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간 노자 - 도덕경의 태초 원본 (죽간본)

Posted by 히키신
2017. 2. 6. 18:04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도덕경의 태초 원본-

초간 노자
(도덕경 죽간본)

<갑본>

1

꾀를 끊고 말재간을 버리면
백성들은 백배 이로워지며

재주를 끊고 이익냄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지며

거짓됨을 끊고 생각을 비우면
백성들은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세 문장으로는 부족하여
가르침을 덧붙인다.

본연의 모습을 바라보고 순수함을 간직하라.
사사로움(私)을 줄이고 바램을 작게 하라.













2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계곡의 왕이 되는 까닭은
그가 수많은 계곡의 아래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수많은 계곡의 왕이 되는 것이다.

성인이 백성들의 앞에 있는 것은
자신을 뒤로 물리기 때문이며
그가 백성들의 위에 있는 것은
스스로 말을 낮추기 때문이다.

그가 백성들의 위에 있어도
백성들은 무겁게 느끼지 않으며
그가 백성들의 앞에 있어도
백성들은 해롭게 느끼지 않는다.
천하가 그를 즐거이 받들며 꺼려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다툼이 없기 때문에
천하가 그와 다툴 수 없다.












3

죄는 과도히 바라는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이 없고
허물은 가지려 욕심부리는 것보다 더 참혹한 것이 없으며
화는 충족함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충족해할 줄 알게 될 때 비로소 충족해지고
그것은 영원한 충족함이니라.














4

도로써 사람들을 돕는 지도자는
군대로써 천하를 강압하려 하지 않는다.
훌륭한 자는 일을 이루기만 할 뿐
강건함(强)을 취하지 않는다.

일을 이루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며
일을 이루어도 오만하지 않으며
일을 이루어도 자랑하지 않는다

이를 일러 ‘일을 이루되 강건하지 않음’이라 하며
그것은 좋은 것이다.











5

태고에 도를 행하였던 현자는
틀림없이 ‘은은한 검은 경계’를 통하였으며
[玄(현): 검음, 고요, 무한]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것을 표현해 보자면
그 앞서 살핌이여, 겨울 시내를 건너는 듯하며
그 신중함이여, 사방의 적군을 경계하는 듯하며
그 정중하고 의젓함이여, 손님과 같으며
그 유연하고 부드러움이여, 녹아 내리는 얼음과 같으며
그 진실함이여, (갓 베어낸) 통나무와 같으며
그 알 수 없음이여, 흐린 물과 같다.

누가 흐릿함을 안정시키어 서서히 고요하게 할 수 있을까.
누가 고요함을 유지시키어 서서히 생기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러한 도를 간직한 자는
(스스로를) 높이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6

하려고 하는 자는 그르치고
잡으려고 하는 자는 멀어진다.

고로 성인은 하려함이 없기에 그르침이 없고
잡으려 하지 않기에 잃는 법이 없다.

일에 임하는 바탕은
일의 끝을 처음처럼 신중히 하는 것이며
(일의 처음에서 끝까지 한결같이 임하는 것이며)
이렇게 처사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느니라.

성인은 바라지 않음을 바라며
얻기 힘든 재물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가르치지 않음을 가르치며
(관념 입히지 않음을 가르치며)
뭇사람들이 지나쳐온 곳으로 되돌아간다.

이렇듯 성인은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울 뿐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7

도는 항상 무위이다.
[무위: 형상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무형의 근원 경계]

나라의 왕이 무위에 머무르면
만물은 스스로 다스려진다.

도중에 욕심이 일어나면
이름 없는 통나무(도)로써 본처로 돌아오게 하라.

대저 충족함을 알지라.
충족함을 알게 되어 고요해지면
만물은 스스로 제 자리를 찾는다.










8

함 없이 하며
일 없애기를 일삼으며
무맛을 맛보라.

크고 작은 일들을 쉽게 대함이 잦아지면
반드시 어려움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쉽더라도 오히려 어렵게 대하며
고로 마칠 때까지 어려움이 없다.












9

온 천하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추함이며
모두 선함을 선함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함이 아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를 형성하고
길고 짧음이 서로를 만들고
높고 낮음이 서로를 메우고
음과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고
앞과 뒤가 서로를 뒤따른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에 머물러 일에 임하며
말 없는 가르침을 편다.

만물은 일어나지만 그것을 시작 삼지 아니하고
운행하지만 그것에 기대지 아니하며
완성되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저 머무름이 없으며
고로 사라지지 않는다.








10

도는 항상 이름이 없으며
소박하고 조그마하지만
천지도 감히 부릴 수 없다.

나라의 왕이 도에 머무르면
만물이 스스로 따르며
하늘과 땅이 서로 모여 단이슬을 내리며
백성들에게 명령함이 없어도 스스로 다스려지느니라.

(통나무는) 비로소 깎고 난 후에는 이름이 생기는데
이름이 있게 되면
대저 그칠 줄을 알아야 하며
그칠 곳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

나직한 도가 천하에 깃들어 있는 것은
작은 계곡에 강바다가 더불어 있는 것과 같다.

11
무언가 있는데
알 수 없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지에 앞서 생겨났다.
고요하고 텅 비어 있으며
홀로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다.
가히 천하의 어미라 할 만하다.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도’라고 글자 지어 부른다.
나는 구태여 그것에 이름을 붙여 '크다'라고 한다.

크면 뻗어나가고
뻗어나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시 되돌아온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도도 크고
왕 또한 크다.

나라 안에는 네 가지 큰 것이 있으니
왕(성인)은 그 가운데 하나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12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은
풀무와도 같다.
[풀무: 바람을 불어 불을 붙이는 도구]

그것은 텅 비어 있으나 쇠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욱 샘솟는다.











13

텅 빔에 이르름이 영원같고
텅 빔에 머무름이 지극하면
만물이 다 함께 일어나게 되고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간다.

하늘의 도는 둥글고 둥글어서
만물은 각기 그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14

안정된 것은 간직하기 쉽고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일을 꾸며나가기 쉬우며
연한 것은 식별하기 쉽고
조그마한 것은 이행하기 쉽다.

생기기 전에 처리하고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리라.

아름드리 나무도 한 터럭의 싹에서 시작하고
구층누대도 한 줌의 흙에서 시작하며
백길의 높은 산도 한 발자국에서 시작한다.









15

아는 자는 말이 없으며
말하는 자는 앎이 없다.

(의식이 반응하는) 그 구멍을 닫고 문을 막으면
빛과 어우러져 티끌과 하나되며
날카로움이 다듬어지고 어지로움이 가라앉는다.
이 경계를 일러 현동(검은 하나됨)이라 한다.
고로 (이 경계를)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또한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롭게 여길 수도 없고
또한 해롭게 여길 수도 없으며
귀하게 여길 수도 없고
또한 천하게 여길 수도 없다.

고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된다.

16

바름(正)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써 군사를 부리며
일하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얻으라.

내가 어떻게 이러한 이치를 아는가.

대저 임금이 바라거나 꺼리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지며
백성들에게 편리한 물건들이 많아질수록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지며
사람들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기이한 것들이 더욱 일어나며
법률이 요란할수록 도적들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나서서 일을 벌이지 않으면
백성들은 스스로 넉넉해지고
내가 무위에 머무르면
백성들은 스스로 다스려지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들은 스스로 올바르게 되고
내가 바라지 않기를 바라면
백성들은 스스로 순박해진다.




17

덕을 품음이 지극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다.

벌, 전갈, 벌레, 독사도 쏘지 못하고
사나운 새나 맹수도 덮치지 못하며
뼈가 연하고 근육이 부드럽지만 붙잡음이 굳세다.

암수의 합을 모르는데도 곤두서는 것은
정기가 지극하기 때문이며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조화로움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조화로움을 ‘영원함(常)’이라 하고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하며
생명을 보태는 것을 ‘길함(祥)’이라 하고
마음으로 기운을 통제하는 것을 ‘강건함(强)’이라 한다.

모든 것은 굳세지면 노쇠하게 되며
이를 일러 도가 아니라고 한다.










18

명예와 몸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
몸과 재물 중 무엇이 더 귀중한가?
얻음과 잃음 중 무엇이 더 문제인가?

과도히 애착하면 반드시 큰 댓가를 치르게 되고
무겁게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망한다.

그러므로 충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장구하게 된다.









19

되돌아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며
은은함은 도의 방식이다.

천하 만물은 있음으로부터 비롯되며
있음은 없음으로부터 비롯된다.












20

가져 쌓으려는 것은
그만둠만 못하다.

많이 뭉쳐 쌓으면
오래 보존하지 못한다.

금과 옥으로 가득 찬 집은
지켜낼 수가 없다.

귀복하다 하여서 교만해지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는 것이다.

공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다.

<을본>

21

사람들을 다스리고 하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아낌’만한 것이 없다.

대저 아낄지라.
이렇게 함으로써 미리미리 갖추게 된다.

미리미리 갖춤을 일러 ‘덕을 두둑이 쌓는 것’이라 하며
덕이 두둑이 쌓이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고
해내지 못할 일이 없으면 그 끝을 알 수 없으며
그 끝을 알 수 없으면 나라를 맡을 만하며
(이렇게) 나라의 근본을 맡으면 (그 나라는) 장구할 수 있다.

이것을 이르기를 깊은 뿌리, 굳은 토대의 덕이라 하며
오래오래 존재하는 도라 한다.













22

학문을 하는 자는 나날이 쌓아가며
도를 닦는 자는 나날이 덜어낸다.

덜고 또 덜어내어
마침내 무위에 이르게 된다.

그는 함이 없는데도
하지 않음이 없다.











23

학문(관념 입히는 배움)을 끊으면
근심(번뇌)이 없다.

공손함과 성냄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사람들이 걱정하는 모습을
되려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24

사람들은 명예와 수치를 갓끈처럼 여기며
번뇌를 자신의 몸뚱이처럼 귀중히 여긴다.

어째서 명예와 수치를 갓끈이라 하는가?
명예는 아랫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어도 그것에 얽매이게 되고
그것을 잃어도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
그렇기에 명예와 수치를 일러 갓끈이라 한다.

어째서 “번뇌를 자신의 몸뚱이처럼 여긴다”고 하는가?
나에게 번뇌가 있는 까닭은
나에게 ('나'라고 여기는) 몸뚱이가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없는 경계에 이른다면
어찌 번뇌가 일어나겠는가.

그러므로 천하를 다스리듯 자신을 다스리면
가히 천하를 맡을 수 있느니라.

천하를 사랑하듯 자신을 사랑하면
가히 천하를 이끌 수 있느니라.









25

높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그 정수를 행하고
중간 사람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해하고
낮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큰 비웃음을 사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느니라.

고로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듯하며
평탄한 도는 굴곡진 듯하며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듯하며
높은 덕은 골짜기처럼 낮으며
큰 순백함은 탁한 듯하며
큰 덕은 부족한 듯하며
건실한 덕은 박한 듯하며
바탕되는 본성은 변화하는 듯하며
거대한 모서리는 모가 없으며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거대한 소리는 희미하게 들린다.

하늘의 형상은 형체가 없고
도는 성대하지만 이름이 없으며
훌륭한 느슨함으로써 만물을 완성시킨다.


26

(의식이 반응하는) 그 문을 닫고 구멍을 막으면
죽는 날까지 어려움이 없다.

그 구멍을 열고 일을 좆으면
죽는 날까지 돌아오지 못한다.










27

진정 완전한 것은 부족한 듯하며
하지만 그 쓰임은 모자람이 없다.

진정 가득한 것은 비어있는 듯하며
하지만 그 쓰임은 끝이 없다.

큰 재주는 둔한 듯하고
큰 완전함은 곤궁에 빠진 듯하고
큰 곧음은 굽은 듯하다.









28

화롯불은 차가움을 이기고
고요함은 뜨거움을 이긴다.
고요하디 고요함은 천하의 바탕이 된다.










29

(도를) 잘 심은 자는 뽑혀지지 않고
잘 간직한 자는 벗어남이 없으며
자손들로부터 제사가 끊이질 않는다.
(도로써) 자신을 다스리면 덕이 본처에 이르며
집안을 다스리면 덕이 넘쳐나며
마을을 다스리면 덕이 자라나며
나라를 다스리면 덕이 흥왕해지며
천하를 다스리면 덕이 모든 곳에 두루 미친다.

집안을 집안으로써 바라보고
마을을 마을로써 바라보고
나라를 나라로써 바라보고
천하를 천하로써 바라보라.

내가 어떻게 천하의 그러함(이치)를 알 수 있는가?
이로써다.
(모든 것의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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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인 한대수

Posted by 히키신
2016. 12. 22. 07:24 영혼의 위로_Music

출처
: http://m.blog.naver.com/tnt62sik/120010178878
*오래전 작성된 글이라 사진은 전부 짤렸다.

마지막 작품 - 따끈따끈하이 좋지요

테헤란로에 인접한 주택가로 갔다. 거기에 한대수 씨가 지난 9월부터 묵고 있는 원룸 주택이 있다. 방 한 쪽에 부엌, 그리고 다른 한 켠에 화장실, 그리고 침대 하나가 놓여 있는, 예상보다 너무 단촐한 방이다.
그러나 방의 주인은 우리가 잘 아는 단발머리에, 반짝이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테이블도 의자도 따로 없었다. 침대에 기댄 한대수 씨를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방바닥에 빙 둘러 앉았다.

- 방바닥에 앉아서 인터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엉덩이가 아주 뜨끈뜨끈 합니다.
> 아, 따끈따끈하이 좋지요?

우리가 꺼내 놓은 녹음용 디지탈 미니디스크에 관심을 보이던 방 주인은 대뜸 "근데 저 고향이 저 경상도 지방이다...?" 며 묻는다. 나의 몇 마디 말을 듣고 그 억양을 읽은 것이다. 그렇다고, 뿐만 아니라, 부산이며 인터뷰 자리에 함께 온 친구도 고향이 부산이라고 답했다.

> 오ㅡ 부산! 오케이, 부산 넘버원!

다 알다시피(한대수 씨의 연보, 클릭) 한대수 씨는 부산에서 나서 경남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근황을 묻는 것으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 앨범이 이제 나왔으니까, 그에 따른 활동을 할 거고. 크리스마스 때는 마누라 만나러 갈 거고. EPI 레코드하고 팬 멤버들이 개인 칸서트 추진하자, 이런 운동이 지금 크게 벌어지고 있는데, 제가 요새 오른 팔이 아파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곧 좋아지겠지요.

> 미국에 언제 다시 들어갈 건지 질문을 많이들 하는데, 우리는 '외국'에 대한 의식이 너무나도 많아요. 외국 음악가의 경우에는 어디 사는가가 중요하진 않거든요. 류이치 사카모토( 류이치 사카모토(坂本龍一) ; 일본의 영화음악가. 1952년 일본 나가노태생. 공식 홈페이지주소는 http://www.sitesakamoto.com/) 키타아로, 믹 재거 이런 사람들은 뭐 어디 사는지 안 중요하죠. 또 돌아다녀야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얻고. 과거 20년동안 저는 한국에 일이 없었고, 불러 주는 사람도 없었죠. 그래서 올 이유도 없었지요. 근데 일이 있으면 한국에 있는 거죠. 일을 따라 다녀야지요.


- 아마 뵙기가 쉽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하겠죠.
> 음, 그렇죠. 우리나라의 경우도 백남준이나, 정경화 씨나... 외국에서 모든 것을 흡수하고, 살고 또 들어오고 안 했으면 그런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못 됐겠죠. 국내의 아티스트들이 국외로 나가는 게 좋아요. 일을 하는 한에서 서울에 있을 거예요.

한대수 씨는 요즘 오른쪽 팔이 불편해서 병원엘 다니고 있다. 그리고 내년 봄에 가나 아트센터에서 열리기로 계획된 사진전 구상과, 악보집 발간 준비도 한다. 저녁에는 8집 앨범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일을 안 하고 있으니까, 자꾸 술만 먹게 되고... 또, 제2의 주병진이 될까 겁나요.
그래서 이 집에는 미인 출입금지예요. 그런데, 안 되겠네! 하하하. 오늘만 빼 놓고. 하하하하!

동행한 <퍼슨웹>의 객원기자를 가리키며 크게 웃었다. 한대수 씨는 인터뷰어를 매우 편하게 만드는 인터뷰이이다. 이 방에 들어온 후 우리가 벌써 몇 번이나 폭소를 터뜨렸는지. 그 자신이 그야말로 호탕하게 '우하하하' 잘 웃기도 하지만, 그의 직설적이면서도 담백한 말투와 특유의 유머 감각은 그가 50을 넘긴 '영감'(한대수 씨 자신의 표현)이며, 살아 있는 가요사의 신화라는 사실을 때로 잊게 만들었다.

마지막 앨범

그러나 이번 앨범 재킷에서 이 유쾌·호방한 인물은 한껏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주 보기 싫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찡그리고 있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했다. 앨범 재킷에 설명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인터뷰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 왜 이 음반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까?

> 에... 저는 처음부터 음악을 하면서 '가수'라는 개념으로 활동을 시작한 거는 아니었거든요. 뒤에도 항상 그랬고. 그냥 제가 보고 느끼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너무나도 아픔이 많고 - 그것을 표현하고 발표하니까 음악이 되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글을 쓰듯이 그렇게 느낌이나 영감을 표현한 건데.
그 느낌이라는 것이, 나이가 들고 이제 8집을 내니까 역시 영감이 둔해져요. 영감이 둔해져도 그냥 할 수는 있어요. <행복의 나라로>나 <물 좀 주소> 같은 거 비슷비슷하게 만들면 앞으로 앨범 5장도 더 만들 수 있겠죠.

그렇지만 비슷한 연배의 밥 딜런, 폴 사이먼, 폴 매카트니 등이 하는 작업을 보면 영 재미도 없고 새로운 것도 없다고 한다.
> 제 자신도 리미테이션 느껴요. 이 정도 왔구나 하는. 그래서 음악 활동을 하자면 프로듀서나 젊은 밴드한테 아이디어를 주는 일을 할 수도 있겠죠. 또 구태여 가수를 해라하면 남의 노래를 부를 수도 있는데. 그런데 작곡이 젤 힘들어요.
> 작곡이 어려운데 우리나라 음반계에서 작곡가를 키우지 못했어요. 가수만 키웠죠. 아마 요즘 히트 하는 곡도 작곡가 한 5사람이 다 쓸 거예요. 저 때만 하더라도 옛날에 큰 레코드사들 - 신세계, 지구, 오아시스 이런 데서 가망성 있는 작곡가들을 보면 키우거나 같이 나누지는 않고 자기들만 다 먹어버리고. 그러니까 작곡가들이 음악 때려치우고 곰탕집 내는거요. 가락국수집 내고 명동칼국수집 내니까, 작곡가가 없지요. 이런 역사 때문에 지금도 작곡가가 모자란 거죠. 슬픈 상황이죠.
- 아직도 활동할 수 있는 힘이 넘치는 걸로 보이십니다만.
> 와, 그래요? 근데 락큰롤 문제도 있어요. 50 넘어서 활동하는 밴드가 롤링스톤즈 하나가 있는데 그거는 워낙 조직이 잘 돼 있고 화폐가 너무나 많고 하니까. 크ㅡ 화폐가 그냥 파워가 되는 거예요. 무대장치 하나에 2밀리언! 무대만, 와ㅡ. 50 넘어서 락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옛날에는 제가 혼자서 통키타 하나 들고 2시간 반도 했는데, 저번에 해보니까 밴드가 다 된 상태에서 10분만 하니까 땀이 줄줄 나고, 에너지가 죽 빠지더라꼬요.
> 또 중요한 것이 아무래도 또 락 자체가 저항 음악이니까. 저항적 정신과 분노가 있어야 되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분노가 모지래지. 하하하. 화난 것도, "아이고 그래 화났다. 누가 돈 가져갔다, 그러면 아이고 또 누가 또 가져갔는갑다", 그러죠. 젊었을 때는 (삿대질을 하며) 야, 니가 내 돈 가지갔어?
문제는 락이기도 한 것이다. 한대수 씨는 만약 처음부터 '가수'라는 개념으로 음악을 시작했다면,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행복의 나라로
* 이 페이지에서의 음악 링크는 한대수 씨공식 홈페이지(http://www.hahndaesoo.co.kr)와
윈드버드 70년대 우리 가요 감상실에서 링크한 것입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곡의 길이와 음질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으면 안 하는 게 좋다
> 할 말이 없으면 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번 앨범에서 특히 할 말을 많이 했꼬요.
- '마지막'이라는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앨범에 대한 반응은 어떤지요?
> 아, 이번 음반에 반응이 상당히 좋아요. 제 웹사이트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국내 최고다, 아니다 세계 최고다라 하고. 심지어 우주 최고라는 사람도 있고. 하하. 평론가 박준흠 씨는 저한테 밥을 사주겠대요. "와? 당신한테 내가 밥을 사주야지", 그랬더니, 이번 음반이 하도 좋아서 저한테 감사하다는 거예요.
음반사를 겨우 잡아 8집을 어렵게 내놓은 한대수 씨는 언론의 평가와 반응에 대해 민감했다. 예컨대 <문화강국>에서 했던 동영상 인터뷰가 마음에 든다는, 반면 <조선일보>의 기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 글이 너무 닝닝하더라고.
뿐만 아니라,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들도 "음반을 들어봤는지? 듣고 느낌이 어땠는지? 어떤 곡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대수 씨로부터 따갑게 질문을 들어야 했다. 동행한 <퍼슨웹>의 "미인"은 아직 음반을 들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 (크게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와, 여성들 반응을 들어봐야 되는데-.
그러나 그 "미인"은 금년 7월달에 나온 한대수 씨의 자서전을 읽었다는 걸로 '용서'를 받았다.

> 책은 어땠어요? 느낌은? 눈물나는 부분도 좀 있죠?
> 진짜 11년만에 우리나라 음악인들과 기술진들과 같이 사운드를 만들었다는 것이 가장 만족스럽죠. 음반 나오고 난 뒤에 미국에 잠시 가서 파티를 했는데, 미국 친구들도 오고 옥싸나 회사 사람들도 왔는데 반응이 너무나 좋았어요.
음악 생활을 총결산한다는 이 8집 음반은 실제로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한대수 씨 자신도 대단히 만족스럽다고 했다. 손무현 씨의 편곡과 프로듀싱이나 엔지니어 기술도 최고 수준이라 결코 뉴욕에서 작업한 것에 손색이 없는 완벽한 사운드라는 것이다. 앨범 자체는 상당히 다양한 색깔을 가진 노래들로 이루어져있다.
> 제가 여러 가지 색깔이 있었잖아요. <기억상실>은 재즈였고 <천사의 담화>는 쟌 케이쥐 같은 미니말리즘이었고, <이성의 시대>는 완전히 하드락이었고 또 누구 말대로 <멀고 먼 길>은 밥 딜런이나 포크 계열이었고. 그런데 마지막 작품이고 하니까 특별한 컨셉을 정하지 말고 그냥 곡이 있는 대로 가자는 거였죠. 그래서 <멍든맘....> 같은 곡은 댄스 포크로 가고, <그대>는 포크 분위기로 가고...
- 노래 가사들의 특징이 항상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치성이 있다는 거고, 하나는 유희적인 유머러스함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음반에서는 <멸망의 밤>이 전자에 <남자/여자>가 후자가 해당된다고 보입니다만...
> 노래 첫 대목의 여자 목소리는 내 목소립니다. 가성을 쓴 거지요. 직접 여자 목소리를 쓰려고 하니까 재미가 없더라꼬요.
그런데 상당히 심각한 문제지요, 남자 여자 문제가. 미국 같은 데는 이혼율이 54%잖아요. 사회나 인생에서 남자, 여자 관계가 기본인데 그게 잘 안 되는 사회는 결국 망하는 사회거든요. 그게 제일 중요하고 기본인데, 미국에서 보면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사건 같은 거 막 나잖아요. 그런데 결국 그 시작이 이혼문제 아니겠나. 부모가 없고, 혼자 버려져 있으니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울 수도 없꼬. 애들이 가진 게 분노밖에 없는 거잖아요.
심각한 문제를 유머러스하게 다루는 거를 워낙 저가 좋아하니까. 저가 그렇게 해 봤어요. 음악적으로는 블루즈는 블루즌데 그런 형태를 못 들어봤으니까 한번 해 본 거죠.
> 아, 그런데 그 곡이 제일 재밌습니까?
- 예, 재미로 말하면 <멍든 마음 손에 들고>도 만만치 않던데요.
> 아, 하하. 그거 희한하다. 조선일보 기자도 <남자/여자>가 제일 재밌다 했는데...

- 물론 귀에 익기는 <그대>가 그랬고요. <To Oxana>는 멜로디가 예쁜 것 같던데요.
> 어떤 의미에서는 이번 음반에는 선과 악, 강한 것과 약한 것, 분노와 아름다움, 요런 기 상당히 표현되었어요. 그기 또 저 성격이고... 완벽한 이중성 같은 거ㅡ.

- <Intro>나 <파라노이아>에서 "무섭다"고 하셨는데.
> 저는 사람들 만나면 술도 좋아하고, 농도 좋아하는데 사실, 깊숙이 저는 무서워요. 요즘 세상이.
왜냐하면 모든 것이 너무 급변하니까. 1+1=2라는 것은 과정이 있는데, 과정은 모르고 2만 안다고. 모든 인터넷을 통해서 답만 받으니까.
몇 %의 사람은 빨리 회전하는 세상에, 저, 뭡니까, 파도를 타고 배를 띄울 수 있는데, 그 나머지 대부분이 파도 밑에 휩쓸린다고. 특히 우리 세대는. 40이상 넘으면 컴퓨터 근처도 못 가요, 무서워 가지고.
> 그런데, 자꾸 듣는 것이 빌 게이츠 성공 스토리라든지, 또 테헤란로 여기서 누가 3달만에 500억 벌었다, 이런 거지. 그 사람 한 두 명이지, 나머지는 사실 소외되고 직장이 많이 바뀌고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서게 된다고요. 우리나라는 그래도 다행히 길거리 나서는 사람 몇 명 안되지만, 미국 같은 데는 심각하죠. 뉴욕 같은 데는 한 30만명이 홈레스니까. 정책도 없고.
> 제가 반말하는 것이, 아니 반문하는 것이 어떻게 미국이 세계 최고 부자나라냐? 자기 국민도... 말이지, 응. 그야말로 길거리에서 썩어가고 있어요. 계속 굶으니까 정신이상이 되고, 전국에서는 몇 백만이 되는데 그냥 두는 거예요. 앨 고어나 조지 부시가 뭐 어떻다 하는 거지, 그 사람들 신경 안 쓰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것도 그렇고 저 자신이 이제 노후의 문 앞에 들어갔잖아요. 팔도 아프기 시작하고.(웃음) 아, 농담 아니에요. 노후의 문 입구에 들어갔어요. 어쩔 수 없어요. 거기 대한 두려움도 있고. 여러 가지 급변하는 사회와 저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그런데 "이 좆같은 세상, 다 썩어가네"로 시작되는 <멸망의 밤>은 모든 방송국으로부터 방송불가판정을 받았고, <남자, 여자>도 모방송국에서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 도합 4곡이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 앨범의 한대수 씨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어야 할 이유는 많은 것 같다. 나이든 이 락커, 고국으로부터 그 업적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멀고 먼 길 - 가면 가고, 오면 오고

한대수 씨를 신화로 만든 것은 1집 <멀고 먼 길>이었다. 1집을 통해서 한대수 씨는 한국 가요사의 이정표이자 전위가 되었다. 대부분 그가 불과 20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만들었다는 1집의 곡들은 모두가 주옥편이다.
<물 좀 주소>를 내가 처음 들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85년이었다. 친구 집에 가서, 그의 형이 가지고 있던 "금지곡 모음"이라는 제목의 해적 테이프 안에 <물 좀 주소>가 들어 있었다. 김민기의 <친구>, 송창식의 <고래사냥>, 윤시내가 불렀다는 <나는 열 아홉 살이에요>와 함께. 이름도 모르던 가수의 <물 좀 주소>의 충격을 잊기 어려웠고 자연스럽게 <멀고 먼 길>의 팬이 되었다.
<멀고 먼 길>의 팬으로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다. 우선 이번 음반에서 리메이크된 <옥이의 슬픔>의 정확한 제목이 <옥의 슬픔>이냐는 것이었다. 이 간단한 물음에 대한 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 미스프린트를 많이 했어요. 제가 추방되고 없는 사이에 레코드 회사가 자기들끼리 막 만들어냈기 때문에 가사도 많이 틀렸고 제목 자체도 틀렸고. 저하고 의논하지도 못했으니까. 또ㅡ 자기들만 팔고 주머니에 넣고 그랬으니까. 30년 동안...... 그래서 신세계가 건물이 많습니다. 하하하하!! "슬픈 옥이야-♬"고 제목은 <옥의 슬픔>이 맞지요.





- <옥의 슬픔>에 있는 큰 답답함이나 분노 같은 거는 뭐였습니까?
> 우리는 못 사는 나라였는데, 저는 그 때 연세대 사택에 살았거든요. 담이 높고 수위가 지키는.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동네 친구가 없었어요. 아예 나가 논다는 개념이 없었어요. 식모나 목수, 수위 아저씨 같은 사람들하고 친하고 그랬는데, 상당히 외로웠어요. 그 고독을 <옥의 슬픔>에 담았어요.
"하얀 벽을 보는 빛 잃은 눈동자-♬" 근데 그것이 반응이 있었던 것은 그러한 상태에 있는 부유층 아이들이 많더라고요. 부유층 아이들은 그 층 나름대로 문제가 많잖아요. 바깥 세상을 어릴 때부터 접촉해야 되는데, 너무 프로텍트하고 그러니까. 그 틴에이저들이 크면 또 사회생활을 하지도 못하고.

그리고 <하루 아침>의 가사에 대해서도 물었다. 룸펜 청년의 하루를, 낙관적인듯 달관한듯, 재미있게 형상화한 이 노래는 <무한대> 앨범에서 리메이크 되었을 때는 오리지날 버전과 가사가 달라져 있다.

> 그렇죠. 백수의 일기죠. 원래는 심의가 안 나왔어요. 가사가 놈팽이 이야긴데, 유신 체제에서 우리나라에 놈팽이가 어디 있느냐는 거지요. 가사에서 "반겨주는 빈대 셋♬" 그랬는데 실제로 방에 빈대가 많았어요. 이도 많았고. 제가 셋방에 살 땐데.
그런데 빈대가 없다는 거야!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는 나란데 무슨 빈대냐는 거였죠. 또 왜 할 일 없이 "언덕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고, "나무가 사라지"느냐? 왜 할 일 없이 "치마 구경"이나 하느냐? 말이지. 빨리 나라를 재건해야 되는데.
그래서 겁이 나서 레코드회사 사장님이 그 노랠 빼버렸어요. 그런데 노래가 남아 있기는 해서 나중에 다시 넣었지요. 89년에 만들 때는 빈대가 개미로 변했지요. 89년에는 빈대가 없으니까.



<하루 아침>

- 저는 그 빈대들이 한대수 씨 당시 친구분들을 말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친구 자취방에서 뒹구는 친구들 말이죠.
> 아, 그래요. 그렇게 상상할 수도 있겠네. 하하하.
또 가사에서 백수 청년이 가는 데가 처음에는 명동이었다가 나중에 광복동으로 바뀌었는데.
> 예. 명동에 제가 살았지요. 그런데 "명-동에 들어가♬" 그런데 사실은 그게 세 음절이 들어가야 되거든요. 다다다, 명동이 안 맞지요. 그래서 명륜동으로 할라다가 명륜동은 유명하지도 않고. 두 번째 할 때는 부산도 구박 많이 받는 나라니까. 광복동으로 했지요.

- 강산에 씨가 그 곡을 리메이크 했던데 어떠셨어요?
> 아주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하하하.(일동 폭소) 그런데 그거는 강산에 씨 탓이 아니고, 편곡을 좀 잘못 했어요. 강산에 씨는 그래도 의식 있는 음악가인데.


나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마스터 테이프가 소각 당한 2집 <고무신>은 <후쿠오카 라이브>(1997)로 완전히 복각이 되었을 때야 들었다. 1989년에 복각되었다는 음반은 청계천이나 국제시장에서나 찾기 어려웠다. 의외였던 것은 1집의 분노나 슬픔에 비해 <고무신>의 음악은 훨씬 부드럽고 낙관적인 거 같았다는 점이었다.


- 제 느낌이 맞습니까.
> 맞아요. 2집을 만들었을 때는, 물론 작곡은 그 전에 해 놓은 거도 있지만. 결혼했겠다, 군대 끝났겠다. 직장 있겠다. 상도 탔겠다. 낙관적인 게 분명 있긴 있지요.
그런데 비교적 제 음반의 대부분은 고통의 흐름이 많아요. 이유 중의 하나는,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작곡가가 기쁘고 기분 좋은 때는 곡이 안 나오거든요. 밥 잘 먹고 즐겁게 있는데 무슨 작곡이 나옵니까. 고통스러워야 음악이 되고, 작가들도 마찬가지겠죠. 고통에서 모든 것이 나와요. 창작은. 슬픈 강이 항상 흐릅니다. 이번 것도 그렇고.




- 이번 음반 타이틀은 <영원한 슬픔 Eternal Sorrow>이지요?
> 아, 영원한 고독! 우리가 가는 길이 <영원한 고독>인 거 같아요. 인생의 나머지는 모르지요. 잠시 살다 가는 건데 시작과 끝은 모르니까. 답은 없고. 어느 종교도 그 답을 줄 수도 없고. 그건 틀림없어요. 저는 신학자의 손자니까,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제목 붙이고 싶더라고요.



미국행은 혹 도피가 아니었나?

- 음반 2개를 내고 미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한대수'라는 가수를 신비화하고 전설처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가요사 같은 데도 그렇게 써 있기도 한데, 꼭 6, 70년대적인 정치적 저항이나 히피즘과 연결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는데, 본인은 어떤지요..
> 물론,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워하고 그러겠죠. 저는 어릴 때부터 처음부터 음악적인 배경에서 자랐고, 음악의 표현이라는 게 제일 만족스러웠죠. 근데 떠남으로써 저보고 '신화'라 그러는데. 옛날에 페이퍼에서 "신화가 돌아왔다" 그랬는데 너무 그러지 말라 그랬지, 제발... 그런 걸 제가 고의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대수 씨는 미국으로 떠나던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그 때는 직장도 좋았어요. 어린 나이에 코리아 헤럴드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기자는 굉장히 파워가 있었어요. 못 가는 데도 없고 화폐도 봉급말고도 많이 들어오고. 옆으로도 들어오고 밑으로도 들어오고. 처음 받고 나서 깜짝 놀랬어요. 한국화약 사장하고 인터뷰를 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끝나고 나서 주는데 돈 봉투가 이렇더라고요. 그래서 '아이고 이거 안 됩니다' 그랬더니 그 사장이 '네 이눔 안 받아 갈 거야'하면서 고함을 지르더라고요. 그래서 돌아와서 편집국장한테 말하니까 '아, 모른 척하고 넣어둬' 그러더라고요.
직장 생활도 괜찮았죠, 또 4, 5년 연애한 이쁜 여자와 결혼했죠. 모든 것이 상당히 화평한 상태였어요. 음악도 앨범이 2개 나왔고 가요제에서 작곡상도 받고 국전에서 상도 받았고. 말하자면 저는 젊은 청년으로서 희망이 있는 상태였어요.
- 그런데 왜 떠나기로 결심했던 겁니까?
> 그런데 음악할 수 없다는 것이 굉장히 디프레스하게 만들더라고. 그것이 가장 만족감을 주는 건데. 그거 없이 단순히 출퇴근하고 돈 받고, 집에 오면 마누라 안아 주고, 호떡 같이 먹고. 그게 반복되는 인생이 진짜 의미가 없더라고. 그래서 가기로 했죠.

- 어떤 사람들은 그 힘들던 70년대의 상황에서, 음악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을 회피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만?
> 제가 도망간 거요? 아,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아요. 근데 저는 대한민국 청년으로서 할 임무는 다 했어요. 공무원까지 했고, 군대까지 다 했고. 제가 디자인포장센터 초창기 멤버예요.
오히려 제가 애국애족한 거죠. 하하하. 나라가 너무 좁으니까 좀 비껴 준 거죠. 어떠한 의미에서 그것도 사실이에요. 만약 이민 간 인구들이 다 들어오면 살 데가 없다고요.
저는 그런 말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안 써요. 말 가지고 말을 만드는 거니까. 그리고 오히려 더 사람들이 나가야죠. 더 일찍 나가서 모든 것을 흡수하고 돌아와야죠. 만약에 제가 그렇게 뉴욕 생활을 안 했다면 이런 음악을 지을 수가 없어요. 불가능합니다. 뉴욕은 전 세계인들이 와서 영감을 얻는 데 아닙니까.
우리가 나라가 워낙 작으니까 그런데 국경에 대한 관념을 좀 없애야되요. 일본 같이 고등학교 때부터 로마에 보내야 되요. 화폐 파워가 안 되니까 할 수 없지만도. 그런 사람들이 들어오면 또 좋은 거를 흡수하고 좋은 거로 고치고 그래야죠.

- 신중현이나 김민기와 비교를 많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 전혀 음악적으로는 관계가 없죠. 우리 셋 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나훈아 씨나 남진 씨 같은 음악이 아니라, 좀더 젊은이들이 뭔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음악을 했다는 면에서는. 그러나 스타일에서는 다 달라요. 신중현 씨는 신중현 씨대로 굉장한 아름다움이 있고, 김민기 씨도 그렇고. 음악적으로는 전혀 이야기가 안 되지만, 다 좋아해요. 근데 그 분들을 두 분 다 좋아해요

"음악만큼 완벽하고 강한 건 없어요"
- 경상도 사투리와 미국식 발음이 절묘하게 어울려서 특이한 창법을 만들어낸다는 평가가 많은데, 이런 문제를 스스로 의식을 많이 하시는지요? 예를 들어, <고무신>의 "대수야! 와 밥 무라-"는 가사 같은 거는 제가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재미있게 들리는데.
> 아, 그거는ㅡ. 김종서 씨 알지요? 그 사람이 <무한대>에 참여했었는데. 자기가 그걸 집어 넣겠데, "대수야, 와 밥 무라"를. 그래서 '야 너 꼭 해야 되나', 그랬는데 하고 나니까 재미있데요.
그게 어떻게 보면 첫 랩중의 하나이기도 하죠. 그라고 사투리를 노래에서 그대로 쓴 예는 없거든. 옛날에는 나훈아 씨나 남진 씨도 얼마나 서울말을 연습하느라 노력을 했었는데. 발음이 서울 발음이 안 되면 방송에 못 나갔습니다.
> 저가 제일 의식하는 것은, 소리의 조환데, 발음과 음이 어떤 소리로 던져졌을 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자극이나 깨우침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건데. 사투리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렇게 발음함으로써 그 음이 이야기가 되더라고. 음악 자체가.
서울말로 "바람아 불어라" "명태잡이 찾아온다♬" 이렇게 하면 노래가 안 되지. 사투리가 막 나오니까 음이 되더라고요. 좀 거칠면서 흙 냄새도 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고. 지금은 뭐 경상도 사투리도 좋고 전라도 사투리도 좋죠. 우리가 지금도 속 좁지만, 그 때는 너무 했어요.
- 근데 <고무신>에서 그게 왜 명태잡이냐고, 명태는 남해에서는 잘 안 잡히고, 동해 쪽으로 올라가야 잡히는데. 그래서 혹 고향이 사실 울산 쪽이 아니냐는 질문을 한 사람이 있던데요. 부산 쪽이면, 멸치 잡이여야 되는데.
> 으하하하하. 상당히 공부를 하셨네요. 아, 예, 예. 그런 지리적인 거는 생각 안 하고 발음이 좋아서 한 겁니다. 멸치는 발음이 안 되지. 하하하하.
- 억양 문제와 관련해서, 여쭈는 건데, 가족이나 태어난 곳 또는 한국이라든지에 대한 뿌리 의식이 음악 활동이나 다른 활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까?
> 뿌리가 상당히 중요하죠. 러시아 사람들이 그런 게 많다는데. 마더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같은 작곡가도 그랬지요. 저도 우리나라에 대해서- 그 아픔이라든지 문제점이 저한테 큰 주제가 되는 거죠. 그라고 또 경상도니까 부산이 상당한 뿌리가 되는 거죠. 경남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이나.

- 김영삼이 경남고를 나왔지요?
> 하하, 또 김영삼 씨라 하니까 부끄럽네. 하하하. 하도 문제를 많이 일으켜 가지고.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하여간 인물은 인물이죠.
- 경상도 남자들이 가부장적 의식이나 남녀 차별의식이 강하고, 공동체에 대한 가치부여하는 경향이 큰데ㅡ.
> 아, 저도 그런 경향이 좀 있는 같기는 해요. 남자 구찌, 여자 구찌 다르다고 생각하고. 차별하는 거는 아니지만, 남녀의 역할은 다르지요. 역할에 혼란이 와서 더 문제지요. 60년대 이후부터 페미니스트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여자들이 더 고독해지고 힘들어진 거 아닌가? 뉴욕의 케이스를 보면 이혼녀들은 나이 4, 50되면 고양이 개하고밖에 살 수 없어요. 남자는 40대 되어도 걸프렌드가 있을 수 있지요. 같이 일하고 와 가지고 남자가 밥 맛이 왜 이래? 하면 말이 안 되죠. 야, 나도 힘들어-. 그렇게 되니까 싸움이 나고.
- 자서전이나 홈페이지에 나온 부인 옥산나와의 관계를 보면, 옥산나는 직장에 나가고 한대수 씨는 설겆이도 하고 요리도 하는데.
> 그래서 남자 여자가 분명히 있다는 거죠. 제가 여자가 된 거죠. 하하하하. 옥싸나는 남자가 되고. 그렇게 하면 되요, 또. 둘 다 같이 밖에 나가고 그라믄 문제가 된다는 거지. 저같이 여자일을 하는 남자가 많아요. 요새는 똑똑한 여자가 많으니까. 미국에서도 그런 게 많아요. 남자가 진공청소기하고 애 보고...
우리 옥싸나가 좀 남자 같은 면이 있어요. 바깥 일도 잘 하고 털파리 ( 털파리 : '덤벙대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부산 사투리 ) 고. 그릇도 다 깨뿌고. 요리해라 하면, 다섯 시간 되도 사라다 몇 개밖에 안 나오고. 역할을 교차시키는 건 좋은 거 같아요.
이야기가 번져 가며 한대수 씨는 미국의 가족 관계와 제도를 비판했다. 이야기가 자연스레 정치적인 데로 흘렀다.

미국을 따라가지 말자
> 저로서는 미국의 시스템이 전혀 옳다고 생각 안 해요. 전혀. 저가 미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데. 만약 통일국가를 이뤄서 나가자면 모델 케이스는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 요런 데를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너무 미국 밑에 있어 놓니까. 아- 여태까지 미국을 따라왔는데 미국의 시스템을 안 따라 갔으면 좋겠어요. 불란서나 독일 시스템도 좀 공부하고.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뉴욕타임스에 난 건데, 당신은 통일을 이뤘을 때 어떤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냐 하니까 김정일 위원장이 난 스웨덴이 좋다, 이랬다고. 그 사람도 유럽 문화에 대해서 좀 아는 거죠. 유럽이 좀 인간적이고.
미국은 완전히 부산말로 돌놈이야. 그 시스템이. 이번 선거에서도 보면 알지만, 돌놈적인 게 있어요. 남자 여자 관계도 진짜 말도 안되고.

- 요새 한국 사회는 어떴습니까?
> 우리는 이제 제일 큰 숙제가 빨리 통일을 해야지. 인구 분산도 해야 되고.
강남이 꼬마방이 월 130만원이라는 게 말이 안되거든. 이게 말이 됩니까? 만하탄에서 1300불이면 최고급 동네인데. 뉴욕에서 15th 애브뉴 53가 같으면 1300쯤 할 건데. 강남이 만하탄입니까. 모든 게 비정상적인 면이 있죠. 통일이 되면 북쪽으로 생산품이 가고, 또 철로로 러시아 중국 몽고로 수출품이 가면 경제도 좋아질 거고. 그게 가장 큰 숙제일 거 같네요.
근데 통일이 정치적으로는 안 되겠죠. 한 세대는 지나야 될 건데. 문화 경제만 되면 그것도 통일이 된 거죠. 미국처럼 합중국하면 되죠.
> 제가 가서 노래 한마디 부르고, 그 쪽 사람도 와서 노래 부르고. 북쪽 냉면집 체인이 남한에 생기고, 남한 공장이 북한에 생기고.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하고. 그라믄 통일 아닙니까?
그의 달변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 정치적인 홈런 필요 없다고, 히트만 하면 되죠. 왜냐하면 김정일 위원장이 그 자리 절대 안 놔 줄거고, 우리는 5년만에 한번 뽑는 프리 시스템이고. 정치적으로는 아마 양보를 안 할 거죠. 그런 걸 바래서도 안 되는 거죠. 제일 중요한 거는 남북한 사이에 결혼이 이뤄지면, 그게 통일 아닙니까? 그 다음 세대는 통일된 세대가 되는 거죠.


음악만큼 완벽하고 강한 건 없다.


한대수 씨는 알려진 대로 오랜 경력을 가진 사진가이기도 하다. 다른 앨범 때처럼 8집의 앨범 자킷의 속지들도 직접 찍은 사진들로 채웠다. 그리고 내년에 30년만에 처음으로 사진전이 준비되고 있다.
- 사진가나 시인으로서 자신을 평가하면 어떻습니까?
> 뭐 괜찮은 거 같애요. 저는 항상 색다른 거나 새로운 구멍이 없는지 찾으니까, 시나 사진을 하는 건데. 그러나 저는 결국 음악가입니다. 사진이나 시는 혼자서 영감 하나로 끝나니까. 스튜디오 상업 사진은 별로 재미가 없고. 스튜디오 작업이라 하면 사진은 회화를 못 따라 가지요. 밴 고호 이상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진이 회화와 다른 것을 줄 수 있는 거는 사회 현황의 그 순간을 그대로 나타내는 거죠. 누가 쓰러졌는데 그 쓰러지는 장면을 그대로 찍는 거지. 저는 포토저널리즘 - 그것에 제일 만족해요. 옛날에 여자도 빨가벗겨 찍어보고 맥주병도 찍어봤지만 별 의미가 없더라고요.
한국이 지금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면 그 사회 현황이 어떤가? 그 사람들 표정이 어떤가? 이런 거는 사진만이 줄 수 있는 특권이더라고요. 그 부분은 상당히 재미있게 생각합니다.
- 그런 감각은 사진 기자 생활의 영향도 있는 거 같습니다...
> 예... 사진은 순간 그대로예요. 사진이 상당히 발전해왔고 여러 갈래로 번져갔지만, 다시 오리지널로 돌아가야 되는 게 브레쏭 ( Henri Cartier-Bresson. 1908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출생한 사진작가. 인위적인 연출이나 계획없는 사진연출로 유명하다고 함 ) 이나 유진 스미스 ( Eugene Smith 1918-1978. Life誌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금세기의 포토저널리스트 ), 덩컨 ( David Douglas Duncan, 1916년 미국태생. Life誌 기자. 한국전에도 기자로 종군) - 그 사람들은 샷 하나로만 갔거든.
- 저희가 보기에는 정말 음악 하실 에너지가 넘치시는 거 같은데요?
> 와하하하하, 그렇습니까. 음악은 정말 말도 못하게 힘들어요! 그래서 병이 난 건지도 모르겠는데, 음악은 완전히 빨가벗는 거고 또 제일 중요한 것이 완전히 말도 못하는 화폐거든요. 그래서 리스판스빌리티, 책임이 굉장히 많아요. 또 음악은 10, 20명이나 되는 엔지니어나 다른 음악가들, 음반사 사람들과도 관계해야 하죠.
사진은 어떤 건가 하면 - 자기 혼자 찍고, 자기 페이스대로 암실에서 작업하고. 갤러리하고 계약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하고. 그래서 프레셔가 훨씬 덜하지요.
음악은 또 무대에 서는 거니까 아무래도 옷도 입어야 되고 포즈도 취해야 되고. 그런데 사진작가는 세수를 안 해도 되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어도 되고. 그런 게 참 편한데.
> 그렇지만, 자극도를 생각하자면- 작품을 발표했을 때 관객들에게 주는 느낌이나 영감이나 생각하면 음악이 최고지요. 영원하지요. 아직도 베토벤이나 비틀즈 같은 경우는 빅히트 아닙니까.
하여간 음악 같이 강한 거 없는 거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건데. 그림이나 조각보다도.
SHARP과 김현정
- 젊은 세대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한대수 씨를 잘 모르는데 10대나 20대들이 듣는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10대나 20대들이 하는 댄스곡들이 상당히 필요하지요. 어느 세대나 팝이 있다고. 우리 때도 팝이 있었어요. 플래터스( The Platters : 1950년대 중반의 대표적인 보컬그룹. 1955년 발표됐던 그들의 히트곡 "The Great Pretender"는 퀸에 의해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 나 뭐 그런 거. 비틀스도 나왔지만 계속 공존했지요. 팝이 항상 있어야 되고 그것이 하나의 패션인데. 물론 오래 못 가지요. 그 당시에 기분이니까.
대부분의 저 세대 음악가들이 댄스곡이 우짜고 저짜고 그라는데 나는 비난하는 거 하나도 없어요. 그라고 저도 자주 봐요, 즐겁게. 너무 이쁘니까-. 그 중에 좋은 곡들이 많더라고. 특히 샾 같은 애들은 곡도 좋고 둘 다 이쁘더라고. 누구하고 데이트를 해야 될지를 모르겠더라고. 김현정은 마 너무 늘씬하고.
한대수 씨가 기거하는 방 화장실 문에 나이트 가운을 입은 김현정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었다.
>저도 좋아해요, 댄스곡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댄스곡도 있고 예를 들어서 김도균 씨나, 손무현, 한상원 씨가 할 수 있는 무대도 있고 그기 없다는 게 서글픈 거죠. 그래도 그건 할 수 없어요. 꼭 있어야 돼요, 항상 있는 거고. 미국도 마찬가지죠. 마돈나, 크리스티나 아귈레라인가 누군가 뭐 그런 사람도 있고. 미국은 약간 나은 것이 그래하면서 그 옆에서 비비킹 ( B.B King ; 1925년 미국 미시시피 태생. 금세기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중 하나. 1999년에는 생애 9번째로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공식 홈페이지- http://www.worldblues.com/bbking ) 이나 에릭 클랩튼이 기타 치고 있고 같이 빌보드 차트를 나눌 수도 있고. 그것이 우리가 아쉬운 거죠.
티비 나올 때마다 봐요. 열다섯, 열 일곱 되는 애들이 이야기하고 또 패션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굉장히 크리에이티브 하다고. 옷이나 댄스 무브도. 잘하는 팀은 참 재밌게 예술적으로 참 잘하더라고. 저 팬이에요.
- 그 중에서도 특히 샤프?
> 샤프하고 김현정. 김현정이 남버원이고.

- 얼마 전에 김현정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던데요?^^
> 아, 그랬구나. 야- 세상에. 병문안 갔어야 되는데.

- 의미 있는 음악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어려운 조건에서 하고 있고, 어찌 보면 신념은 있지만 생활이 어려워서 많이 앓기도 하는데, 그런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 예- 음악을 하는 목적이 뭔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죠. 무엇 때문에 음악을 하느냐? 첫째, 자신이 음악적 재능이 있는지 물어보고 없는 사람은 안 해야지. 음악이라는 건 정말 알 수 없는 거니까. 음악적인 재능이 있고 보여줄 게 있다, 판단했으면 그 다음에 또 목적이 뭐냐? 대부분 유명해지고 싶다, 돈 벌고 싶다, 그런 건데.
그라믄 유명해지고 돈 벌고 난 뒤에는 뭐 하고 싶냐? 그거까지 물어봐야 된다고! 유명해지고 돈 버는 거까지는 쉬운데 제일 마지막에 있어야 될 리스펙트, 존경 - 다들 못 가지거든요. 마이클 잭슨도 두 가지는 있지만 마지막 한 가지는 없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진지하게 음악을 해야 되요. 자기 생활이 음악이어야 되고.
구태여 인기를 얻기 위해서 조작하고 꾸며대는 것은 1, 2년을 못가고 다 끝나거든요. 짐 모리슨이나, 지미 헨드릭스, 존 레논도 자기 생활이 음악이었기 때문에 신화가 되었고, 윤이상 씨 - 우리가 위대한 음악가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분도, 진지한 음악가였고 그런 분은 역사에 남고 존경도 받죠. 마이클 잭슨은 돈은 즐기고 있지만 절대 존경은 못 받거든요. 그래서 자기 목적이 뭐냐를 먼저 물어봐야 될 거 같애요.

- 본인은 젊은 시절에 어땠습니까?
> 아, 저 같은 경우는 음악을 시작한 거는 연애를 많이 하기 위해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고 반해가지고. 하하하하. 그러다가 음악이 이렇게 흘러온 거죠.
생활이 어려운 젊은 음악가들이 공사판에서 일하고 식당에서 일하고 츄럭도 몬다는데, 으레 그렇게 해야죠. 저도 뉴욕에서 낮에는 사진 공장 다니고 밤에 연습하고 코피 터지고 그라면서 무대에 섰어요. 브루스 스피링스틴은 노동자였고 엘비스 프레슬리도 츄럭 몰았지요.
머라이어 캐리는 웨이츄리스 일하다가 소니 회장하고 마 찐빵이 된 거지. 소니 회장이 식당에 온 거를 보고 가가지고는 그 무릎에 앉아버린 거야. 그 늘씬한 여자가 무릎에 앉으니까 소니 회장이 그냥 간 거지. '이렇게 싱싱한 여자가 무릎에 앉으니까 내 몸의 이상한 부분이 이상해진다', '머라이어야! 니 너무 좋다, 우리 집에 그냥 오라' 그래 시작되 가지고 소니 회장이 500만불로 그냥 밀은 거 아니예요. 한 3년 동안 500만불로 밀면 되죠. 물론 목소리는 있고 몸매 좋고.
운전하고 그릇 닦고 그래 해야 되요. 그렇게 해도 하겠다는 사람은 될 것이고. 그래하다가 너무 지치는 사람은 목적이 없어지는 거죠. 다들 그랬어요, 고생 고생 끝에.



100번 틀어주면 된다...
열변을 토한 한대수 씨는 덧붙여 우리 뮤지션들이 가진 가장 큰 악조건은 우리나라가 "화폐"가 별로 없고 또 그래서 제대로 된 (배급)망이 없다는 거라 했다. 특히 그에게 '망'은 대단한 관심사이면서 '한 맺힌(?)' 부분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잘못된, 또는 낙후한 '망' 체계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70년대에 나온 음반으로는 십수년간 거의 인세를 받아보질 못했다고 했으니까.
> 화폐가 없으께는 뭐냐 계속 서태지, 베이비 복스 가야지 뭐. 다른 음악 하는 사람들한테는 돈이 안 돌아가니까. 저도 이번에 EPI 뮤직 아니었으면 음반이 안 나왔어요.
그런데 워너브로더스 같이 세계망이 있다면 그것이 유리한 점이에요. 마돈나처럼 오늘 음반이 나왔으면 모레는 시드니 가 있고, 다음 주에는 도꾜, 서울에 가 있어야지요. 그런데 할려면은 우리가 그 쪽에 들어가서 한다는 거는 힘들고 우리가 여기서 만들어야 되요. 삼성전자가 어느 정도 했듯이, 화폐의 능력과 기발난 아이디어를 가진 음반사가 나와야 되요. 그럴러면 중국과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동양에서라도. 그게 상당히 중요해요.
> 왜냐하면 음악이라는 것이 이상해서, 물론 나쁜 음악은 아무리 해도 안 되지만 어느 정도 괜찮은 곡들은 자꾸 틀어주면은, 100번 들려주면 좋아하게 되요.
조성모, 그 형편없는 발라드 아닙니까. 너무나도 형편 없지. 그렇지만 작곡이 아주 졸자는 아니거든, 중간은 되거든. 그런데 그걸 라디오나 길거리에서 얼마나 틀어댑니까? 그래서 100번 들으니까 좋아지는 거야. 마찬가지로 마돈나나 브루스 스프링스틴 음악이 훌륭해서보다도, 그렇게 나쁜 곡도 아니고 훌륭한 것도 아닌데, 100번 들으니까 좋아지더라고. 예스터데이 같은 명작은 아니지만, 세계망을 가지고 미국애들이 자꾸 틀어주잖아요.
> <멸망의 밤>이라든지, <그대>라든지도 한 100번 틀어주면 된다고. 꼭 미국애들이 음악을 잘 하는 것이 아니고, 프리젠테이션이 좋고 망이 있으니까.
아직까지 역사적으로 동양에서 세계적인 클라식 아티스트는 나왔는데, 50년 락큰롤 역사에서 한 명도 없어. 우리가 인구가 얼마나 되고, 재능이 얼마나 좋은데 한 명도 없다는 거는 그건 말이 안 되거든.


멸망의 밤
그대

한대수 씨는 클래식은 완벽한 아티스트라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했다. 클래식 음악가들이 작곡보다는 연주 기량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건데, 말러 이후에 위대한 작곡가는 없다고 했다. 특유의 화법으로 번스타인을 비웃기도 한 그는 상대적으로 클래식은 죽은 음악이라 단언했다.
> 그렇지만 락캔롤은 완벽한 아티스트가 되어야 해요. 데이빗 보위를 보세요. 옷, 걷는 스타일, 작곡, 가사, 프리젠테이션- 완벽한 아트예요. 지가 다 만들어내거든. 그래서 락이 굉장히 힘들어요.
락 애티튜드가 동양 애티튜드하고 다르거든.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는데. 콜롬부스를 이사벨 여왕이 보낸 것처럼 서양 애티튜드는 죽을 수도 있지만 "해라, 해보라"는 건데, 우리는 "죽으니까 안 된다". 하하. 그러니까 우리는 락하고 반대되는 태도지. 우리는 부모님들때부터 '안된다'는 교육만 받았으니까.

> 무대에 나와서 막 발광하고 그래야 되는데. 이기 팝*이라고 알죠? 그 사람 초기에 대단했는데. 빤스를 다 벗고 그라는데, 한번 공연 가서 봤는데 민망해서 못 보겠더라고. 바이올린 활을 사타구니에 끼우고 아, 웃기더라고. 유리를 깨 가지고 그기다가 몸을 비비고 피를 묻히고. 그기 락이라고. 그래서 사실 락적인 애티튜드하고 우리 거하고는 정신이 사실 다르지. 일본도 마찬가지고. 약간만 스쳐도 '아, 스미마셍' 그러잖아. 죽을 죄를 지었대.

* Iggy Pop: 1947년 4월 미시건 태생.
전위적인 음악과 기행으로 이름이 높다.1999년 9월 발매된 그의 최신앨범의 제목 "Avenue B"는 이기 팝이 오랫동안 거주했었던 뉴욕의 한 지역이라고 한다. 어쩌면 한대수씨와 마주쳤을지도 모르고...
공식사이트 : http://www.virginrecords.com/iggy_pop


그런데 락은 "야, 내 잘 났어, 너 뭐야."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게 안되는 이유 중에 하나요. 이제 동양에서도 상당히 괴짜들이 많이 나오죠. 특히 파격적인 게 노랑머리 물들이는 거. 나는 뉴욕에서 동양여자가 노랑물 들인 거 보고 깜짝 놀랬어. 일본에서 5년전부터 나왔다는데. 특히 파격적인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나오죠. 요코 오노 같은 여자.
삼겹살, 맥주 - "화폐가 사람 지기지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대수 씨의 방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집 근처의 식당에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박사 숯불갈비>였고, 삼겹살과 맥주를 시켰다. 한대수 씨의 오른쪽 팔은 꽤 많이 불편해서, 그는 왼손에 포크를 잡고 삼겹살을 찍어 먹었다.
팔 나으면 쇠주를 마셔야지. 그래도 많이 좋아진 거 같애요.
- 술은?
술은 거진 매일 먹는데, 요즘 몸이 그러니까 잘 안 먹죠.
- 술, 담배를 끊을 생각은...
전혀ㅡ! 그렇게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굽고, 따르고, 먹느라고 이야기는 잇고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 혹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야죠. 조성모나 지오디한테 가서 빌려야죠. 돈이 없으니까. 조성모가 한 1억정도는 빌려주겠죠. 하하하. 그라믄 만들어야죠. 오성욱 감독이 관심이 있다고 그러더라고. 뮤직비디오를 하면 색다른 것이, 10대만 나오다가, 할배가 나와서 기타를 치면서 한다, 거기서부터 보낼 거 아냐? 근데 할배가 하는데 재미있게 한다... 그라면 진짜 문 잠가야겠다. 또 10대들이 찾아올 거 아냐, 그러면 골치 아프죠...... 제가 원래 영상 쪽에 관심이 많으니까.
- 친구는...?
비교적 친한 친구가 많진 않아요. 우리 마누라하고 제일 친하고. 저가 친구나 우정관계가 문제가 많아요. 아는 사람은 많지만 아주 가까운 사람은 몇 명 안돼요.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세대 중에서 친한 가수들의 이름을 세대별로 죽 댔다. 양희은, 서유석, 김추자, 윤형주....... 황신혜 밴드, 어어부, 크래쉬, 강산에 등등.)
- 컴퓨터? 인터넷?
복잡한 거는 못하고, 문 열고 내 팬레터 정도는 처리한다.
- 정태춘 씨 인터뷰 기사가 퍼슨웹에 실렸었는데...
아, 그래요. 나, 정태춘 씨 덕을 많이 봤어. 왜냐하면 그 분 아니면 이번에 <멸망의 밤>이 안 나올 뻔했잖아. 심의 관계를 그 사람이 노력한 거 아냐. 무슨 말인 줄 알겠죠? 그런 노력 아니면 이런 음반이 시장에도 못 나온다고. 저번에 포크 페스티발에서 만나서 재밌는 대화 나눴고...... 사람 참 좋더라꼬.
- 한국에서 생활하기는?
상당히 편해요. 꼭 같아요, 뉴욕하고. 물질적으로 모자란 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오히려 여기가 좀더 고급이에요. 10년 전에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물질적으로 차이가 있더라고, 음식이라든지. 전혀 뉴욕이나 똑같다. 여자들이나 남자들 옷 입는 패션이 똑같고. 여기 사람이나 저기 사람이나 똑같더라고.
장기체류해서 오히려 재미가 있어요. 여기 사는 데-. 한국의 좋은 점은 정이에요. 우리가 정이 많은 나라고. 그라고 이렇게 사람들이 뭉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뉴욕보다는 좀더 자기 시간을 우정을 위해서 쓰는 게 많지. 절대 필요할 때만 모이고, 생활이 냉정하거든. 필요 안 하면 이거거든. 정이 많은 게 나쁜 점이 있다면 간섭을 할라 하는 게 있거든.
뉴욕의 나쁜 점은, 너무 자기 중심이라서 모든 것이 me me me야! 영 재미가 없지. 좋은 점이 있다면 간섭 안 하니까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이 없는 거야.
- 부인이 보고 싶진 않으...?
허허. 보고 싶지. 그런데 일은 희생 없이 되는 게 없어. 항상 우리가 현실하고 타협하고 살아야 잖아요. 또 제 팬 베이스가 여기고, 또 현실적으로 우리 둘이가 같이 움직일 수 있는 거도 아니고. 그래서 저라도 혼자 움직이는 거고.
- <하룻밤>?
"하룻밤 지나서∼♬" 그거를 대기 좋아하더라고 사람들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그 노래가 나오는데, 나는 이해가 안 가데? 와 그 노래를 좋아하는고?
요즘 들으면은 촌스럽지 않아요? 그 노래는 특히 전혀 모자란 상태에서 녹음했는데, 기타리스트도 없이 저 혼자 기타 치고 노래하고 다 했어요......
- 살면서 혹 무책임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아니, 한 번도 없어.

- 책임감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는지?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건 제일 중요한 거라 생각해요.
-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인간에 대한 애정은 깊거나 혐오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계 맺음을 즐기지 않는 것...?
즐기는데, 저가 마음을 틀어놓을 사람이 몇 명 안돼요. 그거하고 무책임하고는 아무 관계없는 거지.
- 한국사회의 인간관계가 관심과 정은 많지만 간섭하는 경향이 있다함은...
한국 사회가 아니라 인간 사회... 자체가 친구가 있어 봤자 둘 셋 아닌가? 그건 한국 사회하고 아무 관계없는 거지. 저 개인적으로 친구가 없다는 거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둘 셋밖에 없고, 둘 중에 하나는 마누라고. 하하하.
- 간섭받기 싫은 만큼 간섭하기도 싫어하는 거...
아니, 그게 아니야ㅡ 그것도 아니고, 전혀.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부분이 없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깊숙이 들어가면 내가 지루해지는 거야.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면,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대개 사랑이건, 우정이건, 대인관계를 힘들어하지 않은가?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책임질 일도 때로 회피하기도... 쉽게 잘 안되니까.
우정 관계는 책임과는 관계 없이,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돼. 일은 책임을 져야 돼. 우정 관계는 진실한 친구다, 그러면, 반시간을 만났다 그라믄 서로 반시간이 안 아깝고 그래야 되는, 서로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내한테는 별로 없다 그 말이야.
-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많이 못 만났다... 그런 부분에서 당신은 독특한 거 ?
거진 없지. 그런데 억지로 만들 수는 없고.
- 그런 면에서 부인은 잘 통하신다...?
그것이 나는 정말 복이기도 하지만ㅡ. 상당히 노력을 한 거기도 하지.
근데 자기도 진심으로 생각해 봐. 친구, 친구 하지만 그야말로 방어태세를 갖출 필요 없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열 명, 스물 명이 아니라고.
모든 사람의 답변이 '둘, 셋'일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정말 진실한 친구 몇 명 되느냐? 말이지, 물어봐, 둘 셋이면 상당한 거지. (식당 아줌마를 향해) 어언니, 우리 국은 안 주나?

음반사들로부터 음반 내는 걸 거절 당했을 때?
기분이, 야 완전히 야, 현실이 이렇구나 하고 느꼈지. 완전 기분이 희한한 거지.
완전히 그냥 '멸망의 밤'이 나오는 거지, 하. 그냥. "이 무엇 같은 세상!" 음반에 대해서는 지금 논할 것이 아니고, 저 자신도 감상을 느끼고 있는 상탠데.
시간이 지나면 <멀고 먼 길>보다 더 좋아질 거예요. 시간을 좀 주세요. 또 오늘은 좋아했는데, 내년에는 다른 노래가 좋아질 수도 있죠. 어렵게 나온 앨범이니까 마이 협조 좀 해주이소. 사람들이 노력도 많이 하고 희생도 많이 했다고.
- "화폐"라는 어휘 사용이 제일 특이한데...
그 놈의 화폐가 사람 지깁니다. 죽이고, 속이고.

- 싫어하는 사람이 스탈린, 김일성, 문선명이라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파워 앤 칸트롤인데, 스탈린은 너무 그거를 해 버렸다고.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고. 김일성은 공산주의 중에서도 더 지독한 공산주의를 만들었거든, 그거는 김일성주의일 뿐이지. 언제 칼 맑스가 그런 말을 했나? 칼 맑스나 헤겔하고 아무 관계 없어요. 듣기 좋으라고 공산주의라 한 거지. 문선명이 싫어하는 이유는 그 사람은 그냥 화폐 많은 사람이지, 좀 미친 놈이지. 자기가 메사이어라니까. 종교가 아니지, 뭐.
그 사람들은 정말 강한 리더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남의 인생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인류의 진보를 막는다고 생각해요.

- 당신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나 혹은 무정부주의자나......?
정치적으로? 애나키스트는 아니고, 그건 말도 안되고. 자유주의란 말도 너무 좀 그렇고?
뭔가 하면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만든 어떤 제도든, 시스템이거든. 지금은 자본주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있었고...... 어떠한 시스템이든 대다수가 그 제도에 의해서 혜택을 얻어야 된다고.
근데 지금은 미들 클라스, 중견층이 없잖아. 극소수의 부자와 대다수의 가난뱅이들 뿐이잖아. 우리나라가 그렇잖아. 미국도 마찬가지고.
우리 다 가난뱅이야. 항상 돈 걱정하잖아. 밥을 묵어면 밥 값 걱정하고. 우린 전부 다 가난한 사람들이야. 돈에 전혀 신경 안 쓰는 극소수 사람들이 있어요. 아무리 써도 돈을 다 못쓰는 사람들 있어. 해외로 좋은 것만 보고, 먹으러 다니는 사람들. 한국에도 그런 사람 많애요.
모든 제도는 대다수가 혜택을 받아야 돼. 대다수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제도는 제도가 아이지.
단순히 자유주의나 무슨 주의나 그런 건 너무 단순한 말이야. 웃기지 마라 그래. 그게 내 주의라고.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지금 문제가 있다는 거는 틀림없는 사실이야. 전 세계적으로!

정리 : 천정환(heutekom@personweb.com)
연보 와 앨범 연보
한대수 씨의 공식 홈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을 옮긴 것이다.
이 홈페이지에 가면 사진과 함께 보다 상세한 연보를 볼 수 있다.
www.hahndaesoo.co.kr
1948 3월 12일 부산 출생
1955 부산 남일 국민학교 입학
1958 뉴욕 초등학교 입학
1962 부산 경남 중학교 입학
1964 부산 경남 고등학교 입학
1965 미국 롱 아일랜드 A.G. Berner 고등학교로 전학
1966 New Hampshire 대학에서 수의학 전공
1967 New York Institute of Photography 전공
1968 한국에서 포크 싱어 송라이터로 데뷔
1969 이화여자 대학교,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부산대학교, 드라마 센터 공연
1970 한국 디자인 포장센터에서 디자이너(3급 공무원)로 근무
1971-74 군복무(해군 149기)
1974 코리아 헤럴드 신문 기자 겸 사진작가
1977 뉴욕시 Color Wheel, Chroma Copy의 사진작가 활동
락 밴드 "Genghis Khan"의 리더로서 클럽 Trude Heller, CBGB's 등에서 공연1988 L.A.로 이주. Color House, Burbank 사진관 매니저 활동
1991 뉴욕으로 이주. Nathaniel Lieberman studio, architectural 활동
1993 Speed Graphics사 매니저 활동
1997 Crossbeat Asia의 후원 하에 일본의 락스타 Carmen Maki와 함께 일본 공연 및 서울 올림픽 경기장에서 유니텔 락 콘서트 "Koreanism" 공연
1999 양희은의 "아주 특별한 만남" 공연(5.5-9, 영산 아트홀)에서 고정 게스트로 함께 공연
2000 SBS 포크 페스티발(5.27-28, 올림픽 공원 잔디마당)에 양일간 참가
앨범 연보
1st : 멀고 먼- 길 Long Long Road
신세계, 1974, SIS-81115, LP & Tape
1977년 이후 수차례 LP 및 MC 재발매
재발매되면서 재킷이 계속 바뀜
1989년 재발매판(초판과 동일한 재킷)에는 <하루 아침>의 미발표 오리지날 버전이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수록곡 순서도 다른 재발매판들과 다름
2nd : 고무신 Rubber Shoes
포 시즌(4 Season) 레코드, 1975, LP & Tape
1975년 2월 9일 녹음
1989년 7월 1일 재발매(서울음반, 기획: 김홍식), SPDR-172(LP) / SPDC-172(카세트)* LP에서 복각 - 마스터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소각됨
1999년, "97년 후쿠오카 라이브"와 묶어 2CD로 재발매(도레미), DRMCD 1548
3rd : 무한대 Infinity
신세계, 1989, SIS-890294, LP & Tape

4th : 기억상실 Loss of Memory with 잭 리 밴드 Jack Lee Band
뮤직 디자인, 1990, LP, Tape & CD
5th : 천사들의 담화 Angels' Talkin' with 이우창 Lee Woo-Chang
삼화, 1991, LP & Tape
1975 고무신∼1997 후쿠오카 (6th)
2CD, 도레미, 1999, DRMCD 1548, CD & Tape
CD 1: 2집 [고무신](1975)의 재발매
CD 2: 일본 후쿠오카 라이브(1997) 녹음
7th :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 Age of Reason, Age of Treason
Gam Mee Records (NYC), 1999.9, CD Only
나의 마지막 작품" ...8th eternal sorrow

http://personweb.com/sub3/performance/han_ds/hds_chro4.html#top 퍼슨웹에서

김수영

Posted by 히키신
2016. 12. 15. 16:59 Poetry#1

김수영 전집 – 1. 시 , 민음사, 1981

<웃음>

웃음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서러운 것일까
푸른 목
귀여운 눈동자
진정 나는 기계주의적 판단을 잊고 시들어갑니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좋지 않아요
웃고 있어요
그것은 그림
토막방 안에서 나는 우주를 잡을 듯이 날뛰고 있지요
고운 신(神)이 이 자리에 있다면
나에게 무엇이라고 하겠나요
아마 잘 있으라고 손을 휘두르고 가지요
문턱에서.
이보다 더 추운 날처럼 나는 여기서 겨울을 맞이하다가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도
이 웃음만은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
시간에 달린 기이다란 시간을 보시오
내가 어디라고 한탄하지 마시오
나는 내 가슴에
또 하나의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1948>



<풍뎅이>

너의 앞에서는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았다
백년이나 천년이 결코 긴 세월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사랑의 테두리 속에 끼여 있기 때문이 아니리라
추한 나의 발빝에서 풍뎅이처럼 너는 하늘을 보고 운다
그 넓은 등판으로 땅을 쓸어가면서
늬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추악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도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 안다
너의 이름과 너와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질 때까지
소금 같은 이 세계가 존속할 것이며
의심할 것인데
등 등판 광택 거대한 여울
미끄러져가는 나의 의지
나의 의지보다 더 빠른 너의 노래
너의 노래보다 더한층 신축성이 있는
너의 사랑

<시골 선물>

종로 네거리도 행길에 가까운 일부러 떠들썩한 찻집을 택하여 나는 앉아 있다
이것이 도회 안에 사는 나로서는 어디보다도 조용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의 반역성을 조소하는 듯이 스무 살도 넘을까 말까 한 노는 계집애와 머리가 고슴도치
처럼 부스스하게 일어난 쓰미에리의 학생복을 입은 청년이 들어왁서 커피니 오트밀이니 사과니
어수선하게 벌여놓고 계통 없이 처먹고 있다
신이라든지 하느님이라든지가 어디 있느냐고 나를 고루하다고 비웃은 어제저녁의 술친구의 천박
한 머리를 생각한다
그것은 갈색 낙타 모자
그리고 유행에서도 훨씬 뒤떨어진 서울의 화려한 거리에서는 도저히 쓰고 다니기 부끄러운 모자
이다
거기다가 나의 부처님을 모신 법당 뒷산에 묻혀 있는 검은 바위 같이 큰 머리에는 둘레가 작아서
맞지 않아 그 모자를 쓴 기분이란 쳇바퀴를 쓴 것처럼 딱딱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시골이라고 무관하게 생각하고 쓰고 간 것인데 결국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서울에 돌아온 지 일주일도 못 되는 나에게는 도회의 소음과 광증(狂症)과 속도와 허위가 새삼스
러웁게 미웁고 서글프게 느껴지고
그러할 때마다 잃어버려서 아까웁지 않은 잃어버리고 온 모자 생각이 불현듯이 난다
저기 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먹고 떠들고 웃고 있는 여자와 젊은 학생을 내가 시골을 여행하기
전에 보았더라면 대하였으리 감정과는 다른 각도와 높이에서 보게 되는 나는 내 자신의 감정이
보다 더 거만하여지고 순화되어진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구태여 생각하여 본다
그리고 비교하여 본다
나는 모자와 함께 나의 마음의 한 모퉁이를 모자 속에 놓고 온 것이라고
설운 마음의 한 모퉁이를. <1954>

<꽃2>

꽃은 과거와 또 과거를 향하여
피어나는 것
나는 결코 그의 종자(種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설움의 귀결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설움이 없기 때문에 꽃은 피어나고

꽃이 피어나는 순간
푸르고 연하고 길기만 한 가지와 줄기의 내면은
완전한 공허를 끝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중단과 계속과 해학이 일치하듯이
어지러운 가지에 꽃이 피어오른다
과거와 미래에 통하는 꽃
견고한 꽃이
공허의 말단에서 마음껏 찬란하게 피어오른다 <1956>

<파밭 가에서>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1959>

<싸리꽃 핀 벌판>

피로는 도회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
푸른 연못을 넘쳐흐르는 장마통의
싸리꽃 핀 벌판에서
나는 왜 이다지도 피로에 집착하고 있는가
기적소리는 문명의 밑바닥을 가고
형이상학은 돈지갑처럼
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1959. 9. 1>

<미스터 리에게>

그는 재판관처럼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구제의 길이 없는 사물의 주위에 떨어지는
태양처럼 판단을 내린다 ㅡ 월트 휘트먼

나는 어느 날 뒷골목의 발코니 위에 나타난
생활에 얼이 빠진 여인의 모습을 다방의 창 너머로 별견(瞥見)하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쪽지를 미스터 리한테 적어놓고
시골로 떠났다

『태양이 하나이듯이
생활은 어디에 가보나 하나이다
미스터 리!

절벽에 올가가 돌을 차듯이
생활을 아는 자는
태양 아래에서
생활을 차 던진다
미스터 리!

문명에 대항하는 비결은
당신 자신이 문명이 되는 것이다
미스터 리!』 <1959>

<하……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라스나 리처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릿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혈투』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세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그림자가 없다

하……그렇다……
하……그렇지……
아암 그렇구말구……그렇지 그래……
응응……응……뭐?
아 그래……그래 그래. <1960. 4. 3>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라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세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1960. 6. 15>

<<4. 19> 시>

나는 하필이면
왜 이 시(詩)를
잠이 와
잠이 와
잠이 와 죽겠는데

지금 쓰려나
이 순간에 쓰려나
죄수들의 말이
배고픈 것보다도
잠 못 자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해서
그래 그러나
배고픈 사람이
하도 많아 그러나
시 같은 것
시 같은 것
안쓰려고 그러나
더구나
<4. 19> 시 같은 것
안 쓰려고 그러나

껌벅껌벅
두 눈을
감아가면서
아주
금방 곯아떨어질 것
같은데
밥보다도
더 소중한
잠이 안 오네
달콤한
달콤한
잠이 안 오네
보스토크가
돌아와 그러나
세계정부 이상(理想)이
따분해 그러나
이 나라
백성들이
너무 지쳐 그러나
별안간
빚 갚을 것
생각나 그러나
여편네가
짜증 낼까
무서워 그러나
동생들과
어머니가
걱정이 돼 그러나
참았던 오줌 마려
그래 그러나

시 같은 것
시 같은 것
써보려고 그러나
<4. 19> 시 같은 것
써보려고 그러나 <1961. 4. 14>

<격문(檄文) – 신귀거래 2>

마지막의 몸부림도
마지막의 양복도
마지막의 신경질도
마지막의 다방도
기나긴 골목길의 순례도
<어깨>도
허세도
방대한
방대한
방대한
모조품과
막대한
막대한
막대한
막대한
모방도
아아 그리고 저 도봉산보다도
더 큰 증오도
굴욕도
계집애 종아리에만
눈이 가던 치기(稚氣)도
그밖의 무수한 잡동사니 잡념까지도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농부의 몸차림으로 갈아입고
석경을 보니
땅이 편편하고
집이 편편하고
하늘이 편편하고
물이 편편하고
앉아도 편편하고
서도 편편하고
누워도 편편하고
도회와 시골이 편편하고
시골과 도회가 편편하고
신문이 편편하고
시원하고
버스가 편편하고
시원하고
하수도가 편편하고
시원하고
펌프의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온다고
어머니가 감탄하니 과연 시원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
인제 정말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
시원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
이건 진짜 시원하고
이 시원함은 진짜이고
자유다 <1961. 6. 12>

<모르지? – 신귀거래 5>

이태백이가 술을 마시고야 시작(詩作)을 한 이유,
모르지?
구차한 문밖 선비가 벽장문 옆에다
카잘스, 그람, 슈바이처, 앱스타인의 사진을 붙이고 있는 이유,
모르지?
노년에 든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연애시를 쓰는 이유,
모르지?
우리집 식모가 여편네가 외출만 하면
나한테 자꾸 웃고만 있는 이유,
모르지?
그럴 때면 바람에 떨어진 빨래를 보고
내가 말없이 집어 걸기만 하는 이유,
모르지?
함경도 친구와 경상도 친구가 외국인처럼 생각돼서
술집에서는 반드시 표준어만 쓰는 이유,
모르지?
5월 혁명 이전에는 백양을 피우다
그 후부터는
아리랑을 피우고
와이셔츠 윗호주머니에는 한사코 색수건을 꽂아 뵈는 이유,
모르지?
아무리 더워도 베와이셔츠의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넣지 않는 이유,
모르지?
아무리 혼자 있어도 베와이셔츠의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넣지 않는 이유,
모르지?
술이 거나해서 아무리 졸려도
의젓한 포즈는
의젓한 포즈는 취하고 있는 이유,
모르지?
모르지? <1961. 7. 13>

<예지>

바늘구멍만한 예지(叡智)를 바라면서 사는 자의 설움이여
너는 차라리 부정한 자가 되라
오늘
이 헐벗은 거리에 가슴을 대고
뒤집어진 부정이 정의가 되지 않더라도

그러면 너의 벗들과
너의 이웃사람들의 얼굴이
바늘구멍 저쪽에 떠오르리라
축소와 확대의 중간에 선 그들의 얼굴
강력과 기도가 일체가 되는 거리에서
너는 비로소 겸허를 배운다

바늘구멍만한 예지의 저쪽에 사는 사람들이여
나의 현실의 메트르여
어제와 함께 내일에 사는 사람들이여
강력한 사람들이여…… <1957>

<서시>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成長)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
정리(整理)는
전란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그리고 교훈은 명령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지지한 노래를
더러운 노래를 생기 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1957>

<비>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榮譽)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 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鷄舍) 위에 울리는 곡괭이 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ㅡ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음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1958>

<생활>

시장거리의 먼지 나는 길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처럼
솟아오른 놈

(유년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 웃는다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1959. 4. 30>

<달밤>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밤거리를 방황할 필요가 없고
착잡한 머리에 책을 집어들 필요가 없고
마지막으로 몽상을 거듭하기도 피곤해진 밤에는
시골에 사는 나는ㅡ
달 밝은 밤을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 보다
나는 커단 서른아홉 살의 중턱에 서서
서슴지 않고 꿈을 버린다

피로를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슬픈 일이다
밤이여 밤이여 피로한 밤이여 <1959. 5. 22>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세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1960. 6. 15>
<이놈이 무엇이지? ㅡ신귀거래 9>

여행을
안 한다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도 없다
밀모(密謀)는
전혀 없다
담배마저 안 피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성급해지면 아무 데나 재를 떠는
이 우주의 폭력마저
없어질지도 모른다
정적(靜寂)이
필요 없다
그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다
낚시질도
안 간다
가장(假裝) 파티에
가본 일도 없다
하물며
중립사상연구소에는
그림자도 비친 일이 없다
뇌물은
물론 안 받았다
가지고 있는
시계도 없다
집에도
몸에도
그러니까
The reason why
You don’t get
A clock
Or
A watch마저
말할 필요가 없다
집에도
몸에도
이놈이 무엇이지? <1961. 8. 25>

<아픈 몸이>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골목을 돌아서
베레모는 썼지만
또 골목을 돌아서
신이 찢어지고
온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는데
또 골목을 돌아서
추위에 온몸이
돌같이 감각을 잃어도
또 골목을 돌아서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는
그 무수한 골목이 없어질 때

(이제부터는
즐거운 골목
그 골목이
나를 돌리라
ㅡ아니 돌다 말리라)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나의 발은 절망의 소리
저 말(馬)도 절망의 소리
병원 냄세에 휴식을 얻는
소년의 흰 볼처럼
교회여
이제는 나의 이 늙지도 젊지도 않은 몸에
해묵은
1,961개의
곰팡내를 풍겨 넣어라
오 썩어가는 탑
나의 연령
혹은
4,294알의
구슬이라도 된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1961>

<백지에서부터>

하얀 종이가 옥색으로 노란 하드롱지가
이 세상에는 없는 빛으로 변할 만큼 밝다
시간이 나비모양으로 이 줄에서 저 줄로
춤을 추고
그 사이로
4월의 햇빛이 떨어졌다
이런 때면 매년 이맘때쯤 듣는
병아리 우는 소리와
그의 원수인 쥐 소리를 혼동한다

어깨를 아프게 하는 것은
노후(老朽)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개울과 개울 사이에
하얀 모래를 골라 비둘기가 내려앉듯
시간이 내려앉는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두통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바다와 바다 사이에
지금의 3월의 구름이 내려앉듯
진실이 내려앉는다

하얀 종이가 분홍으로 분홍 하늘이
녹색으로 또 다른 색으로 변할 만큼 밝다
ㅡ그러나 혼색(混色)은 흑색이라는 걸 경고해 준 것은
소학교 때 선생님…… <1962. 3. 18>

<장시 2>

시금치밭에 거름을 뿌려서 파리가 들끓고
이틀째 흐린 가을날은 무더웁기만 해
가까운 데에서 나는 인성(人聲)도 옛날이야기처럼
멀리만 들리고
눈은 왜 이리 소경처럼 어두워만 지나
먼 데로 던지는 기적소리는
하늘끝을 때리고 돌아오는 고무공
그리운 것은 내 귓전에 붙어 있는 보이지 않는 젤라틴지(紙)
ㅡ나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재산처럼
외계의 소리를 여과하고 채색해서
숙제처럼 나르 괴롭히고 보호한다

머리가 누렇게 까진 땅주인은 어디로 갔나
여름저녁을 어울리지 않는 지팡이를 들고
이방인처럼 산책하던 땅주인은
ㅡ나도 필경 그처럼 보이지 않는 누구인가를
항시 괴롭히고 있는 보이지 않는 고문인(拷問人)
시대의 숙명이여
숙명의 초현실이여
나의 생활의 정수(定數)는 어디에 있나

혼미하는 아내며
날이 갈수록 간격이 생기는 골육들이며
새가 아직 모여들 시간이 못 된 늙은 포플러나무며
소리 없이 나를 괴롭히는
그들은 신의 고문인건가
ㅡ어른이 못 되는 나를 탓하는
구슬픈 어른들
나에게 방황할 시간을 다오
불만족의 물상(物象)을 다오
두부를 엉기게 하는 따뜻한 불도
졸고 있는 잡초도
이 무감각의 비애가 없이는 죽은 것

술 취한 듯한 동네아이들의 함성
미쳐돌아가는 역사의 반복
나무뿌리를 울리는 신의 발자국소리
가난한 침묵
자꾸 어두워가는 백주의 활극
밤보다도 더 어두운 낮의 마음
시간을 잊은 마음의 승리
환상이 환상을 이기는 시간
ㅡ대시간(大時間)은 결국 쉬는 시간 <1962. 10. 3>

<전향기(轉向記)>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소련한테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얼마전까지는
흰 원고지 뒤에 낙서를 하면서
그것이 그럴듯하게 생각돼서
소련을 내심으로도 입밖으로도 두둔했었다
ㅡ당연한 일이다

소련을 생각하면서 나는 치질을 앓고 피를 쏟았다
일주일 동안 단식까지 했다
단식을 하고 나서 죽을 먹고
그 다음에 밥을 떡국을 먹었는데
새삼스럽게 소화불량증이 생겼다
ㅡ당연한 일이다

나는 지금 일본 시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너무 자연스러운 전향을 한 데 놀라면서
이 이유를 생각하려 하지만
그 이유는 시가 안 된다
아니 또 시가 된다
ㅡ당연한 일이다

<히시야마 슈조>의 낙엽이 생활인 것처럼
5.16 이후의 나의 생활도 생활이다
복종의 미덕!
사상까지도 복종하라!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이 말을 들으면 필시 웃을 것이다
ㅡ당연한 일이다

지루한 전형의 고백
되도록 지루할수록 좋다
지금 나는 자고 깨고 하면서 더 지루한
중공(中共)의 욕을 쓰고 있는데
치질도 낫기 전에 또 술을 마셨다
ㅡ당연한 일이다 <1962>

<후란넬 저고리>

낮잠을 자고 나서 들어보면
후란넬 저고리도 훨씬 무거워졌다
거지의 누더기가 될락 말락 한
저놈은 어제 비를 맞았다
저놈은 나의 노동의 상징
호주머니 속의 소눈깔만한 호주머니에 들은
물뿌리와 담배 부스러기의 오랜 친근
윗호주머니나 혹은 속호주머니에 들은
치부책 노릇을 하는 종이쪽
그러나 돈은 없다
ㅡ 돈이 없다는 것도 오랜 친근이다
ㅡ 그리고 그 무게는 돈이 없는 무게이기도 하다
또 무엇이 있나 나의 호주머니에는?
연필쪽!
옛날 추억이 들은 그러나 일년 내내 한번도 펴본 일이 없는
죽은 기억의 휴지
아무것도 집어넣어본 일이 없는 왼쪽 안호주머니
ㅡ 여기에는 혹시 휴식의 갈망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ㅡ 휴식의 갈망도 나의 오랜 친근한 친구이다…… <1963. 4. 29>

<돈>

나에게 30원이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대견하다
나도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무수한 돈을 만졌지만 결국은 헛 만진 것
쓸 필요도 없이 한 3,4일을 나하고 침식을 같이한 돈
ㅡ 어린 놈을 아귀라고 하지
그 아귀란 놈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집어갈 돈
풀방구리를 드나드는 쥐의 돈
그러나 내 돈이 아닌 돈
하여간 바쁨과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나하고 같이한 돈
바쁜 돈ㅡ
아무도 정시(正視)하지 못한 돈ㅡ돈의 비밀이 여기 있다 <1963. 7. 1>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ㅡ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 10>

<시>

신앙이 동(動)하지 않는 건지 동하지 않는 게
신앙인지 모르겠다

나비야 우리 방으로 가자
어제의 시를 다시 쓰러 가자 <1964>

<강가에서>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소인이 돼간다
속돼간다 속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1964. 6. 7>

<말>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寒氣)도 내 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 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 버렸다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1964. 11. 16>

<65년의 새해>

그때 너는 한 살이었다
그때 너는 한 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그때 너는 여섯 살이었다
그때 너는 여섯 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그때 너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때 너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너의 의지는 싹트기 시작했다
너의 의지는
학교 안에서 배운 모든 것이
학교 밖에서 본 모든 것이
반드시 정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의 어린 의사를 발표할 줄 알았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너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때 너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너의 근육은 굳어지기 시작했다
너의 근육은
학교 밖에서 얻어맞은 모든 것이
골목길에서 얻어맞은 모든 것이
반드시 정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의 어린 행동은
어린 상징을 면하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우리 키만큼 되었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는 이제 열아홉 살이었다
너는 이제 열아홉 살이었다
너는 여전히 기적이었다
너의 회의는 굳어가기 시작했다
너의 회의는
나라 안에서 당한 모든 것이
나라 밖에서 당한 모든 것이
반드시 정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의 어린 포부는
불가능의 한계를 두드려보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우리 키보다도 더 커졌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는 이제 스무 살이다
너는 이제 스무 살이다
너는 여전히 기적일 것이다
너의 사랑은 익어가기 시작한다
너의 사랑은
38선 안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
38선 밖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
전혀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는 너의 힘을 다해서 답쌔버릴 것이다
너의 가난을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가난을
이 엄청난 어려움을 고통을
이 몸을 찢는 부자유를 부자유를 나날을……
너는 이제 우리의 고통보다도 더 커졌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니 네가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란다
네가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란다
65년의 새 얼굴을 보고
65년의 새해를 보고 <1965 연두시(年頭詩)>
<적 1>

우리는 무슨 적이든 적을 갖고 있다
적에는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
지금의 적이 제일 무거운 것 같고 무서울 것 같지만
이 적이 없으면 또 다른 적ㅡ내일
내일의 적은 오늘의 적보다 약할지 몰라도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으로 내일의 적을 쫓으면 되고
내일의 적으로 오늘의 적을 쫓을 수도 있다
이래서 우리들은 태평으로 지낸다 <1965. 8. 5>

<적 2>

제일 피곤할 때 적에 대한다
바위의 아량이다
날이 흐릴 때 정신의 집중이 생긴다
신의 아량이다

그는 사지의 관절에 힘이 빠져서
특히 무릎하고 대퇴골에 힘이 빠져서
사람들과
특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련을 해체시킨다

시(時)는 쨍쨍한 날씨에 청량한 들에
환락의 개울가에 바늘 돋친 숲에
버려진 우산
망각의 상기(想起)다

성인(聖人)은 처를 적으로 삼았다
이 한국에서도 눈이 뒤집힌 사람들
틈에 끼여 사는 처와 처들을 본다
오 결별의 신호여

이조시대의 장안에 깔린 기왓장 수만큼
나는 많은 것을 버렸다
그리고 가장 피로할 때 가장 귀한
것을 버린다

흐린 날에는 연극은 없다
모든 게 쉰다
쉬지 않는 것은 처와 처들뿐이다
혹은 버림받은 애인뿐이다
버림받으려는 애인뿐이다
넝마뿐이다

제일 피곤할 때 적에 대한다
날이 흐릴 때면 너와 대한다
가장 가까운 적에 대한다
가장 사랑하는 적에 대한다
우연한 싸움에 이겨보려고 <1965. 8. 6>

<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965. 8. 28>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란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1965. 11. 4>

<이 한국문학사>

지극히 시시한 발견이 나를 즐겁게 하는 야밤이 있다
오늘밤 우리의 현대문학사의 변명을 얻었다
이것은 위대한 힌트가 아니니만큼 좋다
또 내가 <시시한> 발견의 편집광이라는 것도 안다
중요한 것은 야밤이다

우리는 여지껏 희생하지 않는 오늘의 문학자들에 관해서
너무나 많이 고민해 왔다
김동인, 박승희 같은 이들처럼 사재(私財)를 털어놓고
문화에 헌신하지 않았다
김유정처럼 그밖의 위대한 선배들처럼 거지짓을 하면서
소설에 골몰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덤핑 출판사의 20원짜리나 20원 이하의 고료를 받고 일하는
14원이나 13원이나 12원짜리 번역일을 하는
불쌍한 나나 내 부근의 친구들을 생각할 때
이 죽은 순교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우리의 주위에 너무나 많은 순교자들의 이 발견을
지금 나는 하고 있다

나는 광휘에 찬 신현대문학사의 시를 깨알 같은 글씨로 쓰고 있다
될 수만 있으면 독자들에게 이 깨알만한 글씨보다 더
작게 써야 할 이 고초의 시기의
보다 더 작은 나의 즐거움을 피력하고 싶다

덤핑 출판사의 일을 하는 이 무의식 대중을 웃지 마라
지극히 시시한 이 발견을 웃지 마라
비로소 충만한 이 한국문학사를 웃지 마라
저들의 고요한 숨길을 웃지 마라
저들의 무서운 방탕을 웃지 마라
이 무서운 낭비의 아들들을 웃지 마라 <1965. 12. 6>

<이혼 취소>

당신이 내린 결단이 이렇게 좋군
나하고 별거르 하기로 작정한 이틀째 되는 날
당신은 나와의 이혼을 결정하고
내 친구의 미망인의 빚보를 선 것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집문서를 넣고 6부 이자로 10만 원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10만원 중에서 5만 원만 줄까 3만 원만 줄까
하고 망설였지 당신보다도 내가 더 망설였지
5만 원을 무이자로 돌려보려고
피를 안 흘리려고 생전 처음으로 돈 가진 친구한테
정식으로 돈을 꾸러 가서 안 됐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이것을
하고 피를 안 흘리려고
피를 흘리되 조금 쉽게 흘리려고
저것을 하고 이짓을 하고 저짓을 하고
이것을 하고

그러다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에 다니는
나이 어린 친구한테서 편지를 받았지
그 편지 안에 적힌 블레이크의 시를 감동을 하고
읽었지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 그러나 완성하진 못했지

이것을 지금 완성했다 아내여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
어제 국회의장 공관의 칵테일 파티에 참석한
천사 같은 여류작가의 냉철한 지성적인
눈동자는 거짓말이다
그 눈동자는 피를 흘리고 있지 않다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지대(地帶)에는
중립이 없다
아내여 화해하자 그대가 흘리는 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그러기 위해서만
이혼을 취소하자 <1966. 1. 29>

*주 : 영문으로 쓴 블레이크의 시를 나는 이렇게 서투르게 의역했다. <상대방이 원수같이 보일 때 비로소 자신이 선(善)의 입구에 와 있는 줄 알아라.> (원주)
**주의 주 : 상대방은 곧 미망인이다. (원주)

<판문점의 감상>
31일까지 준다고 한 3만 원

29일까지는 된다고 하고 그러나 넉넉잡고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한 3만 원
이것을 받아야 할 사람은 1.4 후퇴 때 나온
친구의 부인
이것을 떼먹은 년은 우리 여편네가 든
계(契)의 오야가 주재하는
우리 여편네는 들지 않은 백만 원짜리
계의 멤버로 인형을 만들어 파는 년이라나
이 3만 원을 달러 이자라도 내서 갚아 달라고 대드는 바람에
집문서를 갖고 가서 무이자로 15개월만
돌려 달라고 우리가 강청한 사람은 이 돈을 받을 사람과 한 고향인 함경도 친구

이 돈이 31일까지 나올 가망성이 없다
전화를 걸어 보니 아직도 해결이 안 됐느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폼이 벌써 이상스럽다
이것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 생각을
그 마지막 대책을 나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고 있다
31일까지!

31일 오오 나의 판문점이여
벌판이여 암흑의 바보의
장막이여 이 돈은 원은 10월 말일이
기한이고
내 날짜로는 그것이 기한이고
38선의 날짜로는 8월 15일이 기한인데
3만 원을 돌려 달라고 우리가 부탁한 친구가
돈을 받을 1.4후퇴의 친구 부인하고
한 고향이라는 것을
31일까지 돌려 주겠다고 아니 29일까지
돌려 주겠다고 집문서를 가지고 간 친구에게
말한 것이 잘못이었나 보다
이것이 이남 사람인 우리 부부의 오산(誤算)이었나 보다
38선에 대한
또 한 해의 터무니없는 감상(感傷)이었다 보다
그렇지? <1966. 12. 30>

<사랑의 변주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쫓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넝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ㅡ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1967. 2. 15>

<꽃잎 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 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 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1967. 5. 7>

<여름 밤>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소음도 번쩍인다
여름은 이래서 좋고 여름밤은
이래서 더욱 좋다

소음에 시달린 마당 한구석에
철 늦게 핀 여름 장미의 흰구름
소나기가 지나고 바람이 불 듯
하더니 또 안 불고
소음은 더욱 번성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다 남은 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던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기 전 날
우리는 언제나 소음의 2층

땅의 2층이 하늘인 것처럼
이렇게 인정(人情)의 하늘이 가까워진
일이 없다 남을 불쌍히 생각함은
나를 불쌍히 생각함이라
나와 또 나의 아들까지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다 남은 날
땅에만 소음이 있는 줄만 알았더니
하늘에도 천둥이, 우리의 귀가
들을 수 없는 더 큰 천둥이 있는 줄
알았다 그것이 먼저 있는 줄 알았다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이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1967. 7. 27>

<먼지>

네 머리는 네 팔은 네 현재는
먼지에 싸여 있다 구름에 싸여 있고
그늘에 싸여 있고 산에 싸여 있고
구멍에 싸여 있고

돌에 쇠에 구리에 넝마에 삭아
삭은 그늘에 또 삭아 부스러져
거미줄이 쳐지고 망각이 들어앉고
들어앉다 튀어나오고

불이 튕기고 별이 튕기고 영원의
행동이 튕기고 자고 깨고
죽고 하지만 모두가 갱(坑) 안에서
참호 안에서 일어나는 일

사람의 얼굴도 무섭지 않고
그의 목소리도 방해가 안 되고
어제의 행동과 내일의 복수가 상쇄되고
참호의 입구의 ㄱ자가 문제되고

내일의 행동이 먼지를 쓰고 있다
위태로운 일이라고 낙반(落盤)의 신호를
올릴 수도 없고 찻잔에 부딪치는
차숟가락만한 쇳소리도 안 들리고

타면(惰眠)의 축적으로 우리 몸은 자라고
그래도 행동이 마지막 의미를 갖고
네가 씹는 음식에 내가 증오하지 않음이
내가 겨우 살아 있는 표시라

하나의 행동이 열의 행동을 부르고
미리 막을 줄 알고 미리 막아져 있고
미리 칠 줄 알고 미리 쳐들어가 있고
조우(遭遇)의 마지막 윤리를 넘어서

어제와 오늘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지고 침묵과 발악이 오늘과
내일처럼 달라지고 달라지지 않는
이 갱 안의 잉크 수건의 칼자국

증오가 가고 이슬이 번쩍이고
음악이 오고 변화의 시작이 오고
변화의 끝이 가고 땅 위를 걷고 있는
발자국소리가 가슴을 펴고 웃고

희화(戱畵)의 계시가 돈이 되고
돈이 되고 사랑이 되고 갱의 단층의 길이가
얇아지고 돈이 돈이 되고 돈이
길어지고 짧아지고

돈의 꿈이 길어지고 짧아지고 타락의
길이도 표준이 없어지고 먼지가 다시 생기고
갱이 생기고 그늘이 생기가 돌이 쇠가
구리가 먼지가 생기고

죽은 행동이 계속된다 너와 내가 계속되고
전화가 울리고 놀라고 놀래고
끝이 없어지고 끝이 생기고 겨우
망각을 실현한 나를 발견한다 <1967. 12. 15>

<성(性)>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1968. 1. 19>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테이블도 많으면
걸린다 테이블 밑에 가로질러놓은
엮음대가 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은
미제 자기(磁器) 스탠드가 울린다

마루에 가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옆에 놓은
찬장이 울린다 유리문이 울리고 그 속에
넣어둔 노리다케 반상 세트와 글라스가
울린다 이따금씩 강 건너의 대포소리가

날 때도 울리지만 싱겁게 걸어갈 때
울리고 돌아서 걸어갈 때 우리고
의자와 의자 사이로 비집고 갈 때
울리고 코 풀 수건을 찾으러 갈 때

38선을 돌아오듯 테이블을 돌아갈 때
걸리고 울리고 일어나도 걸리고
앉아도 걸리고 항상 일어서야 하고 항상
앉아야 한다 피로하지 않으면

울린다 시를 쓰다 말고 코를 풀다 말고
테이블 밑에 신경이 가고 탱크가 지나가는
연도(沿道)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 피로하지
않으면 울린다 가만히 있어도 울린다

미제 도자기 스탠드가 울린다
방정맞게 울리고 돌아오라 울리고
돌아가라 울리고 닿는다고 울리고
안 닿는다고 울리고

먼지를 꺼내는데도 책을 꺼내는 게 아니라
먼지를 꺼내는데도 유리문을 열고
육중한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울리고
울려지고 돌고 돌려지고

닿고 닿아지고 걸리고 걸려지고
모서리뿐인 형식뿐인 격식뿐인
관청을 우리집은 닮아가고 있다
철조망을 우리집은 닮아가고 있다

바닥이 없는 집이 되고 있다 소리만
남은 집이 되고 있다 모서리만 남은
돌움길만 남은 난삽한 집으로
기꺼이 기꺼이 변해 가고 있다 <1968. 4. 23>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5. 29>

거울

Posted by 히키신
2016. 12. 12. 22:58 時쓰는 詩人의 始

<거울>

거울은 수많은 이들의 놀라움 혹은
경악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마주선 자의 행동은
뻔한 것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무런 자각도 감정도 없이 본다 거울 속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수많은 이들의 절규
놀란 마음에 바라본 하늘가엔
강물 속에 비친 수많은 달과 슬픈 눈동자
그와 동시에 불현듯 스미는 고독, 고독,
고독...

포우는 이젠 영원히 안식하는가
아니면 아직도 절규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떠돌이 개처럼
유연油然하고 있나?

- 16.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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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키신
2016. 12. 11. 22:36 순간의 감상[感想]

세상에서 가장 큰 새
썬더버드ㅡ 천둥새 :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추앙하던 전설의 새.
1900년대 초까지 실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멀리나는 새
알바트로스 : 50일정도 공중에서 머물 수 있고 자면서도 비행할 수 있다고 알려진다. 하루 보통 500km를 비행하고 15000km이상 날기도 한다.

- 1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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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Posted by 히키신
2016. 12. 11. 22:33 음미할만한 말과 단편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그와의 관계를 끊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톨스토이 문학전집』(한국톨스토이,2012)

 

기뻐하라! 기뻐하라!
인생의 사업, 인생의 사명은 기쁨이다.
하늘을 보고, 태양을 보고, 별을 보고, 풀을 보고, 나무를 보고, 동물을 보고,
인간을 보고 기뻐하라.
그 기쁨이 어느 무엇에 의해서도 깨지지 않도록 감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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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 밤

Posted by 히키신
2016. 12. 11. 22:29 순간의 감상[感想]

누군가의 고통을 나누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한 여름밤은 으레 시원함을 내게 안겨주곤 했지만 오늘밤은 유난히도 춥게만 느껴진다. 추위는 나에게 익숙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 거기에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작은 인간에 불과한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억지로 힘을 짜내려면 짜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비틀거리는 채로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갔다. 조금 지친 기색을 띠고서.

- 16.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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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문 -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Posted by 히키신
2016. 12. 10. 23:50 영원의 지헤, 그리고 철학

둑에 핀 아름다운 들꽃에 반한
개천의 붕어는
꽃을 보러 둑에 뛰어오를 때
이미 죽어야 해서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지 못한다
붕어들은 그저 개천의 물속에서
물 위에 어른거리는 꽃 그림자만
신비로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 박이문, 철학이란 무엇인가(1975) '초월에 대하여';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16. 5. 27

생의 슬픔

Posted by 히키신
2016. 12. 10. 23:48 時쓰는 詩人의 始

달빛 떨어지는 호숫가
눈감고 그리려니
몸에 스미는 바람

- 16. 5. 17.
바쇼의 하이쿠의 한 구절을 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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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

Posted by 히키신
2016. 12. 10. 23:46 時쓰는 詩人의 始

상상해본다
맛볼 수 없는
감미로운 두려움

필연은 우연으로부터 나와
라플라스의 도깨비는
영원한 꿈

꽃은 말없이 피고지고
인생의 수레바퀴는
끝없이 돌고돌아

순간 속에 보이는
그대의 모습 사라지지 않지만
우리 사이에 남겨진
들꽃 한 송이

물장구 치고 노닐다
허우적대다 이제는
물가에서 바라보고 섰다
바람이 분다

다시 상상해본다
무서움없이 자라나고
무섭게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고독을
끝내 맛볼 수 없을
향기같은 그리움
놀랍도록 신비로운
인생은
생은

- 16.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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