 것도 모두가 신의 은총이다. 신의 은총과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오을날의 이 '자연스런 삶'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수 있었던 것도 신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베네딕타Benedicta나 테오도투스Theodotus 이후 별다른 연정에 연루되지 않은 것 역시 신의 은총이다. 루스티쿠스와는 자주 언쟁을 벌였지만 가슴에 회한이 남을 정도로 실수를 한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불행한 일이었지만, 돌아가시기 전 몇 년을 나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 역시 크게 감사드릴 일이다.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바로 도울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었다는 점, 남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었던 점에 대해서도 늘 감사한다. 유순하고, 이해심 많고, 소박한 성격의 여자를 아내로 맞게 해 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린다. 또한 자삭들을 훈육할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해 준 일, 내가 아팠을 때 꿈속에서 그 치료법을 일러주었던 일 등에 대해서도 감사의 기도를 빠뜨릴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철학에 심취해 있으면서도 궤변론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 논리학과 법학과 자연과학 등의 탐구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해 주신 점에 대해서도 감사드린다. 이런 모든 축복은 하늘과 운명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2장
인생에 대하여

1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스스로에게 말하라.
"오늘 나는 침착하지 못한 자, 배은망덕한 자, 사기 치는 자, 오만불손한 자, 제 이익에만 눈먼 자들과 만나게 될것이다." 그들의 그런 행동은 모두 선과 악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고귀함과 악의 비굴함 양면을 모두 보고 있으며, 악인들의 일반적인 본성 또한 알고 있다.
우리와 똑같이 이성과 신성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보면 악인들 역시 나의 형제이다.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분노할 수 없으며 싸울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양손이나 양발, 위아래 눈썹이나 위아래 치아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서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경계하고 증오한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분노와 질시는 서로에게 해가 될 뿐이다.

2 '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만 보잘것없는 살덩어리와 한줄기 호흡, 그리고 이것들을 지배하는 이성, 그것이 나의 정체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던져 버려라. 다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라. 책은 당신을 구성하는 일부분이 될 수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당신의 육체를 무시하라. 육체를 이루는 피와 뼈와 신경 조직과 혈관을 잊어버려라. 호흡이란 한가닥 공기에 불과하다. 항상 같은 공기가 아니라 매 순간 새로 들이마시고 토해 내는 공기일 뿐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다. 이 점을 상기하라.
사리사욕에 이끌려 이성을 노예로 만들지 말라. 꼭두각시처럼 반사회적인 행동에 자신을 옭아매고 조종당해서는 안 된다. 또한 오늘을 불평하고 내일을 한탄함으로써 스스로를 운명의 노예로 전락시키지 말라.

3 만물은 신의 섭리로 충만하다. 심지어 운명과 우연의 변화조차도 자연의 법칙에 해당한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사물에는 반드시 필연이 존재하며, 그것은 우주의 섭리와 연계되어 있다. 당신 또한 그 우주의 일부분이다. 물론 전체의 자연이 초래하는 것, 그리고 자연을 근간으로 하는 모든 것들은 자연으 ㅣ각 부분에 있어 유익한 것들이다. 누주는 갖가지 변화로 유지되며, 이것은 기본 원소의 변화뿐 아니라 그 원소들이 합성되어 이루는 보다 큰 형체들의 변화도 포함된다.
이같은 원리를 충분히 숙지하고 그것을 당신의 원칙으로 삼아라. 책에 대한 갈망을 버려라. 그리하여 비탄에 빠져 고뇌하는 일 없이 편안하게 신에 대한 감사를 느끼고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라.

4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신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은총을 받아 왔다. 다만 그것을 알아차라지 못하고, 이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당신 안에 있는 우주의 본성과 당신을 조종하는 지배자의 존재를 깨달을 때다.
또한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한계가 있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시간을 당신의 지혜를 증진시키는 데 활용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 시간은 영월히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5 매 순간 로마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에게 닥쳐올 모든 일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그리고 위엄과 사랑으로 행하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라.
또한 여러 가지 잡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노력하라. 지금 이 순간을 마치 생의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행동해야만 모든 잡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오갖 위선과 경솔함, 이성의 명령에 대한 감정적인 반항, 자기 과시,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불평불만을 떨쳐 버려야만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신들의 경건한 생활처럼, 매일매일 고요 속에서 생활하기 위해 명심해야 할 것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 불과하다. 신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6 당신의 영혼을 너무 학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머지않아 당신 자신을 존중할 기회조차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으며 그것마저도 끝나 가고 있다. 그런데도 당신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타인의 영혼에 자신의 행복을 의탁하고 있다.

7 당신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온갖 복잡한 일들로 인해 마음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마련하여 선에 대해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생각해 보고, 혼란에 대한 초조감을 불식시켜라. 그리고 또 다른 오류에 대비하라. 왜냐하면 당신은 많은 일을 하느라 이미 지쳐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노력도, 저항할 목적도 세우지 못할 수가 있는데, 이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기 때문이다.

8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해서 불행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속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진다.

9 항상 이것만은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즉, 우주의 본성은 무엇이며, 나의 본성은 무엇인가? 또한 이 둘은 사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나는 어떤 것의 일부분이며, 또한 어떤 것의 전체가 되는가?
나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을 좇아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방해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10 인간의 여러 가지 죄악을 연구한 테오프라스투스Theophrastus는 이렇게 말했다.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죄는,분노로 인해 저질러진 죄보다 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분노로 인한 흥분은 어느 정도의 고통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지만, 욕망으로부터 생겨난 죄는 쾌감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훨씬 무절제할 뿐 아니라 나약함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경험과 철학이 뒷받참해주고 있다. 이는 고통에 의한 죄는 아떤 부당한 처사에 대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제력을 잃은 것이고, 쾌락에 따른 죄는 옥망에 대한 일시적인 충동이 악을 행하도록 바극한 것이라는 뜻이다.

11 만일 신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되 인간의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면, 신들도 신의 섭리도 없는 이 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신들은 분명 존재하고, 또 그들은 인간 세계를 다스린다. 또한 인간이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부여해 주었다.
그렇다면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대자연이 이같은 위험을 간과할 만큼 무지할 리 없으며, 혹 그렇다 해도 그것을 예방하고 교정할 능력은 충분할 것이다. 또한 우주가 능력 부적을 이유로 선과 악, 선인과 악인을 대치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생과 사, 명예와 치욕, 부와 빈곤, 쾌락과 고통 등은 선인이나 악인 모두에게 올 수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인간을 격상시키지도, 격하시키지도 않는다. 따라서 선도 아니며 악도 아닌 것이다.

12 만물은 얼마나 빨리 소멸하는가? 육체는 우주 속으로, 기억은 시간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이렇듯 모든 사물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본질은 무엇인가?
쾌락으로 우리를 유혹하느 것들, 고통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 허영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천박하고 저급한 것이며, 얼마나 가치 없고 덧없이 사라지는가를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그럴 듯한 말과 주장을 통해 명성을 구축한 사람들의 진가를 판별할 줄 알아야 하며, 또한 죽음의 본질을 꽤뚫어 봐야 한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하고 막연히 떠오르는 공포심을 제거한다면, 죽음이란 하나의 자연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자연의 끝없는 번영과 순환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13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신들의 창조물을 모두 이해하고자 하는 행위일 거시다. 땅 속 깊숙한 곳까지 찾으려 들고, 다른 사람의 비밀을 훔쳐보기 위해 기웃거리고 공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성스러운 이성에 관심을 갖고, 그 영혼을 충실히 섬기는 것이야말로 자기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수호신인 이성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의 욕망을 떠나 순결함을 보존하는 것을 말한다. 신의 행위는 그 우월성으로 인해 존경받아 마땅하고, 인간의 행위는 사랑과 인류의 평화를 위해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선과 악을 모르는 인간의 무지는 흑백을 가리지 못할 만큼 가련한 상태이기 때문에 동정받아 마땅한 것이다.

14 당신이 만약 3천 년, 혹은 3만 년을 산다 해도 잃는 것은 현재 당신이 영위하는 순간의 삶이며,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지금 그 순간의 삶임을 명심하라. 그것이 긴 인생이든 짧은 인생이든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를 스쳐 지나는 이 순간은 만인에게 공통된 소유물이며, 잊혀지는 것 또한 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나 미래를 잃을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 갖고있지 않은 것을 잃거나 빼앗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어떻게 갖지도 않은 것을 잃어버린단 말인가!
그러므로 다음의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영원으로부터 전해지는 만물은 윤회輪廻를 거듭하는 것이어서 설사 당신이 그 순환을 100년, 200년, 아니 무한 세월을 두고 본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차이도 없다.
둘째, 가장 오래 산 사람이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사람이나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상실할 수 있는 것은 현재뿐이기 때문이다.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잃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5 일찍이 모니무스Monimus는 갈파했다.
"모든 사물은 그 사물에 대해 인간이 갖는 견해, 즉 관념에 의해 결정된다."
설령 반론이 있다 할지라도, 이 말의 진리에 해당되는 부분을 교훈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느 정도의 가치는 발견할 수 있다.

16 인간의 이성이 스스로를 해친다는 것은 이성이 이성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즉, 우주의 한 종양이 되는 것으로, 자연의 한 부분에 속해 있으면서 그러한 환경과 투쟁하는 것은 우주를 향한 반란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개별적인 것들의 모든 본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성이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두 번째는, 아떤 사람을 배격하거나 악의적으로 반목하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이성이 쾌락이나 고통으로 인해 자제력을 잃는 경우이며, 네 번째는, 일을 행함에 있어 성실성 없이 건성으로 움직이는 경우이다. 마지막으로는 이성이 이렇다 할 목표도 없는 상태, 즉 어떤 사고나 분별력 없이 무모하게 정력을 쏟아 붓는 경우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목표를 세우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가장 합리적인 사고력은 가진 인간만이 그 목적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정치, 법률 및 이성에 따를 때에만 가능하다.

17 무한한 시간 속에 한 인간이 차지하는 인생이란 순간에 불과할 뿐이며, 그의 존재는 끊임없이 윤회한다. 또한 그의 깨달음은 우둔하고 혼탁하며, 그의 육체는 이내 썩어 없어질 운명을 지니고 있다. 운명은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영혼은 한줄기 회오리바람과 같다. 다시 말해 육체에 속한 모든 것은 굽이치는 물결이고, 영혼에 해당하는 것은 꿈과 환상과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하나의 전투이며, 후세에 남는 명예란 망각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무기력한 인간을 깨우치고 인도할 힘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 바로 철학이다. 그렇다면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기 정신과 영혼 속에 신성을 안치시키고, 그것을 모독하거나 해치는 일 없이 욕망과 쾌락을 초월하여 행동하고, 거짓과 위선을 행하지 말며, 행동이나 의사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또 장해진 모든 운명이 자신과 같은 원천에서 나온 것임을 자각하고, 무엇보다 모든 생물이 그 구성 분자로 환원하는 것에 불과한 죽음마저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은 각 생물을 구성하고 있던 원소의 분해 작용이다. 그것은 자연의 한 현상이고, 자연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므로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제3장
운명에 대하여

1우리의 생명이 나날이 꺼져 간다는 사실 외에 또 다른 사실 하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어떤 사람의 생명이 얼마간 더 연장된다 하더라도 과연 사고력이나 이해력이 그대로 남아서 사물을 뚜렷이 식별하고, 신과 인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색 능력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노령기에 접어들더라도 신체적 배설작용이나 식욕, 상상력 등에는 크게 이상이 따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능려을 발휘하는 힘, 의무를 정확하게 수행하는 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판단하는 힘, 최후의 순간을 분별하는 힘 그리고 그동안 숙련시킨 이성의 기능은 쇠퇴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며, 동시에 사물에 대한 개념이나 이해력은 점점 쇠약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2 기억해야 할 것은, 자연의 섭리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현상 속에는 신의 은총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오븐에 빵을 구울 때 빵의 표면이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기술적으로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일종의 아름다움으로써 식욕을 돋우어 준다. 또한 잘 익어 벌어진 무화과, 썩기 직전의 올리브도 아름다움을 한층 더한다. 고개 숙인 벼 이삭, 사자가 인상을 쓸 때 생기는 주름, 멧돼지의 콧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지만 이 역시 자연의 또 다른 과정으로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 것들이며,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서 삶의 희열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우주의 신비로운 활동으로 생성된 모든 것들을, 깊은 통찰력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무엇 하나 즐겁지 않은 것이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맹수의 으르렁거리는 입을 볼 때도, 화가나 조각가의 작품을 보듯 찬탄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며, 청춘 남녀 사이에 감도는 열정적인 사랑뿐 아니라, 나이 들어 쭈글쭈글해진 노인의 주름살에서도 일종의 원숙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모습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그 자연의 산물에 대해 진실로 애착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만이 깊은 감명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3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병에 걸려 죽었다. 칼데아Chaldea의 점성술사 역시 많은 사람의 죽음을 예언했지만 정작 자신의 운명은 알지 못햇다. 폼페이우스, 시저, 알렉산더는 수많은 도시를 함락하고 수십만의 기병과 보병들을 죽였지만, 결국 그들도 죽고 말았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불로 이루어진 우주에 대해 끊임없이 명상을 거듭했으나, 자신은 수종에 걸려 물이 가득찬 몸뚱이로 죽어 갔다.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는 이때문에 죽었고, 소크라테스Socrates는 처형당했다. 그렇다면 이 사실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은 이미 배에 올라탔다. 항해는 시작되었고, 당신은 지금 피안에 도착해 있다. 이제 그만 하선하라. 만약 당신이 또 다른 저승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신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때 배는 이승에 머무는 형체, 즉 육신을 말하고, 배에서 내림은 그 육신과의 이별을 의미한다.
당신은 결국 무감각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이미 고통이나 쾌락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또한 육신이라는 형체에 갇힌 노예 상태에서도 벗어나 있을 것이다. 형체라는 것은 영혼의 우월함에 비하면 매우 저급한 것이다. 영혼은 지혜이며, 이성이고 신성인데 반해, 형체인 육신은 흙이며 부패腐敗이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460~355.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로 실증 위주의 과학적 의학을 수립해 의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인생은 딻고 예술은 길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체액설體液說을 주창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540~475. 그리스의 철학자, 비판자. 이오니아학파의 대표자. 헤시도스, 피타고라스 등을 매도하여 고독한 생활을 했는데, 그가 쓴 잠언풍의 문장이 매우 난해하여 '어두운 사람'이라 일컬어진다. 불을 우주의 근원이라 보았고, 만물은 모두 유전流轉한다고 하였다. 로고스에 따르는 생활이 최고의 생활이라 주장하였으며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단편 중 130여 편이 현존한다.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 후기부터 알려져 아리스토텔레스 때에 중요시 된 인물. 우주는 무한한 원자들의 다양한 결합으로 형성되었다는 원자론을 주장, 근세 물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4 국가나 사회에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굳이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어떠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지 등 잡다한 사념에 사로잡히다 보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잃게 된다. 즉, 자기 내면의 '통치자'에 대한 충성심을 분산시키는 역효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마음 속의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는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지우고, 맹목적이며 단순한 호기심에 의한 감정 따위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 갑자기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에도, 정화하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항상 사고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욕망과 쾌락으로 괴로워한다거나 시기와 질투, 경쟁심 따위를 갖는 일 없이, 언제든 마음 속의 것을 말해야 할 때 얼굴 붉히지 않을 수 있는 것들만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은 말과 행동에 당당해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보다 높은 이상을 갈망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그야말로 신의 사제요, 종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쾌락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고, 어떤 고통에도 능욕당하는 일 없이 자신의 본성을 유지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당당하고 숭고한 싸움의 투사이며, 일체의 격정에 휘말리지 않고 운명에 할당된 것을 유유히 누리는 자이다. 그는 정의감에 불타 있으며,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주위의 온갖 사념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우주라는 직조물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특정한 실을 찾아내어 자신의 관심사에서만 능력을 발휘한다. 또한 자신의 행동이 명예로운 것이 되도록 항상 노력하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유용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를 이끄는 운명은 보다 높은 곳에서 지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동료이며, 그들을 생각하고 돌보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평판이나 여론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선인의 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반면 자연에 순응하며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집 안팎에서의 생활은 어떠한가, 밤과 낮의 생활은 어떠한가, 인품은 어떠한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며, 또 친구들과 어울려 올바르지 못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에게조차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는 그들의 찬사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5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을 하되 항상 공공의 이익을 감안하하. 충분히 숙고하여 움직이되 감정 속에 가식과 지나친 세련을 가미하지 말라. 말 많은 사람이 되지 말 것이며, 자신과 무관한 일에 연루되어 스스로를 망치지 말라. 자기 내면의 신으로 하여금 남자답고 성숙한 개체, 로마 시민, 정치가, 국가지도자로서의 직분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게 하라. 그리하여 인생이란 전쟁터에서 퇴각 명령을 기다리며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되,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자기 입으로 공적을 말하거나 남이 남이 그 공적을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라. 외부의 도움을 청하지 말고, 타인에게서 마음의 평정이나 위안을 바라서도 안 된다. 반드시 스스로 일어서야하며 절대 타인의 부축을 받아서는 안 된다.

6 만일 당신이 정의, 진리, 절제, 강직, 용기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만나게 된다면, 즉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보다 더 좋은 것을 만나게 된다면, 당장 그것에 온 정신을 쏫고 그렇게 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쾌감을 향유하라. 그러나 만일 당신의 내면에 머물면서 온갖 욕망을 조절하고, 안생 전부를 비판 검토하며, 신에게 귀의하여 인류를 염려하는 그 신성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어떤 것도 추종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되면, 본래 당신의 소유인 선함에 몰두할 수 없게 된다. 대중의 칭찬이나 권력, 부나 쾌락 따위도 당신의 합리적이고 선한 이성에는 미칠 수 없다. 물론 알마 동안은 그것들이 잘 순응하는 듯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순식간에 지배력을 얻어 우리를 압도해 버리고 만다.
지금 당장 당신이 가장 고귀하다고 믿는 이상을 선택하여 그것에 몰두하라. 그리고 최후까지 그것을 고수하라!
7 무리하게 약속을 깨뜨리거나, 자존심을 잃게 하거나, 타인을 증오하게 하거나, 의심케 하거나, 저주케 하거나, 위선을 행하게 하는 모든 욕망으로부터 얻어지는 이익을 중요시하지 말라. 마음 속 신성을 존중하는 사람은 꾸밈이 없고, 불평하지 않으며, 쓸데없는 고독을 자초하지 않으며, 대중과 휩쓸리는 일은 바라지 않는다. 또 무엇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이 육체 안에 깃들어 있는 시간에 대해서도 초조해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가령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해도, 그는 보통의 일상적인 일을 행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또한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일생 동안 자신의 이성이 문명 사회의 지적, 사회적 동물로서의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뿐이다.

8 부단히 단련되고 장화淨化된 인간의 정신 속에는 부패된 것이나 부정한 것, 상처 따위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운명은 그러한 인간의 생명을 완성하기도 전에 회수하지 않는다. 그것은 배우가 연기를 다 끝내지 못한 채 무대를 내려가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는 추호의 비굴함도, 허식도 없으며, 남에게 의지하지도 않고, 남을 멀리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살 일도, 숨을 곳을 찾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9 스스로 독자적인 의견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을 존중하라. 당신의 이성은 그것이 있어야만, 자연과 인간의 이상적인 본성에 위배되는 관념의 창출을 중지할 수 있다. 또한 경솔한 판단을 금지시키고, 훌륭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나아가 하늘의 의지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

10 인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는 현재의 이 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나머지 인생은 그저 사라져 버렸거나 아니면 아직 불확실할 뿐이다.
이같은 인간의 삶은 순간에 불과하며, 각자가 영위하는 지상의 공간 역시 비좁기만 하다. 생명은 지구의 한구석에 숨어사는 보잘것없는 난장이에 불과하며, 그 생명도 곧 꺼져갈 것이다. 그리고 가장 뒤늦게까지 이곳에 머물 사후의 명성 역시 짧고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고 만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일조차 알지 못하는 가엾은 족속이므로, 이미 과거에 죽은 사람들의 일 따위를 알 리가 없다.

11 어떠한 대상이 당신의 마음 속에 들어왔을 때, 그것에 대한 정신적 정의를 내리거나 적어도 그 윤곽만큼은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물이며, 그 본성과 실제적인 모습, 그것을 이루는 원소의 정체, 그 원소가 분해되고 다시 환원하는 과정을 확인하라. 당신 혼자의 힘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이성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매우 유효한 방법은, 삶을 통해 제시되는 하나하나의 대상을 면밀히 검토하고 음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사물을 관조함에 있어 다음의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전체로써 이 우주는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우주 가운데 나타나는 사물의 효용가치는 어떤 것인가? 각각의 사물이 전체에 관련해 갖는 가치는 무엇인가? 또 세계의 모든 도시를 내 집처럼 포용하는 로마의 한 시민으로서의 당신에게 각 사물과 인간은 어떤 의의를 가지는가? 각 사물의 본체와 그 구성은 어떠한가? 혹은 그 성질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가? 또한 나는 어떤 덕성을, 예를 들면 부드러움, 강직함, 정직, 진실, 충성, 만족 중 어떤 것을 가져야 할 것인가?
어떤 경우이든 인간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신에 의한 것이다. 혹은 운명이 부여한 것으로 복잡한 거미집의 줄 한 가닥과 같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자연의 법칙에 따라 관용과 정의를 갖고 신의로써 대해야 한다.

12 한 순간도 이성을 잃지 않도록 경계하며, 언제라도 자신의 신성을 반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항상 정신을 순수하게 유지하면서 매사에 열정적으로 임하라.
무엇을 기대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단지 자연의 본성에 따라 순응하며 임무를 이행하고 모든 언행에 있어 진실을 추구해 나간다면, 당신의 인생은 행복해질 것이다. 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당신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13 의사들이 위급한 환자들을 위해 늘 진료 도구를 준비해 놓듯이, 당신도 신과 인간의 이해를 얻기 위해 늘 당신만의 원칙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행위일지라도 항상 이 점을 명심하라. 왜냐하면 인간에 관한 그 어떤 일도 신의 섭리를 벗어나 수행될 수 없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14 더 이상 당신 자신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지 말라. 그렇게 되면 지나간 로마인이나 희랍인의 전설적인 기록들, 노년에 읽기 위해 간직해 둔 훌륭한 저적들도 더 이상 읽지 못할 것이다.
이제 종말을 준비하라. 무익하고 나태한 희망을 버려라. 그래도 자신을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 그 능력이 남아 았을 때 건강을 돌보면서 눈앞의 일들을 서둘러 마무리 짓도록 하라.

15 사람들은 '훔치거나', '씨앗을 뿌리거나', '무엇을 사거나', '평화로워지는 것', 혹은 '어떤 일에 대한 의무'와 같은 말들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통찰력에 의해 파악되기 때문이다.

16 인간의 육체는 감각을 위해 존재하고, 영혼은 행동의 욕망을 위해 존재하며, 이성은 모든 기능과 원칙을 위해 존재한다. 감각, 즉 외관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의 개념을 파악하는 능력은 가축들에게도 있다. 욕정의 충동에 이끌리는 것은 야수에게도, 동성애자에게도, 네로Nero나 팔라리스Phalaris 같은 자들에게도 있다. 또한 이성은 신을 부정하고, 조국을 배반하고, 온갖 불결한 행위를 일삼는 자들에게도 돋등하게 부여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나, 선인에게는 그만의 독특한 것이 따로 존재한다. 그것은 운명이 예비해 놓은 모든 경험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또한 마음 속에 깃든 신성을 모독하거나, 옳지 못한 온갖 관념들로 인해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방해하지 않으며, 진리에 벗어난 일은 일체 관여하지 않고, 또한 정의와 대립되는 일일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간다는 이유로 남들이 불신하더라도, 절대 분노하지 않으며, 자신의 운명이 다할 때 까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나아간다. 그리하여 생과의 작별을 주저하지 않고, 운명이 정해준 수명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팔라리스Phalaris
B.C.6세기경 시칠리아의 아크라가스를 통치했던 정치가로 비인간적이며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 그는 포로를 놋쇠로 만든 황소에 넣고 불태워 죽였는데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황소를 만들었던 페릴루스였다.





제4장
죽음에 대하여

1 인간을 다스리는 내면의 힘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있다면, 그것은 항상 환경에 의하여 생기는 기회와 가능성에 쉽게 순응할 것이다. 그 힘은 특정한 재료를 요구하지 않고, 다만 정해진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타협할 것이다.
그 힘은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전환시켜 자신에게 유익한 재료로 삼는다. 그것은 마치 던져진 장작더미를 집어삼키는 모닥불과 같다. 작은 불꽃이라면 이내 꺼져버리겠지만, 강한 불일 경우에는 그 물체를 사르고 이로 인해 불꽃은 더욱 크게 타오르는 것이다.

2 어떠한 행위도 뚜렷한 목적 없이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되며, 그 일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원리 원칙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3 많은 사람들이 시골이나 바닷가, 또는 깊은 산중에 은둔해 살기를 바란다. 당신 역시 이런 욕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일 뿐,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부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그 자신 속으로 은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의 영혼 속보다 더 조용하고 평온한 은신처는 없다.
특히 정신적인 여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조금만 노력하면 즉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마음의 평온이란 잘 정리된 정신과 같다. 마음 속으로의 은둔을 자주 활용하여 스스로를 쇄신시켜라. 또한 삶의 원칙들은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모든 기본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원칙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영혼은 즉시 정화될 것이며,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스스로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불만은 대체 무엇인가? 인간들의 사악함인가?
그렇다면 이성을 지닌 모든 동물은 서로 돕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원리를 상기하라. 인간은 고의적으로는 악행을 범하지 않으며, 서로 참는 것이 곧 정의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품었던 적개심, 증오, 의심, 원한, 갈등 등을 상기해 보라. 그런 것들을 품었던 인간은 이미 먼지나 재와 더불어 사라져 버리고 앖지 않은가!
우주로부터 할당된 당신의 위치가 너무 작아서 불만인가?
그렇다면 지고지순한 섭리가 아니면 단 한 개의 원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다시 한 번 상기하라. 그리고 더 이상 불평하지 말고 침묵하라.
질병이 당신을 괴롭히는가?
그렇다면 이성이 육체와 분리되어 그 스스로의 힘을 인식하고, 육체의 호흡이 순조롭든 거칠든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상기하라. 즉, 고통과 쾌락에 대해서는 그동안 당신이 배우고 받아들인 모든 것을 떠올리면서 괴로워하지 말고 침묵하라.
명성이란 괴물이 당신을 괴롭히는가?
그렇다면 보라,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얼만 ㅏ빨리 잊혀지는가! 그리고 현재의 앞뒤로 펼쳐진 영원이란 심연을 상기하라. 갈채의 메아리는 얼마나 공허하고, 열광하는 자들은 또 알마나 무분별하고 변덕스러우며, 그 찬사가 미치는 공간은 얼마나 협소한가? 이 세계는 단지 하나의 점에 불과하며 우리가 사는 곳은 그 점 안의 미세한 한 귀퉁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 안에 당신을 찬양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으며, 그들은 또 알마나 보잘 것 앖는 존재들인가?
무엇보다도 당신의 마음을 불안, 긴장, 부담으로 혼미케 하지 말고, 편협하게 하지 말며, 다만 한 인간으로서, 언젠가는 죽어야 할 숙명을 지닌 피조물로서 인생을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후 항상 명심해야 할 다음의 두 가기 진리를 생각하라.
첫째, 외적인 존재인 주위의 사물은 우리의 영혼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므로, 우리 마음의 동요는 오로지 내면의 관념에 의해서 생겨난다.
둘째, 지금 당신이 바라보는 눈앞의 모든 사물은 순식간에 변하는 것으로,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또한 당신도 그 수많은 변화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4 안류가 보편적으로 사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이성을 소유했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우리를 이성적인 창조물로 만들어 준다. 따라서 이성은 우리에게 상대방을 인식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세상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인간은 모두 동료이고, 공통된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전 세계는 하나의 도시임을 뜻한다. 이렇듯 모든 인간애를 주장하는 또 다른 시민권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서부터 정신, 이성, 그리고 법을 파생하는 세계의 조직이 생겨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가?
인간의 몸을 이루는 흙은 지구를 구성하는 흙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인체의 수분과 호흡 역시 지구의 또 다른 요소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정신의 원천 또한 어딘가에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다.

5 탄생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자연의 한 신비이다. 탄생할 때 결합되었던 원소들이 분해되면 그것이 바로 죽음인 것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에 관한 어떠한 것도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이 부여된 인간의 본질에 어긋난 것이 아니며, 결코 창조의 섭리에도 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 인간은 누구나 자기 본성에 맞는 일을 찾기 마련인데, 이것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일이다. 이와 같은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화과나무에서 수액이 나오는 것을 믿지 않는 것과 같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당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죽을 것이며, 얼마후엔 당신들의 이름조차도 남겨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명심하라.

7 무언가로 인해 억울하다는 마음을 버려라. 그러면 억울함도 사라질 것이다. 피해의식을 버려라. 그러면 그 자체도 사라져 버린다. '나는 상처받았다'라는 생각을 버리면 그 상처도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8 어떤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의 삶을 부패시킬 수 없으며, 내적이든 외적이든 아무런 피해도 입힐 수 없다.

9 집단을 위해 보편적으로 유용한 것들의 본성은, 당연히 그렇게 행해져야 한다는 데 있다.

10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어떤 것이든 정당한 이유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에 주목하라.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이것이 진실이고, 단순히 인과관계에 의한 연속성만이 아닌, 모든 대상에 합당한 가치를 분배하는 신의 섭리와도 같은 공정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 관찰을 주의 깊게 계속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무엇을 하든 모든 사람들이 선하다고 말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행동을 함에 있어 아것을 명심하라.

11 당신은 비리를 범하는 자들이 갖고 있을 법한 생각이나, 그들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또한 거기에 지배되어서도 안 된다.
다만 진리에 비추어 생각하고, 진리의 관점에서 볼 것이며, 진리에 맞게 행동하라.

12 우리는 언제나 다음의 두 가지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이성과 국가의 법을 시행하는 제왕이 인류 공동의 이익을 위해 명령하는 것만을 행하라.
둘째, 당신의 미망迷妄을 풀어주고 판단을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당신의 당신의 결정을 재고하라.물론 이것은 공공의 이익이나 그 밖의 다른 이익에 이바지한다는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야 한다. 일시적인 쾌감이나 소소한 명성 따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13 당신은 이성을 갖고 있는가? 갖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가? 만일 당신의 이성이 그 본래의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14 당신은 지금까지 전체의 한 부분으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당신은 처음 당신을 생성한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오히려 다시 한 번 변화를 거쳐 우주의 창조적 이성 속으로 귀속해야 한다.

15 제단 위로 많은 유향乳香 가루들이 떨어진다. 어떤 것은 먼저, 또 어떤 것은 나중에 떨어진다. 그러나 결국 떨어진다고 하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16 만일 당신이 당신의 본성으로 돌아가 이성을 섬긴다면, 지금 당신을 한 마리의 야수나 원숭이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열흘이 채 못 되어 당신을 신처럼 섬기게 될 것이다.

17 눈앞에 마치 일만 년 정도의 수명이 남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 죽음은 당신의 머리 위를 항상 맴돌고 있다. 생명과 능력이 당신에게 붙어 있는 동안 온갖 노력을 다해 선한 인간이 되도록 하라.

18 주위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고 순수한가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은 실제로 수많은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다른 사람들의 퇴폐적인 행위에 눈을 돌리지 말고 흔들림 없이 곧장 앞으로 달려가라.

19 사후의 명성에 집착하는 자는, 자신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 역시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또한 그의 후손들 역시 곧 사라질 것이며, 활활 타오르다가도 종국에는 스러지는 불꽃처럼, 기억의 마지막 불씨도 마침내 소멸하고 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설령 그것을 기억해 줄 사람들이 영원히 죽지 않고, 그들의 기억이 영원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것은 살아 있는 자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질문이다. 명상이나 칭송이 실제로 확실한 공리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늘 대자연이 당신에게 베풀고 있는 은혜를 뿌리치고, 사람들이 내일 당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에 모든 정신이 쏠려 있다면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가 나름대로의 미를 간직하고 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인간의 찬사와 찬미도 어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찬사를 덧붙인다고 해서 더 좋아지거나 나빠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사물, 즉 천연적인 것이나 인공적인 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그 밖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법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법률이나 진리, 친절과 예의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 중 어떤 것이 찬사를 받는다고 아름다워지며, 비난을 받는다고 더렵혀지겠는가? 에메랄드의 아름다움이 찬사가 부족하다고 해서 추해지는가? 황금과 상아, 장미와 숲의 나무가 그렇던가?

21 만일 영혼이 영원불멸의 것이라면 하늘은 어떻게 이 불멸의 혼들을 수용해 왔을까? 그리고 대지는 어떻게 아득한 과거로부터 묻혀온 그 수많은 시신들을 수용해 왔을까? 대지는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변화와 부패로써 또 다른 사체를 위해 자리를 마련한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변화하고 사라지기에 앞서 잠시 공중에서 머물다가, 우주 본원의 영지靈智에 수용됨으로써 불의 본성을 갖추게 된다. 이리하여 다른 영혼을 받아들일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땅에 매장된 시체 수만을 생각해선 안 된다. 인간들에게, 혹은 다른 동물들에게 매일매일 먹히는 동물들의 수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그렇게 죽어가며, 아떤 의미로 그들을 먹는 자들의 뱃속에 매장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들은 인간이나 짐승들의 체내에서 피로 변했다가 다시 공기나 불로 변하기 때문에 대지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찾아낼 것인가? 그것은 물질과 그 생성의 근거를 분별해 냄으로써 가능하다.

22 일순간의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몰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 어떤 충동이 일어날 때면 우선 그것이 정의의 명령에 의한 것인가를 파악하라. 또 어떤 인상을 받을 때마다 확실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라.

23 오, 우주여! 당신과 조화를 이루는 모든 것이 나와도 조화를 이루노라. 그대에게 알맞은 것이라면 나에게도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지 않다.
오, 대자연이여! 그대의 사계절이 생산하는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열매로다. 만물은 그대로부터 나오며, 그대 속에 존재하며, 그대에게로 돌아가노라.
시인은 '고귀한 케크롭스Cecrops의 도시'라고 노래했으나, 우리는 '고귀한 신의 도시여!'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케크롭스Cecrops
고대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건립했다는 전설적인 시조로, 이 구절의 출처는 분명치 않음.

24 어느 철학자는, 마음의 평정을 원한다면 많은 일을 벌여 놓거나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당신에게 꼭 필요한 행위와 사회인으로서의 당신의 이성이 요구하는 행위, 그리고 보편적 이성이 요구하는 행위를 할 수 있도록 그 밖의 다른 행위를 제한하라. 이렇게 하면 몇 가지 일이나마 잘 이행할 수 있고, 거기에서 오는 만족감과 안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불필요함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시간과 수고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혹시 이것도 불필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아울러 불필요한 행위뿐 아니라 사념까지도 떨구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쓸데없는 행위가 뒤따르지 않게 된다.

25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선한 인간의 생활, 즉 우주로부터 내게 할당된 부분에 만족하고, 올바른 행위와 자비만을 희구하는 생활을 영위할 능력이 과연 내게 있는가?

26 인간은 살아가면서 온갖 자질구레한 사건들과 마주치게 된다. 당신은 이미 그런 일들을 수없이 봐 왔을 것이다.
자, 이제 이것을 보라!
당신은 당신의 감정을 어지럽히지 말고, 지극히 단순한 상태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부당한 일을 가하고 있는가? 그러나 그런 행동은 결국 그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체의 일은, 우주에서 생성하여 세상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미 당신에게 할당되어진 운명이며, 당신 앞에 펼쳐진 상황은 살아 움직이는 다른 모든 것처럼, 운명의 직조물에 짜 넣은 한 오라기의 실에 불과한 것이다.
인생은 짧다. 이성과 정의의 공정한 처사에 순응하며, 빠르게 스쳐 지아가는 시간으로부터 유용한 것을 움켜잡아라. 마음은 여유롭게 가지더라도 정신은 차려야 한다.
자, 이제 이것을 보라!
새로운 만남의 불쾌한 측면.

27 질서 정연하든 혼돈 속에 있든 우주는 여전히 우주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한 개체 속에 어느 정도의 질서가 존재하는데, 동시에 그보다 큰 '전체'에는 무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롸 마찬가지로 자연의 모든 부분 사이에서 일탈이나 분산되는 일 없이 감정의 일치가 실재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28 사악한 마음이여! 유약하고 제멋대로인 성격, 야수같고 유치한 자, 어리석고 우둔하며 허위로 가득 찬데다 교활한 성격, 비열한 자, 폭군의 마음이여!
사악한 마음이여!
이 별다를 것 없는 감정의 폭발에 대해서는 다만 추측을 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마르쿠스가 네로의 생애를 다시 읽었던 것일까?

29 우주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자를 우주의 이방인이라고 한다면, 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자 역시 이방인이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한 자, 즉 유형 당한 죄수이다. 그들은 이해의 눈을 감은 장님이며, 남에게 의지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거지이다.
운명을 거부하고 이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자는 우주의 종양과 같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혼을 이탈, 표류시키는 자 또한 공동 사회로부터 버려진 하나의 깨진 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30 어떤 철학자는 옷을 갖춰 입지 않았고, 또 어떤 철학자는 책을 갖지 않았다. 또 어떤 철학지는 반라의 몸으로 살며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빵은 없지만 이성이 있다."
나는 비록 만족할 결실을 얻지 못했지만, 학문을 사랑하며 이성에 의해 살아간다.

31 당신이 배우고 터득한 기술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에 만족하라. 그리고 자신을 폭군이나 노예로 만들지 말고,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긴 채 남은 인생을 살아라.

32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황제 시절을 생각해 보라. 당신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가? 당시에도 사람들은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고, 병들고, 싸우고, 향연을 누리고, 장사를 하고, 의심하고, 자랑하거, 음모를 꾸미고, 저주하고, 불평하고, 연애하고, 재물을 모으고, 집정관의 지위와 왕권을 탐했다. 그러나 지금 그 시대의 사람들과 생활 모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트라야누스Trajanus황제 시대는 어떠한가? 이때에도 마찬가지이며, 그들의 삶 또한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런 식으로 과거와 그 시대 사람들의 기록을 살펴보라. 그들은 이미 원소로 분해되어 사라져 버리지 않았는가?
당신이 아는 모든 이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운명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게을리하고, 타고난 본성을 미혹시키고, 모든 일에 만족할 줄 모르고, 하찮은 것들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어떤 대상을 추구할 때에는 그 대상의 본래 가치와 조화를 이뤄야만, 비로소 가치 있는 추구가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으려면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시간과 정신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로마 황제(69~79 재위)로 트라야누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82세에 사망했으며, 반란 평정, 건축, 재정 정비 등 로마의 번영에 공헌하였다.

33 이전에는 귀에 익었던 말과 표현도, 요즘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옛날에 훌륭했던 사람들의 이름도 지금은 묵은 냄새를 풍긴다. 카밀루스Camillus, 케소Caeso, 볼레수스Volesus, 레오나투스Leonnatus, 스키피오Scipio, 카토Cato, 아우구스투스Augustus, 하드리아누스Hadrianus, 안토니누스 등의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것은 사라진 후,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남았다가 결국에는 망각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당시에는 엄청난 세력과 명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숨을 거두자마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고, 누구도 그들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
영원한 기억이란 없다. 모든 것이 허무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올바르게 생각하고, 공공의 이익과 사회 규범에 맞게 행동하며, 거짓 없이 이야기하고, 모든 일들을 하나의 근본 원리로부터 유출되는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카밀루스Camillus
로마의 장군으로 전설적인 영웅 로물루스를 잇는 로마 제2의 건국자로 일컬어졌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로마의 초대 황제(B.C.30~A.D.14 재위)로 서민 출신. 어머니가 카이사르의 질녀로 아버지가 죽은 후 카이사르의 보호를 받았다. 안토니우스, 레피도우스와 삼두 정치를 시작하면서 반대파를 추방하였다. 집권적 관료 정치 확립, 학문ㆍ예술 장려, 토목ㆍ건축 실시 등 평화적 정책을 일관하였으며, 라틴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
하드리아누스Hadrianus
로마 황제(117~138 재위)로 5현제賢帝의 한 사람이다. 여러 도시의 건설ㆍ육성, 공공시설에 힘썻으며, 아테네와 로마에 각종 신전을 건조하였다. 그가 직접 건립한 그의 묘지는 현존하는 로마 건축의 하나로 산탄제로 성에 있다.

34 운명의 직녀 클로토Clotho에게 당신을 내맡기고, 그녀로 하여금 마음대로 당신에게 할당된 운명의 실을 짜도록 내버려 두라.
클로토Clotho
운명의 세 여신 가운데 클로토는 인간의 삶의 실을 짜고, 라케시스Lachesis는 운명을 결정하여 나누어 주며, 아트로포스Atropos는 인간이 죽어야 할 때 그 실을 끊는다고 한다.

35 기억하는 자든 기억되는 자든, 모두가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36 세상의 온갖 만물은 변화에 의해 생겨나고 있음을 관찰하라. 우주의 본성은 모든 사물과 상황들을 변화시비고, 새로운 창조를 거듭하는 데에서 존재한다.
현재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어떤 의미에 있어 미래에 존재할 사물의 씨앗인 것이다. 씨앗을 단순하게 대지나 여성의 자궁에 뿌려지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37 당신은 머지않아 곧 죽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신의 생각은 여전히 단순해지지 못하고 번뇌에 사로잡혀 있으며, 손해를 입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이들에게 자비롭지 못했다. 또한 이성적이고 정당한 행위를 하는 것이 유일한 지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38 현명한 사람들의 행위를 이끄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그들이 피하는 것과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주의 깊게 관찰하라.

39 당신이 입었다고 생각하는 손해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당신 자신의 육체적인 변화나 외적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손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는 당신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손해'라고 하는 생각 자체를 버려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육체가 약하든, 큰 상처를 입었든, 화상을 입었든, 종양으로 고통을 받든 간에 당신의 마음으로 그것들을 아스리고 치유하라.
그 손해라는 것이 악인이나 선인에게 동등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악이니 선이니 하고 속단할 수 없다. 자연을 거역하는 사람에게나 순응하는 사람에게나 동등하게 닥쳐오는 것이라면, 결코 자연의 목표를 방해하거나 그 목적을 증진시키지도 않기 때문이다.

40 우주를 하나의 실체와 하나의 영혼을 지닌 살아 있는 유기체로 생각하라. 그리고 어떻게 이 모든 사물이 하나의 지각知覺에 결부되어 있으며, 하나의 자극에 따라 움직이고, 각각의 사건의 인과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를 관찰하라. 직조물과 같은 세상의 복잡함, 즉 실타래의 얽히고 설킴애 주의하라.

41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당신은 육체라는 시신을 끌고 다니는 가엾은 영혼에 지나지 않는다."

42 변화하는 모든 산물이 선이 아닌 것처럼,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모든 것등 역시 악은 아니다.

43 시간이란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로 이루어진 끊임없는 강물과 같다. 하나의 사물이 나타나는가 하면 곧 과거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또 다른 사물이 그 뒤를 따라오는가 하면 그것도 곧 흘러가 버리고 만다.

44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봄에 장미꽃이 피고 여름에 과일이 열리는 것처럼 지극히 정상적이며 예측이 가능하다.
이것은 질병이나 죽음, 중상모략뿐 아니라 어리석은 인간들을 기쁘게 하고 괴롭히는 다른 모든 일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치이다.

45 사물의 연속에 있어, 뒤에 오는 것은 항상 선행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단지 필연적인 순서에 따른 진행이 아니라, 합리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미 존재하는 것은 모두 조화로운 관계에 있는 것이므로, 앞으로 존재하게 될 사건들도 단순한 연속이 아니라 연쇄적인 기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46 "흙이 죽으면 물이 되고, 물이 죽으면 공기가 되고, 공기가 죽으면 불이 되고, 불이 죽으면 다시 흙으로 순환한다"라고 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기억하라.
그의 다른 말들도 늘 상기하면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자기가 가는 깅니 어디로 통하는지 안중에도 없는 여행자나 가장 가까운 친구와 늘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매일 그렇게 살면서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잠든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잠들었을 때 상상 속에서 행동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로부터 꾸중 듣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지 말라"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그의 말은, 전통적인 교훈을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7 만일 신이 나타나, 당신에게 내일이나 모레 반드시 죽는다고 말한다 해도, 당신이 극히 천박한 인간이 아닌 이상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이나 모레의 차이는 사실 아주 작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이 내일 닥치든 몇 년 후에 닥치든 그것을 중요시할 필요는 없다.

48 한번 생각헤 보라.
많은 의사들이 병에 걸린 환자들을 눈살을 찌푸리며 굽어보았지만 그들은 결국 죽어 버렸으며, 많은 점성가들이 근엄한 어조로 남의 운명을 예언하였지만 그들 역시 죽어 버렸다.
죽음과 불멸에 대한 해답을 찾느라 전력을 다해 논쟁을 벌아던 철학자들도 모두 죽었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인 영웅과 장군들도 결국 무의미하게 죽어 버렸다.
마치 자신은 결코 죽지 않을 신이나 되는 것처럼 사람들을 살리고 죽이는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구르던 폭군들, 헬리케ㆍ폼페이ㆍ헤르쿨라네움처럼 완전히 파괴된 도시와 그 밖의 수많은 도시들의 멸망.
또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헤라려 보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매장한 다음 그 사람 역시 죽고, 또 다른 사람이 그를 매장한다. 이 모두가 고작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니, 결국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덧없고 무상한 것인가? 어제만 해도 한 방울의 점액에 불과했던 것이, 내일이면 한 줌의 재로 화하는 경로를 관찰해 보라.
우리는 지상에서의 이 덧없는 순간을 자연에 순응하며 보낸 다음, 순순히 휴식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저 무화과 열매가 자기를 낳고 길러준 대자연에 감사하며 떨어지듯이.

49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 부딪혀도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는 저 바위 언덕을 닮아라. 끄떡없이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거칠던 파도도 이내 잔잔해질 것이다. "이런 일이 닥쳤으니 나는 얼마나 불행한 놈인가?"라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 현재의 시련에 흔등이지 않고, 미래의 공포에도 압도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라.
누구에게나 뜻밖의 일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침착하게 그 상황을 이겨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번뇌에 시달릴 때마다 반드시 기억해 두고 적용해야 할 원리가 있다. 즉, "이것은 결코 불행이 아니다. 이것을 잘 참고 견뎌냉다면 오히;려 행운이 될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50 남달리 삶에 강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도대체 그들이 일찍 죽은 사람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언제 어디서든 흙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이다. 카디시아누스, 파비우스, 레피두스, 율리아누스 그 밖의 모든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을 묻어주고, 자신들 역시 타인에 의해 땅 속에 묻혔다. 결국 그들이 누린 삶은 극히 짧은 것이었다.
살아가는 데 있어 얼마나 많은 난관에 부딪치고, 얼마나 많은 관계를 맺고, 또 알마나 보잘 것 없는 육체로 천신만고 끝에 이 과정을 통과해 가는지를 생각해 보라.
생의 기간에 가치를 두지 말라. 오직 그 뒤에 놓인 무한의 시간과 앞으로 올 영원만을 직시하라. 진리가 이러할진대, 어린애가 영원 속에서 사흘밖에 살지 못하는 것과 3대에 걸쳐 산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51 언제나 지름길을 택해 나아가라. 그 짧은 길이란 바로 자연이며, 자연이 가르쳐 주는 길이다. 그리고 모든 행동과 말에 있어 당신을 지배하는 이성에 순응하라.
그것이 번뇌와 투쟁, 거짓된 행동이나 허세로부터 당신을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제5장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1 아침에 눈을 떴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다면 이런 생각을 해보라.
'나는 지금 사람다운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나야만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로 되어 있고,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데 불평을 해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누워 있으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도 잠자리에 누워 있는 것이 더 좋다면 당신이 태어난 것은 쾌락을 위해서였단 말인가?
미천한 식물이나 새, 개미, 거미와 꿀벌들을 보라. 그들은 이 우주 속에서 각자 차지한 부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다. 반면 당신은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물론 휴식을 취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에도 한계가 있듯이, 휴식에도 자연이 규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 한계를 벗어나 늦잠을 잤고, 이제 그 이상의 것을 취하려고 한다. 그만큼 당신의 수행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또한 당신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만약 사랑한다면 당신의 본성과 그 의지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기술을 사랑하는 기술자들은, 먹는 것과 씻는 것까지 잊어가면서 자신의 소임을 완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당신은 선반공이 선반을, 무용수가 무용을, 또는 수전노가 은화를, 명예욕에 혈안이 된 자가 헛된 명성을 좋아하는 것만큼도 자신의 본성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한 대상에 격렬한 애정을 느끼게 되면 그것에 몰두하느라 먹고 마시는 일을 잊기 마련이다.
당신의 눈엔 사회에 대한 봉사에 전력을 다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가?

2 귀찮고 못마땅한 망념妄念들을 말끔히 털어 버리고 난 뒤에 찾아오는 마음의 평화는, 인생에 있어서 귀한 위안임에 틀림없다.

3 자연의 본성에 일치하는 언행을 할 수 있는 당신의 권리를 소중히 여겨라. 남들로부터의 비난이나 험담 때문에 주저하거나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행하고 말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말라.
당신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비판하는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와, 그런 비판을 하도록 자극한 충동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직 당신 자신의 본성과 만인의 골통된 본성에 순응하고 적응해 나가도록 노력하라.

4 나는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자연의 본성에 순응하며 나아가겠다.
그리하녀 내가 매일 들이쉬던 호흡은 그 원천인 대기 속에 반환할 것이며, 내 신체 역시 대지에 묻히리라. 그 대지로부터 나의 아버지는 씨앗을 얻었고, 나의 어머니는 피를 취했고, 내 유모는 젖을 취했다. 대지는 내게 오랜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먹을 것을 공급해 주었고, 내가 그 위를 밟고 다니며 목적을 위해 무자비하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허용하고 품어 주었다.

5 당신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뛰어난 재주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무 상관 없으니 개의치 말라. 당신은 "그런 것에는 소질이 없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당신에게는 미처 깨닫지 못한 숨겨진 자질이 있을 것이다. 이 자질을 계발하라.
이러한 자질은 성실성, 존엄, 근면성, 절제할 줄 아는 성품 속에 있다. 당신은 이 순간 불평하지 않고 검소하고 사려깊고 솔직하며, 행동과 말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자질을 가질 수 있게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그런 장점을 발휘할 능력이 없다느니, 소질이 없다느니 하는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 저급한 차원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다투고, 탐하고, 인색하고, 아첨하고, 불평하고, 비굴하고, 교만하고, 걷잡을 수 없이 방황하며 불안해 하는 것이, 정말 당신의 타고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니, 어쩌면 당신은 벌써 오래전에 이런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이해가 늦고 행동이 둔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아러한 결점도, 당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고치고자 노력한다면 곧 사라질 것이다.

6 어떤 사람은 남에게 봉사를 해 주고 나서, 마치 커다란 은혜라도 베푼 것처럼 자기 장부에 기록을 해 둔다. 또 어떤 사람은 기록은 하지 않더라도, 마음 속으로 그 상대방을 채무자로 간주하고 자기가 베푼 일을 항상 기억해 두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자기가 베푼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마치 포도송이를 맺게 한 포도나무처럼 생산을 하고서도 아무것도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다. 전력을 다해 달리고 난 뒤의 말이, 사냥감을 물고 돌아온 사냥개가, 꿀을 만드는 벌꿀이 감사를 기대하지 않듯이, 선행을 베푼 사람은 절대 그것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포도나무가 다음 해의 포도를 맺기 위해 준비를 하듯이 곧장 다음의 선행으로 옮겨간다.
당신은 아마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그럼 인간도 포도나무나 벌처럼 무의식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물론 인간에게 자기 행동에 대한 인식 그 자체는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인 것이라는 인식은, 스스로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표시인 동시에 특성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또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드런 행위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 것도 사회적 동물의 표시 아닙니까?"
분명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당신은 스스로를 앞서 열거한 인간들과 같은 부류로 타락시키고, 고식적인 논리로 잘못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내 말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이 어떤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를 하지는 않을까 라는 두려움은 갖지 않게 될 것이다.

7 "오, 제우스 신이시여! 산과 평야에 비를 내려 주소서!"
이것은 아테네인들의 기도이다. 기도란 처음부터 하지 말든지, 하려거든 이렇듯 단순하고 소박해야 한다.

8 전설에 의하면 애스쿨라피우스Aesculapius는 어떤 사람에게는 승마를, 어떤 사람에게는 냉수욕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맨발로 다니라는 처방을 내렸다고 한다.
우주의 본성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질병과 불구, 또 어떤 사람에게는 상실감을, 혹은 또 다른 무능력을 처방했다.
전자의 경우 처방은, 환자의 건강 회복을 위한 특별한 치료법을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개별적인 일들이 각각의 운명에 따라 미리 준비된 것이다. 이는 마치 석공이 벽이나 피라미드를 쌓을 때 네모난 돌들이 착착 들어맞는 것처럼 우리의 운명과 '합치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세계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수많은 개체들이 모여 하나의 현존하는 완성체를 이루듯이 수많은 원인들이 결합되어 하나의 우주적 원인이 된다.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누군가가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에게 처방된 것이었고, 따라서 우리는 애스쿨라피우스의 처방을 받아들이듯, 각자에게 예고된 이런 현상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그 처방들 중에는 못마땅한 것도 있겠지만, 건강을 위해서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자연의 명령을 수행하고 완성할 때에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듯이 임해야 한다. 또한 일어나는 일이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항상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의 건강에 이로우며, 우주 자체를 행복과 선행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전 우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자연은 어느 누구에게 그 어떤 운명도 주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자신이 지배하는 거에 무언가를 부여할 때에는 반드시 그 대상에 이롭도록 고안한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만족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것은 당신을 위해 발생했고, 또 당신을 위해 처방되었으며, 당신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이란 운명이 우주를 지배하는 섭리의 증진과 완성, 생존을 위해 당신 몫으로 툭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발생하는 모든 일은 우주를 지배하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지속적인 연관 과정에서 어느 한 개의 분자를 떼어 버리는 것은 전체에 손상을 입히는 행위이다. 따라서 당신이 불만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당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우주와의 단절과 파괴를 범하는 것이 된다.
애스쿨라피우스Aesculapiu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으로, 마르쿠스는 여기서 그를 의학적인 컨설턴트로 언급했다.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호머로서 그를 단순히 '훌륭한 외과의사' 라고 표현했다.

9 올바른 원리원칙에 따라 일을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면, 그것을 괴로워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그럴 때에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되, 당신의 행위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라.
그리고 언제든 의존할 수 있는 철학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간직하라. 이때에는 스승을 찾아가 섬기듯 하지 말고, 눈병이 난 사람이 해면이나 달걀을 사용하듯, 또는 환자가 고약을 붙이고 찜질을 하듯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이성에 순응하는 것에 실패하지 않고, 그 안에서 안정과 신뢰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철학은 오직 본성이 요구하는 것만을 희구한다고 해도, 정작 당신은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는 그 무엇을 찾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라.
그러면 다음과 같은 회의가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바로, 쾌락이 당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영혼의 고매함이 더 유쾌하다고 생각하라.
관용과 자유와, 소박함과, 마음의 평정과, 겸허가 보다 유쾌하지 않겠는가? 이해와 지식으 ㅣ기능에 기초한 모든 사물의 안정과 행복한 진행 과정을 생각할 때, 도대체 지혜 그 자체보다 더 적절하고 유쾌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10 우주 만물의 진리는 모호함 속에 숨어 있기 때문에, 학식이 뛰어난 철학자들조차도 극히 불가해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심지어 스토아학파들도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또한 그것은 여러 난관에 둘러싸여 있고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적인 결론도 늘 오류를 범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류를 범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방향을 바꾸어, 보다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물질적인 것들이란 얼마나 덧없고 무가치한 것인가? 그런 것들은 불결한 탕자나 도둑이나 창녀들조차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신과 함께 생활하고 교제하는 사람들의 덕성을 살펴보라. 자신의 자아도 참고 견뎌 내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이 암흑과 진흙탕 속에서, 물질과 시간의 끊임없는 유전流轉 속에서, 빠르고 다양한 변화 속에서 과연 가치있고 존중할 만한 것, 진지하게 추구할 탐구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란, 용기를 갖고 다가오는 죽음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며, 다음의 두 가지 원리를 생각하면서 위안을 찾는 것이다.
첫째,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필영적으로 우주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이다. 둘째, 나의 내부에는, 신과 내 자신의 영혼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능력이 있다. 왜냐하면 나로 하여금 그런 일을 강제로 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11 "나는 지금 내 영혼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행위에 앞서 이같은 의문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이렇게도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른바 나를 지배하는 부분으로 일컬어지는 내 이성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순간 내 안레 누구의 영혼이 머무르고 있는가? 어린아이의 영혼인다? 젊은 청년의 영혼인가? 여인의 영혼인가? 폭군의 영혼인가? 야수의 영혼인가?"
수시로 자문해 보라.

12 '선'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사람들이 선입관에 얽매여 신중함과 절제, 정의와 강직함 같은 것을 지닌 사람을 선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그처럼 많은 선에 대한 비웃음에 귀기울이지 못할 것이다.
반면, '선'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일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빈정거리는 말도 기꺼이 감사하며 그 재능을 발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13 '나'는 형식적인 요소와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 존재이다.
그리고 이 구성 분자는 모두 무無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무로 소멸할 수 없다.
결론작으로 나의 각 부분은 변화를 통해 우주로 환원될 것이며, 그것이 또다시 변화르 거쳐 우주의 다른 부분이 되고, 그런 식으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와 같은 변화에 의해 나 역시 존재하게 되었고, 나를 태어나게 한 어머니도, 그리고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간 세대도 마찬가지이다.

14 이성과 철학은 그 스스로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들은 그 자체에 존재하는 원천으로부터 최초의 원동력을 얻는다. 그리고 스스로 정한 목표를 향해 곧바로 나아간다. 따라서 이같은 행동은 '올바른 행동'이라 불려지며, 그것은 가야 할 길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진행함을 의미한다.

15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속성이든 인간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필요하지도 않은데, 이는 인간의 본성이 그같은 것을 약속하지도 않았으며 그로 인해 완성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은 인간의 본성이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로 하는 수단도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은 그런 것들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인 선도 나타내지 않는다.
만일 인간이 그러한 속성을 지니고 태어났다면, 이를 경멸하고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 없이 지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하여 칭찬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것들을 참된 선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진가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것들을 제거하거나, 제거하려고 노력한 사람일수록 더욱 선량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16 당신이 생각하는 사념思念 여하에 따라, 당신의 정신적 성향性向이 결정된다. 왜냐하면 정신과 영혼은 사상과 사고에 의해 물들여지기 때문이다.
당신의 정신과 영혼을 다음과 같은 생각들로 채색해 보라. 예컨대, 인간은 어디서든 선량하게 살 수 있다. 따라서 궁전에서도 선량한 생활을 할 수가 있다.
또한 모든 사물은 창조 이면에 존재하는 목적이 결정하는 방향에 따라 발전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에 도달점이 있고, 그 목적이 있는 곳에 각 사물의 이익과 복지가 있다. 이성을 지닌 인간에게 있어 복지는 버로 사회이다.
인간이 사회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이성이 있는 인간이 이상으로 삼아야 할 선은 바로 이웃과의 평화이다. 또한 생명을 지니 것은 생명을 지니지 않은 것보다 우월하며, 생명을 지닌 것 중에서 가장 우월한 것은 이성을 지닌 존재이다.

17 불가능한 것을 얻고자 하는 행위는 미친 짓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럾는 자들은 그런 짓을 되풀이한다.

18 우리에게 본성의 힘으로 견뎌 내지 못할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혹은 비상한 용기와 정신력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위축되지 않기 위해 그저 버틸 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무지나 허세가 지혜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19 외부에 있는 사물 그 자체는 영혼과 조금도 접촉할 수 없다. 또한 영혼은 다른 방향으로 돌리거나 옮길 수도 없다. 그러나 영혼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전환시키고 움직일 수 있으며, 적절한 사고와 판단으로 사물을 분별하고 적용한다.

20 인간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하고, 그들의 결점이나 과오를 참아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내게 가장 가깝게 인식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내 본연의 행위를 가로막거나 방해하면, 인간은 내게 있어 태양이나 바람, 야수처럼 선택의 여지도 없이 전혀 무관한 존재가 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내 활동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그때 환경과 조건에 따라 작용하고 변화하는 능력을 지닌 내 감성이나 이성에는 장애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의 의지와 기질은 늘 자제되어 스스로를 보호하고 그 환경에 적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행동을 방해하는 것은 오히려 촉진제가 되며, 내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내 본성에 따라 전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

21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존중하고 섬겨라. 그것이 만물을 돌보고 지배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 자신에게 있어 최고의 것, 가장 고귀한 부분을 존중하라. 그것 역시 우주의 이치와 일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돌보고 지배하며, 당신의 삶 또한 그것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다.

22 사회에 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 구성원인 국민에게도 피해를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언가 피해를 입었다고 느껴진다면, '만일 이 사회가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나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원칙을 상기하라.
그러나 만일 사회가 실제로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결코 그 해를 입힌 자에 대해 분노하지 말고, 잘못된 점을 찾아 지적해 주어라.

23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새로 생겨나는 사물이 얼마나 빨리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지를 상기하라.
실체란 쉼 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으며, 사물의 활동은 끊임없는 변화이다. 그 활동은 영원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고, 그것의 원인 또한 영원한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다. 결국 이 세상에 정지해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영원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과거와 미래라는 이 무한의 심연深淵을 생각하라.
따라서 주위의 것들이 마치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거나, 고통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고뇌하고 실의에 빠져있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다.
그런 것들이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오직 한순간이며,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24 우주의 총체적인 모습을 그려 보라. 당신은 그 속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주의 무한한 시간 중 더이상 쪼갤 수 없을 정도의 극히 짧은 순간만이 당신에게 할당된 양이다.
또한 운명에 의해 결정된 것들을 생각해 보라. 그중에서 당신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인가!

25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과는 무관한 것이며, 오히려 그 사람이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그의 기분과 그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그에게 속한 문제이다.
당신은 지금 우주의 섭리가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며, 본성이 원하는 행동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26 쾌락이든 고통이든 육체의 감성이 영혼을 교란시키도록 방지하지 말라.
영혼을 육체의 감성과 결부시키지 말고 감성의 적당한 영역 내에서 국한시켜라.
그러나 만일 그러한 감성이 마음 속에 생겨난다면, 굳이 그 육체적인 감각을 뿌리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단지 이러한 감각들을 선이나 악으로 판단하는 일만은 삼가야 한다.

27 신들과 더불어 살아가라.
신들과 같이 산다는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부여한 것에 만족하고,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행하고 있음을 끊입없이 신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28 겨드랑이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거나 입에서 악취가 나는 사람에게 화가 나는가? 하지만 그러한 분노가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의 겨드랑이가 그렇고 그의 입이 그러한 것을, 만약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 악취 역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그에게도 이성이 주어졌고, 그가 조금이라도 이런 사실을고려해 본다면 무엇이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하는지 충분히 알 것이라고 생각하라. 그것이 옳은 생각이다.
또한 당신도 이성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당신의 이성으로 그 사람을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당신과 같은 이성을 갖도록 설명하고 훈계하라.
만약 그가 당신의 말에 귀기울인다면, 당신은 그를 바로잡는 셈이니 준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29 저승에 가서 이러저러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승에서도 그 삶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그대로 하여금 그같은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 즉시 이 세상을 떠나라. 단, 어떤 박해를 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그저 '방에 연기가 자욱하여 밖으로 나가는 것' 쯤으로 여겨라. 수선을 떨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나를 내쫓지 않는 한, 나는 자유로이 이 집 안에 머물러 있겠다. 주인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나의 선택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나는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동물의 본성에 맞는 삶을 선택하고 행동할 것이다.

30 우주의 이성은 사회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주는 보다 우월한 것을 위해 열등한 것을 만들었으며, 또 우월한 것끼리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해 놓았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우주의 이성은 각각의 사물에 저마다의 가치를 부여했으며, 질서를 세우고, 격식을 주고, 적당한 위치를 지정해 놓았다.

31 당신은 지금까지 신들에 대해, 부모, 형제, 자녀, 스승, 친구, 친척, 하인들에게 어떻게 처신해 왔는가? "말이나 행동에 있어 어느 누구에게도 누를 끼친 바가 없다" 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행동해 왔는가?
또 당신은 오늘날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경험했으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참아냈는지 생각해 보라. 당신의 한 생애가 끝나고 타인에 대한 봉사도 막을 내린 지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봐 았으며, 얼마나 많은 고통과 쾌락을 경멸해 왔는지, 또 멸시의 눈으로 바라본 수많은 영광, 그리고 못되고 경박한 인간들에게 보여 준 그 많은 친절과 배려를 돌이켜 보라.

32 미숙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어떻게 유능하고 현명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진실로 유능하고 현명한 영혼의 소유자란 누구를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주의 시작과 끝을 알고, 모든 실체에 널리 퍼져 있으며, 일정한 주기에 따라 영원히 우주를 다스리는 이성을 아는 영혼, 오직 신뿐이다.

33 머지않아 당신의 육체는 앙상한 뼈만 남아 끝내는 한 줌의 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남는 것이라곤 이름뿐, 아니 그 이름조차도 금세 사라질 것이다.
인간들이 인생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모두 공허하고 헛된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를 물어뜯는 강아지나, 싸웠다가는 금방 웃고 또 금방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다.
믿음과 겸양과 정의와 진리는 '험악한 대지를 떠나 멀리 몰림포스산으로 올라'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럼에도 당신을 아직까지 이 지상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감각의 대상이란 수시로 변하고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으며, 쉽게 오도되고 둔해지는 것이다. 가엾은 영혼 그 자체도 피로부터 증발된 증기에 불과한 것인데, 이같은 상황 속에서 명성과 찬양은 공허할 따름이다.
종말이 소멸이거나 혹은 다른 상태로의 이동이라 해도 상관없다. 당신은 그저 평온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된다.그렇다면 그 종말이 닥쳐올 때까지 필요한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을 경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며, 인내와 자제력을 키우고 정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허약한 육체와 호흡의 한계를 넘어선 무엇이든 당신의 것이 아니며, 또한 당신의 능력에 속하는 것도 아님을 기억하라.
'험악한 대지를 떠나 멀리 올림포스산으로 올라'
B.C. 8세기경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의 시구.

34 만일 당신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당신의 여생은 평온하게 흘러갈 것이다.
인간과 신의 영혼, 모든 이성적 존재의 영혼에는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외적인 요소로부터 절대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정의와 선의 자질과 그 실천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이 당신의 욕망을 자제시킬 수 있다.

35 만일 이것이 내 잘못이 아니고, 내 잘못의 결과도 아니며, 또한 사회 질서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아니라면, 그 일에 신경을 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또 그것이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칠 수 있겠는가?

36 당신의 능력이 허락하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라.
그러나 만일 무분별하게 이끌린 것이 도덕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그들이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그럴 때에는 옛 노인처럼 행동하라. 그 노인은 세상을 떠날 때 노예 소녀의 팽이가 필요 없음에도 그것을 소중한 보물로 인정하고 굳이 달라고 청했다.
나는 한때 행운을 잡았던 사람이었으나, 그것을 잃러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다'는 감정은 나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행운의 총아였다. 행운이란 영혼의 선한 기질이며, 선량한 감정, 선량한 행위인 것이다.
노인과 소녀와 팽이
노인은 소녀에게 있어 그 팽이는 아주 소중하고 귀중한 보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르쿠스는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보면 동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산덕 - 복귀(復歸)1975

Posted by 히키신
2016. 11. 23. 15:17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제 4. 言語와 實相
17. 因果도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그 속(현실)에서 끄집어 낼지라도, 그것이 고갈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것들의 전부가 우리의 능력 앞에서 동시에 한꺼번에 주어지는 일은 없었다. 우리의 능력의 수준만큼, 그리고 우리의 노력의 정도만큼, 그 가능성은 우리의 앞에서 실현될 뿐이었다. 이 현실, 이 세계는 우리의 앞에서 언제까지나 開放的이다.
반면에, 인간의 思惟는 무한한 事象을 앞에 놓고서, 그것을 有限의 차원에로 끌어 내리려고 한다. 무한인 것처럼 보이는 우주에다가 한계를 지어 보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사유는 유동적인 현실을 그대로 대하지는 못하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이든 고정시켜 놓고는, 그러한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는 전제 밑에서 작용한다.
우연히 한번 그러한 일이 있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며, 앞으로도 그러한 상황의 밑에서는 그러한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유는 예외(例外)를 가장 싫어한다. 모든 것을 원칙대로만 파악하려고 하고, 언제나 ‘맞아 떨어지는’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다시 말하면, 완결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이며,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사유는 어디까지나 閉鎖的이다.
인간의 사유는 우리의 현실을 그것으로서 총체적으로 대하는 일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이 현실의 어떤 ‘국면’만을 상대하려고 하며, 그리고 이 때에는 일정한 ‘比較의 觀點’을 먼저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서만 이 국면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의 관점이 즉 ‘개념(槪念)‘이다.
가령 이 몸을 예로 든다면, 인간의 사유는 그 몸을 총체적으로 대상으로 삼지는 못하고, 가령 그것의 ‘길이’와 같은 어떤 국면만을 알아보려고 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있어서는 m나 cm같은 ‘비교의 관점’을 미리 정해 놓는다. 이리하여 가령 172cm라는 답이 나오면, 우리의 사유는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때에는 그 몸의 ‘무게’나 ‘건강상태’같은 것은 관심 밖의 것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져 있던 비교의 관점이 불편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다른 기준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리하여 가령 별의 거리를 측정하려고 할 때에는, m로는 불편하므로, 光年이라는 새 기준으로 바꾸기도 한다.
인간의 사유는 이와 같이 ‘비교의 관점’ 이라는 색안경을 끼고서만 현실을 槪念的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촉수(觸手)에 걸려 들지 않는 것은 관심 밖의 것으로서 무시된다.
이와 같이 개념을 통해서만 작용하는 인간의 사유는, 그것이 대하는 이 세계가 그렇게까지 그 내용이 풍부한 것은 아니라고 自慰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인간의 사유가 아무리 쫓아갈지라도, 우리의 현실 또는 세계는 언제나 그보다 앞질러 있으며, 인간의 사유가 그것을 완전히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유가 내세우는 관점의 촉수에 걸려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이 현실 또는 세계의 그대로의 전부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의 현실 또는 세계는 사실은 客體化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총체적으로 대상으로 삼을 만한 주관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의 현실에 관하여, 우리가 아무리 심각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아무 것도 끄집어 내지를 못한다. 우리의 현실 또는 세계와 우리와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우리의 사유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실천일 뿐이다.
사유에 의함으로써는 우리는 아무 것도 끄집어 낼 수 없지만, 실천에 의하는 경우에는 이 현실속에서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성취시킬 수 있다. 비록 그 성과는 그것만으로는 미미한 것일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는 없었던 것이요,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창조가 된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맞는 도전(挑戰)의 양상에 따라, 거기에 알맞는 방식으로,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창조의 과정에는 한계가 없다. 지난날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우리가 해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한한 창조활동이 모두 우리의 ‘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래 우리의 현실속에서는 무한한 가능성이 발굴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으며, 우리가 원하는 바에 따라 무엇이든지 우리의 앞에서 전개시킬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는 소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 또는 세계는 곧 그대로 우리의 나타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를 떠나서 이 현실, 이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며, 나의 현실 또는 나의 세계는 곧 그대로 ‘나’다.
-p85~87

제6. 영원하고도 새로운 문제
-26. 인간의 소외(疎外)

(…)이리하여 가령 교수가 학생을 대할 때에도, 그저 형식적으로 ‘교수’로서만 처신하려고 할 뿐, 그 이상 깊이 ‘인간 대 인간’의 직접적 관계에는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가까운 가족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대인관계의 직접성, 구체성을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의 생활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이러한 직접성, 구체성은 자취를 감추고, 우리는 그저 교수-공무원-유권자-시민-고객 등등 ‘생명 없는 추상’의 탈을 쓴 존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 간다.
경제활동이 인간의 주요 관심사가 된 사회에서는, 위에서 말한 양화(量化)와 추상화(抽象化)의 과정은, 경제적 생산의 영역을 넘어서, ‘물건’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까지 확대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 인간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아무런 생명도 없는 ‘추상’의 탈을 쓴 허수아비로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인간이 소위 ‘자아상실’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확립된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산업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인간의 ‘소외’현상이 특히 눈에 띄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간이 육체적 존재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자아상실은 충분히 문제될 수 있으며, 실제에 있어서 이것은 모든 종교인과 사상가에 의하여 인간존재의 가장 시원적(始原的)인 문제로서 다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런데 구약(舊約)에서는 이 소외현상을 ‘우상숭배’라는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우상을 숭배할 때에는, 인간이 만든 우상이 물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자신도 물건이 된다. 물질에는 자기라는 것이 없다. 그리고 물질이 되어버린 인간도 자기를 가지는 일이 없다. 따라서 우상을 숭배할 때에 인간은 자기를 상실하게 되며, 그러기 때문에 우상숭배는 배척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상숭배에 대한 구약의 주장의 골자가 된다. 구약의 몇 귀절을 들어보자.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호세아’ 14:3)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여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가식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시편’ 135:15~18)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자신의 풍부함을 남(他)에게 투사(投射)하고, 그리고 그 풍부함이 자기와는 동떨어져 있는 그 ‘타’에게 본래부터 위탁되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이 ‘타’에게 복종하고 그것을 사모함으로써만 그 풍부함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우상숭배다. 그리고 이 때의 그 ‘타’는 반드시 물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는, 인간이 만든 ‘수공물’을 숭배할 때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관념’을 숭배할 때에도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외재적(外在的)인 관념신(觀念神)을 숭배하는 것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우상숭배가 된다. 이 때에 인간은 그 자주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아를 상실하고 자기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인간의 탈을 쓴 물건이요, 인간이라는 이름의 ‘생명 없는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상을 만든 자나 우상을 의지하는 자가 다 우상과 같아진다는 것은 이것을 말해 주고 있다. 특히 기계문명이 발달된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람들은 추상화된 자격을 가지고 서로 남을 상대하고 있으며, 여기에 양화현상까지 겹치게 되면, 결국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상품이다(homo homini merx).’라고까지 극단적으로 표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은 그 본연의 자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인류의 위대한 導師들이 한결같이 ‘영원한 문제’로서 제시해온 것은, 바로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아상실과 이에 대한 인간의 자기발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잃어버린 ‘자아’를 다시 찾는 것이 아니다. 찾아야 할 ‘자기’, 다시 말하면, ‘참된 자기’는 사실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아를 다시 찾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꾸며진 것을 ‘자기’라고 착각하고서 그것을 숭배하고 따라가지 않는 것,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라고 인정하고서, 그것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다름 아닌 우상숭배요, 이 때에 사람들은 자신을 소외된 자로서 느끼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으로 꾸며진 것을 ‘자기’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며,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영원하고도 새로운 문제’는 바로 여기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p128~130


우리가 그 무엇인가를 행할 때에는, 반드시 그 이전의 상태가 어떠하였는가를 문제삼아야 하는 것이며, 이래야만 우리는 우리가 행하려고 하는 것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고, 따라서 그 방향도 올바르게 잡을 수 있다.
-P158~159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한 바와 같이 ‘坤’괘는 6개의 효가 모두 음(--)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완전 정지와 자기 충만을 상징하고 있다. 제 1단계의 사업을 원만히 끝내고, 이제 제 2단계의 비약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 대해서 주역은 “무한한 재능을 안으로 간직하고서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라(含章可貞).”(坤六三 爻辭)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純陰의 상태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여기에 양(ㅡ)이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완성된 상태는 스스로 새로운 움직임을 전개할 수는 없고, 움직일 수 있는 계기가 밖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역은 이것을 음효가 양효로 변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리하여 ‘곤’괘의 初六이 양효로 변하는데, 주역은 이것을 ‘復’괘로 부르고 있다. 새로운 움직임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動因이 날아와서 완전 정지의 상태에 종지부를 찍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중국의 철인들은 이것을 ‘복’ 즉 復歸라는 관념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오직 때가 이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天地生物之心’(程朱學派의 用語)이 다시 자신의 일을 해낼 수 있는 상태에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귀’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반드시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한다.
첫째로, ‘복귀’의 전단계로서는 일시적인 ‘후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항상 전면에 나와 있기만 한다면, 복귀라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동시에 여기의 후퇴가 앞날의 복귀를 전제로 하지 않고, 영영 물러서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단순한 ‘도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이 후퇴는, 개인이나 사회를 불문하고, 하나의 ‘자기 완성’의 기간이 될 것이다. 후퇴가 반드시 복귀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면, 여기의 후퇴는 복귀 후에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모든 종류의 활동을 위한 준비기간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준비가 완료되어 자기 완성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바로 이렇나 때를 지목하여 주역은 ‘含章可貞’이라는 교훈을 내리고 있다. 또한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治父는 그의 시귀에서 “산당정야좌무언 적적요요본자연(山堂靜夜坐無言 寂寂寥寥本自然)“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또한 구약의 ‘욥기’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이미 모든 창조활동을 끝냈으나 아직 ‘사탄’ 또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전을 받기 이전의, 자기충만에 가득찬 하나님의 상태를 여기에 해당시키고 있다.
셋째로, 자기 완성이 이룩되고 나면, 다음에는 일정한 계기가 주어지는대로 ‘사명감’을 가지고서 현실속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복귀의 참뜻이 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계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출애굽기’ 19:3)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출애굽기’ 19:3)

여호와가 모세를 ‘시나이’산으로 부른 것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 때에는 신비로운 사명감에 가슴이 부풀어 있는 超人과 그의 지도를 받아야 할 일반 대중의 구별이 생겨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보살’과 ‘중생’의 관계로서 파악하고 있으며, 중생속에 뛰어들어 그들을 제도함으로써, 보살은 보살로서의 구실을 다 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만일 중생이 없으면 일체의 보살은 마침내 무상정각을 이룰 수 없나니라(若無衆生 一切菩薩 終不能成 無上正覺).”(‘華嚴經’ 普賢行願品)
(…)
넷째로, 복귀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명감을 의식한 초인-구세주-보살의 ‘大發願’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의 발원은 절대자 앞에서, 그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 무엇인가를 바라는 따위의 욕망을 가지고는 올바른 복귀를 할 수가 없다. 욕망을 가지고 절대자를 대하는 경우에는 달라는 만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중생속에 뛰어들 때에는, 욕망을 가지고 그들을 대할 것이 아니라, 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여 그 속에서 바람직스러운 가치를 실현시켜 보겠다는 커다란 발원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발원은 아무나, 그리고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크나큰 발원을 한 보살이 중생들속에 뛰어든다는 것은 결코 이것을 범상한 일로서만 보아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보살과 중생이 만난다는 것은 ‘희귀한(rare)’일이며, 그러기 때문에 ‘法華經’도 부처님은 “오직 一大事因緣으로써만 세상에 출현하신다( 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 世).” 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야 하고, 동시에 그것들이 모두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범상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때가 영웅을 만드는 것이다.
다섯째로, 새로운 계기가 주어지어 복귀를 한 자는 그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하나의 도전을 이겨 내고 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새로운 사태는 또다른 도전을 가해 올 가능성이 있는 것인데, 이러한 새로운 도전마저 극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餘力이 이쪽에 보유되어 있어야 한다.
a의 도전을 받았을 때에 단순한 –a로 이에 대응한다면, 그것은 마치 모기에 물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그 자리를 탁탁 치는 것과 같이, ‘원시적-직접적인 반격’은 될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되지 못한다. 위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a와 –a가 마주치면 그저 0이 될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남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나의 왼뺨을 때릴 때에 나도 그의 왼 뺨을 때리는 것이 바로 이러한 ‘원시적-직접적인 攻防戰’이 되는 것이며, 이것으로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보살은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하여 복귀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밖으로부터의 도전을 표면에서 그대로 받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속에 깊숙이 끌어들여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이와 같이 해서 이해된 그 의미에 맞추어 자기 결정을 하고 난 다음에,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도전에 맞서 나가야 한다. 무슨 문제가 있을 적마다 그것을 그것만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일단 후퇴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참된 자기의 입장에서 그 문제의 의미를 새로이 인식하고는, 그러한 의미에 맞추어 자기의 설 땅을 결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자신을 개조하기까지 하고는, 그처럼 새롭게 된 자기를 가지고 당면한 문제 처리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귀가 된다.
-p159~163

(…)다음에 둘째는, 기복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된다. ‘우의 상’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또는 발원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그것이 위대한 도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 달라는 기원이 되는 경우에만 한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 ‘가치있는 행위’를 할 것을 다짐하고, 이에 대해 ‘마음속의 지도자’에게 가호를 구하는 경우에만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올바른 길로 인도해 달라고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세속적인 福德을 베풀어 줄 것을 바라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에는, 다시 말하면, ‘가치있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는 않고, 다만 ‘가치있는 결과’를 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에는, 그러한 요구가 비록 십자가상이나 불상 앞에서 행하여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한 ;기복’에 그치는 것이요,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상 앞에 나서기만 하면 우상숭배가 되지 않는다고 기독교인들은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모든 창조는,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오직 마음만이 능히 해낼 수 있고, 그리고 이러한 절대자를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지성뿐이다. 지성이 아니라, 욕망을 가지고 절대자 앞에 나서는 경우에는, ‘다이얼’을 돌리지도 않고서 방송을 들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감응도 얻어 낼 수가 없다. 일에 당면하여 자기로서 해야할 일은 생각치도 않고, 그저 하나님이나 부르고 부처님에게 의지하려고 하기만 하는 것은, 가장 타락한 종교인의 태도가 된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길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을 가지고 절대자 앞에 나서는 경우에는 ‘求不得苦’에 빠진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p211~212

37. 準偶像崇拜
(1) 假像的自己 하나의 도전에 대해 알맞게 응전함으로써 이것을 무난히 극복해 낸 자가 계속해서 닥쳐 오는 또 다른 도전마저 그처럼 이겨낸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참으로 희귀한 일에 속한다. 하나의 도전을 이겨내고 나면 그의 마음은 ‘포만’ (koros)의 상태에 빠지게 되고, 이 때부터 그는 주의의 사람들에 대하여 ‘거만’(hybirs)한 자세를 취하게 되며, 이리하여 그는 점차로 ‘파멸’(ate)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상태에서 그의 앞에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게 되면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 하게 되는 것이다.
(…)
기원전 5세기에 제작된 ‘아테나이’의 수많은 비극은, 승리감에 도취한 자가 어떻게 ‘코로스’의 상태에 빠졌다가, 주위의 사람들을 난폭하게 다루는 ‘휘브리스’의 자세를 취하게 되며, 나중에 온갖 재난이 돌발하여 결국 ‘아테’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는가를 주제로 삼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포만-거만-파멸이라는 3막극이 성립될 수가 있는 것은, 하나의 도전을 이겨낸 자가 ‘가상적인 자기’를 만들어 내어, 그러한 ‘자기’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힘든 문제들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는 ‘비범한 자질’이 있어서,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일을 잘 처리해 낼 수 있으리라고 방심하는데에서 불행은 시작되는 것이었다. 참된 자기라는 것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에 이룩한 업적을 ‘자기’의 것으로 돌리고, 그리고는 이처럼 조작된 자기가 천재적으로 모든 문제들을 언제 어디서나 척척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이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가 있다.
-p214~215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며, 그래야만 술과 부대가 모두 온전할 수 있다.(‘마태복음’ 9:17)
-p215

**(3) 가치판단(價値判斷) ‘나’를 우상화하여 하나의 實體로 보는 것은 ‘아의 상’(我相)에 사로잡히는 시초가 된다. 여기에서는 ‘나’와 ‘나 아닌 것’을 갈라서 보는 ‘사려분별’의 마음이 생겨나고, 그것은 더 나아가서 ‘나 아닌 것’을 배척하고 나를 수호하려는 ‘가치판단’의 태도에로 발전해 나간다. ‘나’는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에 수호해야 하고, ‘나 아닌 것’은 가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배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의 태도는, 자신의 입장이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小我에서 大我에로 그 기준을 확대한다. 나 개인에게만 좋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정당’한 것이며, 따라서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순한 ‘자아’(ego)가 ‘초자아’(super-ego)로 확대될 때에, ‘정당성’의 계기가 여기에 뛰어들게 되고, 동시에 그 주장은 當爲(ought to)의 요청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된다. 모두에게 좋으니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지는 구실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이데올로기’(ideologie)라고 부른다. 있는 그대로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있어야 할 것에 관한 이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있어야 할 것에 관한 이론’은 실제에 있어서는 ‘있는 그대로에 관한 이론’의 탈을 쓰고서 주장된다. 우리 모두가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본래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익이 된다 안 된다라는 단순한 주관적 판단으로써는 일반에게 호소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진리의 기반 위에 그 주장을 올려 놓으려고 하는 것이며, 이리하여 생겨난 것이 正義의 관념이었다.
실제에 있어서는 개별적 이익에 적합한 것이면서도, 겉으로는 普遍妥當性을 가장하고 나선다는 점에서, 정의의 二面性은 인정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까지 사람들의 머리를 깊은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가령 로마의 법학자 Ulpianus는 ‘각자에 그의 것을’(suum cuique)주는 것이 정의의 내용이 된다고 하였다. 사실 각자에 그의 것을 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보편타당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외견상의 보편타당성에도 불구하고, ‘개별적 이해관계’의 대변자로서의 다음과 같은 그 정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첫째로, 각자에 그의 것을 준다고 하지만, 그러면 무엇이 각자가 가져야 할 ‘그의 것’인가. 이에 관하여 그들은 물론 여러 가지로 그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끝까지 추궁해서 물어 나가면, 이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결국에 가서는 “그의 것은 그의 것이다.” 또는 좀더 솔직하게 “나의 것은 나의 것이다.”라는 同語反覆(tautology)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하나의 논리적 전개가 이와 같이 ‘동어반복’에 빠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그 주장의 내용이 아주 공허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요, 아무런 실질적 설명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 둘째로, 비록 동어반복에 빠지는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에 관한 이론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각종 형태로 반복해서 주장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이 현실사회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상당한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에 있어서는 개별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표면상으로는 보편타당성을 가장해서 주장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대의명분이 될 수가 있으며, 따라서 일반에 대한 설득력도 또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정치의 실천가들은 바로 정의의 이러한 측면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자기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싸움에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들은 이것을 솔직하게 그대로 털어놓으려고는 하지 않고, 자유 평등 평화 국가 민족등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자기의 주장이 ‘정의’의 원리에 맞기 때문에 자기는 승리하게 된 것이라고 내 세운다. 이리하여 정의는 强者의 專有物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모든 그럴싸 한 ‘주의’나 ‘주장’들은 모두 공허한(즉, 동어반복에 빠지는) 것이며, 我執에서 생겨난 욕구에 대하여 보편타당성을 가장하기 위해 이름만을 그렇게 붙였을 뿐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리하여 ‘金剛經’은 가령 국가를 위하여 보람 있는 일은 하겠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것조차도 我相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참된 구도자로서 취할 바 태도가 아니라고 이르고 있다.
“’수보리’야, 만일 구도자가 ‘나는 佛土를 장엄하게 하겠다’라고 말하였다면 그는 구도자라고 불릴 수 없나니라. 어째서 그런고 하면, 여래께서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은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구도자가 我와 法이 없음을 통달한다면, 여래께서는 그를 참된 구도자라고 부르실 것이니라.”

(4)哲學의 發生 대게 ‘정의’에 관한 이론은 하나의 문명이 쇠퇴기에 접어든 이후부터 생겨나는 것이 보통이다. 동시에 개별적 이해관계에 보편타당성의 탈을 씌우기 위해서는 이론적 조작술이 발달되어 있어야 하므로, 어마어마한 체계를 갖춘 ‘철학’이 생겨나는 것도 대체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周文化가 그 절정기를 지나 春秋戰國의 혼란기에 접어들자 儒-墨-道-名-法 등 각종 학파가 일어나 중국 철학의 꽃을 피웠고, 그리고 Toynbee가 말하는 ‘헬레닉’ 사회가 그 쇠퇴기에 들어서자 Platon, Aristoteles등의 이른 바 ‘영원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 생겨났었다.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여 ‘아의 상’에 사로잡힌 群像들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처참한 살육이 공공연하게 감행되는 ‘악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숭고하고 심원한 철학체계가 생겨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p227~230

(1)後退와 逃避
현실 문제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에, 그 허물이 자기에게 있다고 보고, 그리고는 올바른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자기반성 내지 자기완성에로 그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 ‘복귀’를 전제로 한, ‘후퇴’의 본질이 된다. 이에 대해 ‘도피’는 모든 허물을 남에게로 돌리고, 무가치한 물건을 버리듯이, 자기의 현실을 버리려고 한다. 자기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데, 자기의 주위와 현실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처럼 가치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 떠난다는 것이다.
후퇴에 있어서의 마음의 방향은 ‘안으로’ 자기를 겨누고 있고, 도피하는 자의 마음은 남을 원망하면서 온통 ‘밖으로’나와 있다. 후퇴에 있어서는 ‘나 때문이다’ 이고, 도피에 있어서는 ‘너 때문이다’ 이다.
-p243~244

(2)逃避의 風潮 이러한 도피의 풍조는 무엇보다도 ‘불만족스러운 자기의 현실’을 설명하는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 나라가 이처럼 볼 품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면, 도피의 심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대게 그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외부적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충분한 발전을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가 支那대륙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반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또는 자연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심지어는 倭를 비롯한 이웃 민족의 지속적인 침략을 받아 왔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힘차게 발전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 조건이 아무리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만일 그러한 부담을 이겨낼 만한 힘이 갖추어져 있다면, 그것은 도리어 우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자극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외부적 조건이 아무리 劣惡할지라도, 그것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자세 여하에 따라, 그것은 좋은 자극제 구실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이 그처럼 볼 품이 없는 것은, 그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안에’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밖으로 돌리고,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넋두리를 하는 데서부터 도피의 풍조는 싹트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연적-물리적인 자극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그 사회가 정신적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도전을 맞아 알맞게 대응해 내갈 수 있는 자기결정의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에 국한된다. 이리하여 나라의 일을 맡아 보는 자가 시행착오만을 거듭하면서 갈팡질팡하자, 뜻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버리고서 어디론가 떠나 버리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도피의 풍조는 크게 퍼져 나간다. 이렇게 되면 그 사회는 하나의 문제를 앞에 놓고서 자신의 전부의 능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킬 수가 없게 되며,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그 사회는 더욱더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p245~246

(7) 인텔리겐차
이처럼 ‘입만 살아 있는 자들’도 위정자를 위해 그 이용가치를 인정받는 때가 없지는 않다. 특히 높은 수준의 異質文明과 접촉하기 시작한 사회가 外來物에 대한 적응을 원만히 끝내지 못하고 있을 동안에는 그러하다. 그 높은 수준의 외래 문명을 되도록 빨리 흡수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자들을 양성하기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 그 밖의 나라의 높은 수준의 문명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러한 人材를 양성하는 일이 하나의 커다란 국가 사업으로 되어 왔었다.
신라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많은 유학생을 중국-일본-미국-독일 등으로 파견하였지만, 그들은 이를 테면 두 문명 사이의 다리를 놓는 중개역할을 담당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러시아의 용어를 따라, ‘인텔리겐차(intelligentsia)’라고 부른다.
제 17세기의 러시아 황제 ‘표토르’(Pyotr, Peter)는 낙후된 자기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구문명을 조속히 도입하기로 결심하였고, 이리하여 많은 유학생을 프랑스 등에로 파견하였으며, 공부하고 돌아온 그들을 나라에서 크게 등용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공직은 바닥이 났고, 이리하여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지식인의 수효는 늘어만 갔다. 드디어 제 19세기에 이르자 그들은 불평객의 집단으로 변질하였고, 이리하여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들은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는 일에 협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지식인의 이러한 변천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텔리겐차’의 기질을 가장 표준적으로 엿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텔리겐차’는 그들의 독서력으로 말미암아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이용가치가 있다고 하겠으나,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도피자인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그들은 자신이 소속해 있는 사회에 대하여 반기를 들 수 있는 잠재적인 소질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들의 몸은 비록 자기 나라 ‘안에’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밖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신적 고향은 자기가 다녀 온 그 외국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는 “프랑스에서는 이러이러한데 러시아에서는 왜 이 몰골인가.”라는 自嘲的인 불평만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인텔리겐차’는 이를 테면 전형적인 ‘內的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반면에 있어서, 그들이 소화한 외국 문물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도 기실은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아무리 프랑스를 찬양한다고 할지라도 프랑스에서는 그들을 프랑스인으로 대해 주지를 않았다. 이리하여 그들을 러시아인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닌, 허공에 뜬, 기형적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과 거의 비슷한 현상을 우리나라에서는 ‘事大主義’라는 이름으로 찾아볼 수 있다. 불교의 근원지인 인도가 지리적으로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불교인들 중에서 비굴한 事大家는 별로 생겨나지 않았지만, 유교의 중국과 근대문명의 일본 그리고 기독교의 미국은 우리와 접근해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항상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이들 국가를 통해 지식을 배워 온 그때그때의 ‘인텔리겐차’들은 때로는 파렴치하다고 할 정도의 짙은 독무(毒霧)를 뿌려 왔던 것이다. 이리하여 몇 년 동안 그 외국에 가서 공부하면서 견딜 수 없는 인종차별을 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귀국할 때에는 벌써 한국말을 다 잊어버렸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고 있다. 당시의 러시아의 상류사회에서도, 러시아 말 대신에 프랑스말을 유창하게 구사해야만, 사람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자기의 현실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도피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독주하는 자나 도피하는 자는 모두 그가 앉아야 할 자리에 앉아 있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건전한 상태에 있지 못하며, 심리학자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열등의식’(inferiority complex)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그리고 열등 의식에 사로잡힌 자는, 일면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마조히즘’(masochism)의 면을 보이는 반면에, 타면에 있어서는 남을 무참하게 학대하는 ‘새디즘’(sadism)의 면도 보여준다고 한다.
독주하는 자가 그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파렴치하다고 할 정도로 비굴해지는 것은 ‘마조히즘’의 현상이고,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국민을 상대로 싸우기까지 하는 것은 ‘새디즘’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텔리겐차’는, 선진국의 중산계급이 그 위대한 근대사회 건설에 성공한 先例를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의 볼품 없고 무력함에 대한 항상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그들이 엄연한 자기 나라의 현실을 부정하고, 기존도덕을 파괴하며, 조상으로부터의 모든 문화적 유산을 아낌없이 말살하려고 하는 것은 ‘새디즘’의 작용이고, 그러면서도 외국의 것이라면 무조건 존경하고 따르려고 하는 것은 ‘마조히즘’의 소치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가 앉을 자리를 떠나 있기 때문이고, 참된 자기로부터 소외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모든 도덕률을 봉건적이라는 한마디로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유형 무형의 모든 문화재를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말살해버리며, 그러면서도 별스럽지도 않은 외국의 문물을 금이야 옥이야 소중히 여기는 오늘의 우리 나라 일부 젊은이들의 심리 속에서도 이러한 ‘새드-매조히즘(sad-masochism)’의 병적 현상을 엿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통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모든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이고(그들은 기성세대가 말하는 6.25의 참상도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자기네들의 존재를 상대방에게 알리기(identify하기)위해 가능한 한 기발한 방법으로 소위 ‘이유 없는 반항’을 해보겠다는 점이다. 그들은 외국에는 가보지 않았으나, 이미 ‘인텔리겐차’의 나쁜 면은 모두 닮아 가고 있는 것이다.
-p258~261
(8)逃避者의 가는 길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자기 자신을 남에게 알리기 위해 발버둥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그들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현실감각은 이미 둔해져 있고, 오직 가공의 세계에서만 그들의 울부짖음은 메아리 칠 뿐이므로, 이런 상태로 얼마만큼을 지나고 보면, 그들도 다음의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살기 위해’ 부득이 현실에 굴복하여 독주자의 지시대로 따라가든가, 또는 아주 어디론가 숨어버리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일본의 대학생들은, 학생시대에는 곧잘 ‘인텔리겐차’의 본색을 드러내다가도, 졸업만 하고 나면 그들의 소위 ‘늙은 이’가 경영하는 기업체에 취직하여, 평생을 온순한 월급장이로 낙착되고 마는데, 이것든 그들이 전자의 길을 택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도 대개는 이 길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이 교통수단이 발달되어 있는 시대에는 아주 죽어버리지 않는 한, 항구적인 도피생활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동시에 이런 자들은, 자신의 능력부족 때문에, 제대로 현실에 적응해 나갈 수도 없다(모든 잘못을 기성세대의 책임으로 돌리고 도무지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실력이 없다). 이리하여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패배자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이러한 고통을 정면으로 뚫고 나가 해결할 힘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은 呪術신앙에 빠져, 어떤 신비스러운 힘의 도움을 받아 자기의 뜻을 실현시켜 보려고 공상하게 된다.
뇌물을 바치고서 관직을 얻겠다든가, 권력의 그늘 밑에서 치부해 보겠다든가, 청탁을 하여 자식을 일류학교에 입학시키겠다든가 하는 것들은, 돈이나 권력에 붙어 있는 ‘魔力’에 의지하여 힘 안들이고 목적을 달성해보겠다는 것이다. 또한 ‘경’을 손에 들고 울부짖으면서 사악한 무리들을 이 땅에서 몰아 내 달라고 신에게 매달리는 행동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것들은 넓은 의미의 ‘주술신앙’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만족스러운 결과만을 얻어 보겠다는 것은 邪道이며, 그리고 사도에 빠진 사람이 올바른 창조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술신앙이 쇠퇴기에 접어든 사회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현상이라 함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p262~263

제 14. 因果必然
(1)사람은 본래부터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생각하기 전에 먼저 행동하고, 그리고 감정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보다 앞서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이 점은 특히 원시인의 의식상태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원시인은 모든 사물을 감정적으로만 대하려고 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앞에 있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대하려고는 하지 않고, 오직 그것이 그들에게 이로운가 또는 해로운가만을 가려내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있는 그대로를 파헤쳐 보려는 호기심 같은 것은 도무지 없다. 평상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비정상적인 사건이 눈앞에 벌어졌을 경우에만 한해서 경이와 공포의 심정으로 그것을 대할 뿐이다. 그리고는 그것이 그들에게 이로운가 또는 해로운가만을 가려냄으로써 그것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끝난다. 그 이상 더 나아가 그것의 정체 같은 것을 파악해 보려는 호기심은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반면에, 원시인은 모든 것을 집단적으로만 생각한다. 개인의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아니라, ‘우리가’라고만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과는 별도로 ‘내가 이것을 했다’ 라는 생각이 별로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집단적으로만 대하고 또한 평가하기 때문에, 가령 환자가 생겨나면 가족 전체가 그 병에 대한 치료를 받았다(Kafir Indian). 아내의 병 때문에 백인의 병원을 찾은 남편은 약을 주자마자 그 자리에서 그것을 자기가 먹었다는 보고가 있다. 자기가 그 약을 먹어도 집에 있는 아내의 병을 낫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원시인은 이와 같이 자기네들의 이해관계에 직접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비정상적인 사건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는 이러한 사실이 그들의 집단에 대하여 이로운 것인가 또는 해로운 것인가만을 문제삼는다. 그리고는 이로운 것을 그들의 집단에 대한 ‘포상’(reward)이라고 보고, 반대로 해로운 것을 그들에게 내려지는 ‘처벌’(punishment)이라고 생각한다.
본래 원시인은 죽은 조상의 영혼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조상의 영혼은 그의 후손인 그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무생물까지도, 차별없이 강력하게 지배한다고 원시인은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은 조상의 영혼은 그들이 전부이고 또한 만능인 것이며, 이러한 영혼 앞에서는 그들과 동물-식물-무생물과의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인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문명인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만만한 자아의식은 원시인들에게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과 그들이 ‘동등’하다고 보든가, 또는 그것들보다 ‘열등’하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죽은 조상의 영혼 앞에서는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조상의 영혼이 그들의 한 일에 대하여 포상하기도 하고 또는 처벌하기도 한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2) 원시인은 죽은 조상의 영혼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보는 동시에, 그러한 조상의 영혼 앞에서는 사람과 그 밖의 존재와의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이리하여 그들은 모든 사물에게 요정(demon)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요정이 깃들어 있어서 그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고, 또한 일정한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본다. 이와 같이 원시인의 눈에 비친 삼라만상은,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나 식물 또는 무생물이든, 모두 생명이 있고 인격이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원시인의 이러한 해석을, Tylor를 따라, ‘애니미즘’(animism) 萬有精神論이라고 부른다. 원시인은 그들이 대하는 모든 사물을 ‘인격’이 있는 존재로 대한다는 뜻이다(personalistic thinking 人格的思考).
이리하여 물소(水牛)에 짐을 실리고 말을 타고 온 백인을 보고서, 오스트렐리아의 원주민 마오리족(the Maoris)은 물소를 백인의 아내로 그리고 말을 백인의 어머니로 보았다고 한다. 아내는 짐을 싣고 다니며 일하고, 자식을 업어 주는 것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산이나 숲 같은 것도 그들의 친족으로 보았다. 이리하여 두 부족 사이에 평화가 성립되었을 경우에 이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한 부족의 추장의 딸과 다른 부족의 추장의 아들을 결혼시키는 동시에, 그들 부족을 각각 대표하는 산들까지도 서로 결혼을 시켰다. 이와 같이 원시인은 사람과 그 밖의 모든 존재를 동질적(homogeneous)인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원시인은 모든 것을 동질적으로 보고, 또한 모든 존재에는 인격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사회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자연현상까지도 대하였다. 이리하여 가령 비정상적인 자연현상이 일어났을 경우에도, 그들은 문명인과 같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묻지 않고, 반대로 ‘누가 이렇게 하였는가’ 또는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라고만 묻는다. 가령 홍수가 진 경우에 이것을 靈泉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조상의 영혼이 내리는 처벌이라고 보고, 그리고는 누가 그처럼 불경스러운 짓을 하였는가를 알아 내려고 한다.
이리하여 그것에 대한 책임자를 찾아 나서는 그에 대하여 일정한 보복을 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자는 사람인 경우가 보통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리하여 옛날 ‘아테네’에는 각각 사람, 동물, 식물 또는 무생물을 재판하기 위한 4개의 재판소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중세의 서양에서는 사람을 죽인 개나 소, 또는 곡물을 먹어서 손해를 끼친 메뚜기와 같은 동물에 대해서도 재판의 절차를 밟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일정한 절차를 밟아 사형이 선고되면, 피고동물은 사람과 같은 방법으로 그 형이 집행되었다.
이와 같이 원시인은 모든 것을 동질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의 질서’는 그들의 ‘사회의 질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리하여 가령 메뚜기가 습격해 왔을 때에 그들은 그 중의 하나를 잡아서 이 지방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애원하였고(Liberia의 the Kpelles), 값비싼 樟腦나무를 찍으려 산에 오를 때에는 그 나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저 산에 놀러간다고 소리지르고서 떠났으며(the Sakais), 종려유(棕櫚油)를 얻기 위해 나무에 올라갈 때에는 마치 告訴人과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Serebes의 the Toradjas). 원시인은 이와 같이 그들의 사회생활의 원리에 맞추어 자연을 보고 또한 대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유물론자와 같이 사회를 자연의 일부로 보든가, 또는 Kant를 따라 사회와 자연을 갈라서 二元的으로 보고 있지만, 원시인은 반대로 자연을 사회의 일부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모든 존재를 동질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 원시인은 자연과 사회를 본질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그들의 사회적 원리에 맞추어 자연까지도 그대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원리라는 것은 즉 應報(retribution)의 원리를 말한다. 즉, 선행에 대해서는 포상이 따르고 악행에 대해서는 처벌이 따른다는 것인데, 그들은 사회뿐만이 아니라 자연까지도 이러한 원리에 맞추어 해석한다. 이리하여 풍년이 들고 또는 홍수가 지는 것까지도 그들의 선행 또는 악행에 대해 내려지는 조상의 영혼으로부터의 포상 또는 처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이와 같이만 보기 때문에, 가령 사냥에서 크게 성공하였을 경우에도, 이것을 무기가 좋았기 때문에 또는 자기의 사냥솜씨가 훌륭하였기 때문이라고는 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조상의 힘의 도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너무도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느낌이 강한 나머지, 두려움 때문에 병에 걸리는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응보’의 원리로부터는, 자기가 입은 해악에 대해서는 질적-양적으로 동등한 보복이 그 가해자에게 반드시 가해져야 한다는, 복수(blood revenge)의 원리가 또한 생겨난다. 그리고 여기의 복수는 자기보존의 본능에 따라 행하여지는 단순히 소극적인 반작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격을 받았을 때에 공격자를 물어 뜯고 달아나는 개나 고양이의 반격은 여기에서 말하는 복수와는 같은 것이 아니다. 복수는 응보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것이며, 거기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라는 當爲(ought to)의 의미가 들어 있다.
이리하여 복수를 하기 위해 출동한 원시인은 그들이 받은 피해만큼의 피해를 상대방이 입기까지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복수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요 사회적인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원시인에게 있어서 法的인 동시에 또한 道德的인 것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like for like). 원시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正義의 이념이 되는 것은 이러한 복수인 것이므로, 나중에 기독교에서 강조되는 바와 같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비겁하고 추악한 반도덕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복수를 함에 있어서 원시인은 그들이 받은 해악과 상대방에게 가한 해악을 實體化(substantialize)한다. 그러한 해악이 ‘그러한 것’으로서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러한 두 해악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동등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복수는 동질-동량의 해악의 교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로카이바족(the Orokaivas)이 복수를 diroga-mine(diroga=死魂, mine=교환) 즉 ‘죽은 사람의 혼의 교환’ 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사물을 나타난 그대로 대하지 않고 그것을 실체화하여, 그 속에 그 무슨 본질이 있다든가 또는 그것에 어떤 힘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것은, 원시인의 사고 방식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가 된다. 이리하여 그들은 가령 환자의 병을 실체화하여 일정한 의식을 거치기만 하면 그것을 환자로부터 빼어내 나뭇가지 등에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곰의 가죽을 어린애의 피부에 꺼매 주면 그 어린애는 힘이 강해진다고 생각한다(Eskimo). 그리고 이러한 ‘실체화경향’(substantializing tendency)은 나중에 더욱더 확대되어, 단순한 병이나 건강뿐 아니라, 책임이나 시간과 같은 관념, 그리고 혈족이나 종족과 같은 집단엑까지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죄인이 그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속죄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또한 오늘날 문명인이 말하는 법인-국가-민족 등에 관한 생각도 그러한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원시인은 모든 것을 실체화하고, 그리고는 응보의 원리에 맞추어 그것들을 대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언제나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 (do ut des)라는 원칙에 맞추어 행동한다. 그리고 이 때에 있어서 그들은 그들의 상대방이 누구인가, 즉 동족인가 他族인가, 사람인가 동물인가, 식물 또는 무생물인가, 심지어는 神인가에 따라,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상대방에게 그 무엇인가를 준 다음에는 반드시 그만큼 받아 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령 신에게 제물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효험이 없을 때에는 신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반항으로 돌변하는 것이었다.

(4)원시인은 죽은 조상의 영혼이 선-악에 대하여 상-벌을 내린다고 본다. 즉, 죽은 자의 영혼은 응보의 主體가 된다. 동시에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이리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들은 해석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모두 응보로서의ㅡ즉, 선악에 대한 상벌로서의ㅡ의미를 가지는 것이 된다.
그 후 종교는 발달하였고, 나중에는 수많은 고등종교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행위 때문에 죽은 다음에 포상을 받아 천국으로 가든가 또는 처벌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보는 점에 있어서는, 응보의 관념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다만 응보의 원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살아 있는 동안의 현세에서가 아니라, 죽은 다음에 맞는 내세의 일로 미루어졌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처럼 현세에서 내세에로 미루어지게 되었는가. 이러한 변천의 과정을ㅡ문헌이 많이 남아 있는ㅡ고대 그리스의 종교와 철학을 통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의 종교를 가장 자세하게 그린 문헌은 Homeros의 두개의 敍事詩(Ilias와 Odysseia)이다. 그것들에 의하면, 왕의 권한은 우주를 주관하는 최고의 신 Zeus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이리하여 왕은 항상 제우스의 총애를 받으며, 왕의 권한과 왕이 발하는 법은 제우스로부터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왕은 항상 자신의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왕이 만일 올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면, 그는 제우스의 축복을 받아 모든 것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왕이 만일 제우스에 반항하여 악을 집행하는 경우에는, 그는 제우스로부터 예를 들면 폭풍우 같은 것으로 처벌을 받는다. 그러면 제우스는 어떤 경우에 이러한 상 또는 벌을 내리는 것인가. 이 점을 밝히려는 것이 ‘호메로스’의 두 개의 서사시의 주요 동기가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빈틈 없이 주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며, 그리고 그 신이 善神인 이상 지극히 낙관주의적인 인생관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그리고 결과는 언제나 정당한 것으로 낙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경험이 풍부해지자, 악한 사람이 반드시 처벌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자일수록 도리어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현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고대 그리스의 護神學)(theodicy)은 이에 관하여, 신의 응보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실은 하나 그러나 서서히 행하여지는 것이라고 해명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사람들의 의심을 푸는 데에 충분하지는 못하였다. 악행에 대한 처벌을 받음이 없이 무사히 일생을 마치는 권력자나 부자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호메로스’ 이후부터는 이러한 응보는, 현세에서가 아니라, 내세에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이리하여 고등종교는 생겨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내세에 있어서의 천국과 지옥을 생각하는 한, 응보적 사고방식의 본래의 핵심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것이다.

(5)응보적 사고방식은 비단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의 분야에서도 인정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초기의 철학에 있어서는 자연은 여전히 사회의 원리에 맞추어 설명되었다. 물론 外界에 대한 관찰이 풍부해짐에 따라 자연(physis)을 사회(nomos)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원시인에게 특유한 응보적 사고를 그들은 끝내 버리지 못하였다.
Thales에서 시작되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우주의 근원이 되는 ‘아르케’(Arkhe)에 관한 논의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모든 사물의 밑바닥에는 아르케가 있어서, 이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아르케는 처음에는 반드시 하나(mon)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monarkhia(monarchy의 語源)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양적인 專制君主國家의 정치질서를 머리에 그리면서 우주의 기본인 아르케를 생각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이 一君萬民의 정치질서를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唯一神이라든가 조물주라는 관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올림프스의 신들(Olympic gods)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세계가 있었으며, 따라서 이 세계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혼돈’(Chaos)의 상태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비록 질서와 형상이 없었을망정, 거기에 그 어떤 세계가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혼돈 속에는 질서를 잡아 나가는 힘이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이러한 힘에 의해 Chaos는 Cosmos에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다. 여기의 ‘코스모스’는 ‘질서가 잡힌 아름다운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자가 바로 ‘올림프스의 신들’이다.
이 때의 신들은 마치 조각가와 같은 일을 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재료를 이용하여 일정한 형상에 맞추어 그것들을 다듬어 나간다. 이리하여 모든 것들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가 유지되고, 질서가 잡혀간다. 이렇게 함으로써 ‘카오스’는 ‘코스모스’가 된다. 그러므로 코스모스의 상태를 성취시키고 또한 그것을 지켜 나가는 것은 신들에게 부과된 至上의 과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코스모스에 대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이러한 관념은 사실은 그들의 ‘폴리스’(polis 도시국가)의 생활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당시의 그들의 생활은 폴리스의 시민으로서의 생활이 그 전부였었다. 당시의 그리스에는 6백 개 가량의 폴리스가 있었고, 그 영토는 도시의 성곽에서 충분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정도였으며, 인구는 수천을 넘지 않았다. 시민은 서로 안면이 있었고, 서로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Aristoteles는 인간을 ‘폴리스의 동물’이라고 말한 바 있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폴리스의 일’(즉, politics)은 그들 자신의 일이었으며, 이러한 일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는 인간으로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폴리스에는 각각 독립된 법이 있었다. 그리고 이렇나 법에 의해 각기 自治의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의 법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것’(nomos)으로서, 그것에 의해 폴리스의 질서 즉 코스모스는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법이 생명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神意의 표현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의 ‘신의 뜻’은 인간이 지나치게 많은 (즉, 균형을 깨뜨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일 절도(節度 sofrosyne) 있는 생활을 하여 자신의 분수를 잘 지키면 그것은 법을 지키는 것이 되지만, 반대로 만일 지나치게 많은 것을 차지하여 거만(倨慢 hybris)해지면, 그것은 신의 뜻에 반역하고, 법을 어기는 것이 되어 신의 반격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때에는 범법자 자신뿐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폴리스까지도 처벌을 받는다.
고대 그리스의 사람들은 폴리스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하여 코스모스에 대한 그들의 관념을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이 때에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균형과 조화였었고, 또한 질서의 유지였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한 것은 조화가 파괴되어 불균형의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신이 여기에 관여하여, 반드시 올바른 상태에로 회복시키고야 만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가령 Herakleitos는 반대자 사이의 긴장 내지 불균형이 자연 속에 있다고 보았고, 이것을 그는 전생(polemos)의 상태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이러한 반대자 사이의 전쟁 속에서 균형을 잡아 나가는 보편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여기의 로고스는 신의 뜻이며, 그것에 따라 만물은 존재하고 또한 발전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만물의 ‘운명’이요 또한 ‘필연성’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여기의 운명 또는 필연성을 eimarmene라고 그는 표현하였다. 그런에 이 말의 동사인 meriomai는 ‘몫을 차지한다’는 뜻이고, 語源學的으로 그것은 smeriomai에서 생겨났으며, 이것의 어간(語幹)인 smer는 ‘배정한다’는 뜻이고, 그것에 해당하는 라틴어 mereo는 ‘공로가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생각한 운명 또는 필연성은 ‘공로에 따라 배정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선-악에 따라 상-벌을 귀속시키는 응보의 원리 그대로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 있어서 사회적 해석으로부터 해방된 자연법칙이 원리상 확립된 것은 Leukipus와 Demokritos와 같은 原子論子 이후부터의 일이 된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들은 우주를 어떤 인격적 존재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는 보지 않고, 철저하게 기계론적인 사고(mechanism)의 밑에서, 모든 生起의 필연성만을 찾으려고 하였기 때무이다. 그런데 이 필연성(Ananke, anagke)에 관하여 ‘데모크리토스’는 이것을 원자 사이의 타격과 반격의 관계라고 이해하였다. 즉, 모든 현상의 변화는 원자 사이의 충돌과 분리, 타격과 반격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 속에서 필연성 즉 因果法則은 나타난다고 그는 보았다. 그런데 ‘레우키푸스’는 여기의 필연성을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생각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어서, 여기의 원인을 ‘데모크리토스’는 aitia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본래 ‘책임이 있다’는 뜻이었다. 즉, 원인은 결과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원자론자들은 인과법칙을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로서 보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은 선-악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상-벌을 대응시키는 응보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와의 사이의 내부적 관계를 ‘유책(有責)’으로 보는 태도는 오늘의 자연과학에까지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
(6)여러 가지 원인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원자론자들 이후부터 자연의 법칙은 독자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자연(physis)은 사회(nomos)로부터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양사회에서 기독교가 승리를 거두게 되자, 이 둘은 또 다시 조물주에로 歸一되었으며, 이러한 상태는 중세의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제 16세기에 이르러 신의 원리를 떠나 또 다시 독자적으로 자연의 법칙이 탐구되기 시작하였고, 그 성과는 제 17세기의 Newton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제 20세기에 이르러 相對性原理와 量子力學이 나타나기까지, 자연법칙에 관한 뉴턴의 관념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전해 내려왔다. 그리고 자연법칙에 관하여 뉴턴이 확립해 놓은 소위 ‘古典的 관념’ 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지금은 모두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1)客觀性의 문제
첫째는, 자연법칙에 있어서의 객관성이 문제된다. 원인에 뒤이어 반드시 결과가 뒤따르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객관적’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시 말하면, 원인과 결과와의 사이에는 단순한 post hoc(그것에 뒤이어)가 아니라 porpter hoc(그것 때문에)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에 뒤이어 반드시 그러한 겨로가가 뒤따르는 것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객관의 세계에 본래부터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관례적으로(by custom)그렇게 보기 때문이라고 Hume은 말하였고, 그리고 Kant는 인과법칙이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이 인과율(因果律 Kausalitat)에 맞추어 대상을 그렇게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인과법칙을 객관의 세계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주관의 세계의 문제로서 바꿔 놓은 것이 된다.
사실 인과법칙을 객관적이라고-즉, 객관의 세계에 본래부터 그러한 법칙이 있다고-보는 것은 원시인의 응보적 사고 방식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시인에 있어서 응보의 원리는 죽은 조상의 영혼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러한 영혼이 하는 일은 그들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러한 일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객관적으로 그 무엇인가가 이루어진다는 관념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초월적인 권위(權威)가 있어서 그것이 선악에 대해 반드시 상벌을 귀속시킨다고 생각하는 것과, 원인에 뒤이어 결과가 뒤따르는 것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객관적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그 사고방식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된다. 우리의 주관과는 독립해서 그 무엇인가가 그것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실체화경향’이 그 모두에게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성의 사고방식이 ‘흄’과 ‘칸트’ 이후부터는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2) 等價 의 문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원인과 결과는 같다’(causa aequat effectum)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Robert Mayer에 의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발견된 이후부터는 물리학상의 확고한 진리로서 인정되어 오고 있다. 본래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 있어서는 同類 사이에서만 작용과 반작용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러 ‘원인과 결과는 같다(동류)’로 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에너지가 없어지고 그 대신 다른 종류의 에너지가 생겨난다는 것은 결코 그러한 두 종류의 에너지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Carnot의 熱力學에 의하면, 열을 다른 에너지로 바꿈에 있어서는 상당한 분량의 열이 의도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그대로 없어진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원인과 결과가 같다’라는 뜻으로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類에는 類가 따라야 한다는 응보적 사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원시인은 선악과 상벌을 모두 실체화하여 그것들 사이의 等價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3) 對的性格의 문제
다음에는 인과법칙에 있어서의 대적 성격(bipartite character)이 문제된다. 원인과 결과는 서로 1대1로 상대하고 있어서, 하나의 원인은 그것과 대응하는 하나의 결과만을 가지고, 그리고 하나의 결과는 그것과 대응하는 하나의 원인에로만 소급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결과에는 무수한 원인과 관련되어 있고, 그리고 하나의 원인으로부터는 무수한 결과가 생겨난다. 이리하여 여기에 복잡하게 얽혀 있고 또한 끝없이 계속되는 ‘因果의 連鎻’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어느 것이나 원인 아닌 것이 없고, 또한 그 어느 것이나 결과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연속체(連續體 continuum)의 흐름 속에서 어느 하나를 지목하여 원인이라 하고 다른 또하나를 골라서 결과라 하고는, 그것들만을 서로 대응시켜 거기에서 인과관계를 인정하려고 하는 것은 확실히 人爲的造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행위의 흐름 속에서 어느 하나를 골라 악행이라고 규정짓고, 그것에 대해서만 처벌을 대응시키려는 응보적 사고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4) 先後關係의 문제
인과관계에 관한 일반의 생각에 의하면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그 뒤를 따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죄가 시간적으로 먼저 있고 벌이 그 뒤를 따른다고 하는 응보의 원리 그대로의 재판(再版) 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후관계의 생각은 오늘날의 자연과학에 있어서 점차로 ‘함수 상의 의존관계’(functional dependency)의 관념으로 바꿔지기에 이르렀다. 가령 태양의 주위를 公戰하는 行星을 예로 들기로 한다면, 이에 관해 Kepler가 작성한 방정식에 있어서는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와 행성의 ‘속도’등이 하나의 함수관계를 이루고서 한몫에 규정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先行한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억지로라도 선후관계를 따지기로 한다면, 태양으로부터의 거리가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서 지구는 그러한 속도로 공전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는 반대로 지구가 그러한 속도로 공전하기 때문에 태양으로부터 그러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결국 이것은 자연법칙에 관하여 선후관계를 문제 삼는 것이 무의미함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자연과학이 시간적 선후관계의 생각을 버리고, 자연법칙을 점차로 함수 상의 의존관계로 표시하기 시작한 것은, 원시인의 사고방식에 뿌리박은 응보관념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 위대한 일보 전진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5) 絶對的必然性의 문제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연법칙을 절대적 필연성의 법칙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일정한 원인에 대해서는 일정한 결과가 ‘반드시’ 뒤따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며, ‘因果必然’이라는 말이 관용구(慣用句)처럼 사용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자연법칙이 진리라고 인정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절대적 필연성 때문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 법칙을 우리는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법칙에 관한 이러한 신념도 오늘날 量子力學이 성립되기에 이르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절대적 필연성의 요청에 맞추어 하나의 운동의 장래의 상태를 예언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의 운동상태를 기술하는 2개의 변수-예를들면, 위치와 속도, 또는 시간과 에너지-를 동시에 모두 확정 지을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의 물체가 지금 어디에 위치하고 있고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확정지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한 시간 후, 또는 1년 후에 그 물체가 어디 있을 것인가를 예언할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Lamarck는 지구에 관한 하나의 방정식만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는 먼 미래에 있어서의 지구의 상태를 예언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巨視的 현상에 있어서는 이러한 일이 원리상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微視的 현상에 있어서는, Heisenberg의 ‘불확정성원리’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러한 2개의 변수 중의 하나를 확정지으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불확정해지며, 따라서 그 운동의 장래의 상태를 확정적으로 예언할 수는 없고, 다만 수많은 실험을 통하여 그것의 장래의 상태를 통계적-확률적으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지극히 작은 원자 안에서 電子와 같은 물체가 빛의 속도(1초에 30만km)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의 운동상태를 절대적 필연성의 요청에 맞추어 추적(追跡)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거시적 현상에 있어서도 절대적 필연성은 ‘近似的’으로만 인정될 뿐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오늘날 자연법칙의 의미는 절대적 필연성에서 ‘통계적 확률성’에로 수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원시인의 응보관념으로부터 우리가 참으로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여기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7) 본래 원시인은 자기네들의 이해관계에 직접 관련이 있는 비정상적인 사건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는 그것이 그들의 집단에 대하여 이로운가 또는 해로운가만을 알려고 한다. 그리고 이로운 것을 포상이라고 보고 해로운 것을 처벌이라고 보며, 이러한 상-벌을 그들의 어떤 행위에 대하여 내려지는 초월적 권위의 반작용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러한 반작용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누구도 그것에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리하여 선-악이 있으면 반드시 상-벌이 뒤따르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것을 무가내하(無可奈何)로 지배하는 절대성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볼 때에,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법칙이 그것 자체로서 어딘가에 있다고 보는 사고방식은 역사 이전부터 인류가 가지고 있던 숙명적인 습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후 인간이 점점 합리적으로 되어 가자, 자기네들에게 직접 고통이나 쾌락을 주는 것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호기심’이 많아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비로소 실천으로부터 독립된 과학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상-벌이라고만 해석되었던 것이, 인간의 非行이나 공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단순한 ‘사건’이 되었다.
본래는 ‘책임이 없으면 처벌이 없다’라고 되어 있던 것이 이때부터는 ‘책임이 없으면 사건이 없다’로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말로 aitia는 책임을 의미하기도 하고 원인을 의미하기도 하였으므로, 이것은 그대로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다’로 되었다. 이리하여 이 때부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因果法則 비슷한 것이 탐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과법칙을 사람들이 찾아 나서기는 하였으나, 그러면서도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권위의 意志라는 생각을 그들은 끝내 버리지 않았다. 초월적인 권위가 있어서 모든 사물을 그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그러한 움직임의 법칙이 즉 인과법칙이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이 생각하는 인과법칙의 배후에는 항상 그 법칙대로 움직이도록 명령하고 조종하는 명령자 내지 ‘作者’가 있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다(인격적 사고 personalistic thinking). 따라서 그러한 인과법칙은 원시인이 응보의 원리에 대하여 인정한 ‘절대적 필연성’(ananke)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초월적 권위는 자기가 뜻하는대로 ‘반드시’ 이루어 놓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룩된 과학의 발달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자연법칙에 대해 인정하는 절대적 필연성의 특성을 그것이 끝까지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권위가 있다고 보는 ‘인격적 사고’를 어떤 형태로이든 그것이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법칙의 이러한 특성은 최근의 ‘양자역학’에 이르러 수정되기에 이르렀으나, 그러나 그것에 따르는 일반 철학의 재조정(再調整)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처음에 응보의 원리와는 별도로 인과법칙이 탐구되기 시작하자 여기에 ‘사회로부터의 자연의 분리’라는 생각이 수반하게 되었다. 원시인에 있어서는 자연은 사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러한 자연을 따로 떼어 그것에 특유한 법칙을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권위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초월적 권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의 명령에는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보는 자연은 이러한 초월적 권위가 하라는대로 잘 순응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고 인정되었다. 사람인 경우에는 명령에 불복종하는 非行이 있을 수 있지만, 자연에 있어서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기독교 신학에 이르러 더욱 확고해지기에 이르렀다.
신은 전능하기 때문에 자연은 신의 명령(즉, 장녀법칙)에 절대복종한다. 따라서 자연에 대해서는 불복종의 경우에 과해질 ‘제재’(sanction)를 규정할 필요가 도무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신의 뜻에 거역하여 죄를 짓는 일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사회법칙은 처벌과 포상을 규정하는 규범(規範)으로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즉 기독교 신학이 내세우는 이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우주관의 밑에서 자연과 사회를 갈라서 보는 二元論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이원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배후에 있는 ‘인격적 사고’가 청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그리고 자연법칙을 조물주의 명령으로 보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신을 중심으로 한 一元論에 귀일되는 것이며, 원시인의 응보관념이 그러하듯이, 여기의 자연법칙도 규범으로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절대적 필연성의 법칙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가 된다. 다만 자연은 이러한 규범을 잘 지키는 ‘모범생’인데 반하여,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제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간의 변천과정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들을 표현함에 있어서 사람은 처음에 ‘언어’를 사용하였다. 동시에 ‘애니미즘’의 사고방식에 잠겨 있던 원시인들은, 그들에게 특유한 영혼 신앙과 응보의 원리로 말미암아, 이러한 사건들을 ‘神話’의 형식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인간의 경험이 풍부해 지고, 그리고 경험된 것을 체계적으로 파악해 보려는 의욕이 강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경험된 것을 언어로써 남김 없이 표현하는 데에 부족함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이 참으로 알고자 한 것은, 사실과 사실 사이의 ‘類似性’ 뿐만이 아니라, 자연 속에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질서’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완전히 표현하는 데에는 언어는 역시 불완전하였던 것이다.
가령 우리가 ‘A는 M이다’ 라고 말하였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여기의 A와 M의 두 낱말은 각각 여러 개의 이미지(image)를 가지고 있다. 가령 A에는 a,b,c등의 그리고 M에는 m,n,p등의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낱말에는 다음 낱말과 연결되기에 적합한 이미지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리하여 위의 문장을 가령 ‘a는 m이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잘 통하지만 가령 ‘c는 p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든가 또는 반대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가령 ‘大學(유교의 경전) 은 四書(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하나이다’라는 문장을 ‘대학(college)은 4개의 책 중의 하나이다’라는 뜻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에, 일정한 질서를 체계적으로 표현하려고 함에 있어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언제나 편리하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자연의 질서를 완전히 표현함에 있어서는 어떠한 수단이 강구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관하여 ‘數’라는 새로운 상징수단을 사용함으로써 과학적인 관념을 만들어 내는 데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Pythagoras였다. 그는 사물의 존재와 그 성질이나 관계를 모두 수로써 표현하려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행복’을 7, ‘법’이나 ‘정의’를 4라고 상징하지만, 이것들이 모두 그에게서 유래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든 영역에 걸쳐 수라는 상징수단을 철저하게 사용하게 되자, 인간의 상징능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본래 ‘수’에 관해서는 단일의 수 또는 고립된 수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수는 언제나 상대적이며,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수는 체계적인 질서 속에서의 하나의 위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수는 그것 자체로서의 존재를 가지지 않으며, 그것의 의미는 수의 체계 전체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로써만 결정될 뿐이다. 동시에 自然數의 계열은 끝없이 계속되며, 그것이 가지는 기본적인 관계는 하나의 수(n)를 곧 그 뒤에 오는 수(n+1)와 연결시키는 관계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하며, 그 어느 한 모퉁이에라고 不調和의 陰()이 그늘지는 일이 없는, 참으로 질서정연한 관계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를 인간이 상징수단으로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진정으로 感性의 세계에서 理性의 세계에로 건전하게 진일보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피타고라스’에 있어서의 수는 아직은 整數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수의 체계의 특징은 그것의 완전한 명석성(aletheia)에 있다. 고대 그리스 초기의 자연철학자들은 모든 존재와 모든 인식에 있어서의 완전한 조화와 명석성만을 찾으려고 하였던 것인데, ‘피타고라스’도 이러한 조화와 명석성에 맞는 수로서 오직 정수만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학파가 直角三角形에 있어서 사변(斜邊)과 다른 두 변과의 사이에 공약수(公約數)가 없음을 발견하자 그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약분(約分)할 수 없는 길이를 발견하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arreton 즉, 無理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와 같이 ‘조화’와 ‘정수’만을 생각하였던 것은, 그들이 아직도 類에는 類만을 대응시키는 응보의 관념에 그대로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이와 같이 산술(算術)과 기하(幾何), 다시 말하면, 정수(整數)(즉, 離立數)와 연속량(連續量) 사이에는 아무런 조화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수’를 단순한 상징수단으로 보지 않고 實體的存在로 보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은 ‘무리수’와 같은 새로운 상징수단의 창조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는 그것과 1대1로 대응(isomorphieren 동형대응)하는 어떤 사물의 이미지적인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물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상징(symbol)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는 간단한 하나의 관계의 상징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관계의 관계의 상징, 또는 관계의 관계의 관계의 상징 등등이 될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수와 같은 1차적 관계의 상징 뿐 아니라, 무리수와 같은 2차적 또는 3차적 관계를 상징하는 수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점에서, 기하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연장(延長)과 수와의 관계를 성취시킴으로써, 철학과 과학의 발달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은 解析幾何學의 창시자인 제17세기의 Descartes였다.
해석기하학에 이르럴 종래에는 그 연결이 불가능하였던 기하학적 연장과 이립수, 다시 말하면, 무리수와 정수의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확립된 것은 ‘연속’이라는 개념이었다. 가령 1과 2라는 두 정수의 중간에서 생각될 수 있는 무수한 分數와 무리수를 이러한 두 정수에 좌표계(座標系)의 곡선을 통하여 연결시킴으로써, 우리는-인접해 있는 두 수의 차(差)를 여하히 작은 수보다도 더 작게 할 수 있다는-연속의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수가 가지는 상징적 기능을 십분 활용함으로써, 물체의 운동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것은 Leibniz와 Newton에 의해 각별로 만들어진 微分學 과 積分學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통틀어 解析數學이라 한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해석수학은 그 후에, 自乘함으로써 ()數가 된다는-일상생활의 경험으로써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虛數’까지도 포함한, 복소수함수(複素數函數)(즉, 타원함수楕圓函數)의 이론에까지 발전해 나갔다. 이리하여 수라는 상징수단으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자연현상의 전부의 영역에 미친다고 생각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이러한 수의 체계는 참으로 합리적이요 논리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상징수단에 대응하는 자연현상도 그만큼 합리적이요 논리적인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엄격한 ‘결정론’(determinism)에 따르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모든 것이 일정한 數式에 따라 움직이도록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에 대한 고전적 관념 속에 ‘객관성’과 ‘절대적 필연성’이 그 내용으로 들어 있었던 것은 이러한 단계의 수학적 상징에 그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대하는 현실은 본래는 우리의 思惟로써 그 전부를 다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수학적 상징을 가지고 대할지라도 그것으로써는 다 포섭할 수 없는 잔여물(殘餘物)이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나는 법이다. 이리하여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승승장구하던 해석수학은, 지금까지는 물질과 운동을 설명함에 있어서 참으로 유용하였으나, ‘線스펙트럼’(line spectrum)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이르러 드디어 좌초(坐礁 )하고 말았다.
종래의 고전적 電子論에 의하면, 原子核의 주위를 일정한 週期로 돌아가는 電子의 운동에 있어서, 그 전자의 에너지는 점차로 감소되고, 따라서 그 궤도도 그만큼 원자핵에 가깝게 수축되며, 동시에 그 원자에서 방출되는 光의 스펙트럼선은 매우 넓은 폭을 가지게 되리라고 예상되었었다. 그러나 실제로 원자로부터 방출되는 빛을 프리즘을 통과시켜 알아보니, 그것은 元素를 따라 각각 다른 선스펙트럼을 이루고 있었고, 이에 따라 각종 원소는 지극히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관해 Poincare는, 종래의 수학적 상징에 의하는 한, 누구도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의 수학적 상징으로써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발견되었고, 특히 생물학적 현상에서는 그러한 殘餘가 더욱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과학자들이-‘연속성’과 ‘필연성’에 바탕을 둔-因果的決定論에 완고하게 집착해 있었던 것은, 비록 원시적인 응보관념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인격적 사고’를 그들이 끝내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 바탕을 둔 神意的決定論이 그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는 理神論을 주장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자연해석이 ‘인격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라이프니츠의 단자론(單子論) (Monadologie)에 나타난 ‘예정조화론(豫定調和論)’은 인격적 사고에 의하지 않고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케플러는 ‘수학적 방법으로 진행하는’ 神은 모든 行星에게 ‘기하학적 아름다우무’을 따르도록 명령하였다고 말하였고, 갈릴레오는 자연을 ‘신의 질서의 집행자’라고 보았으며, 뉴턴은 신의 뜻에 의해 자연법칙은 설정되었다고 말하였다. 근대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이들 지성인은 조물주에 의해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기독교 신앙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물리학의 이론 전개에 직접적인 前提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인격적 사고의 흔적을 그들은 감출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들이 발견한 자연법칙에는, 원시인의 응보원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절대적 필연성’이 그 필수적 요소로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연속’의 개념에 바탕을 둔 해석수학은 새로운 물리학에 의해 배척을 받고 있다. 이리하여 아인슈타인은 그의 ‘일반적 상대성원리’를 발전시킴에 있어서 ‘리이만 기하학’이라는 새로운 상징수단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원자의 내부에서는 연속개념을 적용할 수가 없으므로, 미시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이젠베르크는 새로운 代數的 상징을 만들어냈다. 이리하여 그는 양자역학의 최초의 형태인 行列力學(matrix mechanics)을 확립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계속된 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하여 미시적 세계의 非連續性과 非因果性은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巨視的 세계에 있어서는 여전히 고전적 물리학의 체계가 지배하고 있으며, 그러한 두 체계를 통일하는 종합적인 새로운 자연관은 아직 생겨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원시인의 응보적 사고로부터는 부분적으로만 벗어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실정이다.

(9) 현실을 설명함에 있어서 원시인은 언제나 모든 사물을 선-악에 따르는 상-벌의 뜻으로만 보았다. 따라서 이 때에 그들은 이러한 상벌을 내리는 초월적 권위를 항상 머리에 그렸고(인격적 사고), 동시에 그들이 대하는 모든 사물 속에는 그러한 선악 또는 상벌의 뜻을 지니는 일정한 ‘성질’ 내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실체화경향). 모든것을 實體化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그것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의 본질 내지 실체가 있다고 보는 사고방식과, 눈에 보이지 않는 인격에 의하여 우리의 앞에서 전개되는 모든 현상이 계획되고 성취되었다고 보는 사고방식은, 본래는 이와 같이 원시시대로부터 우리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 있어서는 우주의 법칙인 ‘로고스’(logos)가 문제되었다. 이것은 만물의 존재법칙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에는 만물을 그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主宰者 내지 神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었다. 만물로 하여금 그렇게 존재하도록 하는 원인 내지 본질이 있다고 보는 ‘실체적 사고’와, 만물로 하여금 그렇게 존재하도록 만들어 주는 주재자 내지 신이 있다고 보는 ‘인격적 사고’가, 로고스라는 이 말 속에 함께 엉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개의 사고방식이 원시인의 응보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함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이 로고스는 그 후 Platon에 이르러 이데아(idea)가 되었고, 다음에 Aristoteles에 이르러서는 에이도스(eidos 形相)가 되었다. 이와 같이 명칭이 달라짐에 따라 인격적 요소는 제 2선으로 물러났지만, 그것의 실체화 경향은 도리어 크게 두드러지게 되었다. 모든 존재가 ‘그것’때문에 그렇게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그 존재의 본질 내지 실체가 무엇인가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본체 내지 제1원인을 끝까지 찾아들어가면 결국은 주재자 내지 신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통상적인 이론 전개에 있어서는 그러한 인격을 직접 내세우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기독교 시대에 들어서자 인격적 사고는 다시 제1선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 모든 것을 신의 攝理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기본 입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양의 ‘형이상학’(Metaphysik) 내지 ‘존재론’(Ontologie)은 이러한 전통의 바탕 위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항상 찾으려고 한 것은 모든 존재의 본질-본체-실체-제1 원인이었으며,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것이 ‘객관의 세계’에, 다시 말하면,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에는 관계 없이 그것 자체로서 영원히 변함없이 實在한다고 믿었다. 이것은 가장 완전한 형태의 실체화경향인 것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경향의 배후에 어떤 형태로이든 인격적 사고가 숨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자연법칙의 필수적 요소로서 그것의 ‘객관성’과 ‘절대적 필연성’이 인정된 것은 이러한 두 사고방식(즉, 인격적사고와 실체화경향)에 입각함으로써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물론 자연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실체화경햐을 배제해 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흄은 인과법칙에 관하여, 원인에 뒤이어 결과가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 주는 힘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관례적(慣例的)으로 그렇게 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인과관계를 객관의 세계에서 주관의 세계의 문제로 바꿔 놓았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의 ‘비판주의’의 입장에서 새로운 자연해석을 가능하게 한 사람은 칸트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사람에 의해 참으로 제거된 것은 자연법칙에 있어서의 ‘객관성’일 뿐, 그것의 ‘절대적 필연성’은 아니었다.
칸트에 의하면,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계기(繼起)의 관계는 대상을 단순히 관찰하기만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주관이 여기에 개입하여 그렇게 구성함으로써만 비로소 인정되는 것이다. 현실 속에 본래 인과법칙이 있어서 그것을 그대로 모사(模寫)(abbilden)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함에 있어서 우리의 주관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즉, 先驗的인 a priori) 인식형식에 맞추어 그것을 인과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因果律(Kausalitat)은 경험에 의해 주어진 것을 그렇게 결합시키는 ‘A priori’한 인식형식으로 보아야 한다. 인과법칙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주어진 것을 ‘인과율’에 맞추어 결합함으로써 인과법칙은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과법칙은 종래에 생각되듯이 존재론상의 법칙인 것이 아니라, 다만 인식론상의 요청(要請)(Postulat)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과법칙에 관한 논의를 존재론의 문제로부터 인식론의 문제로 돌려 놓은 것은 그것으로서 확실히 하나의 進一步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자연법칙에 그처럼 오랫동안 붙어 다니던 ‘객관성’은 비로소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이 그것을 알든 모르든, 자연법칙이 본래부터 그러한 모습으로 자연 속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소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법칙에 있어서의 ‘절대적 필연성’만은 칸트에 있어서 아직 제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선험적 인식형식의 하나로 ‘인과율’을 들고 있는 것은 이 점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인과율인가. 우리의 주관은 어째서 인과적 결정론에 맞추어서만 사물을 인식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것은 아마 그가 알고 있던 수학은 데카르트 이래의 해석수학뿐이었고,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자연관은 뉴턴의 물리학에서 유래한 고전적 우주관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인과율을, 다시 말하면, 절대적 필연성을 인간이 선험적(a priori)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형식이라고 보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자연법칙의 절대적 필연성은 오늘날 미시적 현상에 관해서는 용납될 수 없음이 알려지었다. 다시 말하면, 원자 내부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은 이미 그 발붙일 곳을 잃고 말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거시적 세계에서 아직도 인과율이 논하여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은 그것이 해석수학과 고전적 물리학의 배경 위에서만 가능하였던 것이므로, 그것은 참으로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경험적(a posteriori)이었던 것이다. 해석수학과 고전적 물리학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물의 움직임을 절대적 필연성에 맞추어 인식하도록 ‘요청’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해석수학과 고전적 물리학의 배후에는 아직도 ‘인격적 사고’가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칸트와 같이 ‘근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지성인들’까지도 원시인의 응보적 사고로부터 본질적으로는 벗어 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응보적 사고방식이 그들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모든 의식활동을 숨어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적 필연성을 구비해야만 ‘진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시인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참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연법칙에 있어서의 ‘객관성’뿐이 아니라, 그것의 ‘절대적 필연성’까지도 거부하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절대적 필연성에 대한 거부는 오늘날 미시적 현상에 관해서는 가능하게 되었다. 원자 내부의 세계에서는 절대적 필연성이 진리가 될 수 없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는 아직 자연현상 전반에 걸쳐서는 성취되지 못하고 있다. 원시적 사고에 뿌리박고 있던 ‘因果-必然’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에 우리는 지금 부분적으로만 성공하였을 뿐이다.
(10) 돌이켜 생각해 보면, 현실을 설명한다는 것과 이것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결부시킨다는 것이 반드시 일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인과율’은 인식론상의 ‘요청’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인식주관이 그렇게 대하려고 한다는 것일 뿐이다. 사실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렇게 움직이는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과의 관계’는 사실 속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 속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보아야만 하는가.
하기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변화’라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된다. 가령 유능한 정치가가 나타나 적절한 경제정책으로 가난에 쪼들리던 나라를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켰다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그 정치가의 ‘활동’과 국가의 ‘발전’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결부시킴으로써, 그러한 변화를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러한 활동 때문에(because) 그러한 발전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하나는, 이러한 변화를 일으킨 ‘作者’가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 정치가의 활동이 있었고 그리고 국가의 발전이 있은 것은 사실이고, 따라서 “이런 일이 있었고 그리고 이런 일이 있었다(是事有()是事有).”라고 말하는 정도라면 무방하겠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 누군가를 끄집어 내어, 그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 정치가의 활동은 물론 중요하였지만, 그러나 수많은 기업가나 일반 국민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그러한 성과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작자’를 개입시켜 사물을 고찰하는 것은 본래는 원시인의 ‘인격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또하나는, 그 무엇인가가 그것으로서 ‘常住’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 정치가의 훌륭한 경제정책이 있었고 또한 국가의 경제발전이 있은 것은 사실이고, 따라서 “이런 일이 생겨났고 그리고 이런 일이 생겨났다(是事生有是事生).”라고 말하는 정도라면 무방하겠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경제 정책’이나 ‘경제 발전’이라는 것이 그런 것으로서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나라의 제반 조건을 떠나서 하나의 경제정책이 그것으로서 독자적으로 성립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리고 정치나 문화의 분야에서의 생활향상을 떠나서 경제만이 발전이 생겨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그런 것으로서 있다’ 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그런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현실을 대하는 것은 본래는 원시인의 ‘실체화경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작자’와 ‘상주’는 원시인의 의식상태에 그 근원을 두는 것이었으며, 원시인은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절대적 필연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선악과 상벌이 그런 것으로서 있으며(상주), 선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상벌이 따르도록 꾸며진다는 것이다(작자). 이리하여 ‘인과필연’이라는 관념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올바르게 보고 또한 대처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원시인에게서 비롯된 ‘인과필연’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누군가가 있어서 이 현실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보는 ‘인격적 사고’와,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이런 상태에서 언제까지나 그런 모습으로 있다고 보는 ‘실체화 경향’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의 표현을 따르면 人相과 法相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포함하여 현실을 그렇게 만든 작자가 있다고 보는 것이 ‘인상’이고, 그리고 그 무엇인가가 그런 것으로서 상주해 있다고 보는 것이 ‘법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상’은 모두 我相 즉 ‘자아의식’에서 유래한다고 불교에서는 말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아의식(즉, 제7식)이 생겨나면 우리는 ‘인격적 사고’와 ‘실체화 경향’을 따르게 되며, 이 때부터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망상과 고통이 생겨난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불교에서는 ‘아상’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은 인상과 법상, 다시 말하면, 인격적 사고와 실체화 경향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동시에 이것은 ‘인과필연’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라는 뜻도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원시인에 특유한 응보적 사고를 멀리하라는 뜻이다. 이렇게 벗어나고 해방되어야만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주어진 문제를 잘 풀어 나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때에 비로소 우리는, ‘때문에’ 에 걸리지 않고, ‘어떻게’ 에만 우리의 정신력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362~396 전문.

시에서 구두점의 사용

Posted by 히키신
2016. 9. 8. 18:54 글쓰기와 관련하여

1.
시에서 하나하나의 말이나 부호는 모두 의미를 갖는다.
시어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듯이, 문장 부호도 하나하나 의미가 있을 때 사용된다. 시에서 중요한 것은 문법이 아니라 감동을 얼마나 강하게 전달하느냐 이다.

마침표가 들어가면 시를 읽는 사람 입장에서 한 호흡 정도 쉬어갈 수 있다. 연과 행을 나눌 때는 내용과 함께 호흡도 끊어진다. 하지만 내용은 끊기는 것이 아닌데 호흡을 끊어야 할 때, 혹은 눈으로 보기에 붙어있는 것이 좋은데 분명 둘 사이에 이질감이 필요할 때는 마침표를 사용한다. 쉼표도 쓰이지만 마침표는 보다 더 강렬한 느낌이 든다.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을 때처럼 앞 말과 뒷말을 끊어버리는 효과가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아예 '이 시는 일상적인 느낌이 들도록 쓰고 싶다.'는 작자의 의도 하에 문장부호가 문법에 맞게 정석대로 쓰는 때도 있다.

정리하자면 시를 쓸 때는 '문장부호니까 써야지' 보다, '문장부호를 여기서 이렇게 사용하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겠지?'라는 적절한 의도를 갖고 문장부호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흐름을 유지하려 한다면 마침표를 생략할 것이다.

2.
“… 산책은 나의 종교, …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방,…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창밖, 가을비 내린다, 삼십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심보선의 ‘삼십대’라는 이 시는 원래 이보다 더 길다. 이 시에는 마침표가 없고 전부 쉼표로만 이어져 있다. 산책과 쉼표는 아주 잘 어울린다. 산책은 무엇인가를 끝맺기 위해서나 강렬한 느낌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쉬엄쉬엄 감정과 생각을 숙성하는 것이다.

3.
시는 마침표나 느낌표, 쉼표의 사용이 산문과는 전혀 다르다.
산문에서 마침표의 기능은 문장의 종결기능을 담당하며, 쉼표는 문장의 호흡 조절기능이 있다.
그러나 시에서 마침표의 경우 문장의 종결기능이라기보다 강한 긍정이나 강한 부정을 의도한다.
[아 바야흐로 때는 봄.]
이럴 때 봄 뒤에 찍은 마침표는 문장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쉼표의 경우 시에서는 문장의 호흡조절이 아니라 그 문장의 약한 영탄이나 감탄을 나타내는 기능을 한다.
[순아, 보고싶구나]
순아 뒤에 찍힌 쉼표는 호흡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고 보고 싶은 순이에 대한 그리움을 더 강하게 나타내는 기능이다.

[그리고 봄이 왔다!]
[다]에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 사용은 봄이 왔음을 강렬하게 전달하는 기능이다.
또한 문장 앞에 [아, 어, 오,]등과 같은 감탄조사를 사용할 경우 일반적으로는 [아! 오!]등과 같이 느낌표를 부여하는데 이 경우는 이미 [아]나 [오]가 감탄사이기 때문에 느낌표를 사용하였을 경우 감탄사의 중복현상이 일어나서 문장에 군더더기가 붙게 되는 것이다.

보통 시집에서 부호 사용 작품이 드문 것은, 부호를 사용할 경우 작자의 감정이 드러나는 오류를 방지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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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 여행으로의 초대 (L'invitation au voyage)

Posted by 히키신
2016. 8. 30. 22:58 Poetry#1

여행으로의 초대


샤를 보들레르


아이야, 누이야,
꿈꾸어보렴
거기 가서 함께 살 감미로움을!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으리,
그대 닮은 그 고장에서!
그곳 흐린 하늘에
젖은 태양이
내 마음엔 그토록 신비로운
매력을 지녀,
눈물 통해 반짝이는
변덕스런 그대 눈 같아.

거기엔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와 고요, 그리고 쾌락뿐.

세월에 닦여
반들거리는 가구가
우리 방을 장식하리;
진귀한 꽃들,
향긋한 냄새,
용연향의 어렴풋한 냄새가 어울리고,
호화로운 천장,
깊은 거울,
동양의 찬란함,
모든 것이 거기선
넋에 은밀히
정다운 제 고장 말 들려주리.

거기엔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와 고요, 그리고 쾌락뿐.

보라, 저 운하 위에
잠자는 배들을,
떠도는 것이 그들의 기질;
그대의 아무리 사소한 욕망도
가득 채우기 위해
그들은 세상 끝으로부터 온다.

- 저무는 태양은
옷 입힌다, 들과
운하와 도시를 온통
보랏빛과 금빛으로;
세상은 잠든다.
뜨거운 빛 속에서.

거기엔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와 고요, 그리고 쾌락뿐.


*****
'악의 꽃' 우울과 이상 편
문학과 지성사 윤영애 옮김.
*****

L'invitation au voyage


Charles Baudelaire


Mon enfant, ma soeur,
Songe à la douceur
D'aller là-bas vivre ensemble !
Aimer à loisir,
Aimer et mourir
Au pays qui te ressemble !
Les soleils mouillés
De ces ciels brouillés
Pour mon esprit ont les charmes
Si mystérieux
De tes traîtres yeux,
Brillant à travers leurs larmes.

Là, tout n'est qu'ordre et beauté,
Luxe, calme et volupté.

Des meubles luisants,
Polis par les ans,
Décoreraient notre chambre ;
Les plus rares fleurs
Mêlant leurs odeurs
Aux vagues senteurs de l'ambre,
Les riches plafonds,
Les miroirs profonds,
La splendeur orientale,
Tout y parlerait
À l'âme en secret
Sa douce langue natale.

Là, tout n'est qu'ordre et beauté,
Luxe, calme et volupté.

Vois sur ces canaux
Dormir ces vaisseaux
Dont l'humeur est vagabonde ;
C'est pour assouvir
Ton moindre désir
Qu'ils viennent du bout du monde.
- Les soleils couchants
Revêtent les champs,
Les canaux, la ville entière,
D'hyacinthe et d'or ;
Le monde s'endort
Dans une chaude lumière.

Là, tout n'est qu'ordre et beauté,
Luxe, calme et volupté

*****
'Les fleurs du mal' 中
'Spleen et idéal'

네가 황제다/ 알렉산드르 푸슈킨

Posted by 히키신
2016. 8. 25. 14:19 Poetry#1

네가 황제다/ 알렉산드르 푸슈킨

너의 자유로운 혼이 가고 싶은 대로
너의 자유로운 길을 가라.
너의 소중한 생각의 열매들을 실현하라.

그리고 너의 고귀한 행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마라.
보상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너 자신이 너의 최고 재판관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너는 자신의 작품을 심판할 수 있다.

너는 네 작품에 만족하는가?
의욕 많은 예술가여!
네가 황제다. 고독하게 살아라!

-『푸슈킨 선집』(민음사, 2011)

순수의 전조/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1757∼1827)

Posted by 히키신
2016. 8. 25. 14:00 Poetry#1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쫓기는 토끼의 울음 소리는
우리의 머리를 찢는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
아기 천사는 노래를 멈추고....
모든 늑대와 사자의 울부짖음은
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여기저기를 헤매는 들사슴은
근심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켜준다.
학대받은 양은 전쟁을 낳지만,
그러나 그는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인간은 기쁨과 비탄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알 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기쁨과 비탄은 훌륭하게 직조되어
신성한 영혼에겐 안성맞춤의 옷,
모든 슬픔과 기쁨 밑으로는
비단으로 엮어진 기쁨이 흐른다.

아기는 강보 이상의 것,
이 모든 인간의 땅을 두루 통해서
도구는 만들어지고, 우리의 손은 태어나는 것임을
모든 농부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그대가 무엇을 하건, 그것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해와 달이 의심을 한다면
그들은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열정 속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열정이 그대 속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국가의 면허를 받은 매음부와 도박꾼은
바로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들려오는 창부의 흐느낌은
늙은 영국의 수의를 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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