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 필승전

Posted by 히키신
2016. 8. 25. 09:58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렬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채리지 않으면 이 몸을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라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둬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허거든 네가 적극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엎집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
김유정은 죽기 11일 전인 3월 18일에 방안에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놓고 글을 썼는데, 친구 안회남 앞으로 남긴 「필승전」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김유정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고 있다.
1937년 3월 29일 아침 6시 30분에 김유정은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폐결핵. 향년 29세였다.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악] 셰익스피어  (0) 2017.02.13
톨스토이  (0) 2016.12.11
70년대 잡지 광고 (2013)  (1) 2014.10.11
최규석 - 습지 생태 보고서 (2005)  (2) 2014.08.16
최규석 - 송곳 (2014)  (2) 2014.07.14

도둑 고양이

Posted by 히키신
2016. 8. 1. 11:32 순간의 감상[感想]

어느 고양이 한마리가 누가 먹다 던져 준 켄터키 치킨 박스를 뒤적거리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친다 길거리를 걷고 있는 연인들 그 중 여자들이 귀여워하며 고양이를 쳐다본다 점점 자기를 바라보는 눈이 많음을 자각한 고양이는 사람들을 경계하다 결국 도망친다

미용실에 돌아와 원장 형에게 얘기하니 "그래도 그 고양이가 이 동네에서 정말 인기 많은 고양이다. 이쁘게 생겼지 않더냐? 근데 너무 인기가 많아서 볼때마다 배가 불러 있더라..." 고양이를 보며 느꼈던 안타까움과 고양이의 사연을 듣고 느낀 감정이 저 고양이 신세가 마치 나만 같아서 울컥한다 저 고양이 신세가 마치 나만 같아서 저 고양이 신세인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해서 아니, 그것보다는, 저 고양이 신세가 꼭 나 같아서.

-'15. 8. 31
-'16. 8. 1

'순간의 감상[感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움을 노래하며  (0) 2016.12.10
어느 날의 상념  (0) 2016.12.10
모터싸이클에서 철학을 배운다.  (0) 2016.08.01
일상의 어느 소소한 순간  (0) 2015.01.05
직업 심리 상담을 받고나서...  (2) 2014.10.19

모터싸이클에서 철학을 배운다.

Posted by 히키신
2016. 8. 1. 11:18 순간의 감상[感想]

- 바이크에 올라타려면 두 발을 땅에서 떼어야 한다. 가만히 그자리에 두 발 붙이고 서있어서는 바이크를 탈 수 없다. 두렵더라도, 두 발을 땅에서 떼내어 바이크 위에 올려 두고 출발해야 달려 나갈 수 있다.

- 바이크 위에 앉은 후부터는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중심을 잡지 못하면 십중팔구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기 십상이다.

- 바이크를 타면 걸어다닐 때나, 자동차를 탈 때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돌맹이나 움푹 패인 작은 웅덩이에도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항상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안 된다. 언제든 깨어 있어야 한다.

- 바이크를 타고 달릴 때엔 바로 코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멀리 두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언제 어디서 뛰쳐들지 모르는 자동차와 사람들, 동물 등의 갑작스런 돌진에 대처할 수 있다.

- 바이크를 타고 인도를 달리거나 횡단보도를 건널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경찰에 붙잡혀서 벌금을 물게 되거나 인명 사고를 내는 등 그 결과는 좋지 않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정도를 밟지 않고 꼼수를 부리면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말은 결코 좋지 않다.

- 바이크를 탄다는 것은 매순간 항상 위험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갑자기 밀어내듯 끼어들어오는 택시들과 전혀 모터싸이클을 신경쓰지 않고 급하게 차선변경을 해대는 버스들, 그리고 지상 위의 도로는 마치 모두다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것인냥 운전해대는 수 많은 과격한 운전자들...인생을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언제 무슨 일이 갑자기 터질 지 모른다. 정말 착실하게 잘 살아왔는데 믿었던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고로 인한 후유증을 겪게 된다거나 천재지변, 지병을 얻어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거나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과 고난의 순간들이 언제든지 불쑥 불쑥 찾아온다. 이를 원천 봉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다른 환경적 요소로 인해 다가오는 것이므로 어느 개인이 스스로 조심한다고 해서 이를 막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으로 이러한 상황의 발생 확률을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모터싸이클 운전자의 경우는 언제든지 무슨 일이 터질 지 모른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항상 방어운전을 하는 것이 그 좋은 방책이 될 것이다. 또한 성능이 우수한 헬멧과 보호장구를 착용하는 것 따위도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을 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소중한 생명구가 될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갑작스레 발생하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순간만이 아닌, 나중을 항상 생각하며 매순간 행동한다든가 항상 남에게 내가 받고자 하는 만큼 대하는 자세라든지, 많은 예방책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사고가 널리 확산되어 그 사회가 점점 이러한 사유를 공유하게 될 때엔, 지금과 같은 여러 문제들은 상당 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 바이크를 탄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항상 동반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려는 학자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수 많은 라이더들이 존재하듯, 인식을 확장하고 신념을 지키려는 올바른 학구자의 길을 걷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예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바이크는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내리는 날과 같은 악천후의 날씨엔 타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내가 아무리 오늘 바이크를 타고 라이딩을 즐기고 싶다고 하더라도 주변 상황이 이를 받쳐주지 않는다면, 그만 단념하고 잠시 쉬는 것이 현명하다. 학문을 닦으려는 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세상이 날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신념을 잃지만 않는 다면, 그 빛을 발할 좋은 날은 언젠가 꼭 도래한다. 그때를 위해 잠시 에너지를 아껴두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 아마 작년 이맘때 쯤 작성해뒀던 것으로 기억한다.

'순간의 감상[感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의 상념  (0) 2016.12.10
도둑 고양이  (0) 2016.08.01
일상의 어느 소소한 순간  (0) 2015.01.05
직업 심리 상담을 받고나서...  (2) 2014.10.19
아버지와 사직 야구장에 다녀와서...  (2) 2014.10.11

윤노빈 - <신생철학(新生哲學)>

Posted by 히키신
2016. 8. 1. 11:09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철학자는 민중보다 앞서서 먼저 고통을 자각하며, 민중보다 나중에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다.

철학의 과제는 큰 고통에 관한 인식이며, 큰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철학의 목표다.

-

반드시 기억하고 또 기억할 것.

+

윤노빈– 신생철학 정리
(학민사, 1978)
사람의 눈은 비록 그물과 같은 감옥에 갇혀 부자유의 노예가 되는 것일지라도 물고기의 눈과는 다른 살아 있는 눈이다. 사람의 눈은 눈알로써만 보지 않는다. 눈알 뒤에는 눈알을‘자유로이’ 굴리는 정신적 힘줄이 있다. 물고기는 그물에 갇히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의 밥상 위에 얹히게 되지만, 사람은 그물을 째고 나올 수 있는 힘 즉 자유의 불빛을 지니고 있다. 사람에 대한 그물은 사람이며, 사람은 이 그물을 만든 장본인이며,동시에 이 그물을 태워버리는 주인공이다.시각에 대한 우리들의 경고는 시각의 ‘제한성’ 에 대한 경고이지 시각 그 자체를 제거하려는 철거명령은 아니다.
시각의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시야의 제한성과 시선의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시각들이 협동해야 한다. ‘시각의 협동’은 “혼자서 보지 말고 함께 보아라!”는 명령을 준수해야 한다…
사람의 눈은 한 개가 아니다.왼쪽 눈과 바른쪽 눈이 협동하듯 사람들의 눈은 협동한다.그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두 눈은 나란하다.왼쪽 눈이 바른쪽 눈 위에 있지 않다.그것처럼 사람들의 사회적 시야들이 상하에 있어서 수직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평등한 위치에 되돌아옴으로써 입각견지가 통일될 수 있다.
시각의 협동은 바로 ‘시각의 통일’이다.시각이 통일됨으로써 수평적 시야와 수평적 시선이 전개될 수 있다.평등한 시야와 평등한 시선이 성립하는 조건은 자유로운 협동과 통일이며,자유와 통일이 성립하는 조건도 시각의 평등이다.시각의 협동은 자유로운 환경에서만 가능하며,시각이 협동함으로써 자유가 확보될 수 있다.
-p48~49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와의 논쟁은 문제의 초점을 잃었던 것도 같다.남을 사랑함은 결국 ‘더 큰 나’를 사랑함이 아니더냐. “사람은 본래 자기를 사랑하도록 마련이다”라고 주장했을 때,이기주의자들은 “그러나 그 ‘나’는 무한히 큰 범위를 가질 수도 있다”고 덧붙여야 했을 것이다. (김태길, ‘빛이 그리운 생각들’, 1965, 삼중당, P215)


요소론적, 명사적 세계관은 광물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면서 식물적 세계관에 의하여 강화되었다.명사 지배,시각 지배의 시대라고도 부를 수 있는 서양 2천 여년의 문화는 식물적 정신에 의하여 비육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광물적 세계관은 정신활동을 구속함으로써 인간성을 기계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미 희랍 자연철학의 시초부터 ‘인간기계론’의 이론적 토대는 마련되어 있었다.이것은 피타고라스의 형상이론과 수 개념이 정신적인 것이면서도 물질적인 것에 토대한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뚜렷하다.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은 이미 라메트리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간공학이론’을 원칙적으로 거의 완성시켜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공학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인간성에 관한 이론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이버네틱스’는 말하자면 광물로서의 인간이라는 요소론적 인간관의 현대적 표연이라고 하겠다.
광물적 세계관은 식물적 세계관에 의하여 보강된다.마치 식물의 생명이 낭비적이며 과도한 증식을 통하여 성장하듯,요소론적 세계관은 과도한 증식의 철학, ‘고리대금의 철학’을 낳았다.생명유지에 필요한 것만큼 이상의 낭비와 과잉생산,과잉공급을 갈망하는 욕심이 마음을 지배하면서 과도한 금욕이 강요되는 광물적,식물적 세계관은 야수적 세계관에로 발전한다.생산자에게만 과도한 금욕이 강요되는 고대적,봉건적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절제가 미덕으로 평가받지만,근세 이후로는 공공연히 ‘욕망의 체계’(System der Begierde)로서 사회를 표현하게 되었다.요소론적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바라는 ‘다다익선의 낙관론’을 지향하여 왔다.
윤리적인 공리주의는 물질적인 공리주의를 결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더 많은 재산을!더 많은 지식을!더 높은 건물을!더 빠른 비행기를!말하자면 올림픽 경기가 요소론적 세계관의 발상지에서 비롯되었듯이 현대의 올림픽 경기는 전세계 인류를 ‘많이!철학’의 제물로 바치려 한다.오늘날은 성화를 어느 신에게 바치는가?바로 요소론적,연금술적 원흉인 광물 ‘금’이다.현대의 제우스는 올림프스산에 있지 않고 ‘금고’ 속에 있다.맘몬을 위하여 욕망의 석유 성화가 훨훨 타는 요소론적 제전에 인류의 정신은 팔과 다리를 부지런히 놀리며 ‘더 많이!더 높이!더 멀리!’를 가치로 하여 달려간다. …
-p68~69

실제중심적 철학은 공리주의에 기초한 것인 동시에 빈익빈 부익부라는 분열을 조장하여 왔으며,인간성의 균형,문화적 균형,정치-사회적 균형,민족들 사이의 균형을 파괴하여 왔다.어느 한쪽이 다량의 행복을 획득하면 그 반면에 다른 쪽은 불행의 양이 증대된다.벤담의 조국에서 획득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곧 그의 조국이 짓누르고 있는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 민족들의 최대행복은 아니었다.오히려 이 지역들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배고픔으로써 영국 본토는 밝고 행복하며 배부를 수 있었다.게르만 민족이 진보하기 위하여 동양민족은 정체하여 있어야 한다.희랍의 진보는 페르샤의 죽음이며,유럽의 진보는 아프리카의 죽음이다.얼마나 이기적 진화이며 이기적 발전이냐.진화와 진보는 퇴화와 퇴보,즉 ‘살인’을 반비례 변수로 한다.
-p71~72
사람은 실체로서가 아니라 행위자로서 파악되어야 한다.사람은 행위다.행위는 요소적 실체를 타넘어 간다.행위는 실체와 요소를 건너뛴다.요소는 개울에 설치된 돌다리와 같다.행위는 이 돌다리를 디디고 간다.요소론적 세계관은 고정된 돌덩어리들만을 시각적으로 고집하려고 한다.그것은 그 다리를 건너가는 행위를 관찰할 수 없다.행위는 요소를 초월한다.
-p75


현실적 모순은 승리가 보장된 언어와 패배가 결정된 언어와의 투쟁이라고 하겠다.
-P87

사람의 정신은 실체로서가 아니라 행위로서 파악되어야 한다.행위로서의 정신은 뛰어넘는 행위,뚫고 나오는 행위다.정신이라는 행위는 진리라는 행위와 구조에 있어서 일치한다.언어의 벽,가상적 벽을 뚫고 나오듯 정신은 종이와 언어와 속임수의 장막을 뚫는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적 행위는 ‘파괴적’ 행위이며 흔히 이것을 비판적 행위라고 부른다. 여기서 ‘파괴적’ 이란 물론 인위적 구속성에 대한 파괴적 해방행위에 적용된 말이다.행위하지 않는 정신,비판하지 않는 정신은 죽은 정신 즉 정신이 아니다…..
지성(Intellectus)은 사이(ineter, 間)를 읽음(legere, 讀), 즉 행간독서다.눈에 보이는 활자ㅡ사실 이것은 사자이지만ㅡ또는 시각을 사로잡는 물체,즉 우상(idolum, eidolon)을 타넘어 ‘여백’ 에로 뛰어들어가며,종이를 뚫고 배후의 사실을 읽을 수 있는 ‘투시력’ 이 지성적 행위의 능력이다. ‘타넘어 가서 읽어 봄’이며 ‘뚫고 들어가 봄’이므로 지성적 행위에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대문짝만큼 커다란 활자,또는 좁쌀만큼 작은 활자로부터 시선을 떼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성적 행위 또는 정신적 행위는 용기로부터의 행위다.정신적 파괴력,논리적 용감성없이 진리행위는 불가능하다.뜀바위(서울 백운대에 있는 큰 바위로서 그 사이에 매우 깊은 틈이 벌어져 있다)하나 건너뛰지 못하는 정신이나 지성은 이미 정신도 지성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용기’란 비겁에 대립된 용기뿐만 아니라 ‘게으름’과 ‘정체성’에 대립된 용기를 뜻한다.기만행위나 거짓말뿐만 아니라 정신적 녹이 진리의 적이다.이 녹은 언어적 장벽 또는 정신의 장막에 끼어 있는 것으로서 정신이 원활하게 행위하는 것을 방해한다.정신적 녹이 잔뜩 끼어 있으면 정신은 게을러지며 비겁하여지므로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서도 매에 쫓기다 풀숲에 머리만 처박는 꿩처럼 논리적 둔감의 숲,또는 보수주의적 수렁에 머리를 처박고 만다.
-p100~101

인식된 실재의 부분의 총화를 흔히 철학자들은 현상이라고 불러왔다.인식되지 않은 존재를 흔히 철학자들은 물자체라고 불러왔다.그러나 현상이란 기지의 존재이며 물자체는 미지의 영역이다. “물자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 실재의 영역을 물자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현상은 방정식에 있어서 기지수와 비슷하며 물자체는 미지수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미지로부터 기지로,또는 기지로부터 미지로 나아감이 진리행위의 과정이다.
-p103

사람은 살아 있기 위하여 생각한다.…철학의 관심사는 생각 자체가 아니라 고난에 부딪치고 있는 사람의 생존이다.철학의 출발은 눈을 감고 하는 명상이 아니라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고통이다.
-p103

철학은 서재 또는 강의실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눈물과 피와 땀과 한숨이 뒤범벅된 사람들의 생존현장에서 탄생한다.철학은 인쇄된 책들과 마주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있는 책’인 바 민중이라는 책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는 고통과 고난과 괴로움,시달림과 같은 살아있는 글자와 마주쳐서 생긴다.철학은 공책이나 사유에 봉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고통에 봉착하고 있다.
철학은 철학적 안락의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햇빛이 내려쪼이는 공사장에서,불꽃이 튀는 용광로 곁에서,거센 풍랑이 휩쓰는 바다 위에서,거머리가 꿈틀거리는 논바닥에서,검은 먼지가 가득찬 갱 속에서,또는 어둡고 그늘진 뒷골목에서 씌어지고 있는 것,이것이 살아있는 철학이다.철학의 활자들이 기록되는 장소는 창백한 종이(tabula rasa)가 아니다.한숨과 고통이 철학의 종이이며 눈물과 피가 철학의 잉크다.
P105-106

철학이라면 보통 머리가 허연 늙은 학자를 연상하고,지혜라면 곧 곳간에 들어 쌓인 책을 생각하지만,아니다.철학은 구더기같다는 민중 속에 있고,지혜는 누구나 다하면서도 신통히 알지도 않는 삶 곧 그것 속에 있다.이 말없는,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을 들여다 본 사람이 철학자다.
(함석헌, ‘인간혁명’, 1961, p56)

02. 분단, 감금자로서의 악마
악마는 틈에서 나서 틈으로 지나다닐 뿐만 아니라 틈을 만들며 사이를 넓히는 자다. …
악마는 바로 ‘쪼개는 자’, ‘분단시키는 자’다. 서양말의 어원에서 이점은 잘 드러나 있다. 악마(dia-bolos)란 ‘둘로 쪼개며’, ‘이간질하며’, ‘속이며 모략 중상한다’는 말(dia-ballein)에서 생긴 것이다. 악마의 하는 짓은 잘게 쪼개며 절단하는 일로써 대종을 이룬다. 그러므로 세계지도 위에 절단의 핏자국을 남기는데 솜씨를 자랑하였던 영국인들에 있어서 악마(devil)는 바로 절단기계(devil)를 뜻하지 않는가! 악마는 종이를 절단하거나 나무를 절단하는 자가 아니다. 악마는 인간을 절단하는 자다. ‘인간절단기’가 바로 악마다. …
악마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절단하며 악마의 통로를 몰래 숨어 다니면서 인간적 협친성을 파괴하는 쐐기를 박는 자다. 악마는 사람들끼리 쥐고 있는 협동의 손길에다 찬물을 끼얹어 끊어버리며, 인간 사이에 이어진 신뢰의 뺨에다 주걱따귀를 들이대는 자들이다. 친구들을 등지게 만들며, 산맥 서쪽에 사는 사람과 산맥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서로 원수로 만들어 버리며, 민족과 민족을 이간질시키는 자를 악마라 부르지 않고 달리 무엇이라 부를 수 있는가?
협동적 인간활동을 파괴하는 인간절단기 악마는 이간자다. 악마가 인류 역사의 기록을 더럽힌 각 시대의 사연은 ‘이간’이라는 대문자로 시작되어 있다. 인류 역사의 틈바구니에 끼어든 악마들의 독트린은 이렇게 되어 있다.
“사람들을 이간시켜라! 사람들끼리 서로 떨어져 서로 원수가 되게 하라!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게하라! 형제간에 쌈을 붙이자!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자!”
-p156,157

그러나 악마들이 처음 쏜 불신의 불화살과 배반의 독화살은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과정에서 점점 악마에게 되돌려 날아간다는 것이 불신과 배반의 운명이다. 불신과 배반의 독은 악마의 이빨과 혀끝에서 나온 것이지만 여러 사람을 해치고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출처인 악마 자신에게 되돌아 가고 마는 것이다. … 악마의 종말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종말이 있기까지 지불되어야 하는 고통과 혼란의 총화는 엄청난 것이다. 이것은 손실이다. … 악마가 쏜 화살이 악마를 향하도록 사람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하라! 서로 쏘지 말고. 그러면 악마는 자기가 쏜 화살에 맞아 거꾸러질 것이다.
-P158~159

악마는 정신과 마음을 쪼개 놓으며 사람들을 분열시키며 민족 내부 분단을 조장하며 민족들 사이를 갈라놓는 절단기(devil)일 뿐만 아니라, 갈라진 사람을 ‘가두어 두는’ 감금자다. 악마는 일단 분열된 정신을 언어의 감옥에 감금시켜서 보수적 장벽을 뚫고 나오지 못하도록 하며, 분열시킨 사람들을 개인적 단자의 철창에다 감금하여 놓으며, 분열된 민족들을 민주적 공리주의, 민족적 이기주의의 장막에다 가두어 두려고 획책한다. 모든 분단은 감금이다. 감금은 분단이다. 분단시켜 놓기 위해서는 가두어 두어야 한다. 가두어 두려면 분단시켜야 한다. 분단된 것은 부자유이며 부자유는 분단된 것이다.
-p159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십자가를’ (마태 10:38)짊어져야 한다는 말씀은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개의’ 십자가들을 도맡아서 포개 지라는 말씀은 아니다. 더구나 ‘남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몰래 또는 강제로 지우라는 말씀은 아니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남의 등어리에다 씌워버리는 가해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해자는 자신이 져야 할 고통의 십자가를 피해자의 등에다 넘겨주고 쾌락의 ‘황금십자가’, 실로 수놓은 ‘황금십자가’ 또는 ‘종이십자가’를 하얀 목에 걸고 다니거나 붙이고 다니거나 하얀 손에 들고 다닌다. 얼마나 악독스럽고 표독스러운 예술이 악마들의 혀 끝과 손 끝에서 제작되는가!
-p125~126

가장 훌륭한 것의 타락은 가장 나쁜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천사가 타락할 때 그것은 악마로 둔갑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진보되었다는 것, 예컨대 이성이 타락하면 가장 퇴보된 악마의 발톱이 된다. 타락된 이성, 악마의 손톱과 발톱은 사람을 떼어놓고 사람을 가두어두는 데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뜯어먹는 포크와 나이프로서도 사용된다.
-p160~161

악마로부터 손을 떼고
사람들끼리 손을 잡아라!
사람을 위하여 손을 써라!
-P167
*윤노빈 ‘신생철학’ 제 5장_언어의 인위성_P169~184
서양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철학에 대하여 무얼 좀 알아보려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들은 마치 으슥한 신전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또는 노인의 목쉰 부르짖음과도 같은 소리로 “너 자신을 알아라!”는 외침을 듣고 움찔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옛날 어떤 신전의 돌기둥에 새겨진 의미깊은 금언으로서 뿐만 아니라, 실은 서양철학이라는 대가문을 이끌어 온 정신적 교훈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양철학자들이 그처럼 오랜 동안 영혼의 문제, 정신의 문제, 자아의 문제, 자기의식의 문제, 실존의 문제 등에 골몰하여 왔음은 그들의 조상 소크라테스가 남긴 가훈에 충실하였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너 자신을 알아라!” 네가 감히 무얼 안다고. 너 아닌 다른 문제들, 너를 둘러싼 문제들, 예컨대 우주니 세계니 인생이니 하는 것들, 또는 정치-사회-법률 등, 또는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들에 관해서 알아보려고 하기 전에 먼저 너 자신에 관해서 알아보라는 이 말, 또는 매사에 너 자신을 정신차려 가다듬으며 사려깊은 통찰을 앞세울 것이며, 네 분수를 지키라는 이 말에 대하여 이제와서 왈가왈부한다거나, 그 말을 탓할 바가 어디에 있겠으며, 흠잡을 데가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너’란 바로 ‘나’다. ‘나’란 단순히 개인적 사생활에 몰두하는 ‘나’라기보다 사람 자신, 보편적 사람됨 등을 뜻할 것이므로 세계와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에 관한 앎을 앞세우라는 저 금언은 조금도 못마땅할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철학자들은 보편적 사람됨과 그 기능에 관한 탐구를 자기 자신의 세계 속에서 진행하여 왔으며 ‘나’ 속에서 또는 ‘나’ 에게로 파고들고자 했다. 바꾸어 말해서 나에 비추어서 보편적 사람됨을 해명하는 방식을 택하여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중대한 잘못이 숨어 있다. 나 혼자만의 세계, 나의 내면세계에서 보편적 문제를 해결함은 근본적으로 틀린 해결방식이다. 원칙적으로 나 혼자만의 내면세계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개인으로서 고립되어서가 아니라 남과의 만남에서 살아가며 생각한다. 나 혼자서 많이 노력하여 많은 지식을 획득하고 많은 성과를 이루어 놓았다고 뽐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실은 남이 가르쳐 주어서 남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만을 안다는 것은 그 말 자체부터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 즉 ‘남’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그로부터 어떤 은혜나 덕을 입어서 그의 혜택을 기억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남이 나에게 지식을 전달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내용과 의도와 결과가 호의로써 충만된 것은 아니다. 그가 나에게 전달하는 지식이 참일 수도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일 수도 있으며, 무의식중에 또는 과실로서가 아니라 고의로써 진실 아닌 거짓을 전달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가 보여준 것처럼 마귀가 사람을 속일지도 모른다는 공상적 가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속이는 엄연한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매 이제 ‘거짓말’ 이 새로운 인식이론으로서의 ‘사회적 인식론’ 에서 마땅히 취급되어야 한다. 여태까지는 남을 알기에 앞서 먼저 나를 알아야 했다면, 나와 남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수립되는 동일성에 입각해서 나를 알기 위하여, 내가 살기 위하여 남을 알아야 한다는 요청이 제기된다. …
그러나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격률에 대하여 음미해 보아야할 것이다. 즉 “너의 무지는 너 자신의 탓도 있겠으나 상당히는 남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달아라!” “너를 무지이게끔 만든 사람, 너를 무지이게끔, 무지의 상태에 머물게끔 애쓰는 사람도 있음을 알아두는 것이 유익하다.” 요컨대 “무의식적이든 또는 고의적이든 남이 나를 속이고 있음을 깨달아라!”는 격률이 “너의 무지를 깨달아라!” 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p188~190
서양철학의 모순 및 한계점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리고 그에 빗댄 동양철학과 더불어 동학사상,
즉 한국철학을 정제되지 않은 거친 어조로 설파한 이 시대의 새로운 철학적 세계관(신’생’철학)을
담고 있다.

**P191~213, ‘참말과 거짓말’

사상싸움의 패배는 모든 싸움의 패배를 가져오며, 또 사상의 지배는 모든 것에 대한 지배를 의미한다. 무력에 정복될 때에는 적에 대한 적개심과 반항심이 솟아나지만 사상에 정복될 때에는 적을 도리어 벗으로 알고 환영함이 보통이다. 뿐만 아니라 조국과 제 겨레를 잊어버리고, 적과 또 적국을 따라간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그러하려니와 특히 우리나라에서 더 잘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안호상, ‘민주적 민족론’, 단기 4294년, 어문각, p4)

작은 인식은 자기 신발 한짝 훔쳐간 사람에 대해서는 적개심의 이를 갈면서도 자기 부모와 자기 조상과 자기 민족의 발에다 노예의 사슬을 얽어매 팔아먹는 자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하지 못하며, 심지어 그 큰 도적을 주인으로 모시기까지 한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인식은 무관심적, 신경질적, 도착적일 뿐만 아니라, 무간심적, 신경질적, 도착적이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바꾸어 말하자면 고통이 인식을 협소하게 만들며, 인식이 협소화됨으로써 고통이 증대된다. 따라서 고통을 해소하면 인식은 건전해지며, 인식이 건전해지면 고통은 해소된다. 악마가 퇴치되면 인식은 확장되며, 인식이 확장되면 악마가 퇴치된다. 여기서 순환논증의 마술에 걸릴 필요는 없다.
-p248

사람이 실재에 너무 가까이 가면 사람은 관념에서 멀어지며, 관념에 너무 가까이 가면 실재에서 멀어진다. 하나의 산을 너무 가까이서 보면 흙과 낙엽과 돌과 같은 것들이 보일 뿐이다. 반대로 너무 멀리서 산을 바라보면 구름에 가린 그림과 같은 형체만 보일 뿐이다. 실재에 너무 가까이 간 인식도 위험하며, 관념에 너무 가까이 간 인식도 위험하다. 너무 실재 가까이 가는 것도 ‘실재’에 속는 결과를 초래하며, 너무 관념 가까이 가는 것도 ‘관념’에 속는 결과를 초래한다.
실재에 너무 접근한 인식은 ‘감각적’ 확실성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반드시 감각이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감각은 좋은 증인인 동시에 나쁜 유혹자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념은 좋은 안내자인 동시에 나쁜 오도자다. 감각과 관념은 모두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지니고 있으므로 두 가지가 좋은 방향으로 합치면 매우 좋은 인식을 성립시킬 것이다. …
감각적 확실성이 제구실을 다하려면 인식은 ‘감각 바깥에로’ 나와야 한다. 관념적 윤곽이 제구실을 다하려면 인식은 ‘관념 바깥에로’ 나와야 한다. 인식의 확장은 ‘속에서 밖으로!’ 의 탈출이며 해방이다. 인류의 거처 동굴은 인간의 심리 속에다 동굴을 파놓았으며, 인간은 이 굴 속에 들어앉아 쉬려고 한다. 그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은 ‘속에서’ 다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동굴 밖에 얼마나 많은 풀과 돌과 짐승이 있는가? ‘밖에’ 나가지 않고서는 살 수도 없으며, 또 사실대로 알 수도 없다. 살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하며, 알기 위해서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 살기 위해서 관념 속에서만 틀어박혀 있어서는 안된다. 관념 ‘밖으로’나와서 실천하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감각 속에만 틀어박혀 있어도 안된다. 감각 ‘밖으로’ 나와서 알아보아라. 관념론자는 관념론 ‘밖으로!’ 나와야 한다. 실제론자는 실제론 ‘밖으로!’ 나와야 한다.
-p250~251

여백은 ‘무’가 아니다. … 여백은 존재다. 여백은 인간에 대해서만 성립하는 ‘일시적’ 공백이지 실재 그 자체에 대하여 성립하는 영원한 공간은 아니다. 개별적 인식은 개별적 여백의 담을 타넘어 광범한 인식에로 확장되어 간다. 인식 스스로 커간다. 인식의 인위성이 인식의 확장과 성장을 위협하더라도.
… 인식에 대한 가장 큰 여백은 ‘실재’다. 언어가 없다고 해서 실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실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없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지 않은가. 인식과 언어의 인위성은 인식과 언어의 인간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 신문이 나오지 않는 휴일이락 해서 사건도 휴식한다는 얘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신문사가 문을 닫았다고 해서, 방송이 중단되었다고 해서 사건이 문을 닫았거나 사건이 중단된 것은 아니다. 역사가들이 없거나 역사가들이 마음대로 기록할 수 없다고 역사적 사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을 불태운다고 해서 사실이 잿더미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p252
실재 밖에 실재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실재 밖에 언어와 인식이 살아 있다.
…이리하여 인식의 확장, ‘인식의 해방’ 이 지켜야 할 최대의 준칙은 다음과 같이 정립된다.
있는 것을 없다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된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된다.
있는 것을 있다고, 없는 것을 없다고 생각하며 말하라.
-p254
…달팽이껍질 속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겉껍질을 아무리 만져보아도 소용이 없다. 내용은 껍질 속에 있다. 그 내용을 밖에로 끄집어낸다는 것은 그 내용과 구별되는 모든 것들과 그 내용을 대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철학이나 사상을 ‘여백’ 에로 끌어내지 않고서는 그 철학, 그 사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비판할 수도 없다.

지혜(智慧)란 ‘어둠을 뚫고 밝은 데로 나옴’이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의 시력이 뚫을 수 없는 언어적 장벽, 인식론적 암흑의 장막을 뚫는 투시력을 갖고 있다. … 지혜란 해방이며 탈출이며 구원이다.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밝음의 배움’(哲學)은 ‘암흑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광명에의 용기’ 또는 ‘인식의 해방’ 이다.
-p256
생각이 독백이 아니라는 것, 도대체 독백이란 없다는 것. 왜냐하면 독백은 실제에 있어서 내적 대화이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며, 사이와 틈을 건너간다는 것이다. 나의 세계 바깥에서 나의 형제들과 만나는 것, 이것이 생각하는 행위다. 나와 형제들 사이, 나와 친구들 사이의 틈을 건너서 서로 정신적 팔을 마주잡는 것이 생각하는 행위다.
어찌 생각을 나 혼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나 개인의 고독을 장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있겠는가. 생각은 독창이 아니다. 생각은 보이지 않는 합창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정신적 합창을 뜻한다. 생각한다는 것 그 자체가 서로 손잡음을 뜻한다. 사람은 생각의 공동체이며 인식의 공동체다. 사람들은 ‘함께’ 생각하며 ‘함께’ 인식한다. 사람들이 함께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다. … 사유(思惟)는 사유(私有)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상은 사유재산이 아니다. 지식은 공동소유물이다. 혼자만 몰래 사용하는 지식의 창고, 또는 사상의 도서관은 벌써 지식의 창고도 아니며 사상의 도서관도 아니다. 원칙적으로 지식의 창고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사상의 도서관 문엔 자물쇠가 없어야 한다. 지식이나 사상의 사유성을 고집하는 사람은 대화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가장 병든 사상은 자신의 고유성을 고집하는 사상이다. 나의 사상과 너의 사상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담을 쌓는 것은 벌써 사상의 자격을 상실하였다는 증거다.
-p262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dis-covering)이 진리다.
-p266
‘역사’(Geschichte)는 사건(Geschehen)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인위적(人爲的) 사건이며 인위적(人僞的) 사건에 관한 인위적 기록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역사적 사건은 악마의 인위적 마희로부터 항상 도전받고 있다. 역사에 관한 정확한 이해는 역사의 인위적 성격에 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역사는 명사로서보다는 동사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동사로서의 역사적 사건(geschehen)은 자동사적인 것으로서보다는 사역동사적인 것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즉 저절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사람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발생하게끔(geschehen lassen) 되어서 제작된 사건이 역사의 참뜻이다. “인위적 존재는 저절로 있는 것(sein)이 아니라 사람에 의하여 있게끔 만든 것(sein lassen)이다” 라는 인위적 존재의 곤본적 성격을 역사가 대표한다.
-p271

사람의 생명은 공유다. 생존은 공존이다. 생존의 인위적 성격은 생존의 공유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살기 때문에 생존은 인위적(人爲的)이며 또 인위적(人僞的)이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악마화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생존이 보호도 되며 위협도 받는다. 본래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다. 그것도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 손잡고 사는 모인 사람들(社會)이다. 생존은 함께 산다는 뜻에서 생존일 뿐만 아니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공유다.
본래 사람의 생존은 사유(私有)될 수 없다. 이 말은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한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나의 생명을 남이 소유할 수 없으며, 남이 소유해서도 안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나의 생존은 나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속한 것이므로 나의 생존은 남에게 점유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생존은 오로지 나의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나의 생존은 나의 부모, 나의 자식들, 나의 형제들, 나의 이웃들, 나의 벗들, 나의 민족, 나의 인류 전체에까지 확대되어 있다.
-p274

생존의 반대는 구속이다.
생존은 부자유와 대결하는 것이지 죽음과대결하는 것은 아니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류의 역사는 살인의 역사였다. 직접적으로 대량 살인을 범하며, 살인기술을 발전시키며, 살인기술자를 양성하며, 살인전문가 집단을 구성하며, 살인제도를 구성하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더구나 ‘간접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기술과 학문과 제도를 발전시키는 짐승은 인간밖에 없다. 사람의 죽음은 자연적인 것으로서보다는 인위적인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람의 생존이 자연적인 것으로서보다는 인위적인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죽음은 저절로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된다. 사람의 죽음은 자신이 잘못하여서 죽거나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서 죽임을 당하거나 둘중의 하나다. 그러나 엄밀히 추구해가면 인위적 죽음의 원인으로서 인위적 죽임의 요인들이 있음을 캐낼 수 있을 것이므로 결국 생존의 죽음은 타살이거나 타살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살은 대개 타살의 최종결과다. 남들이 쏜 죽임의 화살들을 수없이 맞은 사람이 맨 나중에 가서 자신의 목에다 밧줄을 매는 수고를 보탤 뿐이다.
사람들은 ‘죽음’ 에 관하여 많은 얘기를 해왔다. 죽음에 관한 명상, 죽음에 관한 수필, 죽음에 관한 명언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어느 한가지도 죽음의 참뜻을 깨우쳐 주지 못하였다. 사람의 죽음은 사실에 있어서는 죽임(killing)이라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면 죽임이라는 뜻에서 본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하여서 모른다”고 하기보다 “모르는 것이 죽음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
죽임은 “모르게 함”이다. 죽음은 모르는 상태다. 죽임 또는 ‘살인’은 전체적 살인 또는 급살과 부분적 살인 또는 서살로 대별된다. 한꺼번에 단번에 모르게 함이 급살이며, 천천히 모르게 함이 서살이다. 모르게 함은 단순한 무지 조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식론적 의미에서의 무지를 인위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도 죽임의 여러 경우들 가운데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죽음은 모르는 상태다.
이 사람을 보라!
밖으로 나올 줄 모르는 사람,
틈과 사이를 건너뛸 줄 모르는 사람,
악마를 가려볼 줄 모르는 사람,
친구를 알아볼 줄 모르는 사람,
형제를 알아볼 줄 모르는 사람,
은인을 알아볼 줄 모르는 사람,
자기를 죽이려는데 대하여 저항할 줄 모르는 사람,
감히 말할 줄 모르는 사람,
제대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
서로 손잡을 줄 모르는 사람,
자기 것을 지킬 줄 모르는 사람,
스스로 통일할 줄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살해된 사람이다.

묘지에 가서 어제 매장한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큰 소리로 물어보라.

그대는 관 밖으로 나올 줄 아는가?
그대는 관 속과 바깥 사이를 건너뛸 줄 아는가?
그대는 자기를 꺼내 톱으로 썰고 맷돌로 갈아버리려는 악마를 가려낼 줄 아는가?
그대는 평생 가까웠던 친구를 알아볼 줄 아는가?
그대는 한 핏줄로 태어난 형제를 알아볼 줄 아는가?
그대는 은인을 알아볼 줄 아는가?
그대는 자기를 찢어버리려는 자에 대해 저항할 줄 아는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할 줄 아는가?
그대는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아는가?
그대는 여러 사람들과 손잡을 줄 아는가?
그대는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킬 줄 아는가?
그대는 통일할 줄 아는가?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므로 질문을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며,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조차도 모르는, 철저히 모르는 것 즉 사람이 아닌 ‘시체’다. 시체의 모르는 상태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초래된 것이다.
-p279~281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제일 꺼려한 좁은 문은 넓게 사는 길로 통하여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즐겨한 넓은 문은 가느다란 죽음의 길로 통하여 있었다.
‘오래’ 살려고 하지 말고 ‘넓게’ 살려고 노력하라!
넓게 사는 길이 오래 사는 길이다.
-p289

생명을 잡아 늘구지 말고 ‘옆사람’에게 생명을 펴라!

생명의 길은 앞으로 이어져감으로써가 아니라 옆으로 퍼져감으로써 지속,확장된다. 생존에 관한 한 그것은 ‘진보’ 가 아니라 뻗어남을 통하여 자라난다. 진보함으로써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함으로써 진보한다. 결코 이 순서는 바뀔 수 없다. 생존의 공유적 역사는 진보에 대한 자각과 진보를 구현하는데 있어서의 발전이 아니라, 확장에 대한 자각과 확장을 실천하는데 있어서의 성장이다.
-p290

생명을 길게 늘어뜨리려 하다가는 끊어진다.
생명을 넓게 뻗어나게 하라!
존재를 넓히려 하지 말고
생존을 넓히려 하라!

…생존에 대한 평가는 그 길이로써가 아니라 넓이로써 기준을 삼아야 할 것이다. 생존의 심오성이라는 것도 사실에 있어서는 생존의 광활성을 뜻한다. 한 사람이 심오하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과 헤어져 깊은 산골짜기에 홀로 외롭고 심각하게 산다는 것과는 다르다. 심오하게 사는 사람은 바로 ‘사람과 함께’ 또는 ‘넓게’ 사는 사람이다. 생존의 ‘넓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이 광활한 넓이야말로 ‘인ㅡ간’의 깊이이며 ‘인ㅡ간’의 길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인ㅡ간의 수명은 짧으나 그것은 막힘없이 넓다.
인생은 넓음으로써 예술보다도 훨씬 길다.
-p291

“이제 몇날이 지나지 않아서 또 먼제로 가야할 텐데 먹지도 못할 것을 그건 심거서 무엇하십니까?” 제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건 모르는 말씀, 비록 우리가 먹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먹어도 좋지 않겠소?”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백세명, ‘하나로 가는 길’, 일신사, 1968, pp.43~44)
생존은 실체로서가 아니라 ‘주는 행위’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태양이 온누리에 따뜻함과 밝음을 주는 것처럼 생존은 줌(giving)의 가지를 한울 속에 뻗어나간다. 생존은 줌으로써 확장된다. ‘줌’ 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된다. 줌은 빼앗김 또는 빼앗음이라는 인위성의 위기에 봉착하여 왔다. 줌으로서의 생존은 원조를 가장한 약탈과 구별된다. 악마는 주는 척 하면서 빼앗는다. 악마는 미끼를 원조하면서 생명을 빼앗는다. 그런데 전체적 총계에서 본다면 약탈한 것은 악마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감소된 것이다. 훔친 장물이 훨씬 감소되는 것처럼, 약탈은 전체적 축소, 즉 죽음을 초래한다. 악마는 빼앗음으로써 마의 창고를 채울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악마의 창고는 결국 텅 비게 된다. 사람의 손에서 빼앗긴 것은 악마의 창고에 들어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창고에 들어가 썩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빼앗음’은 ‘없앰’이다.
생존은 확장이며 줌이며 초월이며 ‘사랑’이다. 확장으로서의 생존은 축소와는 딴판인 사랑이다. 줌으로서의 생존은 약탈, 탈취와는 딴판인 사랑이다. 초월로서의 생존은 감금, 구속과는 딴판인 사랑이다. 생존은 행위며, 행위로서의 생존은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은 음양 속에 들어있는 액체 덩어리도 아니며, 사랑은 입술 사이로 날름거리는 혓바닥도 아니다. 사랑은 물체가 아니라 행위다. 사랑은 명사로서가 아니라 동사로서, 그것도 자동사로서아니라 인위적 타동사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된다. 사랑의 인위성은 빼앗음과 살인의 독소인 ‘미움’의 인위성에 항상 직면하여 있다. 서로 미워하며 서로 빼앗고 서로 할퀴고 서로 때리며 서로 욕하며 서로 죽이게끔 이간시키는 악마의 행위가 항상 사랑의 행위를 위태롭게 하려고 도사리고 있다.
사랑은 사람의 ‘하나됨’ 또는 ‘하나님스러움’ 또는 ‘우리됨’을 짜주는 한울의 끈이다. 사랑은 사람 사이의 틈을 가득 채움으로써 생존을 확장시키며 인간의 생명을 확장시켜 준다. 사랑의 밧줄은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 준다. 사랑의 밧줄은 사람들의 탯줄이다. 여러 가닥으로 꼬여진 사랑의 밧줄은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옆으로 이어져 있다. 공중에 매달린 밧줄은 흔히 악마의 올가미 또는 악무한적 세계도피의 거미줄과도 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한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협동적 행위다. 사랑이란 바로 서로 잡아 당겨주는 행위이며 서로 생각해 주는 행위다. ‘사랑’이란 본래 ‘생각’이 아니었던가!

서로 일으켜 주며
서로 붙잡아 주며
서로 구원해 주며
서로 도와 주며
서로 가르쳐 주며
서로 생각해 주며
사람들은 함께 살아있다.
-p294~296

인간의 초월은 날개로써가 아니라 두 발로써 달성되며, 고층사다리로써가 아니라 두 팔로써 달성된다.
-p299

땅이 성스러운 것은 그것에 한울이 발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 위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땅은 성스러운 것이다. 그 위에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에 땅은 ‘성지’인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성지다. 그런데도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가 태어난 성지를 버리고 가난한 거지처럼 부자들이 사는 타향에서 눈치의 거리를 방황하면서 문화적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객사할 뿐만 아니라, 인질의 땅에서 태어난 자녀들 손에다 국제적 고등거지의 깡통을 영원히 쥐어주려는 ‘신라방’ 주민들이 있음은 매우 가련한 일이다. 이들은 고향을 더러운 곳, 지저분한 곳, 시끄러운 곳이라 하여 침을 뱉고, 깨끗한 곳, 아름다운 곳, 조용한 곳에로 짐을 싸서 도망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어느 땅치고 깨끗하지 않으며 아름답지 않으며 조용하지 않은 땅이 있는가? 모든 땅은 깨끗하며 아름답고 조용하다. 깨끗한 중국인들이 아무리 ‘더럽다’ 고 하는 동쪽 구이의 땅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군자가 가서 산다면 누추한 곳이 아니라고 공자라는 군자 한 분이 가르친 적이 있다. (‘논어’ 자공편 참조. 구이는 조선민족, 만주민족, 일본민족 등을 고래 중국인들이 얕잡아 부르던 이름.)
그러나 이 사람의 군자다운 생각과는 달리 땅 위에 군자가 이민 와서 살아야 그 땅이 더럽다는 누명을 벗게 되는 것은 아니다. 땅 위에 한울이 있고 땅 위에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모든 땅은 깨끗하며 아름답고 조용한 것이다.
-p324.325

인내천 혁명이 세계사상적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사상 탄생 배경의 세계성뿐만 아니라 그 사상 내용의 혁명성에 기인한다. 人乃天은 人乃賤에 대한 혁명이다. 인내천 사상이 혁명적인 것은 인간이 인간을 천대하던 과거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의미의 인간 존엄성을 고취하는 인내천 사상은 지난날의 온갖 위선적 인본주의, 종군적 박애주의, 박애적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타 넘었다. “사람이 바로 한울이다” 라는 한마디의 웅변이 가짜 인본주의의 온갖 교언들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한반도의 모든 골짜기와 모든 강과 모든 산과 하늘에 사무친 아세아적 인간 천대의 신음 소리를 수운은 들었다. 서양 군함에 실려온 로고스적 과학기술의 유물주의적 인간 천대의 대포 소리를 수운은 들었다. 신과 인간의 절대적 불평등에 바탕한 위선적 서양 종교업자들이 지껄이는 인간 천대의 간사한 목소리를 수운은 들었다.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지배하여 온 인간 천대의 모든 소리를 듣고 수운은 人乃天으로써 人乃賤의 역사를 종식시키고자 한 것이다.
인내천 사상은 전통적 동양사상의 최첨단에서 탄생한 것인 동시에, 로고스적 살인기를 능가한 활인기로서 등자한 것이며, 예수의 가면을 쓰고 들어온 위석적 사랑을 능가하는 보편적 공경의 도리로서 등장하였다. 인내천 혁명의 내용은 소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人乃賤의 철저한 거부이지만, 적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사회적 성화다. 인내천 사상은 인간의 행위를 신적 행위에로 고양시켜 놓고자 한다. 한울님을 모시는 인간의 신적 행위, 한울님을 산채로 기르는 인간의 신적 행위, 한울님을 구체적으로 본받아 혁명적으로 실천하는 인간의 신적 행위가 지니고 있는 뜻이야말로 인내천의 적극적 혁명성을 제시하고 있다.

-p335,336

한울님을 키우려면 가두어 두지도 말아야 하며 때리지도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함부로 ‘옮기지 말아야’ 한다. 옮김은 유기적, 공화적 생명을 ‘빼앗음’ 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 속에서 키워질 때나 땅 위에서 키워질 때나 한울 속에 살아 있다. 어머니 태 속에 살아 있음은 어머니와 함께 살아 있으며, 세상에 나와 큰 울 속에 살아 있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 있음이다. 태 속에선 땅 위에건 간에 사람은 우주와 함께 살아있다.
‘함께’는 인간적 생존 방식이다. 사람에게서 이 ‘함께’를 뺏아 버리면 벌써 사람은 키워질 수 없다. ‘함께’를 떠나서 살아 움직일 수 없으며 ‘함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함께’ 생각한다. ‘함께’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가면 객이 되며 倜가 된다. ‘함께’ 로부터 떠나버리게 되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며, 바르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함께’ 로부터 옮겨 버리게 되면 한울님은 키워질 수도 없으며 바르게 생각할 수도 없다. 도대체 ‘함께’로부터 옮길 수도 없으며 떠나버릴 수도 없으며 떼어 낼 수도 없는 것이 사람의 생존이다.
태 속에서 나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서 사람은 점점 나(자아)를 확인해 간다. ‘나’ 의 첫 번째 자각이란 ‘남’(타자)에 대한 인식에 바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나’라는 자각을 갖게 되는 것은 ‘남’이 나에 대하여 저항이 되며 방해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라고 하겠다.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남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자각은 이 같은 초보적 단계로부터 남에 대한 대립감 또는 적대감 위에서 점점 뚜렷해진다. 남으로부터의 나의 마음과 나의 신체를 가두어 두는 여러 가지 선입관과 거짓말이 침입하게 되면 나와 남 사이에는 ‘함께’라는 투명한 막 대신에 ‘차별’이라는 두꺼운 장벽이 쌓이게 된다. ‘나’의 진정한 자각은 이 차별적 장벽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시작된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자각이다. 나의 첫 번째 자각은 나와 남의 구별에서 성립하는 편벽된 자각이지만, 두 번째 자각은 흔히 해탈 또는 覺이라고 불리우며 “천지와 더불어 그 큰 덕에 합한다”고도 표현된다.
-p342,343

時쓰는 詩人의 始

Posted by 히키신
2016. 8. 1. 11:03 時쓰는 詩人의 始

視, 侍, 施
마지막 순간까지

꽃이 진다 해도
그 꽃은
여전히 아름다우니..!

- '16. 6. 24.

'時쓰는 詩人의 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택>  (0) 2017.02.06
거울  (0) 2016.12.12
생의 슬픔  (0) 2016.12.10
물음  (0) 2016.12.10
고독 속의 꿈  (0) 2016.12.10

릴케 시 모음

Posted by 히키신
2016. 8. 1. 01:49 Poetry#1

Rainer Maria Rilke


작별
소녀의 기도
엄숙한 시간
석상의 노래
봄을 그대에게
고독
자신이 직접 쓴 릴케의 묘비명
사랑은 어떻게
당신 말씀의 파수꾼으로
고독한 사람
고아의 노래
살로메에게 바치는 시
존재의 이유
흰장미
사랑의 노래
장미의 내부
삶의 평범한 가치
가을의 종말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가을날(Herbsttag)
순례의 서
가을
그리움이란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피에타
서시(序詩)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받는다는 것
고독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만년의 밤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1부/ 3편)
과수원
두이노의 비가-제 4 비가 (1-18)
*두이노의 비가





~~~~~~~~~~~~~~~~~~~~
작별


우리 이제 서로 작별을 나누자, 두 개의 별처럼,
저 엄청난 밤의 크기로 따로 떨어진,
그거야 하나의 가까움이려니, 아득함을 가늠하여
가장 먼 것에서 스스로를 알아보는.


~~~~~~~~~~~~~~~~~~~
소녀의 기도


그 언젠가 그대가 나를 보았을 때엔
나는 너무도 어렸습니다.
그래서 보리수의 옆가지처럼 그저 잠잠히
그대에게 꽃피어 들어갔지요.
너무도 어리어 나에겐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나에게 말하기까지
나는 그리움에 살았었지요.
온갖 이름을 붙이기에는 내가 너무나 큰 것이라고.
이에 나는 느낍니다.
내가 전설과 오월과 그리고 바다와 하나인 것을,
그리고 포도주 향기처럼
그대의 영혼 속에선 내가 풍성한 것을...


~~~~~~~~~~~~~~~~~~~
엄숙한 시간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우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세상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슬퍼 울고 있다.

지금 이 밤 어디에선가 웃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밤에 웃는 사람은
나를 비웃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가고 있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세상에서 가고 있는 사람은
나를 향해 걷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죽어가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나를 보고 있다.


~~~~~~~~~~~~~~~~~~~~
석상의 노래


소중한 목숨을 버릴만큼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누구일까.
나를 위하여 누군가 한 사람 바다에 익사한다면
나는 돌에서 해방되어
생명체로, 생명체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도 나는 끓어오르는 피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돌은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나는 생명을 꿈꾼다. 생명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나를 잠깨울수 있는 만큼
용기를 가진자는 아무도 없는가.

그러나 언젠가 내가, 가장 귀중한 것을 내게 주는
생명을 갖게 된다면------


~~~~~~~~~~~~~~~~~~~~
봄을 그대에게


갖가지의 기적을 일으키는
봄을 그대에게 보이리라.
봄은 숲에서 사는 것,
도시에는 오지 않네.

쌀쌀한 도시에서
손을 잡고서
나란히 둘이서 걷는 사람만
언젠가 한번은 봄을 볼 수 있으리.


~~~~~~~~~~~~~~~~~~~~
고독


고독은 비처럼
바다로부터 저녁을 향해 올라 온다.
멀리 외딴 벌판으로부터 고독은
언제나 외로운 하늘로 올라가서는
처음 그 하늘에서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모든 골목길마다 아침을 향해 뒤척일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신들은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를 떠나 갈 때,
그리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잠자리에 들어야하는
그 뒤엉킨 시간에 비 되어 내리는

고독은 냇물과 더불어 흘러 간다.


~~~~~~~~~~~~~~~~~~~~
자신이 직접 쓴 릴케의 묘비명


장미여, 아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Rose, oh reiner Widersprl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
사랑은 어떻게


그리고 사랑은 어떻게 그대를 찾아왔던가?
빛나는 태양처럼 찾아 왔던가, 아니면
우수수 지는 꽃잎처럼 찾아 왔던가?
아니면 하나의 기도처럼 찾아 왔던가? --- 말해다오
반짝이며 행복이 하늘에서 풀려 나와
날개를 접고 마냥 흔들리며
꽃처럼 피어나는 내 영혼에 커다랗게 걸려 있었더니라


~~~~~~~~~~~~~~~~~~~~
당신 말씀의 파수꾼으로


나를 당신 말씀의 파수꾼으로 삼아 주소서.
돌에 귀기울일 줄 아는 자가 되게 해 주소서.
나에게, 바다의 고독을 볼 수 있는 두 눈을 주소서.
양 기슭의 맞부딪치는 소음 속에서
멀리 밤의 음향 속으로
나를 당신의 텅빈 나라로 보내 주소서.
그곳을 지나 끝없는 바람이 불어
큰 수도원의 승복처럼
아직 살아 보지도 못한 삶의 주위에 서 있는 그곳에
어떤 유혹에 의해서도 다시는
그들의 목소리와 모습에서 벗어나는 일 없이
거기서 나는 순례자 쪽에 서렵니다.
눈 먼 늙은이의 뒤를 따라
모르는 사람뿐인 길을 가렵니다.


~~~~~~~~~~~~~~~~~~~~
고독한 사람


낯선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나는 영원히 귀향길에 있습니다.
그들 식단을 보면 충족된 날들로 가득하지만
내게는 아득한 곳의 모습만 있습니다.

내 얼굴 속에 세상이 스며듭니다.
달처럼 어쩌면 사람이 살지 않는 세상,
그러나 세상은 어떤 감정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세상의 온갖 언어에는 삶이 끼어 있습니다.

멀리서 내가 가져온 것들은
희귀하게 보이면서, 제몸에 매달려 있죠:
그들의 넓은 고향에서 그들은 짐승이지만,
여기서 그들은 부끄러움을 타며 숨을 죽입니다.


~~~~~~~~~~~~~~~~~~~~
고아의 노래


나는 아무도 아닙니다.
앞으로도 아무도 되지는 않으렵니다.
지금은 존재하기에도 너무 초라한 몸
그러나 훗날에도 마찬가지일 게요.

어머님들 아버님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정말 키워 주신 보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잘려지는 몸입니다.
아무한테도 쓸모없는 신세입니다.
지금은 너무 이르고 내일이면 너무 늦습니다.

내가 걸친 옷은 이 옷 한 벌뿐
헤어지며 빛이 바랩니다.
영원을 간직하는 옷입니다.
어쩌면 신 앞에서도 지킬 수 있는 영원 입니다.
나한테 남은 것이라고는 이 한 줌 머리카락뿐입니다.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지만)

한때는 사랑하는 이의 것이었어요.
이제는 사랑이라고는 모르는 그 사람 이어요.


~~~~~~~~~~~~~~~~~~~~
살로메에게 바치는 시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으세요
나는 당신을 가슴으로 잡을 것입니다.

심장을 멎게 하세요
그럼 나의 뇌가 심장으로 고동칠 것입니다.

당신이 나의 뇌에 불을 지르면
그 때는 당신을 핏속에 실어 나르렵니다.


~~~~~~~~~~~~~~~~~~~~
존재의 이유


아! 우리는 세월을 헤아려 여기저기에
단락을 만들고, 중지하고, 또 시작하고
그리고 두 사이에서 어물 거리고 있소.

그러나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어쩌면
모두가 친한 관계에 있고, 태어나고, 자라고
자기 자신으로 교육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결국 그저 존재하면 되는 겁니다.
다만, 단순하게 그리고 절실하게 말이요.

마치도 대지가 사계절의 돌아감에 동의 하면서
밝아졌다, 어두워 졌다 하며 공간 속에 푹 파묻혀서
하늘의 별들이 편안하게 위치하는
그 숱한 인력의 그물 속에 쉬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과 같이......


~~~~~~~~~~~~~~~~~~~~
흰 장미


너는 죽음에 몸을 맡긴 채
잎새 위에 서럽게 얼굴을 뉘인다.
유령 같은 빛을 숨쉬며
희푸른 꿈을 띠고있다.

하지만 노래마냥
마지막 가냘픈 빛을 띠며
아직도 하룻밤을
달콤한 네 향기 방안에 스민다.

네 어린 영혼은 불안스럽게
이름없는 것을 더듬거리다
내 가슴에서 웃으며 죽는다.
내 누이인 흰 장미여.


~~~~~~~~~~~~~~~~~~~~
사랑의 노래


당신의 영혼이 내 영혼에 닿지 않은 바에야
어찌 내 영혼을 간직하겠습니까?
어찌 내가 당신 아닌 다른 것 에게로
내 영혼을 쳐 올려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오,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어떤 것 옆,
당신의 깊은 마음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조용하고 낯선 곳에
내 영혼을 가져가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은
확실히
마치 두 줄의 鉉에서 한 音을 짜내는
활 모양의 바이올린처럼 우리를 한데 묶어 놓습니다.
어떤 악기에 우리는 얽혀져 있는 것인가요?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우리를 사로잡은 건가요?
오, 달콤한 노래입니다.


~~~~~~~~~~~~~~~~~~~~
장미의 내부


어디에 이런 내부를 감싸는
외부가 있을까. 어떤 상처에
이 보드라운 아마포 (亞麻布)를 올려놓는 것일까.
이 근심 모르는
활짝 핀 장미꽃의 내부 호수에는
어느 곳의 하늘이
비쳐 있을까. 보라,
장미는 이제라도
누군가의 떨리는 손이 자기를 무너뜨리리라는 것을 모르는 양
꽃이파리와 꽃이파리를 서로 맞대고 있다.
장미는 이제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가 없다. 많은 꽃들은
너무나 충일하여
내부에서 넘쳐나와
끝없는 여름의 나날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점점 풍요해지는 그 나날들이 문을 닫고,
마침내 여름 전체가 하나의 방,
꿈속의 방이 될 때까지.


~~~~~~~~~~~~~~~~~~~~~
삶의 평범한 가치


이따금 나는 륨 드 세인 같은 거리의 조그만 가게의
윈도우 앞을 어정거리는 일이 있다.
그것은 고물상이나 조그만 헌 책방의 동판화를 파는 가게로
어느 윈도우에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많이 들어차 있다.
나는 손님이 한 사람도 들어가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아마 장사를 하려고 가게를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역시 거기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앉아서 무엇을 읽고 있다. 정말 한가한 모습이다.
내일을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려고 억척을 피우는
모습이란 눈곱만치도 없다.
발치에는 살이 찐 개가 배를 깔고 누워 있다.
개가 아니면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는 꽂혀 있는 책에
몸을 비비며 표지의 등 글자를 지우듯이 걸어 다닌다.
그것은 주위의 조용함을 더욱 깊게 하는 것 같다.

아아, 이런 생활에 만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느 가게 하나를, 구닥다리 물건이 차 있는 윈도우를
고스란히 사들여 개 한 마리와 함께 그 안에서
20년쯤 앉아 있을 수 있다면 하고.


~~~~~~~~~~~~~~~~~~~~
가을의 종말


언제부터인가 눈앞에
만물의 변화가 보인다.
무엇인가 우뚝 서서 몸짓을 하며
죽이고 또 아픔을 준다.

시시로 또 아픔을 달리하는
모든 정원들.
샛노란 잎새들이 차차 짙으게
조락에로 물든다.
내가 걸어온 아득한 길

이제 빈 뜨락에서
가로수길을 바라보면
먼 바다에까지 이어닫는
음울하고 무거운
차디찬 하늘


~~~~~~~~~~~~~~~~~~~~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데 익숙해야 하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의 것이라고 보이는 그것은 사실
홀로 따로따로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전개되어
마침내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이 오직 자기 감정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자기를 연마하는 일과가 되네.
서로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으며
그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두 사람이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가 되라.


~~~~~~~~~~~~~~~~~~~~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럽게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Herbsttag


Herr: es ist Zeit. Der Sommer war sehr groß.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ß die Winde los.

Befiehl den letzten Früchten voll zu sein;
gieb ihnen noch zwei südlichere Tage,
drä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jage
die letzte Süß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ätter treiben.


~~~~~~~~~~~~~~~~~~~~
순례의 서


내 눈빛을 지우십시오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십시오.나는 당신을 들을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팔이 꺾여도 나는 당신을
내 심장으로 붙잡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멈춘다면
나의 뇌수가 맥박 칠 것입니다

나의 뇌수를 불태운다면
나는 당신을 피속에 싣고 갈 것입니다


- 릴케가 연상의 여인
루 안드레아 살로메에게 첫사랑을 고백한시


~~~~~~~~~~~~~~~~~~~~
가을...


앞이 떨어집니다. 멀리서인 듯 떨어집니다.
하늘의 저 먼 정원이 시든 것처럼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집니다.

밤이면 저 무거운 대지가
모든 별들에서 고독으로 떨어집니다.

우리 모두가 떨어집니다. 이 손도 떨어집니다.
다른 것을 보십시오.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지요.

하지만 이 떨어짐을 부드러운 손으로
끝없이 맞아주는 누군가가 계십니다.


Autumn


The leaves are falling, falling as if from far up,
as if orchards were dying high in space.
Each leaf falls as if it were motioning "no."

And tonight the heavy earth is falling
away from all other stars in the loneliness.

We"re all falling. This hand here is falling.
And look at the other one. It"s in them all.

And yet there is Someone, whose hands
infinitely calm, holding up all this falling.


Translated by Robert Bly

조두환 번역


~~~~~~~~~~~~~~~~~~~~
그리움이란


그리움이란 이런 것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의 삶
그러나 시간 속에 고향은 없는 것
소망이란 이런 것
매일의 순간들이 영원과 나누는 진실한 대화

그리고 산다는 것은 이런 것
모든 시간 중에서도 가장 고독한 순간이
어제 하루를 뚫고 솟아오를 때까지
다른 시간들과는 또다른 미소를 띠고
영원 속에서 침묵하고 마는 것


~~~~~~~~~~~~~~~~~~~~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마음 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
피에타


이렇게, 예수여, 저는 당신의 발을 다시 봅니다,
제가 가슴 떨며 벗기고 씻겨드렸던,
그 때는 한 젊은이의 발이었지요.
내 드리운 머리카락 속에 당황하여 서 있던 모습
마치 가시덤불 속에 하얀 야수 같았지요.

이렇게 저는 당신의 사랑 받은 적 없는 팔다리를 봅니다
처음으로 이 사랑의 밤에.
우리는 아직 함께 누워 본 적도 없는데,
이제는 경이로와 지켜볼 뿐이로군요.

그런데, 보아요, 당신의 손이 찢겨 있군요-:
사랑하는 이여, 저 때문에, 제가 찔러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당신의 심장은 열려 있어, 누구나 들어갈 수 있군요:
어찌 저만 들어갈 수는 없었던가요.

이제 당신은 지쳤고, 당신의 지친 입술은
제 슬픈 입술에 아무런 욕구도 없군요-.
오 예수여, 예수여, 우리의 시간은 언제였나요?
어쩌면 기이하게도 우리 둘 다 몰락하는지.


Pieta


So seh ich, Jesus, deine Fusse wieder,
die darmals eines J nglings Fusse waren,
da ich sie bang entkleidete und wusch;
wie standen sie verwirrt in meinen Haaren
und wie ein wei es Wild im Dornenbusch.

So seh ich deine nie geliebten Glieder
zum erstenmal in dieser Liebesnacht.
Wir legten uns noch nie zusammen nieder,
und nun wird nur bewundert und gewacht.

Doch, siehe, deine Haende sind zerrissen-:
Geliebter, nicht von mir, von meinen Bissen.
Dein Herz steht offen und man kann hinein:
das haette duerfen nur mein Eingang sein.

Nun bist du muede, und dein mueder Mund
hat keine Lust zu meinem wehen Munde-.
O Jesus, Jesus, wann war unsre Stunde?
Wie gehn wir beide wunderlich zugrund.


~~~~~~~~~~~~~~~~~~~~
서시(序詩)


네가 누구라도, 저녁이면
네 눈에 익은 것들로 들어찬 방에서 나와보라;
먼 곳을 배경으로 너의 집은 마지막 집인 듯 고즈넉하다:
네가 누구라도.
지칠대로 지쳐, 닳고닳은 문지방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너의 두 눈으로
아주 천천히 너는 한 그루 검은 나무를 일으켜
하늘에다 세운다: 쭉 뻗은 고독한 모습, 그리하여
너는 세계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 세계는 크고,
침묵 속에서도 익어가는 한 마디 말과 같다.
그리고 네 의지가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너의 두 눈은 그 세계를 살며시 풀어준다. . . .


Entrance

Rainer Maria Rilke (Translated by Edward Snow)


Whoever you are: in the evening step out
of your room, where you know everything;
yours is the last house before the far-off:
whoever you are.
With your eyes, which in their weariness
barely free themselves from the worn-out threshold,
you lift very slowly one black tree
and place it against the sky: slender, alone.
And you have made the world. And it is huge
and like a word which grows ripe in silence.
And as your will seizes on its meaning,
tenderly your eyes let go. . . .

(김재혁 / 고려대학교 교수 / 옮김)


~~~~~~~~~~~~~~~~~~~~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받는다는 것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오직 타버린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나긴 밤을 새운 아름다운 불빛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스러지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영원한 지속이다


Das Geliebtsein heißt aufbrennen.
Lieben ist:
Leuchten mit unerschöpflichem Öle.
Geliebtwerden ist vergehen, Lieben ist dauern.


~~~~~~~~~~~~~~~~~~~~
고독


고독은 비와도 같은 것

저녁을 찾아 바다에서 오른다.
멀고 먼 외진 들녘에서 오른다.

늘상 고적하기만 한 하늘로 옮겨갔다가
하늘에서 비로소 도시에 내린다.


아침을 향해 골목골목이 몸을 일으키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육신들이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 떠나갈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같은 잠자리에서 함께 잠들어야 할 때,

낮과 밤이 뒤엉킨 시각, 비가 되어 내리면

고독은 강물과 함께 흘러간다.....


Einsamkeit


DIE Einsamkeit ist wie ein Regen.
Sie steigt vom Meer den Abenden entgegen;
von Ebenen, die fern sind und entlegen,
geht sie zum Himmel, der sie immer hat.
Und erst vom Himmel fallt sie auf die Stadt.

Regnet hernieder in den Zwitterstunden,
wenn sich nach Morgen wenden alle Gassen
und wenn die Leiber, welche nichts gefunden,
enttauscht und traurig von einander lassen;
und wenn die Menschen, die einander hassen,
in einem Bett zusammen schlafen mussen:

dann geht die Einsamkeit mit den Flussen....


~~~~~~~~~~~~~~~~~~~~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려 합니다.
박해받으면 갇혀 있는 감옥에서 풀려나려는 듯이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나는 느낍니다.여기에는 모든 삶이 살고 있다고.

그러나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연주되지 아니한 선율이 하아프 속에 깃들여 있듯이
저녁 어스름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겠습니까.

물 위에 불어 오는 바람이겠습니까,
신호를 주고받는 나뭇자기겠습니까,

향기를 풍기는 꽃송이겠습니까,
늙어 가는 긴 가로수 길이겠습니까,

오고가는 따뜻한 동물들이겠습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새들이겠습니까.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신(神)이여, 당신입니까-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
만년의 밤


밤이여, 오 그대 나의 얼굴에서
깊이 속으로 녹아든 얼굴이여.
그대여, 내 경탄하는 관조의 가장 위대한
과중(過重)함이여.

밤이여, 나의 응시 속에 전율하며,
그러나 스스로 그토록 확고한 ;
고갈되지 않는 피조물,
대지의 잔해(殘骸) 위에 영원한;

저네들의 가장자리의 도피로부터
중간영역의
소리 없는 모험 속으로 불길을 던지는
어린 별들로 가득한;

그대 다만 존재함 자체만으로도, 우월한 존재여,
나는 얼마나 왜소한 모습인가 ― ;
허나 어두운 대지와 한 몸 되어
내 감히 그대 안에 존재하려 하노라.


Aus dem Umkreis : N chte
Nacht. Oh du in Tiefe gel stes
Gesicht an meinem Gesicht.
Du, meines staunenden Anschauns gr tes
bergewicht.

Nacht, in meinem Blicke erschauernd,
aber in sich so fest;
unersch pfliche Sch pfung, dauernd
ber dem Erdenrest;

voll von jungen Gestirnen, die Feuer
aus der Flucht ihres Saums
schleudern ins lautlose Abenteuer
des Zwischenraums:

wie, durch dein blo es Dasein, erschein ich,
bertrefferin, klein ― ;
doch, mit der dunkelen Erde einig,
wag ich es, in dir zu sein. (SWII 178f.)


~~~~~~~~~~~~~~~~~~~~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1부/ 3편)


A god can do so. But tell me how a man
신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말 해다오.
is supposed to follow, through the slender lyre?
어떻게 인간이 가냘픈 수금을 통해 신을 따라갈 수 있는지를?
His mind is riven. No temple of Apollo
그의 마음은 찢겨졌다.
stands at the dual crossing of heart-roads.
이중의 마음의 십자로엔. 아폴론의 사원이 서 있지 않구나.
Song, as you have taught it, is not desire,
노래는, 당신이 가르쳐 준 것처럼. 욕망이 아니다.
not a winning by a still final achievement:묵묵한 마지막 성취에 의한 승리도 아니다:
song is being. A simple thing for a god.
노래란 존재이고. 신에겐 단순한 것.
But when are we in being? And when does he
그러나 우리는 언제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는 언제
turn the earth and stars towards us?
대지와 별을 돌려서 우리에게 향하게 해 줄 것인가?
Young man, this is not your having loved, even if
젊은이여, 이것은 네가 사랑을 간직하는것만으로 될 수 없다.비록
your voice forced open your mouth, then – learn
그때, 네 목소리가 네 입을 열도록 만든다 할지라도.
to forget that you sang out. It fades away.
네가 불렀던 노래를 잊어버리도록 배워라. 그건 사라질것이다.
To sing, in truth, is a different breath.
노래한다는건. 사실은, 또 다른 호흡이며
A breath of nothing. A gust within the god. A wind.
아무것도 호흡하지 않는 것이며. 신 안의 돌풍이고. 바람이기 때문이다.


~~~~~~~~~~~~~~~~~~~~
과수원


1

내가 만일 빌려온 언어로 그대에게
편지를 쓸 용기를 냈다면,
그것은 아마도
과수원이라는 이 소박한 명사를 사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그 명사 하나에 사로잡혀 오래 전부터 고통스러워했다.

이 명사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서
흔들리는 너무나 막연한 하나의 의미나,
또는 그보다 못한 방어하는 울타리라는 의미 중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가엾은 시인이여.

과수원 : 오, 너를 단순하게 이름 부를 수 있는
리라의 특권이여 ;
꿀벌들을 매혹하는 비할 데 없는 말,
숨쉬고 기다리는 말...

고대의 봄을 숨기고 있는 명료한 명사,
가득 차 있으면서도 투명한 말,
그 대칭적인 음절 안에서
모든 것을 배가시킴으로써 풍요로워지는 말.


VERGER

Rainer Maria Rilke


1

PEUT-ÊTRE que si j"ai osé t"écrire,
langue prêtée, c"était pour employer
ce nom rustique dont l"unique empire
me tourmentait depuis toujours : Verger.

Pauvre poète qui doit élire
pour dire tout ce que ce nom comprend,
un à peu près trop vague qui chavrre,
ou pire : la cloture qui défend.

Verger : o privilège d"une lyre
de pouvoir te nommer simplement ;
nom sans pareil qui les abeilles attire,
nom qui respire et attend ...

Nom clair qui cache le printemps antique,
tout aussi plein que transparent,
et qui dans ses syllabes symtriéques
redouble tout et devient abondant.


- 릴케전집 3. 「완성시(1906 ~ 1926). 프랑스어로 쓴 시」(책세상 , 2001, 옮긴이 김정란)에서
(원문: "Rilke Werke", Zweite Auflage, Insel Verlag, 1982)


~~~~~~~~~~~~~~~~~~~~
두이노의 비가-제 4 비가 (1-18)


오 생명의 나무여, 겨울은 언제이뇨?
우리는 한 마음이 아니다. 철새들처럼 그렇게
때를 알지도 못해 뒤쳐지고 늦어서야 우리는
느닷없이 억지 바람을 일으켜
무심한 못 위로 떨어질 뿐이다.
피고 지는 것을 우리는 동시에 의식하고 있다.
어디에선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가고 있는 사자들은 무기력을 모르련만.

그러나 우리가 서로 아주 하나라고 생각하는 곳에서도
이미 상대편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다.
적대감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 여인들도
언제나 서로 안에 하나가 되어
가장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
거기 아득한 넓이와 사냥과 고향이 약속되어 있건만.
한 순간의 그림을 위한 여기에도
애써 대조의 바탕이 마련된다.
우리가 그것을 보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아주 분명하게
우리를 아니까. 우리는 감정의 윤곽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밖에서 그것을 형성해 주는 것일뿐.


Die vierte Elegie 1-18


O Baeume Lebens, o wann winterlich?
Wir sind nicht einig. Sind nicht wie die Zug-
voegel verstaendigt. Ueberholt und spaet,
so draegen wir uns ploetzlich Winden auf
und fallen ein auf teilnahmslosen Teich.
Bluehn und verdorrn ist uns zugleich bewusst.
Und irgendwo gehn Loewen noch und wissen,
solang sie herrlich sind, von keiner Ohnmacht.

Uns aber, wo wir Eines meinen, ganz,
ist schon des andern Aufwand fuehlbar, Feindschaft
ist uns das Naechste. Treten Liebende
nicht immerfort an Raender, eins im andern,
die sich versprachen Weite, Jagd und Heimat.
Da wird fuer eines Augenblickes Zeichnung
ein Grund von Gegenteil bereitet, muehsam,
dass wir sie saehen; denn man ist sehr deutlich
mit uns. Wir kennen den Kontur
des Fuehlens nicht: nur, was ihn formt von aussen


~~~~~~~~~~~~~~~~~~~~
두이노의 비가


내가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 주리오? 설령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해도, 나보다 사뭇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텐데.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는 무서움의 시작에 다름아니니까.
우리 이처럼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까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어두운 흐느낌의

유혹소리를 꿀컥 삼키는데, 아, 대체 우리는 그 누구를
부릴 수 있을까? 천사들도 아니요 인간들도 아니다.

영리한 짐승들은 해석된 세계 속에 사는 우리가
마음 편치 않음을 벌써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 산등성이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어 날마다 볼 수 있을런지.
우리에게 남은 건 어제의 거리와, 우리가 좋아하는

습관에의 뒤틀린 맹종, 그것들은 남아 떠나지 않았다.
오 그리고 밤, 밤, 우주로 가득찬 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파먹어가면, 누구에겐들 밤만 남지 않으랴,

그토록 그리워하던 밤, 모든 이의 가슴 앞에 힘겹게 드리운,
약간 환멸을 느끼는 밤. 밤은 사랑하는 이들한테는 더 쉬울까?

아, 그들은 그저 몸을 합쳐 그들의 운명을 가리우고 있구나.
너는 아직 그것을 모르는가? 우리가 숨쉬는 공간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네 공허를 던져라. 그러면 새들은
더욱 당찬 날갯짓으로 넓어진 대기를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봄들은 너를 필요로 할지 모르지. 수많은 별들은
네가 저희들을 느끼기를 바랐다. 과거 속에서

파도 하나 일어나고, 혹은
열려진 창문 옆을 지나갈 때
너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겠지. 그 모든 건 사명이었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완수했는가? 모든 것이
네게 애인을 점지해줄 듯한 기대감에

너는 언제나 마음이 어지럽지 않았는가? (네가 그녀를
어디에 숨겨도, 크고 낯선 생각들은 네 가슴속을
들락거리며 밤이면 어김없이 네 안에 머무르는데.)

그리웁거들랑, 사랑을 하는 자들을 노래하라, 하지만
그들의 유명한 감정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리라.

네가 시기할 지경인 그 사람들, 너는 그들이 사랑의
만족을 맛본 이들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움을 알았으리라.

결코 다함이 없는 칭송을 언제나 새로이 시작하라,
생각하라, 영웅이란 영속하는 법, 몰락까지도 그에겐
존재하기 위한 구실이었음을, 그의 궁극적 탄생이었음을.

그러나 지친 자연은 사랑에 빠진 자들을,
두 번 다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듯이,

제 몸 속으로 거두어들인다. 너는 가스파라 스탐파를
깊이 생각해 보았는가, 사랑하는 남자의 버림을 받은

한 처녀가 사랑에 빠진 스탐파의 드높은 모범에서
자기도 그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느끼는 것을?

언젠가 이처럼 가장 오래 된 고통들이 우리에게
열매로 맺지 않을까? 지금은 우리가 사랑하면서

연인에게서 벗어나, 벗어남을 떨며 견딜 때가 아닌가?

발사의 순간에 힘을 모아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
화살이 시위를 견디듯이. 머무름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목소리, 목소리들, 들어라, 내 가슴아, 지난날 성자들만이
들었던 소리를, 엄청난 외침 소리가 그들을

땅에서 들어올렸지만, 그들, 불가사의한 자들은
무릎꿇은 자세 흐트리지 않고,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바로 그렇게 그들은 귀 기울이고 있었다. 신의 목소리야
더 견디기 어려우리. 바람결에 스치는 소리를 들어라,

정적 속에서 만들어지는 끊임없는 전언을.
이제 그 젊은 주검들이 너를 향해 소곤댄다.

네가 어디로 발을 옮기든, 교회든 로마든 나폴리든
그들의 운명은 조용히 네게 말을 건네지 않았던가?

아니면 얼마 전의 산타 마리아 포르모자의 碑文처럼
비문 하나가 네게 엄숙히 그것을 명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내게 무엇을 바라는가? 내 그들의 영혼의
순수한 움직임에 가끔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옳지 못한 인상일랑 조용히 버려야 하리라.


이 지상에 더 이상 살지 않음은 참으로 이상하다,
겨우 익힌 관습을 다시는 행할 수 없음과,

장미들과 그밖의 무언가 나름대로 약속하는 사물들에게
인간의 장래의 의미를 선사할 수 없음과,

한없이 걱정스런 두 손 안에 들어 있는 존재가
이제 더 이상 아님이, 그리고 자기 이름마저도 마치

망가진 장난감처럼 버리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서로
연결되어 있던 모든 것이 그처럼 허공에 흩어져 날리는 것을

보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므로 죽어 있다는 것은
점차 조금이나마 영원을 맛보기 위한 힘겨움과 만회로

가득 차 있는 것 ――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은
모든 것을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하는 실수를 범한다.

천사들은 살아 있는 자들 사이를 가는지, 죽은 자들
사이를 가는지 때때로 모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영원한 흐름은 두 영역 사이로
모든 세대를 끌어가니, 두 영역의 모두를 압도한다.


끝내 그들, 일찍 떠난 자들은 우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니,
우리는 어느 덧 자라나 어머니의 젖가슴을 떠나듯, 조용히

대지의 품을 떠난다. 그러나 그토록 큰 비밀을
필요로 하는 우리는, 슬픔에서 그토록 자주 복된 진보를

울궈내는 우리는 ―― 그들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언젠가 리노스를 잃은 비탄 속에서 튀어나온 첫 음악이

메마른 단단함 사이를 꿰뚫었다는 전설은 헛된 것인가,
거의 신에 가까운 한 젊은이가 갑작스레 영원히

떠나버려 깜짝 놀란 공간 속에서 비로소 공허함이
우리를 매혹시키고 위로하며 돕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


Duineser Elegien - The First Elegy

- Rainer Maria Rilke


Who, if I cried out, would hear me among the angels"

hierarchies? and even if one of them suddenly

pressed me against his heart, I would perish

in the embrace of his stronger existence.

For beauty is nothing but the beginning of terror

which we are barely able to endure and are awed

because it serenely disdains to annihilate us.

Each single angel is terrifying.

And so I force myself, swallow and hold back

the surging call of my dark sobbing.

Oh, to whom can we turn for help?

Not angels, not humans;

and even the knowing animals are aware that we feel

little secure and at home in our interpreted world.

There remains perhaps some tree on a hillside

daily for us to see; yesterday"s street remains for us

stayed, moved in with us and showed no signs of leaving.

Oh, and the night, the night, when the wind

full of cosmic space invades our frightened faces.

Whom would it not remain for -that longed-after,

gently disenchanting night, painfully there for the

solitary heart to achieve? Is it easier for lovers?

Don"t you know yet ? Fling out of your arms the

emptiness into the spaces we breath -perhaps the birds

will feel the expanded air in their more ferven flight.


Yes, the springtime were in need of you. Often a star

waited for you to espy it and sense its light.

A wave rolled toward you out of the distant past,

or as you walked below an open window,

a violin gave itself to your hearing.

All this was trust. But could you manage it?

Were you not always distraught by expectation,

as if all this were announcing the arrival

of a beloved? (Where would you find a place

to hide her, with all your great strange thoughts

coming and going and often staying for the night.)

When longing overcomes you, sing of women in love;

for their famous passion is far from immortal enough.

Those whom you almost envy, the abandoned and

desolate ones, whom you found so much more loving

than those gratified. Begin ever new again

the praise you cannot attain; remember:

the hero lives on and survives; even his downfall

was for him only a pretext for achieving

his final birth. But nature, exhausted, takes lovers

back into itself, as if such creative forces could never be

achieved a second time.

Have you thought of Gaspara Stampa sufficiently:


that any girl abandoned by her lover may feel

from that far intenser example of loving:

"Ah, might I become like her!" Should not their oldest

sufferings finally become more fruitful for us?

Is it not time that lovingly we freed ourselves

from the beloved and, quivering, endured:

as the arrow endures the bow-string"s tension,

and in this tense release becomes more than itself.

For staying is nowhere.


Voices, voices. Listen my heart, as only saints

have listened: until the gigantic call lifted them

clear off the ground. Yet they went on, impossibly,

kneeling, completely unawares: so intense was

their listening. Not that you could endure

the voice of God -far from it! But listen

to the voice of the wind and the ceaseless message

that forms itself out of silence. They sweep

toward you now from those who died young.

Whenever they entered a church in Rome or Naples,

did not their fate quietly speak to you as recently

as the tablet did in Santa Maria Formosa?

What do they want of me? to quietly remove

the appearance of suffered injustice that,

at times, hinders a little their spirits from

freely proceeding onward.


Of course, it is strange to inhabit the earth no longer,

to no longer use skills on had barely time to acquire;

not to observe roses and other things that promised

so much in terms of a human future, no longer

to be what one was in infinitely anxious hands;

to even discard one"s own name as easily as a child

abandons a broken toy.

Strange, not to desire to continue wishing one"s wishes.

Strange to notice all that was related, fluttering

so loosely in space. And being dead is hard work

and full of retrieving before one can gradually feel a

trace of eternity. -Yes, but the liviing make

the mistake of drawing too sharp a distinction.

Angels (they say) are often unable to distinguish

between moving among the living or the dead.

The eternal torrent whirls all ages along with it,

through both realms forever, and their voices are lost in

its thunderous roar.


In the end the early departed have no longer

need of us. One is gently weaned from things

of this world as a child outgrows the need

of its mother"s breast. But we who have need

of those great mysteries, we for whom grief is

so often the source of spiritual growth,

could we exist without them?

Is the legend vain that tells of music"s beginning

in the midst of the mourning for Linos?

the daring first sounds of song piercing

the barren numbness, and how in that stunned space

an almost godlike youth suddenly left forever,

and the emptiness felt for the first time

those harmonious vibrations which now enrapture

and comfort and help us.


~~~~~~~~~~~~~~~~~~~~
- 릴케(Rainer Maria Rilke)

평가 : 열정적인 몸부림과 영감, 충일한 언어로 20세기를 감당하고자 했던 세계문학사의 거장
약력 : 1875년 체코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영토) 출생
1890년 메리시 바이스키르헨의 육군사관학교 입학
1891년 사관학교 퇴학
1894년 처녀시집 <인생과 노래>를 발레리의 도움으로 출간
1895년 프라하 대학 입학
1901년 여류 조각각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
1902년 <형상시집> 출판
1910년 <말테의 수기> 출판
1923년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출판
1926년 장미가시에 찔려 급성 백혈병의 증세로 사망

작가 이야기

열정적인 몸부림과 영감, 충일한 언어로 20세기를 감당하고자 했던 세계문학사의 거장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실존의 불안과 예감의 고뇌 속에서 자신의 영감이 폭풍을 일으키고 그것을 언어로 춤추었던 불세출의 서정시인이요 작가였다. 그는 매우 열정적인 몸부림과 영감 그리고 충일한 언어로 20세기를 감당하고자 했던 세계문학사의 거장이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 출신의 독일 시인이었던 그는 일찍부터 고향 상실의 비애와 감상에 젖어야 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가 퇴학한 것도 그의 우수를 더해 주는 요소였다. 군사교육에 대한 지독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그로 인해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아쉬움을 평생 극복할 수 없었노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뮌헨대학을 졸업하던 22살 무렵 만난 루 살로메와 더불어 러시아 여행을 하면서부터 그의 삶은 사랑과 고독, 방황과 편력, 여행과 발견, 그리고 그에 따른 문학적 탐색의 드라마처럼 전개된다.

릴케의 문학은 정신적 순례를 통해 영혼의 초월을 모색하고자 했다는 특성을 지닌다. 신을 찾고 신에게로 다가서고자 하는 순수 영혼의 열정적인 동경을 형상화한 <시도시집>을 비롯하여 사물의 존재를 관조적으로 성찰한 <형상시집>, 무한한 우주 공간에 던져진 인간의 실존과 고뇌를 그린 <두이노의 비가>, 존재와 세계의 아름다움과 조화 세계를 노래한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등의 시편들로 현대시인으로서의 불멸의 지위를 확보했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인 <말테의 수기>는 <로댕론>을 집필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체류했던 기간에 쓰여진 대표적인 소설이다. 말테라는 청년 주인공의 내면 영혼의 심층을 깊 있게 보여준다.

<두이노의 비가>를 완성하던 날, "마침내 축복받은, 축복받은 듯한 날이 왔습니다"라며 열광적인 편지를 쓰기도 했던 그는 장미 가시에 찔려 그 상처가 깊어져 숨을 거둔다. 51세의 나이로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라고 스스로 쓴 묘비명 아래 누웠다. 누구의 꿈도 아닌 깊은 잠을 포근히 감싸주는 장미꽃에 덮혀, 그렇게 20세기의 순수 열정과 운명을 마감했다.
(우찬제/문학평론가, 서강대 교수)
출처 : 시인 소향{素香}강은혜 플래닛입니다 | 글쓴이 : 데미 | 원글보기

묵자의 사상과 배경

Posted by 히키신
2016. 6. 19. 12:11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묵자의 사상과 배경

▶ 약자를 지키는 방패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에 공수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민 출신인데도 기술이 뛰어나서 대부 자리에까지 올랐다. 공수반은 아무리 높은 성에도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구름까지 닿을 만큼 사다리를 제작해 놓고 송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제나라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들은 묵자는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꼬박 열흘을 걸어 초나라로 왔다.

"선생은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오셨습니다?"
"북쪽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이 나를 귀찮게 하는데, 당신이 그 사람을 없애 주었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공수반은 아주 불쾌해 했다.
"그렇게 해 주면 천금을 드리지요."
"나는 의기가 있는 사람이라서 남을 죽이지 않습니다."
묵자는 마음속으로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탄복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수반에게 두 번 절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당신이 구름 사다리를 만들어 송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던데 송나라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땅과 백성이 남아돌 정도로 많으면서 땅도 좁고 백성도 적은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더구나 죄 없는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어질지 못합니다. 지혜롭지도 어질지도 못한 일임을 알면서도 임금에게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고, 잘못임을 지적하면서도 임금을 끝내 설득하지 못한다면 강직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한 사람도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왜 많은 송나라 사람을 죽이려 합니까?"

묵자의 말을 들은 공수반은 잘못을 뉘우쳤다. 하지만 이미 구름사다리 공격 계획을 왕에게 보고한 뒤라 이제와서 취소할 수는 없다고 난감해 했다. 묵자는 공수반과 함께 초나라 왕을 만났다. 묵자가 왕에게 말했다.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이 가진 보잘것없는 것을 훔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도벽이 있는 사람이겠지요."
"제가 보기에 넉넉하고 풍요로운 초나라가 가난하고 약한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도벽과 다를 게 없습니다. 더구나 임금께서는 포악하다는 비난만 듣게 될 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수반은 내게 구름 사다리를 만들어 주면서 반드시 송나라를 이길 수 있다고
장담했소."

묵자는 허리띠를 끌러 땅에다 원형으로 둘러 놓고 그 안에 들어가 선 다음 품속에서 첩이라는 이상한 도구를 꺼냈다. 그리고는 공수반더러 모형 구름 사다리를 이용해 공격해 보라고 했다. 공수반이 아홉 가지 방법을 써서 공격했지만 묵자는 다 막아내었다. 공수반의 공격 기술이 바닥이 났는데도 묵자에게는 아직 쓰지 않은 방어 기술이 여럿 남아 있었다. 공수반이 묵자에게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내가 선생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알기는 하지만 말하지 않겠소."
"나도 당신이 얘기하는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만 얘기하지 않겠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왕이 궁금해서 물었다.
"그 방법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공수반의 생각은 저를 죽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만 죽여 없애면 송나라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송나라에선 제가 훈련시킨 제자
300명이 이 도구로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죽여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초나라 왕은 공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일화는 묵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또 묵자가 매우 실천적인 인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묵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에는 강대국들이 약한 나라를 집어 삼키는 겸병 전쟁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대다수 약소국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큰 나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민중들의 고혈을 짜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으며, 성을 쌓거나 직접 전쟁에 나가 싸우는 일 또한 민중의 몫이었던 것이었다.
묵자는 대다수 피지배 민중과 약소국의 편에 섰다. 그는 강대국과 지배 집단을 향해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라고 외쳤다. 묵자가 주장한 것은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었다. 묵자는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결사까지 만들었다. 당시로 볼 때 묵자의 주장은 가히 혁명적이었으며, 그는 민중의 편에 가장 가깝게 선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겠다.


▶ 피지배층의 지배자

묵자는 성이 묵(墨)이고, 이름은 적(翟)이다.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는 잘 알려져 있지만 묵자는 약간 생소한 느낌이 든다. 묵자는 태어난 나라도 불분명하고, 태어나고 죽은 해도 확실하지 않다. 대체로 공자보다 조금 뒤, 맹자보다 조금 앞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묵자는 아주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그만큼 묵자의 사상이 지배층에게 반가운 사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묵자의 성이 본래 묵씨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묵(墨)'자에는 검다는 뜻이 있고, 또 붓글씨 쓸 때 사용하는 먹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떤 학자는 그가 묵형이라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묵씨라 불렸다고 주장한다. 묵형이란 죄인의 얼굴에 죄명을 먹으로 떠 넣는 형벌을 말한다. 우리 나라 조선 시대에도 도둑질을 하면 얼굴에 '도(盜)'자를 문신처럼 새겨 넣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주나라에서는 지배층은 형벌로 다스리지 않았고, 피지배층에만 형벌을 가했다. 그렇다면 묵자는 형벌로 다스려지는 하층민이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또 어떤 학자는 묵자의 피부가 검었기 때문에 묵씨라 불렸다고 한다. 오늘날 노동자를 블루 칼라라고 부르듯이, 피부가 검다는 것은 그가 노동을 하는 계층이었음을 말해 준다. 아무튼 묵자는 피지배 계층이었던 것 같다. 묵자의 주장 속에 먹줄 같은 노동 도구들이 비유로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준다. 또한 그의 사상을 따른 그룹이 대부분 하층 무사 집단이나 기술자 집단이었던 점도 묵자의 출신 계층을 짐작하게 한다. 공자는 전설적 제왕인 요임금과 순임금을 높였는데 반해 묵자가 기술과 효용을 중시했음을 보여 준다.

묵자도 처음에는 공자의 학문을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곧 공자를 배격하고 새로운 주장을 세웠다. 공자의 사상이 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한 것과는 달리 묵자의 사상은 일관되게 피지배 계층을 옹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묵자 사상은 피지배 계층의 엄청난 호응을 받아 공자 이후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다. 맹자가 "세상에 양주와 묵적의 주장이 가득 찼다"고 한탄한 것을 보면, 당시 묵자의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한비자, 순자, 장자 같은 책에서도 '유묵'이라고 하여 유가와 묵가를 나란히 놓고 있다.

묵자는 뛰어난 기술자였고, 많은 도구들을 개발했다. 한번은 그가 3년 동안 공들여 만든 정교한 연을 하늘에 띄워 놓고, '하루 걸려 만든 수레보다 쓸모가 없구나'하고 개탄했다고 한다. 묵자는 그런 점에서 철저한 공리주의자였다. 묵자가 만든 도구 가운데는 전쟁 무기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격 무기가 아닌 방어용 무기였다. 묵자가 만든 방어용 무기들은 약소국 제후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송나라의 대부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묵자의 사사을 볼 수 있는 책이 <묵자>이다. <묵자>는 본래 71편이었다고 하는데 18편이 없어져서 오늘날에는 53편만 남아 있다. 묵자 자신이 쓴 글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자들이나 후대 사람들이 썼다고 한다. 대화체로 된 글도 있고 논문 형태의 글도 있다. 주목되는 것은, 방어 위주의 병법이 11편에 걸쳐 서술되어 있는 것과 6편이 논리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점이다. 특히 논리학적 내용이 담긴 6편을 묶어 '묵변'이라고 부른다. 이 밖에도 <묵자>에는 수준 높은 고대 과학 기술의 성과가 들어 있다. 도구 제작에 관련된 기하학, 빛의 굴절 등에 대한 광학적 분석 등도 보인다.

묵자는 춘추 전국 시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사상을 펼쳐 보려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힘있는 제후들은 대부분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가 비천한 계층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의 사상이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부국 강병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민중을 옹호한 묵자의 사상은 진나라에 의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면서 약해지기 시작했고, 통일 이후 중앙 집권적 전제주의가 강화되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묵자 사상의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 고증학자들에 의해서이며, 오늘날 중국에서는 사회주의와의 유사성을 초점을 맞추어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 강철같은 조직

묵자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집단의 우두머리는 거자라고 불렀는데, 거자는 구성원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회남자>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묵자를 따르는 무리는 180명인데, 그들은 우두머리의 명령이 떨어지면 불 속에 들어가는 일이건, 칼날을 밟고 서는 일어건 절대 주저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또 <사기>에서도 묵가 집단의 무사들은 말이 믿음직하고 용감하며,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고, 몸을 아끼지 않고 위험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묵가 집단의 초대 지도자가 바로 묵자였다. 묵자 집단은 거자를 뽑을 때 선임 거자가 지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집단 구성원들이 직접 선출하기도 했다. 집단 구성원들은 대부분 하층민이었으며, 하급무사나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집단적 결속을 통해 자신들이 처한 예속적 지위를 벗어나려 했다.

그들의 생활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그들은 비좁은 방에서 살았고, 기둥에 조각을 하거나 벽을 화려하게 꾸며서는 안 되었다. 음식은 흙으로 빚은 그릇에 담긴 옥수수나 조밥, 그리고 국 하나뿐이었다. 옷도 여름에는 베옷, 겨울에는 사슴 가죽만을 입어야 했다. 노래나 오락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장례도 얇은 관 하나만 가지고 검소하게 치러야 했다.

그들은 이런 금욕적인 규율을 철저히 지켜야 했고, 오로지 남을 위해 일해야 했다. 규율을 어겼을 때는 조직으로부터 엄한 벌을 받았다. 구성원 중 누가 어떤 나라에 가 벼슬을 하면 봉록의 일부를 집단에 바쳐야 했다. 어떤 사람은 벼슬 자리에 있다가 묵가 집단의 금기 사항인 공격 전쟁에 참가했다 하여 거자로부터 소환당하기도 했다.

묵가 집단의 엄격한 조직력을 잘 보여 주는 일화를 두 가지 소개하겠다.

진나라의 복황이 거자를 맡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다. 복황은 나이도 많은데다가 대를 이을 사람이라곤 그 아들 하나 뿐이었다.
진나라 혜왕이 복황에게 말했다.
"당신은 늙었고 또 외아들이니 죄를 감해 주겠소."
"묵가의 법에 따르면 남을 죽인 자는 죽어야만 하고, 남을 해친 자는 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온 세상의 대의입니다. 나는 묵가 사람이니 묵가의 법을 지킬 수 밖에 없습니다."
복황은 이렇게 대답하고 자기 아들을 처형하였다.

거자 맹승은 형나라의 양성군과 아주 가까이 지냈다. 양성군은 맹승에게 성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고 왕의 장례에 참석하러 갔다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그러자 형나라에서는 양성군의 땅을 몰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맹승은 양성군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서 묵가 집단에게 성을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한 제자가 반론을 제기했다.

"우리가 여기서 모두 죽는 것은 양성군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그러다간 묵가 집단이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묵가의 지휘권은 송나라에 있는 전양자에게 계승할 것이니 묵가가 끊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양성군과의 약속을 어긴다면 앞으로 그 누도 묵가 집단과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맹승은 이렇게 말하며 그대로 싸울 것을 명령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자결했고, 맹승과 그 부하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전양자에게 거자 자리를 넘겨 준다는 맹승의 서신을 전하러 간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신을 전하고 나서 전양자에게 말했다.
"저희는 이제 다시 돌아가 싸우다 죽겠습니다."
전양자가 그들을 말렸다.
"이제는 내가 거자이니 내 말을 들으시오."
그러나 두 사람은 극구 돌아가서 자결하고 말았다(그러나 이 두사람이 보인 행동은 후대 묵가들에 의해 거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잘못된 행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자어에 묵수(墨守)라는 말이 있다. 철저하게 끝까지 지킨다는 뜻인데, 이 말은 묵가 집단의 이러한 행동 양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묵가 집단에는 하급 무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군인과는 달랐다. 보통 군인이라면 어떤 전쟁이든 가리지 않고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묵가 집단에게는 오직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지키는 방어 전쟁만이 의미 있는 전쟁이었다. 또 보통 군인들에게 군인이란 지위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업에 불과했다. 그러나 묵가 집단에게는 군인 생활이 자신들의 철학을 실현해 가는 실천이었다. 일반 군인들은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를 따지지 않고 오직 이기겠다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었지만, 묵가 집단은 전쟁의 윤리를 승화시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철학으로 높여 갔다. 이 점은 묵자와 공수반의 대화에서 잘 나타난다.

묵자는 자신의 사상을 인과 의라는 말로 자주 표현하였다. 어느날 공수반이 이를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해전에서 상대방의 배를 잡아당기는 갈쿠리와 상대방의 배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밀대를 만들었습니다. 선생은 걸핏하면 인이니 의니 하는데 선생이 떠드는 인의에도 내가 만든 갈쿠리나 밀대 같은 것이 있소?"

"내가 만든 갈쿠리와 밀대는 당신이 만들어 낸 것들보다 더 훌륭한지요. 나는 사랑을 이용해서 남을 끌어들이고, 겸손을 이용해서 남을 막아냅니다. 사랑이 아니면 남들이 당신을 가까이 하지 않고, 겸손이 아니면 남들이 당신에게 대들게 되지요."
평범한 기술자의 논리와 묵가 집단의 논리가 어떻게 다른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단순한 군인이나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철학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철학자들이었으며,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강철 같은 조직의 동지들이었다. 사실 묵가 집단의 결속은 그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던 셈이다.


▶ 서로 사랑하고 이익을 나누자

묵가 집단을 이렇게 강한 힘으로 결속시키고 끌고 나간 철학은 무엇이었까? 그들 철학의 핵심은 겸애와 교리였다. 겸애는 서로 사랑하자는 뜻으로 정치적인 평등의 요구였고, 교리는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의미로 경제적인 평등의 요구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겸애가 이루어지면 교리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묵자는 겸애의 반대를 별애라고 했다. 겸애가 무차별적인 사람이라면, 별애는 차별적인 사랑이다.

그러면 묵자는 무엇으로부터 겸애 철학을 끌어냈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묵가 집단에는 하급 무사들이 많았는데, 어떤 학자는 묵자의 무차별적인 사랑 철학이 바로 이 하급 무사 집단의 행동 양식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전쟁을 한다고 가정을 해 보면 특히 묵가 집단처럼 방어 전쟁을 할 때 성벽에 둘러서서 적을 맞아 싸우는데, 성의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지는 날이면 결국 다같이 죽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편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며, 서로 사랑으로 아끼고 돕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바로 이 같은 극한 상황에서 동고 동락하던 체험을 철학화한 것이 겸애라는 주장이다. 묵자는 겸애란 자기를 위하듯 친구를 위하고, 내 부모를 위하듯 친구의 부모를 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반대로 차별적인 사랑이라면 자신을 위하듯 친구를 위할 수 없으며, 내 부모를 위하듯 친구 부모를 위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묵자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증명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무슨 일 때문에 어딘가로 떠나다고 해 보자. 맡은 임무가 위험하고 길이 험해서 돌아오지 못할지라도 모른다면, 당신은 처자식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자기 가족이나 다름없이 당신 가족을 돌봐 줄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아니면 당신 가족보다 자기 가족을 돌봐 줄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묵자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못살게 굴고, 많은 수를 가지고 적은 수를 괴롭히고, 귀한 자리에 있는 자가 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부리고, 교활한 자가 어리석은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은 모두 차별적인 사랑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 모두를 겸애, 즉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묵자는 맹자의 표현처럼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갈아 없어진다 해도 그렇게 해서 세상에 이로울 수 있다면 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실천해 나갔다. 바로 묵자의 이러한 사랑을 가라켜 겸애라고 하는 것이다.

묵자는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자기 나라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자기 나라를 위하듯 남의 나라를 위한다면, 온 세상이 이로워져서 결국 그 이익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보았다. 묵자 사상의 이런 점을 가리켜 공리주의라고 부른다. 사실 묵자의 이런 생각은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한 것이다. 본래 인간의 감정은 자기 중심적이다. 따라서 감정에 기초한다면 남보다는 나를, 남의 부모보다는 내 부모를, 남의 자식보다는 내 자식을, 남의 나라보다는 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묵자는 그 같은 차별애가 사회 혼란을 가져오고, 급기야는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따져 보자고 주창했다.

묵자는 이를 따져 보는 기준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옛날부터 훌륭한 임금이라고 전해오는 사람들이 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백성을 위해 힘썼던 사람들이다.

둘째, 백성들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이 참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구체적인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어떤 효용이 나타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결과가 국가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해가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묵자가 제시한 세 가지 기준은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피지배계층의 입장에 판단의 토대를 두고 있다. 이처럼 논리적인 묵자의 주장을 피지배 계층이었기 때문에 문화적 훈련을 쌓을 기회가 적었던 대다수 묵가 집단 성원들이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묵자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하늘의 뜻을 끌어 왔다. 하늘의 뜻이 모든 백성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에, 통치자 역시 백성들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통치자가 하늘의 뜻을 잘 따라 모든 백성을 사랑하면 하늘이 상을 주고 복을 내리지만, 안 그러면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미신적인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하늘의 뜻'은 묵자가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빌려온 것일 뿐이다. 묵자 사상에서 하늘은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점은 뒤에서 살펴 보겠지만 묵자가 운명을 부정하고 사치스런 장례나 제사를 반대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묵자는 무차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적 힘인 강력한 통치자의 규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강력한 통치는 전제 군주의 막강한 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인 무차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묵자가 강력한 군주의 통치를 말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묵자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기준이 다르다고 보았다. 따라서 제각기 자신의 기준이 옳다고 고집한다면 혼란이 올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마을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우두머리로 삼고, 그의 결정을 마을 사람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했다. 마을들이 모인 큰 부락에서는 각 마을의 우두머리 가운데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부락의 우두머리로 삼고, 더 나아가 여러 부락이 모인 지방 단위에서는 각 부락의 우두머리 가운데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지방의 우두머리로 삼자고 했다. 이렇게 해 나가면 천자는 온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이며, 그가 진정 현명하다면 그의 뜻은 하늘의 뜻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하늘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천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묵가 집단들이 그들의 우두머리인 거자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제도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묵자의 사상에는 당시 춘추 전국이라는 엄청난 혼란 속에서 중앙 집권의 강화를 통해 혼란을 종식시켜 보려는 바람이 숨어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묵자의 사상은 집단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 유가 비판

현대의 관점에서도 묵자 사상은 매우 합리적이며 실용적이다. 이런 점은 유가에 대한 비판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유·묵이라고 병칭된 이유는 두 사상 사이에 대결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묵자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후하게 지내고 상복을 입는 기간도 긴 유가의 예제를 반대했다. 그 까닭은 장례가 너무도 화려해서 마치 이사가는 사람 같으며, 이것이 재산을 탕진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일을 안 하기 때문에 산업이 부진해지고, 그 동안은 아이도 안 낳기 때문에 인구가 감소해서 정의의 전쟁에 필요한 사람이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둘째, 묵자는 유가의 악, 즉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반대했다. 악기를 만들고 음악을 연주하려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지만, 생기는 이익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사회적 조건에서 화려하게 장사지내고 음악을 들으면서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지배층뿐이었으며, 묵가 집단은 그런 생활을 할 수 없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이었다. 묵자가 화려한 장례나 음악과 노래, 춤을 반대한 것은 지배 계층의 특권을 부정한 것이며, 그 까닭은 이런 일들이 모두 피지배 계층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묵자는 철저한 공리주의자였다.

셋째, 묵자는 운명론을 반대했다. 당시 사람들은 명(命)을 하늘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천명(天命)이라고 불렀다. 천명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지만 그 중 운명적 요소가 강하게 들어 있었다. 묵자는 자기가 운명을 반대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본뜻은 세습에 의한 차별성을 반대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당시 사람들은 일찍 죽을 것인가 오래 살 것인가, 세상이 평안할 것인가 혼란할 것인가, 부자가 될 것인가 가난할 것인가 등을 모두 운명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 신분과 부를 세습하는 것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묵자는 운명이란 포악한 임금이 만들어 낸 궁색한 자기 변명이며, 나아가 백성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다. 운명이란 것을 본 사람이 없을 뿐더러, 세상 모든 일은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고, 운명을 믿으면 노력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큰 해악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큰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세습적 신분제에 반대했다. 지배층이 항상 귀한 것이 아니며 피지배층이 끝내 천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인재를 쓸 때 차별을 철폐라고까지 주장하였다.

넷째, 묵자는 유가가 하늘과 귀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신령스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유가에서 말하는 하늘은 모든 것을 낳은 생명의 근원이자 도덕의 뿌리였다. 그러나 묵가의 하늘은 겸애의 실시 여부를 살피는 감독의 기능이 강했다. 그래서 앞에서 보았듯이 상과 벌로 평가 결과를 보이는 것이다. 이는 묵가의 합리성에 비추어보면 맞아떨어지지 않는 주장이지만, 묵자가 자신의 주장에 무게를 싣기 위해 '신령한 하느님'을 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반전 평화론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은 이기심에서 왔다. 이기심은 본질적으로 차별적인 사랑을 낳으며, 차별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 자기 집안,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묵자는 지배 집단의 차별적 사람 때문에 생긴 침략 전쟁의 물결을 거슬러서 무차별적 사랑에 기초한 전쟁 반대론을 주장하였다. 사실 묵자의 전쟁 반대론은 겸애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강력한 구호도 작은 실천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묵가 집단은 그러한 전쟁에 맞서는 방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 방어를 위한 무기들을 새롭게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어떤 학자는 묵가 집단의 이런 모습을 가리켜 방어전을 위한 전쟁 청부업이라고도 표현했다.

묵자가 전쟁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묵자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전쟁을 벌이는 지배 집단을 도둑에 비유했다. 남의 집에 들어간 좀도둑이 처벌을 받는 것과 달리 남의 나라를 침략한 큰 도둑은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고 비난했다. 또 죄 없는 사람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열 사람을 죽이면 인간 백정이 되는데, 전쟁을 일으켜 수만 명을 죽인 자는 도리어 영웅이 되니 어쩐 일이냐고 반문했다.

침략 전쟁을 막기 위한 묵자의 노력은 첫머리에 소개한 일화에서 보았듯이 눈물겨울 정도이다. 묵자는 그 밖에도 제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노나라에 대한 침략을 막았고, 초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정나라에 대한 공격을 막았다. 묵자의 전쟁 반대 의지는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 꿈으로 남은 묵자의 철학

묵자 철학은 중국 고대 철학 가운데 피지배 계층의 입장에 가장 가까이 선 철학이었다. 그는 당시 억압과 수탈을 일삼는 지배 계층을 향해 똑같이 사랑하라고 외침으로써 정치적 평등을 확보하려고 했고, 서로 나눠 갖자고 주장함으로써 경제적 수탈에 대항했다. 백성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하는 지배층의 음악, 노래, 춤을 반대했고, 화려한 장례를 반대했다. 현실적인 지배를 운명이라고 합리화시키는 지배 논리에 맞섰고,
강자의 영토 확장 욕구를 채우기 위한 침략전을 막기 위해 직접 무기를 만들고 싸우기까지 했다.

묵자의 사상은 지배층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통일의 기운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았을 때는 많은 약소국들이 묵자의 뛰어난 방어전 기술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묵가 집단을 유지시키는 사회적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세력 균형이 깨져 몇몇 강대국 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되면서부터 묵가의 영향력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왕권이 안정되자 묵자 사상은 완전히 소멸하고 묵가 집단도 없어졌다. 다만 그 뒤로는 협객들의 집단, 즉 의적 같은 비밀 결사들을 통해 명맥을 이어 나갔을 뿐이다.

묵자 사상이 소멸된 원인은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묵자 사상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을 때 맹자는 묵자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맹자는 묵자의 겸애가 자기 아버지와 남의 아버지를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묵자의 유가 비판에 대한 유가의 대응이었던 셈인데, 사실 묵가와 유가 사이의 이러한 대결 의식은 묵가가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는 동안 끝없이 이어졌지만, 그 당시는 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자유로운 대립이었다. 그러나 진나라를 이어 중국을 평정한 한나라는 유가 이론을 통치 원리로 받아들였고 따라서 묵자의 철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묵자에게는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는 사회에 대한 꿈이 있었다. 묵자의 사상은 2500여 년 전이라는 상황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혁명적 사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묵자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집단을 만들었고, 강자에 맞소 싸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묵자는 혁명을 꿈꿀 수는 없었다. 이 점은 그의 사상에 혁명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묵자가 피지배 계층에 의한 혁명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공격 전쟁을 의미하게 되고, 공격 전쟁은 겸애에 어긋나는 것이니 스스로 자기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 묵자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내부적 요건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묵자 사상은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와 많은 유사점이 있다. 불과 십수년동안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보아왔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헌신적인 자기 희생과 꿋꿋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 내면에는 또 다른 욕구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기심이다. 사회주의는 강한 조직력과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지탱되었고, 경험과 실천이 그 사회의 추동력이었다. 그러나 조직력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을 이기적인 욕구가 뚫고 나왔을 때 사회주의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묵자도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묵가 집단을 강철 같은 대오로 이끌어 갔다. 물론 여기에는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주된 동력은 이상 사회에 대한 갈망과 꿈이었고, 이를 통해 내적 성실성과 아울러 외적인 배척력을 함께 가질 때 유지될 수 있었다. 즉 팽팽한 긴장이 강한 단결력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춘추 전국의 혼란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혼란의 종말은 지배 집단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혁명 이론이 없는 묵자의 철학이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지탱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틈을 이기적 욕구가 그대로 놓아둘 리도 없었다. 결국 2500여 년 전 중국의 획기적인 사상은 꿈으로 남았던 것이다.

(출처 : 다음 블로그 貪 嗔 痴
http://m.blog.daum.net/skxogkswhl/14749506?categoryId=823080)

[한국 지성에게 미래를 묻다] 이덕일 -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Posted by 히키신
2016. 6. 19. 08:17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오늘 드릴 말씀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입니다. 조선 후기사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인조반정은 지금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로는 인조반정이 있고 그 다음에 일제강점기가 있고, 6·25전쟁이 있다고 꼽을 수 있겠죠.

인조반정이 뭡니까? 신하들이 광해군을 내쫓은 겁니다. 그런데 이 신하들이 모두 유학자예요. 유학의 기본을 두 자로 표현하면 효(孝)와 충(忠)입니다. 충효가 아니라 효가 먼저고 다음이 충입니다. 그래서 효자 집안에 충신 난다고 말하는 겁니다. 집에서 효도하는 자세로 공직에 복무하라는 겁니다.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이 나라에는 충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겠죠. 효와 충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유학자들이 국왕을 내쫓으려고 하다보니까 명분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명분이 뭐냐? 우리의 임금은 명나라 황제라는 것입니다. 조선 왕은 신하인 제후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 국왕과 우리 사대부는 같은 계급이라는 얘기입니다. 인조반정이 외교정책을 명분으로 삼은 것은 모두 여기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중원의 패권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는데 조선에서 그 사태를 주도하지 못할 바에는 이긴 쪽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됩니다. 명과 청 두 나라를 연구해보면 재미있는 게 아주 많아요. 명나라는 대대로 무능한 황제가 계속 즉위합니다. 그래서 환관(宦官)정치가 득세하지요.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반기

반면 인구가 한족의 100분의 1도 안되는 만주족의 청나라는 통치기술에 관한 한 대단한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말하는 열하(熱河)는 지금 허베이(河北)성 북쪽의 청더(承德)이라는 곳인데 여기에 청나라 황제들이 피서 산장을 지어놓고 매년 갔습니다. 열하에 가서 사냥을 하는데 사냥이라는 게 군사훈련입니다.

청나라는 잠시라도 방심하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후계자를 선출할 때도 태자를 미리 결정하지 않습니다. 태자밀건법입니다. 자금성의 황제 집무실에 ‘광명정대(光明正大)’라는 글귀가 쓰인 액자가 있는데 그 액자 뒤에 자기가 죽으면 황제가 될 사람의 이름을 써놓습니다. 그리고 내부에도 하나 있어서 황제가 세상 떠난 다음에 두 개를 맞춰봐서 즉위하는 겁니다. 여러 황자에게 다 기회가 있는 겁니다. 장남이라고 무조건 차기 황제가 되는 게 아니라 모든 황자에게 기회가 있는 겁니다. 그런 자세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인조반정은 정권에서 소외된 율곡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겁니다. 명분이 숭명반청(崇明反淸)입니다. 그러다보니까 광해군의 중립 외교정책을 확 바꿔서 후금(청)을 적대시했습니다. 그러자 청나라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킵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다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전쟁이에요. 인조반정을 일으킨 지배층이 초래한 겁니다. 후금 입장에서는 산해관을 건너서 중원에 들어가기 전에 조선 문제를 정리해야 합니다. 그냥 들어갔다가 조선이 치고 올라오면 전선이 두 개가 되지 않습니까? 이걸 방지하기 위해서 조선을 먼저 공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과 만주족(여진족)은 원래 같은 민족이에요. 중국에서 바라볼 때 동이족이라고 불렀던 같은 민족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만주, 거란, 숙신 다 같은 민족이에요. 수나라가 통일하고 나서 모욕적인 국서를 보내니까 영양왕이 말갈병사 만 명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서 수나라를 먼저 공격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중국을 선제공격하는 거예요. 말갈이 후에 이르면 여진족, 만주족이 되는데 이때 영양왕이 말갈병사 만 명을 거느리고 갈 때 통역병을 데리고 갔겠어요? 안 데리고 갔겠어요? 만주어와 우리말은 같은 언어예요. 서로 통하는 겁니다. 옛날 독립운동가들 이야기로는 만주인과 우리 민족은 같은 집에서 생활하면 6개월이나 1년 지나면 의사소통이 다 된다고 그랬어요. 기본적으로 같은 언어들입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유학자들이 만주족을 오랑캐로 보게 되죠.

말로만 북벌

우리를 단일민족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이 알고 있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구조입니다. 우리 민족은 원래 동이족이에요. 그런데 단일민족론이 뭐냐 하면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말갈, 거란, 숙신을 전부 다 오랑캐로 내몰고 우리는 중국인이라고 주장한 겁니다. 그래서 ‘소중화(小中華)’ ‘우리는 작은 중국인이다’라는 것이 단일민족론이에요. 그 시초가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이 만든 개념입니다.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로 광해군을 내쫓고 나니까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변변한 싸움 한 번 못해보고 항복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조선 후기의 이중성이 시작되는데, 이상으로는 망한 명나라를 섬기지만 현실적으로는 매년 청나라에 조공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북벌(北伐)을 소리 높여서 주창합니다. 문제는 실제 북벌할 마음이 있느냐는 겁니다. 효종 임금이 실제로 북벌을 하려고 하니까 이들이 반대하고 나오는 겁니다. 말로는 북벌을 주창하면서 실제로 북벌하려면 발목 잡는 겁니다. 북벌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국방비를 늘려야죠. 그런데 이들은 국방비를 줄이고 복지예산을 늘려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입으로는 북벌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북벌과는 거꾸로 가는 거죠.

제가 아까 인조반정을 주도한 사람들은 조선 임금은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로 본다고 그랬죠. 사대부 중의 제일사대부로 보는 겁니다. 여기서 바로 예송논쟁이 나왔습니다. 예송논쟁이 간단한 논리가 아닙니다. 효종, 즉 국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3년 입어야 하느냐, 1년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 발생하지요. 부모가 먼저 세상 떠나면 자식은 3년복을 입습니다.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장남일 경우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남 이하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1년복을 입습니다.


효종이 세상 떠났을 때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은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가 최근에 ‘백호 윤휴와 침묵의 제국’을 펴냈습니다. 지금은 윤휴를 잘 모르지만 당대엔 송시열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학자로 평가받았습니다. 이때 윤휴의 사랑방에 여러 선비가 모여 있는데 송시열이 사람을 보내가지고 ‘자신의 견해는 1년’이라면서 윤휴의 견해를 물어봤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취규 이류라는 선비가 “그 사람 ‘상례비요’를 다시 봐야 할 사람이네”라고 말합니다. 1년복은 사가의 예법이지 어찌 왕가에 그 예법을 쓰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세상 떠났는데 가족장 치르라는 이야기입니다.

남인 중용 직후 죽은 현종

윤휴는 3년복을 주장하고 송시열은 1년복을 주장하다가 결국 1년복이 승리합니다. 그래서 백호 윤휴와 청남(淸南)은 선왕의 장례를 1년복으로 치른 정권에 참여를 거부합니다. 1년복설은 조선 왕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이론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현종이 1년복설이 선왕을 둘째아들 대우하는 거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경국대전’에는 장남과 차남 구분 없이 다 1년복을 입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15년 후에 효종의 부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 떠났는데 똑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맏며느리가 세상을 먼저 떠났을 때는 시부모가 1년복을 입고 둘째며느리 이하가 세상 떠났을 때는 9개월복을 입습니다. ‘경국대전’에 이 경우에는 1년복과 9개월복으로 구분지어 놨습니다.

예조에서 처음에 1년복으로 올렸다가 남편 상사(喪事) 때와 같으니까 9개월복으로 고쳐 올렸습니다. 그러자 대구 유생 도신징이 대구에서부터 걸어와서 “둘째며느리라는 뜻 아닙니까?”라고 상소를 올리죠. 그러자 현종이 대신들을 불러다 묻습니다. 대신들이 “9개월복이 맞다”고 답하자 “너희들이 국모로 모셨던 분을 둘째며느리 대우했다는 거냐?”라고 묻습니다. 다시 의정하라고 하니까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현종은 오늘 중으로 결정하라고 합니다. 왜 시간을 달라고 하냐면 충청도 회덕에 있는 송시열에게 사람을 보내서 송시열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려고 하는 겁니다. 조선 왕들이 이런 정치구조를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중으로 결정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와서 “9개월복이 맞다”고 하니까 현종이 “‘경국대전’대로 하면 1년복이 맞느냐, 9개월복이 맞느냐?”라고 묻습니다. ‘경국대전’대로 하면 1년복이 맞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인들이 자기모순에 빠진 겁니다. 현종이 “경들이 선왕의 은혜를 그렇게 두텁게 입고도 선왕에게 이토록 박하게 하면서 누구에게 그토록 후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냐?”라고 화를 내면서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중용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현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제가 ‘조선왕 독살사건’이라는 책을 썼는데, 단순히 흥미 위주의 책이 아닙니다. 인조반정 이후 허수아비에 불과한 조선 임금이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서인의 주류인 노론(老論)과 어떤 사안을 두고 충돌을 향해서 달려가다가 충돌 직전에 왕이 때마침 죽어주는 것으로 정리되는 패턴이 거듭되는 겁니다. 효종이 세상 떠나기 한 달 전에 송시열과 독대해서 “경에게 정권 다 줄 테니까 대신 북벌을 추진하라”고 제안합니다. 북벌 안 할 거면 정권 내놓고 다 나가라는 뜻입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아느냐”

송시열을 북벌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시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송시열이 정태화를 찾아와서 북벌 이야기를 하니까 정태화는 “나는 경이 북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올라가는 걸 보는 게 꿈이지만 몸이 약해서 같이 못하겠다”고 거절합니다. 송시열이 실망해서 간 다음에 정태화 아들이 “무슨 북벌 이야기냐”고 물으니 정태화는 “만약 내 입에서 북벌을 찬성한다는 한마디만 나오면 내게 뒤집어씌울 생각으로 왔기 때문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식으로 내가 병을 핑계대고 빠진 거다”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송시열이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데 한 달 후에 효종이 급서합니다. 종기가 났는데 신가귀라는 어의가 침으로 종기를 찢다가 혈락, 즉 혈관을 터뜨려서 세상을 떠난 겁니다. 신가귀를 조사해봤더니 수전증, 손 떨리는 증세가 있는 어의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그래서 효종이 나이 마흔에 갑자기 세상 떠났습니다. 그리고 2차 예송논쟁 와중에 현종이 정권을 남인에 넘기다가 서른넷의 나이로 또 급서합니다. 그래서 청나라 강희제가 불쌍하다고 제사를 두 번 지내줍니다. 그런데 현종이 세상 떠나기 1년 전에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납니다. 오삼계, 상가희, 경정충이란 한족 출신 번왕들이 군사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래서 양자강 이남이 쑥대밭이 됩니다. 그러자 백호 윤휴가 상소를 올려서 북벌을 주장합니다.

윤휴는 송시열과 한때 친하게 지내다가 갈라서게 됩니다. 윤휴가 ‘중용’의 장과 절을 구분하는데 주자가 구분한 것과 다르게 합니다. 그랬더니 송시열이 “네가 감히 주자가 한 것과 달리할 수 있느냐?”라고 하니까 윤휴가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만약 주자가 다시 살아나면 내가 틀렸다고 하겠지만 자사(子思)가 다시 태어나면 내가 맞다고 할 것이다”라고 답합니다. 자사가 바로 ‘중용’의 저자입니다.

이 말이 대단한 말이에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사상의 상대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는 단순히 송시열과 윤휴 두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미래 진로를 둘러싼 중요한 논쟁이 됩니다. 송시열이 주자를 절대화하려 했다면 윤휴는 주자를 상대화하려 합니다. 송시열은 주자를 절대화하는 것으로, 조선의 흔들리는 신분질서를 양반 사대부 중심으로 재편하려 합니다. 반면 윤휴는 주자를 상대화하는 것으로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을 완화 내지 해체하려고 합니다. 양자는 바로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충돌한 것입니다.

“호패보고 싸우라 하지”

그리고 윤휴는 진정한 북벌론자죠. 윤휴는 중국 남방이 쑥대밭 됐을 때 압록강을 건너면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때 조선의 정예군, 효종이 기른 정예 포병, 조총수가 압록강을 건너면 상황은 뒤바뀝니다. 윤휴가 북벌을 주창할 때 서인 정권의 최고 실력자였던 송시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국사 교과서는 송시열을 북벌론자로 가르쳐왔죠. 노론 후예 학자들이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에 나온 현상입니다.

윤휴는 북벌하려면 나라가 부강해야 하는데,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백성들이 잘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백성들이 잘살려면 양반 사대부의 특권이 철폐 내지는 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윤휴는 호패법을 지패법으로 바꾸자고 주장합니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재질이 다릅니다. 보통 2품 이상은 상아로 만든 걸 차고, 양반들은 뿔로 만든 걸 차고, 일반 상민이나 노비는 나무로 된 걸 찹니다.

그래서 윤휴가 지금 같은 종이신분증인 지패법으로 바꾸자고 주장한 겁니다. 그러면서 정묘호란 때 안주성을 예로 듭니다. 후금군이 안주성을 포위하자 감사 윤훤이 병사들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하니까 병사들이 호패를 끌러서 쌓아놓고 “호패보고 나가서 싸우라고 하지 왜 우리보고 나가서 싸우라고 하느냐” 하고 반발합니다. 임진왜란 때 서애 유성룡이 면천법(免賤法)을 실시했어요. 면천법이 뭐냐면 천인(賤人)이나 상민도 공을 세우면 양반이 될 수 있는 신분상승의 기회를 준 겁니다. 그러다가 전쟁 끝나니까 유성룡을 실각시키고 다 없던 걸로 만들었어요. 역사는 차별을 철폐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발전합니다. 그런데 전쟁 끝나니까 다시 과거로 돌아갔어요. 그러다 정묘호란 일어나 싸우라고 하니까 병사들이 호패 끌러놓고 “이 호패보고 나가서 싸우라고 하지 왜 우리보고 싸우라고 그러느냐?”라고 반발하지요.

아주 중요한 사례입니다. 그래서 안주성이 삽시간에 무너집니다. 임진왜란 때 면천법을 실시하니까 의병이 일어난 겁니다. 정묘·병자호란 때는 의병도 안 일어납니다. 임진왜란 때 면천법 실시해놓고 종전 후 폐기하니까 다시 의병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신분제를 철폐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래서 윤휴가 호패법을 지패법으로 바꾸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윤휴는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를 내자고 주장합니다. 조선의 양반 사대부는 병역의무가 없어요. 지금 우리나라 고위공직자들의 병역 면제 비율이 높은 것이 다 이 잘못된 유산을 이어받은 겁니다. 병역을 천하게 여기는 그 뿌리가 바로 조선 후기에 있어요. 1년에 두 필씩 군포를 내게 돼 있는데 농토가 많은 부자인 양반 사대부는 합법적으로 면제되었습니다. 가난한 상놈들만 내는 거예요. 군사비가 자꾸 늘어나니까 이미 세상 떠난 부친 것도 씌우고, 갓난아이 것도 씌워서 한 사람이 3명 몫을 내야 됩니다. 그러니까 못 견뎌서 도망가면 가족에게 대신 씌우는 족징(族徵)이 성행합니다. 한 가족이 모두 도망가면 이웃에게 씌우는 인징(隣徵)이 성행합니다. 그래서 한 마을이 텅 비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북벌론자 윤휴, 사약 받다

해결책은 뭡니까? 양반 사대부도 군포를 내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호포제(戶布制)죠. 그런데 조정에 올라오면 번번이 부결됩니다. 조정에는 양반 사대부들뿐이지 상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벼슬아치는 없지 않습니까? 이때 숙종 초에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조정에 들어간 윤휴가 호포제 실시를 주장합니다.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모두 군포를 매겨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상민은 원래 납부해왔으니까 결국 양반 사대부도 군포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양반 사대부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지요. 이런 와중에 중국에서 삼번의 난이 실패로 끝나면서 숙종이 정권을 갈아치웁니다. 국제정세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삼번의 난이 실패로 끝나니까 북벌을 주창한 남인 정권을 갈아치운 겁니다. 청나라가 혹시 자신에게 책임을 추궁할 경우에 대비한 겁니다. 서인들은 이때다 하고 윤휴를 사형시키려고 하는데 사형시킬 죄목이 없어요. 윤휴가 3년복설을 주장할 때 1년복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임금을 임금 대접 안 한 것으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왕실을 높여야 한다면서 3년복을 주장한 사람을 죽일 죄목이 없습니다.

윤휴는 죽여야 할 대상입니다. 북벌을 주장하고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을 해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국대전’ ‘대명률’을 다 뒤져도 해당 죄명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민정중이 “전하께서 결단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임금을 살인자로 유도하는 말입니다. 사형시킬 죄가 없지만 전하께서 결단해서 죽이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백호 윤휴는 사형당합니다. 야사에서는 윤휴가 사약을 마시면서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 후 조선은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이야기를 못 하는 침묵의 제국이 됩니다.


조선 후기에 외주내양(外朱內陽)이라는 말이 있어요, 겉으로는 주자학자인데 속으로는 양명학자라는 뜻입니다. 공부해보니까 양명학이 맞지만 양명학자라고 시인했다가는 심할 경우 윤휴처럼 사형당할 수 있으니까 겉으로는 주자학자인 척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곡 정제두(鄭齊斗)가 공부하다보니까 양명학이 맞습니다. 그러다가 병에 걸리자 유서 비슷하게 박세채에게 편지를 써서 양명학이 맞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나자 내놓고 양명학자로 자처합니다. 외양내양(外陽內陽)이 된 거죠. 그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그 작은 섬에 스스로 유배당해 학문의 자유를 누립니다. 백호 윤휴가 사형당하지 않고 주자를 상대화했으면 조선 후기 사회가 상당히 달라졌을 겁니다. 사상의 자유는 사회의 다양화, 다원화를 이끌어냅니다.

노론과 충돌하다 죽은 임금들

지금 우리나라 학계는 조선 후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미국 아이비리그 탈락률이 44%라는 연구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아이비리그에서는 “네 생각은 뭐냐?”라고 물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생각을 외우는 데만 익숙합니다. “주자(朱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만 줄기차게 외우는 겁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빠져 있는 거예요. 자기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같은 시스템인 국내에서는 견뎌도 아이비리그에서는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엊그제 신문 보니까 수능 만점자 중에 수학도 외웠다는 이야기가 버젓이 실려 있습니다. 수학도 외워서 만점 맞을 수 있는 곳이 한국입니다. 이게 우리나라 교육현실이에요. 노벨상은 다 자기 시각, 자기 사고로 사물을 바라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거지 남의 생각, 남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윤휴가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라고 맞섰다가 사형당한 사건이 그래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생각이 다른 것을 ‘틀리다’고 표현하지요. 이게 다 언어폭력이에요. 다르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여기에 똑같은 옷 입은 분 한 분도 안 계시죠? 이만큼 세상은 다양합니다. 인간이 그런 존재인데 하나의 틀 속에 억지로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 유학의 주류가 예학(禮學), 즉 예론(禮論)으로 갑니다. 김장생, 김집, 송시열 등이 모두 예학의 대가입니다. 왜 예학이 학문의 주류가 되느냐?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 이후 조선사회의 신분제가 흔들립니다. 임진왜란으로 사대부 지배체제는 이미 끝났습니다. 또한 면천제로 신분 해방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양란 후 다시 구 지배체제로 회귀하자 상민들이 저항합니다. 힘이 약한 사람은 도망가고 강한 사람은 산이나 바다로 들어가서 떼도적이 된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백호 윤휴는 신분제를 해체 내지는 완화하는 것으로 조선사회를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송시열 등은 신분제를 계속 강화해서 양반 사대부의 특권을 유지하는 쪽으로 사회를 끌고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예론이 나오는 겁니다.

철학에 체제나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담겨 있지 않으면 철학이 아니라 지적 유희, 말장난에 불과 합니다. 철학엔 반드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치열한 현실문제가 담겨있어야 합니다. 윤휴가 사형당한 후 주자는 임금도 감히 넘을 수 있는 신성한 존재로 한층 올라섭니다. 조선 임금이 주자를 절대화하는 사상을 가진 서인이라는 정파, 그 서인의 핵심인 노론과 어떤 사안을 두고 충돌을 향해서 달려가다가 충돌 직전에 조선 왕이 급서하는 것으로 정리되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소현세자가 그렇게 죽었고, 효종, 현종, 경종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사도세자가 노론에 맞섰다가 뒤주 속에 갇혀 죽습니다. 정조도 죽은 후 독살설에 휘말리고, 순조가 아들 효명세자를 내세워서 노론과 맞섰다가 3년 만에 또 급서합니다.

청나라에 뇌물 로비

조선 후기에 결국 택군(擇君)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임금을 선택하는 시대, 왕조 국가에서 택군이라는 말 자체가 역심(逆心)입니다. 지금은 대통령이 밤중에 누굴 만나는지 전혀 모르죠? 조선시대 때는 국왕과 신하의 독대(獨對)가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어요.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배석하게 돼 있습니다. 지금 이 제도를 복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치공작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 됩니다. 숙종 43년, 숙종과 노론 영수 이이명이 독대하는데, 그해가 정유년이라서 정유독대라고 합니다. 정유독대 후 갑자기 사형당한 장희빈의 아들,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는 명이 내려집니다.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태어날 때부터 남인이라는 당적이 찍혔습니다. 숙빈 최씨가 연잉군(영조)을 낳으니까 노론은 연잉군을 국왕으로 택군했습니다. 그 일환이 세자의 대리청정입니다. 소론 쪽에서는 대리청정을 시켜가지고 꼬투리 잡아서 내쫓으려는 속셈이라면서 거세게 반발합니다. 소론 영수 윤지완이 구순이 다 된 노구에 시골에서 와병 중에 있다가 관을 짊어지고 올라와서 상소합니다. 이때 상소문 중에 “전하께서는 어찌 상신(相臣:정승)을 사신(私臣:개인의 신하) 부리듯이 하며 이이명은 한 나라의 상신이 되어가지고 어찌 임금의 사신(私臣)인 것처럼 처신하느냐”라고 숙종과 이이명을 모두 꾸짖습니다. 대단한 의기죠. 이런 게 바로 선비정신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대통령 개인의 장관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장관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장관으로 있어야 하는데 대한민국 현실이 어디 그렇습니까?

소론에서 이처럼 격렬하게 반발하니까 세자를 갈아치우려 하다가 못 갈아치웁니다. 그러다 경종이 끝내 즉위하니까 노론에서 청나라에 이 사실을 보고하러 가면서 노론 영수 이이명이 은화 수만 냥을 청나라 조정에 바칩니다. 청나라 사신이 나오면 연잉군을 좀 만나달라는 로비입니다. 겉으로는 끝까지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노론 당론인데 실제로는 뇌물까지 가지고 가서 로비합니다. 사신이 나오면 왕을 만나면 되는 겁니다. 미국 대통령이 나오면 한국 대통령 만나면 되지 대통령의 야심 많은 이복동생을 왜 만납니까? 국왕 후보니까 미리 면접 봐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 스토리대로 돼가지고 경종은 4년 만에 서른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연잉군이 즉위합니다. 영조가 즉위하니까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습니다. 영조가 즉위 초에 능행을 가는데, 이천해라는 군사가 어가를 가로막고 욕을 합니다. 영조는 이천해를 사형시키면서 그가 한 말은 기록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실록에는 ‘불인지언(不忍之言)’, 차마 참을 수 없는 말이었다고 나오는데 모두 경종 독살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천해라는 군사가 “이 선왕을 독살한 역적”이라고 영조에게 욕을 한 겁니다.

과대포장된 영조

영조는 우리 역사에서 과대포장된 임금입니다. 노론과 손잡고 사도세자를 죽였기 때문에 노론 후예 학자들이 실제보다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국어교과서에 사도세자 관련해서는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만 실려 있었습니다. 한중록 이야기는 뭡니까? 사도세자는 정신병자고 영조 또한 정신병자에 가까운 성격 이상자인데 이 두 부자가 충돌해서 뒤주의 비극이 발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핵심은 우리 친정은 이 사건에 책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서울대학교 국문과의 한 교수가 제가 쓴 ‘사도세자의 고백’은 다 틀렸다면서 ‘한중록이 100% 다 맞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학문 현실입니다.

혜경궁 홍씨는 노론 당론에 따라서 남편 죽이는 데 가담했습니다. 그런데 노론에서 세손도 쫓아내야겠다고 하니까 여기에는 반대합니다. 세손이 쫓겨나면 죽는 겁니다. 영조도 내 자식은 죽였지만 손자는 못 죽이겠다고 반대합니다. 세존(정조)은 부친이 비참하게 죽는 것을 봤기 때문에 자기의 색깔을 전혀 드러내지 않습니다. 본능적인 생존술이죠.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이고 나서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없으니까 세손을 이미 죽은 효장세자의 호적에 입적시킵니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이것을 정확하게 예견합니다. “나는 폐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 삼으면 어떨꼬”라고 말합니다. 또한 혜경궁 홍씨에게 “그 뜻들이 무서워”라고 말하죠. 사도세자는 다 아는 겁니다. 자기 부인이 적진, 노론에 가담해서 자기를 죽이는 데 일조한다는 걸 다 아는 거예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때는 음력 윤5월이니 양력으로 치면 한여름입니다. 이때 세자는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정신병자 행세하려고 하니까 세손의 가죽 털모자인 휘항을 갖다달라고 말합니다. 한여름에 가죽 털모자를 빌려달라는 세자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답변이 “세손 거는 작으니까 당신 걸 쓰고 가세요”라는 겁니다. 그러자 세자가 “나는 오늘 나가서 죽겠기에 자네는 세손하고 오래 살겠기에 안 빌려주려는 그 속셈을 알겠네”라고 말하지요. 혜경궁 홍씨가 세손을 보호했던 것이 정조가 즉위할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자기 정체성은 분명히 밝혔지만, 13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과거회귀의 정치는 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정조가 성공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입니다. 과거는 과거, 역사에 맡기는 겁니다. 현재의 권력이 아무리 강해도 흘러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현재의 권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정치를 잘함으로써 더욱 나은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역사학은 과거학이 아니라 미래학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달라지는 겁니다. 현재의 권력을 가지고 과거 역사를 뒤바꾸려고 한 모든 정권, 모든 국왕은 다 실패했습니다.

한중록의 오류

영조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선왕 독살설을 없애기 위해 과거의 정치에 매진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사도세자도 죽인 겁니다. 미래를 선택한 정조는 자기 부친을 죽인 노론과도 손잡고 “함께 미래로 가자”고 이야기합니다. 정조 10년, 노론에서 정조를 압박하기 위해서 이복동생인 은언군을 사형시키라고 주창하다가 그 와중에 구선복이라는 인물에게 불똥이 튑니다. 그래서 노론으로 군권을 잡고 있는 구선복이 사형당하는데 정조가 “저놈이 나의 원수인데 내가 저놈과 10년 동안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얼굴 맞대면서 정치를 했으니 내가 어찌 화병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구선복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했던 인물이죠. 한 나라의 국왕, 한 나라의 대통령은 이 정도의 진정성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정조는, 무엇을 가지고 미래를 지향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이는 이런 정치체제로는 미래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노론일당 독재체제를 이가환이나 정약용 형제 같은 남인 계열 인물들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다당제로 바꿉니다. 그리고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바꾸어 양명학과 서학이라고 불렸던 천주학까지 용인하는 것으로 사상의 다원화를 꾀합니다. 그리고 신분제 완화를 시도합니다.

재위 1년에 서류허통절목, 서자도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법을 만들고 재위 3년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리수 이 네 명의 서자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채합니다. 이들은 사검서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면서 조선의 지식지도를 확 바꿔버립니다. 이들 서자 지식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중상주의(重商主義) 실학입니다. 노론이라는 당파는 끝까지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인정하자는 중상주의, 북학파는 노론과는 다른 서자 지식인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봤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간 국사 교과서는 중상주의 실학을 노론에서 주창한 것처럼 써놨었습니다. 거짓말이죠. 그러다가 얼마 전 교과서 바꿀 때 노론이라는 부분을 슬그머니 빼버리면서 중농주의 실학, 즉 경세치용 학파는 남인들이었다는 사실까지 빼버렸습니다. 아까 국어교과서에 ‘한중록’만 실었었다고 말했지요. ‘한중록’과 반대되는 내용은 많습니다. ‘영조실록’에도 있고 정조가 편찬한 ‘어제장헌대왕지문’도 있고 여러 야사도 있습니다. 교과서에 한중록을 실으려면 다른 시각의 사료도 싣고 난 후 학생들에게 어떤 게 맞는지 한번 조사해보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이비리그식 공부법이죠. 반면 우리나라는 “한중록만 믿어야 돼”라고 가르칩니다.

‘한중록’이 100% 맞다고 주장하는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는 그 근거로 “진술이 구체적”이라고 말합니다. 살인자도 구체적으로 혐의를 부인하면 무죄라는 이야기예요. 이것이 우리나라 학문 수준입니다. ‘한중록’만 배운 학생들에게 아이비리그에서 “사도세자가 과연 정신병 때문에 죽었을까?”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라고 물어보니까 답변을 못하는 겁니다. 사고의 다양성, 한 사건을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는 훈련을 못 받았기 때문에 탈락하는 거예요.

정조 독살설의 의미


정조는 서자도 등용해 신분제를 완화하는 것으로 미래를 지향합니다. 그러다가 정조가 결국은 독살설에 휘말리면서 세상을 떠나게 되죠. 얼마 전에 정조가 심환지와 주고받은 어찰이 나왔죠. 그러니까 정조어찰을 연구했다는 학자들이 느닷없이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결정적 자료라고 주장했지요. 제가 어떤 방송 인터뷰에서 “아내가 살해당하면 제1 용의자가 누가 되는지 아느냐? 남편이 아니냐” 그랬더니 진행자가 “남편이 보험에 들어놨을 때 그렇다”고 답해요. 그래서 제가 “심환지가 정조가 세상 떠난 당일로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그게 보험금 탄 거 아니냐?”라고 답했습니다.

정조어찰이 나왔으면 기본적인 연구 자세는 어떠해야 하느냐? 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기존 사료와 그 내용이 배치되는지 아닌지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러면 정조어찰은 기존사료를 뒤집는 사료가 아니라 그 배경을 설명해주는 보조사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록에 심환지가 우의정을 사퇴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는데, 정조어찰이 그 배경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니까 독살했을 리가 없다는 단순무식한 이야기를 기자들 앞에서 해서 약 이틀 동안 그게 통용됐어요.

심환지가 정조 독살 혐의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정조가 세상 떠난 후에 심환지가 정조의 정치노선을 조금이라도 계승하려고 노력하다가 귀양을 간다든지 파직당한다든지 하는 정치적 불이익을 당한다면 정조 독살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환지는 정조가 세상을 떠나던 1800년과 그 다음해인 1801년, 이때가 바로 다산의 형 정약종은 사형당하고 정약전은 정약용과 귀양 가는 등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신유박해가 발생한 해입니다. 정조 때 성장했던 남인은 대부분 죽거나 귀양 가죠. ‘순조실록’은 이 모든 옥사를 심환지가 주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또 ‘순조실록’에는 선왕(정조)이 선향(仙鄕:저승)으로 떠나던 당일로 선왕을 배신했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백주대낮에 학자라는 사람들이 ‘정조와 심환지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니까 독살했을 리 없다’고 주장하는, 심환지에 대한 실록 기록입니다. 21세기의 학자들이 ‘정조독살설’을 자신들에게 아픈 이론 구조, 아픈 프레임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그 구조가 문제라는 겁니다. 정조 죽음은 200여 년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그 진실을 밝히려면 사건을 객관화, 대상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정조가 노론에 의해서 독살당했다는, ‘이 노론에 의해서’란 문구를 너무 아프게 생각하는 학자가 많아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200년 전, 300년 전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겁니다.

이완용 비서 이인직의 매국행위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자행되죠. 세도정치가 뭐냐? 노론의 10여 개 집안이 모든 국정을 농단하는 겁니다. 강화도령, 즉 철종의 형인 회평군을 노론에서 죽였어요. 죽인 사람의 동생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곧 왕은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고종 시대를 맞이하죠.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910년 8월 이인직이라는 인물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를 밤중에 몰래 찾아갑니다. 이인직이 이완용의 비서입니다. 이인직을 보내 “나라를 넘기면 우리에게 어떻게 해줄 것이냐?”라고 묻는 겁니다. 고마쓰가 “귀족령을 만들어서 계속 귀족으로 대우하고 막대한 은사금으로 나라 팔아먹은 대가를 지불할 거다”라고 말하니까 이인직이 좋아서 갑니다.

이완용이 데라우치 통감하고 협상하면서 “고종의 지위는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어요. 데라우치가 “왕으로 봉할 거다”라고 하니까 이완용이 “대공(大公)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제안합니다. 대공은 왕과 공작 사이의 중간 계급으로서 왕이 아닙니다. 이게 아까 말씀드린 노론, 인조반정의 쿠데타 명분, 조선 왕은 왕이 아니라는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 겁니다. 이완용이 노론 당수예요.

나라가 망했을 때 일본에서 76명에 달하는 조선인에게 훈장과 작위를 주죠. 이 76명을 조사하면 두 부류가 나옵니다. 하나는 왕족입니다. 대원군의 조카가 있고 순종의 장인도 있어요. 다른 하나는 당인(黨人)들입니다. 64명 정도의 당적을 알 수 있는데 남인은 없고 북인은 2명이고 소론이 6명이고 나머지 56명이 다 노론입니다. 이인직이 고마쓰를 찾아가서 “우리는 중국을 섬겨왔는데 이제 일본으로 바꾸는 것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정확히 노론 당론입니다.

그런데 국어교과서에서 이인직을 뭐라고 가르쳐 왔습니까? ‘혈의 누’를 쓴 선각자로 가르쳐왔지 않습니까? 이 상태에서 대한민국이 미래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혈의 누’ 내용이 뭔지 아세요?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가 조선 처녀를 겁탈하려는 것을 일본군이 구해준다는 내용이에요.

훈민정음의 변질

우리 언어는 지난 100년 사이에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한글날이면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표음문자라고 자랑하죠. 그런데 이 우수하다는 표음문자가 L과 R을 구분 못하고, P와 F, 또 B와 V도 구분 못하죠.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는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게 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다 나와 있어요. 이 원칙에 따르면 R과 L을 구분할 수 있게 돼 있어요. 병서(竝書) 원칙이 있습니다. 초성(初聲)을 두 개, 세 개 써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원칙에 따르면 L은 그냥 ‘ㄹ’ 로 쓰고 R은 ‘ㅇㄹ’로 쓰든지 ‘ㄹㄹ’로 쓰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연서(連書) 원칙이 있어요. 순경음을 적는 방법입니다. P와 F, B와 V 모두 입술소리죠. 하나는 ㅂ으로 적고 다른 하나는 ㅂ아래에 ㅇ을 써서 순경음을 만들면 구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만든 겁니다.

그런데 1912년에 일본 사람들이 언문철자표기법이라는 걸 만들어요. 지금 한글맞춤법통일안이라는 것은 언문철자표기법을 한글로 옮겨놓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두음법칙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전세계에서 특정음을 발음 못하게 국가권력으로 강제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어요. 앞에 ㄹ이 발음되면 ㄹ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걸 강제로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 언어를 절름발이로 만든 겁니다. 다 일제시대의 잘못된 유산입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원칙으로 돌아가면 모든 발음을 다 구분해서 적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학 때 교사들 교육시켜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면 영어 때문에 그렇게 난리 치지 않아도 다 잘할 수 있게 돼 있어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그렇게 만들어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자고 하면 반대하는 국어 학자가 많습니다.

강화도로 들어갔던 양명학자들은 대부분 소론 계열입니다. 이들이 나라 망하니까 만주로 망명해요. 만주에 가보면 횡도천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 이건창의 동생인 이건승, 홍승원, 정제두의 6대손 정원하 같은 양명학자들이 망명해서 독립운동 합니다. 그런데 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홍승헌, 정원하를 찾아보면 세상 떠난 해가 물음표로 돼 있어요. 이러니까 대한민국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거예요. 나라 팔아먹는 데 가담한 쪽은 계속 호사를 누리는데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분들은 생사조차 모릅니다. 최소한 명예라도 높여줘야 되는데 이게 안 돼 있는 겁니다. 이상을 선택해서 자기 몸을 던졌으면 그 명예를 후대인들이 기려줘야 하는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에서는 우당 이회영 6형제 일가가 전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웁니다. 그리고 또 충청도 진천에 있는 양명학자들과 경상도 안동에 있는 남인 계열의 백하 김대락, 석주 이상룡 같은 인물이 만주로 망명해서 횡도천에 모였다가 추가가라는 마을로 이주해 경학사라는 민단자치조직을 만듭니다. 저는 이 경학사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요, 대한민국 정부의 뿌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100년 전인 1911년 음력 4월경에 일단의 양반 사대부들이 만주의 추가가라는 마을 뒷산, 대고산이라는 곳에 모여서 노천군중대회를 엽니다. 노천군중대회라는 민주적 집회를 하고 그 결과로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를 만들고 경학사에서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일본을 구축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꿈을 꾸는 겁니다. 나중에 많은 독립군 지휘관이 이 신흥무관학교에서 나옵니다. 나라가 망했을 때 나라 팔아먹은 쪽에서 막대한 은사금을 받고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자기 모든 걸 던져서 만주로 망명하고 추가가에 모여서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었던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를 찾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전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하느냐의 답이 나와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사회 불만지수는 가난할 때보다 훨씬 높지 않습니까? 그 물질에 걸맞은 정신을 못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제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을 비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노론사관은 중국인의 시각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고 일제 식민사관은 일본인의 시각으로 우리를 보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봐야 합니다. 세계 10대 교역국이라는 덩치에 걸맞은 정신세계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이 대한민국이 미래로 나갈 수 있습니다.

안동에서 망명한 석주 이상룡 선생이 ‘서사록’이라는 망명일기를 남기는데 그 기록을 보면 일제가 나중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서 우리 역사를 왜곡하리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써놓습니다. 일제 식민사관은 아직까지 한사군은 평양 중심, 한강 이북에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동북공정의 주요 논리입니다.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이 한사군은 한강 이북에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고조선사 같지만 대한민국사이자 현대 영토 문제입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15일에 해체됐지만 조선사편수회는 해체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그 역사가 그대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사군이 설치되었을 당시에 쓰였던 사마천의 ‘사기’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같은 책은 한사군의 위치를 ‘재요동(在遼東)’, 즉 ‘요동에 있다’고 써 놨습니다. 요동이 만주죠. 모든 중국 역사서는 다 요동에 있다고 써 놨는데, 100년 전에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강 이북에 있다고 새롭게 주장한 것을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나라의 정신계가 황폐한 겁니다.

일본 고관만 죽이고 운전수는 살릴 방법이 없겠느냐

이제는 새로운 역사관, 언어관으로 대한민국의 그랜드 디자인을 다시 짤 때가 됐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나라가 망했을 때 자기의 모든 걸 다 털어가지고 대한민국 건국의 씨앗이 된 분들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야 합니다. 구파 백정기라는 분이 있습니다. 상해 육삼정에 일본군 고위 장성들과 중국의 부패관료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폭탄을 던지려고 하는데 일본 고관만 죽이고 운전수는 죽이지 않을방법이 없겠느냐고 고민합니다. 아무나 무차별로 살상하는 알 카에다와는 정신적, 도덕적 차원이 다른 겁니다. 한국 독립운동이 이렇게 대단히 높은 도덕적 사고 속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나라가 제 길을 잡으려면 이 독립운동가들이 갖고 있던 마음, 나라 망할 때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로 망명해 처음 시작했던 마음, 일본과는 추호의 흔들림 없이 싸우면서도 관련 없는 사람은 한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던 마음으로 대한민국의 정신세계를 다시 세워야 하는 겁니다.

엄형순 선생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들 이규창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어린 규창에게 “너는 좋은 세상 만나면 나가서 어머니께 효도하고 살아라”면서 모든 일을 혼자 했다고 진술하고 사형 선고 받습니다. 법정에서 마지막 진술 때 “내가 비록 인간해방과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한 행위지만 어쨌든 그 와중에 희생된 인물들에게도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사형당합니다. 바로 이런 정신세계를 가지고 우리 후세를 가르치고 우리 공무원이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미래의 선진국으로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그런 문제점 속에서 이런 귀한 씨앗들, 즉 나라 망했을 때 모든 것을 바치고 만주로 망명하는 선비정신이 있었고, 그런 정신이 현재 대한민국의 정신으로 되살아날 때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긴 시간 감사합니다.

출처 : 다음블로그 貪 嗔 痴
http://m.blog.daum.net/skxogkswhl/17955932?categoryId=823080

소칼 사건(- 事件, Sokal affair, Sokal's hoax)

Posted by 히키신
2016. 6. 12. 23:13 etc


소칼 사건(- 事件, Sokal affair, Sokal's hoax)은 앨런 소칼이 1996년에 유명 인문학 저널인 《소셜 텍스트》(Social Text)를 상대로 벌인 지적 사기극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뉴욕대학교의 물리학 교수였던 소칼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학문적 엄정성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논문이 '그럴듯 하게 들리고, 편집자의 이데올로기적 선입견에 편승하기만 하면' 내용에 관계없이 게재가 되는지 시험하기 위해 가짜 논문을 투고하였다. 이를 위하여 1994년에 그는 양자 중력이 언어, 사회적 구성(Construct)이라는 것을 제안한〈경계를 넘어서: 양자 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위하여〉("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 a Transformative Hermeneutics of Quantum Gravity")를 《소셜 텍스트》지에 투고하였다. 당시 《소셜 텍스트》 지는 동료 평가를 하지 않았으며, 물리학자에 의한 전문가 평가를 거치지 않았다. 결국 이 논문은 1996년 《소셜 텍스트》의 봄/여름 ‘과학전쟁’ 특별호에 개제되었으며, 소칼은 이 논문의 출판일인 1996년 5월에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라는 학술지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였다. 이후, 이 사건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프랑스 철학계를 발칵 뒤집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대한 논쟁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연구윤리와 동료평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배경

소칼의 저서에 따르면, 그는 폴 R. 그로스와 노르만 레비트의《고등 미신: 학문적 좌파와 과학에 대한 그들의 헛소리》(Higher Superstition: The Academic Left and Its Quarrels With Science)를 읽고 가짜 논문을 투고하기로 결심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미국 대학들의 인문학 학과들에 만연한 반지성적 풍토에 대해 비판하였다.

흔히, 과학 전쟁의 기폭제라고 여겨지는 《고등 미신》에서는 흔히 "학문적 좌파"라고 불리는 인종주의, 성 차별과 같은 차별에 관심을 두던 학자들이 과학, 특히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불신을 퍼뜨린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주도하는 해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과학에 대한 무지와 적대성, 그리고 정치성을 비판하였다. 특히 저자들은 일부 학술지들이 논문의 엄정성을 동료평가를 통해 평가하지 않고 정치적 경향성에 의해서만 논문을 평가한다고 우려하였다. 특히 인문학 학술지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좌익적 견해"와 유명한 좌익 학자들을 인용하기만 하면 된다고 비난하였다.

좌파들이 제시한 과학에 대한 비판에 대한 사실 중 가장 신기한 점은 얼만큼 이 분야의 선동가들이 주제에 관한 무지에 대해 주제를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피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만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 주저하는 것을 이겨냈냐는 것이다.

이렇게 《고등 미신》은 적절한 비판 없이 받아들여진 주관주의적 관점을 비판하기 위한 시도였으며, 과학 전쟁에서 주로 비과학자들이 과학의 객관성을 반박하는 논쟁적인 주장들을 내놓는다는 과학자들의 논거로 사용되었다.

제출된 논문

소칼은 만약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학문적 엄정성을 잃었다면, 학술지 편집자들은 그의 논문의 내용이 아닌, "편집자들의 편견에 대한 아부"와 "거창하게 들리는 정도"에 따라 논문 게재를 허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4] 이외에도, 소칼은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즘을 공격한 것은 이것이 이성과 과학에 대한 큰 위협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학문적 좌파'(Academic Left)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노력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논문의 내용

소칼은 〈경계를 넘어서: 양자 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위하여〉라는 가짜 논문을 작성하였다. 이 논문은 양자 중력이 큰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고 보았고, 심지어는 "물리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관념 이외에도 물리적 현실 조차도 밑바탕은 사회적, 언어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리고, 양자중력에 대한 대안적 이론으로 "형태 형성장"(루퍼트 셸드레이크에 의한 뉴에이지적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 논문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과학이 종래의 과학에 깊이 박혀있는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를 타파하고, 과학적 활동에 민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만든다고 주장하였으며, 과학을 객관성의 목표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과학이론이 결국에는 맞고 틀린 문제를 떠나서 진보를 추구하는 정치적 실천의 구체적인 도구인 전략적 이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칼은 주석을 통하여 뻔히 보이는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

마클리(1992, 264쪽), 사족을 한마디 달자면, 나는 수리물리학에서도 아직은 상당히 사변성이 강한 것으로 간주되는 복소수 이론(복소수 이론은 물리학이 아닌 수학에 속하며, 이미 19세기에 확립이 된 이론이다.)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토대가 잘 확립된 다른 세 이론들과 인식론적으로 동일한 지위에 올려놓아야 하는지 그 점이 석연치 않다.

동료평가

1996년 당시, 《소셜 텍스트》지는 더욱 독창적이고 틀에서 벗어난 연구를 촉진하기 위해 동료평가를 시행하고 있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소칼의 논문은 그들의 연구의 정직성에 대한 믿음을 배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반드시 동료평가제가 논문조작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소칼 사건 이후로, 《소셜 텍스트》지는 논문 동료평가 과정을 추가하였다.

출판

소칼은 당시 ‘과학전쟁’특별판을 준비중이던 《소셜 텍스트》측에 논문을 투고하였다. 이때, 소칼이 작성한 〈경계를 넘어서: 양자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위하여〉는 자연과학자가 투고한 유일한 논문이었다. 후에, 소칼이 《링구아 프랑카》지에 자신의 가짜 논문에 대하여 폭로하자, 《소셜 텍스트》지 편집자들은 소칼에게 이전에 수정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였다고 설명하였으며, 당시 논문의 질에 대하여 우려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소셜 텍스트》지는 저자의 동의를 얻어서 1996년 5월, 96년도 봄/여름 ‘과학전쟁’ 특별호에 소칼의 논문을 출판하게 되었다.

반응

1996년 5월호 《링구아 프랑카》지의 〈물리학자가 문화 연구를 실험하다〉("A Physicist Experiments With Cultural Studies")에서 소칼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 논문은 가짜였다고 폭로하고, “《소셜 텍스트》지는 이데올로기적 편향과 편집자의 편견 때문에 관련 분야의 전문가에게 확인해 보지도 않고 양자 물리에 관한 논문을 출판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반대로 편집자들은 소칼의 논문인 〈경계를 넘어서: 양자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위하여〉는 논문의 정직성에 대한 그들의 신뢰를 저버린 배신이라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과학적 동료평가는 논문조작을 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 논문에서 "패러디 논문이라는 사실은 어떤 징후를 보여주는 논문이라는 점에서는 우리의 관심을 크게 변하게 하지 못했다"라고 주장했다.

답으로 소칼은 《소셜 텍스트》지 편집자들의 반응은 자신이 지적한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엄연히 한 학술지인 《소셜 텍스트》지는 이 논문이 양자 중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정확하고, 진실되며, 성실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학술적 권위자’가 이를 작성했다는 사실과 이 논문의 모호한 문체로 인하여 이 논문을 게재하였다고 비판하였다. 편집자들은 논문을 게재한 이유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였다. 하지만, 편집자들은 이 논문이 서툴게 쓰였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소칼이 그들의 학술적 승인을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게재를 승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칼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제 목표는 야만인 떼처럼 몰려드는 문학 평론가들에게서 과학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고(지적은 감사하지만, 우린 무사히 잘 살아남을 겁니다) 좌파를 그 자신의 유행처럼 번지는 한 부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과학기술 주변에는 수많은 정치경제적 문제가 있어 왔습니다. 과학의 사회학은 한 면으로는 이러한 문제점을 명료화 하는데에 큰 도움을 주웠습니다. 하지만, 너절한 과학의 사회학은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는 역효과를 주기도 합니다.

이 사건이 터진 이후 《뉴욕 타임즈》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 《르 몽드》 등의 여러 신문에서 대서특필되었다.

학계

이 사건이 터진 이후에 소칼을 비판하는 의견도 많이 발표되었다. 또한 코넬대학교의 과학기술학부의 학장인 스티븐 힐가트너가 작성한 〈The Sokal Affair in Context〉(1997)에서는 소칼 사건을 윌리엄 M. 엡스타인이 《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s》지에 게재한 〈Confirmational Response: Bias Among Social Work Journals〉(1990년)와 비교하였다. 엡스타인은 소칼과 동일한 방식을 이용하였다. 그는 가짜 논문을 실제 학술지에 제출하여 반응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힐가트너에 따르면 엡스타인은 더 방법론적으로 정당한 방식을 이용했지만,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힐가트너는 소칼 사건로 인하여 발생한 학술계의 충격은 이 실험방식의 질 때문이 아니라, 언론사들의 과장보도와, 미국 언론인들의 반지성적 편견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소칼 사건은 학계에서 대중매체로 전파되었다.《지적 사기》에서 비판당한 학자 중 한 명인 브루노 라투르는 이 사건을 ‘찻잔속의 폭풍’이라고 표현했다. 수학자인 가브리엘 스톨첸버그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소칼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이 비난하려는 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소칼과 장 브리크몽은 《과학의 사회 연구》(Social Studies of Science)에서 이 비판에 대해 자신들의 연구에 대한 ‘편향된 와전’이라고 비판하였으며, 그의 스트롱 프로그램에 대한 해설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같은 학술지에서 스톨첸버그는 그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의견을 잘못 읽었기 때문이라고 반박하였다. 또, 스톨첸버그는 독자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상세하고 비판적이며 성급하지 않게 고려”하기를 주장하였다.

한국

한국어권에서는 이 사건을 '미국과 프랑스간의 지성 대결', 또는 '절대 진리에 도전하는 상대 진리'와 같이 보도하였다. 하지만 이는 상기 소칼의 본래 의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라 하겠다. 당시 한국 학계에서는 소칼의 주장을 지지하는 학자는 극소수였다. 이정우(당시 서강대 전 교수)는 “소칼의 주장은 엉뚱하기 짝이 없”으며, “인문학 분야에서 뒤처진 미국인이 ‘프랑스 콤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해 선정적 주장을 편다”고 주장했으며, "과학에 대한 유치한 절대주의를 고수하는”, “논거도 분석도 없는 삼류학자”가 “위대한 인물들을 흠잡음으로써 빗나간 명성을 얻으려는 소인배의 술책”이라고 규정하고 《지적 사기》는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같은 자극적 에세이와 동일선상에 있다고 매도하였다. 하지만 서방세계의 2개 대학에서 테뉴어를 하며 동시에 산디니스타 공산정권에서 강의를 한 소칼을 삼류학자라느니 소인배라느니 평가절하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할 것이다. 진중권은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에서 이정우 등의 소칼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들을 “제가 팔아먹은 상품을 헐뜯는 자에게 보내는 지식 소매상의 히스테리”라 평가했다.

또한 1998년 3월에 교수신문 지면 상에서 이루어진 과학에 대한 사회 구성론의 역할에 대한 토론을 ‘한국판 소칼 사건’이라고 부른다. 당시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김환석 교수가 1998년 3월 9일 교수신문에 투고한 〈과학기술학과 과학기술정책〉 [20] 에 대해 당시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 오세정교수가 반박글을 내놓은 것으로 부터 시작된 이 논쟁은, 신문지상의 논쟁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21] 이에 대하여 오세정교수는 비록 사회적 영향을 과학이 받기는 하지만 “과학의 냉엄한 비판자는 ‘자연’”이라는 반론을 내 놓았으며, 이에 대해 김환석 교수는 관찰된 자연은 여과과정 없이는 과학지식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과학에 대한 참여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비현실 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5월 18일에 송상용 한림대학교 교수가 논평하면서 논쟁이 종료된 것으로 보인다.

후일담

이 사건이 끝난 뒤에, 소칼은 《지적 사기》라는 책을 출판해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비판을 반박함과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스트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다. 일반적인 충돌로만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소칼 사건 이후, 철학계 또한 자숙의 계기를 갖고 다른 학문과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노력을 했으며, 그 사례로는 리모더니즘이나, 포스트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

유사 사건

보다노프 사건 : 흔히 역-소칼사건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소칼 사건은 지적 사기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고, 보다노프 사건은 지적 사기를 목적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얀 헨드릭 쇤 : 네이쳐, 사이언스, 피지컬 리뷰 지에 28개의 허위 논문을 개제하였으며, 이 논문들은 허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논리를 펴고 있다.
로젠한 실험(Rosenhan Experiment) : 12개의 정신병원에 제 정신인 사람들을 정신병자로 가장하여 입원시킨 사건이다.
SCIgen 사건 : 무작위로 생성시킨 컴퓨터 논문을 한 학회에서 동료 평가를 거치지 않고 게재한 사건이다.

(출처 : 위키백과, <소칼 사건>)

1554년 금강산, 청년 율곡과 어느 노승의 대화

Posted by 히키신
2016. 6. 9. 10:47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1554년 금강산, 청년 율곡과 어느 노승의 대화

: 불교와 주자학의 철학적 격론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서울대철학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받음. 《주회에서 정약용으로》 《중고생을 위한 고사성어 강의》 등의 저서와 ‘理氣 패러다임의 철학적 전망’ 등 논문 다수.



1. 방황


율곡은 나이 열여섯에 어머니의 죽음을 맞았다. 조운(漕運)의 일을 맡은 아버지를 따라 남도를 돌아오던 길에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는 부랴부랴 마포에 배를 대고 집으로 향했다. 조선 제일의 여인으로 칭송받는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을 임종도 못하고 떠나보낸 안타까움과 그리움은 율곡의 정신적 풍경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로부터 삶에 대한 회의와 우울이 깊어갔고, 급기야는 유학자들에게는 금기나 다름없는 입산을 결행하게 된다.


율곡은 그의 술회에 의하면, 학문도 과거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맞았고 그 이후 몇 해 동안 “옛 사람들의 글로 해학에 가까운 것을 취해서 수시로 열람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오랫동안 자신 속에서 갈등해 온 도학(道學)과 과거(科擧), 즉 성(聖)과 속(俗)의 두 갈래 길에서 ‘성자의 학문’을 우선으로 하겠다는 것, 다시 말하면 사회적 성취보다 스스로의 삶을 완성하겠다는 힘든 길을 가겠다고 ‘뜻을 세운’ 것이다.


그는 학문의 방법을 말할 때, 언제나 ‘입지(立志)’를 첫머리에 강조했다. 19세, 금강산에서 내려와 스스로를 경계한 《자경문(自警文)》의 첫머리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크게 세워 성인으로써 표준을 삼을 것이니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못 마친 것이 된다.”고 적었다. 아이들을 깨우치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첫머리도 ‘입지’로 시작하고 임금에게 방대한 성리학의 학문체계를 요약 제시한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첫머리도 수신(修身)의 첫 발걸음이 입지임을 힘주어 강조했다.


이 무렵, 즉 열여섯에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던 2~3년, 그리고 새로운 각오로 학문에의 길을 내딛던 이 시기가 그의 인간과 사상을 읽는 관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이력,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전환점’이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그는 두 번의 전환을 겪는다. 하나는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증폭된 정신적 갈등을 어쩌지 못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이고, 또 하나는 ‘삶’을 이해하는 유교적 진리에 대한 실존적 자각과 더불어 하산하는 것이다. 이 두 전환은 일년 남짓의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는 다시 하산(下山)했다. 불교에 대한 그의 심취와 탐구가 그의 내적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다시 사회 속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1년여의 방황을 마치고 다시 유학으로 회귀하면서 지은 시에는, 그를 괴롭히던 정신적 충격과 방황이 상당히 탈각되면서 상당한 정신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산인(山人) 보응(普應)과 함께 하산하여 풍암(豊巖) 이광문(李廣文)의 집 초당에서 묵으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도를 배움에는 ‘매인 바’가 없어야 하니 學道卽無著

인연따라 이르는 곳에 노닐 뿐이네 隨緣到處遊

잠시 청학동 하직하고 暫辭靑鶴洞

백구주에 와 구경하노라 來玩白鷗州

내 몸은 천리 구름 속에 있고 身世雲千里

우주는 바다 끝에 닿아 있네 乾坤海一頭

초당에 묵어가는 무심한 하루밤 草堂聊寄宿

매화를 비추는 달 이것이 풍류로다 梅月是風流


그는 편견과 고착을 떠나 진리를 구했고, 그런 정신으로 불교와 노장(老莊)의 청학동을 노닐다가, 이제 다시금 유학의 백구주(白鷗州)로 돌아왔다. 그는 삶의 실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키는 대로 방황하고 여러 철학을 순례했지만, 나중 이 입산의 경력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혐의와 비판에 시달리게 했다. 그러나 이때 그는 다만 길을 가고자 했을 뿐,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2. 노승과 나눈 짧은 대화


그렇다면 그는 어떤 계기를 통해 유교로 다시 ‘회귀’했을까. 여기가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유감스럽게도 율곡은 그 점을 직접 자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았다. 당대의 유가독존적 분위기가 불교에 대한 논의 자체를 원천봉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천만 다행하게도 그 언저리를 짐작하게 해 주는 상징적 일화 하나가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금강산을 유력하던 시절 어느 암자에서 노승과 나눈 문답이 그것인데, 이 일화는 그의 불교를 향한 입산과 유교를 위한 하산이라는 실존적 ‘전향’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니, 거시적으로 볼 때 불교와 유교의 만남이라는 동아시아 문명사에서의 거대한 합류의 한 실례를 보여주는 귀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노승과의 에피소드는 짧지만 풍부한 함의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자세히 분석해 보려한다. 언젠가 꼭 한번 다루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제목은 「금강산에서 조그만 암자의 노승에게 주다」이다.


(*시를 주게 된 경위는 이렇다.)

내가 풍악산을 유람하던 어느 날, 혼자서 깊은 골짜기를 몇 리쯤 가다보니 조그만 암자 하나가 나타났다. 노승 하나가 가사를 걸친 채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나를 보고서도 일어나지도 않고 입도 떼지 않았다. 암자를 한바퀴 둘러보니 아무 것도 없고 아궁이에는 불을 땐 지 며칠 된 듯하였다. 내가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시오?” 노승은 웃음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무엇으로 허기를 끄시오?” 노승은 소나무를 가리키며 “이게 내 양식이오.” 나는 그의 식견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공자와 석가, 둘 중 누가 성인이오?” “선비는 나를 놀리지 마시오.” “불교는 이적(夷狄:오랑캐)의 가르침이어서 중국(中國)에선 시행될 수 없소이다.” “순(舜)은 동이(東夷) 출신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출신이니 이들 역시 이적이란 말이오.” 나는 말했다. “불교의 핵심적 교의(妙處)가 우리 유가를 벗어나지 않거늘 굳이 유학을 버리고 불교를 찾고 있소?” 노승이 말했다. “유가에도 ‘마음 그것이 곧 부처다(卽心卽佛)’라는 말이 있소?” 나는 말했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말하면서 입만 열면 요순을 들먹였는데 (이것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 그렇더라도 우리 유학의 견해가 (훨씬) 적극적(實)이오” 노승은 (내 말을) 수긍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묻기를,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다’가 무슨 소리요” 내가 말했다. “이 또한 상대적 의식의 특정한 양태(前境)일 뿐이오.” 노승이 씨익 쪼개는 것을 보고 내가 물었다. “‘소리개가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 이것은 색(色)이오 공(空)이오.” 노승이 말했다.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님은 진여(眞如)의 체(體)요, 이런 시로 어떻게 빗댈 수 있단 말이오.”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언어적 표현(言說)을 거쳤다면 바로 상대적 인식의 지평(境界)이니 어떻게 체(體)라 할 수 있겠오. 허면 유가의 핵심(妙處)은 언어를 통해 전할 수 없는데 불교의 진리는 문자 언저리에 있는 셈이오.” 노승은 화들짝 놀라며 내 손을 잡고 “그대는 시속의 범용한 선비(俗儒)가 아닌가 보오. 나를 위해 시를 지어,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글귀의 뜻을 풀어주시오.” 그래서 절구 한 수를 써 주었더니 (이윽히) 보고나서 소매속에 넣고는 벽을 향해 돌아앉아 버렸다. 나도 그 골짜기를 나오고 말았는데 경황간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사흘이 지난 뒤 다시 가 보았더니 암자는 그대로인데 노승은 떠나버리고 없었다.


물고기 뛰고 소리개 날아 아래 위가 한가지 魚躍鳶飛上下同

이는 색(色)도 아니오, 공(空)도 또한 아닌 것 這般非色亦非空

무심히 한번 웃고 내 몸을 둘러보니 等閒一笑看身世

노을지는 숲, 나무들 사이에 홀로 서 있구나 獨立斜陽萬木中


이 게임을 보고 있노라면 선가(禪家)에서 일어나는 사제간의 법력 겨루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지금 율곡과 노승은 각각 유교와 불교의 가치를 어깨에 매고 한판 정당화의 칼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 전투의 서막과 종극을 이해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실제로 칼을 부딪는 장면인데, 이 대목은 상세한 철학적 분석과 해설이 필요하다. 편의를 위해 핵심부에 다음과 같이 번호를 매겨두기로 한다.


(1) 율곡: “공자와 석가, 둘 중 누가 성인이오?” 孔子釋迦, 孰爲聖人.


(2) 노승: “선비는 나를 놀리지 마시오.” 措大,莫瞞老僧.


(3) 율곡: “불교는 이적(夷狄:오랑캐)의 가르침이어서 중국(中國: 여기서는 동아시아 문화권을 지칭한다)에선 시행될 수 없소이다.” 浮屠是夷狄之敎, 不可施於中國.


(4) 노승: “순(舜)은 동이(東夷) 출신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출신이니 이들 역시 이적(夷狄)이란 말이오.” 舜東夷之人也. 文王西夷之人也. 此亦夷狄耶.


(5) 율곡: “불교의 핵심적 교의(妙處)가 우리 유가를 벗어나지 않거늘 굳이 유학을 버리고 불교를 찾고 있소?” 佛家妙處, 不出吾儒. 何必棄儒求釋乎.


(6) 노승: “유가에도 ‘마음 그것이 곧 부처다(卽心卽佛)’라는 말이 있소?” 儒家亦有卽心卽佛之語乎.


(7) 율곡: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말하면서 입만 열면 요순을 들먹였는데 (이것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 그렇더라도 우리 유학의 견해가 (훨씬) 적극적(實)이오” 孟子道性善言必稱堯舜, 何異於卽心卽佛. 但吾儒見得實.


(8) 노승: 수긍하지 않고, 한참 있다가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다’가 무슨 소리요” 不肯,良久,乃曰, 非色非空, 何等語也.


(9) 율곡: “이 또한 상대적 의식의 특정한 양태(前境)일 뿐이오.” 此亦前境也.


(10) 노승: 씨익 쪼개다. ?之.


(11) 율곡: “‘소리개가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 이것은 색(色)이오 공(空)이오.” 鳶飛戾天魚躍于淵, 此則色耶空耶.


(12) 노승: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님은 진여(眞如)의 체(體)요, 이런 시로 어떻게 빗댈 수 있단 말이오.” 非色非空是眞如體也. 豈此詩之足比.


(13) 율곡: 웃으면서, “언어적 표현(言說)을 거쳤다면 바로 상대적 인식의 지평(境界)이니 어떻게 체(體)라 할 수 있겠오. 허면 유가의 핵심(妙處)은 언어를 통해 전할 수 없는데 불교의 진리는 문자 언저리에 있는 셈이오.” 笑曰, 旣有言說便是境界, 何謂體也. 若然則儒家妙處不可言傳, 而佛氏之道不在文字外也.


(14) 노승: 놀라서 손을 잡고 시 한 수를 청하다. 愕然,執我手曰...爲我賦詩...



3. 진검승부의 분석과 해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율곡이었다(1). 노승은 귀찮다는 듯이 슬쩍 몸을 비켜버렸다(2). 이것보란 듯이 율곡이 이번엔 힘을 실어 외곽의 허술한 부분을 찔러보았다(3).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노승은 칼을 뻗느라 흐트러진 율곡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왔다(4). 노승의 솜씨가 일전을 겨룰 만하다고 판단한 율곡은 정식으로 도전장을 던졌다(5). 여기까지는 탐색전에 해당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한판 싸움이 시작된다. 그 주고받음을 단계별로 분석해 보기로 하자.


(5) 율곡: “佛家妙處, 不出吾儒 何必棄儒求釋乎”

율곡은 “불교의 핵심 교의가 유교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단언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그는 이때쯤 그 동안의 정신적 방황과 불교에의 침잠을 통해, 불교가 노리는 목표와 그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인적 없는 금강산 깊은 곳에서 며칠씩 침식을 잊으며 깊은 사색과 명상에 잠겨 있던 어느 날, 그는 불교가 왜 증감상(增減想)을 짓지 말라고 그토록 강조하는지에 대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그 교의는 별 특별한 것이 없다. 다만 이 마음의 일탈을 차단하고 심신의 에너지를 집중, 그 고요의 극치에서 정신의 <허명(虛明)>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짐짓 화두(話頭)라는 것을 설정하여 수행자들로 하여금 이에 의거해 노력하게끔 했다.”


그렇지만 율곡은, 인식의 장애를 제거하여 얻은 정신의 투명성(虛明)은 그 자체 아무런 <실질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방법적 부정은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무엇을 구현하기 위한 준비로서만 의의를 가질 수 있는데, 불교는 그 부정을 통해 구현하려는 목표, 즉 창조적 생명활동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한 적극적(positive) 지평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율곡은 불교의 반쪽을 긍정했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은 불교가 유교에 못 미친다고 판단했다. 이 생각이 이 격돌의 전편을 끌고 가는 주조음(主調音)이다. 더구나 불교는 인종과 민족, 문화적 철학적 기반이 다른 저쪽 서역(西域)의 산물이 아니던가.


(6) 노승: “儒家亦有卽心卽佛之語乎”

노승은 이 ‘물음’을 비껴갈 수도 있었지만, 수십 년의 나이의 격차와 삶의 이력의 무게를 접어두고 이 물음에 시종 진지하게 대처했다. 흡사 60객 퇴계(退溪)와 갓 서른의 고봉(高峰) 사이에 오간 학문적 토론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정경이다. 노승은 이렇게 반문했다. “유가에도 ‘마음 그것이 곧 부처다(卽心卽佛)’라는 말이 있소?” 이 물음에는 수많은 의미와 맥락이 깔려 있다. 왜 노승은 하필이면 팔만대장경의 장광설(長廣舌) 가운데 이 말을 들어 반격했을까. 그는 불교의 궁극이 유가의 이념 속에 포섭된다는 율곡의 발언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노승이 든 ‘즉심즉불’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을 넘어서 발전한 중국선(中國禪)의 표어 가운데 하나이다. 그 가운데서도 점교(漸敎)를 표방하는 북종(北宗)에 대해 돈교(頓敎)를 대표하는 남종(南宗)의 가르침이며 남종 가운데서도 ‘일상성’ 속에서 활발한 정신의 자유를 첨예하게 고취하는 마조(馬祖) 선의 핵심적 표어이다.


즉심즉불에 대해 좀 부연 설명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마조선은 계율을 지키고 경전을 읽는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목표에 이르는 길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고,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들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젊은 마조(馬祖)가 스승 남악(南嶽)을 만날 때의 일이다. 스승인 남악은 일찍이 정신의 절대적 자유란 상대적 인식의 극단적 세척으로부터 성취된다는 것을 증거함으로써(甚物伊來. 設使一物卽不中.) 육조(六祖) 혜능(慧能)으로부터 인증을 받은 사람이다. 어느 날 남악의 눈에 선방에서 열심히 좌선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첫눈에 큰 그릇임을 알고서 넌지시 떠보았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보시다시피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좌선은 해서 무엇 하려는가.” 마조는 별일이라는 듯 “부처가 되려구요”하고 대답했다. 다음날 남악은 마조의 선방 앞에서 숫돌에다 기와를 갈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마조 왈, “아니 스님 지금 무얼 하고 있습니까.” “기와를 갈고 있지 않나.” “뭐하시게요.” “거울을 만들려네.” “원, 세상에, 기와를 갈아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남악이 기다렸다는 듯 쏘아부쳤다. “기와를 갈아 거울이 안 된다면 퍼질러 않아 어찌 부처를 기약하는가.” 정신이 아득해진 마조가 엎드려 가르침을 청하자 남악은 이렇게 대답했다. “수레가 안간다면 바퀴를 쳐야겠는가, 소를 때려야겠는가. 참된 원리는 앉거나 누움에 걸리지 않고(禪非坐臥) 이르러야 할 자리는 일정한 틀이 없다.(佛非定相) 너의 따지고 가리는 마음, 취하고 버리는 태도로 하여 ‘부처’가 질식하고 있음을 왜 모른단 말이냐.”


《전등록(傳燈錄)》을 포함해 공안의 앤솔로지인 《선문염송(禪門拈頌)》 《마조어록(馬祖語錄)》등에 전해오는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남악은 전통적 방법에 따라 좌선에 열중하고 있는 마조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정신의 본바탕은 아무런 규격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그 같은 절대무제약(絶對無制約)의 공간에서라야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 해방될 것이라고 깨우쳤다. 결국 방법은 없다는 것, 이 방법 없는 무가나(無可奈) 속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급기야 임제(臨濟)의 봉불살불(逢佛殺佛), 조주(趙州)의 무(無)로 이어졌다.


마조가 학인들을 일깨우기 위해 즐겨 쓴 말이 바로 이 즉심즉불이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도 하고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고도 하는 이 말은, 모든 외적 규범과 방법을 차단하고 곧바로 자신의 본질을 파지하라는 지극히 단순직절한 가르침이다. 그는 남악에게서 배운 대로, “참된 원리는 앉거나 누움에 걸리지 않고(禪非坐臥) 이르러야 할 자리는 일정한 틀이 없다.(佛非定相)”는데 철저했다. 그러므로 “모든 인위적 <선택>과 의도적 노력을 방하(放下)하고 판단중지(epoche)의 온전한 혼돈 속에 머물라, 그것이 도에 이르는 길이다.”


노승이 어린 선비 율곡에게 “즉심즉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유가가 설정한 이념의 규범성과 방법의 번쇄성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유가의 가르침이란 결국 예(禮)로 설정된 이상적 행위양식에 대한 존중과 복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도 유교란 다양한 인간관계의 무대에서 한 인간이 수행해야할 엄격한 격식의 체계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래디칼한 불교인 선의 자리에서 그같은 유교적 권위와 인습은 진정한 인간성의 실현에 대한 가장 큰 방해와 위협이었던 것이다. 노승은 진정한 해방의 의미에 대한 각성 없이 세간의 자잘한 규범과 소성(小成)에 매여 있는 유교가 오히려 불교의 초세간적 가르침을 포괄하고 있다는 애숭이 선비의 물정모르는 당돌함에 기가 차서, 이렇게 반문했다. “어린애야, 너는 도대체 ‘즉심즉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기나 하니?”


(7) 율곡: “孟子道性善言必稱堯舜, 何異於卽心卽佛. 但吾儒見得實.”

율곡은 이 반론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율곡이 인간의 심리학적 지평에 대해 불교와 유교 양면에서 나름의 이해를 축적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같은 순발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맹자인가. 맹자가 성선을 말하고, 요순을 들먹인 것이 지금의 논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이 <연관>의 고리를 읽지 못하면 주자학적 지평 아래서의 율곡의 심리학과 도덕학을 그 충분한 의미와 깊이에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곡절은 이렇다.


앞에서 율곡이 불교의 가르침이 그다지 독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불교는 “다만 이 마음의 일탈을 차단하고 심신의 에너지를 집중, 그 고요의 극치에서 정신의 허명(虛明)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는 노승이 던진 즉심즉불 역시 이 차원에서 생각한다. 그가 이해하기에,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표명하고 있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불교와 선은 그 본연의 정신신체적 에너지는 무명(無明)과 탐진치(貪嗔痴)에 의해 전락(轉落)되고 소외(疏外)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본원적 에너지가 절대의 힘과 공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마조의 즉심즉불은 그것을 충격적으로 일깨우자는 말이겠는데, 율곡은 이 같은 인식이 일찌감치 유학의 전통에 이미, 그리고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맹자는 아득한 춘추전국의 혼란기에 인간의 추악한 모습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던 시대에 공자가 창도한 유학의 진실을, 즉 인간성의 본래적 선함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어깨에 걸고 전파하던 동키호테였다. 그는 굳건한 확신과 확고한 용기, 그리고 효율적 변설을 무기로 우세하던 비관론의 도도한 흐름에 맞서 인간의 본래적 에너지가 사회적 공적 지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변호해 나갔다.


《맹자》 전편을 통관하고 있는 그의 인간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a) 인간의 에너지는 본원적으로 선(善)을--이때 선이란 사회적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지향하고 있다. (b) 인간의 에너지가 왜곡 변질되는 계기는 외적 대상과의 교섭을 통해 강화되는 에고의 비본질적 욕망이다. (c) 그렇지만 이렇게 생긴 정신신체적 ‘일탈’도 본래의 선한 에너지를 근본적으로는 차단하지 못한다. (d) 그 에너지를 자각하고 확충해 나감으로써 내적 에너지의 순수성에 대한 확신이 깊어지고 그 깊어진 확신은 내적 에너지의 순수한 발현을 증강시키는 쪽으로 에스컬레이트되며 그 극에서 순수한 에너지의 전면적 해방이 성취된다. (e) 근본적으로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는 이 순수한 에너지는 상호감화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 ‘확충’의 극치에서 사회적 질서와 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


이 다섯 단계에서 관건은 ‘인간 내부의 선한 에너지’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이다. 맹자는 다음과 같은 단적인 예를 들었다. 성선론을 들먹일 때마다 회자되는 예화이다. 어린애가 우물 쪽으로 기어간다. 아이는 아직 자신의 행동이 몰고 올 결과에 대한 지각이 부족하다. 경험을 통해 사태를 추론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그래서 세계에 대해 아무런 공포가 없다. 그런데 아이가 무심히 우물 쪽으로 기어가는 광경을 누군가가 보았다 하자.


가슴이 철렁한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아이를 건지려고 달려갈 것이다. 여기에는 아이를 건져 동네사람에게 칭찬을 받겠다는 명예욕도, 아이를 건져 보상을 받겠다는 이해득실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아이의 위험에 대한 자각과 건져야겠다는 충동, 그리고 실제 건지는 행위 사이에 아무런 간격이 없다. 이 ‘간격 없음’은 유학이 인간 에너지의 순수성을 확인하는 결정적 표지이다. 만일 그 ‘지각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면 이미 내부적 에너지의 순수성은 오염되고 만다. 사(私)가 끼일 때 즉 현실적 고려나 욕망이 개입할 때 인간의 내적 순수성은 파괴된다.


대개 인간의 정서나 의지, 그리고 인식과 행동은 안타깝게도 오염되고 왜곡되어 있다. 유학은 이 오염을 정화하여 정신의 본래적 순수를 확보하라고 가르친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지로 가능하겠는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자신에 대한 관심을 접고 공동체의 이익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겠는가. 맹자는 그럴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억압이 아니라 개인의 진정한 실현이라는 ‘믿지 못할’ 주장까지 했다. 맹자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했는데, 그들이 다름 아닌 요순(堯舜)이라 불리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인격이다. 맹자는 인격의 본래적 가능성과 그 확장으로서 선의 구현이라는 자신의 교설을 회의하는 사람들을 위해 언제나 이들을 실증적 전거로 삼았다.


율곡은 맹자의 교설에 담긴 핵심적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즉심즉불을 말하는 노승에게 맹자의 성선(性善)으로 응수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종합하건대 율곡의 응수에는 다음과 같은 판단이 깔려 있다. “맹자의 성선은 인간의 에너지가 외적 내적 방해를 받지 않을 때 투명하고 순수하게 표출된다는 교설이고 그것은 지금 노승께서 말씀하시는 즉심즉불의 가르침의 핵심을 포섭하고 있다”고.


율곡은 불가의 즉심즉불이 맹자의 성선론의 지평에 포괄된다고 단언한 뒤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렇더라도 우리 유학의 견해가 더욱 적극적(實)이오!” 돌이켜 보면, 불교는 왜곡된 세계를 바로잡기 위한 공(空)의 ‘부정’의 방법을 기조로 할 것이냐, 혹은 본원적 세계를 적극적으로 지시하는 불공(不空)의 ‘긍정’의 효과를 기조로 할 것이냐의 시계추 속에서 흔들려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온전한 가르침은 이 둘을 모두 포괄하는 역동적인 것, 다시 말하면 입파여탈(立破與奪)이 자재(自在)한 것이어야 한다. 일찍이 원효가 공과 불공을 동시에 말하는 《대승기신론》을 발견하고 환호했던 소이(所以)가 바로 여기 있다. 대승 최후의 발전인 선(禪)은 그 같은 입파여탈의 역동성, 즉 본원적 세계의 현실적 구현을 ‘실천적’으로 증거하는 전통을 세웠다. ‘즉심즉불’은 그러므로 불교 내부의 실(實)을 대표하는 표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율곡은 유가가 훨씬 실(實)하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대승기신론》을 포함한 여래장 사상이 우주적 공능과 연관된 인간의 본원적 에너지를 ‘긍정’은 했으되, 그 에너지가 우주 안에서 창조성을 구현하고 있는 방식과 세목에 대해 적극적으로 입언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 점에서는 대승 최후의 발전이라는 선(禪)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일상적 에너지를 절대화하여 ‘나무 지고 물긷는 것(神通幷妙用, 運水及搬柴)’을 암시하거나, ‘차나 한잔 들고 가라(喫茶去)’고만 하지 도무지 인간행위의 순수를 정위해주는 적극적 ‘규정’이 없는 것이다.


주자를 따라 율곡 또한 행위의 규범에 일정한 표준을 마련하지 않고, 순전히 개인의 즉각적 자발성만 강조할 때, 사회적 통합과 질서는 물론, 개인의 온전한 실현을 기대할 수 없다고 믿었다. 유교적 어법을 빌면 불교는 세계로부터의 고착을 벗어던지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했을지는 모르나 ‘준칙(準則)’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세계를 향한 창조적 참여, 나아가 그 참여를 통한 사회적 질서와 화해의 구현이라는 지평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율곡은 판단한 것이다.


(8) 노승: “不肯. 良久, 乃曰, 非色非空, 何等語也”

노승은 이렇게 진리를 준칙을 통해 규정적으로 접근하는데 동의할 수 없었다. 노장의 표현을 빌리면 ‘혼돈(渾沌)’의 에너지를 모종의 규범적 형식 아래 통합하려는 어떤 시도도 불교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특히 소승의 맹목적 좌선과 스콜라적 교학을 비판하며 태동한 대승불교, 특히 중국 선의 전제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노승은 유학이 소승적 테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음에 틀림없다.


규정적 접근과 비규정적 방임(Gelassenheit, 逍遙)의 두 입장 차이는 유학 내부에서도 첨예하게 논의된 바라는 점을 일러두어야겠다. 준칙의 성현 혹은 붓다의 ‘준칙’을 둘러싼 갈등은 송명의 신유학 안에서 맥락을 달리하여 재연되었다. 이른바 도문학(道問學)과 존덕성(尊德性)으로 대표되는 주자와 육상산(陸象山)의 방법론 논쟁이 그것이다. 인간의 본원적 에너지를 어떻게 발양할 것이냐에 대해 주자는 점진적인 격물(格物)과 거경(居敬)을 통한 ‘준칙’의 확인과 체화를 강조했고 육상산은 인간정신 내부에 준칙 형성의 이성이 자연적 자발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외부적 준칙이 필요하지 않다고 역설했다. “육경(六經)은 내 마음의 주석(六經皆我註脚)”이라고 그는 외쳤던 것이다. 이들 두 테제 사이에 쉽사리 우열이나 진위를 가릴 수는 없다. 아무러나 상산이나 그 뒤를 이은 양명학이 늘 선(禪)의 혐의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준칙’을 둘러싼 노선 갈등이 유교 혹은 불교만의 것이 아님을 일러주고 있다.


노승이 절대적인 것의 ‘자유’를 강조했다면, 율곡은 그 반대편에서 절대적인 것의 ‘규범’을 강조했다. 그래서 율곡은 주자를 따라 불교를 허(虛)로, 유교를 실(實)로 평가하지만, 그러나 노승이 이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노승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묻는다.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다’가 무슨 소리요?” 이 질문으로 하여 우리는 앞에서의 진단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한다. 노승은 자신의 입장, 즉 절대적인 것의 무규정성과 무규범성을 경전의 언어를 빌어 재차 주장하여 율곡을 설득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색(色)과 공(空)의 병치적 연관은 대승 반야경전의 핵심을 최대한 요약한 《반야심경》에 구체적으로 결정(結晶)되어 있다. 《반야심경》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로,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 요소들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설파한다. 중관(中觀)은 자칫 학인(學人)들이 이 언표의 표면에 붙잡혀 세계에 대한 또 다른 ‘규정’에 몰두할까 싶어, 다시금 비색비공(非色非空)의 반야검(般若劍)을 휘두른다. 《중론(中論)》과 삼론(三論)에서 보이는 극단적 부정의 논리를 보라. 그것은 세계를,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그리고 그 인식의 표명인 인간의 언어를 치열하고 집요하게 깨부수는 노력을 섬뜩하고도 집요하게 보여준다. 그 비(非)의 논리는 인간의 분별(分別)이 기대고 있는 마지막 발판을 빼앗기 위한 처절한 사투이다.


그를 통해 무엇이 전개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수행을 통해 펼쳐지는 그 같은 비인식의 세계가 끝없는 축복, 즉 니르바나로 묘사되는 절대적 해방의 공간이고, 그 공간에서 자유로운 삶의 에너지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공능(用)을 발휘해나간다는 정도만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축복은 축복을 향유하는 자신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축복은 축복을 누릴 주체인 자아의 탈각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의 것’으로 확인(identify)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뭏든 노승이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非色非空)”로 촉구하려는 바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진리란 무규정적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상대적 인식의 왜곡과 배제의 협소한 영역에서는 도저히 확보할 수 없는, 융이 말하는 모종의 ‘전체(Ganzheit)의 경험’이라는 종교적 진실이다.


이에 비해 유교는 요순이라는 모델을 설정하여 절대를 특정하게 표지화하고, 또 그에 이르기 위해 선과 악의 이분을 설정한 다음, 택선거악(擇善去惡)의 인위적 훈련을 통해 분리된 중심을 강화해나가는 ‘고착된’ 가르침이었다. ‘선택’과 ‘고집’의 이 방법(擇善而固執之: 《중용(中庸)》)은 그러나 필연적으로 분리를 낳고 분리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하며 갈등은 진리의 전체성을 해친다. 요컨대 노승은 이렇게 판단했다. “어린 선비가 말하는 유가의 길은 상대적 인식의 특정한 영역을 분리 강화시켜나가는 것이라면 우리 불가의 길은 상대적 인식을 근원적으로 불식시켜 비분리적 인식의 초월적 지평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서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 1) 노승이 무위(無爲)를 말하는데 비해, 율곡은 유위(有爲)를 강조한다. 2) 노승이 소요(逍遙)를 말하고 있다면, 율곡은 중용(中庸)을 최고의 경지로 삼고 있다. 요컨대 2) 노승이 자유를 말하는데 비해 율곡은 책임을 말하고 있다.


(9) 율곡: “非色非空...此亦前境也”.

율곡은 노승이 무엇을 얘기하려 하는지를 알았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하다. 율곡의 반문은 일상적 대화의 방식이나 이로(理路)에 익숙해진 사람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난데없이 불쑥 튀는(abrupt)’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전경(前境)일 뿐이오”라는 대답은 비색비공이 무슨 소리냐는 노승의 질문에 대한 합당한(corresponding) 대답이 아니다.


율곡은 노승이 던진 공을 따라 가지 않고 던진 손을 물어버린 격이다. 부연하자면, 노승이 물은 것은 세계가 편협한 상대적 인식--필연적으로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의 지평을 벗어날 때 무슨 일이 전개되는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절대적 공간에 대해 생각이나 해 본적이 있느냐는 추궁이었다. 율곡은 이 질문에 대해 유가가 보유하고 있는 카드를 곧바로 내보이지 않고 우선 노승이 가진 카드를 요구했다. 율곡은 말한다. “당신네들이 절대적 인식의 지평을 알리기 위해 제시한 비색비공이란 것 또한 상대적 인식의 지평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외다!”


여기서 전경(前境)이란 불교유식(佛敎唯識)의 전문용어로 ‘앞에 펼쳐진 풍경’, 즉 의식의 구체적 구성물을 뜻한다. 불교에 의하면 인식은 감각기관과 감각자료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데(6識), 이들은 보다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에고 의식(7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위 8식, 9식으로 갈수록 의식은 보다 근원적이고 전체적인 정신신체적 에너지의 흐름을 가리킨다.


그런데 불교는 우리가 당연시 하는 이들 6-8識 단계의 의식을 자기로부터, 본원으로부터의 분열 혹은 소외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신체적 에너지는 일상적 의식의 단계에서는 오염되어 있는데, 이 왜곡은 에너지의 가장 심층부에 자리잡고 있는 자아에 대한 염려와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식(唯識)과 《대승기신론》이 이 문제를 본격 다루고 있는데, ‘추한 형태의’ 오염은 일상적으로도 관찰이 가능하지만, 보다 간접적인 ‘미세한 형태의’ 오염은 명상과 수행이 깊어가면서 비로소 확인된다고 말한다. 이 같은 분석을 통해 불교가 알리고자 하는 바는, 세계는 아무런 규정도 없는 통일적 전체라는 것, 그리고 이 전체성을 원초적 염려 위에 서 있는 자아가 파편화시키면서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문제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노승은 불교의 최상승의 진리가 의식이 단편화에 의한 자기질곡을 벗을 때 일어날 니르바나의 축복에 있다고 자랑(?)하기 위해,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非色非空)”를 내세웠다. 그런데 율곡은 니르바나의 축복을 말하는 바로 이 말 자체가 절대적 의식의 지평과 상대적 의식의 지평을 ‘이원적으로 인식한’, 그리하여 불교가 그렇게도 타기하는 ‘소외된 인식’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따져드는 것이다.


자, 우리는 아주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동일한 언어가 실질적으로 상대적 지평에 ‘제약되어’ 있을 수도 있고, 또 혹은 상대적 지평 너머의 소식을 ‘암시하는’ 해방된 언어일 수 있다? 이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그렇다면 묻노니, 상대적 인식의 지평과 절대적 인식의 지평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으며 그것의 표지는 과연 어떤 것이냐.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한 시원한 대답은 없다. 그 둘은 외면적 관찰에 의해 구분될 수 없고 특징적 표지도 확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언어적 차원’에서는 이 둘을 ‘절대로’ 구분할 수 없다!


율곡은 이 두 지평을 동시에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율곡은 과연, 노승이 ‘비색비공’이라는 언표로 상대적 지평 너머의 소식을 암시하는 해방된 언어로 썼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짐짓 이렇게 시비를 건 것일까. 논자는 율곡이 알고도 시비를 걸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율곡의 비판에 대한 노승의 웃음, 그리고 그 웃음을 낚아채는 율곡의 기민한 응수를 함께 보아야 한다.


(10) 노승: “之.”

율곡은 초월을 가리키는 언어라도 ‘그것이 언어인 한’, 상대적 지평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노승은 빙긋이 웃었다. 그거라면 노승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불교는 이미 자체 전통에서 이 문제를 누구보다도 심각하고 치밀하게 다루지 않았던가. 노승은 어린 율곡이 초월에 이르는 불교의 방법적 논의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시비를 걸고 있다는 생각에 슬몃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비색비공이라는 말로 초월적 지평을 가리키고 있는데, 귀여운 애숭아, 너는 나의 표현이 상대적 언어의 탈을 쓰고 있다고 내 발목을 잡는거냐?”라는 뜻이 노승의 웃음 속에는 깃들어 있다.


불교의 전통은 ‘진리를 언표하는 언어의 역설’을 첨예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장자의 뗏목과 통발이 끊임없이 인용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운위되며, ‘방편(方便)’이 불교의 독특한 방법론적 발상으로 자리잡은 것도 이 점을 깊이 자각한 결과이다. 절대적 진리는 침묵에 있다는 것, 어떤 언어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 언어는 상대적 지평의 이원론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런데 눈먼 중생들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 그리하여 절대적 진리가 침묵에 있다는 것을 ‘방법적으로 깨우치기 위해서는’ 손을 더럽히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원효(617-686)의 말처럼 결국 “언어를 통해 언어를 잠재울(依言離言)”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방편’으로서의 언어이다. 그래서 부처는 48년 설법의 장광설(長廣舌)을 뱉고도 “나는 일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어거지(?)를 쓰고 있고--물론 이것은 후기불교의 주장이다--, 그 어거지가 전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불교적 전통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비유하자면, 쓰는 것과 동시에 지워버린다.


이 점은 즉심즉불을 강조한 마조 자신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학인이 어째서 즉심즉불을 외치고 다니느냐고 묻자 마조는 “우는 아이 달래려고”라고 대답했다. 아이가 울지 않으면 어떡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하지 뭐(非心非佛)!” 라고 대답했다. 실제 노승이 물은 비색비공(非色非空)은 비심비불과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도 비색비공을 내세운 것은 애송이 선비에게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임이 틀림없다. 즉심즉불과 비심비불은 그것이 노리고 있는 궁극적 효과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모두 일변에 집착하는 상대적 인식의 폐단을 극복하고 전체적 인식의 지평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적 설정에 불과한 것이다.


(11) 율곡: “鳶飛戾天魚躍于淵, 此則色耶空耶.”

율곡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는 노승의 웃음 뒤에 깔린 문맥을 즉각적으로 읽고 이렇게 되물었다. “‘소리개가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 이것은 색(色)이오 공(空)이오.” 시린 하늘 저편으로 소리개가 날아가고, 싱싱한 물고기가 고요한 연못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율곡에 있어 생명의 움직임은 창조적 생명력의 생생한 자발성을 구현하고 있다. 이 테제는 송대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율곡에게 있어서도 영원의 철학을 받치는 주춧돌이었다. 율곡은 우선 절대의 지평이 일차적으로 자아의 고착을 풀어냄으로써 펼쳐진 실상의 자유로운 공간임을 확인한다. 그때 세계는 존재(色)나 비존재(空)라는 인식의 구성물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자아에서 해방된 ‘우주적’ 에너지는 그 자체 절대의 지평을 확보한다. 그가 인용한 이 《시경(詩經)》의 한마디가 바로 그 지평을 선명한 상징으로 언표하고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자아의 개입이나, 인식의 왜곡이 개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우주적 창조력, 그 순수의 발양뿐! 이것은 인간의 에너지가 단편화나 고착이 없을 때 본원적 우주적 공능과 구분될 수 없다는 불교의 전제와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리고자 하는 근본 소식에 있어 불교와 유교의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불교적 진실이 유가적 지평에 포괄된다는 율곡의 단언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여 이젠 알겠다. 율곡이 앞의 (9)에서 불교의 방편론을 절대가 아닌 상대적 지평으로 끌어내린 까닭이 ‘악의’나 ‘왜곡’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율곡은 불교가 지향하고 있는 절대적 지평의 가치를 인정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를 말하는 언어가 또한 ‘억압’이 아니라 ‘암시’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짐짓’ 딴지를 건 것은 절대적 지평과 언어와의 관계가 불교적 전통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혹은 그보다 탁월한 형식으로’ 유교 내부에서도 천양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유교가 말하는 이상적 인격, 그를 통해 증현되는 세계 또한 ‘언어’를 빌리고 있지만, 실상은 언어의 제약을 벗어난 절대적 화해의 지평임을 확신하고 자부했다.


앞에서 그가 불교의 이상과 목표는 유교 안에 포섭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인간성의 절대적 가치가 맹자의 성선론에 집약되어 있고, 요순이라는 모델에 구체화되어 있다고도 주장한 바 있다. 그만하면 알아들었을 텐데도(?) 노승이 알아듣지 못하고 ‘비심비불’로서 불교의 절대적 지평을 내세우자 율곡이 불퉁스럽게 시비를 건 것이다. 지금 든 ‘연비어약’은 그 시비의 본론이다. 즉 유교가 ‘일상성’의 언어를 말하고 있지만 그 언어를 통해 노리고 있는 것은 ‘상대적’ 지평이 아니라 해방된 ‘절대적’ 공간이라는 것! 그것을 좀 깨우쳐 주십사하는 것이다.


요컨대 율곡이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은 이렇다. “절대적 지평은 언어에 의해 오염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에서든 유교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노승께서는 자꾸만 불교적 인식에서만 절대적 지평이 확보될 수 있다고 우기시는데 그것은 유교를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교는 언제나 일상적 ‘언어’로 말하지만 그를 통해 노리는 것은 ‘상대’가 아닌 ‘절대’입니다. 그 절대는 ‘일상성’을 떠나지 않기에 오히려 불교보다 훨씬 차원이 높습니다. 제가 불교를 떠나 유교로 향하는 근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고, 아울러 노승을 설득시키려는 근본적 동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승께서는 유가 언어의 ‘일상성’을 표면적 상대적 ‘이분’의 차원에서만 바라보시는데 언어는, 앞에서 말했듯이, 그 자체로는 분열(vicalpa)의 언어인지 해방(moksa)의 언어인지를 ‘즉자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해방’과 ‘절대’를 말하는 언어조차도 그렇습니다. 초월적 지평을 말하는 ‘비색비공’도 상대와 구속의 언어로 기능할 수 있고, 일상적 언표인 ‘연비어약’도 절대와 해방의 공간에 대한 찬가일 수 있습니다.”


(12) 노승: “非色非空是眞如體也. 豈此詩之足比.”

그런데 노승은 ‘연비어약’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선 율곡의 전략적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율곡의 예증을 흔히 일상적 시야에 들어올 수 있는 단순한 사건의 기술로만 보았던 것이다. 단순하지 않더라도 일상적 표현은 서정적이든 서사적이든 특정한 감정의 고양이나 집중된 의식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고 그것은 예외없이 상대적 인식의 지평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것은 세계의 왜곡, 즉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상상적 구성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승은 말한다.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님은 진여(眞如)의 체(體)요, 이런 시로 어떻게 빗댈 수 있단 말이오.” 다시 말하면 모든 상대적 지평이 탈각한 절대의 세계를 어찌 이런 시시한 시로 비유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진여(眞如)의 체(體)란 《대승기신론》의 어법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불교에 관해 논한 바를 궁극적으로 긍정의 자리에서 논한 불교대승의 가장 발전된 단계에 속하는 경전이다. 진여란 ‘본래 그러하다’는 뜻이고 체란 모종의 에너지의 중심이 있음을 알리는 말이다. ‘본래 그러하다(眞如)’란 말은 ‘다만 이렇게’라는 여여(如如)와 동의어로서 세계가 자아에 의해 개입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는 모습을 알리자는 말이다.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 그 진여의 체는 이제 자아에 의해 구성된 것도 아니고, 자아에 의해 편향된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고유한 활동으로 드러난다. 그 모습은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자아에 의해 인식작용에 의해 구성된 객관이 아닌 절대객관의 세계, 즉 법계(法界)이다.


이 세계가 펼쳐나가는 모습이 얼마나 장엄한가를 읽으려는 사람은 화엄의 바다에 한번 들어가 보라. 그것은 선가의 표현을 빌면, ‘내가 우물을 보는 세계가 아니라 우물이 나를 보는’ 세계이고, ‘진흙으로 만든 소가 장강을 건너고’, ‘줄 없는 거문고가 산조를 타는’, 상대적 이성이 발붙이지 못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인간이성의 편협함, 상대적 인식의 불완전성에 대한 깊은 자각과 그를 벗어나려는 고된 수련의 결과 증득되는 세계이다. 노승은 의아하게 되묻는다. 도대체 이 같은 절대해방의 ‘법계 法界’를 어떻게 솔개나 물고기를 읊은 천박한(?) 시에 끌어댈 수 있느냐는 것이다.


(13) 율곡: “笑曰, 旣有言說便是境界, 何謂體也. 若然則儒家妙處不可言傳, 而佛氏之道不在文字外也”

앞에서 진리를 말하는 언어의 이중적 특성을 살펴보았다. 이 특성으로 하여 노승은 율곡의 덫에 걸렸다. 율곡은 말한다. “언어를 거쳤다면 이미 상대적 인식의 지평으로 떨어진 것이다. 색(色)이니 공(空)이니 진여체(眞如體)니는 물론, 팔만대장경의 장광설이 모두 방편적 입설이고, 그것은 진여체를 곧바로 지시해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그것이 지시하고자 하는 바와의 거리를 숙명으로 안고 있다. 개념은 이미지에 의존하고 이미지는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율곡은 이 같은 전제에서 결국 이미지를 통해 실재에 다가설 수 없는 것은 불교나 유교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유교 역시 성현의 내면적 진실은 언어로 전달할 수 없다. 안회(顔回)가 공자를 평해, “우러르면 더욱 높고 앞인가 하면 뒤이며, 절벽같이 우뚝 서서 절망감을 안겨준다”는 그 진실은 불교가 진여(眞如)의 체(體)와 용(用)을 구성적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양상이다. 지금 인용한 소리개의 비상과 물고기의 약동 역시 그렇다. 그 시는 소리개와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의 내적 정신의 풍경에 일차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바, 소리개와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는 자신 속에 아무런 갈등을 존치하지 않음으로써 외적 대상과의 일체감을 누리고 있고 그것은 우주적 의미를 띠고 있다. 거기서 주관 혹은 에고는 사라진다.


이 자리는 유가의 이상인 천인합일(天人合一), 장자(莊子)의 표현을 빌면, 천지여아병생(天地與我竝生) 만물위아일체(萬物爲我一體)의 경지, 장재(張載)가 기(氣)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곳, 그리고 주자가 이(理)와 성(性)과 인(仁)을 통합시키고 그것을 우주의 본원력인 원형이정(元亨利貞)과 등치시켜 알리고자 했던 곳이다. 율곡은 여기서 불교의 진리뿐만 아니라 유교의 궁극적 이념까지 선명히 통관했다.


그의 나이 겨우 열아홉이었지만 왕필(王弼)이 불후의 명작, 역전(易傳)과 노자주(老子注)를 쓴 때가 지금 율곡보다 한 살 어렸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율곡은 유교의 대강(大綱)을 읽었다. 그 이념을 보다 정련하게 체계화하고 구체적 현실에서 실현해나가는 것은 앞으로의 세월을 기다린다 해도 근본적 방향과 지취에 대해 자신을 정위하는 각성은 연령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는 이 몇 해 동안 남다른 사상적 방황과 정신적 편력을 겪고 있었고 노승과의 문답은 그 순례의 한 매듭을 증거하고 있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14) 노승: “愕然, 執我手曰...爲我賦詩.”

노승은 앞에 선 애숭이 선비의 식견이 범용하지 않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불교는 그렇다 하고 유교의 진리가 불교적 이상과 합치하며 오히려 그보다 고차원의 것이다? 노승은 대체 네가 자부하고 있는 유교의 진리, 그 구체적 표현인 연비어약이 무슨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지 시로 한번 읊어 보라는 주문을 던진다. 노승은 율곡이 단숨에 써 준 시를 일별하고는 소매 속에 넣고 돌아누워 버린다. 이를 보건대 노승은 선비의 자만(?)을 전폭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은 듯하다.


율곡이 며칠 뒤 암자를 다시 찾았을 때 노승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없었다. 이는 노승이 유가의 진실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수도승의 일상적 패턴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율곡이 써 준 시는 노승에게서보다 그 자신에게 보다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율곡이 이른 모종의 통찰, 그리고 이제 나아갈 정신적 지표를 상징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물고기 뛰고 소리개 날아 아래 위가 한가지 魚躍鳶飛上下同

이는 색(色)도 아니오 공(空)도 또한 아닌 것 這般非色亦非空

무심히 한번 웃고 내 몸을 둘러보니 等閒一笑看身世

노을지는 숲, 나무들 사이에 홀로 선 나 獨立斜陽萬木中\



4. 허명에서 중용으로


노승과의 문답은 앞으로 전개될 율곡 철학의 향방을 예고하는 상징, 혹은 전주곡이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는 그가 생각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창조적 에너지의 인간적 발현을 둘러싼 제약과 해방의 전 구도를 짐작하게 해 준다. 나는 위의 에피소드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나아가 그와 불교와의 대면을 빼버리고서는 그의 독특한 이기(理氣) 철학을 적절히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율곡이 금강산을 유력하던 시절, 함께 지내던 지정(智正)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산을 내려온 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는데 그가 어느날 불쑥 산사에서 책을 읽고 있던 율곡을 방문했다. 밤새 회포를 나눈 다음날, 떠나는 그에게 율곡은 지난 시절의 감회와 더불어, “불교에서 유교에로 전회”를 권유하는 은근한 뜻을 시에 담아 보냈다. 산을 내려온 뒤 5년만의 일이었다.

....

때로 옥 총채 휘두르며 시비(異同)을 가렸지만 時揮玉辨異同,

논쟁의 끝은 언제나 뒤엉킨 실타래였네 談邊矛盾紛縱橫.

안타깝게도 대사의 미혹은 그대로여서 憐師惑志未曾變,

큰 길 버려두고 샛길을 찾는구려 不遵大路求捷徑.

법륜(法輪)도 심인(心印)도 본래 징표가 없거니 法輪心印本無徵,

삼계(三界)와 육도(六道)를 누가 증거하리오 三界六道誰汝證?

우리 유가에 진정한 즐거움의 경지 있어 吾家自有眞樂地,

외물(外物)을 끊지 않고 능히 성(性)을 기른다네 不絶外物能養性.

고원을 찾고 특이를 세우는 것은 모두 중(中)이 아니라 求高立異摠非中

스스로를 돌이켜 성(誠)이라면 거룩함(聖)에 이를 수 있다오 反身而誠可醒(成)聖

.....

(「산인 지정에게 주다(贈山人智正)」, 《전서》 1-p.71.)


율곡은 진리란 인간사의 일상성, 즉 외물(外物)이 구성하는 상황성과 그 상황이 제기하는 요청에 대처하는(respond) 인간의 에너지(性)의 종합적 필드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고 말한다. “외물(外物)을 끊지 않고 성(性)을 기른다(不絶外物能養性)!” 이것이 율곡 철학의 지반이다. 유교의 중심인 중용은 각자가 선 자리에서, 그의 인간 관계의 지반 위에서 주어진 상황적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라고 가르친다. “소기위이행(素其位而行)!” 이것이 인간의 길인데, 율곡은 불교가 이 원리(理)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는 인간의 일을 다음 두 가지로 요약했다. 1) 소극적으로는 자기 속의 원리(性卽理)를 가리고 있는 기질(氣質)의 왜곡을 교정하고 방해물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2) 자기 내부의 원리를 일상의 다양한 관계와 맡은 직무에서 적극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 둘 가운데 하나가 빠져도 인간의 일은 완성되지 않는다. 율곡은 불교가 첫 번째 일에는 유효했으되, 두 번째 원리는 아무래도 소홀히 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가 금강산을 들어섰다가 다시 하산하여 유학으로 돌아온 소이(所以)이다.


그 하산의 의미는 요약하자면, 무위(無爲)에서 유위(有爲)로, 혹은 소요(逍遙)에서 중용(中庸)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길이 ‘자유’가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 혹은 “자유는 오직 책임 속에서만 구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자각이 그를 절망적 상황에도 언제나 정치적 공간, 사회적 역할에로 나아가고자 한 동력이었고, 아울러 그의 독특한 이기(理氣) 해석도 이 같은 자기 정위의 기반 위에 세워진 철학적 건축물이다.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